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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호세야 개요 및 서론

by 은총가득 2021. 8. 22.

음란한 아내… 우상 숭배 빠진 이스라엘에 빗대

 

 - 북왕국의 바알 숭배를 표현한 부조 작품.

 

 

 

 

호세아[HOSEA]

 

본서는 북이스라엘 사상 최고의 황금기에 수도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벌인 선지자 호세아의 사역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본서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상,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외면하는 백성들의 사회적 무관심, 우상 숭배와 불신앙에 대한 신랄한 꾸지람과 심판 선언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한 걸음 더 나가 음란한 아내와 불행했던 자신의 결혼 생활에 빗대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시키면서 백성들에게 거듭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호소한다.

 

히브리어 성경을 비롯한 헬라어 70인역(?ⅩⅩ), 라틴역본 벌게잇(Vulgate), 현대의 모든 성경들은 본서 저자며 중심 인물인 ‘호세아’의 이름을 따서 ‘호세아’로 부른다.

 

저자 

본서는 호세아 저작으로 본다. 이는 ① 호세아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사실을 본서가 증거하며(1:1, 2, 4) ② 호세아란 이름이 1인칭 단수(내가)로 언급되고(3:1) ③ 유대, 기독교 문헌들이 모두 본서를 호세아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 시기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아스 왕의 아들 여로보암 2세(B.C. 793-753년경) 통치 말기에 활동을 시작하여 북이스라엘 마지막 임금인 호세아 왕 때(B.C. 732-722년경)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1:1; B.C. 753-722년경). 그러나 본서에는 북이스라엘 멸망(B.C. 722년)에 관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이 시기에 남유다에서는 웃시야(B.C. 791-739년), 요담(B.C. 750-731년), 아하스(B.C. 735-716년), 히스기야(B.C. 728-687년) 왕이 계속해서 통치하였다(겹쳐지는 연대는 섭정). 이렇게 볼 때 본서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 호세아 선지자 말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 장소

호세아 선지자의 주요 활동 무대인 북이스라엘과 수도 사마리아를 기록 장소로 본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호세아 선지자는 본서에서 자신을 떠나간 음란한 아내 고멜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가르친다. 거듭해서 선지자의 곁을 떠나는 아내 고멜은 은혜를 수없이 거부하며 하나님의 곁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된다. 또 이들 부부 사이에 태어난 세 아이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범죄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공의롭고 준엄한 심판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본다면 범죄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매질조차도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 없고 신실한 사랑의 일환임을 확신하게 된다.

 

 

호세아서의 배경과 무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당시 앗수르는 북방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 위협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여로보암 2세는 북방 하맛 어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며, 경제적 안정을 꾀하여 북이스라엘은 역사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이룬다. 하지만 이런 번영은 곧 사치와 타락으로 이어졌고, 여로보암 2세 사후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를 거치면서 북이스라엘 왕국은 점점 쇠락하여 호세아 왕 때 결국 앗수르에게 패망하고 말았다(B.C. 722년). 

(라이프성경사전)

 

 


호세아 개요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은 선지자 호세아입니다. 호세아와 여호수아는 원래 같은 이름으로, 그 뜻은 ‘구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품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아모스와 동시대 사람으로 미가보다 연장자이고, 이사야와는 비슷한 연배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역을 하면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지요.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멸망을 지켜보며 통곡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남유다에게 경고를 주는 데 사용됩니다.

 

호세아서의 목적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백성이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말씀하시고, 그렇게 하면 주님의 축복으로 그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특이하게도 하나님께서 호세아 개인의 가정을 예증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사랑

 

1장-3장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호세아가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는 내용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 사이에 태어난 세 아이들의 이름을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의미를 담아 짓게 하십니다.

 

첫째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어 뿌리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심각한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앗수르 왕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 온 앗수르 제국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둘째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셋째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히브리어에서 ‘로-’는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시고 회복시킬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세 아이의 이름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첫째 ‘이스르엘’은 ‘이스라엘’로, 

둘째 ‘로루하마’는 ‘루하마’, 긍휼히 여김을받지 못하던 자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셋째 ‘로암미’는 ‘암미’로,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가 내 백성이라는 뜻으로 바뀐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고멜

 

2장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회복하시는 과정을 말해줍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이 돌이키도록 가시로 그 길을 막으십니다. 환경적으로 힘든 고통 때문에라도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담을 쌓아서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데까지 가게 하셔서 결국 절망 속에서 주의 은혜를 구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4,15절에 하나님은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그에게 되돌려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는 힘들고, 두렵고, 불안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거친 땅입니다. 안정된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골 골짜기는 ‘환난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를 떠나서 제멋대로 살며, 방황하며, 환난 속에 살지만 긍휼히 여기셔서 절망을 놀랍게도 소망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바꾸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장가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말씀하심으로 사랑과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은 결심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2:19,20).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주변국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남편을 버리고 떠난 아내과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호세아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메시지를 듣길 원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2:23).

 

3장에서 호세아는 그를 떠났던 부정한 아내를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사서다시 데려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해 동맹국들을 신뢰했습니다. 이에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유다는 이방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며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절개를 팔고 창녀 노릇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결혼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이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뿌리를 뽑아 이방 땅 앗수르에 흩뿌리실 것입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은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금 포로에서 돌이켜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4장-14장은 하나님의 모습을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4장-7장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주께서 지적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살아야 된다고 촉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삶에서 돌이켜 돌아오며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6장 3절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7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상태를 네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달궈진 화덕’과 같다고 하십니다(4절). 이는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마치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다고 하십니다(8절). 빵을 한쪽으로만 구우면그쪽은 타버리고, 다른 쪽은 덜 익어서 못 먹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상태와 같다고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 ‘어리석은 비둘기’ 같다고 말씀하십니다(11절). 비둘기는 원래 자기 집을잘 찾아가지만 어리석은 비둘기는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데이방 국가들에게로 간 이스라엘을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네 번째는 ‘속이는 활’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16절). 처음에는 과녁을 잘 맞추었지만 마지막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쏘는 활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이방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을 잘 보여주지요.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이들이 모든 죄를 다회개하고 돌이켜 돌아오기를 요청하십니다.

 

8장-10장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죄의 결과가 얼마나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들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8:7). 헛된 것을 심었더니 더 큰 헛된 삶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백성들은 ‘나라들 사이에 방랑자들’이 될 것이고, 그들의 왕통王統은 끊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두마음이 아닌 오직 한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11장-13장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떠난 삶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십니다. “내가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다”라고 하십니다(11:4). 그래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넘어지면 팔로 안아서 치료해주시는 부드러운 사랑의 아버지로 보여주십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시듯(11:8), 우리가 죄를 지으면 화를 내시기보다는 함께 마음으로 아파하시며 돌봐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12장-13장에서 에브라임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풍요 속에 젖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능력으로 부를 모았다고 교만해지고, 더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재물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십니다.

 

 

회개하는 자에 대한 풍성한 약속

 

14장의 어조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앞에서 죄에 대한 책망과 진노와 경고를 말했다면 이 장은 회개의 권면과 긍휼로 인한 회복의 약속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회개하는 자들을 위한 지침서와 같습니다. 죄사함과 용서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입술로 죄를 모두 자백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14장 5-8절은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켜주실지를 열거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로 더 빠져들어 점점 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이켜서 주께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큰 축복과 풍성한 열매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우리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호세아서에서는 끊임없이 범죄한 백성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셔서 계속 기회를 주시고,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며 결국에는 큰 축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서론

 

 

명칭

'호세아'란 '구원'이라는 뜻으로 '여호수아'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동일하다. 북 이스라엘이 영적, 사회적으로 타락했을 때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하면서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본서는 저자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책의 제목을 삼았다.

저자 및 기록연대

본서의 저자는 호세아이다. 그는 이사야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B.C. 782-753년경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여로보암 2세 때 소명을 받아 예언 사역을 시작하였다. 호세아의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지자로서는 특이하게 북이스라엘에서 출생하였다. 소명 전의 직업에 대해서는 제빵업자(7:4) 또는 농사꾼이라는 설이 있다.

배경 및 주제

 

 

■ 역사적 배경

 

본서의 표제에 의하면(1:1) 호세아는 남유다왕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와 북이스라엘왕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기간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의 초반은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 특히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B.C. 793-753)의 통치하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유능한 여로보암 2세는 40여년 동안 왕국을 다스리면서(왕하 14:23) 영토를 솔로몬 시대의 판도와 같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14:25) 확장시켰으며, 팔레스타인의 주변 국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물론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으면서 항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던 아람(다메섹)이 앗수르의 공격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동시에 앗수르도 국내 ·외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주변국가들에 대한 공격을 멈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영적·사회적으로 가장 타락하였다. 즉 그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망각한 채 율법을 무시하고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으며, 이웃에게 불의를 자행하는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걸어 갔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하면서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호세아의 경고와 호소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범죄했기 때문에,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V세의 공격으로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였다(B.C. 722). 그리고 그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앗수르로 끌려가는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참조. 왕하 17:1-23).

 

 

 

■ 주제

 

호세아는 자신의 책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체험을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극적인 묘사 수단으로 활용하고 계신다. 여호와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한 따뜻하고 간절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11:8). 여호와는 기이한 사랑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호세아는 자신의 메시지에서 심판과 사랑을 가장 큰 주제로 삼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는 공의의 심판을 초래하고 심판 후에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사랑은 언제나 자기 백성의 소망이 된다. 심판과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중심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요소를 나타낸다. 학자들 중에는 호세아서의 표현은 가감할 수 없는 하나임의 거룩한 공의를 잘 이해시키는 동시에, 자기 백성을 향한 깊고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내용분해

1. 선지자의 결혼 생활(1:1-3:5)

2.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 심판(4:1-13:16)

3. 이스라엘의 회개와 축복(14:1-9)

 

서론 일람

1. 기록자 : 호세아

2. 기록연대 : B.C. 790-710년 사이

3. 기록장소 : 북왕국 이스라엘

4. 기록대상 : 북이스라엘 백성들

5. 핵심어 및 내용 : 호세아의 핵심어는 "결혼"과 "용서"이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한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관계는 결혼 관계로 묘사된다. 그리고 호세아가 간음한 자기의 아내를 용서하고 노예 시장에서 다시 찾아오기 위하여 나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찾고 계신다.

 


호세아(Hosea)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죄,심판 그리고 사랑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돈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14:9,참조,호2:14-16,6:1-4,8,9,14:4-8)"

의심할 바 없이 이 말씀은 호세아 자신에 의해 쓰여진 선지서의 결어이다. 유다 왕국에서의 그의 사역 기간은 70년 이상이다. 본서를 통해 우리는 그의 사역 기간 동안에 행했던 많은 설교의 집대성을 대할 수 있다. 호세아는 본서를 완결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이 결어는 본서가 16선지서 중 그러한 결어를 갖는 유일한 선지서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돋보인다. 선지자의 의도가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지혜가 있느냐?" 그리고 "누가 총명이 있느냐?"는 것은 이 글이 어떤 조건하에서 고찰되어야 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지혜와 총명이라는 말들은 간당하면서도 깊은 뜻을 지닌 말들이다. 하지만 선지자가 사용했을 때 그 말들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지혜는 참 빛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총명은 빛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받은 자가 알 것이다. 이 조건을 제시하는 질문 다음에는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라는 인상적인 선언이 따른다. "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길, 즉 행위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탄탄 대로를 일컫는 말이다. 선지자는 이 길이 정직하다고 선언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자신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예언하였던 하나님의 통치와 활동의 모든 결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도가 정직하다는 이 진리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주었다. 첫째는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도는 변함이 없다. 또 언제나 정직하다. 따라서 그 도에 순종하는 자들은 그도에 행할 것이다. 즉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 도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같은 도에 거쳐 넘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물음과 선언에 대한 답으로서,"그렇다면 본 호세아서에 정직한 것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도는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그 답을 70년이상 동안 호세아가 선포한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으므로써 얻을 수 있다.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본서를 읽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의 명확한 계시, 죄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그의 활동에 관한 분명한 단언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사랑의 호소에 대한 언명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죄와 심판과 사랑이라는 세 단어가 하나의 선 상에 놓이게 된다. 이것들은,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백성 가운데 있으며 또한 그들은 위해 있는 하나님의 도에 입각해 취급될 수 있는 말이다.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그의 심판 활동, 그리고 그의 사랑의 호소이다. 이 세가지는 본 선지서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이 세가지는 서로 결합하여, 선지자가 정직하다고 선포한 하나님의 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죄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첫째는 많은 특권을 가진 백성의 범죄는 인간이 범하는 죄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러운 죄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다의 죄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에게 사랑을 물붓듯 쏟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가상에 배신으로 답하였다. 이 선지서에서 죄가 통속적인 형태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음은 주목할 만하다. 죄는 단지 도덕적이며 영적인 의미로만 언급되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는 사랑에 대한 배신의 죄이다. 유다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사랑하시고 찾으시며 구속하여 주신 민족의 죄였다. 그들은 그들이 행할바에 대해 하나님께 가르침 받은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팔에 안긴 백성이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인에 대한 사랑 이상의 것이었다.이런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에 불충실했다.

 

호세아는 자신의 찢긴 심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웠단. 그의 가정 생활은 파괴되었으며,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고멜의 배신 때문에 차믈 수 없는 번민에 시달려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죄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죄를 묘사하는 데 간통, 행음이라는 자극적이며 통속적인 단어를 채택하였다. 간통죄는 불법적인 관계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범죄이다. 이는 이 백성들이 범한 죄였다. 행음은 더 나쁜 것이다. 이는 돈으로 몸을 팔고 사는 죄이다. 이 죄 역시 유다가 범한 죄었다. 선지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셨으며 사랑하셨다. 또 그들에게 행할 바를 교훈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른 신을 좇았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계시는 그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일 것이다.

 

첫째는 그러한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러한 죄를 결코 너그럽게 봐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와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것ㅇ. 그 묘사는 생생하고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 백성들에 있어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업신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사랑을 훼손하였다. 하나님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언어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자신의 목적을 밝히셨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그의 사랑을 멸시하였다. 그들은 음녀와 간부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눈감아 준다거나, 죄와 타협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지혜가 있는 자는 깨달을 것이고, 총명한 자는 알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정직하다. 따라서 언제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특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우리는 흔히 대화 속에서 작은 죄 또는 큰 죄라는 말을 하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구분은 전혀 근거가 없다.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는 사실이다. 호세아처럼 민족적인 견지에서 보면, 특권을 가진 민족의 죄는 특권을 가지지 못한 민족의 죄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빛을 누리는 데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 결국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치 못할 것이라면, 우리는 영국에서 태어나는 것보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선지서는, 고멜이 호세아를 대하듯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면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신다는 점을 탄식과 한숨으로 교훈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두변이나 말했듯이, 죄와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너그럽게 눈감아 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뿐만 아니라 그의 필연적인 심판 행위에 대한 것까지도 명백히 밝혀졌음을 알게 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심판이란 말은 공의 속의 징벌적인 요소를 지적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선지서 전반에 걸쳐 진노의 호통으로 울려 퍼지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선지서의 빛 가운데서,그리고 실로 성경 전체의 계시의 빛 가운데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결코 변덕스러운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징벌은 오히려 죄 자체가 가져오는, 취소할 수 없는 결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곧 도덕적 세계를 조성하사 우리가 그러한 결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게 하셨다. 죄는 언제나 심판에 이른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는 바로 사람이 스스로 심은 것을 거둔다는 것을 명백히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 형벌은 불가피한 것이며 죄의 경로 속에 반드시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불가항력적인 강제성이 죄에 대해 최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호세아에게서 들어 인식하였지만,이외에도 알아야 할 것이 상당히 많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로부터 피할 길은 없다.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시편 기자가 물었을 때, 그 정확한 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선언 가운데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다. 또 그의 통치가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도 없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사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간구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요 옳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왕권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다렬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반역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강력한 방패에 부딪혀 깨질 수 있다. 또 하나님의 피난처로 피해, 모든 해로부터 보호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자신의 통치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각, 그의 선택, 그리고 그의 철학을 그 통치의 궁극적인 결과에까지 성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다. 한 전사를 바라보고 "누구뇨"라고 물었던 이사야는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면서 매우 주목할 만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사63:1). 그 전사는 포도즙 틀을 밟고 있었다. 즉, 포도를 짜서 그것의 특성을 드러내게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늘 하고 계시며 오늘날 전 세계에 이 일을 행하고 계시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자신의 철학과 선택을 그 통치의 궁극적인 결과에 까지 성취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벌로서의 심판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다. 이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떠맡은 것이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의지를 망라하는 것이며, 그러므로써 도덕적 세계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벌칙은 의에 대한 축복 만큼이나 결정적인 것이다. "여호와와 도는 정직하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사랑의 호소를 하신다는 가장 중대한 사실에 접하게 된다. 이는 실로 호세아가 전한 메시지의 가장 뚜렷한 특색을 이루는 내용인 것이다. 그것은 시편의 음악을 끊임없이 울린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호세아의 비극을 통해 그에게 나타났다. 고멜은 그를 속였고, 그에게 불충실하였으며 그를 버렸다. 그녀가 허망한 연인에게로 가 버렸을 때, 그의 마음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호세아서의 이야기는,그녀의 연인들이 그녀를 버렸고, 그녀는 종으로 전락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때 호세아는 그녀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노예로서 사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골 골짜기에 있는 그녀에게 소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아골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통의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이 개인적인 뼈 아픈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영적인 간음과 매음의 죄를 범한 민족에게 그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신가를 보이셨다. 고통의 골짜기에 소망의 문이 열렸다. 이는 모든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사랑의 노래이다. 오직 호세아만이 그가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명해진 일을 수행함으로써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메시지를 다음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나니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 큰 외침은 자기 백성의 반역으로 인해 고통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극도의 경멸 속에 처해 있던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떡, 즉 설 구워져 흐물거리는 떡, 한 쪽은 덜 익었고, 다른 한쪽은 재가 되어 버린 떡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의 외침을 듣는다.

 

 나라 혹은 민족은 그 심은 것을 거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에게 돌아온다면 그 땅에 다시 번영을 가져다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유대 산지에서 추수한 곡식을 타작하고 있는 장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11:8)

이에 대한 답변은 바로 다음의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에서 나온 변함없는 말씀을 듣게 된다.

내가 이 설교의 본문으로 이러한 말씀들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다른 구절들 즉 죄의 특성과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나타내는 엄하고 두려운 경고의 말씀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사랑의 노래가 들려 오는 이 구절을 택하였다.

 

이 구절은 호세아의 위대한 메시지에 있어 불변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궁극적인 사상으로 인해 이에 관계된 말씀을 다른 말씀들보다 강조함으로써 본서 전체의 가치를 매우 하찮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가 사랑의 노래만 듣고 심판의 선포는 잊어 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심판만을 강조하고 사랑의 노래는 잊어버린다면, 이 또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랑에 대한 배신이야말로 가장 가증스러운 죄악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고통을 준다. 또한 죄인 자신도 파멸시킨다.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눈감아 주시기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회복시키실 수 있고, 또 희복시키신다. "누가 지혜가 있는가?" 그는 깨달을 것이다. "누가 총명이 있는가?" 그는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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