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과 진정'(요4:24)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가
- 요한복음 4장 24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
오늘날 예배 드릴 때 거의 습관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하고 겸손하며 진실된 마음 자세, 한마디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예배에 임하는 내적인 마음 상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마음 자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영적’ 이해는 비단 현재 우리 교계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교회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물론 이러한 정성어린 자세는 예배에 임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갖춰야 할 것임에는 두말 할 나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음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인용하는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이 본래 그러한 뜻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요한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표현만큼 오래도록 본래의 의미에서 왜곡되게 사용된 성경 말씀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Ⅰ. 내적인 혹은 영적인 하나님 섬김(?)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대체로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난 표현을 인간의 내적인 마음 상태 혹은 인간 마음의 영적 상태와 관련시켜 해석해왔다(spiritualistisches Verst ndnis).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에 젖은 서구인들의 이해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 특별히 고대 헬라 신비주의와 스토아 사상 혹은 영지주의의 이해에 따르면, 이른바 유치한 원시종교의 외적이며 육적인 예배 이해와 대립된 것으로, 영적이고 신비적인 예배를 참된 예배로 간주하였다.1온전한 예배란, 제물을 바치는 제의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비와 선행과 정의를 실천하는 진실된 마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이미 구약성경 여러 구절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 1장 11~17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개역개정판).2
또한 헬라 유대 종교철학가로 통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von Alexandria, 대략 BC 20~AD 50년경)에게서도 그런 표상을 찾을 수 있다: “유일무이한 제물로서 진리를 바치는 마음의 섬김은 진실되다”(det. 21), 혹은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마음의 경건성을 떠나 진실되며 신성한 제물이 있단 말인가?”(Vita Mos. II, 108).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언급하는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구약/유대적인 물질주의적인 예배 표상에 대립된 영적인 예배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영적 예배(곧 우리의 인간적 정성과 종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오랫동안 이해해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계몽주의 이래로 더욱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긴 세월 동안 내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이해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한글 ‘개역성경’도 그와 같은 영향을 받아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진정’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를 번역한 것인데, 인간 마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한다. 또한 ‘으로’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전치사 ‘엔’(en)을 우리말로 바꾼 것인데, 수단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배하는 자가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즉 ‘개역성경’에 나타나는 번역은 예배를 완전히 내적인 의미로 이해한 번역임을 알 수 있다.3 ‘공동번역’(1997/1999년)에는 그리스어 원어 ‘프뉴마’와 ‘알레테이아’가 전치사 ‘엔’과 합하여 완전히 부사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로 번역했다. 이로써 소위 ‘영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4장 20절을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인간적인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과 관련이 있다.
한편, 요한복음 4장 24절을 내적 혹은 영적인 의미의 예배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서구 학자들의 주석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한 좋은 예가 고데의 요한복음 주석에 나타난다. 고데는 요한복음 4장 23~24절과 관련하여 ‘영성’(Geistigkeit)과 ‘진정’(Wahrheit)을 미래에 있을 예배의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기서 영은 인간적인 영혼(=정신)의 최고의 활동(die hochste Lebenstatigkeit der menschlichen Seele)을 가리킨다. 이로써 영혼은 신적인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된다. 곧 경건의 장소요,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며, 진실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소이다. … 이와 같은 첫 번째 특징은 새로운 예배의 내적인 세력을 묘사한다. - 두 번째 특징인 진정은 첫 번째를 보충한다. 영혼의 내적 성소에서 거행되는 예배야말로 유일한 참된 예배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대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영혼 가운데 또한 진정 가운데라는 이 두 표현은 단지 양태(die Art und Weise)와 관련된 것이다.”4 또한 하이트뮐러(W. Heitmuller)는 이렇게 해석했다: “영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혹은 민족과 제의의 경계를 넘어서 특정 지역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인, 따라서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다.”5 혹은 바우어(W. Bauer)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신성한 시간과 장소와 제의와 결부된 육(Sarx)의 영역에 속한 모든 멍에에 구속됨이 없이 ‘진실된’ 기도자(wahrhaftige Anbeter)는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할(geistige Gottesverehrung) 것이다.”6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이 모든 영적 혹은 내적인 해석은 본래 요한이 의도했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Ⅱ. 요한의 사고에 따른 이해
요한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4장 1~26절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나누는 대화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대화가 평범한 대화가 아님을 요한은 처음부터 강조한다. 한 유대인 남성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 4장 24절의 문맥 이해
어느날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옛날부터 유래한 한 우물이 있었는데, 행로에 지친 예수께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제6시(=정오)가 되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그곳에 왔고, 마실 물을 청하는 예수님과 대화가 벌어지게 된다.
이 여인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은 오늘날의 시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 이방인과의 혼혈족이고,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던 사람들이었다. 9절에 예수께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래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물을 청하자, 그 여인은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리는 가운데, 우선적으로 메시아 계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누군인줄 알았더면 (역으로) 네가 나에게 생수를 구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여자는 물 길을 그릇도 없이 도대체 ‘생수’(=샘솟고, 흐르는 물)를 어디서 얻겠는가 하고 11절에서 상당히 이성적인 질문을 한다. 아마도 여인은 예수께서 다른 우물을 알고 있지 않나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러한 종류의 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물임을 설명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라고 우회적으로 말함으로써,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기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여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갈증을 해소시키는 마법의 물과도 같은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4절)을 달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자 16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각도로 대화를 돌린다.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꿰뚫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엿보게 된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남편 다섯을 두었다는) 여자의 과거사를 정확히 밝히게 되고(18절), 그러자 비로소 여인은 예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서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고백한다(19절).
이어서 여인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를 언급한다(성전을 예루살렘에 갖고 있는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성소를 그리심 산에 세웠다). 21절에서 예수는 여인에게 대답한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함으로써, 두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예배 드릴 때가 지금 이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온전히 예배 드릴 때’란, 바로 예수와 함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와 함께하는 현재에는 예배를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2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또한 그런 예배를 드릴 때가 언제인가를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참된 예배가 바로 지금 자신과 더불어 성취되고 있음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때’란 바로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오신 때,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이때’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는 문장의 맨 앞에 놓여 강조되고 있다. 이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인 24절 말씀을 예수께서 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선포할 메시아를 기다린다(25절). 그러자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계시한다(26절).
2. 요한이 의미하는 ‘영’과 ‘진리’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두 핵심어인 ‘영’과 ‘진리’를 요한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은 이 두 개념을 인간의 심성과 관련된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즉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며,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요한의 ‘영’(pneuma) 이해
요한복음의 ‘프뉴마’(pneuma)는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혼’(psyche)/‘마음’(nous)/‘몸’(soma)과 대립된 인간학적인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요한은 프뉴마를 인간적인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7 요한복음 3장 6절(“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에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세력으로 이해되는 ‘영’(pneuma)과 대립된 개념은 세상 세력을 대표하는 ‘육’(sarx)이다.
요한의 문맥에서 '신령'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제자들을 계시의 진리 가운데로 이끈다.
이와 같이 이해된 하나님의 영은, 보이지도 않으며 단지 그 활동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을 뿐이기에(요 3:8), 인간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요 1:18). 이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이 바로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1 1:5)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8)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요한적인 이원론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둠이 아니라 빛을 비추신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요한의 영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말로 ‘보혜사’ 혹은 ‘협조자’로 번역하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빠뜨릴 수 없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복음(요 14:16f, 26; 15:26f; 16:7b~11, 13~15)과 요한일서 2장 1절에만 나타난다. 종교사적인 유래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이 개념은,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특별히 법정에서 변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불러들인 자’를 뜻한다.8 즉 누군가를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의 문맥에서 이 개념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된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과 이별한 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선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은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가르치며’(cf. 요1 2:27)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이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26~27절은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기능으로서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기능에 대해 말한다. 게다가 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믿지 않는 세상을 고소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요 16:8~11).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장 13~15절에 언급된 파라클레토스는 신앙 공동체의 활동과 관련하여, 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 가운데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기능에 대하여 언급한다.
2) 요한의 ‘진리’ 이해
요한은 ‘진리’(aletheia)라는 개념을 자기 특유의 신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이 단어를 공관복음서 기자와 달리 훨씬 자주 사용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9 이 개념을 중요하게 간주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요한이 어떠한 의미로 이 개념을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이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된 언어 사용법에10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사용법이 눈에 띈다11첫째, ‘진리’는 다음과 같은 동사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진리를 ‘알다’ 혹은 ‘보다’(요 8:32; 1요 2:21); 진리를 ‘말하다’(요 8:40, 45, 46; 16:7); 진리를 ‘증거하다’(요 5:33; 18:37); 진리를 ‘행하다’(요 3:21; 1요 1:6); 진리에서 ‘나오다’(요18:37; 1요 3:19). 여기에서 요한이 뜻하는 ‘진리’는 계시를 나타내는 언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둘째, ‘진리’가 전치사 엔(en)과 함께 사용된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24); 진리 ‘안에’ 서다/서지 못하다(요 8:44);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다(요 17:17, 19); 행함과 진리 ‘가운데’(1요 3:8). 여기에서 ‘진리’는 전치사 엔(en)과 더불어 일종의 부사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고,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진리의 영역은 이와 대립된 영역을 전제한다. 이를 요한은 ‘어둠’(요 1:5) 혹은 ‘세상’(요 1:10)으로 부른다.
예배란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참 예배는 말씀의 온전한 선포를 전제한다.
셋째, 진리가 마치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다(요 1:17);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나는 진리다(요 14:6). 여기에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은혜와 진리’라는 한 쌍의 명사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본래 구약적인 표현 ‘헤세드’(dsj)과 ‘에메트’(tma)에 상응한다.12 하나님의 자비와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출 34:6) 요한은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파송한 것을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이해했다. 아들 파송 사건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동일하다(요 17:17). 결국, 본질적인 의미로 볼 때, 요한의 ‘진리’가 뜻하는 것은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점은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경우의 언어 사용법 가운데 특히 잘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요한에게 나타나는 ‘영’과 ‘진리’란 서로 보충하는 개념으로서, 한마디로 세상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과 대립된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과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이 표현은 요한 특유의 성령을 가리키는 칭호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을 연상시킨다. 또한 ‘진리의 영’은 다음과 같은 표현, ‘참 빛’(요 1:9; 1요 2:9), 혹은 ‘참 떡’(요 6:32) 또는 ‘참포도나무’(요 15:1), 또는 ‘선한 목자’(요 10:11, 14)와도 상응한다.
3. 참된 예배란
이제 다시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구절 요한복음 4장 24절로 돌아가서, 요한이 의미하는 참된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참된 예배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특정 예배 시간과 장소의 극복
참된 예배란 특정한 예배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참된 예배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은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오직 그리심 산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는데(요 4:20), 요한은 그것을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유대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의적 관습을 거부한다. 예배의 본질은 제의 자체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해는 요한 특유의 사고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성서 및 유대 전통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현재에 가능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참된 예배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고 강조하듯이, 하나님의 영과 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진리)가 드러난 현재,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곧 예배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금의 순간을 가리킨다(요 3:19; 5:25). 예배의 ‘참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순간에 제한되고 있다. 바로 그때 구원의 시대에 합당한 장소가 펼쳐진다. 참된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형식을 통해 인간이 주도가 되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예배를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가속화된 예배의 형식화를 거부한다.
3) 현재 종말론적인 예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현재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현재적 종말론은 요한복음의 특징에 속한다(요 3:19; 5:25; 4:23; cf. 12:31; 16:11). 예수의 오심은 바로 종말론적인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선재한 로고스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미래 종말에 있을 사건이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 요한은 믿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요 4:23)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함께하신다는 근거에서 가능한 말이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종말의 시간이 기다려야 할 미래에 나타날 것이 아니고, 예수의 운명 가운데 바로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말이다.13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현재성은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 참된 예배가 종말론적인 현재에 가능하다고 요한은 강조한다.
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배
요한은 그리스적인 사고보다 훨씬 더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였다. 요한에게 있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한 분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하나님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정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의 차원에서 묘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에 비로소 그분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란 이처럼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요한복음 3장 23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진술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즉 예배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삶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로운 은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해진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락해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Ⅲ. 나가면서
오늘날 우리는 예배의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 너무도 집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시 교회 건물 안에만 임재하고 계신 듯이 말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을 통하여, 참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주로서 바로 지금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고 계신다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임을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 성과 속(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과 모든 날을 성스럽게 여기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속되다고 천대받던 창녀, 세리, 어린아이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주일과 평일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날을 마치 주일처럼 귀한 날로 여기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은 바로 성스러운 주일과 다름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평일에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배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나의 주로 고백하는 믿음 가운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러한 삶이 나의 노력에 달려있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두 무릎을 꿇는 삶인14 것이다. 참된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전적인 자비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히 다양한 예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드러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값진 선물인 것이다.
김창선/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바른 예배 이해(요4:24)
예배에 관하여 예수께서 친히 언급하신 유일한 구절이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서 물길러 온 여인과 나눈 대화중에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다.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구절을 예배시작 문구로 사용하면서 낭독하고 있다. 그 의도는 예배에 임하는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게하고 경건하고 간절한 마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구절이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1.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개념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신령적 존재'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신령과 같은 존재란 개념이다.그러나 사실, 이 '영'이란 단어의 뜻은 히브리어로는 רוח<루아흐>, 헬라어로는 πνευμα<프뉴마>라는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바람' 또는 '숨(호흡)'으로 해석되며 그 깊은 의미는 생명,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슨 산신령과 같은 어떤 초현실적, 신령적인 존재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생명자체와 생명력의 원천이시요 생기의 근원이시라는 의미인 것이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창 2:7절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영', 즉 거룩한 생기, 생명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기, 생명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영적 존재라고 말한다. 또는 인간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성품과 의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또 그러한 삶을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임을 가리키는 의미이다. 그것을 가리켜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2.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1) '신령으로'란 '하나님의 생명으로' 란 말이다.
이것은 어떤 거룩한 마음의 자세나 경건한 태도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그런 식의 어떤 자세나 태도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성령안에서' εν πνευματι (엔 퓨뉴마티) 즉 '하나님의 본성인 영-생명(Spirit)을 받은 사람으로서', 또는 '그 받은 바 거룩한 생명의 본성으로'란 뜻으로란 의미다.
예수가 사마리아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시는 그 생수가 바로 영이다.
πηγη υδατος αλλομενου εις ζωην Αιώνια
페게 휘하토스 알로메누 에이스 조헨 아이니온
a fountain of water springing to life eternal
생수란 '새롭고 생명력 있는 마음'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곧 생명력으로 예배한다는 것이다.
2) '진정으로' 란 '진리를 따라서' 란 뜻이다.
이것 역시 결코 '진지한 마음으로' 라는 식의 예배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본을 따라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예배할지니라".
아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보통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예배를 말함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한번도 그런 의식적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배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며, 그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뜻이다.다시말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란 말은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거룩하고 진실된 마음과 정신으로, 참된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라는 뜻이다.과연 오늘의 교회는 예배때 단지 마음을 경건하게 추스리고 진지하게 예배드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런식으로 예배를 이해하고 있기때문에 교회의 모든 형식을 예배를 어떻게하면 좀더 감동적이고 은혜롭게 드릴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최고의 음향기기, 영상기기들, 최고의 성가대 등, 예배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붇고 있다. 다시말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든 그리심 산이든 이제는 그런 의식적 예배를 드리는 시대는 지나갔으니, 모든 일상의 삶 속에서 진실하고 바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 말로 참된 예배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또다시 성전화되어진 건물안에서의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드려야하는 것으로 이 구절을 오용하고 있다. 그런 오해때문에 성전안 의식예배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교회밖밖 삶의 참된 예배는 사라져버리고만 것이다.바른 삶이어야 되는데도 마음만 경건하게 집중해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왜곡된 가르침 때문에, 교회오늘의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있는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하였다.
(John 4:24)
הָאֱלֹהִים הוּא רוּחַ וְהַמִּשְׁתַּחֲוִים לוֹ עֲלֵיהֶם לְהִשְׁתַּחֲוֹת בְּרוּחַ וּבֶאֱמֶת׃
http://blog.daum.net/ipssen/15890908?category=717801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요4:24)의 의미
요4장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pneuma o qeoV kai touV proskunountaV auton
퓨뉴마 호 데오스 카이 투스 프로스쿠눈타스 아우톤
[is]spirit God and worshipping the[ones]
영이시니 하나님은 예배하는자는
en pneumati kai alhqeia dei proskunein
엔 퓨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데이 프로스쿠네인
in spirit and truth it behoves to worship.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예배에 관하여 예수께서 친히 언급하신 유일한 구절이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서 물길러 온 여인과 나눈 대화중에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구절을 예배시작 문구로 사용하면서 낭독하고 있다. 그 의도는 예배에 임하는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게하고 경건하고 간절한 마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구절이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1.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개념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신령적 존재'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신령과 같은 존재란 개념이다.그러나 사실, 이 '영'이란 단어의 뜻은 히브리어로는???<루아흐>, 헬라어로는<pneuma 프뉴마>라는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바람' 또는 '숨(호흡)'으로 해석되며 그 깊은 의미는 생명,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슨 산신령과 같은 어떤 초현실적, 신령적인 존재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생명자체와 생명력의 원천이시요 생기의 근원이시라는 의미인 것이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창 2:7절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영', 즉 거룩한 생기, 생명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기, 생명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영적 존재라고 말한다. 또는 인간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성품과 의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또 그러한 삶을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임을 가리키는 의미이다. 그것을 가리켜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2.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 '신령으로'란 '하나님의 생명으로' 란 말이다.
이것은 어떤 거룩한 마음의 자세나 경건한 태도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그런 식의 어떤 자세나 태도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성령안에서' en pneumati(엔 퓨뉴마티) 즉 '하나님의 본성인 영-생명(Spirit)을 받은 사람으로서', 또는 '그 받은 바 거룩한 생명의 본성으로'란 뜻으로란 의미다.
예수가 사마리아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시는 그 생수가 바로 영이다.
phgh udatoV allomenou eiV zwhn aiwnion
페게 휘하토스 알로메누 에이스 조헨 아이니온
a fountain of water springing to life eternal
생수란 '새롭고 생명력 있는 마음'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곧 생명력으로 예배한다는 것이다.
2) '진정으로' 란 '진리를 따라서' 란 뜻이다.
이것 역시 결코 '진지한 마음으로' 라는 식의 예배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본을 따라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예배할지니라.
아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보통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예배를 말함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한번도 그런 의식적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배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며, 그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란 말은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거룩하고 진실된 마음과 정신으로, 참된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곧 진정한 예배라는 뜻이다.
과연 오늘의 교회는 예배때 단지 마음을 경건하게 추스리고 진지하게 예배드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런식으로 예배를 이해하고 있기때문에 교회의 모든 형식을 예배를 어떻게하면 좀더 감동적이고 은혜롭게 드릴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최고의 음향기기, 영상기기들, 최고의 성가대 등, 예배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붇고 있다.
다시말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든 그리심 산이든 이제는 그런 의식적 예배를 드리는 시대는 지나갔으니, 모든 일상의 삶 속에서 진실하고 바른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 말로 참된 예배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또다시 성전화되어진 건물안에서의 예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드려야하는 것으로 이 구절을 오용하고 있다.
그런 오해때문에 성전안 의식예배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교회밖밖 삶의 참된 예배는 사라져버리고만 것이다.바른 삶이어야 되는데도 마음만 경건하게 집중해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왜곡된 가르침 때문에, 교회오늘의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있는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하였다. http://blog.daum.net/ipssen/17954351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 4:23-24)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예배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본문은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발견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정과 신령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왜 예배자를 찾으십니까?
그만큼 예배가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앞으로의 운명을 가릅니다. 가인과 아벨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예배였습니다. 에서와 야곱, 다윗과 사울을 가른 것도 예배였습니다.
2. 성도는 바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찾는다'는 말은 '경배한다'는 말인데, 부모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간절함이 이 단어에 숨어 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찾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찾는 것은 사람이 찾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예배 프로그램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오늘날 열린 예배다, 현대예배다, 찬양예배다, 구도자예배다, 드라마예배다, 전통예배다 참으로 예배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이 예배 프로그램을 찾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예배들에 대하여 '좋다 나쁘다'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관점하고는 너무 다르다는 걸 말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 프로그램을 찾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람들은 예배의 순서에도 민감합니다. 헌금을 설교 전에 해야 하는지, 설교가 끝나고 해야 하는지도 관심거리이며, 헌금 후에 호명을 해야 하는지, 호명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또 성경은 신약과 구약을 함께 본문으로 해야 하는지, 찬송은 몇 장을 해야 하는지, 축복으로 끝낼 것인지 주기도문으로 끝낼 것인지 등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다면 한번쯤은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씻고 봐도 예배 순서나 종류는 없습니다.
4.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 일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나름대로의 예배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조상들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장소로 고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예배 관을 수정하신 것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예배의 존재입니다. 장소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속 말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이라고 하심으로 오직 그 관심을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예배의 대상을 잘못 선정하면 아무리 노력하고, 혼신을 다하여 예배드려도 소용없습니다.
시96:7절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잊지 마십시오.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5. 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격자인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가 바로 예배자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을 구원의 아버지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요1: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새롭게 태어난 사람, 즉 중생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육체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시지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는데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성령의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혹 예배처럼 생긴 의식을 행한다고 해도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사가 거부된 후에 안색이 변하여 아우를 미워하고 심지어는 동생을 쳐죽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정하는 사람의 행위가 아닙니다.
삼상16:7절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예배자는 겉이 아니라 속으로 하나님을 먼저 아버지로 모셔야 합니다.
6.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령'은 말 그대로 성령님을 말합니다. '진정'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있습니다.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뤄집니다.
벧전1: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공적인 예배자가 먼저 되시기 바랍니다.
http://cafe.daum.net/kmc4755/7fUe/82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3-24). |
예배의 기준
요한복음 4:23-24은 신약시대의 참다운 예배에 관한 예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위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는 말씀을 교회 주보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영과 진리” 대신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배할 때 정성을 다하고 엄숙하게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된장찌개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해 주 일마다 정성스레 된장찌개를 끓여 드렸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김치찌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아무리 정성과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즉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기준이기에, 여기에 맞추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
요한복음 4:24의 “예배할지니라”는 “예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어로 “must”로 표현되어 있을 만큼, 반드시 그렇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영과 진리에 대한 예배를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예배할 때”를 언급하시며, 참된 예배는 어떤 장소에서 행해지는 희생제사가 아니라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필요치 않고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고 하며, 당시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할례파들을 향해 성도의 참다운 특징들을 말했다. 참다운 성도는 첫째,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는 자이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이며,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이다. 바울이 언급한 “성령으로 봉사하며”는 헬라어 원어성경에선 라트레우오(latreuō, 하나님께 봉사하다, 즉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로 “성령으로 예배하며”를 뜻한다. KJV 영어성경에는 “worship God in the spirit,”ESV에는 “worship by the Spirit of God”로 표기되어 있다. 즉 참다운 성도는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를 뜻한다.
칼빈의 예배 핵심 역시 성령의 임재였다. 그는 언제나 예배를 시작하기 전과 성경을 낭독하기 전, 그리고 성찬을 집례하기 전에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예배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시편을 통한 예배를 드리고 강조했다. 시편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다. 즉, 성령께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부흥과 예배에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부흥』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을수록 예배는 형식화되었다. 반면 신앙이 회복될수록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었다.”고 말했다. 예배에 형식이 필요하지만, 예배 형태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이 된다면, 성령의 역사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예배는 형식적이 되고 영적 침체기에 빠져들지만, 부흥이 일어나면 성령께 속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쇠퇴하는 20세기 영국교회들을 향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예배에서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참고로, 2005년 England Church Censu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사람이 전체 인구의 71%였지만, 실제로 주일마다 교회 나간 사람은 1979년에는 12%, 1989년에는 10%, 2005년에는 6.3%로 계속 감소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교회에서 부흥이 떠나면 성가대를 강조합니다. 돈을 주고 성가대를 사오기도 합니다.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 찬양 좋았어,라고 평가합니다. 성가대가 성도들을 위해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안합니다. (...) 더 나아가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향해 모든 일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지 모두 짜여져 있습니다. (...)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순서지에 적힌 대로 하라고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한 다음 12시에 축도를 합니다. (...)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이처럼 묶어 놓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는 당시 영국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형식적이지 않았다.
성령에 의해 예배가 드려졌기 때문에 즉흥성이 있었고,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예배가 형식적이 되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게 된다. 형식적인 예배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존 파이퍼 목사도 그의 책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예배의 의식적인 부분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예배는 절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암송하고, 설교하고, 먹고, 정결하게 하는 의식들”이라며, 파이퍼 목사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될 수 있다.”라고 우려한다.
성령에 의한 예배는 저절로 드려지지 않는다.
그런 것이라면, 칼빈이 예배 중에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세 번이나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배의 형식과 의식이 성령님보다 우선할 수 없다. 성경은 예배의 순서대로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성경에는 예배에 대한 구체적 형식보다 마음 자세,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에 대한 반응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신약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성령님에 의한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로,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참된 예배는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이번 호에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 보자.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의미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에서 진리(Truth)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이아(Aletheia)는 요한복음에서 24번 사용되었다. 이들을 통해 진리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진리는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원한 실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4:6에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Aletheia)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신약시대 예배에선 동물의 희생제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히브리서 10:19-20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증거한다.
둘째,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17:17은 “그들을 진리(Aletheia)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Aletheia)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명령, 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사실과 성경에서 증거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우리의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그대로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셋째, 진리는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다.
요한복음 8:32에선 “진리(Aletheia)”를 알지니 진리(Aletheia)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알게 될 때, 믿음으로 모든 죄에서 자유케 되며, 구원자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로 예배함의 의미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진리의 의미를 이해하면 진리로 예배함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자신의 공로가 아닌 십자가의 공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께 예배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가 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성경은 두 사람 중에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둘째,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예배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그대로 믿어 경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한다. 요한일서 4:10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감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선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을 알고 믿어 예배하는 것이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그의 저서『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이렇게 간증했다.
“제 아이는 자기 맘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요?’ 라고 말했지만, 제 사랑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 아이에 대한 제 사랑이 그 아이가 원하는 방법과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외동딸 캐리가 열여섯살 때, 암에 걸려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습니다. 캐리가 고통스러워하면 저도 고틍스러웠습니다. 캐리의 투병은 제게 절망적인 경험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변했습니까? 아니지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수없이 질문했습니다. 그러나‘주님은 저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보군요’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때로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딸 아이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환경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저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제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환경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캐리가 암에 걸리기 훨씬 전부터 결심한 게 있는데, 그것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십자가의 공로를 먼저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저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영원토록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전체적이고, 완전하며, 최종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고 싶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를 위해 당신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그 관계로 불러들이려고 노력하십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모든 교제는 그분의 당신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비록 환경과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하나님임을 신뢰하고 나아갔다. 이와 같이 진리로 예배하려면, 환경과 상황과 생각과 감정에 상관 없이 하나님을 성경이 증거하는 그대로의 하나님으로 알고 신뢰해야 한다.
셋째,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기초한 예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의 용서와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담긴 예배, 부활의 소망과 영원한 삶을 기대하는 예배이다.
이처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임태집 목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요 4:23,24)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크신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지나가시다가 수가성의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죄가 많은 아주 불행한 과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예배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이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4:20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질문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과 같이 저와 여러분도 예배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은 평생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마태복음 1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두세 명 정도 적은 수의 사람일지이라도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들 가운데 우리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저와 여러분이 항상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는 믿음과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안아주시고 받아주시고 품어주시고 복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자리에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어떤 믿음을 가지고 나오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똑바로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믿음으로, 찬양을 해도 믿음으로, 헌금을 해도 믿음으로, 봉사를 해도 믿음으로, 예배를 해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려면?
1.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둔 올바른 예배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참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께 예배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마태복음 16: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에 수많은 군중이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어찌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주님과 상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 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잘 모르고 말씀의 진리도 모른 다고 하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제자들 중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의 진리를 똑바로 알았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거듭난 믿음의 사람이라면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우리의 생사화복은 물론 한 나라의 흥망성쇠까지도 주장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알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얻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주시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2.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해야하며, 찬양을 불러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해야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찬양은 더 이상 찬양이 아니며 가치 없는 일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따라서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예배자의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잘못된 자세를 가지고 예배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음에도 없는데 억지로 끌려나와 예배를 드리거나 또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딴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난다거나 사적인 필요에 의해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예배의 태도가 바르지 못한 사람을 단적으로 꼬집어 표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위 '멀대파'로 불리는 사람은 설교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강단을 응시하며 눈은 목사님께 가 있으나 생각은 멀리 출장 중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꼼꼼파’는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졸면서 끄덕끄덕 방아를 찧는 ‘아멘파’가 있으며,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안절부절파’가 있습니다. 또 옆 사람과 글로 주고받는 ‘청각장애파’가 있는 반면에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인원 체크하는 ‘경비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딴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 시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바른 예배의 자세를 가지도록 잘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루이 14세는
주일이면 가족과 왕족을 거느리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교회는 프넬론이라고 하는 대주교가 시무하는 교회로 왕이 출석하다 보니 예배당은 늘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교인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이 대주교의 마음은 결코 기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들이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인지 아니면 왕에게 잘 보이려고 왕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를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왕이 도착하기 전에, 다음 주일은 국왕께서 교회에 나오시지 못한다는 거짓 광고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왕이 왕족들과 교회에 도착했을 때 교회가 너무나 조용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대주교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주교는 슬픈 얼굴로 “아무래도 이분들이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왕을 만나러 오는 것 같아서 한번 제가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 전에 다음 주일에는 왕이 나오시지 못한다고 광고했더니 오늘 이렇게 다들 나오시지 않았습니다.”라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왕과 악수 한번하고 왕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 실제로 있었던 충격적인 실화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4:23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는 ‘성령과 진리로’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성령이 함께 하는 예배이며, 성령의 은혜가 넘치는 예배입니다.
성령이 넘치는 예배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너무 감사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으며,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기로 다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성품과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바뀝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타락의 근성은 사라지고 주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겸손하고 순수하며 온순하고 온유하며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 찬양의 능력, 경건의 능력, 환난과 시험을 이기는 능력, 전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혜가 넘치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부흥될 수밖에 없습니다.
3.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일절 딴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예배에 대표 기도하시는 분도 내 기도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주님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찬양대도 찬양할 때 서로 비교하거나 성도들의 평가에 좌지우지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4.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대가를 지불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이 조금도 고생하지 않으려 하고 절대로 손해보지 않으려 한다면 바른 예배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려면 땀을 쏟아야 합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예물을 드리고, 선교헌금을 드리며,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먼 거리를 마다하고 마산, 창원, 경주, 포항에서 기쁨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많이 계십니다. 대가를 치르고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 이분들이 어찌 은혜를 받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으니 우리가 그 주님을 위해 아깝다고 드리지 못하고, 힘들다고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찬송가 356장의 가사를 보면,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이까”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이 찬송의 작사자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신령한 복을 받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복을 받으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예배 시간은 하늘의 양식으로 배부르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천국잔치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고 날마다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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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란 거듭난 영혼이 경험하는 최고의 경험입니다. 여기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광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그러할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는 모두 그 합당한 위치에 놓일 때, 말할 수 없이 복된 실체입니다. 곧 기도는 우리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그 필요를 아뢰는 것이며, 감사는 하나님이 그 은혜를 통해 우리를 복주신 신령한 축복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란 하나님의 뛰어나심과 그 완전하심을 깊이 묵상한 결과로 우리 심령이 압도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직접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 곧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배만이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때에도 그 충만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여러 세대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그 특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족장 시대에 하나님은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음으로 기다렸던 믿음의 선진들은 전능하시며, 신실하시고 미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 가운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예배는 가정예배 형태로, 믿음의 선진들은 가정의 머리이자, 가족들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욥 1:5).
이제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을 때 큰 변화가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무죄상태에서나 혹은 타락한 상태에서는 결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더할 나위 없이 귀한 특권이자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예배는 제사장 제도를 필요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희생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레위기서에 분명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출 19:6)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만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해 회복을 받게 될 다른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들은 희생제사의 피를 통해, 그리고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서 향기로운 제사를 통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대치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휘장 뒤에 계시지 않고, 그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구속이 완성되었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돌아가서 지극히 높은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은혜의 시대에 속한 예배는 그 성격이 완전히 변경된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4:20~24-(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을 살펴보면,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우물가의 여인의 마음과 양심을 다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여인의 양심을 찔러, 그녀로 하여금 그 추구의 대상을 예배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은혜로 그 여인을 대하셨고, 예배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심 산을 언급했는데, 그곳은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만의 헛된 성전을 자랑삼아 가지고, 유대인의 예배의식을 모방하는 장소였습니다. 그 여인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상기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1-24)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사마리아 예배방식을 완전히 거짓되고 악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두 번째, 주님은 유대 예배방식을 합당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 두 가지 방식이 모두 폐해지게 되고 더 나은 예배가 세워지게 될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기독교에는 성소와 같이 예배를 위해 따로 구별된 장소의 개념이 없습니다.
단순한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드문지요! 지금 이 땅에서 성소를 세우고 성소에서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된 기독교가 누리고 있는 예배하는 영혼의 기쁨을 도적질하는 사람들입니다. 아, 이것은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행해오고 있는 관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는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속에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함과 애정이 녹아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누리고 있으며, 아들됨의 자유 속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우리의 마음을 예배를 통해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우리가 우리 죄짐으로 인해 견딜 수 없어 신음하면서, 주님께 우리의 허물과 우리 조상의 죄를 기억치 말아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지 말아 주십사 하고 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매우 복되고 더 높은 실체가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실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하나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예배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참된 예배를 드릴 영적인 상태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배하는 사람은 속사람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데 제한을 받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로 심령이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나 성령님이 상관하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신령한(종교 의식적인 것과 대조되는) 예배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는 반드시 신령해야 한다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must worship)." 이제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본질이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 - 이 이제 차례로 선포되었습니다. 사람이 순전히 외적인 종교의식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면, 이는 마치 하나님을 이방종교의 죽은 신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신령한 예배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좇아 예배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신분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진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을 광야의 노정(거쳐 지나는 길이나 과정.)에 있으며, 하나님의 안식을 향해 순례하는 순례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분을 통해 광야노정에서 도움을 받게 됩니다.예배에 관해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늘성소에 들어갈 담력과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배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의 하나님과의 가족관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여전히 아버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 10:19-22(그러므로 교우 여러분(그, '형제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을 살펴보고자 합니다.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또는 자유)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휘장이 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휘장이 제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휘장이 찢어지게 되었고, 지성소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양심도 정결함을 입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화목된 자로서 평안 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은 죄 문제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었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불확실한 사람은 예배하고자 하는 좋고, 선한 의도가 있을지라도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졌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의 사역이 완성되었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 모든 믿는 자들은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확실한 담력(또는 자유)"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옳고 합당하다고 여기는 어떤 상태를 정해놓고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정죄감에 자주 빠지곤 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합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곧 두려움과 영혼의 떨림 가운데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특권은 주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자주 자기 정죄에 빠짐으로써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있습니다. "양심을 항상 정결케" 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대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한 일이 죄로 인해 오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신령한 예배가 하나님께 받으심직 하게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자신의 복된 영원한 인격과 사역의 탁월함과 및 그 생명의 향기로 더불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심령에 어떠한 위로와 위안을 가져다주는지요! 누가 다음과 같은 말에 찬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 모든 예배에 대한 수고와 노력, 여전히 헛되고, 내가 가장 뜨거울 때 드리는 예배도 냉냉함이 감도네!" 이제 우리는 광야에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로워진 심령 가운데 최고의 예배를 드릴 때조차도, 우리 주님을 얼마나 의지해야 하겠는지요!
22절에 보면, 우리는 아론 제사장 직분이 세워지는 절차에 대한 암시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란 말씀은 희생제사의 피를 뿌리고, 회막문 앞에서 씻었던 구약시대의 예식을 기억나게 합니다. 레위기 8:6-24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피를 우리 마음에 뿌린다는 것은 새로운 출생에 대한 모형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끗케 되었으며, 우리를 송사할 죄가 전혀 없게된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지금까지 간략하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또는 신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지요!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새로운 질서의 복됨을 깨닫는 것이 너무 둔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의 종교적인 편견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영적 어두움이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주님에 의해 심판받은 유대교를 모방해 왔으며, 따라서 그러한 종교 아래서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과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할 뿐 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더욱 굳게 하시길 빕니다. W. W. 페러데이/http://www.godswill.com.br/xe/Culto/408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요4:23) 뜻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원문은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이다. 여기에서 주목 할 것은 ‘프뉴마티’ 와 ‘알레데이아’ 이다. 먼저 ‘엔’은 ‘~안에서’(in)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그리고 ‘카이’ 는 ‘그리고’(and) 라는 뜻의 단순 접속사이다. 한편 ‘프뉴마티’ 의 원형은 ‘프뉴마’로서 이것은 바람 등이 ‘불다’(마 7:25, 요 3:8) 라는 뜻의 ‘프네오’에서 유래하여 ‘영’(고전 15:45, 갈 4:6) 또는 ‘영혼’(마 27:50) 및 마음 의 ‘중심’(막 2:8)이나 ‘귀신’((낙 1:26, 눅 9:39)을 의미 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나 심령 및 귀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속성에서 이와 같은 의미가 파생된 듯하다. 본절에서는 문맥상 ‘심령’의 의미가 에배자의 자세와 관련되어 사용 되었기 때문에 본절의 ‘신령으로’ 라는 뜻은 ‘귀신’ 이라는 뜻보다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것을 뜻하는 ‘영으로’ 또는 ‘마음의 중심으로’ 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진정으로’ 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알레데이아‘는 그 원형이 ’알레데이아‘이다. 이것은 ’숨기다‘(막 7:24, 눅 8:47) 또는 ’알지 못하다‘(행 20:26) 및 ’잊다‘(벧후 3:5, 8)를 뜻하는 ’란다노’에 부정적 의미를 갖는 접두모음 ‘아’ 가 합쳐져 명사화된 단어이다. 따라서 그의 뜻은 ‘숨김이 없는 상태’ 또는 어떤 일을 ‘깨달아 아는 것’ 및 여호와의 뜻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개역 성경에서 ‘알레디이아’ 는 일반적으로 ‘진리’(요 17:17, 벧전 1:22) 및 ‘진실함’(엡 5:9) 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위에서 언급한 의미 가운데 ‘숨기지 않고 드러 낸다’ 는 뜻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 나타난 ‘진정으로’ 의 정확한 뜻은 ‘있는 모습 그대로 숨기지 않고’ 혹은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며 여호와의 뜻을 잊지 않고’ 라는 것이 된다. 결국 이상을 통해‘신령과 진정으로’ 의 뜻은 사람이 ‘마음으로 깨달아 여호와를 분명하게 알고’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본절 전체를 풀어보면, 예수께서는 장차 사람들이 여호와께 온전한 예배, 곧 사람이 그 마음을 드리며, 또 여호와의 뜻을 잘 깨달아 예배를 드리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 하신 것이다. 그랜드종합주석 요한복음 4장 pp649-650 |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
설교본문낭독: 요한복음 4장 23-26절
신조 낭독: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6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1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1,5절
발단
요한복음 4장 24절에 대한 오해
저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은 오늘의 본문 24절을 이런 식으로 많이 외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개역한글판)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이 아닌 개역한글판에서 그렇게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는 신령하게 드려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딴 짓하면 안되고 신령하게 드려야 한다고 배워왔을 것입니다. 또 예배는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냥 대충 드리면 안되고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드려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 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예배 시간에 딴 짓하면 어른들로부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별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4절만을 놓고 봤을 때에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이유를 달고는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우리가 예배를 신령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드리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영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예배는 신령하지 않아도 되고 진심이 아니어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서로 별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하면 말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신령과 진정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신령과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는 그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신령하게 하고 진심으로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에 신령하게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진심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도 맞는 말이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다” 라는 말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것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제2계명의 관점에서
그렇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그것은 바로 제2계명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동안 제2계명 설교를 들으면서 많이 들었던 말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앞부분에 있는 이 말은 제2계명의 기초를 이루는 말입니다. 제2계명의 근거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 본문이 제2계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무조건 전부 다 제2계명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제2계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출애굽기 20장 4-5절에 보면 제2계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4절에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절하지 말라” 라는 말이 다르게 표현하면 “예배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지 말라”라는 말도 NIV 성경에 보면 “shall not worship”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배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계명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고, 그것으로 예배하지 말라”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4절도 역시 제2계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표현과 “~~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표현이 오늘 본문이 제2계명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바른 번역
이렇게 제2계명의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읽으면 어떻게 되느냐? 저와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이 제대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꿔서 번역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렇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신령하게, 진심으로 예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하면 더 분명해 집니다. NIV성경에 보면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역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자는 반드시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진짜 의미입니다.
제2계명의 긍정적인 표현으로서의 본문
우리가 계속 보았듯이 십계명은 “~~하지 말라”라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지 말고, ~~하라”라는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제2계명에서는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고, 그것들로 예배하지 말라.”인데, 긍정적으로는 “그 대신에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라는 말입니다. 그 긍정적인 명령을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전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
먼저,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원문에 충실하게 말하면 “성령 안에서 예배하라”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우리의 예배가 오직 성령님께 의존하여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신령하게 예배하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예배는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성령님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예배는 인간의 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만 힘입어 예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경배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1)
그렇기에 사실상 예배라는 것은 성령 안에서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 지금 예배하는데 여러분 속에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고, 여러분이 성령과 전혀 상관없이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하는 자들은 영으로 예배할지니라(must)”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아무리 열심히 찬송을 부른다 할지라도 성령이 없는 자들은 예배의 자리에는 있지만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그 다음으로 봐야 할 것은 “예배하는 자가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이 말도 제대로 번역하면 “예배하는 자가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2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하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님이 진리로 예배하라고 했는데, 그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 이신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예배하라” 라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으로 예배하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해서 예배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 순서 가운데에 죄의 고백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참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고는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고 예배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성령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 대로
그런데 이 ‘진리’라는 것은 그리스도 말고도 또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진리(眞理)’라고 하면 말 그대로 참된 이치입니다. 이것은 시대를 불변하고 동일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늘 동일합니다. 수천년 전에 진리이면 지금도 진리여야 합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최고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고후 6:7). 왜냐하면 성경이야 말로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오직 유일합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성경도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2000년 후에도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예배하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보게 될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진리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진리도 불변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배하는 방법은 늘 동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진리도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불변하시니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배는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제2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 참된 예배라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3)
그렇다면 성경대로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하는 예배의 요소만을 사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4) 다시 말하면 성경의 방법을 따라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규정적 원리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서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라고 말합니다.5)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교회의 소개문에서 언급하고 있고, 현재 진행 중인 평일모임에서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만,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가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배는 아무렇게나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에 따라 예배드려야 하며, 예배에는 질서가 있고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규정된 순서나 규정된 요소들로 짜여진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거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대한 규범은 인간적인 창의성이 아니라 성경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는 최고의 규범입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가 예배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6문답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1문답
이처럼 제2계명의 중요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대로 예배해야 한다”입니다. 제2계명은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6문답은 제2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96문: 제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image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1)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2)
1) 신4:15-18; 사40:18-19,25; 행17:29; 롬1:23-25 2)레10:1-2; 신12:30-32; 삼상15:22-23; 마15: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1문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51문: 제2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2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형상images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1) 자신의 말씀으로 정하여 주시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2)
1) 신4:15-19; 출32:5,8 2) 신12:31-32
적용 - 예배의 필수요소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예배는 무엇보다도 성경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파 장로교회의 예배는 설교를 비롯하여 말씀의 선포가 항상 중심이 되었습니다.6) 설교는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7) 한 때 중세시대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에 설교가 등한시 되었습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가톨릭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설교를 예배의 핵심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에 설교를 회복시켰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자는 오직 성경을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은 설교자의 설교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이 선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예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렇다 보면 나중에는 설교자도 회중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설교 안에 이상한 것들을 집어넣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제2계명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만이 설교되어야 합니다. 전하는 자는 순수하게 전해야 하고, 듣는 자도 순수한 말씀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밖에 성례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을 통해서 세례와 성찬이 시행됩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해서는 안됩니다. 세례는 오직 공적인 예배시간에 이루어집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헌금이 있어야 합니다(고전16:2). 예배 시간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온라인 헌금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배 중에 이 일을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과 기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이외의 시간에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배 시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초대교회부터 모든 성도들은 다른 모든 시간보다도 예배 시간에 찬송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또한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으로만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정성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예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절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배의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정신이 중요하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예배는 중요하지 않아.” 과연 이 말이 맞습니까? 하다 못해 불신자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도 방식이 있습니다. 올려야 할 음식도 정해져 있습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도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에 대해서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정신이 중요하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우리의 정신만 받아 주세요. 우리 마음대로 예배할께요.” 라고 말해야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예배의 방식도 정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You must worship in tru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고백
이 사실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절과 5절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8)
제 21 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Of Religious Worship and the Sabbath-day
1. 본성의 빛the light of nature은 만물에 대한 주권lordship과 통치권sovereignty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분은 선하시며 만물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경외해야 하며 사랑해야 하며 찬양해야 하며 찾아야 하며 신뢰해야 하며 섬겨야 한다.1)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the acceptable way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해 주신 것으로, 그분의 계시된 뜻에 의하여 한정된다limited by his own revealed will. 그러므로 인간의 상상imaginations이나 고안devices 또는 사탄의 제안suggestions에 따라 눈에 보이는 사물visible representation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지시되어 있지 않은not prescribed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된다may not.2)
1) 수 24:14, 시 18:3,31:28,62:8,119:68, 렘 10:7, 막 12:33, 행 17:24, 롬 1:20,10:12. 2) 출 20:4-6, 신 4:15-20,12:32, 마 4:9-10,15:9, 행 17:25, 골 2:23.
5.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예배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경건한 성경낭독과17) 건전한 설교,18) 그리고 분별력과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들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성도들이 있어야 한다.19) 그들은 마음에서부터 은혜로 시편을 노래해야 하며singing of psalms with grace in the heart,20)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합당하게 시행되어 성도들이 그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예배에 있어야할 내용들이다.21) 이 밖에 특별한 경우에는 신앙적인 맹세와22) 서약,23) 엄숙한 금식,24) 특별한 감사25) 등이 예배의 요소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요소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릴 경우에도 절차에 따라 경건하고 신앙적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26)
17) 행 15:21, 계 1:3. 18) 딤후 4:2. 19) 사 66:2, 마 13:19, 행 10:33, 히 4:2, 약 1:22. 20) 엡 5:19, 골 3:16, 약 5:13. 21) 마 28:19, 행 2:42, 고전 11:23-29. 22) 신 6:13, 느 10:29. 23) 전 5:4-5, 사 19:21. 24) 에 4:16, 욜 2:12, 마 9:15, 고전 7:5. 25) 에 9:22, 시 107편. 26) 히 12:28.
이러한 고백에 따라 역사상 존재했던 경건한 정통 개혁파 장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의 요소만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예배 안에 마음대로 다른 것들을 집어 넣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랐습니다.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성경낭독과 설교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례와 찬송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 예배하는 원칙에 매우 충실했습니다.9)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지금 드리는 이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대로 정한 것입니다.
한국장로교회의 현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장로교회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그렇듯이 대부분이 십계명에 대한 가르침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보니, 모두가 자기들 마음대로 예배의 형식을 꾸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그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대로 자기가 기분 좋은대로 예배하는 것이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왜 이렇게 드리는 지에 관심도 없고 그 근거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제2계명이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2계명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에 따라 예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의 예배가 예배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장소, 예배시간의 길이, 예배에 사용되는 물건들의 가격,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액수가 예배의 예배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화려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참된 예배란
참된 예배란 외형적인 것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 가운데 참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지, 그리고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것을 성도들이 어떻게 듣는지, 비록 적은 헌금이라 할지라도 그 헌금이 헌금의 성격대로 드려지고 또한 사용되는지가 예배의 예배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대로 예배가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에 따라 영이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이 아니시라면 예배는 진리를 따라가 아니라 외적인 것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진리를 따라 할 때에만 참으로 받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느끼기에는 예배를 드린 것 같은지 아닌지 잘 모른다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 없이 성령으로,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고 우리가 느끼기에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 말하는 방식대로 하는 예배, 그것이 바로 제2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결말
제2계명의 2가지 측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6문답)
이처럼 제2계명은 우리에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고, 그것으로 예배하지 말라”입니다.10) 그러므로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려고 해도 안되고, 예수님 그림도 중요하게 여기면 안됩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그런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이냐?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인 성경에서 말씀하신 방법으로 예배하라”입니다.11)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대로 예배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개혁주의 예배의 회복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의 예배입니까? 과연 여러분들은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추구하십니까? 예배가 예배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열광적인 열정이나 어떤 진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소리 질러야 받으시고, 화려한 악기를 사용해야 예배가 예배되는 것이 아닙니다.12) 성경이 말하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개혁주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
우리교회가 지향해야 할 예배는 바로 이러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소개문에는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적 원리에 충실해야 함을 믿는다. 따라서 한국교회에서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각종 예배는 시행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의 고백이 되어, 우리교회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방법대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리라”(요4:23).
1) 이승구, “성경적 공예배를 지향하며”, in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기독교 세계관적 교회론 탐구』(서울: SFC, 2007), 42. 침례교 신학자인 웨인 그루뎀은 “성령 안에서”라는 의미보다는 “영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활동으로”라고 본다.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4), 노진준 옮김, 『조직신학(하)』(서울: 은성, 1997), 259.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썩 바람직하지 않다.
2) Jochem Douma, De Tien Geboden: Handreiking voor het Christelijk leven (Kampen: Van den Berg, 1992), trans by Nelson D. Kloosterman, The Ten Commandments: Manual for the Christian Life. (Phillipsburg: P&R, 1996). 35.
3) Bruce Milne, The Message of John: Here is your King (Leicester: IVP, 1993), 정옥배 옮김, 『요한복음 강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울: IVP, 1995), 113.
4) 이승구, “성경적 공예배를 지향하며”, 43.
5)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869.
6) Milne, 『요한복음 강해』, 115.
7) 최근에 번역된 책 가운데 설교를 다루는 다음의 책에서는 이 부분을 아주 잘 강조하고 있다. R. Albert Mohler, Jr., He is Not Silent (Chicago: Moody, 2008), 김병하 옮김, 『말씀하시는 하나님』(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34.
8) Frame은 2계명을 설명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벡서 제21장 제1절을 언급한다. John M. Frame,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hillipsburg: P&R, 2008), 465.
9) John Murray, “Worship”,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1: The Claims of Truth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 박문재 역, 『조직신학 Ⅰ』(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166; Institutes, Ⅳ, ⅹ, 30.
10) John I. Durham, Exodus, WBC, (Waco: Word, 1987), 손석태 역, 『출애굽기』(서울: 솔로몬, 2000), 475.
11) Frame,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464.
12) Stephen Charnock, Discourses upon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 (Grand Rapids: Baker, 1853, 1996), 179.
http://cafe.daum.net/hgpch/UTKJ/7/https:
cafe.daum.net/correcttheology/1Esw/393?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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