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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장 )

by 은총가득 2021. 9. 19.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실때에 그들이 수없이 배신하고 죄악의 길로 행할 때에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돌아보시고 때로는 거센 폭풍우와도 같은 징계를 통해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의 근본적인 목적은 죄에 대한 책망에 우선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우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매몰찬 책망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며, 감사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때에 섣불리 판단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는 징계가 남달리 거세다고 할지라도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는 그러한 이유가 자신의 죄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약성경보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 충만하게 담겨져 있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구약 성경보다 신약 성경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 충만하게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은 신약 성경보다 구약 성경속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끝없이 돌보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고, 신약 성경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구약 성경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흔히 원인을 간과하고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록 결과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한 과정과 원인을 통해서 주어졌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며, 심오한 진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값지게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오신 것이며, 그 계획하심이 구약 백성들의 끝없는 죄악 속에서도 변하지 아니하셨기에 구세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변하지 아니하시는 끝없으신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진정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들, 즉 예배와 찬송과 헌금과 믿음의 봉사와 헌신과 충성속에 열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기에 성경의 주제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사랑이라고 할수 있으며, 더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며, 더 축소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가운데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고전 13:13). 또한 로마에 보낸 서신 가운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 것입니다(롬 13:10).

 

 

 

이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는 똑같이 16장으로 되어져 있으며, 일관성 있게 13장에 가서 각각 사랑에 대해서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 율법에는 흠이 없을 정도로 완전하다고 할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주장했을텐데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만났기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획기적인 변화되었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이 중요한 사랑을 배제하고 율법을 지키기에만 열심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잘못된 것이라고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름은 흔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구약에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이후에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이 개명된 것과도 같이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개명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사울과 바울, 두가지의 이름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울은 유대인으로써의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인으로써의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안디옥 교회에서 사울과 바나바를 복음증거를 위해 파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의 이름이 바울과 사울 두가지의 이름이라는 증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22장 27절에서 천부장에 바울에게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라고 묻자 사도바울은 '그러하다' 고 대답합니다. 또한 28절에서 천부장이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하자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는 상황과 지역에 따라서 두가지의 이름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권 안에서 복음을 증거할때에는 바울이 아닌 사울의 이름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만약 바울이라는 로마의 이름을 사용하면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족들을 억압하는 로마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동질성을 주기 위해서 유대인의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는 것이며, 유대권을 벗어난 이방 땅과 로마에서는 사울이 아닌 바울의 이름을 사용할 것입니다.

 

만약에 사울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약소국가인 유대인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고린도전서 9장 19절로 23절에서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지만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22절에서 사도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이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시작인 창세때부터 이 세상의 끝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The Second Coming)때까지 결코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이 성경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서 사랑에 빚진 자로서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하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Out Christ) 있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어 그 사랑에 빚진 자로써 그 사랑을 증거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며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변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보다도 남을 비판하는 시각이 앞선다면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며, 그 지식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잠 16:18).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되었는데 호세아서는 슬픈 사랑을 기록하고 있으며, 반면에 솔로몬이 기록한 아가서는 대조적으로 기쁜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선지자이며, 예언자로서 북방 이스라엘 출신인 브에리의 아들입니다. 당시의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심히 풍요로왔지만 반면에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한 시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쾌락을 쫓아 행하였던 패역하고 부도덕한 시대였습니다. 그 때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 것과 포로 생활을 예언하면서 회개하기를 강하게 촉구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더욱 더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올수가 없으며 구원에 이르러 천국에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늘 성도들에게 회개할것을 권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설교중에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결코 합당한 설교라고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을 갈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이고,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기까왔느니라' (마 3:17)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모습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호세아가 아내로 취한 여인은 디블라임의 딸인 고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음란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호세아가 고멜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 뿌리신다' 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경고하시기 위해서 흩으실 것을 말씀하시며, 반면에 회복하심과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뿌리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의미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담겨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도 하시면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책망하신 후에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의 과정을 잘 참고 견디면 회복의 은혜를 통해서 풍성한 사랑을 받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또 고멜을 통해서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로루마하로 지으라고 하시며, 그 이름의 의미처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루하마의 뜻은 '절대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이 없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들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자녀의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로루하마가 젖을 뗀 후에 고멜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셨는데 그 이름의 뜻은 '너희는 결코 나의 백성이 아니다' 입니다. 이 의미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셨는데 첫째인 이스르엘의 이름을 통해서는 단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흩으시고 다시 뿌리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둘째인 로루하마의 이름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악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없음을 말씀하셨고, 셋째인 로암미의 이름을 통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점점 가중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급기야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서 멀어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 두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대신 버림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거나 떠나시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급기야 죄악으로 잃어버린 양인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 이제 2장 1절에서는 다시 이름을 통해서 회복시켜 주시며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로암미와 로루하마의 이름을 암미와 루하마로 고쳐 부르게 하십니다. 로암미는 '결코 아니다' 라는 뜻을 가진 '로'와 '나의 백성이다' 는 '암미'의 합성어로서 '결코 나의 백성이 아니다' 는 뜻인데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면 '암미' 로서 '나의 백성이다' 는 뜻입니다. 로루하마도 역시 '결코 아니다' 는 뜻을 가진 '로' 와 아버지의 사랑' 인 '루하마' 의 합성어로서 '결코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 는 뜻인데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면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시고 죄악으로 사무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죄인된 우리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로'를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들이 바알에게 드렸던 우상제물인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바알은 음행과 관련이 있는 우상입니다. 이 바알은 단순히 비를 내려 풍요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남 바알신과 여 바알신의 성 행위(Sex)를 통해서 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꼭 비가 필요할 때에 이 남녀 바알신이 성 행위를 하지 않게 되면 비가 오지 않게 되므로 땅에 있는 바알 산당에 남 사제와 여 사제가 들어가서 알몸이 되어 변태적인 성 행위를 하게 되면 이 성 행위를 하늘에 있는 남 바알신과 여 바알 신이 보게 되어 음욕을 품게 되고 성 행위를 하게 되어 비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알을 통해서 이방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 하나님이 철저하게 금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성이 말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우상들 보다도 이 바알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하게 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알에게 드렸던 건포도 떡을 먹을지라도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은 그 어떠한 인간의 죄악도 능가하시는 것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에게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호세아를 떠난 듯 합니다. 고멜은 호세아에게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이렇게 음행을 하기 위해 떠난 고멜은 하나님께서는 다시 데려오라고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시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아내가 음행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며,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고멜을 사오게 됩니다. 호세아가 아내인 고멜을 데려오기 위해서 지불한 것은 노예 한사람의 가치입니다. 즉 고멜은 남편인 호세아를 떠난 결과로 인해서 노예와도 같은 위치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호세아는 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사오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죄인들을 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속량이라고 하며, 그 뜻은 '값을 지불하다' 입니다. 제16대 미국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노예해방으로 알려진 자인데 그가 노예시장을 걷다가 어느 남매가 각각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가게 되어 그들이 평생동안 다시 볼 수 없음에 흘린 눈물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링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지불하고 그 남매를 사게 됩니다. 그러자 그 남매는 링컨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은 방금 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달리 감사의 눈물입니다. 이는 한 주인 밑에서 남매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눈물입니다. 이에 링컨은 그 남매의 눈물을 거두게 하고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링컨의 행위도 가슴 벅찬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일인데 예수 그리도의 사랑은 감히 비교조차도 할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죄의 속박 아래 갇혀 있었던 자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부정과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것이며,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죄에서 돌이킬 것을 권면할 책임이 있는 선지자와 제사장들마저로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징계와 심판을 선포하신 긍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멸망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와 심판의 강도가 아무리 거셀지라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씀하시며, 제사장들의 불의한 재물만을 취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교훈하며 가르치는 것을 방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리게 하였음을 책망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백성들의 무지함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5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 즉 죽음 이후와 역사적인 종말 즉 재림 이후에는 더 이상의 기회기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죄악을 범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음탕한 고멜과도 같은 자들입니다. 고멜이 자식을 낳은들 하나님의 복에서는 멀어지고, 저주에 가까운 것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 가까이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고멜처럼 우리도 역시 세상의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얽매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스스로가 자신들에게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고 음행하지만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며 돌아오면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보배 피로써 씻어 주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인 6장 1절에서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돌아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웨나슈바' 인데 이는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헬라어로 죄를 가리켜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데 이는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있어야할 자리가 각양각색(各樣各色)으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같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며 영원히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새는 공중에서는 자유롭지만 공중을 떠나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물고기는 물속에서는 자유롭지만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처럼 인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자유로울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호세아의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외침 속에는 그 동안의 고통과 괴로움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확신에 찬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난을 통해서 얻게 된 믿음은 영적인 힘이 솟구치며 그 어떠한 것일지라도 결코 장애 요소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2절에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이는 신속한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말하는 것으로서 죄악의 기간은 비록 길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신속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 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되 힘써서 알자고 하며 지난 날 여호와를 바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자초했던 자신들의 어리석고도 무지했던 죄악을 회개하며 여호와를 알기에 힘쓸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비와 같이 임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비를 언급한 것은 비가 자주 오지 않아서 늘 메말라 있는 그 땅의 현실에서 비가 내리는 것보다도 더 큰 은혜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명성이 이방땅에 까지 알려지게 되자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먼 거리를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하여 솔로몬에게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했으나 솔로몬이 그 묻는 말에 다 대답하여 스바 여왕이 놀라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가 특출한 솔로몬이 전도서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합니다(12:13).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이며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사람들의 악한 심성을 도덕적으로 제어할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변화시킬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만이 인생을 참되게 변화시키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며, 1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며,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장 1절의 말씀처럼 지금의 이 시대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앞에 바로 서야 하며, 그분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가운데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만 묵상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말라버릴 것이며, 기도만 하고 말씀을 묵상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폭팔해 버릴 것이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믿음은 아름답게 성장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변천이 되어 예수가 된 것입니다. 그 변천 과정은 여호와가 여호수아가 되고, 여호수아가 예수아가 되고, 예수아가 예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를 버리고 겸손히 주의 말씀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귀를 세상의 소리에 기울이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이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것' 이라고 합니다. 이 말처럼 세상에 눈 감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개하고 돌아온 것처럼 우리들도 고난과 역경과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이세상의 고통은 천국을 소망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처럼 우리가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속한 모든 허영과 욕심을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기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인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 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들도 그 사랑에 빚진 자로써 이 시대를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김영재 교수/합동신학대학원(역사신학)

 

 

 

 

참회의 결의와 약속 (호세아 6:1-3)

 

 

이것은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말이나 아니면 하나님께 자비를 얻을 희망에서 여호와를 구하며 그 앞에서 겸손하자고 서로 권면하고 고무한 백성들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고 말씀하셨다(5:15). 이제 선지자와 그에게 호의적인 선한 백성은 쇠가 달아 있는 동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드리려고 했다. 그들의 이웃은 확신과 깨달음을 얻은 듯이 보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나 선한 백성은 이를 십분 활용하려 했다.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 설 의향이 있는 자들은 남도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권면하여 분기시켜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그들이 권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1절). "우리는 더 이상 앗수르인에게 가지 말며 야렙왕에게 사람을 보내지 말자. 그런 것은 신물나도록 충분히 해 보았으니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 예배로 돌아가며 피조물에 대한 모든 신뢰에서 하나님께 대한 희망에로 돌아가자." 하나님께로부터 배반한 자들의 큰 관심사는 그에게 돌아가는 것임을 명심하자. 서로를 죄에 끌어들이면서 동의에 의해 대거 하나님을 이탈한 자들은 동의에 의해 대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상호 간의 훈육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Ⅱ. 그들은 서로를 분기시켜 이렇게 하기 위해 어떤 권유와 격려에 매달리는가?

1. 하나님의 노여우심에 대한 경험.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가자. 이는 그가 우리를 찢으셨고 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찢겼고 우리를 찢은 분은 여호와시다. 우리는 맞았고 우리를 치신 분은 그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돌아가자. 그가 노여움 가운데서 우리를 찢고 치신 것은 우리의 배반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돌아 갈 때까지는 그와의 화해를 기대할 수 없다. 그가 우리를 이처럼 괴롭히시는 것은 우리로 마음이 움직여 그에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치는 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의 손은 계속 펼쳐져 우리를 칠 것이다(사 9:12, 13). 우리와 우리 땅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특히 찢는 심판을 보면 우리는 각성하여 회개와 기도와 개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2.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들의 기대. "찢으신 분이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신 분이 싸매어 주실 것이다." 그는 능숙한 의사처럼 부러진 뼈나 피흐르는 상처를 따뜻한 손길로 싸매어 주실 것이다. 자기 백성을 괴롭히시는 하나님의 바로 그 섭리가 그들을 구원하시며 성도에게 확신을 주는 바로 그 성령이 그들을 위로하신다. 처음에 종의 영이던 것이 나중에는 양자의 영이 된다(롬 8:15).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우리가 아무리 심하게 찢겨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치유하실 수 있다)그의 자비(그는 치유하실 것이다)를 가리킨다. 아니 그는 치유하시기 위해 찢으셨다. 혹자는 이것이 특히 유대인의 바벨론 귀환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즉 유대인은 여호와를 찾았고 하나님이 자비의 길로 은혜로이 돌아 올 것을 전망하면서 여호와를 찾고 그와 연합하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과 계획을 줄곧 좋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고난 하에서도 버틸 힘을 얻으며 회개하는 가운데서도 격려를 받는다. 그들이 여기서 기대하는 하나님의 은총은 몇 가지 사례로 묘사되고 있다.

 

(1) 그들은 이 구원이 부활 같을 것이라고 기대한다(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즉 하루나 이틀같이 단 시일 내에) 우리를 살리시며 시체의 부패와 매장이 예상되는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우리는 편안히 그 얼굴을 보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부활과 같을 것이다. 그는 비록 잠시동안 버리실 지라도 영원한 자비로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찢기고 구타당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로 치부되며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며 오래도록 그렇게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곧 그들을 소생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이 소생에 대한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며 집착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 시간은 이틀과 삼 일로 한정되어 표현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삼일의 부활을 예표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부활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 성경 말씀에 응한 것이다. 모든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수반될 영광에 대해 증거하였다. 우리는 선지자의 말씀을 그렇게 지정하신 하나님의 지혜로움과 선하심을 주목하고 찬미하자. 하나님은 고난 당하던 구약 교회의 구원을 예언하시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도 가리키셨다. 다른 구원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표로 결실이었다.

 

그들은 비록 이 말씀 속에서 그런 비의를 깨닫지 못했더라도 그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오실 그이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곧 우리 신앙을 공고히 해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언이 "그가 우리를 일으키시며 우리가 살리라" 고 표현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온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처음 열매로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며 그를 통해 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의인(義認)을 위해 부활하셨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다고 했다(사 26:19 참조). 하나님이 교회를 낮은 상태에서 일으키시리라는 것은 교회의 위로와 확신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가 차면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시며 그 아들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생명과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고난받는 기독교인에게 큰 힘이 되며 회개하여 돌아오는 죄인에게는 풍부한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19)고 말씀하신 때문이다.

 

(2)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향상되리라고 기대한다(3절). "그 때에 우리가 여호와를 알기 위해 따른다면 알게 되리라" (흠정역:역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비로이 되돌아오시며 그들을 위해 은총을 계획하시는 때에는 은총의 담보와 열매로서 자신에게 대한 지식을 더욱 많이 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땅(세상)에 충만할 것이며(사 11:9) 지식이 더할 것이며(단 12:4)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 것이다(렘 31:34). 우리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며 여호와를 알려고 따를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생활로 이해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보다 큰 지식의 수단을 소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수단으로 말미암아 지식을 증진시킬 수 있는 은혜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한 백성에게 자비를 주시려고 계획하실 때에는 그를 알려고 하는 마음도 주신다는 데 주목하자(렘 24:7 참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들에게는 지혜의 영과 계시도 주어진다. 갈대아 주석가처럼 우리 생활을 죽은 자의 부활날에 하나님 앞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타당하다. 즉 우리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며 알려고 따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우리가 그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이 완전하게 되고 영원히 증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우리가 읽는 대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 귀중한 축복이 약속된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때에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께 나올 때에는 그를 친숙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계획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영원한 생활이기 때문이다(요 17:3).

 

[2] 이 축복을 얻는 방법과 수단.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최선의 지식으로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 지식을 불러 구하고 찾아야 하며(잠 2:3, 4) 온갖 지혜로 구하고 힘써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지식을 묻고 힘써 증진시켜야 한다. 우리가 규정된 의무를 이행한다는 약속된 자비를 기대할 만한 이유를 갖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더욱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그 지식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신적 위로가 충만하게 된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다" (예비된다:흠정역).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자기 처소로 돌아 가셨을 때는 그의 은총도 거두어 들이셨다. 그런데 그의 나오심은 어둔 밤이 지난 뒤 새벽이 돌아오듯 확고히 준비되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오랜 밤 뒤 새벽을 기다리는 자들처럼 그의 은총을 고대하며 정해진 시간에 그 은총이 틀림없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의 얼굴의 빛은 새벽빛처럼 우리가 반기는 것인 동시에 우리에게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 그는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땅을 상쾌하게 하고 비옥하게 하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반가이 임할 것이다. 이것은 포로의 구원보다 멀리 조망하여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혜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구약 성도들은 힘써 그를 알려고 했으며 예루살렘의 구속을 간절히 고대하였다. 그리고 결국 신적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왔고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방문하러 나오셨다.

 

[1] 그것은 어두운 땅에 동터오는 새벽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의의 태양으로서 나오셨고 그에게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신 까닭이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했으니 이는 그가 때가 차서 임하신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행자였다. 아니, 그 자신이 밝은 새벽 별이셨다.

 

[2] 그것은 마른땅에 단비 같았다. 그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을 것이다(시 72:6). 그에게서 축복의 소나기가 이 세상에 내리며 그것은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까준다(사 55:10).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은총은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다고 한다(잠 16:15).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하나님의 은혜는 늦은 비와 이른 비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열매 맺는 선한 일은 이로써 시작되고 결실하기 때문이다.

 

 

 

약속과 권면 (호세아 6:4-11)

 

유다와 에브라임은 두 가지 악한 일로 책망과 규탄을 받는다.

Ⅰ. 그들은 확신에 확고하지 못했고 꾸준하지 못했다. 그들은 물결처럼 불안정했다(4, 5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것은 이상한 표현이다. 무한하신 지혜자가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당황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궁역진하여 난처한 데 빠져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지와 자신의 처사가 얼마나 공정한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인간의 방식대로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치시고 찢으셨다 하여 그를 가혹하고 혹독한 분이라고 불평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달리 행하실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하실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양한 방법을 써 보셨다(사 5: 참조). 그는 사태가 극단으로 흐르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그는 "에브라임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겠느냐?" (11:9 참고)고 스스로 추론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을 베풀으려고 하셨으나 그들은 그에 따른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내가 명예롭게 건질 수 없을 때 너를 내쫓을 수밖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까지는 죄인을 멸하지 않으신다는 데 주목하자.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행위는 어떠했는가? 그들의 인애는 아침구름 같았다. 혹자는 이것을 회개 시의 자기 영혼에 대한 인애라고 이해한다.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대한 인애와 자비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인애를 철회했고 취소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자기 영혼을 많이 손상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경건과 신앙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선한 것이 때때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아침 구름과 이슬처럼 곧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예후 당시 이스라엘이 나타난 선도 그랬고 히스기야와 요시야 당시의 유다의 선도 그랬다. 그 선은 곧 자취를 감췄다. 가뭄 때의 아침구름은 비를 약속하며 이슬은 땅을 상쾌하게 해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구름은 흩어져 버리며(위선자는 물 없는 구름에 비유된다, 유 12) 이슬이 땅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다시 공기 속으로 증발해 버려 땅은 계속 타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어떻게 하실것인가? 그는 그들의 인애를 열납하실 것인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인애가 쉬 사라져 버리는 까닭이다.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즉 계속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침 구름이나 계속되지 않는 인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도 못한다는 데 주의하자. 사람들이 잘 행할 듯하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며 경건한 신앙의 시작은 호조를 보이면서 지속하지 못할 때, 그들이 처음사랑과 처음행위를 버리거나 아니면 비록 신앙을 완전히 버리진 않지만 불안정하고 한결 같지 않고 변덕스러울 때는 그들의 인애가 아침구름과 이슬 같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가?(5절) "그들이 그토록 조악하고 기형적이었으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재목이나 돌을 떠내듯) 잘랐고(한글 개역: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라." 선지자들이 행한 것은 그들의 입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행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이 살해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신실한 행동으로 자기들을 죽이거나 자기들의 흉금을 찔렀다고 말해야 할 판이었다.

 

(1) 선지자들은 죄를 각성시키고 그들을 범죄에서 절단시킴으로써 그들을 쳤다. 그들의 신앙 생활은 고르지 못했으므로(4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르셨다. 죄인의 심령은 돌과 같다. 그것은 거친 돌과 같으므로 그것을 제대로 깎고 다듬으려면 굉장히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또는 그것은 마디가 많은 재목과 같다. 그 역시 평평하게 만들려 면 여간한 어려움이 뒤따르는 게 아니다. 목회자의 일은 사람들을 깎고 자르는 것이며 하나님은 목회자들을 통해 그들을 자르신다. 여호와께서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는 때문이다(삼하 22:27; 시 18:26). 목사들에게는 신랄하게 책망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이 있다. 장작 부스러기가 나뭇꾼의 얼굴에 튀어오르듯 책망보이는 자가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책망자에게 정면으로 대들으면서 그를 원수시하더라도 목사는 그의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

 

(2) 선지자들은 진노의 선언으로 그들을 죽였다. 에스겔은 성읍의 멸망을 예언했을 때 그 성읍을 멸한다고 표현되었듯이(겔 43:3) 선지자들은 그들이 살륙당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그들을 죽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언된 것을 이루셨다. "내가 내 입의 말씀대로 나의 심판에 의해 그들을 죽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죽이거나 아니면 죄인을 죽일 것이며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나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될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해독한다. "내가 선지자들을 자르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라. 즉 내가 백성의 유익을 위해 선지자들을 힘든 봉사에 고용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힘을 탈진시켰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업과 위험한 봉사에서 제물에 지쳤고 그들의 정신을 죄다 쏟아 버렸다. 이것은 그들 대다수에게 목숨을 요구하였다." 목사들은 하나님이 백성을 감화시키는 데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데 유의하자. 비록 그들의 수고가 도로에 그치는 경우가 많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도구의 마모를 염두에 두실 것이다.

 

(3) 하나님의 극히 엄한 처사도 의로우셨다. 선지자들은 굉장한 수고를 해가며 그들에게 죄를 충고하고 위험을 경고했지만 그런 수단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들이 다소 선한 감명을 받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어서 아침 구름처럼 곧 사라졌다. 따라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의 불행을 그들에게 내리시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가혹하다고 트집잡을 수가 없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향하여 "주의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아 명명백백히 공정하고 의로우시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목사들의 수고에 의해 죄인들이 교화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옳다함을 얻고 그가 판단하실 때는 분명하실 것이다(마 11:17-19 참조).

 

Ⅱ.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치 않았다(6, 7절).

 

1. 하나님이 그들과 세우신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어떤 조건하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며 하나님께 열납되기로 되어 있었는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즉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인애라고 한 원어는 "헤세드"로서 4절의 인애와 동일하다. 그것은 선함, 경건, 신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모든 실천적 신앙 행위에 사용되며 신약의 자비 자선과도 동일하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게 대한 지배적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 가운데서 자기를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수반되며 그 지식에서 유출되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가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의 보상자시라는 것을 믿는 견고한 신앙이다. 그것은 선한 판단의 인도를 받는 신적 일들에 대한 선한 애정이어서 선한 행실을 산출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며 제사나 번제가 아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 소상히 설명되고 있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내가 말한 그것은 극히 작은 일이며 가장 작은 강조가 주어진 것이었다) 오직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고 하였다(렘 7:22, 23; 미 6:6-8).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번제와 희생보다 낫다(막 12:33, 시 51:16, 17).

 

희생과 제사가 요구되거나 수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수반되지 않을 때에는 그 희생과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된 제사를 눈여겨보지 않고 멸시하셨다는 것이다(사 1:10, 11). 아마 이것은 그들이 버린 하나님과 그들이 좇아간 신들 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언급되었을 것이다. 참되신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은 오직 그들이 선하게 되고 그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선한 생활을 하는 것 뿐이었다. 희생 제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식은 그의 율법중에서 극히 작은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거짓 신들은 오직 희생과 제사만 요구했다. 그들의 제사장과 제단만 진수성찬으로 배불리면 백성은 제멋대로 살아도 되었다. 경배자에게 새로운 품성을 주려고 노력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만 지어내려고 꾀하는 신들을 택한 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또 이것은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논쟁이 제사의 태만 때문이 아니라(내가 저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시 50:8) 그들 중에 공의와 자비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언급되고 있다(4:1). 이것은 경건한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시하시는 주된 것이며 경건한 능력이 없이는 경건한 모양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준다. 마음과 생활상의 진정한 경건은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아무리 그럴 듯 하고 비용을 많이 들이는 신앙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적 의무가 의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신다. 그는 세리나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도 옳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영혼에게 대한 자비에서 행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도 의롭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육체에 대한 자비에서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식사와 안식의 의식도 이런 것에는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 9:13; 12:7).

 

2. 그들은 이 언약을 얼마나 경시했는가? 언약은 만사에 있어서 그토록 잘 규정되었고 이 언약으로 이득을 얻을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지만 그들은 그 언약을 그토록 무시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일반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불화했으며 불충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선한 것들을 지키도록 부탁받았다. 곧 제사와 번제의 장농 속에는 자비와 경건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뢰를 저버렸다. 그들은 장농은 지켰으나 보석은 야비한 육욕의 충족을 위해 저당 잡히고 말았다. 하나님이 그들과 다투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7절). "저희는 아담(원의:사람들)처럼 언약을 어겼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맺으신 언약이었다. 그들은 그 언약의 조건을 파기했고 따라서 그 혜택을 상실했다. 자비와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버리며 다른 불순종의 사례로써 그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범하게 되었다.

 

[1] 그들은 위맹죄와 언약을 어기는 죄를 범했다. 그들은 엄숙히 맹세한 언약을 범한 사람과 같았다. 이것은 온 세상이 수치를 돌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계약을 어기는 자들은 두 번 다시 존중이나 신용을 못받게 되고 상종못할 존재가 된다. "거기서, 바로 그 일로 그들은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비록 그들의 거짓을 행치 아니 하는 자녀(사 63:8)됨을 의지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신실치 못하며 야비하며 거짓된 자녀로 그 안에는 믿음이 없도다."

 

[2] 이런 점에서 그들은 그들답게 즉 일반적으로 거짓되고 변덕스러우며 본질상(부패한 본성 때문에) 패역을 행하는 인간들처럼 행동했을 따름이다.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이며(시 118:16) 다 치우쳐서 그들 역시 나머지 타락한 인종과 같다(시 14:2, 3). 그들은 사람들처럼(자연의 언약을 어긴 이방인들처럼), 비열한 사람들처럼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도의심이 없는 사람처럼 기만적으로 행동하였다.

 

[3] 이렇게 하여 그들은 우리의 처음 조상의 전철을 밟았다.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 (이렇게 읽는 것이 더 낫다). 아담이 순결의 언약을 범했듯 그들은 은혜의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모두 너무나 패역하고 어리석었다. 아담은 거기서 즉 낙원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그들은 다른 낙원인 가나안에서 자기들의 약속을 깨뜨렸다. 그들은 그 패역한 행동으로 아담처럼 그들 자신과 그들의 부속물을 망쳤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죄는 더욱 더 악하다(롬 5:14 참조).

 

[4] 이 모든 일의 근저에는 하나님과 그의 권위와 은총에 대한 과소 평가가 깔려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읽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저희는 인간의 언약처럼 그것을 어겼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 있는 인간의 계약이기라도 하듯, 그 언약의 명령이 마치 자기들과 같은 인간의 명령에 불과하며 그 언약이 가져오는 친절이 인간의 친절보다 귀중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 언약을 어겼다. 인간의 계약에도 신성한 구속력이 다소 있게 마련이다(갈 3:15). 하물며 하나님의 언약에랴! 그런데도 그들은 그 언약을 하찮게 여겼다. 그들은 그 언약에서 패역을 행하였고 지킬 듯 하면서 아무 것도 이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패역을 행하는 것을 여기서 그를 거스려 패역을 행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욕인 동시에 반대인 까닭이다. 탈주자는 반역자이며 그렇게 취급당할 것이다. 패역한 마음은 반역하는 마음이다.

 

(2) 패역의 구체적 사례가 몇 가지 제시된다. "저희는 거기서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거기라는 장소는 그 뒤에 곧 언급된다.

 

[1] 요단강 저쪽을 바라보자. 그 지방은 인근 열방의 모욕을 아주 많이 받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곳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려고 부심하였다. 그런데도 거기서는 극히 대담하게 하나님의 존엄을 도발하는 자들이 눈에 띌 것이다(8절). 갓과 므낫세 반지파의 지경 내에 있던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었다. 거기서 자행되던 일은 악이었다. 그 지방은 길르앗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그곳은 통째로 하나의 고을이라고 호칭되는 데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 도당으로 연합하여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는 여기서 의미하는 고을은 라못 길르앗일 것이다. 라못 길르앗은 요단 저편의 세 도피성 중 하나였고 레위인의 고을이었다. 그 거민은 비록 거룩한 지파에 속했지만 행악자였고 악을 안출했으며 악을 업으로 행했다. 레위인의 고을이 행악자의 고을이 되고 선한 교훈을 선포해야 할 자들이 악한 생활을 할 때는 참으로 악하다는 데 유의하자. 특히 그곳은 피 발자취로 편만했다. 마치 악한 레위인들이 특히 범한 죄가 바로 유혈의 죄이기라도 한 듯 하였다. 교황의 국가들에서는 성직자가 극히 많은 피를 흘린 박해자로 관찰된다. 아니면 그곳은 도피성이었으므로 살인자들도 많았고 따라서 그 살인자들을 재판해야 했음에도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피발자취가 편만하게 됐을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고의적 살인자라도 뇌물을 주면 보호하려고 했으며 어쩌다 우발적 살인을 한 자라도 가난하여 바칠게 없으면 피의 보수자에게 인도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곳은 피로 얼룩진 곳이 되었다. 피는 그 흐른 땅을 더럽히며 심문과 복수가 취해지지 않는 곳을 오염시킨다는 데 주목하자. 정의와 자비 간의 균형 유지를 기막히게 갖추고 있는 최선의 제도라도 남용될 소지가 있으며 명백한 편견으로 왜곡되어 정의와 자비를 다 어길 수 있다는 데 유의하자.

 

[2] 거룩한 일들의 봉사를 주무로 삼는 자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극히 악한 자나 흉악한 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9절). 바로 제사장의 무리가 그러했다. 제사장 계급에 추문을 남기는 자는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교단과 그 무리가 다 그랬다. 제사장들은 모두가 다 "동의에 의하여 한 어깨로" (원의는 그렇다) 한가지 길로 행하며 서로를 죄에서 더 악하고 대담하고 뻔뻔스럽고 잔인하고 간교하게 만든다. 제사장의 무리는 단독으로는 감히 행하지 못할 행동을 공모에 의해 행한다. 제사장의 무리는 강도 떼나 산적 떼와 같았다. 그들은 행객의 목을 찌르고 돈을 빼앗는 노상 강도 떼와 같았다.

 

첫째, 그들은 잔인하고 피에 굶주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악감을 품고 있거나 방해가 되는 자들을 살해한다. 살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는 그들의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둘째, 그들은 교활했다. 그들은 매복해서 사람을 기다렸다. 이것은 그들의 음흉하고 사악한 계획을 이루기에 알맞은 기회를 얻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제사장의 무리는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 "명절에는 말자" (마 26:5) 하면서 기다렸다.

 

셋째, 그들은 단 한 사람처럼 공동으로 협력했다. "저희가 길에서 살인하도다." 여행객들이 안전하게 지나다니던 대로상에서 그들은 일심으로 살인하며 살인을 서로 방조하고 교사한다. 악인은 만장일치로 악을 행한다는 데 주목하자. 그런데 선한 자들은 어찌해서 선을 행하는 데 일치를 보이지 못하는가? 그들은 세겜길에서 살인하였다. 세겜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그들이 살해하는 자는 예루살렘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자들이었다. 또는 혹자가 생각하듯 세겜 길은 그들의 조상 레위가 그 형제와 함께 기만과 사술로 세겜인들을 살해한 것과 동일한 방법을 의미한다(창 34장 참조).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죄로 유인함으로써 그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넷째, 그들은 이 일을 계략으로 행했다.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이 말은 가해할 의사로 심사숙고하여 행하는 악을 의미한다. 악의와 계획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죄는 더욱 악하다.

 

[3] 백성 전체와 이스라엘 온 집을 살펴 보라. 그들은 죄다 비슷하다(10절).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노라." 그 일이 제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발견해내시고 그들에게 밝히 드러내신다. 하나님 자신이 보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에브라임은 거기서 행음하였다. 그것은 육적 영적 행음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여 부인할 수가 없다. 죄인의 죄악 특히 이스라엘 집의 죄는 떨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가증하고 두렵고 위협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낯을 붉히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 일로써 더렵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존재가 되는 까닭이다.

 

[4] 유다를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들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임을 알게 될 것이다(11절). "유다여, 내가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너는 에브라임과 마찬가지로 셈을 치러야 한다. 너도 멸망이 무르익은 존재다. 네 멸망의 시간은 정해졌으며 급히 오고 있다. 너는 불의를 쟁기질하고 악을 씨뿌렸으므로 그와 꼭 같은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전체적 심판과 마찬가지로 각개 심판도 추수에 비유된다(마 13:39; 욜 3:13; 계 4:15).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로잡힌 유다 포로들이 회복될 때에, 내가 너와 계산할 때를 정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인은 오뎃 선지를 보내 명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 행했다(대하 28:8-15). 하나님은 "그들에게 추수할 일을 정하시고서" 그들을 살려 주셨다. 즉 그는 다른 때에 그 모든 것에 대해 함께 계산하시기로 계획하셨던 것이다. 현재적 심판의 유보는 그것을 선용하지 않는다면 보다 큰 심판을 위한 유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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