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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잠언(Proverbs) 개요 및 1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4. 16.

잠언(Proverbs)


1. 히브리 민족의 지혜문학

어느 민족이나 인생을 지혜롭게 또 가치있게 살기를 원하며 그러한 삶을 위하여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자연스럽게 많은 속담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생기고 격조 높 은 귀한 격언이나 금언을 많이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청소년 들을 훈계하는데 사용되었다.그리하여 그것들은 자연히 근면, 정직, 순결, 효, 신의, 경건, 희망, 사랑, 믿음 등을 주로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 민족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러했다.
옛 속담에 이르기를 (삼상24:13)하는 말씀 이나 삼상10:12 같은 귀절을 보아도 옛날부터 구전으로 많은 속담 같은 것들이 히브 리 민족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솔로몬 왕은 잠언 3,000수를 지었다(왕상4:32참조).

 


2. 주제표

초점

서문

잠언

교훈

구분

목적과 주제

아버지의 훈계

솔로몬의 교훈

(제1부)

지혜로운자의 교훈

솔로몬의 교훈

(제2부)

아굴의 교훈

덕망높은 부인의 첫걸음

본문

잠 1

잠 2-9장

잠 10-21장

잠 23-24장

잠 25-29장

잠 30

잠 31

주제

지혜의 사람

지혜의 원리

지혜의 실습

저자

솔로몬

아굴과 르무엘

장소

유다

미상

시간

B.C 950-700년

 

3. 잠언의 교훈

격언과 같은 문장인 잠언들은 삶에 대하여 다양한 교훈을 준다.
1) 신앙의 교훈을 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7)이라는 것. 여호와 의 미워하시는 것(6:16-19)이 무엇이라는 것. 죄를 지복하고 버리는 자(28:13)가 될 것 등을 가르치고 있다.
2) 도덕적 교훈을 준다: 효도(10:1,15:20),선과 악(10:9),사랑과 미움(10:12),진실과 허위(12:17), 정의 와 불의(16:8)등 여러 방면의 실생활의 도덕적 교훈을 주고 있다.
3)사회 생활상의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근면과 나태(12:11,24),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10:9,10,29),화목(17:1), 바른 언어 생활(10:19) 등 유익한 교훈들이 많다.

4. 저자 문제

본서의 대분이 솔로몬 왕이 지은것이 분명하나 본서 전부의 그의 작이라는 것은 무리 인것 같다.

본서 자체도 본서가 여러 사람의 잠언을 모은 것임을 강조 하고 있다.

잠1:1에는 (솔로몬의 잠언)고 하여 본서가 대체적으로 솔로몬의 저작임을 말하고 있지만

잠25:1에 보면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라는 말이 있고

잠30:1을 보면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 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또 잠31:1을 보면 그 잠언은 르므엘왕의 어머니의 잠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5. 내용 분해(대분류)

A. 편집된 대로의 분해
1. 지혜의 탁월성 잠1:1-9:18
2. 솔로몬의 잠언 잠10:1-22:16
3. 지혜있는 자의 말씀 잠22:17-24:34
4. 편집된 솔로몬의 잠언 잠25:1-29:27
5. 아굴의 잠언 잠30:1-33
6. 르므엘의 잠언 잠31:1-31

 

B. 교육의 내용별 분해
1. 지혜의 근원 잠1:1-8:36
2.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 잠10:1, 잠15:20, 잠17:21,잠25:장
3. 세상의 허무함과 신앙의 축복 잠10:2-3,잠11:4, 잠15:16-17
4. 근면과 나태 잠10:4, 잠26장, 잠12:11, 잠24
5. 의인과 악인 잠16:6, 잠9장, 잠16장, 잠 24:잠24장, 잠11:3
6. 영광의 치욕 잠10:7, 잠12:3-9, 잠18:3
7. 순종과 불순종 잠10:17, 잠12:1, 잠15
8. 유익한 일과 해로운 일 잠10:10,잠29장, 잠11:19
9. 의인의 말과 악인의 말 잠10:11, 잠13:1-14
10. 사랑과 미움 잠10:12, 잠15:17, 잠27:5
11. 가난한 자와 부자 잠10:15, 잠22장, 잠11:28
12. 진실과 거짓 잠10:18, 잠12:17, 잠19
13. 명철과 미련 잠2:2, 잠3:5, 잠9:10, 잠10:13, 잠15:22
14. 다변과 침묵 잠10:19,잠11:12
15. 정의와 불의 잠11:1, 잠16:8
17. 존경과 모욕 잠11:12, 잠14:21


6. 내용 분해(소분류)

○잠1:1 솔로몬의 잠언 잠1:1 본서의 서론 잠1:20지혜의 부름에 대한 응답을 촉구함
○잠2:1 지혜 잠2:1 지혜를 찾는 방법 잠2:10지혜의 가치
○잠3:1 지혜를 소유한 자의 복 잠3:1 장수와 평강의 비결 잠3:11지혜의 중요성 잠3:27이웃에 대한 태도
○잠4:1 아비의 훈계 잠4:1 지혜를 얻으라 잠4:10의인의 길과 악인의길 잠4:20지혜로운 자가 행할 길
○잠5:1 음녀의 경계 잠5:1 지혜와 명철에 주의하라 잠5:15자기 아내를 사랑하라
○잠6:1 어리석음의 경고 잠6:1 경솔한 보증에 대한 경고 잠6:6 게으르고 악한 자에 대한 경고 잠6:16일곱까지 죄
○잠7:1 음녀에게 빠지지 말라 잠7:1 지혜를 마음 판에 새기라 잠7:6 이방 여자에게 빠지지 마라 잠7:24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라
○잠8:1 지혜의 부름 잠8:1 지혜를 부르는 소리 잠8:22지혜의 영원성 잠8:32지혜의 필요성
○잠9:1 지혜와 어리석음 비교 잠9:1 지혜의 초청 잠9:7 거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 잠9:13미련한 계집의 초청
○잠10:1아비의 기쁨, 어미의 근심 잠10:1주리지 않는 의인의 영혼 잠10:6악인과 의인의 비교
○잠11:1저울을 속이지 말라 잠11:1의인과 악의의 특성 잠11:12지혜 없는 자와 명철한 자
○잠12:1훈계를 좋아하라 잠12:1훈계와 징계 잠12:9악인과 의인의 입술 잠12:24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
○잠13:1부지런한자의 풍족한 마음 잠13:1입을 지키고 정직히 행하라 잠13:12소망을 이루는 원천 잠13:20선인과 죄인의 결과
○잠14:1슬기로운 여인을 집을 세움 잠14:1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 잠14:11악한 자와 정직한 자의 삶
○잠15:1의인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잠15:1지혜로운 혀와 미련한 혀 잠15:8여호와는 마음을 살피신다 잠15:16부하지 못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복 잠15:21겸손한 자는 지식을 얻는다
○잠16:1응답은 하나님이 하심 잠16:1하나님에 대한 잠언 잠16:10왕에 대한 잠언 잠16:20여호와를 의지하라
○잠17:1분별하는 지혜 잠17:1화평이 다툼보다 낫다 잠17:4언행에 대한 잠언 잠17:10행실에 대한 잠언 잠17:21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대조
○잠18:1주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 잠18:1참 지혜의 지혜의 샘 잠18:10교만을 버리고 여호와를 의지하라 잠18:16다툼을 피하고 화목 하라
○잠19:1가난에 대해서 잠19:1온유한 사람이 되라 잠19:18인자한 마음으로 징계하라
○잠20:1지혜자의 입술과 행실 잠20:1의인이 가져야 할 행실 잠20:12지혜로운 입술이 귀한 보배 잠20:20하나님의 구원 섭리
○잠21:1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심 잠21:1의와 공평을 행하라 잠21:13지혜자가 생각할 것 잠21:20지혜 자와 교만한 자
○잠22:1종합적인 교훈과 지혜자의 말 잠22:1선한 이름과 은총을 택하라 잠22:6마땅히 행할 길로 행하라 잠22:17지혜자의 권고에 주의하라 잠22:22압제를 금하고 근실히 행하라
○잠23:1아들에게 주는 교훈 잠23:1재물을 탐내지 마라 잠23:9어리석고 사악한 일을 금하라 잠23:17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23:27음녀와 술 취함을 멀리하라
○잠24:1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 잠24:1지혜의 유익함 잠24:8이웃을 돌아 보라 잠24:23공정하게 재판하라
○잠25:1히스기야가 편집한 금언들 잠25:1겸손히 행하라 잠25:8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라 잠25:17자신을 지혜롭게 제어하라
○잠26:1미련한 자 잠26:1미련한 자를 변호하지 말라 잠26:13게으른 자의 특징 잠26:20다툼에 대한 경고
○잠27:1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잠27:11지혜로운 자는 재앙을 피한다 잠27:23자기의 소유를 잘 관리하라
○잠28:1악인은 불안함 잠28:1율법을 지키는 자와 버리는 자 잠28:12의인과 악인 잠28:21악인과 지혜자의 결과
○잠29:1의인이 많으면 백성이 기뻐함 잠29:1공의를 행하라 잠29:15책망은 지혜를 주는 교훈 잠29:22겸손히 여호와를 의지하라
○잠30:1아굴의 잠언 잠30:1하나님을 아는 지식 잠30:5하나님의 순전한 말씀 잠30:11네 종류의 악한 무리들 잠30:18이해할 수 없는 일들 잠30:24작지만 지혜로운 네 가지
○잠31:1르므엘 왕의 잠언 잠31:10현숙한 여인

 

 

잠언 서론


모든 성경은 변화된 죄인이 구원을 받고 이제 새로운 존재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이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지만 성경의 특정한 부분에서 특별하게 이 주제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책 중의 하나가 잠언서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히브리 지혜서 중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주제로 한 지혜의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참 지혜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의 삶에 올바른 길을 계시한 것이며, 관념적인 진리로서가 아닌 실천적인 의미로서의 참 지혜와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살펴볼 때 본서에서 말하는 지혜는 삶의 근원적인 해결책이며,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재창조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실현해 나아가야 할 성도들은 끊임없이 참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생활에서 항상 구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잠언이 이러한 지혜의 책이라는 데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으나 잠언의 역사적 배경이나 여러 신학적인 주제들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제각기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고 있다. 이제 본 서론에서는 잠언의 기본적인 역사적 배경과 특별한 주제들에 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제1부: 잠언서의 역사적 배경

I. 명칭

히브리 성경에서는 '솔로몬의 잠언들'<hmolov] ylev]mi ; 미쉴레 쉘로모>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ylev]mi ; 미쉴레>는 <lv;m; ; 마솰>의 복수 구성형으로서 이 용어는 그 사용 범위가 광범위하여서 '잠언'(참조, 시 49:4)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조롱하는 노래'(참조, 미 2:4), '말거리'(참조, 시 44:4), '알레고리'(참조, 겔 17:2) 등의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영'(Young)은 '마솰'<lv;m;>이란 말이 '짤막하고 간결한 지혜의 격언'을 뜻한다고 말하며, 'fp이븐'(Raven)은 '마솰'에 대해서 '다양한 상황에서 교훈을 줄 수 있는 원리를 간결하고도 포괄적으로 진술해 놓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마솰'이 실제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의 명칭은 헬라어 70인역에서도 <paroimivai salwmwnto" ; 파로이미아이 살로몬토스>라 불렀는데 그 뜻은 '솔로몬의 잠언들'이란 의미이다. 또 라틴 불가타(Latin Vulgata)역에서는 '잠언들의 책'이란 뜻인 이라 불렀고 이를 따라 영역에서는 'proverbs'이라 표기하였으며, 한글 성경에서는 '잠언'이라고 번역하였다.


II. 저자와 기록 연대

1. 저자

전통적으로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통상 인정되어 왔다. 그 이유는 본문의 1:1; 10:1; 25:1에서 본서의 저자를 솔로몬이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의 본문에 의하면 솔로몬 외에도 다른 사람의 저자가 명시되어 있는데, 그들은 '아굴'(참조, 잠 30:1)과 '르무엘'(참조, 잠 31:1), '지혜로운 사람의 말씀'(참조, 잠 22:17)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잠언이 솔로몬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성경 자체의 내증에 따라 판단해 보건대 잠언은 솔로몬이 지은 대부분의 작품과 다른 저자가 지은 작품이 합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 솔로몬 저작을 반대하는 비평적 입장의 견해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솔로몬과 다른 저자들이 지었다는 주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잠언 저자에 대한 견해

그들은 시편의 저자가 정확하게 누구라고 말할 수 없음 같이 잠언서의 저자 역시 분명히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편이 오랜 시일 동안 여러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것을 수집한 것이고 또한 오랜 시일 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체험에서 얻고 또 구전되어져 내려온 격언들이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수집 종합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의하면 솔로몬을 비롯하여 본문 중에 나오는 이름들은 그 자신들이 잠언을 말한 지혜인임과 동시에 그 이전 사람들에 의해서 구전되어 내려온 잠언들을 수집한 편집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 중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의 이름이 언급되어진 부분까지도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이름이 나온 부분들을 분석하여 보면 한 사람의 저작이라고 하기에는 그 문체나, 문장의 형태로 보나, 나타난 신학적 사상을 보나, 솔로몬 시대보다는 훨씬 후대의 것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왕이 자신을 가리켜 이야기를 할 때 개인적인 문제를 강조하는 점도 솔로몬 시대와는 시대적 거리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2) 솔로몬이 잠언의 대부분을 저작했다는 견해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 견해는 1:1; 10:1; 25:1을 근거로 하는데 이들에 의하면 1:2-9:18; 10:1-22:16; 25:2-29:27이 솔로몬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30장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고, 31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르무엘 왕에게 훈계한 잠언인데 르무엘 왕이란 이스라엘 왕이 없었던 점을 미루어 보아 31장의 기원이 이스라엘 밖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처'(Archer)는 르무엘 왕이 유일신 야훼 하나님을 숭배했던 우스 땅에서 멀지 않은 북쪽 아라비아의 한 왕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잠언 1:1-29:27까지의 내용이 솔로몬의 저작인데 그 총 절수는 851절로서 열왕기 4:32에서 솔로몬이 잠언 3,000개를 말했다고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이는 능히 솔로몬이 저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량이라는 주장이다.

2. 기록 연대

잠언의 기록 연대를 결정하는 데는 두 개의 문제들이 결부되어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각 부분의 저작 시기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의 문제는 여러 가지 단원들을 한 책으로 수집, 또는 편집한 시기와 관련된 것이다.

1) 전통적인 견해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은 30, 31장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 잠언이 솔로몬의 저작이라는 견해를 따르기에 그들은 본서의 저작 연대를 B.C. 10세기경, 즉 솔로몬의 만년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솔로몬 이외의 저자들이 저작한 시기는 B.C. 700-400년 사이로 본다.

2) 비평적인 견해

비평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의 주장은 저자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이상, 연대 문제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단지 여기에 솔로몬의 잠언이 수록되었다고 볼 때 우리는 잠언서의 일부가 솔로몬의 연대와 같은 것이며, 또 어떤 부분은 솔로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들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면 모든 잠언의 연대를 말한다는 것은 힘들고 다만 현재의 잠언서의 형태로 이뤄지기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이 흘러갔을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비평적 학자들은 잠언의 최종적 편집 시기를 B.C. 5-4로 잡고 있다. '오토 카이저'(Otto Kaiser)에 의하면 잠언 1-9장은 양식사적 입장에서 볼 때 잠언서 중에서 가장 세련된 양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장 후기에 쓰여진 것이며, 그 연대는 포로후기이며, 그리고 잠언 서두(참조, 잠 1:1-6)에 언급되는 솔로몬 저작을 가리키는 내용은 잠언서의 마지막 편집자에 의해 잠언의 서론으로 첨가한 것이지 1-9장까지의 저자를 지칭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카이저'(Kaiser)는 잠언10:1-22:16을 분석하면서 10:1-15:33; 16:1-22:16을 양분하고, 후자인 16:1-22:16이 유다 왕조 말기 때에 저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이저는 잠언 25-29장의 저자에 관해서도 비록 25:1에서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 말은 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유형과 양태가 단지 '솔로몬의 잠언'과 같은 유형임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그 저작 시기는 본문 25:1에서 언급한 대로 히스기야 때에 편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적 견해들은 문맥상으로 따져 볼 때 근거 없는 주장이다. 또한 '올브라이트'(albright)는 잠언의 내용과 양식을 바알의 서사시와 아람어의 지혜서 등과 비교하면서 잠언서의 전체 내용이 포로 시대 이전에 이미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잠언서와 우가릿 문서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시적인 표현 양식이 B.C. 7세기의 '아히칼의 잠언'같은 데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잠언서가 포로 이전의 작품임을 강조한다.


III. 기록 목적

1.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목적

본문 1:2-4에서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지혜와 참다운 분별력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맥락은 솔로몬을 제외한 나머지 저자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본서는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저자는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항상 찾아야 하고 실제로 구현되어야 할 참다운 지혜, 곧 하나님께서 내신 삶의 법을 사람들에게 깨우치려 하였다. 저자가 주장하는 지혜는 전혀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 진리 체계가 아니라, 이 지혜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서 경험해 가는 실천적인 앎이었으며, 개인에게 있어서는 건전한 인격과 성격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잠언은 공적, 혹은 사적인 수업을 위한 훌륭한 지침서로 사용이 될 수 있었다. '패더슨'(Patherson)이라는 학자는 본서의 기록 목적에 대해서 '어리석은 사람의 수효를 줄이고 지혜로운 자의 수효를 증가시키는 것이다'라고 적절하게 구사했다.

2. 특정 계층을 위한 목적

이스라엘의 모든 다른 지혜 문헌들과 함께 잠언은 젊은이들을 훈육하기 위한 지침서로서 사용되었다. 본서는 음녀에 대한 경고가 말해 주듯이 어린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젊은이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기서 교훈을 받을 대상은 젊은 여인들이라기보다는 젊은 청년들이다. 비록 여자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여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잠언서는 젊은 남성들, 특히 상류층에 속하는 청년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교훈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상류층의 자제들만이 잠언이 금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빠질 수 있었을 테고, 또 잠언서가 권장하는 많은 미덕들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며,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사회적 배경과 철학은 상류 계층을 위한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제 2부 'III. 잠언과 사회적 배경과의 관계'부분 참조).


IV. 특징과 구조

1. 특징

잠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 자체만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특성이다. 이제 본서의 문학적 특징들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1) 문학적 양식

잠언서는 지혜 문학으로 분류된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사사나 왕에 의해서 통치되었으며 제사장, 예언자, 서기관들에 의해서 인도되었는데, 이러한 통치와 인도함의 원리들을 지혜의 양식으로 발전시켜 놓은 것이 히브리의 지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은 통치자이면서 지혜자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 외에도 수많은 지혜자들은 인생과 세상에 관한 자신들의 실제적인 지식을 동족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들이 서술한 문체적 양식은 다음과 같다.

① 문체의 형태

잠언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문체들이 있으나 가장 두드러진 형태는 시의 형식인데 저자는 시의 형식을 통하여 간단한 비유, 예리한 질문, 간결한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다. 그 서술방법에 있어서는 거의 평균율적인 시행들과 함께 종합적 평행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 (참조, 15:16, 17; 19:1).

② 수사법의 형태

잠언에는 대구법과 의인법의 두 가지 수사법이 사용되었는데, 대구법이란 반대되는 것, 혹은 유사한 것들을 대비하여 표현하는 표현 기법이며(참조, 잠 16:22; 17:10), 의인법은 무생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표현법을 말한다(참조, 잠 9:1). 특히 현저한 교훈의 방법으로 사용된 대구법은 본서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바, 순종과 불순종, 성실함과 불성실함, 신중함과 경거망동 등의 기본적인 사항을 대비시킴으로써 비굴한 타협이나 망설임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명백한 양자택일의 문제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잠언의 기본 단위는 대개 한 절에서 네 절로 되어 있으며, 때로 한 군(cluster)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도 있다. 이 군(cluster)으로 된 한 예가 26:1-12에 언급한 '미련한 자'에 관한 구절이다.

2) 내용에 있어서의 특징

엄밀한 의미에서 잠언과 같은 유형의 글은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논구되고 구명된 바와 같이 잠언과 유사한 지혜 문학들이 타민족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이방의 잠언들이 인간 생활의 윤리적 측면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전자는 하나님의 법을, 후자는 인간 생활의 평범한 진리를 그 골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그 관점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잠언의 두드러진 내용적 특징은 참다운 삶에 이르는 근본적인 원리로서의 실천적 철학을 하나님의 법에서 찾으며 인간들에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2. 구조

잠언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에 따라서 분류되어질 수 있다. ① 어리석음과 죄악을 떠나 지혜를 구하라는 교훈(1-9장), ② 지혜로운, 혹은 어리석은 행위들의 구체적인 예들(10-29장), ③ 덕 있는 여인에 대한 언급(30, 31장),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한 잠언은 세부적 구조는 아래의 도표와 같다


제2부: 잠언의 특별 주제들

I. 잠언의 정경성

탈무드(샤바트 30b)의 진술에 의하면 잠언은 A.D. 1세기 말에 전도서와 아가서와 더불어 정경성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서가 솔로몬의 다른 책들(전도서, 아가서)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 책이 정경이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또 전도서와 아가서의 정경성에 관해서 이견들이 기록되고 있는 탈무드의 '야다임(iii5)'에서도 잠언에 관한 논란은 없다. 뿐만 아니라 약 4:6은 잠언이 A.D. 1세기에 정경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기정사실인 것처럼 잠 3:34을 인용하고 있다. 또 70인역에 잠언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잠언이 일찍이 거룩한 글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해 주는데, 70인역과 영어 역본들은 잠언을 솔로몬의 다른 책들과 함께 배열하고 있다. 탈무드(Baba Bathra 15b)에서는 잠언을 시편과 욥기 뒤에 배열하고 탈무드(베라코트 59b)에는 시편과 욥기 사이에 배열하고 있다.


II. 잠언의 특징적 문제들

1. 지혜 사상과 창조

이스라엘인들이 지혜 사상과 창조를 결부시킨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집트의 지혜 문헌에도 600여 종의 사물 이름이 언급되듯이 구약성경에도 식물, 가축, 조류, 어류에 관한 목록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창조 사역과 지혜 사상의 연관이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에 존재해 왔었음은 분명하다(참조, 왕상 4:29-34; 5:9-14; 욥 9:7-15; 잠 6:6-8; 30:24-31; 사 28:23-28).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것에 대한 기록은(참조, 창 1:1-2:4) 지혜 문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 사건에서 명령한 지상 정복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자연 정복을 목표로 한다는 관점에서 하나의 지혜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것인 만큼(참조, 사 31:2) 지혜는 삶의 힘이다(참조, 사 40:13; 렘 10:12; 51:15).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가 세상 창조 이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참조, 욥 38:35; 잠 3:19)은 지혜 없이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창조는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소산이라는 지혜 이해에서 연원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2. 지혜의 선재설과 인격화

본문의 1:20-33을 보면 마치 지혜자가 설교자나 훈계자처럼 성곽 위에서 소리치고(참조, 잠 1:21; 8:3), 손 내밀어 붙잡고 미소 지으며(참조, 잠 1:24, 26), 마치 교사가 실제로 학생을 가르치듯이 묘사되었다(참조, 잠 8:14-16). 이러한 지혜의 인격화는 세상 창조 이전에 지혜가 존재했다는 지혜 선재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잠언의 지혜 인격화가 애굽의 지혜 인격화와 그 경향이 다르고, 오히려 가나안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지혜가 창조 이전에 존재했다는 선재설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본문을 근거로 하여 살펴볼 때 잠언서에서 지혜가 인격화된 사실은 분명하다. 지혜는 말하고, 계시를 주며, 호소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또 지혜는 총애를 입은 선생으로(참조, 잠 9:4) 묘사되기도 하며, 교훈을 받지 않은 자에게 심판을 선언하기까지 한다(참조, 잠 8:1-21; 9:13-18). 그리고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참조, 잠 8:23, 26), 하늘이 만들어지기 전에(참조, 잠 8:27),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참조, 잠 8:30). 그러므로 잠언에서의 지혜는 보통 일반적인 지혜를 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지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III. 잠언과 사회적 배경과의 관계

잠언서의 정치 사회적인 배경이 확실하게 나타나지는 않으나 왕에 대한 언급(참조, 잠 14:28; 16:10, 13; 20:2, 18, 28)이 많이 등장하고, 히스기야 왕 시기에 편집되었다는 증언(참조, 잠 25:1) 등이 있음을 미루어 보아 잠언이 쓰여진 시기들에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와 함께 활발한 민족 문화의 집중적인 배양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솔로몬의 잠언이라'(잠 1:1)는 표제어조차도 그의 저작을 나타내기보다는 그가 수집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솔로몬 저작설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솔로몬의 통치기간이 평화기요, 히브리 지혜 문학의 황금 시절이 될 충분한 이유가 됨을 시사한다는 점이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 시대에는 외국과의 대규모적인 접촉을 통하여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도 왕성한 성장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이제 잠언이 쓰여질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잠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교육을 받은 귀족 계급과의 관계

최근에는 잠언서가 형성된 직접적인 상황에 대해 더욱 넓은 견해를 취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간다. 그래서 현재는 이 책이 성격상 순순히 일반인을 훈계하거나 교육시키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어떤 계층을 교육시키기 위해 저작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러한 특수 계층에게 시행되었던 교육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교육이라기보다는 지적인 즐거움과 자극을 추구하고 있었다. 잠언서의 어떤 부분들은 교과서적인 특징들을 분명히 지니고 있는 반면에 특별히 성숙한 독서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견해를 잘 뒷받침해 준다.

2. 학교와의 관계

잠언서가 기록된 구체적 환경이 이스라엘의 학교들이었다는 이론은 단순히 궁중 저작권에 대한 반대 이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교들은 궁중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기 때문이다. 잠언서에 대한 애굽의 영향력을 바로 이러한 학교들을 통해서였다고 주장되어 왔다. 사실상 구약 성경에서 제도적인 교육 기관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분명한 언급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과 솔로몬은 애굽과 메소보타미아의 잘 정비된 교육 제도를 국제적인 접촉을 통해서 도입하였으며, 잠언서는 주로 이런 교육 기관에서 서기관을 교육하기 위해 저술된 학습용 문헌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에 공식적인 학교 제도들이 있었는지는 현재까지 명백하게 증명될 수도 부인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학교 제도를 배경으로 잠언이 생성됐다는 설에 대해서 의문을 표명한다. 그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통일 왕국 시대에 국력이 강성했을 때에도 실제로는 거대한 제국들에게 비교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중의 업무와 다른 목적을 위해 있었던 서기관의 수요는 다른 직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극소수의 세습적인 서기관 가문에서 아버지가 손수 아들을 교육시킴으로써 충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에서의 교육은 제도적인 학교와는 매우 다른 성격의 것이었으므로 잠언과 학교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3. 궁중과의 관계

다윗의 시대 때부터 박학다식한 서기관들이나 기록관들이 예루살렘의 궁중에 있었다. 비록 솔로몬의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솔로몬 자신이 이 책의 어떤 부분이라도 저작했음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문학적 지혜를 솔로몬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참조, 왕상 4:29:-34)과 이 책의 전부 내지는 일부를 솔로몬의 것으로 돌리는 것(참조, 잠 1:1; 10:1; 25:1)과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을 언급하는 것(참조, 잠 25:1) 등은 모두 전적으로 근거가 없지는 않은 궁중의 잠언서 사이의 관계인 전통을 입증해 준다. 이스라엘의 궁중에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이 책이 궁중에서 자작되었다는 견해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IV. 잠언서에 나타난 윤리적 교훈

본서는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자는 부모의 입장에서, 연장자의 입장에서, 또한 왕의 입장에서 심지어는 인격화된 하나님의 모습으로서 지식과 명철과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본서에 나타난 윤리적인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 잠언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충고와 권고, 훈계와 지시 등을 통하여 각성시키고 있다. 그 '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의인의 길'(참조, 잠 2:20), '명철의 길'(참조, 잠 9:6), '공평의 길'(참조, 잠 2:8; 8:20), '선한 자의 길'(참조, 잠 2:20), '생명의 길'(참조, 잠 10:17) 등의 인간이 살면서 반드시 선택해야 할 정도와 '악인의 길'(참조, 잠 4:14), '음부의 길'(참조, 잠 7:27), '음녀의 길'(참조, 잠 7:25), '사망의 길'(참조, 잠 14:12; 16:25), '패역한 자의 길'(참조, 잠 22:5) 등의 삼가고 피해야 할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고 권고하고 있으며, '부모를 즐겁게 하고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고 말하고 있다.

둘째, 인간다운 생활을 하려면 성(sex)이 문제에 깨끗하기를 권고하고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말기를 강권하고 있으며(참조, 잠 5:3), 적극적으로는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고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연모하라'(참조, 잠 5:18, 19)고 교훈하고 있다.

셋째, 성실한 생활을 권면하면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기'를 권하고 있다(참조, 잠 6:6; 7:10, 11; 20:4; 26:13; 26:14).

넷째, 겸손의 덕을 배우고 교만을 물리치라고 말한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가 되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된다'(참조, 잠 15:33; 16:18; 22:4).

다섯째, 또 입을 지키고 혀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진귀한 덕인가를 누차 강조하고 있는데(참조, 잠 10:19; 11:13; 12:19; 13:3; 15:13; 16:4; 16:28; 18:6; 18:21), 패역을 말하는 악인의 입을 가지지 말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을 아는 의인의 입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다(참조, 잠 10:31, 32).

여섯째, 술과 독주를 피하라고 거듭 경고하고 있는데 독주는 백성을 다스리는 주권자로 하여금 법을 망각하게 하여 공의를 굽게 할 것이니 피하라는 것이다(참조, 잠 23:30-35; 31:4, 5)

일곱째, 저자는 또 잊지 않고 사회 정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악한 관리가 되지 말며(참조, 잠 28:15), 포악을 행하는 무리한 치리자가 되지 말며(참조, 잠 28:16), 가난한 자를 못 본 체하지 말며(참조, 잠 28:27), 불의의 재물이 얼마나 무익한 것임을 알며(참조, 잠 19:25), 선을 간절히 구하고(참조, 잠 29:12), 구제하기를 좋아하며(참조, 잠 19:25), 선을 간절히 구하고(참조, 잠 11:27),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참조, 잠 14:31).

여덟째,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싸우지 말고 사랑하고 화목하는 일을 권고하고 있는데, 그 범위는 광범위하여 다투는 여인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거듭 말하면서(참조, 잠 21:9, 19; 25:24; 27:15) 모든 다툼은 노함에서 나오므로 더디함을 권하며(참조, 잠 19:11; 14:29) 미련한 자는 분노를 곧 나타내며(참조, 잠 12:16), 다툼은 교만에서 일어나며(참조, 잠 13:10) 시비를 그치는 일이 곧 다툼을 물리치는 일이니(참조, 잠 15:18)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잘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용사보다도 나음을 말한다(참조, 잠 16:32).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윤리적 교훈이 근본적인 의미의 지혜인 '여호와를 경외함'(참조, 잠 1:7)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즉 선하게 사는 것도 여호와 경외함에 있다는 것이다(참조, 잠 16:6). 사람이 아무리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참조, 잠 16:9) 그를 찾고(참조, 잠 28:5) 항상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마땅한 길(참조, 잠 23:17)임을 역설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다.


V. 잠언에 미친 이방 문학의 영향 -잠언과 '아메네모페'(Amenemope)와의 관계-

이집트의 지혜 문서인 '아메네모페'(Amenemope)는 1888년 '윌리암 부드'(William Budge)에 의해 발견되어지고 1922년 처음 발표되었다. 그는 이 지혜서의 연대를 이집트의 18대 왕조(B.C. 16-13C)때라고 했는데 아직 이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일치된 의견을 갖지 못하고 있다. '랑게'(Lange), '에르만'(Erman), '그리피스'(Griffith), '윌슨'(Willson)등은 그 연대를 B.C. 10c경 제 22왕조(B.C. 945-745) 혹은 24대 왕조(B.C. 718-712)로 보며 어떤 학자는 페르시아와 헬라 시대의 편집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애굽의 지혜서는 총 30장으로 구성되었고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교훈의 지혜서이다. 이 지혜서가 잠언과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아돌프 에르만'이 '아메네모페'와 잠 22:17-23:14의 유사성을 주장하고 난 후부터 잠언서가 애굽의 지혜 문서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게 있어왔다.

그래서 '심프슨'(Simpson), '에르만'(Erman) 등의 학자는 잠언이 애굽의 지혜서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는 결론을 가진다. 그러나 '아처'(Archer)나 '영'(Young) 같은 학자들은 오히려 '아메네모페'가 잠언서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비록 논쟁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셈어의 관용어들이 '아메네모페'에서 사용된다는 사실은 잠언의 우선성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양쪽의 논리 모두를 수용하고자 하는 절충적인 견해가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이집트의 지혜서와 잠언 둘 다 고대 근동의 구전 전승을 받아들였거나, 공통된 원본(Vorlage)을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또 히브리 성경의 잠언이 이집트의 지혜 문서인 아메네모페 30장 전체를 직접적 자료로 썼다기 보다는 하나의 모델로 단순히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말하는 학자는 '머피'(Murphy)와 '스코트'(Scott)등인데 이러한 견해 역시 결국은 잠언의 이방 문학 영향설과 크게 다를 바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VI. 잠언의 신학적 가치

잠언서는 율법서와는 달리 예배나 제사 등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희생 제사에 대한 몇 가지 중립적이고 거의 부정적인 언급(참조, 잠 7:14; 15:8; 17:1; 21:3, 27)들과 선한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고 하는 내용(참조, 잠 15:8, 29; 28:9), 성전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고 권하는 말(참조, 잠 3:9)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종교적 내용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역사서들이나 예언서들과는 달리 잠언서에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나 선지자적 영웅들, 민족의 운명, 메시아사상 등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 묵시 문학에서 보듯이 개인의 부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 전체적인 내용이 내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현세적이어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사는가 하는 문제를 그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본서가 단순히 생활 관습에서 터득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혜를 말하기 때문에 종교적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본서가 현실 생활에서 신중하고 도덕적인 행동과 실천들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관점이 아니라 삶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어떠한 관점에서 조망하고 실천해 나가야 하는가를 지혜라는 틀로서 일관성 있게 정리해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창조주이신 그가 원하시는 인생을 살 수 있는가 하는가를 제시하며, 그 길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찾아서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잠언서는 제사서나 예언서가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지혜의 결정체를 윤리적인 통로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 '실천 신학의 책'이라 할 수 있다.


VII. 지혜 문학과 솔로몬의 지혜서


1. 지혜 문학

예언서와 율법서들과는 달리 성경의 지혜서들은 지혜에 대한 권위 있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잘 이해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잘 아는 교육자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즐겨하는 교훈은 잠언으로 이 잠언은 자명하고 설명적인 간결한 선언이다. 이들의 가르침은 인간의 모든 영역을 다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고 실제적인 어조로 해학과 풍자를 곁들여 표현되었다. 성경의 지혜 문학 중에 대부분의 것들이 상당히 고대의 것들인데 고대의 전승들에 의하면 지혜는 동방과 애굽 그리고 남방의 자녀들의 보편적인 문화라고 한다. 유대의 지혜 문학의 가장 많은 부분은 솔로몬의 것이었다(참조, 왕상 5:9-14).

실제로 히브리 지혜의 최고 오랜 된 책은 잠언서인데, 이 잠언서의 대부분들이 솔로몬의 것이다. 여기서 기록자는 지혜를 하나님을 포괄하고 있는 지식, 하나님의 최초의 일, 창조시의 하나님의 협조자, 그리고 세계의 기초적인 기반이자 인간의 선도자라 하는 원형적이고 고차원적인 개념으로 전개하고 있다. 전도서에서는 지혜가 암울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실체와 이 세계의 윤리적 치리의 문제를 그 주안점으로 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인간 노력의 허무함'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지혜 문학의 요소들이 시편들, 위경 아리스테아스의 편지(No. 187-300), 아히칼의 지혜서, 십이 족장의 유언, 마카베오 4서, 그리고 시락서와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 외에도 랍비 문헌들과 신약 성경(산상 보훈, 야고보서)에도 그 기본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2. 솔로몬의 지혜서

이 책은 욥기서와 집회서 사이에 위치한 성문서로 라틴 불가타역(Latin Valgata)에서는 '지혜의 책'이라고 이름하고 있는데 로마카톨릭에서는 제2의 정경으로,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 지혜서는 그 위대한 사상, 예술적인 성격, 희랍과 히브리적 요소들을 융합하는 선구자적인 역할로 인해서 외경들 가운데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 내용

본서의 일관된 주제는 지혜에 대한 찬양이다. 이 지혜는 성격이나 기능이 그렇게 명백히 규정되어진 것은 아니지만 잠언서와 마찬가지로 의인화된 지혜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1-9장: 의와 지혜

 1-2:24; 악인의 그릇된 생각을 의인들이 논박하는 내용

 3:1-5:23; 의인과 악인의 순간적 운명과 영원한 운명

 6:1-9:18; 인간에게 있어서의 지혜의 중요성

② 10-19장: 역사 안에서의 지혜의 효능

  10:1-11:1; 아담에서 모세 시대까지의 지혜

 11:2-12:22; 하나님의 징벌 속에 포함된 자비

 13:1-15:19;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16:1-19:21; 애굽에게 내리신 벌과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축복을 비교함


2) 문학적 성격

지혜서는 지혜 문학 범주에 속하기는 하지만 실질적 양식과 특성에 있어서 이 범주에 속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다. 지혜서는 잠언서나 전도서와는 다르게 격언적인 말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그 문체의 양식이 유려하고 다양하다. 또 지혜서는 마카베오 4서와 가장 유사한데 이는 후에 헬레니즘 문학에 있어서 희랍적 요소와 히브리적 요소들을 적절히 융합해 가고 있는 본보기인 마카베오 4서와 버금가는 작품이다. 이들 양쪽 책들의 형식은 사상과 감정 표현에 있어서 히브리식과 희랍식을 모두 사용하는 희랍어 구어체 화법의 형식이다. 지혜서의 저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적인 형식을 지니고 문명화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마카베오 4서에서와는 달리 보다 낮은 계층의 일반 대중,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기도나 역사적인 사건들, 또 그에 대한 설명들과 담화를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본서의 기록 동기는 오직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cafe.daum.net/oknjc/IT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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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장 주석

 

● 잠언의 목적과 의도(잠언 1:1-6)
우리는 여기에서 이 책의 서론부와 접하게 된다. 흑자는 에스라와 같이 수집자와 발행인이 본서에 이 서론을 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머릿글은 오히려 솔로몬 자신이 직접 집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기 책의 서두에서 본서 저작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자기 업무를 지속하고 그 목적을 면밀하게 추구하기 위함이다.


Ⅰ. 누가 이 지혜로운 말씀을 기록하였는가?(1절) 이 말씀은 "솔로몬의 잠언"이다.

1. 그의 이름은 "화평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그의 특성이나 통치 성격 모두가 그 이름에 부합되었다. 즉 그의 기질과 정치는 평화스러웠다. 그 생애가 환란으로 가득하였던 다윗은 기도서를 저술하였다.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지니라."

그러나 조용하게 산 솔로몬은 교훈의 책을 저술하였다. "교호가 평안할 때 그들은 교훈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스스로 배우고 남들을 가르쳐야 하며, 환란의 시기에는 남들이나 우리가 배운 바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는 "다윗의 아들"이었다. 그 선한 사람과 혈연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의 명예였고, 그가 다윗의 아들됨을 명예로 생각한 것은 충분히 타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문에 더욱 행복하게 되었던 것이다(왕상 11:12). 그는 훌륭한 교육의 혜택을 입었고, 또 그를 위해서는 많은 기도가 드려졌다(시 72:1). 이 두 가지의 효력은 그의 지혜와 유용성으로 나타났다. 때때로 "의인의 세대"는 이와 같이 축복을 받는다. 곧 그들은 축복을 받으며 저희 당대의 저명한 축복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왕 다윗의 아들로 불리시는데 솔로몬은 다른 일들 뿐만 아니라 이 일로도 그의 예표였다. 즉 주님께서는 "그의 입을 열어 비유나 잠언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3. 그는 "이스라엘이 왕이"었다. 왕이면서 무지한 자의 훈계자가 되고 어린 아이의 선생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치욕도 되지 않았다. 그는 특히 하나님이 알려져 있고 그 이름을 크신 이름으로 여기는 백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백성들 중에서 지혜를 배웠으며 그들에게 그 지혜를 전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지혜를 능가하는 "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온 땅이 그를 찾았다(왕상 4:30; 10:24). 이스라엘의 임금이 그런 놀라운 지혜의 필기사였고 신탁자였다는 것은 그 백성들에게 영예가 되었다.

솔로몬은 경구(驚句)로 유명하였다. 그가 한 말은 언 것이나 무게가 있었고, 놀라게 하고 교훈하는 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를 시중하고 그의 지혜를 듣던 자들은 자기들의 일기장에 기록해 두었던 그의 잠언 삼 천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이 잠언은 그 자신의 기록으로 되었으며 천 개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잠언은 그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혹자는 위경 "Ecclesiasticus"(일명 Ben sira의 지혜서:역주)나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가 신적 영감으로 저작되지 않은 그의 딴 잠언들로부터 편찬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위서에도 매우 훌륭한 명언과 유용한 격언이 상당히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을 다 합친다 해도 본 잠언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로마 황제들은 요즘 왕들이 각기 문장(紋章)을 가지듯 자기 심볼이나 좌우명을 제각기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천금 같은 많은 금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금언은 그들처럼 타인들로부터 빌어온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비상한 지혜의 산물이었다.

Ⅱ. 이 잠언은 무슨 목적을 위해 저작되었는가?(2-4절) 이것은 저자의 명성을 높이거나 자기 백성 사이에서 자기 세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로 씌워진 게 아니라 모든 자들이 사용하여 혜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누구나가 이 훈령을 따라 자신을 거느리고 또 세심하게 연구하라고 저작된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준다.

1. 사물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형성하게 하며 우리 마음이 사물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석한 주관을 갖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우리로 하여금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교훈으로 말미암아 획득한 지혜를 신적 계시에 의해 현명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고 타인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도록 사용하기 위해서 이 책은 기록되었다.

2.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즉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이해하고 판단하게 해 준다. 실수를 예방하게 해 주며 우리가 배운 바를 우리 자신에게 적응시켜 주어 쓸모있게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들을 구별"하도록 해 주며 속임을 당하지 않게 하고, 사도가 기도하는 대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여 그 이익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빌 1:10).

3. 우리가 매사에 올바른 언행을 지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3절).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의 훈계를 받도록"하기 위해 우리의 실제 행동을 "정의와 공평과 정직"으로 안내해 주는 지식의 공급자가 될 것이다(3절). 이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지불해야 할 모든 것을 갚도록 조처해 줄 것이다. 모든 종교적 실천으로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하며, 인간에게 돌려 줘야 할 모든 것은 관계로나 직분으로나 계약으로나 그외 어떤 계산으로든, 우리가 지고 있는 의무대로 갚게 해 줄 것이다.

보편적으로 양심적인 사람들은 참다운 지혜인이며 또 그들만이 지혜로운 자이다. 성서의 의도는 우리에게 바로 그 지혜를 가르치려는 것이니 제 일 석판(십계명의 두 서판 중)이 의무에 있어서는 "의로움"을, 제 이 석판이 의무에 있어서는 "공평함"을, 이 두가지 다 포함에서 "정직함"(즉 성실성)을 가르쳐 준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그들을 구별한다.

Ⅲ. 이 잠언은 누구의 사용을 위해 기록되었는가?(4절)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소용되지만 특히 다음과 같은 대상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1. "어리석은 자"를 위해, 그들에게 "슬기를 주려고." 여기에 제시된 교훈은 평범하고 쉬우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도 맞는 수준으로 되어 있어서, "어리석은 길손이라 하더라도 이 길에서는 실족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배울 필요성을 느끼며 따라서 교훈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이 잠언을 통해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우둔하더라도 자기 재능이나 능력껏 이 교훈을 받아 들이는 자들은 이로써 슬기로와지며, 자기들이 피해야 할 조가 무엇이며 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은혜로운 재주를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유혹자의 간계를 모면할 수 있게 된다. "비둘기처럼 순결"한(혹은 "무해한") 자는 솔로몬의 규칙들을 관찰함으로써 "뱀 처럼 지혜로"와질 수 있다. 죄악의 길에서 어리석었던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스스로를 규제하기 시작하면 은혜로운 지혜를 지니게 된다.

2.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하여. 청춘은 배우는 시기이며 교훈을 붙잡고 감명을 받으며 얻은 것을 보유하는 때이다. 그러므로 청춘의 시기에 그 마음을 좋은 양념으로 간을 잘 맞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솔로몬의 잠언보다 더 좋은 맛을 나게 하는 것은 없다. 청춘은 성급하고 고집이 세며 무사려하다. "인간은 들나귀 새끼처럼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견제에 의해 제동을 걸 필요가 있으며 이 잠언의 규칙으로 길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잠언대로 자기 길을 조심한다면 그들은 곧 옛 성현들의 지식과 분별력을 얻게 될 것이다. 솔로몬의 본서를 기록하면서 후인들을 염두에 두었었다. 즉 이 잠언을 통하여, 다가올 새 세대의 마음이 지혜와 미덕의 원리라는 풍부한 양념으로 맛들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Ⅳ. 이 말씀은 무엇에 유용한가?(5,6절) 젊고 어리석은 자라도 이 말씀으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플라톤 학파에게 간다면 문전 축출당하고 말 그들이지만 솔로몬의 학교에서는 따뜻이 맞아 들여진다. 그러면 잠언은 젊고 어리석은 자만을 위한 것일까? 아니다. 여기에는 어린이를 위한 젖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을 위한 강장식도 있다. 이 책은 어리석고 악한 자들을 지혜롭고 선한 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선한 자들을 더욱 지혜롭고 선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설령 우둔한 자와 젊은이가 이 훈계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또 그것으로 더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혜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지혜는 비록 저자 바닥에 앉아 있는 자녀들로 인해서는 그 정당성이 입증되지 못하더라도 지혜 자신의 자녀들에 의해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비록 지혜있는 자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들어야 하며, 자기들 스스로가 너무 지혜로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혜있는 자는 자기 자신의 결점을 인식하고 있다(plurina ignoro, sed ignorantian mean non igncro-즉 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무지하다. 그러나 내 자신이 무지하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 앞으로 전진하는데 이는 "학식을 더 하기"위함이며, 더 많이 알고 더 잘 알고, 보다 명석하게 보다 분명하게 알며, 지식이 사용법을 보다 잘 알기 위함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모든 유용한 학식의 증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Qui non auget scientian, amittit de ea-즉 만약 우리 지식의 창고가 불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가장 위대한 랍비 중 한 사람이 했던 명언이다. 그리고 학식의 증가를 원하는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한다." 현명한 사람은 학식이 더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이득을 끼친다.

1. 상담자로서, 이 지혜의 교훈에서 "명철한 자"는 이 교훈 자체들을 서로 비교해 보고 또 자신의 관찰과도 대조해 봄으로써 점차적으로 "모략을 얻을 것이다." 그는 출세의 유망주로 등장하며 신탁의 상담을 받을 것이고 그에게 공무의 행정이 위탁될 것이다. 그는 "키잡는 자리에 앉게"될 것이다(말이 의미는 그렇다).

근면은 명예를 얻게 되는 첩경이다. 하나님이 지혜로 축복해 주신 이들은 자기들이 활동 영역에서 그 지혜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주의 자문역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 더욱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일이고, 욥이 자기 지혜로 그러했던 것 같이(욥 29:15,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었다") 불쌍한 자의 조언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자비로운 일이다.

2. 해설자로서(6절)-즉 "잠언을 이해하는" 해설자로서. 솔로몬 자신은 수수께끼를 해설하고 난문난제를 푸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기문난제 놀이는 옛날 동방의 군주들에게는 매우 인기 높은 오락이었다. 솔로몬은 바로 스바의 여왕이 그를 골려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낸 물음을 척척 알아 맞힌 장본인이었다. 이제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독자들에게 최선의 목적에 쓸모가 있을 바로 그 재능을 갖추도록 하려고 기도한다. "저들은 잠언과 심지어 그 해석(우리 성경에는 비유)까지도 깨달을 것이다. 해석을 못하면 잠언은 깨어지지 않는 호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지혜로운 말을 들을 때에 비록 그것이 비유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의미를 포착하게 될 것이며 그 사용하는 방법까지도 알게 될 것이다." "지혜있는 자의 말"은 때때로 "오묘한 말"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깨닫기에 어려운"것이 있다. 그러나 성서에 정통하여 "신령한 일을 신령한 것으로 분별"할 줄 아는 자들(고전 2:13)에게는 그런 말씀도 쉽고 든든한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을 깨닫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예, 주여"하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직한 자들이 깨닫는 자가 될 때 그것은 기독교의 명예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사람들은 총명한 자가 되도록 해야하며, 자기들의 "지식이 증가되도록 하기 위해 이리저리 달려야 하며"그 수단의 이용에 고심해야 한다.

 

 

 

  ● 경외함과 공경(잠언 1:7-9)

"젊은이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가르치려고" 기도하였던 솔로몬은 그 목적을 위해 여기에 지켜져야 할 두 가지 일반적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이 두가지 기본 도덕률로 자기의 금언을 시작하는데 그중 전자는 극히 타락된 표현으로 되어 있다. primum, deos immortales cole, parensque hmora-즉 첫째, 죽지 않는 신들을 경배하라. 그리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젊은 사람들은 바람직한 모습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도록 해야 한다.

Ⅰ.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기들의 지존자로서 존중하게 하자.

1.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진리를 기록하고 있다(7절). 난외주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주요 부분"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지식의 머리인 것이다.

(1) 즉 알려진 모든 일 중 극히 명백한 것은 "하나님은 경외 받을 분이시며" 존중받고 섬김을 받고 경배 받을 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식의 근원이 되며, 따라서 이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2) 온갖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극히 필요한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성스런 경외감으로 사로잡혀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생각이 그에게 복종하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어진 교훈으로 유익을 얻을 자격도 없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훈에 대하여 알 것이라"(요 7:17).

(3) 우리의 모든 지식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에서 비롯해야 하듯 모든 지식은 신의 경외를 지식의 완성과 중심으로서 지향해야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자들은 충분히 아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매사에 있어서 그를 기쁘시게 하기에 전력하며 어떤 일에 있어서 그를 노엽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것은 지식의 "알파요 오메가." 즉 지식의 전부이다.

2. 우리이 모든 지식 추구에서 지향하고 편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이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 그는 "미련한 자(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무신론자들)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또 그의 은총도 갈구하지 않는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진로를 피하고 그의 은총을 획득할 수 있는지 말해 준다고 해도 감사해 하지 않을 것이다. 전능자에게 "우리로부터 떠나가시오"하고 말하며, 그를 경외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에게 반항하는 자들이 설사 하나님의 길에 관한 지식을 원치 않고 그 훈계를 무시한다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성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은 미련한 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기지에 대한 예찬론자인 척하더라도 실제로는 지혜에 생소한 자들이고 지혜의 적인 것이다.

Ⅱ. 청년들로 하여금 부모를 자기들의 선배로서 존중하게 하자(8,9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어라."

그가 의미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자녀가 그를 주시하고 자기 말을 준수하며, 자기 문하생들과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모든 자들이 자기를 저희 아비로 존경하며 자녀의 심정으로 자기 교훈에 주목해야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자녀가 자기들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며 율법의 제 5계명을 따라서 부모가 베푼 고결하고도 경건한 교육에 순응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1. 그는 부모들이 자기들이 모든 지혜로 자녀를 훈계하며 자기들의 모든 권위로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법을 베풀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지사로 여긴다. 자녀들도 이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부모는 그들에게 훈계없이 율법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즉 인간적인 줄로 그들을 끌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가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할 때 그 이유도 함께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고 방종하기 쉽다. 따라서 훈계와 함께 법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뿐만 아니라 명령도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자기 자녀들의 훌륭한 교육을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한다해도 충분치 못한 게 자녀 교육인 것이다.

2. 그는 자녀들에게 부모가 주시는 좋은 교훈과 법을 받기만 할 뿐 아니라 간직하기도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1) 부모의 교훈을 기꺼이 받아야 한다.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 그것을 듣고 주의를 기울이라. 듣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라."

(2) 굳은 마음으로 그것을 보유해야 한다. "저희 법을 떠나지 말라. 네가 장성하여 가르치는 자들과 다스리는 자들 아래 더 이상 있지 않을 때가 되더라도 너는 자유분방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네 어미의 법은 네 하나님의 법을 따른 것이므로 결코 파기되어서는 안 된다. 너는 네가 마땅히 가야만 할 길로 훈련을 받아 왔다. 그러므로 네가 늙더라도 너는 그 길에서 떠나면 안 된다." 혹자는 이방인의 윤리와 펠샤인과 로마인의 법이 자녀의 그 부친에게 대한 공경만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하여 하나님의 법은 어머님의 존경도 확보해 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3. 그는 이것을 매우 은혜롭고 우리에게도 명예를 가져오는 일로 권장하고 있다. "네 부모와 훈계와 법을 주의 깊게 지키며 그에 따라 살아 간다면 그것은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 될 것이요(9절),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귀한 장식물이 될 것이며, 그것은 저희 목에 금사스를 매단 사람들처럼 너를 매우 돋보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명령을 우리의 관리 되게 하며 제 1급 기장인 SS목걸이가 되게 하자. 우리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탐내야 한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관이나 목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세상이 재물이나 지위로 보다는 자기들의 미덕과 경건으로 스스로를 가치있게 하는 자들은 참으로 가치있는 자들이며 소중히 여겨질 것이다.


●악한 자의 유혹에 대한 경고(잠언 1:10-19)

여기에서 솔로몬은 청년들에게 그들의 지혜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일반적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곧 나쁜 친구의 함정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잠언도 역시 이런 경고로 시작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활기찬 신앙과 일상적 생활에 대하여 이보다 더 파괴적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10절). "내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며 네게 각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 악한 자(혹은 죄인)가 너를 꾈지라도 너는 쫒지 말라."

이 말씀은 부모가 자식들을 세상에 보낼 때 할 수 있는 좋은 조언이다. 사도 베드로도자기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같은 말을 하였다(행 2:40).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악인들은 타인들을 멸망자의 길로 유혹하기에 얼마나 부지런한가. 그들은 꾀고야 말 것이다. 죄인들은 죄를 지음에 있어 동반자를 희구한다. 타락한 천사들은 죄를 짓게 되자 곧 유혹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위협하거나 논쟁하지 아니하고 아첨과 아름다운 말로 꾀는 것이다. 그들은 갈고리에 미끼를 달아 가지고는 방심한 청년을 낚아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저히 악업에 딴 사람들을 끌어들여 동업하게 하고, 말하자며 그 죄에 같이 착고를 차게 만들어 놓고서도, 자기들은 보다 적게 응징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인 것이다. 그들은 그 청년에 대해 한층 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2. 청년들은 그 악인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너는 쫒지 말라(동의하지 말라는 뜻임). 그렇다면 그들이 너를 꾀기는 하나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듯이 말하지 말며, 그들이 행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네게 원하는 대로 행하지도 말라. 또한 그들과는 교분을 갖지도 말아라."

Ⅰ. 이 경고를 강력히 하기 위해 그는 죄인들이 유혹할 때 사용하는 현혹적인 설득의 수법과 불안정한 영혼을 기만하기 위해 구사하는 감언이설의 기교를 폭로하고 있다. 그는 자기들의 패거리에 끌어 넣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는 노상 강도를 묘사한다(11-14절). 그들이 여기에서 청년에게 무슨 행동을 바라고 있는지 살펴 보자. "우리와 함께 가자(11절). 우리와 교제하자." 처음에는 그들이 이것 이사 더 요구하는 것이 없는 것같이 보이나 교제의 요구는 점점 더 높아진다(14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자. 들어와 우리 함께 손잡고 네 힘과 우리 힘을 합치자. 그리고 같이 살고 같이 죽기를 맹세하자. 너는 우리와 꼭 같은 대우를 받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 함께 전대를 하나만 두어 우리가 함께 번 것은 다 같이 즐겁게 쓸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그들이 노리는 바이다. 그들은 두 가지 부당하고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도모하며 그것으로써 저희 희생물을 함정에 빠뜨릴려고 유혹한다.

1. 그 한가지는 그들의 잔인성이다. 그들은 피를 갈망하며 자기들에게 아무런 화를 끼치지 않는 순결한 자들을 증오하는데, 이는 그 결백한 자들이 정직함과 근면함으로 자기들을 부끄럽게 하며 죄를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만히 엎드려 그들의 피를 기다리며 그들은 숨어 기다리자. 결백한 자들은 아무 죄도 자각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위험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무장하지 않은 채 여행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해치기는 훨씬 수월하다. 오! 그들은 산채로 삼키면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12절) 이들 잔인한 자들은 굶주린 사자가 어린 양을 삼키는 만큼이나 탐욕스럽게 이 일을 행할 것이다. 만약 "피살자의 유류품 때문에 살해자들의 정체가 탄로날 것이다"라는 이의가 제기된다면, 그들은 "그럴 위험성은 없어 우리는 그들을 매장하듯이 통채로 삼켜 버릴테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딴 사람을 멸하는 게 즐거움이 될 정도록 인성이 타락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 또 하나는 그들의 탐욕스러움이다. 그들은 그 일로 훌륭한 노획물을 얻었으면 하고 바란다(13절). "우리는 이 사업에 종사함으로써 온갖 보화를 얻으리라. 그 일로 우리 목을 건다고 한들 어떠랴? 우리는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세상 물질에 대해 그들이 품는 생각. 그들은 그것을 "보화"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은 실체도 아니며 귀중하지도 않다(보화라는 말은 원문에서 영어로 precious substance라고 번역되 있는데 substance는 실상, 실체, 물질의 뜻임:역자주). 그것은 그림자요, 허사이며 특히 강탈로 획득한 것은 더욱 그러하다(시 62:10).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사람에게 아무런 확고한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값싸고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의 재물을 보배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자기들의 목숨까지, 아마 영혼까지도 거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귀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을 "보화"로 간주하는 오산을 범하여 파멸에 이르게 된다.

(2) 그들이 기대하는 재물의 풍부함.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집을 채우리라."

죄악으로 장사하는 자들은 큰 매매를 고대하고 그 거래가 무한한 흑자로 될 것을 바란다(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시험하는 자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먹는다는 꿈"만 꾸고 있다. 따라서 지붕꼭대기이 풀과 같이, 온 집안에 그득한 것 같던 것이 거의 한 웅큼도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Ⅱ. 그는 우리가 왜 그들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써 이 길의 유해성을 제시해 준다(15절).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그들과 연합하지 말라. 너는 가능한 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그들의 본을 받지 말며 그들이 하는 대로 행하지 말라." 우리 발이 죄의 길을 밟기 쉽다는 것이 바로 우리 본성의 타락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길을 향해 한치라도 발을 떼는 날이면, 우리발을 금하고 우리 스스로를 견재하기 위하여 필요한 강제력을 사용해야 한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들의 길은 그 본질상 얼마나 해독을 끼치는가!(16절)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하나님께서는 불쾌하고 인류에게는 해로운 악에게로 달려가는데, 이는 그들이 "피흘리는 데 빠르기 때문이다."

죄의 길은 내리받이 길이다. 그 길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멈추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길로 계속 행진하기를 오래하면 할수록 그들에게는 더 빠른 가속도가 붙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나쁜 짓을 충분히 범하지 못하게 될까봐 전전긍긍이라도 하는 듯이 속히 행하며,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작정이나 한 듯 한 가지 범죄가 끝나기 무섭게 다음 행악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한가로이 진행할 듯 말했지만(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피를 흘리자, 11절) 우리는 그들이 아주 급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사탄이 "저희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그 결과는 유독(有毒)할 것인가! 그들이 이 악한 길이 정녕코 그들 자신의 파멸로끝날 것이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길을 고집하고 있다.

(1) 이 일에서 그들은 자기를 잡으려고 펼쳐져 있는 그물을 보면서도 아무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미련한 새와 같다. 그 새는 미끼에 유혹되어 그 물 속에 들어가고 자기 눈이 주는 경고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17절).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참새 몇 마리보다 더 귀한"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새보다 더 많은 지각이 있어야 하고 더 신중히 행동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중의 새보다 더 지혜롭게 만드셨다"(욥 35:11). 그렇다면 우리가 새처럼 어리석어서야 될 것인가?

(2) 그들은 새보다 못하며 우리가 때때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못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다. 새잡이는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인 줄 알기에 새를 기만하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자기의 길 끝에 있는 파국을 본다. 살인자나 도둑은 자기들 앞에 도사린 교도소와 교수대를 바라본다. 아니,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지옥도 볼지도 모른다. 저희 파수군들은 그들이 필경 죽으리라고 경고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들은 죄악으로 뛰어들고 군마가 전장으로 질주해가듯 죄악 속으로 돌진한다.

그들이 굴리는 돌은 실제로 그들 자신에게 떨어질 것이다(18, 19절). 그들은 타인의 피와 생명을 빼앗기 위해 가만히 엎드려서 숨어 기다린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들 자신의 피와 그들 자신의 생명"을 노린 결과가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수치스런 종말에 다다를 것이다. 그들이 설사 치안 책임자의 칼날을 모면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신의 응징(천벌)이 있을 것이다." "복수"는 그들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무엇을 얻으려는 저희의 탐심은 저희에게 반나절의 생명조차 허락하지 않거나 저희의 월수(달수)를 중간에서 끊어버릴 행위도 서슴치 않고 해치우게 만든다. 그들은 "주인의 생명을 잃게 하고" 나서 딴 주인에게로 넘어가 버리는 그러한 재산을 자랑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일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천하를 얻어도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그는 그 이상 더 세상을 즐길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는 일이야 말해 무엇하랴! 많은 자들이 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러하듯 영혼이 멸망과 파멸 속으로 익사해 버리고 만다면 얼마나 무익하랴! 솔로몬은 노상에서 강도짓하려는 유혹만 예시했을 뿐이지만, 이것으로 죄인들이 사람을 꾀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악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술취한 자와 음란한 자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여기 이 땅에서의 파멸과 영원한 파멸을 초래하는 쾌락 속에 탐닉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도 또한 좇지 말아야 한다.

 

 

 

●지혜에 대한 주목을 촉구(잠언 1:20-33)

솔로몬은 이제까지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주었는데 이제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부르심을 경청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위험스런 일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솔히 여기다가는 영원히 그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 보자.

Ⅰ.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가?-즉 "지혜를 통하여." "밖에서 부르"는 것은 바로 "지혜"이다. 이 단어는 "지혜들"(wisdoms)이라고 복수형으로 표기돼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무한하신 지혜가 있음과 아울러 "온갖 지혜"가 있는 까닭이다(엡 3:10).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지혜로써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모든 의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말씀에도 권고가 있으시다.

1. 인간의 오성은 지혜이며, 본성이 빛이요 법이며, 이성의 능력이요 기능이며, 양심의 직분이다(욥 38:36).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며 타이르신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인간은 어디로 가나 자기 뒤에서 "이것이 길이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며, 그것은 항상 작은 소리로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 그것은 부르짖기도 한다.

2. 시민의 정부는 지혜이다. 지혜는 하나님의 율례이며 장관들은 그의 대리인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오만한 자에게 오만히 행치 말라"(혹은 "우매자에게 우매하게 행치 말라"). 말씀하셨던 것이다(시 75:4). 법정이 베풀어지던 "성문 어귀"에서 국가의 지혜인 재판관들이 하님의 이름으로 악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며 개심시킨다.

3. 하나님의 계시는 지혜이다. 계시의 모든 훈령과 법은 지혜 그 자체와 꼭같이 지혜롭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에 의하여서나, 우리에게 축복과 저주를 제시하는 모세 율법에 의해서, 또 지식을 담고 있는 제사장의 입술로나 자기 종된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 말씀의 모든 사역자들을 통하여 자기 마음을 죄인들에게 선언하시고 길거리나 사법 재판소에서 소리 높여 선포하듯 명백히 그들에게 경고를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말씀 안에서 사건을 상의하실 뿐만 아니라 인생들과도 그 일에 대해 토론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

4.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지혜"이시고, 또 "지혜들"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으며," 그는 모든 신적 계시의 중심이시고 "본질적 지혜"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그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죄인을 위해 변론도 하고 그들에게 판결도 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지혜"로 칭하신다(눅 7:35)

Ⅱ. 그는 우리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부르시는가?

1. 매우 공공연하게. 그는 말씀의 혜택을 받으려 하는 자는 누구든 환영하시고 또 모두가 다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관심을 가지셨으며, 귀를 가진 자는 누구든지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부르셨다. 지혜의 규칙은 "바깥 길거리에서" 공포된다. 비단 학교나 제왕의 궁전에서만 지혜의 비결이 전달되는 게 아니라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성문 어귀와 성중"을 오가는 갑남을녀에게도 선포된다. 이것은 고기가 많은 곳에서는 몇 마리라도 잡히라는 바램으로 편안히 던지는 복음의 그물이다. 이 일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는 성전이나 사람이 운집한 곳에서 공공연히 가르치셨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셨으며"(요 18:20), 그의 사역자들에게도 "집위에서" 그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부하셨다(마 10:27). "나는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노라"(사 45:19).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는 말이나 언어도 없다." 진리는 구석진 곳을 찾지 않으며, 미덕은 미덕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이다.

2. 매우 애처롭게 지혜는 "소리 질며," 간절히 바라는 자처럼 또 다시 "소리 지르고 있다.""예수께서는 서서 부르셨다." 지혜는 "그 소리를 발하며," 가능한 대로 분명하게 그리고 애정이 뚝뚝 떨어지게 "자기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듣고 귀 기울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Ⅲ.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1. 그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이 우매를 완고히 고집하고 있음을 꾸짖으신다(22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지혜가 여기서 꾸짖고 충고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그들은 "어리석은" 범주에 드는 자들로서 괄시를 받을 만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는" 그런 부류이어서 전혀 가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대해서 조차 어떻게 든 방법을 강구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부르는 대상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1] "어리석음을 좋아 하는 어리석은 자들." 죄는 어리석음이며 죄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게 행동하며 매우 우매한 짓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들의 상태는 매우 악화된 것으로서 그들은 어리석음을 사랑하고 선악에 대한 자기들의 우둔한 견해를 좋아하며, 하나님의 길에 대한 저희의 어리석은 편견을 애호한다. 그들이 능사로 알고 하는 것은 곧 넋빠진 일을 행하는 것이며, 기껏 잘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기만 속에서 희희낙낙하고 저희 악함 속에서 자화자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거만을 기뻐하는 거만한 자들." 그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소리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교만한 사람들이며, 모든 인류를 희롱하고 자기 구역에 들어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놀려대는 실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 지목하는 것은 신앙 생활을 비웃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가장 죄인들로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법에 승복하는 일을 우습게 알고 그의 말씀의 견책과 권면에 코웃음치며, 신성하고 진지한 모든 일을 무시해 버리는 데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자들이다.

[3] "지식을 미워하는 미련한 자들." 미련한 자 이외에 지식을 미워하는 자는 없다. 경건한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오직 종교의 적이다. 그리고 우매자들 중 가장 못된 자들은 훈계받고 개선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며 진지한 경건에 대해 고질적 반감을 품고 있는 자들이다.

(2) 책망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너희가 어느 때까지 그러하겠느냐?" 이것은 하늘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심과 개선을 바라시며 그들의 파멸을 원치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이 고집과 지체함을 즐거워하시지 않으시며, 은혜를 베푸시게 될 때를 기다리시고 이 사건을 그들과 기꺼이 변론하려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2. 그는 그들에게 회개하여 지혜자가 되라고 인도한다(23절).

(1) 그 교훈은 간명하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만약 우리가 악한 것으로부터 선한 것에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망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책망은 바로 돌이키라는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키라, 즉 너의 정상적 마음으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네 의무를 돌아서며, 돌아서서 생명을 얻으라.

(2) 주어지는 약속들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리석음을 좋아하는 자들은 자신이 자기 자신의 마음과 길을 변화시키기에 전혀 도덕적 무능력 상태하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신(영)을 부어 주리라.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에 착수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네안에서 나와 함께 작용하실 것이고 너로 하여금 선한 의지와 선한 행위를 아울러 소유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만약 이 은혜가 없다면 너는 능히 이것을 행할 수 없으리라."

네 스스로 도우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도와 주실 것이다. "네 마른 손을 내보이라."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손을 강하게 하며 고쳐 주실 것이다.

[1] 이 은혜이 공급자는 성령이시며, 또 그렇게 해 주실 것이 약속되어 있다.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기름처럼, 물처럼 부어 주리라." 너희는 성령을 충만 충만히 받을 것이며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요 7:38).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마다 성령을 주실 것이다."

[2] 이 은혜의 수단은 말씀이다.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돌이키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너희에게 알려지도록 하겠으며,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도록 해 주겠다." 진실된 참회에는 특별하신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는 그것을 정직히 구하고 그것에 승복하는 이들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주어질 것이다.

3. 그는 이러한 모든 은혜의 수단과 방법에 대해 계속하여 완강히 버티는 자들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규모가 크고 매우 무서운 것이다(24-32절). 죄인들을 돌아오라고 불렀던 지혜는 그 부름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살펴 보기 위해 잠시 숨을 돌이켜서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그러나 그들이 정직히 말하지 않으므로"(렘 8:6) 지혜는 그들에게 종국에 가면 어떻게 될지를 계속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1) 죄악이 상세하게 논술되는데, 그것은 극히 노엽게 하는 죄들이다.

저 큰 날에 주제넘은 죄인들에게 내릴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 본다며 그들이 그와 같은 일을 당해야 마땅하며 여호와께서는 그 일에 있어서도 의로우시다고 말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의 복음의 말씀들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율법"의 저주와 "죄의 율법"의 지배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마다 하였던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위험을 경고해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자기 손을 펼치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비참한 상태에서 구출해 내시려고 "자기 손을 내미셨으나" 그들은 거절하였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주목하지도 않았다. 또 어떤 자들은 악의에 차 있었고 고의적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단히 부인하고 배격하였던 것이다(24절).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좋아하셨으며 지혜있는 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을 회복시키려고 취하신 모든 방법에 대하여 한사코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부여하신 자비 속에 "그의 손을 펴셨다."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잘못을 고쳐 주려는 그 손의 역사를 원하지 않으니 모든 것은 허사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손의 운행을 그 입의 선포와 마찬가지로 간주하였고 그의 입의 선언을 거부하듯 이도 배척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충고하셨다. 그들이 잘못 행동한 데 대해 견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더 잘 행할 수 있도록 권면도 하셨으나(이들은 "교훈의 책망"이요 사랑과 호의의 표징이었다) 그들은 "그의 모든 교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멸시하였다." 마치 그에게 꾸중받는 일은 자기들의 체면에 손상에 가고 자기들답지 않는 일이라도 되며 자기들은 책망받을 만한 일이라곤 도무지 행한 기억도 없다는 듯이 "그의 책망을 받지 않았다"(25절). 이 말씀은 30절에도 반복되어 있다. "그들은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권면을 멸시하며 배척하였다. 그들은 책망을 비난이라고 불며 그것을 모욕으로 간주하였다.(렘 6:10). 아니, 그들은 내 모든 책망을 농담이라도 되는 듯이,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는 말인 듯이 모두 멸시하였다."

책망과 선한 교훈에 귀머거리가 되는 자들은 멸망의 낙인이 찍힌 자들이 되는 것이다.

[3] 그들은 정당한 이성이 지배와 경건한 신앙에 복종하도록 권면을 받았으나, 이러한 것에 모두 반감을 품었다.

첫째, 그들은 지식을 미워하였기 때문에(29절)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신적 진리의 빛을 증오하였던 까닭은 그 빛이 저희의 악한 행위를 그들에게 들어내 주기 때문이다(요 3:20). 그들은 자기들이 알면 견딜 도리가 없는 것을 듣기 싫어하였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경건한 신앙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저희 마음과 저희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하기를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항상 하나님을 두도록" 요구받았으나 그들은 오히려 그를 내쫒고 여호와의 경외를 "자기들 뒤에"두려고 하였다.

"여호와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에게 "지식이 없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2) 선고가 내려지는데 그것은 분명한 파멸의 언도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승복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정녕 그의 진노하심과 저주 아래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며, 복음 그 자체로도 그들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가 자기들 앞에 제공되었을 때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그의 공의의 희생물로 전락함은 당연하다(잠 29:1). 여기에 나오는 위협적인 경고는 저 큰 날의 심판에 가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며, 참회하지 않는 자들은 그 때에 영원한 불행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의 심판에서도 다소 그 전조를 보이고 있다.

[1] 목하 죄인들은 평온무사한 가운데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평안한 생활을 누리며 슬픔이나 근심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보라!

첫째, 그들에게 "재앙이 이를 것이다"(26절). 병이 찾아올 것이니 그 질병들은 바로 그들이 죽음의 구속 영장이나 명부의 사자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 밖에 마음이나 재산에도 여러 가지 재난이 덮쳐 하나님을 멀리 둔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줄 것이다.

둘째, 그들의 재앙은 그들에게 큰 공포를 가져다 줄 것이다. 불안이 그들을 사로잡아 그들은 일이 설상가상으로 악화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심판의 공의가 널리 발효될 때 "시온에 있는 죄인들은 두려워하며, 무서움이 사특한 자들을 놀라게 하리라." 죽음은 그들에게 "왕처럼 두려움"을 줄 것이다(욥 15:21 이하;18:11 이하). 이러한 불안이 그들을 끊임없이 고문할 것이다.

셋째,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로 두려움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임할 것이다"(그들이 불안해 하던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 두려움은 거대한 힘을 지닌 홍수가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 듯이 "광풍처럼 임하리라." 그것은 그들의 "멸망"이 될 것이며, 그들의 전체적이고도 최종적 멸망이 될 것이다. 그것은 "폭풍처럼" 임할 것이니 그것은 모든 겨를 갑작스럽고도 강하게 싹 쓸어가 버릴 것이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용납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공포에 무방비상태로 노출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두려움은 타당한 것이다.

넷째, 그렇게 되면 그들의 두려움은 절망으로 변할 것이다.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라"(27절). 그들은 자기들이 무서워하던 함정에 떨어졌고 탈출할 길도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사을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다(들었다)"(삼하 1:9)고 절규한다. 그리고 지옥에는 괴로움으로 "슬피 울며 이를 갊고 있고," 죄인의 "영혼에게는 환란과 곤고,"즉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열매가 있다(롬 2:8, 9)

[2] 지금은 하나님께서 저희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지만 그 때에는 "그들이 재앙을 마날 때에 웃으실" 것이다(26절). "너희가 나의 교훈을 비웃었던 것같이 나도 너희의 곤란을 비웃을 것이다." 경건한 신앙을 조소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온 세상 앞에서 스스로 조소당하게 될 것이다. 의인들도 "저희를 비웃"을 것이다(시 52:6).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웃으시는 까닭이다. 이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동정으로부터 영원히 차단되어 버릴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비에 대항하여 너무나 오랫동안 죄를 지었으므로, 이제는 그 죄 때문에 자비를 아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의 눈이 보아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도 않으실 것이다." 비록 저들이 "돌이켜서 살게"되기를 원하셨지만, 이제 그의 공의는 그들의 멸망으로 빛나실 것이며 그는 저희 파멸을 기뻐하시게 될 것이다. "아! 내가 내 대적들에게서 나를 편하게 하리라."

[3]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즉시 들으시며 그들이 자기에게 구하려 하기만 한다면 자비로써 그들을 기꺼이 맞으신다. 그러나 그 때에는 문이 닫혀질 것이며 소리쳐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28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라고.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다. 그 때에는 그들이 거절하고 경시하는 바로 그 자비에게 은혜입기를 사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겠노라. 이는 내가 부를 때 그들이 대답하려 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 때의 모든 대답은 한결같이 "내게서 떠나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가 될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사울의 경우에서처럼 이 생에서도 몇몇 사람이 당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림"이나 "선지자"로써도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 생명이 있는 동안엔 기도할 수 있는 여지와 행운을 빌 소망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마지막 심판 때의 가차없으신 공의를 언급하는 게 틀림 없다. 그 때에는 하나님을 멸시하던 자들이 "그를 이른 아침에(즉 부지런히, 열심히) 찾아도" 허사일 것이다. "그들은" 그를 만날 만한 때에는 그를 찾지 않았으므로(사 55:6)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지옥에 있는 부자는 구걸하였지만 거절당하였던 것이다.

[4] 지금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길에 열중하며 자신의 꾀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자업자득("제가 담근 술은 제가 마셔야 한다")이란 격언대로 그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던 것을 충분히 가지게 될 것이다(31절). 즉 그들은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그들은 노임은 그들이 한 일 그대로일 것이며 "그들의 운명"은 자신이 선택한 대로 "될 것이다"(갈 6:7, 8).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첫째, 죄는 멸망을 초래하는 자연적 경향성이 있다(약 1:15). 죄인들이 만일 오직 자기 행위의 열매"만을 "먹게"된다면 그들이 비참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

둘째, 망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하며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핑계를 돌릴 수 없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꾀"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계책을 자만하였는데 이제 그 결과도 자랑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혹(혹은 미혹)을 택하여 주신다"(사 66:4)

[5] 지금은 그들의 자신들의 세속적인 재산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것이 저희 파멸을 악화시킬 뿐인 것이다(32절).

첫째, 지금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외면하고 신앙 생활의 제한 조항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바로 그 일이 그들을 멸망시키게 되며 그것에 대한 기억이 그들의 마음을 찢어 놓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지금 자신의 안보와 육욕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킬 것이다"(난외주는 그렇게 해독한다). 그들이 보다 안전하게 느끼게 되면 될 수록 그들의 멸망은 보다 확실해질 것이며 보다 더 두려울 것이다. 즉 "미련한 자의 안일 (형통)은 자기를 멸망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교만심으로 자신의 번영한 모습을 뻐기고,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집착하고, 자신에게 욕망의 기름을 공급하고, 자신의 악의 길에서 마음을 더욱 강팍하게 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4. 그는 지혜의 훈계에 승복하는 모든 자들은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33절). "오직 나를 듣고, 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으리라."

(1) "그는 안전할 것이다. 그는 하늘의 특별하신 보호아래서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도 그에게 실질적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2) "그는 편안한 것이며 위험에 대한 어떤 불안함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재앙으로부터 안전할 뿐만 아니라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는 편안할 것이다." "비록 땅이 옮겨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우리는 악으로부터 안전하고 재앙의 두려움으로부터 편안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신앙이 언제나 우리를 지배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상담자가 되게 하라.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안연히 살게" 되고, 저 세상에서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편안"하게 되는 길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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