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들의 그리스도 복음
- Werner G. K mmel -
1. 제 4복음서와 요한 서신들의 그리스도 복음
주후8-90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의 문서들은 공관복음서와 지리적, 역사적 차이점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서는 그 형식과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 공관복음서와 구분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처럼 보도에 충실했다기 보다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믿는 신앙을 강하게 하는 점을 강조한다. 즉, 처음 세 복음서들의 예수 보도는 특정한 신학적 방향설정의 관계에서 개개 전승들을 조직함으로 각기 생겨난 반면에 요한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전승로부터 예수의 말의 맥락속에 들어있는 더 큰 구성체에 교훈적 의도와 선포의 의도들이 추구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요한은 공관복음서의 전통적인 지식아래에서 예수의 온전한 상, 신앙 공동체의 그리스도상을 그리려하고 있다. 그의 증언방식은 1세기의 팔레스틴-시리아의 이단적 유대교와 영지주의적 구원론의 결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상은 어떠한가? 그에게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세주, 인자, 로고스, 구원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 예수의 인격과 말씀에서 똑같이 실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기름부은 자라는 신앙고백적인 의미를 가지나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아들이 더 중요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요한은 아들의 선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요한은 아들안에서 아버지의 현존을 말하며, 아들을통해서만 인간들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음을 말한다. 또한 예수를 말씀으로 말함으로 성육신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멸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자. 그는 세상을 영지주의적인 의미에서 물질의 세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영지주의적 표상과는 대립되는 방식이었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요한은 구원을 곧 생명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승리를 하였을지라도 믿는자들의 세상에서의 구원은 필연적이며, 이는 성령의 현재적인 실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헬라주의적인 언어와 표상세계 그리고 미래 대망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인격뿐 아니라 예수를 통해 야기된 구원까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적인 행동에 엄격하게 결합시키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종말론적인 구원사건으로 선포하고 있다.
2. 예수, 바울, 요한 : 신약성서의 중심
신약성서는 다양한 음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성을 확립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신약성서는 고대교회에서 문헌들의 제거와 교직적으로 언명된 한계설정을 통해서 생겨난 사도시대의 기독교 문헌집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구원사역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신약성서의 세 증인들, 예수, 바울, 요한을 통해서 이러한 신약성서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공통성들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에수는 당시의 유대교적인 표상과는 다르게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의 약속을 현재화시켰으며, 원시공동체의 구원체험은 바울신학의 전제가 되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박한 구원의 기대에 살면서 현재를 구원의 시대로 향하게 하였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아들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가 아버지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며, 무엇보다도 예수의 등장을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구원의 현재성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서 신학의 세 주요증인들은 그들에게 나타나는 사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두가지 메시지에서 일치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게서 세상 종말을 위해 얄석하신 그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게 하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우리를 만나셨으며 또 세상안에 붙잡혀 있는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며 능력있는 사랑으로 자유하게 하시려는 아버지로서 만나실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사도 요한서신의 신학
사도 요한은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하였다. 그것들은 요한복음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이다.
1. 요한복음
1)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비교
요한복음은 특이한 복음서이다. 초대교회는 요한복음을 독수리에 비교했다. 공관복음을 모두 땅에 거주하는 사자(마태)와 사람(마가)과 황소(누가)로 비교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을 유독히 하늘날며 비상하는 독수리에 비교한 까닭은 그만큼 요한복음이 초월적이며,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공관복음도 막상 서로 자세히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실제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면들이 있다.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하여 아주 쉬운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어는 대체적으로 단문으로 되어 있고, 거의 기본적인 쉬운 단어들을 사용한다. 시제도 대단히 쉽다. 하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요한복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자주 신학적인 사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단락의 길이이다. 공관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짧게 다루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길게 다룬다. 공관복음은 수난과 부활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개별적인 활동과 개별적인 말씀을 다소 헐겁게 연결하는 결합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깊이 다룸으로써 주제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마치 단막극처럼 구성된 체계를 가진다. 공관복음의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은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이 작은 점으로 꾸민 그림과 같다면, 요한복음은 큰 면으로 처리한 그림과 같다. 공관복음은 여러가지 사건들을 짧게 보고하는 일간지로 비유할 수 있고,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하는 월간지로 비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이 한 사건을 길게 진술한다고 해서 쓸데없는 말을 만연체로 늘어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각 진술마다 압축된 사상을 담고 있다. 마치 압축화일처럼. 만일에 우리가 이것을 모두 풀어낼 수 있다면 엄청난 양의 내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요한복음의 문학적인 특징
요한복음의 문학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곱 개의 표적들이 나온다. 공관복음서에 는 대략 29개의 이적들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요한복음은 단지 세 가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신하의 아들 치료 요 4:46-54; 오병이어 요 6:1-13; 바다 위를 걸으심 요 6:16-21). 이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없는 다섯 가지의 이적들을 보고한다(가나의 혼인잔치 이적 요 2:1-11; 베데스다 연못의 치료 요 5:1-9; 소경의 치료 요 9:1-7; 나사로의 살리심 요 11:1-44; 이적적인 어획 요 21:1-14). 둘째로 일곱 개의 담화들이 나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4:7-26), 38년된 병자를 치료한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5:19-47), 오병이어 표적 후 유대인들과의 대화(6:25-65), 초막절 논쟁(7:1-38), 목자설교(10:1-18), 고별설교(14-16장). 공관복음에 나오는 비유는 요한복음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선한 목자(요 10:1-18)와 포도나무(요 15:1-6)라는 테마는 공관복음에서도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완전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셋째로 일곱 개의 "나는... 이다" 말씀이 나온다.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9), 선한 목자(10:11), 부활/생명(11:25), 포도나무(15:1), 길/진리/생명(14:6).
3) 요한복음의 구조
요한복음은 세 번에 걸친 유월절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입부(1:1-2:12)
첫번째 유월절(2:13-5:47)
두번째 유월절(6:1-11:54)
세번째 유월절(11:55-19:42)
예수의 부활(20:1-21:23)
결론(21:24-25)
4) 요한복음의 신학
요한복음은 이중적인 결론을 가지고 있는데 둘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요 20:30-31; 요 21:25). 따라서 요한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을 지향한다. 하나님과 함께 선재하시는 로고스이시다(요 1:1-2).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기의 원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행한다(요 5:30). 둘째로 예수는 사람을 만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세례자 요한 1장, 가나 혼인 잔치 2장, 니고데모와의 만남 3장,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 4장, 38년 된 병자 5장, 오천명의 무리 6장, 초막절 7장, 간음한 여인 8장, 소경 9장 등등). 예수는 사람들의 빛이다(요 1:4). 그래서 예수는 사랑을 베푸는 분이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분이시다(요 13장). 예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한다(요 21:15-17). 사람들은 바로 이 예수를 신앙해야 한다(요 20:30-31). 특히 요한복음의 기독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로고스(말씀, 요 1:1-18)
사도 요한은 예수를 로고스라는 특이한 용어로 설명한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 성격 중에 가장 먼저 설명되는 것은 그분의 존재이다 (요 1:1-2). 그분이 "계신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처음 두절(1절과 2절)에서 "말씀이 계신다"을 네 번 사용한다. 말씀이 어떻게 계시는가? 시간적으로 볼 때 그분은 태초에 계셨고 (시간적 존재방식), 공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공간적 존재방식), 성품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셨다 (인격적 존재방식). 그러나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존재 (계심)하실 뿐 만 아니라 활동하는 분임을 설명한다(요 1:3-5).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활동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3). 또한 만물이 타락한 후에 로고스는 그것을 회복하는 일을 하셨다(4-5). 이 회복을 위하여 로고스는 성육신하셨다(요 1:14-18). 로고스는 세상에 오셨다. 성육신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육신이 되었고, 사람들가운데 거하셨다.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충만하게 넘친다(16-17). 그리스도의 충만은 하나님을 나타내주는 것에서 절정에 달한다(18).
(2) 하나님
로고스와 연관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진술한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일하다. 로고스의 신분은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진술된다(요 1:1).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점에서 로고스가 하나님이라는 신분은 자연히 결론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라는 한 단어로 두 인격이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자는 로고스 밖에는 없다(요 1:18). 이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기독론이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에 있어서 로고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요 1:14). 이 때문에 로고스는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을 말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당신과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당신과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요 17:5).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기에(10:30, 38), 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한 기능이 강조된다. "나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고 나도 일한다"(요 5:17).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성으로부터 예수는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고백된다. "도마가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요일 5:20).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과 구별된다.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이라는 것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묘사되고, 로고스는 "독생하신 자"로 묘사된다. 인격은 둘이며, 성격은 아버지와 나신 자(아들)이다.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이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는 명제적인 선언이 가능하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 17:21).
(3) 인자
요한복음에는 인자라는 표현이 13번 나온다(요 1:51 3:13; 3:14; 5:27; 6:27, 53, 62; 8:28; 9:35; 12:23, 34 (2번); 13:31). 이 명칭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중재성 : 요한복음에서 인자의 특징은 인자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심점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밀접하게 연결된 예수의 참 모습에 관한 주요한 그리스도론적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둘째로 선재성 :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 묘사된다(요 3:13). 인자는 땅에 존재하기 전에 하늘에 존재하던 분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자의 존재에 관한 공간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선재적인 시간과 공간이 연결되어 표현된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요 6:62).
셋째로 비하성 : 인자는 본래 선재하시던 분이지만 세상에 오신다. 그래서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다(요 3:13). 인자는 분명하게 혈육을 가진다.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요 6:53). 인자는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는 분이다(요 6:27). 이것은 아버지의 확인가운데 이루어진다(요 6:27 "아버지께서 이 사람을 인치셨다").
넷째로 수난성 : 인자의 비하는 그의 죽음에서 잘 나타난다. 인자는 들리게 될 것이다(요 8:28; 12:34). "들리다"는 영광을 나타내는 말보다는 죽음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요 12:33 참조. 땅에서 들림은 죽음의 방식을 의미함).
다섯째로 승귀성 : 비하하여 수난당하는 인자는 결국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간다"(요 6:62). 이것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이라고 부른다(요 12:23; 13:31).
요한복음에서 인자는 세상에 와서 수난당하고 승귀하시는 분으로 설명된다.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에서와는 달리 인자가 미래의 영광중에 오실 분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물론 인자의 심판권세대하여는 언급된다(요 5:27). 전능한 성격(하늘과 관련)과 구속적 성격(십자가 죽음)이 드러난다(3:13, 14).
(4) 사랑의 주님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의 주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요 13:34). 이 때문에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록하되 가능한 자세히 기록하려는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살펴보자(요 13:4-5).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요 13:1) 사랑하셨다는 것을 놀라운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동작 하나 하나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술된다. 예수께서는 만찬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겉옷을 벗는다. 수건을 취한다. 수건을 허리에 두른다. 대야에 물을 담는다.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는다. 마치 영화를 느린 속도로 보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한 장면 한 장면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된다. 이처럼 예수의 동작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예수께서 한 동작 한 동작에 얼마나 깊은 사랑을 담고 있는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의 동작은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다. 예수의 움직임은 사랑의 움직임이다. 예수의 각 동작은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예수의 손놀림, 예수의 허리를 굽히심, 예수의 눈동자의 움직임은 제자들에 대한 끝까지 사랑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제자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는 자신의 모든 동작을 바치고 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 예수는 사랑하심에 있어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2. 요한서신
사도 요한은 세 편지를 기록하였다. 세 편지는 길이에 따라서 성경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가장 긴 편지가 앞에 위치하고, 가장 짧은 편지가 뒤에 위치한다. 요한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서신들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는 이단과 싸우는데 주력한다.
1) 요한일서
(1) 요한일서의 구조
① 도입(1:1-4)
② 하나님과 교제(1:5-2:17)
③ 적그리스도(2:18-29)
④ 소망자의 삶(3:1-24)
⑤ 영분별(4:1-6)
⑥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의 관계(4:7-5:4)
⑦ 신앙의 증거(5:5-12)
⑧ 결론적 권면(5:13-21)
(2) 요한일서의 내용
요한일서는 특히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가현설과 싸운다(요일 4:1-3). 요한일서에는 "우리"와 "그들"의 기독론적인 대립이 요점이다. 여기에 요한일서의 분립와 관련된 갈등구조가 설명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에 대하여는 먼저 2:18-20에 나온다. 첫째로 "그들"은 "우리"에게서 분립하였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다"(2:19). 이것은 출교가 아니라 탈교를 의미한다. 반대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출교는 시행되지 않았다. 남은 자가 있고 나간 자가 있다. 둘째로 "그들"은 다수를 이루었다. "많은 적그리스도"(2:18; 4:1).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한 그룹이 아니었다. 요일서의 공동체는 "그들"에게 위협을 받을 정도로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외부적으로 진출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비기독교적인 주변세계)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4:5). 셋째로 "그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불린다(2:18). 적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우선 기독론적인 문제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2:22). 이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보아 이들의 정체가 유대(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다(참조. 요 7:25-27; 9:22; 10:24,36). 특히 이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4:2). 이들이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으로보아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일 가능성이 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자들을 거절하였다.
2) 요한이서
(1) 요한이서의 분해
① 도입(1-3)
② 형제사랑(4-6)
③ 이단경계(7-11)
④ 결론(12-13)
(2) 요한이서의 내용
요한이서에서도 기독론이 중요한 논점으로 등장한다. 요한이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믿는다(육체재림설). 이것은 이단을 분별하는 중요한 요점이다. 발신자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혹자와 적그리스도가 많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7). 이들은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이다(7). 이 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된다. 첫째로 이것은 기독론에서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이다. 이러한 면에서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과 관계가 있다(요일 4:2). 둘째로 이것은 종말론에서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재림을 다룬다(현재분사에 주의하라). 이러한 면에서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과 다르다. 요일서가 말하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한다(요일 4:2). 셋째로 이것은 신앙고백에서 문제가 된다. "고백하지 않는 자들". 미혹자는 초대교회의 공동적인 신앙고백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이런 이단에 대하여 엄격하고 냉정하게 거절할 것을 권면하였다(10-11).
3) 요한삼서
(1) 요한삼서의 분해
① 첫말(1)
② 첫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2-4): 가이오를 칭찬
③ 둘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5-10): 디오드레베를 반대
④ 셋째 "사랑하는 자여" 단락(11-12): 데메드리오를 추천
⑤ 끝말(13-15)
(2) 요한삼서의 내용
장로가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는 선교론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장로는 선교지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장로의 선교정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첫째로 선교대상와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이방인선교이다(7). 둘째로 선교주체자와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헌신선교이다(그 이름을 위하여 7). 개인보다 예수가 앞선다는 강조이다. 셋째로 선교방식과 관련하여 볼때 이것은 방랑선교제이며(나그네 5, 나간다 7). 교회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보고중심제이다(교회앞에서 증거 6). 선교자와 피선교자를 철저하게 통제한다. 또한 이것은 무보수제이다(아무것도 받지 아니 함 7). 선교자가 자비량으로 모든 것을 감당한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장로의 선교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디오드레베가 선교지향적이 아닌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장로가 행하는 선교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디오드레베는 많은 말로(여러 면에서) 장로를 비판하였다(10). 따라서 디오드레베는 방랑선교자들을 접대하지 않았고(형제들을 대접하지 않았고 10), 접대하려는 자들을 엄금하고 추방하였다(10). 사도 요한은 이런 분파주의자를 거절한다. 사도 요한은 이방인선교를 방해하는 것은 악한 행위로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하였다(11).
3. 요한계시록
사도 요한의 신학은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밝히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반드시 속히 될 일과 관련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말하다가 체포를 당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에 이 계시를 받았다. 예수의 계시는 일곱 교회(1-3장) - 일곱 인(4-7장) - 일곱 나팔(8-14장) - 일곱 대접(15-20장)의 도식을 가진 종말론으로 구성된다.
1) 예수의 명칭
요한계시록에서도 기독론이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은 기독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명칭을 사용한다. 예수는 그리스도(11:15-19; 12:10-12; 20:4-6 두 번), 어린양(29번 사용), 하나님의 아들(12:18), 알파와 오메가(21:6; 22:13), 하나님의 말씀(19:13) 등으로 표현된다. 특히 예수의 고난과 부활과 승귀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를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가운데 먼저 나신 자, 땅의 왕들의 머리라는 표현이 중요하다(1:5).
2) 예수의 관계성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관계성에서 이해된다.
(1) 교회의 그리스도
예수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그리스도이시다(계 1:10-18). 예수는 "인자같은 이"의 신분을 가진다(1:13). 그의 외모는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설명된다(1:13-16).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는 권위를(13),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과 눈같음은 성결을(14), 눈이 불꽃같음은 통찰을(14). 발은 풀무에 단련된 주석같음은 능력을(15), 음성은 많은 물소리같음은 세계통치를(15),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은 교회통치를(16),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은 말씀의 권세를(16), 얼굴이 해처럼 비치는 것은 생명수여자를 상징한다(16).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자증하신다(1:17-18). 예수는 처음과 나중이시며(17), 산 자이시며(18), 전에 죽었으나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열쇠지니어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신다(18).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일곱교회에 대한 말씀에서 다시 한번 각각 반복적으로 설명된다(2-3장).
에베소 - 일곱 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서머나 - 처음과 나중,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
버가모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두아디라 -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같은 이
사데 -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흰 옷 입으라)
빌라델비아 - 다윗의 열쇠가진 이
라오디게아 - 창조의 시작
(2) 우주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에서 우주는 무지개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와 우편에는 어린 양이 있고 전면에는 일곱 영이 있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이 중심이다. 이것을 중심하여 네 생물, 24장로, 144천의 유다의 성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 천사들, 만물이 배치된다.
예수는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5:1-14). 어린 양이신 예수가 보좌와 네 생물, 장로들 사이에 계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 인봉을 떼고 책을 펼 자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이때 유대지파, 다윗의 뿌리이신(5:5), 어린 양 예수께서 이 책을 취한다. 찬양이 드려진다. 네 생물과 24 장로가 노래하고(5:9-12), 많은 천사들이 노래하고(5:12), 만물이 노래한다(5:13). 이 노래들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따라 우주를 다스릴 권세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통하여 우주를 다스리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심판의 그리스도이시다(14:14-16). 그는 흰 구름에 앉으시고, 금면류관을 쓰시고,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을 거두신다.
(3) 영계의 그리스도
예수는 전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음녀 바벨론(14:8; 16:19; 17:5; 18:10)을 비롯하여 세 가지 지원세력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16:13)와 싸우신다. 이들이 하르마겟돈에 집결한다(16:16). 하르마겟돈은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다.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는 철병거 900승을 가진 강한 병력이기에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인데 바락과 드보라가 이겼다(삿 5:19).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전쟁에서도 음녀 바벨론과 세 더러운 영과 온 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 큰 세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여도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16:15) 이 대적들을 무찌르실 것이기 때문이다(19:19-20:10).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16:14)이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유배를 당하는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예배한 사람이었다. 고난이 신앙을 이기지 못하였다. 비록 그의 육신은 밧모라는 지중해의 먼지처럼 작은 섬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영안은 하늘보다도 넓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비록 그는 고난과 핍박이라는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영광과 승리라는 미래를 기대하였다. 사도 요한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에 의하여 세상나라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며, 영광과 승리라는 미래로부터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현재를 이해하는 삶이었다. 이런 시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렬하게 소망하였던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요한신학
박경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 요한의 독수리
오늘날 인간은 자본의 세계화와 기술의 도움에 의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가깝게 느끼고 그야말로 인류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독하다. 우리 동네 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과 공존 공생한다는 생각보다는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세계 시민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람들의 어깨를 내리누른다. 기술적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발전되었지만, 그것은 내가 이용할 수 있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기술이 아니라, 또 다시 힘겹게 습득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 자유와 가능성이 확대된 오늘의 세계 속에서 아이러니칼하게도 개인은 자신을 더욱 왜소하고 무력하게 느낀다. 세계화 과정 속에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내면적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삶의 의미 문제와 가치 문제에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다. 세계화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국경허물기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성과 인간 내면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오늘날 세계화로 인해 인류가 겪는 위기상황은 초대 기독교가 형성된 후기 헬레니즘 시대 인간이 겪었던 내면적 위기와 비슷한 데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화, 세계화 정책 역시 오늘날의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촉발된 측면이 강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을 정복한 이후 그리스 도시를 모델로 하여 형성된 도시들이 헬레니즘 세계의 경제와 문화생활의 중추가 되었다. 시리아의 안디옥, 소아시아의 에베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동방의 대도시들은 산업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동방과 서방은 경제적으로 개방되어 있었으며, 서로 교류하면서 경제적인 공동체로 성장했다. 동방과 서방을 가로지르는 물품의 교역은 필연적으로 인간과 사상의 교류로 이어졌고, 이러한 물적, 인적 자원의 교류로부터 제한 없는 사상 교류를 가능케 하는 세계 문명이 탄생하였다. 폴리스라는 좁은 우물이 아니라, 이른바 '세계화'의 지평에서 사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적 세계화에는 그늘이 있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도시와 농촌의 갈등 양상으로 뿐만 아니라 도시 안에서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헬레니즘적 세계화의 혜택을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과 이들이 흡수한 토착 지배세력이 소수의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던 반면, 대다수의 노동 인구는 토착민들이었으며, 이들은 대개가 동방 지역의 후손들이었다. 이것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대다수의 토착민들은 그리스 문화에 결코 흡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헬라화 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생활양식,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특성을 고수하였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하나의 통일체였던 헬레니즘 세계가 내적으로는 불평등한 두 부분, 그리스인과 그에 결탁한 세력, 그리고 토착민으로 분열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지배계급의 혁명과 항쟁의 분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66-70년의 유대전쟁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로마제국에 대한 이러한 투쟁들은 정치 운동임과 동시에 종교 운동이었고, 계급적으로는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저항적 성격을, 지역적으로는 서방에 대한 동방의 대항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결집으로 이루어진 제국 속에서 그 신민들이 로마의 전통 안에서 동질성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이해와 지배가 가능한 것 같았던 코스모스는 이제 무섭고 낯설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것으로까지 보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근심이 잊혀진 또 다른 세계, 영원하고 영적인 세계에서의 구원을 갈망했다. 이들은 질서와 이성의 원리를 갈파하는 그리스 사상보다는 유대교의 유일신론, 바빌론의 점성학, 이란의 이원론 등과 같은 동방의 유산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러한 후기 헬레니즘의 분위기 속에서 고대 동방의 종교들은 태생 지역의 강한 토착성에서 벗어나 대중 종교로 재탄생 하였다. 초대 기독교의 발생과 전파는 이러한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 사회적, 영적 위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성공 역시 이러한 위기의식을 자양분으로 한 것이었다.
2000여 년 전 헬레니즘적 세계화 시대에는 동방 종교사상의 질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억압받는 민중들의 사회정치적 저항의 에너지는 구원에 대한 종교적 열정과 연결되었고, 해방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으로 고양되었다. 이 시기의 종교들은 거대한 헬레니즘 세계에서 미아가 되어버린 개인들에게 귀속감과 안정감을 줄 뿐 아니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했다. 모순된 인간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이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동방의 종교들은 그리스의 이성 예찬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와 위안을 찾을 수 없었던 개인들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말하자면 헬레니즘적 세계화로 인해 촉발된 인간 정신에 대한 유례없는 도전에 직면하여 인간 정신의 고양이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인류도 이 유례없는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문화적 세계화에 직면해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인간 정신의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쇠락하고 말 것인가.
요한복음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인간이 겪었던 위기를 무엇보다도 내성적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위기상황의 외적이고 직접적인 계기들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전제되어 있고, 그로 인해 인간 내면이 겪는 곤궁을 신약성서의 그 어떤 문서보다도 깊이 있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세계의 적대성, 자신을 둘러싼 외적 세계의 억압을 뚫고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비상하고자 하는 초월에 대한 열망 같은 것들이 문학적 천재성과 신학적 독창성을 통해 사려 깊게 표현되었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기술한 헬레니즘적 세계화 상황 속에서 인간 내면이 겪은 위기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서의 문학적 특징과 주요 신학적 주제들, 그리고 요한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을 기술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요한 신학을 이해함으로써 오늘날 세계화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문제상황을 이해하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에 주는 도전의 의미를 성찰해볼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오랜 세월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로 독자들을 매료해왔으며, 자주 영적인 복음서라고 일컬어졌다. 요한은 신약성서의 어떤 저자보다도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내면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해석해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와 그의 의미에 대한 장엄한 명상이라고 해도 좋다. 요한복음서는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영의 활동과 사물의 영적 의미에 몰두하며, 동시에 요한이 추구하는 영은 요한복음서 자체의 문서적 성격마저도 규정했다. 요한복음서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심오한 언어들은 그 의미가 잘 잡히지 않으며, 드디어 알았나 싶은 순간에는 이미 멀찌감치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국 요한복음서 자체가 "불고 싶은 대로 불며....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3,8) 영처럼, 바람( )처럼 모호하면서도 묵직한 신비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요한복음서의 이러한 영적 경향은 흔히 공관복음서와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공관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의 삶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육의' 복음서라면, 요한복음서는 말씀의 복음서, 영적이고 신학적인 복음서라는 것이다. 더욱이 요한복음서의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언어들로 인해 요한복음서의 영적인 성격은 쉽게 추상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서의 추상적 사유의 기원이 어디인지, 그러한 추상화의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을 요한 연구의 주요 주제로 삼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연구 경향이 요한적 사유의 한 측면을 밝혀준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다른 현실들, 즉 구체적인 사회, 역사적 측면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거나 더디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요한복음서 연구 분야에서 눈에 띠는 진전은 요한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요한공동체가 연루되었던 당대 유대교와의 갈등과 회당축출이라는 뼈아픈 경험이 요한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들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요한이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를 풀어나간 문학적 기법들은 어떤 것이었는지가 밝혀졌다. 요한복음서가 쓰여진 사회적, 역사적 상황, 그리고 요한공동체가 연루되었던 갈등들을 밝힘으로써 요한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영적인 복음서로서의 요한복음서에 대한 이해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요한복음서 독자들이자 요한적 사유의 주체들이었을 요한공동체의 치열한 영적 경험과 고백의 과정을 보다 가까이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영적인 복음서로서 요한복음서에 피가 흐르고 살이 붙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서의 영적인 성격까지도 보다 구체적이고 몸적인 형태로 다가오게 할 것이며, 본문에 대한 통전적 이해로 인도할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대한 전통적 상징은 독수리였다. 브라운은 "요한의 독수리는 지상으로부터 높이 날아오르더라도 싸움을 위한 발톱을 드러내고 날아오른다"고 말했다. 이 말은 요한복음서의 영적 특성의 일면을 잘 드러내준다. 요한복음서가, 요한공동체가 영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요한 반성을 즐기거나 영적 열광주의의 만족상태에 있다는 것인가? 요한복음서는 흔히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깊이 하나가 되는 관계로 이끌고,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우리가 이 복음서로부터 심오한 영적 통찰과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이 복음서의 깊은 영적 체험의 세계는 요한공동체의 삶과 투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요한공동체는 적대적인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의 삶을 살았고, 이러한 증거의 삶을 통해 그들의 영적 체험은 구체적인 육의 형태를 얻었다. 요한의 독수리는 드높고 깊은 영적 하늘을 향해 까마득히 비상하지만, 이미 지상의 싸움에서 상처받은 독수리이며, 그 독수리는 지상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애정과 기대를 안고 또 한 번의 아름다운 착륙을 기대하며 하늘로 솟구친다.
2. 하느님의 언어, 인간의 언어
종교가 열어주는 깊은 체험과 감동의 세계 밑바탕에는 늘 심오한 만남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신비와 마주하는 두렵고도 떨리는 체험, 신적인 세계에 의해 자기 자신이 알려지는 체험이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어느 복음서들보다도 이 신비로운 체험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서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의 대화상대자들은 이러한 신비의 세계와 마주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대변한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신비인 예수를 알고자 하며, 그러한 신비의 세계에 의해 알려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와 나누는 대화를 보면 대화 상대자들 사이에 동일한 의사소통의 체계를 사용하는 정상적인 대화라기 보다는 각기 언어의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불교의 선문답을 떠올린다. 하느님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를 뚫고 들어올 때 생기는 균열과 모순 같은 것들이 요한복음서의 언어와 신학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의 대화를 읽을 때 독자들은 상호적인 의사소통의 부재, 단계적인 인식의 부재에 당황하게 된다.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대화상대자들은 종국에는 예수라는 신비의 일단을 깨닫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대화의 진전에 따른 단계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신비를 알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에 비하면 그 깨달음의 내용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속도는 더디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말하는 영적인 다시 태어남을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며,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바로 그이다"( )라는 예수의 결정적인 자기계시 앞에서도 "그가 내 과거를 다 알아맞히었으니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닐런지요?"라고 참으로 답답한 반응을 보인다.
반면 요한의 예수는 사람을 안다.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한다.(2,23-4) 여기서는 예수가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의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 존재의 밑바탕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작용을 알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요한의 예수는 오해들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며, 요한공동체만이 계시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유대인들과 세상은 의사소통 체계의 문밖으로 밀려나 있다. 요한은 믿음의 세계를 앎의 세계로 제시하지만, 그 '앎'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되지 않는다. 예수와 세상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소리 없는 침묵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
요한의 독특하고 내성적인 언어들은 그가 안내하는 세계 안으로 일단 발을 들여놓지 않는 한 꽉 닫힌 채 오만하게 버티고 선 문처럼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이 손잡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면 독자들은 그토록 불가사의하면서도 단순한 언어로 요한이 펼쳐주는 상징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문을 열어야 들어갈 테지만, 안에서 보면 문은 이미 열려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요한 3, 8)는 영에 대한 요한의 말은 요한의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몸으로 바람결을 느낄 수 있다. 바람을 손으로 붙잡을 수 없듯이 요한의 언어는 파악(把握)되지 않는다. 바람을 몸으로 느끼듯 요한의 언어도 몸으로, 삶으로 느껴야 한다.
그러므로 외적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서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라고 독자들을 초대하며, 독특한 자신의 사고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부른다. 여러 학자들이 요한 사고의 논리는 그의 계시이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었으며, 요한의 사고유형을 원형적인 사고라고 했다. 말하자면 요한의 사고는 계시에 근거한 독특한 확신을 전달하는데, 그 안에서는 개념들이 서로 내적으로 관련되어 있어서, 어느 한 결론의 근거는 다시 다른 결론의 인식내용이 되고, 그것의 인식 근거는 다시 첫 번째 인식의 근거가 된다. 계속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마치 하나의 원처럼 폐쇄적인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하지 않고, 이미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폐쇄적인 사고체계이다. 따라서 요한의 사고에서 계시에 대한 지식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인 원 안에서 명시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신앙이 있으면 원형적인 사고는 놀라운 설득력을 발휘하며,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자기폐쇄적인 언어와 사고유형은 그에 상응하는 현실을 전제한다. 요한의 원형적 사고의 폐쇄성은 요한복음서의 상징적 의미세계의 폐쇄성에 대한 표현으로, 요한공동체의 폐쇄성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폐쇄적인 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요한의 사고를 요한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 안에서 이해해볼 것이다.
3. 고통의 실상
요한복음서 3장에서 예수는 "위로부터, 다시"( )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요한은 세상으로부터는 실질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비극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이 확신을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로 표현했을 것이다. "위로부터 남, 거듭남"이라는 요한의 표현은 신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 사이의 단절에 대한 요한의 과격한 신학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인식은 요한공동체의 뼈아픈 박해의 경험 속에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가진다.
요한복음서는 신약성서의 어떤 문서보다도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유대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대표자들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어째서 요한은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반대하는 세상을 묘사하는 데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는가? 거기에는 요한공동체와 유대교 사이의 긴장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대결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복음서 집필 당시의 갈등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구절들에서 요한의 서술은-마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두 차원의 드라마로 이루어진다. 요한은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9장의 소경치유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다. 이 본문이 요한공동체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9,22;12,42;16,2) 개념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22절) 이 말은 회당으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 당시가 아니라, 70년 유대전쟁 이후 유대교 재건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는 바리새파만이 유일한 유대인 집단으로 살아남았다. 이들 대부분이 다른 집단들과 달리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리새파는 예루살렘 파멸 이후 얌니아에서 유대교 재건운동을 벌였고, 이들이 다시 세운 유대교가 규범적인 유대교로 자리잡았다. 이 바리새파의 눈에 요한 기독교인들은 이단이었고, 출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조처는 70년 이후 강제적인 것이 되었다. 요한 9장;15,18-16,4에 의하면 요한공동체는 이 조처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회당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은 곧 민족공동체 자체로부터의 추방이기도 했으며, 법적인 불확실성과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빠지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회당축출은 로마 점령세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파급효과를 지녔다. 회당으로부터 쫓겨난 기독교인들은 로마 당국 아래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회당에 의해 잠정적인 선동자로 고발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요한공동체를 초기 랍비 유대교에 의해 추방당한 이단자들의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유대교와의 이러한 긴장관계는 요한공동체의 가장 일차적인 문제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 시대사적인 배경에 비추어 보아야 비로소 요한복음서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요한공동체 자신의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요한은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공동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서의 많은 설화들은 두 차원의 드라마로 쓰여졌다. 그리고 이 두 차원의 드라마는 요한공동체의 현재적 상황에 더욱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요한공동체의 뼈아픈 경험과 관련해서 보면 앞에서 말한 '거듭남'은 요한적인 상징세계의 폐쇄성을 보여주며, 요한공동체의 자기이해가 지닌 한 가지 특이한 성격을 말해 준다. 외부인으로서는 이 공동체에 접근하고 그들의 확신에 찬 논리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출생의 기적, 다시 말해 새로운 상징체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두 세계 즉,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요한공동체와 외부세계 사이의 대립과 불연속성을 누구보다도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리는 신비와 상징들이 나직한 슬픔의 색조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소리 없는 침묵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 요한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전해주어도 쓰디쓴 비난의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이 침묵의 벽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요한의 언어들은 이러한 뼈아픈 의식의 단련 속에서 연마된 결정체이다.
4.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파라클레토스(paraclete)
신약성서에 의하면 신자들은 영 체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죽은 뒤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을 담대한 선교자로 만든 것은 성령이었고, 영 체험과 교회의 선교 사이에는 긴밀한 관련이 있다.(사도 1,8) 공관복음서의 예수는 추종자들의 운명에 대해 말할 때 늘 그들에 대한 박해를 예언한다. 열둘의 선교는 거부당하고 박해받을 것이며(마태 10,14이하), 박해는 재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영은 제자들의 증거를 도울 것이다.(마태 10,20; 마가 13,11; 누가 21,12)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요한공동체는 유대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15,26-27에 의하면 파라클레토스는 박해 가운데서 선교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힘이었다.(15,26) 법정적 기원을 지닌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칭호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요한은 헬레니즘 그리스어에서 일반적으로 재판상황의 피고측 "변호자"를 의미했던 라는 말을 영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여 영을 인격적 존재로 묘사함과 동시에 영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했으며, 나아가서 단순히 "변호자"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포괄적인 의미로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영이 지니는 다양한 측면들을 기술했다. 본래 신약성서 저자들은 라는 중성명사로 "영"을 기술했으며, 그것은 인간을 사로잡고 변화시키는 특정한 신적 힘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변호자"를 뜻하는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영을 인격적 존재로 묘사하고,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관련시켰다. 요한에 의하면 는 십자가에서 영광 받은 후 영의 형태로 현존하는 그리스도, 즉 영/그리스도이다. 나아가서 요한은 본래 이 말이 지니고 있던 피고측 변호자라는 의미를 넘어서 고발하는 검사, 위로자, 권면자 등 다양한 기능을 포괄하는 독특한 언어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이렇게 재판과 관련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로 영을 묘사함으로써 요한은 영, 또는 영 체험을 재판상황이라는 복음서의 문학적 장치 안으로 끌어들였다. 말하자면 본래 영 체험이 관련되어 있던 박해의 상황이 요한복음서 안에 자주 나타나는 재판 문맥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전체에 걸쳐 예수는 마치 재판을 받고 있는 것처럼 그려졌고, 요한은 지금 재판을 통해 요한공동체가 받고 있는 박해는 그의 소송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요한공동체이지만, 요한공동체의 재판상황은 예수의 재판상황과 동일시된다. 재판 받는 공동체를 위해 예수가 공동체의 자리에 서 있다. 그리스도가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공동체의 박해와 재판상황 안으로 오셔서 공동체의 재판을 자신의 재판으로 삼는다. 박해와 고난의 상황에서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서로 통하며, 하나가 된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는 공동체로 하여금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게 하는 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현재 그들이 당하고 있는 박해와 선교의 삶 한가운데 지나온 하느님의 역사와 앞으로 펼쳐질 하느님의 미래가 집약되어 있다. 과거와 미래가 지금 여기 공동체의 삶 속에 통전되어 있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는 박해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공동체의 현재 시간을 하느님의 시간, 종말론적 시간으로 만드는 영이었다. 그것은 요한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교를 계속했고(17,18; 20,21), 그리스도를 살았다. 요한공동체는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를 지속시킨다. 즉 그리스도를 살려낸다.
파라클레토스는 박해 가운데서 선교와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지속시키는 요한공동체의 현재적 삶 속에 그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영 체험 속에서 요한공동체는 완전한 하나됨,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다. 떠나는 예수가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주는 고별담론은 이러한 하나됨과 완전한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말들로 가득 차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가 떠난 후 슬픔 속에 있는 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하나됨으로, 슬픔을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일치와 위로의 영이었다. 영은 물처럼 조용히 스며들고, 바람처럼 고요히 불어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물을 하나로 엮어주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리스도와 공동체는 하나이고, 요한의 목자와 양은 서로를 완전하게 안다. 이러한 일치의 경험이 요한적인 사랑의 토대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와 함께 사는 일이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영으로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영 그리스도인 파라클레토스는 끊임없이 먼저 있었던 사랑을 회상시킨다.(14,26; 15,26-27)
공동체는 먼저 있었던 사랑의 기억 속에 산다. 요한의 목자는 양들을 위해 죽는다. 이것은 실제 현실 속에서 목자의 행태와는 맞지 않는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도 않으며, 당위적이 될 수도 없다. 설령 양들이 목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소유물에 불과한 양들을 위해 주인인 목자가 목숨을 버리기까지 해야 할까? 양들의 생명보다는 목자 자신의 생명이 더 귀중하지 않은가? 분명 여기에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상황을 과격하고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요한적인 사고의 경향이 나타난다.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요한의 목자는 그리스도이다. 어째서 요한의 목자는 죽음을 무릅써야만 양들을 지킬 수 있는가? 어째서 요한은 이렇게 비장한가? 요한이 그리는 상징들이 이처럼 저마다 낮은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요한공동체가 직면했던 특수한 상황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선한 목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위험한 박해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공동체를 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과 관련된 경험이 예수를 선한 목자로 그리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들은 아직 선한 목자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기억 속에 산다. 목숨을 바친 사랑의 기억은 박해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살아 있게 하는 보루였을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이리를 보고 달아나는 당연한 행동이 양들의 죽음을 초래하듯이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한 작은 행동이 상대방의 죽음과 공동체의 해체라는 크나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넘어서는 비장함,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결연함이 요한공동체와 그 지도자에게 요구된다. 선한 목자인 예수가 양들인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버렸듯이, 그래서 공동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듯이 지금 위기의 상황에서 요한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다.(15, 13) 예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목자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목숨을 버린 큰사랑, 이것은 서로 통함, 서로 꿰뚫림, 완전한 앎이다.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적인 사랑의 토대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다. 양들의 서로 사랑의 근저에는 목자의 사랑이 있고, 목자의 사랑의 근저에는 목자를 보낸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하는 관계에 동참한다. 그럼으로써 구원받은 자들 사이의 완전한 하나됨, 완전한 사랑의 관계가 가능해진다. 요한이 전제하는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이다.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와 신자가, 그리고 신자들 서로 서로가 이처럼 친밀한 공동성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영'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영이 이러한 일치와 공동성의 토대이다.
요한공동체의 영적 열정은 어떤 빛깔을 띠었을까? 신약성서에는 영을 나타내는 다양한 상징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불과 물이라는 상반되는 상징이다. 불로서의 영은 방언, 격렬한 신비체험으로 나타나고, 물로서의 영은 조용하게 스며드는 영, 깨달음의 영으로 나타난다. 아무래도 요한공동체의 영성은 후자, 즉 물로서의 영성인 것 같다. 회당축출이라는 생존권박탈의 위기상황에서 요한공동체는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는 뜨겁고 황홀한 집단적 체험에 몰두하기보다는 공동체 삶의 한가운데서,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스도를 살고자 했다. 그들이 체험한 영/파라클레토스는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리스도를 살게 하는 일치의 영, 하나됨의 영이었다.
영이란 무엇인가? 영은 하느님과 통하고 나 자신과 통하고 이웃과 통하고 자연과 통하는 것이다. 영성은 신적 초월에 대해 열린 자세와 품성, 초월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영은 문자적으로는 바람과 숨(히브리어 , 희랍어 , 라틴어 spiritus)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이다. 숨은 약한 바람, 생명 안에 있는 바람으로서 생명의 본질이다. 모든 생명은 숨을 통해 타자와 연결되고, 숨을 쉼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므로 숨을 영이라 함은 몸과 영의 통전, 나와 나 아닌 것의 통전을 말한다. 영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통하는 것이다. 숨을 고르게 편안히 깊게 잘 쉬면, 마음도 건강하고 편안해지며 영혼도 힘을 얻는다. 동양적인 선도에 따르면 정(精 신체)-기(氣 몸의 기운)-신(神 정신과 혼)이 하나로 통할 때 도(道)가 통한다. 영혼, 신령은 인간의 원동력으로 초월적, 신적 생명, 지극한 생명기운과 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는 기의 조화가 있다.(外有氣化)
파라클레토스는 요한공동체의 숨이자 생명 에너지였을 것이다. 그것은 요한공동체의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의 영이었을 것이다. 즉 내적으로는 파라클레토스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통하고, 그럼으로써 안으로 신령함을 보존하고, 외적으로는 "아무 까닭 없이" 자신들을 증오하는 세상 앞에서 절망과 증오의 나락에 빠지지 않고 그들과 공존공생하며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영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근원적 삶에로 해방시키는 자유와 일치의 영이었을 것이다.
5. 포도나무와 가지: 요한공동체
초대 기독교 시대에나 오늘의 시대에나 기독교 선교와 기독교적 삶의 밑바닥에는 공동체적 삶이라는 토대가 있다. 더욱이 요한공동체는 박해받았고,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선교와 증거의 임무에 대한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적 정체성, 자기결속력은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외견상 요한복음서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집단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요한복음서 안에도 신자들의 공동체성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부분들이 있다. 10,1이하나 15,1이하와 같은 본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본문들은 직접적으로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의의, 그리고 어떻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느냐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요한 15,1-16,4a에서는 공동체 내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15,1-17), 그리고 공동체 밖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15,18-16,4a)와 관련하여 중요한 언급들을 하고 있다. 1-17절에서는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들은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2.5.8절). 공동체는 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얻었고, 이제 그러한 구원받은 상태를 공동체의 삶 속에서 사랑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12-17절). 이러한 사랑을 통해 공동체는 그들의 삶 전체에서 예수의 제자임을 입증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8절). 이 점에서 부활절 이후 공동체는 계시의 전달자이며, 공동체의 사랑의 삶 전체가 계시의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구원과 믿음에 대한 교리적 진술이나 선동적인 구호가 아니라, 공동체가 보여주는 사랑의 삶이 세상을 향한 계시와 선교의 기능을 한다.(10,37-38;14,10-11)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5,1-17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공동체의 거주장소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는 공동체를 위해 장소를 예비할 뿐만 아니라 그 장소로 들어가는 입구, 아니 장소 자체가 된다. 요한공동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발전시킨 것은 아마도 시대사적인 상황 때문일 것이다. 요한공동체는 유대회당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고립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며, 새로운 안전성을 발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러한 안전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거주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요한복음서의 예수는 "확대된 예수"로서 공동체는 그의 인격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 10,9에 나타나는 "문"으로서의 그리스도나 15장의 포도나무로서의 그리스도는 공동체가 거주할 수 있는 확대된 예수를 나타낸다. 예수 자신이 바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공간이다. 이것은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전부, 즉 그들의 세계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일치와 하나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공동체이해에서 특징적인 것은 공동체와 예수와의 긴밀한 관련성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며", "살고", "그 안에서" 그와 공동체를 이루도록 초대받는다. 그리스도가 거하는 세계는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며, 서로 사랑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13.34-5;15,9-10;12,17;17,26) 즉 15,1-17에 의하면 공동체성의 핵심은 공동체의 지체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끌어들이고 사랑의 계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교회는 몇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예수라는 인격체와 공동체 구성원들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15,1-17에서 공동체의 본질에 대해 다루었다면, 15,18-16,4a에서는 공동체와 세상의 문제를 다룬다. 15,18-16,4a에 의하면 요한공동체는 동시대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에 대해 증거를 했다. 그러나 유대 당국은 요한 기독교인들을 회당에서 축출하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공동체는 어째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15,18-16,4a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 구절들에서 요한은 "공동체"와 "세상" 사이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그러한 증오와 박해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에는 예수로부터 "선택받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요한공동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기사랑 안에 갇혀 있는(19절) 적대적인 세상이 있다. 세상은 요한공동체를 미워한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 요한공동체의 운명은 예수 자신의 운명과 동일하다. 요한은 예수와 요한공동체에 대한 세상의 증오는 "아무 이유 없다"(25절)고 말한다. 26-27절에서 요한은 이러한 박해의 상황 한가운데서 공동체는 이제 새롭게 증거를 재개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요한은 고난에 처한 요한공동체에게 공동체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고, 그럼으로써 공동체가 힘을 얻어 다시 박해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요한 15,18-16,4a는 공동체와 세상 사이의 이원론을 말하는데, 이 이원론은 공동체가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서 고고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여금 세상 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원론적인 인식이 일원적인 통합의 행위로 인도한다. 말하자면 요한공동체는 스스로가 탈세상화 된 공동체이며, 본질적으로 세상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재확인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다시 세상을 향한 선포의 상황 속으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신약성서 문헌들 중 교회에 대한 관심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사실은 특이하게 내성적이고도 신비로운 언어들을 통해 견고한 공동체의식을 보여주며, 권장하고 있다. 바울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몸에 속한 각 지체들은 하나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요한 역시 한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들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정의하며, 나아가서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이것은 흔히 생각되어왔던 것처럼 요한복음서가 구원의 내적 고요 안에 안주할 것을 권하는 정태적 신비주의 문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거부하고 증오하는 세상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 세상과 씨름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요한공동체가 자기폐쇄적인 집단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심력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엄청난 탄력을 받은 원심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고자 했던 열린 공동체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요한공동체가 견지했던 그리스도 중심적 내적 응집성은 세상을 부정하고 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돌진하고 세상을 끌어안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역동성과 활력이 헬레니즘 시대 고통과 박해의 상황 속에서 초대 기독교, 그리고 요한 기독교가 놀라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6. 맺음말: 생명 신학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구원의 현실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썼다면, 요한은 "생명"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적 내용인 "하느님 나라" 개념이 구원 경험의 역사적이고 사회적, 집단적인 차원을 잘 드러낸다면, 요한이 즐겨 사용한 "생명"은 구원 경험의 내면적이고도 개인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준다. '생명'은 요한 신학에서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각기 구원경험의 상이한 측면들을 표현한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선포의 중심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아마도 신중심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관계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요한이 구원을 나타내기 위해 '영원한 생명', 또는 종말론적 '영의 기름부음'과 관련된 표상을 사용한 것은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참된 자아라는 사실을 이 표상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 개념에 비해 구원의 사회학적 측면은 상실되는 측면이 있지만, 대신 생명이나 영이라는 말은 인격적인 사로잡힘을 잘 표현해낸다.
요한복음서에서 구원, 또는 종말론적 기대 실현의 내용이 "하느님 나라"보다는 생명과 영의 수여에 대한 표상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실현 시점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가 "영광받는" 때와 관련되었다. 주지하듯이 요한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영광받음"은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다. 요한복음서에서 "영광받음"이라는 말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영의 기름부음 등 복합적인 사건들을 지칭할 때 ("영광스럽게 하다")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 말은 결정적인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가리키며(2,4; 7,30; 8,20; 12,23.27; 13,1; 17,1),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과 승천까지도 포함한다. 엄격히 말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은 시차를 가지고 진행되는 각각의 사건들이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틀 안에서 설화의 단계적 전개를 통해 그러한 시차를 인정하고 드러내면서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영광받음")를 사용함으로써 부활, 승천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죽음까지도 "영광받음"이라는 단일한 종말론적 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요한이 사용하는 "올려졌다"( )라는 말도 비슷하게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요한복음서에서 이 동사는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 둘 다를 의미한다. 누가(사도 2,33; 5,31)는 승천이라는 의미로만 이라는말을 사용한 데 반해 요한은 하늘로 올리움, 즉 승천과 십자가에 올리움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 위로 올려지는 것은 그가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실은 하늘을 향한 움직임, 즉 승천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요한은 십자가로 올려지는 것과 하늘로 올려지는 것의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구별할 수는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이 둘이 뗄 수 없는 하나임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을 ("올려졌다")이라는 독특한 이중의미를 지닌 말로 표현했다. 이중의미를 지닌 한 단어( )로 두 사건이 묘사됨으로써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뒤로 밀려나는 대신 요한적인 신학적 인식이 전면에 부각된다. 다시 말해 참혹한 십자가가 곧 영광에로 올려지는 길이라는 그의 신학적 인식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이 점에서 요한의 신학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
요한은 "영광받음", "올리움"이라는 말을 통해 종말론적인 "그 때"의 여러 사건들을 하나로 합쳤다. 따라서 영광에 찬 승천 역시 고통스러운 십자가와 연결되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누가는 승천을 예수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극적인 공중 승천으로 묘사했지만, 요한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이 부분을 기술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예수가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고 있다는 데 대한 암시일 수 있다. 요한의 경우는 영/파라클레토스를 그리스도로 체험하는 요한공동체의 삶의 현재에 초점이 놓이다 보니-시간적 선후관계라든가 그리스도와 파라클레토스의 구분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그러한 현재적 경험의 지평에서 상호 구분과 시간적 선후관계의 경계가 융합되어 서로 넘나들게 된다.
결국 요한은 종말론적인 "그 때"의 상이한 역사적 사건들을 알고는 있지만, "영광받음"이라든가 "올리움"이라는 말을 통해 그것들을 신학적으로 통전된 하나로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이 과정을 통해 승천과 영의 수여라는 빛나고 영광스러운 사건들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와 연결되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십자가, 죽음, 부활이 있고 난 다음 이어지는 각각의 분리된 사건들이 아니다. 아니 각기 구분은 되지만 전체가 통합된 하나로서 기능한다. 십자가 없이 승천과 영의 수여는 없다. 이 점에서 십자가는 이미 그 안에 승천과 영의 수여라는 종말론적 기대의 실현을 내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요한 신학의 전체 틀을 받아들인다면, 삶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요한은 고통 뒤에 축복된 미래가 있으리라는 허황된 약속을 하지 않는다. 현재의 삶은 괴롭지만 죽고 난 다음에 천당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리라는 식의 판에 박힌 약속도 하지 않는다. 요한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냉혹함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거짓된 미사여구로 삶을 미화하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의 무상성 한가운데서 영원한 하느님의 손짓을 발견하라고 한다.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곧 영광받음이고, 하느님께로 올리움이듯이,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 자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영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방식은 사실은 오래 전부터 인류가 지녀온 위대한 종교적 통찰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던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개인에게 시간의 주인인 하느님은 무자비하고 냉혹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고 파괴시키는 시간의 수레바퀴는 그 아래 깔린 개인의 감정이나 선악관념 같은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위대한 종교적 통찰은 인간의 고뇌와 시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는 그러한 고뇌와 시련이 본질적으로 평화와 궁극적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아니 자체 안에 평화와 생명을 품고 있음을 깨달으라고 한다. 신과 인간의 하나됨이란 선과 악, 차안과 피안, 남성과 여성, 나와 너의 온갖 대립을 포기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진다. 대립 자체를 포기할 때 마음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신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시간이 지니는 무섭고 잔인한 측면을 나타내며, 먹고 먹힘으로써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한의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광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자기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해소시킨다.
종교적 통찰의 놀라운 신비는 삶의 비극과 처참함을 생명에 대한 찬미로 바꾸어 놓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위대한 종교적 가르침들은 역설과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자기모순적인 하느님의 신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조촐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거한다는 성육신의 신비와도 통한다. 생명의 본질은 시간 안의 존재라는 데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이란 바로 이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그래서 성육신의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은 생멸하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몸소 자기를 낮추어 들어온다.
요한은 고난을 당하는 하느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하느님에 대해 말함으로써 생명의 역설적인 진리를 웅변적으로 설파했다.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육체는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다름 아닌 생명나무이다. 요한은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이미 부활의 생명꽃이 핀 것을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생명,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질 수 있다. 이 살라는 명령 앞에서는 어떠한 개체의 불안도, 두려움도, 고통도 이차적이다.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처럼 보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덧없는 생명일지라도 숨이 붙어 있는 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있는 힘껏 살아낼 수 있다. 아마도 요한은 고통스러운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 이러한 생명의 본질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 속에 있더라도 개체적인 나의 생명이 보다 큰 대자연과 우주, 하느님의 생명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고, 우주와 대자연, 시간의 주인인 신의 지엄한 명령인 생명, 즉 살라는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유대인의 대로마 입장
김선정 박사(연세대 강사)
Ⅰ. 서 언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이 하나의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강조하였던 황제의 신격화 정책, 즉 신-왕 일치 사상에 대하여 신으로서의 황제도, 왕으로서의 황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었다. 전자는 그들의 오랜 유일신 신앙 전통에 위배되는 일이고, 후자는 유대의 피지배 상태에 대한 굴욕적인 수용을 의미하는데서 나아가 초기 이스라엘에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하나님 왕권에 대한 부인을 뜻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요한복음서는 이처럼 로마 제국의 신-왕 일치 사상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타협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지배-피지배의 힘의 불균형 속에서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암시하고 있다.
Ⅱ. 로마 제국의 神 거부: 유대인의 신, 하나님
로마 제국은 여러 신을 인정하고 숭배하였던 다신 종교 국가였다. 로마 제국은 영토 확장으로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된 많은 속주들의 이교들에 대해서, 그것이 邪敎로 판명되지 않는한, 허용하는 관대한 종교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대교는 주변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유일신 사상을 견지하였지만 로마 제국의 이러한 포용적인 종교 정책 덕분에 유대 민족이 조상들의 종교인 야웨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일체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고 야웨 신만을 인정하는 배타성 때문에 '무신론'이라는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 내에서 특별한 혜택을 누렸다. 로마 제국은 유대교의 배타성에 개의치 않았으나 한 가지 경우만은 예외였다. 즉 아우구스투스 집권과 더불어 제정 시대가 열리면서 더욱 체계화된 로마 황제의 신격화와 그에 대한 제의에 참여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우상을 만들거나 거기에 절하는 것이 십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칼리굴라 흉상 건설 계획이나 빌라도의 군기 사건 등에서도 드러났듯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요한복음서는 유대인들과 예수의 논쟁 속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하나님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의 전반부(1-12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논쟁은 주로 요한복음서의 유대적 배경을 설명하거나, 그러한 논쟁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정체성을 규명하거나, 유대교(회당)와 요한공동체의 갈등적 상황을 반영하거나, 비밀 신자에 대한 경고이거나, 유다와 갈릴리 전승 간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연구되어 왔다. 유대인들의 주장에 담지된 하나님 신앙의 내용과 그러한 신앙 양태가 지니는 對 로마적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바,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유대인들과 예수의 논쟁 속에 반영된 유대인들의 하나님 신앙의 내용인 유일신 신앙과 그러한 신앙이 요한공동체의 거시 사회를 이루었던 로마 제국의 신-왕 일치 사상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요한복음서의 유대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 이해, 하나님 신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는 사람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분이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 5장 18절에 잘 나타난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주목하려는 점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인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고 판단하였고 - 예수가 실제로 이러한 태도를 취하였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 그것을 죽임을 당해야 하는 중대한 죄로 인식한다. 요한 10장 33절은 5장 18절의 '동등한 위치에 놓다'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에서 나아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고 단정적으로 말함으로써 보다 명백한 진술 형태를 띠고 있다.
유대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였소."
특히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것은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이며, 종교적인 범죄에 대하여 가해지는 돌로 치는 처형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구절이 예수에게 한 말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 듣는다면, 더 정확히 말해서 1-2세기 당시 만연하였던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혹은 황제 숭배를 강요받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사람들의 귀에 들려진다면, 이 구절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자기 스스로든지 아니면 先王에 대해서든지 사람이면서 神으로 인정되었던 로마 황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를 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요한복음서가 황제 숭배가 극성을 부렸던 지중해 동쪽 지방에서 쓰여졌다고 가정하면서도 이러한 로만 컨텍스트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요한 본문이 있다.
유대 사람들이 그[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19.7).
여기에서는 율법에 따라 처형당할 만한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되고 있는데, 곧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는 살아있는 황제는 선임 황제, 곧 죽어서 신이 된 황제의 아들로서 '신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하였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이 구절은 유대인의 율법은 로마 황제를 '신의 아들'로 주장하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로마인들이 이 구절을 읽는다면, 그들의 황제가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 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에 대한 주장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유대인의 사고는 로마와의 갈등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유대인들의 하나님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요한 8장 41절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신 아버지만 한 분 계십니다."
브라운은 이 구절이 야웨에 대한 불충을 간음으로 묘사한 호세아서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하면서,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숭배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다. 비슬리 머레이(G. R. Beasley-Murray)도 가 호세아서와 관련하여 우상숭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슈낙켄버그(R. Schnackenburg)도 이 구절을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특히 '단지 한 분이신 아버지'란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적들은 이 구절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하나님 신앙의 핵심 요소인 '우상숭배'와 '한 분 하나님'의 관계를 잘 포착하였다. 하나님이신 아버지 한 분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며 이것은 유대인들의 신앙에 위배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주석가들은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을 로만 컨텍스트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서의 유대인들은 한 분 하나님 사상,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로마 제국의 다른 신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거부한 로마 제국의 신들 중에는 식민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숭배되었던 신이 된 황제도 포함되어 있다.
Ⅲ. 로마 제국의 王 수용: 유대인의 왕, 가이사
로마 제국과 유대인 간의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두 번째 항목은 유대인의 메시아 기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서에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있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과 관련된다. 예수를 메시아로 규정하는 요한공동체의 시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하다. 유대인들 사이에 분열을 가져온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의문들 속에는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이 반영되어 있다.(요7.26-27, 41-42; 10.24) 특히 본 연구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구절인 7장 42절은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날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전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날 것이요,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다윗 가문에서 나오는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은 왕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꿈꾸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다윗 가문의 메시아는 다른 형태, 곧 왕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표적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요6.14-15) 이러한 정치적인 함의는 10장 24절에서도 드러난다. "당신[예수]은 언제까지 우리[유대 사람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이러한 왕적 메시아 사상이 로마와의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인가? 앞에서 제시하였던 10장 24절의 라는 표현을 눈여겨봄직하다. 이것은 우리말 표준새번역 성서에서는 '마음을 졸이게 하다'로, 개역 성서에서는 '마음을 의혹케 하다'로 번역되었다. 전자의 경우는 메시아의 출현이 가지는 갈등적 정황을 보다 잘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혹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도 유대인들이 이러한 의혹을 지니는 동기를 추적한다면, 메시아로 인한 이스라엘 왕국의 도래에 대한 그들의 꿈에 닿을 수 있으며, 이러한 꿈이란 결국 지배자 로마와의 갈등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11장 47-48절 "이 사람이 표적을 많이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에서 48절은 로마인들이 유대 땅과 유대 민족을 빼앗는다는 명백한 로마와의 갈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47절을 주목해 보자.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갈등의 원인은 '모두 그를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왜 로마를 자극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정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를 믿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그는, 사람들이 그분이 하신 표적을 보고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 사람이며(요6.14-15 참조),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로 알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요7.25-27)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왕인 정치적 메시아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것은 로마가 유대의 땅과 민족을 빼앗을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왕적 메시아 사상과 로마와의 갈등은 12장 19절에도 암시되어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더욱이 12장 13절이나 15절의 예수의 왕권에 대한 언급은 12장 19절을 메시아로 인한 로마와의 갈등의 빛에서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윗 계보의 왕적 메시아 사상과 관련된 로마 제국과의 갈등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가?
유대인들은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요19.12)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왕'이라는 단어가 '메시아'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기억해 볼 때 이러한 '유대인의 왕'에 대한 거부는 그들의 왕적 메시아에 대한 거부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요한 19장 14-15절,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보시오, 여러분의 왕이오'라고 말하니, 그들은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외쳤다"라는 보도는 예수의 왕됨을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나라를 회복할 왕의 도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요한 7장 25-26절은 이 문제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예루살렘 사람 가운데서 몇 사람이 말하였다
.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이 구절은 지도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즉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죽이려고 한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예수가 참으로 메시아이기 때문에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예수 거부인 동시에 명백한 메시아 거부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들만이 메시아(그리스도)를 거부하는가? 1-12장의 메시아 논쟁에서는 총칭으로 사용되는 유대인이 메시아를 거부했다는 언급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무리들은 유대인들 두려워하여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전해진다(요7.13; 9.22).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요한 19장 12절의 보도는 '유대인들'에게 돌려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황제에 대한 반역을 이유로 황제이외의 다른 '왕' - 여기는 유대인의 왕(메시아)도 포함 - 을 거부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장 15절 하반절은 유대인의 왕(메시아) 거부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의 왕은 가이사뿐 입니다.
대제사장들의 의해서 주도된 이 답변은 지도자들(7.26), 유대인들(19.12)의 메시아 거부와 더불어 메시아 거부가 총체적인 의미의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에서 유대인의 왕은 예수는 말할 것도 없고 다윗 계보의 메시아도 아닌 로마의 황제로 천명된다. 요한복음서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다윗 계보의 정치적 왕, 즉 하나님의 대리자인 인간으로 인식함으로써 메시아(왕)를 하나님과 구분하였다. 곧 하나님의 왕권과 메시아(정치적 왕)의 왕권이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유대인의 왕(메시아)이 아닌 로마 황제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Ⅳ. 유대인의 대로마 타협과 유대인의 유익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 중 하나였던 신-왕 일치 사상은 신 개념이나 왕 개념 각각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충돌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신과 왕의 '일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도 갈등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러한 갈등 요소들로 인한 로마 제국과의 충돌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가? 우리는 앞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신-왕 '일치' 사상에 대하여 신-왕 '분리' 사상으로 대응하였음을 살펴 보았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신-왕 일치 사상에 완전히 순응하거나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입장을 택하지 않고 이중적 기준을 적용하여 신으로서의 황제는 거부하고 왕으로서의 황제는 수용하는 전략을 세움으로써 로마 제국과 타협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로마에 대한 타협적 입장의 배후에 대하여 요한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적을 많이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요11.47-48).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로 인한 문제가 로마를 자극할 경우 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 즉 로마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 이 두려움은 지배국 로마와 피지배국 유대의 힘의 불균형에 토대한 것으로 로마 사람들은 빼앗는 자로, 유대인들은 빼앗기는 자로 표상된다. 유대인들의 對로마 타협의 바탕에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힘의 불균형이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힘의 불균형이 타협적인 행태를 낳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요한복음서는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요11.50)
라고 말한다. 이것은 로마 지배 아래서 유대의 당국자들이 로마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이권을 확보하고 백성들을 착취하였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구절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검토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는 로마 지배에 대하여 유대 그룹들이 각기 다른 대응 양식을 가졌으나 요한복음서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엄밀하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검토는 위의 구절의 ' '(당신들에게)이 사본상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해야겠다. '당신들에게'는 사본에 따라서 ' '(우리들에게)으로 되었거나 아예 생략되어 있다. '당신들에게'를 취할 경우, 유익을 받는 사람은 가야바가 제외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11.47)이고 '우리들에게'를 취할 경우 발언자인 가야바를 포함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유익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어느 사본을 지지하느냐는 가야바의 요한복음서 내의 위치에 관심을 갖는 경우, 보다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가야바에게 있지 않다. 잠시 후에 설명하겠지만, 본 연구는 이 유익의 수혜자를 유대인 전체로 확대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세 번째로 생략되는 경우, 유익을 취하는 대상이 불분명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의 내용상 그 대상은 화자 그룹이나(화자인 가야바를 포함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유대 백성 전체를 지시하므로 그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본 연구의 논지를 방해하지 않는다. 결국 가야바가 말한 '유익'의 수혜자는 유대 당국자들이거나 유대 백성 전체인 셈이다. 현재의 본문을 기준으로 할 때, 이 단락에서는 유익의 수혜자가 문맥상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다. 그러나 이들만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로마로부터의 빼앗김을 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요한복음서는 특정 그룹이 아닌 총칭으로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 - 여기에서는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된 왕이다 - 을 거부하였다고 보도함으로써(19.7; 19.12; 19.14)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를 거부함으로써 생겨지는 유익의 수혜자를 유대 특정 그룹에 국한시키지 않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이 유대 당국자들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해도 요한복음서 기자가 그러한 용어들을 분명히 사용하고 있지 않은 점은 기억할 만하다. 그는 적어도 그것을 분명히 구분지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유대인'의 유익이 로마에 대한 타협적 입장을 형성하는데 관여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50절 하반절의 (유익하다)에 대하여 크레쩌(A. Kretzer)는 이 단어가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용례들을 조사하여 '유용하다, 유리하다, 이익이 있다'라는 뜻이 가장 널리 사용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것은 인간적-지상적 이익이나 개인적인 유리함을 뜻하기 보다는 교회의 복지나 성장(마태, 바울)을 말하는데 사용되며, 이것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의 구원 사역에 토대를 이루는 것(요한)이라고 하였다. 크레쩌가 요한복음서에서의 를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다루는 것은 16장 7절의 경우에만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6장 7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는 장면으로, 제자들의 유익이 보혜사의 오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1장 50절(이를 반복하고 있는 18장 14절 포함)의 경우는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11장 50절에서 말하는 '유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땅과 민족을 빼앗기지 않는 것,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의 구절을 주목하고자 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5.43-44)
여기에서 자기 이름으로 오는 다른 이는 누구인가? 브라운은 거짓 메시아를, 비슬리-머레이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나 악마를, 슈낙켄버그와 바레트는 구체적인 인물을 밝히려는 시도 자체가 적절하지 못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기 이름으로 오는 다른 이의 정체는 이 구절 안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아버지(하나님)의 이름과 다른 이 자신의 이름이 대립하고, 예수에 대한 거부와 그 '다른 이'에 대한 영접이 대립한다. 또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과 유대인들과 '다른 이'가 서로 주고 받는 영광이 대립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대립에서 이름과 영광이 주요 비교 항목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대립이 '오직 한 분'인 하나님(또는 아버지)에 대립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서중석이 주기도문의 첫 번째 탄원에 대한 연구에서 밝히고 있는 '이름'에 대한 언급을 주목해 보자.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 이들[로마] 황제들의 이름은 백성들에게는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헤롯 안티파스와 같은 유다 왕들의 이름 역시 공포의 대상이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이 아니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아니라, 유다 왕 헤롯 안티파스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권력이나 가졌다고 백성들을 함부로 다루는 그런 황제들의 이름말고, 마땅히 인간이면서 신으로까지 추앙된 그런 거짓 이름말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는 것이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세력 그 자체였다.
이 연구는 로마 황제의 이름과 아버지(하나님)의 이름 간의 대립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빌라도와 같은 로마 총독의 이름이나 헤롯 안티파스와 같은 유대 분봉왕의 이름이란 사실상 로마 황제 이름 아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대립되고 있는 두 세력, 두 이름은 황제(의 이름)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한 5장 43-44절에 언급된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대립되는 영광을 지닌 로마 황제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를 영접함으로써, 즉 "우리의 왕은 가이사뿐"(19.15)이라고 외침으로써 서로 영광을 주고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왕)을 버리고 가이사를 선택하는 타협 전략을 구축하므로써 가이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신들 또한 가이사로부터 영광을 받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영광을 받는 위치에 있다고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 12장 43절은 지도자들 중에서 예수를 믿으나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서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되고 있다. '사람의 영광'이란 지도자들이 누리는 지상적 부귀나 명예, 권력 등을 뜻하는 것일까? 지도자들이 유대교 안에 머무름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광이란 이러한 권위자로서의 영광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의 차원을 좀 더 넓혀 보기로 하자. 유대교 회당 내에 머무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단순히 회당 안에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사고나 행동 양태들에 동의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이중적 전략 또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로마 황제에 대한 왕권 인정이 그것이다. 회당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하여 믿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 안에 남아 있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 곧 황제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신-왕 일치에 대하여 그들의 유익(영광)을 위하여 신권과 왕권을 구분하는 이중 기준을 적용하여 로마 제국과 타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인자"의 "들리움"과 "영광"
The Lifting-up and the Glory of the Son of Man in the Gospel of John
김선배 (신약신학 교수)
1. 서 론
요한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해 특별한 형식의 구조와 언어를 사용했으며, 이러한 요한복음서의 신학을 이끌고 가는 것은 인자의 "들리움"에 관한 것이다. 이 어휘와 개념은 요한복음서를 다른 세 복음서와 뚜렷하게 구별되게 하는 동시에 요한복음서의 신학적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인자의 죽음을 영광으로 해석하기 위한 요한의 시도들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요한복음서의 "들리움"은 그의 부활이나 승천을 배제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만을 의미한다.
2. "아버지 됨"과 "아들 됨"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냈고(3:17; 10:36; 17:18), 그는 아버지로부터 왔으며(3:31; 6:33-42),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한다(13:1-3; 14:28; 16:28; 20:17). 아들은 성육신 하기 전부터 있었지만(8:56-58; 17:5, 24), 예수님의 아들 됨은 주로 그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다. 이 아들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일이며,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아들에게 순종하고(3:36), 아들에게 나아 오고(14:6),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다(5:23). 이러한 믿음은 구원과(5:34) 영생을 줄 것이다(6:40, 47; 20:31). 슈나켄버그(R. Schnackenburg)는 아들과 관련된 아버지의 역할을 분류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와서 승귀와 영화롭게 됨을 통해서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 대신에 아버지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아버지-아들"의 구도 속에서 그의 사명과 관련된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13:3). 아들과 관련된 구절들이 주로 내부 논쟁이 아닌 외부 논쟁과 관련된 부분에 등장하는 것은 이 구절들이 그의 정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크로그(R. Scrogg)는 이러한 것은 요한 공동체와 회당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들" 또는 "아들 됨"이란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기독론적 접근이 있다. 스크로그는 이 관계를 거룩한 실체(the divine reality)의 완전한 계시로 보았으며, 슈나켄버그는 구원에 대한 계시와 교리라는 관점에서 이를 다루고 있고, 카사(R. Kysar)는 복음서 기자와 그리고(또는) 공동체가 이 아들(Son) 과 독생자(only Son) 칭호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즉, 이들이 당시의 입장에서 이전의 아들 칭호에 반영된 것들을--인자가 관련된 들리움, 영화롭게 됨, 올라감, 심판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메시아적 칭호, 심판, 그리고 부활을--표현하기 위해 이 칭호들을 주의 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은 이러한 특징적인 아들 칭호를 사용해서 어느 한편의 독특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아들" 관계는 "하나님-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요한복음서의 특징이며, 아들 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독특한 결속 관계와 관련하여 설명되고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3. "들리움"과 "영광"속에 나타난 "인자"
가. "인자"의 의미
요한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비록 "인자"라는 어휘와 개념이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어휘였으며, 그 개념에 대한 이해도 명확한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또한 이 어휘는 그 사용에 있어서 처음의 세 복음서와도 다르다. 요한은, 내려오고 올라가는 구도 속에서 인자가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바로 그가 하나님으로서 그의 영광을 보여 준다는 기독론으로 그 인자 개념을 발전시켰다. 롤란드(C. Rowland)는 인자와 관련된 구절들을 승귀(3:14), 선재(3:13; 6:62), 종말론적 역할(5:27; 6:27), 그리고 고백(9:35)으로 분류하면서 이 인자가 이사야 53장에 나타나는 고난받는 종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서에는 인자 칭호가 13번 등장한다(1:51; 3:13, 14; 5:27; 6:27, 53, 62; 8:28; 9:35; 12:33, 34<두 번>). 대부분의 경우 이 칭호는 "들리움"과 영광인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셨다. 슈나켄버그는, 요한이 기독론적 칭호를 올라감(6:62), 승귀(3:14; 12:34) 그리고 영화롭게 됨(12:23; 13:31)과 관련하여 대단히 사려 깊게 사용했다고 말한다. 이 칭호가 예수님에 대한 칭호 가운데서 으뜸이라는 밀란드의 주장과 같이, 인자 칭호는 다른 칭호들보다도 그 신학적 기능으로 인해 요한복음서 안에서 더 많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요한이 이 어휘의 전통적인 의미를 알았다고 해도 이 칭호의 의미는 요한의 신학을 위해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인자 칭호의 기능은 이 어휘의 배경이나 또는 독특한 용법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어휘를 왜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하는 어휘로 사용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 칭호를 요한복음서의 로고스나 파라클레토스와 같이 창조적인 의미를 가진 어휘로 간주할 수는 없는가? 예수님 자신이 "들리움"과 영광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이 칭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은 이 칭호를 제 삼인칭으로 사용하셨다. 이 칭호는 1장 51절부터 13장 31절의 이른바 표적 말씀 사이에서만 등장하는데 그 시작은 특히 첫 번째 표적이 등장하기 바로 전이다. 구약이나 또는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동일한 선례를 찾을 수 있다면, 이 칭호는 요한의 창조적인 어휘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비록 구약이나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이 어휘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용법은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구약성서나 초기 유대교 문헌에 등장하는 인자는 하나님과는 다른 초월적인 심판자나 또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이 인자의 개념은 전승되는 동안 상황에 따라 수정되고 변화되었으며, 신약성서에서 인자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역에도 관련된다. 물론 영광으로서 "들리움"의 배경은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이사야 52:13). 슈나켄버그는 요한복음서의 인자는 다니엘서 7장 14절이나 에녹서와 같은 유대 묵시문학의 기원을 뛰어넘어 새롭게 중요성을 부여받고 그 의미도 풍부하게 되었으며, 이는 교회의 기독론의 발전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비록 공관복음서에도 이 인자가 언급되지만 그러나 요한복음서와 달리 공관복음서에서는 미래의 영광이 결코 이 인자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그 차이점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슈나켄버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승귀와 영화롭게 됨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밀란드 역시 공관복음서의 인자와 요한복음서의 인자가 다름을 지적하면서, 요한이 이 낡은 어휘를 사용한 것은 용법을 확대시켜서 선 존재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서의 인자는 비록 구약성서에서 그 희미한 어휘적인 기원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요한복음서의 인자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요한복음서의 인자는 요한에 의해 이전의 모호한 의미 대신에 보다 구체적이고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의미는 최종적으로 "들리움"과 관련되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왜냐하면 요한은 인자에 대한 이전의 개념이나 정의보다도 요한복음서 안에서의 그의 역할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 "인자"의 기능
요한복음서의 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독특한 계시임을 반영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든다. 아들과 관련된 칭호나 개념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의 정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드 종은 요한이 특별히 재해석한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리스도"라는 어휘보다도 더 중요한 중심적인 칭호라고 주장한다. 1장 41절에 나타나는 메시아 칭호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지만 51절에서는 결국 인자에 의해서 보충된다는 것이다.
"인자"라는 칭호의 처음 사용부터 요한은 이 인자를 "올라감"과 "내려감"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킨다. 어느 의미에서 요한복음서의 중요한 주제들인 로고스, 성육신, 영광, 성령, 영생 그리고 공생애의 시작이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 이전에 나타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첫 번째 표적부터 나사렛 예수의 정체가 점진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요한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인자의 의미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 의미를 처음부터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예수님은 1장 5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그리고 메시아와 동일시되지만 누가 인자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서로 구분되는 관계가 십자가의 죽음까지 전개된다.
요한은 7장 31절과 13장 31절과 3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가 아닌 것 같이 삼인칭으로 인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9장 35-37절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로 말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구절들에서는 비록 예수님과 소경 된 자와의 직접 대화 형식이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삼인칭으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 ...."를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 자신과 인자를 관련시키지 않으려는 어색한 회피를 시도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12장 34절에서는 다른 구절들에서보다도 더 복잡한 메시아와 인자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의 "들리움"을 이야기할 때, 무리들이 예수님이 인자로서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인자나 메시아의 정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들리움"을 빛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기 시작한다.
인자는 나사렛 예수의 운명을 해석하고 묘사하기 위한 칭호이다. 이 칭호는 십자가를 향해 가는 그의 운명의 여정에서 다른 칭호들의 의미를 흡수하면서 동시에 그 칭호들을 배제시킨다. 12장 34절에서와 같이 요한은 심지어 메시아라는 칭호마저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즉, 인자 칭호는 로고스의 성육신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는 것이다. 슈나켄버그는, 예수님이 그의 완전한 구원 사역의 성취를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로 돌아간다는 구도 속에서 그의 지상 생활 동안 인자로 불렸다고(1:51; 9:35; 12:34) 주장한다. 가나에서의 첫 번째 표적 바로 전에 등장하는 인자는 13장 31절에서 영광에 대한 언급과 함께 사라진다("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뒤이어 바로 그의 고별 강화, 수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등장한다. 인자 칭호가 사라진 후에는 더 이상 표적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들리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인자 칭호는 예수님을 그의 성육신부터 "들리움"까지 연결시키는 하나의 운반 도구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비록 그 적용 범위는 다르지만 이 인자 칭호의 기능적 의무에 동의한다. 인자는 하늘과 땅의 진정한 중재자로서 기능하며, 동시에 죽음은 인자 주제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인자와 관련된 모든 구절들은 명확하게 표현되었든지 아니면 함축되어 있든지 간에 예수님의 죽음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인자라고 불리는 성육신 하신 선 존재(Pre-existent Being)는 하나님이나 또는 메시아와 존재론적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다. 즉, 그 때까지 그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나 또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가 메시아와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메시아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자" 개념은 기독론의 발전과 변화에 맞추어 수정되고 변화되었다. 그의 "들리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 인자의 개념은 다른 기독론적인 칭호들, 예를 들어 아들이나 또는 고별 강화에서의 파라클레토스( )와 같은 칭호들로 대치된다. 따라서 요한은 "인자"라는 칭호를 채택하고 그 개념을 변화시켜 그의 기독론을 존재론적 기독론에서 기능적 기독론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4. "인자"와 "영광"속에 나타난 "들리움"의 기능
가. "들리움"의 의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들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요한이 특징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승귀로 해석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 "들리움"은 사도행전 2장 33절, 5장 31절 그리고 빌립보서 2장 9절 등에 등장하는 승귀와는 구별된다. 그의 죽음의 성격에 대한 암시는 3장에서 얻을 수 있으며, 이 죽음은 3장 12절과 12장 33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다가 18장 32절에서 성취된다.
"들리움"은 고전 헬라어나 또는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며 단지 칠십인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들리움"의 중요한 의미는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땅)에서 죽임을 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통치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들리움"과 그 목적을 잘 설명해 주는 12장 32절과 33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그의 성육신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 점진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 과정을 "들리움"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영원에서 내려와 다시 하늘 보좌에 이르는 올라감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들리움"이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며, 실제로 대다수 학자들은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한다(브라운, 슈나켄버그, 비어즐리-머레이 등). 그러나 이러한 결론들은 "들리움"과 올라감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구절들의 직접적인 증거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3-16(민수기 21:4-9): 예수님은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영생"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들리움"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근원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8:28: 25절의 유대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정체와 관련된 것으로 누가 인자를 들것인지 밝혀져 있다.
12:23-41: 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임금은 쫓겨나고 새로운 임금이 권좌에 오를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는 무덤이 아닌 땅에서( ) 들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부활이 아닌 십자가의 죽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능동태(8:28)와 수동태(3:14; 12:32)의 형식에서 중요성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수동태 형식이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태(voice)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나 또는 섭리를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 죽음의 발전과 목적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6장 9절과10절의 인용은 단지 고난의 종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종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과 일치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들리움"은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것이다(12:32).
슈나켄버그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비참한 굴욕을 나타냈으며, 후에 예수님이 주님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는 승귀가 덧붙여졌을 뿐이나, 그러나 여기에서는 승귀의 기독론이 아닌 시편 110편 1절이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들리움"은 그의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지 않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를 의미하며, 이 "들리움"의 완성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서이다.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을 다른 기독론적 요소들보다도 더 중요하게 취급한다. 만일 그가 부활이나 승천과 같은 요소들을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시켰다면 그의 기독론은 모호해졌을 것이며 십자가 죽음의 중요성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을 다른 요소들과 구별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 자체는 요한복음서에서 돌출 되는 요소가 되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 "들리움"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이 "들리움"은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 가운데 들리는 것이다. 리차드(E. Richard)는 요한복음서에서 사용된 모호하거나 이중적인 표현들은 오해, 아이러니, 일반적인 context 속에서 전문적인 어휘 사용, 특정한 context 속에서 모호한 어휘 사용, 비유적인 표현, 기독론적 칭호들, 특별한 문학적 기교들을 초월하는 이중적인 의미들이라고 분류한다. 이에 대해 이 "들리움"이라는 단어가 그의 죽음 때까지 오해되는 단어라고 하는 토레이(C. C. Torrey)의 지적은 이 단어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들리움"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의 일련의 "들리움"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과정은 13장 31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장 30절에서 끝난다.
나. "들리움"의 기능
"들리움"은 인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3:14; 8:28; 12:32, 34). 12장 37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 구절은 앞에 있었던 표적들에 대한 결론이며, 이어지는 구절들은 예수님에 대한 영접(믿음)이나 거절과 관련된다. 이 표적에 관한 결론 구절이 언급된 뒤로는 인자 칭호가 사라지며 "들리움"과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13:2, 7)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화롭게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신다(13:31).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기 직전에 밖으로 나간다(13:30). 이 "들리움"의 과정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존재론적 일치에 대한 전주곡이며, 인자의 운명은 "들리움"이라는 어휘를 잘 설명해 준다. "들리움"은 비유적으로 인자, "들리움," 그리고 영광 이 세 가지의 삼각 구조 가운데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어휘에 대한 배경은 구약성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어즐리-머레이는 종의 노래(the Servant song)와 요한복음서가 이것을 서로 다르게 적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전자[종의 노래]가 종의 고난과 죽음 뒤에 승귀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이사야 53:10-12에 종의 부활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라), 요한복음서의 들리움과 영화롭게 됨은 예수님의 죽음과 승귀를 한 사건에 대한 분리할 수 없는 두 단계로 묘사한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비어즐리-머레이는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심을 한 사건의 연속적인 단계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들리움"에 대한 구절들 가운데서 부활에 대한 언급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같은 사건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또한 비록 부활이 이사야 52장 10-12절에 함축되어 있다 할지라도 중요한 분위기는 종의 고난이다. 이 "들리움"이라는 어휘는 명확하게 고난을 강조하며 극적인 반전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 52장 13절의 " "는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것이며, 그의 고난과 죽음의 결과로 그가 영화롭게 된 것이다. 이 두 어휘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융합된다. 따라서 "들리움"은 고난의 마침이며, 이 마침은 새롭게 부여된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해 준다. 믹스(W. A. Meeks)는 이 들리움이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 극적인 장치라고 언급한다(8:28; 19:17-22). 팸먼트는 "들리움"과 영광이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사 hypsoo를 사용함으로 요한은 들리움이 예수님의 승귀라는 개념도 표현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단어를 doxazo와 동의어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십 자가에 달리신 인자가 모든 사람에게(12:32) 영생을 준다는(3:14) 믿음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수난과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한 사건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들리움"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의 절정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들리움"이라는 어휘는 중립적이며,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에 자연스럽게 그리고 이 둘의 가치와 기능을 손상시키지 않고 연결시킨다. 즉, "들리움"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성격과 의미를 결합시키는 관로(pipeline)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5. "인자"와 "들리움"속에 나타난 "영광"
가. "영광"의 의미
1장 14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영광( )은 요한복음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한결같이 "들리움"을 향하고 있다. 이 영광은 육신( )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출현을 가리킨다. 거룩한 존재로서의 영광은 "들리움"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가 점차로 밝히 드러남에 따라 영광 역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거룩한 존재는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며 그리스도는 세상에 완전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서 서언에서 등장했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대미를 장식하기 때문에 더이상 "영광"이라는 어휘가 이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생에 들어가는 문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은 성육신의 목표 지점이다. 세상이 나사렛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성육신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이다. 물론 이것은 요한복음서에서 "들리움"( )과 올라감( )이 구별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비록 이사야서 52장 13절에서 "들리움"이 영광과 관련되지만 요한복음서의 "들리움"에 관한 구절들은 영광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인자 구절들은 영광과 "들리움"에 동시에 관련되어 있다. 오직 인자 칭호만이 "들리움"과 영광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자의 기능이 "들리움"과 영광 사이의 관계성을 제공해 줄뿐만 아니라 밝혀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광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브래처는 와 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한다:
(1) 영예, 명성, 명망, 유명, 명예롭게 하는, 찬양하는(5:41, 44; 7:18a, b; 8:50, 54; 12:43; 21:9). (2) 하나님의 영광(11:4, 40; 12:28a, b; 15:8; 13:31, 32; 14:13; 17:1, 4). (3) 예수님의 영광(17:22, 24; 1:14; 2:11; 12:41; 17:5b; 11:4; 12:23; 13:31a, 32; 16:14; 17:1a, 5a, 10; 7:39; 12:16). (4)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영광을 주심(17:22).
브래처는 또한 "(2)번, (3)번, 그리고 (4)번에 언급된 구절들은 이러한 두 가지 단어들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지 못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서에서 이 두 단어들은 새로운 차원을 부여받기 때문에 이 단어들의 새로운 의미를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신약성서에서 와 의 의미는 일반 헬라 문학에서의 의미가 아니라 헬라어 성경의 의미로서, 히브리어 뿌리인 에서 기원하는 번역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처는 "......많은 구절들에서 는 능력, 위엄, 장엄, 영예, 위대함 등보다 더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적인 존재(the divine being), 신적인 본질(the divine nature), 신성(divinity), 신적인 인물(the divine One) 등을 의미한다"라고 주장한다. 키텔도 이 단어가 원래 의미인 "견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평판, 명예, 광휘, 영광,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설명한다. 인자의 들리움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됨과 그리스도인 예수님에 대한 계시의 성취를 의미한다. 인자와 관련된 영광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그 영광은 이미 서언에서 선포되었다(1:14). 그러므로 인자와 관련된 영광들은 신적인 존재, 신적인 본질, 신성, 그리고 신적인 인물 등을 언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에 포함된 전통적인 자료를 사용했지만 그러나 이 "영광"이라는 어휘가 바로 그의 창조적인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영광"의 기능
"들리움"과 인자는 영광에 수렴된다. 인자는 "들리움"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자와 "들리움"은 수난의 시작과 함께 사라지며, "영광"이라는 어휘는 그의 "들리움" 기간 동안 인자의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만 사용된다( -17:5, 22, 24; -12:16, 23, 28; 13:31, 32; 14:13; 15:8; 16:14; 17:1, 4, 5, 10).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영광"이라는 어휘는 그의 "들리움" 동안에 다르게 해석된다. 요한은 7장 39절과 12장 16절에서 이 어휘를 뒤에 있게 될 사건에 비추어 해석한다. 팸먼트(M. Pamment)는 "들리움"과 영광을 내려옴과 올라감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버케트(D. Burkett)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첫 번째 영화롭게 됨이고 뒤이어 바로 있게 되는 부활이 두 번째 단계의 영광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지나치게 영광을 확대 해석한 것이며, 팸먼트 역시 비록 첫 번째 단계인 예수님의 죽음을 영화롭게 됨으로 보지만 그러나 두 번째 단계로서 하늘로의 등극을 전제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영화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희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지나친 구분이나 단계 설정은 타당하지 않으며, "내려옴"과 "올라감"이라는 구도 속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서 인자와 "들리움"의 관계 속에서 노출되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6. 결론: "들리움"을 통한 "인자"의 "영광"
나사렛 예수의 "들리움"의 과정이 고조됨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출현은 더욱 분명하게 되어 간다. 팸먼트는 2장 11절의,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독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육체적 출현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장엄과 능력을 기대할 것이라고 말한다. "들리움"은 인자로서 일하는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들리움"의 완성(성취)이기 때문이다. 영광은 인자에게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영광의 완전한 계시이며 새로운 통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들리움"은 십자가의 죽음이고 십자가의 죽음은 나사렛 예수의 희생적 죽음이며, 그의 희생적 죽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의 성취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가 동일시되는 장소이며, 다시 말해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순간이며 여기에서 마침내 하나님(영광)이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들리움"은 예수님의 수난부터 그의 십자가 죽음까지 통합시키는 역사적 사건이며, 영광은 그의 "들리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신학적 해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과 "들리움"이 무엇을 의미하고 지시하는지는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알 수가 없다. 12장 16절에서 요한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고 기록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 속에 그의 "들리움"은 명확히 드러나 있고, 영광은 함축되어 완전하게 밝혀졌다. 이 16절의 말씀을 읽게 될 때 누구든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어느 특별한 사건을 기대할 것이다.
요한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불일치와 일치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해결하며, "들리움"의 진행을 영광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의미 있게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자의 "들리움"으로, 그리고 이 "들리움"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영광(하나님)을 보는 것이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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