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죄악 (호세아 4:1-5)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진다.
Ⅰ. 법정이 개설되고 방청과 주의가 요구된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는 너희가 들으려고 하든지 않든지 간에 너희에게 이런 유죄 선고가 내려진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에게서 경고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하실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이스라엘 자손 외에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하실 때 그들은 기꺼이 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쟁변하실 때 그들은 즐겨 들으려 할 것인가?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질책하시고 고발하실 때 그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여호와께서 이 땅 곧 이 거룩한 땅의 거민과 쟁변하신다." 죄는 큰 이간꾼이란 점을 명심하자. 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불화를 심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서 죄를 발견하시고 그 때문에 그들을 고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보다 특수한 몇 가지 혐의 사실이 있다. 이것은 다른 죄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가 그들과 쟁변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께 수치를 돌려 드리고 그의 은총을 배은망덕하게 갚은 데 대해 변론하신다. 하나님의 쟁론은 그들이 하나님의 손의 심판으로 정죄되기 전에 그 입의 심판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행동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으시고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론은 경청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의 쟁변은 조만간에 들려 질 것이기 때문이다.
Ⅱ. 기소장이 낭독된다. 이 기소장으로 전 민족이 극악의 혐의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로써 크게 노여워하신다.
1. 그들은 국가적으로 극히 중요한 의무를 태만히 하였다.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다. 그들에게는 자선도 정의도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 구주께서 의와 신과 인이라고 표현하듯(마 23:23), 율법의 극히 중한 것이었다. 백성 전체가 소위 정직이라는 것 따위를 전혀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과 행실이 아무리 진실에 위배되고 자기 이웃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하물며 자비에 대한 인식이나 빈자에게 대한 측은지심과 구제의 의무야 말해 무엇하랴! 그 땅에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진실과 인애가 없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는 곳에서 어떤 선을 기대할 수 있으랴?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이 알려지고 그의 이름이 그곳에서 크다는 것은 그 땅의 특권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었다(시 76:1).
2. 여기에는 십계명에 대한 극악한 국민적 죄가 잇달아 나온다. 그들은 십계명의 두 율법판을 전혀 중시하지 않았다. 맹세(한글 개역 성서:저주)와 거짓말(사위)과 살인과 도둑질(2절)과 간음은 각각 3계명, 9계명, 6계명, 8계명, 7계명의 위반이었고 이런 죄는 전국 방방곡곡과 온갖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죄였다(2절). 부패는 그 땅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었다. 선량한 사람들은 없어지거나 숨기웠다. 또는 선량한 사람은 스스로 숨거나 했다. 그들은 이들 죄로써 파괴하였다(강포했다). 즉 그들은 이성과 양심과 신적 법의 모든 영역을 범하였다. 그들은 심히 악했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었다(전 7:17). 그들은 자기들의 부패가 밖으로 나오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자기 길에 걸리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파괴하며 돌파하고 물이 둑 위에 넘치듯 죄의 편력 가운데서 그들을 제지시키려고 했다. 죄는 격렬한 것이며 그 위세가 엄청나다는 데 주목하자. 인생들의 마음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할 때(전 8:11) 무엇으로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하리요? (창 11:6) 그들이 이처럼 강포할 때 피는 피를 따른다. 즉 전국 각처에서 끊임없이 늘 많은 살인이 자행된다. Cades alioe aliis sunt contiquoe-즉 살인이 살인을 뒤따른다. 그들 사이에는 심지어 왕국 간에도 유혈이 임리한다. 왕권을 장악하느라고 그토록 많은 유혈사태를 빚은 것도 이때였다. 살룸이 스가랴를 시해하고 므나헴은 살룸을, 베가는 브가야를, 호세아는 베가를 살해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혈극은 아마 다른 분쟁자들 사이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땅은 피로 더러워졌다(시 106:38). 무죄한 자의 피는 예루살렘 이쪽 가에서 저쪽 가까지 가득하였다(왕하 21:16).
Ⅲ. 이 죄와 오염된 땅에 내려진 판결(3절). 그 땅은 완전히 멸망하여 황폐될 것이다. 전 국토는 죄에 감염되었다. 그러므로 온 땅이 하나님의 쓰라린 심판 아래서 슬러할 것이며 그 모든 재물과 아름다움을 박탈당하여 애곡 속에 앉게 될 것이다. 풍요와 평화가 있을 때는 골짜기가 기뻐 소리치며 노래한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전쟁과 기근으로 황량하게 되어 슬퍼한다고 한다. 율법에서 위협되었듯이(신 29:23)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불에 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겼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의 모든 위로를 빼앗아 버리겠다고 위협하신다. 소떼가 먹을 풀이 없고 사람에게 소용되는 식물이 없을 때 땅은 슬퍼한다. 그리고 무릇 거기 거하는 자가 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좋은 음식의 부족으로 쇠잔할 것이며 기쁨을 주는 맛난 음식의 결핍으로 안달이 날 것이다. 들짐승도 곤비할 것이다(렘 14:5, 6). 아니, 땅의 열매의 멸망이 너무나 커서 공중의 새도 주워 먹고 살 것이 없을 정도이다. 조류는 사람이 함께 고난을 당할 것이어서 그들의 사멸이나 수척은 야생 조류로 식탁을 풍족히 꾸미던 자들에게는 형벌이 될 것이다. 아니,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거나 한 데 모일 것이다. 즉 고기가 떼를 지어 다른 해안으로 사라지며 따라서 어업은 극심한 흉어로 보잘 것 없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황폐는 노아의 홍수 때보다 더 전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 홍수가 바다의 고기한테는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물고기를 죽이신 것은 애굽의 재앙중 하나였다(시 105:29). 물이 마를 때 고기는 죽는다(사 50:2; 습 1:2, 3).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될 때 하등 동물이 인간에게 소용없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점을 유의하자. 우리는 우리 땅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찬양할 만하다. 왜냐하면 비록 이 땅에서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이 그토록 많지만 우리 식탁에는 육류와 생선과 조류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Ⅳ. 정죄받은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 어떤 수고도 하지 말라는 법정 명령이 내려진다. 이 명령에 대한 이유도 제시되고 있는데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명령 자체(4절).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그들을 환원시키거나 순화시키기 위해 어떤 수단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의 의원으로 하여금 그들을 치료 불가능한 절망자로 포기케 하라." 이것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있는 한 우리가 죄인의 죄에 대해 그들을 꾸짖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책망을 주고받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지고 있는 의무이다. "너는 네 이웃을 반듯이 책선하라" (레 19:17)는 것은 모세 율법중 하나였다. 그것은 형제애의 한 본보기이다. 인간은 자기 죄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존재이므로 때로는 신랄하게 책망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툴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지도 말라" 고 하실 때에는 그 사람들을 멸망받도록 포기한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때로 선지자에게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지 말라" 고 하시는 명령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선지자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런 명령을 내리신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그들이 죄 가운데서 너무나 완악해져서 멸망에 합당하게 무르익었으므로 그들과 관계하거나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진정하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책망자들이 침묵을 지키고 그 시대의 죄를 쳐서 증언해야 할 자들이 귀퉁이로 물러나 주장을 포기할 때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흉한 징조가 된다(대하 25:16 참조).
2. 이 명령의 이유. 상호 책망 금지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죄 가운데 계속 행하기로 결심하고 있어서 어떤 책망도 그들의 죄를 치료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그들은 죄 중에서 너무나 뻔뻔스럽고 무례하게 되어 책망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이 조금만 제지해도 그의 특수성과 직분을 전혀 존중치 않고 그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일반개인에게서 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기들에게 신실히 관계한다고 하여 목사들과 언쟁을 벌이는 죄인은 자기 마음을 악하고 강퍅케 한다. 목사의 책망은 교인을 개혁하기 위한 하나님의 규례이다. 이런 책망에 반발하는 자는 형제적 책망의 혜택도 상실한 자이다. 이것은 아마 유다왕 요아스의 악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돌로 친 그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대하 24:21). 스가랴는 제사장이었다. 그가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직분을 이행하던 때 그들은 그와 다투었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호세아가 피를 따르는 피이야기(2절)를 할 때는 바로 스가랴의 경우를 지목한다고 생각한다. 제사 드리는 자의 피가 제물의 피와 뒤섞였다는 것은 그들의 악의 절정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다는 것이 그들을 고칠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듯이 그들의 파멸은 스가랴의 피까지 소급하는 것이었다(마 23:35).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을 책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2) 하나님도 그들의 파멸을 진행시키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5절). "그러므로, 즉 네가 어떤 책망도, 어떤 충고도 받아 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거칠 것이다. 누가 그것을 방지하려고 생각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명령이 이미 발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낮에 거쳐서 넘어질 것이며 선지자 즉 네게 아첨하고 꾀던 선지자는 밤에 너와 함께 거치리라. 너와 네 선지자는 밤낮으로 넘어질 것이며 끊임없이 이런 저런 재난에 빠질 것이다. 밤의 어두움도 너를 환난에서 엄폐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며 낮의 빛도 네가 곤란에서 도피하는 것을 도우지 못할 것이다." 선지자들은 눈 먼 인도자들이며 백성은 눈 먼 추종자들이다. 눈 먼 자에게는 낮과 밤이 마찬가지이다. 낮이든 밤이든 그들 두 부류는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너는 네 실족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무척 안심할 낮에 거치리라(원의:넘어지리라). 남들의 눈에 보이고 관찰되는 낮에 너는 엎어질 것이며 그것은 극히 큰 수치가 될 것이다. 선지자는 밤에 엎어질 것이다. 즉 그 자신에게는 실족이 극히 두려울 밤에 거칠 것이다." 타인의 파멸을 도운 자들은 파멸을 당할 것이며 그 파멸은 특별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자녀들은 자기들이 넘어질 위험에 빠져 있을 때 그 어머니가 도와 줄 것으로 생각했는가? 그런 기대는 무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네 어미를 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는 어미 성이었고 완전한 나라였다. 그것은 각 지역에게 어머니 같았다. 그것은 모두 잠잠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죄에 연루될 때에는 모두가 멸망에 연루되는 것밖에 달리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백성과 제사장의 죄 (호세아 4:6-11)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도 제사장 및 백성과의 쟁변을 계속하신다. 백성들은 자기 의무를 이행하는 제사장들을 소유할 때도 그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았다(4절). 그러나 대다수의 제사장들은 자기 의무를 태만히 하는 가운데서 생활했고 여기에는 그런 제사장들과, 그런 상황을 사랑하던(렘 5:31) 백성들에게 대한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는 형벌이 어떻게 죄와 상응하는지와 하나님이 자신의 수속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대조하시는 지를 관찰할 수 있다.
Ⅰ. 백성들은 제사장들과 다투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했었다. 따라서 백성들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것은 당연했다(6절). 빛에 반역하는 자들은 어둠 속에서 망하는 것밖에 달리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또는 이것은 제사장에게 대한 책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사장은 백성에게 계속 지식을 가르쳐야 했었다(전 12:9). 그러나 그들은 그러질 못했거나 아니면 전혀 가르치지 않는 듯이 했다. 그래서 그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 그리고 환상이 없거나 아무 목적도 없으므로 백성은 망했다(잠 29:18). 무지는 신앙의 어머니기는 커녕 멸망의 어머니라는 데 주목하자. 지식의 결핍은 어느 사람이나 어느 백성에게도 파멸이 된다. 이처럼 망하는 백성은 "내 백성" 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그의 계명 아래 있었으며 그와 계약을 맺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수고하지 않았다.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켰다. 그리고 백성을 가르쳐야 마땅했던 제사장의 죄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의 교육을 그들에게 맡기고 자녀들을 그들에게 보내셨지만 그들은 백성을 유의하지 않고 그들에게 애쓰지 않았다.
Ⅱ. 제사장과 백성은 다 지식을 배격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백성이 배우지 않고 제사장들이 가르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빛을 가지지 못한 때문이 아니고 빛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길이 없거나 전달할 수단이 없어서라기보다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을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에 관한 지식을 원하지 않고 멀리하였으며 빛에 대해 눈을 감았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버리리라. 내가 너를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거절하겠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니 나를 떠나라고 명하리라. 왜냐하면 너희가 나를 모를 것이며 나더러 떠나라고 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다."
1. 제사장들은 더 이상 제사장직의 특권을 허용받지 못할 것이며 제사직에 등용되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보는 대로 다시는 열납받지 못할 것이다(겔 44:13). 지식을 버리며 크게 무지하고 비방적인 목사들은 목사로 인정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유의하자.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8:18).
2. 백성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제사장 나라나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이다(출 19:6 참조). 하나님의 백성은 지식을 버림으로써 그 명예를 상실할 것이며 자기들의 면류관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Ⅲ.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다. 그들은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그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기억을 그 후손에게 전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들과 그 자녀 즉 백성의 자녀를 잊어버리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의무를 자녀에게 가르쳐야 마땅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와의 언약대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부모가 자녀들이 어릴 때 그 창조주를 기억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창조주가 자기들을 기억해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는 데 주목하자. 아니면 이것은 제사장의 자녀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 아비의 제사장직을 계승하지 못하고 엘리집에 대한 경고처럼(삼상 2:20) 빈궁에 처하게 될 것이다.
Ⅳ. 그들은 자기들의 명예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명예를 박탈할 것이다(7절). 그들의 인구나 존귀나 세력이나 위엄이 증가한 것은 그들의 명예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으나 시간이 경과하자 크게 번성하고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제사장 가문은 놀랄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번성할수록 하나님께 범죄했다. 민족의 수효가 불어날수록 더욱 많은 죄가 자행되었고 그들은 더욱 더 속화되었다. 그들의 재산과 명예와 세력은 그들을 더욱 대담하게 범죄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겠다." 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인구가 그들의 영화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를 줄여 소수가 되게 하실 것이다. 재물이 그들의 영화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비천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들은 자랑하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제사장은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될 것이다(말 2:9). 우리가 우리의 명예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 그것도 조만간 우리의 치욕으로 변하게 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실 것이다(삼상 2:30).
Ⅴ.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먹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 즉 아론 집의 제사장에게 허락된 공물과 자기들의 헌법으로 금송아지의 가짜 제사장에게 바쳐진 부양물을 남용하였다(8절). "저희가 내 백성의 죄(흠정역) 즉 속죄 제물을 먹었다." 이것이 만약 송아지의 제사장을 가리킨다면 그들이 취할 권리가 없는 제물을 먹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장의 수입을 횡령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합법적 제사장을 의미한다면 그들이 직분의 이행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부수입이나 이익에는 탐욕을 부리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물 중 자기 몫으로는 흥청거리면서 정작 그처럼 후한 보수를 받는 일은 망각하였다. "그들은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그들은 자기 영혼을 백성의 죄악에 들어 바쳤다. 즉 그들은 백성이 죄를 범할 때 기뻐하였다. 이는 백성이 범죄하면 속죄하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하며 그렇게 되면 그들도 제 몫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재물도 더욱 많아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백성이 죄를 얼마나 많이 짓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죄는 속죄의 보상을 필요로 했고 제물은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노여움이 되는 지를 나타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백성에게 죄를 경고하긴 커녕 제물만 생각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더욱 대담하게 범죄하도록 격려를 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토록 작은 비용을 들여서 속죄를 할 수 있었던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백성의 죄를 포식했으며 마땅히 중단시켜야 할 범죄를 계속 행하게 도왔던 것이었다. 이런 저런 면으로 우리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타인의 죄를 기뻐한다는 것은 아주 악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한 부양의 축복을 거절하실 것이다(10절).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제물의 헌납으로 아주 풍족하게 소유할지라도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음식이 그들에게 좋은 영양을 제공하지 않거나 그들의 탐욕이 그 음식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불법으로 획득한 것은 즐겁게 사용되지 못한다는 데 주목하자. 아니, 과도히 탐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탐욕스러운 욕심은 언제나 만족을 모르며 족함을 모르는 자들이 결코 배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미 6:14; 학 1:6 참조).
Ⅵ. 그들은 번성할수록 더 많은 죄를 범했다(7절). 그러므로 그들이 행음하여도, 즉 백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극히 악한 방법을 취할지라도 수효가 더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비록 솔로몬처럼 처첩을 많이 둘지라도 솔로몬과 같이 많은 자손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불법적 수단으로라도 수를 증가시키려고 희망하는 자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 좇기를 그쳤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계획을 이처럼 무산시켜 버리실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주목하기를 그쳤다(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권세와 영향력에 주의를 다소 기울이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중도에서 그쳤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섭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으려고 그를 버린다. 그들은 너무도 타락해서 하나님을 존중하는 예의도 없고 세상에서 완전히 하나님이 없는 듯이 지낸다. 여호와께 주목하기를 그치는 자들은 모든 선을 그치는 자들이어서 온갖 선한 것이 자기들을 버리는 것밖에 달리 기대할 것이 없다.
Ⅶ. 백성과 제사장들은 서로의 죄를 강퍅케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벌에 동참해 마땅할 것이다(9절).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그들은 성질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백성과 제사장은 다 같이 무지했고 저속했으며 하나님을 무시했고 의무에 태만했으며 우상 숭배에 탐닉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그 심판은 양자를 다 멸망시킬 것이다. 백성에게서 양심을 빼앗는 기근은 제사장에게서 소제를 빼앗을 것이다(욜 1:9). 백성과 제사장이 일반일 것이라는 것은 보편적 파멸에 대한 부분적 묘사이다(사 24:2). 하나님의 심판이 사명을 갖고 임할 때는 구별이 없을 것이다. 죄에 동참하는 자는 파멸의 동참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대로 벌하실 것이며 그들의 소위대로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그들 위에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원의는 그렇다). 죄가 저지른 후 죄인은 그 죄가 가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 죄가 다시 호출을 받아 돌아오게 되며 자기를 낮추고 정죄하게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Ⅷ. 그들은 관능의 즐거움에 빠져 마음을 북돋우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이 자기들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1절).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어떤 이는 앞 절과 결합시켜 "그들은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를 좇기 위해 여호와를 버렸다." 고 읽는다. 또는 "이런 것들이 그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들이 여호와 좇기를 그쳤다" 고 읽기도 한다. 관능적 쾌락이 그들의 신앙심을 빼앗아 갔고 그들 안에 있는 온갖 선을 죄다 수장시켜 버렸다. 아니면 우리는 이것을 위대한 진리가 포함된 분명한 하나의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나날의 경험에서 음란과 술취함의 죄는 인간을 흐리멍덩하게 만들고 취하게 하며 약화시킨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총명과 용기를 다 가져가 버린다.
제사장과 백성의 죄 (호세아 4:12-19)
Ⅰ. 여기서는 하나님이 쟁론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기소된다. 즉 그 죄는 다음과 같다.
1. 영적 음행 또는 우상 숭배. 그들은 음란한 마음을 품고 있다. 그들은 음란의 죄에 대한 강력한 경향성을 지닌다. 그들의 마음은 그쪽으로 치우쳐 있고 구부러져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죄였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맹렬한 힘으로 그 죄를 향해 끌려가며 이것은 그들을 미혹하게 한다. 판단의 실책과 실수는 부패한 애착에 기인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사람들은 죄에 대한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좋게 생각한다. 우상에 대해 그토록 그릇된 견해를 품으며 우상을 향해 그토록 열정이 작용하므로 그런 머리와 마음을 지닌 자들이 하나님의 수하를 떠나 행음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12절). 그들은 머리와 남편되신 하나님께 복종해야 마땅했고 그의 인도하심과 명령 아래 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떠나 거짓 잡신들의 인도와 보호 아래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행음하였다(15절).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행동은 방종하고 뻔뻔스러운 음부와 같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다" (원의는 뒷걸음질치는 암소뒷걸음질 한다:흠정역). 그들은 길들지 않은 암소 같다(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또는 패역하거나 고집센 암소 같다(다른 이들은 그렇게 해석한다). 고삐풀린 소가 풀밭에서 미친 듯 날뛰는 것과 같다. 멍에를 지운 소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뒤로 물러나며 목에서 멍에를 벗으려고 기를 쓰며 밭이랑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과 같다(본문은 오히려 이것을 가리킬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이 제어하기 힘들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불순종하였다. 그들을 앞으로 몰기 위해 선지자들이 책망의 막대기로 보내졌을 때 그들은 가시채를 뒷발질하고(행 26:14), 뒤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합계는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했다" (17절)는 것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우상과 결합하고 그 애정은 아교처럼 우상과 접착되며 그 마음도 우상에게 가 있었다. 그들의 영적 간음에 대한 사례가 두 가지 나오는데 이 일에서 그들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존귀를 우상에게 돌렸다.
(1) 그들은 우상에게 신탁을 묻고 우상의 사제들에게서 배운 점술을 사용했다(12절).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는다." 그들은 나무로 된 신들에게 지도를 구하며 충고를 의뢰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지 지시와 권고를 의뢰하며 사건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그들은 나무에게 "너는 내 아비라" (렘 2:27)고 말했다. 그게 참으로 아비라면 이런 존귀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참 아버지며 그들 중에는 살아 있는 그의 신탁이 있어서 어느 때든지 자유로이 물을 수 있었던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막대기가 그들에게 어떤 길을 취해야 할지와 사건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은 아마 이방인 사이에 사용되던 악한 점술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은 그들에게서 그 점치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화살로 점을 쳤듯(겔 21:21) 한 조각의 나무 또는 막대기로 치는 점이었다. 하나님의 신탁을 버리고 세상과 육으로부터 방도를 구하는 자들은 사실상 자기 나무나 막대기와 상의하는 셈이다.
(2) 그들은 그것을 신으로서 그것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그 은총을 원했고 그것의 노여움을 두려워하고 그 진노를 입지 않도록 빌었다(13절). 그들이 그것들에게 제사를 드린 것은 속죄를 위해서이며 그것들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분향한 것은 그것들을 즐겁게 하고 흡족하게 하며 이로써 그것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기록하고 싶은 곳을 선정하셨지만 그들은 그곳을 버리고 자기들의 상상력을 만족시키며 불경건한 의식에 알맞는 장소를 택했다.
[1] 그들은 높은 곳을 택했다. 그들은 산 꼭대기와 작은 산 위에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땅의 높이가 하늘을 향한 접근에 유리하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이다.
[2] 그들은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의 음지를 택했다. 이는 그 그늘이 그들에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더운 지방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응달이 자기들의 신에게 즐거운 곳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들은 짙은 녹음이 명상학에 알맞고 두려운 마음 같은 것이 들게 하기 때문에 예배의 적지(適地)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2. 육체적 간음이 여기서 그들의 또 다른 범죄로 추궁되고 있다. "저희는 행음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18절). 그들은 음란을 업으로 삼았다. 그것은 때때로 범한 단일 행위가 아니라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벧후 2:14) 그들의 변치않는 행위였다. 이스라엘에게서 발견된 것은 가증스런 불결과 음란이었다.
(1) 그것은 우상 숭배의 부수물로 언급된다. 그들의 거짓 신들은 그들을 음란에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섬긴 악마는 비록 영이긴 하지만 음란한 영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섬긴 자들은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렸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그를 욕되게 했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악한 애정:흠정역)대로 내버려 두사 자기 몸을 서로 더럽게 하신 때문이다(롬 1:24, 28).
(2) 그것은 우상 숭배의 벌로 언급된다. 우상을 숭배한 자들은 바알브올의 숭배에서처럼(민 25:1, 2) 우상 숭배 의식에 참가한 창기들과 함께 나갔다. 이를 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마찬가지의 악한 애욕에 내버려두셨다. 그들은 행음하며 간음하였으니(13절) 이는 그 남편과 부모들에게 큰 슬픔과 수치가 되었다. 자신은 정숙하지 않은 자라도 아내나 딸들은 정숙하기를 바라는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형벌에서 자기들의 죄를 읽을 수 있었다. 이는 마치 다윗의 간음이 자기 아들에 의한 후궁들의 겁탈로 벌받은 것과 같다(삼하 12:11). 그들은 간음죄를 범했지만 남들도 그들에게 꼭 같은 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을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럴 때에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정의의 왜곡(18절). "저희 방백들은 달라 하기를 사랑한다(흠정역)." 즉 그들은 뇌물을 사랑한다. 그 입에서는 "달라 달라"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부정 이득에 미쳤다. 그들과 볼일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는 무엇을 주려는가?" 라는 물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방백(통치자)으로서 직분상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사례금을 주어야 정의를 행해준다. 그들이 사례금을 위해서 부정을 행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금전에 대한 사랑은 공평을 파멸시키며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는데 주의하자. 그러나 "달라" 고 하기를 사랑하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 통치자에게 수치가 된다. 통치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탐욕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마 이것은 여기 "그들의 술이시다" (한글개역 성서:저희가 마시기를 다하고)는 표현의 의도일 것이다. 그들의 마시는 것은 김이 빠지고 맛이 나갔다. 정당하게 행사되는 정의는 목마른 자에게 대한 음료처럼 원기를 북돋우는 것이 되나 정의가 왜곡될 때 즉 지배자들이 보수를 받고 죄인을 방면하거나 무죄한 자를 정죄할 때는 그 마시는 것이시다. 그들은 "공법을 벌레로 변하게 하는 자들이다" (암 5:7). 아니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전 국민의 타락된 도덕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생명과 정신을 상실했고 하나님께는 죽은 것만큼이나 역겨운 존재였다. 그들은 신술처럼 역겨운 존재였다(신 31:32, 33 참조).
Ⅱ. 이런 죄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실 징표는 다음 여러 가지다.
1. 그들의 아내와 딸은 그 가족들에게 끼친 피해와 치욕에 대해 처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14절). "내가 너희 딸들을 벌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음으로 해서 계속 그 죄를 범하려 할 것이다. 한 죄인의 무형벌은 때때로 다른 죄인의 벌이된다는 데 주목하자. 또는 "내가 너희를 벌하듯 그들을 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유다가 그 며느리에 대해 한 것처럼 그들이 너희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창 38:26).
2. 그들은 잠시 번영할 테지만 그 번영은 그들의 멸망에 보조 역할을 할 것이다. 그 번영은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징표로서 등장한다(16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넓은 곳의 양같이 먹이시리라" (흠정역). 그들은 비옥하고 넓은 초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포식하게 되고 최상의 것으로 배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 먹인 양처럼 그들을 살륙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져서 차버린다면 도살자를 위해 살찌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들을 공유지, 참으로 넓은 장소의 양처럼 먹인다고 해석한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그들을 자기 초장과 자기 보호로부터 몰아 내실 것이다.
3.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어떠한 수단도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17절). "에브라임은 우상과 연합하여 우상을 사랑하며 우상에 빠졌으니 그를 버려 두라. 아무 사람이든지 그를 책망하지 말라(4절). 그를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며 그 자신의 의향대로 행하게 하라. 우리는 그를 고치고자 하였으나 그가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를 버려두라." 그들의 결국이 어떠한지 살펴보자(신 32:20). 어떤 사람이든간에 죄 중에 혼자 버려둔다는 것은 슬프고도 쓰라린 심판임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에게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우상 즉 세상 및 육신과 연합하였다. 그는 고칠 수 없을 만치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포악하다. 그는 고칠 수 없는 주정뱅이거나 행음자다. 그를 혼자 버려 두라. 양심아, 그를 혼자 버려 두라. 목사야, 그를 버려 두라. 섭리야, 그를 버려 두라. 지옥의 불길이 그를 깨닫게 하기까지 아무 것도 그를 일깨우지 못하게 하라." 아버지가 자식을 폐적하려고 결심하는 때는 그 패역한 자식을 그 이상 더 징계하지 않는다. 자기 죄 속에서 당혹함을 느끼지 않는 자들은 그 죄 때문에 멸망받게 될 것이다.
4. 그들은 신속하고 수치스런 멸망으로 급히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19절).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다. 이는 저를 급하고 격렬하게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포로로 끌어가기 위해서다." 그는 그들을 회리바람으로 제해 버리실 것이다(시 58:9). 그러면 그들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 자기 죄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들을 도울 능력이 없는 신들에게 그토록 비용을 들이고 자기들을 멸할 만한 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자기들의 원수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언젠가 부끄러워하고 수치를 당할 제물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자기 시간과 힘과 명예와 모든 위안물을 세상과 육신에 바치는 자들은 곧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눈멀고 절고 마음에도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들도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Ⅲ. 범죄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따라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가 유다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14절 끝에서도 나온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부닥치는 거침돌을 피하거나 극복할 줄 모르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을 수 없다(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두 지파의 나라 유다가 그렇다(15절).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질지라도 유다는 감염되지 말아야 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이것은 매우 필요한 경고였다. 유다인에게는 이스라엘인이 형제였고 가까운 이웃이었다. 이스라엘은 유다보다 다수였고 이 때에는 보다 번성하였다. 그러므로 유다인이 이스라엘의 행사를 배우고 영혼의 올무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우리가 죄에 감염될 위험이 크면 클수록 경계해야 할 필요성도 더욱 증대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2. 그것은 매우 합리적 경고였다. "이스라엘은 행음해도 유다는 그러지 말 것이라."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큰 지식의 수단을 소유했고 성전과 제사장과 다윗 가문의 왕이 있기 때문이다. 실로는 유다로부터 오시기로 되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위해 큰 축복을 예비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보다 유다에게서 더 많은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범죄한다면 책임질 일이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무자비하게 다루실 것이며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취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행음한다고 하더라도 유다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 유다도 범죄하면 하나님께는 이 세상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백성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자가 등을 돌렸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고 열두 제자에게 이르셨듯이 하나님께서도 여기서 유다에게 말씀하신다. 이제껏 자기 순전을 지킨 자들은 모든 사람이 타락하는 시기에조차 자기 순전을 굳건히 고수해야 한다는 데 유념하자. 유다를 이스라엘처럼 범죄하는 것에서 보호하기 위해 두 가지 규칙이 제시된다.
(1) 우상 숭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우상 숭배의 장소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너희는 길갈로 가지말라." 그들의 모든 악은 길갈에 있었다(9:15; 12:11). 그들은 길갈에서 죄를 더했다(암 4:4). 아마 그들은 길갈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여호수아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 (수 5:15)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갈로 가지 말라고 금지를 받는다(암 5:5). 꼭 같은 이유로 그들은 벧엘로 가서는 안 되는데 벧엘은 여기서 허영의 집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벧아웬은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의 벧엘과는 달리 허영의 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죄를 멀리하고 악마의 수중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들은 범죄의 기회를 애써 피해야 하며 악마의 땅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 우상숭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신성 모독을 주의해야 하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은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렘 4:2). 그러므로 여기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허위와 불공평한 불의로 하는 맹세이며 경박하고 성급한 맹세나 거짓되고 기만적 맹세나 여호와와 우상으로 하는 맹세이다(습 1:5). 꾸준히 하나님께 집착하려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소유해야 하며 언제나 엄숙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을 해야 한다. 참되신 하나님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자는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으로 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호4:1]
4:1-14:9은 모두 9개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즉, (1)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4:1-5:4), (2)인간의 교만을 지적함(5:5-6:3), (3)인애가 없으므로 망함(6:4-7:7), (4)세속과 혼합된 죄를 책망함(7:8-8:14), (5)부패의 죄로 징벌을 받음(9:1-17), (6)이스라엘의 두 가지 큰 죄(10:1-15), (7)인간적인 계책을 책망함(11:1-16), (8)우상 숭배의 죄악을 다시 책망함(13:1-16), (9)회복에 대한 약속(14:1-9) 등이다. 이상에서 하나님은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속에 거하도록 촉구하신다.
ꃨ 여호와께서...쟁변하시나니 - '이 땅 거민'은 북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쟁변하신다. '쟁변'(*, 리브)은 다투는 것을 말하는데(2:2 주석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한 책임을 물어 이스라엘을 고소한다는 의미이다(12:2;미 6:2).
ꃨ 이 땅에는...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계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의 죄악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 에메트)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말과 행동의 신실함을 나타낸다. 이는 곧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에 충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애(*, 헤세드)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총과 긍휼을 의미한다(2:19 참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다아트'(*)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다아트'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신들을 섬기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다(롬 1:21). 게다가 사랑과 진실을 도외시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것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선포였다.
성 경: [호4:2]
ꃨ 오직 저주와...간음 뿐이요 - 이스라엘의 부도덕한 죄악들이 열거되고 있는데, 저자는 명사형이 아닌 부정사 절대형(infinitives absolute)으로 표현함으로써 타락과 죄악의 현실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Keil, Lange). 저주의 '알라'(*)는 원래 '맹세하다'란 단순한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남을 저주하는 것과 관련된 거짓 맹세를 의미한다(마 5:34 참조). 사위의 '카하쉬'(*)는 '거짓말하다', '속이다'란 뜻으로 십계명 중 제9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투절(*, 가나브)은 훔치는 것으로 절도 행위를 가리키며, 제8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살인(제6계명)과 간음(제 7계명) 역시 이스라엘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죄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ꃨ 강포하여...뒤대임이라 - '강포하다'의 '파라츠'(*)는 '찢다', '깨뜨리다'등의 뜻으로 강도와 살인의 목적이 있는 폭력 행위를 의미한다. '피'(*, 다밈)는 피흘리는 행위와 관련되며, '뒤대임'(*, 나가)은 원래 '만지다', '도달하다', '치다'등의 뜻으로 여기서는 피흘리는 행위에 또 다른 피흘림이 뒤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폭력은 폭력을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는 뜻이다. 이는 폭력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사회의 비극적인 상황을 반영해준다.
성 경: [호4:3]
ꃨ 이 땅이 슬퍼하며 - '슬퍼하다'의 '아발'(*)은 원래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땅의 황폐한 상태를 비유한다(사 24:4,7). 즉 자연적인 재앙과 재난으로 인하여 땅이 황무하고 땅의 소산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없어지며, 초목이 시들고 메말라 동물들까지 굶어 죽게 된다는 것이다(욜 1:10).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한재, 전염병 등)로 말미암는다.
ꃨ 무릇...없어지리라 - 이는 인간의 타락이 자연계의 파멸과 피조물의 멸망을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인간에게 피조물의 지배권을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피조물에게까지 고통과 파멸을 당케 함으로써 인간의 죄악을 징계하는 것이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도 한재로 인하여 말라버린 물처럼 쇠잔하여진다(사 50:2). 이처럼 하나님의 계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은 전염병과 기근과 한재를 통하여 땅과 그 안에 있는 피조물들을 황폐케 함으로써 저주를 내리신다(신 28:23,24,51).
성 경: [호4:4]
ꃨ 그러나...책망하지도 말라 -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그 원인이 서로에게 있다고 비난하지 말라는 뜻과 함께 백성들의 완고함과 불성실함을 지적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즉, (1)형벌과 심판이 모든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서로를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말라는 뜻이거나(Lange, Kimchi), (2)아무리책망해보았자 백성들의 완악함은 그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점을나타내는 것 같다(J.Given).
ꃨ 네 백성들이...되었음이니라 - 본 구절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즉, (1)제사장들의 타락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보는 견해(RSV, J.Ward), (2)제사장들처럼 백성들이 타락했다고 이해하는 견해(G.Smith), (3)백성들이 제사장을 대항하여 싸우는 자와 같이 악하다고 보는 견해(신 17:12 참조, Keil, Hengstenberg) 등이다. 이중 어떤 견해를 취하든 본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법과 행악 가운데 빠져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호4:5]
ꃨ 너는...거치리라 - '거치다'의 '카솰'(*)은 '넘어지다', '비틀거리다'등의 뜻으로 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 '선지자'(*, 나비)는 탐욕과 자만에 빠져서(사 28:7;렘 6:13;미 3:11)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를 가리킨다. 당시 북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과 왕을 경배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매우 많았다(왕상 22:6-8).
ꃨ 네 어미를 멸하리라 - '네 어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권이 있는 나라 전체까지도 멸망시키겠다는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성 경: [호4:6]
ꃨ 내 백성이...말하는도다 -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당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아트'(*)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1절)이 없어서였다. 이 지식은 제사장들에 의해서 율법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었다(신 31:9-13;33:10;말 2:7).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이 바로 율법에 기록되었기 때문에(신 30:15,16) 이스라엘 백성이 지식이 없는 것은 율법을 마땅히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의 책임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제사장의 불성실함을 문책하고 그 백성들을 파괴하신다.
ꃨ 네가...잊어버리리라 - 율법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서 오는 망각의 죄악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율법에 무관심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버릴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빼앗아버리신다. 그런데 제사장 직분은 이스라엘 전체와 관련된 것이었다(출 19:6). 때문에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잊어버리는 것'(*, 솨카흐)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이방인과 같게 하시는 것이다(Keil).
성 경: [호4:7]
ꃨ 저희는...욕이 되게 하리라 - 여기에서 '번성'(*, 라바브)은 이스라엘이 인구의 증가를 포함하여 부와 번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 때의 번영은 오히려 이스라엘에 사악함이 충만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우상 숭배에서 얻어지는 결과로 생각하는 제사장들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화와 명예(*, 카보드)를 빼앗아 수치와 부끄러움(*, 칼론)으로 만들어 버리신다.
성 경: [호4:8]
ꃨ 저희가...속죄 제물을 먹고 - 원문에는 '내 백성의 죄'(*, 하타아트 암미)로 되어 있다(KJV, NIV, RSV). 여기서 '죄'는 특별히 백성의 제사 의식과 관련되었다. 즉, 제사장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희생 제물을 더 많이 바치게 하여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속죄 제물의 고기를 많이 거두어 들였다는 것이다(레 6:26;10:17 참조). 이것은 제사장들의 삶의 방식이 탐욕으로 가득 찼음을 보여준다. 이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의로운 행위를 가르치기보다는 가증스러운 제물을 바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8:13). 따라서 백성들의 제사 행위는 제사장들의 죄악으로 바뀌게 되었다.
ꃨ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 제물에 대한 탐욕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가증스러운 제사를 더 많이 요구하게 만들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악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제물의 수입이 많아진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였다. 따라서 우상 숭배의 죄악을 끊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범죄 행위를 열망하고 가증시키는 데 마음을 쏟았다. 결국 여호와의 제사와 율법을 팔아 먹는 제사장들의 사악함은 징계와 파멸을 자초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 경: [호4:9]
ꃨ 장차는(*, 하야) - 이는 '...이 되다'라는 be동사로서 먼 미래를 가리키기보다는 백성이나 제사장이 모두 타락해가고 있는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ꃨ 내가...갚으리라 - '그 소행'은 원래 '그의 걸어온 길'(*, 데레크)을 뜻하는 단어로서 '행동', '행위'란 뜻의 '소위'(*, 마알랄)와 종종 병행하여 사용된다(겔 14:22;20:43;24:14).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원함으로써 백성들과 함께 타락하였기에 형벌을 그들 모두에게 철저하게 내려질 것이다.
성 경: [호4:10]
ꃨ 저희가 먹어도 - 이는 제사장들이 속죄 제물을 탐욕스럽게 먹는 것과 관계가 있다(8절). 그러나 그들의 탐욕은 기근이나 질병과 같은 하나님의 형벌로 인하여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레 26:26;미 6:14). 혹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더라도 지칠줄 모르는 욕망 때문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ꃨ 행음하여도 - 여기서 '행음'(*, 히즈누)은 매춘 행위를 유도하거나 음란을 조장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행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음은 제의적인 우상 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아퍼(W.Harper)는 바알 숭배에 있어서 여인들이 자녀의 생산을 위하여 자기들의 몸을 성전에서 음란하게 내어주는 제사 의식에 참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우상 숭배와 연관된 음행은 종족 번식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생식을 막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신 28:18).
성 경: [호4:11]
본절은 10절에서 여호와 좇기를 그쳤던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곧 음행과 술취함에 의해서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구하는 지성, 감정, 의지의 인격을담고 있는 마음을 음행과 술취함이 몽롱하게 함으로써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여호와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여호와를 버리게 되었음을 뜻한다(신 31:16). 결국 그들의 방종과 도덕적인 타락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 숭배에 흠뻑 취한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성 경: [호4:12]
ꃨ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 백성들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 행위가 구체적으로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나무로 새긴 우상에게 신적계시를 묻는다(렘 10:3;합 2:19).특히 이것은 드라빔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3:4).
ꃨ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 '막대기'(*, 마켈)는 여기서 우상의 형상을 나무 꼭대기에 새겨서 만든 것이거나, 아니면 막대기가 넘어지는 방향에 따라서 예언이 응답되는 것으로 믿는 점술적인 도구의 하나로 여겨진다(J.Given, W.Harper).
ꃨ 이는...떠났음이니라 - 나무 우상에게 신탁을 구하고 점복술을 통하여 소원을 얻으려는 이스라엘의 우매함과 가증스러움에 대해 호세아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5:4).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감각적인 행음에 빠져서 더이상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언약에서 떠남으로써 멸망의 길을 자초한다. 그런데,그렇게 만드는 배후의 세력은 '음란한 영'(*, 루아흐 제누님) 곧 악한 귀신의 능력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기보다는 음란과 우상 숭배를 자극하는 사탄의 권세에 굴복하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호4:13]
ꃨ 저희가 산꼭대기에서...작은 산 위에서 -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교도적인 우상 숭배와 제사 의식을 거행한 사실을 나타낸다. '산꼭대기'는 아마 하늘과 신을 가까이 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선택된 듯하며(신 12:2), '작은 산' 역시 동일한 이유로 분향의 장소가 되었다.
ꃨ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 산과 언덕들의 꼭대기뿐만 아니라 푸른 나무가 있는 곳마다 우상 숭배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푸른 나무로 우거진 숲이 태양의 뜨거움을 막아주거나, 또는 방탕한 의식을 거행하기에 적당하도록 은밀한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J.Given).
성 경: [호4:14]
ꃨ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 이는 딸들과 며느리들의 행음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에서 제외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죄악보다 남자들의 죄악이 더 많고 크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징계함으로써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즉, 백성들의 죄악이 극에 달아서 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제멋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이다(롬 1:24). 이것은 여호와의 임재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났음을 뜻하며, 동시에 그 백성들은 전적인 파멸에 떨어졌음을 시사한다(P.Butler).
ꃨ 남자들 - 원문에서는 '저희들'(*, 헴) 곧 여자들의 남편과 아비들을 가리킨다.
ꃨ 창기와 함께 나가며 - '나가며'의 '파라드'(*)는 창기와 홀로 있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ꃨ 음부와 함께 - '음부'(*, 카데솨)는 아스다롯을 섬기기 위하여 신전에 바쳐진 방탕한 여자를 말한다. 남자들은 우상 제사에 참여하여 음부들과 함께 부끄럼없이 음행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ꃨ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 '패망하리라'의 '라바트'(*)는 '밀어 넘어뜨리다', '내팽개치다' 등의 뜻으로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잠 10:8,10).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죄악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어 패망하게 될 것이다.
성 경: [호4:15]
ꃨ 이스라엘아...할 것이라 - 이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을 유다 백성이 배우지 않도록 권고하는 내용이다. 이로 볼 때 당시의 남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 죄악의 위험 수위가 낮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 같은 대조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행음을 징벌하지 않고 계속 방치하는 것은 이미 그 백성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ꃨ 길갈 - 이곳은 이스라엘에 위치하였으며, 한때 선지 학교의 자리였으나(왕하 2:1;4:38), 호세아와 아모스 시대에는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9:15;12:11;암 4:4;5:5).
ꃨ 벧아웬 - 이곳은 일반적으로 벧엘 남동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알려졌으나(수 7:2), 여기서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웠던 '벧엘'을 다르게 부른 이름이다. 즉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이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자 선지자는 이곳을 '벧아웬', 곧 '사악한 집'이라고 언급한 것이다(10:5).
ꃨ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지어다 - 이는 우상 숭배자들처럼 우상을 섬기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가증스러움을 배우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인하여 맹세하라고 하셨다(신 6:13;10:20;렘 4:2).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 신을 섬기면서도 여호와께 대한 예배를 모방하는 망령된 행동을 하였다.
성 경: [호4:16]
ꃨ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 '완강하다'의 '사라르'(*)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완악함으로 반역하는 것을 의미한다(신 21:18). 이스라엘은 멍에에 익숙지 못하여 다루기 힘든 송아지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고 반역하였다(렘 31:18).
ꃨ 이제 여호와께서...먹이시겠느냐 - 대부분의 번역본들(NIV, RSV, JB, NEB)과는 달리 맛소라 원문은 의문문이 아닌 평서문으로 되어 있어서 본 구절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뉘어진다. (1)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경우:이스라엘의 완강함 때문에 이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넓은 초장에서 어린 양을 먹이는 것처럼 먹이시지 않는다(G.Smith). 이 때에 '넓은 들'(*, 메르하브)은 풍요와 축복의 초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시 18:19; 31:8;118:5). (2)평서문으로 해석하는 경우: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길잃은 어린양처럼 넓은 들에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Calvin, Keil, Given). 이 때에 '넓은 들'은 사나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광야로 이해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상기시킨다. 한편, 본 구절을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넓은 초장의 어린양처럼 유순하게 되어 목자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거나, 아니면 살육을 위한 잠시동안의 포식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M.Henry) 문맥상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본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가려내기란 그리 쉽지 않으나 이스라엘의 고통과 역경을 암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성 경: [호4:17]
ꃨ 에브라임 - 북왕국의 가장 뛰어난 지파 이름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킨다(5:3,5;사 7:2).
ꃨ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 '연합하다'의 '하바르'(*)는 '교제를 나누다', '동맹 또는 계약을 맺다', '하나가 되다' 등의 뜻으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비통의 원인은 바로 우상과 연합한 이스라엘의 무지와 완악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라'(*, 한나흐-로)고 하신다. 이는 모든 훈계와 책망에서 '그들을 놓이게 하라'는 뜻이다. 즉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의 죄악된 행동을 막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징계의 최종적인 형태이다(롬 1:24).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우상 숭배에 대한 훈계와 책망이 헛된 것임을 선언하고, 최후적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내려질 형벌은 그들의 계속되는 죄악과 더불어 높게 쌓여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쌓여진 형벌이 이스라엘의 머리 위에 임할 것임은 자명하다.
성 경: [호4:18]
ꃨ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 본 구절은 '다하다'에 해당하는 '사르'(*)를 어떤 뜻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 '사르'는 '수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떨어지다', '제거하다', '떠나다', '외면하다', '그만두다', '버리다'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서 그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술이 시다'라는 해석이나(KJV), '사르'를 '사드'(*)로 고쳐서 '술주정뱅이 무리들'(A band of drunkards, RSV)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어색하다. 보다 가능한 해석은 (1)더 이상 마실 것이 없을 때까지 술을 다 마셨다. (2)저희의 술이 타락하였다(렘 2:21 참고)이다. 이로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술취함과 방종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한편, 이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저희의 타락한 현실을 술취함에 비유한다고 보아도 어색하지는 않다.
ꃨ 행음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 원문에는 '하즈네 히즈누'(*)로 기록되어서 이스라엘이 매춘 행위를 계속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술취함과 방종은 결국 부도덕한 음행으로 연결되었다.
ꃨ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 '방백'에 해당하는 '마겐'(*)은 '방어하다'의 '가난'(*)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방패'를 뜻하나, 여기서는 나라를 보호하는 방백들을 상징한다(시 47:9;89:18). '수치'(*, 칼론)는 사회적 또는 국가적 지위가 낮아지는 치욕적인 부끄러움을 뜻한다(렘 46:12). 그리고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부 헤부'(*)는 히브리어 난제 가운데 하나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하브'(*, 사랑)를 반복하여 강조한 형태로 본다(Delitzsch, Pusey, Ewald, Keil). 따라서 본 구절은 저희의 방백들이 수치를 극진히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의미이다. RSV는 이를 '그들이 저희의 명예보다 수치를 더 사랑한다'고 번역했다.
성 경: [호4:19]
ꃨ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 '바람'의 '루아흐'(*)는 강한 파괴력을 지닌 '태풍'이나 '폭풍'을 상징한다(겔 13:11). '싸다'의 '차라르'(*)는 '묶다', '봉하다' 등의 뜻으로 결국 바람에 날려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사 57:13). 결국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받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포로로 끌려갈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기도 한다.
ꃨ 저희가...당하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희생 제물은 그들에게 복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심판의 정당한 증거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이방 나라에게 조롱을 받는 치욕으로 나타난다(10:6;렘 2:36).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감각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희생 제물을 바친 죄악으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으로서 부끄러운 멸망을 경험하게 된다.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대한 책망 (호세아 5:1-7)
Ⅰ. 온갖 계급과 부류의 사람들이 소환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책망받을 일에 응하게 하기 위함이다(1절). "제사장들아 들으라." 이것은 거룩한 반차에 몸담은 제사장을 가리킨다. 유다에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이스라엘에도 아마 많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지파 중에는 제사장과 레위족의 성이 여럿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레위인들은 십지파의 반역 이후에도 자기 지역에 머물러 자기 직분의 대부분을 이행했을 것이다(비록 성전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또는 이것은 금송아지의 제사장(거룩한 반차에 몸담은 걸로 자처하는)을 가리킬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너희 이스라엘 족속아(일반 백성) 깨달으라. 왕족들아 들으라." 그들은 모두 주목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민족적 범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민족의 심판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성스러운 제사장이나 존귀한 왕족이 죄를 멀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진노를 멀리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는 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는 데 주목하자. 제사장과 왕족은 무척 고귀한 성품을 지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만일 그들이 남들처럼 죄를 짓는다면 그들의 고귀한 성품도 그들에게 구실이 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도 다른 사람처럼 쓰라림을 당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족속도 자기들이 제사장과 통치자에게 오도되었다고 탄원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그들과 공동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보잘 것 없는 평민이라거나 수효가 많다는 것도 그들의 형벌을 면제시키지 못할 것이다.
Ⅱ. 일천 명 대신 단 한 증인이 그들을 쳐서 증거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다(3절).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한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4절).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아셨다. 여호와는 그들이 아무리 교묘히 위장하더라도 그들의 진정한 특성을 아시며 그들이 아무리 숨기더라도 그들은 은밀한 악을 아신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지식을 거부해 봐야 하나님의 아심으로 부터 자신을 안전히 위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쟁변하실 때에는 하나님 자신의 인지로써 그들의 죄를 증명하실 것이다. 그래서 죄없다고 변론해봐야 헛 수고일 것이다.
Ⅲ. 그들은 매우 나쁜 일들로 추궁을 받는다.
1. 그들은 백성들을 죄나 곤란으로 끌어들이기에 몹시 재간을 부리며 몹시 부지런했었다.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1절). 그들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으려고 산 위에 놓는 덫이나 그물과 같았다. 이스라엘에서 금송아지 숭배가 확립되었을 때 이 우상 숭배의 후원자들과 주창자들은 온갖 기술과 수단을 다 안출해 내가지고 백성들을 금송아지 숭배에 끌어들였고 처음에는 송아지 숭배를 두려워하던 자들이 그 관습에 동화되도록 했다. 우정과 호의를 가장하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꾀어서 범죄케 하는 자들은 올무와 그물로 간주될 것이며 그들의 손은 포승으로 묶여질 것이다(전 7:26). 그러나 그들의 죄에 꾀어들이지 못한 자들에게도 그들은 곤란에 빠뜨리는 올무나 그물 같았다. 혹자는 예루살렘에 엄숙한 절기가 있을 무렵이면 길에 특히 미스바와 다볼 산 위에 첩자를 깔아놓는 것이 이스라엘의 관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라도 있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지 감시하고 만약 있다면 그를 고발하여 기소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마귀의 일을 한다. 악마는 자기가 타락시킬 수 없는 자들은 동요시키며 편지 못하게 만든다.
2.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 매우 간교하고 잔인했다(2절).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다." 하나님의 진리에서 이탈하고 반역하는 자들은 왕왕 아직도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는 자들을 극히 간교하고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법이다. 그들에게는 살륙하는 것밖에 안중에 없다. 그들이 목마르게 추구하는 것은 성도의 피다. 그들은 뱀의 머리 뿐만 아니라 뱀의 독아도 갖고 있다. 그들은 살륙하는 일에 깊이 빠져있다. 오! 사탄의 깊음이여! 그 사자들의 악의 깊음이여! 심히 (원의:깊이) 거역하던 자들(사 31:6)의 깊음이여! 더욱이 이것을 악화시킨 것은 그들이 많은 책망과 경고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했다" (한글 개역:징책하노라). 선지자는 직분상 징책자였다. 선지자는 그들의 길과 행사의 악함을 그들에게 누차 말했고 그들을 다 따끔히 꾸짖었다. 그는 제사장이나 왕족이라 해서 예외로 돌리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도 그들의 양심과 자신의 섭리에 의해 그들을 다 징책하셨다. 책망하는데도 죄를 짓는 것은 이중의 범죄라는 데 주목하자(잠 29:1).
3. 그들은 행음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으로 자신의 신체를 더럽혔고 우상 숭배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혔다(3절). 그들은 비록 은밀히 이런 죄를 지었고 교묘하게 오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일의 증인이셨다. 아니, 하나님의 꿰뚫으시는 눈은 그들의 속에 있던 음란한 마음(원의:영)을 보셨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그들의 은밀한 성향과 죄스러운 기질과 죄악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그들에게 대한 죄의 지배력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음란한 영(마음)의 세력 하에 있으며 이 모든 쑥과 인진을 내는 쓴 뿌리의 세력 하에 있는지를 보셨다. 그는 그들이 썩고 독이 있는 샘의 세력하에 있는 것을 보셨다.
4. 그들은 하나님과 알고 교제하려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았다. 음란한 영(마음)은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미혹케 하여 끊임없이 방황하게 만든다(4절).
(1)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알기를 원치도 않았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알기를 거절했고 알기를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많은 길을 가고 있는 그들에게 혼란만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는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의 배반을 완고하게 고집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자기들의 하나님이었고 언약상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이름으로 불렀고 그를 섬겨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숭배에서 이탈했는데 그 숭배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행위)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고 진지한 성품을 갖추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할 일에 대해 생각을 쏟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기능과 성령의 도움을 적당히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다. 이 일을 행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려 하지 않는(대하 12:14)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전부 자기 탓이다. 그들은 죽는다. 그들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행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은혜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3) 그들은 악명 높은 교만죄와 무례죄를 범했다(5절).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된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통치에 대한 반역자라는 것을 쳐서 증거한다. 그 속에 있던 음란한 마음은 창기가 그 옷차림으로써 알려지듯 (잠 7:10) 그들의 번지레하고 흥겨운 예배로 나타났다. 음녀의 경박한 옷은 그녀가 정숙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 얼굴에 증명한다.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과 그 선지자들이 가져온 증언을 대적한 그들의 교만 그리고 자기들의 형제와 수하 사람들에게 대한 그들의 거만하고 냉소적 태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것을 증거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모든 심판으로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되셨다. 그의 교만은 그의 얼굴에서 증거가 된다(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이것은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한다" (사 3:9)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교만한 표정을 갖는다.
(4)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갔고 그 자녀를 우상 숭배로 양육했다(7절). "저희가 혼인 언약을 무시하여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간음하며 지내는 아내처럼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돈으로 자기 하나님을 삼는 자나 배로 하나님을 삼으면서 영적" 간음을 범하는 자들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어기며 그의 기대를 좌절시킨다. 고의적 죄인은 정조를 지키지 않는 자라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사생아를 낳았다. 즉 그들이 낳은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었고 거짓된 예배 방법으로 양육되었다. 그들은 음란한 데서 난 자녀였고 사생아였다(요 8:4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기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을 좇는 데서 돌이킬 뿐 아니라 악한 길로 그 자녀를 훈육하는 자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정조를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Ⅳ. 매우 슬픈 일들이 그들의 운명을 기다린다(1절). "너희에게 심판이 있다. 하나님이 너희와 쟁변하러 나오시고 너희 죄에 대한 그의 노여우심을 증명하신다." "심판이 우리를 향할" 때(원의는 그렇다)는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1. 그들은 "그 죄악을 인하여 넘어질 것이다." 이것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는 교만" 을 따라 나온다(5절). 그러므로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질 것이다. 교만은 몰락을 가져온다는 데 주의하자. 교만은 파멸의 확실한 전조이며 예고자이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춤을 당할 것이다. 교만이 증거가 되는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넘어질 뿐만 아니라 "그 죄악 중에서 넘어질" 것이다(흠정역). 죄악 중에서 망한다는 것은 모든 파멸 중 가장 슬픈 파멸이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죄악을 회개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죄악을 인하여, 그 죄악 가운데서 넘어질 것이다. 자기 죄악을 인하여 겸비치 않는 자들은 영원히 자기 죄 중에서 망하기 쉽다는 것을 주의하자. 여기에 유다도 그 죄악을 인하여 그들과 한가지로 넘어지리라는 말씀이 추가되고 있다. 열 지파가 우상 숭배로 인하여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듯이 두 지파도 그들의 악한 전례를 따랐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전자가 넘어져서 완전히 망한 데 반해 후자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으킴을 받았던 것이다. 유다에는 성전과 제사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유다가 만일 이스라엘이나 에브라임과 함께 범죄한다면 그들과 한가지로 넘어질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한다고 고백할 때 그 은총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6절).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주로 유다에게 하신 것 같다. 그들은 자기 죄악 속으로 빠졌고 그 죄악을 인하여 넘어졌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죄악 속으로 빠졌을 때 여호와를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만을 찾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섬기면서도 참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허울과 잔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이나 다름없이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엄숙한 절기에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정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적으로 그를 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서 나뉘지 않고 전심으로 그를 찾을 때에만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겔 14:3 참조).
(2) 그들은 자기 죄중에서 넘어지거나 자기 죄악을 인하여 넘어진다고 깨닫자 여호와를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간절히(또는 새벽에, 잠 8:17; 호 5:15) 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견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파멸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때에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피신하게 될 것이고 번제물과 희생 제물로써 그와 화친하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을 내리신 때에는 그의 진노를 돌이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왕하 23:25, 26). 양떼와 소떼만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가며 자기 심령과 영혼으로 나아가지 않는 자들은 그를 만난 줄로 기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은 수양 일천 마리로도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날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지 않는 자들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만나지 못할 시간도 있는 까닭이다. 그들은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물러 나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문의를 받지 않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막으시며 그들의 제물을 고려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은 일찍이 그리고 만날 만한 때에 그리고 구원의 날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3. 그들과 그들의 분깃이 다 삼키울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않았고 이방 자손과 연합함으로써 패역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굳게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새 달이 그들과 그들의 기업을 다 삼킬 것이다. 즉 그들의 재산과 유업과 그들이 자기 몫으로 취한 모든 것들을 삼킬 것이다. 또는 그들의 기업이란 것은 그들이 하나님 대신 자기들의 분깃으로 선택한 우상을 의미한다. 세상을 자기들의 기업으로 취함으로써 우상으로 삼는 자들은 그 세상과 더불어 멸망할 것이다. 한 달이 그들을 삼킬 것이며 먹어치울 것이다. 이 기간은 일정한 기간이며 짧은 시간이다.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될 때는 곧 끝장을 낼 것이다. 한 달이면 그들의 일을 끝낼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한 달간의 질병으로 얼마나 많이 쇠약해지며 나라는 한 달 간의 전쟁으로 얼마나 피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달 동안에 그 세 목자를 끓으리라" (슥 11:8)고 말씀하신다. 때때로 하나님의 심판은 죄많은 백성과의 일을 속히 처리하신다는 데 주목하자. 한 달은 여러 해 동안 복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 더 많은 기업을 삼킨다.
심판의 위협 (호세아 5:8-15)
Ⅰ. 여기에는 심판의 임박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경보가 울리고 있다(8절). 기브아와 라마는 유다국과 이스라엘국의 경계에 있는 인접 도시들이다. 기브아는 유다국의 전진 기지였고 라마는 이스라엘 왕국의 전진 기지였다. 따라서 이 경보는 양국에 대해 보내는 것이다. 벧아웬 또는 벧엘은 이미 적군의 내습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나팔 소리가 울리지 않고 점령하기 위해 소리치는 공격군의 함성이 피점령민의 울부짖음과 뒤섞여 들린다. 그들로 하여금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적군이 온다. 에브라임 지파는 이미 함몰했다. 베냐민아! 얼마 안 있으면 적군이 네 배후를 습격할 것이다. 다음에는 네 차례가 온다. 떨림의 잔이 돌아갈 것이다" 라고 크게 소리치게 하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쟁변을 율법의 재판으로 묘사했었는데(4:1) 여기서는 전쟁의 재판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심판하실 때는 이기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자기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앞에서 심판을 확실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는 심판을 가까운 것으로 말씀하신다. 심판이 바로 문밖에 왔다고 할 때 그들은 매우 놀라고 깨우침을 얻는다. 이 나팔 소리는 9절에서 설명된다.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 있을 일 곧 참되거나 확실한 일(말뜻은 그렇다)을 보였노라." 참회치 않는 죄인의 멸망은 확실히 있을 일이란 데 주목하자. 이것은 단지 그들을 놀라게 할 말이 아니라 취소 불가능한 판결이다. 그 일이 우리에게 보여지며 우리가 시기 적절한 경고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한 자비이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장차 올 진노를 피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신탁을 통해 의무를 들을 뿐만 아니라 위험도 경고받는 것은 이스라엘 지파의 특권이다.
Ⅱ. 하나님이 그들과 쟁변하시는 근거가 나온다.
1. 하나님께서는 유다 방백들과 쟁논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겁없이 죄짓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10절). 그들은 경계표 즉 옛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기 율법을 주셔 자기 재산의 울타리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무엄하게도 그 울타리를 뚫고 들어와서 그것을 치워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리조차 침해했으며 선악간의 구별을 짓밟았고 방백이라 해서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성과 공평의 지극히 신성한 의무도 유린했다. 그들에게는 Quicquid libet, licet-즉 그들의 의지가 곧 법이었다. 또는 이것은 전권의 횡포로 백성의 자유와 재산을 침해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옛 지계표를 옮기는 것과 같았다. 혹자는 유다 방백들이 이스라엘 방백보다 전체적이고 더 전단적 권력을 소유했다고 말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그들과 쟁변하신다.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 하나님의 진노는 물밀 듯이 몰려 오는 홍수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땅을 가득 채운 강포로 인하여 옛 세계의 거인들에게 쏟아진 홍수와 같을 것이다(창 6:13). 방백(군주들)조차 옮겨서는 안 될 경계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것은 곧 종교와 정의의 경계이다. 군주들이라도 이 두 가지의 제한을 받는다. 만약 이들을 침해하며 파괴한다면 그들은 자기들 위에 책임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2. 하나님은 에브라임 백성이 남몰래 죄를 좇으므로 그들과 쟁변하신다(11절). "에브라임은 명령 좇기를 좋아한다." 즉 그들은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그 다음 왕들의 명령을 즐겨 좇았다. 이스라엘 왕들은 모든 백성에게 단과 벧엘의 송아지를 숭배하도록 법으로서 강제하였다. 그들은 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것이 명령이었다. 그것은 그 땅의 법이었고 국가적 이유에서 지원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권세에 대한 맹목적 복종심에서 그 명령을 좇았을 뿐만 아니라 즐겨 좇기도 했다. 이것은 암암리에 하나님 예배에 대한 냉담과 우상 숭배에 대한 강력한 편견이 작용한 결과였다. 하나님의 명령과 상치되는 인간의 명령에 쉽사리 순응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한 백성의 멸망을 성숙시킨다. 그리고 순순히 복종하는 불복종(그렇게 부를 수 있으면)에 대한 형벌은 죄와 상응한다. 에브라임이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으며 시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가 유린당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인 까닭이다.
(1) 일을 그렇게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재산을 배신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재산을 상실해 마땅하며 자신의 양심을 무모한 재판관과 그 절대적 권력에 복종시키는 자는 그 두 가지를 다 충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2) 그 일 자체에는 자연스런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과 상반될 때에도 사람의 명령좇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그 명령이 침해한다는 것과 많은 권력이 주어지면 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맹렬하고 사나운 불독개 같은 폭군에게는 웅크리고 앉아 아양떠는 스파니엘 개 같은 순종보다 더 큰 유익을 주는 것도 없다는 데 주목하자. 이와 같이 에브라임은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한다. 즉 에브라임은 정의의 기치와 구실 아래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정의를 행한다는 구실 하에 압제하고 학대한다는 것은 슬프고도 쓰라린 심판이라는 데 주목하자. 위협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9절). "견책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무하리라." 대담한 죄인은 견책하는 날이 이를 것을 각오해야 하며 그 견책의 날은 그들을 황무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소유하고 희망하는 모든 위로를 빼앗아 갈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에브라임에게 상이한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다. 때로는 이런 방법을, 또 때로는 저런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며 어떤 때에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취하실 것이다. 또는 먼저 유다에게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시고 그 다음 에브라임에게는 저런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완전한 멸망을 향해 진행하실 것이다.
1. 하나님은 보다 작은 심판으로 시작하려고 하셨다. 작은 심판은 때때로 조용히 부지불식간에 작용한다(12절). "내가(즉 나의 섭리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을 것이다. 아니, 그들이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은 현재 그것을 병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13절)." 하나님의 심판은 때때로 죄많은 백성에게 좀 같고 썩이는 것 또는 벌레 같다는 점을 주목하자. 전자는 옷에서 번식하는 작은 생물을 의미하며 후자는 나무에 기생하는 곤충을 의미한다. 이들이 옷과 나무를 좀먹듯 하나님의 심판도 그들을 좀먹을 것이다.
(1) 이 심판은 세상이 떠들썩하지 않도록 조용하게 올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심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번영하고 안전한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나라를 보다 엄밀히 보게 될 때 자기들의 피폐와 쇠잔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이 심판은 천천히 올 것이다. 그 심판은 오래 지체되고 간격이 길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많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많은 국가도 그 전성시기에 만성병으로 사멸한다.
(3) 이 심판은 점차로 올 것이다. 하나님은 보다 큰 심판을 방지하시기 위해 보다 작은 심판으로 죄인들에게 임하신다. 그들이 지혜롭게도 그것을 경고로 받아들이려고만 한다는 보다 큰 심판을 예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죄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죄인들에게 임하신다.
(4) 좀은 옷에 쓸고, 벌레나 썩게 하는 것은 나무에 쓴다. 그와 같이 죄인은 그들 스스로 사르는 불에 타죽는 셈이다.
2. 작은 심판이 자기 업무를 성취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면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심판으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14절).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리라." 유다 자신도 야곱의 축복에서 사자요 사자 새끼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약화된 것으로 생각할 자가 있을까하여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사자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자는 포효소리로 그들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갈갈이 찢기도 하는 동물이다. 보다 작은 심판이 제 일을 끝마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보다 큰 심판을 보내시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데 주목하자.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가 되시는 적도 있으나 여기서는 유다 지파를 대적하는 사자가 되신다. 죄악 중에서 태평스럽게 지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지 유의하자.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하나님은 오직 단 한 분의 입법자로서(약 4:12) 멸할 능력이 있으신 것을 자기 특권으로 자랑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나 곧 내가 그 일을 내 수중에 장악하리라. 그 일이 그렇게 되리라고 내가 말한다." 어떤 심판에는 다른 것보다 더 다급한 하나님의 일이 있다. 내가 찢을 것이며(원의는 그렇다) 갈 것이다. 하나님이 가시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1) 그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기에. 그는 사자가 그 먹이를 떠나듯 당당히 그리고 위엄있는 얼굴로 가실 것이다.
(2) 그들을 도우지 않으시기에. 하나님이 만일 고난의 섭리로 우리를 움키시면서도 그의 은혜와 위로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주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움켜 가시며 우리의 위로물을 박탈하시고도 우리에게서 떠나가신다면 우리의 형편은 참으로 비참하다. 하나님이 떠나가실 때는 소중하고 귀중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실 때는 모든 선한 것도 그와 함께 가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자에게서 먹이를 구해낼 자가 없는 것과 같다(미 5:8). 하나님의 은혜의 수중으로 구출받는 자 이외에는 그의 공의의 수중에서 수출해 낼 수 있는 자는 없다.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와 다툰다는 것은 무익하다.
Ⅳ. 상이한 방법의 상이한 효과.
1. 하나님이 보다 작은 심판으로 그들과 다투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피조물에게서 구원을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다(13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좀 같고 썩이는 것 같으셨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병과 상처를 깨달았다. 얼마 후 그들은 스스로 언덕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깨달았고 저희 사업이 부진하며 재산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러자 그들은 앗수르 왕에게 도우러 와 달라고 사람을 보내고 야렙왕에게 원조를 청했다. 혹자는 야렙이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이나 불(Pul) 의 이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곤경에 빠질 때면 앗수르왕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쓰러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고 재흥시키기 위해 앗수르와 제휴하기를 희망했었다. 세상적 마음은 환난의 때에 자기 병과 상처는 보면서도 그 원인이 되는 자기 죄는 보지 못하고 또 그 점을 인식하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손 곧 그의 강한 손을 깨닫지도 못한다는 데 주목하자. 하물며 그들의 환난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손길을 깨닫는 일이랴!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신 창조주께 곧장 가긴 커녕 자기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피조물에게 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써가며 우회한다. 죄악으로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을 회개치 않는 자들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은혜입기를 싫어하며 오히려 그 이외에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러나 저가 능히 저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줄이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피조물에게 구조를 요구하는 자들은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이다. 피조물에게 후원을 의존하는 자들은 그것들이 기초가 아니라 상한 갈대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피조물에게 공급을 의존하는 자들은 그것들이 근원이 아니라 터진 웅덩이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피조물에게 위로와 치료를 의존하는 자들은 그것들이 번뇌케 하는 안위자이며 쓸데없는 의원이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욥 13:4; 16:2 참조). 유다와 이스라엘이 도움을 구했던 앗수르왕들은 도리어 그들을 군핍하고 돕지 않았다(대하 28:16). 어떤 이는 아렙왕이 크고 유력하거나 훌륭한 왕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힘에 많이 의지한 까닭이다. 또 다른 이들은 야렙이 변론해 줄 왕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지혜와 변설에 크게 의존했고 자기들의 일에 개입해 주기를 원한 때문이다. 그들은 야렙에게 예물을 보냈고 후한 사례금을 지불했다(10:6). 그들은 자기들을 위한 그의 권면을 의뢰했기에 그의 충실성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혈육의 팔이 자기를 의뢰하는 자를 속이듯이(렘 15:5, 6) 그들을 기만했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보다 큰 심판을 보내실 때 그들은 결국 그에게 의뢰치 않을 수 없게 된다(15절).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자처럼 움키신 뒤 그들을 떠나실 것이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의 곳은 하늘 또는 은혜의 보좌인 속죄소를 말한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는 자기 장소에서 나오신다(사 26:21).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은총을 주시려고 작정하실 때에는 그의 곳으로 돌아가신다.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순종하면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신다(사 30:18). 또는 그는 그들을 징계하시고 난 뒤 그의 곳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이는 그들을 돌아보시지 않고 그들에게서 그 얼굴을 숨기시며 그들의 고난이나 기도를 주목하지 않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을 더 이상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의 은총의 돌아오심에 다소 자격을 구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그들을 움키신 뒤에는 드디어 그들에게 작용하셔서 고난으로 그들로 제 정신을 차리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일이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그들에게서 물러나시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들이 돌아오는 사례로서 두 가지 일이 언급된다.
[1] 자기 죄에 대한 참외의 고백.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칠 때까지 즉 자기 죄를 깨닫고 인정하게 되며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될 때까지"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난보다 자기 죄에 대해 더 많이 호소하게 될 때에라야 비로소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아래 있을 때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또 징계 당해 마땅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겸손한 청원. "저희가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그들이 최후의 궁지까지 이르게 되어 다른 구조자들을 청해 보나 헛되게 될 때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또는 이른 때에) 그리고 부지런히 찾을 것이며 몹시 애타게 조를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찾으며 그 태도가 신실하면 너무 늦진 않을 것이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이 찾게 되어 늦게 찾는다는 평을 듣더라도 그들의 하나님 탐구는 너무 늦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일찍이 찾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진정한 회개자를 최대한 활용하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징계의 채찍을 느끼게 될 때 우리의 본분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일이라는 데 주목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그와의 친숙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와 화해하신다는 표시로 우리를 위해 또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다. 고난은 오랫동안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던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우리에게서 돌이키신다. 이는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돌이키셔서 우리에게로 돌아오시기 위함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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