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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빛과 선한 목자이신 예수( 요 9-10장)

by 은총가득 2021. 6. 7.

 

 

빛과 선한 목자이신 예수 / 한천설

 

요한은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교회 안에서 발생되고 있는 잘못된 해석들에 직면하여, 예수는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케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요한복음이 기록된 주된 목적이며, 기독론이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전체 문맥에서의 요한복음 9~10장 이해

 

요한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서론 부분으로 머리말(prologue; 1:1~18)과 증언들(1:19~51),

둘째는 본론으로 표적들의 책(The Book of Signs; 2:1~12:50)과 영광의 책(The Book of Glory 13:I~20:31) 두 부분으로,

마지막은 부록(epilogue;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2장부터 12장까지는 많은 표적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표적들의 책'이라 불리는데, 요한복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일곱 가지 표적들과 이 표적들의 의미를 해설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이 가르침들은 '내가....이다'(에고 에이미)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한복음은 이런 예수님의 이적 사건들을 '이적'(Miracle)이란 말을 쓰지 않고 '표적' (Sign)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현상 전반을 나타내는 반면,

표적은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기를 바라는 구체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사건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에 몇 개의 표적이 기록되었다거나 혹은 이 표적이 배열상 어떤 특정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이 표적들의 의미가 무엇이며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느냐이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믿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단순한 이적적 사건 혹은 신적능력을 가시화하는 사건이 모두 표적이 되는 것은 아니라,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담긴 이적적 사건만이 표적이기 때문이다.

표적의 의미를 바로 규명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사실 하나는 표적은 표적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긴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표적들의 책'은 '표적 - 오해 - 강론 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 먼저 표적을 행하시고 나면, 청중들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 관점으로 그 표적의 의미를 판단하기에 이 현상들이 진정으로 계시하고자 하는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게 된다.

그러면 예수께서 다시금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자신이 베푼 물리적 현상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 표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강론하시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치유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먼저 소경을 고치시는 표적을 행하시고, 유대인들이 그 표적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자, 메시아 개념을 오해한 것에 대항하여 예수께서 강론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인간의 인식기관을 통하여 관찰할 수 있는 아주 물리적인 현상이지만, 이 표적들은 물리적 현상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진리, 영원한 세계, 참 실체(reality)를 계시해 주는 하나의 부호이다.

따라서 그 표적이 가지는 궁극적 의미를 알리시려고 예수께서 '내가 세상의 빛", 곧 '내가 하나님을 깨닫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자'라는 긴 설교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표적은 종종 표적 자체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건으로 연결되기도 하는데, 연결된 사건들은 표적에 대한 받아들임'과 '거부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지만(2:23),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12:37) .

특별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들로 나서게 된다.

특히 요한복음 5-10장을 보면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화되는 갈등이 요한복음 5-10장의 맥이라 할 수 있는데, 뒤따르는 1:1~12장에서는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죽음의 당위성이 단계적으로 준비된다.

 

요한복음7-9장에 나타나는 특징은 예수님도 적대자들에게 맞불을 질러 공격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응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첫째 유대인들의 영적 어두움과 무지를 꼬집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신학논쟁을 통해 저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켜 '마귀에게서 난 자'라고 하신다(8:44). 이는 그들이 진리를 어둡게 하기 때문인데, 마귀의 주 업무는 미혹케 하는 것으로 진리를 어둡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경을 고치신 9장을 중심으로 계속되는 논쟁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통렬히 공격하시는데, 이들이야말로 영적안목이 어두워진 장애인들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 ~10장의 내용의 진모를 한 눈에 파악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는 적대자들의 도전이 여러 차례 반복되며, 이에 맞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숨 가쁘게 펼쳐지고 그 내용의 반복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한복음 9장의 소경 치유 사건도 단지 9장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이미 7~8장에서 일부 해설되고, 9~10장에서 더욱 자세히 해설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내가 세상의 빛'(8:12)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표적으로 보이신 것이 바로 소경 치유 사건이고, 그 결과 암흑에 있는 자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9장의 소경치유사건은 ‘표적사건' 이며, 10장의 선한 목자에 대한 가르침은 이 표적이 궁극적으로 가지키고 있는 실체인 것이다.

이처럼 9장 표적에 대한 강론은 9장만이 아니라 전후 문맥에 복합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한복음 9장은 8장에 대한 해설이고, 10장은 9장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빛 이신 예수(9:1~41)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적 눈을 뜨게 한 표적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신 때는 초막절이 지난 어떤 안식일이었다.

이 표적은 앞서 있었던 초막절 강론인 세상의 빛 되신 예수 (8:12)에서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세상의 빛' 이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영생을 얻게 하는 분이라는 것을 실례로 보여준 사건이다.

 

한마디로 요한복음 9장은 요한복음 8장 12절의 주석이요, 하나의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경치유사건은 모두 여섯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은 다음과 같이 드라마의 각 장면들(scenes)을 나타낸다.

1)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고치심(9: 1 ~7) : 등장인물은 예수님, 제자들, 소경

2) 이웃들과의 논쟁 (9:8~12). 소경과 그의 이웃

3) 바리새인들과의 논쟁(9:13~17): 소경과 바리새인들

4) 눈 뜬 자의 부모를 심문함(9:18~23) 바리새인들과 소경의 부모들

5) 눈뜬 자를 두 번째 심문함(9:24~34) : 바리새인들과 소경

6) 눈뜬 자를 예수께서 만나심(9:35~38) : 예수일과 소경

 

요한복음 9장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면 소경을 치유한 표적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질지 모르지만,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서론에 불과하고 본문의 초점은 바리새인과 예수님 간에 펼쳐진 긴 신학적 논쟁에 있다.

 

9장에서는 5장과 달리 안식일 논쟁도 부수적일 뿐이다.

안식일 논쟁은 배후로 사라지고 논쟁의 핵심은 수님이 누구신가'하는 것에 모아진다.

 

1.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죄와 고통과의 관계

소경치유사건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세상의 빛' 이고 우적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생명을 얻게 하는 분임을 알리려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누군신가' 하는 것을 변증하고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사건을 대하면서, 한 가지 꼭 다루어야 할 주제는 죄와 고통과의 관계이다.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발견하고 '그가 이렇게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물으며 장애의 원인을 죄 문제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죄가 죽음. 곧 고난을 일으킨다는 신학적 원칙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인들은 병이나 고난의 원인을 인과론적으로 보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욥의 세 친구가 바로 이런 인과론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유대인만 아니라 우리 또한 누군가가 육신의 질병을 앓으면 죄와 관련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질병을 죄에 대한 형별로 곧장 연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지 질병과 관계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신자들을 괴롭히는 질병과 고통, 장애와 불행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도 뿌리를 같이 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보면 사실 질병과 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죄에 대한 징벌로 병을 얻게 되고, 그래서 최를 용서해준다는 것과 병고의 상태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은 늘 동의어로 쓰인다.

 

가령 시편 103편 3절에 보면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하여, 죄용서와 병 고침을 한 사건을 두 가지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죄사함에 대한 비유들은 대부분 시편 103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비유들을 보면 죄사함과 병고침이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

따라서 구약에서는 장애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았다 종종 장애나 질병은 개인의죄에 대한 징별로 이해되기도 했고(겔 18:20) , 또한 조장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결과로 이해되기도 했다(출20:5; 34:7 민14:18; 시79:8; 109:14; 사 65:6,7) .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하신다. 소경과 관련하여 그가 소경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신다. 즉 본인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소경된 것이라는 것이다(9:33).

하나님께서는 소경을 통해 자신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셔서, 그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 이렇게 함으로 소경은 빛을 보게 되고,

빛을 봄으로서 예수를 바로 이해하고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됨으로서 예수를 증거하는 생명의 도구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의미있게 쓰여졌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받는 사람들을 볼 때 무조건 그가 어떤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함부로 딘정짓는 원시적 사고의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한다. 죄가 고난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1대 1로 상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병이나 장애, 또는 인간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원죄'의 결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결과를 'De-Form'이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형상(Form)과 모양이 망가진 상태가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De-Form'은 인간의 내면에 생겨났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음도 없어졌다. 예외적으로 'De-Form'은 인간의 외향에서도 나타났는데, 이것이 곧 장애로 장애는 곧 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애는 개인이 지은 대가의 벌이라기보다는 인류 모두가 함께 지은 원죄의 결과이다 장애는 인간에게 원죄가 있음을, 그 결과 온 인류가 함께 별을 받고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가시적으로 볼 수 있도록 남겨주신 표라 할 수 있다. 즉 장애의 책임이 장애자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원하지 않는 장애, 질병, 고통 등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죄를 지은 결과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고난은 있게 마련이지만. 예수 안에서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 장애나 질병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장애는 존재하며 무작위로 찾아온다. 그러나 장애는 죄의 우주적 결과일 뿐, 장애는 곧 개인이나 부모의 죄의 결과는 아니다. 장애도 원칙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도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위장된 축복일수 있다. 요한복음의 약속처럼 장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고로 장애인은 "왜 나만'이라고 괴로워하거나. 나의 특정한 죄 때문에 장애나 질병이 생긴 것이라고 죄의식에 빠져서는 되지 않는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장애를 입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는 생명의 도구가 되어야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질병이나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섣불리 죄와 직결시켜 생각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그 결과 고난을 받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에게 회개를 권고해야 하나, 그렇지 않는 경우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장애자를 바라보며 가져야 할 자세는, 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도와야 한다. 그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나의책임의 일부를 갚아가는 것이다. 더 큰 장애는 나의 내면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외적 'De-Form'을 주신 이유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2. 소경 치유 사건에 대한 세 가지 반응들

 

요한복음 5장과 같이 안식일의 율법적인 의미에만 집착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소경을 고침으로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 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다.

논쟁은 예수님과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병고침을 받은 자와 논쟁,그 부모와의 논쟁형식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그런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병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하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전재되고 있다.

사건을 지켜본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1.유대인들 간에 처음으로 논쟁이 붙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쳤으므로 안식일을 험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과,

소경치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 만이 할 수 있기에 예수를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자들로 나뉘게 되고, 이들은 서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나중에 바리새인과 소경 간에 똑같은 논쟁이 벌어진다.

 

소경치유사건을 보면 예수님의 표적에 대한 세 가지 부류의 반응이 나타난다.

1.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명백한 표적을 보고서도 이 표적이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예수에 대한 신앙을 거부한다.

 

2. 소경의 부모는 예수가 자기 아들에게 빛을 준 그리스도임을 알면서도 유대회당에서 출교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다(9:22).

 

당시 유대회당에서 축출당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손해를 입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때에는 소경의 부모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3. 그러나 소경은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당하고 박해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선지자라고 고백한다(9:17).

고백은 이사야 2918~19, 355~6, 611-2절의 예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종말에 메시아가 오면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언했는데, 이 예언 중 하나가 소경의 눈을 뜨도록 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611~2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그 예언을 성취하려 왔다고 이미 밀씀하셨고(4:14~19) , 세례요한이 예수께 당신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인가 물었을 떼도 이사야 2918~19절과 355~6절에 나타난 예언들을 성취하고 있음을 들어 자신이 메시아임을 이미 나타내셨다(11:1~6 ; 7:18~23).

 

☞ 이처럼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 땅에 가져오는 것이고, 암흑세계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러한 예언을 성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알고 있다는 유대인들은 그가 메시아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에서 요한복음 문체의 특징인 역설(Irony)이 나타난다.

소경인 자는 빛이신 예수를 만나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인식한 반면,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알아 빛을 받고 있다는 유대인들, 특히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정작 소경이 되어 빛이신 예수를 보지 못하고 메시아로 인정치 않음으로 결국 소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소경은 눈을 뜨고, 빛을 본다는 자들은 오히려 소경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적 역설인 것이다.

 

반면 치유된 소경의 신앙은 발전하다. 눈을 뜬 소경은 933절과 938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점진적으로 깊어감을 볼 수 있다.

그의 고백은 사람(11), 선지자(17) , 그리스도(22), 하나님께로 온 자(33), 그리고 그리스도(38)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공동체에서 축출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라고까지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소경의 신앙단계가 발전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예수께서 스스로를 '인자('그사람의 아들)라고 계시하셨기 때문이다(9:35~37)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예언할 때 항상 '인자라는 호칭을 쓰신다(10:45). 예수께서 메시아 되시는 것은 그의 '대속적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스스로를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내어주는 것이 바로 메시아의 과업인 것이다. 예수를 유대교의 메시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치유된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바로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인류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인자' 이신 것을!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이제 영적으로도 이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본문은 육체적 소경과 영적인 소경을 대조하고 있다(39절).

어거스틴은 "이 소경은 흑암 속에 살아가는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 만일 소경이라는 의미가불신앙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가 눈을 뜬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을 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육신의 눈이 뜨인 다는 것은 영적 눈 뜨임의 상징이며 표적이다. 당시 유대교는 수많은 초막절을 치루었지만 나면서부터 소경된 이 사람을 고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예수께서는 이 소경의 눈을 열어주시므로 그에게 진정한 빛이 되셨고, 유대교의 초막절을 온전케 하신 메시아가 되신 것이다. "

 

3. 소경치유사건의 현대적 의미

이 땅에는 아직도 소경의 부모처럼 자기아들의 고침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체험했지만 사회적 정치적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하기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자신들의 율법 개념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격했듯 제한된 이성이나 세상 지혜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도 있다.

요한복음 9장은 우리로 하여금 치유된 소경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인식하고, 두려움이나 타협없이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신앙고백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형태는 다를지 모르지만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란 고난과 박해가 뒤따르기 마련이고, 거룩을 추구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이미 예수님은 복음에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는 사실을 말했었다.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어려운 것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거짓과 죽음의 세상에서초월적인 진리와 생명에 성실 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위협적인 것이기에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반드시 받게 된다. 그러나 비록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게 된다 해도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무엇보다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거기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고, 또한 예수님은 자기 때문에 고통당하고 핍박당하는 자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셔서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신다. 그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주시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10:1~42)

 

요한복음 10장은 '선한목자 에 대한 가르침과 수전절의 예루살렘 방문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요한복음 7장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셨는데, 그 결과 예수님과 이들과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간다(7~9장) 이와 같은 갈등은 10장에서도 계속된다. 선한 목자에 대한 가르침은 7~10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유대지도자들 간의 갈등의 일부인데, 이 가르침은 초막절 설교와 수전절 설교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선한목자에 대한가르침의 역할은 초막절 설교의 대상인 바리새인들에게 백성의 참 지도자는 어떤 시점이 되어야함을 알리는 동시에, 유대인들에게는 수전절과 관계된 이스라엘의 참지도자상은 어떤 것인지를 교훈하는 전이적인(transitional)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이 부분엔 예수님의 앞선 가르침에 관계된 빛의 주제도 나타나고, 뒷부분에 나오는 가르침에 대한 주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 요한복음 문맥에서 본 선한목자에 대한 가르침

요한복음 9장과 선한 목자에 대한 가르침(10:1~18)은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선한 목자에 대한 비유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예언이고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9장의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피시고(9:35~41), 자신이 메시아임을 분명히 하신다. 뒤따르는 선한목자의 가르침을 통해 이들에 대한 공세는 더욱 분명해 진다. 그것은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강력하게 대조하심으로서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의 차이를 드러내신다. 핵심 구절인 10장 10절은 선한 목자와 도적의 지항점을 적나라하게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렇게 첨예해진 갈등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신다. 따라서 선한 목자의 가르침은 뒤따르는 나사로의 죽음,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견하는 11-12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선한 목자에 대한 가르침에는 부활에 대한 예견도 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0:17).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모습을 양을 예로 들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선한목자 로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는 분, 다른 하나는 양떼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얻게 하는 '양의 문'이다.

 

 

2. 선한 목자(10:1 ~21)

요한복음 10장은 선한 목자에 대한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심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11절). '나는 선한 목자라'는 요한복음 10장11절의 표현은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에스겔 장은 수전절에 유대인들이 읽는 표준 낭독 본문들 중의 하나였다. 하나님의 백성을 양떼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백성의 목자로 부르는 것은 언약 신학적 표현으로서 구약에 흔히 나타나는 그림이다. 하라넘은 목자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양떼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신을 대신하며 자기 백성을 돌보도록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제사장들과 왕들을 백성의 목자로 세우셨다.

 

그러나 에스겔서 34장에서 정죄한 것 같이 이들은 자신의 본래 목적과 사명을 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양떼들을 속이고 노략질하고 그들의 것을 도둑질한 자들이 되고 말았다(렘23, 슥 11장 참조). 양들을 잘 먹이고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잡아먹고 가죽을 벗겨서 옷을 해서 입는 등 파렴치한 행위를 계속하여 양떼들이 온 땅에 흩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실제로 에스겔 당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의 온 땅에 흩어졌고, 짓밟히고 종노릇하며 유리하는 양떼가 되지 않았던가! 또한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세계에 흩어져 유리하는 디아스포라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상적 목자로 나타나셨으며(시 23:1; 74:1;80 95 100:3), 포로생활 중에라도 자신의 양떼를 돌보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사40:11; 렘 23:3; 31:10). 특히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이상적인 목자였다(시 78:70~72; 삼하 7:7~8). 그리고 그의 몸에서 날 약속된 메시아는 흠이 없는 목자로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으시고 친히 먹이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 에스겔 34장이다. 이 메시아가 바로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선한 목자에 대한 가르침은 '참 목자를 소개하는 비유' (1-6절), '양의 문되신 그리스로(7-10절) 그리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 (l1~18절)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참 목자를 소개하는 비유(10:1 ~6)

본문은 하나의 비유로서 참 목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예를 설명하고 있다. 본문이 강조하는 선한 목자의 속성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양 우리'의 모습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 당시 두 종류의 '양 우리'가 있었다.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것과 산간 벽촌의 것인데, 이 둘은 구조가 서로 달랐다. 마을의 양우리는 나무로 잘 지어지고, 문 앞에는 문지기가 있었다. 이런 경우 양은 대개 마을의 공동소유였고, 문지기는 양치기가 오면 양을 내주였는데 양치기의 대부분은 고용된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전문적인 양치기였겠지만, 앙들의 이름을 세세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양들은 그의 소리나 몸짓 혹은 지팡이를 따라 움직였지, 그의 음성을 구별하여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비해 산간 벽촌의 양 우리는 돌을 쌓아 담을 만드는데 문이 따로 있지 않았고, 담의 한 부분을 터놓아 입구를 대신했다. 밤이 되면 양치기는 자기 몸으로 이 문을 가로 막고 자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이런 경우 양들은 대부분 양치기 개인의 소유였다.

 

본문의 첫 부분 1-6절은 큰 마을에 있었던 양 우리를 전제로 하고 있고, 7~10절은 산간 벽촌의 양 우리를 염두에 둔 가르침으로 보여 진다. 따라서 첫 부분에 소개된 참 목자는 삯군 목자와는 달리 양 하나 하나의 이름을 알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의 참 목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본 비유에서 선한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다고 한다. 도둑이나 강도가 양을 넘볼 수 없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참 목자는 항장 정상적인 방법으로 양에게 접근한다. 즉 문을 열고 들어가 양들에게 음성을 들려주고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 주장을 안식일 논쟁에 적용해 보자. 선한목자의 비유는 안식일 준수 방법을 둘러싸고 생긴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적 답변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육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율법의 근본정신이라고 주장하신 번면,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을법을 어긴 일이요 죄인이라고 공격한다. 이에 대해 어떤 주장이 양을진정으로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겠느냐고 되묻고 계신다.

 

(2) '양의 문' 되신 그리스도(10:7~10)

앞에서 그리스도가 양의 목자인 것을 설명하신 후,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신다. 이 문은 분명히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연상케 하는 그림 언어이다. 헬라인들은 하늘에 문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예수가 스스로를 '문' (7절)으로 나타내고, '들어온다'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신이 '양의 문'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인데, 이 '양의 문'으로 다니는 양만이 꼴을 먹고 구원을 얻으며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신 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요 통로인 예수를 통해서 들어가야만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에 비유하고 선한 목자라 칭함으로써 예수께서 이해하신 안식일의 의미와 준수 방법이 옳은 것이며, 모세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3) '선한 목자' 이신 예수(10:11~l8)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목자 라고 말씀하시며, 삯군 목자들과 자신을 대조하신다. 여기서 선한 목자의 중요한 속성이 소개되는데, 그것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당시 남의 양을 직업적으로 치는 목자나 더 나아가 자기 양을 소유한 목자라 할지라도 과연 양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면서까지 양을 지킨 자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자기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는 있겠지만, 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목자 라고 말씀하신다(11절).

 

이미 요한복음 9장에서 본 것처럼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소경이나 백성들에게 목자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들은 목자 역할은커녕 오히려 소경을 박해하고 쫓아냄으로 백성들을 유리하고 방황하게 만들었다. 반면 예수님은 이 양에게 찾아오실 뿐 아니라, 그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실 분이다(35절). 선한 목자 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예수께서는 9장의 소경치유사건에 대한 바리새인과 자신의 대조를 요한복음 10장에서 주석하고 계신 것이다. 이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떼들을 위해서 자기목숨을 내어 놓을 분, 즉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분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양떼의 죄를 덮어버리고 씻어 버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실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 올마로 연결시키고 하나님의 참 양떼, 새 백성이 되게 하는 새 언약 제사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데시아인 것이다. 참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 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계시하고 대속의 죽음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아래 살게 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가져다주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예수가 참 메시아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선함목자 되심이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본 장에서 요한이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인 것이다.

 

3. 수전절을 온전케 하신 그리스도(10:22~42)

수전절(하누카)은 수리아의 헬라왕이었던 안디오쿠스 에피 파네스가 B.C. 168년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들을 박해했을 때 유대의 한 제사장 마타디아의의 다섯 아들, 특히 유다마카비가 중심이 되어 헬라의 군대와 전쟁을 벌였고 마침내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A.D 164년 12월 더럽혀진 성전을 수리하고 성별하여 하나님께 봉헌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초막절처럼 성전과 관계있는 절기라 하여 기슬레 월의 초막절'이라 불리우기도 하고(마카비 2서 1:9) 8일간 계속 되는 이 기간 동안 성전은 8개의 등불로 장식된다. 요한은 바로 이 수전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설교를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은 진정한 성별자, 참 성전, 하나님 백성의 참목자가 되심을 교훈하고 있다. 이 부분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0장 22~31절까지는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해, 10장 32~42절까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선한 목자에 대한 강론 이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며 논쟁을 벌인다(24절)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그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지 왜 정확히 말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 중 하나는 알쏭달쏭하게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는 귀 있는 자들은 듣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소경을 고치시는 등 많은 표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이미 분명히 다 드러내셨다. 그들이 모계의 성경을 잘 안다면 이 모든 것이 메시아의 증거인 줄 알 것이다(사29장). 더 무슨 표적이 필요하단 말인가! 문제는 눈먼 유대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구 내가 하는 말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셔서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이 모든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내 양례가 아니기 때문이다(26절). 이땅에 메시아가 와서 종말에 모으는 구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들은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듣고도 믿지를 못하는 것이다. 반면 내 양떼들은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도 그들을 알고 그들도 나를 따르고 있다(14, 27절) 목자와 양떼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기에, 양떼들은 목자인 나를 알고, 나를 따르고 나의 제자들이 되면, 궁극적으로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관계이다(28절). 이처럼 예수님은 예정론적인 구원의 차원에서 설명하신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분리현상! 세상의 빛으로서 예수께서 계시를 하시지만 어쩔 수 없이 항상 청중들은 두개로 갈라진다. 계시를 보지 못하는 다수의 불신자들 부류와 소수의 믿는 자들로 분류된다. 분리현상! 이것이 바로 심판인 것이다. 이 현상은 궁극적으로 예정론적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을 예수의 손에 양떼들로 맡기셨다. 이 말이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자들은 예수의 양떼가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이를 이중예정이라 하는데, 즉 구원의 예정과 멸망의 예정이다.

 

특별히 10장 22~31절까지는 예정론적인 언어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참목자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속 증거하시는데,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도 몰라보고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의 양떼가 아니기 때문이다(요 10:26). 요한은 궁극적으로 구원과 심판을 예정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원의 예정론적 설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하는 것은예정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이다.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예정론에 관한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정론의 문제를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려 한다. 그 결과 현재에 대한 불확신과 미래에 대한 의심 때문에 이 땅에서의 힘있는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염려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예정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뿐 아니라 바울서신(엡 1:5)에도 나타나는 예정론의 문제는 신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가르쳐진 교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안위와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예정의 문제를 현재나 미래의 문제가 아닌 과거사건으로 언급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미 예정된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과 평안 속에 거하라는 것이 예정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요한이 10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양들인 우리에게 이러한 확신을 주려는 것이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스스로 예정받았는지 아닌지 불안감을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구주로 믿는 자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정된 자임을 확신해야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정하시고, 때가 되매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결과이기 매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을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의 예정을 확신하고, 종말의 구원 완성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지킬 것을 확신함으로 평안을 누리며,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성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요10:28; 를 8:28~39)

 

결론

요한복음을 흐르는 대 주제는 예수는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케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9~10장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 주어지는 메시지는 예수는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신 일은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 일이나 로마에서 유대를 독립시킨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예수의 메시아적 사건, 또는 메시아적 행위(The Christ Event)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요한은 7~10장에 이르는 동안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 메시아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고 알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선한 목자가 되신다. 우리는 자신이 소경된 것과 암흑에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하면, 예수의 빛을 보게 되고 계시를 깨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모세 율법에서 얻는 것만을 절대시하고 그 관점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진정한 및과 계시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는 헬라인들처럼 플라톤이나 스토아 철학의 지식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무엇을 깨닫는다고 착각하면 빛이신 예수의 계시를 보지 못하게 된다. 모세의 율법이나 헬라철학, 아니 그 이외의 어떤 것이라도 이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우리를 흑암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사량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서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오는 구원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오늘도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서양 피학문명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거기서 구원의 길을 찾는 인본주의에는 결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등양의 인본주의 철학이나 종교 등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예수! 아무리 타 종교와의대화를 부르짖고, 종교다원주의를 부르짖는 세상이 되어 기독교 구원의절대성에 대해 도전하는 시대가 되어 가지만, 기독교 신앙을 제외한 어떤 종교나 어떤 사상도 그 근원은 다 인본주의여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요한은 오늘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한 구원이란 동양이나 서양의 인본주의에서 찾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십자가의 계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는 오늘도 우리의 빛이시고 선한 목자 되시며, 오늘도 우리의 구원자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철학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마치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이때 구원은 메시아이신 오직 예수로 만이라는 신앙을 계속 고백하고 이 세상과 타협없이 힘있게 살아감으로 그 분 만이 이 땅의 구원자 되심을 삶으로 증거하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