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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간략하게 보는 아모스 1-4장

by 은총가득 2021. 7. 18.

 

아모스1장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아모스는 예루살렘 남쪽 18km 쯤 떨어진 유대광야 드고아에 살았다. 그는 이사야처럼 왕족 출신도 아니고 예레미야처럼 제사장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평범한 목자로 양을 치고 뽕나무를 가꾸어 먹고 살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살던 아모스를 불러내셔서 북왕국 이스라엘로 보내셨고, 아모스는 북왕국 수도 사마리아와 금송아지 우상이 있는 벧엘에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했다.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 출신으로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했던 유일한 선지자이다.

 

아모스가 선지자로 활동할 당시 남유다의 왕은 웃시야였는데, 웃시야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무려 52년동안 남왕국 유다를 통치했으며, 말기에 있었던 실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왕이다. 한편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었는데, 그가 오래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나름대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나라가 크게 번영하여, 겉으로는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에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그 당시 북쪽에서는 불과 한 세대 뒤에 북왕국을 멸망시킬 앗수르 제국이 크게 발흥하고 있었다. 이에 아모스는 배부르고 편안하여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던 북이스라엘을 향해, 조만간 아주 강한 적군이 쳐들어와 그들을 사로잡아 갈 것이라고 선포했다.

 

특히 아모스는 왜 선민인 북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침략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지, 그 이유도 직설적으로 고발하고 있는데, 사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정치적, 경제적 번영 자체가 곧 하나님의 축복의 전부인 양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같은 경제적, 정치적 호황이 계속되자, 특히 부유한 상류층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일신상의 안일만을 위하여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고, 지주들은 세법을 악용하여 가난한 자를 착취하였으며, 정의를 상실해 버린 재판정에서는 의인 학대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생활은 단지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으며, 단지 제사와 절기를 형식적으로라도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자신들을 영원히 멸망치 않고 번영하도록 지켜 보호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저들은 지극히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며, 이방 열국에 대해서는 장차 ‘여호와의 날’에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 이방인의 우상들을 자신들의 탐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섬겼다. 한마디로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도, 수평적인 인간들과의 관계도 모두 파괴해버리는 불의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이처럼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의와 공의를 땅에 내팽개치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의로운 삶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총체적인 부패 상황이 지속되는 한,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선민이라 할지라도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고 멸망 가운데서 구원받을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어느 정도 공의로운 세상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여러 면에서 아모스 당시의 북이스라엘 사회보다 훨씬 그 타락의 정도가 심한 것이 실상이다. 그런 점에서 아모스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말씀임에 틀림없다. 아모스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심령의 귀를 열어, 이 어두운 시대에 영적으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다. 

 

일반적으로 다른 선지자들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 뒤에, 이방 여러 나라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것과는 달리, 아모스는 이방 열국에 대한 심판을 먼저 선언하고 난 후에 남유다와 특히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이같은 순서를 택한 것은, 아마도 아모스가 남유다 출신이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남유다 출신의 선지자가 어떤 편견이나, 잘 살고 있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시샘으로 그같이 심판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모스는 먼저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다섯 개 나라에 대한 심판을 1장에서 예언하고 있는데, 제일 먼저 북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람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둘째는 북이스라엘 바로 서편으로 자리잡고 있는 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 그리고 셋째는 북이스라엘 북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넷째는 이스라엘 남쪽 사해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에돔에 대한 심판 예언, 그리고 다섯째는 북이스라엘 동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암몬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이스라엘 주변의 이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까닭은, 예를 들면, 전쟁을 하면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등 하나님 보시기에 잔악무도한 일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은 하나같이 오래 세월, 선민 이스라엘을 사사건건 대적하고 압제했던 자들이었다. 저들에 대한 아모스의 심판 예언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는데, 앗수르제국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BC722년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이 이루어진 BC331년 사이에 이 나라들은 모두 패망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로,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제일 괴롭힌 나라들이다. 특히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들이며,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혈육으로 볼 때, 형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들이 이스라엘을 심히 괴롭혔으며,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들이 이해가 상충됨으로 인해, 그토록 오랜 세월을 죽자살자 싸웠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나라도 마찬가지고, 한 교회, 한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화평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인간세상에서는 이처럼 가장 가까운 이웃이 가장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적이요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혹시 가까운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다면, 이유야 무엇이든간에, 만일 내가 진정으로 성령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평의 사람이라면, 화목의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 교회 안에서조차,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교우들 간에 불협화음을 만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는 천국을 배우고 천국생활을 연습하는 곳이다. 그런데, 모든 불화와 시기다툼미움이 사라진 천국생활을 연습해야하는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되지 못하고, 화목하게 생활하지 못한다면, 그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지 아니할까?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라는 증거는, 바로 오늘 내 자신의 삶 속에 드러나 있다. 지금 이대로 신앙생활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신속히,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막힌 담을 과감히 허물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안 그러면, 나의 예배, 나의 찬송, 나의 기도,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도)

주님, 

아모스의 말씀들이 나를 향한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뜨거운 불길이

내 삶을 송두리째 번제로 태우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의 화목의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아모스2장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구약성경에 보면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반열에 오르기도 했으나,

대체로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을 적대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솔로몬 시대에는 모압 족속이 섬기던 그모스 신의 우상이

이스라엘 전역에 유포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모스 선지자는 모압의 죄를 먼저 지적한 후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그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는 없지만,

모압 사람들은 아마도 전쟁 중 이웃나라인 에돔 임금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뼈를 불살라 재로 만들어 담을 회칠하는데 사용했던 모양이다.

비록 이것이 선민 이스라엘에게 행한 악행은 아니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끔찍한 일을 행한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벌하신다.

결국 모압은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나바티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멸절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모압 족속과 같이 인간에 대해 잔혹하게 행하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인 죄악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가끔 가족을 폭행하는 등,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크게 꾸중들을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친절하고 인자하게 행하며

사랑으로 서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주변 이방에 대한 심판 예언에 이어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을 선포하는데,

여기서 아모스는 이들이 비록 하나님의 선민이라 할지라도

범죄한 이상 이방 열국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그 죄목을 지적함에 있어서는 이방 국가들과 차이를 보인다.

먼저 남유다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고 그 율례를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율법을 주셨기 때문이다.

타락한 온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만방에 전해야 할,

유일한 제사장 나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멸시한 것은,

곧 자신들의 존재 의의와 근거를 무너뜨리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행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땅끝까지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의무사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포기하지 말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모스는 6절부터 돌연 주 예언 선포 대상 국가인 북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한다.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심판 예언을 흡족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을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신들을 향한 심판 예언 앞에 할 말을 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족을 종으로 사고 팔 수 없게 율법으로 정하셨다.

하지만 저들은 정말 얼마 안 되는 빚(신 한 켤레 값)을 갚을 수 없다고 해서,

너무나도 쉽게 가난한 이웃들을 팔아 넘겼다.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자들을 제대로 보살피기는커녕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았다!

한 젊은 여인은 창기가 아니라 빚을 졌거나 자립할 능력이 없는 어떤 여인이다.

이 여인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동시에 능욕을 당한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에 대한 이 같은 무자비한 행동은

저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저들은 모든 제단 옆과 신전에서 저당(전당) 잡은 옷을 깔고 누우며

벌금(빚 대신 받은)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한다.

 

애굽 종살이에서 구해내어, 수많은 힘 있는 족속들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으며,

선지자와 나실인들을 세워 그토록 바르게 살도록 이끌었건만,

도대체 이러고도 너희들이 어찌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족속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징계를 받을 것이다!

 

(기도)

주님,

일제 식민지배와 육이오 전쟁의 도탄에서 이 민족을 건져내어

오늘 여기에 이르게 하셨는데,

이 민족의 죄악이 심히 깊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들이 초심을 잃고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도와주소서. 남은 자들을 더욱 강건히 세우시고

기도의 눈물로 새로운 소망을 열어가게 하소서.

 

 

 

아모스3장  너희는 이 말씀을 들으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 말씀을 들으라’ 하고 시작되는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는,

마치 판사가 법정에 선 피고인을 향하여 판결문을 낭독하는 듯한 엄숙한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2절에 나오는 ‘안다’는 말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경험을 통해 상대를 깊이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족속 가운데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시고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며 사랑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은 늘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 때문에 자기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지위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특권을 내세우는 데는 빨랐으나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는 일은 뒷전이었다.

 

사람 모이는 곳에 가면 꼭 이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나 회사, 지역사회, 교회,

심지어 국가들 가운데도 보면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 한결같이 꼭 무슨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도발적이고 비협조적이다.

한마디로, 이것이 바로 변화 받지 못한 옛사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 역시 누구도 예외 없이 이와 같은 구습의 흔적이 남아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죽이지 아니하면,

어느 한순간, 자신도 모르게 구습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기도를 왜 하는가? 예배를 왜 드리고, 왜 말씀을 묵상하는가?

이같은 구습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실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이었으며, 또 직업적인 선지자가 아닌 평범한 목자 출신이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에서는 그의 선지자 자격에 대해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모스는 자신의 선포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모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요나 선지자는 적대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들은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함으로써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적대국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아모스나 요나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나라에서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했던 선지자들 역시,

대부분 그 예언의 내용이 심판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놓고 선지자 직분을 감당했을 것이다.

사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나같이 도망을 쳐본들 다시 원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목회자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가 완악하여, 목회자들이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망할 수밖에 없다.

구약시대부터 거짓선지자들이 있었듯이 이 시대에도

부정직하고 신실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목사도 인간인지라 잠자야 하고, 쉬어야 하며, 먹을 것 먹고, 때때로 격려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목회자가 하나의 직업인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목회자들이 투철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으로, 뜨겁게 말씀을 선포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정말 큰 관심을 갖고 기도의 동역자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아모스는 아스돗과 애굽을 증인으로 불러 북왕국 수도 사마리아 성 안에서 행해지는

왕과 정치 지도자들의 포학에 대해 지적하며 멸망의 심판을 선포한다.

선지자는 당시 가장 세속적인 국가라 할 수 있는 블레셋과 애굽을

북왕국 수도 사마리아로 초대하여 증인으로 불러 세운 것이다.

그 까닭은 가장 세속적인 국가인 이들조차,

이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무질서와 학대와 포학과 겁탈을 목격하고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이 지도자들은 벧엘에 금송아지 제단을 세워놓고

거짓된 신앙을 백성들에게 전파했으며,

상아로 꾸민 겨울 궁, 여름 궁을 만들어 놓고 호화판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북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애굽에서 불러내어 세우신 나라가 아닌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10지파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북이스라엘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맡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방 나라들보다 더 심각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다.

결국 지도자들의 이같은 범죄는 자신들의 멸망뿐만 아니라

북왕국 전체의 멸망을 초래하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거론하면서 제일 먼저 지도자의 잘못에 대해 선지자가 선포한 것은,

백성 위에 세워진 지도자들의 사명이 실로 막중하기 때문이다.

곧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그 직접적인 영향은 그에 속한 백성들이 받을 수밖에 없다.

 

한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회사, 교회, 공동체, 가정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로 세워진 사람들의 책임이 실로 막중하다.

오늘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무엇일까?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직분과 사명이 주어진 이상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기도)

주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충성되게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룰 수 있도록,

늘 새롭게 하시며 돕는 손길을 보내어 주시며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길 잃지 아니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모스4장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바산은 요단강 동쪽 북단에 위치한 기름진 목초지로

그곳에서 사육되는 소들은 매우 살지고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인들을

바로 이 바산의 살진 암소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 자체는 중동에서 모욕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중동에서는 기름진 몸매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지도층의 부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유복한 생활을 했고,

남편들을 뒤에서 움직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 나갔다.

하지만 장차 이 부유한 여인들은 밧줄에 묶여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고대 앗수르 유적지에서 발견된 한 비석에 보면,

앗수르 군사들이 사로잡은 포로의 코나 아랫입술을 뚫고

거기에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경책하며 심판을 예언하던 아모스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종교생활에 대해 조롱한다.

벧엘은 일찍이 야곱이 살기등등한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천국 사닥다리와 여호와를 꿈속에서 보고 언약을 맺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사사 드보라와 사무엘은 이곳을 중심으로 선지자 사역을 행하는 등,

벧엘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런데 왕국이 분열된 이후 북이스라엘을 창건한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에 종교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곳에 자체적으로 단을 만들어 금송아지 숭배를 획책함으로써

벧엘은 북이스라엘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말았다.

길갈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으로 유서 깊은 장소로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기념물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곳이며,

이곳은 벧엘과 함께 사무엘의 중심 사역지로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기 전까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길갈 역시 벧엘과 마찬가지로 왕국 분열 이후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배교의 중심지가 되어 심각하게 타락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4절에 나온 ‘희생’이란 아침마다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소에 올라와서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는 평소 드리는 십일조 외에

삼년에 한 번씩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삼년에 한번 드리는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리고,

일 년에 한번 드리는 희생을 아침마다 드린다 할지라도,

거저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들은 오히려 그것 자체가 죄를 더하는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수은제’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화목제사의 일종인데,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누룩을 넣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하나님께 수은제로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규례에서 벗어난 것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자기 생각이나 자기 편한 대로 드렸다.

그리고 ‘낙헌제’ 역시 수은제와 함께 화목제의 한 종류이며,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개인이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였다.

이 낙헌제를 드린 후에는 제사 드린 자의 자녀들과 성중의 레위인들을 초청하여 함께 먹으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거워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당시 외식적인 행위만을 일삼았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낙헌제를 드릴 때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어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했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같은 저들의 종교적 허영심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식을 빙자한 허영과 외식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같은 종교적 허영과 외식으로 인해 예수님께 책망 받았다.

물론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신앙행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예배 등의 모든 종교의식과 행위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향한 것인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종교적 열심 자체가 해답이 결코 아니다.

자신들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행위는

하나님께 열납 되기는커녕, 그것 자체가 죄악이다.

 

6절 이하에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악함을 고발하며,

이로 인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아모스는 과거 북이스라엘 땅에 내렸던 기근과 가뭄, 풍재와 병충해, 염병과 전쟁, 지진 등

7가지의 자연재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재앙들은 모두 우연히 내려진 것이 아니라

범죄한 백성들을 회개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의 채찍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문에 반복해서 다섯 번이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고 확정하듯이,

심히 완악하여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다.

12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종말과 심판을 의미한다.

십계명 제2 계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아니,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죄를 갚으신다니,

이것 너무 한 것 아닌가? 아버지가 지은 죄인데 왜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그 죄 값을 물으신다는 말인가?’ 하고 이 구절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사용된 ‘삼사 대까지’나 ‘천 대까지’라는 표현은 관용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징계에 비해 그 사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배반과 불순종과 수없는 범죄에도 불구하고,

무려 천년 가까이 저들을 참아주셨다. 말이 천년이지, 어떻게 천년을 참아준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참고 또 참고, 오로지 그 백성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떠한 징조와 채찍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이 관영하고,

마지막 회개의 기회마저 거부하는 극악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삶이 끝나는 날, 모든 사람은 철저히 공의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기회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오늘 홀연히 나를 부르시면 주 앞에서 뭐라 변명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가 천년이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기도)

주님,

북녘의 수많은 인민들이 얼마나 죄가 많길래 저토록 죽을 고생입니까?

남녘의 수많은 백성들이 얼마나 선량하고 의롭기에 이토록 넘치도록 부어주십니까?

긴 안목으로 역사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때때로 안타깝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속이 불 붙듯 하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참으로 보잘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지극히 작은 일부터 다시금 시작하게 하소서.

[작성자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