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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호세아 6장-7장

by 은총가득 2021. 8. 2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실때에 그들이 수없이 배신하고 죄악의 길로 행할 때에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돌아보시고 때로는 거센 폭풍우와도 같은 징계를 통해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의 근본적인 목적은 죄에 대한 책망에 우선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우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매몰찬 책망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며, 감사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때에 섣불리 판단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는 징계가 남달리 거세다고 할지라도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는 그러한 이유가 자신의 죄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약성경보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더 충만하게 담겨져 있는 것인데 우리는 흔히 구약 성경보다 신약 성경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 충만하게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은 신약 성경보다 구약 성경속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끝없이 돌보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고, 신약 성경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구약 성경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흔히 원인을 간과하고 결과만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록 결과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한 과정과 원인을 통해서 주어졌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며, 심오한 진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값지게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오신 것이며, 그 계획하심이 구약 백성들의 끝없는 죄악 속에서도 변하지 아니하셨기에 구세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변하지 아니하시는 끝없으신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진정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들, 즉 예배와 찬송과 헌금과 믿음의 봉사와 헌신과 충성속에 열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기에 성경의 주제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사랑이라고 할수 있으며, 더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며, 더 축소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가운데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고전 13:13). 또한 로마에 보낸 서신 가운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 것입니다(롬 13:10).

 

이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는 똑같이 16장으로 되어져 있으며, 일관성 있게 13장에 가서 각각 사랑에 대해서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 율법에는 흠이 없을 정도로 완전하다고 할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주장했을텐데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만났기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획기적인 변화되었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이 중요한 사랑을 배제하고 율법을 지키기에만 열심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잘못된 것이라고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름은 흔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구약에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이후에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이 개명된 것과도 같이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개명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사울과 바울, 두가지의 이름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울은 유대인으로써의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인으로써의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안디옥 교회에서 사울과 바나바를 복음증거를 위해 파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의 이름이 바울과 사울 두가지의 이름이라는 증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22장 27절에서 천부장에 바울에게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라고 묻자 사도바울은 '그러하다' 고 대답합니다. 또한 28절에서 천부장이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하자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는 상황과 지역에 따라서 두가지의 이름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권 안에서 복음을 증거할때에는 바울이 아닌 사울의 이름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만약 바울이라는 로마의 이름을 사용하면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족들을 억압하는 로마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동질성을 주기 위해서 유대인의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는 것이며, 유대권을 벗어난 이방 땅과 로마에서는 사울이 아닌 바울의 이름을 사용할 것입니다. 만약에 사울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약소국가인 유대인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고린도전서 9장 19절로 23절에서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지만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22절에서 사도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이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시작인 창세때부터 이 세상의 끝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The Second Coming)때까지 결코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이 성경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서 사랑에 빚진 자로서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하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Out Christ) 있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어 그 사랑에 빚진 자로써 그 사랑을 증거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며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변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보다도 남을 비판하는 시각이 앞선다면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며, 그 지식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잠 16:18).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되었는데 호세아서는 슬픈 사랑을 기록하고 있으며, 반면에 솔로몬이 기록한 아가서는 대조적으로 기쁜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선지자이며, 예언자로서 북방 이스라엘 출신인 브에리의 아들입니다.

 

당시의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심히 풍요로왔지만 반면에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한 시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쾌락을 쫓아 행하였던 패역하고 부도덕한 시대였습니다. 그 때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올 것과 포로 생활을 예언하면서 회개하기를 강하게 촉구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더욱 더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올수가 없으며 구원에 이르러 천국에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늘 성도들에게 회개할것을 권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설교중에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결코 합당한 설교라고 할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을 갈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이고,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기까왔느니라' (마 3:17)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모습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호세아가 아내로 취한 여인은 디블라임의 딸인 고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음란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호세아가 고멜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 뿌리신다' 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경고하시기 위해서 흩으실 것을 말씀하시며, 반면에 회복하심과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뿌리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의미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담겨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도 하시면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책망하신 후에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의 과정을 잘 참고 견디면 회복의 은혜를 통해서 풍성한 사랑을 받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또 고멜을 통해서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로루마하로 지으라고 하시며, 그 이름의 의미처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루하마의 뜻은 '절대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이 없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들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자녀의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로루하마가 젖을 뗀 후에 고멜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셨는데 그 이름의 뜻은 '너희는 결코 나의 백성이 아니다' 입니다. 이 의미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 낳은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셨는데 첫째인 이스르엘의 이름을 통해서는 단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흩으시고 다시 뿌리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둘째인 로루하마의 이름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악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없음을 말씀하셨고, 셋째인 로암미의 이름을 통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점점 가중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급기야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서 멀어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 두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대신 버림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거나 떠나시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급기야 죄악으로 잃어버린 양인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 이제 2장 1절에서는 다시 이름을 통해서 회복시켜 주시며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로암미와 로루하마의 이름을 암미와 루하마로 고쳐 부르게 하십니다. 로암미는 '결코 아니다' 라는 뜻을 가진 '로'와 '나의 백성이다' 는 '암미'의 합성어로서 '결코 나의 백성이 아니다' 는 뜻인데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면 '암미' 로서 '나의 백성이다' 는 뜻입니다. 로루하마도 역시 '결코 아니다' 는 뜻을 가진 '로' 와 아버지의 사랑' 인 '루하마' 의 합성어로서 '결코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 는 뜻인데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면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부정어인 '로' 를 제거하시고 죄악으로 사무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죄인된 우리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로'를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들이 바알에게 드렸던 우상제물인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바알은 음행과 관련이 있는 우상입니다. 이 바알은 단순히 비를 내려 풍요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남 바알신과 여 바알신의 성 행위(Sex)를 통해서 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꼭 비가 필요할 때에 이 남녀 바알신이 성 행위를 하지 않게 되면 비가 오지 않게 되므로 땅에 있는 바알 산당에 남 사제와 여 사제가 들어가서 알몸이 되어 변태적인 성 행위를 하게 되면 이 성 행위를 하늘에 있는 남 바알신과 여 바알 신이 보게 되어 음욕을 품게 되고 성 행위를 하게 되어 비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알을 통해서 이방인과 결혼을 하게 되어 하나님이 철저하게 금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성이 말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우상들 보다도 이 바알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하게 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알에게 드렸던 건포도 떡을 먹을지라도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은 그 어떠한 인간의 죄악도 능가하시는 것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에게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호세아를 떠난 듯 합니다. 고멜은 호세아에게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이렇게 음행을 하기 위해 떠난 고멜은 하나님께서는 다시 데려오라고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시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아내가 음행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며,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고멜을 사오게 됩니다. 호세아가 아내인 고멜을 데려오기 위해서 지불한 것은 노예 한사람의 가치입니다. 즉 고멜은 남편인 호세아를 떠난 결과로 인해서 노예와도 같은 위치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호세아는 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사오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죄인들을 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속량이라고 하며, 그 뜻은 '값을 지불하다' 입니다. 제16대 미국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노예해방으로 알려진 자인데 그가 노예시장을 걷다가 어느 남매가 각각 다른 주인에게로 팔려가게 되어 그들이 평생동안 다시 볼 수 없음에 흘린 눈물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링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지불하고 그 남매를 사게 됩니다. 그러자 그 남매는 링컨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은 방금 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달리 감사의 눈물입니다. 이는 한 주인 밑에서 남매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눈물입니다. 이에 링컨은 그 남매의 눈물을 거두게 하고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링컨의 행위도 가슴 벅찬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일인데 예수 그리도의 사랑은 감히 비교조차도 할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죄의 속박 아래 갇혀 있었던 자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부정과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것이며,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죄에서 돌이킬 것을 권면할 책임이 있는 선지자와 제사장들마저로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징계와 심판을 선포하신 긍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멸망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와 심판의 강도가 아무리 거셀지라도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씀하시며, 제사장들의 불의한 재물만을 취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교훈하며 가르치는 것을 방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리게 하였음을 책망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백성들의 무지함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5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 즉 죽음 이후와 역사적인 종말 즉 재림 이후에는 더 이상의 기회기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죄악을 범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음탕한 고멜과도 같은 자들입니다. 고멜이 자식을 낳은들 하나님의 복에서는 멀어지고, 저주에 가까운 것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 가까이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고멜처럼 우리도 역시 세상의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얽매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스스로가 자신들에게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고 음행하지만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며 돌아오면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보배 피로써 씻어 주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인 6장 1절에서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돌아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웨나슈바' 인데 이는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헬라어로 죄를 가리켜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데 이는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있어야할 자리가 각양각색(各樣各色)으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같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며 영원히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새는 공중에서는 자유롭지만 공중을 떠나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물고기는 물속에서는 자유롭지만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처럼 인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자유로울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호세아의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외침 속에는 그 동안의 고통과 괴로움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확신에 찬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난을 통해서 얻게 된 믿음은 영적인 힘이 솟구치며 그 어떠한 것일지라도 결코 장애 요소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2절에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합니다.

 

이는 신속한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말하는 것으로서 죄악의 기간은 비록 길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신속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 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되 힘써서 알자고 하며 지난 날 여호와를 바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자초했던 자신들의 어리석고도 무지했던 죄악을 회개하며 여호와를 알기에 힘쓸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비와 같이 임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비를 언급한 것은 비가 자주 오지 않아서 늘 메말라 있는 그 땅의 현실에서 비가 내리는 것보다도 더 큰 은혜가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명성이 이방땅에 까지 알려지게 되자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먼 거리를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하여 솔로몬에게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했으나 솔로몬이 그 묻는 말에 다 대답하여 스바 여왕이 놀라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가 특출한 솔로몬이 전도서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합니다(12:13).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이며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사람들의 악한 심성을 도덕적으로 제어할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변화시킬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만이 인생을 참되게 변화시키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며, 1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며,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장 1절의 말씀처럼 지금의 이 시대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앞에 바로 서야 하며, 그분의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가운데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만 묵상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말라버릴 것이며, 기도만 하고 말씀을 묵상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폭팔해 버릴 것이며,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 우리의 믿음은 아름답게 성장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변천이 되어 예수가 된 것입니다. 그 변천 과정은 여호와가 여호수아가 되고, 여호수아가 예수아가 되고, 예수아가 예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를 버리고 겸손히 주의 말씀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귀를 세상의 소리에 기울이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이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것' 이라고 합니다.

 

이 말처럼 세상에 눈 감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회개하고 돌아온 것처럼 우리들도 고난과 역경과 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말하기를 '이세상의 고통은 천국을 소망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처럼 우리가 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속한 모든 허영과 욕심을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기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인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 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들도 그 사랑에 빚진 자로써 이 시대를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김영재 교수/합동신학대학원(역사신학)

 

 

 



참회의 결의와 약속 (호세아 6:1-3)

 
 
이것은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말이나 아니면 하나님께 자비를 얻을 희망에서 여호와를 구하며 그 앞에서 겸손하자고 서로 권면하고 고무한 백성들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고 말씀하셨다(5:15). 이제 선지자와 그에게 호의적인 선한 백성은 쇠가 달아 있는 동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드리려고 했다. 그들의 이웃은 확신과 깨달음을 얻은 듯이 보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나 선한 백성은 이를 십분 활용하려 했다.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 설 의향이 있는 자들은 남도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권면하여 분기시켜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그들이 권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1절). "우리는 더 이상 앗수르인에게 가지 말며 야렙왕에게 사람을 보내지 말자. 그런 것은 신물나도록 충분히 해 보았으니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 예배로 돌아가며 피조물에 대한 모든 신뢰에서 하나님께 대한 희망에로 돌아가자." 하나님께로부터 배반한 자들의 큰 관심사는 그에게 돌아가는 것임을 명심하자. 서로를 죄에 끌어들이면서 동의에 의해 대거 하나님을 이탈한 자들은 동의에 의해 대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상호 간의 훈육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Ⅱ. 그들은 서로를 분기시켜 이렇게 하기 위해 어떤 권유와 격려에 매달리는가?
1. 하나님의 노여우심에 대한 경험.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가자. 이는 그가 우리를 찢으셨고 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찢겼고 우리를 찢은 분은 여호와시다. 우리는 맞았고 우리를 치신 분은 그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돌아가자. 그가 노여움 가운데서 우리를 찢고 치신 것은 우리의 배반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돌아 갈 때까지는 그와의 화해를 기대할 수 없다. 그가 우리를 이처럼 괴롭히시는 것은 우리로 마음이 움직여 그에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치는 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의 손은 계속 펼쳐져 우리를 칠 것이다(사 9:12, 13). 우리와 우리 땅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특히 찢는 심판을 보면 우리는 각성하여 회개와 기도와 개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2.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들의 기대. "찢으신 분이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신 분이 싸매어 주실 것이다." 그는 능숙한 의사처럼 부러진 뼈나 피흐르는 상처를 따뜻한 손길로 싸매어 주실 것이다. 자기 백성을 괴롭히시는 하나님의 바로 그 섭리가 그들을 구원하시며 성도에게 확신을 주는 바로 그 성령이 그들을 위로하신다. 처음에 종의 영이던 것이 나중에는 양자의 영이 된다(롬 8:15).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우리가 아무리 심하게 찢겨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치유하실 수 있다)그의 자비(그는 치유하실 것이다)를 가리킨다. 아니 그는 치유하시기 위해 찢으셨다. 혹자는 이것이 특히 유대인의 바벨론 귀환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즉 유대인은 여호와를 찾았고 하나님이 자비의 길로 은혜로이 돌아 올 것을 전망하면서 여호와를 찾고 그와 연합하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과 계획을 줄곧 좋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고난 하에서도 버틸 힘을 얻으며 회개하는 가운데서도 격려를 받는다. 그들이 여기서 기대하는 하나님의 은총은 몇 가지 사례로 묘사되고 있다.



(1) 그들은 이 구원이 부활 같을 것이라고 기대한다(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즉 하루나 이틀같이 단 시일 내에) 우리를 살리시며 시체의 부패와 매장이 예상되는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우리는 편안히 그 얼굴을 보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부활과 같을 것이다. 그는 비록 잠시동안 버리실 지라도 영원한 자비로 모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찢기고 구타당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로 치부되며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며 오래도록 그렇게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곧 그들을 소생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이 소생에 대한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며 집착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 시간은 이틀과 삼 일로 한정되어 표현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삼일의 부활을 예표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부활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 성경 말씀에 응한 것이다. 모든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수반될 영광에 대해 증거하였다. 우리는 선지자의 말씀을 그렇게 지정하신 하나님의 지혜로움과 선하심을 주목하고 찬미하자. 하나님은 고난 당하던 구약 교회의 구원을 예언하시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도 가리키셨다. 다른 구원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표로 결실이었다.

그들은 비록 이 말씀 속에서 그런 비의를 깨닫지 못했더라도 그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오실 그이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곧 우리 신앙을 공고히 해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언이 "그가 우리를 일으키시며 우리가 살리라" 고 표현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온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처음 열매로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며 그를 통해 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의인(義認)을 위해 부활하셨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다고 했다(사 26:19 참조). 하나님이 교회를 낮은 상태에서 일으키시리라는 것은 교회의 위로와 확신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가 차면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시며 그 아들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생명과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고난받는 기독교인에게 큰 힘이 되며 회개하여 돌아오는 죄인에게는 풍부한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19)고 말씀하신 때문이다.



(2)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향상되리라고 기대한다(3절). "그 때에 우리가 여호와를 알기 위해 따른다면 알게 되리라" (흠정역:역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비로이 되돌아오시며 그들을 위해 은총을 계획하시는 때에는 은총의 담보와 열매로서 자신에게 대한 지식을 더욱 많이 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땅(세상)에 충만할 것이며(사 11:9) 지식이 더할 것이며(단 12:4)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 것이다(렘 31:34). 우리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며 여호와를 알려고 따를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생활로 이해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보다 큰 지식의 수단을 소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수단으로 말미암아 지식을 증진시킬 수 있는 은혜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한 백성에게 자비를 주시려고 계획하실 때에는 그를 알려고 하는 마음도 주신다는 데 주목하자(렘 24:7 참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들에게는 지혜의 영과 계시도 주어진다. 갈대아 주석가처럼 우리 생활을 죽은 자의 부활날에 하나님 앞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타당하다. 즉 우리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며 알려고 따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우리가 그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이 완전하게 되고 영원히 증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우리가 읽는 대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 귀중한 축복이 약속된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때에는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께 나올 때에는 그를 친숙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계획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영원한 생활이기 때문이다(요 17:3).


[2] 이 축복을 얻는 방법과 수단.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최선의 지식으로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 지식을 불러 구하고 찾아야 하며(잠 2:3, 4) 온갖 지혜로 구하고 힘써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지식을 묻고 힘써 증진시켜야 한다. 우리가 규정된 의무를 이행한다는 약속된 자비를 기대할 만한 이유를 갖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더욱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그 지식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신적 위로가 충만하게 된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다" (예비된다:흠정역).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자기 처소로 돌아 가셨을 때는 그의 은총도 거두어 들이셨다. 그런데 그의 나오심은 어둔 밤이 지난 뒤 새벽이 돌아오듯 확고히 준비되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오랜 밤 뒤 새벽을 기다리는 자들처럼 그의 은총을 고대하며 정해진 시간에 그 은총이 틀림없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의 얼굴의 빛은 새벽빛처럼 우리가 반기는 것인 동시에 우리에게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 그는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땅을 상쾌하게 하고 비옥하게 하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반가이 임할 것이다. 이것은 포로의 구원보다 멀리 조망하여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혜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구약 성도들은 힘써 그를 알려고 했으며 예루살렘의 구속을 간절히 고대하였다. 그리고 결국 신적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왔고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방문하러 나오셨다.


[1] 그것은 어두운 땅에 동터오는 새벽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의의 태양으로서 나오셨고 그에게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신 까닭이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했으니 이는 그가 때가 차서 임하신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행자였다. 아니, 그 자신이 밝은 새벽 별이셨다.


[2] 그것은 마른땅에 단비 같았다. 그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을 것이다(시 72:6). 그에게서 축복의 소나기가 이 세상에 내리며 그것은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까준다(사 55:10).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은총은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다고 한다(잠 16:15).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하나님의 은혜는 늦은 비와 이른 비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열매 맺는 선한 일은 이로써 시작되고 결실하기 때문이다.

 

 

 

 

약속과 권면 (호세아 6:4-11)

 

 

유다와 에브라임은 두 가지 악한 일로 책망과 규탄을 받는다.

Ⅰ. 그들은 확신에 확고하지 못했고 꾸준하지 못했다. 그들은 물결처럼 불안정했다(4, 5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것은 이상한 표현이다. 무한하신 지혜자가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당황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궁역진하여 난처한 데 빠져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지와 자신의 처사가 얼마나 공정한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인간의 방식대로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치시고 찢으셨다 하여 그를 가혹하고 혹독한 분이라고 불평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달리 행하실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하실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양한 방법을 써 보셨다(사 5: 참조). 그는 사태가 극단으로 흐르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그는 "에브라임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겠느냐?" (11:9 참고)고 스스로 추론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을 베풀으려고 하셨으나 그들은 그에 따른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내가 명예롭게 건질 수 없을 때 너를 내쫓을 수밖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까지는 죄인을 멸하지 않으신다는 데 주목하자.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행위는 어떠했는가? 그들의 인애는 아침구름 같았다. 혹자는 이것을 회개 시의 자기 영혼에 대한 인애라고 이해한다.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대한 인애와 자비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인애를 철회했고 취소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자기 영혼을 많이 손상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경건과 신앙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선한 것이 때때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아침 구름과 이슬처럼 곧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예후 당시 이스라엘이 나타난 선도 그랬고 히스기야와 요시야 당시의 유다의 선도 그랬다. 그 선은 곧 자취를 감췄다. 가뭄 때의 아침구름은 비를 약속하며 이슬은 땅을 상쾌하게 해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구름은 흩어져 버리며(위선자는 물 없는 구름에 비유된다, 유 12) 이슬이 땅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다시 공기 속으로 증발해 버려 땅은 계속 타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어떻게 하실것인가? 그는 그들의 인애를 열납하실 것인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인애가 쉬 사라져 버리는 까닭이다.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즉 계속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침 구름이나 계속되지 않는 인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도 못한다는 데 주의하자. 사람들이 잘 행할 듯하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며 경건한 신앙의 시작은 호조를 보이면서 지속하지 못할 때, 그들이 처음사랑과 처음행위를 버리거나 아니면 비록 신앙을 완전히 버리진 않지만 불안정하고 한결 같지 않고 변덕스러울 때는 그들의 인애가 아침구름과 이슬 같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가?(5절) "그들이 그토록 조악하고 기형적이었으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재목이나 돌을 떠내듯) 잘랐고(한글 개역: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라." 선지자들이 행한 것은 그들의 입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행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이 살해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신실한 행동으로 자기들을 죽이거나 자기들의 흉금을 찔렀다고 말해야 할 판이었다.

 

(1) 선지자들은 죄를 각성시키고 그들을 범죄에서 절단시킴으로써 그들을 쳤다. 그들의 신앙 생활은 고르지 못했으므로(4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르셨다. 죄인의 심령은 돌과 같다. 그것은 거친 돌과 같으므로 그것을 제대로 깎고 다듬으려면 굉장히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또는 그것은 마디가 많은 재목과 같다. 그 역시 평평하게 만들려 면 여간한 어려움이 뒤따르는 게 아니다. 목회자의 일은 사람들을 깎고 자르는 것이며 하나님은 목회자들을 통해 그들을 자르신다. 여호와께서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는 때문이다(삼하 22:27; 시 18:26). 목사들에게는 신랄하게 책망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이 있다. 장작 부스러기가 나뭇꾼의 얼굴에 튀어오르듯 책망보이는 자가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책망자에게 정면으로 대들으면서 그를 원수시하더라도 목사는 그의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

 

(2) 선지자들은 진노의 선언으로 그들을 죽였다. 에스겔은 성읍의 멸망을 예언했을 때 그 성읍을 멸한다고 표현되었듯이(겔 43:3) 선지자들은 그들이 살륙당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그들을 죽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언된 것을 이루셨다. "내가 내 입의 말씀대로 나의 심판에 의해 그들을 죽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죽이거나 아니면 죄인을 죽일 것이며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나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될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해독한다. "내가 선지자들을 자르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라. 즉 내가 백성의 유익을 위해 선지자들을 힘든 봉사에 고용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힘을 탈진시켰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업과 위험한 봉사에서 제물에 지쳤고 그들의 정신을 죄다 쏟아 버렸다. 이것은 그들 대다수에게 목숨을 요구하였다." 목사들은 하나님이 백성을 감화시키는 데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데 유의하자. 비록 그들의 수고가 도로에 그치는 경우가 많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도구의 마모를 염두에 두실 것이다.

 

(3) 하나님의 극히 엄한 처사도 의로우셨다. 선지자들은 굉장한 수고를 해가며 그들에게 죄를 충고하고 위험을 경고했지만 그런 수단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들이 다소 선한 감명을 받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어서 아침 구름처럼 곧 사라졌다. 따라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의 불행을 그들에게 내리시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가혹하다고 트집잡을 수가 없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향하여 "주의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아 명명백백히 공정하고 의로우시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목사들의 수고에 의해 죄인들이 교화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옳다함을 얻고 그가 판단하실 때는 분명하실 것이다(마 11:17-19 참조).

 

Ⅱ.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치 않았다(6, 7절).

1. 하나님이 그들과 세우신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어떤 조건하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며 하나님께 열납되기로 되어 있었는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즉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인애라고 한 원어는 "헤세드"로서 4절의 인애와 동일하다. 그것은 선함, 경건, 신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모든 실천적 신앙 행위에 사용되며 신약의 자비 자선과도 동일하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게 대한 지배적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 가운데서 자기를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수반되며 그 지식에서 유출되는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가 자기를 열심히 찾는 자의 보상자시라는 것을 믿는 견고한 신앙이다. 그것은 선한 판단의 인도를 받는 신적 일들에 대한 선한 애정이어서 선한 행실을 산출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며 제사나 번제가 아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 소상히 설명되고 있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내가 말한 그것은 극히 작은 일이며 가장 작은 강조가 주어진 것이었다) 오직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고 하였다(렘 7:22, 23; 미 6:6-8).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번제와 희생보다 낫다(막 12:33, 시 51:16, 17).

 

희생과 제사가 요구되거나 수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수반되지 않을 때에는 그 희생과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된 제사를 눈여겨보지 않고 멸시하셨다는 것이다(사 1:10, 11). 아마 이것은 그들이 버린 하나님과 그들이 좇아간 신들 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언급되었을 것이다. 참되신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것은 오직 그들이 선하게 되고 그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선한 생활을 하는 것 뿐이었다. 희생 제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식은 그의 율법중에서 극히 작은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거짓 신들은 오직 희생과 제사만 요구했다. 그들의 제사장과 제단만 진수성찬으로 배불리면 백성은 제멋대로 살아도 되었다. 경배자에게 새로운 품성을 주려고 노력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만 지어내려고 꾀하는 신들을 택한 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또 이것은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논쟁이 제사의 태만 때문이 아니라(내가 저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시 50:8) 그들 중에 공의와 자비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언급되고 있다(4:1). 이것은 경건한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시하시는 주된 것이며 경건한 능력이 없이는 경건한 모양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준다. 마음과 생활상의 진정한 경건은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아무리 그럴 듯 하고 비용을 많이 들이는 신앙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적 의무가 의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신다. 그는 세리나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도 옳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영혼에게 대한 자비에서 행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도 의롭게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육체에 대한 자비에서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식사와 안식의 의식도 이런 것에는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 9:13; 12:7).

 

2. 그들은 이 언약을 얼마나 경시했는가? 언약은 만사에 있어서 그토록 잘 규정되었고 이 언약으로 이득을 얻을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지만 그들은 그 언약을 그토록 무시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일반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불화했으며 불충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선한 것들을 지키도록 부탁받았다. 곧 제사와 번제의 장농 속에는 자비와 경건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뢰를 저버렸다. 그들은 장농은 지켰으나 보석은 야비한 육욕의 충족을 위해 저당 잡히고 말았다. 하나님이 그들과 다투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7절). "저희는 아담(원의:사람들)처럼 언약을 어겼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맺으신 언약이었다. 그들은 그 언약의 조건을 파기했고 따라서 그 혜택을 상실했다. 자비와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버리며 다른 불순종의 사례로써 그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범하게 되었다.

 

[1] 그들은 위맹죄와 언약을 어기는 죄를 범했다. 그들은 엄숙히 맹세한 언약을 범한 사람과 같았다. 이것은 온 세상이 수치를 돌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계약을 어기는 자들은 두 번 다시 존중이나 신용을 못받게 되고 상종못할 존재가 된다. "거기서, 바로 그 일로 그들은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비록 그들의 거짓을 행치 아니 하는 자녀(사 63:8)됨을 의지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신실치 못하며 야비하며 거짓된 자녀로 그 안에는 믿음이 없도다."

[2] 이런 점에서 그들은 그들답게 즉 일반적으로 거짓되고 변덕스러우며 본질상(부패한 본성 때문에) 패역을 행하는 인간들처럼 행동했을 따름이다.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이며(시 118:16) 다 치우쳐서 그들 역시 나머지 타락한 인종과 같다(시 14:2, 3). 그들은 사람들처럼(자연의 언약을 어긴 이방인들처럼), 비열한 사람들처럼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도의심이 없는 사람처럼 기만적으로 행동하였다.

 

[3] 이렇게 하여 그들은 우리의 처음 조상의 전철을 밟았다.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 (이렇게 읽는 것이 더 낫다). 아담이 순결의 언약을 범했듯 그들은 은혜의 언약을 어겼다. 그들은 모두 너무나 패역하고 어리석었다. 아담은 거기서 즉 낙원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그들은 다른 낙원인 가나안에서 자기들의 약속을 깨뜨렸다. 그들은 그 패역한 행동으로 아담처럼 그들 자신과 그들의 부속물을 망쳤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죄는 더욱 더 악하다(롬 5:14 참조).

 

[4] 이 모든 일의 근저에는 하나님과 그의 권위와 은총에 대한 과소 평가가 깔려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읽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저희는 인간의 언약처럼 그것을 어겼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 있는 인간의 계약이기라도 하듯, 그 언약의 명령이 마치 자기들과 같은 인간의 명령에 불과하며 그 언약이 가져오는 친절이 인간의 친절보다 귀중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 언약을 어겼다. 인간의 계약에도 신성한 구속력이 다소 있게 마련이다(갈 3:15). 하물며 하나님의 언약에랴! 그런데도 그들은 그 언약을 하찮게 여겼다. 그들은 그 언약에서 패역을 행하였고 지킬 듯 하면서 아무 것도 이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패역을 행하는 것을 여기서 그를 거스려 패역을 행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욕인 동시에 반대인 까닭이다. 탈주자는 반역자이며 그렇게 취급당할 것이다. 패역한 마음은 반역하는 마음이다.

 

(2) 패역의 구체적 사례가 몇 가지 제시된다. "저희는 거기서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거기라는 장소는 그 뒤에 곧 언급된다.

 

[1] 요단강 저쪽을 바라보자. 그 지방은 인근 열방의 모욕을 아주 많이 받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곳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려고 부심하였다. 그런데도 거기서는 극히 대담하게 하나님의 존엄을 도발하는 자들이 눈에 띌 것이다(8절). 갓과 므낫세 반지파의 지경 내에 있던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었다. 거기서 자행되던 일은 악이었다. 그 지방은 길르앗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그곳은 통째로 하나의 고을이라고 호칭되는 데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 도당으로 연합하여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는 여기서 의미하는 고을은 라못 길르앗일 것이다. 라못 길르앗은 요단 저편의 세 도피성 중 하나였고 레위인의 고을이었다. 그 거민은 비록 거룩한 지파에 속했지만 행악자였고 악을 안출했으며 악을 업으로 행했다. 레위인의 고을이 행악자의 고을이 되고 선한 교훈을 선포해야 할 자들이 악한 생활을 할 때는 참으로 악하다는 데 유의하자. 특히 그곳은 피 발자취로 편만했다. 마치 악한 레위인들이 특히 범한 죄가 바로 유혈의 죄이기라도 한 듯 하였다. 교황의 국가들에서는 성직자가 극히 많은 피를 흘린 박해자로 관찰된다. 아니면 그곳은 도피성이었으므로 살인자들도 많았고 따라서 그 살인자들을 재판해야 했음에도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피발자취가 편만하게 됐을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고의적 살인자라도 뇌물을 주면 보호하려고 했으며 어쩌다 우발적 살인을 한 자라도 가난하여 바칠게 없으면 피의 보수자에게 인도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곳은 피로 얼룩진 곳이 되었다. 피는 그 흐른 땅을 더럽히며 심문과 복수가 취해지지 않는 곳을 오염시킨다는 데 주목하자. 정의와 자비 간의 균형 유지를 기막히게 갖추고 있는 최선의 제도라도 남용될 소지가 있으며 명백한 편견으로 왜곡되어 정의와 자비를 다 어길 수 있다는 데 유의하자.

 

[2] 거룩한 일들의 봉사를 주무로 삼는 자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극히 악한 자나 흉악한 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9절). 바로 제사장의 무리가 그러했다. 제사장 계급에 추문을 남기는 자는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교단과 그 무리가 다 그랬다. 제사장들은 모두가 다 "동의에 의하여 한 어깨로" (원의는 그렇다) 한가지 길로 행하며 서로를 죄에서 더 악하고 대담하고 뻔뻔스럽고 잔인하고 간교하게 만든다. 제사장의 무리는 단독으로는 감히 행하지 못할 행동을 공모에 의해 행한다. 제사장의 무리는 강도 떼나 산적 떼와 같았다. 그들은 행객의 목을 찌르고 돈을 빼앗는 노상 강도 떼와 같았다. 첫째, 그들은 잔인하고 피에 굶주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악감을 품고 있거나 방해가 되는 자들을 살해한다. 살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는 그들의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둘째, 그들은 교활했다. 그들은 매복해서 사람을 기다렸다. 이것은 그들의 음흉하고 사악한 계획을 이루기에 알맞은 기회를 얻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제사장의 무리는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 "명절에는 말자" (마 26:5) 하면서 기다렸다.

셋째, 그들은 단 한 사람처럼 공동으로 협력했다. "저희가 길에서 살인하도다." 여행객들이 안전하게 지나다니던 대로상에서 그들은 일심으로 살인하며 살인을 서로 방조하고 교사한다. 악인은 만장일치로 악을 행한다는 데 주목하자. 그런데 선한 자들은 어찌해서 선을 행하는 데 일치를 보이지 못하는가? 그들은 세겜길에서 살인하였다. 세겜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그들이 살해하는 자는 예루살렘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자들이었다. 또는 혹자가 생각하듯 세겜 길은 그들의 조상 레위가 그 형제와 함께 기만과 사술로 세겜인들을 살해한 것과 동일한 방법을 의미한다(창 34장 참조).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죄로 유인함으로써 그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넷째, 그들은 이 일을 계략으로 행했다.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이 말은 가해할 의사로 심사숙고하여 행하는 악을 의미한다. 악의와 계획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죄는 더욱 악하다.

 

[3] 백성 전체와 이스라엘 온 집을 살펴 보라. 그들은 죄다 비슷하다(10절).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노라." 그 일이 제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발견해내시고 그들에게 밝히 드러내신다. 하나님 자신이 보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에브라임은 거기서 행음하였다. 그것은 육적 영적 행음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여 부인할 수가 없다. 죄인의 죄악 특히 이스라엘 집의 죄는 떨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가증하고 두렵고 위협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낯을 붉히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 일로써 더렵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존재가 되는 까닭이다.

 

[4] 유다를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들 역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임을 알게 될 것이다(11절). "유다여, 내가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너는 에브라임과 마찬가지로 셈을 치러야 한다. 너도 멸망이 무르익은 존재다. 네 멸망의 시간은 정해졌으며 급히 오고 있다. 너는 불의를 쟁기질하고 악을 씨뿌렸으므로 그와 꼭 같은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전체적 심판과 마찬가지로 각개 심판도 추수에 비유된다(마 13:39; 욜 3:13; 계 4:15).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로잡힌 유다 포로들이 회복될 때에, 내가 너와 계산할 때를 정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인은 오뎃 선지를 보내 명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 행했다(대하 28:8-15). 하나님은 "그들에게 추수할 일을 정하시고서" 그들을 살려 주셨다. 즉 그는 다른 때에 그 모든 것에 대해 함께 계산하시기로 계획하셨던 것이다. 현재적 심판의 유보는 그것을 선용하지 않는다면 보다 큰 심판을 위한 유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선지자들은 모세의 제사제도를 부인했는가?(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모세는 동물(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서 불사르는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라 했고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하였다(출 29:18). 그러나 8세기의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기록들은 거듭 희생제사 제도를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참고, 사 1:11-17; 암 5:21-24; 사 6:6-8; 호 6:6).  
  
다윗 왕도 하나님께 고백하기를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하였다(시 51:17).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고 하셨다(렘 6:20).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사를 원치 않으셨는가?  후대 선지자들은 희생 제사를 부인한 것인가?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들의 가나안 이웃들이 이해하듯 한데 있었다.  예배를 하나의 제사적인 의식적 행위로만 본 것이다.  그들이 제사로 신에게 헌신을 보이면 신은 그들의 간구에 은혜를 베풀어줌으로서 그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야외의 관계는 그런 종교와 같지 않았다.  저들의 예배에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충성심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정직의 세 가지 요소였다.1)  따라서 여기서 호세아는 희생 제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참 신앙이 없이 기계적이고 의식적인 제사행위를 부인한 것이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사실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같은 기간에도 희생 제사를 승인하신 사실이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은 수천의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부터 불로 응답하셨다(대하 7:1-4).  요시아 왕은 유월절 양을 먹음으로 모세의 법에 대한 그의 순종을 보여 주었다(참고, 왕하 23:21-23).  다른 선한 왕들도 하나님이 열납하신 번제를 드렸다(참고, 왕하 16:15; 대하 29:18).  구약의 마지막 포로 후에까지도 하나님이 받으신 제사들이 에스라(참고, 스 3,5; 8:15)와 느혜미야(참고, 느 10:33)때에 드려졌다.
  
더구나 후기 선지자들 자신들도 제사를 드렸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용기를 주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삼상 7:9) 엘리야는 하나님이 받으신 번제를 가멜산에서 드렸다(왕상 18:38).  요엘 선지자는 소제와 전제가 끊긴 것을 슬퍼하였으며(욜 1:9, 13) 스바냐는 예배자들이 돌아와 하나님께 제사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습 3:10).2)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  이 구절은 제사제도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제사를 명령하셨으나 그 제사의식은 마음의 적합한 자세로 드려 진 것이 아닌한 의미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3)  사실상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제사의식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제사 자체를 훼손시킨 것이 아니라 제사의식을 두 번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다.4)  실재가 없는 의식은 무가치한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도 제사보다 순종이 더 낫다는 말씀을 하였다(삼상 15:22).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종교가 무엇임을 배운다.  참 종교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시 136장)과 자비를(딛 3:5-7) 기억하며 하나님께 대한 왕적인 헌신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에 반응하는 삶으로 부름 받는 것이다.5)  진정한 예배는 예배 시간에 참석하는 것 이상이다.  주일 예배를 위해서는 한 주간 동안 교회 밖에서의 삶이 말씀에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진실된 것이어야 한다.  예배자는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를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지 않아야 한다.

   주
   1. Douglas Stuart, Hosea - Jonah(Waco: Word, 1987), p.110
   2.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p.298-299
   3. Leon J. Wood, Hosea, E. B. C. Vol.7(Grand Rapids: Zondervan, 1985), p.195
   4. Francis I. Anderson and David Noel Freedman, Hosea(Garden City: Doubleday, 1986), p.430
   5. James Limburg, Hosea - Micah(Atlanta: John Knox, 1988), p.30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세아 6장)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살 길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앗수르 나라에 망하고 장차 유다는 바벨론 나라에 망해서 오랜 기간 큰 고난의 포로 생활을 할지라도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엄위하신 공의의 심판자이시지만, 또한 긍휼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싸매어 주시고 낫게 해 주시는 자이시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3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회복케 하시는 일이 곧 있을 것을 보이는 말씀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것은 이틀 후에 혹은 제3일에 일어날 일이다. ‘이틀 후’ 혹은 ‘제3일’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공의로 징벌하시지만, 오래지 않아, 이틀 후나 제3일에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 예언은 상징적으로 혹은 예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놀랍게도 이루어졌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참혹한 고통과 저주와 수치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오래지 않아 제3일에 다시 살아나셨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확실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말코쉬 요레)[혹은 ‘늦은 비와 이른 비’](KJV)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리라’는 말은 5:15에 이어서 6:1-3을 이스라엘 백성의 말로 표현한 것이지만, 6:1-3을 선지자의 권면으로 보아서 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두움을 밝히는 새벽빛같이, 또 늦은 비와 이른 비같이 임하실 것이다. ‘이른 비’는 가을에 씨를 심기 전에 내리는 비이며, ‘늦은 비’는 봄에 추수하기 전에 곡식을 익게 하는 데에 필요한 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뜻을 알아야 하고 특히 그의 의와 긍휼을 알고 그를 믿고 교제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계명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는](KJV, NASB)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이슬 같음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을 향해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물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심정이 뒤섞인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의 심정으로 아끼신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의 인애함(케세드)[자비] 즉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은 아침 구름 같고 쉬 없어지는 이슬같이 너무 일시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이웃에 대한 자비로 나타나며 또 그렇게 나타나야 한다. 

 

[5-6절]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을 선언하셨고 그 심판은 그의 말씀하신 대로 밝히 시행될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애, 즉 형제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원하시며 단순히 제사를 원치 않으셨고 그들이 율법의 규정대로 날마다, 절기마다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을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종교 의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7-11절]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아담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패역했고 악을 행했고 사람들을 죽였고 남의 것을 강탈했고 행음하였고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무리도 그러했다. 세겜은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도피성이다(수 20:7).그러나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오도록 회복시키실 때 유다 백성에게도 그런 일을 작정하셨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벌하시지만, 제3일에 일으키실 것이다(2절).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15:4)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힘써 알아야 한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 우리는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 회개와 순종을 통해 또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구원자 되심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인애(仁愛)와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로 경건과 믿음이고, 둘째로 인애(仁愛) 즉 자비와 사랑이다. 우리는 모든 패역과 행악, 강도질과 사악, 살인과 간음 등의 악을 다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형제와 이웃에게 인애 즉 자비와 사랑과 선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주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스라엘에게 대한 기소장 (호세아 7:1-7)

 

혹자는 앞 장의 결어 부분을 취하여 본장의 서언으로 삼아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또는 돌이키려고 할 때 즉, 내가 막 그들에게 자비의 길로 돌아 오려고 할 때 심지어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나라와 일반 백성)의 죄와 사마리아(조정과 수도)의 악이 드러나도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이스라엘의 현상태에 대한 일반적 개념(1, 2절). 그들의 형편이 어떠한지 살펴보자.

1.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로이 선처하려고 계획하셨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병들고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병은 위중하고 악성 질병이어서 치명적일 가망이 있었다(사 1:6).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의사가 되겠다고 제의하셨고 치료를 떠맡겠다고 나섰다. 길르앗에는 자기 백성의 딸의 건강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향유가 있었다. 그들의 병세는 악했지만 절망적은 아니었다. 아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하셨을 때는 희망조차 있었다.

 

(1) 하나님은 그들을 개혁시키려 하시며 그들과 죄를 분리시키고자 하셨다. 그는 자기 율례와 선지자들로써 그들 중에 만연해 있던 부패를 깨끗이 숙청하시려고 하셨다.

 

(2) 하나님은 그들을 환난에서 구출해 내려고 하셨고 그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셨다. 몇 가지 치료가 시도되었고 때로는 그들의 병세가 호전되는 듯한 기미도 보였다. 그들의 악화된 병이 회복될 듯한 희망마저 엿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어리석음은 다시 그들을 물고 늘어졌다. 죄 많고 불행한 영혼이 치료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자기 죄와 불행 가운데서 멸망당한다고 해도 그들이 하나님을 탓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치료하려고 하셨고 또 그럴 능력도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파멸을 자기 수중에 떠맡으시겠다고 제의하셨다. 하나님이 병든 교회와 국가를 치료하고자 하시는 적극성을 나타내시는 특별한 경우가 더러 있으며 그때 그것은 희망찬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위기를 주의 깊게 감시하여 활용한다면 사정이 아무리 악화됐더라도 생명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2. 그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방해하며 자기 문에 빗장을 걸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치료하려 하실 때에, 즉 그들이 개혁과 평강의 가능성을 보일 때에 그들의 죄와 악이 드러났다. 그들의 죄와 악은 하나님의 은총의 흐름을 막았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취소시켰다.

 

(1)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병세와 검진과 조사가 실시되었을 때에, 숨겨지고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던 악이 드러나고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악이 하나님께로부터 감춰졌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실 따름이다. 하나님은 외과의로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검진을 하시다가 그 상처가 치명적이어서 불치의 상처라는 것을 발견하시자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대해 친절하신 의도를 품고 그 병세를 살피러 내려오셨다가(창 18:21 의 표현처럼) 그들의 악이 너무나 흉악하며 그들이 죄악 중에서 너무나 완악하고 뻔뻔스럽고 뉘우치는 기색이 없어서 자기가 의도하셨던 은총을 그들에게 떳떳이 베푸실 수 없었다. 죄인들은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고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모으셨을 테지만 그들은 원치 않았다.

 

(2) 그들을 개혁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을 때에 그때까지 억제되고 있던 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자기들을 치료하시려는 하나님의 조치를 기화로 그를 더욱 격동시켰다. 그들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이 베풀어졌을 때 악은 더욱 성급해지고 더 난폭해지며 더욱 높이 팽창하였다. 그들은 형편이 잘 풀리기 시작하자 더욱 교만해지고 방종하며 안심하게 되어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좋은 일들이 우리를 향해 나아오고 있을 때 그 진로를 바꾸게 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베풀려고 하실 때 우리 스스로 나쁜 짓을 저질러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우행이요 파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앙화를 입힌 것은 무엇이었는가?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은 궤사를 행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다(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그들은 서로 사기를 쳤다(다른 이들은 그렇게 읽는다). 또는 그들은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존경의 고백에서 그에게 위장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치료받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치료받기 위해서 그의 지배를 기꺼이 받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 입으로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며 그 혀로 아첨을 한다.

 

3. 실제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의 통치에 대한 불신이 그 모든 악의 근저에 깔려 있었다(2절).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며 심중에 이르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하나님이 전지하신 분인데도 마치 그것을 보지 못하시는 듯이 행동하며 그의 이름이 질투의 신인데도 그 일을 주목하지 않으시기라도 하시는 듯 행동한다. 하나님은 결코 망각이란 것을 모르는 영원한 마음이시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치 그가 그것을 잊기라도 하신 듯이 행동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심판자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그가 그 일을 계산하지 않으시기라도 하는 듯이 행동한다. 이것은 바로 죄인의 무신론이다. 하나님은 사물을 판단하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사물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판단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하나님을 무지하거나 잊어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며 그들 자신에게 대한 저주스런 기만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시 94:7).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은 그런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아니, 누가 그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그 점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행위에 대해 생각해야 마땅할 때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대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들이 그 기만을 깨우칠 때가 올 것이다.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쌌다. 즉 그들은 마침내 악의 절정에 도달하여 그들의 죄가 그들의 사면팔방에 나타난다. 그들의 모든 이웃은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알게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한 형벌이 그들을 포위한다. 그들은 환난에 둘러싸여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탈출하지 하신다. 따라서 그들로 곤혹을 당케 하는 죄가 내 목전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 내가 그 여러 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여러 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유하심으로써 자기 등 뒤로 던져버리시기까지는 우리 죄가 여전히 그의 목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이 그들의 여러 악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조만간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깨닫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한 예표가 되는 심판으로써 그들과의 다툼을 시작하셨다. "도둑이 안으로 들어오며 밖에서는 강도떼가 노략질한다" (흠정역). 혹자는 그들이 서로 도둑질하고 노략질했다는 것을 그들의 악한 사례로 이해한다. Nec hospes ab hospite tutus 즉-주인과 손님이 서로 두려워하며 서 있다.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 중에는 비적들이 암약했고 그 도둑들은 그들의 집과 상점을 털며 호주머니를 훔쳤다. 강도 떼 즉 외국의 침입자들은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며 밖으로 노략질했다. 이스라엘의 치료는 요원했다. 도둑과 약탈자들은 날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사처를 남겼고 이 모든 것은 죄의 결과였으며 하나님께 강도 행위를 한 데 대한 벌이었다(사 42:24; 말 3:8; 11).

 

Ⅱ. 조정 즉 왕과 방백 그리고 그들 주위 사람들의 죄가 특별히 기술되고 있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이 나오고 있다.

 

1. 왕들과 방백들은 백성의 악과 모독을 기뻐했고 이로써 그들은 대담하게도 더욱 악한 일을 행했다(3절). 그들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악한 법과 악한 선례를 따르는 것을 보고 즐거움을 느꼈다. 백성들은 그들의 우상 숭배와 불경건과 부도덕의 다른 본보기를 따랐다. 백성은 악한 길을 걷고 있는 그들에게 아첨과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헤롯은 그의 악이 백성들을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을 알자 그 악행을 계속했다(행 12:3). 하물며 백성이랴! 특히 그들은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했다. 그들은 방백의 총애자들에게는 거짓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방백이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거짓 비난과 혹평을 마구 퍼부어 대었다. 중상 모략과 악의에 찬 이야기에 기쁨을 표시하는 자들 주변에는 그런 이야기꾼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며 거짓말로 그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잠 29:12 참조).

 

2. 조정에는 폭음과 주연이 아주 풍성하다(5절). 그들에게는 왕의 날 즉 왕의 탄생일이나 등극일이 즐거운 날이었다. 그들은 아마 그런 날을 기념일로 지켰을 것이다. 또는 그 날은 왕이 정한 공휴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왕의 날이라고 부른다. 방백들은 그날 회집하여 왕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올리며 왕을 그들 중에 모셔다가 즐겁게 하며 술병으로 병나게 만들었다. 왕은 보통 과음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큰 축제일이 되면 왕은 방백들의 교만한 농간과 좋은 술의 유혹과 무리들의 흥청거림에 넘어가서 과음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이 강조하는 건강의 축배로 과음하게 되었다. 왕은 과음에는 좀체로 익숙지 못했으므로 병이 나게 되었다(흠정역: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병으로 그를 병나게 하며). 그것은 범죄 곧 crimen loeesoe majestatis-즉 대역죄로 규탄되어 마땅했다.

 

그들은 왕에게 강요하여 병나게 한 때문이다. 그날이 그들의 왕의 날이라는 것도 변명이 되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켰다. 그들은 왕을 존귀케 한다고 하면서 그를 극도로 명예롭지 못하게 한 때문이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 그에게 큰 모욕이 되고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라면 하물며 관을 머리에 쓴 왕에게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랴! 이웃을 취하게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합 2:15) 지위가 높은 자면 자일수록 취한다는 것이 더 큰 수치가 된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지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다(잠 31:4, 5). 술취하는 죄가 인간에게, 특히 왕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관찰하자

 

(1) 건강상. 그것은 그를 병나게 했다. 숙취는 자연스런 생리를 어긋나게 강요하는 압력이다. 술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홀린다. 취하지 않을 땐 아주 멀쩡한 사람도 취하면 전혀 딴 사람이 된다. 술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그들의 영적 복락과 영원한 행복에 손상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현재적 몸에도 혼란과 질병을 가져다준다.

 

(2) 명예상. "왕은 이처럼 대취하면 오만한 자로 더불어 악수하는 도다." 일국의 통치를 맡은 그가 술이 취하게 되면 자신의 통치도 주체하지 못할 뿐더러 다음 두 가지도 잊게 된다.

 

[1] 왕으로서의 품위. 그는 함께 앉으면 추문을 일으킬 광대와 익살꾼과 친숙하게 됐다.

 

[2] 왕의 도리. 그는 무신론자나 종교를 모독하는 오만한 자들과 연합했다. 그는 왕으로서 마땅히 그런 자들을 침묵시키며 면박을 주어 수치스럽게 해야 했다. 그는 오만한 자 즉 불경건의 극치에 도달한 자들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오만한 자들과 밀착하여 그들처럼 말하고 행하며 자기 권세를 행사한다. 그는 그들과 협력하여 자기 통치의 손을 내민다. 선함과 선한 자는 왕왕 주정뱅이의 노래가 된다(시 69:12; 35:16). 왕이 어려 자기를 술취하는 자로 더불어 악수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전 10:16 참조).

 

3. 조신들 사이에는 음란과 불결이 팽배해 있었다. 이것은 4, 6, 7절에서 언급되며 술취함에 대한 책망은 그 중간에 나온다. 술은 욕망의 불을 일으키는 기름이다(잠 23:33). 간음하는 자는 육체의 정욕으로 불 붙은 자이며 여기서는 몇 번이고 빵 굽는 자가 달궈 놓은 화덕에 비유되고 있다(4절). 그들은 그 마음을 화덕같이 예비한다(6절). 그들은 다 화덕같이 뜨거워져 있다(7절).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음란한 마음은 가열된 화덕과 흡사하다. 음란한 욕망과 애욕은 화덕을 덥히는 연료와 같다. 음란은 안에서 일어나는 불이며 그 자체 내에 열을 보유한다. 그래서 간음자와 밀통자는 로마서(롬 1:27)의 표현처럼 음욕이 불일 듯한다. 화덕의 열은 강하다. 특히 본문의 표현은 그렇다. 화덕을 달구는 자는 불을 일으켜서 쉬지 않고 계속 가열시킨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발효시킨 뒤 화덕에 넣기 직전까지 가열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표현은 죄다 음란이 최고로 달궈진 때의 화덕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그것은 빵 만드는 자에게 너무도 뜨거운 화덕과 같다(박식한 포코크 박사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 화덕은 너무도 뜨거워서 불을 일으키는 자는 빵 반죽이 발효되는 동안에는 열을 좀 식히기 위해 가열작업을 중지한다. 음란한 마음의 욕망은 이와 같이 뜨겁다.

 

(2) 음란한 자는 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회를 기다린다. 그들은 마음을 화덕처럼 준비하고는 먹이를 잡기 위해 엎드려 기다린다.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란다(욥 24:15). 그들은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에 일어나는 것 같다. 빵 만드는 자가 화덕에 불을 피우고 충분한 연료를 넣은 뒤 침상으로 가서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화덕이 아주 뜨거워져서 빵을 만들기에 안성마춤으로 되어 있다. 그와 같이 이들 악한 백성들은, 모종의 악한 계교를 꾸미고 탐욕과 야심과 원한이나 음란에 찬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럴 때는 그 악을 행하는 데 완전히 심취되어 비록 일시적으로는 그 욕망을 억누를지라도 부패한 애욕의 정염은 안에서 여전히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마치 구멍만 있으면 불길이 새어나오듯 기회가 오면 그들의 악한 의도는 즉시 돌출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 화덕같이 뜨겁다. 마음속의 욕정은 화덕 안의 불길과 같아서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이처럼 악한 애욕으로 자기 자신을 뜨거운 화덕같이 만드는 자들은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불을 끄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달궈진 화덕같이 되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극렬한 풀무 같은 날이 이를 것이다(말 4:1).

 

4. 그들은 개선과 교정에 알맞은 방법을 거역한다. 그들은 그 재판장들을 삼킨다. 그들 중에는 선량한 재판관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재판관들은 그들이 가열시켜 놓은 불을 끄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재판관들에게 제동을 걸고 충돌하며 정의를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며 자칫하면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다. 아마 그들은 선한 재판장들을 돌로 쳤으리라. 또는 혹자가 생각하듯 그들은 하나님을 격동시킴으로써 사법의 축복을 박탈당하며 모든 것을 혼란의 도가니 속에 몰아 넣었을 것이다. 그들의 왕들은 모두가 차례로 엎드러지고 왕들의 가문도 그들과 함께 넘어졌다. 왕국은 혼란의 와중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사분 오열 상태로 나뉘며 대량의 유혈 사태가 발생될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에는 불만과 원한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분노와 악의로 화덕같이 뜨거워져 있었다. 그러므로 재판장을 삼키고 왕들을 엎드러지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진다(잠 28:2). 그러나 이 모든 환란과 무질서의 와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다. 이런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이 자기들을 치려고 펼쳐진 것을 보고 치지 않으시기를 기원하며 분발해서 하나님을 붙잡는 자가 하나도 없다(사 64:7). 환난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 자는 죄로 가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 중에서 강퍅해진 것이다.

 

 

에브라임의 홀린 죄 (호세아 7:8-16)
 
우리는 이스라엘 조정의 부패상과 사악한 형편을 관찰했으므로 이제는 나라 전체의 모습을 알아보게 되지만 그 역시 별반 나을게 없다. 정수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병의 침범을 받아 성한 데가 하나도 없다.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사마리아의 악뿐만 아니라 에브라임의 죄도 드러났고 방백의 악뿐만 아니라 백성의 죄도 발각되었는 데 여기에는 다양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Ⅰ.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완전하고 특유한 백성이 되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하였다(8절).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별하셨듯이 그들 스스로 이방인과 구별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열방에 혼잡되고 그들과 연합하며 그들에게 동화되어 자기의 특성을 상실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홀로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웠다(시 106:35). 그들은 열방사이를 오르내리며 다른 이방을 대적하기 위해 한 이방의 도움을 청했다(그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하나님만 고수했더라면 어느 이방민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2.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한 쪽은 타고 다른 한 쪽은 밀가루 반죽 그대로여서 그 어느 쪽도 사용할 수 없는 케이크와 같다. 아합 시대처럼 지금도 그들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서성거린다. 때로는 하나님을 항해 열성을 내다가도 다른 때에는 바알을 향해 뜨거워진다. 얼마간 독실한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자기 모순과 불일치로 일관하며 언제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왕래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슬프다.

 

Ⅱ. 그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면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심판은 그들의 파멸을 위협하고 있었다(9절). 다음을 관찰하자.


1.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좀과 썩게 하는 것 같으셨다. 그들은 일면 외국인의 침식으로 소리없이 그리고 서서히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우고 부식되었다. 이방인들은 그의 재력과 재물을 탕진시키며 그의 수효를 감소시키고 땅의 소산물을 소모시켰다. 공공연한 전쟁으로 그들을 삼키는 자도 있었다(왕하 13:7). 평화와 수호 조약을 핑계로 막대한 재물을 착취하며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일에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더욱 많은 대가를 바쳐야 했다(왕하 16:9). 이런 일은 에브라임이 이방과 혼합되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과 뒤섞이도록 허용함으로써 얻은 결과였다. 그들은 에브라임이 의지하고 믿던 것을 삼켰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는(시 52:7) 자들은 이방인에게 곧 삼킬 것으로 자기 힘을 삼는 자이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비정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진다.

 

백발이 얼룩얼룩하게 된다. 즉 한 나라의 쇠미의 슬픈 징조가 여기 저기 나타난다.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듯(히 8:13) 그 나라에는 환난과 우환이 그치질 않는다. cura facit canos-즉 근심은 머리를 잿빛으로 변화시킨다. 살구나무가 아직 꽃이 피지도 않아서 색이 바래지는 것처럼, 이것은 악한 날이 오고 있으며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 준다(전 12; 1, 5 참조).


2. 그들은 이런 경고를 무시했다. "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를 치기 위해 펼쳐진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손이 들려 있지만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사 26:11). 그는 자기 파멸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방지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보다 작은 심판 아래서도 우매하다는 것은 보다 큰 심판의 도래의 전조라는 데 주목하자.

 

Ⅲ. 그들은 패역하게도 자기들의 악한 길로 계속 행하였고 책망을 받았음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10절). 전과 다름없이(5:5)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된다. 겸손케 하는 섭리 아래서도 그들의 마음은 겸손케 되지 않으며 그들의 욕망은 억제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려 들지 않는 것은 얼굴의 교만 때문이다(시 10:4). 그들은 회개와 개혁으로써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지 않으며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믿음과 기도로써 그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한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갈 때까지는 결코 무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헛되이도 다른 자에게 구원을 구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Ⅳ. 그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자기 꾀에 도취하여 매우 그릇된 방법을 취했다(11, 12절).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원의:마음)가 없다. 비둘기처럼 무해하며 원한을 품지 않고 남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비둘기처럼 어리석고 지혜가 없으며(무심하며) 자기를 방어할 줄도 모르고 자기 안전을 도모할 줄도 모른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1. 이 비둘기의 어리석음은 다음과 같다.


(1) 이 비둘기는 제새끼를 빼앗기고도 슬퍼하지 않고 다시 그 자리에 둥우리를 지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에브라임은 원수에게 자기 백성을 포로로 빼앗기고도 느낀 바가 없이 자기들을 야만스럽게 학대하는 자들과 계속해서 상종한다.
(2) 이 비둘기는 미끼에 쉽사리 유혹받아 그물에 걸리며 다른 조류들처럼 자기 위험을 식별할 마음도 지혜도 갖고 있지 않다(잠 1:17).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잠 7:23) 그들은 자기들을 파멸시킬 인접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다.


(3) 이 비둘기는 놀램을 당할 때 비둘기 집에 머물고 있을 용기를 갖지 못하고 날개짓을 하며 이리저리 배회한다. 자기 주인의 세심한 보호 아래서 안전을 기할 수 있는 비둘기 집을 떠나 한 곳에서 피하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도피처를 삼지만 결국 자신을 더욱 더 많이 노출시키게 된다. 이 백성 역시 그러했다. 고난을 당하자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며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 같이 하나님께로 날아오지 않았다(사 60:8). 하나님은 공격하는 온갖 맹금류로부터 그들을 안전히 지켜 주실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뛰쳐나와 애굽을 향하여 도와 달라고 부르짖으며 헛된 원조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앗수르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와 기도로써 하나님에게서 보다 가까운 보금자리를 발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천국에 두고서 피난과 구원을 피조물에게 의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지각없는 짓이다. 피난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지각이 없고 지혜가 없는 백성이다.

 

2. 이 어리석은 비둘기는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12절). "저희가 애굽과 앗수르로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들 위에 치리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거하여 살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추격을 각오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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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올무에 걸린다. "내가 그물을 그 위에 치며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리라. 이는 저희로 자기 어리석음을 보며 돌아 것일 생각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은 흔히 피난처를 기대하던 곳에서 올무를 발견하게 된다는 데 주목하자.


(2) 그들은 낮춤을 당한다. 그들은 외국 동맹군을 자랑하고 신뢰하면서 높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떨어뜨리겠다. 공중의 새처럼 아무리 높이 날더라도 나는 맞아 떨어지게 하겠다." 하나님은 스스로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는 자들을 떨어뜨리실 수 있으며 떨어뜨리실 것이다(옵 3, 4).


(3) 그들은 어리석음 때문에 혼찌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내가 저희를 징계하리라." 우리가 피조물을 신뢰하다가 맛보는 실망은 꼭 필요한 훈련이거나 징계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로써 우리는 다음 번에는 더 지혜로와질 수 있다.

 

(4) 이 모든 일로서도 성서는 그대로 성취된다. 그것은 그들의 공회가 들은 대로이다. 인간의 도움이 헛되며 인간에게 도움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도 여러 번 들었으며 그들의 종교적 집회에서 봉독과 설교와 노래로써도 부지기수로 들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도 하나님이 그들의 악함에 대해 어떤 심판을 내리시리라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이제 들었던 대로 보게 될 것이며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공회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에 주목하고 그 말씀의 규제를 받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공개적이고도 명백한 경고를 받았다는 것은 죄인이 정죄 시에 하나님을 의롭게 인정시킬 것이며 그들의 죄를 가중시킬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회중이 여러 번 들었던 것이지만 그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아, 네가 그 일이 어떻게 될지를 경고받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제 너는 그것이 헛된 말이 아님을 보는도다" (슥 1:6 참조).

 

Ⅴ.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했고 그가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시기 위해 취하신 여러 가지 방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다(13-15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자애롭게 대하셨던가! 그는 자기 백성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군주와 같으셔서 그들의 번영을 여간 괘념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을 구속하셨다(13절). 처음에는 그들을 애굽 땅에서의 구출하셨고 그 뒤로는 그들을 많은 고통에서 건지셨다. 그는 그들의 팔을 연습시켜(동여매어, 흠정역) 강건케 하셨다(15절). 골절되거나 탈골된 팔처럼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외과의가 부러진 뼈를 접합시키듯 그들을 다시 조정하셔서 동여매시고 강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수리아에게 승리하게 하셨고(왕하 13:16, 17) 그들의 해변을 수복시켜 주셨으며(왕하 14:25, 26) 전쟁케 하시려고 능력으로 그들에게 띠를 띄우셨다(시 18:39). "비록 내가 그들을 징계했을지라도(그렇게 읽는 자도 있다), 내가 어떤 때에는 그들의 잘못을 징계함으로써 그들을 가르치며 다른 때에는 그들의 팔을 강건케 하여 그들을 구원할지라도, 내가 그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좋은 수단과 나쁜 수단을 다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비도 심판도 통하지 않았다.

 

2.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행위는 여간 뻔뻔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이렇게 묘사되고 있는 것은 악행을 계속한 모든 사람들의 각성과 겸손을 위해서이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극악한지와 하나님이 어떻게 해석하시며 분개하시는 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1) 그는 그들에게 구혼하시며 스스로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으나 그들은 언제나 신실한 친구로 나타나셨던 그가 마치 원수이기라도 한 듯,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를 떠나듯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유리하였다.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은 피조물에게서 안식을 얻지 못하며 정착지도 찾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할 뿐이다. 그들이 하나님 예배를 타기하고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 도망치며 그에게 대한 충성에서 물러났을 때가 곧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친 때다.

 

(2) 그는 그들에게 자기 율법을 주셨다. 그의 율법은 전부가 다 공정하고 거룩하고 선했다. 그는 그 율법으로써 그들을 올바른 길에 두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들은 높은 손과 곧은 목으로 범죄했고 고의적으로 그리고 터무니없이 죄를 지었다(글 뜻은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의 울타리를 돌파했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었다.

 

(3) 그는 자기의 진실을 그들에게 알리셨고 온갖 가능한 증거를 다 들어 그들에게 대한 자신의 진지한 호의를 입증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를 거스려 거짓을 말했다. 그들은 거짓 신들을 세워 하나님과 경쟁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를 부인했고 그를 인정치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를 거짓으로 말했다(렘 5:12). 그들은 선지자를 통해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배척하며 비록 죄 중에서 계속 행할지라도 자기들은 평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직접적인 반향이었다. 그들은 위선적인 신앙 고백과 신앙의 과시와 개선의 약속으로 여호와께 거짓을 말했고 하나님은 이것을 자기에게 대한 거짓말로 간주하셨다.

 

(4) 그는 그들의 의로우신 주요 왕이셨다. 그는 항상 공평으로 야곱을 다스리셨고 공공의 이익을 위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다(14절).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들고 그에게 대항하며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다른 신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5) 그는 그들을 위해 복리를 계획하셨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악을 꾀했다(15절). 죄는 해로운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해이며 그의 주권과 존엄에 대한 반역이다. 이 말은 죄인이 자기창조주께 가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힘껏 가해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깜짝 놀라거나 부주의로 죄를 짓지 않고 계획적으로 죄를 안출해 내는 것은 여간 악한 게 아니다. 포코크 박사가 인용하듯 유대인에게는 "범죄의 생각이 범죄보다 더 악하다" 는 격언이 있다. 앙화를 계획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앙화를 입히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영국법에서는 국왕 시해의 음모와 왕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대역죄에 해당한다. 악한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그것이 비록 헛된 일로 판명되더라도 그 생각에 대한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이에 대한 벌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화 있을진저! 저희가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13절).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은 화가 따라온다는 것과 그들이 흉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늘로부터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그들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잇달아서 "패망할진저" 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의 화는 실질적 효과를 갖는다는 데 주목하자. 패망은 그들을 선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손의 심판은 그의 입의 심판을 확증시킨다. 하나님이 저주하고 화 있겠다고 선언한 자들은 저주받으며 참으로 화를 입는다.

 

Ⅵ. 그들은 헌신적 신앙을 가장했지만 그 신앙은 진실하지 못했다(14절).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치려 펼쳐졌을 때 그들은 다소 하나님께 구하긴 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시자 그들은 그를 찾았다.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나이다(사 26:16). 그러나 그것은 전부가 위선이었다.

 

(1) 그들은 개인적 환난 중에서 은밀히 하나님을 부를 때에도 성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을 때에도 성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침상에서 고통으로 징계받고 많은 뼈가 강렬한 고통에 시달릴 때 (아마 그들은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울부짖으며 신음하며 기도 형식으로 호소했다. 아마 그들은 선한 말을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항에 걸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여호와여, 우리를 살피소서"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심(원의:마음)으로 부르짖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기에게 대한 부르짖음으로 간주하지 않으신다. 모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그의 마음이 믿음과 열성의 기도를 했을 뿐인데도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을 들었다(출 14:15).

 

그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많은 말을 했지만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옳지 못했고 그의 뜻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그의 존귀를 위해 몰두하지 않았고 그에게 대한 봉사에 전념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영혼을 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정수다. 이런 본질을 갖추지 못한 기도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골라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욥 6:26). 그러나 그런 본질을 갖춘 기도라면 비록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고 하더라도 열납받을 수 있는 기도가 된다.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 전혀 기도하지 않는 자라는 점을 주목하자.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기도를 시인하사 기뻐 받으시기는커녕 그것을 슬피 부르짖는 것이라고 부르신다.

 

흑자는 그것이 그들의 시끄러운 기도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은 바알에게 하던 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는 그것은 그들의 기도 속에서 새로 나온 야수 같은 격렬한 감정의 표출이었다. 그들은 돌을 향해 으르렁대며 채찍을 보고 울부짖으면서 그 손을 주목하진 않았다. 또는 이것은 그들의 위선적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긴 고사하고 도리어 그를 노엽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들의 기도에 노하셨다. 궁전(흠정역, 성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다(암 8:3).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는 고사하고 그들의 재난을 비웃으실 것이다. 또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은 그들이 그의 권세를 비웃었던 까닭이다.

 

(2) 공공의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을 은총을 탄원하려고 회집했을 때도 그들은 위선적이었다. 그들은 유행을 좇아 스스로 모였다. 전체적 애곡의 때에 거룩한 회를 소집하는 것은 항용있는 일이었다(습 2:1). 그러나 그들이 모인 것은 곡식과 포도주를 위한 기도회에 지나지 않았다. 이 두 가지는 그들이 원하고 강우 부족으로 감수될 까봐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그들이 목하 당하고 있던 심판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은혜를 위해 간구하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회개를 주시며 그들의 죄를 사유해 주시고 진노를 돌이키시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그들의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아 가지 말도록 하기 위해 모여 기도했을 따름이다. 세상적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현세적 자비에만 탐욕을 부리며 오직 현세적 심판만 두려워하여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세 이상의 다른 것은 감지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2. 그들은 개혁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도 진실한 게 아니었다(16절).
(1)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죄가 나온다. "저희가 돌아온다." 그들은 마치 돌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가장한다. 그들은 회개하는 체하며 자기 행위를 교정한다고 떠들어 대면서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여긴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네가 돌아 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 렘 4:1) 그들은 충성에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나를 향해 돌이킬 뿐만 아니라 내게로 돌아 오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들의 이런 가식은 그들을 속이는 활처럼 만든다. 속이는 활은 쏘기에 알맞은 듯이 보이며 굽거나 당기는 데에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그 활에 힘이 실리면 활도 시위도 끊어지고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긴 커녕 궁수의 발앞에 떨어지고 만다. 회개와 개혁을 향한 그들의 시도도 그와 같았다.

 

(2) 이스라엘 방백의 죄가 나온다. 그들이 책망 받는 것은 그 혀의 거친 말(그 혀의 분노, 흠정역)이다. 방백들은 일이 잘 안 될 때면 하나님과 그 섭리와 자기들 주위의 모든 자들을 헐뜯고 언쟁하였다. 그들은 자기들 문제대로 무슨 말을 해도 좋으며 노발대발하며 호령하며 저주하며 욕하며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 자기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보다 높은 하나님이 계시며 그는 그 혀의 거친 말에 대해 그들을 부르실 것이며 그들 자신의 말이 자기들 위에 떨어지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3) 이스라엘과 그 방백들에 대한 벌이 여기에 나온다. 방백에 대해서는 그들이 적군의 칼이나 자기 백성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는 벌이 규정된다. 어떤 방백은 적군의 칼날에 엎드러질 것이며 또 다른 방백은 자기 백성의 칼에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인들에게 도망하여 구조를 청할 때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될 일이다(11절). 그들의 죄와 벌은 그들을 주위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역하며 속이려 들으며 사람들에게 대한 태도에서 격정적이고 난폭한 자들은 반드시 그 이웃에게 조롱거리가 된다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1Esb/19?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