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지혜
(전11:1-8)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이 시대를 일컬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1975년 미국의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라는 분이 이 제목으로 책을 썼고, 이것이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뒤부터 이 책 제목을 따서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늘 불확실성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를 아예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가 너무 빠르고 그 변화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 나타나 세상을 이렇게 뒤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습니까? 예측하지 못했던 소니, 노키아, IBM 같은 세계를 호령하던 기업들이 도태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많은 직업이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또 많은 기업들이 도태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것이 언제 어떤 형태로 도래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우리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누구도 제대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확실성이 과거와 달리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예측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구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이것이 전 세계로 금방 파급됩니다.
예를 들어 2008년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하자 엄청난 파급효과가 일어났습니다. 소위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나전 세계의 금융권이 몸살을 앓았습니다. 미국과 중동의 미묘한 힘겨루기로 기름 값이 폭락하자 전 세계 경제가 한 차례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이제 곧 있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가 전 세계 경제에 자칫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남의 나라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앉아서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모두가 크고 작은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 때문에 만성적 스트레스로 고생하고 있고 크고 작은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특히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정말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전도서는 전도자 솔로몬이 쓴 지혜서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장소를 의미하는 용어 하나가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해 아래에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저 하늘과 대조되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존재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해 아래에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결국 겪게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 하나가 또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헛되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해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전도서는 이 두 용어를 통해서 해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 아래에 살면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겪게 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확실성입니다.
2절을 보면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사람이 해 아래에서 살면서 언제 어떤 재앙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6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가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자가 인생을 살아보니 해 아래에서의 삶은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떤 재앙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고, 자기가 노력하는 일들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도자는 이렇게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투자를 하라
본문 1절을 보면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배로 무역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배에 상품을 싣고 출항을 시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 배가 돌아올 때 돈을 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배를 띄워 출항을 하면 풍랑 때문에 배가 침몰하면 어떻게 하나, 해적을 만나서 다 빼앗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믿음으로 출항을 시켜야 한 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불확실성 시대에 사람들은 투자를 머뭇거리게 됩니다. 자칫 돈을 버는 것은 고사하고 투자금마저 다 날려버릴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다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그저 한 달란트만 가지고 주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고 투자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언제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모르니 재물을 손에 쥐고만 있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확실성 시대에 사람들은 지갑을 잠급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손에 돈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 19: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이자까지 붙여서 더 크게 갚아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 10:42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작은 자에게 사랑의 손을 펴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반드시 상으로 갚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헌당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세계 선교하는 일 중단하고 또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을 중단하고 그 돈을 일단 교회 빚 갚는 일에 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 아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 아래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내부적으로 긴축을 하고 절약하면서도 선교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은 결코 줄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 3: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국교회 미래지도라는 책을 보면 근자에 한국교회에 헌금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십일조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선 소득이 줄어서 십일조가 준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안한 미래와 노후를 생각하면서 십일조를 중단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은퇴자들이 십일조를 중단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믿음의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에 성실하라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바람 없는 좋은 날 씨를 뿌리겠다고 바람을 살피는 사람은 씨를 뿌리지 못할 것이고, 비가 오지 않는 날 추수하겠다고 구름을 살피는 사람은 추수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농사지을 때 풍세도 살펴야 하고 구름도 바라봐야 합니다. 농사지을 때 날씨는 매우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이런 환경 요소가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 탓하며 자기의 불안을 감추기도 합니다. 환경 탓하며 자기의 게으름을 핑계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콜럼부스가 위대한 것은 그가 신대륙에 이르렀다는 것에 있지 않고 신대륙을 향해 닻을 올렸다는 것에 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에는 신대륙 발견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씨 탓하고 거센 바다의 풍랑 탓하며 주저주저하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풍세만 살피지 않았습니다. 구름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닻을 올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콜럼부스와 같은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불확실한 시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에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닻을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완벽한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보지만 그런 환경은 이루어지기 어렵고, 그런 환경이 이루어지면 이미 때가 늦을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또한 저녁에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씨를 뿌린 것이 풍성한 소출을 가져다줄지 저녁에 가꾼 채소가 풍성한 소출을 가져다줄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콤 글래드웰이라는 분이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전문가로서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빌 게이츠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좋은 환경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좋은 환경 아홉 가지를 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유한 부모를 만나서 좋은 사립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운 좋게 남들 접할 수 없는 컴퓨터를 마음껏 쓸 수 있었고, 고등학교에서 역시 수업시간을 빼먹고 컴퓨터 프로그램 짜는 것을 용납해 주었다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좋은 환경이 저절로 빌게이츠를 성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좋은 환경에서 편히 놀며 지낼 수 있었지만 그는 남다른 노력을 쏟아 부어 남다른 성공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확실성 시대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맞아 최선을 다할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어진 오늘에 성실할 때 소중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심판의 날을 생각하라
본문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들을 생각할지로다.” 그리고 9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불확실한 날들이 우리 앞에 있지만 결국 그 날들도 다 지나갈 것이고 우리가 생을 마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불확실한 시대에 사람들은 앞날을 예측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미래학이라는 학문에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서점에 가보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이야기들을 쏟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 불확실한 시대에 성업하는 곳이 점을 보는 곳이라고 합니다. 수능을 앞두고 입시생 학부모가 많이 찾고,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많이 찾는 답니다. 근자에는 기업의 CEO 들 가운데 점집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망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점집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날을 예측해 보려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남보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해서 대비한다면 오늘을 남보다 성공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앞날을 내다보려고 하되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인생 끝자락까지 내다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인생 이후까지 내다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해도 참된 성공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라고 하면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미래를 내다보며 선도적으로 길을 걸으며 큰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애플이라는 퍼스털컴퓨터를 만들어 컴퓨터 시대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고, 아이폰을 만들어 스마트폰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패드와 같은 앞서가는 제품들을 선보이면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갔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불확실한 시대의 영웅이라고 불릴만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희귀암 발병으로 건강 문제로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2004년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 2009년에는 간이식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다 201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시대의 앞을 내다보았을지는 몰라도 자신이 맞게 될 캄캄한 날 그리고 심판의 날은 내다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독실한 믿음의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그는 불교의 참선에 심취했고, 제대로 된 가정도 꾸리지 못했고, 그 많은 재산 허망하게 남기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태풍처럼 지나갈 불안한 미래 너머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같이 해 아래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투자를 해야 합니다.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을 생각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를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박봉수 목사>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전도서 11장)
[1-2절]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 . . .
본문은,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후한 구제를 교훈한다.
본문은 우리가 구제할 때 먹는 음식을 물 위에 던지듯이, 또 일곱 사람이나 여덟 사람에게 나눠주듯이 하라고 말한다. 성경은 구제에 대해 ‘흩어 구제한다’는 표현을 하며(시 112:9; 잠 11:24), 우리가 구제할 때 인색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너그러이 하라고 교훈한다. 신명기 15:7-8, 10,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 . .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9:7,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본문은 구제한 것을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제에 대해 보상하신다. 신명기 15:10,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본문은 땅에는 무슨 재앙이 임할지 알지 못한다고 부언한다. 구제한 돈보다 도적이나 사고로 잃는 돈이 더 많게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우리는 구제를 힘쓰자. 구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명령이다. 구제는 남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복이 된다.
[3-4절]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 . . .
본문은,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고 말한다. 본문을,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듯이 하나님께 물질의 풍성한 복을 받은 자들이 구제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는 자들이 있으나, 본문은 재앙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본다. 폭우가 쏟아질 것이며 나무들이 남으로나 북으로 쓰러질 것이다. 사람이 나무같이 죽고나면 아무 일도 못한다. 재앙의 날과 죽음의 날이 곧 찾아올 것이다. 재앙의 날에는 사람들이 은을 거리에 던지며 금을 더러운 물건같이 여길 것이다(겔 7:19). 우리가 더 이상 선을 행할 힘도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앙을 당하기 전에 선을 행해야 한다. 잠언 3:27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6:10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4:17은,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또,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람을 보고 파종을 미루거나 구름을 보고 추수를 늦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농사하는 자는 웬만한 어려움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에 합한 선한 일을 할 때 어려움이 예견되어도 또 실제로 어려운 일이 좀 있어도 낙심치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전도도, 선행도 그러하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성경 교훈에 맞는 선한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낙심치 말고 행해야 한다.
[5-6절]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 . . .
본문은,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임의로 부는 바람의 길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기압의 변화와 기류의 이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때때로 태풍 때문에 큰 피해를 입는다. 또 우리는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생명의 시작과 성장의 신비를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만사를 성취하시는[아사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 실상 바람도, 생명의 잉태와 성장도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을 때, 또 그가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아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 아무도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본문은,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농부가 씨를 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구원과 성화의 일에서도 그러하다. 고린도전서 3:7은,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 있는 대로, 힘이 있는 대로, 선을 행하고 말씀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10은,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고, 또 오직 우리의 의무를 날마다 부지런히 행하자.
[7-8절]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 . .
본문은,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고 말한다. ‘아름답다’는 원어(마소크)는 ‘즐겁다’는 뜻이며(BDB, NASB), ‘즐겁다’는 원어(토브)는 ‘좋다’는 뜻이다. 태양빛은 일곱 가지의 색깔을 띠는 아름다운 빛이다. 이 빛으로 인해 만물의 형상과 색깔이 드러난다. 사람이 대낮의 불타는 태양을 직접 쳐다볼 수는 없으나, 일출이나 일몰의 아름다운 태양을 볼 수 있다.
본문은 또,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라고 말한다. 다시 번역하면, “그러나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해들을 기뻐할지라도 어두움의 날들을 기억하라. 그것들이 많음이니라. 오는 모든 날이 헛되도다.” 빛은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슬프고 고통스런 시간을 상징한다. 아이들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든지 밝은 낮을 좋아하고 어두운 밤을 싫어한다.
사람은 긴 인생을 사는 동안 밝고 기쁘게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좋다. 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롭게 살면서 기쁘고 즐겁게, 밝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슬픈 날, 고통의 날도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는 슬픔과 피곤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고 심지어 의인이 당하는 핍박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앙망하는 자는 항상 새 힘을 얻고(사 40:31) 또 세상을 이길 것이다(요일 5:4).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위로가 되시며 도움이 되시기 때문이다.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인생을 기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고난도 많음을 알고 고난 중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9-10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 . .
본문은,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말한다. 청년의 때는 꿈과 소망이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는 소원이 많은 때이다. 사람이 늙을수록 꿈과 소망이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다 없어지고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다. 너무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짜증스럽게 살지 말고 쾌활하고 씩씩하게 사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죄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청년 때에 무슨 일이든지 해볼 수 있으나 오직 죄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또,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고 말한다. 결국 인생은 허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청년 때의 생활 원리 두 가지를 말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하다. 하나는 기쁘게 살라는 것이다. 슬픔과 근심은 우리의 심신을 피곤케 하고 해롭게만 한다. 세상에는 항상 고난이 있다. 그러나 섭리자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쁘게 살 수 있다. 또 하나는 악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것을 누리되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탐심이 우상숭배임을 깨닫고 범사에 절제하며, 또 악을 조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9:25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교훈하며, 잠언 3:7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한다.
청년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섭리자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세상을 기쁘게 살자.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범사에 악을 멀리하자. http://www.oldfaith.net/01exposit
권혁재 목사의 다시 읽는 희망의 전도서 <대담한 낙천주의자>
사람의 생애는 울음으로 시작해서 통곡으로 끝난다. 인생의 여정 또한 슬픔과 억울함의 탄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전도서조차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마친다. 문제는 ‘인생은 허무하고 무상하다’라는 전도서의 선언이 모세처럼, 고라의 자손들처럼, 그리고 야곱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의 생애에도 해당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몇 개의 질문이 제기된다. 진정 해 아래 이 세상은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인가? 그리스도인에게도 현세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인가? 우리는 그저 현실을 체념하고 내세만 의지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짐짓 달관한 척하며 견디는 수밖에 없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세 대처의 방식인가? 또한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확인하는 말씀인가? 전도서는 내세 천국에만 소망을 두라는 현실 도피적 가르침인가? 그렇다면 여기 이 생생한 현실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필자는 전도서 전 본문을 일별함으로 이 질문들의 답을 찾고자 한다. 전도서가 인생의 허무함과 현실 도피의 말씀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서언: 수렁에 빠진 허무한 인생(1:1~18) 전도서는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첫 말과 끝 말이 동일하게 ‘헛되다’(1:2, 12:8)이니, 수미쌍관법인 동시에 결론을 내포하고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머리말은 해 아래에서 인생이 헛되게 보인다는 선언이다. 마지막 말씀은 전도서 전체에서 얻어 낸 답을 가지고 평가하는 새로운 선언이다. 머리말은 문제 제기 외에 해답의 어떤 언질도 없다. 저자인 전도자는 도발적인 질문을 터놓고 한다. “인생이 다 헛것일 뿐이라면 대체 이 모든 수고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친 짓 아닌가!” 그는 모든 인생의 질문을 토해낸다. 나아가 신실한 신자의 죽음에 이르는 몸부림을 감추지 않는다. 전도서 곳곳(1:3 2:2 3:9 5:16 등)에서 무엇이 유익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무슨 소득이 있으리오를 토해낸다. 저자의 천명(闡明)은 명료하고도 정연하다. 생은 반드시 죽음으로 귀착된다.(1:11) 그러니 인생의 수고는 쓸데없이 피곤한 쳇바퀴 돌리기다.(1:4~11) 하나님께서 주신 생애란 것이 고작 이런 괴로움뿐인가?(1:12~14) 게다가 이것이 최고의 철학(지혜와 지식)의 결론이라니!(1:16) 그렇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인생은 다만 바보짓일 뿐이다.(1:17) 차라리 생각 없는 목석이라면 좋으련만…(1:18) 이 어찌 허무하지 않은가!(1:2~3) 대체 이것이 다 무엇 때문인가? 잘못 출제된 문제를 풀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해 아래에는 답이 없다. 고차원이지만 왜곡된 문제, 따라서 답이 없는 문제 풀이 속으로 던져진 것이다!(1:15) 여기는 모래수렁이다.
첫째 마당: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2:1~3:15) 1. 도전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솔로몬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뭘 하자고 내가 똑똑했던가?”, 또 “뭘 얻겠다는 건가?”라고 쓴다.(2:2, 15, 22) 단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미칠 듯 한 고뇌’로 동일하다. 솔로몬은 해 아래에서 인생 자체가 희망을 걸만 한 것인지 실험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경주했다.(2:1, 3하) 어리석은 짓인줄 알면서도 육신의 쾌락을 붙잡고서 늘어졌고, 인생의 일대 성취와 거리낌 없는 향유에 전력투구하기도 했다.(2:4~9) 성취와 향유 사이에서 솔로몬은 금한 것이 없었다.(2:10)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진정 답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 많은 시간과 수고가 기껏 바람잡기에 불과했다.(2:11) 그래서 그는 결국 거기에서 오는 웃음은 한낱 미친 짓이었고, 그때에 맛본 희락은 무슨 짓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2:12~15) 해 아래 세상엔 희망을 걸만 한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무엇에든 희망을 걸수록 고통만 가중된다. 현세의 흡족한 성취와 향유에 희망을 걸 수 없는 원인은 바로 죽음이다. 초롱초롱한 눈, 총명한 두뇌로 생의 목표를 성취한 지혜자든, 머릿속이 온통 깜깜하여 생을 형편없이 낭비한 우매자든 결국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바로 죽음이다.(2:12~15) 생시에는 감히 상종도 못 할 현자와 우자가 죽어서는 같은 흙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눕다니, 그리고 똑 같이 잊히고 만다니, 이 어찌 미친 짓이지 않으리오!(2:16)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정직히, 애를 쓰고 살았는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운명이다.(2:17) 아직 살아 기동하는 동안 우리는 죽어 망각된다는 사실을 애써 밀어 내지만, 우리가 그리 하는 이유는 그것을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용감하게 그것을 직시한다. 그의 관찰 보고서는 이렇게 쓴다. “내가 죽고, 잊히고, 그리고 밤을 낮 삼아 노심초사 이룬 나의 성취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고... 아, 이런 운명은 실망스럽다. 이것은 큰 악이다. 슬플 뿐이다. 허무하다.”(2:18~23) 하나님께서 인생 도처에 소소한 행복을 흩뿌리시고 그것을 누리게 하시고,(2:24~25) 부분적이나마 공의가 시행되게도 하시지만,(2:26상) 죽음과 잊힘(死亡)이 만일 전부라면 생은 헛된 바람잡기일 뿐이다.(2:26하) 여기는 희망을 걸만 한 근거가 없다. 인간이란, 그냥 이대로는, 세상에서 아무 소망도 없이 나부끼는 입김(헤벨, 엡 2:12)에 지나지 않는다. 희망, 정녕 걸 수 없단 말인가? 인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수많은 곡절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 태어남과 죽음을 포함한 스물여덟 사건들을 피해 갈 인생은 세상에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기쁘고 슬픈, 환영 받고 미움 받는 온갖 사연들이 뒤엉킨다.(3:1~8) 인간 존재란 이렇게 태어남으로 시작되어 고통 받다 죽어 잊힘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전부인가? 그리고 스물여덟 사건들이 숨 쉴 틈조차 없이 난마처럼 옥죄는 것이 전부인가? 그래서 저자는 또 다시 분노로 읊조리는가? “그 수고가 무슨 이익이 있는가?”(3:9) 2. 반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노고를 신적 혜안으로 헤아려 본 솔로몬은 그 안에서 두 진리를 읽는다.(3:10~11) “하나님께서 이 노고들을 당신의 때에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마다 영원을 심어 놓으셨다.”(3:11)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영원에 잇대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3:14상)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사건들을 영원에 잇대어 지어 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생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 보면 무의미한 파편들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지어 가고 계시는 아름다운 작품의 부분이요 과정들이다. 실로 신비롭지 않은가! 더구나 영원의 갈망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를 경외하는 사람의 인생은 형언할 수 없이 완벽하게 구성된 조형미를 갖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옛적의 일들과 장래의 일들을 가지고 만드시는 솜씨다.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수고를 쓰시면서 당신의 아름다운 작품을 친히 완성해 가시는 진정한 ‘신의 한 수’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동시성’ 발현과도 같다. 모든 인격체는 각각 자신에게 부여하신 자유로운 의지를 완벽히 구사하여 일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격체를 통하여 또한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펼쳐 나가시는데, 이럼으로써 각각의 인격체와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뤄 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과거에나 현재에나 세상만사를 이렇게 경영하시는 줄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만사는 지루한 반복이 아니다.(3:14~15) 하나님의 이 일하심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펼치시는 스물여덟 노고들을 오히려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 기쁨으로 누리며 기꺼이 선을 행한다.(3:12~13)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영생을 주시고 영원에 잇대어 아름답게 내 인생을 빚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상 분노와 절망의 탄식이 아니다. 잃어버린 정답을 회복한 신자의 설의법(設疑法)적 역설이다.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유익이 있고 소용이 100퍼센트 있다. 이 하나님을 영접하여 그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즐거워하는 삶을 영원에 잇대어 사는 경외의 지혜는 대담한 낙천주의를 가능케 하는 유익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이 설명되지 않는 세상의 난마 속에도, 세상사를 저주하거나 비난하거나 도피하지 않는 대신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아름답고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과 더불어 동역하며 이뤄 내는 과정이요 수단임을 알기에, 얼마든지 거기에다가도 희망을 걸고 사는 것이다! 이야말로 신자의 삶의 가장 높은 목적인 하나님 경외, 즉 하나님의 존엄을 높이는 가운데에서도 그분을 즐거워하는 삶이자(시 2:1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 아니겠는가?(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문, 소요리문답 1문)
둘째 마당: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전 3:16~5:7) 1. 도전 해 아래 세상에서는 정의로운 평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3:16~22). 그래서 수많은 인간들이 “억울하다!”고 아우성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인생을 사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을 정의롭게 평가하고 계심을 이제 믿을 수 있다(3:17). 죽음이 궁극적인 정의의 심판이지만(3:18~20) 그 후에 더욱 완전한 평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임을 안다(3:21).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해 아래서의 억울한 사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몫으로 받아 승화시킬 수 있다(3:22상). 참으로 아름다운 몫 아닌가(16:5~6).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도 얼마든지 희망을 걸어도 좋지 않은가! 죽음 뒤에 있을 이 완전히 정의롭고 영원한 평가를 직접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리 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3:22하). 이 영원하고도 완전한 심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흔히 정의가 부정되곤 한다. 정의가 서지 않으면 학대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4:1~3). 완력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등의 폭력이 자행될지라도 정의로운 평가와 심판이 엄히 집행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약자의 눈물을 도무지 닦아 줄 길이 없다(4:1). 그런데 해 아래 세상을 보면 이 문제를 만족할 정도로 해결한 시대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는 삶보다 죽음이 동경 받고, 죽음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이 더 동경 받는다(4:2~3).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타인의 성취를 폄하하는 쪽으로 기운다(4:4~6). 그래서 현세에서 흔히 사람들의 성취는 칭찬보다는 시기를 받는다(4:4). 그러나 시기하는 사람은 미련하다. 왜냐하면 분노에 사로잡혀 팔짱을 끼고 시샘과 미움으로 이를 갈아 봐야, 결국 갉아 먹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4:5). 과연 누가 진정으로 자기 생의 분복들을 감사하고 평온할 수 있겠는가(4:6). 이처럼 부정의, 학대 그리고 시기가 마구 뒤섞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로 고립된 섬이다. 외로움의 문제다(4:7~16). 이 외로움은 홀로 있더라도 그 자체를 즐길만한 것이 아니다. 문학적 표현인 고독이 아니다. 이것은 홀로 있으나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몸서리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비록 혈육이 있더라도 탐욕에 사로잡혀 시기하고 증오할 뿐이라면 없는 것과 다름없어 외로울 뿐이다(4:8. 5:14, 6:3 참고). 사람들은 노회(老獪)한 유력자라고 존중해 주지 않고, 유능한 소장(少壯)이라고 존중해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많이 가진 타인을 밀어낸다(4:13~16). 아, 그러니 세 겹 줄 동무를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받은 은혜가 많은 행복자인가(4:9~12). 2. 반전 이 많은 고난들을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면, 경건한 신자라도 혼란과 낙망에 빠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라면 늘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5:1~7). 이것이 전도서가 천명하는 하나님 경외의 지혜다.(5:7) 이 지혜를 놓치는 사람은 신자일지라도 우매하기 이를 데 없다(5:1 중). 비록 하나님을 믿을지라도 이 지혜를 놓친 채 인생을 산다면 그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피곤하며 절망적이겠는가! 그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하나님의 처우로 인해 주님을 원망하거나 불신앙하는 심리와 언사를 쏟아놓을 것이다. 비록 윤리적 악이 아닐지라도, 신앙 안에 있으나 신앙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이 불안한 심리보다 더한 악이 무엇이겠는가(5:1하~2상).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걱정에 사로잡혀 온갖 망상에 괴롭힘 당한 끝에 불신앙적 언사를 쏟아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 매달리느라 그토록 무진 애를 썼건만 세상의 모든 부조리한 공격을 맨 몸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처사 앞에서 어찌 “서원하고 경외하는 삶이 다 부질없구나.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실수일지 모르겠다”는 신음이 새나오는 게 납득된다.(5:1-6)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그 가슴에 주신 사람에게 지금 여기의 모든 사건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 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는 하나님 경외의 삶, 즉 하나님을 드높이 존중하면서도 이 삼위 하나님을 마음껏 즐거워하고, 또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현실을 마음껏 즐거워하는 경외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임이 옳다. 꿈 같이 헛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되는 대로 함부로 입을 열기 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
셋째 마당: 탐욕, 밑 없는 심연 (5:8~5:20) 1. 도전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거기엔 학대와 부정의가 있다.(5:8상) 물론 우리는 이것이 인간 사이의 암투와 불의가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을 안다.(5:8하~9) 그렇더라도 해 아래 세상에서 학대와 부정의는 끊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시기와 고립이 따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연원이 무엇인가? 탐욕이다.(5:10~17) 끝없는 허기(5:10), 결국은 혼자 다 가질 수 없음에서 오는 불만족(5:11), 어떻게든 더 크게 불려야 만족하겠다는 욕망(5:12~13), 그리고 결국 빈손의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5:14~16), 이 사실들은 그 자체로 근심과 질병과 분노라는 어두움이다.(5:17) 2. 반전 그러나 ‘하나님 경외’라는 지혜를 지닌 신자는 희망에 찬 답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기 앞의 생이 충분히 아름답고 선한 전체 생애의 부분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 현실 속에서도 탐욕에 뒤엉키거나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몫의 수고 안에서 얼마든지 낙(즐거움)을 누린다.(5:18. 3:1~15 참고) 따라서 그는 얼마만큼의 분량이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물이요, 즐겁게 받아 누릴만한 선물임을 이미 알고 있다.(5:19)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셨으며 또 현재의 생을 영원에 잇대어 아름답게 완성해 가고 계신다는 정답을 가지고, 여기에서 오는 기쁨으로 무장된 신자는 더 이상 자기에게 배당된 현실의 몫을 하염없는 불만과 불신앙으로 해석하느라 부심하지 않는다.(5:20)
넷째 마당: 인간, 공동(空洞)의 부르짖음(전도서 6:1~7:14) 도전 재물, 부요, 존귀, 자녀, 그리고 장수... 인간은 행복의 조건들을 부족함 없이 누리더라도 결코 그것들만 가지고는 만족한 마음으로 살고 죽을 수 없다. 존재의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철학적 질문 앞에 솔직하게 서면, 그래서 그 질문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현실에 절망하게 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지 않은가”하고 한탄하게 된다(6:1~6.). 인간이 이렇게 아무리 추구하고 얻어도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그에게 생래적 공동(空洞), 해 아래 세상이 채울 수 없는 공동이 있기 때문이다(6:7, ‘식욕’이 공동이다). 알고 보면 바닥없는 탐욕의 원인은 이 생래적 공동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호조건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지니고 한 세상을 사는 재력가든, 별다른 혜택 없이 그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근근이 연명하는 빈곤한 자든 이 근본적 공동을 채우지 못한다면 바람 잡는 인생을 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6:8~9). 사실 이 천래의 공동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인식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또는 아무리 채우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는 강렬한 공허의 공간이다. 불행히도 인간은 이 공동에 어떻게 대면할 줄 몰라 허둥대다가 죽는 존재일 뿐이다(6:10~12). 반전 이 공동은 바로 하나님 부재, 영원한 생명의 부재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영생의 임재를 만끽하며 사는 신자, 따라서 지금 여기를 영원에 잇대어 살아내는 하나님 경외자는 죽음 저편뿐 아니라 이편까지도 모든 시간과 공간의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아름다운 작품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믿는다(3:11~14). 그렇기에 이 영생의 희열에 찬 신자는 명예로운 죽음이 향수로 덧칠한 생존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7:1). 반면 영생에 잇대어 살지 않는 사람의 죽음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죽음은 모든 허무의 궁극적 원인(3:1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잔칫집과 혼인집보다는 죽음 너머의 영생을 확인하는 초상집을 더 좋아한다. 잠시 육체적 이별을 겪으나 영원한 생명과 내세 천국을 확인하여 뜨겁게 감사하게 되는, 그 초상집의 슬픔과 근심을 더 좋아한다(7:1~4). 누가 참 지혜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주권적 역사를 굳게 의지하며 지상에서도 천국을, 현세에서도 영원을 사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3:1~15. 5:1~7. 6:18~20) 이 생명이 없는 인생의 노래와 웃음은 괴로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7:5~7). 인간은 본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창조됐다. 그러나 타락하여 가슴에 영원한 공동이 뚫리자, 그 공동을 탐욕(뇌물)으로 채워 보고자 몸부림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7:7). 만사의 끝은 내세의 영원, 하나님의 완성작품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세의 시작보다 낫다. 경건한 지혜자라면 하나님의 영원한 완성을 믿어 인내함으로써 교만과 분노에서 터져 나오는 미련한 언사를 제어해야 한다. 이 영적 지혜가 없는 사람은 “차라리 옛날이 오늘이나 내일보다 낫다”라는 말을 쏟아 낸다. “믿어 봤자 다 헛수고야. 희망 따윈 걸지 마”라는 불신앙을 토로한다. 진정한 하나님 경외의 지혜를 지닌 신자라면 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다(7:8~10). 하나님 경외의 지혜는 진정 아름답고 유익하다. 그것은 돈 따위의 순간적 위로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다. 이 지혜만이 그 소유자를 진정으로 살리기 때문이다(7:11~12). 해 아래의 세상만으로는 답이 없다. 그것은 애초부터 뒤틀려 있다. 거기에는 형통과 곤고가 온통 뒤범벅되어 있고, 사람은 그 전후 관계를 능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경외의 지혜자라면 어느 때에든지 아름다운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뻐하며 침착하게 인내할 필요가 있다(7:13~14).
다섯째 마당: 막돼먹은 세상이지만(전도서 7:15~8:8) 도전 세상과 인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인생들은 수많은 사건을 겪는다. 그 일과 사건들이 공의롭게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파멸한다. 반면에 악인들은 그 악한 행위와 삶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한다(7:15). 막돼먹은 세상이다. 반전 애초부터 뒤틀려진 해 아래 세상에서 당연한 결과이다. 이 세상에서 선함과 지혜에 틀림없는 포상이 따른다고 바라서는 안된다. 악행과 미련에 반드시 징벌이 주어진다고 바라서도 안 된다. 완전한 포상과 징벌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인생을 파멸하게 한다. 그 부조화를 감당할 수 없어 자폭하고 말 것이다(7:16~17).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지혜의 신자는 선을 행하는 삶과 악을 버리는 삶을 그저 묵묵히 살 뿐이다. 우리의 목적은 당장 이 세상에서 만사의 완전한 판결을 보는 것이 아니다!(7:18) 이 불공평한 해 아래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가기 위한 절대적이고 강력한 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뿐이다. 사실 사람들이 공평하다고 간주하는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해선 안 되는 기계적 법칙이다(7:19~2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이 천상의 지혜는 다만 인간적인 연구와 궁구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다(7:23~24). 사실 상선벌악(賞善罰惡)과 인과응보라는 일반적 지혜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에서는 전혀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왜곡된 이 세상에서 완전함을 기대하는 심리는 사망보다 더 쓴 아픔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에 잇댄 그분의 아름다운 역사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 올무와 포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7:25~26, 26절에서 ‘여인’은 왜곡된 이 세상에서 인과응보 법칙의 완전한 작동을 기대하는 신념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이라는 지혜의 주소는 어디인가? 성령님의 감동을 입은 솔로몬이 이 지혜의 소유자로 찾은 단 한 사람은 ‘한 남자’(7:27~28, 아담 에핟)이다. 이 ‘한 남자’가 누구일까? 그는 곧 사람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생을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수많은 꾀들을 내었다(7:29).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에 잇대어 살아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삼위 하나님과 영생을 지닌 사람으로서, 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현세를 영원에 잇대어 아름답게 완성해 간다는 믿음으로 사는 신자만 참다운 지혜자다. 그는 현실로 인하여 불만과 불신앙에 휩싸여 사납게 자폭하지 않는다. 고통으로 인하여 얼굴이 일그러지고 신음과 비명이 나올지라도, 그것이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천상의 광채가 발산되는 것을 아주 막을 수는 없다(8:1). 이 지혜가 사물의 참된 이치요,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영원에 잇댄 이치,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섭리의 이치를 충분히 의지하고 살기에, 그는 현실이 다 납득되지 않을지라도, “정말 이따위로 하실 겁니까, 하나님?”을 외치는 불신앙적 사고나 언사나 행실을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다(8:2~4). 그는 미처 다 파악하거나 장악할 수 없는 온갖 일들을 임의로 하시는 이 왕의 전능, 전지, 그리고 선하심을 믿는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 그의 세계관은 더 이상 인과응보적 세계관이 아니다. 해 아래에서 인과응보적 법칙이 완전하게 작동되기를 바라는 신념은 인간을 괴롭히는 악이다(8:5~8). 별도로 한 가지 덧붙일 내용이 있다. 전도자는 7장 28절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영원에 잇댄 이치, 전능하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섭리의 이치를 깨달은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천 명 중에 겨우 하나인데, 여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문법적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겸양이나 과장법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런 지혜를 여자는 절대로 가질 수 없고 오로지 남자만 가질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겸양일 수 없고 또 무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남자’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시다(고전 1:30, 2:6~7, 눅 11:49, 잠 8~9장, 사 11:2). 또한 하나님 경외의 지혜는 특수 신자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신자가 향유해야 할 은혜다. 그런데 이 은혜를 오직 ‘한 남자’에게서만 발견했다고 하니, 이것은 구원으로써 모든 신자가 지니게 될 은혜가 아니고 본유적 은혜다. 이 은혜를 본유적으로 소유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시다. 신자들은 우리의 지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여섯째 마당 : 듣지 않는 법칙(전도서 8:9~13) 도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박해하고도 평화롭게 살다가 죽고, 그 악행이 문제되지 않은 채 슬그머니 덮이고 잊히는 일이 세상엔 많다. 성실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억울하고 허무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세상사는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다. 인과응보, 상선벌악의 법칙이 꼭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악인들이 더욱 용기백배하여 악을 행하게 된다. 심지어 악인이 선인보다 더욱 번성하고 장수하는 모순도 흔히 일어난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법이다(8:9~12상). 반전 그러나 참 신자는 분명히 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삶만이 영원히 아름답게 완성될 것임을 말이다. 여기에 비하면 악인의 번영과 장수는 실체가 아닌 그림자일 뿐이다(8:12하~13).
일곱째 마당 : 체념 아닌 신앙(전도서 8:14~17) 도전 해 아래 세상에서 더욱 분통 터지는 일도 있다. 의인이 악인처럼 해를 당하고, 악인은 오히려 의인처럼 형통하는 일이다(8:14).
그러나 경건한 지혜를 지닌 신자라면 하나님께서 이런 불의를 알고 계시며, 자신은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복을 즐겁게 누리며 기쁘게 사는 것이 옳음을 또한 안다(8:15). 사람에게는 사건들의 전말이 감춰진 상태로 진행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완성해 가신다. 신자는 이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한계 밖까지 다 알아야만 되겠다는 듯이 외람되게 애쓰는 대신, 하나님의 전능하고 전지한 섭리를 의지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히 여긴다(8:16~17, 롬 11:33~36·시 131:1~3 참조).
여덟째 마당 : 생의 예찬(전도서9:1~10) 도전 의인이 미움을 받고 악인이 사랑을 받기도 하는 것이 해 아래 세상의 사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왜곡된 세상의 사정을 모르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 어그러진 흐름을 그대로 쓰고 계신다(9:1). 세상의 불확실하고 불공정한 처우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의인, 선한 자, 깨끗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 그리고 맹세하는 자(6:13)가 미움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악인, 깨끗하지 않은 자,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사랑을 받을 때도 있다. 그릇된 대우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러다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죽음으로 생을 마무리한다. 죽음이라는, 참으로 악하고 무자비한 법칙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선인에게도 악인과 동일하게 들이닥쳐 파괴하는 것이다(9:2~3).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9:3하)는 말씀처럼, 어찌 사람이 악에 받쳐 미치지 않겠는가! 반전 그래도 살아 있으면 아직 소망이 있다.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음으로써, 죽음을 생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한 과정으로 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었고,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거룩하게 승화되었을 것이었다(9:4~6). 그러하니 영원한 생명의 한 부분으로서의 해 아래에서의 생은 얼마나 찬란한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셔서 그의 생애 전체 사건들을 피로 씻어 구속하여 받아 주시는 생애의 순간들이란 얼마나 거룩하고 찬연한가! 하나님께서 그 생의 사건들 전체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실 사람의 생애는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잔칫집처럼 기쁨으로 먹고, 즐거움으로 마시며, 그리고 정갈하고 고아하게 몸과 마음을 단장할만 하지 않은가!(9:7~8) 그저 허무할 수밖에 없던 나날들이 이제 하루하루 다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로 변했다. 인간은 더 이상 덧없는 그림자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을 담은 보석함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작품은 당연히 창조의 꽃인 두 사람이 모여서 사람을 생산하고 양육해 내는 아내와 남편이요 그 둘의 가정이다. 이 신자들의 식탁은 진실로 영원 천국의 식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해 아래 세상의 일과 계획과 지식과 지혜도 의미 없이 흘려 떠내려 보낼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분복으로서 선용하여 누릴 선물들이다(9:9~10, 시 128:1~6 참고).
아홉째 마당 : 채비를 갖춰라(전도서 9:11~11:8) 도전 이제 마무리를 위해 정리한다. 해 아래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다. 성실하고 희생적이며 지혜롭고 명철하며 유식하다고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여기는 온갖 재앙의 때와 사건들이 지뢰처럼 묻혀 있다. 당혹스럽게 이 재앙들은 착한 사람에게까지 자주 임한다(9:11~12, 여기에서 ‘시기’(에트)와 ‘기회’(페가)는 동의어로서, 3:1의 ‘때’나 ‘사건’과 같다.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지만, 문맥상으로 12절의 ‘재앙의 날’을 가리키므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인간이란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 미천한 사람의 조용한 지혜는 그 훌륭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멸시당하기 일쑤다(9:13~16). 비록 내용이 올바른 것이더라도 그것을 제시하는 사람이 강경하지 못하고 온순하기만 해서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목소리가 큰 악인 한 사람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 일를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9:17~18). 인간이란 강포한 비진리의 힘에 굴복하여 스스로 존귀성을 포기해 버릴 만큼 약하고 악하다. 이는 마치 죽은 파리 몇 마리가 향수 전체를 변질시키는 것과도 같다(10:1). 지혜자와 우매자는 오른쪽과 왼쪽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우매자는 심지어 어리석은 논리인 줄조차 모르고 주절주절 그것을 늘어놓곤 하는데, 이 무식한 주권자가 해 아래 세상에서 대중의 환영을 받기 일쑤다. 그러니 여기를 살아내려면 다소 비굴하더라도 공손한 재략(shrewd)을 발휘해야만 한다(10:2~4). 해 아래 세상은 미련한 힘이 정의로운 진실을 짓밟을 때가 많다. 여기는 흔히 이렇게 질서가 전복되곤 한다(10:5~7). 반전-1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단단히 채비를 갖춰야 한다. 그 채비가 무엇인가? 앞서 말한 그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다(10:8) 긴 호흡으로 살펴 본 바와 같이 해 아래의 세상은 위험하다. 대단히 위험하다. 이 세계는 애초부터 답이 누락되었고, 그 구조가 뒤틀렸으며, 일반적인 정의의 법칙이 자주 먹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이 이렇게 위험천만한 곳임을 미리 알고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로 단단히 무장하고 들어서지 않으면, 순수한 신자라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 끝없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는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일생을 마쳐서야 신앙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이 지혜의 연장을 날카롭게 연마해야 하고, 이 방책을 미리 베풀어야 한다(10:8~11). 이 지혜가 아닌 다른 인생관들은 모두 다 제 인생을 삼키고 미치게 만드는 이설(異說)들일 뿐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인간의 생애를 영원에 잇대어 책임질 것인가? 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사실 인생을 감당할 입구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수고는 하면 할수록 더욱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10:12~15). 무지하고 무력한 관료들이 올바른 방책도 없이 그저 흥청망청 연락만 즐기면, 국가는 쇠한다. 반대로 국사를 바르고 힘 있는 책략을 가지고 질서정연하게 운영하면, 국가는 흥하는 것이 당연하다. 잔치도 좋고 희락도 좋으며 또 포도주도 즐겁지만, 바르고 강력한 정책과 실력을 충분히 갖춘 상태에서나 통하는 것이다. 국정에 대한 힘 있는 정책과 실력을 미비한 채, 일도 할 줄 모르고 게다가 흥청망청 눈앞의 연락만 즐기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 분명하다. 필수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로 잘 무장하고서 인생에 임하는 것이다. 이 지혜는 마치 풍부한 돈의 힘처럼 인생 전체의 성패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지혜가 없으면 생애 전체가 그릇가게 된다(10:16~19). 해 아래 세상은 그저 성실하게 그저 정직하게만 살면, 정직한 보상을 받는 그런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대단히 위험한 곳이다(10:20). 반전-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로 단단히 채비를 갖춘 후에 신자는 대범하게 인생에 돌입해도 좋다. 담대하게 생을 투자하라. 위축될 필요가 없다. 염려에 찌들어 위축되어 산다고 해서 반드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잃고 얻음은 하나님께서 영원에 잇대어 결정하신다(11:1~2).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질 수밖에 없지 달리 무슨 일이 생길 수 있겠는가?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을 수밖에 달리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며 ‘바꿀 수 없는 숙명’이라고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신자라면 절대로 그런 소심하고 비관적인 심정을 가져선 안 된다. 전지, 전능,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즉 ‘거룩한 신의 한 수’를 믿는 신자라면 그렇게 바람과 구름 탓만 하며 하염없이 움츠릴 필요가 없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을 그것의 길로 불게 하시고 태아의 뼈를 완전하게 자라게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신자는 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 그러므로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든 이미 저물어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밤중이든, 그는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용감하게 생을 투자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넘겨 드린다(11:3~6). 아, 이 지혜로 단단히 채비를 갖춘 경건하고 대범한 낙천주의자에게는 장엄한 태양빛을 눈으로 직시하는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도 벅찬 희열이겠는가! 그에게 있어서 삶은 더 이상 피곤한 노고일 수 없다. 비록 많은 어둠과 위험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는 여기에서 더 많은 대로(大路)들과 더 깊은 샘을 발견할 테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11:7~8). 그는 이 해 아래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희망을 걸고 살 수 있음을 누누이 확인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고 지상에서 천국을, 현실에서 영생을 살아가는 하나님 경외자야말로 대범한 낙천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냉소적일 수 있다. 하지만 대담한 낙천주의자가 되라.” 이 신자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이 신자에게 있어서는 오늘 여기의 모든 삶도 얼마든지 희망을 걸만큼 경건한 삶이다.
열째 마당: 희망, 얼마든지 걸어라(전도서 11:9~12:8)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지혜, 이 지혜로 채비를 갖춘 신자는 이제 인생의 황금기인 ‘청년’으로 불러도 좋다. 이러한 신자라면 언제든지 자기 인생의 순간들 전부를 푸르른 청년의 날처럼 기뻐하며 용감하게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지혜를 지닌 신자라면 여기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희망을 걸만하다는 것이 거듭거듭 확인됐다. 다만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넘어서지만 않도록 경계한다면 말이다(11:9). 이제 하나님과 그분의 위대하신 섭리를 굳게 믿으니 여기 이 세상에서 모든 정의가 확정되어야만 한다는 그릇된 신념의 악을 제거해 내라. 거기에서 오는 끝없는 근심의 악을 떠나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앙하면서도 불신하고, 의지하면서도 근심하면서 소중한 인생을 허공으로 날리고 말 것이다(11:10).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곧 청년)라면 마땅히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인생을 다 허비한 후 어떤 시도도 이제 허용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12:1),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인생의 쇠락을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12:2, 전 3:11 참고). 죽음에 이르는 쇠락은 이렇게 그려진다. 그렇게도 강하고 날쌔던 팔다리가 후들거려 날벌레 한 마리조차 쫓아내기 힘들다. 곧게 세워 주던 스물여섯 개의 튼튼한 뼈들은 진액이 빠져나가 등허리가 굽는다. 반짝이던 서른두 개 치아들은 닳고 빠져나가 음식을 씹기 힘들다. 그토록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은 백태가 껴 앞이 흐릿하다(12:3). 또렷이 들리던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청력 감퇴다. 전신의 근력과 기력이 쇠약해져 이제는 일을 손에 잡기가 힘들다. 새벽잠이 없어지는 통에 작은 새소리에도 눈이 뜨인다. 윤택하고 우람하던 음성이 갈라지고 탁해져 쇳소리가 난다(12:4). 한 때는 높디높은 지붕에도 오르내렸는데 이제는 골이 흔들려 걸상 위에도 못 올라선다. 포탄이 작렬하던 전장에서도 의연했었는데 이젠 길거리의 소음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밤처럼 검었던 머릿결은 시나브로 이슬처럼 하얗게 변했다. 동무를 목말 태우고 힘차게 내달렸었는데 메뚜기 한 마리도 짐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 내가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내 집 문간을 찾을 때가 가까이 왔다(12:5). 은줄처럼 영롱하던 육신의 생명이 풀려 떠나간다. 금 그릇처럼 찬란하던 육체의 생명이 해체된다. 한없이 길어 담을 것 같던 생명의 항아리가 샘 곁에서 스러진다. 끝없이 달릴 것 같던 생명의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진다(12:6, ‘우물’(보르)은 ‘무덤’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 나의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 순간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늦다. 현세와 내세가 모두 다 헛되고 헛될 것이다(12:7~8).
결언(전도서 12:9~14) 전도서의 저자는 진정한 지혜자였다. 그래서 깊고 넓은 연구의 결실로써 잠언과 진리의 말씀들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또한 그는 많은 말씀들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의 말씀들뿐 아니라 다른 지혜자들과 스승들의 말씀들 역시 모두 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자는 다른 많은 책들을 저술하고 연구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들을 심비에 깊이 새기고 연구하며 경계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피곤만 가중된다. 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 이분을 경외하면서 그 명령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고 즐거워하며, 여기 해 아래의 생애 전 과정을 이분께서 주신 본분으로 받아 영생에 잇대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생애 속에서 함께 일하시면서 우리의 생애 전체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하여 가심을 믿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해 아래 세상의 생애는 더 이상 무의미한 허비가 아니다. 얼마든지 희망을 걸만한 거룩한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일생 전부가 여기에 맞는지 여부를 평가하신다.
결론: 전도서는 복음이다 전도서는 해 아래 세상과 그 안의 인생사 전부를 다만 ‘허무’일 뿐이라고 고발하는 글이 아니다. 해 아래에서는 희망을 걸만한 가치가 전혀 없으니 신속히 내세 천국으로 도망하자는 사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근거 없는 주장으로 신자의 현세를 장밋빛 융단으로 포장하는 속임수도 아니다. 전도서는 많은 눈물 골짜기와 어두운 계곡을 신자가 걸어 나갈지라도,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되는지를 거듭거듭 확인시켜 주는 천둥소리다. 현세와 내세를 분리하지 않고, 차안에서 피안으로 도피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의 영생 안에서 여기와 저기가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격문(檄文)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지혜,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지으시고 그것을 더 나아지게 회복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영접하여 그를 높이고 즐거워하며, 동시에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신과 해 아래에서 자신의 생애를 영원에 잇대어 존귀하고 즐겁고 대담하게 향유하는 삶이 바로 신자의 인생관임을 본서는 천명한다. 현세와 영원이 거룩한 가치로 잇대어 있으니 이 지혜를 지닌 신자라면 오늘 여기에서 자신이 살아 내는 모든 일들, 그리고 그것들을 신성한 작품으로 아름답게 완성해 내실 하나님께 대담하게 희망을 걸고 살아가라고 전도자는 격려한다. 이런 확신이 진정 자신의 것이 된 신자만이 그야말로 눈물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전도서는 복음이다. <끝>
권혁재 목사(민들레교회) ekd@kidok.com |
cafe.daum.net/correcttheology
< 그림: faith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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