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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간략하게 보는 아모스 5 - 9장

by 은총가득 2021. 7. 18.

 

아모스5장  예배와 삶을 일치시키라

 

애가는 성경에서 종종 발견되는 문학양식으로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서,

혹은 한 민족이 멸망당했거나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 사실을 슬퍼하는 의미로 불렀던 노래이다.

아모스가 이 애가를 지어 부른 것은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치리하던 때로,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매우 번영하였다.

이러한 때에 아모스가 애가를 지어 불렀으니,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모스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모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로서,

뿌리 깊은 우상숭배 관습을 비롯해서 가증스러운 종교적 범죄와,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불법과 탈법이 판을 치는 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이 필연적으로 참담하게 몰락하게 될 것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북이스라엘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번영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번영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영적인 빈사 상태를

선지자는 직시하고 애가를 불렀던 것이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눈을 가진 것 같지만,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영적, 육적 상태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진다.

며칠 굻어 심히 굶주린 사람에게는 아마 모든 것이 먹는 것과 관련되어 보일 것이다.

금식을 해 본적 있는가? 기도원에서 며칠 금식해 보면 감각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식당에서 밥 짓는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멀리 언덕 아래 쓰레기장에 버려진 음식냄새까지 코끝에 진동하고,

굴러다니는 자갈돌은 모두 삶은 감자처럼 보인다.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것도 달라진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지금 아모스는 바라보고 애가를 부르고 있다.

천국을 소망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리 바라본다는 뜻이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현세에 얽매여 보이는 것만 추구하고

그것으로 낙을 삼고 살아간다면,

어찌 그런 사람을 부활신앙, 천국소망을 가진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 시대의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선지자적 통찰력은

겸손의 자리에서 철저한 참회와 결단의 뜨거운 눈물로 자신을 씻어낼 때 열리지 아니할까?

 

8,9절은 역사의 주인 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시로,

애가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시가 갑자기 들어간 것 같지만,

실은 이 한 구절의 찬양시로 인해, 아모스가 선포하는 모든 심판과 구원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묘성이라고 번역된 ‘키마’는 많은 별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라틴어로는 ‘플레이아데스’인데,

일곱 개의 큰 별을 비롯하여 40개 이상의 별자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삼성이라고 번역된 ‘케실’은 오리온이라고 번역되는데,

오리온별자리는 가운데 세 개의 별이 나란히 놓여있다.

하여튼 묘성과 삼성을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조화롭게 운행되는 별자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시간을 주관하시며

자연질서를 총체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성도들마다 신앙고백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오늘 성경에 묘사된 것과 같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고백하고,

어떤 사람은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고 소돔고모라를 유황비로 다 태워버리며,

뒤돌아봤던 롯의 아내를 소금기둥으로 만들기도 한, 무서운 하나님으로 신앙고백하기도 한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한때는 같이 있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자,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 내가 느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이름조차 감히 부르기 어려웠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했다.

‘아바’는 우리말로 ‘아빠’이다. 다시말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만큼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도록 해 주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솔히 무례히 행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시무시한 심판자로만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가까이 계시는 주님, 오늘도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마치 탕자가 아버지 품안으로 다시 돌아가듯, 모든 무거운 인생 짐을 내려놓고,

주님 품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된 특권이 아닐까?

 

24절은 아모스의 핵심구절이다.

하나님 백성들의 예배와 일상생활은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분리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모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를

행복과 번영을 얻을 수 있는 기복의 수단으로 오해했고,

제사는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는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못했다.

‘예배 따로, 생활 따로’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실천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의와 요구하신 공의는

더 이상 저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주변 여러 이방 민족의 우상들을 더 즐거이 섬겼다.

26절에 나오는 식굿과 기윤은 앗수르의 천체 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저들의 가증한 예배와 절기행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원하신 것은, 번제보다 정의를, 제사보다 순종과 공의를 더 원하셨다.

이같은 사상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신앙관이다.

 

혹시 오늘 우리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예배와 신앙행위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우리의 생활이 아무런 연관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증한 신앙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배를 나의 삶과 일치시켜야만 한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칭찬받는 자녀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예배와 삶을 일치시키라고 강조하며 명령하고 있다.

어떡하면 좋을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칭찬 받는 삶의 지름길이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수많은 예배와 세련된 프로그램들과 아름다운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와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기도)

주님,

열심히 신앙생활한다는 것과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배가 삶으로 이어지는 조용한 개혁들이

교회마다 일어나게 하소서.


상아장식품

 

 

모스6장  싫어하지 마소서 미워하지 마소서

 

‘시온에서 안일한 자’는 남유다 왕국의 정치지도자를 가리킨다.

아모스는 주로 북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남왕국 역시 그의 책망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남유다 백성 역시 북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영적 안일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을 배반하며

우상숭배와 심각한 도덕적 타락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란 표현은,

산 위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당시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마리아 성은 당시 세계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던 앗수르 군대의 공격을 받고서도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무려 삼년이나 항전하기도 했다.

더욱이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아래 군사적,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하며

그 지역에서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니 마음이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은 어떨 때 마음이 든든하다고 느끼는가?

배고플 때는 한 끼 식사만으로도 사람들은 든든함을 느낀다.

예전에는 겨울이 오기 전 창고에 연탄 한 삼백 장 넣어 놓으면 사람들은 든든함을 느꼈다.

사글세방을 전전하다 전셋집에라도 들면 서민들은 방에 누워 든든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 다른 모양이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마음이 든든하리라 생각하는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 자신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재물이나 권세, 인맥 등이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난공불락의 요새 사마리아성도 앗수르의 공격 앞에 결국에는 함락되고 말았듯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의지하는 그 무엇도 영원한 반석이 될 수 없다.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맹세나 철학이나 사상도 시간과 함께 스러져 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정으로 든든한 반석인지를 깨닫고 고백하기 전에는,

흔들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지배 계층이 누렸던 극도의 사치와 환락을 책망한다.

상아는 이스라엘 자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수입품으로,

당시 극한 사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값비싼 것이었다.

어린양과 송아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고기 중에서도 가장 부드럽고 연하여

먹기 좋은 최고급 음식에 속한다.

그 당시만 해도 음악이나 악기는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고,

그 사용 대상이나 범위도 한정되어 있었다.

다윗이 악기를 제조하고 음악을 연주한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건히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음악을 자신들의 향락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기 등장하는 대접이란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릇이 아니라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그릇을 말한다.

물론 당시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을 가져와서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성전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마찬가지로

금과 은으로 고급스럽게 만든 그릇을 제작하여 그것으로 술을 마시는데 사용했다는 말이다.

참으로 저들의 사치와 환락과 방자함이 코를 찌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소에 기름을 몸에 많이 바른다.

여기 나오는 ‘귀한 기름’이란 외국에서 수입해야만 하는 나드향과 같은 최고급 향유를 말한다.

따라서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이런 고급 향유를 일상용품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향락적이고 사치스러웠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

더욱이 환난이나 심판이 예고되었거나 고난을 당했을 때,

혹은 통회자복할 때는 기름을 바르기보다 재를 뒤집어쓰는 것이 마땅한 태도였다.

하지만 아모스의 심판 메시지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한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아모스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아모스 선지자 당시 북이스라엘 사회 전반의 모습이

오늘과 흡사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순간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바른 길을 찾아,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이다.

안 그러면, 바로 우리가 시온의 안일한 자들이요,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교만하고 방자한 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경제적, 군사적 번영 때문에 교만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하기보다 영적 무감각과 사치, 향락에 빠져 있던 북이스라엘!

저들은 현재의 번영이 영원하며, 자신들은 결코 멸망치 않으리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일으켜

북이스라엘 전역에 심판을 내리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아모스는 연속된 세 편의 설교(3-6장)를 통하여,

왜 선민 북이스라엘이 멸망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그 필연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또 그 멸망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나, 형식적인 종교행위, 경제·군사적 번영이 아닌,

오직 여호와 앞에서 회개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길뿐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거듭된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은

세상의 열락과 안일에 빠져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아모스 선지자는 세 편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멸망의 심판을 최종 선언하고 있다.

아모스의 예언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의 전 영토가 짓밟힘으로써 성취되었다.

또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민족 분산정책으로 인해

여러 이방 민족들과 혼합되었으며(왕하17:5,6,24-41),

이후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며 천대받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스4:1-3;요4:9).

 

지루하게 계속 되는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 때문이 아니라,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이 땅의 온갖 소식들 때문에 불쾌지수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신문, 방송,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오늘 이 나라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라!

하나같이 통탄할 소식들이건만, 이 땅 백성들은 이력이 났는지 무감각하다.

다른 나라도 우리와 사정이 같을까? 66억 각 나라 백성들은 오늘 무슨 일이 화제일까?

각 교단마다 총회를 열고 있는데, 총대들은 오늘 어떤 기도제목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까?

아모스 선지자는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것일까...

 

(기도)

주님,

이 나라, 이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 끝까지 붙들고 눈물로 중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모스7장 뜻을 돌이켜 주소서

 

아모스는 이제 7장부터 9장까지 다섯 가지 환상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멸망 과정과 멸망 이후의 참상을 예시하여 보여주고 있다.

먼저 1절부터 9절까지는 세 환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이 환상들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과정을 시간 순으로,

또 하나님의 징계가 약한 것에서부터 강한 순서대로 보여준다.

이 중 처음의 두 환상, 즉 메뚜기와 불의 환상은

두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최종 경고와 함께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도 선지자 아모스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보여준다.

세 번째 다림줄 환상은 계속된 긍휼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완고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끝내 멸망의 심판을 시행하게 된 사실을 보여준다.

세 환상을 통한 예언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북이스라엘은 BC745년과 733년에 있었던 앗수르의 1, 2차 침입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다가,

BC724년 3차 침입을 받아 3년 동안의 접전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아모스를 비롯 모든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들의 예언들이

역사 속에서 한 치 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처럼,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성취의 때를 기다리며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믿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충격이 그 어떤 나팔소리보다 크게 심령을 때리기 때문에,

잠들지 않고 경성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 나는 성경말씀이나 설교말씀을 들을 때 어떤 심정으로 듣고 있는가?

만일 말씀에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정신 차려야지!’ 하는 경각심이 들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아모스는 거듭 범죄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아모스의 이같은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두 번이나 유보되었다.

일찍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던 북이스라엘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긍휼을 간구했던

아모스의 기도에도 응답하고 계심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비록 오늘의 세상이 심히 타락하고 교만하여

도저히 어떤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부패한 세상을 향해 성도들은 무조건 정죄할 것이 아니라

진정 세상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말고 저들을 위해 중보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또한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사역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뭘 하고 계실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 놓고 계실까?

주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한 중보자로서

성도들을 위해, 또 세상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졌을 때,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형상 둘을 만들어 단과 벧엘에 두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숭배할 것을 백성들에게 강요했다.

그때부터 단과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는데,

단에 세운 성소는 너무 북쪽 변두리에 치우쳐 있어서 백성들이 찾기에 불편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벧엘의 성소가 북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아모스는 바로 이 벧엘 성소에서, 그 성소를 찾아오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북이스라엘의 회개와 멸망에 대해 예언하고 있었다.

그러니 벧엘 성소의 제사장들은 매일 아모스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 아마샤는 벧엘 성소의 우두머리로 북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같은 지위에 있는 자로,

아모스로 인한 이 같은 사태를 계속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로보암 2세에게 남유다에서 온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왕의 죽음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등 반역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그의 고발 내용은 아모스의 예언사역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모스의 예언은 반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여로보암 2세 개인의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언한 적도 없었다.

아마샤가 자신의 주장에 유리하도록 아모스의 예언을 고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이후 그가 왕의 답변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불확실하나,

아모스에게 더 이상 벧엘과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하지 말고 남유다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후일 아마샤는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 거기서 죽임을 당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일을 행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이를 방해하는 악한 세력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선포될수록, 하나님의 일이 힘 있게 펼쳐질수록,

현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은 그만큼 더 위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핍박과 불이익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담대히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핍박이 클수록, 방해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크게 일어나며,

놀라운 은혜가 준비되어 있음을 명심하고 결코 포기하지 말고

힘차게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 나의 영혼이 잠들거나 죽지 아니하고 살아나며,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덧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다.

 

(기도)

주여,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고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의 계승자들로 자랄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소서. 이 시대가 믿음은 뒷전입니다.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최첨단 무기와 군인들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보우하심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릎 꿇는 하나님의 정병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가슴이 뜨거워진 사명자들이 선교의 횃불을 높이 들게 하소서.


 

 

아모스8장 말씀이 닫히기 전에

 

‘여름과일의 환상’은 앞에 나온 세 번째 다림줄 환상과 마찬가지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최종적인 재앙, 즉 멸망에 대한 경고이며,

또한 그러한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여름 과일을 거두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1년 추수 중 맨 마지막에 있는 일로서,

한마디로 ‘끝’이 이르렀다는 말이다.

여름 과일이 나무에 달려 있을 때는 참으로 탐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이것은 북이스라엘이 당시에 누리고 있던 군사적, 경제적 번영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다 따버린 나무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뿐만 아니라 수확하여 광주리에 담긴 열매는,

보관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상황 아래서는

금방 먹지 않으면 곧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름 과일 한 광주리는, 현재는 정말 보기 좋게 번성한 듯 보이나,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이 실현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이 어떤 비참한 모습에 처하게 될지를 상상케 하는 계시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는

다름 아닌 북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지도자들과 지배계층, 상류층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은 월삭과 안식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월삭이란 매월 첫날에, 지난 한 달 동안 지은 죄를 사함 받고,

아울러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감사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날이다.

따라서 이날에는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상적인 노동이 중지되었다.

그런데 불의한 북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장사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던 지배계층들은

월삭 때문에 하루 장사를 못하게 됨을 아쉬워하며,

율법의 규례를 오로지 수입을 올리지 못하는 날로만 여겨 불평했던 것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다. 저들은 안식일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복된 날이 아니라,

곡식 매매를 금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는 귀찮고 성가신 날 정도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저들의 태도는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얼마나 물질숭배에 젖어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곡식 저울을 속이거나 그릇을 조작하여 부당하게 폭리를 취했으며,

소액의 빚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난한 동족을 종으로 사고팔았으며,

양식으로는 부적합한 찌꺼기 밀까지도 가리지 않고 비싼 값으로 가난한 동족들에게 팔아먹었다.

북이스라엘 부유층의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한

불신앙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저들은 탐욕을 위해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도,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도 다 무시하고 파괴해 버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며 저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날’이란 여호와의 날, 곧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에 대해 결정적 심판을 내리시는 날을 뜻한다.

그런데 아모스는 마치 이날을 일식현상을 연상케 하는 자연현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북이스라엘 심판의 날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 최후 심판의 날에 있을 대재앙 때도 동일하게 나타날 현상이다.

따라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면서 동시에

그보다 훨씬 먼 미래인 세상 종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상에 나타날 한 사건에 대해 예언하면서 동시에

세상 끝날 사건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성경 예언의 복합성’이라고 한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종말 예언은

AD70년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멸망당할 예루살렘의 종말에 대한 예언임과 동시에

세상 끝 날의 예언이라 할 수 있으며,

요한계시록의 상당수 예언 역시 당시 로마제국과 관련된 예언임과 동시에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사장들에게서 율법을 교훈 받고,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 없는

영적 기갈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을 아모스가 예언하고 있다.

실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의 영혼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

실례로 불순종한 죄로 징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했던 사울왕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영적 고갈 상태에서 답답하여 신접한 여인까지 찾아가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북이스라엘도 이제 때가 너무 늦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간절히 찾고 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고,

오로지 절망적인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젊은이들조차 지쳐서 쓰러지고 말 것인데,

그것은 삶의 해결책을 여러 우상들에게서 찾았지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은 북이스라엘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던 우상숭배의 중심지이고,

브엘세바는 남유다의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는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에 이스라엘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전역의 모든 우상들은 완전히 훼파될 것이며,

아울러 그것에 의지하여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말씀이 멀어지게 되고,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 것이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말씀에 즉각 반응하며 살아가야 할까?

왜 세상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늘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며,

성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까?

생명과 소망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기도)

주님,

이 땅에 말씀이 넘쳐흐르는 줄 알았습니다.

TV, 라디오, 인터넷... 수많은 예배들과 모임들...

북이스라엘에 제사장이 없었습니까? 예배와 종교의식이 없었습니까?

말씀이 닫히기 전에, 절망적인 침묵이 찾아오기 전에,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소서.


 

 

아모스9장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소서

 

성전 파괴 환상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로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멸망을 확정짓는 마지막 환상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환상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 어딘가? 그것은 북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유다이다.

따라서 성전 파괴 환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단지 북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유다에게도 반드시 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환상대로 남유다도 결국 바벨론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처소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앙상태에 따라 성전 예배가 살아나기도 하고

성전 예배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였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못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신앙은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성전 파괴 환상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여호와 신앙을 떠났기 때문에

심판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인 처소로서 굉장히 중요한 곳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신앙관계에 있을 때에만 그 장소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예루살렘 성전 그 자체가 그들의 구원의 보증물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성전 파괴의 환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만나기 위해 택한, 구별된 처소인 성전이었지만,

그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비록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범죄할 때는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환상은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귀한 깨우침을 준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은 예배당 건물을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처럼 신성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예배당 건물을 비롯해서 교회의 여러 시설물들은 참으로 교인들이

소중히 간수하고 다루어야 할 시설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조차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훼파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중대형 교회는 지난 한 세대동안 하나님께서 물 붓듯이 쏟아부어주신

물질적인 축복을 주체하지를 못하고 그동안 예배당을 새로 짓고 꾸미기에 바빴다.

수십억도 모자라 수백억짜리 예배당을 번쩍번쩍하게 지어놓고 박수치며 기뻐했다.

한국의 감리교를 대표하는 서울의 모 교회는 새로 지은 깨끗한 예배당 건물을

불과 5년 만에 다 부수고 화려하게 새 예배당을 건축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는 불신 백성들로부터 가장 기피하고 싶은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국에 새로 지은 예배당 수가 도대체 얼마인가?

 

그러나 예배당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시설을 최신으로 바꾸는 것이 결코 종교개혁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당 세우지 말자거나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시설 바꾸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동안 한국의 수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을 조금 수수하고 검소하게 건축하고,

건축비의 한 20~30%정도를 아껴서, 아니 한 10~20% 정도만이라도 아껴서,

이 나라의 소외된 곳, 고통당하는 사람들,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용했더라면,

오늘처럼 교회가 설 자리를 잃어버릴 지경까지 내몰렸을까?

교회를 짓는 그 열심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예배당을 아끼고 꾸미는데 들이는 노력들을

조금 나누어 세상을 섬기고 베푸는데 사용했더라면,

한국의 기독교가 오늘과 같은 위기에까지 이르렀겠는가?

 

순서가 뒤바뀌고 하늘의 질서가 무시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냐 사마리아냐 하는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바로 우리 자신이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이라고 깨우쳐 주셨다.

교회당을 깨끗하고 시대에 뒤지지 않게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먼저, 진정한 성전인 바로 우리 자신의 심령의 전을 바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참으로 온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이 순서, 이 질서가 바로 세워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어리어리하게 대리석과 금빛으로 예배당을 꾸민다 할지라도, 불과 몇 년 후면,

관광지나 심지어 술집으로 변해버린 유럽의 성당, 예배당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먼저 자신의 심령의 전을 바르게 세우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림으로써,

이 땅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새로운 종교개혁의 역사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일관되게 북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했던 것과는 달리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약속을 11절 이하에서 선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시고,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할 것이며,

풍성한 물질의 축복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며 그 왕국을 영원히 보존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물론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한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다.

 

후일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을 보고하는 예루살렘 공의회 자리에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사실에 대해,

바로 오늘 본문 아모스9장11절 이하를 인용하여,

메시아 왕국의 도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모스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였고 나라가 회복되었으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함으로써,

이후 2천년동안 유리방황하는 또 다른 고난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곳곳에서 세상의 종말 이전에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불리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역함으로써,

또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우리 역시 처절한 심판을 면하기 어렵지 않을까?

왜 새벽 이른 시간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수많은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한 채,

제대로 믿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기 위해 이토록 몸부림쳐야 하는가?

알곡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성실하심을 믿고 있기에...

온갖 세상의 어지러움과 패역함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시고

심판과 함께 구원과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을 신뢰하고 있기에...

 

(기도)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며

모세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신 주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니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보우하심을 깨닫지도 감사치도 않는 완악한 세대가 도래했으나

아직도 이 강토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눈물 뿌리는 주의 백성들의 기도를

외면치 말아 주소서, 주님.

말씀이 닫히지 않도록 사명자들이 광야의 소리를 듣게 하시고,

높이 높이 예배당 세우는 도모들을 멈추고

교회의 문을 열어 백성들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마당을 열게 하소서.

나와 가정을 살려내고 이 시대를 살려내는 일은

예배와 삶을 일치시키는 데서 시작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드려지게 하소서.

싫어하지 마소서 미워하지 마소서.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게 하소서.

주님...

 

작성자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