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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잠언 2- 4장, 8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4. 16.

 

메튜헨리 주석

잠언 2장

 

지혜 추구의 방법과 결과(잠언 2:1-9)

욥은 이보다 오래 전에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하고 묻고(욥 28:12, 20),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답으로써 "하나님은 그 곳을 아시느니라"(23절)고 하였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솔로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와 획득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아울러 말해 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우리가 지혜를 얻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지혜의 말씀이며, "우리를 능히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1,2절).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지혜와 명철의 샘이요, 표준임을 확실히 깨달지 않으면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만들어 주는 것 이상으로 지혜롭게 되기를 소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혜"나 "명철" 그 자체에게 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귀를 기울이며 우리 마음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기질에서도 지혜로운 것이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적 계시와, 그 계시 위에 구축된 참 신앙은 그 전부가 다 지혜인 것이다.

 

(2) 따라서 우리는 아주 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하며 약속뿐만 아니라 계명조차도 불평하거나 논란함이 없이 기꺼이 영접해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이르소서. 주의 종이 듣고 있나이다."

 

(3) 우리는 도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숨기는 보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유해야 하고 우리의 소용에 즉시 닿을 수 있도록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기탁시켜 두어야 한다.

 

(4) 우리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모든 기회를 포착해야 하며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주의깊고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5) 우리는 우리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에 바쳐야 한다. 만약 마음을 거기에 쏟지 않는다면 귀를 기울이는 일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2.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3절).

우리는 굶주림으로 거의 죽게 된 자가 허겁지겁 먹을 것을 찾듯이 "지식ㄷ을 불러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꺼져가는 듯한 희미한 열망 가지고는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가치와 그 자식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아는 자답게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우리는 갓태어난 아기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달라고 보채지 않으면 안 된다(벧전 2:2). 우리는 "명철을 얻으려고 우리 소리를 높여야"한다. 그 소리를 높여 하늘에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이러한 좋은 은사와 완전한 선물을 기대할 수 있다(약 1:17; 욥 38:34). 우리는 "목소리를 명철에게 주어야"하고(말의 직접적 해석은 그렇다), 그것을 변호하고 찬성하여야 하며, 혀를 지혜의 명령에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그것에 봉헌해야 한다. 마음을 그것에 쏟았던 우리는 이제 그것을 구하는 데에 우리 목소리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로몬은 probatum est-즉 시험삼아 해 보는 치료법으로 이 방법을 기록할 자격이 있었다. 그는 지혜를 주십사고 기도를 하였었고 또 그렇게 하여 그것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3. 우리는 고심참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4절).

즉 우리는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해야"한다. 그것을 이 세상의 모든 부귀보다 더 좋아하며 광산에서 굴착해 들어가는 광부처럼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수고를 하여야 한다. 광부는 광석을 채취하기 위해 백절불굴의 끈기와 정복할 수 없는 견실한 지조와 결의로써 커다란 고난을 견디며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또 부자가 되려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밤 늦도록 일하며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무슨 일이라도 다해 가면서 자기 재물 창고를 채우는 자들처럼, 그것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기 위해 따라갈 때에, 이처럼 부지런히 지식의 방편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Ⅱ. 이러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성공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우리는 하나님과의 지면(知面)과 교제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게 될 것이다(5절) 즉 너는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고, 모든 성례의 의미와 신비로 안내 받을 것이며 그 규례의 목적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원문의 뜻은 "네가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하게 되리라"이다. 역주). 이것은 우리가 그를 올바로 경외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따뜻한 애정과 그에 대한 찬미로써 그 사실을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

 

2.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올바른 처신법을 알게 될 것이다(9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너는 공의와 공평과 정직을 깨달을 것이라. 너는 너의 모든 처세 과정에서 너를 이끌어 주고 규제할 정의의 원리, 자비의 원리, 공정거래의 원칙을 배우게 될 것이며, 그 원리들은 네가 모든 관계, 모든 사업에 적격자가 되게 하고 모든 신뢰에 결코 어그러지지 않는 충실한 사람이 되게 해 줄 것이다. 그 말씀은 네게 정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심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을 줄 수 있는 마음도 심어 줄 것이다. 공정하게 행하지 않는 자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들을 "모든 선한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니, 성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즉 자기 의무를 아는 자들은 가장 훌륭한 지식의 소유자인 것이다(시 111:10)

 

Ⅲ. 우리가 지혜의 추구에서 이런 성공을 희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일에 있어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우리의 격려를 얻어야 한다(6-8절).

1. 하나님께서는 부여해 주실 지혜를 가지고 계시다(6절).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지혜를 주기"도 하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명철을 열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어떤 피조물 안에 있는 모든 지혜는 다 그의 선물이며, 그가 거져 주신 은사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지혜를 후히 주시고(약 1:5), 많은 자에게 주셨으며 아직도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려면 그에게로 가서 구해야 할 것이다.

 

2. 그는 자기 의지의 계시로써 이 세계를 축복하셨다.

"그의 입에서," 즉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과 그의 사역자를 통하여 "지식과 명철을 내신다." 기록된 말씀과 그의 사역자들은 다 인간들에게 대한 그의 입이다. "지식과 명철은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그러한 진리와 선의 발견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 감명을 인정하며 그 감동을 받아들이려 하기만 하면 우리를 참으로 지식있는 명철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에게 탐색할 만한 성서가 있다는 것은 지혜를 추구할 약속이기도 하고 격려이기도 한 것이니 만일 우리가 부지런히 찾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지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3. 그는 특별히 당신의 뜻을 성실히 추구할 마음이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전제하고 있다(요 7:17).

그런 선한 자들만이 그들에게 필요한 그 자식과 명철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행하고자 하는 선한 자들아! 그것을 찾으라. 그러면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구하라! 그러면 그것을 얻게 되리라(7,8절)

 

(1) 이와 같은 은총을 입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정직한 자들이다.

의로움에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게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또 그들은 하나님과의 거래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직하며 자기가 아는 한도까지는 자기 의무의 수행을 본분으로 삼는 자, 곧 "그 행실이 온전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성도들"이다. 곧 그의 영광을 위해 바쳐지고 그에 대한 봉사를 위해 구별된 무리이다.

 

(2) 그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무엇인가!

[1] 훈계, 지혜의 수단은 모든 자들에게 다 주어지나 지혜 그 자체, 곧 "완전한 지혜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예비되며" 그들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비축되어 있다. 그리스도께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지혜"이신 것이다. 말씀 안에서 계시의 성령이 되시는 그분이 곧 성별된 자들의 영혼 속에 들어와 계신 지혜의 영이시며, 그의 길을 깨닫는 명철한 자의 지혜가 되신다. 그것은 완전한 지혜여서 기초가 공고하며 원리는 어김이 없고 그 소산은 영원한 이익을 준다.

 

[2] 만족, 혹자는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물질을 예비하신다"라고 해독한다. 그는 실질적 지식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행복과 위안도 예비하신다(잠 8:21). 재물은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것이다. 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단지 스스로 행복한 줄로 상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자를 위한 약속 안에, 그리고 천국에 예비되어 있는 것들은 그들에게 진정한 행복, 철저하고도 영원한 행복을 줄 것이다.

 

[3] 보호. "행실이 온전한" 자들조차도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는 위험한 데에 직면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방패"가 되시며, 또 되실 것이다. 그래서 저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들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공포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안전하며 그들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아브라함아! 두려워말라. 나는 네 방패니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소유하고 계시며 돌보아 주고 계시는 것이 저희의 길이며 저희가 다니고 있는 공평의 소로인 것이다.

 

[4] 끝까지 지속되는 은혜.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에게서 지혜를 구한다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순전함 가운데서 지탱해 주실 것이며 우리가 거기서 곁으로 벗어나도록 아무리 유혹 받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공평의 길을 견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다. 즉 그가 "자기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사 그것이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며, 그들을 그 길에서 안전하고 결백하게 보전하셔서 자기의 하늘 나라에 이르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은혜에 대해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을 올바르게 활용한다면 그것은 우리 의무를 수행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고무하고 촉진하게 해줄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역사하시느니라."


지혜의 유익함(잠언 2:10-22)

 

이 성귀의 목적은 다음 사실을 나타내는 데에 있다.

1. 참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큰 이득을 주는가? 참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해 줄 것이며,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재물로 부유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친절을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 된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어떻게 선용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혜를 미덕의 길로의 안내자로서, 모든 종류의 유혹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사용해야 한다.

 

3. 우리가 이 지혜를 소유하는지의 여부는 어떤 규칙을 따라 시험해 볼 수 있을까?

이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지혜롭다면 그 지혜는 모든 악한 친구와 악한 행위를 피하려는 우리의 근신함으로써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쓰일 것이다.

Ⅰ. 악으로부터, 죄의 폐해로부터 우리를 보존하는 데에. 결과적으로 이 지혜는 죄악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환란의 재앙에서 우리를 보전하는 데에 유용하다.

 

1. 전체적으로(10,11절). "지혜가 너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면 언제 그 지혜는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는가?

(1) 지혜가 우리에게 대해 지배권을 행사할 때. 지혜가 우리 머리를 지혜로운 관념들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어가서" 명령권을 가지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 즉 지혜가 우리 마음 속에서 왕노릇하며 애정과 열정을 규제하게 될 때, 누룩(효모)이 밀가루 반죽 속으로 들어가듯이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서" 거기에 제맛을 확산시키며 전체를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릴 때, 이러한 때에라야 그 지혜는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가 그 지혜를 기뻐하게 되는 때.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때." 네가 그것을 극히 유쾌한 위안물로서 즐기기 시작하고 즐거이 흡족하게 여기면서 그 규칙에 복종하게 될 때, 즉 다시 말하자면 네가 미덕의 행위를 노예들이나 하는 고역으로서 하는 수 없이 억지로 해야 하는 임무라 하지 않고 "자유"요, "즐거움으로 하는 일"이라고 부르며 신령하고 경건하게 사는 삶을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안락한 삶이라 말하게 될 때, 너는 그 지혜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설사 어떤 점으로는 그 지혜가 주는 제한이 몸에게는 다소 즐겁지 아니하더라도 그러한 것조차도 영혼에게는 즐거울 것임에 틀림 없다.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 이 정도에 이르게 될 때에는 "근신"이 우리를 지켜며 "보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에게 해로운 길에서 피할 수 있고 악인의 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심으로써 "그 성도의 길을 보전"하신다(8절) 심령을 지배하는 은혜의 원리들은 내부의 타락과 외부의 유혹에 대해서 공히 강력한 보신책이 될 것이다(전 9:16, 18)

 

2. 보다 세부적으로 지혜는 우리를 보전해 준다.

(1) 타락된 원리의 사람들과 무신론적 이교도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데, 그들은 젊은이들의 판단을 타락시키며 그들의 마음에 신앙에 대한 편견과 악을 위한 논증 따위를 주입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는 자들이다.

"지혜는 너를 악한 자의 길에서 건져 내리라. 그 구출은 마치 죽음의 입에서 건져내는 것같이 복된 구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악한자가 걷고 있는 길로부터, 악한 자가 네게 걷도록 유인하는 그 길로부터의 구출이다." 원수는 악한 자(12절)라고 단 한 사람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서는(13절) 다수로 표현되고 있다. 즉 한 무리이며 일당이다. 그들은 신앙에 대항하여 연합을 이루고 악마의 왕국과 그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손을 잡고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1] 그들은 선한 것에 반대하는 심령을 갖고 있다. 그들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그들은 종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면 그것이 신앙에 의한 그들 자신의 적의를 나타내기 위함이건 타인들을 신안의 길에서 도중하차 시키기 위한 것이건 무엇이든지 다 말한다. 그들은 사탄의 대변자요, 바알을 위해 변호하는 자들이어서 "여호와의 올바른 길을 그르치게 하느나라" 신성을 모독하는 독신적(瀆神的) 재주는 죄악을 위한 찬성론을 얼마나 심술궂게 펼 것이며 패역함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헐뜯을 것인가! 지혜는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막아 줄 것이며 최소한 그런 자들의 꾐에 빠지지는 않도록 해 줄 것이다.

 

[2] 그들은 바로 그 선한 것에서 탈퇴한 자들이다. 흔히 그런 자들이야말로 경건한 신앙 세계의 원수 중 가장 악의에 차고 위험한 원수들이다. 배교자 율리안이 그 증거가 아닌가!(13절). "이 무리는 정직한 자의 길을 떠나느니라." 그 정직한 길 안에서 그들은 훈련을 쌓아 왔으며 출발을 했었는데 이제 자기들이 받은 교육의 영향력을 훌훌 떨쳐버리고 희망어린 첫출발의 인연도 끊어 버렸다. 이것은 "어두운 길로 행하기 위해서"였다. 빛을 싫어하는 그 사악한 길에서 사람들은 무지와 실수로 눈을 가리우며 완전한 어두움으로 끌려 가게 된다. 죄악의 길은 암흑의 길이요, 편안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한 길이다. 평탄하고 즐거우며 밝은 길, 정직한 길을 버리고 그런 암흑의 길로 행하다니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시 82:5; 요일 2:11).

 

[3] 그들은 죄악을 즐거워하며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과 타인의 범죄 행위를 보는 것을 다 기뻐한다(14절). 그들은 "행악"할 수 있는 기회를 "즐거워하며" 악한 계획의 성취와 성사를 기뻐한다. 나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유희이다. 그들에게는 "악인의 패역을 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광경은 없다. 소망있는 자들이 죄악의 길로 끌려가는 것을 보는 일, 그래서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강팍케 되고 굳어지게 됨을 보는 것보다더 기분좋은 일은 없다. 그들은 악마의 왕국이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즐거워하는 것이다(롬 1:32 참조). 그들의 불경건은 이렇게까지 높이 도달해 있다.

 

[4] 그들은 죄악에 확고부동하다(15절). 저희 "길은 구부려져 있느니라." 그 길은 아주 굉장히 꼬불꼬불하고 이리 돌며 저리 돌아 저희의 회오가 추적해 오지 못하도록 도피하고 있으며 회오의 힘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기만적인 마음은 저희 악행속에 있는 손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때는 간교한 변명을, 또 어떤 때는 이런 저런 교묘한 구실을 갖다 댄다. 그들은 저 미궁(迷宮)의 미로(迷路)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그들 자신의 양심의 붙잡음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위가 패역한 자"들인 때문이다. 즉 그들은 voi역한 길에서 계속 매진하려고 결심하고 있다. 그것을 말라는 말이 무엇이든지 마이동풍격으로 흘려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 모든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자들과의 교제를 회피해야 할 것이다.

 

(2) 지혜는 타락한 행위의 여인들로부터 우리를 보전해 줄 것이다.

전자는 영적 악함, 즉 성화되지 않은 마음으로의 욕망으로 이끌어 간다. 반면에 이 후자는 "육체적 욕정"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산 성전인 육체를 더럽히며 게다가 "영혼에게 전쟁을 건다." 음녀는 여기에서 "이방 계집"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자기 안에 지혜나 선함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여인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인은 음녀가 마치 이교도인양, 그리고 저 신성한 공동체에 대해 이방인인양 회피할 것이다. 이방 계집이란 사실상 이성과 미덕과 명예의 제반 원리로부터 완전히 소원(疏遠)한 여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음녀의 유혹에서 구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1] 이 여인은 얼마나 거짓된 자인가!

온통 위선 덩어리로 이루어진 자와 거래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여인은 이방의 여인이여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녀는 자기가 유혹하는 자에게 부실하다. 그녀는 정중하게 말한다. 즉 그에게 다른 누구보다 그를 얼마나 흠모하는가, 또한 그녀가 그를 위해 얼마나 친절한가를 말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로 호리고 있느니라. 이 여인은 데리라가 삼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정도 품고 있지 않으며 그의 행복 따위는 원하고 있지도 않다. 그녀가 의도하는 전부는 그의 호주머니를 터는 일과 자신의 천한 욕정을 충족시키는 것뿐이다.

 

둘째, 이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부실하며 그에게 매여 있는 자기의 신성한 의무를 깨뜨리고 있다. 그는 자기 "소시의 짝(혹은 "길잡이")이었다."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그를 그렇게 선택하였고 그만을 섬기며 그 외 모든 것은 버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는 그를 "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여인이 그 외 딴 어떤 자라고 해서 절개를 지키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다. 그 여인을 향유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녀의 허위성을 같이 분담하려는 자이다.

 

셋째, 이 여인은 하나님께 부실하다. 그녀는 "자기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니라"(17절). 즉 혼약을 망각하였다. 하나님은 결혼 언약에 증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혼약 당사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남편과 아내 쌍방이 서로에게 진실하겠노라고 서약하는 의식의 창시자인 까닭이다. 따라서 이 여인이 죄를 짓는 것은 그 남편에게 뿐만 아니라 그녀의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서약을 무시하며 언약을 깨뜨리는 때문에 "간음자와 행음자를 심판하실 것이다"(겔 17:18; 말 2:14).

 

[2] 이 여인과 연합하게 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치명적 결과가 발생한 것인가!(18,19절)

타인들의 고생을 보거든 그것을 우리의 경고로 삼자. 우리는 음행의 죄를 조심하자.

 

첫째, 음행하는 자들이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그들의 파멸은 확실하며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행의 죄는 영혼을 곧 바로 살해하는 경향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애정과 영혼 속의 선한 기질을 질식시켜 버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저주, 그리고 그의 공의로우신 칼날 앞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금지된 쾌락 속에서 사는 자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근신은 모든 사람을 악한 여인으로부터 보전해 줄 뿐만 아니라 악한 집으로부터도 지켜 준다. "그 집은 사망으로 기울어지는" 집이다. 즉 그 집은 영원한 죽음으로 직통하는 길 위헤 있다. "그리고 그녀의 길은 르바임(Rephaim)으로," 즉 옛 세계의 죄인들인 "거인들"(어떤 이는 그렇게 읽는다)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그 거인들은 사치와 과도한 난동의 삶을 살다가 늦게야 제거되고 그들이 설립한 것은 홍수로 뒤집혀 버렸던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 많은 쾌락 뒤에 따를 영원한 고통을 상기시키시면서 우리를 제지시키신다(마 5:28, 29 참조).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회개와 회복은 지극히 모험적이다. "그녀에게로 가는 자는 누구든지," 거의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느니라." 마귀의 이 올무에 걸린 자 치고 회복에 나오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 죄의 기만성에 빠지면 그만큼 심령이 강퍅해지고 그 마음이 눈뜬 장님처럼 어두워진다. "생명의 길을 잡았다"가("얻었다는" 뜻은 원래 잡는다"이다), 일단 놓치면 그들은 다시 잡을 줄은 모르고 그 천한 욕망에 완전히 도취되며 매료되고 만다. 많은 박식한 해석가들은 "이방 여인"에 대한 경고를, 문자적인 의미 이외에 상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영적 매음인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로서. 지혜는 네가 모든 우상 경배자들과 친하지 못하게 지켜 줄 것이며 그들에게 가담라도 싶어하는 네 모든 성향으로부터도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우상 숭패는 수 십 세기 동안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해로운 결과를 끼쳤고, 솔로몬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신체의 욕망과 육정으로 인해 영혼의 지적 능력과 기능이 타라되는 데 대한 경고로써, 지혜는 네가 육육의 마음에게 포로당하지 않게 지켜 줄 것이며, 네 영이 이 악명 높은 음녀, 곧 육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다. 이 악명 높은 음녀인 육은 "그 길잡이(혹은 "짝")를 버리며 우리 하나님의 언약"을 범하여 "죽음에로 기울어진" 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사불란한 지배를 하기시작할 때는 그 영혼의 사정이란 가망이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Ⅱ. 이 지혜는 우리를 선한 것에로 안내하고 지시하는 데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20절).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리라." 우리는 선한 길로다니기 위해서는 "악인과 이방 여인"의 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선한 행하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악을 행하는 일을 그쳐야"만 한다.

여기서 다음 사실에 유의하도록 하자.

 

1. 선한 자들의 전용 도로가 있다. 그 길은 선한 자들이 선한자의 자격으로서 다니는 길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선한 동아넹는 언제나 다닐 수 있는 길이다.

 

2. 그 길로 행하며 그 선한 옛 5길을 구하고 그 안에서 다니는 것이 곧 우리의 지혜이다(렘 6:16; 히 12:1). 우리는 잠시동안 그 길로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길을 지키고 계속 그 길 안에서 걸으며, 그 길에서 곁길로 나가서는 아니 된다.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이어서 지혜로운 모든 사람은 그것을 한 번 붙잡은 이상 그 길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너로 저 훌륭한 분들, 곧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본받게 하며(패트릭 감독은 그렇게 의역한다), 그들을 따라간 의로운 자들의 길을 지키게 하리라."

우리는 성도들의 선한 귀감에 의해 전반적인 우리 길을 선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부적 소로의 선택에 있어서도 옛 성도들의 모범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한다. 즉 흔적을 살피고 무리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왜 우리가 이같은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인간의 순전성은 그들은 확고히 세워 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21절).

[1] 그것은 그들 개인을 확립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대저 정직한 자는" 그들이 사는 날동안 평화롭고 조용하게 "땅에 거하리라." 그들의 정직성은 그런 삶에 이바지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저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계획에 길잡이가 되며 그들의 이웃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이다.

 

[2] 저희 권속들을 확립시켜 주는 게 될 것이다. "완전한 자는"그들의 후손으로 "땅에 남아 있으이라." 그들은 천국의 가나안에 영원히 거하며 남아 있게 될 것이니, 땅의 가나안은 그 천국 가나안의 모형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2) 인간의 불의는 그들의 파멸이 될 것이므로(22절). "악인"은 어떻게 되며 누가 "궤휼한"자의 길을 택하는지 살펴 보라. 그들은 이 뒤에 올 천국과 그에 대한 모든 소망으로부터 "끊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착을 두고 있는 저희의 보화를 쌓아둔 바로 이 현재의 "땅에서 끊어지리라." 그들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 땅에서" 뽑혀질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땅에게는 자비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아니할" 날이 올 것이다(말 4:1). 그러므로 그 지혜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하며 "우리 영혼에 즐겁게" 되도록 하자. 그 지혜는 이와 같은 종말의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메튜헨리 주석

잠언 3장

 

지혜의 유익함(잠언 2:10-22)

 

이 성귀의 목적은 다음 사실을 나타내는 데에 있다.

1. 참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큰 이득을 주는가? 참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해 줄 것이며,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재물로 부유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친절을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 된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어떻게 선용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혜를 미덕의 길로의 안내자로서, 모든 종류의 유혹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사용해야 한다.

3. 우리가 이 지혜를 소유하는지의 여부는 어떤 규칙을 따라 시험해 볼 수 있을까?

이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지혜롭다면 그 지혜는 모든 악한 친구와 악한 행위를 피하려는 우리의 근신함으로써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쓰일 것이다.

Ⅰ. 악으로부터, 죄의 폐해로부터 우리를 보존하는 데에. 결과적으로 이 지혜는 죄악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환란의 재앙에서 우리를 보전하는 데에 유용하다.

 

1. 전체적으로(10,11절). "지혜가 너를 완전히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면 언제 그 지혜는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는가?

(1) 지혜가 우리에게 대해 지배권을 행사할 때. 지혜가 우리 머리를 지혜로운 관념들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어가서" 명령권을 가지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 즉 지혜가 우리 마음 속에서 왕노릇하며 애정과 열정을 규제하게 될 때, 누룩(효모)이 밀가루 반죽 속으로 들어가듯이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서" 거기에 제맛을 확산시키며 전체를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릴 때, 이러한 때에라야 그 지혜는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가 그 지혜를 기뻐하게 되는 때.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때." 네가 그것을 극히 유쾌한 위안물로서 즐기기 시작하고 즐거이 흡족하게 여기면서 그 규칙에 복종하게 될 때, 즉 다시 말하자면 네가 미덕의 행위를 노예들이나 하는 고역으로서 하는 수 없이 억지로 해야 하는 임무라 하지 않고 "자유"요, "즐거움으로 하는 일"이라고 부르며 신령하고 경건하게 사는 삶을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안락한 삶이라 말하게 될 때, 너는 그 지혜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설사 어떤 점으로는 그 지혜가 주는 제한이 몸에게는 다소 즐겁지 아니하더라도 그러한 것조차도 영혼에게는 즐거울 것임에 틀림 없다.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 이 정도에 이르게 될 때에는 "근신"이 우리를 지켜며 "보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에게 해로운 길에서 피할 수 있고 악인의 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심으로써 "그 성도의 길을 보전"하신다(8절)심령을 지배하는 은혜의 원리들은 내부의 타락과 외부의 유혹에 대해서 공히 강력한 보신책이 될 것이다(전 9:16, 18)

 

2. 보다 세부적으로 지혜는 우리를 보전해 준다.

 

(1) 타락된 원리의 사람들과 무신론적 이교도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데, 그들은 젊은이들의 판단을 타락시키며 그들의 마음에 신앙에 대한 편견과 악을 위한 논증 따위를 주입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는 자들이다.

"지혜는 너를 악한 자의 길에서 건져 내리라. 그 구출은 마치 죽음의 입에서 건져내는 것같이 복된 구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악한자가 걷고 있는 길로부터, 악한 자가 네게 걷도록 유인하는 그 길로부터의 구출이다." 원수는 악한 자(12절)라고 단 한 사람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서는(13절) 다수로 표현되고 있다. 즉 한 무리이며 일당이다. 그들은 신앙에 대항하여 연합을 이루고 악마의 왕국과 그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손을 잡고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다.

 

[1] 그들은 선한 것에 반대하는 심령을 갖고 있다. 그들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그들은 종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면 그것이 신앙에 의한 그들 자신의 적의를 나타내기 위함이건 타인들을 신안의 길에서 도중하차 시키기 위한 것이건 무엇이든지 다 말한다. 그들은 사탄의 대변자요, 바알을 위해 변호하는 자들이어서 "여호와의 올바른 길을 그르치게 하느나라" 신성을 모독하는 독신적(瀆神的) 재주는 죄악을 위한 찬성론을 얼마나 심술궂게 펼 것이며 패역함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헐뜯을 것인가! 지혜는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막아 줄 것이며 최소한 그런 자들의 꾐에 빠지지는 않도록 해 줄 것이다.

 

[2] 그들은 바로 그 선한 것에서 탈퇴한 자들이다. 흔히 그런 자들이야말로 경건한 신앙 세계의 원수 중 가장 악의에 차고 위험한 원수들이다. 배교자 율리안이 그 증거가 아닌가!(13절). "이 무리는 정직한 자의 길을 떠나느니라." 그 정직한 길 안에서 그들은 훈련을 쌓아 왔으며 출발을 했었는데 이제 자기들이 받은 교육의 영향력을 훌훌 떨쳐버리고 희망어린 첫출발의 인연도 끊어 버렸다. 이것은 "어두운 길로 행하기 위해서"였다. 빛을 싫어하는 그 사악한 길에서 사람들은 무지와 실수로 눈을 가리우며 완전한 어두움으로 끌려 가게 된다. 죄악의 길은 암흑의 길이요, 편안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한 길이다. 평탄하고 즐거우며 밝은 길, 정직한 길을 버리고 그런 암흑의 길로 행하다니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시 82:5; 요일 2:11).

 

[3] 그들은 죄악을 즐거워하며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과 타인의 범죄 행위를 보는 것을 다 기뻐한다(14절). 그들은 "행악"할 수 있는 기회를 "즐거워하며" 악한 계획의 성취와 성사를 기뻐한다. 나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유희이다. 그들에게는 "악인의 패역을 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광경은 없다. 소망있는 자들이 죄악의 길로 끌려가는 것을 보는 일, 그래서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강팍케 되고 굳어지게 됨을 보는 것보다더 기분좋은 일은 없다. 그들은 악마의 왕국이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즐거워하는 것이다(롬 1:32 참조). 그들의 불경건은 이렇게까지 높이 도달해 있다.

 

[4] 그들은 죄악에 확고부동하다(15절). 저희 "길은 구부려져 있느니라." 그 길은 아주 굉장히 꼬불꼬불하고 이리 돌며 저리 돌아 저희의 회오가 추적해 오지 못하도록 도피하고 있으며 회오의 힘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기만적인 마음은 저희 악행속에 있는 손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때는 간교한 변명을, 또 어떤 때는 이런 저런 교묘한 구실을 갖다 댄다. 그들은 저 미궁(迷宮)의 미로(迷路)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그들 자신의 양심의 붙잡음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위가 패역한 자"들인 때문이다. 즉 그들은 voi역한 길에서 계속 매진하려고 결심하고 있다. 그것을 말라는 말이 무엇이든지 마이동풍격으로 흘려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 모든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자들과의 교제를 회피해야 할 것이다.

 

(2) 지혜는 타락한 행위의 여인들로부터 우리를 보전해 줄 것이다.

전자는 영적 악함, 즉 성화되지 않은 마음으로의 욕망으로 이끌어 간다. 반면에 이 후자는 "육체적 욕정"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산 성전인 육체를 더럽히며 게다가 "영혼에게 전쟁을 건다." 음녀는 여기에서 "이방 계집"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자기 안에 지혜나 선함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런 여인과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인은 음녀가 마치 이교도인양, 그리고 저 신성한 공동체에 대해 이방인인양 회피할 것이다. 이방 계집이란 사실상 이성과 미덕과 명예의 제반 원리로부터 완전히 소원(疏遠)한 여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음녀의 유혹에서 구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1] 이 여인은 얼마나 거짓된 자인가!

온통 위선 덩어리로 이루어진 자와 거래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여인은 이방의 여인이여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녀는 자기가 유혹하는 자에게 부실하다. 그녀는 정중하게 말한다. 즉 그에게 다른 누구보다 그를 얼마나 흠모하는가, 또한 그녀가 그를 위해 얼마나 친절한가를 말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로 호리고 있느니라. 이 여인은 데리라가 삼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정도 품고 있지 않으며 그의 행복 따위는 원하고 있지도 않다. 그녀가 의도하는 전부는 그의 호주머니를 터는 일과 자신의 천한 욕정을 충족시키는 것뿐이다.

 

둘째, 이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부실하며 그에게 매여 있는 자기의 신성한 의무를 깨뜨리고 있다. 그는 자기 "소시의 짝(혹은 "길잡이")이었다."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그를 그렇게 선택하였고 그만을 섬기며 그 외 모든 것은 버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의 인도에 자신을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는 그를 "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여인이 그 외 딴 어떤 자라고 해서 절개를 지키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다. 그 여인을 향유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녀의 허위성을 같이 분담하려는 자이다.

 

셋째, 이 여인은 하나님께 부실하다. 그녀는 "자기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니라"(17절). 즉 혼약을 망각하였다. 하나님은 결혼 언약에 증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혼약 당사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남편과 아내 쌍방이 서로에게 진실하겠노라고 서약하는 의식의 창시자인 까닭이다. 따라서 이 여인이 죄를 짓는 것은 그 남편에게 뿐만 아니라 그녀의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서약을 무시하며 언약을 깨뜨리는 때문에 "간음자와 행음자를 심판하실 것이다"(겔 17:18; 말 2:14).

 

[2] 이 여인과 연합하게 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치명적 결과가 발생한 것인가!(18,19절)

타인들의 고생을 보거든 그것을 우리의 경고로 삼자. 우리는 음행의 죄를 조심하자.

 

첫째, 음행하는 자들이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그들의 파멸은 확실하며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행의 죄는 영혼을 곧 바로 살해하는 경향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애정과 영혼 속의 선한 기질을 질식시켜 버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저주, 그리고 그의 공의로우신 칼날 앞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금지된 쾌락 속에서 사는 자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근신은 모든 사람을 악한 여인으로부터 보전해 줄 뿐만 아니라 악한 집으로부터도 지켜 준다. "그 집은 사망으로 기울어지는" 집이다. 즉 그 집은 영원한 죽음으로 직통하는 길 위헤 있다. "그리고 그녀의 길은 르바임(Rephaim)으로," 즉 옛 세계의 죄인들인 "거인들"(어떤 이는 그렇게 읽는다)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그 거인들은 사치와 과도한 난동의 삶을 살다가 늦게야 제거되고 그들이 설립한 것은 홍수로 뒤집혀 버렸던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 많은 쾌락 뒤에 따를 영원한 고통을 상기시키시면서 우리를 제지시키신다(마 5:28, 29 참조).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회개와 회복은 지극히 모험적이다. "그녀에게로 가는 자는 누구든지," 거의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느니라." 마귀의 이 올무에 걸린 자 치고 회복에 나오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 죄의 기만성에 빠지면 그만큼 심령이 강퍅해지고 그 마음이 눈뜬 장님처럼 어두워진다. "생명의 길을 잡았다"가("얻었다는" 뜻은 원래 잡는다"이다), 일단 놓치면 그들은 다시 잡을 줄은 모르고 그 천한 욕망에 완전히 도취되며 매료되고 만다. 많은 박식한 해석가들은 "이방 여인"에 대한 경고를, 문자적인 의미 이외에 상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영적 매음인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로서. 지혜는 네가 모든 우상 경배자들과 친하지 못하게 지켜 줄 것이며 그들에게 가담라도 싶어하는 네 모든 성향으로부터도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우상 숭패는 수 십 세기 동안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해로운 결과를 끼쳤고, 솔로몬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신체의 욕망과 육정으로 인해 영혼의 지적 능력과 기능이 타라되는 데 대한 경고로써, 지혜는 네가 육육의 마음에게 포로당하지 않게 지켜 줄 것이며, 네 영이 이 악명 높은 음녀, 곧 육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다. 이 악명 높은 음녀인 육은 "그 길잡이(혹은 "짝")를 버리며 우리 하나님의 언약"을 범하여 "죽음에로 기울어진" 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사불란한 지배를 하기시작할 때는 그 영혼의 사정이란 가망이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Ⅱ. 이 지혜는 우리를 선한 것에로 안내하고 지시하는 데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20절).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리라."

우리는 선한 길로다니기 위해서는 "악인과 이방 여인"의 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선한 행하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악을 행하는 일을 그쳐야"만 한다.

 

여기서 다음 사실에 유의하도록 하자.

1. 선한 자들의 전용 도로가 있다. 그 길은 선한 자들이 선한자의 자격으로서 다니는 길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선한 동아넹는 언제나 다닐 수 있는 길이다.

 

2. 그 길로 행하며 그 선한 옛 5길을 구하고 그 안에서 다니는 것이 곧 우리의 지혜이다(렘 6:16; 히 12:1). 우리는 잠시동안 그 길로 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길을 지키고 계속 그 길 안에서 걸으며, 그 길에서 곁길로 나가서는 아니 된다.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이어서 지혜로운 모든 사람은 그것을 한 번 붙잡은 이상 그 길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너로 저 훌륭한 분들, 곧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본받게 하며(패트릭 감독은 그렇게 의역한다), 그들을 따라간 의로운 자들의 길을 지키게 하리라."

우리는 성도들의 선한 귀감에 의해 전반적인 우리 길을 선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부적 소로의 선택에 있어서도 옛 성도들의 모범으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한다. 즉 흔적을 살피고 무리의 발자국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왜 우리가 이같은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인간의 순전성은 그들은 확고히 세워 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21절).

[1] 그것은 그들 개인을 확립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대저 정직한 자는" 그들이 사는 날동안 평화롭고 조용하게 "땅에 거하리라." 그들의 정직성은 그런 삶에 이바지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저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계획에 길잡이가 되며 그들의 이웃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이다.

 

[2] 저희 권속들을 확립시켜 주는 게 될 것이다. "완전한 자는"그들의 후손으로 "땅에 남아 있으이라." 그들은 천국의 가나안에 영원히 거하며 남아 있게 될 것이니, 땅의 가나안은 그 천국 가나안의 모형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2) 인간의 불의는 그들의 파멸이 될 것이므로(22절). "악인"은 어떻게 되며 누가 "궤휼한"자의 길을 택하는지 살펴 보라. 그들은 이 뒤에 올 천국과 그에 대한 모든 소망으로부터 "끊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착을 두고 있는 저희의 보화를 쌓아둔 바로 이 현재의 "땅에서 끊어지리라." 그들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 땅에서" 뽑혀질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땅에게는 자비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아니할" 날이 올 것이다(말 4:1). 그러므로 그 지혜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하며 "우리 영혼에 즐겁게" 되도록 하자. 그 지혜는 이와 같은 종말의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봉헌(잠언 3:7-12)

 

우리 앞에는 세 가지 권면이 나오는데 그 하나 하나가 충분한 이유와 함께 역설되고 있다.

Ⅰ.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다스리심에 대해 겸손하고도 의무감에 넘친 복종 안에서 살아야 한다(7절). "너의 최고 주요 주인으로서의 영호와를 경외하라. 무슨 일에서든지 네 신앙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1. 이 복종은 겸손한 순종이어야만 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종교의 권세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지혜를 자부하는 것보다 더 큰 적은 없다. 자기 자신의 지혜로 충분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종교의 규칙으로부터 자기들의 방법을 취하는 일은, 더구나 종교의 규칙에 얽매인다는 것은 자기들 답지 않다거나 자기들의 위신에 먹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2. 또한 충성스런 복종이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그를 노엽게 할 짓이나 그의 돌보심을 목수당할 어떤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라. "악에서 떠나기" 위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요 참 "명철"이다(욥 28:28). 이것을 소유하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다. 그러나 자기 부정적으로 그래야 하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고무시키기 위해 여기에서 약속되는 것은(8절) 이것이 외적인 인간에게조차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음식처럼 쓸모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양분을 많이 공급해 줄 것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리라." 그것은 또한 강하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근신과 절제, 술취하지 않음과 침착함, 마음의 평정, 욕망과 정욕을 잘 다스리는 것, 이런 것은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영혼의 건강에 많은 기여를 할 뿐만 아니라 신체를 위해 좋은 습관도 된다. 몸의 좋은 습관은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서 건강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썩음"과 같고 세상의 근심은 뼈를 말린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희망과 기쁨은 골수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Ⅱ.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선용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재산을 불리는 길이다(9,10절)

 

1. 여기서는 재산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우리 본분으로 삼도록 하는 교훈이 나오고 있다. "네 재물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성호와 찬미로 그를 존귀케 한다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목적이다. 우리는 그를 존귀하게 하는 것 말고는 단지 그를 섬길 도리가 없다. 그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야 하며 그에게 경의를 품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소유인 우리 몸과 마음으로" 그를 공경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재물로도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재물 또한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종속물은 그의 영광을 위해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 재산은 단지 보잘 것 없는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것이지만 이것으로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는데, 그러면 보잘 것 없던 그 물질이 실속있는 것, 즉 본질적인 것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세 가지로써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1) "우리의 소산물로써" 재물이 불어나는 곳에서는 우리가 자신을 존귀케 하고 싶어지며(신 8:17) 우리 마음을 세상에 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시 62: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해마다 나는 산물을 먹고 살므로, 우리의 소산이라 함은 땅의 소산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항구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2) "우리의 모든 소산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사에 우리를 번영하게 하심과 같이 그를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율법은 modus decimandi 즉 십일조세의 방식에 대한 규정은 허용할 것이지만 de non decimando 즉 십일조의 납부를 면제해 주는 규정은 하나도 허용치 않을 것이다.

 

(3) 아벨처럼(창 4:4) "온갖 처음 익은 열매로써" 이것은 율법이요(출 23:19) 선지자였다(말 3:10). 처음이요 가장 선하신 분 되시는 하나님은 모든 사물의 처음 것과 가장 좋은 것을 받으셔야 한다. 그의 권리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시므로 그는 맨 먼저 대접을 받으셔야 한다.

 

우리의 세상 제물을 우리 종교에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며 그들 및 그들로 인해 갖게 되는 이익을 우리의 종교의 진흥을 위해 사용하며, 우리의 가진 것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유익을 베풀고 아끼지 않고 "후히 줄 것을 꾀하면서" 경건과 자선의 모든 일을 충만히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2. 또한 여기에는 우리 재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리 우리의 이익으로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적은 것을 많게, 많은 것을 더 많게 만드는 길이다. 그것은 번영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리라" 그는 네 주머니라고 하지 않고 네 창고라고 말하며 네 옷장을 새로 채운다고 하지 않고 네 즙틀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겉치레나 장식용이 아닌, 쓸모있는 소산물로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몰래 감춰두고 쌓아두기 위한 것으로가 아니라 사용하고 투자하기 위한 것으로 너를 축복해 주실 것이다."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하는 자들은 더 많은 선을 베풀 수 있도록 더욱 많이 받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세상 재산으로써 우리 종교에 쓸모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종교가 세상 일의 형통에 매우 유용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건함에는 현재 생명의 약속이 있고" 그 모든 위로도 있다. 우리가 만일 준다고 해서 망하게 되고 가난하게 되는 줄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면 우리가 그로 인해 부자가 될 것이다(학 2:19). 우리는 우리가 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요 받을 것이다.

 

Ⅲ.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올바로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11, 12절). 사도는 이 말씀을 인용하며(히 12:5) 이것을 아버지의 권유와 애정을 가지고 "그 자녀에게 하듯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훈계"라고 부르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고난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환란에 처할 때 우리의 주의는 어디에 있어야만 되는가?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지 말며 지겨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앞에서 나온 그의 훈계는 부유하고 형통한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여기에서는 가나하고 역경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는 훈계이다.

 

(1) 우리는 그 고난이 아무리 가볍고 단시간에 걸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주목해 볼 가치가 없는 듯이, 혹은 또 그 고난이 어떤 심부름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어서 응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환란을 당하여서 목석이나 금욕주의자처럼 무감각해지며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점점 경화되어서는 아니 된다. 또한 하나님이 없이도 그 고난을 쉽사리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스스로 강퍅케 되어서도 아니 된다.

 

(2) 우리는 그 고난이 아무리 중하고 오래 계속되더라도 지쳐서는 아니되며 사도가 해석하듯 그고난 아래서 "낙심"해서도 아니 되고 실망해서도 안된다. 그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빼앗겨서는 아니되며 혹은 절망에 떨어지거나 자신을 구출하고 억울한 점을 시정하기위해 어떤 부당한 수단을 사용하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고난이 정도 이상으로 강하게 압박하거나 보다 오래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빨리 구원이 이르지 않는다고 하여 구원될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된다.

 

2. 우리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은 무엇인가?

 

(1) 그것은 고난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라는 점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징계"이다. 이 점은 왜 우리가 그 고난에 승복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비할 데 없이 지고한 주권과 항거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왜 우리가 그 고난을 만족히 여겨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된다. 왜냐하면 오점 하나 없이 순전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하시지 않으시며 무한한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하시진 않을 것을 우리가 확신하는 까닭이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경히 여겨서는 안 된다. 사자(使者)에게 가하는 결례는 그를 보내는 자에게 대한 모욕인 것이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싫증을 내서는 아니 된다. 그는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2) 그것이 아버지의 징계라는 점이다. 그 징계는 재판장으로서, 그의 응징하는 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그의 지혜로운 애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한다. 아니,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까닭에, 자식이 지혜롭고 선하게 되기를 바라는 까닭에 징계한다. 그는 자기 아들의 귀엽고 마음에 드는 점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결함이 되고 자기의 기뻐하는 것을 손상시키는 점을 방지하고 치료하기 위해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라"(계 3:19)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다음 사실은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1] 고난은 사랑의 언약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에서 유출되는 것이란 사실.

[2] 고난은 그들에게 실제의 해를 입히기는커녕 도리어 그 고난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주 풍성한 유익을 주는 것이며 그들을 신성하게 하는 복된 수단이라는 사실.

 


지혜의 유익함(잠언 3:13-20)

 

솔로몬은 지혜를 부지런히 찾으라고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하였고(잠 2:1 이하) 우리가 성실히 그리고 꾸준히 추구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혜를 찾았을 때 그로 인하여 얻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유리한 점을 내다본다는 것은 부지런함이 근본이 되고 부지런하도록 박차를 가해 주는 동기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지혜를 얻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라는 의심할 나위없는 진리를 제시하면서 지혜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인지 나타내 보이고 있다. 즉 이 지혜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에 존재하는 참 지혜이며 그의 진리와 섭리와 법칙의 모든 의도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지혜에 의해 행복해지기 위해서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1. 우리는 지혜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혜를 발견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그 이익을 얻으며 그 소유권을 얻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이고, 또한 "명철을 뽑아내는"(단어의 뜻이 그렇다) 자는 복 있는 자이다.

 

(1) 즉 그런 사람은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이끌어 내는 자이다. 그는 지혜를 자기 자신 안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히 주시는" 모든 지혜의 원천으로부터의 기도의 물통으로써 지혜를 긷는 자이다.

(2) 그는 광산에서 광석을 뽑아내는 사람이 그렇듯이 지혜를 얻기 위해 수고하는 자이다. 지혜가 쉽사리 나오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뽑기 위해 보다 많은 힘을 들여야 한다.

(3) 그는 그 지혜 안에서 향상하는 자이다. 얼마간의 명철을 가지고서 지식이 자라나게 하며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불림으로써 명철을 뽑아내는 자이다.

(4) 그는 그 지혜로 선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술독에서 술을 떠내듯 자기가 가지고 있는 창고로부터 그것을 꺼집어 내어 타인들에게 "새 것과 옛 것"을 가르치기 위해 전달하는 자이다. 이렇게 선한 용도에 쓰이는 지혜야말로 잘 획드한 지혜이며 목적에 부합하는 지혜인 것이다.

 

2. 우리는 지혜를 매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혜라는 상품에 대해 읽게 된다. 이것이 암시해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상인이 자기 생각과 시간이 대부분을 자기 상품에 쏟듯이, 그것을 우리의 부업이 아닌 본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2) 우리는 주식의 매매처럼 그것에 모든 것을 투기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기꺼이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진주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팔아야 할 만큼 굉장히 비싼 진주이다(마 13:45, 46). "진리를 사라"(잠 23:23). 그는 어떤 시세로 사라는 말을 하지 아니한다. 이는 우리가 그것을 놓치느니 보다는 차라리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꼭 사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수지맞는 물건을 살 때처럼 지혜를 꽉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손에서 빠져 나갈 위험이 다분하다면 더욱 신경을 써서 그것을 꼭 쥘 것이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지혜를 포착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데에 최대한의 정력을 내어야 하며, 그것을 중진시킬 수 있는 온갖 기회를 꼭 붙잡아야 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바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아야 한다.

4. 우리는 지혜를 소지해야 한다. 지혜를 붙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코 놓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우리가 잡은 것을 견지해야 하며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 또한 끝까지 지혜의 길안에서 참고 견디며 매질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떠 받쳐야"한다(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떠받쳐 주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듯이 우리 힘을 다해 그것을 끌어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기울어져 가고 있는 경건한 종교의 세력을 후원하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Ⅱ. 지혜를 찾아 낸 자들의 행복은 어떤 것인가?

 

1. 그것은 초월적인 행복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 재물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행복, 이 세상 물질이 주는 행복을 완전히 능가하는 행복이 바로이 행복이다(14, 15절). 지혜, 그리스도, 은혜, 또는 신령한 축복을 위해 거래를 하는 것은 은이나 금이나 진주(혹은 루비)를 얻기 위해 거래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보다 이익이 많은 장사이다. 한 사람이 이러한 보석들을 풍부하게 가졌다고 상상해 보라. 아니 이 세상에서 소원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가진 자를 생각해 보라(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가졌던 자는 누군인가?).

 

(1)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도 하늘의 지혜)를 사지는 못한다. 아니, 그런 것은 "완전히 업신여김을 받으리라." 그것은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느니라"(욥 28:15 이하).

(2) 이 모든 것으로도 하늘이 지혜의 결핍을 보상해 주지 못하며, 그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상실된 영혼에게 보석금이 되어 주지도 못한다.

(3) 이 모든 것은 사람에게 참 지혜자가 누리는 행복의 절반도 주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하나도 갖지 못한다 할지라도 참 지혜를 소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 조차 이런 것들을 가진 인간보다 몇 배 이상 행복한 것이다.

(4) 하늘의 지혜는 은과 금과 진주로도 살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획득해 줄 것이며 그것을 확실하게 지켜 줄 것이다.

 

2.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들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으며 그런 모든 것들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16, 17절). 지혜는 여기에서 명철하면서도 관대한 여왕으로서 충성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자기 신하들에게 선물을 건네 주며 자기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 여왕처럼 묘사되고 있다.

 

(1) 장수는 축복인가? 그렇다. 가장 가치있는 축복이다. 생명은 모든 선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우편 손"으로 장수를 제시하고 있다. 신앙은 장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갖게 하며 우리로 그 약속의 유자격자가 되게 한다. 땅 위에서 우리가 사는 날이 설사 이웃 사람들보다 더 많지 않더라도 그것은 보다 나은 세계에서 누릴 영생을 우리에게 보증해 줄 것이다.

 

(2) 부유와 존귀는 축복으로 간주되는가? 이것도 역시 축복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부귀를 "자기 왼편손"으로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이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들을 그녀가 양 팔로 즉시 포옹할 준비가 되어 있음과 동시에 양손으로 그들에게 즉시 나누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한하신 지혜자가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시는 범위 안에서 이 세상 부를 얻게 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께 대하여 부자가 되게 하는 참 부도 그들에게 보장된다. 나면서 얻는 것이든 출세로 인한 것이든 어떤 명예도 종교에 부수되는 명예와는 비교도 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의로운 자를 그의 이웃보다 더욱 훌륭하게" 만들며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고, 인류 중 모든 온전한 자들에게서 존경과 경의를 자아내도록 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은 비록 미미한 가운데 파묻혀 지내는 자들을 저 다른 세상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해 준 것이다.

 

(3) 즐거움은 딴 어떤 것에 못지 않게 환영받는 것인가? 그렇다. 진정한 경건에는 최대의 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길은 즐거운 길이니라." 지혜의 그 여인이 우리에게 걸어가라고 지시하는 길은 풍부한 기쁨과 만족이 발견되는 그런 길이다. 감각이 누리는 모든 향락과 위안물은 은혜로운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선을 행하는 가운데 얻는 즐거움과 비교가 안 된다. 우리는 그 길이 아름답든 더럽든, 즐겁든 불쾌하든, 우리 여행의 종착지에 올바로 안내해 주는 유일한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올바른 길인 동시에 즐거운 길이다. 그 길은 매끄럽고 깨끗하며 장미꽃들이 뿌려져 있다.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종말에 가서 평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중도에도 평강이 있다. 종교 전반의 길에 평강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길의 개개 소로와 그 모든 길, 즉 각각의 행위와 사례와 그 모든 의무의 길에도 평강이 있다. 이 세상의 길처럼 하나가 달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쓰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길이 다평강이어서 달콤할 뿐만 아니라 안전하기도하다. 성도는 피안의 천국의 평강으로 들어가며 현재의 안식(Sabbatism)을 누리는 것이다.

 

3. 그것은 낙원의 행복이다. "지혜는 생명나무이도다"(18절). 참다운 은혜는 영혼에게 있어서 생명나무가된다. 우리의 첫조상은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 생명나무로부터 축출당하였다. 그것은 썩지 않는 씨앗이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샘"이다. 그것은 그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서 있는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계 22:2; 2:7). 이 하늘의 지혜를 먹고 즐기는 자들은 모든 치명적 질환에서 치유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노년과 죽음에 대한 해독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먹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4.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요 축복이기 때문이다(19, 20절). "여호와께서 지혜로 땅을 세우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신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땅은 여호와께서 세우셨으므로 움직일 수도 없으며, 그것을 창조하신 모든 목적에 추호라도 어김이 없다. 즉 땅은 창조하신 그 목적에 놀라우리만치, 그리고 예외 없이 부합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천제의 모든 운동을 가장 훌륭한 모양으로 지정하셨다. 천제들은 광활하다. 그럼에도 그들에는 흠도 없으며, 무수하지만 무질서하지 않고 그 운동은 빠른데 파멸되거나 손상됨도 없다. 깊음의 바다가 터지고 궁창 아래에서 물이 나오며 "구름이 이슬을 내리고"("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고"-우리 성경;역주)궁창 위로부터 물이 나온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자는 복되도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로 말미암아 "모든 선한 언어와 행실을 완전히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지혜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음을 받았고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한 그를 "지혜의 하나님으로 삼는" 이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앞에 나온 장수와 부와 명예의 모든 약속을 실행하실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재화가 다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지혜를 보유하라는 권고(잠언 3:21-26)

 

솔로몬은 지혜를 붙잡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복된자들이라고 표명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데에 위로가 있으리라고 확신시키면서 지혜를 보유하도록 하고 권면하고 있다.

 

Ⅰ. 그의 권면은 경건한 신앙 생활의 규칙을 항상 조망하고 심중에 두도록 하나는 것이다(21절).

 

1. 이것들을 언제나 조망(眺望)하라는 것. "내 아들아!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눈이 이들에게서 떠나 허영을 좇아서 방황하지 않게 하라. 언제나 그들을 마음에 유의하며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것들을 틈틈이 생각해 보며 사귀고 결코 네가 충분히 오래도록 그들을 보아서 이제는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망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들과의 친분을 유지하며 도야하여라." 서예를 배우는 자들은 자기가 본으로 사용하는 것에 항시 눈을 붙이고 있어야 하며 자기 시야에서 글씨본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신중히 행하려는 자들은 지혜의 말씀을 꾸준히 주의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2. 이것들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으라는 것. 그것은 바로 마음의 보고, 즉 마음에 숨은 속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지혜와 근신의 원칙을 고수해야 하며 그 길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지킬 가치가 있는 재산인 것이다.

 

Ⅱ. 이러한 권면을 강조하게 되는 논거는 이렇게 지켜진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말로다 할 수 없는 이익에서 나온다.

 

1. 강함과 만족이란 점에서. "그것은 네 영혼의 생명이 될 것이다(22절). 그것은 네가게을러지고 태만하게 될 때 너를 자극하여 의무의 길로 달려가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네가 낙심하고 낙담하기 시작할 때 고통 중에 있는 너를 소생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너의 영적인 생명력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영혼의 생명이야 말로 참 생명인 것이다.

 

2. 명예와 명성이란 점에서. "그것은 금사슬이나 보석처럼 네목에 장식(혹은 은혜)이 될 것이다. 네 턱에 은혜(이렇게 해독하는 이도 있다)가 될 것이며, 네 맛과 기호에 은혜로울 것이다(더러는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것은 네가 말하는 모든 것에 은혜를 주입할 것이며(또 딴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한다) 마음에 드는 말을 네게 공급해 주리라. 이 말들로 인해 너는 신앙을 얻게 될 것이다."

 

3. 안전과 보장이란 점에서. 그는 네 개 성구에서 이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의도는 "의의결과"(여기에 나오는 지혜와 동일하다)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데에 있다(사 32:17). 선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거두어 들여진다. 거기에서 그들은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안전하며 다음 여러 가지 경우에도 편안할 수 있다.

 

(1) 낮의 활동에서(23절). 우리 신앙이 우리 반려자가 돼 줄 때 그것은 우리의 호송자가 될 것이다.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리라. 자연적인 삶과 그에 속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영적 삶과 그와 관계된 모든 일도 그의 은혜의 보호 아래 있다. 그래서 너는 죄악에 빠지거나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질 것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유혹으로부터 안전한 길을 지시해 줄 것이며 될 수 있는 대로 그 안전한 길에 머물도록 할 것이고, 거룩한 보호로써 우리가 능히 그 길을 행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의무의 길은 안전한 길이다. "우리는 엎어질 위험에 처해 있지만 지혜가 너를 지켜 주어서 네 발이 거치지 않게 되리라" 많은 자들을 실족케하고 거치게 하여 엎드러지게 하는 것에 너의 발은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지혜가 너로 그것을 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해 줄 것이다."

 

(2) 밤의 휴식에서(2절) 우리가 쉴 때는 노출된 채 있으므로 극히 두려움을 받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고 선한 양심을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누울 때에 화재나 도둑이나 유령이나 어떤 암흑의 공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우리와 우리의 모든 친구가 잠자고 있는 때에라도 이스라엘과 모든 참 이스라엘인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줄 우리가 아는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그에게 네 자신을 의탁하였고 그의 날개 그늘 아래 피신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망을 보기 위해 앉아 있을 필요가 없이 누울 것이로다. 누우면 잠을 자게 될 것이고 근심 걱정과 불안 때문에 뜬 눈으로 새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밖에서 오는 것이든 안에서 오는 것이든 어떠한 두려움으로도 동요되는 일이 없이(시 4:8; 116:7), 네 잠은 달 것이며 상쾌할 것이다." 편안한 밤을 보내는 비결은 선한 양심을 간직하는 것이다.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의 잠처럼,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의 짐은 달다.

 

(3) 최대의 곤경과 위기에서, 온전과 정직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창졸간의 두려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25절). 불시에 기습하는 불의의 해는 생각해 보고 말고 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므로 우리는 극히 당황하기 쉽다. 그러나 지혜롭고 선한 사람은 제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고통을 주거나 아무리 갑작스레 닥치는 놀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어떠한 두려움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라.

 

[1] 즉 그것은 악한 자들이 거룩한 종교와 경건한 신앙인에게 자행하는 멸망인 것이다. 설사 그런 멸망이 임하고 곧 문앞에 닥친 것같이 여겨지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설령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그런 악인을 사용하실지라도 그는 결코 악한 자가 자기 백성을 박멸하는 원흉이 되도록까지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2] 이것은 오히려 악인들이 순식간에 맞게 될 멸망을 말한다. 그 멸망은 꼭 임할 것이다. 그런데 소심한 성도들은 그 때 자기들이 그 멸망에 포함될 것을 염려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로 하여금 심판이 비록 전체적으로 황폐케 하며 혹은 최소한 혼잡하게 행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가자기의 백성인가를 아시며 귀한 자와 악한 자의 구별법을 아신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게 하라. 그러므로 극히 무섭게 보이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대저 여호와는 너를 안전히 지켜 주시는 보호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너를 든든하게 지켜 주시는, 너의 의지할 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네 발이 원수에게 걸리지 않게 하시며 네 자신의 두려움에 빠지지도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도들의 발을 지키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웃에 대한 지혜로운 교훈(잠언 3:27-35)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께 대한 것과 인간에게 대한 것으로 양분되는데, 참다운 지혜는 이 두 가지의 우리 의무를 정당히 이행하는데에 있으며 그것도 경건함과 아울러 정직한 가운데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대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관련되는 지혜의 여러 가지 훌륭한 교훈들이다.

 

Ⅰ. 우리는 정의와 자선에 있어서 그것들을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자에게 줘야 하며 그 실천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27, 28절).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그들에게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이거나 아니면 네 돈에 대한 사랑이 너무지나쳐서)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 네 입장이 그럴 능력을 갖지 못한 처지라면 이같은 것이 기대될 수도 없다. 그러나 네가 사치와 낭비로 인하여 정의롭게 행할 수 없게 되고 자선을 베풀지 못하게 된 것이라면 그것은 너의큰 실책이다. 그리고 만약 마땅히 받아야 할 자에게 줄 자력이 없다기 보다 차라리 네 자신의 위안과 편안이 궁핍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너를 무능력하게 하셨다면 너는 그것을 너의 최대 슬픔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그것을 "아끼지 말라(이 단어는 억제한다는 뜻임). 이 말씀은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렇게 해 줄 것이 기대되었지만 손을 오무려들이고 "자비심이 닫혀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딴 사람들의 자선 행위를 막아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들 스스로도 그 행위를 기피하여 우물쭈물해서도 안 된다. "네가 오늘 가지고 있고 그것을 네 손에 장악하고 있거든 네 이웃에게 이르기를 이번에는 돌아가고 보다 적당한 때에 다시 오라, 그러면 내가 어떻게 되나 보리라, 내일 내가 주겠노라고 말하지 말아라. 너는 네가 내일까지 살지도 또 그것이 내일 네게 있을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듯한 이유가 있더라도 이처럼 내 돈과 헤어지기 싫어하지 말아라. 해야 할 의무를 발뺌하려고 구실을 만들지 말며, 네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을 졸이게 하고서 즐거워하지 말며, 적선하는 이가 걸인에게 하듯 권위를 과사하려고 하지도 말아라. 기꺼이, 즐겁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원리로 마땅히 받아야 할 자에게 선을 베풀어라." "그것의 주인들과 소유주들"에게(단어의 의미는 그러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어라.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1. 우리의 정당한 부채는 사기나 협잡이나 연기함이 없이 갚을 것.

2. 일한 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

3. 우리의 친척들과 우리에게 의조하고 있는 자들을 부향할 것.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교회와 국가, 위정자와 목회자에게 마땅히 바쳐야할 것을 바칠 것.

5. 우정과 인정어린 모든 행위를 다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며 무슨 일에나 이웃의 도리가 다할 것.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우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에 의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6. 불쌍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자비롭게 대할 것. 타인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이 없고 우리에게는 그들을 후원해 줄 자력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여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의연금은 "의로움"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것이 가난한 자에게 갚아야 할 빚인 까닭이며 지불을 연기해서는 안 될 빛이기 때문이다. Bis dat, qui cito dat-즉 속히 쥐는자는 두배를 주는 자이다.

 

Ⅱ. 우리는 누구에게든 상처나 해를 입히려고 꾀해서는 안 된다.(29절).

 

"네 이웃을 모해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네 이웃에게 들키지 않고 해를 끼치며, 어떻게 하면 그의 몸이나 물건이나 명망에 손해를 입힐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지 말아라. 더욱이 그가 네 곁에서 안연히 살면서 네게 집적거리지 않고 너를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으며 따라서 방심하고 있다 하여 그에게 해를 입히려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더욱 부당한 일이다."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면서 예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예나 우정의 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자기 이웃을 은밀히 돌로 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이웃 사람들이 우리가 자기들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호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을 기화로 그들을 기만하여 해를 입힌다면 얼마나 비열하고 점잖지 못한 일이겠는가!

 

Ⅲ. 우리는 다투고 소송하기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30절). 까닭없이 사람과 더불어 다투지 말라. 네가 아무런 명분을 갖지 않은 일로 싸우지 말아라. 우연히 잘못 본 것에 불과한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하여 성내지 말아라. 네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거나 정당성을 밝힐 수 있는 때에 부질없는 불평이나 트집 또는 성가신 소송으로 "네 이웃을 괴롭히지 말아라." 법은 최후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힘이 미치는 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의 이득도 되기 때문이다. 주고 받는 계산이 끝나면 싸워서 득볼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Ⅳ. 우리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번영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31절). 이 경고는 시편 37편에서 매우 많이 강조된 것과 동일하다.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 그가 설사 부유하고 대단하며, 비록 편안히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자기 주위의 모든 자로 하여금 늘 자기를 두렵게 여기도록 한다 하더라도 그를 행복한 자로 생각하지 말며 나도그런 처지에 있어 봤으면 하고 부러워하지 말아라. 그의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그를 본받지 말며 그가 부자가 되기위해 취한 경로를 밟지 말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너도 그렇게 하면 꼭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는 데로 해 볼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죄인들을 부러워할 이유라고는 전혀 없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솔로몬은 이제 본장의 마지막 네 구절에서 죄인의 처지와 성도의 처지를 같이 비교하고 있다(자기 아버지 다윗이 한 것처럼, 시 37편). 그는 하나하나를 대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도가 비록 억눌림을 당하고 있을 망정 얼마나 복된 존재들이며 악인은 비록 압제자이지만 얼마나 불행한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심판을 받기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 앞에 서는 때가 바로 그 때이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판단 하시는 그대로가 심판이며, 세상의 책에 나타나는 것 그대로가 심판이 될 수는 없다.]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자들은 정당하다. 죄인은 다른 자를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라면 죄인이 아무리 번영을 구하더라도 성도는 그를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만큼 복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1. 그것은 죄인들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거나 성도들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32절). 패역한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멀어져 가는 자들이며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심술궂게 반대하는 삶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는 자"들이다. 자기 손수 지으신 그 어떤 것도 미워하시지 않는 그 분이지만 이와 같이 스스로를 못쓰게 망치는 자들은 증오하신다. 저들은 그가 보시기에 가증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인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교제를 가지신다. 이 교제는 세상에게는 비밀이며 그들은 나그네가 간섭할 수 없는 기쁨을 이 교제에서 얻는다. 그는 자기 사랑의 은밀한 증거를 의인들에게 전달하신다. 그의 언약이 그들과 함께 있다. 그들은 그의 마음을 알며 그의 섭리의 의미도 의도를 딴 사람들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나의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서 숨기겠느냐?"

 

2. 죄인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으니 곧 그들과 그들의 집이다. 그의 저주 아래 있다. 반면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으니 곧 그들과 그들의 거소가 다그의 축복 하에 있다(33절). 악인이 가진 집은 아마 강하고 으리으리할 것이지만 "여호와의 저주"가 그 위에 있고 "그 안"에 있어서 그 가정의 일이 잘 되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축복이 저주가 된다(말 2:2). 몸은 아주 비대하게 살이 쪄 있을 때에도 "영혼은 파리하게 하신다(시 106:15). 저주는 말 없이, 천천히 역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둥병이 좀먹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저주는 "그 집의 나무와 그 집의 돌"을 아울러 소멸시킬 것이다(슥 5:4; 합 2:11). 의로운 자도 처소가 있다. 즉 초라한 오두막집(이 단어는 양우리에 대해 사용하는 말임)으로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집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을 축복하신다. 그는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까지 줄곧 그 집을 축복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저주나 축복은 그 집에 사는 자가 악하냐 경건하냐에 따라 그 집에 임한다. 그리고 비록 가난하지만 축복받은 가정이라면 저주받은 가정을 부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다.

 

3. 하나님은 죄인을 경멸하시나 성도들에게는 경의를 표하신다(34절).

(1) 자기 스스로 높이는 자들은 낮아질 것이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들을 비웃으신다." 종교의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비웃고 하나님의 멍에 데기를 냉소하며 그의 은혜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하고 경건함과 경건한 백성을 조롱하며, 그들을 골리는 일이나 들춰 내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는 교만한 자들, 바로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냉소하실 것이며 온 세상 앞에서 그들을 멸시받게 하실 것이다. 그는 저희의 무능한 악의를 업신여기시며 "하늘에 앉아 저희를 보고 웃으신다"(시 2:4). 그는 그들에게 보응하시며(시 18:26), "교만한 자를 거스리신다."

 

(2) 스스로 겸손한 자들은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때문이다. 그는 그들 안에 은혜를 역사시키셔서 그들로 존귀케 하시며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께 기뻐 받으시는 바가되고 사람들 앞에서 시인을 얻는다." 거만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을 끈기있게 참는 자들은 하나님과 모든 선한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거만한 자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들의 행위(혹은 길)를 좇겠는가!

 

4. 죄인들의 종말은 영원한 치욕이 될 것이나 성도의 종말은 끝없는 영광이 될 것이다(35절).

(1) 성도들은 지혜있는 자들이며 스스로 지혜롭게 행동한다. 저희 신앙 생활 때문에 미미하게 파묻혀 지내며, 또 저희 신앙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만 그들은 끝내 틀림없이 영광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들이 받는 영광은 너무나 지극한 것이며 영원한 비중을 갖는다. 그들은 그 영광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니 그것은 가장 달콤하고도 확실한 향유(享有)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34절). 그러므로 저들은 영광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 즉 은혜는 영광인 까닭이다(고후 3:18). 은혜는 영광의 시작이요 영광의 모형이다(시 84:11)

 

(2) 죄인들은 우매자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치욕을 준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있기라도 한 양 영광에 대한 전망으로 우쭐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증명할 것이다.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그들이 영달을 누리게 되는 대신 치욕을 당하게 됨으로써 그들의 벌은 더욱 더 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원한 당황을 기뻐하실 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항상 바라지 않으면 안 될 모든 현달이 될 것이다.


 

잠언 4장

 

부모의 훈계(잠언 4:1-13)

Ⅰ. 솔로몬이 자기 자녀들에게 와서 자기 교훈을 받으라고 하는 초래. "너희,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1, 2절). 즉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나의 타인들의 사용을 위해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맨 먼저 나의 친 소생들이 그 훈계를 받으며 그 말씀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겠다."

 

위정자나 목회자는 보다 많은 사회 대중의 지도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정을 잘 교육시키는 데에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저희의 공적인 업무도 결코 이 의무에 대한 발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이 일이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이 자선은 가정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자기 자녀를 아주 근엄하게 순복시키지 않고 그들의 선도에 수고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미땅히 해야 할 자기의 의무를 수행할 것인가?(딤전 3:4, 5) 지혜나 공익성으로 저명한 인사들의 자녀를 그런 부모를 둔 관계로 얻는 잇점에 비례하여 지식이나 은혜의 증진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녀들의 교욱에 으레 수반되는 희망이나 기대에 자녀가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 그 부모의 명예나 위로 같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조차도 가장 지혜로운 자나 가장 훌륭한 사람 축에 전혀 끼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함직한 것은 정작 솔로몬의 잠언이 헌신한 것처럼 보이는 솔로몬의 친아들보다는 수 천의 사람들이 더 많은 유익을 그의 잠언에서 받았다는 사실이다.

 

2. 모든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어리고 젊을 때 지식과 은혜를 구비하기 위해 고심참다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 때가 저희의 학습시기이며 그때에 그들의 사상이 형성되고 무르익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자녀들아" 하지 않고 "너희 자녀들아(혹은 아들들아)"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가졌던 단 하나의 아들에 대해 읽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면)그는 선뜻 교장 선생님을 자처하면서 기꺼이 타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려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시기가 성공할 수 있는 가망이 극히 높은 나이인 때문이다. 가지는 어리고 연할 때에 잘 휘는 것이다.

 

3. 교훈 받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성인들일지라도 어린 아이의 기질을 가지고 나오게 하라. 모든 편견은 접어 두고 마음은 백지처럼 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공손하고 유순하며 수줍어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이 말씀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도록 하라. 아버지의 말씀에는 위엄과 사랑이 실려 있는 법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대상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고 축복을 기대하는 대상도 우리 영들의 아버지되신 그분이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아버지께 복종함이 마땅하다.

우리는 선생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행복을 구하는 아버지처럼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 훈계 속에 책망과 징계가 들어 있더라도(훈계라는 단어 자체의 뜻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1) 이것을 우리에게 권장하기 위해서 이것이 "아비의 훈계"일 뿐만 아니라 "명철"이기도 하다는 말씀을 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지적 동물이라면 그것을 환영해야 마땅하다. 종교는 자기 나름의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공명한 이성의 추리에 의거하여 그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법(2절)이며 그 법은 도리어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명백한 진리의 원리 "선한 도리"를 기초로 하고 세워져 있다. 이 선한 도리는 신실할 뿐만 아니라 전부 받아들일 만한 가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도리를 인정한다면 그 법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2) 그 도리를 우리 안에 단단히 죄어 넣기 위해 그것을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열성을 다해 주의를 기울이며 온전히 알기 위해 애쓰라고 지시해 주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교훈을 행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또 그 도리를 부인하거나 그 법에 순종치 아니함으로써 그것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Ⅱ. 그가 자녀들에게 주는 훈계.

1. 그는 어떻게 이 훈계들을 입수하게 되었는가? 그는 자기 부모에게서 이 훈계를 받았다. 그래서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가르쳐 준 꼭 같은 사실을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다(3,4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의 부모는 그를 사랑하였고 따라서 그를 가르쳤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느니라." 다윗에게는 아들이 많았으나 솔로몬은 이삭이 그렇게 불리우듯(창 17:19) 정녕 그의 아들이었고 더욱이 이삭의 아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듯 솔로몬의 아비 다윗에게도 언약이 체결되었던 때문이다.

 

그는 그의 부와 다윗의 애자였으면 딴 어느 자녀보다 총애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특별하신 친절을 베푸셨고(선지자는 그를 "여디디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신 때문이라, 삼하 12:25), 그 이유로 해서 다윗도 그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었으니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었던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모가 여러 자녀 중 한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겨우, 하나님께서 그리하신다는 사실이 뚜렷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부모가 다 같이 사랑할 때 이와 같이 구별할 만한 명백한 이유가 확실히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부모들이 자기들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살펴 보자. 그들은 그를 가르쳤고 자기 책을 붙들고 있게 하였으며 엄한 규율에 그를 붙들어 매놓았다. 그가 비록 왕자였고 왕세자로 책봉된 자였지만, 그 부모는 그를 마음대로 매이지 않은 생활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그와 같이 훈육을 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아도니야에게서 지나친 방종이 미치는 나쁜 결과를 보았기 때문에 아마 솔로몬을 교육시킴에 있어 보다 엄격한 쪽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압살롬의 경우에서처럼 아도니야에게도 "무슨 일에서나 그를 가로 막은"적이 없었던 것이다(왕상 1:6).

 

(2) 그는 자기 부모가 가르쳐 준 것을 남에게 가르치고 있다.

[1] 장성한 솔로몬은 어릴 때 자기 부모가 가르쳐 주었던 선한 교훈을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그는 그 교훈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토록 그들이 미친 감명은 깊이 박혀 있었다. 그는 그 교훈들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교훈에 대해 그토록 높은 가치를 두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 임금이 되었다 하여 그 교훈들이 자기에게 불명예라도 되는 듯이 버려야 할 유치한 것이나 천한 일로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을 어찌 되풀이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부모의 엄한 교훈과 억제를 벗어나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부모의 교훈을 조롱하며, 그것들을 자기 친구들을 즐겁게 만드는 농담거리로 삼는 일부 못된 자녀들도 있는 것이다.

 

[2] 비록 그 자신이 현인이었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의 말을 인용하고 말을 이용하는 것을 자기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에서 잘 배우며 잘 가르치려고 하는 자들은 선배들의 지식과 언어를 보잘 것 없다는 듯이 멸시하려고 새로 찾아낸 개념이나 새로 만든 용어들은 즐겨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선한 옛 길을 고수해야 한다고 하면서 왜 선한 옛 말씀을 비웃어야 한단 말인가?(렘 6:16)

 

[3] 자기 부모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던 솔로몬은 따라서 자기 자신의 자녀에게도 훌륭한 교육, 즉 자기 부모가 베풀어 준 것과 꼭 같은 교육을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가정에서 경건을 보이기까지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부모의 노고에 보답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다(딤전 5:4).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가 배워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선한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시 78:6). 만약 우리가 이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탁(信託)에 부실한 셈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교훈과 율법은 "우리 뒤에 올" 자들에게 순전하고 온건히 전달하란 부탁과 함께 신성하게도 우리 손에 위탁된 것이기 때문이다(딤후 2:2).

 

[4] 솔로몬은 자기 당대에 모든 점으로 유명한 인물이던 아버지 다윗의 권위를 빌어서 자기 권면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시대마다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은 종교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실천에 극히 열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 그것을 전파하는 데에도 극히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배운 일에 거하고 있어야"하며 뉘게서 배운 것을 알아야"한다(딤후 3:14).

 

2. 이 훈계들은 무엇이었는가?(4-13절)

(1) 교훈과 권면의 수단. 다윗은 자기 아들의 교육에 있어서 비록 솔로몬이 비상한 재질과 총명을 소유한 아이였지만 자기가 매우 열심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가 한 말로 자기 아들을 더욱 감동시키기 위하여 아주 온화하게 간곡히 말하였으며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너는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칠지니라"(신 6:7). 다윗은 공무로 분망한 사람이었고 자기 아들을 위한 개인 교사들을 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의 교육에 이처럼 친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1] 다윗은 성서와 자기의 교리 문답집을 방편으로써 그에게 권장하고 있다.

즉 그것은 자기 아버지의 "말씀"(4절)이고 "그의 입의 말"이며(5절) "그의 말"(10절)이고 그가 자기에게 가르쳐 준 모든 교훈이다. 특히 그는 시편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은데 시편 중 다수는 "마스길"(Maschil) 즉 "교훈의 노래"였고 그 중 두 편은 특별히 "솔로몬을 위한" 것이라고 칭하여진다. 솔로몬은 이들과 그 외 다른 모든 말씀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째, 그는 "그 말씀들을 듣고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10절). 그는 부지런히 경청하며"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듯"(히 6:7) 그들을 흡수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그와 같이 미리 말하여 두신다.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둘째, 그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한 "완전한 형태의 말씀을 꽉 붙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4절). 내 말을 네 마음 속에 감추지 않고, 네 의지와 사랑 안에 넣어 두지 않는다면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그는 그 말씀에 의하여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명령을 지키라. 그 명령에 순종하라." 그것이 그들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게 되는 비결이다(요 7:17).

넷째, 그는 그 말씀에 충실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말씀이 네게 너무 큰 방해가 될까하여 "내 입의 말을 어기지 말고"(5절) 네가 잡은 것을 놓지 않고 계속 유지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훈계를 굳게 잡아라"(13절). 좋은 교육을 받는 자들은 설령 자기들이 받은 교육을 떨쳐 버리려고 무진애를 쓰더라도 그것이 아주 오랫동안 자기들에게 베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다.

 

[2] 그는 솔로몬에게 이런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지혜와 명철을 달성 목표로 삼으라고 권면을 하고 있다. "지혜"를 얻으라. "지혜"중에서도 "제일가는 지혜"를 얻으라. Quod caput est sapientioeeam acquire sapientiam-즉 지혜의 나뭇가지 중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지혜의 가지를 꼭 유의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 대한 경외"인 것이다(잠 1:17).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올라가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며 곰을 잡으려면 그 심장을 겨누어야 한다. 경건한 신앙의 원리는 마음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첫째, 이 "지혜,"이 "명철"을 얻으라(5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7절). 기도로 그것을 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고심 참담하며,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지정된 모든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하라. 지혜의 문 곁에서 기다리라(잠 8:34). 네가 타락하는 것을 저지하라. 그것은 네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원리와 지혜의 습관을 소유하라. 경험으로 지혜를 얻으며 무릇 네가 얻을 모든 것보다 지혜를 얻으라. 이 세상 부귀를 얻는 일보다 이 지혜를 얻는 데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며 보다 수고하라. 네가 무엇을 잊어버리든지 간에 이것만은 가지고 있으라. 그것을 큰 성공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그것을 추구하라." 참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얻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에가서 "우리 힘과 우리 손의 힘이 우리로 이 재산을 얻게 하였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그것을 잊지 말며(5절), "버리지 말며"(6절)", "놓치지 말고 지키라(13절)." 이 지혜를 얻은 자는 다시 어리석음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그것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참으로 좋은 짝이요 재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치 그것을 맨 먼저 잊어버리고 자기들 마음에서 빠져 나가게 하며,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버리고 그 선한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자들처럼 그것을 내던져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준 그 좋은 것을 간직해야 하며 부주의로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강제로 빼앗기게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며 스스로 감언이설에 속아 그것에게서 나와서도 안 된다. 그와 같은 보석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세상 사람들이 저희 재물을 사랑하며 저희 마음을 물질에 두는 것처럼 "지혜를 사랑하며"(6절), l"그것을 품어라"(8절). 경건한 신앙은 우리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이 되어야 하며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도어야 한다. 우리가 위대한 지혜의 교사까지는 못된다 할지라도 지혜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라도 되자. 우리가 은혜를 얼마나 얻든지 간에 지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자답게 그 지혜를 성실한 애정으로 품도록 하자.

 

넷째, 그를 높이라(8절). 참 종교에 대해서 언제나 높이 우러러 보는 생각을 견지하라. 경건한 신앙에 대해 말할 때는 존중과 경의로써 하고 그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네 종교의 명예를 유지하라.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라. 그것은 율법을 확대하는 것이며 존귀케 하는 것이다. 그 목적에 부응할 수 있도록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라. 지혜의 자녀들은 지혜를 의롭게 여겨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찬미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 앞서 이 지혜를 더 좋아해야 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낮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존귀한 자로 대접하고 "가난한 지혜자"를 존중하는 일 가운데에서 우리는 지혜를 높이도록 하자.

 

(2) 이처럼 지혜를 얻기 위해 수고하며, 또 그 지혜의 안내에 복종하게 하는 동기와 유도.

이에 대해 다음 사실을 참작하자.

[1] 지혜는 인생살이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며 이 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돌아봐야 할 주된 관심사이다. "지혜가 제일이다"(7절). 우리가 얻으려고 애쓰고 지키려고 애쓰는 딴일들은 이것에다 대면 아무 것도 아니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분"이다(전 12:13). 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해 주고 영혼을 아름답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능히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얼마쯤 선한 목적에 따라 살게 하여 마침내는 천국에 이르도록 해 준다. 이것이 제일이 아니고 무엇이냐!

 

[2] 지혜는 제 나름대로 이성과 정당성을 가진다(11절).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느니라." 그래서 결국 그것은 네게 발견될 것이다. 내가 너를 인도하였다. 나는 지혜라는 보호색하에서 그릇된 일을 행하는 세상적 권모술수의 구부러진 길로 너를 인도한 게 아니라 영원한 규칙에 합당하고 선악의 판단력에 일치되는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정직하신 속성은 모든 하나님의 법의 정직성 속에 나타나 있다.

다윗은 좋은 교훈으로 자기 아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좋은 본보기를 보이고 일반적인 훈계를 개별적 사례에 적용시켜 가면서 그를 인도하였다. 그래서 다윗 편에서 볼 때는 그를 지혜롭게 만들기에 부족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3] 그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할 것이었다. "만약 네가 지혜롭고 선하다면 너는 네 자신을 위해서도 지혜롭고 선하게 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네 생명이 될 것이며 네 위로, 네 행복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그것 없이는 살수 없는 그런 것이다.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4절). .우리의 구주께서도 이것과 일치되는 말씀을 하셨다. 즉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우리가 경건해지도록 요구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의 고통, 영원한 죽음 위에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10절). 이 세상의 네 연수는 무한하신 지혜자의 눈에 적당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길 것이며, 저 세상에서는 네가 그 햇수를 셈할 수 없을 정도의 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 드는 비용이 얼마이든지 간에 이것을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13절). 너의 모든 만족도 이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지혜와 은혜가 없는 영혼은 죽은 영혼과 다름없다.

 

둘째, "그것은 이 광야을 통과하는 여행길에서 모든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지켜 주는 너의 호위요 안내자이며, 네 방어자요 인도자가 될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를 고수하라. 그리하면 지혜가 너를 보호하며 지켜 주리라(6절). 지혜가 너를 죄로부터, 가장 나쁜 악으로부터, 가장 악한 원수들에게서 보호하며 지켜 줄 것이다. 지혜는 네가 다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외에 어떤 누구도 너를 해칠 수 없다." "상점을 지켜라. 그러면 상점이 너를 지켜 주리라"는 속담처럼 "네 지혜를 지켜라. 그리하면 네 지혜가 너를 지켜 주리라."

 

지혜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무를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를 곤란과 장애물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12절).

1. 우리는 다닐 때에 우리 걸음이 곤란하지 않게 되고, 다윗이 빠졌던 그런 궁지(삼하 24:14)에 들어가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은 자유로이 다닐 것이며 자기들 스스로 편안할 것이다.

2. 우리가 달릴 때도 우리 발이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결단을 요구당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들이 의지하고 다니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 있는 규칙이 그들을 지키셔서 그들이 해로운 어떤 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성실과 정직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셋째, "그것은 네 명예와 명성이 될 것이다(8절). 지혜를 높이라(단지 너는 지혜의 높아짐에 호의만 보여라). 그리하면 지혜는 네 봉사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풍족하게 보상해 줄 것이다.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솔로몬은 왕이 될 몸이었지만 그의 지혜와 미덕은 왕관이나 곤룡포보다 그의 명예를 더욱 높일 것이었다. 그의 모든 이웃 사람이 그를 그토록 존경한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그와 다윗의 치세 하에서는 아마 틀림 없이 지혜롭고 선한 자들의 출세가 아주 순조로왔을 것이다. 종교는 충심으로 "자기를 품는" 모든 자들을 이르든 늦든 간에 모두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존재가 되고 모든 현자들에게 존경받게 될 것이며, 저 큰 날에 인정받고 영원한 영광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는 다음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9절). "그가 이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관(혹은 장식물)을 네 머리에 두겠고, 너를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에 다 같이 드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저 딴 세상에서는 그가 아름다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 면류관은 결코 흔들릴 위험도 없을 것이며 결코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신앙에 부수되는 진정한 명예인 것이다. Noibilitas sola est atque unica virtus-즉 미덕은 유일한 귀족이다. 다윗이 이처럼 지혜를 자기 아들에게 권장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라고 하셨을 때 그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지혜롭고 분별있는 마음을 주소서"라고 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못 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바 좋은 교육을 우리 기도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악인의 길에 대한 경고(잠언 4:14-19)

다윗이 솔로몬에게 준 교훈은 4절에서 시작되는데 혹자는 이것이 이 4장 끝까지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9장 끝까지 계속된다고 본다. 그러나 더 앞에서는 아니더라도 솔로몬이 여기서 다시 자기 말을 잊고 있다는 견해가 한층 타당할 것 같다. 그는 자기 아버지 훈계를 빌어 우리에게 지혜의 길로 행하라는 권면을 하였는데, 이 성귀에서는 악인의 길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1. 우리는 죄의 길을 조심해야 하며 피해야 하며, 죄악과 닮았다고 생각되고 죄의 길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피해야 한다.

2. 이를 위해서 우리는 죄인의 길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며 죄인과 교제하지 말아야 된다. 사악한 행로에 빠지게 될 것을 염려하여 사악한 교우를 회피해야 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Ⅰ. 경고 그 자체(14, 15절).

1. 죄악에 빠지고 죄인과의 교제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라."

우리의 선생은 앞에서 신실한 안내자 같이 우리에게 "정직한 첩경"(11절)을 가르쳐 주었는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자칫하면 빠져 들어갈 곁길에 대해 경고를 해 주고 있다.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잘 교욱을 받고 그 길에서 훈련을 쌓은 자들은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곁길로 엇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길에 들어가 보지도 말아야 하며, 그 길을 시험해보려고 들어가보는 일조차 금해야 한다.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험으로 판명될 것이며 한번 들어갔다 하면 안전하게 후퇴하기 어려운 걸음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전염병에 감염된 무리들한테 들어가 보는 모험을 하지 말아라. 설사 해독제로써 네 자신이 안전히 지켜진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런 모험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

 

2. 어느 때고 간에 설사 꾐에 빠져 악한 길에 들어서게 되더라도 우리는 재빨리 거기서 뛰쳐 나와야한다.

"설령 그 문이 넓어 네가 부지중에 발을 들여 놓게 되더라도 너는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니라. 네 잘못을 깨닫게 되는 순간 즉시 물러나라. 틀림 없이 파멸로 이끄는 그 길에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말며 일 분 일 초도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말아라."

 

3. 우리는 죄의 길과 죄인의 길을 두려워하고 혐오해야 하며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려 그들을 타기해야 한다.

"악인의 길은 즐겁고 사교적인 길인 것처럼 보일런지도 모른다. 그 길은 또 우리가 의중에 두고 있는 어떤 세속적인 목적의 추구에 가장 첩경인 것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악한 길이며, 그 끝이 악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네 하나님과 네 영혼을 사랑하거든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라. 그렇게 해야 너는 그 길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네가 그 길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 돌이켜 떠나가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라." 이러한 표현 양식은 우리가 빠져 있는 절박한 위험과 우리에게 대한 이 경고의 필요성과 중대성을 암시해 주며 우리에게 경각심을 촉구하는 우리의 파숫군이 얼마나 열심히 경고하고 있는 지를,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지를 나타내 준다. 또 마찬가지로 본문의 표현은 우리가 죄와 죄인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어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한다. 멀면 멀수록 더욱 좋다. "이만큼 떨어져 있으면 충분하겠지"하고 생각하지 말아라. "네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라. 네 뒤를 돌아다보지 말아라."

 

Ⅱ. 이 경고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

1. "네가 그 길을 피하라고 경고받은 자들의 특성을 고찰해보라."

그들은 심술궂은 자들이다(16, 17절). 그들은 자기들의 길에 서 있는 자들에게 어떤 해를 끼칠까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를 입히는 것이 저희의 본업이요 기쁨이 된다. 그들은 화 자체를 위해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뜨리고 몸과 영혼을 다멸망시키기 위해 부단히 계획하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본성 안에는 악과 악의가 공존하며 그들의 모든 행동에는 폭력이 있다. 그들은 극도로 원한에 차 있다. 그들이 왜 이렇게 악의로 가득차 있는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해치는 일은 그들의 잠요 휴식이다. 탐욕에 가득찬 인간이 돈을 얻었을 때나 야심에 불타는 인간이 승진을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선량한 사람이 선을 행하였을 때 얻는 만족감과 같은 정도의 만족을, 악인은 해롭고 심술궂은 일을 말하거나 행동하였을 때 느낀다. 모르드개가 교수형을 받지 않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즐겁지 않았던 하만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시기심과 복수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때에는 아주 불안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들이 악한 일의 추구에서 얼마나 부단히 애쓰며 지칠 줄 모르는가를 암시해 준다. 그들은 남을 골려주는 즐거움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잠을 포기하려 할 것이다.

 

(2) 해를 끼치는 일은 그들의 양식이요 음료이다. 그들은 행악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즐긴다. "그들은 불의의 떡을 먹으며"("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도다." 시 14:4) "강포의 술을 마시고"(17절)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도다"(욥 15:16).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전부가 늑탈과 압제로 얻는 것이다. 악인들은 자기들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시간을 손해 본 것으로 생각한다. 선한 사람들은 이에 못지 않게 선을 행하는 일을 자기 본분과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 amici, diem perdidi-즉 친구들이여, 나는 하루를 잃었노라. 지혜로우며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모든 자는 악인과의 교제를 피하여야 한다.

 

[1] 악인과의 교제는 매우 추문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 중, 누구에게나 화를 입히기 좋아하고 성가시게 하기를 취미로 삼으로 남을 해치거나 파멸시키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 심사보다 더 치욕스러운 성벽은 없으며, 그것은 또 인류 사회의 최대의 적이며 하나님과 양심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 대담한 도전은 없는 것이다. 이런 마음보는 그안에 마귀의 형상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악인의 이익에 보다 더 쓸모가 있다.

 

[2] 악인과의 교제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네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거든 행악을 즐기는 자들을 피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우호를 표방하더라도 언젠가는 네게 화를 입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그들과 야합한다면 네 스스로 파멸할 것이며(잠 1:18) 네가 그들과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너를 파멸시키려들 것이다."

 

2. "네게 피하라고 경고된 바 있는 악한 길 그 자체의 특성을 고찰하고, 네게 걸어 들어오라고 초대한 의로운 길과 비교해 보라."

(1) 의의 길은 광명이다(18절). 정직한 자들이 택하여 걷고 있는 "의인의 길은 햇볕과 같느니라" "그들의 길에는 빛이 비친다"(욥 22:28). 그리고 광명은 저희 길을 안전하고 즐겁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길"이요 "빛"이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것은 "저희 발의 등불"이다. 그들 스스로도 "주 안에서 빛"이 되며 "주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에서 행한다."

 

[1] 그것은 "비춰 주는 빛"(혹은 돋는 햇볕)이다. 저희 길은 그 길 자체의 기쁨과 위로로 그들에게 빛을 비춰 준다. 그 길은 광채와 명예로 딴 사람들 앞에서 빛난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빛이 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으로 의로운 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게 된다"(마 5:16). 그들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자들처럼, 거룩한 안보하심과 마음의 평정으로써 자기들의 길로 계속 행한다. 그 길은 새벽 빛 같아서 "흑암 중으로부터 빛이 나와 어두운 일"에 종언을 고하게 한다(사 58:8, 10)

 

[2] 그것은 점증하는 빛이다.

그것은 "점점 더 빛나느니라." 그 빛은 곧 사라져 버리는 유성의 빛, 혹은 타다가 침침해지고 꺼져 버리는 촛불의 빛과 같지 아니하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아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빛나며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빛을 낸다. 이 의로운 길의 안내자 되신 은혜도 점증한다. "그 손이 청결한 자는 더욱 더 강하여지리라." 이 길의 즐거움이 되는 기쁨과 이 길의 밝음이 되는 존귀와 참 빛이 되는 행복은 여전히 계속 증가할 것이다."

 

[3] 그것은 결국 "원만한 광명"(완전한 낮이란 의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새벽 빛은 마침내 한 낮의 빛이 될 것이니 빛을 받은 영혼이 향해 나아가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성도들은 천국에 가기까지는 완전하지 못 할 것이지만 거기에서는 그들이 자기의 강함으로 돌아오는 때의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그들의 은혜와 기쁨은 전부가 다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을 고수하는 것이 곧 우리의 지혜로움이다.

(2) 죄악의 "길은 어둠같느니라"(19절).

 

그가 우리에게 사귀지 말라고 경고한 일은 "어둠의 일"이다. 악행하는 일로 얻는 즐거움과 만족 외에는 달리 아무런 즐거움이나 만족을 모르는 자들이 도대체 어떤 참 즐거움과 만족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던져버리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안내자란 무엇인가? "악인의 길은 어둡고," 따라서 위험하다. 때문에 그들은 실족하며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에 거쳐 넘어지는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죄악에 빠져 들면서도 자기들이 정복당한 시험이 어느 길로 왔는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다음 번에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 그들은 환란 속에 빠져들지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기들과 다투시는가를 물어보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으며,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시 82:5; 욥 18:5, 6).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피하라고 지시하는 길인 것이다.


선을 행하는 길(잠언 4:20-27)

앞에서 솔로몬은 악을 행치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어떻게 하면 훌륭히 행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범죄하게 되는 기회를 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의무 수행의 방도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 말씀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지혜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를 규제하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 또 지혜의 말씀은 우리에게 의무와 위험을 경고해 주는 우리의 권고자가 되어야 한다.

 

(1)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을 신속히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20절). 겸손히 그 말씀에 복종하며 부지런히 그것을 청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는다는 것은 마음에 은혜의 역사와 시작됨을 알리는 좋은 징조이며 또한 은혜를 가져오는 좋은 수단이다. 말씀을 알고 싶어하는 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의무를 행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2) 우리는 그 말씀을 조심스러이 보유해야 한다(21절).

우리는 그것을 규칙으로써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라. 그것을 관찰하고 검토하여 무슨 일에서든지 그것에 맞추어라."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 기거하도록 하며 하나의 지배 원리로 삼아서 그 영향력이 온 몸에 퍼지게 해야 한다. "네게 소중한 것인 양, 그리고 네가 잃어버릴까 하여 두려워하는 물건처럼 그것을 네 마음 속에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어 그 기록이 계속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2. 우리가 이처럼 지혜의 말씀을 중시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생명 나무"처럼 우리에게 음식이 되고 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계 22:2; 겔 47:12). 그것을 구하여 찾으며, 찾아서 지키는 자들은 그 안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음식.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됨이니라"(22절).

영적 생명이 지혜의 도구인 말씀으로 시작되었듯이 바로 동일한 그 말씀에 의해 그 생명은 양육되며 계속 부양된다. 우리는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으며, 믿음으로써 그 말씀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2) 약. 그것은 "저희 온 육체에 건강"이 된다. 즉 그것은 몸과 영혼을 포함한 전인(全人)에게 건강이 된다. 그것은 영과육을 아울러 좋은 상태로 유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모든 육체에 건강"이 된다(70인역은 그렇게 되어 있다). 말씀에는 이 병든 세상의 모든 질환을 치료하기에 충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저희 온 몸에 약"이 된다(이 말씀의 의미는 그렇다). 그것은 육신이라고 불리우는 저희를 썩게 하는 모든 것에 약이 된다. 또 말씀은 육에 가시 같은 저희의 모든 고통에도 약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영적인 모든 질병에 적절한 약이 있는 것이다.

 

Ⅱ. 우리는 우리 속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경계의 시선과 엄중한 손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23절).

 

1. 지혜를 얻고 보존하도록 하기 위해 지혜의 법이 요구하는 큰 의무가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우리에게 이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에 대해 우리에게 엄한 당부를 하셨다. 즉 남자나 여자나 "네 마음을 지키라. 네 심령을 조심하라"(신 4:9). 우리는 자신에 대해 거룩한 질투심을 계속 품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영혼의 모든 통로에 대해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마음을 가해와 피해로부터 지키며 죄로 더렵혀지지 않게, 고통으로 말미암아 동요를 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우리의 보석이나 우리의 포도밭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범죄가 없는 양심을 견지하며 악한 생각을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막아라. 선한 생각을 유지하라. 적당한 범위 안에서 정당한 대상에게 대한 애정을 품어라.

 

"모든 지킴으로써 그들을 지키라"(말 뜻은 그렇다). 사물을 지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즉 조심하거나, 힘으로써 하거나 남의 도움을 요청해서 하는 수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온갖 것을 다 동원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다. 마음은 그토록 부패하기 쉬운 것이다.(렘 17:19). 또는 "무릇6 지킬 만한 모든 것보다"(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라고 해석된다. 우리는 그 외의 어떤 것을 지킬 때보다 더욱 조심하고 부지런히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 눈을 지켜야 하며(욥 31:1) 우리 혀를 지켜야 하며(시 34:13) 우리 발을 지켜야 한다(전 5:1).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런 보살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는" 때문이다. 잘 지켜진 마음에서는 생명의 근원이 유출될 것이며 선한 소산이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타인들에게는 교훈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모든 생명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는 것은 나무를 훌륭하게 기르는 것이며 근원을 고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잘 지키는가 아니면 소홀히 버려두는가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규칙적으로 되든가 불규칙적으로 되든가, 안락한 삶이 되든가 불편한 삶이 되든가 결정될 것이다.

 

Ⅲ. 우리는 혀로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입술의 문앞에 감시"를 세워두지 않으면 안 된다.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24절). 우리 마음은 원래 부패한 것이므로 악한 표현이 쏟아져 나오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악한 말에 대해 큰 두려움과 혐오감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저주, 맹세, 거짓말, 중상모략, 말다툼, 음담패설, 횡설수설 등 "궤휼한 입과 사고한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이름인데, 이들은 이성이나 경건한 신앙의 규제를 받으려 아니하고 오히려 이 양자를 부인한다. 그래서 기형적으로 비뚫어지고 일그러진 입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듯이 이런 말을 하는 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흉하고 추한 것이다. 우리는 악한 못브을 한 모든 말을 삼가고 그런 말을 배울까봐 두려워하면서 혀로 범하는 온갖 모양의 죄를 끊임없이 감시와 확고한 결의로써 "우리에게서 버리지" 않으면 안되며 "우리로부터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Ⅳ. 우리는 우리 눈과 계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앞을 곧게 살필지어다(25절). 네 눈을 고정되게 하며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 따라 다니지 말게 하라. 그렇게 될 때에는 네 눈이 선으로부터 벗어나 악의 유혹에 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헛된 것을 바라보는 일로부터 네 눈을 돌리라. 네 눈은 하나가 되게 하며 나뉘지 않게 하라. 네 뜻을 성실하고 균일하게 잡아 어떤 부수적 목적을 곁눈질 하지 말게 하라." 우리는 우리 주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그에게 우리 자신의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시선을 우리의 목표 곧 "높은 데서 부르시는 상"에 못박고 우리의 눈을 전부 그쪽으로 향하자. oculum in metam-즉 눈은 목표에!

 

Ⅴ.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에서 사려깊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26절).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헤아리며 그 길을 달아 보라(단어의 의미는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 한 쪽에 얹고 네가 행한 일이나 행하려고 하는 일을 다른 한 쪽에 얹어서 그 두 쪽이 평형을 이루는지 살펴 보아라. 네 길이 여호와 앞에서 선한지의 여부와 그 끝이 좋을런지의 여부를 검사함에 있어 한 눈금이라도 따지고 한치라도 관용하지 말라."

 

우리는 과거에 지나온 길을 살펴야 하며 우리가 행한 일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길, 즉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근신하여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길의 의무가 무엇이며 어려운 점들은 무엇이고 유리한 점은 무엇이며 위험은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일이든지 경솔히 행하지 말라."

 

Ⅵ. 우리는 견실성과 경각심, 그리고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26절).

그리하여 그길 안에서 두마음을 품은 사람처럼 불안정하지 않도록 하라. 두 길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니 서 있지 말고 평탄하고도 일관성 있는 순종의 길로 나아가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27절). 이 양편에는 다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사탄이 어느쪽 길이든 한 쪽으로 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자기 목적을 이루는 셈이 된다.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라. 극단을 삼가라.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이 있기 때문이다. 네 눈을 바로 보라. 이는 너로 하여금 중용의 도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준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슬기 있는 자로 입증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메튜헨리 주석

잠언 8장

 

음란에 대한 경고(잠언 7:24-27)

우리는 여기에서 앞에 나온 이야기의 해설을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듣고 그런 유혹자의 말은 듣지 말라(24절). 아비에게 귀를 기울이고 원수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1. "좋은 교훈을 네게 베풀거든 그것을 취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지어다(25절). 음녀의 길이 비록 푸르르고 넓어 많은 사람이 그리고 몰려든다고 할지라도 너는 가지 말며 미덕의 길이 험난하고 좁으며 가는 이가 없는 오르막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에서 떠나지 말라. 네 발을 음녀의 길에서 금할 뿐만 아니라 네 마음조차 그리로 치우치지 말지니라. 그 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품지 말며 이같은 악한 해우이에 네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인하여 감각적 욕망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라. 네가 음녀의 길로, 또는 이 죄에 이르는 그 어떤 길로든 간다면 너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며, 바르고 안전한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한없이 방황하지 않으려거든 "미혹지 말도록 주의하라."

 

2. "정당한 경고를 네게 주거든 그것을 받아들여라."

(1) "뒤를 돌아다 보고 이 죄가 어떤 화를 입혔는지 살펴 보라. 음녀는 여기서 한 사람 저기서 한 사람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려지게 하였느니라." 이 죄로 인하여 수 천명이 지금도 화를 입고 있으며 또 영원히 그럴 것이다. 여태껏 나온 얘기의 주인공 같이 약하고 어리석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강한 자들도 "그녀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26절). 아마 그는 이 말씀에서 음해의 죄로 죽음을 당한 삼손을 특히 지목하는 것 같으며, 또 이 죄로 자기 가문에 칼을 불러들인 다윗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 같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록 다윗 자신은 그 칼로 죽지 않도록 멀리 치우시긴 하셨으나, 음행의 결과 유다 왕국에 칼의 환란이 임했던 것이다. 삼손이나 다윗은 굉장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지만 빼어난 지혜와 용기의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육체적 정욕은 그들을 압도했던 것이다. "전나무여, 백향목이 흔들리거든 울부짖어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2) "믿음의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이 죄의 종말이 어떠할 것인가 살펴보라"(27절).

그 여인의 집은 비록 값비싼 침구가 깔려 있고 귀한 가구가 즐비하여 "쾌락의 집"이라 불리지만 그것은 "음부의 길"이다. 그리고 그 여인의 방은 "사망의 방"과 영원한 암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음행의 잔은 곧 떨림의 잔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욕의 불길은 만약 회개와 금욕으로 끄지 않으면 가장 깊은 지옥 불에서 타게 된다. 그러므로 "두려워 떨며 범죄하지 말라."


지혜의 유익함(잠언 8:12-20)

 

여기에서의 지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지혜는 말씀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며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시오,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적 계시의 온전한 영역이며, 말씀이신 하나님이시고 모든 신적 계시의 구심이 된다. 또한 이것은 말씀에 의해 형성된 영혼이요, 영혼 안에 이루어지신 그리스도이시다. 그 순수성과 능력에 있어서 이것은 종교가 된다. 여기에는 이 훌륭한 분, 이 극히 선한 것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일들이 표현되어 있다.

 

Ⅰ.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들에게 훌륭한 두뇌를 제공해 준다(12절).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는다." 이것은 세속의 책략이 아니라(위에서 오는 지혜는 이와 상반된 것이다. 고후 1:12) 참된 분별이어서 처신을 올바로 하도록 지시해 준다. 명철한 자의 지혜는 "그의 길을 깨닫는"것이며,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지시하기에 유익하다." 이것은 뱀의 지혜여서 해로부터 지켜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도록 인도해 준다.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는다." 즉 명철은 경건한 신앙의 산물이며 그 신앙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로 깨닫게 하고 마귀의 궤계를 효과적으로 봉쇄시키며 우리 자신의 세대에 선을 끼치는 데에는, 철학자의 학문이나 정객들의 정략이 여태까지 발견해 낸 것보다 성서의 도움으로 찾아 낸 "묘안"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께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전체 사업이 "비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며, 그 일 안에서 하나님은 "온갖 지혜와 명철로 우리에게 풍성히 주시는" 까닭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저 큰 "발병의 지식을 찾아 내셨고" 그것은 그에게 값비싼 것이었으며, 자기의 보상의 대속물로 주심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의 놀라운 방편이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발견, 발명을 해냈지만 그것은 우리를 파멸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발명을 하신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모든 일 가운데 너무나 잘 배치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명하신 분이야 말로 "명철을 주소로 삼으시는" 분임에 틀림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Ⅱ.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들에게 훌륭한 마음을 준다(13절). 참된 종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에 존재한다. 이것은 앞에서 권장한 지혜로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 준다.

 

1.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며 영혼을 파괴시키는 모든 죄를 미워하라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악한 길(행실)을" 미워하며, 죄를 죄로서 미워하고 따라서 "모든 거짓된 행실"을 미워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외경이 있는 곳에는 오직 악일 수 밖에 없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2. 특히 두 가지 공통되고 위험한 죄, 곧 교만과 격정을 하라는 것. 우리 자신을 뽐내는 "교만과 거만"은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죄이며,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이며 누구나가 다 미워하는 죄이다.

모든 사람은 타인의 교만을 미워하지만 우리의 자신의 자만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패역한 입" 즉 타인들에게 편벽되이 화내는 것은 인류 평화에 큰 원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를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의 종교가 아무리 부당한 비난을 받더라도 우리의 교만과 격정보다 우리 종교에 더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없으며, 우리 종교는 사람을 뽐내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들기는커녕 우리에게 이들을 한 층 더 미워하라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당당히 말하여 우리 종교의 명예가 되도록 하자.

 

Ⅲ. 하나님의 지혜는 공공 업무와 모든 사회를 잘 다스리는 데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나(14절).

하나님 되신 그리스도는 힘과 지혜를 소유하고 계신다. 지혜와 힘은 그의 것이다. 구속주되신 그는 "하나님의 지혜며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는 "능력과 지혜"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 능력과 지혜가 우리를 위해 예비되 있어 우리 의무를 알고 행하게 한다. 그는 놀라운 도략가이고 놀라운 은혜를 주시며, 이 은혜만이 "참 지식"이다. 그는 "명철" 그 자체이시며, 자기 안에서 스스로 능력을 얻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되신다." 참 종교는 인간들의 모든 어려운 문제에서 가장 훌륭한 "도략을 그들에게 제공해 주며 그 길을 평탄하게 하도록 도와 준다. 참 종교가 있는 곳에는 "명철" 있고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우리가 꼭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어 줄 것이며 우리가 봉사하는 데에나 환란을 당하는 데에나 다 부족하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 곳에서는 그것이 사람을 "완전"하게 하며, "온갖 선한 말과 일을 충분히 공급"해 준다.

 

왕이나 주권자나 재판관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와 능력, 도략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그것을 구비해야만 자기들에게 부하(負荷)된 중임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으며 자기들이 다스리는 백성에게 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처리하느니라"고 말하고 있다(15,16절).

 

1. 국민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이다. 그러므로 위정을 맡은 자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그것을 위탁받은 자들이다. "그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한다"는 것은 그의 왕으로서의 직분에게 갈라져 나온 한 부분이다. 그들의 능력은 모두 판단을 위임받고 있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연유한다.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통치하므로 그를 위해 치리해야 마땅할 것이다.

 

2. 옹이나 통치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베풀고 있는 자격이나 권한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그것에 대해 그리스도의 은혜에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그들에게 정사의 영을 주시며, 그들은 그가 부여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어떤 기술이나 정의의 원리도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혹은 판결) 왕이 입술에 있다." 그리고 왕들은 그가 만들어 주시는 말에 복종한다.

 

3. 종교는 통치에 아주 큰 힘이 되며 뒷받침이 된다.

그것은 국민에게 그 의무를 가르쳐 주어 왕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백성을 더욱 쉽게 "치리한다." 그것은 왕에게 그 의무를 가르쳐 주며 따라서 "왕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베풀어야 하는 대로 "치리하게" 된다. 그들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운데 치리하면" 그들은 "공의를 세우게"된다. 참 종교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잘 통치하는 것이다.

 

Ⅳ. 하나님의 지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품에 품는 자들을 복되게, 참으로 복되게 해 줄 것이다.

 

1.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17절)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사랑하는" 자들은 특별히 뛰어난 사랑으로 그에게서 사랑받을 것이다. 즉 그는 "그들을 사랑하실"것이며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2. 그들은 그를 찾는 일에 성공을 거둠으로써 행복하게 될 것이다. "나를 간절히(혹은 일찍이)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나와의 교제를 구하고 내게서 이익을 구하는 자, 나를 일찍이 찾는 자, 즉 나를 간절히 찾고 다른 무엇보다 먼저 나를 찾는 자, 자기 청년의 때에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나를 찾기 시작하는 자, 이러 자들은 자기들이 찾던 대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것이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가 "헛되이 찾으리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다.

 

3. 그들은 이 세상 재물로 행복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무한히 더 좋은 것으로 행복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무한하신 지혜자가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보시는 만큼 많은 재물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18절). 그러한 것은 모두다 "그리스도께"있다. 줄 것은 그가 갖고 계시므로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시는지 않는지의 여부는 그에게 달린 것이다. 경건한 종교는 때때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부자와 위인으로 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며 명성을 누리고 재산을 늘어나게도 한다. 지혜자가 자기의 총아들에게 주시는 부요함에는 다음 두가지 잇점이 있다.

 

[1] 그들은 "재물과 의"라는 점. 이것은 사기나 착취로 얻은 재물이 아니라 정상적 수단으로 정직하게 취득한 것으로서 자비롭게 사용하는 재물이다. 의연금품도 "의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자기 산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물을 소유하게 된 자로서 그 재산을 가지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자는 "재물과 의"를 소유하게 된다.

 

[2] 그들은 "장구한 재물"이라는 점. 헛된 수단으로 벌어들인 재물은 쉽게 없어질 테지만 올바른 수단으로 획득한 재물은 노래 갈 것이며, 손 대대에까지 물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건과 자선의 일에 선하게 사용된 재물은 최선의 흑자로 나타날 것이며 따라서 장구한 재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의 재물로" 산 친구는 "우리가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우리를 영접할 것이기 때문이다(눅 16:9). 이것은 많은 날이 지나면 영원한 날을 위해 그 사실을 옳다는 것을 나타내 줄 것이다.

 

(2) 그들은 설사 이 세상에서 재물과 부귀를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무한히 더 나은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19절). "내 열매는 금보다 나으며 더 수지맞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고 작기는 하지만 더 가치있는 것이 될 것이다.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아서 보다 유리한 장사가 될 것이다."

마지막에 나올 지혜의 산물뿐만 아니라 그 중간에 버는 수입, 즉 그 열매뿐만 아니라 그 소득도 이 세상의 가장 좋은 소유물이나 재산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4. 그들은 현재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선한 길의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20절). 이것은 바로 "금보다 낫고 정금 보다 나은" 지혜의 열매이어서 우리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고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주며 앞장을 서서 그 길로 간다. 그 길은 하나님이 우리가 그의 안에서 행하기를 바라시는 길이요 우리는 바라는 목적지까지 꼭 이르도록 해 주는 길이다. 그것은 "공평한 길 가운데로"로 인도해 주며 우리가 어느편이든 이탈해 나가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Im medio virtus-즉 미덕은 한 가운데 누워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성령에 의하여 믿는 자들을 모든 진리로 안내하시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은 그 "성령을 따라 행한다.

 

5. 그들은 금후에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행복하게 될 것이다(21절).

지혜가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것은 자기 친구들을 의무와 복종의 길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함"이기도 하다. 그 곳간은 이 세상 것이나, 하나님과 천국보다 못한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자는 행복은 실질직이며 만족할 만한 것이다.

 

(1) 그 행복은 본질적이며 본질 그 자체이다(저자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본문 안의 재물이란 원래 본질, 물질, 실질이란 뜻을 포함하는 까닭이다:역주). 이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외적으로 편리한 부수물의 뒷받침 없이도 혼자 서 있는 그런 행복이다. 신령하고 영원한 것들만이 유일한 실상이며 본질적 사물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본질적 기쁨이며 확실하고 기초가 든든한 기쁨이다. 그 기쁨의 담보물은 약속이요, 그 보증인은 그리스도로서 이 양자가 다 본질적인 것이다.

그들은 "재물을 얻는다"(원의는 "본질을 유업으로 받는다"). 즉 이후에 얻을 그들의 상속은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영광이란 무게를 가지는 실체이다. 그것은 저희 산업이다(히 10:34 흠정역에는 본체). 그들은 그들의 모든 행복을 상속자로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2) 그 행복은 만족을 준다.

그것은 저희 손을 가득 채워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곳간도 채워 줄"것이며, 그들을 부양시켜 줄 뿐만 아니라 부자가 되게도 해 줄 것이다. 이 세상 것으로 인간의 배는 채워질 수 있으나(시 17:14) 그 곳간은 채워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재물을 여러 해 동안"거기에 안전히 보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밤"에 그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혼의 곳간은 아무리 크게 지어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는, 또 천국에는 그 곳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풍부한 것이 있다. 신자들은 지혜의 약속 안에 재물을 쌓으며 그 저장 기간은 몇 날이나 몇 해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열매는 "금보다 낫다."

 

 

 

 

지혜의 영원함(잠언 8:21-31)

 

여기서 매우 분명하게 여겨지는 것은 본문 말씀의 주체자가 지성을 가진 신적 인격체라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비단 신성의 본질적 속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지혜는 인격적 속성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적 인격체는 하나님의 아들 이외의 어느 누구일 수도 없으며, 여기서 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주요 사항들이 성서 내의 딴 부분에서는 그의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그자체로써 이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심에 있어 지혜를 수단으로 삼으셨고 그것은 그의 속성 중 한 가지이다.

 

이것은 인간의 것이기도 하다. 만약 솔로몬이 이런 의미로 인간들에게 지혜의 연구를 권장하기 위해 지혜 예찬만을 의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기록한 것을 먼저 지으신 하나님의 성령은, 다윗에게 종종 그렇게 하셨듯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큰 사실을 알려 줄 수 있도록 표현하게 하신다. 모든 신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며 "하나님께서 이들을 그에게 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영원한 계획속에 내정되신 분이다. 이 성귀에 대한 최선의 해설은 요한 복음 서론(1-4절)에 나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하 생략).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그의 품성과 명백한 현존. 그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동질이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위(성자위)를 가지사 "여호와께서 그를 가지셨으며"(22절), 그는 "그에게 세우심을 입고"(23절) "그에게서 났으며"(24,25절) "그의 곁에 있었으니" 이는 그가 "본체의 형상"(히 1:3) 이시기 때문이다.

 

Ⅱ. 그의 영원성. 그는 아버지에게서 났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자기 아들로, 자기를 사랑하는 아들로 "가지셨으며" 그를 품에 품으셨던 까닭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독생자로 났으며" 그나마도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나셨는데 이 점은 본문에서 아주 강조하는 것이다. 말씀은 영원하셔서 세상보다 먼저, 시간의 시작보다 먼저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그 조화의 시작," 곧 자기 계획의 시작 때부터 "그를 가지셨으니" 그 때는 그가 "일하시기 전"이었다.

 

이 조화(혹은 길)는 실로 시작도 없었다.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의도는 그 자신처럼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우리의 언어로 하신다. 지혜가 자신을 "만세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고 설명하고 있다(23절).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서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으로 예정되고 승진되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창조와 구속에서 빛과 생명이 되었다. 그의 존재는 하나님이 "났다"는 사실과 그의 직분에 관한 하나님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가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은 매우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표현과 대동소이하다(시 90:2, 산이 생기기 전에").

 

1. "땅이 생기기 전부터." 땅은 사람이 생기기 전 "태초"에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보다 먼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둘째 아담은 "땅이 생기기 전에" 존재하였으므로 "땅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3:31).

 

2. 바다가 존재하기 전에(24절). 그 때는 아직 물이 모이는 "바다(혹은 깊음)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물이 솟아 나오는 "샘들도 있기 전"이었으며, 눈에 보이는 피조물의 창조를 위해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실 수면도(창 1:2) 없었다.

 

3. 산이 존재하기 전에, 곧 영원 불변하는 산이 있기 전에(25절)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계획을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그에게 묻는다(욥 15:7). 너는 산들이 있기 전에 출생하였느냐? 아니다, "너는 그 때 생기지도 않았느니라." 그러나 "언덕이 생기기 전에" 영원하신 말씀은 "이미 나셨다."

 

4. 이 세상의 거주 지역이 생기기 전에. 이것은 사람들이 경작하고 그 소산을 거두는 곳, 즉 골짜기나 평지에 있는 "밭(들)"을 말한다(26절). 들에게는 산이 벽과 같고 "세상 진토의 가장 높은 부분"이 된다. 그것은 "세상 진토의 근원"(이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이다. 즉 세상의 여러 가지 요소를 구성하는 원자이란 말이다. 또 이말은 세상 진토의 제일 중요하고 으뜸된 것"으로 해독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인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지면의 티끌에서 나왔고 흙에 불과하나 티끌중 제일 주요한 것이며, 생기가 도는 진토요, 극히 정교한 진토인 것이다. 영원하신 말씀은 이간이 생기기 전에 존재하셨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이 그에게 있었던" 까닭이다.

 

 

Ⅲ. 세상을 창조하시는 신의 호라동. 그는 세상이 지음 받기 전에 존재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창조될 때 방관자가 아닌 건축자로서 참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그를 침묵시키시고 겸손케 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느냐?(욥 38:4 이하) 네가 그 거창한 공사의 도목수였던 영원하신 말씀과 지혜이냐? 아니다, 너는 어제 생긴 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여기서 욥고 하신 하나님의 이 대화를 넌지시 가리키면서, 욥은 이 세계 창조의 증인이나 일군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으며 자기가 바로 그 세계 창조의 역사에 종사한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셨느니라"(엡 3:9; 히 1:2; 골 1:16)

 

1. 태초에 창조하시는 첫 날에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한 마디 말씀으로 빛은 생겨났던 것이다. 그 때의 전능하신 말씀이 바로 이 영원하신 지혜이셨던 것이다. "그가" 빛의 근원인 "하늘을 지으실 때 내가 거기 있었노라." 빛이 여기에서는 무엇이든 간에 거기 하늘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2. 그는 둘째 날에도 첫날 못지 않게 활동하셨다. 그는 창조 제2일에 무한한 넓이를 가진 하늘을 펴셨고 그것을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셨으며"(27절) 하늘의 휘장인 그 천개(天蓋)로 사면팔방을 둘러 막으셨다. 혹은 이것은 기술자가 자와 콤파스로 자기 작품을 설계하듯 하나님이 우주의 모든 부분 부분 요소 요소를 짤 때 사용하신 정확한 순서와 방법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작업은 영원하신 마음 안에 형성된 설계도와 일호의 착오도 없는 작품을 만들어 내셨다.

 

3. 그는 제3일에도 일하셨다. "위에 있는 구름을 견고하게 하심"으로 "궁창 위에 있는 물"을 모이게 하셨고, 물을 뿜어내는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심"과(28절) 또 그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심"(29절)으로 궁창 아래 있는 물을 모이게 하셨다. 이것은 이 영원하신 지혜의 존귀를 더욱 많이 나타내는 말씀이다. 이 사례로써 하나님은 자기가 크게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는 것이다(렘 5:22). 즉 "그는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정하사" 물이 계속 물 위에 나타나 있게 하시며 인간의 거소가 되기에 알맞도록 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는 "땅의 기초"도 이와 같이 "정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 구세주가 되기를 충분한 능력을 가지시며 조금도 손색이 없으시니 그는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인 까닭이다.

 

Ⅳ. 아버지가 그에게서, 그가 아버지에게서 얻으시는 무한한 만족감(30절).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혹은 양육받는 아이)가 되었다." 그는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아버지에게서 났고 영원한 계획에 의하여 그와 함께 양육되었는데, 이것은 "아들"에게 대한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을 암시한다. 그러한 아들을 "그의 사랑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골 1:13).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아들이 떠 맡으실 인간의 구속 역사에 관하여 그들 간에 상호 의식과 양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곧 "이 두 분 사이에는." 그 일에 대해 "평화의 의논"이 있으셨던 것이다(슥 6:13). 나는 그가 alumnus patris-즉 아버지의 제자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때가 되면, 즉 때가 차면 해내기로 되어 있던 그 일을 위해 영원 전부터 훈련을 받아왔으며 이로써 아버지의 특별하신 지도와 보호 아래 있는 생도란 말이다.

 

그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사 42:1). 그는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셨고(요 5:19) 그를 기쁘게 하셨으며, 그의 영광을 구하셨고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계명대로 행하셨으니 이 모든 것은 "양육받은 자"로서 행하신 것이다. 그는 "날마다 자기 아버지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 42:1), 또한 "그 앞에서 항상 즐거워하셨다."

 

이 말씀은 다음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복되신 성삼위께서 서로에게 대하여 품는 무한한 기쁨. 여기에 하나님의 품성이 갖는 행복의 대부분이 있다.

 

2. 성부가 성자에게서 얻는 기쁨. 그가 "세상을 만들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활동을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이 만든 모든 것을 보셨고 "그것을 보기에 매우 좋았으며," 그를 즐겁게 하였다.

따라서 그의 아들은 창조의 엿 새 동안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다(출 39:43). 그리고 아들도 또한 "그의 앞에서 전체 창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즐거워하셨다"(시 104:31).

 

3. 인간 구속이란 위대한 사업으로 성삼위가 서로 간에 얻으시는 만족. 아버지는 자기와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된 아들을 기뻐하셨고 그가 제안하는 것도 기뻐하셨으며(마 3:17), 그가 "양을 위해 자기목숨을 버리려고"하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일을 내동댕이치고 달아나거나 실패하지 않고, 완성하리라는 것을 믿으셨다. 아들도 또한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그의 뜻대로 행하기를 기뻐하였고(시 40:8) 그 일에 아주 만족하는 자로서 자기 사업에 열심히 집착하였다. 일의 착수 시기가 왔을 때 그는 "보소서! 나를 가리켜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대로 내가 행하러 가나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일에 대해 어느 때보다 더 큰 만족을 표명하였다.

 

Ⅴ. 그가 인류에게 대하여 품으신 은혜로운 관심(31절).

지혜는 땅의 풍요한 산물이나 그 속에 숨겨 있는 보물을 기뻐하였다기 보다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자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시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고 하시며 특별히 즐거워하시는 것이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속과 구원에서도 그의 기뻐하시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창세 전부터" 그 큰 사업에 "알리신 바" 되었다(벧전 1:20). 인자들 중 남은 자는 그의 은혜를 통하여 영광에 이르도록 그에게 주어졌고, 그는 바로 이들을 기뻐하셨다.

 

그의 교회는 그의 거처할 땅이었으며, 하나님은 그곳에 그를 거주케 하여 반역하였던 자들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거처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손의 앞날을 바라보고 즐거워하였다. 비록 그는 자기 사업의 수행 중 당면하게 될 모든 난국과 또 감당해야 할 봉사와 고난을 예견하였지만, 그 일이 결국 아버지의 영광과 자기에게 주신 바된 인자들의 구원을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 최대의 만족으로 그 일을 고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랄 수 있는 모든 담대함을 얻어 그에게 나아가고 그를 의지하며, 그가 영광스러운 거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의도하신 모든 은혜를 얻게 된다.


지혜의 훈계(잠언 8:32-36)

여기에는 지혜의 말씀이 나오고 있다. 그 담화의 의도와 취지는 우리 모두를 경건의 법에 전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며, 우리를 지혜있고 선량한 자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머리에 사상을 가득 주입시키거나 우리 입에 논쟁을 채우려 하지도 않으며, 단지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서 잘못된 것을 교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Ⅰ. 지혜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하라는 권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훈계를 경청하고 그것에 순응하며,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듯이 그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식별하는 권면이 주어지고 있다.

 

1.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들어 보지도 못한 자를 믿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32절). 기록된 말씀을 읽고 선포되는 말씀은 앉아서 들으며 이 두 가지로 하나님을 송축하고 그것으로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라." 나이로 보아 자녀된 자녀들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니, 이는 그 때가 저희의 학습기인 때문이고 또 그들이 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은 것은 평생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때맞춘 쾌사가 될 것인 까닭이다. 혈연 관계로 자녀된 자들은 저희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저희 어머니되신 지혜자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그 부모에게 순종하고 생명을 얻어야 마땅하다. 지혜자의 자녀된 자들은 그를 들음으로써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야 하며, 참으로 그의 자녀됨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1) 우리는 지혜의 말씀을 공손하게 그리고 기꺼이 들어야 한다(33절). "훈계를 들으며 그것을 버리지 말라. 마치 그것이 필요없는 물건이나 좋아하지 않는 것인 양 버리지 말라. 그것은 호의로서 네게 준 것이다. 만약 네가 그것을 거절한다면 너는 위태롭게 되리라." 하나님의 충고를 배격하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저버리고 그것을 받지 않는 자들이다(눅 7:30). "또 다른 것을 받기가 싫지 않거든 이제 그것을 버리지 말아라."

 

(2) 꾸준히 그리고 주의깊은 귀로 들어야 한다. 우리는 거지가 적선을 받듯, 소송 의뢰인이나 환자가 충고를 받아들이듯 "날마다 그 문곁에서 기다리며" 지혜를 들어야 하며, 종이 겸손하고 참을성있게 기다리다가 명을 받으면 즉각 봉행하는 것처럼 "그 문설주 옆에서 기다려서"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지혜가 얼마나선한 집을 진고 있는지 살펴 보라. 그 집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적선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지혜는 얼마나 훌륭한 학교를 개설하고 있는지 감탄하라. 그 학교에서는 연중 무휴 강의를 쉬는 날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목전에 하나님의 일을 대하고 있으며 그의 말씀을 우리 손에 쥐고 있는 한 매일같이 지혜를 듣고 그에게서 훈계를 배울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시중은 얼마나 충성스럽고 부지런한 것인지 살펴 보자.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그 문 곁에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1] 우리는 지식과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면 무슨 기회든지 포착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불변의 궤도 속으로 진입하여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교시(敎示)를 청문함에 있어 매우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며 어떤 장소이든, 비록 극히 초라한 곳이라도 그의 훈계를 들을 수 있는 곳이면, 즐거워해야 한다. 성전 문직이라도 즐거이 되려 했던 다윗처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이런 훈계의 말씀에 대해 기대감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주의와 끈기와 인내로써 경청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던 자들같이 지켜보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갈구하던 자들은 원래의 문자 그대로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었으며"(눅 19:48), "그의 말을 들으려고 나아왔던"것이다(눅 21:38).

 

2. 우리는 양심적으로 "일을 행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만 축복"을 얻는 까닭이다.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우리는 "그의 도를 지켜야"한다(32절). 지혜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해야 하며 그 길의 철책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그 난간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의 선로만 따라가고 그 길로 매진해야 하며 그 길에서 참고 견디어야 한다.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 훈계수를 단으로 삼아서 네 처신을 정하는 데에 지혜로운 자가 되라. 우리가 지식으로 인하여 지혜있는 자가 되지 못할 경우 그 지식은 헛된 아는 것이 된다"(33절).

 

Ⅱ. 지혜에게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행복하게 된다고 하는 확신.

그들은 복이 있다란 말씀이 두 번에 걸쳐 나온다(32,34절). 지혜의 문 곁에 지켜서서 기다리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거기 기다리고 섰다는 것마저도 그들의 행복이 된다. 그곳은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최상의 장소이다. 거기서 기다리는 자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잠간 동안만 계속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그 문을 열릴 것이다. 지혜를 찾고 있는 그들은 자기들이 찾던 그 대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들이 찾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의 수고에 대해 보상을 해 줄 것인가? 물론이다(35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즉 이 생명은 모든 행복, 그가 필요로 하거나 소원할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을 말한다. 그는 신령한 생명의 원리가 되고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는 바로 그 은혜 속에서 생명을 만나며 얻는다. 그는 "생명을 얻는다." 즉 그는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이고" "그의 은총 안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아들에게 왕의 총애가 돌아간다면 왕 중 왕의 은총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도는 지혜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 그에게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생명이신 까닭이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면 누구나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자는 생명을 즉 영생을 얻으며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고 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을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Ⅲ. 지혜와 그 지혜의 제안을 거부하는 모든 자들에게 내려지는 운명(36절).

이런 자들은 스스로 멸망하도록 방치될 것이다. 그들은 지혜의 모든 충고를 초개같이 여겼기 때문에 지혜도 그들의 자멸행위를 막지 않을 것이다.

 

1. 그들의 범죄는 매우 큰 죄이다. 그들은 "지혜에게 범죄하고"("지혜를 잃으며," 우리 성경), 지혜의 빛과 법에 반역하고, 그 의도에 배치된 행동을 하며 저희 우행으로 지혜를 거스린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께 범죄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멸시하고 그의 삶과 죽음이 지닌 모든 목적을 반박하는 가운데 행동한다. 이것은 지혜를 미워하고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그의 원수들이다. 모든 아름다움의 중심이시고 모든 선의 원천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그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악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2. 그들의 형벌은 매우 공평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징벌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 득죄하는 자들은 자기들 자신을 가장 크게 해하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자이다. 자신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자신의 영혼에 때와 얼룩을 입히는 자들이다. 이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눈에 매우 보기 싫은 자들로 비치게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에 적합하지 않는 자들로 만든다. 그들은 자신을 기만하고 동요시키며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자들이다. 이와 같이 죄는 영혼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와 불화하는 자들은 자신의 멸망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죽음이 될 것은 사랑하고 자기들의 생명이 될 것은 멀리한다. 죄인들은 죽을 존재인고로 죽는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들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고 그들의 저주를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며, 영원히 하나님을 의롭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스스로를 패망하게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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