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신학
1.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요한복음을 그렇게 위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요한복음의 신학이다. 요한복음은 성경 중에서 가장 깊은 신학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유일신 세계에서 처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기독교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독교로 만들었다.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다. 인간적으로는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촌간이다. 이런 사촌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율법세계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인간세상에 오시되 자기의 가족의 일원으로 오셨다는 것은 도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불가능을 넘어서는 기적을 현실로 진리로 받아들였다. 인간의 이성과 판단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율법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있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있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율법세계에서 하나님이 성육신하신다는 진리가 왜 필요한지를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이 사실로 일어난다고 일어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더구나 유일신 세계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실 수 있는가? 유일신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어서 사람이 되시므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말인가?
유일신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말하고 그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서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배도가 된다. 유일신 세계에서는 한 인격적 하나님만이 존재하고 그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이시어서 독생하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하므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는 그를 만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도 성령이 역사하시어서 그 사항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성육신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하나님의 성육신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요한은 그를 처음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비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공관복음서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출생부터 시작한다(마 1:1-2:12 눅 1:26-2:20).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영원에서 하나님으로 계심에서 시작한다. 요 1:1의 태초는 창 1:1의 태초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대로 여기의 태초는 영원을 말한다. 오히려 태초를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이해해야 정당하다. 왜냐하면 영원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고 하나님은 영원자로만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말씀이 계시니라로 옮겨야 바르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말씀이 계시니라를 바른 독법으로 보면 하나님의 존재방식 안에 구분이 있음을 말한다. 요한복음은 성경역사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유일신 하나님이 그 내적 존재방식에 있어서는 구분이 있어서 한 위격이 아님을 내포한다.
그 구분을 요한은 말씀으로 표기하였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므로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단정하고 선포한다. 그냥 어떤 신적 존재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구분이 있지만 그 구분은 또한 하나님이시라고 단언한다(요 1:1-2).
말씀으로 구분되신 존재가 하나님이심을 요한은 그의 창조사역으로 입증한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요 1:3, 10).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고 피조물일 수 없음을 단정한다. 성경세계에 있어서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로만 존재한다. 다른 길은 없다. 진화에 의해서 만물이 발생하였다거나 큰 터짐 혹은 대폭발로 만물이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로만 존재가 시작하고 또 존재하게 되었다. 이 만물을 만드신 이가 바로 말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창조주 혹은 창조중보자가 인간 세상에 오시어 육신으로 나타나시므로 사람이 되셨다(요 1:9-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을 때는 아버지의 독생자로 나타나셨다(요 1:14). 육신을 입어 사람이 되신 이가 아버지의 독생자로 인정되고 알려진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요 1:14). 하나님으로서의 영광만이 아니라 육신이 되신 아버지의 독생자는 은혜와 진리를 가져오셨다(요 1:14).
성육신자가 은혜와 진리를 가져온 것은 그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독생자가 가져온 진리는 바로 그가 독생하신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이다(요 1:18).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독생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아무도 못 본 하나님을 육체 안에서 알리셨다. 요한은 말씀을 독생자로 아버지의 아들로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표기한다(요 1:1, 14, 18).
이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그는 그냥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는 선언을 명시하였다(요 19:30).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비평적 신학이 주장하듯이 두 인격간의 의지의 일치를 뜻하지 않는다. 비평적 신학에서 그렇게 주장해왔다. 하나님으로서 실체가 하나이고 동일함을 뜻한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고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아버지와 신성이 완전히 동등하고 동일하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심을 말하다. 독생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고 동일한 한 하나님이시다.
사도요한은 성육신자가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밝히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는 이로 제시한다. 세례요한은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으므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고 하였다(요 1:33-34). 성령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므로 성육신하여 육체 안에 나타나셨어도 성령을 주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요한은 세례요한의 증거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선언을 그대로 인용하므로 성육신자가 성령을 주는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이 말씀을 주석하여 생수의 강을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라고 밝혔다(요 7:39). 그리스도는 더욱 직접적으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보내실 것을 강조하였다(요 15:26). 부활 후에는 더욱 직접적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였다(요 20:22).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을 주는 자임을 밝히므로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와 동등하고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이에서 나아가 사도요한은 성육신하여 자기들 가운데 육체로 나타나신 이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호와이심을 강하게 주창한다. 육체 안에 나타나신 이는 어떤 신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구약의 여호와이심을 강조한다. 사도요한은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본 그 영광의 여호와(사 6:1-10)가 지금 자기들 가운데 와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요 12:8-41).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는데 그 영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하여 이사야가 바라본 여호와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자기들 가운데 와 있다고 강조하였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므로 그의 복음서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의 고백으로 마친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일어났다. 부활 전에는 다른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확실하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존재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정하고 고백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고백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증하므로(요 20:31) 아버지 하나님과 구분되는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요한의 글 전체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분되는 아들 하나님이 사람이 되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이다. 즉 처음에 로고스 곧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요 1:1-18) 그 사람이 되신 이가 구약의 여호와이시며(요 12:38-41)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으로 마친다(요 20:28).
성육신의 목적
율법세계에서 더구나 유일신 세계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진리는 생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였다. 온 세상이 다 힘을 합쳐도 깨닫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사도요한은 복음서의 처음 부분부터서 밝히고 있다.
율법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세상의 구주가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져있어서 율법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일신세계에서는 사람이 되셔서 오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일신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불가능하고 그런 신비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런데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의 성육신을 말하고(요 1:14) 육신이 되신 이는 세상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수록하였다(요 1:29-36). 그냥 세상 죄를 해결하는 구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죄를 해결한다고 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36).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다는 것은 희생제사로 세상 죄를 해결한다는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양이 하나님이신 것을 그가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라는 말로 표시하였다(요 1:33).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받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밝혔다(요 1:32-33).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물로 세례주지만 그가 성육신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표현을 나는 그의 신 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였다(요 1:27).
사람이 싣는 신 끈은 아무나 풀 수가 있다. 그가 왕이거나 황제이거나 영웅이거나 호걸이거나 간에 어떤 사람이 그의 신 끈을 풀 수 없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기가 세례 준 그 사람을 향하여 그런 증거를 하였다. 그것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이 아니라는 공손한 표현을 한 것이다.
즉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알리고 선포하기 위해서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 주고 그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므로 세례요한 신구약의 최대선지자가 되었다. 구약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하므로 그의 사명을 다하였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증거를 세례요한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였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한 것은 그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세상 죄를 위해 죽는다고 하는 것도 용납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세상 죄 때문에 죽는다는 일이 가능한 일이고 승인할 수 있는 일인가?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하나님이 세상 죄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가? 도저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담대하여 이 주장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다. 삶의 시작부터 죽음에로 작정한 선포를 하였다. 이 선포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공생애의 시작부분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선언하였다(요 2:19-22). 이 이해하기 힘든 발언은 제자들도 그의 부활 후에나 깨달을 수 있었다(요 2:22). 이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가 나무 달려 들려야 함을 밝히므로 그가 십자가에 죽으므로 세상으로 죄용서를 받아 영생에 이르게 할 것임을 선언하였다(요 3:13-17).
요한복음 6장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므로 생명을 가진다고 하여 주 예수는 자기 자신이 자기 몸을 찢고 피를 흘리므로 세상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요 6:33-58).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림으로 즉 희생의 제물이 되어 세상 죄를 완전히 속량할 것을 밝혔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거듭 확인하고 확증하였다. 세상의 죄의 해결이 율법준수로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을 희생해야 죄가 용서되는 것임을 밝히고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림으로 세상 죄를 속량할 것임을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리라고 선언하므로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고 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명시하였다(요 8:28). 그리고 실제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법은 주 예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여(요 8:51) 그리스도의 말씀 곧 그의 십자가에 죽어서 피 흘림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강조하였다.
속죄제물로 죽어서 세상을 구원함을 강조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다(요 10:10-18). 자기의 목숨을 버리되 자기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버리므로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함이라고 반복하므로 자기의 세상에 온 목적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임을 강조한다(요 10:15-18). 타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세상의 구주로 왔으므로 자기 목숨을 버리므로 세상으로 죄용서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요한복음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는 것임을 계속 전개한다. 그리하여 나사로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렸을 때 예루살렘 백성들이 흥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울기 때문에 그를 죽이므로 제사장들이 자기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어 이스라엘 백성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는 것으로 연결하였다(요 11:48-53). 어떻든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지도자들의 손으로 죽고 그의 죽음이 세상 죄를 위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의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에는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토로하고 이 속죄를 위한 그의 죽음이 면할 수 있기를 구하였지만 그래도 이 때를 위해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요 12:23-28). 그리고 세상 구원을 위해서 죽어 자기의 사명을 다 이루기 때문에 그의 죽는 것을 영광을 보는 것으로 제시하였다(요 12:23). 그리고 죽음의 방식이 십자가에 달림을 전제하고 내가 땅에서 들리면 이라고 반복하였다(요 12:32).
성육신자의 구원사역이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이므로 이 성경 전체에서 구원사역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 주제를 전개한다. 주 예수께서 자기를 세상의 참 빛으로 제시하여도 믿지 않는 것을 한탄하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자기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요 12:50). 즉 그리스도는 자기의 세상에 온 목적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다는 것을 그의 공생애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가르치고 밝혔다.
주 예수는 마지막 유월절을 맞아 자기를 팔아 십자가에 달리게 할 사람이 12제자 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일 것을 미리 지목하였다(요 13:21-30). 그리고 이어서 자기가 죽은 후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사 제자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므로 성령과 함께 살게 될 것을 길게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므로 살아야 할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요 14:16-16:33). 그냥 보통 세상의 종교설립자이면 자기의 가르침대로 살라고만 권할 것인데 주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자기 자리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지키고 인도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4:16-17, 23-26 15:26 16:7-14).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하고 체포되었을 때 주 예수는 이렇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으므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선언하였다(요 18:11). 이 선언은 자기의 죽음이 구원협약에서 이미 결정되었음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요 18:11).
예수 그리스도는 빌라도 앞에 서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았다. 그 심문의 핵심은 유대인들의 고소대로 예수가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하느냐 여부였다. 그래서 빌라도가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서는 달았지만 내가 왕이라고 답하므로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세상 왕권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왕이라고 답하므로 반역죄로 죽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였다(요 18:33-37). 왕이라고 답하는 것은 로마의 반역자로 죽는 것이어서 십자가형으로 죽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백성들의 요구대로 빌라도는 십자가처형에로 예수를 넘겼다(요 19:1-16).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므로(요 19:30)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속하는 일이 다 성취되었음을 공포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므로 세상을 죄와 사망에서 구속해내는 것이 요한복음의 중심주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에서 한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을 복음의 절정으로 삼았다.
십자가 처형 이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두 장에 걸쳐 자세히 제시하므로 세상 구원을 성취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도마사도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으로(요 20:28) 복음서를 마치므로 세상의 구주가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므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속량하신 분임을 널리 공포한다.
이 신앙고백과 함께 사도요한의 자기 저술의 목적을 반포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3:16의 반복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심이라.
이 고백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이룩한 구원을 전파하여 세상으로 구원얻게 할 사도들을 다시 확립하는 일을 하셨다(요 21). 베드로는 본래의 수사도와 수제자의 자리에 다시 세워지므로 복음전파를 힘있게 할 책무를 받았다(요 21:15-18). 십자가 처형 전에 주 예수를 부인하고 모른다고 한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다시 일어나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도록 베드로 사도의 지위로 복귀되었다.
구원만 성취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성취된 구원이 만방에 전파되어서 구속주의 뜻이 다 이루어져야한다. 이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널리 전파될 수 있게 다 마련되었다.
2. 보혜사 성령
요한은 독생하신 하나님을 제시함과 동시에 성령을 제시한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성령이 그 위에 임하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가 또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이다.
성령의 직임의 하나 사람을 거듭나게 함
성경역사상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으로 거듭남을 말하였다. 이 거듭남은 물과 영으로 이루어진다고 정하였다. 그 영은 바람에 비유되었는데 바로 성령의 주권성을 밝히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을 거듭나게 함에 두었다(요 3-8).
그리스도 성령 담지자요 파송자
또 그리스도는 성령과 자기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는다고 하여 자기는 성령의 담지자임을 명백히 하였다(요 3:34). 이제까지 성령을 자기 몸에 담지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또 성령이 내주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므로(요 1:31-32) 성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량없이 담지하였음을 밝힌 것이다(요 1:32-33, 3:34).
주 예수는 백성들에게 선포하여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이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여 자기가 성령을 주는 자임을 주장한다. 성령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신데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만 믿으면 성령을 받는다고 하여 자기가 아버지처럼 성령으로 세례 주는 하나님이심을 밝힌다(요 7:37-39).
이 진리가 밝히고 증명하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 예수는 성령 주는 자로서 자기가 성령 주시는 자라고 주장하여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근본진리로 전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보혜사 성령을 소개하였다. 그냥 보혜사가 아니라 다른 보혜사로 소개하였다. 이 다른 보혜사를 아버지에게 청하여 제자들에게 보내시기로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17).
보혜사는 자기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보혜사는 백성들과 함께 하여 백성을 지키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이를 말한다. 이런 직임을 지닌 이의 이름과 그 직임이 성경역사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혜사를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소개하였다(요 14:16, 26 15:26).
자기는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면서 보혜사를 소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할 것을 밝혔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여(요 14:17), 보혜사가 자기의 자리를 대신할 것임을 밝혔다. 자기 자리를 대신할 것을 밝히면서 다른 보혜사로 소개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원보혜사이심을 밝힌 것이다. 보혜사가 다른 보혜사인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떠난 후에 오실 수 있다고 한 것이다(요 16:7).
구속사역 후에만 보혜사가 오실 수 있음
원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야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없이는 성령이 오시지 않음을 말한다. 원보혜사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은 그냥 장소적으로 이동만이 아니라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아버지께 가는 것을 말한다. 원보혜사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전에는 제자들을 떠날 수 없다. 또 구속사역을 다 이루시면(요 19:30) 그 구속사역을 아버지께 보고해야한다(히 9:24). 그리스도는 자기의 속죄사역을 아버지께 보고하므로 구속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므로 구속사역완성 후에 성령이 이 구속사역의 계속과 적용을 위해서 오셔야한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밝힌 이유이다(요 16:7).
보혜사의 오심의 유익 성령의 내주
내가 떠나야 보혜사가 오실 수 있으니 보혜사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하였다(요 16:7). 보혜사 성령은 제자들에게 오시면 제자들과 영구히 함께 계시기 때문에 유익이라고 하였다(요 14:16). 원보혜사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시지 못하였다. 마 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를 보면 제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가 일이 있을 때에는 헤어져 일을 보고 다시 장소를 정하여 모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보혜사 성령이 오신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한 것은 오신 보혜사는 제자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보혜사는 오시면 주 예수와는 달리 제자들 안에 또 백성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보혜사는 그들과 동행하고 늘 함께 계신다.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식과 다른 점이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 하나님이심을 증명
뿐만 아니라 이 보혜사를 성령으로 일치시킨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여 15:26). 그러면 성령이 보혜사로서 백성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성령을 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과 동등이신 하나님을 밝히고 있다. 보혜사 성령이 아버지께로서 나오신다고 하였다(요 15:26).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셨듯이 성령도 아버지에게서 나오심으로 하나님의 본질에서 유래한 하나님이심을 밝힌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아들의 성령 파송 그의 구속으로 성령을 사심으로
그리고 성령이 세상에 오실 때 그냥 혼자 독자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파송하시고 또 아들이 보내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성령은 아버지가 보내신다. 그러나 아들이 청구하므로 보내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요 14:16). 아들이 아버지께 성령을 백성들에게 보내시도록 구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의 구속사역이다.
히브리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 흘려 이루신 구속을 가지고 아버지의 얼굴 앞에 나타나사 성령을 청구하셨다(히 9:24). 요한복음도 말하려고 하는 것은 동일하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고 아들이 하신 일을 하신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 바로 이 구속사역으로 아들이 성령을 획득하였으므로 아들도 성령을 보내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요 15:26)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서철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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