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배
(요한복음 4:20-24)
오늘날 예배 드릴 때 거의 습관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하고 겸손하며 진실된 마음 자세, 한마디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예배에 임하는 내적인 마음 상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마음 자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영적’ 이해는 비단 현재 우리 교계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교회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물론 이러한 정성어린 자세는 예배에 임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갖춰야 할 것임에는 두말 할 나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음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인용하는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이 본래 그러한 뜻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요한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표현만큼 오래도록 본래의 의미에서 왜곡되게 사용된 성경 말씀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Ⅰ. 내적인 혹은 영적인 하나님 섬김(?)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대체로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난 표현을 인간의 내적인 마음 상태 혹은 인간 마음의 영적 상태와 관련시켜 해석해왔다(spiritualistisches Verst ndnis).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에 젖은 서구인들의 이해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 특별히 고대 헬라 신비주의와 스토아 사상 혹은 영지주의의 이해에 따르면, 이른바 유치한 원시종교의 외적이며 육적인 예배 이해와 대립된 것으로, 영적이고 신비적인 예배를 참된 예배로 간주하였다.1온전한 예배란, 제물을 바치는 제의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비와 선행과 정의를 실천하는 진실된 마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이미 구약성경 여러 구절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 1장 11~17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개역개정판).2
또한 헬라 유대 종교철학가로 통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von Alexandria, 대략 BC 20~AD 50년경)에게서도 그런 표상을 찾을 수 있다: “유일무이한 제물로서 진리를 바치는 마음의 섬김은 진실되다”(det. 21), 혹은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마음의 경건성을 떠나 진실되며 신성한 제물이 있단 말인가?”(Vita Mos. II, 108).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언급하는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구약/유대적인 물질주의적인 예배 표상에 대립된 영적인 예배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영적 예배(곧 우리의 인간적 정성과 종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오랫동안 이해해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계몽주의 이래로 더욱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긴 세월 동안 내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이해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한글 ‘개역성경’도 그와 같은 영향을 받아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진정’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를 번역한 것인데, 인간 마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한다. 또한 ‘으로’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전치사 ‘엔’(en)을 우리말로 바꾼 것인데, 수단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배하는 자가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즉 ‘개역성경’에 나타나는 번역은 예배를 완전히 내적인 의미로 이해한 번역임을 알 수 있다.3 ‘공동번역’(1997/1999년)에는 그리스어 원어 ‘프뉴마’와 ‘알레테이아’가 전치사 ‘엔’과 합하여 완전히 부사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로 번역했다. 이로써 소위 ‘영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4장 20절을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인간적인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과 관련이 있다.
한편, 요한복음 4장 24절을 내적 혹은 영적인 의미의 예배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서구 학자들의 주석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한 좋은 예가 고데의 요한복음 주석에 나타난다. 고데는 요한복음 4장 23~24절과 관련하여 ‘영성’(Geistigkeit)과 ‘진정’(Wahrheit)을 미래에 있을 예배의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기서 영은 인간적인 영혼(=정신)의 최고의 활동(die hochste Lebenstatigkeit der menschlichen Seele)을 가리킨다. 이로써 영혼은 신적인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된다. 곧 경건의 장소요,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며, 진실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소이다. … 이와 같은 첫 번째 특징은 새로운 예배의 내적인 세력을 묘사한다. - 두 번째 특징인 진정은 첫 번째를 보충한다. 영혼의 내적 성소에서 거행되는 예배야말로 유일한 참된 예배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대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영혼 가운데 또한 진정 가운데라는 이 두 표현은 단지 양태(die Art und Weise)와 관련된 것이다.”4 또한 하이트뮐러(W. Heitmuller)는 이렇게 해석했다: “영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혹은 민족과 제의의 경계를 넘어서 특정 지역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인, 따라서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다.”5 혹은 바우어(W. Bauer)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신성한 시간과 장소와 제의와 결부된 육(Sarx)의 영역에 속한 모든 멍에에 구속됨이 없이 ‘진실된’ 기도자(wahrhaftige Anbeter)는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할(geistige Gottesverehrung) 것이다.”6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이 모든 영적 혹은 내적인 해석은 본래 요한이 의도했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Ⅱ. 요한의 사고에 따른 이해
요한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4장 1~26절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나누는 대화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대화가 평범한 대화가 아님을 요한은 처음부터 강조한다. 한 유대인 남성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 4장 24절의 문맥 이해
어느날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옛날부터 유래한 한 우물이 있었는데, 행로에 지친 예수께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제6시(=정오)가 되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그곳에 왔고, 마실 물을 청하는 예수님과 대화가 벌어지게 된다.
이 여인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은 오늘날의 시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 이방인과의 혼혈족이고,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던 사람들이었다. 9절에 예수께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래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물을 청하자, 그 여인은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리는 가운데, 우선적으로 메시아 계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누군인줄 알았더면 (역으로) 네가 나에게 생수를 구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여자는 물 길을 그릇도 없이 도대체 ‘생수’(=샘솟고, 흐르는 물)를 어디서 얻겠는가 하고 11절에서 상당히 이성적인 질문을 한다. 아마도 여인은 예수께서 다른 우물을 알고 있지 않나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러한 종류의 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물임을 설명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라고 우회적으로 말함으로써,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기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여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갈증을 해소시키는 마법의 물과도 같은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4절)을 달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자 16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각도로 대화를 돌린다.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꿰뚫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엿보게 된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남편 다섯을 두었다는) 여자의 과거사를 정확히 밝히게 되고(18절), 그러자 비로소 여인은 예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서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고백한다(19절).
이어서 여인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를 언급한다(성전을 예루살렘에 갖고 있는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성소를 그리심 산에 세웠다). 21절에서 예수는 여인에게 대답한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함으로써, 두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예배 드릴 때가 지금 이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온전히 예배 드릴 때’란, 바로 예수와 함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와 함께하는 현재에는 예배를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2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또한 그런 예배를 드릴 때가 언제인가를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참된 예배가 바로 지금 자신과 더불어 성취되고 있음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때’란 바로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오신 때,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이때’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는 문장의 맨 앞에 놓여 강조되고 있다. 이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인 24절 말씀을 예수께서 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선포할 메시아를 기다린다(25절). 그러자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계시한다(26절).
2. 요한이 의미하는 ‘영’과 ‘진리’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두 핵심어인 ‘영’과 ‘진리’를 요한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은 이 두 개념을 인간의 심성과 관련된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즉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며,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요한의 ‘영’(pneuma) 이해
요한복음의 ‘프뉴마’(pneuma)는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혼’(psyche)/‘마음’(nous)/‘몸’(soma)과 대립된 인간학적인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요한은 프뉴마를 인간적인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7 요한복음 3장 6절(“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에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세력으로 이해되는 ‘영’(pneuma)과 대립된 개념은 세상 세력을 대표하는 ‘육’(sarx)이다.
요한의 문맥에서 '신령'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제자들을 계시의 진리 가운데로 이끈다.
이와 같이 이해된 하나님의 영은, 보이지도 않으며 단지 그 활동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을 뿐이기에(요 3:8), 인간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요 1:18). 이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이 바로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1 1:5)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8)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요한적인 이원론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둠이 아니라 빛을 비추신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요한의 영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말로 ‘보혜사’ 혹은 ‘협조자’로 번역하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빠뜨릴 수 없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복음(요 14:16f, 26; 15:26f; 16:7b~11, 13~15)과 요한일서 2장 1절에만 나타난다. 종교사적인 유래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이 개념은,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특별히 법정에서 변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불러들인 자’를 뜻한다.8 즉 누군가를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의 문맥에서 이 개념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된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과 이별한 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선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은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가르치며’(cf. 요1 2:27)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이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26~27절은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기능으로서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기능에 대해 말한다. 게다가 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믿지 않는 세상을 고소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요 16:8~11).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장 13~15절에 언급된 파라클레토스는 신앙 공동체의 활동과 관련하여, 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 가운데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기능에 대하여 언급한다.
2) 요한의 ‘진리’ 이해
요한은 ‘진리’(aletheia)라는 개념을 자기 특유의 신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이 단어를 공관복음서 기자와 달리 훨씬 자주 사용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9 이 개념을 중요하게 간주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요한이 어떠한 의미로 이 개념을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이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된 언어 사용법에10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사용법이 눈에 띈다11첫째, ‘진리’는 다음과 같은 동사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진리를 ‘알다’ 혹은 ‘보다’(요 8:32; 1요 2:21); 진리를 ‘말하다’(요 8:40, 45, 46; 16:7); 진리를 ‘증거하다’(요 5:33; 18:37); 진리를 ‘행하다’(요 3:21; 1요 1:6); 진리에서 ‘나오다’(요18:37; 1요 3:19). 여기에서 요한이 뜻하는 ‘진리’는 계시를 나타내는 언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둘째, ‘진리’가 전치사 엔(en)과 함께 사용된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24); 진리 ‘안에’ 서다/서지 못하다(요 8:44);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다(요 17:17, 19); 행함과 진리 ‘가운데’(1요 3:8). 여기에서 ‘진리’는 전치사 엔(en)과 더불어 일종의 부사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고,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진리의 영역은 이와 대립된 영역을 전제한다. 이를 요한은 ‘어둠’(요 1:5) 혹은 ‘세상’(요 1:10)으로 부른다.
예배란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참 예배는 말씀의 온전한 선포를 전제한다.
셋째, 진리가 마치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다(요 1:17);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나는 진리다(요 14:6). 여기에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은혜와 진리’라는 한 쌍의 명사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본래 구약적인 표현 ‘헤세드’(dsj)과 ‘에메트’(tma)에 상응한다.12 하나님의 자비와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출 34:6) 요한은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파송한 것을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이해했다. 아들 파송 사건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동일하다(요 17:17). 결국, 본질적인 의미로 볼 때, 요한의 ‘진리’가 뜻하는 것은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점은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경우의 언어 사용법 가운데 특히 잘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요한에게 나타나는 ‘영’과 ‘진리’란 서로 보충하는 개념으로서, 한마디로 세상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과 대립된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과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이 표현은 요한 특유의 성령을 가리키는 칭호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을 연상시킨다. 또한 ‘진리의 영’은 다음과 같은 표현, ‘참 빛’(요 1:9; 1요 2:9), 혹은 ‘참 떡’(요 6:32) 또는 ‘참포도나무’(요 15:1), 또는 ‘선한 목자’(요 10:11, 14)와도 상응한다.
3. 참된 예배란
이제 다시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구절 요한복음 4장 24절로 돌아가서, 요한이 의미하는 참된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참된 예배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특정 예배 시간과 장소의 극복
참된 예배란 특정한 예배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참된 예배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은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오직 그리심 산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는데(요 4:20), 요한은 그것을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유대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의적 관습을 거부한다. 예배의 본질은 제의 자체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해는 요한 특유의 사고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성서 및 유대 전통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현재에 가능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참된 예배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고 강조하듯이, 하나님의 영과 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진리)가 드러난 현재,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곧 예배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금의 순간을 가리킨다(요 3:19; 5:25). 예배의 ‘참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순간에 제한되고 있다. 바로 그때 구원의 시대에 합당한 장소가 펼쳐진다. 참된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형식을 통해 인간이 주도가 되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예배를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가속화된 예배의 형식화를 거부한다.
3) 현재 종말론적인 예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현재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현재적 종말론은 요한복음의 특징에 속한다(요 3:19; 5:25; 4:23; cf. 12:31; 16:11). 예수의 오심은 바로 종말론적인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선재한 로고스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미래 종말에 있을 사건이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 요한은 믿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요 4:23)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함께하신다는 근거에서 가능한 말이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종말의 시간이 기다려야 할 미래에 나타날 것이 아니고, 예수의 운명 가운데 바로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말이다.13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현재성은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 참된 예배가 종말론적인 현재에 가능하다고 요한은 강조한다.
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배
요한은 그리스적인 사고보다 훨씬 더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였다. 요한에게 있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한 분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하나님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정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의 차원에서 묘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에 비로소 그분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란 이처럼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요한복음 3장 23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진술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즉 예배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삶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로운 은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해진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락해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Ⅲ. 나가면서
오늘날 우리는 예배의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 너무도 집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시 교회 건물 안에만 임재하고 계신 듯이 말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을 통하여, 참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주로서 바로 지금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고 계신다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임을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 성과 속(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과 모든 날을 성스럽게 여기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속되다고 천대받던 창녀, 세리, 어린아이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주일과 평일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날을 마치 주일처럼 귀한 날로 여기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은 바로 성스러운 주일과 다름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평일에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배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나의 주로 고백하는 믿음 가운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러한 삶이 나의 노력에 달려있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두 무릎을 꿇는 삶인14 것이다. 참된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전적인 자비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히 다양한 예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드러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값진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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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만든 예배
야곱의 우물가에서 나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사이의 대화는 요한복음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이다. 이 대화에는 진정한 예배에 관하여 가르치는 값진 진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 권력자들의 강제적인 조치로 그리심 산의 성전을 예배 처소로 삼고 있던 사마리아인 중에서도 외면당하던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 문제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놀라움 이상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한 대화를 나누신 이유는 간단하다. 알기 원하고, 목마름 사슴같이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찾는 마음이기에 주님은 응답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찾고자 하면, 즉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보여주신다. 유대인으로부터 당시에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의 중대한 화두였던 예배 장소에 관한 의문을 진지하게 지니고 있던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자 올바른 예배에 대하여 즉시 물었다. 그 대답으로 예수님은 요 4:21에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신다. 이는 장소의 문제를 떠나고 형식주의, 의식주의, 율법주의가 극복된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고 받아주신다는 복음의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예배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진정한 예배에서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본문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세 가지로 살펴본다.
Ⅰ. 사람이 만든 예배
사람이 만든 예배는 사람에게 편리하게 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기 조금 고치고 저기 조금 더하여 결국에는 성경의 의도를 왜곡시킨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북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예배에 편의를 도모하고 예배를 사람의 기호에 맞도록 만들어 성경의 의도를 왜곡시켰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신비감과 신뢰를 받기 위하여 그리심 산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였던 산이고 멜기세댁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산이라고 꾸며대며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제단을 쌓고 희생제물을 이 산에서 바칠 것을 명하였다고 하여 성경의 사실까지 왜곡시켰다. 그러나 신 27:4-7에는 그 산은 그리심 산이 아니라 에발(Ebal) 산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모든 이단과 가짜들은 오늘날에도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의 뜻을 왜곡하고 비틀어서 사람들에게 신비함과 신빙성을 조작해 내고 사람의 마음과 편리에 영합한다. 사람의 고안이 가미된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
Ⅱ.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에 무지하다
요 4:22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하신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모세오경을 해설하고 적용한 예언서(message)와 시편 영감(inspiration)들을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오경의 율법만 무조건 문자대로 믿고 행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율법주의와 의식주의와 형식주의가 지닌 맹신의 결과이다. 그들은 맹신(blind faith)으로 사람을 신의 노예로 삼았다.
복음의 말씀을 설명하고 이해하게 하여 진리의 깊음으로(into the truth)까지 인도하는 성령의 시대인 지금에 하나님 말씀의 기본 가르침(basic teaching)에 대하여 무지하여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모르면서 믿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알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어둠을 사랑하는 자이다. 더구나 기독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무지함으로 대체하여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가로 막아 소자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어 지는 이상의 큰 징벌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막 9:42).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성령의 도움으로 깨우쳐 나가야 바울 같이 목표를 향해 완주할 수 있어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
Ⅲ. 미신과 우상숭배적인 축복신앙이다
사마리아의 종교는 그들과 섞여 사는 이방인들의 축복의 신에 오염되어 있었다. 많은 크리스천도 진정한 예배를 경험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진정한 갈망이나 순수한 뜻으로 교회에 오지 않고 두려움이나 신의 노여움을 피하여 복을 받고자 하여 나온다. 축복 신앙은 하나님을 공포의 신으로 만들고 자의적인 신으로 만들어 맹신에서 재물을 제단에 바침으로 신의 노여움을 달래어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으려 하며, 마음의 위안과 세상에서의 안전을 얻고자 한다. 즉 그들은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나아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창조하셨고 그것을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우리의 부활과 영생이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그리스도로 보낸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에서 증거 하였다. 기적이나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보호받고 복이 올 수 있도록 열성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그 동기가 우상숭배와 동일하여 하나님이 물리친다. 진정한 예배의 경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하며 예배에서 말씀의 진리를 영적으로 깨달을 때와 이 깨달음이 살아 있는 일상의 삶 속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성과 감각과 자기중심적 세속의 갈망을 철저히 극복하는 회개로 영이 진리를 깨닫는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야곱에게서 열 두 지파의 이스라엘이 나왔고 그 후 솔로몬 왕의 사후에 정치적인 욕심으로 두 지파의 남유다 왕국과 열 지파의 북 이스라엘로 분리되었다. 이 분리는 결국 종교를 완전히 변질시켜 한 하나님 여호와에 두 믿음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계속하여 서로의 믿음과 예배가 진정한 것이라고 싸웠다. 자기들의 믿음과 예배가 옳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양쪽 모두 사람이 만든 예배를 드려 하나님과 그 예배를 세상 목적을 위하여 왜곡시켜 왔다. 그러므로 한 우물을 먹고 한 믿음을 가졌던 그리고 한 믿음으로 한 민족이었던 야곱시대로 다시 돌아갈 진정한 예배에 대한 말씀을 야곱의 우물가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에게는 깊은 감회와 뜻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인 진정한 예배의 영원한 공식을 요 4:23-24에서 주시며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 승천으로 성령이 강림하심은 새로운 예배의 때라고 가르치는 본문 말씀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을 묵상하자.
Ⅰ.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진정한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첫째로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이 먼저 예배에 사람들을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조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부르짖고 호소하며 떼쓰는 곳에 오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갖추면 진정한 예배를 찾으시는 하나님이 즐거이 오시어 함께하신다. 왕상 18장의 갈멜산 기도 대결을 보자. 바알과 아세라신의 축복신앙과 미신적 신앙의 선지자들이 신을 부르기 위하여 호소하고 애걸하며 몸을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면서 광신적인 열광 속에서 신을 강제하려는 곳에는 응답이 없다. 그러나 엘리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제단을 쌓고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니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의 경험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것을 잊지 말자.
Ⅱ. 진정한 예배는 영적 경험이다.
요 4:24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영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이기 때문에 모호하고 비인간이며, 안개같이 알 수없는 존재인 것을 말함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나의 속사람인 나의 영과 함께 교통하고 있으며 함께 생각하며 함께 느끼고 통화하며 함께 일하는 관계를 이루어 더 할 수 없이 나와 이심동체가 된 나의(subjective)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정말 신비한 연합으로 하나님이 죄 없는 아들인 그리스도로 인간의 육신에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적 객체(objective)가 아니다. 예수님이 오시어 복음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보이시고 그 말씀을 영접하여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은 성령으로 거하시며 믿는 자와 일심동체가 되어 나의 하나님(subjective)이 되셨다. 이렇게 나의 주 나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나의 바깥에 있는 객체적 대상(objective)에 대한 예배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며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하나님과의 교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영적 경험을 세우는 예배이다.
Ⅲ. 진정한 예배는 진리로 드린다.
진정한 예배는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진리로 드린다. 요 17:17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기도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진리를 통하여서만 성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와 나의 영적 지도이며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길의 나침판이다. 그리고 항상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진리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영감(inspiration)과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령의 깨우치는 영감으로 인도를 받기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시키는 가르침을 계속적으로 베풀고 배우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자라가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의 많은 경우 진리와 하나님 말씀의 기본 가르침 위에 서 있지 않고 강한 감성적 "믿습니다" 만 외치며 단순하고 무조건적인 목적으로 복종하면서 진정하고 강한 믿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무지함 속에서 복종만 한다면 성령을 거슬리는 믿음이 될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을 그 속까지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를 항상 살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진리가 없는 영적 예배라면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이 지배하여 미신과 신비주의에 빠져 다른 영들의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이 없는 진리로 드려서 하나님 없는 예배는 교회와 나의 교육장소일 뿐이며 사교모임 또는 사회운동의 모임이 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성경중심이며 성령이 나에게 임하여 역사하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94276/20161014
참된 예배(요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니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으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오늘은 요한복음 4:20~24절까지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참된 예배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 동네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누는 대화와 거기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생명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설교 말씀은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겪은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을 추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현실과 내가 지금 부딪힌 상황 없이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추적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우리의 현실이나 순서에 관계없이 나가고자 합니다. 이런 시각이 때로는 우리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은 옳은 생각이고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조만간 우리도 이 말씀들을 인용하게 되고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깊은 맛을 느끼시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주고 받던 중 사마리아 여인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하며 어떤 초월자의 임재를 느끼는 자리까지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때는 지금이라면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가를 느끼게 하는 말씀 중의 하나인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맘에 맞는 교회를 찾는다든가 솔직한 목사님을 어쩌다 만나게 되면 자기의 어떤 급박한 질문을 들고 나옵니다. 많은 질문 중에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하나님은 창세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하나님은 자기가 들 수 없는 무거운 물건을 만드실 수 있는가?’ 등등의 질문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때는 이때라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문과 호기심은 늘 동일하다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내용을 조금 살피고 지나갑시다. 20절 이하의 말씀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가리키는 예배하는 산은 그리심 산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출애굽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입구까지 오지만 그리심 산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들어가거든 이렇게 하라고 유언을 한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마치고 부족 간에 국토를 나누어 가지고서는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축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심 산은 창세기12장에 보면 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이르렀다가 하란에서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이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12::5,6) ‘세겜’땅 ‘모레’라는 곳에 이릅니다. 그런데 계속하여 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고 거기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고 거기에서 단을 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11:25~30에는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이 두 산은 요단강 저 편 해 돋고 지는 편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 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앞에 말했던 지명과 같은 곳으로 시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장소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고 지명이 자주 바뀌므로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맞는다고 생각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솔로몬이 지은 솔로몬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한 번도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리심 산이 예루살렘과 같은 양대 산맥인 것 같이 대조되는 지위를 얻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열왕기상12:25-29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이 사건의 내용을 좀더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처음에는 부족사회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때부터 왕국이 됩니다. 초대 왕 사울, 둘째 왕 다윗, 셋째 왕 솔로몬까지만 통일된 왕국으로 있다가 솔로몬 왕의 사후에는 나라가 둘로 나뉘었습니다. 12파중 10지파가 다윗 왕조를 배반하고 북쪽 지방에 나라를 세우고는 국호를 그대로 이스라엘로 씁니다. 남쪽 지역은 다윗의 왕통을 인정한 그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두 지파만으로 남쪽 왕조를 설립하였고 국호는 주를 아루는 유다 지파를 따라서 ‘유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 변역되면서 ‘유’가 ‘ㅈ’ 발음으로 변화되어 ‘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유대주의는 ‘쥬대이즘’이라는 영어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분열된 이유는 이러합니다. 솔로몬이 궁전을 짓느라고 이스라엘의 경제는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민심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마치 중국의 진시황이 아방궁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을 때 백성의 생활이 도탄에 빠졌던 것과 비슷합니다. 마침내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를 이어 왕이 됩니다. 그러자 원로 대신들이 르호보암에게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같이 세금을 중하게 부과시킬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르호보암은 원로 대신들은 가볍게 해 주라고 하고 젊은 동료들은 더욱 중하게 해야 한다고 할 때에 포악한 말을 권한 젊은 동료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내 새끼 손가락이 우리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 아버지가 손에 채찍을 들었다면 나는 M16을 들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10지파는 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습니다.
북 왕조는 여로보암이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가만히 보니 이스라엘은 원래 시정국가로서 종교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성전이 남 왕조 유다에 속한 예루살렘에 있으므로 그 곳으로 가는 백성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그곳을 오다가다 왕통의 정통성이 유다 쪽으로 기울어 버리면 자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리라는 걱정 때문에 여로보암은 방금 읽은 말씀처럼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의 최 북단에 위치한 단에 세워서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이 여기서 예배를 드리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북 왕조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근거를 밝혀 이런 방법이 어떠냐 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그리심 산에서 단을 쌓은 것과 연결을 시켜서 누구인가가 정당화시키지 않았었는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습니다. 그런 추측들이 섞인 구전을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습니다’라는 말로 한 데 묶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데 왜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여기서 예배를 드렸으니 이쪽이 더 정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이것이 이 여인에게는 가장 큰 질문거리였던 모양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추적하려는 것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 말씀이 실감납니다.
잠시 말머리를 돌려서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며 교회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정리를 해 봅시다. 교회는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까? 종교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까? 아니면 교회나 종교가 없이는 하나님을 못 만납니까? 또한 하나님을 만나고 무릇 신을 만나는 데는 꼭 종교적인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까? 하는 질문을 우리도 한 번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므로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누구나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의 도움이나, 또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면회하게 하는 비서실장도 아닙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쓸데없는 정력을 낭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과 연결시키시는지 조심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21절을 다시 보시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요? “ 신령과 진정으로” 하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처음부터 꺼내지 않으시고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의 징검다리를 놓고서야 말씀하십니다.
‘때’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왜 필요한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인데 너희는 ‘신령과 진정으로’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한다는 것’에 왜 ‘때’가 필요합니까?
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어떤 예배 형식이나 종교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나 통로에 관한 것이나 과정에 관한 것이나 방법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잘 연결해 봅시다.
‘이 산에서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는 장소와 방법과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대상이 문제다.’ 라는 대답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23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이 대화 중에서 가장 놀랍게 부딪쳐야 하는 단어는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21절을 다시 봅시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이 말씀은 그냥 적어 놓은 단어의 열거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형식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라는 것은 버릇이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하는데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하고, 아버지께 예배하는 때가 온다.” 이 말씀을 다 묶어 보면 결국 ‘예배가 무엇이냐?입니다.
예배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 마땅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결국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며 아버지께 영광과 경배를 바로 드리고 있느냐로 참된 예배냐 아니냐를 가리지 그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하느냐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 때 너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말을 왜 등장시켰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누구신 줄을 밝히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오시기 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큰 일이 난다는 정도밖에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자 하나님이 누구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여기서 아버지라는 것은 권위와 물질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으로 표현되는 것보다 오히려 사랑이 있고 성품이 있고 내가 깊이 알고 있는 끊을 수 없는 혈육관계의 밀접성 같은 것들이 베어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 이전에는 참다운 예배가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라는 말을 등장시킵니다.
요한복음 1:17~18에서 왜 모세가 등장하는지 아십니까? 모세가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이것을 좋아하며 이것을 싫어하신다는 육법전서 식의 이야기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는 인격적인 분이라는 설명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누구이신 줄을 아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로 인해 안타까워하시며 우리로 인해 애를 태우고 계시는 분이라고 느끼는 감각이 있기 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은 성경이 언제나 요구하는 계명-중에서 가장 큰 계명 - “너희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다른 어느 것도 그 예배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요한복음 14:6이하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러자 우리와 같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이렇게 질문을 하는데 이런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려면 복음서를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베드로가 자른 말고의 귀를 붙여 주신 분입니다.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신 분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른 제자에게 팔리신 분입니다. 그가 세상에서 받은 것은 구유와 십자가밖에는 없었을 정도로 푸대접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그 예배가 어느 정도의 감격과 진심 속에 드려지는지 늘 두드려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말씀이 왜 성경의 제일 앞부분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구약에서부터 연결하여 요한복음 4장에 이르러서야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왜 창세기의 천지창조(1장), 사람을 지음(2장), 타락(3장), 이 다음 즈음에 기록하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그렇게 빨리 알아듣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누구인 줄을 가장 잘 아십니다. 직접 만드셨으니까 가장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아듣는 순서를 정하셨는데 그것이 여기에 있는 이 사건에 그대로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심 산에서도 단을 쌓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하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라를 나누었고 단 위에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왕상12:28)했습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 용어로 ‘여호와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과 율법들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금식을 하고 있을 때 산 밑에서는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지칭하기를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이로다.”(출32:4). 그 때에도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들로서, 즉 인간이 처음에는 종교성을 어떠한 모양으로 가지는가 하면 인격적 대상으로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종교성을 가질 때는 자기 최면으로 가진다고 합니다. 자기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 경배를 한다는 얼마나 웃을 일입니까?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고개를 숙일 만큼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리석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타락하다 못해 이지러진 영적인 실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기억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길 때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웠던 사건들이 면면이 이어오는 것이 구약의 연속입니다. 이런 것이 언제 없어지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바벨론의 포로가 됨으로써 없어집니다.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사람은 자기 최면과 자기 눈가림을 하던 것에서부터 손을 놓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바로 전의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이 등장만 했다 하면 도처에 편만하여 있는 우상 숭배를 지적하곤 합니다. 신약에 예수님이 오셔서부터는 우상 숭배로 인하여 싸우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자기 최면의 종교성을 없애고 나니까 두 번째로 도덕적 경건주의가 종교 대신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바리새인과 싸움을 했습니다. 도덕적 경건주의, 즉 스스로 어떤 아름다운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한 인간이 그의 신앙의 수준을 높여 가는 데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 두 과정을 지나가야만 됩니다.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어디까지 극복되어야 하느냐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리에까지입니다.
신령과 진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또한 나의 아버지라는 뜨거운 인식과 만남이 있으며 또 그것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도 필요없습니까? 교회도 필요없습니까? 그렇다면 아무 데나 앉아서 혼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낫지 굳이 교회에 와서 집사니 장로니 목사니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혼자서 진심을 가지게 되면 진심이 너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혼자서 생각하면 늘 독재자가 되게 마련인 것입니다. 독단으로 흐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견제 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마치 빨갛게 달아오른 석탄 덩어리도 꺼내 놓으면 식듯이 인간은 자신을 지 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갖는 가장 중요한 필요성입니다.
교회에 모이라고 하는 것이 통로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믿는 사람인 줄 아는 향기를 피우라고 해서 모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가능한 한 성경이 밖으로 보이도록 들고 다니십시오. 심장에 가깝게 들수록 영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형식주의와 진정한 형식이 필요한 것과의 차이를 여기서 인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만 재학 시에는 누구나 가슴 근처에 성경책을 끼고 다니기 때문에 제가 몹시 기분이 상했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 중의 한 분이 제일 작은 성경책과 찬송가 두 권을 가볍게 들고 강대상에 오르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러한 면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반발은 귀중히 여겨야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형식이란 성의의 표현을 말합니다. 형식에 내용을 대치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형식은 정성이 없게 되면 생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연애를 하실 때 연애 편지를 노트를 쭉 찢어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색깔도 핑크색에다가 몇 번이나 쓰고 찢고, 썼다가는 찢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쓰는 성의를 보입니다. 이렇게 형식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내면의 가득 찬 정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표이지 형식이 내용을 대치하거나, 형식이 있어야만 이 일이 가능한 조건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조금 전의 말과 같이 ‘예, 저는 하나님을 목숨을 걸고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면서도 거기에는 늘 이런 조건이 붙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계명이요.” (마22:34-38)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39절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고 그것이 흘러 넘치면 결국은 옆으로 흘러 내릴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옆으로 흘러 넘치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완성적 차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완성적 차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됩니다.
그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여기에 모인 여러분을 향하여 요구하시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것을 참된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안 계시면 못 살겠습니다.’라고 그렇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하라시면 목숨이라도 내놓고 불 속에 뛰어들겠습니다.’하는 식으로 살벌하게 증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봄볕이 따스하게 얼음을 녹이듯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녹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증명하셨는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그 수치스러운 죽음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열심을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만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을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다시 출발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해 주옵소서, 그 사랑에 정당한 반응을 할 수 있게 하시고 내가 누리고 마땅히 감격할 것들을 알려 주옵소서’라고 요구하십시오.
이것을 알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마음 속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찬송과 감사와 기쁨을, 모여서 이렇게 늘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땅히 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축복을 얻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박영선 목사/남포교회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
설교본문낭독: 요한복음 4장 23-26절
신조 낭독: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6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1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1,5절
발단
요한복음 4장 24절에 대한 오해
저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은 오늘의 본문 24절을 이런 식으로 많이 외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개역한글판)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이 아닌 개역한글판에서 그렇게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는 신령하게 드려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딴 짓하면 안되고 신령하게 드려야 한다고 배워왔을 것입니다. 또 예배는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냥 대충 드리면 안되고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드려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 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예배 시간에 딴 짓하면 어른들로부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별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24절만을 놓고 봤을 때에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이유를 달고는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우리가 예배를 신령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드리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영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예배는 신령하지 않아도 되고 진심이 아니어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서로 별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하면 말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신령과 진정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신령과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는 그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신령하게 하고 진심으로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에 신령하게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진심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도 맞는 말이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다” 라는 말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것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제2계명의 관점에서
그렇다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그것은 바로 제2계명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동안 제2계명 설교를 들으면서 많이 들었던 말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앞부분에 있는 이 말은 제2계명의 기초를 이루는 말입니다. 제2계명의 근거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 본문이 제2계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무조건 전부 다 제2계명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제2계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출애굽기 20장 4-5절에 보면 제2계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4절에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절하지 말라” 라는 말이 다르게 표현하면 “예배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지 말라”라는 말도 NIV 성경에 보면 “shall not worship”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배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계명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고, 그것으로 예배하지 말라”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4절도 역시 제2계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표현과 “~~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표현이 오늘 본문이 제2계명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바른 번역
이렇게 제2계명의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읽으면 어떻게 되느냐? 저와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이 제대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꿔서 번역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렇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신령하게, 진심으로 예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하면 더 분명해 집니다. NIV성경에 보면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역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자는 반드시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진짜 의미입니다.
제2계명의 긍정적인 표현으로서의 본문
우리가 계속 보았듯이 십계명은 “~~하지 말라”라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지 말고, ~~하라”라는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제2계명에서는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고, 그것들로 예배하지 말라.”인데, 긍정적으로는 “그 대신에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라는 말입니다. 그 긍정적인 명령을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전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
먼저,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원문에 충실하게 말하면 “성령 안에서 예배하라”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우리의 예배가 오직 성령님께 의존하여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신령하게 예배하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예배는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성령님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예배는 인간의 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만 힘입어 예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경배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1)
그렇기에 사실상 예배라는 것은 성령 안에서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 지금 예배하는데 여러분 속에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고, 여러분이 성령과 전혀 상관없이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하는 자들은 영으로 예배할지니라(must)”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아무리 열심히 찬송을 부른다 할지라도 성령이 없는 자들은 예배의 자리에는 있지만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그 다음으로 봐야 할 것은 “예배하는 자가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이 말도 제대로 번역하면 “예배하는 자가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2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하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님이 진리로 예배하라고 했는데, 그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 이신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예배하라” 라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으로 예배하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해서 예배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 순서 가운데에 죄의 고백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참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고는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고 예배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성령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 대로
그런데 이 ‘진리’라는 것은 그리스도 말고도 또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진리(眞理)’라고 하면 말 그대로 참된 이치입니다. 이것은 시대를 불변하고 동일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늘 동일합니다. 수천년 전에 진리이면 지금도 진리여야 합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최고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고후 6:7). 왜냐하면 성경이야 말로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오직 유일합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성경도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2000년 후에도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예배하라”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보게 될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진리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진리도 불변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배하는 방법은 늘 동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진리도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불변하시니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배는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제2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 참된 예배라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3)
그렇다면 성경대로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하는 예배의 요소만을 사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4) 다시 말하면 성경의 방법을 따라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규정적 원리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서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라고 말합니다.5)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교회의 소개문에서 언급하고 있고, 현재 진행 중인 평일모임에서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만,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가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배는 아무렇게나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에 따라 예배드려야 하며, 예배에는 질서가 있고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규정된 순서나 규정된 요소들로 짜여진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거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대한 규범은 인간적인 창의성이 아니라 성경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는 최고의 규범입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가 예배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6문답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1문답
이처럼 제2계명의 중요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대로 예배해야 한다”입니다. 제2계명은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6문답은 제2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96문: 제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image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1)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2)
1) 신4:15-18; 사40:18-19,25; 행17:29; 롬1:23-25 2)레10:1-2; 신12:30-32; 삼상15:22-23; 마15: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1문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51문: 제2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2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형상images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1) 자신의 말씀으로 정하여 주시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2)
1) 신4:15-19; 출32:5,8 2) 신12:31-32
적용 - 예배의 필수요소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예배는 무엇보다도 성경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파 장로교회의 예배는 설교를 비롯하여 말씀의 선포가 항상 중심이 되었습니다.6) 설교는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7) 한 때 중세시대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에 설교가 등한시 되었습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가톨릭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설교를 예배의 핵심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에 설교를 회복시켰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자는 오직 성경을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은 설교자의 설교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이 선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예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렇다 보면 나중에는 설교자도 회중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설교 안에 이상한 것들을 집어넣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제2계명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만이 설교되어야 합니다. 전하는 자는 순수하게 전해야 하고, 듣는 자도 순수한 말씀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밖에 성례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을 통해서 세례와 성찬이 시행됩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해서는 안됩니다. 세례는 오직 공적인 예배시간에 이루어집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헌금이 있어야 합니다(고전16:2). 예배 시간에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온라인 헌금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배 중에 이 일을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과 기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이외의 시간에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배 시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초대교회부터 모든 성도들은 다른 모든 시간보다도 예배 시간에 찬송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또한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으로만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정성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예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절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배의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정신이 중요하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예배는 중요하지 않아.” 과연 이 말이 맞습니까? 하다 못해 불신자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도 방식이 있습니다. 올려야 할 음식도 정해져 있습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도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에 대해서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정신이 중요하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우리의 정신만 받아 주세요. 우리 마음대로 예배할께요.” 라고 말해야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예배의 방식도 정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You must worship in tru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고백
이 사실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절과 5절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8)
제 21 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Of Religious Worship and the Sabbath-day
1. 본성의 빛the light of nature은 만물에 대한 주권lordship과 통치권sovereignty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분은 선하시며 만물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경외해야 하며 사랑해야 하며 찬양해야 하며 찾아야 하며 신뢰해야 하며 섬겨야 한다.1)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the acceptable way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해 주신 것으로, 그분의 계시된 뜻에 의하여 한정된다limited by his own revealed will. 그러므로 인간의 상상imaginations이나 고안devices 또는 사탄의 제안suggestions에 따라 눈에 보이는 사물visible representation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지시되어 있지 않은not prescribed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된다may not.2)
1) 수 24:14, 시 18:3,31:28,62:8,119:68, 렘 10:7, 막 12:33, 행 17:24, 롬 1:20,10:12. 2) 출 20:4-6, 신 4:15-20,12:32, 마 4:9-10,15:9, 행 17:25, 골 2:23.
5.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예배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경건한 성경낭독과17) 건전한 설교,18) 그리고 분별력과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들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성도들이 있어야 한다.19) 그들은 마음에서부터 은혜로 시편을 노래해야 하며singing of psalms with grace in the heart,20)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합당하게 시행되어 성도들이 그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인 예배에 있어야할 내용들이다.21) 이 밖에 특별한 경우에는 신앙적인 맹세와22) 서약,23) 엄숙한 금식,24) 특별한 감사25) 등이 예배의 요소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요소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릴 경우에도 절차에 따라 경건하고 신앙적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26)
17) 행 15:21, 계 1:3. 18) 딤후 4:2. 19) 사 66:2, 마 13:19, 행 10:33, 히 4:2, 약 1:22. 20) 엡 5:19, 골 3:16, 약 5:13. 21) 마 28:19, 행 2:42, 고전 11:23-29. 22) 신 6:13, 느 10:29. 23) 전 5:4-5, 사 19:21. 24) 에 4:16, 욜 2:12, 마 9:15, 고전 7:5. 25) 에 9:22, 시 107편. 26) 히 12:28.
이러한 고백에 따라 역사상 존재했던 경건한 정통 개혁파 장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의 요소만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예배 안에 마음대로 다른 것들을 집어 넣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경의 원리에 따랐습니다. 예배에 있어서의 규정적 원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성경낭독과 설교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례와 찬송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 예배하는 원칙에 매우 충실했습니다.9)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지금 드리는 이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대로 정한 것입니다.
한국장로교회의 현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장로교회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그렇듯이 대부분이 십계명에 대한 가르침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보니, 모두가 자기들 마음대로 예배의 형식을 꾸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그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대로 자기가 기분 좋은대로 예배하는 것이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왜 이렇게 드리는 지에 관심도 없고 그 근거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제2계명이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2계명은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에 따라 예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의 예배가 예배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장소, 예배시간의 길이, 예배에 사용되는 물건들의 가격,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액수가 예배의 예배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화려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참된 예배란
참된 예배란 외형적인 것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 가운데 참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지, 그리고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것을 성도들이 어떻게 듣는지, 비록 적은 헌금이라 할지라도 그 헌금이 헌금의 성격대로 드려지고 또한 사용되는지가 예배의 예배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대로 예배가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에 따라 영이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이 아니시라면 예배는 진리를 따라가 아니라 외적인 것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진리를 따라 할 때에만 참으로 받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느끼기에는 예배를 드린 것 같은지 아닌지 잘 모른다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 없이 성령으로,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고 우리가 느끼기에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 말하는 방식대로 하는 예배, 그것이 바로 제2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결말
제2계명의 2가지 측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6문답)
이처럼 제2계명은 우리에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고, 그것으로 예배하지 말라”입니다.10) 그러므로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려고 해도 안되고, 예수님 그림도 중요하게 여기면 안됩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그런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이냐?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인 성경에서 말씀하신 방법으로 예배하라”입니다.11)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대로 예배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개혁주의 예배의 회복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의 예배입니까? 과연 여러분들은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추구하십니까? 예배가 예배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열광적인 열정이나 어떤 진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소리 질러야 받으시고, 화려한 악기를 사용해야 예배가 예배되는 것이 아닙니다.12) 성경이 말하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개혁주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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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가 지향해야 할 예배는 바로 이러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소개문에는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적 원리에 충실해야 함을 믿는다. 따라서 한국교회에서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각종 예배는 시행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의 고백이 되어, 우리교회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방법대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리라”(요4:23).
1) 이승구, “성경적 공예배를 지향하며”, in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기독교 세계관적 교회론 탐구』(서울: SFC, 2007), 42. 침례교 신학자인 웨인 그루뎀은 “성령 안에서”라는 의미보다는 “영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활동으로”라고 본다.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4), 노진준 옮김, 『조직신학(하)』(서울: 은성, 1997), 259.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썩 바람직하지 않다.
2) Jochem Douma, De Tien Geboden: Handreiking voor het Christelijk leven (Kampen: Van den Berg, 1992), trans by Nelson D. Kloosterman, The Ten Commandments: Manual for the Christian Life. (Phillipsburg: P&R, 1996). 35.
3) Bruce Milne, The Message of John: Here is your King (Leicester: IVP, 1993), 정옥배 옮김, 『요한복음 강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울: IVP, 1995), 113.
4) 이승구, “성경적 공예배를 지향하며”, 43.
5)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869.
6) Milne, 『요한복음 강해』, 115.
7) 최근에 번역된 책 가운데 설교를 다루는 다음의 책에서는 이 부분을 아주 잘 강조하고 있다. R. Albert Mohler, Jr., He is Not Silent (Chicago: Moody, 2008), 김병하 옮김, 『말씀하시는 하나님』(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34.
8) Frame은 2계명을 설명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벡서 제21장 제1절을 언급한다. John M. Frame,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hillipsburg: P&R, 2008), 465.
9) John Murray, “Worship”,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1: The Claims of Truth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 박문재 역, 『조직신학 Ⅰ』(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166; Institutes, Ⅳ, ⅹ, 30.
10) John I. Durham, Exodus, WBC, (Waco: Word, 1987), 손석태 역, 『출애굽기』(서울: 솔로몬, 2000), 475.
11) Frame,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464.
12) Stephen Charnock, Discourses upon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 (Grand Rapids: Baker, 1853, 1996), 179.
http://cafe.daum.net/hgpch/UTKJ/7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요4:23,24)
(요 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하신다. 그 여인은 벌써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닌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잘못으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남성위주 사회의 희생으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여인은 분명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고(6-7절. 대낮에 물을 길으러 감), 또한 내적인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었다(15절.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이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어떤 이는 전도, 어떤 이는 대화의 기술, 어떤 이는 치유라는 측면에서 이 대화를 주목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는 바로 예배에 대한 것이다. 대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참된 예배에 대해 주제가 좁혀진다. 사실 예수님은 예배라는 주제가 나올 때까지 대화를 계속 이어가다가 그 주제가 나오자 일종의 강설을 베푸신다(21-24절).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참된 예배자와 참된 예배, 바로 그것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가능해졌다. 이것이 이 본문의 참주제이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3-24절이고, 그 중에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한 말씀이 핵심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을 보더라도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래의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참된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1)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다(요 4:24). “영”이라는 말은 “빛”(요일 1:5)이나 “사랑”(요일 4:8, 16)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 “영”이라는 말은 설명하기 힘든 용어이다. 그것이 “인간의 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성령”과 동일시 할 수도 없다. 분명히 성령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성령이다.”라고 성경은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영”을 부정신학의 방법으로, 즉 “무엇무엇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곤 했다. “영”은 물질이 아니며, 복합물이 아니며, 보이지 않으며, 육체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영”은 몇 가지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영”은 인간과 대비되며(요 3:6), 생명을 주는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요 1:18). “영”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들리며 그 효과는 확실하다(요 3:8). “영”의 가장 중요한 작용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살도록 하는 사역이다(요 3:5, 7:38-39).
따라서 “하나님이 영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분명히 알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2)
둘째로,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도 역시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진리 안에서”라는 말이 “영 안에서”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본다.3)
참된 예배는 성령의 은사로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알 때에 가능하다. 그렇기에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성경은 종종 “진리의 성령”이라는 표현을 쓴다(요 14:17; 15:26; 16:13; 그리고, 요일 4:6; 5:6; 살후 2:13 참조).4)
참된 예배는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예배 장소나 예배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참된 예배의 본질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중심의 문제이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5)
셋째로, 이러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
참된 예배는 삼위일체적이다. 참된 예배란 그 대상이 영이신 하나님이시며, 그 시작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있고, 그 성격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것으로 특징 지워지는 예배이다.6)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게 되며 새 생명의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사모하며, 그 진리를 들을 때에 기뻐한다. 그들은 성령의 활동적인 역사를 그 영혼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 4:23-24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삼위일체적인 예배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가능해졌다(요 4:25-26).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러한 특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공예배에서 가정예배에서 개인예배에서 그런 특권을 감사히 누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성도들을 간절히 찾고 계신다(요 4:23).
2)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25.
4)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25-26; Köstenberger, John, 157.
6) M. W. G. Stibbe, John. Readings: A New Biblical Commentary (Sheffield: JSOT Press, 1993), 64. Köstenberger, John, 157에서 재인용. 우병훈 교수(고신대, 신학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다”(요4:24)
- 어떻게 예배한다는 것인가?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한복음 4장의 몇 구절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많은 교회의 주보 예배순서에 적혀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예배는 이렇게 드려야 하는거야”라는 식으로 말하기 위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떻게 예배한다는 뜻입니까? 실제로 이 말을 많이 쓰고는 있지만,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막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소위 영적으로(신령과),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진정으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글성경이 그렇게 보이도록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이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예배 드릴 때 영적으로(사실 이 영적인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예배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만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 땅에 원어를 한 번 들춰보지도 않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아 모를 뿐이지,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우리네 교회 행태의 중요한 부분을 반성할 수 있는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원문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말은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떼이아”입니다. ‘엔’은 영어의 ‘in’ 에 해당하는 전치사이고, ‘프뉴마티’ 와 ‘알레떼이아’는 각각 ‘성령’ 과 ‘진리’ 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출현빈도가 낮은 단어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 ‘영’, ‘성령’ 등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단어 자체에 대한 상세한 뜻을 주해하지 않더라도, 그냥 단순하게 말해도 이 단어는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알레떼이아’ 역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서 보편적으로 성경에서 ‘진리’라고 할 때 거의 ‘알레떼이아’를 씁니다. 두 단어 모두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처음 배울 때 배우는, 즉 초급단어들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무언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잘 살리면서, 그리고 전치사까지 살리면서 번역을 하면 이 말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가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할 때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표현 안에 소위 말하는 “영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이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신령과’라는 말을 어떤 신비적인 느낌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령과’를 이해했을 때, 그 사람의 예배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체험을 찾으려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경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지 “성령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예배는 어떤 공중에 떠다니는, 혹은 마음 속에서 영적인 어떤 기운이 흘러나오게 되는 그런 종류의 예배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성경에서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이런 신비적 체험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 안에 “진심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개념 역시 있습니까? 한글 번역의 “진정으로” 라는 말은 오역입니다. 이 말씀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이 단어는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이지, “진심으로”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이해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존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다”라고 말할 때는 주로, “예배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면, 무언가 좀 더 영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무언가 더 진심어린 태도로 예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본래 의미는 “예배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의 속성”, “예배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령과 진리라는 말은 한 전치사 아래 묶어져 있기 때문에 두 단어는 같은 것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용례와 성경 전체의 어법에 의하면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요한의 용례에서 '진리'는 '그림자', '모형'의 반댓말입니다). 글이 복잡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본 글에서는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에만 주목해서 글을 전개해 보도록 합시다("진리 안에서" 부분은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으면 해 보겠습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은 사실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표현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한 번도 하나님께서 “자!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라고 보여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즉 모델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인지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신령한 예배’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비적 체험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두 가지 정도 중요한 유추를 해낼 수가 있습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의미를 명확히 경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유추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말씀이 씌어져 있는 방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23절과 24절에서 두 번 연이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24절 곧 우리가 이 글에서 제목으로 삼은 절에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의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할 근거를 어디에서 두셨는고 하면,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에 두었습니다. 헬라어 단어로도 두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프뉴마 호 떼오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엔 프뉴마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에 두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영이시니까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의미는 대단히 명확해 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은 “육체가 아니시다”, “인생이 아니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영이시므로 너희도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좇는 육체적 방편들로는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무언가 신비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인간이 원하는, 인간이 좋아하는, 인간의 방편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와 달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칼빈 역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런 식으로 썼습니다.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의 성품에 맞는 것에 탐닉하는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피상적인 의식으로 가득찬 것을 여러 가지 발상해 낸다. 우리는 물이 불과 상종하지 않는 것처럼 육신과 도저히 통할 수 없는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음을 우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지루해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방탕함을 억제하는 데 족할 것이다” (칼빈 주석 중, 요한복음)
칼빈은 이 요한복음의 구절을 “로마 가톨릭 예배와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의 예배야말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라기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육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찬” 눈에 보이는 것을 만족케하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 교회는 이 말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나쁜 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적용되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오히려 중세의 교회보다 지금의 교회들이 이것에 더욱 더 대담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없는 예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대담하게 도입합니다. 그리고 그 도입이라는 것이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흥미를 가질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유익해하는 예배가 될지.....온톤 이것에 관심이 쏠려 끊임없이 예배에 새로운 것들을 장착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성령 안에서” 혹은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선배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정확하게 이 사실에 대해 정립해 두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가견적인 구상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르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1장 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예배를 위해 “무언가를 고안해 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오로지 “성경에 규정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배의 앞부분에 함부로 찬양집회를 끼워 넣고, 설교 앞에 꽁트나 스킷 드라마를 끼워 넣고, 연말에는 예배를 촛불을 켜놓고 온갖 잡다한 예식을 하는 행사로 만들거나, 심지어는 예배 시간과 간증시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패션쇼를 하기도 하고, 예배시간에 사람들의 장이 되어 서로 인사를 하거나, 특송이라는 명목 하에 노래자랑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사람들을 위한 순서들”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을 행하기 전에 적어도 대부분 교회들의 신조로 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조항 한번 뒤적여 보지 않았을까요? 왜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는지 검토 한번 해보지 않았을까요? 철저하게 현금의 한국교회들은 단지 “실용적”입니다. 효과가 있으면 무엇이라도 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에 관하여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이 그 속에 계신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 봅시다. 즉 불신자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면 반드시 성령 안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예배라는 것이 “신자에게만” 가능한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 안에 불신자가 많을수록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 누구든지, 교회의 예배에 불신자를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드리려고 할 때, 교회로부터 제제를 받는 교회에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예배는 어디로 갔습니까? 불신자가 함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들어오는 것은 주님의 이 말씀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관하여 전혀 아무런 선이해가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교회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독립개신교단에 속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 이런 권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예배를 집례하는 분으로부터 이런 제제를 받았습니다.
“손님으로 오신 분들은 본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대우를 처음 받아본 저는 몹시 놀랐지만, 곧 이들이 예배에 대해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교회 뿐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 호주의 개혁교회들은 이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단지 한국교회들과 세계의 현재 대중화된 추세가 그것을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기보다,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분위기를 가만히 보십시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들(소위 부흥한다는 교회들은 더 그렇습니다)은 온통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습니까? 얼굴이 낯선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모든 촉각이 그리로 곤두섭니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어떤 새 사람이 들어와 교인수를 늘려줄지에만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배 안에 불신자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아예 개념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신자들을 아무런 제제 없이 그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한 예는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자인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선이 매우 엄격했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거치지 않으면 신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아무런 규제가 없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서 주님의 명령을 매 주일마다 어기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령 없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함께 몰려와 “주님의 몸이 아닌데도 같은 예배의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듯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그렇게 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대안은 필요할 것입니다. 전도 받은 사람들은 예배외의 전도집회 등에서 따로 모여 신자가 될지 여부를 결정케 하거나, 아니면 예배 안에 들어올지라도 예배당 안에 손님석이나 관람석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예배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성도된 자들이 지키려 할 때에만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예배의 중요성보다는 교회에 새사람이 오는 것만을 더 중시하는 풍조에서는 예배의 정체성 자체가 고수될 수 없습니다. 실로 예배드리는 자리 안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끼어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의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들에 조금만 더 민감하다면, 말씀의 의미가 풍성하게 살아있는 산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출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다”(요4:24)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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