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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 14장 연구

by 은총가득 2021. 8. 22.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

 

Ⅰ. 구약성경에서의 호세아서의 위치

 

호세아서는 구약성경에서 소선지서에 해당된다. 구약성경은 (1)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구성되고 모세오경, 또는 모세의 율법으로 불려지는 ‘율법서’(5권)와 (2)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로 구성된 ‘역사서’(12권)와 (3)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로 구성된 ‘시가서’(5권)와 (4)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로 구성된 ‘대선지서’(5권),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구성된 ‘소선지서’(12권)의 ‘선지서’로 되어 있다. 호세아서는 ‘선지서’에서 ‘소선지서’ 그룹에 속해 있으며,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대선지서 소선지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타락 후의 인간을 하나님의 언약에 기인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 시대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초기의 구속사를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 이전까지의 역사에 다루는 기록이다.
 
율법서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민족의 역사가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져 신정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가나안에서 전개되는 것을 다루는 언약백성의 삶과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 백성의 경험과 감정 및 사고를 반영한 노래와 지혜로서 언약 백성의 삶에 대한 내면적 성찰과 지혜의 권면을 기록하고 있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사역하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하는 예언의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 파기에 대한 책망과 함께 새시대-새언약의 제시를 기록하고 있다.
 
 
 
 
 
 
 
 
 
 
 
 

 

 

소선지서인 12선지서에서 호세아서를 보면 제일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12선지자들의 사역 시기를 보면, (1) 오바댜 : 850/40 (2) 요엘 : 835/4 (3) 요나 : 780 (4) 아모스 : 760 (5) 호세아 : 755-710 (6) 미가 : 740-687 (7) 나훔 : 650/30 (8) 스바냐 : 640-610 (9) 하박국 : 600 (10) 학개 : 520 (11) 스가랴 : 520 (12) 말라기 : 458/44 순서로 오바댜의 선지자 사역 시기가 가장 빠르다.1)

 

그럼에도 호세아서가 12선지서에서 가장 앞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12선지서의 배열과 구성은 연대기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는 대선지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선지서는 이사야 - 예레미야, 애가 - 에스겔 - 다니엘의 순서이나 연대기에 의한 순서는 이사야 - 예레미야, 애가 - 다니엘 - 에스겔 순서이다. 12선지서는 연대기에 의해서 배열되는 구성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12선지서의 다른 선지서와 갖는 공통 주제와 그에 따른 근접 문맥을 연결하려는 의도로 이루어졌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호세아서가 독립적인 한 권이 아니라 다른 12선지서와의 통일성2)에 의해서 12선지서 곧 소선지서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본다.

 

 

Ⅱ. 호세아서의 정경적 통일성

 

호세아서는 소선지서로 불려지는 12선지서에 해당된다. 호세아서는 12선지서를 차지하고 있는 한 권으로 이해하여 왔으나, 최근 20년 동안에는 소선지서인 12선지서를 한 권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2001년 SBL 세미나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며, 2007년 Interpretation 61권 2호에서도 “열두 권의 책을 신학적으로 읽기”("Reading the Book of the Twelve Theologically")라는 주제로 특집이 마련되기도 했다. 후자의 편집장인 노갈스키(James D. Nogalski)는 표제어를 중심으로 한 연대기적 구조 문제와 핵심어(catchwords), 암유(allusion), 반복되는 주제(recurring themes)를 통해 열두 권의 통일성을 고찰한다고 하였다.3) 그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개별적으로 예언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말씀을 맡기는 개별적인 신탁보다는 예언적 책에 의해 전달되는 메시지로서의 전환에 주목하고 있다.4) 이러한 경향은 호세아서를 12선지서의 다른 성경과 구분하는 책으로서가 아닌 12선지서 전체가 동일한 내용의 통일성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해를 갖는 것이다.

 

 

Ⅲ. 호세아서 명칭-기록 연대-내용에 대한 이해

 

호세아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명칭은 ‘호쉐아/호세아’(['ve/h)이다. 이 단어는 “돕다, 보존하다, 구출하다, 안전하다, 구원을 가져오다(구원을 이루는), 구원하다(구원자), 승리를 얻다”는 뜻을 지닌 동사 ‘야솨’([v'y:)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구원’(salvation)이다.5) ‘야솨’란 뜻은 속박에서 풀림을 받은 자유의 상태를 말함이 원의(原義)인데, 넓은 광장으로 옮겨서 자유로운 공간 속의 환한 분위기를 뜻하기도 하는 것으로, 속박과 구속이 없는 자유의 행동이 ‘야솨’란 말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야솨’란 말로써 “야웨는 구원자이시다.”라는 표현을 구약이 즐겨 사용하고 인명으로 즐겨 택했다.6) 동사 ‘야솨’([v'y:)에서 유래한 이름으로는 ‘호세아’ 외에도 ‘여호수아’ 및 그리스도이신 ‘예수’란 이름이 있다. 70인경(LXX)의 Ώσηέ, 라틴어의 Hoseae, 영어의 Hosea, 그리고 우리말의 ‘호세아’는 모두 히브리어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7)

 

 

호세아서의 기록 연대는 B.C. 720년경이며, 호세아서를 기록한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B.C. 755-710년 사이인데, 호세아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 의해서 세워진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주로 왕과 제사장 같은 고급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을 상대로 사역한 선지자이다. 이때는 유다에서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대를 이어서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또한 이사야와 미가 두 선지자가 사역의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에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과 같은 이름인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Ⅱ가 왕이 되어 다스리던 시대였다(호 1:1).8)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선지자 호세아에게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게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어 창녀 고멜과 결혼하고 그녀에게서 음란한 자식 이스르엘(la[er>z>yI), 로루하마(hm;j;ru al), 로암미(yMi[' al)를 낳는 호세아 개인적 경험을 다루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여 주려는데 있다. 그래서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부정한 아내(이스라엘)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며, 결국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그녀를 사서 축복의 처소로 회복시켜 주심을 보여주신다.9)

 

 

Ⅳ. 호세아서의 선지자 메시지 사역

 

호세아서에 나타나고 있는 호세아의 선지자 메시지 사역은 선지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의 다섯 가지 공통된 특징을 띤다.

 

(1) 죄악(罪惡) :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말씀(뜻)을 불순종하여 악한 죄를 지음

(2) 질책(叱責) :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악한 죄를 질책하심

(3) 경고(警告) : 악한 죄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심

(4) 권고(勸告) : 악한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의 회개를 권고하심

(5) 약속(約束) : 회개에 따른 회복의 약속에 의한 구원

 

 

Ⅴ. 호세아서의 중심 사상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선지자 호세아에게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게 함으로 호세아가 창녀 고멜과 결혼하고 세 명의 음란한 자식들을 낳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으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 사랑을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삶으로 실천해 보여야 할 도덕적인 사랑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모범으로 해서 그리스도인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일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서 나온 음란한 세 명의 자식에 의해서 나타내 주시고 있는 것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떠나 다른 연애하는 자인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나타내시면서 이스라엘을 데려와 신부 삼으시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는 인간의 도덕적인 사랑의 행위에 있지 않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있다. 따라서 호세아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호세아서는 이 중심 사상에 의해서 과거 역사의 회복 구절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각 단원마다 심판에서 회복의 약속을 주시고 있는 구원이, 그리고 회개의 권고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즉, 심판의 선고+회복의 약속 +회개의 권고 이 셋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Ⅵ. 호세아서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에 나타난 그리스도

 

호세아서에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1)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죄의 실상을 드러내시고 (2)그에 대해 질책하시며 (3) 심판이 있을 것의 경고가 매장마다 말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변함없는 사랑이 (4) 회개를 권고하시며 (5) 회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이 선언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북왕국 이스라엘의 죄악을 질책하고 그에 대한 경고를 하시면서 또한 회개의 권고와 회복의 약속을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예언해 주시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호세아는 총 14장으로 되어 있다. 

위에 따라서 각 장의 본문 내용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호세아서의 표제

 

1절.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대를)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호세아서는 여호와께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2. 호세아서의 본문 이해

 

하나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호세아는 이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호세아서는 이렇게 해서 주어졌다. 호세아가 기록된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에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진 것이므로, 그 연대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주전 721년 직후로 보아 주전 72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호세아는 호세아서의 주제를 말해주는 표제가 되는 1절에서 알 수 있듯이, 남왕국 유다에서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대를 이어서 왕이 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Ⅱ가 통치하던 때에 활동한 선지자로서 그 활동 기간은 주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인 710년경까지이므로 주전 755-710년경에 활동한 선지자이다.

 

 

여로보암Ⅱ가 통치하던 때의 북왕국 이스라엘이 어땠는가는 1장 2절부터 언급되어 시작되면서 1장 전체에 걸쳐, 그리고 호세아서 매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질책하시고 그에 따른 심판을 경고하시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다.”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떠나 창녀처럼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악한 죄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호세아서 매장에서 지적하여 언급하시는 것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범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각 장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다.

 

(1) 호세아의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에서 나타내신 북왕국 이스라엘의 죄 : 우상숭배

 

1장 : 2절.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느니라.”

 

본 절은 호세아서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 범죄가 어떤 것인지를 한마디로 규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떠나 크게 음란한 것이다. 여기서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음란한 행동은 우상숭배에 있는 악한 죄를 지칭하는 것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호세아가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하게 하여 아들을 낳게 하고 그 첫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 곧 “하나님이 씨를 뿌린다.”는 뜻의 이름을 짓게 하고,10) 또한 둘째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자이다.”라는 뜻의 이름을 짓게 한 것에서 나타내주셨다. 그리고 셋째로 낳은 아들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어 부르게 하셨는데, 그 뜻은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것에서, 그래서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뜻을 나타내 주셨다. 여기서 첫째 아들의 이름인 ‘이스르엘’에서 뜻하고 있는 “하나님이 씨를 뿌린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파종하실 것이다.”(God will plant)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4절에서의 이스르엘은 씨를 땅에 흩어 뿌리는 것에서의 뜻으로 쓰이고 있어 “하나님께서 씨[이스라엘 백성]를 흩으실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4-5절에서 설명되고 있는 대로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예후의 왕조를 벌하여 예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시는 것이었는데,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군대를 궤멸시켜 그 나라를 없애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악한 죄에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딸의 이름인 ‘로루하마’에서 뜻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자이다.”는 뜻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긍휼을 입을 수 없으며,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상태인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북왕국 이스라엘을 셋째 아들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부르게 한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 아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음란한 행위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에서 끊어져 떨어져 나간 것으로 표현하시고 있다.

 

(2)하나님이 주신 금과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이스라엘

 

2장 : 1-7절.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a)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하에서는‘북왕국 이스라엘’또는‘이스라엘’로 병행하여 표기)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음란한 아내’로 비유하여 말하며, 하나님은 더 이상 그러한 이스라엘의 남편이 아니라며, 그 어미에게서 난 자식들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므로 그 어미의 자식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임을 말씀한다. 음란한 아내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축복을 받으며 그것으로 먹고 마시고 온 몸을 치장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바알의 신상들을 만들 때 사용한 모든 금과 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에도 그것으로 바알의 신상들을 만들어 숭배하는 악한 죄에 있으므로, 그들을 벌함으로써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b)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신다.“오,‘이스르엘’아, 네 아우와 누이의 이름을 고쳐라. 네 아우는‘암미’(“이제 너는 내 백성(자식)이다.”는 뜻)라 부르고, 네 누이는‘루하마’(“긍휼을 받은 자”라는 뜻)라고 불러라. 이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내 백성에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의 모래같이 불어나 셀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이 될 것을 말씀하신 약속에 따른 것이다.11)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 파기에 있었으며 그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버린 자식이라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언약에 의해서 그들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있게 하실 것이며,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가 되어서 한 왕을 받들고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 다시 뿌려 놓을 씨가 되는 이스르엘의 날이 되게 하실 것이므로 그 날은 더할 수 없이 위대한 날이 될 것이라는 말씀에 의한 것이다.

 

(3) 많은 날들 동안 포로가 될 것에 있을 이스라엘

 

3장 : 1-5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a)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음행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신다.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로 마음이 빼앗겨져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른 신들에게 온갖 좋은 선물들을 갖다 바치는 열애에 빠져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이 하나님에게 행하였던 것과 똑같이 대하여 행할 것을 말씀하신다.

 

(b) 그럼에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에 호세아는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음녀로 전락한 그 여자를 다시 사왔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여자, 곧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 후에 되어질 것임을 말한다. 다시 호세아의 아내가 된 여자[이스라엘]는 많은 날들 동안 함께 지낼 것이므로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인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들 동안 그들이 열애하여 섬겼던 이방 신인 우상을 숭배해 온 날들만큼 많은 날들을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어 있는 것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을 주로 섬겨왔던 믿음에서 부패에 있던 모두를 제거하여서 오히려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포로 됨은 이 하나님의 은총에 있다.12) 유다는 포로 됨이 바벨론 포로 생활인 70년에 그치지만, 이스라엘의 포로 됨은 그보다 더욱 길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당하여 완전히 없어져 실질상 포로 됨에서 자유로운 몸에 결코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포로 기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부패케 한 죄로부터 거룩하게 해 나가실 계획과 그 준비에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맺은 언약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자기들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인데 그렇게 다윗 왕을 찾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자기들의 왕이신 메시야에게로 돌아올 것에서 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진심으로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경외하며 벅찬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온갖 좋은 것/선물/복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호세아 3장에서는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의 구원이 근거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비록 유다로부터 분리되어 나가 독자적으로 독립해 나가고자 하며 우상숭배의 부패에 있어왔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다윗 왕국과 그 집에 두고서 영원히 견고함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호에 두고 계신다.

 

(4) 제사장들의 죄와 백성의 죄가 하나인 이스라엘

 

4장 : 1-2, 6, 12-13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 도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음란하게 우상숭배에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다른 신을 열애하여 우상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에게서 극명하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잊은 자로 있으며,13)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다. 이런 제사장들로 인해서 그 백성들은 ‘그 제사장에 그 백성’의 꼴 모습에 있다.

 

(5)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매일반

 

5장 : 3-5절,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a)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에브라임은 가장 세력이 큰 지파로서 주동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북왕국 이스라엘 전체와 동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에브라임은 다른 지파들을 하나님 앞에 있게 하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데서 그 큰 세력이 쓰여져야 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미스바에서는 백성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되고, 다볼산에서는 백성을 잡는 그물이 되고, 싯딤에서는 백성을 빠뜨리는 깊은 함정이 되어 버렸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 음란한 여인이 남편을 버리고 떠나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온몸이 더럽혀졌다.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음란한 생각이 숨어 있어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저지른 죄 값대로 반드시 갚으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에 유다도 동참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는 결국에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남왕국 유다나 매일반이었던 것이다.

 

(b)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족속 10지파 중에 가장 주동적이고 지도적인 지파이다. 따라서 이 호세아서에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이스라엘 족속 전체와 동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엄청난 범죄 때문에 주께서는 그들을 버리시기로 하셨다. 본문은 4장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할 것임을 선언하신 것에 이어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교만으로 망함을 예언하시는데, 유다도 이스라엘과 함께 넘어질 것을 선언하시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기들의 병세 - 정치적인 곤궁의 상태 - 가 중한 줄을 깨달아 앗수르의 대왕에게 특사를 보내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결코 그들을 돕지도 병을 고치지도 못할 것이었다: (1) 북왕국 이스라엘 - 여로보암 2세 때의 백성들의 부패만 아니라 그 아들 스가랴의 타락은 마침내 여로보암의 왕가가 무너지고 뒤이어 혁명에 혁명을 거듭하면서 앗수르에 점령을 당했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이스라엘의 므나헴 왕은 앗수르 왕 티글랏빌레셀(B.C. 745-727) 에게 은 일천달란트의 조공을 드리며 앗수르의 도움을 얻으려 했으나 헛된 일이었고(왕하 15:19), 또 이스라엘의 최후의 왕 호세아(B.C. 732-723)도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왕위를 계속했으나, 앗수르 왕 티글랏빌레셀이 죽자 한 때 앗수르이 굴레를 벗어나 볼려고 하였으나 다시 살만에셀(티글랏빌레셀의 아들)에게 굴복하여 조공을 바치며 명맥을 유지해 가다가 애굽과 동맹하고 앗수르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앗수르에게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왕하 17:3, 4).

 

(2) 남왕국 유다 - 또 이때 남왕국 유다에서의 아하스 왕(B.C. 731-715)도 왕위에 있는 동안(16년간)에 친앗수르 정책을 쓰면서 이스라엘의 압력과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을 막아보려고 애썼다. 이처럼 그도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그의 후원을 얻어 보려고 했으나 앗수르는 유다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롭게 했다(대하 28:20, 21).

 

(3) 13절은 그러한 사실의 시대적 배경을 잘 나타내 보여 준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이처럼 북왕국 이스라엘도 남왕국 유다도 앗수르를 의지하나 그 의지가 헛된 것은 14절에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여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때문임을 밝힌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도 유다도 심판하실 것이 벌써 작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섭리하신 이유는 이것이 그들에게 경고가 되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실 것 때문이었다. 즉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모두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에서 자신들 정권을 쥔 왕국을 유지해 보려고 하나 그 모두가 허사로 돌아갈 것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마음이시다.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실 것을 시사해 주시는 구절을 볼 수 있는 곳은 15절인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이다.

 

 

(6) 아담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

 

6장 : 7절.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a)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망하는지를 예언해 주시고 있다. 에브라임은 다른 신들을 따라가고 이스라엘은 완전히 더러워졌다. 이러한 이들의 운명은 마치 가을걷이가 풍년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은데(9-10절), “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으랴?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으랴? 너희들의 인애<진심>는 아침 안개처럼 흩어지고, 이른 아침의 이슬처럼 쉬 사라지고 있구나. 그러므로 나는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의 멸망을 알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씀으로 너희를 죽이겠다고 경고하였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듯이 나의 심판이 어김없이 너희에게 닥쳐올 것이다.”(4-5절). 이스라엘은 형식적으로 지킬 것은 제대로 지키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단지 격식과 껍데기가 아니라 중심이요 주의 기뻐하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은 6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인애이다. 나는 너희들이 번제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14) 라는 말씀으로 토해내지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인애가 없으므로 망할 것이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b)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있지 못한 까닭은 그들은 아담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김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그 죄성에 따른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인애가 없었던 문제점의 본질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에서 말씀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그들의 마음이 있지 않은 것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언급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다루시는 것에서 다름 아닌 그 문제점을 해결하실 것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어기고 있는 그 하나님의 언약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담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갔지만, 그래서 그렇게 언약 파기에 있은 이스라엘은 폭력이 들끓는 도시가 되었고 발자국마다 피가 묻어 있으며 숲속에 숨어 행인들을 강탈하는 강도떼처럼 제사장들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서 살인과 온갖 죄를 저지르고 있어 이스라엘에서는 무서운 일만 벌어지고 있지만,15)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있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에 두고 있음을 함의하고 있다.

 

(7)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르짖지 않고 이방 나라를 의지하므로 망할 것임을 재차 강조함

 

7장 : 7-16절.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 도다…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르짖지 않고 강대국인 이방 나라를 의지하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데 따라 망할 것을 예언해 주신다. 이스라엘의 죄악의 극심함은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짖지 않은 데 있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잘못, 그것은 그들이 이방 나라인 외세에만 의지하려 하지 그들의 참 신이신 하나님을 부르짖지 않으며, 하나님께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7절, 10절, 14절, 16절에서 네 차례에 걸쳐 반복되어 지적되고 있다.

 

(8)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원인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데 있음

 

8장 : 1절.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지 않고 당시 강대국인 이방 나라를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하시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해 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들의 운명은 노예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13절에서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기 전의 상태, 곧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그 때의 모습인 노예생활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을 의미하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의지하던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어서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유다도 이스라엘과 동일한 죄악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처럼 동일하게 멸망할 것이었다(8:14)

 

(9)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 나라처럼 행음(우상숭배)하는 부패에 있으므로 열방 중에 유리하는 자가 될 것임

 

9장 : 1절, 17절.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 나라처럼 행음(우상숭배)하는 부패한 죄악이 드러나고, 그들의 운명은 결국 온 세상에 흩어져서 집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을 선언하는 예언의 계시인데, 왜 하나님께서 그처럼 그들을 버리시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아 불순종하기 때문이다.

 

(10) 이스라엘이 가장 큰 죄인 (1) 신앙의 변절<두 마음을 품음>과 (2) 우상숭배로 망함

 

10장 : 1-3절, 10절.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a) 본문에서는 포도나무에 비유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말하고 있다(1-3절). 그들의 악과 죄가 얼마나 극심한지는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부정과 불법을 심어 온갖 범죄의 열매를 무성하게 키워 냈다. 또한 거짓을 신뢰하여 전쟁 무기와 막강한 병력만이 나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바란 대로 이제 그 보상을 온전히 받게 되리라!”(13절), “이스라엘은 가지마다 주렁주렁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한 포도나무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그 재산을 제단과 기념비와 신상을 세우는 데에 쏟아 붓고 그 땅에 풍년이 들면 들수록 더욱더 많은 제물을 제단에 바치기에 바쁘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는 진실한 마음을 바치지 않으니 마땅히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호화스러운 제단을 무너뜨리고 신상들을 쓰러뜨리실 것이다…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를 저지르던 아웬의 그 죄악의 제단들은 산산조각이 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덮일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산들을 향하여 '우리를 덮어 다오!'하고 애원하며, 언덕들을 향하여 '우리 위로 무너져 다오!'라고 울부짖을 것이다”(1-2, 8절) 여기에서 보는 대로 이스라엘은 두 마음을 품어 하나님이 아니라 거짓을 신뢰하여 강대국으로 있는 이방 나라를 의지하며 우상숭배에 있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여호와이신 하나님과 강대국 이방 나라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그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된 것은 그들이 강대국 이방 나라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상숭배에 있는 죄악에서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두 가지 죄, 곧 전에 지은 죄와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를 한꺼번에 심판[징벌]하실 것이므로 망할 것을 예언하신다.

 

(b) 그러나 심판을 말씀하는 이 10장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은총이 아주 강하게 표시되고 있다.“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12절).16) 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소망을 걸 수 있음을 보여준다.

 

 

(11) 이스라엘이 배은의 죄로 망함

 

11장 : 2절.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a)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품은 사랑이 어떤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여 말씀한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적에 나는 그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를 애굽에서 데려다가 내 아들로 삼았다”(11:1).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인 430년을 애굽에 있을 때를 이스라엘이 어렸을 적으로 표현하며 그 이스라엘을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그러한 그들을 애굽에서 데려다가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내가 예언자를 보내어 그를 부르면 부를수록 그는 바알이라는 우상들에게 짐승을 잡아 바치고 신상들 앞에 향을 피워 올리며, 점점 더 내게서 멀리 떠나갔다”(11:2).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배은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가진 죄악은 참으로 고질적이고 의도적이며 아주 완고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에 의하여 멸망할 것과 그 나라에 복속케 할 것임을 경고하신다(11:5-6)

 

(b)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애절하다시피 깊고 넓다. 이 크신 사랑이 결국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본 땅으로 되돌아오게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큰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그들이 회복될 것이 다음과 같이 말씀되고 있다. “오, 에브라임아, 그러나 내가 어떻게 너를 내어 버릴 수가 있겠느냐? 오, 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할 수가 있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ㄱ) 아드마처럼 파멸시킬 수 있으며, 내가 어떻게 너를 스보임처럼 멸망의 길로 빠지게 할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다시 돌아섰다. 너를 돕고 싶은 마음이 불붙듯 타오르고 있다. (ㄱ. 소돔,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도시들(신 29:23) 다시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시키는 대로 너희에게 벌을 내리지 않겠다. 에브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에 살아 있는 거룩한 신이지 멸망이나 시키러 온 자가 아니다. 이제 내 백성이 나를 뒤따라 올 것이다. 내 백성이 사자처럼 포효하는 나의 소리를 듣고 서쪽에서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애굽 땅에서 새 떼처럼, 앗수르 땅에서 비둘기 떼처럼 떨면서 날아올 것이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다시 고향집으로 데려다 주어 살게 하겠다. 나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11:8-11)

 

이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역사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있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주신다. “그의 조상 야곱은 태 안에서 이미 자기 형을 속였고 장성한 뒤에는 하나님과도 싸움을 겨루었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이 벌어지게 되자 울며 간청하여 축복을 얻어 내고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그를 찾아와 말씀하셨다. '여호와, 온 세계의 주인, 나의 이름은 여호와이다. 너는 이제 네 하나님께로 돌아와 늘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살고, 네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지내라‘ ”(12:3-6) : ① 야곱이 태에서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은 일 - 이것은 야곱의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김에 있게 하실 것에서 있는 하나님의 섭리로 있는 것이었다. ②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한 일 - 이것은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받아내고 아버지로부터는 형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하는 축복을 가로챈 일로 형 에서의 분노를 사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것에서 있는 일이었으나 이 모든 일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김에 있게 하실 것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에서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일은 야곱 한 개인의 간교함으로 몰아가 야곱의 인격이나 성품의 결여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도망하며, 이러한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또한 그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그를 그의 조상이 있는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여 주시는 것에서 야곱이 그 하나님께로 마음을 두고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살 것을 말씀해 주셨다. ③ 천사와 힘을 겨루어 대항한 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그를 반드시 조상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임에도 형 에서를 크게 두려워하여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못하는 육체의 소욕에 있는 야곱의 생명을 보존하시며 그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가실 것에서 있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사건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겨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이 보존된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 있는 일을 상기시켜 주시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은 또한 야곱,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 주시고 있는 것으로서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하여서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족속을 사랑하여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땅에서 구원한 바로 그 날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셨음을 말하면서 그들을 다시 광야시대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만남을 가지셨던 천막에서 살게 하되 광야시대에서 축제를 벌이던 것처럼 살게 하며, 일찍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많은 환상과 꿈과 비유로 자신의 뜻을 알려주던 대로 하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신을 배반하는 것은 죄악임을 말씀한다. 에브라임<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도 괴롭혀 드렸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지은 피의 죄값을 그들에게 되돌려 갚으시고, 그들에게 받은 수치를 그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족속을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를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므로 심판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런데도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도 괴롭혀 드렸다. 그들이 지은 피의 죄값을 이제 주께서 그들에게 되돌려 갚으시고, 그들에게 받은 수치를 그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12:14) 즉,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에 있다는 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그것이 어떠한 심판이 되는 것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12) 이스라엘이 바알과 송아지의 헛된 우상숭배로 망함

 

13장 : 1-3절.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a) 본문은 이스라엘에서 에브라임 지파가 하는 말은 온 이스라엘을 벌벌 떨게 만들만큼 이스라엘에서 지도적인 세력을 가진 위치에 있었으나 그러한 에브라임 지파가 바알을 섬겨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점점 더 불순종의 길을 가고 있으며, 은을 모아 여러 가지 신상들을 만들고 거기에 제사를 드리며 송아지 형상에 입 맞추어 숭배하는 어리석음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그들을 하나님께선 아침 안개처럼, 쉬 말라버리는 이슬처럼,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불려 나가는 쭉정이처럼 흩어지는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잘 나타내 주시고 있다(1-3절).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뒤부터 언제나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셨으며,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다른 구원자가 없이 그들을 광야에서 보호하고 살펴주셨는데도 -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냄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고 자주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에 대한 크나큰 반역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그 악한 죄값에 합당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길가에 몸을 숨기고 있는 표범처럼 기회를 노려 달려들 것이며, 새끼를 빼앗긴 암콤같이 달려들어 가슴통을 찌고 심장을 꺼내며, 그 자리에서 개들이 그것을 뜯어먹고 들짐승들이 갈기갈기 찢게 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더욱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드러내 주시고 있다(4-8절).

 

(b) 그러나 이 심판을 예고하는 먹구름 같은 하늘에서도 빛나는 햇살이 한줄기 비취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임으로 소망을 갖게 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냄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의 성립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는 은혜의 약속에 있다. “내가 지옥에서 그들의 몸값을 치르고 살려내야 되겠느냐? 내가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져내야 옳겠느냐? 오, 죽음아, 네 재앙을 모조리 풀어 놓아 그들이 맛보게 하여라! 오, 무덤아, 네 가시들을 그들에게 보여주어라! 내가 절대로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14절).

 

(13) 지금까지에서 보게 되는 모든 불의로 넘어져 망함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권고와 회복의 약속이 주어짐

 

14장 : 1-3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호세아서에서 마지막 장인 본문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말씀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에서 보게 되는 모든 불의로 넘어져 망함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께서 베풀고 싶어 하는 그 큰 사랑을 담뿍 받아 누릴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루어질 축복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침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축복은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확장되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그에게 돌아오는 자는 모두 다 그런 축복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이 예언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자’요 그 깨닫는 지혜를 따라 의로운 길을 가는 ‘의인’이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악한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는 자이다. 그러나 죄인은 자기들의 죄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자이다. “이 모든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운 자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슬기로운 자는 누구인가? 주님의 길은 곧고 평평하다. 의로운 사람들은 그 길을 잘 걸어갈 것이지만 죄인들은 그 길에서 자기들의 죄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9절).

 

Ⅶ. 결론

 

이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통해서 호세아서의 결론을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어찌 선지자에게 그러한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가? 라고 여기는가? 그러면 이제 다음과 같이 묻겠다.

 

(1) 하나님이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숭배에 있는 이스라엘을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2) 선지자가 음녀를 아내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가?.

 

어느 쪽이 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가? (1) 인가? (2) 인가?(1) 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선지자가 음녀를 아내로 받아들이게 하시는가? 선지자에게 부도덕한 행실을 하나님이 조장하고, 강요하는 것이겠는가? 호세아서는 음녀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며, 그러한 음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선지자의 관용과 사랑의 행실 문제를 다루어 가시는 것이 아니다.

 

호세아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죄악과 이 죄에 동참하고 있는 남왕국 유다의 죄악을 다루는 것에서 (1)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회개의 권고’를 하시며(14:1-3), (2) 이로 인해서 ‘미래에 있게 될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시며(14:4-8), (3) 이스라엘의 지혜가 의인의 길이요 생명의 길에 있을 것인지, 악인의 길이요 멸망의 길에 있을 것인지 에서, “너희는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의 권고를 통하여(14:9), 그 선택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아담언약-아브라함언약-다윗언약에 나타내시고 있는 언약의 주이신 메시야/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는 것이 호세아서의 마무리인 결론이다.

 

호세아서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아담언약-아브라함언약-다윗언약은 그리스도가 약속되고 있는 언약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에 있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로 나아온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인 다윗 언약에 약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고 그보다 더 훨씬 오래 전인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고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곧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약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선택과 구원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호세아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알게 해 주시는 것이 이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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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선지자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며,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다.

2) 최근의 구약학자들은 12소선지서를 전체적인 한 권으로 보는 견해를 ‘문학적인 통일성’으로 말한다.

3) 노갈스키(James D. Nogalski)는 소논문을 통하여 12선지서의 편집에 대한 표지로서 다음 4가지를 들고 있다. (1) 여호와의 날 (2) 그 땅의 풍요성 (3) 하나님 백성의 운명 (4) 신정론(theodicy). 장 재, 제5회 개혁신학회 구약학회 학술세미나 ‘소선지서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Ⅱ’『최근 호세아서 연구의 동향과 전망』, 2011. 11. 20

4) James D. Nogalski, What kind of "Book" Is Twelve? 인용.

5) 안영복, 구약요람(서울: 성광문화사, 1980), p.210.  

6)  최종진, 구약성서개론(서울: 도서출판 소망사1986), p.427.  

7) 안영복, loc. cit.

8) 호세아 1장 1절은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남왕국 왕들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것은 구속사적 입장에서 볼 때 다윗의 직계로서 다윗에게 준 ‘언약’의 정통성 때문이다. 김희보, 구약호세아 주해(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83), p.19.

 

(2) 또한 여기에서 볼 수 있는대로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남왕국 유다의 왕들의 계보를 보면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라고 했다.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의 계보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Ⅱ 한 사람만 기술하고 있다. 사실 선지자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의 계보는 여로보암Ⅱ 한 사람만이 아니다. 그를 위시하여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및 호세아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그럼에도 여로보암Ⅱ 한 사람만이 기록된 것은 그의 통치와 함께 그의 말기와 후 시대의 이스라엘의 형편은 나라가 부패하여 극에 달했으며, 국권은 급전직하(急轉直下)로 사양길에 들어서 혼란을 거듭하며 멸망으로 치닫고 있던 시대였다. 여로보암Ⅱ세의 아들 스가랴가 불과 6개월만에 살룸의 반역으로 죽음을 당하여 여로보암의 집은 망했으며(B.C. 752), 살룸 왕은 왕위에 오른지 불과 한 달만에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했고(왕하 15:14), 왕 위에 오른 므나헴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왕하 15:19), 그후 그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으나 궁중 반란으로 베가에게 죽었다. 그리고 베가는 반 앗수르 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호세아의 반란으로 그 역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호세아 왕은 앗수르의 보호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으나 기회를 얻어 앗수를 배반하고 친애굽 정책을 펼침으로 인해서 앗수라에게 망했다. 이렇게 호세아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당시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죄악이 관영하고 국가의 반란이 거듭되는 혼란기에 있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들은 여로보암Ⅱ를 비롯하여서 하나같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불러 온 장본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이름은 생략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입장에서 볼 때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희보, 구약호세아 주해(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83), p.18-19.

 

9) 안영복, loc. cit.

10) 이스르엘이란 이름이 지닌 뜻에서의 ‘씨’는 아들 - 자손(후손) - 이스라엘 백성의 발전적 개념을 갖는다.

11)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있는 ‘약속의 씨’에 의해서 되어 진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약속되고 있는 씨인 아들[자손]을 여럿이 아닌 ‘오직 한 사람(아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곧 그리스도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갈 3:16).

 

12) ‘많은 날 동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밈 랍빔’은 문자적으로는 ‘많은 날들’로서 특정한 기간이 아닌 불특정한 기간인 아주 많은 날들인 ‘아주 오랜 후에’를 의미하는 것으로 문맥상 북왕국 이스라엘이 포로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은 남왕국 유다의 포로 기간인 70년보다 훨씬 더 긴 오랜 기간이 될 것인데, 이스라엘이 포로됨에 있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이 기간이 그들에게서 어떤 성격의 것이 되게 할 것인지를 4-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범람하였던 부패한 여섯 가지 요소들을 제거하여 이스라엘이 거룩하여질 것이며 이후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을 것에서 말씀해 주신다. 이때 4절에서의 여섯 가지 부패 요소는 각각 세 가지 범주로 엮여 있다. (1)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을 것이다 : 통치자 왕과 왕이 임명한 총독이나 방백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이 열애하여 따라 다녔던, 그래서 ‘주’로 섬겼던 ‘다른 신’, 곧 ‘우상’이다. 이스라엘이 열애하며 의지하였던 우상은 결코 그들을 책임지는 ‘주’가 되지 못할 것임을 나타내신다

 

. (2)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을 것이다 : 제사는 희생 제사를 지칭하는 것이며, 주상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위해서 세웠던 아세라 목상 등 우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하였던 희생 제사를 우상에게 드려가면서까지 하나님의 진노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제사와 주상을 이스라엘에 없게 하실 것이므로 더 이상 그들에게 희생제사를 요구할 수 없게 할 것임을 나타내신다. (3) 에봇과 드라빔도 없이 지내게 할 것이다 : 에봇은 대제사장 제복 외부체 부착하였던 종교적 도구로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사용하였던 것, 곧 ‘신탁’의 의미로 쓰였으며, 드라빔은 작은 규모의 우상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탁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길을 인도하심에 있는데, 이스라엘은 에봇과 드라빔을 사용하여 우상에게 그들의 장래를 묻고 의지하였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그들에게 없게 하실 것임을 나타내심으로써 더 이상 이스라엘의 희망이 되질 못한다.

 

13) 현대어성경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잊은 것”을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기를 마다하였다.”라고 의미에서 전달하고 있다. 이런 그들은 7, 8절에서 “백성들의 죄악으로 먹고 살면서 그것도 모자라 더 많은 죄들을 부추긴다.” 이는 “제사장의 수가 많을수록 더 많은 죄를 쌓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들의 치욕과 바꾸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14) 참조. 사무엘상 15:22-23. 하나님께서 제사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좋아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15) 북왕국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악한 횡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사실 그대로가 묘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도피성의 하나인 세겜의 길목에서 이곳에 몸을 피하러 오는 사람이나 북이스라엘의 경건한 신앙인들 중 절기 때마다 남유다의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이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본다(Pusey).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족장 시대에 제사장 직분을 구성하는 지파의 조상 레위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더불어 동일한 장소 세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것처럼(창 34:2-31) 당시 제사장들이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대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란 견해를 갖는다. 두 견해 모두가 가능성이 있으나, 원문 표현이나 당시 역사적 정황, 즉 북왕국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혈통적으로 레위 지파와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전자의 견해가 후자의 견해보다 더 지지를 받는다. 옥스퍼드원어성경대전(서울: 제자원, 2008), p.290.

 

16) 현대어성경. “너희는 선한 행실의 씨를 뿌려라. 그러면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너희는 묵은 땅을 가는 농부처럼 다시 시작하여라. 이번에는 나 여호와에게 물어 보고 시작하여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가서 온갖 좋은 복을 쏟아 부어 주겠다.” 이천우 목사


호세아에 나타난 그리스도

 

호세아서 서론


 • 12권의 소선지서 가운데 제일 처음에 위치한 호세아서는,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신실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본 서는 다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말씀을 사용하였다면,호세아는 자신의 불운한 가정과 결혼 생활을 통하여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거기에 따른 하나님의 반응을 전하였습니다.

 1) 저자 
• 본서의 기록자는 '호세아'로서,이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새 이름을 주기 전의 '여호수아'의 본명과 동일하고(민수기 13:16/신명기32:44) 또한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라는 이름과도 같습니다(열왕기하 15:30). '호세아'는 북왕국의 시민이었던 '브에리'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호세아 1:1),'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출생하여 역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로서(호세아 7:5) 매우 가정적이고 사랑의 예언자로 나타납니다.

• '호세아' 선지자의 사역은 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한 '남유다'출신의 아모스'선지자와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예컨대 아모스가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며 외친 반면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며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도 하였으나,그러나 호세아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애국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다정다감한 인도주의(人道主義.휴매니즘)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애타게 선포한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기록 연대 및 본서의 특징   
•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13대 왕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B.C.793년~753년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예언 활동을 시작하였으나(1:1),본서를 보면 호세아가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할 것을 계속 예언하면서도(호세아 8:1~7/10:5~8)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사건(B.C.722년)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서 기록 연대는 B.C.723년 이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하던(B.C.793년~753년)때는,남유다 왕국의 제 10대 왕인 웃시야 왕 시대부터(B.C.790년
~739년) 제 13대 왕인 히스기야 왕 시대까지(B.C.728년~687년)이므로,호세아의 예언 활동 연대는 B.C.790년~687년 사이로 볼수 있습니다.

 

3) 역사적 배경 • 호세아의 예언 사역은 북이스라엘 제 13대 왕으로 북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번영을 구가했던 여로보암 2세 통치 말기(B.C. 755년)즈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는 호세아보다 조금 앞서 북왕국에서 활동한 아모스 선지자(B.C.760년~755년)가 경고한 대로(아모스 5:2/7:7~9/8:1~3)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북왕국 멸 망의 징조가 점점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 아모스서 서론에서 알아본 대로 여로보암 2 세가 다스리던 시기는,북왕국이 솔로몬 시대처럼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동서 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볼 때 한 나라가 외적으로 크게 번영할 때는,언제나 그 이면에는 극심한 종교적,도덕적 타락이 있었으며 물질 만능주의와 현세지향적이고 극단적인 인본주의적 이기심이 팽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북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어서,그들의 경제적인 번영은 오히려 전례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 부패 현상을 초래하였습니다(아모스 2:6~8/5:11 ~13/열왕기하 14:23~29). 특히 흔히 오해하듯 외적인 번영 자체가 곧 하나님의 축복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있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정치적 호황이 계속되자,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아무런 가책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일신상의 안일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 호세아 선지자는 이같은 북방 이스라엘의 총체적 부패 상황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받고 멸망할 수 밖에 없 다는 사실을 경고하며,동시에 회개를 촉구하는 애타는 심정을 안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북방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 모두는 나라의 위기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다가온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 하지 못했고,자신들의 패역한 행위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런 죄악들을 더욱 즐기며 일삼았습니다. 특히 일반 백성들은 일신상의 안일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축적하였으며,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전부터 자주 섬겨오던 바알신 숭배는 물론 이방 강대국의 각종 우상들을 들여와서 여호와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가증한 행위들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더우기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백성들의 죄악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지적하여 깨우치며 책망하기보다는,수수방관하 거나 한층 더해서 자신들도 동참하여 더 큰 죄악을 조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4) 호세아에 나타난 그리스도 • 성경 66권은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각각 다른 시대의 역사나 서로 다른 주제의 교리들을 실로 다양하게 논하고 있지만,그 근본 주제나 목적은 모두 다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救贖事役)을 통한 우리 죄인들의 구원이라는 목적 하나로 축약됩니다. 즉 성경은 예수의 구속 사역(救贖事役)으로 인한 성도의 구원이라는 한 연속적이고도 통일된 주제의 여러 측면과 그 전개의 역사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사랑를 예표하는 호세아의 사랑 •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고멜과 결혼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호세아 1:2). 이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참을 수 없고,납득하기 어려운 일로 호세아에게는 하나의 큰 십자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멜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을 뿐 아니라,그녀가 호세아를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데려다가 아내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부패한 인간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지신 (마태복음 27:31~34)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표합니다(마태복음 20:28/갈라디아서 3:13). ② 남은 자들의 두목이 되실 그리스도 • 호세아 1장 11절을 보면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오리니"라고 예언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 예언으로써,B.C.722년 앗수르군에게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갈 북이스라엘 백성들과(열왕기하 17:1~41),그리고 또한 B.C.586년 바벨론에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갈 남유다 백성들이 B.C.537년 유대 총독 으로 임명된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유대 땅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재건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힘입어 바벨론 또는 앗수르가 상징하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스룹바벨이 예표하는 다윗의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영광된 하나님 나라를 건설 하게 될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참회자에게 대한 격려 (호세아 14:1-3)

 

Ⅰ. 회개의 초대가 죄인에게 친절히 발송되고 있다(1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회심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교회 울타리 내에 있는 자들에게도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의무와 감사와 이해 관계로서도 너는 하나님께 매여 있다. 네가 하나님을 배반하면 그만큼 더 악하며 네가 그에게 돌아오는 일은 그만큼 더 필요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다음 사실을 알아야 했다.

1. 그는 무슨 회개할 만한 일을 저질렀는가?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거쳤느니라)." 우상은 그들의 거침돌이었다.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서 죄에 엎드러졌으며 모든 선에서 추락했으며 죄와 저주의 짐 아래서 쓰러졌다." 이것이 돌아와야 할 자의 행동이었다. 죄는 타락이요, 엎드러지는 것이며 죄로 넘어진 자는 회개에 의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2. 그는 회개 시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는 네가 의지하는 주 여호와시요, 언약상 네 하나님이시며 네가 관계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의 최대 관심사는 그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며 그것이 맨 처음 해야 할 일이라는 데 주목하자.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서 엎드러졌고 그분만이 너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에게 돌아오라. 너는 여호와께 완전히 돌아 오라. 그를 쳐다보거나 그를 향해 몇 걸음만 옮기지 말고 완전히 돌아 오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고대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만들었다. "회개는 위대한 일이다. 왜냐하면 회개는 사람을 영광의 보좌에까지 데리고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Ⅱ. 회개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오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생이나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참회의 기도와 간원을 가지고 오라고 요구하신다. 그것은 입술의 열매이다. 아니, 그것은 입술만의 열매가 아니라 마음의 열매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말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랍비 중 한 사람은 그 말들은 먼저 속 사람이 하는 말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즉 마음이 먼저 혀에게 지령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한 생각과 선한 사랑을 품고서 선한 말을 가져가야 한다. verbaque proevisam rem non invita sequentur-즉 자아를 지배하는 자는 좀처럼 말이 막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할 일 없이 나아가면 대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기 쉬운 까닭이다. "우리가 이제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스 9:10)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가야하며 성령께로부터 은혜와 탄원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가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시며 우리 안에서 대언을 하신다.

 

2.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숙고해야 했다. 그들은 말씀을 가지고 가야 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했다. 내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서야 할 뿐만 아니라 외적 생활로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했다.

Ⅲ. 그들을 돕고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할 말을 우리 손에 준비해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할 말을 지어 주실 때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림없이 잘 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작용이 여기에 권면된 말씀과 일치하면 우리 일은 틀림없이 잘되어 나갈 것이다.

 

1. 그것은 간청하는 말들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간청하도록 지시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1) 죄로부터의 사면,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는 "여호와여, 우리의 모든 불의를 제하소서" 하고 아뢰어야만 한다. 그들은 무거운 고난 아래서 죄로 인한 가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왕처럼 "이 죽음을 내게서 제하라" 고 기도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이 죄를 제하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있을 때일수록 고통의 제거보다 우리 죄악의 용서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불의를 제하소서. 그것은 우리를 무게에 못이겨 무릎 꿇게 하는 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입니다. 여호와여, 그것을 치워 주소서.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의 혼란과 정죄가 되지 않게 하소서. 그 모든 죄를 제해 주소서. 아무 대가없이 완전히 사면해 주소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제거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 큰 빚을 전부 다 탕감하신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가 죄에 대해 기도할 때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죄를 다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열납되는 것. "선한 바를 받으소서(흠정역:은혜로이 받으소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은총과 사랑을 받게 하시며 주께서는 우리와 우리 행위를 중시하시옵소서. 우리 기도를 은혜로이 받으소서.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할 수 있게 된 선한 바를 기뻐하소서. 선한 바를 받으소서. 선이 우리에게 부과되게 하소서. 선을 주소서." 이것은 불의를 제해 달라는 청원에 이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의가 제거될 때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선한 것을 기대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불의의 제거는 길을 막던 방해물이 치워지는 것(removendo pr ohibens)을 뜻하며 선의 수여를 위한 길의 예비가 된다. "선을 주소서." 그들은 어떤 선을 달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조건 맡긴다. 그것은 세상에게 보일 선(시 4:6)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이다. "선을 주소서, 우리가 몰수당한 선을 주소서. 당신께서 주마고 약속하신 선을 주시며 우리 형편상 필요한 선을 주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서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열납과 그 열납의 복된 열매요 표징이다. "선을 주소서,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다시는 불의로 되돌아 가지 않게 할 선을 주소서."

 

2. 그것은 약속의 만듬이다. 하나님이 이런 말들을 그들의 입에 두심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거나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함이며 그들로 하여금 의무에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용서와 열납을 위한 우리 기도에는 언제나 진지한 의도와 새로운 순종의 서약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은 두 가지 일을 약속하고 서약해야 했다.

 

(1) 감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기뻐 받으소서. 그러시면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70인 역에는 우리 입술의 열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번제에 사용하는 말로서 히브리서와 일치한다. 사도는 이 구절을 인용한다(히 13:15). 우리 입술의 열매라는 것은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를 말한다. 찬미와 감사는 우리의 영적 제사이며 그것이 만약 정직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황소나 수송아지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만든다(시 69:30, 31). 우리가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열납을 의식하게 되면 우리 마음의 찬미와 감사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로이 열납 되는 자들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드릴 수 있고 드려야 한다. 값비싼 열납에 비해 드리는 것은 값이 싸긴 하지만 진심에서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외양간의 소 몇 마리보다 더 기쁘게 받으신다.

 

(2) 생활의 개선. 그들은 약속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구두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개혁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언약해야 한다. 우리는 죄를 버리고 멀리 하지 않으면 죄의 용서와 제거를 기대할 수 없다.

[2] 죄를 짓지 않겠다는 우리의 언약과 결의는 우리의 신앙 고백에서와 같이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말과 총괄적 말에는 거짓이 깃들기 때문이다.

 

[3] 우리의 언약은 우리가 극히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해 특별하고도 명백히 선언되어야 한다. 그 언약은 우리가 극히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해 특별하고도 명백히 선언되어야 한다. 그 언약은 우리가 극히 쉽사리 사로잡히고 극히 자주 압도당하는 죄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에서 우리를 지키고 또 자신을 강화해야 한다(시 18:23). 그들이 여기서 범했다고 시인하며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언약하는 죄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게 바쳤다는 것이 그들이 하는 약속은 다음두 가지이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만 신뢰를 두고 피조물을 결코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외국 동맹군을 의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으리이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과거처럼(5:13; 7:11; 8:9) 앗수르의 도움을 청하지 않으리이다. 우리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며 그를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찾아갈 하나님이 계시고 의뢰할 전능한 하나님이 계시므로 앗수르에게 신세지는 것을 냉소하나이다." 그들은 국내의 전쟁 준비를 믿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증강이 금지된 전쟁 준비는 않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을 타지 않으리이다. 즉 우리는 애굽에 원조를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말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신 17:16; 사 30:16; 31:1, 3). "대적들이 침입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보병을 구조해 주실 것으로 의지할 것이며 기병 확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는 "외적의 침입시에 우리는 구원을 위해 황급히 파발과 사절을 이 나라 저 나라로 보내지 않을 것이며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을 취하여 하나님께 호소하겠나이다" (사 20:5). 진정한 회개는 혈육의 팔에 대한 의지를 끊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선을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게 만든다는 데 주목하자.

 

둘째, 그들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충성을 다시는 피조물에게 바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를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이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두 번 다시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신이라 하여 기도하는 것만큼 불합리하고 얼빠진 짓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이득에 열중하거나 외면적 경건 행위를 자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도 사실상 우리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해 "너희는 우리 신이라" 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의 입에서는 탄원의 말이 나오고 있다.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어떤 공로로부터 용기를 얻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는 공로는 어떠한 용기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얻으려고 희망해야 하며 그 긍휼에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의 커다란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고아를 특별히 돌보신다는 것이다(시 68:4, 5). 그는 자기 율법에서도 그랬고(출 22:22) 섭리로도 그리하신다(시 27:10). 의지할데 없는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이다. 하나님께는 그런 무의무탁자에게 대한 긍휼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이야말로 긍휼을 받을 온당한 대상인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게서 긍휼을 발견한다. 그에게는 그들을 위한 자비가 축적되어 있고 그들은 그것을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이것은 자비와 은혜를 원하는 자에게 타당한 훌륭한 원리로서 나오며 신앙의 좋은 격려자가 된다.

 

(1) 그들은 자기들의 비참한 형편과 사정을 호소한다. "우리는 고립무원한 고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얻을 줄로 기대해도 된다. 그는 그들이 사면초가의 형편에 있음을 바로 알고 계시며 또 그 점을 기꺼이 인정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안을 향한 좋은 단계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대담성이 없다면 하나님 없는 우리 자신을 고아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하며 그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측은히 보아 주시기를 소망해야 한다.

(2)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형편에 놓인 자에게 언제나 인자하셨다는 점을 들어 탄원한다. "고아는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을 수 있으며,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비 없는 자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도움받을 데가 없는 자를 도와 주신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의 믿음과 소망을 크게 격려한다.

 

 

 자비의 확약(1) (호세아 14:4-7)

 

앞에서는 돌아 오는 이스라엘의 기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 기도에 대한 평화의 응답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찾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의무의 길로 자기에게 돌아있는 자들을 자비의 길에서 꼭 만나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선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도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듯이(슥 1:13), 우리에게도 선한 약속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앞에 나온 말씀을 가지고 가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으며 그 말씀은 우리 믿음의 잔치가 된다. 후자는 전자의 말씀이 어떻게 상응하는지 살펴보자.

 

Ⅰ. 그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탄원하며 돌아오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순종하면 그의 진노가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것을 확언하신다. 이것이 여기서 약속되는 여타 모든 은총의 기초로 제시된다.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리니 이는 나의 노가 떠났고 따라서 모든 선한 것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사 12:13). 하나님이 죄인에게 크게 노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노여움은 풀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자. 그의 진노는 돌이켜 떠날 수 있는 노여움이다. 그 진노는 자기 불의로부터 돌이키는 자들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와 화해하며 자기의 온전하신 뜻과 화해하는 자들에게 화해를 허용하실 것이다.

 

Ⅱ. 그들의 불의를 제해 달으라고 기도하는가? 하나님은 그들의 패역(원의:물러남)을 고치겠다고 확언하신다. 그는 그렇게 약속하셨다(렘 3:22). 하나님께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것은 비록 영혼의 위험한 병이요 상처라고 하더라도 치료가 전혀 불가능한것은 아니라는 데 주목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이 치료를 약속하신 때문이다. 즉 패역한 죄인이 그들의 의원되신 하나님께 치료를 의뢰하고 그의 치료 방법에 응하기만 한다면 그가 그들의 패역을 치료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유하는 자비로써 그들의 패역하는 죄를 거치실 것이며 새롭게 하는 은혜로써 그들의 물러나는 결심(11:7)을 고치실 것이다. 그들의 불의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다.

 

Ⅲ.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받아 주시도록 기도하는가? 보라,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겠다" 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죄를 계속 범하는 동안에는 그들을 미워하셨다(9:15). 그러나 그들이 돌아 오며 뉘우치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며 진노를 그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흡족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도모하신다. 그는 즐거이(자유로이:흠정역) 사랑하신다. "이것은 절대적 완전한" 사랑을 의미한다(그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다). 그래서 이전의 노여움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아낌없는 사랑이다. 그는 그들에게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도량이 넓을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주는 일이나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을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즐거운 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는 타락의 날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고 말씀하셨듯이(11:8) 회개의 날에 "내가 어찌 너를 다시 받아들이겠느냐?" 고 말씀하시진 않을 것이다. 또 이 사랑은 공로로 얻지 않는 사랑이요. "예방적 사랑" 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무조건 사랑하신다. 그들이 사랑 받을 만한 공로나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기쁜 마음에서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다(신 7:7, 8).

 

Ⅳ.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을 주시며 자기들을 선하게 다니어 주시기를 기도하는가? 보라,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라" 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5절).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실 은총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이 네게 하늘의 이슬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창 27:28)는 것이 그들의 조상 야곱이 이삭에게서 받은 축복이었다. 이것은 곧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을 보증한다(엡 1:3). 그리고 이것은 패역의 치료에 뒤따라 나온다. 사유하시는 자비에는 항상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참 이스라엘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슬처럼 되어 주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그들을 가르칠 것이며 그의 교훈이 그들에게 이슬처럼 떨어질 것이다(신 32:2). 그는 그들에게 비와 같이 임하실 것이므로(6:3)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더욱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위로로써 그들의 원기를 북돋울 것이어서 그들의 영혼은 물 댄 동산 같을 것이다(사 58:11).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자에게도 이슬 같으실 것이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그가 이슬 같았듯이 참회개자에게도 그러하실 것이다. 이슬은 만나를 품고 있었다(출 16:14; 민 11:9). 성령의 위로는 이슬에 감추어진 만나와 같다. 하나님은 풍부한 이슬로 이스라엘을 먹이셨듯이 하늘로서 그들에게 떡을 주실 것이다(요 1:16).

 

2. 그 은총의 열매는 어떤 것일까? 그 은총은 그들에게서 어떤 결심을 산출할 것인가? 그들에게 풍성하고 즐거이 시여된 은혜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슬처럼 되어 주시고 자기 은혜를 방울방울 적하시키셨던 이스라엘들, 그 영혼들은 어찌 되는가?

 

(1) 그들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악하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하게 되었듯이 그들 역시 그 은혜에 의해 더욱 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어디에서든 점점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위로 자랄 것이며 더욱 번성할 것이다. 그들은 백합화 같이 필 것이며 자랄 것이다. 백합은 다른 구근 식물이 다 그렇듯 성장이 매우 빠르다. 백합 뿌리는 겨우내 땅 속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 이슬로 다시 기운을 얻으면 순식간에 쑥쑥 자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도 때때로 어린 회심자를 매우 빨리 성장시킨다. 백합은 제 키대로 다 자라게 되면 매우 아름다운 화초가 된다. 이와 같이 은혜도 영혼을 아름답게 만든다(겔 16:14). 새벽 이슬로 산출되는 것은 성결의 아름다움이다(시 110:3).

 

[2] 그들은 아래로 자라며 더 견고하게 될 것이다. 백합은 참으로 빨리 자라며 모양도 예쁘게 자라지만, 곧 시들어 버리며 사람들이 쉽사리 따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백합의 꽃과 함께 백향목의 뿌리도 가진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약속된다. "저가 레바논같이 즉 레바논의 나무처럼 뿌리가 박힐 것이라." 레바논의 나무들은 뿌리를 깊이 박으므로 절대로 뽑히지 않는다(암 9:15). 영적 성장은 대부분 뿌리의 성장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가 그리스도께 많이 의존하여 그로부터 수액과 미덕을 많이 뽑아 올리면 올릴수록 우리는 더욱 더 신앙적 원칙에서 행동하게 되며 그 신앙적 원리 속에서 더욱 견실하고 확고하면 할수록 우리의 뿌리는 더욱 깊이 박히게 된다.

[3] 그들은 사면으로 자라게 된다(6절). 그 가지는 사방팔방으로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포도나무같이 자랄 것이다(흠정역). 포도나무 가지는 다른 어느 나무보다 멀리 퍼진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로 비유되었다(창 49:22). 외부로부터 교회에 접합되는 자가 많고 유망한 세대가 일어날 때 이스라엘의 가지는 퍼지게 된다. 개개의 신자들에게 선행이 풍부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하며 온갖 선한 은사가 늘어날 때는 그들의 가지가 퍼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는 속 사람이 날로 새롭게 된다.

 

(2) 그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다 은혜롭고 열납받게 될 것이다. 은혜는 사랑스러운 것이어서 은혜의 소유자를 참으로 사랑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나무에 비유되고 있다.

 

[1] 보기에 좋은 나무.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다." 감람나무는 항상 푸르다.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도다" (렘 11:16). 규례와 법도는 교회의 아름다움이며 교회는 그 규례로써 현재나 미래나 늘 푸르다. 성결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마음으로 믿는 자는 입으로 시인하며 일치된 행실로 그 신앙 고백을 의롭게 하며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럴 때 그들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다(시 3:8).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은 의로운 나무에 대한 약속이다.

 

[2] 향기로운 나무. "그 향기는 레바논 같을 것이라" (6절).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7절). 이것은 그들의 조상 야곱에게 대한 칭찬이었다(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7). 교회는 온갖 향품이 나는 동산에 비유되며(아 4:11, 13) 그 모든 의복에서는 향기가 난다(시 48:5).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사람들에게 시인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령한 제사로부터 향기를 흠향하시며(창 8:21) 그들은 무수한 자기들의 형제들에게 용납받는다. 은혜는 영혼의 향품이며 이름의 향기여서 그 이름을 보배로운 기름처럼 만든다(전 7:1). "그 기념은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될 것이다" (다른 사본). 현재 소생하는 그들의 안락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라진 뒤에 남는 명예도 레바논의 포도주 같을 것이다. 레바논의 포도주는 향긋한 맛이 여운을 남긴다. 교회는 융성하며 그 믿음은 온 세상에 선포되고 화제가 된다(롬 1:8). 그리고 그 이름은 만세에 기억케 된다(시 45:17). 번성하는 성도들의 기억은 현재도 미래도 송축될 것이며 믿음으로 선한 증거(또는 소물)를 받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으며 유용할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로 비유된다. 이 나무들은 유용한 열매를 많이 내어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영광을 돌린다. 아니, 교회의 그늘은 즐거운 것이다(7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것은 하나님의 그늘이며(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메시야의 그늘(갈대아 주석은 그렇게 해석한다)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한다. 그들이 거하는 곳은 하나님의 그늘이며 그들은 거기서 안전과 편안을 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그늘 즉 교회의 그늘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약속은 교회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들의 것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고 자기 백성을 고수하는 자의 것이다. 뜨거운 볕에서 피난처만을 바라며 그늘로 도망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해당되지 않는다(시 27:4). 이것은 개개의 신자들에게도 적용된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오게 될 때는 그의 그늘아래 거하는 모든 자 즉 자녀와 종복이나 백성이나 친구들이 다 번성하게 된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눅 19:9). 이 교회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들은 돌아 올 것이다. 그들의 저상한 사기는 돌아 올 것이며, 그들이 원기를 회복하고 편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내" 영혼을 소생케 하실 것이다(시 23:3). 그들은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다. 씨를 뿌리면 먼저 죽어 다시 소생해야 많은 결실을 맺는다(요 12:24). 하나님이 백성은 곡식이나 포도주처럼 세상의 축복이 되리라고 약속된다. 우리가 우리 세대 사람들에게 쓸모있고 도움을 준다는 것은 여간 크고 귀중한 자비가 아니다. 거기에는 위로와 명예가 뒤따른다.

 

 

자비의 확약(2) (호세아 14:8,9)
 
이제 우리는 본 예언서의 결론을 들어보자.
Ⅰ. 본문은 에브라임에 대해 말하며 에브라임에게 말하고 있다(8절).
1. 에브라임의 회개와 개선.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혹자가 읽듯이 하나님께서는 왜 우상 숭배를 끊어야 하는지 에브라임과 토론하시며 설득하신다." 에브라임아! 나와 우상이 무슨 상관이냐? 나와 우상 간에 무슨 일치점이 있느냐? 나와 우상이 어찌 조화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느냐?(고후 6:13, 14)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나와 언약을 맺으러 나아오려면 우상과의 연합을 끊어야 한다." 우리가 읽는 대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그런 경지까지 데리고 오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에브라임의 말이(하나님이 그 말을 에브라임의 마음에 넣어서 말하게 하신다)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에브라임은 "내가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내 신이라 하지 아니 하리라" (3절)고 약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약속보다 죄를 굴복시키는 데 훨씬 더 확실하고 힘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친히 자기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며(시 119:122) 이 말을 에브라임의 마음과 입에 넣어 주신다. 우리가 하시라도 어떤 좋은 말과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 언행을 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주체자는 하나님이시다. 에브라임은 우상을 자기 신들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엄숙히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브라임으로 하여금 다시는 우상과 관계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하신다. 에브라임은 우상을 철폐하게 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도 극도의 혐오감으로써 그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생활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죄를 등지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에브라임은 우상과 연합하였고(4:17), 우상을 너무나 좋아하여 누가 보더라도 우상과 사이가 틀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역사하셔서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는 우상을 사랑한 만큼 그에 비례하여 우상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2) 성화(聖化)된 고난의 혜택. 에브라임은 우상 숭배 때문에 아픔을 당했다. 우상숭배는 에브라임에게 이런 저런 심판을 가져 왔는데 결국 그 열매는 자기 죄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사 27:9).


(3) 회개의 속성. 회개는 다시 죄와 관계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참회자의 언어는 이렇다. "나는 죄와 관계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나는 죄를 충분히 맛보았다. 이제는 죄를 미워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는 결코 그따위 죄와 관계를 맺지 않겠다. 아니, 죄의 기회와도 상관하지 않겠다." "너는 네 우상에게 '나가라'고 말할 것이며 시험하는 자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할 것이다" (사 30:22).


2.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은혜로이 주목하기를 기뻐하신다. "내가 저를 듣고 돌아보았도다" (흠정역). "내가 저를 들었다. 그래서 돌아보리라" (그렇게 읽는 이도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죄인의 참회하는 생각과 결심을 인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죄인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의 참회를 기대하며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며(흠정역, 욥 33:27)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렘 8:6). 그리고 회개의 기미라도 엿보이면 그는 즐거워하신다. 에브라임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탄식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된다(렘 31:18, 20).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가 돌아오는 탕자를 반가이 맞듯 참회자를 자비로이 맞이하신다. 그는 에브라임을 돌아보았다. 이것은 에브라임이 참회의 고백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와 선한 심사를 계속할지 않을지를 보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에브라임을 돌아보신 것은 그의 위급한 형편을 따라 그에게 유익을 끼치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3.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위로하고 그의 결심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에게 자비를 주시기로 내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분이 될 것이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이 나무로 비유되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무에 비유하신다.


(1) 그는 그 백성에게 나무의 가지 같으실 것이다.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곧 네게 그러리라." 중동에서는 잣나무가 심히 크고 무성하여 햇볕과 비를 피하게 해 준다. 하나님은 모든 참회자에게 기쁨과 방어가 되어 주신다. 그들은 그의 보호와 세력 아래서 안전하게 거하며 편안히 지내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의 상황이 요구함에 따라 태양(Sun)과 방패(Shield) 또는 그늘(shade)과 방패(Shield) 또는 그늘아 심히 기뻐할 것이다(아 2:3). 하나님은 온갖 기후에 상응하는 전천후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사 4:6).


(2) 그는 그 백성에게 나무의 뿌리 같으실 것이다.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이것은 우리가 받는 열매(우리는 모든 위안물을 다 하나님 덕으로 얻는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 우리가 맺는 열매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힘을 얻어 우리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어떤 의의 열매를 맺든지 간에 그 모든 칭찬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역사하사 선한 것을 지향하고 행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Ⅱ. 본서의 예언을 듣고 읽는 모든 자에게 대한 말.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닫겠느냐?" 아마 선지자는 설교를 마칠 때면 으레 이런 말로 끝맺었을 것이다. 이제 본 예언서를 마치면서도 마찬가지로 결론을 내린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가 전한 진리로 이득을 얻는 자의 특성. "누가 지혜로우며 총명한가? 그는 이런 일을 깨달으며 알리라." 이런 일들을 이해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그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자임을 증명하며 그럼으로써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다. 만일 이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무의 이행에 지혜롭고 실천적 신앙에 총명한 자는 다른 사람들로서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진리와 섭리를 아주 깨닫기 쉬운 것이다(요 7:17). 여호와의 비밀은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흠정역, 시 25:14). "누가 지혜가 있는가?" 이 말씀은 소원과 불평을 다 암시한다. 즉 이런 일들을 듣고 읽는 자는 그것을 깨닫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선지자의 소원이 암시되고 있는 동시에(그들이 지혜로우면 좋으련만!) 그런 자가 드물다는 불평도 들어 있다(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2. 여기에서 교훈되고 있는 일들의 훌륭함에 대하여.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닫고 아는 것은 우리의 지혜요 의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교훈의 길로 행하도록 요구하신다. 그의 교훈은 정당하며 영원한 이성의 법칙과 일치하며 공평의 규칙과 부합하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으로 직행하는 경향을 갖는다. 하나님은 섭리의 길로써 우리를 향해 오신다. 그의 섭리는 모두 정당하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는 어떤 잘못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일은 전부가 잘 행해지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대한 그의 심판이나, 회개하는 자에게 대한 은총이나 다 정당하다. 그의 심판과 은총이 아무리 왜곡되고 곡해 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일들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공평하다.


3. 그러나 사람들은 이 교훈을 각기 상이하게 이용한다.


(1) 선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직한 도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며 또 그럴 것이다. "위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의인은 교훈에 있어서나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좇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나 역사에서나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할 것이다. 또 그들은 그 두 가지와 다 잘 화합할 것이며 그 양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에 잘 순응할 것이다. 의인은 그들의 큰 목적지를 향한 그 길로 행할 것이며 그 길에 미달하지 않을 것이다.


(2)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정직한 길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될 것이다. "죄인은 그들 자신의 그릇된 길에 걸려 넘어질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정직한 도에도 걸려 넘어질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정직한 도에도 걸려 넘어지리라." 어떤 자에게는 초석이신 그리스도께서 다른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시며, 걸리는 반석(롬 9:33)이 되신다. 생명을 주기로 작정된 것이 남용으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사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도 그들이 적당히 활용하지 않으면 그들을 죄중에서 더 완악하게 하며 그들의 파멸에 기여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 입의 말씀과 그 손의 심판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도 달라진다.


Recipitur ad modum recipientis-즉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질에 따라 영향을 달리한다. 동일한 햇볕이 밀납을 녹이기도 하고 진흙을 굳게도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에 걸려 넘어지며 만세반석 위에서 터지는 자들은 모든 죄인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 실족을 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길르앗의 향유로부터 독약을 빠른 자들이다. 시온에 있는 죄인은 이것을 두려워할지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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