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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메소포타미아 문명 / 천년왕국 - 수메르 문명 / 이집트 문명

by 은총가득 2021. 8. 31.

메소포타미아 문명 / 천년왕국 - 수메르 문명 - / 글의 기억, 쐐기문자, 설형문자 

​글의 기억

 

수메르의 신관들은 위대하며 자랑스러운 신들의 이야기를 후대에까지 전하길 원했다. 또 갈수록 복잡해지는 제례의식 절차도 빠짐없이 기록해야했고, 신전으로 들고나는 물품과 경비도 기록해두어야 했다. 또 사회가 점점 분화되고 사람들 사이에 거래와 계약이 빈번해지면서 이제 머리로 기억하고 말로 약속하는 데에는 한계에 다다랐다.

이런 요구는 수메르에서 최고의 지적능력을 갖춘 엘리트 집단인 사제들로 하여금 드디어 인류최초의 문자를 만들어내게 했다.

이들은 수메르지역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강가에 널린 점토를 반죽해 사각형의 넙적한 점토판을 만들어 거기에 갈대 끝으로 글을 써서 보관하기 시작했다. 만약 영구적인 보전이 필요할 경우 기록한 점토판을 그늘에 말리거나 불에 구워 단단한 상태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문자는 쐐기 형태의 문자(설형문자, 삼각형형태의 문자)였다. 그들이 발음해낼 수 있는 모든 음을 각기 하나씩의 글자에 대응시켜 만든 문자였다. 즉 알파벳이나 한글처럼 각 문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나눠 조합시켜 소리를 표현하는 체계와는 달리, 하나의 발음(음절의 발음) 당 하나의 글자가 존재했던 것이다.

표음문자이기는 했으나 마치 한문처럼 무수히 많은 글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째로 암기하여 머릿속에 집어넣어야했으므로 글을 배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문서작성은 신관들이나 전문적인 서기들이 담당해야만 했고, 훗날 서기를 양성하는 학교까지 생겨났다.

 

​(수메르의 대도시 우르의 상상도)

 

 

 

20세기 초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이들 점토판 문자의 해석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잊혀졌던 천년왕국 수메르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수메르의 점토판은 엄청난 분량이 남겨져 있다. 가히 고대의 백과사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가 총망라되어있다. 예를 들어 천문, 수학, 법률, 의학, 신화, 역사, 문학, 예술 등 대형 서점에서 각 코너를 알리는 작은 푯말 전부에 해당하는 방대한 영역과 이에 대한 그들의 깊은 생각이 수천 년을 흐른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겨진 것이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의 언어를 관찰해보면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언어는 우리나라 말에서 ‘은’ 는’ ‘을’과 유사한 조사나 접두사 접미사를 쓰고 어간과 어미로 나눌 수 있는 교착어였다. 현재까지 교착어를 쓰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터키, 몽골, 일본 정도다

 

게다가 단어의 발음에서도 우리말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수메르어로 ‘아버지’는 아범 혹은 아붐(Abum), ‘아버지의’는 아비(Abi), ‘어머니’는 어멈 혹은 엄멈(Ummum), ‘동생’ 즉 ‘아우’는 아후(Ahu), ‘하늘’은 아누(Anu) ‘물’은 무(Mu), ‘나의, 내 것’은 나가(Naga), 하늘에 뜬 '달'은 달(Dal), 논밭 할때 '밭'은 바드(Bad), '바람'은 바라(Bara)…….

 

정말 놀랍지 않은가! 실제 수메르인들의 기원은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즉 이들이 어디서 출발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해왔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지만 여기선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겨두기로 하자.

 

수메르인들이 문자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지만, 수메르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사회를 이룬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기원전 8000년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이 멸망한 것이 기원전 2400년경이니 이들의 문명은 길게 잡으면 4, 5천년, 짧게 잡아도 약 1000년의 번영을 누린 셈이다. 수메르를 부름에 ‘잊혀진 천년 왕국’이라고 칭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 그럼 이젠 수메르로 시작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맞은 편 이집트 문명의 탄생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와 보자.

* 다음은 어떤 사이트에서 가져온 수메르 언어와 우리말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재밌는 자료입니다.

영어; 수메르어 - 한국어 순​

​I: Na(Sumerian)-Na(Korean)
Farm: Bad(Sumerian)-Bat(Korean)
Road: Gir(Sumerian)-Gil(Korean)
Father: Abi(Sumerian)-Abi(Korean)
Father(vocative): Aba(Sumerian)-Appa(Korean)
Mother: Uhma(Sumerian)-Uhma(Korean)
Person(formal): Nim(Sumerian)-Nim(Korean)
to: ra(Sumerian)-ro(Korean)
He: Ge(Sumerian)-Ge(Korean)
This: I(Sumerian)-I(Korean)
Slave: Lu(Sumerian)-No(Korean)
Morning: Asa(Sumerian)-Asa(Ancient Korean)
what, which: A-na(Sumerian)- O-nu(Korean)
Half: Ba/Bar(Sumerian)-Ban(Korean)
pounded grain: Zi(Sumerian)-Ssi(Korean)
Urine: A-sur(Sumeriam)- O-jum(Korean)
First: Ash(Sumerian)-Asi(South-east dialect of Korea)
wall: Bad(Sumerian)-Byog(Korean)
Hand: Su(Sumerian)-Son/Su(Korean)
Ear: Gizzal(Sumerian)-Gui(Korean)
Nose: Kiri(Sumerian)-Ko(Korean)
cut into, divide: sil(Sumerian)-ssol(Korean)
to cut: gun(Sumerian)-Kkun(Korean)
smooth: sal(Sumerian)-sal(Korean)
smell: ni(Sumerian)-ne(Korean)
count: shid(Sumerian)- se-da(Korean)
alone: diri(Sumerian)- ttaro(Korean)
exclusive: Diri-diri(Sumerian)- Ttaro-ttaro(Korean)
Pool,swamp: umun(Sumerian)-umul(Korean)
Wind: bara(Sumerian)-baram(Korean)
Write: sar(Sumerian)-ssu(Korean)
Foot race: dal(Sumerian)-daligi(Korean)


2. 오시리스의 왕국

 

나일의 선물

 

이집트의 어머니인 나일은 크게 두 줄기 강이 중류에서 만나서 큰 강을 이루는데, 하나는 서쪽에서 흘러오는 백나일 강, 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굽이쳐오는 청나일 강이다. 물 색깔에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인데, 둘 중에서 청나일 강이 길이는 짧지만 더 많은 수량을 자랑하는 나일의 본류에 해당한다

 

자연스럽게 합쳐진 두 강은 하나의 물줄기로 유유히 흘러내려 장대하고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 했던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의 명언은 정확했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이 가져다준 혜택을 입고 찬란함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

(​상, 하 이집트를 보여주는 지도)

그러나 나일강 역시 해마다 범람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도 물을 다스리는 일은 중요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나일의 범람은 그 시기가 해마다 거의 일정했다. 결과적으로 이집트인의 물 문제는 현실적 공포라기보다는 오히려 축복에 가까웠다. 범람은 상류로부터 끌어내린 기름진 퇴적층을 하류까지 운반해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나일이 범람하면 농토의 경계선마저 분간하기 힘들어져 곤욕을 치르지만, 이런 범람과 복구가 매년 똑같이 반복되면서 이를 해결하는 방법 역시 고안되었다. 땅의 이전 모습을 구분해내기 위해 이집트에선 일찍부터 측량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이런 측량술은 도형을 다루는 기하학의 토대위에 발전했으며, 이는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쌓아 올릴 기술적 밑거름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수메르인들의 경우 예측 불가능한 홍수는 내세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홍수방지를 위해 절대적 신에 의지하는 것 이상의 바람, 즉 사후 세계에 대한 염원은 사치였다. 따라서 수메르의 종교는 내세신앙이라기 보다는 현실적 구복신앙의 측면이 강했다. 이에 비해 나일의 범람을 쉽게 극복함으로써 현실문제에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이집트인들은 내세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여유로움이 있었다.

 

내세와 종교에 대한 양 문명 간의 관점의 차이는 홍수의 특징적 차이뿐 아니라 지형적 차이에도 기인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사방으로 개방되어있어 여러 족속들이 몰려들어 흥망을 거듭하는 혼돈의 무대가 될 운명인데 반해, 이집트는 폐쇄적인 지형 탓에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고 안정된 현실을 바탕으로 내세, 즉 영원한 미래세계에 대한 희망에 전념할 수 있었다. 북쪽의 지중해, 동쪽의 홍해, 또 서쪽의 사막지대가 오랜 세월 동안 외부의 적을 막아주는 자연 방파제가 되어준 셈이다.

 

이렇게 주위 지형이 평온하게 감싸 안은 보금자리에 감춰진 이집트는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나일강 연안을 따라 도시들을 세워나갔다. 따라서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연안만 잘 관리하면 왕국을 손쉽게 유지할 수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가 쉽게 달성하기 어려웠던 중앙집권 통치를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이뤄낼 수 있었다.

 

이렇듯 이집트를 둘러싼 고립에 가까운 환경 요소는 독특하며 독창적인 이집트 문명을 가능케 한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서 자유롭고, 언제나 같은 시간에 넘쳐흐르는 강과, 그 강이 선사해주는 비옥한 농토, 또 곡식을 알차게 여물게 해주는 태양……. 이집트 문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홍수로 범람한 나일강

 

 

 

고대 이집트는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보통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으로 구분한다.

각 시기는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중간기’라는 탈바꿈 과정을 거쳤다.

즉 고왕국과 중왕국 사이에 1차 중간기, 중왕국과 신왕국 사이에는 2차 중간기가 있었다. 중간기란 내부적 갈등 또는 외부세력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겪었던 혼란과 동요의 흔적이라 봐도 되겠고, 또 유충이 성충이 되기 위해 중간에 거치는 변태 과정이라 봐도 되겠다.

 

이집트 문명의 시작은 기원전 약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만 해도 초기 이집트는 지역별로 두 개의 세력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나일강을 따라 상류 즉 남쪽에는 상이집트가, 또 하류에는 하이집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대치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설에 의하면 물론 연속적인 것은 아니고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일부 세력이 홍해를 거쳐 상이집트 방향으로 진출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단기간 속성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상이집트는 하이집트에 비해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고, 끝내 통일의 주역으로 성장한다. 상이집트의 왕 ‘메네스‘가 두 개의 이집트를 통일시킨 것이다. 그는 나일강 하류 삼각주 인근 멤피스에 수도를 정하면서 이집트 문명의 첫발을 내딛었다.

​최초의 파라오라 불리는 메네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한 문명의 싹이 홍해를 통해 이집트로 전달된 해상경로)

 

 

잘 알려져 있듯이 이집트의 통치자는 파라오라고 불렸다. 파라오란 원래 큰집, 궁전을 뜻하는 말로,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스스로를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 혹은 ‘신의 대리인’으로 여긴 반면, 이집트 파라오들은 스스로를 신 그 자체로 여겼다. 파라오는 신이요, 절대자였다.

지상에 내려온 살아있는 신이 죽어 내세에서 영원히 살아야할 또 다른 궁전인 무덤은 신의 격에 걸맞게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해야만 했다. 피라미드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고왕국시대 파라오들은 다른 시기와 비교해 훨씬 많고, 좀 더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흔히들 고왕국시대를 ‘피라미드 왕국시대’라고도 한다.

 

이집트 기자에 아직도 우뚝 서있는 쿠푸 (Khufu)왕의 피라미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그 높이만 146m에 달하고 하나가 2.5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돌 2백만 개를 정교하게 깎아 쌓아 올린 놀라운 건축물이다. 에펠탑이 세워지기 전까지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인류가 창조한 가장 높고 장대한 건축물의 지위를 누렸다.

 

무덤 치고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피라미드란 죽은 자를 위해 산자들이 바칠 사치스럽기만 한 준비는 아니었다. 내세란 현세와 연결된 또 하나의 세계였으며, 어찌 보면 너무도 짧은 현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영원한 세상이었다. 또 현세에서 자신 위에 군림한 파라오가 내세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보살필 것이란 믿음이 이런 믿기지 않을 엄청난 프로젝트를 몇 개씩 연달아 그것도 지속적으로 완성케 한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옆에는 나란히 2개의 피라미드가 더 있는데, 그것은 카프레왕과 멘카오레왕의 피라미드다. 재밌는 것은 셋 중 오래된 피라미드일수록 크기가 크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변화를 맞았을 왕조의 흥망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스핑크스와 뒤로 보이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앞에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앉아있는데, 이것은 커다란 화강암 한 개를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큰 돌이었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스핑크스라면 원래 이집트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날개를 달고 있는 괴수였다. ​

신화에 따르면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져 맞추지 못하면 죽여 버렸다고 한다. 그 문제가 바로 “아침에는 네발로, 점심때는 두발로,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은?”이었다. 정답은 알다시피 ‘사람’이었다. 하여튼 이 문제로 스핑크스가 거주하는 주거환경은 점점 규모가 커지는 공동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훗날 테베의 왕이 되는 ‘오이디푸스’(Oedipus)가 정답을 맞춰버리자 스핑크스는 스스로 물속으로 몸을 던져 인간들의 공동묘지에 괴물의 묘 하나를 더 보탰다고 전해진다.


이집트 문명 / 오시리스의 왕국 / 오시리스 신화, 이시스, 호루스, 세트

 

오시리스

스핑크스상 아래에는 거대한 지하 신전이 마련되어있다. 이곳은 이집트 신들 중 가장 위대한 신이라 일컫는 오시리스(Osiris)의 신전이다. 오시리스는 내세의 신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신으로 여겨진다.

 

메소포타미아 최고의 신 엔릴이 바람과 폭풍의 신인데 반해, 이집트 최고의 신 오시리스는 내세와 죽음, 부활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사실 역시 두 문명 사이의 종교적 관점의 차이를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리라.

 

오시리스는 이집트인들이 열렬히 숭배하던 태양의 신 호루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이름이 여럿 있다. 시기적 순서대로 라(Ra)신, 아문(Amun)신, 아톤(Aton)신 등이 있으며, 호루스신도 그들 중 하나다. 머리는 매의 머리를 하고 몸은 사람의 모습을 가진 호루스는 그의 상징 태양만큼 화려하게 치장된 신이었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그럼 여기서 잠시 오시리스의 가족들을 살펴보자. 어쩌면 오시리스의 족보는 이집트인을 이해하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오시리스에게는 ‘세트’(Seth)라는 사악한 동생이 있었다. 자신보다 형이 사람들로부터 더 추앙받는 꼴에 치를 떨던 세트는 끝내 오시리스를 죽이고 만다. 그러나 형의 주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분노를 다 채울 수 없었다. 세트는 오시리스의 주검을 갈기갈기 찢어 온 세상 여기저기에 내다버렸다.

 

다행히도 오시시스에게는 ‘이시스’(Isis)라는 아내가 있었다. 슬픔에 젖은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이곳저곳에 흩어진 오시리스의 시신 조각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이시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오시리스의 시신이 모두 합쳐지던 날, 오시리스는 죽음을 딛고 부활했다. 이후 오시리스는 이시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이자 태양의 신 호루스를 낳았다. 장성한 호루스는 마침내 부모의 원수이자 작은 아버지인 세트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어낸다.

(오시리스와의 형제 세트)​

이후 파라오들은 호루스의 후예로 여겨지게 된다. 즉 지상에 살아있는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이요, 죽어서 피라미드에서 맞이할 내세에선 오시리스가 되어 죽음과 내세와 부활을 관장하는 신으로 변하는 것이다.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심장 무게를 달아 그가 영원한 삶을 살 자격이 있는지 심판할 것이라 여겨졌다. 이것은 파라오의 사후 모습인 오시리스가 파라오에게 충성했던 자들에겐 불멸의 영생을 수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집트인들은 영원한 삶이라는 크나큰 선물을 선사받기위해 현세에서 파라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



(호루스의 상징 매)

 

어쩌면 이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생각은 그들이 늘 바라보는 나일강의 모습과도 연관이 있다. 나일강은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언제나 태양은 여명과 함께 나일의 동쪽에서 떠서 한낮엔 나일강 위에 머물다가 저녁엔 붉은 황혼과 함께 나일의 서쪽으로 진다. 나일은 밝고 생기 넘치며, 살아있는 동쪽 평원과, 어둡고, 죽음을 부르고 마지막 부활을 꿈꾸는 서쪽 골짜기를 나누는 기준이다. 즉 나일은 삶과 죽음을 나누는 기준선이 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의 무덤 피라미드는 언제나 나일강의 서안에 위치해 있다. 부활을 꿈꾸는 죽음의 땅에 말이다.

 

어쨌든 태양이 비치는 동쪽의 호루스와 부활을 관장하는 서쪽의 오시리스는 부자라는 혈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끈은 다름 아닌 나일강이었다. 그리고 이 상이한 두 신은 각기 파라오 생애의 모습 또 죽은 후의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태양이 지배하는 한낮과도 같은 삶의 신 호루스와 어둠이 지배하는 깊은 밤과도 같은 죽음의 신 오리시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집트인들이 가장 숭배해마지않던 두 개의 신이자, 결국 하나이기도 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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