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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잠언 3장 및 다섯가지 복

by 은총가득 2021. 10. 19.

 

 

 '그리하면'의 복(잠 3:1-10)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교훈을 주는 형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훈을 준다면 그 교훈이 얼마나 깊은 교훈이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곧 나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교훈이라 생각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받아서 마음에 깊이 새기고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4번에 걸쳐서 '그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수와 평강의 복이요(2), 둘째는 은총과 존귀함을 얻는 복이요(4),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의 복(6), 넷째는 건강과 풍요의 복입니다(10).

 

  ①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성도의 기본입니다(1).
  세상에는 법이 참 많이 있습니다. 법에는 큰 법도 있고 작은 법도 있고 가시적인 법도 있고 그냥 전승되는 법도 있습니다. 모두 지켜야 할 법들입니다. 그렇게 법을 지키면 모두에게 유익이 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고 너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그 법을 무시하면 곧바로 해를 입게 됩니다. 내가 해를 입고 또 너도 해를 입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교통사고는 질서를 안 지켜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나도 사고를 당하고 너도 피해를 입고 두 사람 다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내가 술을 마시고 가다 차가 인도로 뛰어들면 길 가던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나만 해를 입는 것이 아니고 남들도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질서를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안전사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안전사고는 안전수칙을 안 지켜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나도 생명이 위협받고 너도 생명이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려면 이 법을 지켜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지키고 너를 위해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대원칙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의무이고 신앙인이 지켜야 할 가장 큰 법입니다.


  그리고 작은 법이 있다면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고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일입니다.

또 섬김의 삶을 살고, 나눔의 삶을 살고, 더불어 살아가고,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고 활용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삶이고 법입니다.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2)'

여기 평강에는 세 가지 은혜가 들어있는데, 하나는 내적인 평안입니다. 내적인 평안은 마음의 고요를 말합니다.

즉 신앙의 법을 지키고 살면 행복한 날들, 기쁨의 삶, 만족함, 감사함의 삶이 주어집니다.


  또 외적인 평안도 주어집니다. 외적인 평안은 생활의 고요를 말합니다. 신앙인이 질서를 지키며 살면 생활에 안정, 인간관계의 원만함, 삶의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요소들이 생활의 안정을 주는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적인 평안도 주어집니다. 즉 영적인 고요입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요소 그것이 영적인 고요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법을 지키는 사람은 마음과 삶과 영에 평안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중의 복입니다.


  ②인자와 진리를 따르라!(3)
  여기서 말하는 '인자와 진리'는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이상적인 경지를 의미합니다. 인자는 이 땅에서 제일가는 정신이고, 진리는 하늘에서 제일가는 정신입니다. 이 땅의 제일의 대상은 이웃이고 하늘에서 제일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 두 가지 대상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이웃은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고 목표이고 궁극입니다. 그리고 이웃은 신앙의 내용이고 표현이고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두 대상은 세상에서 가장 존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인자와 진리를 잊지 말고 떠나지 않도록 목에 매고 마음 판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위로 하나님, 아래로 이웃' 이 관계를 잘 이루고 살아가면 그 삶은 하나님이 보장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이웃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의도, 인자도, 진리도 너무 소홀히 하며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엉뚱한 것에 집착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목표가 흐려져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라, 천국, 종말, 심판 이것이 신앙인의 최후의 목표입니다. 
  사람이 초점을 잃으면 초점 잃은 소리를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느 정신병동에서 한사람이 '나는 나폴레옹이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네가 어째서 나폴레옹이냐'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느냐'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초점을 잃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신앙에게 천국을 빼면 무엇이 남습니까? 우리에게 장차 심판이 없고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방종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③네 자신을 의지 말라!(5)
  이 말씀은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어버리면 곧 바로 나타나는 마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교만이고 자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자만이고 교만입니다. 이것은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우리 자신은 전혀 의지할 대상이 못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자신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I can do'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한때 I can do를 높이 외쳐보기도 했던 솔로몬이 실패를 거듭한 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형식으로 오늘 신앙 인들에게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그 말은 '너는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 씹는 맛, 감칠맛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잠언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여기 '의뢰하다'는 말은 단순히 '믿는다'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김을 의미'합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우리 자신의 모든 영역을 다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되 마음을 다하여' 의뢰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나누지 않고 요동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의지할 수 없음을 깨닫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더가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전심으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더니 동족을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제 생각으로 겉보기에 비옥한 소돔 땅에 가서 살면 잘 될 것 같아서 제 판단을 의지하고 갔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수많은 시행착오에 부딪히며 재산을 빼앗기고 아내를 잃어버리고 나중에는 홀몸으로 겨우 목숨만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명철과 잔꾀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합시다. 삶의 중심을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며 나아갑시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내 중심 속에 오셔서 나의 방향키를 잡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④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6).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사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좋은 때와 어려운 때나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 있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의 일이 잘 풀렸다고 해서 내가 똑똑하고 수완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게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내 중심 속에 계셔서 나를 주장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며 모든 것에서 그 분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⑤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9).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은 많이 있지만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내게 가장 귀중한 것'을 말합니다.
  창4:4절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또 출23:19절에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했고, 레27:26절에서는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첫 것은 소중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잘못된 것이든 첫 열매나 첫 작품이나 첫 물품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것을 구별하여 드린다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것이요, 대표적 의미를 가집니다.  


  ⑴첫 것을 드린다는 것은 소유권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첫 월급을 몸 땅 하나님께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골 교회에 어느 날 할머님 성도께서 호박 한 덩어리를 갖고 와서 첫 열매라고 목사님께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며느리가 첫 열매를 따먹으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따먹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바칩니다.'하며 주었습니다.


  ⑵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나 물질을 하나님의 뜻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물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가장 귀한 것,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길 힘써야 합니다. 선한 일에 사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하며 새 포도즙 틀에 포도즙이 넘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하는 일이 잘되고 소득이 늘어나 요셉의 창고같이 가득히 차고 포도 농사가 잘되어 소출이 늘어나 새 포도즙이 넘쳐흐르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송천수 목사>


다섯가지 복의 조건

(잠 3:1-10)

 

성경에 복이란 말은 아세르(אַשְרַי) 마카리오스(μακαριος) 행복되다, 잘되다, 진보되다, 라는 의미가 있다. 한글로 번역된 복(福)이란 말이 구약에 226번 신약에 221번 모두 447번이 기록되었다

성경 66권에서 요한 1,2,3,서와 유다서를 제외하고 모두 기록되어 있다. 

 

복에 적용되는 의미는 영적인 복 육적인 복으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영적인 의미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그 안에서 인도되고 도움을 받는 것을 말하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부름을 받아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에 이르며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인도되고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복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복이다.

 

오늘 본문은 세상에서 필요한 복을 의미하는데 신앙의 조건적 복이다.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주어진다고 말씀한 복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복은 행한대로 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복을 받으려면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땅에서 잘 되는 복을 말한다.

 잠언 3장 1절에서 10절은 땅에서 사는 동안에 누리는 복을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이 아들에게 한 말씀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애정어린 말씀이다. 

단순히 가르치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에 소원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꼭 이렇게 하라 그러면 복을 받는다  아들이 복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다. 

 

1. 오래사는  장수(長壽)의 복이다

 

(잠 3 : 1-2)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나의 명령을 지키라.

법은 율법 토라(םִלָה)즉 율법이고 명령 밀라(תּלָה)인데 율법의 선언, 율법의 가르침이다.  본문의 법과 명령은 1장에서부터 가르친 율법의 지혜의 가르침이다. 

 

법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이고 마음으로 명령을 지키라는 말은 그 말씀을 믿고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창 49:33)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장수(長壽) 란 말은 아라크(שלומ)란 말인데 오래 생존한다는 말이며 평강이란 말은 샬롬( אָרָף)란 말인데 행복하다 잘되다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장수한다는 말은 오래 산다는 말이고 평강을 더하신다는 말은 고난 없이 건강한 장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젊어서 죽는 것은 불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래 살면서도 질병에 시달리고 고난에 시달리며 오래 사는 것은 징정한 복이 아니다. 진정한 목은 평강한 장수이다. 즉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 말한다. 평강 장수는 율법을 지키고 명령을 마음으로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다. 

 

성경 역사를 보면 역사가 내려오면서 인간의 수명이 짧아졌다. 아담에서 노아 시대까지는 인간 수명이 350세-969세 였다. 노아 시대에서 아브라함 시대까지의 수명은 200세에서 500세 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여호수아 까지는 110세에서 200세 까지였다. 그리고 그후 인생은 평균 수명이 70년 80년이었다. 

 

(시 90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위의 역사적인 사실은 인간의 수명이 죄와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가 흘러 오면서 인간은 점점 죄인으로 타락했다. 범죄한 아담에게 죽음을 선언한 하나님은 타락한 죙니들을 오래 살게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씀을 잊지 않고 명령을 마음으로 지키면 건강장수한다는 것을 솔로몬은 잘 알고 있고 또한 성경을 믿기 때문에 아들에게 그렇게 가르친 것이다. 사람들이 제 수명대로 못사는 것은 거의 다수가 죄 때문에 생죽음하고 도 시달려서 죽게되고 특히 악한 병으로 죽게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때에 수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건강 장수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2.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는 복이다.

    

(잠 3 : 3-4)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인자(仁慈)란 헤세트(אםת) 란 말인데 측은함 긍휼함을 의미한다. 진리(眞理)란 에메트 (חסד)란 말인데 율법 약속 진실이란 말이다.

 

인자와 진리를 떠나지 않게 목에다 메고 마음 판에 새기라 했다.

이 말씀은 복된 사람이 가지는 인격을 말하는데 진리는 하나님의 계명 약속이며 사랑은 계명의 정신이다. 떠나지 않게 하라는 말이나 목에다 메라는 말이나 마음 판에 새기라는 말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간직하라는 말이다. 

 

복은 하나님의 은혜이면 마음은 은혜를 받는 그릇이다. 그릇이 있어야 복을 받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 복된 그릇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항상 약속을 믿는 믿음과 진실 정직함과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창 41:39-40)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은총(恩寵)이란 말은 헨(חֵן)이란 뜻인데 은혜와 사랑을 말한다. 귀중(貴中)이란 야카르(יָקַר)란 말인데 귀하고 소중함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여김을 받는 다는 말은 세켈토프(שכל טוב)란 말인데 구별되다 판단되다 란 의이다. 

 

인자와 진리를 지닌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귀하고 중하게 여기시고 사람들에게도 귀하고 수중한 자로 인정받는 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인정 받지 못하고 산다면 불행한 사람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감이 없는 인생은 참으로 불행한 인생이다. 특히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복된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앞에서 인정 받지 못하면 복된 사람이 아니다. 인간이 배우고 선하게 살고 좋은 일 하는 사람들 모두는 자기를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함이다. 마음에 진리와 사랑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귀하게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말씀이다. 

 

3. 삶에 형통의 복이다.

    

(잠 3 :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했다.

 

의뢰(依賴)란 말은 베타흐(בטה)란 말인데 믿고 맡긴다. 믿고 기댄다란 의미이다. 마음을 다한다는 말은 조금도 의심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나의 인생길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한다.  명철(明哲)은 벤나(בינָה)란 말인데 밝은 생각 밝히 안다. 란 의미로 자기 자신의 밝은 생각과 자기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의지하지 말하는 말이다.

 

길을 가는 자보다 길을 만든 자가 더 잘 알고 길을 가는 자보다 안내하는 자가 더 잘안다.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앞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았는 지식은 걸어온 과정에서 얻은 지식이다. 그러기에 가야할 길은 과거가 아니고 미래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너무나 자신의 인생길에 자만에 빠지지 말고 인생의 주고나자이시고 내 길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이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했다.

(시 23 :1-3)(다윗의 시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지도(指導)란 말은 나기도(נָגִיד)란 말인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가르쳐 주다 안내해주다 란 의미이다. 

 

가는 길이 막히고 그 막힌 길을 가지 못하면 실패이다. 어리석게 자신의 찌식과 명철을 의하여 한계에 부디칠 때 낙심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고 줄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맡기고 의지하라 했다.

 

맡기고 의지하는 것은 말씀에서 길을 찾고 또 기도하는 것이다. 

(눅 18:1-5)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4. 건강의 복이다.

   

(잠 3 :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스스로 지혜롭다 하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라

 

지혜(知慧)란 말은 호크마(חכֽםָה)란 말인데 관찰하다 분별하다 헤아린다 란 의미이다. 스스로 지혜롭다 고 자기 지혜를 의지하여 교만하지 말고 스스로 아는 척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악에서 떠날 지어다 했다. 

악행(惡行) 즉 악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악은 라(רַע)란 말인데 악하다 불길하다 올바르지 않다 양심대로 행하지 않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이 악으로 규정하는 어떤 것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씀이다. 악을 떠나라는 말은 악에서 벗어나 도리어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위의 말씀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자기 지혜를 따라 악에 편승하지 말고 떠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은 영적 교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동은 윤리적 인격적인 교만이다. 그 교만은 패망의 패망의 선봉이다. 

 

(잠 16 :17-20)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9)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20)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라 

경외(敬畏)란 말은 야르아(יָרִאָה)란 말인데 높이다 두려워하다 즉 높여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말은 모든 행동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이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말이다. 성도가 성결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책망과 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므로 거룩한 자가 하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이다.

 

(벧전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2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하면 몸의 양약이 되고 네 골수로 윤택케 하리라.

(창 39 :13-15)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15)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양약(良藥) 리페우트(רֽפְאות) 치료하다 힘을 주다 좋게 하다 편안하게 하다 윤택(潤澤) 쉬피(שׅיוקַׅ  )인데 기름짐 광택 빛나게 하다 넉넉한 생활을 의미한다 몸이 양약이란 말은 몸을 치료하여 외적으로 건강하게 하신다는 말이고 골수를 윤택하게 한다는 말은 내적인 건강을 말한다. 그러므로 몸이나 뼈나 모두 치료하시고 기름지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건강하게 평안하게 사는 것은 악과 별별하여 사는 것이다.

 

5. 재물의 복이다.

      

(잠 3 :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재물(財物)은 소유물이며 처음 익은 열매는 소유의 대표성을 말한다.  등을 말한다. 창조주를 믿는 믿음으로 드리라는 말씀이다.  공경(恭敬)이란 말은 키브드(כִבוׁד)란 말인데 공손히 섬기다 높여 섬기다 본성으로 섬기다. 이다 

 

처음 열매를 드리는 것은 창조주로 믿는 믿음의 열매이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소유물은 창조하신 창조자 주인의 것이다. 그러기에 그 창조주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연히 섬기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몸 재산 등으로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고 처음 열매로 공경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드리라는 말이다. 열매의 처음 것은 모든 것의 대표성을 가진다. 아들도 맏 아들은 모든 아들의 대표성을 가지기에 가족을 대표하는 사제로 도는 하나님의 것이라 칭했다. 그러기에 처음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물의 대표로 드리는 창조주를 믿는 신앙이다. 

 

그리하면 창고가 차고 즙 틀에 포도즙이 넘치리라. 

(왕상 17 :15-16)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창고(倉庫)는 사밈(אסׇמׅים)이란 말로 곡식의 저장소를 말한다. 포도즙틀은 음료로 먹어야 하는 시대 포도주 짜는 기구이다.  창고가 찬다는 말은 먹을 것이 가득 찬다는 말이다. 먹을 것이 차 있어서 여유가 있다는 말이며 포도즙 틀이 넘친다는 말은 마실 음료가 마시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즉 먹고 마시는 것이 넉넉하여 여유있게 산다는 말이다. 소위 말하면 부자로 산다는 말이다.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산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다. 창조주로 믿고 내게 주어진 슈우로 공경하면 부요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성경에 소유로 하나님을 공경한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사르밧 과부는 기근에 처한 시대에 자신이 가진 가루로 하나님의선지자 엘리아를 섬겼다. 그 섬김으로 가르가 끊이지 않고 기근이 다 할 때까지 넉넉하게 살았다. 

 

결 론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복을 다섯가지로 말씀했다. 장수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귀함을 받는 것이고 삶의 길이 형통하는 것이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고 재물이 넉넉한 것이다. 

 

율법과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건강 장수의 복을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 받는 복을 자신의 지혜보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을 하나님을 경오이하고 악을 떠나 사는 자에게 건강의 복을 자신의 소유몰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부유한 복을 주신다고 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창1:28,12:3).

① 세상적인 복은 개인의 행복을 이루는 것이고, 성경적인 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요6:38-40).

② 세상적인 복은 보이는 복을 강조하고, 성경적인 복은 신령한 복을 강조한다(엡1:3).

③ 세상적인 복은 소유를 원하고, 성경적인 복은 나누는 것을 원한다(행20:35;눅6:38)
.

④ 세상적인 복은 다스림을 드높이고, 성경적인 복은 섬김을 드높인다(막10:45).

⑤ 세상적인 복은 고난은 저주이나, 성경적인 복은 고난도 유익이다(시119:71).

⑥ 세상적인 복은 이 땅에서 끝나고, 성경적인 복은 천국까지 이어진다(마24:31).



성도의 팔복(마5:3-10).

① 가난한 자(겸손한 자) : 천국을 차지함(마5:3)

② 애통하는 자(회개하는 자) : 위로 받음(마5:4)

③ 온유한 자(복종하는 자) : 땅을 차지함(마5:5)

④ 의에 주린 자(주의 뜻을 사모하는 자) : 배부르게 됨(마5:6)

⑤ 긍휼히 여기는 자(자비를 베푸는 자) : 긍휼히 여김받음(마5:7)

⑥ 마음이 청결한 자(마음이 순수한 자) : 하나님을 봄(마5:8)

⑦ 화평케 하는 자(평화를 추구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음(마5:9)

⑧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공의를 이루는 자) : 천국을 차지함(마5:10).

복과 축복의 구별


'축복‘(祝福, 바라크, 유로기아)이란
내가 누군가를 위해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복(베라카, 마카리오스)을 비는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개념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사...."(창1:28). -> 복을 주시는 하나님

②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27:4). -> 하나님께 복 받기를 비는 사람

③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

->너를 위해 복을 빌어주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를 원한다.


 

 

       

잠언 3장

 

지혜의 유익함(잠언 2:10-22)

이 성귀의 목적은 다음 사실을 나타내는 데에 있다.

1. 참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큰 이득을 주는가? 참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해 줄 것이며,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재물로 부유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친절을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 된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어떻게 선용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혜를 미덕의 길로의 안내자로서, 모든 종류의 유혹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사용해야 한다.

3. 우리가 이 지혜를 소유하는지의 여부는 어떤 규칙을 따라 시험해 볼 수 있을까?

이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지혜롭다면 그 지혜는 모든 악한 친구와 악한 행위를 피하려는 우리의 근신함으로써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쓰일 것이다.

Ⅰ. 악으로부터, 죄의 폐해로부터 우리를 보존하는 데에. 결과적으로 이 지혜는 죄악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환란의 재앙에서 우리를 보전하는 데에 유용하다.

 

1. 전체적으로(10,11절). "지혜가 너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면 언제 그 지혜는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는가?

(1) 지혜가 우리에게 대해 지배권을 행사할 때. 지혜가 우리 머리를 지혜로운 관념들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어가서" 명령권을 가지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 즉 지혜가 우리 마음 속에서 왕노릇하며 애정과 열정을 규제하게 될 때, 누룩(효모)이 밀가루 반죽 속으로 들어가듯이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서" 거기에 제맛을 확산시키며 전체를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릴 때, 이러한 때에라야 그 지혜는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가  그 지혜를 기뻐하게 되는 때.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때." 네가 그것을 극히 유쾌한 위안물로서 즐기기 시작하고 즐거이 흡족하게 여기면서 그 규칙에 복종하게 될 때, 즉 다시 말하자면 네가  미덕의 행위를 노예들이나 하는 고역으로서 하는 수 없이 억지로 해야 하는 임무라 하지 않고 "자유"요, "즐거움으로 하는 일"이라고 부르며 신령하고 경건하게 사는 삶을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안락한 삶이라 말하게 될 때, 너는 그 지혜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설사 어떤 점으로는 그 지혜가 주는 제한이 몸에게는 다소 즐겁지 아니하더라도 그러한 것조차도 영혼에게는 즐거울 것임에 틀림 없다.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 이 정도에 이르게 될 때에는 "근신"이 우리를 지켜며 "보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에게 해로운 길에서 피할 수 있고 악인의 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심으로써 "그 성도의 길을 보전"하신다(8절)

심령을 지배하는 은혜의 원리들은 내부의 타락과 외부의 유혹에 대해서 공히 강력한 보신책이 될 것이다(전 9:16, 18)

 

 

2. 보다 세부적으로 지혜는 우리를 보전해 준다.

(1) 타락된 원리의 사람들과 무신론적 이교도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데, 그들은 젊은이들의 판단을 타락시키며 그들의 마음에 신앙에 대한 편견과 악을 위한 논증 따위를 주입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는 자들이다.

"지혜는 너를 악한  자의 길에서 건져 내리라. 그 구출은 마치 죽음의 입에서 건져내는 것같이 복된 구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악한자가 걷고 있는 길로부터, 악한 자가 네게 걷도록 유인하는 그 길로부터의 구출이다." 원수는 악한 자(12절)라고 단 한 사람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서는(13절) 다수로 표현되고 있다. 즉 한 무리이며 일당이다. 그들은 신앙에 대항하여 연합을 이루고 악마의 왕국과 그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손을 잡고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1] 그들은 선한 것에 반대하는 심령을 갖고 있다. 그들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그들은 종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면 그것이 신앙에 의한 그들 자신의 적의를 나타내기 위함이건 타인들을 신안의 길에서 도중하차 시키기 위한 것이건 무엇이든지 다 말한다. 그들은 사탄의 대변자요, 바알을 위해 변호하는 자들이어서 "여호와의 올바른 길을 그르치게 하느나라" 신성을 모독하는 독신적(瀆神的) 재주는 죄악을 위한 찬성론을 얼마나 심술궂게 펼 것이며 패역함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헐뜯을 것인가! 지혜는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막아 줄 것이며 최소한 그런 자들의 꾐에 빠지지는 않도록 해 줄 것이다.

 

[2] 그들은 바로 그 선한 것에서 탈퇴한 자들이다. 흔히 그런 자들이야말로 경건한 신앙 세계의 원수 중 가장 악의에 차고 위험한 원수들이다. 배교자 율리안이 그 증거가 아닌가!(13절).  "이 무리는 정직한 자의 길을 떠나느니라." 그 정직한 길 안에서 그들은 훈련을 쌓아 왔으며 출발을 했었는데 이제 자기들이 받은 교육의 영향력을 훌훌 떨쳐버리고 희망어린 첫출발의 인연도 끊어 버렸다. 이것은 "어두운 길로 행하기 위해서"였다. 빛을 싫어하는 그 사악한 길에서 사람들은 무지와 실수로 눈을 가리우며 완전한 어두움으로 끌려 가게 된다. 죄악의 길은 암흑의 길이요, 편안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한 길이다. 평탄하고 즐거우며 밝은 길, 정직한 길을 버리고 그런 암흑의 길로 행하다니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시 82:5; 요일 2:11).

 

[3] 그들은 죄악을 즐거워하며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과  타인의 범죄 행위를 보는 것을 다 기뻐한다(14절). 그들은 "행악"할 수 있는 기회를 "즐거워하며" 악한 계획의 성취와  성사를 기뻐한다. 나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유희이다. 그들에게는 "악인의 패역을 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광경은 없다. 소망있는 자들이 죄악의 길로 끌려가는 것을 보는 일, 그래서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강팍케 되고 굳어지게 됨을 보는 것보다더 기분좋은 일은 없다. 그들은 악마의 왕국이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즐거워하는 것이다(롬 1:32  참조). 그들의 불경건은 이렇게까지 높이 도달해 있다.

 

[4] 그들은 죄악에 확고부동하다(15절). 저희 "길은 구부려져 있느니라." 그 길은 아주 굉장히 꼬불꼬불하고 이리 돌며 저리 돌아  저희의 회오가 추적해 오지 못하도록 도피하고  있으며 회오의 힘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기만적인  마음은 저희 악행속에 있는 손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때는 간교한 변명을, 또 어떤 때는 이런 저런 교묘한 구실을 갖다 댄다. 그들은 저 미궁(迷宮)의 미로(迷路)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그들 자신의 양심의 붙잡음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위가 패역한 자"들인 때문이다. 즉 그들은 voi역한 길에서 계속 매진하려고 결심하고 있다. 그것을 말라는 말이 무엇이든지 마이동풍격으로 흘려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 모든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자들과의 교제를 회피해야 할 것이다.

 

(2) 지혜는 타락한 행위의 여인들로부터 우리를 보전해 줄 것이다.

전자는 영적 악함, 즉 성화되지 않은 마음으로의 욕망으로 이끌어 간다. 반면에 이 후자는 "육체적 욕정"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산 성전인 육체를 더럽히며 게다가 "영혼에게 전쟁을 건다." 음녀는 여기에서 "이방 계집"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자기 안에 지혜나 선함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여인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인은 음녀가 마치 이교도인양, 그리고 저 신성한 공동체에 대해 이방인인양 회피할 것이다. 이방 계집이란 사실상 이성과  미덕과 명예의 제반 원리로부터 완전히 소원(疏遠)한 여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음녀의 유혹에서 구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1] 이 여인은 얼마나 거짓된 자인가!

온통 위선 덩어리로 이루어진 자와 거래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여인은 이방의 여인이여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녀는 자기가 유혹하는 자에게 부실하다. 그녀는 정중하게 말한다. 즉 그에게 다른 누구보다 그를 얼마나 흠모하는가, 또한 그녀가 그를 위해 얼마나 친절한가를 말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로 호리고 있느니라. 이 여인은 데리라가 삼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정도 품고 있지 않으며 그의 행복 따위는 원하고 있지도 않다. 그녀가 의도하는 전부는 그의 호주머니를 터는 일과  자신의 천한 욕정을 충족시키는 것뿐이다.

 

둘째, 이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부실하며 그에게 매여 있는 자기의 신성한 의무를 깨뜨리고 있다. 그는 자기 "소시의 짝(혹은 "길잡이")이었다."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그를 그렇게 선택하였고 그만을 섬기며 그 외 모든 것은 버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는 그를 "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여인이 그 외 딴 어떤 자라고 해서 절개를 지키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다. 그 여인을 향유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녀의 허위성을 같이 분담하려는 자이다.

 

셋째, 이 여인은 하나님께 부실하다. 그녀는 "자기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니라"(17절). 즉 혼약을 망각하였다. 하나님은 결혼 언약에 증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혼약 당사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남편과 아내 쌍방이 서로에게 진실하겠노라고 서약하는 의식의 창시자인 까닭이다. 따라서 이 여인이 죄를 짓는 것은 그 남편에게 뿐만 아니라 그녀의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서약을 무시하며 언약을 깨뜨리는 때문에 "간음자와 행음자를 심판하실 것이다"(겔 17:18; 말 2:14).

 

[2] 이 여인과 연합하게 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치명적 결과가 발생한 것인가!(18,19절)

타인들의 고생을 보거든 그것을 우리의 경고로 삼자. 우리는 음행의 죄를 조심하자.

 

첫째, 음행하는 자들이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그들의 파멸은 확실하며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행의 죄는 영혼을 곧 바로 살해하는 경향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애정과 영혼 속의 선한 기질을 질식시켜 버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저주, 그리고 그의 공의로우신 칼날 앞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금지된 쾌락 속에서 사는 자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근신은 모든 사람을 악한 여인으로부터 보전해 줄 뿐만 아니라 악한 집으로부터도 지켜 준다. "그 집은 사망으로 기울어지는" 집이다. 즉 그 집은 영원한 죽음으로 직통하는 길 위헤 있다. "그리고 그녀의 길은 르바임(Rephaim)으로," 즉 옛 세계의 죄인들인 "거인들"(어떤 이는 그렇게 읽는다)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그 거인들은 사치와 과도한 난동의 삶을 살다가 늦게야 제거되고 그들이 설립한 것은 홍수로 뒤집혀 버렸던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 많은 쾌락 뒤에 따를 영원한 고통을 상기시키시면서 우리를 제지시키신다(마 5:28, 29  참조).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회개와 회복은 지극히 모험적이다. "그녀에게로 가는 자는 누구든지," 거의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느니라." 마귀의 이 올무에 걸린 자  치고 회복에 나오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 죄의 기만성에 빠지면 그만큼 심령이 강퍅해지고 그 마음이 눈뜬 장님처럼 어두워진다. "생명의 길을 잡았다"가("얻었다는" 뜻은 원래 잡는다"이다), 일단 놓치면 그들은 다시 잡을 줄은 모르고 그 천한 욕망에 완전히 도취되며 매료되고 만다. 많은 박식한 해석가들은 "이방 여인"에 대한 경고를, 문자적인 의미 이외에 상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영적 매음인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로서. 지혜는 네가 모든 우상 경배자들과 친하지 못하게 지켜 줄 것이며 그들에게 가담라도 싶어하는 네 모든 성향으로부터도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우상 숭패는 수 십 세기 동안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해로운 결과를 끼쳤고, 솔로몬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신체의 욕망과 육정으로 인해 영혼의 지적 능력과 기능이 타라되는 데 대한  경고로써, 지혜는 네가 육육의 마음에게 포로당하지 않게 지켜 줄 것이며, 네 영이 이 악명 높은 음녀, 곧 육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다. 이 악명 높은 음녀인 육은 "그 길잡이(혹은 "짝")를 버리며 우리 하나님의 언약"을 범하여 "죽음에로 기울어진" 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사불란한 지배를 하기시작할 때는 그 영혼의 사정이란 가망이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Ⅱ. 이 지혜는 우리를 선한 것에로 안내하고 지시하는 데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20절).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리라."

우리는 선한 길로다니기 위해서는 "악인과 이방 여인"의 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선한 행하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악을 행하는 일을 그쳐야"만 한다.

여기서 다음 사실에 유의하도록 하자.

 

1. 선한 자들의 전용 도로가 있다. 그 길은 선한 자들이 선한자의 자격으로서 다니는 길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선한 동아넹는 언제나 다닐 수 있는 길이다.

 

2. 그 길로 행하며 그 선한 옛 5길을 구하고 그 안에서 다니는 것이 곧 우리의 지혜이다(렘 6:16; 히 12:1). 우리는 잠시동안 그 길로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길을 지키고 계속 그 길 안에서 걸으며, 그 길에서 곁길로 나가서는 아니 된다.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이어서 지혜로운 모든 사람은 그것을 한 번 붙잡은 이상 그 길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너로 저 훌륭한  분들, 곧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본받게 하며(패트릭 감독은 그렇게 의역한다), 그들을 따라간 의로운 자들의 길을 지키게 하리라."

우리는 성도들의 선한  귀감에 의해 전반적인 우리 길을 선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부적 소로의 선택에 있어서도 옛 성도들의 모범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한다. 즉 흔적을 살피고 무리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왜 우리가 이같은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인간의 순전성은 그들은 확고히 세워 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21절).

 

[1] 그것은 그들 개인을 확립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대저 정직한 자는" 그들이 사는 날동안 평화롭고 조용하게 "땅에 거하리라." 그들의 정직성은 그런 삶에 이바지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저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계획에 길잡이가 되며 그들의 이웃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이다.

 

[2] 저희 권속들을 확립시켜 주는 게 될 것이다. "완전한 자는"그들의 후손으로 "땅에 남아 있으이라." 그들은 천국의 가나안에 영원히 거하며 남아 있게 될 것이니, 땅의 가나안은 그 천국 가나안의 모형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2) 인간의 불의는 그들의 파멸이 될 것이므로(22절). "악인"은 어떻게 되며 누가 "궤휼한"자의 길을 택하는지 살펴 보라. 그들은 이 뒤에 올 천국과 그에 대한 모든 소망으로부터 "끊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착을 두고 있는 저희의 보화를 쌓아둔 바로 이 현재의 "땅에서 끊어지리라." 그들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 땅에서" 뽑혀질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땅에게는 자비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아니할" 날이 올 것이다(말 4:1). 그러므로 그 지혜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하며 "우리 영혼에 즐겁게" 되도록 하자. 그 지혜는 이와 같은 종말의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봉헌(잠언 3:7-12)

우리 앞에는 세 가지 권면이 나오는데 그 하나 하나가 충분한 이유와 함께 역설되고 있다.

 

Ⅰ.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다스리심에 대해 겸손하고도 의무감에 넘친 복종 안에서 살아야 한다(7절). "너의 최고 주요 주인으로서의 영호와를 경외하라. 무슨 일에서든지 네 신앙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1. 이 복종은 겸손한 순종이어야만 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종교의 권세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지혜를 자부하는 것보다 더 큰 적은 없다. 자기 자신의 지혜로  충분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종교의 규칙으로부터 자기들의 방법을 취하는 일은, 더구나 종교의 규칙에 얽매인다는 것은 자기들 답지 않다거나 자기들의 위신에 먹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2. 또한  충성스런 복종이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그를 노엽게 할 짓이나 그의 돌보심을 목수당할 어떤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라. "악에서 떠나기" 위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요 참 "명철"이다(욥 28:28). 이것을 소유하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다. 그러나 자기 부정적으로 그래야 하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고무시키기 위해 여기에서 약속되는 것은(8절) 이것이 외적인 인간에게조차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음식처럼 쓸모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양분을 많이 공급해 줄 것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리라." 그것은 또한 강하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근신과 절제, 술취하지 않음과 침착함, 마음의 평정, 욕망과 정욕을 잘 다스리는 것, 이런 것은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영혼의 건강에 많은 기여를 할 뿐만 아니라 신체를 위해 좋은 습관도 된다. 몸의 좋은 습관은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서 건강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썩음"과 같고 세상의 근심은 뼈를 말린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희망과 기쁨은 골수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Ⅱ.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선용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재산을 불리는 길이다(9,10절)

 

1. 여기서는 재산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우리 본분으로 삼도록 하는 교훈이 나오고 있다. "네 재물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성호와 찬미로 그를 존귀케 한다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목적이다. 우리는 그를 존귀하게 하는 것 말고는 단지 그를 섬길 도리가 없다. 그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야 하며 그에게 경의를 품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소유인 우리 몸과 마음으로" 그를 공경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재물로도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재물 또한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종속물은 그의 영광을 위해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 재산은 단지 보잘 것 없는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것이지만 이것으로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는데, 그러면 보잘 것 없던 그 물질이 실속있는 것, 즉 본질적인 것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세 가지로써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1) "우리의 소산물로써" 재물이 불어나는 곳에서는 우리가 자신을 존귀케 하고 싶어지며(신 8:17) 우리 마음을 세상에 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시 62: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해마다 나는 산물을 먹고 살므로, 우리의 소산이라  함은 땅의 소산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항구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2) "우리의 모든 소산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사에 우리를 번영하게 하심과 같이 그를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율법은 modus decimandi 즉 십일조세의 방식에 대한 규정은 허용할 것이지만 de non decimando 즉 십일조의 납부를 면제해 주는 규정은 하나도 허용치 않을 것이다.

 

(3) 아벨처럼(창 4:4) "온갖 처음 익은 열매로써" 이것은 율법이요(출 23:19) 선지자였다(말 3:10). 처음이요 가장 선하신 분 되시는 하나님은 모든 사물의 처음 것과 가장 좋은 것을 받으셔야 한다. 그의 권리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시므로 그는 맨 먼저 대접을 받으셔야 한다.

우리의 세상 제물을 우리 종교에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며 그들 및 그들로 인해 갖게 되는 이익을 우리의 종교의 진흥을 위해 사용하며, 우리의 가진 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유익을 베풀고 아끼지 않고 "후히 줄 것을 꾀하면서" 경건과 자선의 모든 일을 충만히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2. 또한 여기에는 우리 재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리 우리의 이익으로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적은 것을 많게, 많은 것을 더 많게 만드는 길이다. 그것은 번영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리라" 그는 네 주머니라고 하지 않고 네 창고라고 말하며 네 옷장을 새로 채운다고 하지 않고 네 즙틀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겉치레나  장식용이 아닌, 쓸모있는 소산물로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몰래 감춰두고 쌓아두기 위한 것으로가 아니라 사용하고 투자하기 위한 것으로 너를 축복해 주실 것이다."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하는 자들은 더 많은 선을 베풀 수 있도록 더욱 많이 받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세상 재산으로써 우리 종교에 쓸모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종교가 세상 일의 형통에 매우 유용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건함에는 현재 생명의 약속이 있고" 그 모든 위로도 있다. 우리가  만일 준다고 해서 망하게 되고 가난하게 되는 줄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면 우리가 그로 인해 부자가 될 것이다(학 2:19). 우리는 우리가 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요 받을 것이다.

 

Ⅲ.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올바로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11, 12절). 사도는 이 말씀을 인용하며(히 12:5) 이것을 아버지의 권유와 애정을 가지고 "그 자녀에게 하듯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훈계"라고 부르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고난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환란에 처할 때 우리의 주의는 어디에 있어야만 되는가?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지 말며 지겨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앞에서 나온 그의 훈계는 부유하고 형통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여기에서는 가나하고 역경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는 훈계이다.

 

(1) 우리는 그 고난이 아무리 가볍고 단시간에 걸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주목해 볼 가치가 없는 듯이, 혹은 또 그 고난이 어떤 심부름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어서 응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환란을 당하여서 목석이나 금욕주의자처럼 무감각해지며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점점 경화되어서는 아니 된다. 또한 하나님이 없이도 그 고난을 쉽사리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스스로 강퍅케 되어서도 아니 된다.

 

(2) 우리는 그 고난이 아무리 중하고 오래 계속되더라도 지쳐서는 아니되며 사도가 해석하듯 그고난 아래서 "낙심"해서도 아니 되고 실망해서도 안된다. 그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빼앗겨서는 아니되며 혹은 절망에 떨어지거나 자신을 구출하고 억울한 점을 시정하기위해 어떤 부당한 수단을 사용하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고난이 정도 이상으로 강하게 압박하거나 보다 오래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빨리 구원이 이르지 않는다고 하여 구원될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된다.

 

2. 우리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은 무엇인가?

(1) 그것은 고난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라는 점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징계"이다. 이 점은 왜 우리가 그 고난에 승복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비할 데 없이 지고한 주권과 항거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왜 우리가 그 고난을 만족히 여겨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된다. 왜냐하면 오점 하나 없이 순전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하시지 않으시며 무한한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하시진 않을 것을 우리가 확신하는 까닭이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경히 여겨서는 안 된다. 사자(使者)에게 가하는 결례는 그를 보내는 자에게 대한 모욕인 것이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싫증을 내서는 아니 된다. 그는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2) 그것이 아버지의 징계라는 점이다. 그 징계는 재판장으로서, 그의 응징하는 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그의 지혜로운 애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한다. 아니,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까닭에, 자식이 지혜롭고 선하게 되기를 바라는 까닭에 징계한다. 그는 자기 아들의 귀엽고 마음에 드는 점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결함이 되고 자기의 기뻐하는 것을 손상시키는 점을 방지하고 치료하기 위해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라"(계 3:19)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다음 사실은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1] 고난은 사랑의 언약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에서 유출되는 것이란 사실.

[2] 고난은 그들에게 실제의 해를 입히기는커녕 도리어 그 고난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주 풍성한 유익을 주는 것이며 그들을 신성하게 하는 복된 수단이라는 사실.

 

 

 


지혜의 유익함(잠언 3:13-20)

솔로몬은 지혜를 부지런히 찾으라고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하였고(잠 2:1  이하) 우리가 성실히 그리고 꾸준히 추구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혜를 찾았을 때 그로 인하여 얻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유리한 점을 내다본다는 것은 부지런함이 근본이 되고 부지런하도록 박차를 가해 주는 동기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지혜를 얻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라는 의심할 나위없는 진리를 제시하면서 지혜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인지 나타내 보이고 있다. 즉 이 지혜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에 존재하는 참 지혜이며 그의 진리와 섭리와 법칙의 모든 의도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지혜에 의해 행복해지기 위해서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1. 우리는 지혜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혜를 발견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그 이익을 얻으며 그 소유권을 얻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이고, 또한 "명철을 뽑아내는"(단어의 뜻이 그렇다) 자는 복 있는 자이다.

(1) 즉 그런 사람은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이끌어 내는 자이다. 그는 지혜를 자기 자신 안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히 주시는" 모든 지혜의 원천으로부터의 기도의 물통으로써 지혜를 긷는 자이다.

(2) 그는 광산에서 광석을 뽑아내는 사람이 그렇듯이 지혜를 얻기 위해 수고하는 자이다. 지혜가 쉽사리 나오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뽑기 위해 보다 많은 힘을 들여야 한다.

 

(3) 그는 그 지혜 안에서 향상하는 자이다. 얼마간의 명철을 가지고서 지식이 자라나게 하며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불림으로써 명철을 뽑아내는 자이다.

(4) 그는 그 지혜로 선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술독에서 술을 떠내듯 자기가  가지고 있는 창고로부터 그것을 꺼집어 내어 타인들에게 "새 것과 옛 것"을 가르치기 위해 전달하는 자이다. 이렇게 선한 용도에 쓰이는 지혜야말로 잘 획드한 지혜이며 목적에 부합하는 지혜인 것이다.

 

2. 우리는 지혜를 매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혜라는 상품에 대해 읽게 된다. 이것이 암시해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상인이 자기 생각과 시간이 대부분을 자기 상품에 쏟듯이, 그것을 우리의 부업이 아닌 본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2) 우리는 주식의 매매처럼 그것에 모든 것을 투기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기꺼이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진주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팔아야 할 만큼 굉장히 비싼 진주이다(마 13:45, 46). "진리를 사라"(잠 23:23). 그는 어떤 시세로 사라는 말을 하지 아니한다. 이는 우리가 그것을 놓치느니 보다는 차라리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꼭 사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수지맞는 물건을 살 때처럼 지혜를 꽉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손에서 빠져 나갈 위험이 다분하다면 더욱 신경을 써서 그것을 꼭 쥘 것이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지혜를 포착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데에 최대한의 정력을 내어야 하며, 그것을 중진시킬 수 있는 온갖 기회를 꼭 붙잡아야 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바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아야 한다.

 

4. 우리는 지혜를 소지해야 한다. 지혜를 붙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코 놓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우리가 잡은 것을 견지해야 하며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 또한 끝까지 지혜의 길안에서 참고 견디며 매질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떠 받쳐야"한다(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떠받쳐 주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듯이 우리 힘을 다해 그것을 끌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기울어져 가고 있는 경건한 종교의 세력을 후원하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Ⅱ. 지혜를 찾아 낸 자들의 행복은 어떤 것인가?

1. 그것은 초월적인 행복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 재물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행복, 이 세상 물질이 주는 행복을 완전히 능가하는 행복이 바로이 행복이다(14, 15절). 지혜, 그리스도, 은혜, 또는 신령한 축복을 위해 거래를 하는 것은 은이나 금이나 진주(혹은 루비)를 얻기 위해 거래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보다 이익이 많은 장사이다. 한 사람이 이러한 보석들을 풍부하게 가졌다고 상상해 보라. 아니 이 세상에서 소원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가진 자를 생각해 보라(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가졌던 자는 누군인가?).

 

(1)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도 하늘의 지혜)를 사지는 못한다. 아니, 그런 것은 "완전히 업신여김을 받으리라." 그것은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느니라"(욥 28:15  이하).

(2) 이 모든 것으로도 하늘이 지혜의 결핍을 보상해 주지 못하며, 그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상실된 영혼에게 보석금이 되어 주지도 못한다.

(3) 이 모든 것은 사람에게 참 지혜자가 누리는 행복의 절반도 주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하나도 갖지 못한다  할지라도 참 지혜를 소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 조차 이런 것들을 가진 인간보다 몇 배 이상 행복한 것이다.

(4) 하늘의 지혜는 은과 금과 진주로도 살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획득해 줄 것이며 그것을 확실하게 지켜 줄 것이다.

 

2.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들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으며 그런 모든 것들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16, 17절). 지혜는 여기에서 명철하면서도 관대한 여왕으로서 충성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자기 신하들에게 선물을 건네 주며 자기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 여왕처럼 묘사되고 있다.

 

(1) 장수는 축복인가? 그렇다. 가장 가치있는 축복이다. 생명은 모든 선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우편 손"으로 장수를 제시하고 있다. 신앙은 장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갖게 하며 우리로 그 약속의 유자격자가 되게 한다. 땅 위에서 우리가 사는 날이 설사 이웃 사람들보다 더 많지 않더라도 그것은 보다 나은 세계에서 누릴 영생을 우리에게 보증해 줄 것이다.

 

(2) 부유와 존귀는 축복으로 간주되는가? 이것도 역시 축복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부귀를 "자기 왼편손"으로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이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들을 그녀가  양 팔로 즉시 포옹할 준비가 되어 있음과 동시에 양손으로 그들에게 즉시 나누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한하신 지혜자가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시는 범위 안에서 이 세상 부를 얻게 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께 대하여 부자가  되게 하는 참 부도 그들에게 보장된다. 나면서 얻는 것이든 출세로 인한 것이든 어떤 명예도 종교에 부수되는 명예와는 비교도 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의로운 자를 그의 이웃보다 더욱 훌륭하게" 만들며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고, 인류 중 모든 온전한 자들에게서 존경과 경의를 자아내도록 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은 비록 미미한 가운데 파묻혀 지내는 자들을 저 다른 세상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해 준 것이다.

 

(3) 즐거움은 딴 어떤 것에 못지 않게 환영받는 것인가? 그렇다. 진정한 경건에는 최대의 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길은 즐거운 길이니라." 지혜의 그 여인이 우리에게 걸어가라고 지시하는 길은 풍부한 기쁨과 만족이 발견되는 그런 길이다. 감각이 누리는 모든 향락과 위안물은 은혜로운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선을 행하는 가운데 얻는 즐거움과 비교가 안 된다. 우리는 그 길이 아름답든 더럽든, 즐겁든 불쾌하든, 우리 여행의 종착지에 올바로  안내해 주는 유일한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올바른 길인 동시에 즐거운 길이다. 그 길은 매끄럽고 깨끗하며 장미꽃들이 뿌려져 있다.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종말에 가서 평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중도에도 평강이 있다. 종교 전반의 길에 평강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길의 개개 소로와 그 모든 길, 즉 각각의 행위와 사례와 그 모든 의무의 길에도 평강이 있다. 이 세상의 길처럼 하나가 달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쓰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길이 다평강이어서 달콤할 뿐만 아니라 안전하기도하다. 성도는 피안의 천국의 평강으로 들어가며 현재의 안식(Sabbatism)을 누리는 것이다.

 

3. 그것은 낙원의 행복이다. "지혜는 생명나무이도다"(18절). 참다운 은혜는 영혼에게 있어서 생명나무가된다. 우리의 첫조상은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 생명나무로부터 축출당하였다. 그것은 썩지 않는 씨앗이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샘"이다. 그것은 그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서 있는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계 22:2; 2:7). 이 하늘의 지혜를 먹고 즐기는 자들은 모든 치명적 질환에서 치유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노년과 죽음에 대한 해독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먹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4.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요 축복이기 때문이다(19, 20절). "여호와께서 지혜로 땅을 세우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신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땅은 여호와께서 세우셨으므로 움직일 수도 없으며, 그것을 창조하신 모든 목적에 추호라도 어김이 없다. 즉 땅은 창조하신 그 목적에 놀라우리만치, 그리고 예외 없이 부합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천제의 모든 운동을 가장 훌륭한 모양으로 지정하셨다. 천제들은 광활하다. 그럼에도 그들에는 흠도 없으며, 무수하지만 무질서하지 않고 그 운동은 빠른데 파멸되거나 손상됨도 없다. 깊음의 바다가 터지고 궁창 아래에서 물이 나오며 "구름이 이슬을 내리고"("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고"-우리 성경;역주)궁창 위로부터 물이 나온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자는 복되도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로 말미암아 "모든 선한 언어와 행실을 완전히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지혜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음을 받았고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한 그를 "지혜의 하나님으로 삼는" 이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앞에 나온 장수와 부와 명예의 모든 약속을 실행하실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재화가 다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지혜를 보유하라는 권고(잠언 3:21-26)

솔로몬은 지혜를 붙잡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복된자들이라고 표명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데에 위로가 있으리라고 확신시키면서 지혜를 보유하도록 하고 권면하고 있다.

 

Ⅰ. 그의 권면은 경건한 신앙 생활의 규칙을 항상 조망하고 심중에 두도록 하나는 것이다(21절).

 

1. 이것들을 언제나 조망(眺望)하라는 것. "내 아들아!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눈이 이들에게서 떠나 허영을 좇아서 방황하지 않게 하라. 언제나 그들을 마음에 유의하며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것들을 틈틈이 생각해 보며 사귀고 결코 네가 충분히 오래도록 그들을 보아서 이제는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망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들과의 친분을 유지하며 도야하여라." 서예를 배우는 자들은 자기가 본으로 사용하는 것에 항시 눈을 붙이고 있어야 하며 자기 시야에서 글씨본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신중히 행하려는 자들은 지혜의 말씀을 꾸준히 주의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2. 이것들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으라는 것. 그것은 바로 마음의 보고, 즉 마음에 숨은 속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지혜와 근신의 원칙을 고수해야 하며 그 길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지킬 가치가 있는 재산인 것이다.

 

Ⅱ. 이러한 권면을 강조하게 되는 논거는 이렇게 지켜진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말로다 할 수 없는 이익에서 나온다.

 

1. 강함과 만족이란 점에서. "그것은 네 영혼의 생명이 될 것이다(22절). 그것은 네가게을러지고 태만하게 될 때 너를 자극하여 의무의 길로 달려가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네가 낙심하고  낙담하기 시작할 때 고통 중에 있는 너를 소생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너의 영적인  생명력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영혼의 생명이야 말로 참 생명인 것이다.

 

2. 명예와 명성이란 점에서. "그것은 금사슬이나 보석처럼 네목에 장식(혹은 은혜)이 될 것이다. 네 턱에 은혜(이렇게 해독하는 이도 있다)가 될 것이며, 네 맛과 기호에 은혜로울 것이다(더러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것은 네가 말하는 모든 것에 은혜를 주입할 것이며(또 딴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한다) 마음에 드는 말을 네게 공급해 주리라. 이 말들로 인해 너는 신앙을 얻게 될 것이다."

 

3. 안전과 보장이란 점에서. 그는 네 개 성구에서 이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의도는 "의의결과"(여기에 나오는 지혜와 동일하다)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데에 있다(사 32:17). 선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거두어 들여진다. 거기에서 그들은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안전하며 다음 여러 가지 경우에도 편안할 수 있다.

 

(1) 낮의 활동에서(23절). 우리 신앙이 우리 반려자가  돼 줄 때 그것은 우리의 호송자가 될 것이다.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리라. 자연적인 삶과 그에 속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영적 삶과 그와 관계된 모든 일도 그의 은혜의 보호 아래 있다. 그래서 너는 죄악에 빠지거나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질 것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유혹으로부터 안전한 길을 지시해 줄 것이며 될 수 있는 대로 그 안전한 길에 머물도록 할 것이고, 거룩한 보호로써 우리가 능히 그 길을 행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의무의 길은 안전한 길이다. "우리는 엎어질 위험에 처해 있지만 지혜가 너를 지켜 주어서 네 발이 거치지 않게 되리라" 많은 자들을 실족케하고 거치게 하여 엎드러지게 하는 것에 너의 발은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지혜가 너로  그것을 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해 줄 것이다."

 

(2) 밤의 휴식에서(2절) 우리가 쉴 때는 노출된 채 있으므로 극히 두려움을 받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고 선한 양심을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누울 때에 화재나 도둑이나 유령이나 어떤 암흑의 공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모든 친구가 잠자고 있는 때에라도 이스라엘과 모든 참 이스라엘인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줄 우리가 아는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그에게 네 자신을 의탁하였고 그의 날개 그늘 아래 피신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망을 보기 위해 앉아 있을 필요가 없이 누울 것이로다. 누우면 잠을 자게 될 것이고 근심 걱정과 불안 때문에 뜬 눈으로 새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밖에서 오는 것이든 안에서 오는 것이든 어떠한 두려움으로도 동요되는 일이 없이(시 4:8; 116:7), 네 잠은 달 것이며 상쾌할 것이다." 편안한 밤을 보내는 비결은 선한 양심을 간직하는 것이다.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의 잠처럼,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의 짐은 달다.

 

(3) 최대의 곤경과 위기에서, 온전과 정직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창졸간의 두려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25절). 불시에 기습하는 불의의 해는 생각해 보고 말고 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므로 우리는 극히 당황하기 쉽다. 그러나  지혜롭고 선한 사람은 제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고통을 주거나 아무리 갑작스레 닥치는 놀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어떠한 두려움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라.

 

[1] 즉 그것은 악한 자들이 거룩한 종교와 경건한 신앙인에게 자행하는 멸망인 것이다. 설사 그런 멸망이 임하고 곧 문앞에 닥친 것같이 여겨지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설령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그런 악인을 사용하실지라도  그는 결코 악한 자가 자기 백성을 박멸하는 원흉이 되도록까지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2] 이것은 오히려 악인들이 순식간에 맞게 될 멸망을 말한다. 그 멸망은 꼭 임할 것이다. 그런데 소심한 성도들은 그 때 자기들이 그 멸망에 포함될 것을 염려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로 하여금 심판이 비록 전체적으로 황폐케 하며 혹은 최소한 혼잡하게 행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가자기의 백성인가를 아시며 귀한 자와 악한 자의 구별법을 아신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게 하라. 그러므로 극히 무섭게 보이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대저 여호와는 너를 안전히 지켜 주시는 보호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너를 든든하게 지켜 주시는, 너의 의지할 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네 발이 원수에게 걸리지 않게 하시며 네 자신의 두려움에 빠지지도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도들의 발을 지키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웃에 대한 지혜로운 교훈(잠언 3:27-35)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께 대한 것과 인간에게 대한 것으로 양분되는데, 참다운 지혜는 이 두 가지의 우리 의무를 정당히 이행하는데에 있으며 그것도 경건함과 아울러 정직한 가운데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대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관련되는 지혜의 여러 가지 훌륭한 교훈들이다.

 

Ⅰ. 우리는 정의와 자선에 있어서 그것들을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자에게 줘야 하며 그 실천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27, 28절).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그들에게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이거나 아니면 네 돈에 대한 사랑이 너무지나쳐서)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 네 입장이 그럴 능력을 갖지 못한 처지라면 이같은 것이 기대될 수도 없다. 그러나 네가 사치와 낭비로 인하여 정의롭게 행할 수 없게 되고 자선을 베풀지 못하게 된 것이라면 그것은 너의큰 실책이다. 그리고 만약 마땅히 받아야 할 자에게 줄 자력이 없다기 보다 차라리 네 자신의 위안과 편안이 궁핍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너를 무능력하게 하셨다면 너는 그것을 너의 최대 슬픔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그것을 "아끼지 말라(이 단어는 억제한다는 뜻임). 이 말씀은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렇게 해 줄 것이 기대되었지만 손을 오무려들이고 "자비심이 닫혀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딴 사람들의 자선 행위를 막아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들 스스로도 그 행위를 기피하여 우물쭈물해서도 안 된다. "네가 오늘 가지고 있고 그것을 네 손에 장악하고 있거든 네 이웃에게 이르기를 이번에는 돌아가고 보다 적당한 때에 다시 오라, 그러면 내가 어떻게 되나 보리라, 내일 내가 주겠노라고 말하지 말아라. 너는 네가 내일까지 살지도 또 그것이 내일 네게 있을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듯한 이유가 있더라도 이처럼 내 돈과 헤어지기 싫어하지 말아라. 해야 할 의무를 발뺌하려고 구실을 만들지 말며, 네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을 졸이게 하고서 즐거워하지 말며, 적선하는 이가 걸인에게 하듯 권위를 과사하려고 하지도 말아라. 기꺼이, 즐겁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원리로 마땅히 받아야 할 자에게 선을 베풀어라." "그것의 주인들과 소유주들"에게(단어의 의미는 그러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어라.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1. 우리의 정당한 부채는 사기나 협잡이나 연기함이 없이 갚을 것.

2. 일한 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

3. 우리의 친척들과 우리에게 의조하고 있는 자들을 부향할 것.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교회와 국가, 위정자와 목회자에게 마땅히 바쳐야할 것을 바칠 것.

5. 우정과 인정어린 모든 행위를 다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무슨 일에나 이웃의 도리가 다할 것.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우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에 의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6. 불쌍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자비롭게 대할 것. 타인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이 없고 우리에게는 그들을 후원해 줄 자력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여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의연금은 "의로움"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것이 가난한 자에게 갚아야 할 빚인 까닭이며 지불을 연기해서는 안 될 빛이기 때문이다. Bis dat, qui cito dat-즉 속히 쥐는자는 두배를 주는 자이다.

 

Ⅱ. 우리는 누구에게든 상처나 해를 입히려고 꾀해서는 안 된다.(29절).

"네 이웃을 모해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네 이웃에게 들키지 않고 해를 끼치며, 어떻게 하면 그의 몸이나 물건이나 명망에 손해를 입힐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지 말아라. 더욱이 그가 네 곁에서 안연히 살면서 네게 집적거리지 않고 너를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으며 따라서 방심하고 있다 하여 그에게 해를 입히려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더욱 부당한 일이다."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면서 예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예나 우정의 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자기 이웃을 은밀히 돌로 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이웃 사람들이 우리가  자기들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호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을 기화로 그들을 기만하여 해를 입힌다면 얼마나 비열하고 점잖지 못한 일이겠는가!

 

Ⅲ. 우리는 다투고 소송하기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30절). 까닭없이 사람과  더불어 다투지 말라. 네가 아무런 명분을 갖지 않은 일로 싸우지 말아라. 우연히 잘못 본 것에 불과한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하여 성내지 말아라. 네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거나 정당성을 밝힐 수 있는 때에 부질없는 불평이나 트집 또는 성가신 소송으로 "네 이웃을 괴롭히지 말아라." 법은 최후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힘이 미치는 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의 이득도 되기 때문이다. 주고 받는 계산이 끝나면 싸워서 득볼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Ⅳ. 우리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번영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31절). 이 경고는 시편 37편에서 매우 많이 강조된 것과 동일하다.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 그가 설사 부유하고 대단하며, 비록 편안히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자기 주위의 모든 자로  하여금 늘 자기를  두렵게 여기도록 한다 하더라도 그를 행복한 자로 생각하지 말며 나도그런 처지에 있어 봤으면 하고 부러워하지 말아라. 그의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그를 본받지 말며 그가 부자가 되기위해 취한 경로를 밟지 말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너도 그렇게 하면 꼭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는 데로 해 볼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죄인들을 부러워할 이유라고는 전혀 없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솔로몬은 이제 본장의 마지막 네 구절에서 죄인의 처지와 성도의 처지를 같이 비교하고 있다(자기 아버지 다윗이 한 것처럼, 시 37편). 그는  하나하나를 대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도가 비록 억눌림을 당하고 있을 망정 얼마나 복된 존재들이며 악인은 비록 압제자이지만 얼마나 불행한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심판을 받기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 앞에 서는 때가 바로 그 때이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판단 하시는 그대로가 심판이며, 세상의 책에 나타나는 것 그대로가 심판이 될 수는 없다.]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자들은 정당하다. 죄인은 다른 자를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라면 죄인이 아무리 번영을 구하더라도 성도는 그를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만큼 복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1. 그것은 죄인들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거나 성도들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32절). 패역한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멀어져 가는 자들이며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심술궂게 반대하는 삶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는 자"들이다. 자기 손수 지으신 그 어떤 것도 미워하시지 않는 그 분이지만 이와 같이 스스로를 못쓰게 망치는 자들은 증오하신다. 저들은 그가 보시기에 가증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인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교제를 가지신다. 이 교제는 세상에게는 비밀이며 그들은 나그네가 간섭할 수 없는 기쁨을 이 교제에서 얻는다. 그는 자기 사랑의 은밀한 증거를 의인들에게 전달하신다. 그의 언약이 그들과 함께 있다. 그들은 그의 마음을 알며 그의 섭리의 의미도 의도를 딴 사람들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나의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서 숨기겠느냐?"

 

2. 죄인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으니 곧 그들과 그들의 집이다. 그의 저주 아래 있다. 반면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으니 곧 그들과 그들의 거소가 다그의 축복 하에 있다(33절). 악인이 가진 집은 아마 강하고 으리으리할 것이지만 "여호와의 저주"가 그 위에 있고 "그 안"에 있어서 그 가정의 일이 잘 되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축복이 저주가 된다(말 2:2). 몸은 아주 비대하게 살이 쪄 있을 때에도 "영혼은 파리하게 하신다(시 106:15). 저주는 말 없이, 천천히 역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둥병이 좀먹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저주는 "그 집의 나무와 그 집의 돌"을 아울러 소멸시킬 것이다(슥 5:4; 합 2:11). 의로운 자도 처소가 있다. 즉 초라한 오두막집(이 단어는 양우리에 대해 사용하는 말임)으로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집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을 축복하신다. 그는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까지 줄곧 그 집을 축복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저주나 축복은 그 집에 사는 자가 악하냐 경건하냐에 따라 그 집에 임한다. 그리고 비록 가난하지만 축복받은 가정이라면 저주받은 가정을 부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다.

 

3. 하나님은 죄인을 경멸하시나 성도들에게는 경의를 표하신다(34절).

(1) 자기 스스로 높이는 자들은 낮아질 것이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들을 비웃으신다." 종교의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비웃고 하나님의 멍에 데기를 냉소하며 그의 은혜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하고 경건함과 경건한 백성을 조롱하며, 그들을 골리는 일이나 들춰 내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는 교만한 자들, 바로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냉소하실 것이며 온 세상 앞에서 그들을 멸시받게 하실 것이다. 그는 저희의 무능한 악의를 업신여기시며 "하늘에 앉아 저희를 보고 웃으신다"(시 2:4). 그는 그들에게 보응하시며(시 18:26), "교만한 자를 거스리신다."

 

(2) 스스로 겸손한 자들은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때문이다. 그는 그들 안에 은혜를 역사시키셔서 그들로 존귀케 하시며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께 기뻐 받으시는 바가되고 사람들 앞에서 시인을 얻는다." 거만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을 끈기있게 참는 자들은 하나님과 모든 선한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거만한 자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들의 행위(혹은 길)를 좇겠는가!

 

4. 죄인들의 종말은 영원한  치욕이 될 것이나 성도의 종말은 끝없는 영광이 될 것이다(35절).

(1) 성도들은 지혜있는 자들이며 스스로 지혜롭게 행동한다. 저희 신앙 생활 때문에 미미하게 파묻혀 지내며, 또 저희 신앙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만 그들은 끝내 틀림없이 영광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들이 받는 영광은 너무나 지극한 것이며 영원한 비중을 갖는다. 그들은 그 영광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니 그것은 가장 달콤하고도 확실한 향유(享有)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34절). 그러므로 저들은 영광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 즉 은혜는 영광인 까닭이다(고후 3:18). 은혜는 영광의 시작이요 영광의 모형이다(시 84:11)

 

(2) 죄인들은 우매자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치욕을 준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있기라도 한 양 영광에 대한 전망으로 우쭐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증명할 것이다.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그들이 영달을 누리게 되는 대신 치욕을 당하게 됨으로써 그들의 벌은 더욱 더 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원한 당황을 기뻐하실 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항상 바라지 않으면 안 될 모든 현달이 될 것이다.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1EsS/44?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