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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호세아 1-3장

by 은총가득 2021. 8. 22.

 

호세아의 예언 시기 (호세아 1:1)

 

1. 여기에는 선지자의 이름과 별칭이 나온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자기 예언의 서두에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가 입증하려는 모든 것을 성화(聖化)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기가 기록한 것이 하나님께로서 유래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는 수호하려는 자로서 이 예언에 착수하고 있다. 그의 이름 호세아나 호쉐아(이것은 여호수아의 원명과 동일하기 때문에)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구원의 도구가 된다. 신실한 목사들도 그렇다. 그들은 영혼을 죄에서 구출함으로써 많은 영혼을 죽음에서 건지는 데 이바지한다. 그의 별칭은 벤 브에리 즉 브에리의 아들이다. 이때나 그때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 따온 별명으로 통하는데 미가가 모라셋 사람으로, 나훔이 엘고스 사람으로 불리운 것이 그 좋은 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요엘이 브두엘의 아들로, 호세아가 브에리의 아들로 불리운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유대인들은 아마 부모의 명성이 혁혁할 때, 그 이름을 차용함으로써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아버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도 선지자였으리라는 유대인의 생각은 근거가 없다. 브에리는 우물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물을 길어 내와야 할 생명의 샘과 생수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2. 여기에는 그의 권위와 사명이 나온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말씀은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와 효능을 갖고 호세아에게 임했다. 말씀은 그 자신의 공상이나 상상으로서가 아니라 실물로서 임했다. 하나님은 자기 종 선지자들에게 종종 상상에 의해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가 "말하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이 순전히 계시받은 것을 말할 때처럼(살전 4:15), 이 예언은 주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항상 구약 중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신약의 인용으로써도 확증된다(마 2:15; 9:13; 12:7; 롬 9:25, 26; 벧전 2:10). 여호와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다(벧전 1:25).

 

3. 여기에는 그의 예언 시기에 대한 소상한 설명이 나온다. 그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 에 예언했다. 앞에 나온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뒤에 나올 학개, 스가랴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그의 일반적 예언 시기만 접할 수 있을 뿐 소상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왕이 한 명밖에 언급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유다왕들을 열거했으므로 이스라엘 왕들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스라엘 왕들은 죄다 악하였으므로 그는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들을 명예롭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호세아의 예언 시기에 대한 이 설명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여호와의 말씀은 이 시기 전체를 통해 그에게 이따금씩 임했던 것 같다).

 

(1) 그는 오랫동안 예언 활동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매우 젊어서부터 예언을 시작했다. 이것은 원기와 패기 면에서 그에게 이점이 되었다. 또 그는 노령에 이르도록 예언 활동을 했는데 이것은 경험과 권위라는 면에서 그에게 이점이 되었다. 선한 사업에 이토록 오래 등용되었다는 것은 선지자 자신의 큰 명예였고, 백성들 사이에서 그토록 오래 사역했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큰 자비였다. 그는 백성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자연히 거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는 오래도록 백성에게 익숙한 자였고, 따라서 그들에게 보다 도움을 줄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에게서 제대로 환대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의 혜택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에게 대한 존중심은 점점 감소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그의 젊음을 경멸했고 나중에는 그의 늙음을 멸시했다.

 

(2) 그는 다양한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이들 왕들 중 일부는 매우 선량했다. 아마 그를 보호하고 격려한 왕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악한 왕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악한 왕들이 호세아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낙심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동일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명예와 불명예, 좋은 소문과 나쁜 소문을 각오해야 하며, 그 어느 경우에도 자기의 순전성과 자기 사업을 고수하겠다는 결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3)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발효 중에 있을 때 예언을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죄 많은 백성과 다투셨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지기 전에 여호와의 손에 빠졌다(삼하 24:14). 왜냐하면 웃시야 시대와 그 당시대인 여로보암 시대에는 두려운 지진이 있었다고 언급되기 때문이다(눅 14:5; 암 1:1). 그리고 그 당시에는 메뚜기의 재앙도 있었다(욜 1:2-4; 암 7:1; 호 4:3). 말씀을 시행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채찍과 회초리가 보내지며 하나님의 채찍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보내지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귀를 여시사 훈계와 징계를 받게 하시기까지는 그 어느 것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4) 그는 왕국이 번영을 구가할 때 이스라엘에서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여로보암 2세 때였다. 우리가 열왕기에서 보는대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했으며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왕하 14:27). 그럼에도 호세아는 대담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의 멸망을 예언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죄의 길에 있는 자들이 세상에서 형통한다는 이유로 아첨받는 것을 묵과해서는 안되며 그런 때조차 그들을 신실하게 책망해야 하고, 번영이 곧 안전은 아니며, 그들이 계속 죄중에서 행한다면 그 번영도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한다.


경고의 표적 (호세아 1:2-7)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신다" 는 말은 다음 두가지를 가리킬 수 있다.
1. 이 당시에 세움을 입은 일련의 영광스러운 선지자들, 이 때에는 요엘, 아모스, 미가, 요나, 오바댜 그리고 이사야가 살면서 예언 활동을 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들 중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맨 첫 선지자였다.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은 호세아를 통해서였다" (직역하면 그렇다: 역주). 우리는 여로보암의 역사(왕하 14:2)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뒤에 곧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호세아는 그 말을 선포하기 시작한 첫 번째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다른 어는 선지자보다 다소 먼저 이런 불쾌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그의 임무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2. 아니면 호세아 자신의 예언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전하라고 이르신 첫 메시지였다. 그는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자기가 권위와 명성을 얻으며 백성의 총애를 다소 확보할 때까지 이런 거치른 임무를 면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선지자로부터 어떤 기대를 할 수 있는지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설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록하고 공표하며 그들에 대한 증거로서 기록상 남겨 두어야 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선지자는 말하자면 거울처럼 그들의 죄를 보여주어야 했고 그들의 죄가 심히 악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선지자는 음란한 아내를 취해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을 받는다(2절). 그리고 그는 그대로 실행한다(3절). 그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란 평판 나쁜 여인과 결혼한다. 고멜은 미혼녀로 간음을 행한 여인이었다. 만일 기혼녀로 간음했더라면 그녀는 사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독신으로 추문을 뿌리며 다녔던 것이다. 그런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malum in se - 즉 그 자체가 악이라기 보다 malum per accidens - 즉 우발적인 악이었다. 환언하면 그런 결혼은 사려깊지 못하고 점잖지 못하고 편리하지 못한 결혼이었다. 따라서 그런 결혼은 제사장에게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런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호세아 선지에게는 괴로움이 될 터였다(아마샤에게는 그 아내가 창녀로 될 것이라는 것이 저주로 경고되었다 암 7:17). 그러나 하나님이 거룩한 목적에서 명령하셨을 때는 그것이 죄가 되지 않았다. 아니,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상 그것은 의무였다. 그는 자기의 명성조차 하나님께 신탁해야 했다. 그러나 대개의 해석자들은 이 결혼이 환상 속에서 행해졌거나 아니면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인, 특히 예언자들 사이에 흔히 사용되던 교수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고전 4:6) 그들은 타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본으로 보였다. 그는 음란한 아내를 취해야 했고 그에게서 자식을 낳아야 했다. 비록 혼인 관계에서 출생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음행의 씨라고 의심할 그런 자식을 낳아야 했다. 독신 때 품행이 난잡했던 사람은 결혼해서도 단정치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호세아야! 이 백성은 음란한 아내와 음란한 자식들이 네게 치욕과 근심과 고민이 되듯 내게 수치와 슬픔과 고민이 된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크게 행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악한 사례로써 여호와를 떠났다. 그런데 그들이 특히 여기서 추궁받는 음행은 그들의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마치 아내가 낯선 자의 품에 안기는 것과 마찬가지의 피해와 모욕이 되는 셈이다. 특히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우상 숭배 행위는 더더욱 그랬다. 그것은 혼인 계약의 파기 행위였다. 그것은 극악하고 추악한 죄였다. 그것은 다른 어는 것보다 마음을 더 혼미케 하고 심령을 많이 빼앗아 가는 행위였다. 우상 숭배는 다른 어느 것보다 악하고 큰 음행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아내가 남편에게 진 의무보다 더 큰 의무 아래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그런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이다. "이 나라가 행음함이니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것은 여기나 저기서 자행되거나 어떤 특정 인사가 범한 게 아니라 온 나라에 감염된 죄였다. 그것은 국가적 죄요 유행병이었다. 음란한 아내와 그 아내처럼 음란한 자식을 거느린다는 것은 선지자 즉 성인 군자에게 얼마나 역겨운 일이었을까! 그것은 얼마나 심한 인내의 훈련이었으며 만일 그런 아내가 음행을 고집한다면 이혼장을 써 주는 것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음란한 백성을 거느린다는 것은 얼마나 더 불쾌하셨겠는가?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그의 전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행음하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내심은 얼마나 크신가! 그들을 일축해 버려야 마땅하지 않으신가! 선지자는 마치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해야 마땅한 듯하다. 고멜은 아마 당시의 유명한 창녀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같았다. 고멜은 "부패" 를 의미하며 디블라임은 "두 개의 과자" 또는 "무화과 덩어리" 를 뜻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파멸에 근접했고 그들의 사치와 육욕이 그 원인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와 같았다. 그들은 그토록 악했다.


그것은 죄가 풍족의 결과며 파멸은 낭비의 딸임을 시사한다. 어떤 이들은 선지자에게 내린 명령을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 "너는 가서 음행의 아내를 취하라. 왜냐하면 설혹 네가 가서 정직하고 정숙한 아내를 취하려고 해도 온 나라와 온 백성이 우상 숭배의 음행에 빠져 있으므로 그런 자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Ⅱ. 선지자는 말하자면 망원경을 통해 백성들에게 파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음녀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 그들의 파멸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기 때문이다.
1. 선지자는 자기 첫 아들에게 지어 줄 이름으로 왕가의 몰락을 예고한다.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4절).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자녀들에게 예언적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을 읽었는데(사 7:3; 8:3), 여기서도 같은 경우를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손(그들은 그래야 했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의 이산자라는 뜻도 있다. 그들은 목자가 없는 산 위의 양떼 같을 것이다. 그들을 "주권" 이란 뜻의 "이스라엘" 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들은 그 이름의 모든 명예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산" 이란 의미의 "이스르엘" 이라고 부르라. 왜냐하면 여호와를 떠나는 자들은 끝없이 유리 방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그들이 씨앗처럼 뿌려졌으나 이제는 겨와 같이 흩어질 것이다. 이스르엘(Jezreel)은 이스라엘 왕들의 어소 중 하나였는데 아늑한 계곡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성읍이었다. 이 아이가 이스르엘로 불리는 것은 이를 암시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 고 하시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께서 쟁론하시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후의 집이다. 현왕 여로보암 2세는 예후 가계에 속했다. 예후의 집은 예후의 죄 때문에 경을 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선조들의 죄를 쌓아 두셨다가 자손에게 갚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쟁론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족속(원의: 집)의 나라이다. 이것은 현재의 왕가 즉 예후 족속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후의 집을 속히 폐하셨던 때문이다.(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6개월 만에 폐위됨으로써 예후 가계는 끝났다). 아니면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부패와 사악을 계속하다가 약 칠십 년 후 호세아 왕 때에 막을 내리게 된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조금 후에" 불과하다. 왕들의 위세와 왕국의 세력도 그들이 만약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역한다면 하나님의 멸망시키는 심판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2) 이 쟁논의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 예후는 이스르엘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임명을 부여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아합의 집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한 행위를 시인하셨다.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였도다" (왕하 10:30).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4대를 통치하리라는 약속의 시효가 끝나자 여기서 그 피를 예후 집에 갚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동일한 행동에 대해 상도 주시고 벌도 주시는가?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공정했다. 그것은 선한 처사였다. 그것은 아합 집에 내린 의로운 판결의 집행이란 점에서 상이되었다. 그러나 예후는 이 일을 정당한 방법으로 행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자신의 출세를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에 자신의 적개심을 뒤섞었던 것이다. 그는 죄에 대한 혐오감으로가 아니라 죄인에게 대한 악의로써 이 일을 행했다. 왜냐하면 그는 금송아지 숭배를 계속했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왕하 10:31), 그러므로 예후 자신의 불의의 양이 차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계산하시게 되었다. 그 회계의 첫째 조항은 아합 가의 피에 대한 것이다(본문에서는 이스르엘의 피라고 불리우고 있다). 첫째되는 조항이었기에 이것은 여타 모든 죄를 대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바아사의 집이 멸문지화를 당했을 때도 그 이유는 그가 여로보암의 집처럼 행하고 그 집을 쳤다는 것이었다(왕상 16:7). 공의의 집행을 위임받은 자들은 정당한 원리와 정당한 의도에서 행하도록 주선하고 남을 벌하는 죄 가운데서 살지 않도록 관심해야 한다. 이는 그들의 정당한 법 집행도 저 다른 날에 살인으로 치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 쟁논은 얼마나 멀리 진척될 것인가? 이것은 징계가 아니라 멸망이 될 것이다. 혹자는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 는 말이 유혈에 대한 복수를 의미하지 않고 바로 그 유혈의 반복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내가 아합의 집을 벌했듯이 예후의 집을 벌하리니 이는 예후가 전임자의 벌을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상 숭배의 전철을 밟았기 때문이다. 예후의 집이 멸망된 다음에는 내가 이스르엘 족속(집: 흠정역)의 나라를 폐하리라. 비록 지금은 번성하고 있지만 내가 이 나라를 몰락시키리라." 예후 가문의 끝왕 스가랴의 사후에 열 지파의 왕국은 쇠잔했고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해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용사의 힘: 갈데아 주석)을 꺾으리라" 는 것이 경고되고 있다(5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위능력이나 대적에게 대한 항거 능력을 빼앗으실 것이다. 힘이 실려 있고 손에서 새롭게 된 활은 강성해지는 세력을 암시하는데 반해 절궁(折弓)은 쇠잔해 가는 세력을 나타낸다. 활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꺾어질 것이다. 이스르엘 계곡은 아마 병기고가 있던 장소일 것이다. 아니면 그 골짜기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지고 이스라엘 나라가 아주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쟁논하면 방어할 담이 존재치 못한다는데 주목하자. 하나님이 치러 나오실 때는 강한 활도 곧 부러지며 강한 요새도 함락된다.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바로 그 장소에서 갚겠다고 하시던 피를 흘렸다. 이것은 악명 높은 흉악범이 바로 자신의 범행 장소에서 처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벌을 죄에 상응시키기 위해서이다.


2. 호세아는 자기의 둘째 아이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전 국민을 버리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첫 아이가 아들인데 반해 이번에는 딸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아들 딸 모두가 부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혹자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약화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이 말은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도 번역되며(롬 9:25) 또 긍휼을 얻지 못한 자라고도 번역된다(벧전 2:10). 결국 이것은 한가지 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의 운명을 나타낸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위해 자기들에 대한 자비와 긍휼을 버리는 자들은 그 자비가 자기들을 버릴 것이며 자기들은 거짓된 헛 것에게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각오할 만한 이유가 있다(요 2:8 참조). 죄는 이스라엘 족속으로부터도 하나님의 자비를 돌이키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긍휼히 여기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처지는 비참하다. "내가 그들을 완전하게 제해 버릴 것이며, 옮겨 버릴 것이며, 뽑아 버릴 것이라" (한글 개역: 사하지 않을 것이라). 자비의 냇물이 그칠 때 우리는 진노의 물병 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 자는 찌꺼기나 쓰레기처럼 제거당할 것이다. 제해 버린다는 말은 때때로 죄사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혹자는 이 부분을 "내가 비록 지금까지는 그들을 사하였을지라도 더 이상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리라" 고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치기를 싫어하는 백성에게 대해 오래도록 참으셨지만 항상 참으시진 않을 것이다.


또는 "내가 다시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나라." 사유하시는 자비가 부인된다면 여타 모든 자비도 기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자비는 나머지 모든 자비의 문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위로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내가 그들을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들을 사하기까지 즉 구속주가 시온에 와서 야곱에게서 불경건을 제하기까지 하리라." 갈데아 주석은 "그러나 그들이 만일 회개하면 내가 사하리라" 고 읽는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제 때에 반성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는 사위하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Ⅲ.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족속과 다투시는 동안에도 유다 족속을 위해서는 자비를 쌓아두고 계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리라." 비록 어떤 자는 불순종 때문에 추방당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그릇과 기념물이 될 잔존자를 스스로 확보하실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공의가 영광을 얻으실 자들도 있으며 자유로운 은혜가 영광을 얻으실 자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꺾어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종말 때까지 이 세상의 교회를 소유하고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아닌 유다를 긍휼히 여기시리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배척을 더욱 악화시키며 유다 역시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처럼 버리시진 않는다는 것은 유다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더 크게 만든다. "내가 저희를 긍휼히 여겨 구원하리라."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 덕분이란 것을 명심하자.


1.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현세적 구원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혁혁한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셨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는 은총을 베풀지 않으셨으나 유다에게는 베푸셨다. 앗시리아 군대는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고 열 지파를 포로로 끌고 간 뒤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하룻밤 사이에 앗시리아 진영을 크게 살육하셨고 그들은 즉시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을 얻었으며 칼이나 활로 구원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열 지파가 포로 생활을 계속하며 그 땅은 남에게 소유되어 완전히 사함을 얻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셨다. 그리고 칠십년 뒤에는 그들을 데리고 나오셨으니 이는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여호와의 신으로 된 것이다(슥 4:6). "내가 저희 하나님 여호와 즉 내 자신으로 구원하리라" 하나님은 그 자신의 힘으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며, 그 일을 자신의 손으로 취급하실 것이다. 그가 떠맡으시는 구원은 확실하다. 그가 역사하신다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혼자서 행하는 구원은 가장 기뻐받을 만하다. 그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다(신 32:12). 인간이 이룬 구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하나님이 이룬 구원은 더 많아지며 더 빛나고 더 향기롭다. "내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들을 구원하리라" (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읽는다).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권능으로 구원하리라. 내가 활로 칼로 그들을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 그들은 자신을 방어할 활도 칼도 갖지 못할 정도로 쇠퇴할 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삿 5:8; 삼상 13:22).
(2) 그들은 자신의 힘과 무기를 의지할 수 없게 될 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시 44:6).
(3) 그들은 활과 칼의 어려움 없이도 쉽사리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사 9:5). "내가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을 구원하리라" (7절).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 이라고 부르시는 가운데 열 지파를 꾸짖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되신 분을 버렸고 하나님께서는 이 때문에 그들을 버리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구원하신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시사해 준다. 그것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들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며 여호와와 그의 말씀과 예배를 충실히 고수한 데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2. 그러나 이것은 또한 유다의 우상 숭배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다른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 동시에 준비도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한 구원이다. 이것은 그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칼이나 활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는 구원이다.
이스라엘 왕국이 호세아 아래서 완전히 제거된 때에 유다 왕국은 히스기야 아래서 영광스런 개혁을 하였고, 따라서 보존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첫째로는 우상 숭배로부터, 그 다음에는 포로 생활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다.


3. 어떤 이들은 이 약속을 메시야의 크신 구원으로 이해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때가 차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큰 구원을 성취하실 터였다. 그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다.


자비의 약속 (호세아 1:8-11)

 

여기에 나오는 예고는 다음과 같다.

Ⅰ. 이스라엘 백성의 일시적 배척. 이것은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에게서 낳은 또 다른 아이의 이름으로 나타낸다(8, 9절). 우리는 그 이름이 이런 두려운 징조를 가져온 호세아의 자녀가 전부 다 음란한 자식들이라는 것을 계속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2절). 그의 자녀는 전부가 호세아와 결혼한 음란한 창기에게서 출생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파멸이 이스라엘의 죄악의 당연한 산물임을 암시한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배척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라도 먼저 그를 떠나지 않으면 그들을 떠나지 않으신다.

 

1. 이 아이의 출생. "고멜은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는 그 이름 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전적 배척을 예고하는 전조를 포함하는데 본문은 이 아이의 출생이 지체됨을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내심과 극단적 상황으로까지 진행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고멜의 잉태가 이스라엘 백성의 계속적 행악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욕심이 여전히 잉태하여 죄를 낳았다. 그들은 행악을 덧보탰다(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해석한다). 그들은 음행에 이력이 났고 고집이 났다.

 

2. 아이의 이름.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 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긍휼히 여기시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도 이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망상에 젖어 으쓱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그런 칭호마저 삭제해 버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부인하신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나는 너희 것이 안 되겠다(말 뜻은 그렇다). 나는 너희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겠고 너희 왕, 너희 아버지, 너희 후견자, 보호자가 되지 않겠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 는 말은 이런 의미도 된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전의 내가 되지 않겠다. 너희가 우리 하나님은 이러 이러할 것이라고 하던 기대대로의 내가 되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만일 내게 충실했더라면 되어 주었을 하나님도 되지 않겠다." 다음 말씀을 관찰하자. "저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내 백성으로서 어울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백성이라면 마땅히 내 말을 준수하고 청종해야 하는데도 너희는 그러지 않는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어중이 떠중이 잡신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겠고 보호하지도 않을 것이며 너희에게 대한 권리 주장을 하지도 않겠다. 나는 너희를 움켜잡은 자들의 손에서 너희를 요구하지도 구출하지도 않겠다. 그들로 너희를 움켜쥐게 하겠다. 너희는 내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너희 하나님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거짓된 참정자에게 충성을 바치려 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 너희는 내게서 아무런 권리도 이익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혜택도 기대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과 그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일이다.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겠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약에서 쫓겨난 것은 순전히 우리 탓이며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위반은 사람 편에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누군가를 미워하신다면 그것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이다. 이 일은 그들이 앗수르 땅으로 완전히 끌려가고 그들의 장소가 그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을 때 성취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예배를 상실한 때문이다. 그들은 포로 중에 있던 두 지파처럼 선지자들도 파송받지 못했고 약속도 받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더 이상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끌려간 열방의 민족들과 혼합되어 열방 속에서 사라진 듯하기 때문이다.

 

Ⅱ. 이스라엘은 쇠잔할 것이나 때가 차면 회복되리라는 것이 예언되고 있다. 여기서는 진노 도중에 전처럼 자비가 기억되고 있다. 배척은 전체적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종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10, 11절).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될 것이다." 상처를 입힌 바로 그 손이 어떻게 치료하시며, 찢으신 분이 얼마나 친절하게 싸매시는지 관찰하자.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의 위협으로 근심을 불러 일으키시지만,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영원한 자비로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 약속은 매우 귀중하며 우리에게 유용하다.

 

1. 혹자는 이 약속이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 귀환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십 지파 중 다수인들은 유다 족속과 연합하여, 고레스가 선포한 해방의 혜택을 누렸고 흩어졌던 여러 나라에서 무리를 이루어 고국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그들은 스룹바벨을 두목으로 정하고 전에 분명히 두 민족으로 나뉘었던 백성을 하나로 합쳤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배척했던 그 땅에서 자기 선지자를 통해 다시 이들을 자기 자녀로 인정하시고 이들을 위해 나타나시고자 하셨다.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올 터였다. 따라서 비록 이 약속이 보다 멀리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바벨론 포로들의 위로와 후원을 목적으로 하며 또 은혜롭고 경건하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를 갖는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 나라를 위해 예비하셨던 자비를 전체 국민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축복이 예비되어 있는 한 그들의 나라는 멸망될 리가 없었다.

 

2. 혹자는 이들 약속이 후일 올 것으로 기대되는 유대인의 전체적 회심시까지는 완전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때는 바다의 모래같이 흩어져 있는 무수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포용하게 될 것이며 복음 교회에 병합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 자기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배척의 음울한 표징 아래 놓여있는 그곳에서조차 그들은 그의 백성으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유대 박사들은 이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3. 복음의 선포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참여로 그리스도 왕국이 수립되었을 때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그렇게 적용하며(롬 9:25, 26) 베드로도 흩어진 유대인에 대해 그렇게 기록한 (벧전 2:10) 때문이다. 여기의 이스라엘은 복음 교회이며 영적 이스라엘(갈 6:16)이다. 모든 신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의 축복을 유업으로 받는 이스라엘이다(롬 4:11, 12). 이제 이 이스라엘에게 대한 약속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1) 그 이스라엘은 크게 많아지고 그 수가 증가할 것이다.

"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육을 따라서는 감소되어 소수로 되지만 영적 이스라엘은 증가하여 무수하게 될 것이다. 1세기의 기독교나 그 이후의 기독교에서 이 약속은 복음의 선포로 그리스도께 인도된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성취되었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에서 수천 명의 기독교인이 나오고 다른 열방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계 7:4, 9; 갈 4:2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많은 무리의 아비라고 부르셨는데 (창 17:5; 22:17),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은 이 점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여기서 바닷가의 모래로 비유되는 것은 수효 때문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즉 바닷가의 모래는 물이 뭍으로 넘치지 못하게 하는 경계가 되듯 참 이스라엘인은 자기가 사는 곳의 방패막이가 되어 심판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롯이 소돔에 있는 동안 소돔에 대해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었다.

 

(2) 하나님께서는 복음 이스라엘과 언약을 새로 맺으실 것이며 구약 교회를 합병시킨 언약만큼 완전하고 충분한 헌장으로써 복음 이스라엘을 자신의 교회로 합치실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은 훨씬 더 클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너희가 다시 언약 속으로 용납될 것이며 내 백성으로 인정될 것이다." 버림받은 이방인들은 각기 자기 장소에서 그리고 배척받은 유대인은 자기 땅에서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열조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쫓겨난 곳에서 자손들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백성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된 것은 복된 부활이다. 아니, 특권은 확대된다. 전처럼 "너희는 내 백성이라" 고 할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고 한다.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 즉 장자였지만 그 때는 어린 자녀 같았다. 이제 복음 아래서는 그들이 장성하여 총명과 자유가 더욱 크게 되었다(갈 4:1).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사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모든 신자의 말로 다할 수 없는 특권이다. 신자는 은혜와 입양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해도 좋다.

 

[2]신자의 아들됨이 인정되고 인지될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고 할 것이다. 아니, 그들의 명예를 위해 그들의 아들됨이 세상 사람이 듣는 데서 선언될 것이다. 성도는 스스로 불안해하지 말며 남들도 성도를 멸시하게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만간 그들이 하나님 자녀됨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며 세상은 그들의 우수성과 하나님이 그들을 귀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그것은 그들의 위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며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징 아래 있었는데 바로 그 장소에서 은총의 징표로 존귀하게 될 때 그들의 위로와 명예는 크게 증진할 것이다. 이것은 믿는 이방인에게도 위로의 말이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도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며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된다. 그곳이 비록 땅에서 가장 먼 곳이라 해도, 멀리 있던 그 곳에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고 한 그곳에서 자기 나라와 친족을 떠나지 않고도 믿음으로 양자되게 하는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을 수 있다(롬 8:15).

 

(3) 불화하던 자들이 행복하게 합류하게 될 것이다(11절).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보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는 무척이나 불화하여 서로 물고 먹었는데 이들의 결합은 세상에 세워질 그리스도 왕국의 상징이었다. 서로 극히 반목하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나아오면 서로 양해하게 되며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복음 시대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열 지파 지역에 거주했으며 아마 대부분이 그 후손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갈릴리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복음을 수용함에 있어 아마 유대인(즉 유다 출신의) 이라고 불리웠을 자들과 충심으로 연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첫 제자들은 일부는 유대인이었고 일부는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복음의 빛으로 축복받은 자들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출신이었다 (마 4:15). 유대인과 갈릴리인 사이에는 전혀 우호 관계가 없었지만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복되게 유대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서로 품던 원한은 남지 않았다. 아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훨씬 더 큰 적의가 쌓여 있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이 믿게 되었을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졌다.(행 8:14). 이와 같이 유다와 이스라엘은 함께 모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제사법의 간막이 벽이 헐릴 때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설립될 훨씬 훌륭한 연합의 예표였다 (엡 2:14-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요 11:52; 엡 1:10).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에게 단결의 구심점이 되실 것이다. 그들의 한 두목(원의: 머리를 세우는 데 일치할 것이다)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 즉 그리스도 외에 달리 될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며 오직 하나뿐인 두목이시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정치적 몸에 있어서 통치의 우두머리실 뿐만 아니라 생리적 몸에 있어서 생명력의 머리시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우리의 우두머리로 세운 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세우심에 동의하고 그의 안내와 통치에 기꺼이 자신을 위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우두머리로 세운다는 것은 모두 선한 그리스도인들과 일치하고 교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수가 많을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서로 하나가 된다. Qui conveniunt in alqu tertio inter se conveniunt - 즉 제 3자와 일치하는 자들은 서로 일치한다.

 

(5)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우두머리로 세웠으므로 그들은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올 것이다.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듯이 모든 곳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연합하기 위해 올라 올 것이다. "지파들이 그리로 올라 가도다" (시 122:4)라는 말은 명백히 이방인의 교회 접근에 대한 예언(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사 2:3)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10절에는 동일한 장소를 말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변화 곧 영적으로 그리스도께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 땅에서 올라 올 것이다. 우두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친 자들은 이 땅과 거기 속한 것들에게서 애착심을 버리며 위의 것들을 사모하는 자들이다(골 3:1, 2).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요 15:19) 하늘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그곳이 자기들의 고국이지만 그 땅에서 올라 올 것이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기 위해 그곳에서 나올 것이다. 박학한 포콕(Pocock)박사는 그렇게 해석한다.

 

(6)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 "이스르엘의 날은 클 것이다."

비록 "이스르엘의 환난의 날이 크다" 고 하나 (이렇게 이해하는 자도 있다), 이스르엘의 영광의 날도 클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날이 될 것이다. 원수들이 오래도록 자기 날을 누린 뒤에 이것은 이스라엘의 날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이스르엘 곧 하나님의 씨, 거룩한 씨(사 6:13), 그 땅의 재산(신 33:11)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씨는 이제 파종되어 흙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추수기가 오면 그 날은 클 것이다. 구원받을 자가 날로 더하게 되었을 때 교회의 날은 컸다. 그 때 전능자께서는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 1:2)

여기 호세아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명령이 어려운 말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 때문이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음탕한 기질이 있는 여자 혹은 매춘부와 같은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시는가?  더구나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간음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부도덕한 죄로 정죄되고 있지 않은가?(출 20:14; 고전 6:15-18; 레 19:29)
  
이 구절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되어 오고 있다.
첫째로, 이 결혼은 실제가 아니라 가설적이라는 것이다. 호세아의 결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비유나 환상이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대부분의 히브리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으로 선지자는 실제로 아내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결혼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온 백성은 그가 그런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다만 선지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 앞에 생생한 이야기를 제시하기 위함이었다.1)
  
다음으로 영적인 불신앙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인의 음란을 이스라엘의 타락을 묘사하기 위한 영적 음란으로 이해한다.  원래가 매춘이나 음란의 뜻은 문자적으로 부정한 욕망의 행위로 자주 재정적이거나 물질적인 취득이 포함되는 것이었다(참고, 2:5).  그러나 역시 종교적 불신앙이나 배교행위를 서술할 때 쓰였는데 우상과 이교주의의 신화를 위해서 한 분 참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포기하는 것을 가리켰다.  호세아 시대에는 특별히 바알의 숭배가 여기 해당되는 죄였다.2)
  
그러나 가설적인 결혼이나 영적인 불신앙으로 보는 견해보다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가장 합리적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실제적인 결혼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셨다는 것이다.  문자적인 해석의 경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난제가 되는데 이 해석을 취하는 학자 중에 카일(Keil)은 그 자녀들이 그녀가 호세아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의 음행의 결과였다고 믿었다.  그 이유로 고멜은 그녀가 호세아와 결혼하기 전에 매춘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부자연스럽다.
  
하퍼(Harper)는 첫 자녀는 호세아의 자녀였으나 둘째와 셋째는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이 첫째 아이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와의 결혼과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관계 사이에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간음의 행위를 병행하여 소개하고 있음에 비추어 본다면 호세아가 그녀를 취하기 전에 매춘부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두 관계가 유사한 것이었다면, 고멜이 호세아와 결혼 후에 부정한 여인이 되었으며 그 다음 차례로 그녀의 아이들이 그녀의 본을 따랐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후에 부정해졌으며 그들의 후손들이 그 후에 그들의 삶과 똑같은 모형을 따라 간 것이다.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부정한 여인과 결혼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아내가 비록 처음에는 매춘부와 같은 여자가 아니었을지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녀가 후에 음란한 여인이 될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사건은 과거를 다시 회상하면서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를 불행한 만남으로 이끈 것을 처음부터 명령으로 해석했던 것이다.4)
  
가이슬러(Geisler)는 이 구절이 모순이 아님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이 구절은 창기의 행위를 너그럽게 봐 주지 않는다.  호세아는 영적(우상숭배)이나 육적인 모든 종류의 매춘 행위를 정죄하고 있다.
   2.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하도록 명령받았으나 그녀와 간음하라고 명령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서 네 자신을 위해 아내를 취하라고 하셨다. 그녀와 결혼하되 비록 그녀가 너에게 부정하게 될지라도 그녀에게 성실하라고 하시었다. 그리고 실제로 호세아는 그녀가 불성실했을지라도 그 아내에게 성실하였다.
   3. 매춘부와 결혼하지 말라는 레위기 1:14의 명령은 레위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었다.  살몬은 분명히 그의 법적 족보에서  마침내 그리스도가 나신 매춘부 라합과 결혼하였다(마 1:5).  어쨌든, 호세아는 선지자였지 레위 제사장이 아니었으므로 매춘부와 결혼하지 말라는  금제는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4. 고린도전서 6:16의 명령은 매춘부와 관계를 맺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매춘부였던 여인과는 결코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차라리 그 명령은 결혼 관계 밖에서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자들에 대한 명령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결혼 밖에서 성적 관계를 갖지 않았다.  하나님은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되 항상 그녀에게 성실하라고 명령하셨다.5) 거룩하신 하나님은 결코 죄 된 명령을 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속성은 결코 변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하나님의 거룩에 모순된 표현은 인간 저자의 표현의 제한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
     1.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Phophet Hosea(Grand Rapids: Baker, 1989), p.45
     2. David Allan Habbard, Hosea(Downers Grove: IVP, 1989), p.60
     3. Leon J. Wood, Hosea, E. B. C. Vol.7(Grand Rapids: Zondervan, 1985), p.171
     4. 글리슨 아쳐, 성경 난제 백과사전, 황영철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p.402
     5.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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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죄 (호세아 2:1-5)
 
 
어떤 이들은 본장의 첫 마디를 앞 장의 끝맺는 말로 삼고 여기에 나오는 약속들을 거기에 추가시킨다. 이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겠다는 큰 일들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를 중심으로 함께 모이게 될 때는 기뻐서 의기양양하여 서로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갈데아 주석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내 백성아! 위로를 얻으라, 위로를 얻으라'고 말해야 했다는 해석을 한다.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그들에게 암미라 루하마라 하라. 그들을 다시 그렇게 부르라. 그들은 이상 더 로암미와 로루하마라는 수치 아래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내 백성이 될 것이며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은 서로 형제 자매로 부를 것이며, 서로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인정할 것이며, 그런 이유로 서로를 포옹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여 자기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게 하고 그에 합당한 행위를 하게 할 것이다.
아니면 이 말씀은 그 다음에 오는 말과 통일성을 갖는 것 같으므로 각성과 겸비의 목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어미(2절)는 형제자매(1절)와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열 지파의 교회, 백성의 단체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형제들이었다. 또 어미는 특별한 의미에서 우두머리들이나 지도자들과 동일시된다. 그들은 나머지 무리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어머니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어미와 쟁론해야 할 자녀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것은 다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 그들 중에 있으면서 그 시대의 불의를 고발하고 쳐서 중언하던 경건한 자들. "경건한 자들이여! 담대히 나가서 백성 중에 막연한 우상 숭배와 부패를 쳐서 증거하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은 바알 숭배자와 쟁변하라. 여기 제시된 논증으로 그들을 각성시키려고 노력하라." 개인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예배에 대한 공중의 모독을 각자의 자리에서 신원하며 변호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자녀들은 부모라도 잘못하면 겸손히 절도 있게 그들과 논쟁할 수 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요나단은 다윗에 대해 사울과 쟁론하였다.


2. 그들 중에 있으면서 그 시대의 재난에 동참하던 수난자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불평하지 말고 언쟁하지 말며 하나님이 인자한 아버지처럼 대하지 않고 자기들을 가혹하게 다루시기라도 한 듯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 그들은 자기 아버지와 쟁론하고 비난해야 했다. 비난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바로 그들의 어머니였다. "너희 어미는 너희 허물을 인정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사 50:1 비교). 그것은 그녀의 자업자득이며 너희는 너희의 모든 불행을 너희 어미 탓으로 돌려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자기 어미와 어떻게 쟁론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Ⅰ. 그들은 그녀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상기시켜야 했다. 그녀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어떤 자비를 베푸셨고 그녀를 얼마나 총애하셨으며 또 계속해서 총애하시려고 계획하셨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야 했다. 그들은 형제 자매에게 자기들이 암미와 루하마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며 그의 자비의 그릇이었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1절).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 탓이 아니었다면 조용히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어야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에게 대한 의존은 우리의 배반과 반역을 크게 악화시키는 것임을 유의하자.

 

Ⅱ. 그들은 하나님과의 혼약 위반을 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녀를 꾸짖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녀를 더 이상 자기 아내로 간주하지 않고 자신도 그녀의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 주어야 했다.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하라. 저는 영적 음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모든 명예와 위로를 상실했으며 그를 격동시켜 이혼장을 주게 만들었다고 말하라." 우리를 일깨워서 회개시키는 데는 하나님의 격노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데 주목하자. 우리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격노케 되어 우리와의 관계를 끊으시고 우리를 일축해 버리신다. 우리는 바로 그 격노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배격하겠다고 경고하실 때는 우리가 주위를 돌아보고 어떤 경로를 취할 것인지 생각할 때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남편이 아니시라면 우리에게 화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점을 그녀에게 따끔히 말해야 했다(5절). "저희 어미는 행음하였다. 저희 회중은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며 행음하였다(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읽는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의 부추김을 받아 우상을 따라 행음하였다.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으니 우상을 만들고 예배하였다." "우상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불리운다(9:10). 우상 숭배는 수치스러운 것이다.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는 것(사 44:19)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대한 수치이기도 하다. 또는 이것은 죄인의 수치감을 느끼지 않고 뻔뻔스럽게 죄를 지으며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렘 6:15)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럽게 하였으니 즉 그녀는 자기를 보는 모든 자로 하여금 그녀를 부끄러워하게 하였다. 그녀 자신의 자녀들은 그녀와의 관계를 부끄러워한다."

 

Ⅲ. 그들은 그녀에게 하나님께 대한 지독한 배은 망덕을 들어 책망해야 했다. 하나님은 그녀의 은인이요 시혜자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며 이것을 이유로 내세워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충성을 우상에게 바쳤다(5절).

이 점에서 그녀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다." 이는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을 내게 준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녀의 악한 결심.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들과 섭리를 통해 그녀를 우상 숭배로부터 이끌어 내겠다고 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를 고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어떤 반대되는 것이 제안되더라도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나 나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자들을 따르겠다" 고 말했다. 갈데아 주석은 이것을 이스라엘이 동맹을 요구하고 의지하던 나라들로 이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던 것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들이 섬기던 우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우상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우상을 자기들의 연인이라고 부른다.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고의적으로 죄를 짓고 또 죄짓기로 결심하는 자들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죄를 계속 짓겠다고 공공연히 발언하며 시인하는 자들이다. 우상 숭배자의 어리석음을 살펴보자. 그들은 생명조차 갖지 못한 우상을 자기들의 연인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우리의 연인이라고 부르기를 배우자. 하나님께 대해 좋은 생각을 유지하며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높이 평가하자.

2. 이 결심의 근거가 되는 큰 실수.

"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겠다. 왜냐하면 저희가 신체 유지에 필요한 내 떡과 내 물을 주며 몸을 감싸는 데 필요한 내 양털과 내 삼을 내게 주며 즐거운 것들 곧 내 거름과 내 술을 내게 주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세상적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감각적 물질이 가장 좋은 것이 되며 가장 강력한 매력을 갖는다. 그들은 이런 것을 추구하는 데는 자기들이 무엇을 따라 가는지 개의치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규례와 법도를 그들 앞에 제시하셨는데 (신 4:8) 그것은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만한 것이요, 꿀보다 더 단 것이었다(시 19:10). 또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은총을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보다 더 한 기쁨을 마음에 줄 터였다 (시 4:7).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좋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름과 마실 것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했는가? 그리로 그들은 최고의 애정을 보낼 터였다. O curroe in terram anima et caelestium inanes - 즉 오! 타락한 마음이여! 땅을 향해 구부러지고 천적인 모든 것은 전혀 없도다.

(2) 쾌락과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학대이며 모욕이다. 그는 우리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것도 주신 분이시다. 우상 숭배자들은 세레스(Ceres)를 곡식의 여신으로 삼고 바카스(Bacchus)를 술의 신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어리석게도 자기들에게 낙토와 그 땅에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신 8:18)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3) 많은 자들이 세상적 번영으로 인해 죄 중에서 강퍅해진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동안 이런 물질들을 풍성히 소유했고 따라서 그런 것들이 이들 우상으로부터 시여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우리가 하늘 여신(황후: 흠정역)에게 분향할 때에는 식물이 풍부했다" (렘 44:17, 18)고 설파했다.

Ⅳ. 그들은 그녀에게 회개하고 개혁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녀가 음행을 고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녀와 의절할 것이다.

" 그러므로 저로 음란을 제하게 하라" (2절). 그녀에게 개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라. 우상이 비록 친근하다곤 하나 아직까지 헤어질 가능성은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개선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죄인과 벌이는 변론은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저로 그 음란과 음행을 제하게 하라." 여기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말이 중복되며 복수형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들이 범한 음행의 풍성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려고 하시기에 앞서 그들은 이 모든 음행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로 하여금 마치 목불인견의 가증스런 물건인 듯 음행을 보지 않게 하라. 그녀로 음행에게 "여기서 나가라" (사 30:22)고 말하게 하라. 그녀로 그 얼굴과 가슴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녀로 창녀들처럼 행하지 않게 하라. 얼굴 화장과 젖가슴의 노출로 악한 심성을 드러내거나 타인을 악에 꾀어 들이는 일을 하지 않게 하라. 이와 같이 그녀로 하여금 우상 숭배의 온갖 희열과 쾌락을 부과시킴으로써 자기도 열중하고 남도 거기에 끌어들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

그녀로 이 모든 것을 제하게 하라. 온갖 집요한 죄의 길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음행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런 음행을 회개하고 거기서 돌이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다.

1. 진정한 참회자는 공공연한 죄 뿐만 아니라, 은밀한 죄도 버릴 것이며 눈에 보이는 음행 뿐만 아니라 유방 사이에 은밀히 자리잡은 음란도 제거할 것이다. 그 죄는 혀 밑에서 구르는 달콤한 떡 조각같다.

2. 그들은 죄의 외면적 기회를 피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 죄의 경향성도 억제할 것이다. 우상 숭배자는 자기 눈을 따라 행했다. 그들의 눈은 우상을 따라가며 행음했다(겔 6:9; 신 4:19).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들을 자기 눈 앞에서 제해야 했다. 이는 그들로 우상을 섬기고 싶은 유혹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포도주가 붉을 때 그것을 쳐다보지 말라" (잠 23:31).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끼가 뿌리에 놓여져야 한다. 마음의 부패한 본성과 기질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은 가슴(유방) 사이에서 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가슴의 제일 깊은 곳, 가장 높은 곳을 점유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아 1:13).

Ⅴ. 그들은 그녀가 만일 회개하지 않고 개선하지 않는다면, 그 죄의 결과는 틀림없이 치명적일 것이며, 완전한 멸망이 되리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기리라!" (3절) 이것은 여기서 판결 형식으로 나오지 않고 경고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미리 방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저로 음란을 제하게 하여 내가 저를 벌거벗기지 않게 하라"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죄인들이 자격만 갖추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려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경고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엄정하고 질투하는 남편이 간음한 아내를 다루듯 그녀에게 대하시리라는 것이다. 자기 집안을 잡종의 혈통으로 가득 채우고도 잘못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부정한 아내를 다루듯 하실 것이다. 그는 그녀와 그 자녀를 문 밖으로 쫓아내어 구걸하게 하실 것이다.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4절). 민족의 재난에 동참하는 개개의 사람들과 신진 세대들은 파멸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란한 자녀이며 그 열조의 유전으로 받은 헛된 행실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는 그들이 벌거벗기고 굶주리게 되리라는 것이 경고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이 떡과 물과 양털과 삼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물건들을 박탈하심으로써 그런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실 것이다.

1. 그녀는 옷을 벗길 것이다.

"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기리니, 저가 자랑하고 또 연애하는 자들의 눈을 끌려던 모든 장식물을 내가 벗길 것이다. 또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가 세상에 들어오던 때처럼 벌거벗겨서 저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욥 1:21).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추위와 수치에 노출시키리라. 부끄러운 일을 행한 저는 수치를 당해 마땅하다(5절)."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나 거지와 다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날은 바로 그들이 태어난 날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로 그 때처럼 비천하고 불행한 상태로 환원시키겠다고 위협하신다. 그들에게 이웃의 존경을 얻어 주거나 멸시로부터 그들을 숨겨 준 것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들은 그것을 박탈당할 것이다(겔 16:4, 39 참조).

2. 그녀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기 명예 뿐만 아니라 위안물과 필수품도 빼앗길 것이다. 그녀는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광야같이 될 것이고, 마른 땅같이 되어 목말라 죽게 될 것이다. 자기 연인들이 준 것이라고 하여 그 떡과 물과 기름과 술을 그토록 자랑하던 그녀는 필수적 음식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강우량의 부족으로 그 땅은 거민들에게 물질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설령 땅이 산물을 공급한다 해도 그것은 대적에게 탈취되어서 정당한 소유주가 양식 부족으로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그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내가 저를 광야에 있던 때처럼 그대로 만들 것이며 황무지에 있을 때와 같이 만들 것이니 거기서는 저가 때때로 목말라 죽을 뻔하였다. 3절 전반부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저를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처음에 민족으로 형성된 것은 막막하고 황량한 광야에서였던 때문이다. 그들은 그 조상들처럼 비통한 처지에 있게 될 것이다. 그 조상들의 시체는 광야에 널렸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악화된 형편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자손들이 약속된 땅을 유업으로 받도록 보존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니 이는 저희 어미가 행음하였기 때문이다.

 

 

자비의 약속 (호세아 2:14-23)

 

본장 전반부에서는 자신의 죄로 파산한 이스라엘의 상태가 암담하고 음울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견제된 이스라엘의 상태가 밝고 즐겁게 나타난다. 이같이 경고에 바싹 뒤쫓아서 약속들이 나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아니 파멸의 경고가 근거한 죄의 선언에서 이런 약속이 나오고 약속이 연결 부호로써 경고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저가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렸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리라." 그러므로 연결부호인 "그러므로" 다음에 감탄 부호가 곧 잇달아 나온다는 것은 적절하다. "보라! 내가 저를 개유하리라" (원문은 그렇다: 역주).

"저가 나를 잊어버렸다" 고 말할 때는 누구나 "그러므로 내가 저를 포기하고 잊어버리며 더 이상 돌보지 않겠다" 는 말이 나올 줄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겠노라." 하나님의 생각과 자비의 길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무한히 높다는 데 주의하자.

 

하나님의 이치는 전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인출되는 것이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의 악함을 이용하여 훨씬 더 훌륭하게 나타나도록 하신다(사 57:17, 18).

그녀는 진노의 위협에도 제지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자비의 제안에 감화를 받을지 안 받을지 시험하실 것이다. 혹자가 "나중에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를 개유하리라" 고 번역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매 한가지다. 목적은 하나님께서 순전히 자비를 위해 긍휼히 여기실 자들에게 자유로운 은혜를 확대시킨다는 데 있다. 이제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Ⅰ. 비록 그 때 그들이 쓸쓸하고 거의 절망 상태에 있었지만 다시 위로와 소망으로 소생하게 될 것이다(14, 15절). 여기에 나오는 묘사는 출애굽시의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광야를 경유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포로기의 고독하고 비탄스런 상태는 그들이 나던 날 애굽에서의 상태에 비유되었다(3절). 그들은 처음 형성될 때처럼 사랑과 자비의 기적으로 재형성될 것이다. 그들은 그때와 같은 희열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십 지파의 왕국에서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주로 지목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교회 인도와 구출일 것이다. 또 이것은 각기 영혼의 하나님께로의 전향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본문의 의도라고 생각할 만하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로운 방법을 취하실 것이다.

 

(2) 그는 맨 처음 출애굽 때와 같이 그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 출애굽 때 그는 거친 들에서 그들을 교훈하시며 자기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제 그들이 포로된 땅은 그때의 광야와 같이 그들에게 환난의 풀무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서 택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국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같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다(3절). 그것은 위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것이 약속의 일부가 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광야의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섭리 아래서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가난하기에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것이며 자기들의 불의에 대한 징벌을 기뻐 받게 될 것이고 자기들에게 들려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때 광야로 인도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때 광야로 인도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낮추시며 시험하여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다(신 8:2, 3, 15, 16).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예비하시는 대상자들은 먼저 거친 들로 데려감을 당한다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고독하고 한적한 데로 불려간다. 이것은 이 세상의 번잡에서 나와 하나님과 보다 자유로이 사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죄악감과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의 고통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아주 어쩔 줄 모르게 하며 그 자체로는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그는 이런 각성에 의해 위로받을 준비를 시키시며 때로는 외부적 고생과 고통에 빠지게 하여 교훈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신다.

 

(2) 그는 그들을 개유하여 말로 위로하실 것이며 그들을 설득하여 그 마음에다 말씀하실 것이다. 즉 그는 자기 말씀과 성령에 의해 자기에게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격려하여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는 이전에 진노의 위협으로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셨듯이 이제는 은총의 약속으로 개유하실 것이다. 전에는 거칠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자기 선지자와 섭리를 통해 그들에게 우호적으로 말씀하실 것이다(사 40:1, 2).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의 손을 통해 저의 마음에 위로를 말할 것이다" (갈데아 주석은 그렇게 읽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제안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킨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개유 받았다. 이것은 각성한 죄인의 마음에다 대고 어느 모로 보나 그의 처지에 적합한 것을 말해 주며 죄 때문에 근심하고 주를 따라 애곡하는 자들에게 풍성한 위로의 말씀을 해 준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을 통해 참으로 효과적인 말을 마음에 하며 양심에 이르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특권이다) 얼마나 복된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 방황하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최선의 길은 아름다운 회유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안식의 약속으로써 그의 멍에를 지라는 초대를 받는다. 그리고 회심의 작업은 유죄 선고뿐만 아니라 위로의 말씀에 의해서도 촉진될 수 있다.

 

(3) "그는 거기서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실 것이다."

그녀를 괴롭히고 그녀로 하여금 자기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며 겸손하게 만드신 바로 그 때와 장소로부터 그는 그녀에게 복을 베푸실 것이다. 그녀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좋은 일을 베풀며 이전의 대적 행위를 취소하실 것이다. 그는 그녀의 포도원을 거칠게 하였으나(12절) 이제는 그녀에게 전체 포도원을 통째로 주실 것이다. 마치 거칠게 되어 못 쓰게 된 모든 포도나무에 대해 포도원을 복구받고 이자까지 지급받아야 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포도원(복수형에 주의: 원주)을 받을 것이다. 그녀는 생계를 위한 곡식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포도원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들의 사랑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자들(아 8:5)에게 예비된 복음의 특권과 위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한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수여하실 포도원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는 거친 들에서 포도원을 주실 수 있으시다. 피곤한 자가 휴식을 반기듯 거친 들에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 포도원이 가장 인정을 받는다.

 

(4) 그는 그녀에게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실 것이다. 아골 골짜기는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곳이었다. 아골은 괴로움의 골짜기란 뜻이다. 왜냐하면 아간은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를 괴롭히신 때문이다. 이것은 가나안 전쟁의 시작이었다. 저주된 물건을 그곳에 내다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계속 함께 하신다는 것과 그들의 승리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을 소망할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비로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시고 그들이 의무로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복된 전조가 될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 중에서 저주받은 물건을 제거하며 죄를 억제함으로써 진중을 괴롭힌 아간을 돌로 친다면 그들 내부의 적의 제압은 가나안의 열왕에 대한 승리의 증거가 된다. 또는 이것이 그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죄에 대한 진정한 괴로움은 소망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진정으로 괴롭히는 죄는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골 골짜기는 매우 비옥하고 즐거운 골짜기여서 혹자는 포도밭으로 유명한 엔게디와 동일시한다(아 1:4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온 가나안 땅의 모형과 보증으로써 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써 모든 신자에게 은사와 은혜와 이 생의 위로물을 주실 것이며 그것은 천국의 보다 완전한 좋은 것들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때가 되면 그 좋은 것들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심어 줄 것이다(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리고 전체의 문맥은 이와 동일한 취지를 갖는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귀환을 큰 기쁨으로 맞을 것이다.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노래하기를: 흠정역) 어렸을 때와 같이 하리라." 이것은 명백히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부른 예언적 개선가를 가리킨다(출 15:1). 그들이 포로 생활에서 구출받을 때는 그 노래를 되풀이할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 노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새로운 시기에 불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노래는 이전 노래보다 열등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희락을 폐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11절) 이제는 그 모든 희락을 재생시키실 것이다. 그녀는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노래 부를 것이다. 하나님이 이전의 자비를 되풀이하실 때 우리도 이전의 찬미를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모세의 노래가 신약에서도 되풀이됨을 볼 수 있다(계 15:3). 이스라엘의 노래에 대한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그 성취를 보았다. 복음은 우리에게 풍성한 찬송 제목과 기쁨의 자료를 제공해 주며 그것이 어디서 받아들여지든 간에 그 능력으로 기쁨의 마음과 찬미의 마음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을 열어주는 땅이다. 우리는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

 

Ⅱ. 이제까지 그들은 비록 무척이나 바알 숭배에 탐닉해 왔지만 이제는 완전히 그 일에서 손을 뗄 것이며 온갖 모양의 우상과 우상 참배를 포기할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착할 것이며 그가 지정하는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16, 17절). 어느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확실히 보증하고 표징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죄 사이를 갈라놓으신다는 사실이다.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을 극히 쉽사리 얽매던 죄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불의였고 그들을 지배하던 지였다. 그러나 이제 그 우상 숭배는 완전히 폐지될 것이며 그들 사이에는 그 잔재가 조금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1. 바알 우상들은 일컬음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바알들의 날에 그토록 시끄러운 소리를 야기시켰던 바알 중 어느 하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것이다. "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왕상 18:26). 바알들의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제거될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너무나 사용되지 않아서 마치 이스라엘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이름인 양 완전히 망각될 것이다. 그 이름들은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하며 듣는 것도 역겨워할 것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바알에게 대한 이전의 사랑을 부끄러워하여 바알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려 할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 금지 율법을 문자 그대로 극히 엄격하게 지킬 것이다(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 출 23:13; 시 16:4). 이와 같이 사도는 모든 육신의 정욕에 대해 마땅히 품어야 할 혐오감을 표현하고 있다(엡 5:3). 그렇지만 구스인의 피부가 어찌 변하겠는가? 그 대답은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시리라는 것이다.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제할 것이며(17절) 우상의 이름을 끊으리라(슥 13:2)."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받던 죄악을 미워할 것으로 만듦으로써 언어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할 것이다" (습 3:9). 랍비 중 한 사람은 이 약속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도 관련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이방인의 전향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결합하고 있던 우상 숭배에서 돌이켰던 것이다(살전 1:9).

 

2. 바알이란 말 자체도 그 순수한 의미에서조차 타기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내 남편(Ishi)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Baali)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두 단어는 다 내 남편이란 뜻이며 신에게 대해 사용되어 왔다.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며(사 54:5), 네 바알이시며, 네 소유주와 후원자요, 보호자시다." 따라서 많은 선한 백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내 바알(Baali)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악한 이웃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바알이란데서 긍지를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나 네가 다시는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니 내가 내 바알이란 이름을 제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 자체는 매우 결백한 것이라도 우상 숭배에 오용될 때는 철폐해야 하며 그 사용도 제거해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이것은 아무 것도 우상을 기억케 하는데 이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물며 우상을 유명하게 하는 일이랴! 하나님을 내 남편(Ishi)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 바알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좋고 그 의미도 같다면 그 말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내 바알이라고 부르면 타인들이 자기들의 옛 바알(guondam Baal)을 상기할까봐서이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왜 이쉬(Ishi)란 말로 불리시기를 원하고 "내 바알"이란 말로 불리기를 원치 않으시는지 그 이유가 여기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는 다 "내 남편" 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쉬'(Ishi)는 사랑과 감미로움과 친밀성을 띤 명칭이고 '내 바알'은 경외와 복종의 호칭이다. 이쉬는 Vir meus - 즉 내 남자이고 'Baali'는 dominus meus - 즉 내 주인이다. 복음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는데 이 때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오며 그 앞에서 거룩하고 겸손한 자유를 행사하라고 권면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교훈받는 경우가 더 많다. 이쉬(Ishi)는 주인이신 남자(인간이란 말과 병용: 역주)란 말이다. 이것은 복음시대에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남편이 되시고 자기 동포(형제: 원의)와 같이 되실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 바알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쉬" 라고 부를 것이다.

 

Ⅲ. 그들은 비록 전 피조물이 자기들과 전쟁 상태에 있기라도 하듯 끊임없는 환난 중에 있었지만 이제는 마치 전 피조물과 우호 동맹이라도 한 듯 완전한 화평과 평온을 누리게 될 것이다(18절). "그들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들어오는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언약을 세우리라."

 

1. 그들은 재앙에서 보호를 받을 것이다. 아무 것도 그들을 해치거나 화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Tranquillus Deus ranquillat omnia - 즉 하나님이 우리와 화평하실 때는 모든 피조물로도 우리와 화평케 하신다. 하등 피조물들은 들짐승이 그들의 포도밭을 먹어치우거나(12절) 사나운 짐승이 하나님의 쓰라린 심판의 하나로 행하던 것처럼(겔 14:15) 그렇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공중의 새와 기는 곤충도 이 언약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공의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는 그들도 매우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 언약을 통해 그것들은 그들에게 유용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이익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등 피조물도 지배하시며 자기가 원하시는대로 그것들을 언약 속으로 끌어들이신다는 데 주목하자. 그는 들짐승으로 하여금 자기를 존경하게 하실 수 있으시며(그렇게 약속하셨다. 사 43:20) 자기 백성의 안락에 기여하도록 하실 수 있다. 하등 동물이 이처럼 우리에게 대한 봉사의 약속 아래 놓이게 된다면 우리측의 언약 이행 태도는 그들을 학대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뱀을 집을 수 있는 기적적 능력을 부여했을 때(막 16:17, 18) 이것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특별히 포로 귀환시의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 내가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라," 겔 34:25)과 일치하며 모든 성도에게 대한 보다 일반적 약속과 일치한다.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이요(욥 5:22, 2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을 것이라(시 91:13)."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야수보다 인간 서로가 더 위험하다. 그러므로 나아가서 하나님은 전쟁을 그치게 하시며 원수를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내가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리라."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시며(시 46:9) "그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 을 위해 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라도 그들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잠 16:7). 이것은 복음 시대에 칼이 보습으로 될 것이란(사 2:4) 약속과 일치한다.

 

2. 그들은 재앙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침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평안히 지키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하늘의 보호 아래 있는 줄 알기에 음부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처럼 평안히 눕게도 하실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들의 음행을 인하여 이혼장을 그들에게 주셨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에는 그들을 언약 속으로, 혼인 언약 속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19, 20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등 동물과 언약을 세우신 것은 크나큰 은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선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이 언약의 성질. 그것은 사랑과 선택에 의해 성립되고 최근친을 형성하는 혼인 언약이었다.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 (이 말은 세 번 나온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과 혼인한 자들이란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신성하고 불가침의 안전을 그들에게 부여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사랑하실 것이며, 보호하실 것이며 부양하실 것이다. 그는 남편된 도리를 다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과 결합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쏠리도록 하실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은혜로이 열납하실 것이다. 믿는 영혼은 그리스도와 혼약맺은 자이다(고후 11:2). 복음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요 아내이다. 그가 만약 자기 은혜의 능력을 통해 그들에게 장가들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결코 그와의 결혼 관계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분리는 우리편에서 시작되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다. 이에 반해 연합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장가드신다.

 

2. 이 언약의 기간.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리라. 언약 자체는 위반이 불가할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도 이 언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며 네 편에서도 깨뜨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언약의 축복은 영원할 것이다." 유대 랍비 중 한 사람은 이것이 그녀가 절대적으로 영원한 장차 올 세상의 삶에 도달하리라는 약속이라고 말한다.

 

3. 이 언약이 세워질 방법.

(1) 의와 공변됨으로, 즉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심에 있어 진실하고 의롭게 다루실 것이다. 그들은 언약을 위반했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그렇지만 내가 의로 그 언약을 갱신하겠노라"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배역하는 자녀들을 다시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이 조정될 것이다. 그는 자기 공의를 생각하시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의 공의를 생각하시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의 공의는 이 언약의 중보자에 의해 충족될 것이며 이것은 언약의 명예를 훨씬 더 높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토록 자주 배반하던 백성과 언약을 맺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지혜에 오명을 입히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내가 이 일을 판단(한글 개역: 공변됨)으로 행하리라. 경솔히 행치 않고 적당히 숙고하여 행하리라. 나로 하여금 혼자 이 일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게 하며 나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게 하라."

 

(2) 은총과 긍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의 언약 체결에서 인자하고 은혜롭게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말씀처럼 선하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훌륭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과의 언약을 지키시는 데 공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언약 안에 보존하심으로 자비로우실 것이다.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기 쉬울 정도로 약점이 많은 존재이다. 하나님이 만약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극단적으로 주목하신다면 그들은 곧 그 언약의 혜택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그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고려함으로써 성립되는 은혜의 언약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의 모든 범죄도 그들을 밖으로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영원한 인자로 모으실 것이다.

 

(3) 진실함으로, 언약의 각 조항은 꼭 그대로 수행될 것이다. 그들을 부르신 분은 진실하시니 그가 이 일을 이룰 것이다. 그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

 

4. 그들이 자기들 편에서 이 언약을 굳세고 신실하게 고수하게 될 수단.

"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때보다 완전히 그리고 명백히 자신을 계시하리라는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을 알려는 마음을 그들을 주시리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타락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은인인 줄을 모르는 데 기초했다(8절).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해 가르침을 받아 그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훌륭한 이해력과 올바른 지식을 주심으로써 인간의 영혼에 대한 자기 세력을 유지하신다는 데 주목하자(히 8:11 참조).

 

Ⅴ. 그들에게는 하늘이 놋과 같고 땅은 철과 같았지만 이제는 하늘이 이슬을 내게 될 것이며 따라서 땅은 소산을 내게 될 것이다(21, 22절). 하나님께서는 복음 교회에 장가드시고 그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들과 혼인하셨는데 어찌 만물을 그들에게 거저 주시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거저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경건에 속하는 모든 것, 그들이 필요로 하고 원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주셨다.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께 혼인한 자들인 까닭이다. 그들이 먼저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더불어 모든 것이 그들에게 추가될 것이다. 그런데 이 곡식과 포도주의 약속은 영적 의미로도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 따위를 은유로 한 현세적 축복이 약속되고 있는데(이것은 야곱의 축복에서도 먼저 나온다. 창 27:28). 이것은 영혼과 관계 있는 축복과 은혜의 유출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곡식과 포도주를 도로 찾으시겠다고 경고하셨다(9절). 그러나 이제 그는 일상적 자연의 경로와 질서로 그것들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은 기근의 심판 아래 있는 동안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땅에게 곡식과 포도주를 요구하였다. 땅은 기꺼이 그들에게 그런 산물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땅은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되지 않으면 곡식과 포도주를 산출할 수 없으며, 받지 않으면 줄 수가 없다(시 5:9 참조). 그러므로 땅은 하늘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부르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때에 달라고 입을 벌리고, 비가 거절될 때에는 우울한 모습으로 비를 탄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의 열쇠를 가진 분이 그 자물쇠를 열고 병뚜껑을 열지 않으면 비를 내려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돕지 않으시면 행할 수 없다" 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친히 언약을 세우실 때는 자연의 수레바퀴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가동할 것이며 자비의 시냇물이 보통의 경로를 따라 흐르게 될 것이다. 그 때는 "내가 응하리라(들으리라)" 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네 기도를 받아들이리라(맨 처음에 나오는 "응하리라" 를 갈데아 주석은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대한 그들의 말을 은혜로이 주목하실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하늘을 듣겠노라(응하리라). 내가 하늘에게 응답하겠노라. 그러면 하늘은 땅을 듣고 응답하여 땅에 적절한 비를 쏟을 것이다. 그러면 땅은 곡식과 포도주를 들고 습기를 공급할 것이며,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을 듣고 이스르엘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영양을 공급할 것이며 원기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여기서 피조물(제 2원인) 상호 연관성을 살펴보자. 그것들이 사슬처럼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또 제 1원인에 대한 피조물의 필수적 의존성을 주목하자. 우리는 통정상 방법과 정해진 수단을 따라 우리의 모든 위안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실망할 때에는 작은 산과 산보다 높으신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기에 얼마나 적극적이며 그 명예를 얼마나 갈구하는지 주목하자. 곡식은 땅에게 부르짖고 땅은 하늘에게, 하늘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이 모든 것은 자연이 그들에게 공급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얼마나 즉각적으로 구원을 베푸려고 하시는지 주목하라. "내가 응하리라. 아무렴, 응하고 말고" 라고 여호와는 말씀하신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면 하물며 하늘보다 높으신 자기 아들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자들이 피조물의 위안에서 독특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시냇물의 물 근원까지 추적할 수 있으며 일반 자비에서 언약의 사상을 맛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을 배나 즐겁게 한다.

 

Ⅵ.그들이 비록 이산되고 시몬과 레위처럼 야곱 중에 나뉘고 이스라엘 중에 흩어졌을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나뉘고 흩어지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내가 저를 위하여 땅에 물을 댈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으리라. 저의 흩어짐은 타작 마당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 같지 않고 보다 소출을 크게 하기 위해 밭에 뿌려지는 씨앗 같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뿌려지든지 밑으로 뿌리를 내려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좋은 씨앗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심으리라." 이것은 이스르엘이란 이름을 암시한다. 이스르엘은 하나님께로서 또는 하나님을 위해 파종되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하나님께로부터 흩어짐을 당했듯이(이것은 그 단어들의 한가지 의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파종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심는 것을 증가시킬 것이며, 소출이 많아지게 하실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박고 신앙 고백자가 모든 곳에 생겼을 때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으리라" 는 약속은 성취되었다. 이 땅의 최대 축복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교회를 두시고 그로부터 온갖 영광의 공물이 나오며 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심으신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확보하실 것이다.

 

Ⅶ. 그들이 과거에 로암미(-백성이 아니라-)와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였음에 반해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받을 것이며 다시 그와 언약을 맺게 될 것이다(23절).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고 버림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내 백성이 아니었고, 내 백성이 아니었고, 내 백성으로서" 각광을 받지 못하고 그렇게 취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열방과 공통적으로 방임되었다. 배척받은 유대인의 경우가 그랬다. 이방인의 경우도 이와 같았거나 더 비참하였다(사도는 이것을 말한다, 롬 9:24, 25). 그들의 소망을 갖지 못했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큰 무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교회로 연합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었는가?

 

1.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오랫동안 은총밖에 있으면서 진노의 자녀였던 자들이 하나님께 은총을 얻고 그의 사랑의 자녀로 되었다. 만일 무한하신 자비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었을 터였다. 지옥 이쪽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하나님은 이방인과 나그네 되었던 자들을 자기와의 언약 관계에 두셨다. 그는 그들에게 "너는 네 백성이라 내가 너를 내 백성으로 인정하며 축복하며 부양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주는 내 하나님이라. 내가 주를 섬기며 예배하고 주의 명예에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헌신하리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신자가 받는 행복의 총계는 그들과 하나님간의 상호 관계이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은 모든 약속의 관절(冠絶)이다.

(2) 이 관계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근거한다. 우리가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먼저 "저들은 내 백성이라" 고 말씀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권능의 날에 기꺼이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다. 그런 뒤에야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공언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이상 달리 바라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행복을 확신시켜 주는 것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시며, "너는 내 백성이라" 고 성령을 통해 증거하신다.

(4)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기쁘게 받아들인 자는 그렇게 고백하고 공언해야 하며 기도로 그에게 나아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 말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고백해야 한다.

 

(5) 언약 안에 성도의 교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우리 언약의 위로를 더해 준다. 성도의 수는 많으나 여기서는 단수로 표현되고 있다. 본문에는 "내가 저희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라" 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 그 안에서 하나된 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런 자로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그들 역시 "주는 우리 하나님이라" 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한 몸으로 간주하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 말한다. 아니면 이것은 언약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 전체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런데 이제는 복음 아래서 개개의 신자들과 그런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각자에게 "너는 내 백성이라" 고 말씀하신다. 옛적 수만의 이스라엘인에게 하실 때처럼 극히 보잘 것 없는 자에게도 기쁨으로써 "너는 내 백성이라" 고 말씀하시며 그들 각자를 초대하고 격려하여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 말하게 하시며 모세와 온 이스라엘이 그랬듯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드신다. "그는 내 하나님이시오,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로다" (출 15:2).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호세아 3:1-5)

 

혹자는 선지자와 결혼한 음녀(1:3)가 열 지파를 나타내기 때문에 본장은 두 지파의 나라 유다를 언급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여인의 열 지파처럼 이혼되지 않고 오랫동안 홀로 있다가 두 지파처럼 다시 돌아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호칭되는데 이것은 열 지파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 장에서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가서 그 말을 되풀이하라" 고 하신다. "너는 또 가라." 죄인의 각성과 복귀를 위해서는 교훈에 교훈을, 훈계에 훈계를 거듭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데 주목하자. 그들이 한 가지 표적을 믿으려 하지 않거든 또 다른 표적을 시도해 보라(출 4:8, 9).

Ⅰ. 이 비유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스라엘의 악함이 이상하게도 서로의 특성을 더 돋보이게 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1절). 이스라엘은 그 친구(혹은 타인)의 연애를 받는 여인과 같다. 그 친구는 여인과 결혼한 자이거나 아니면 단지 그녀에게 구혼만 하는 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음부가 되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경우도 그렇다. 흔히 애정은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서로 간에 소실되는 사랑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조차 아주 많이 소실되며 무가치하고 배은망덕한 백성에게 허비됨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대해 아주 큰사랑을 품고 계시지만 그렇게도 그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다. 하늘이여 놀라고, 땅이여 기이히 여길지어다!

 

(1)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들의 악함을 종식시키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대해 친절심을 품고 계시며 끊임없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신다. 그들은 그 점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줄곧 자기들에게 아버지 같고 친구 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른 신들을 쳐다본다(곧 섬긴다). 그들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다른 신들을 쳐다보고 눈으로 이끌려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경탄과 찬미의 눈으로 쳐다본다(온갖 위로를 기대한다). 그들은 우상 경배를 제지당하면 그들에게 추파를 던졌고 그들의 눈에는 영적 간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은 포도주 병을 사랑했다" (한글 개역 성서:" 건포도 떡을 즐겼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에게 가담하여 즐겁게 살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이따끔씩 우상의 신전에서 푸짐하게 대접받은 좋은 포도주를 인하여 다른 신들에게 호의를 품었다. 우상 숭배와 육욕은 흔히 함께 따라다닌다. 주정뱅이들처럼 자기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은 그 외 무엇이든지 쉽사리 자기 신으로 삼게 된다.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성전에 시무하러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못 마시도록 되어 있었고 더욱이 나실인들은 전혀 술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신들의 숭배자들은 대접으로 술을 마셨다. 아니, "포도주병" 이라야 그들을 만족시켰다.

 

(2) 그들의 악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종식시키지 못했고 그들에게 대한 은총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그녀가 음녀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 친구(한글 개역:타인)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자비의 이적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여호와의 사랑이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가라, 가서 이런 여인을 사랑하라. 네 마음으로 그런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지 시도해 보라. 아니, 너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나이도 그런 여인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대한 나의 사랑이다. 그것은 사랑없는 자에게 대한 사랑이요, 사랑할 수 없는 자에게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을 수천 번도 더 몰수당한 자에게 대한 사랑이다." 불쌍한 죄인에게 대해 하나님은 선의를 품고 계신다. 이런 면에 있어서도 그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무한히 높으시고 그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보다 한층 겸비하여 자비롭다. 딴 어느 일에 못지 않게 이 점에서도 그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아니시다(호 11:9).

 

2. 그토록 선하신 하나님과 그토록 악한 백성을 다시 결합시킬 방법이 안출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의도하시는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바다처럼 넓은 틈바구니가 효과적으로 치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치지 않는 한 기적도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다음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로 스스로를 알도록 하시기 위해 취하시는 방편(2절).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샀다. 즉 내가 저에게 화해하기를 청하며 악한 행실을 버리고 본 남편에게 돌아오도록 구하였다. 이는 내가 저를 개유하여 말로 위로한 것과 같다(2:14)." 이것은 남편을 떠나 행음한 첩을 좇아가 다정히 말한 레위인과 같다(삿 19:3). 그러나 선지자가 여기서 여인의 호의를 사기 위해 갖고 온 선물은 아주 약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인의 별거 생계를 위한 전부였다. 그녀는 수당이 삭감되었다. 이런 부족한 지참금으로써 선지자는 여인의 교만을 벌하고 여인을 몹시 비천하게 보이도록 한다. 삼손은 자기를 노엽게 한 아내와 화해하러 갈 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갔다(삿 15:1). 이것은 점잖은 대접이었다. 선지자는 은 열 다섯 개라는 적은 금액을 가지고 여인을 찾아갔다. 그렇지만 여인은 이 금액을 가지고 한참 동안 만족하며 지내야 했다. 그 기간은 남편이 그녀를 처음상태로 회복시키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까지였다. 이 여인은 또 보리 한 호멜 반을 식용으로 받게 되었다. 이것은 이 여인이 누가 봐도 충분히 겸손해졌다고 할 수 있을 때까지, 또 적절한 시련의 시기가 지난 뒤 참으로 개과천선했다는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엿보일 때까지 기대해야 할 전부였다. 이 여인은 선지자가 이렇게 구혼하는 것이 그 자신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이 여인에게 대한 그의 평가는 반값에 불과했다. 종의 가격도 삼십 세겔이었다(출 21:32). 이것은 그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것이 자기의 값어치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보석금을 치루셨었다. 그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토록 값지고 존귀했던 것이다(사 43:3, 4).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행음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은 열 다섯 개만 지불하실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죄악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명예와 위로를 주시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먼저 그들 자신의 무가치성을 깨닫게 하시고 탕자처럼 "지금부터는 내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눅 15:19) 라고 고백하게 만드신다는데 주목하자. 시대는 이스라엘이 밀의 아름다운 것을 먹을 때(시 81:16)였다. 그러나 그들은 방탕해서 포도주 병(건포도 떡:한글 개역)을 즐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의 땅에 데리고 가셔서 보리떡을 먹게 만드셨다. 이는 그들을 낮추고 끌어내리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그나마 보리떡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했다. 이전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인색한 대접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는 저울과 말로 달고 되어서 먹게 되었다. 빈궁과 수치는 큰 죄인을 진정한 회개자로 만드는 복된 수단이라는 데 주목하자.

 

(2)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실 조건(3절). "너는 많은 날 동안 나를 위하여 지내고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흠정역). 그는 그들에게 이혼장을 써 주고 다시는 관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셔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푸시겠다고 하시다. 그리고 문제를 타협으로 풀려고 하신다. 그는 엄격한 율법을 따라 엄한 공의로 그들을 다루지 않으시고 많은 자비를 따라 그들과 거래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행음하여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류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관계를 나타낸다. 그는 참으로 평가할 수 없는 값을 주고 그들을 사셨다. 이것은 그들 인간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로운 공의를 위해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제안과 그들과 맺으시고 싶어하시는 은혜의 언약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제안되는 것과 꼭 같다.

 

[1]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한 수치를 스스로 져야 했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감수하며 거기 복종해야 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를 위해(한글 개역 성서:나와 함께) 지내야 할 것이다. 너는 홀로 되어 슬픔 중에 있는 과부처럼 고독과 침묵 속에서 여러 날 동안 나를 위해 지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장식품을 제해 버리고 끈기와 복종심으로 기다리며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대하실지를 알아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처럼 무가치한 폐물들을 다시 은총 속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뻐하실지 않으실지를 알아야 했다(출 33:3, 5). 그들의 아비, 그들의 남편은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미리암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셨듯이) 노여움의 표적 아래 그들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리암처럼 칠 일을 부끄러워해야 하며(민 12:14), 그 할례받지 않은 마음이 낮아질 때까지 진 밖에 갇혀야 했다(레 26:41). 그들은 홀로 앉아 잠잠하며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멍에를 메어야 했다(애 3:26-28).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가운데서 신속히 돌아오시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물론 그런 때도 가끔 있긴 했다. 그들은 위로가 값싸고 손쉽게 올 줄로 기대해서도 안 되었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즉 포로 기간 내내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그것을 자비의 기적으로 간주해야 했다. 마침내 그 구원이 오면 그들은 참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을 터였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주시기로 계획하시는 자들은 먼저 낮추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2] 그들은 결코 다시는 어리석음에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조건이다(시 85:8). "너는 행음하지 말며 네 음란으로 말미암아 별거당한 그 포로된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지니라."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의로우시다고 찬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데 유의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더 이상 범죄하지 않으며 다시는 세상과 육을 따라 행음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우리가 어떤 일로도 오히려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언약의 율법이긴 하나 그 것이 그 언약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행음하지 말며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그들은 포로의 땅에서 그 나라의 우상을 경배하도록 유혹을 받을 터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시험이 될 것이며 오랜 시련, 많은 날 동안 시험이 될 터였다. "그러나 네가 네 근본을 지키고 네 순전을 고수하며 이 일이 네게 임할 때 네 손을 이방신에게 펼치지 아니하면 너는 하나님의 은총의 귀환에 유자격자가 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난시의 유혹에 정복당하지 않도록 보호될 때에는 그 고난이 우리에게 대한 많은 선의 수단과 보다 많은 선의 보증을 확실히 표시한다는 데 주목하자.

 

[3] 이런 조건으로 그들의 조물주는 다시 그들의 남편이 되실 것이다. "나도 네게 그리하겠노라." 이것은 하나님과 돌아오는 죄인 간의 언약이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을 위하고 섬긴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위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경쟁자들을 부인하고 포기하여 마음속의 보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헌신한다면 하나님도 그들에게 모든 경우에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의무의 길로 하나님께 신실하고 불변하며 그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다면 그도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그러하실 것이며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공정한 제안은 없다.

 

Ⅱ. 마지막 두 절에서 우리는 이 비유의 해석과 이스라엘에 대한 적용을 볼 수 있다.

1. 그들은 모든 기쁨과 명예를 박탈당한 채 과부처럼 오래 앉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애 1:1, 2). "그들은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궁도 없이 지내리라." 이런 형편의 나라는 과부라고 불려 마땅하다.

(1) 그들에게는 일반 정부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왕도 없이 지낼 것이며 그들 자신의 군주도 없이 지낼 것이다. 그들에게는 압제하고 가혹히 다스리는 왕이나 군주는 있었지만 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을 위해 전투를 하거나 그들에게 공의를 행사하거나 그들의 공동 안전과 복리를 돌보아 주는 왕도 방백도 없었다. 행정은 국민에게 대단히 큰 축복이며 올바른 행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프고 쓰라린 심판이라는 것을 유의하자.

 

(2) 그들에게는 공중 예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이것은 상이나 기둥을 말하는데 그 단어는 야곱이 세운 기둥에 대해 사용되고 있다. 창 28:18; 31:45; 35:20),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낼 것이다. 여기서 드라빔이 에봇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으므로 혹자는 그것이 대제사장의 흉패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의 의미는 그들이 포로 기간 중에 국가의 면목도 갖추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습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자기들의 선택대로 공적인 예배를 드릴 자유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제물이나 제단도 갖지 못할 것이며(70인 역은 그렇게 번역한다) 제단이 없기 때문에 제사도 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에봇도 드라빔도 없을 것이다. 즉 합법적 제사직도 없으며 하나님의 의사를 알 수단도 소유하지 못하며 의문나는 경우에 문의할 신탁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암흑 중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공적으로 예배드릴 모든 기회가 박탈된 자들의 처지는 매우 참혹하다는 데 주목하자. 포로 중에 있던 유대인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오늘날 흩어져 있는 유대인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더하다. 그들은 비록 회당은 가지고 있으나 성전 예배는 없이 지낸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폐쇄당한 자들의 형편은 참으로 쓸쓸하고 황량하다. 그들은 제사와 제단을 통해 하나님께 호소할 기회도 갖지 못한다.

 

2. 그들은 결국 다시 아내로서 용납받게 될 것이다(5절). "그 후에 즉 시간이 경과하여 저희가 이런 훈련을 거치고 난 뒤 돌아 올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숭배를 뉘우치고 우상을 버릴 것이며 하나님께 전심하며 집착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용납받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는 사례로써 두 가지 일이 약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가운데 그를 기뻐 받아들이며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물을 것이다.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리라."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며 그의 은총을 얻으려는 자는 그를 구해야 하며 찾아야 하고 그와의 면식을 탐내야 하며 그와 화해하기를 원해야 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용납받기 위하여 이런 일로 수고하고 힘써야 한다. 그들이 그를 찾는다는 것은 그들이 그를 상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자기들의 손실을 애통해하고 자기들이 상실한 것을 간절히 회복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그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서 구하게 될 것이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사 8:19) 그리고 그들은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메시야 곧 다윗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시며 다윗 자신도 주라 부른 분이다(시 110:1).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셨다(눅 1:32). 갈대아 주석은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예배를 구할 것이며 그 왕 다윗의 아들 메시야에게 복종하리라" 고 읽는다. 이것을 예레미야 30장 9절, 에스겔 34장 23절, 37장 25절와 비교해 보라. 여호와를 위해 그를 구하려고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문의해야 하며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서 찾아야 하고 기꺼이 그의 백성이 되어야 하며 그에게 충성과 절개를 맹세해야 한다.

 

(2)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저희가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리라" (흠정역). 혹자는 여기에 나오는 그의 선하심을 성전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성전 쪽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르호보암 시대에 이스라엘이 차 내던진 것이 세 가지였다고 말한다. 즉 첫째는 천국이요, 둘째는 다윗가며, 세째는 성전이었다. 그들이 돌아 와 여기에 약속된 세 가지를 찾기까지는 결코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천국을 찾고 그 왕 다윗에게서 왕가를 찾으며 여호와의 선하심 속에서 성전을 찾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그 선하심" 이란 것을 그리스도 즉 그 왕 다윗과 동일한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속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심을 자기 영광으로 나타내셨고 자기 이름을 그 속성으로 선포하신 때문이다.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도 우리가 경외해야 할 대상이다. 그의 엄위로우심 뿐만 아니라 그의 자비도 경외의 대상이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에로 도망할 것이며(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도피성으로서 그와 그의 선하심에로 도망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외해야 하며 상찬해야 하며 놀라야 하며 찬미해야 하며 모세가 이 이름을 선포하던 때처럼 경배해야 한다(출 34:6). 우리는 그의 선하심을 거스르게 할까봐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선하심에 배은망덕한 보답을 하다가 그것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해야 한다. 사유케 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떨면서 기뻐해야 하며 자고해서는 안 되고 그를 두려워해야 한다. 이제 이 약속은 복음 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큰 무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신약 교회에 가맹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되 신적 은혜에 대한 사랑과 경외로써 하며 하나님께 그의 이스라엘로 받아 들여졌던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것이 장차 성취될 것으로 해석한다. 그때에는 불신앙 가운데 남아있는 유대인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돌아 올 것이며 메시야를 그 왕 다윗으로서 구할 것이고 그를 통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며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롬 11:25). 그때에는 그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 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사형시키려고 찾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자기들의 두목으로 세우고 그의 멍에를 멜 날이 오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여기에서 약속하신 분이 메시야의 때 곧 마지막 때의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드실 것이며 그 자신의 방법과 시기에 이 큰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슬프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때 살아있을 자가 누구인가? 유대 민족의 전체적 회심을 기대하다니 이 얼마나 먼 훗날 얘기인가! 그러나 나는 유대인이 개심할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성 경: [호1:1]

ꃨ 웃시야와...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 호세아의 예언 사역은 원래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도덕 등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여로보암 2세 통치 말기부터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B.C. 722년경까지 약 40여 년 동안 북왕국의 선지자로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는 북왕국의 번영(B.C. 793-753)과 쇠퇴가 교차되는 때였으며, 정치.종교적으로 비극적이고 암울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본절은 유다 왕이 네 명이나 기록된 반면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한 명밖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자들은 호세아가 남쪽 유다 출신으로서 북왕국에 파송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시리라는 약속대로, 북왕국 백성들의 구원은 다윗의 하나님인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7절;3:5). 둘째, 북왕국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을 유다 왕조의 정통성과 대조시킴으로써, 북왕국을 멸망으로 이끈 배교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로 인한 심판을 경고하기 위함이다(4:1,2,15;5:5;6:4,10). 그러나 이것 역시 추론에 불과하며, 북왕국의 여섯 왕들(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이 기록에서 삭제된 까닭을 확실히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분명한 것은 호세아가 여로보암 2세 이전에 이스라엘 왕조의 쇠퇴를 예고했다는 것과, 여로보암 왕만은 반역에 의하지 않고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이다. 즉 호세아는 여로보암을 여호와께서 북왕국을 위해 세우신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왕하 14:27).
ꃨ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 - '브에리'(*)의 뜻은 '샘', 또는 '설명하는 자'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호세아'(*)는 '구원'이란 뜻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반영한다.
ꃨ 여호와의 말씀 - 이는 선지자를 통한 여호와의 신적 교통을 암시하는 것으로 선지자의 사역과 연관된 계시를 말한다(사 2:1;렘 1:2;겔 6:1;욜 1:1;암 1:1;욘 1:1;미 1:1;습 1:1)
ꃨ 웃시야와...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 호세아의 예언 사역은 원래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도덕 등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여로보암 2세 통치 말기부터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B.C. 722년경까지 약 40여 년 동안 북왕국의 선지자로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는 북왕국의 번영(B.C. 793-753)과 쇠퇴가 교차되는 때였으며, 정치.종교적으로 비극적이고 암울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본절은 유다 왕이 네 명이나 기록된 반면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한 명밖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자들은 호세아가 남쪽 유다 출신으로서 북왕국에 파송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시리라는 약속대로, 북왕국 백성들의 구원은 다윗의 하나님인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7절;3:5). 둘째, 북왕국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을 유다 왕조의 정통성과 대조시킴으로써, 북왕국을 멸망으로 이끈 배교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로 인한 심판을 경고하기 위함이다(4:1,2,15;5:5;6:4,10). 그러나 이것 역시 추론에 불과하며, 북왕국의 여섯 왕들(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이 기록에서 삭제된 까닭을 확실히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분명한 것은 호세아가 여로보암 2세 이전에 이스라엘 왕조의 쇠퇴를 예고했다는 것과, 여로보암 왕만은 반역에 의하지 않고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이다. 즉 호세아는 여로보암을 여호와께서 북왕국을 위해 세우신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왕하 14:27).
ꃨ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 - '브에리'(*)의 뜻은 '샘', 또는 '설명하는 자'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호세아'(*)는 '구원'이란 뜻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반영한다.
ꃨ 여호와의 말씀 - 이는 선지자를 통한 여호와의 신적 교통을 암시하는 것으로 선지자의 사역과 연관된 계시를 말한다(사 2:1;렘 1:2;겔 6:1;욜 1:1;암 1:1;욘 1:1;미 1:1;습 1:1)

성 경: [호1:2]

ꃨ 비로소 호세아로 - '비로소'(*, 데힐라트)는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 곧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는 계시가 호세아를 통해 처음으로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호세아로'는 '호세아를 통하여'(through, NIV, RSV), 또는 '호세아에 의하여'(by, KJV)란 뜻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호세아와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ꃨ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 '취하다'의 히브리어 '라카흐'(*)는 축첩을 뜻하지 않고 결혼하라는 의미이다(창 4:19;6:2;19:14;출 34:16). '음란한'의 히브리어 '제누님'(*)은 음탕한 기질이 있는 여자, 또는 매춘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같은 명령이 하나님의 도덕적 특성과 신적 거룩함에 맞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가설적인 결혼이라는 견해:호세아의 결혼이 하나님과 타락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비유 또는 환상이라는 주장이다(Augustine, Jerome, Kimchi, E.J.Young). (2)영적인 불신앙으로 보는 견해:여인의 음란을 이스라엘의 타락을 표현하기 위한 영적 음란으로 이해하려는 주장이다(Umbreit). 하나님의 명령이 선지자의 내적이고 영적 본능 속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Keil). (3)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선지자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경험한 결혼이라는 주장이다(Kurtz, Lange, Harper, Chrisholm, Given, Butler). 즉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실재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가장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문자적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견해도 두 가지로 나뉜다. (1)여인이 호세아와 결혼하기 전에는 순결하였으나, 결혼 후에 음란하게 되었다는 주장과, (2)원래부터 음탕한 창녀였다는 주장 등이다. 그러나 (1)의 견해는 신적 거룩함을 옹호하기 위한 변증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뒷받침이 불충분하며, 특히 3:1-3과 연관해 볼 때 수용하기 어렵다. (2)의 견해는 하나님의 명령이 결코 그의 신적 속성을 더럽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즉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은 실제적인 음란죄를 범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죄악된 관습을 치료하여 선지자 자신의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결합이라는 것이다(Lange).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고상한 명령이자 선지자의 의무이지, 결코 도덕적 특성과 관련된 죄에 결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M.Henry).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때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을 명령한 하나님의 속성이 결코 불의 하다거나, 또는 그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호세아 선지자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ꃨ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 원문에는 '낳으라'는 말이 없고 '취하라'(*, 라카흐)는 동사가 나온다. 그래서 혹자는 고멜이 결혼시에 이미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음란한 자식들은 4-9절의 세 자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음란한 자식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름지어진다(4,6,9절).
ꃨ 이 나라가...행음함이니라 - '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츠'(*)는 이스라엘 땅의 백성을 가리키며(4:1), '떠나다'의 히브리어 '메아하레'(*)는 여호와의 신실함에서 끊어진 관계를 나타낸다. 이처럼 그 백성이 여호와를 떠난 것은 '크게 행음하였기'(*, 자노케즈네)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이 나라'는 크게 행음하고 있는 음란한 아내로 상징되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와 방탕한 생활 가운데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실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 경: [호1:3]

ꃨ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 '디블라임'(*)은 일반적으로 '데벧라'(*), 곧 '무화과 떡'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진다(삼상 30:12;대상 12:40). 이것은 3:1에서 우상에게 바치는 떡으로 호색과 쾌락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고 '고멜'(*)은 '완성', '완전'을 뜻하는 '가메르'에서 파생한 것으로 완전한 음란을 상징하는 것 같다. 한편 다른 곳에서 '고멜'은 단지 한 족속의 명칭으로 나타날 뿐이다(창 10:2;겔 38:6).
ꃨ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 이는 '그 여인이 잉태하여 한 아들을 그에게 낳아 주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호세아가 음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한 사실을 증명해 준다. 동시에 그 아들이 호세아의 친자식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 경: [호1:4]

ꃨ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 '이즈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란 뜻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암시한다. 특별히 여기서 '이스르엘'이라는 명칭은 예후가 아합의 집을 대량으로 학살한 장소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Lange, Keil, 왕하 9,10장).
ꃨ 이스르엘의 피 - 이것은 예후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아합의 온 집을 멸망시킨 사건과 관련이 있으나 그 이면의 내용은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합 집의 멸망은 엘리야가 예언했고(왕상 21:20-25), 엘리사가 명하였으며(왕하 9:6-10), 더욱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았던 일이기 때문이다(왕하 10:30).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예후가 흘린 피를 갚겠다고 하시는가 ?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1)예후가 아합의 집을 멸하는 것으로 만족지 않고, 유다의 아하시야와 그 형제 42명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왕하 9:27;10:13,14). 이들의 죽음이 비록 이스르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났지만 그 장소의 대량 학살과 관계되어 있다(R.Chrisholm). (2)아합 집의 멸망이 비록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예후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예후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악한 습성에 따라서 성취시켰을 뿐이었다(Keil). 이것은 예후가 바알숭배를 멸하였지만 여로보암의 죄, 곧 금송아지 숭배를 계속행하였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왕하 10:28-31). 결국 예후의 행위는 대량 학살이라는 범죄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왕하 10:11).
ꃨ 예후의 집에 갚으며 - '갚다'의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권고하다'란 뜻으로 여기서는 징벌을 의미한다. 예후 집의 멸망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4대(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II, 스가랴)만에 끝이 나게 되었는데(왕하 10:30), 스가랴가 통치 6개월 만에 살룸의 반역으로 죽임당함으로써 성취되었다(왕하 15:10).
ꃨ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 예후 왕조의 몰락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이후 반세기 동안 북왕국이 지속되었지만, 계속되는 반역과 살인으로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가 극에 다달았다. 따라서 예후 왕조의 몰락은 "종말의 시작이며 분해 과정의 시작이었다"(Hengestenberg).

성 경: [호1:6]

ꃨ 딸을 낳으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아들 혹은 딸로 비유된다.
ꃨ 로루하마(*) - 문자적으로 '은총을 입지 못하다', 또는 '동정을 받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더 이상 애정어린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을 나타낸다(시 103:13;사 49:15).
ꃨ 내가 다시는...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 '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 -직역하면 '들어 올리다', '가지고 가다'-의 난해함 때문에 본 구절은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1)'반드시 그들의 대적이 될 것이다'(LXX). 이는 '나사'를 '사네'(*), 곧 '미움받는 자'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2)'그것들을 완전히 제거할 것이다'(KJV, Pusey, Henderson). (3)'그들을 버릴 것이다'(Meier, Hengstenberg). (4)'그들을 잊을 것이다'(Vulgate). (5)'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RSV, NEB, JB). 그러나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이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배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을 폐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선언은 앞으로 닥쳐올 북왕국의 멸망과 재난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성 경: [호1:7]

ꃨ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 이는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위해 대조적으로 언급된 구절이다. 사실상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똑같이 언약의 백성이다. 그런데 유다 족속은 긍휼을 얻지만 이스라엘 족속은 사랑에서 제외된다. 이러한 차별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정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유다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무기와 힘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 하나님께서 '내 자신'이라는 표현 대신에 '저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강조적인 구문을 사용하신 것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고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ꃨ 활과 칼이나...아니하리라 - 이스라엘이 의지했던 군사력이나 전쟁 무기로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구원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 일은 실제로 유다왕 히스기야 때 앗수르의 산헤립에게서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음으로 성취되었다. 그때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유다는 자기들의 군사력이 아닌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다(왕하 19장;사 37장).

성 경: [호1:8,9]

ꃨ 로암미(*) - 이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운명이 절망적인 것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백성을 흩으시고(이스르엘)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로루하마) 아예 포기하시고 버리신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출 6:7;레 26:12)는 특별한 언약 관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ꃨ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 직역하면 '나는 너를 위하지 않을 것이다'이다. 즉, '나는 너에게 아무 것도 아니며, 너에게 속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단은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의 삶에서 떠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불법과 가증한 일들을 행한 데서 기인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왕하 17:18).

성 경: [호1:10]

ꃨ 그러나...셀 수도 없을 것이며 - 북왕국 이스라엘 열 지파에 대한 징벌이 선언된 후에, 곧바로 이스라엘 자손의 회복과 구원에 대한 약속이 대조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졌던 자손의 번성에 대한 약속(창 22:17;26:4;32:12)이 새삼 언급된 이유는, 비록 이스라엘 열 지파가 그들의 죄악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족장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폐기되지 않음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이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징벌과 심판, 회개와 용서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ꃨ 그곳에서 -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간 장소가 '메소포타미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팔레스틴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적당하다(Lange). 그들이 언약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된 장소는 바로 이스라엘 땅이다.
ꃨ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 이는 언약 관계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열 지파 가운데 소수의 백성들이 유다 민족과 한 무리가 되어 포로 생활로부터 귀환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롬 11:25,26)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완성된다(벧전 2:10, P.Butler).

성 경: [호1:11]

ꃨ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 르호보암 때 분열된 두 왕국이 한 나라로 다시 통일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예레미야(렘 50:4)와 에스겔(겔 37:16-23)에 의해서 예언된 것이기도 하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은 먼저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바벨론에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스 1:5;3:1,2). 그러나 이 예언은 온 이스라엘이 메시야의 구원으로 인해 시온에 모이게 될 때에 성취된다(롬 9:26;11:26). 이것은 나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롬 9:25;갈 3:28;엡 1:10;벧전 2:10).
ꃨ 한 두목을 세우고 - '로쉬 에하드'(*)는 '한 머리', 곧 단 하나의 방백이나 왕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더 이상 두 나라가 아닌 한 나라로서 연합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는 성경에서 종종 '다윗'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데(3:5;겔 34:23;37:24;암 9:11), 곧 메시야를 가리킨다. 즉 메시야로 인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로 연합됨을 상징한다(엡 2:11-22).


ꃨ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 일반적으로 '그 땅'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포로로 잡혀 있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그 땅'은 고대 이스라엘이 노예 생활을 했던 애굽으로 상징되고 있는 듯하다(2:15;8:13;9:3;11:5). 여기서 애굽은 이스라엘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이방 세계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올라옴'은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환이거나, 유랑 생활에서 다시 모여들게 된 이스라엘의 독립을 뜻한다(Keil).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땅'이 팔레스틴을 가리킨다면, '올라옴'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개선 행진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미 2:13). 그런데 혹자는 이것을 교회 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경배하러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J.Given). 여하튼 본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해방과 승리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ꃨ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 '이스르엘'은 4절에서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으로 사용되어 심판과 저주를 묘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르엘'의 또 다른 의미인 '하나님께서 심으신다', 또는 '뿌리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로부터 축복으로, 심판으로부터 언약의 성취에로 회복시킬 것을 의미한다(2:23;사 9:4-7;암 9:11). 따라서 '이스르엘의 날'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당했던 패배와 수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구원과 승리를 맛보는 날을 의미한다. 한편,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될 천년 왕국의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사 11:1-12;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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