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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요한복음 훑어읽기 : 10장- 선한목자

by 은총가득 2021. 1. 16.

 

 

4th century depiction of Christ as the Good Shepherd,

Museum for Epigraphy, Terme di Diocleziano, Rome

 

10장 개관

 

선한 목자에 관한 은유적 담화 (10.1-21)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단위이다.

하지만, 9.40-41에서 예수를 눈이 멀었다고 비난한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이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다른 방법으로 실재를 보도록 제안하는 은유들이 혼합되어져 있다:

예수는 양의 문으로, 이를 통해 목자가 양에게로 가서 양을 인도하여 목장으로 나간다.

예수는 목자의 모델로, 양의 이름을 일일이 알고 또한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는다.

예수의 사역의 차원에서는 이 이야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신 메시지이다.

요한 공동체의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와 대결하는 듯이 보이는 인간 목자들을 따르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향한 비판이다.

특히 유명한 구절 10.16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은 양의 한 무리와 한 목자를 이루는 것이 자신의 목적임을 표현한다.

또한 이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에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분파가 문제 중의 하나였음을 시사한다.

 

 

 

Phillip Medhurst presents John’s Gospel: Bowyer Bible print 5461

Christ is the good shepherd John 10:11-16 Jan Luyken

 

10장은 장면 전환이 없이 담화 (discourse)가 전개된다.

이는 선한 목자 담화를 하는 대상이 9장의 마지막 청중인 바리새인들임을 의미한다.

 

선한 목자의 담화는 당시 유대에서 민중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바리새인에 대한 일종의 고소장이다.

바리새인들은 제사장이나 사두개파와는 달리 대중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인도한다고 자부하였다.

바리새파 운동의 프로파간다를 보면 알 수 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에게는 고도의 정결이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도 제사장에 준하는 정결을 유지해야 한다.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식탁에까지 정결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아보사 로마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고, 옛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으로 회복시킬 것이다.

이러한 기치를 내건 바리새파 운동은 대중에게 상당히 신뢰를 받았고, 대중적인 지도자들로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예수가 보기에는 이들은 소경된 인도자들이다 (마 23.16, 24).

바리새인들은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소경들이다.

이들의 오만함과 맹목성은 9장에 치유를 받은 맹인을 다루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Good Shepherd - Catacombs of Domitilla, Rome

 

선한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어깨 위에 얹고, 양 네 마리를 두르고 정원에 서 있다. 그의 왼쪽에는 양 두 마리가 있고, 오른쪽에는 두 마리가 있다. 가장 가까운 두 양이 그를 올려다보지만, 밖으로 나온 두 양은 그에게서 외면당하고 그들 앞에 있는 풀밭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다. 심지어 더 멀리 양쪽에 두 마리의 포식동물이 있는데, 이 포식동물로부터 사랑하는 선한 목자가 그의 양을 보호해 준다.

배경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는 구약에 면면이 흐르고 있는 지도자인 목자를 향한 예언 전통의 시각에서 비판한다.

스가랴의 이스라엘 목자들을 향한 예언이 가장 뚜렷하게 예수의 담화와 연속성이 있다.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슥 11.16-17

''The bad sheperd''', oil on canvas

Jan Brueghel d.J. (1601-1678)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슥 13.7. 참고. 요 16.37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 12.10. 참고. 요 19.37와 계 1.7

요한 예수는 스가랴 예언에 등장하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염두고 두고 있다.

하나의 이미지는 양을 버린 '못된 목자'이다.

다른 이미지는 양을 위해 공개적으로 찔림을 당해서 통곡과 슬픔을 불러 일이키는 목자이다.

 

 

 

프랑스 (R. T. France)에 따르면,

스가랴 9-14장은 특히 수난의 시기에 예수의 생각과 말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스가랴서의 이 단락에서 적어도 네 명의 인물이 메시아적 표상으로 이해된다.

 

나귀를 탄 왕 (슥 9.9-10; 요 12.15)

선한 목자 (슥 11.4-14)

"그들이 찌른 자" (슥 12.10)

고통받는 목자 (슥 13.7).

 

이 네가지 이미지는 단 하나의 메시아 개념, 즉 "목자-왕"이 가진 네 가지 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 네 측면은 메시아의 오심과 백성들의 반응에 대한 연속적인 국면을 제시하는 이미지이다.

이 개념은 메시아 거절, 고난과 죽음의 문제에 집중하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주의 종'에 대한 심도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여기에 에스겔의 이미지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에스겔 34장의 이미지는 예수의 선한 목자 담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기에 매우 중요하다.

 

['너희' 목자가 강조된 단락: 2-8]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너희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Le Bon Berger (The Good Shepherd)

 

['나]'가 강조된 단락: 10-24]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라.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으리라.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리라.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리라.

1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라.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라.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야웨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Tomb showing Christ as the good shepherd

at the central cemetery of Kufstein, middle of the 19th century

 

 

에스겔의 메시지를 읽으면,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자기 이해와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양 떼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무책임한 목자로 인해 그릇된 길로 인도되었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배만 불렸다.

 

예수는 자신이 주의 목자가 되어서 흩어진 양떼를 불러모으고 보호하는 선한 목자상을 성취한다.

한편으로 하나님이 친히 그의 양 떼를 돌본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양 떼를 돌볼 목자로 그의 종 다윗을 보낸다.

이 목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다.

예수는 친히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아서, 육신을 입고 사명을 완수한다.

 

 

 

구약에는 유대인의 일상 생활을 반영하는 "양 떼" 비유가 많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다 (시 80.1; 시 23편. 사 40.10-11; 겔 34.11-16).

그런데 여기에는 목자장과 부목자 그리고 고용된 목자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삯꾼 목자는 위험한 상황에서 양 떼를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나 진짜 목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여 양 떼를 지킨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목자, 도래할 목자-왕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그 목자-왕이라고 제시한다.

 

예수는 사역 전반에 걸쳐서 다음 세 집단에게 다가가는데, 대하는 집단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1) 땅의 백성들에게는 긍휼함 (애간장이 타는 마음)을 품고 다가간다.

이들은 목자 없는 양이다 (마 9.36).

(2) 제자들에게는 그릇된 지도자들로부터 보호하려고 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막 8.15).

(3)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기혹하다.

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하여 말한다 (마 23장).

 

 

Christ as the Good Shepherd, mosaic from the entrance wall of the Mausoleum (Oratory) of Galla Placidia, Ravenna,

양과 목자의 이미지: 전반적인 배경

학자들은 예수의 양에 대한 가르침에 어떤한 배경이 있는지를 다양하게 제안해왔다.

몇몇은 영지주의, 특히 만다이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제 4 복음서의 어떤 것도 만디이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만한 근거를 증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디이즘의 자료는 제 4 복음서보다 500년이 더 늦기 때문이다.

사실, 후기 만다이즘은 요한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양무리와 더불어 누리는 친밀감은 분명히 구약 이미지이다 (예: 사 40:11; 겔 34:12?16).

요한이 구약 배경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친밀감 주제가 초기 기독교에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 Q, 마 11:27/눅 10:22).

 

 

 

구약 배경이 가장 중요하지만, 요한 청중들은 또한 자신들이 목자에 대해 알고 있었던 면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요한의 원래 청중 중에 이러한 점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하는 구성원들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개념에 전혀 새롭게 들리는 지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목자 이미지를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경혐과 다양하게 결합하여 효과적으로 인지하였을 것이다.

지중해 서부 지역에 살고 잇던 사람들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목자들의 목가적인 삶을 떠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널리 퍼져있던 인식, 특히 도시 거주자들 사이는 의심스럽게 여기는 부류 중에 하나가 목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자들을 거칠고 부도덕한 인물들로 여겼다.

목자들은 자신의 동물을 다른 사람의 땅에 풀어놓고 풀을 먹이며, 양털, 우유, 그리고 양떼 중에 새끼들을 몰래 좀도둑질한고 여겼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예수가 비교한 목자의 본성은 목자의 부도덕한 면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특히 연상시킬 것이다.

 

양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일 수 있었다.

양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양털로 인해 귀중하게 여겨졌다.

적어도 이집트에서 1월이나 2월에 양털 깎기를 한다.

9월이 되어서야 또 한 벌의 외투를 얻을 수 있었다.

현대 서양인들은 소젖에서 나온 치즈를 생각하지만 그리스인과 이집트인들은 양의 우유와 염소의 우유로 만든 치즈를 선호했다.

죽은 양, 돼지, 그리고 특히 염소의 껍질은 가죽으로 사용되었고, 특히 액체를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성서시대에 목자가 중요했다 (출 3:1; 삼상 16:11; cf. 아모스 7:14).

그럼데 불구하고 요한이 복음서를 쓰던 시대까지도, 빈번하게 경멸하는 직업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헌들은 종종 그들을 많은 해를 끼치지 않지만 그래도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 위험스러운 도둑들로 묘사한다.

때로는 독적떼와 살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물론 우리 본문에 나오는 바와 같이, 목자들을 '도적'과 연결을 짓기에는 일관성이 있는 증거들은 충분하지 않다.

일부 팔레스타인 랍비들은 그들을 이방인들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t. B. Mesia 2:33).

다른 사람들은 목자를 세리들처럼 불명예스러운 직업으로 취급한다.

 

현장 파수꾼들과 마찬가지로, 목자들은 지역 공동체의 공동 기도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동참할 수 없었다.

목자들이 '사회적 왕따' (social outcasts)고 보기에는 다소 의심스럽다고 말한 샌더스의 견해는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목자들에 의존하였다는 그의 주장은 확실히 맞지만, 목자들 낮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증거를 너무 쉽게 그는 무시한다.

 

로마 제국의 농촌 전체를 통틀어서 볼 때에, 농민들은 가난했고, 농민들 사이에서는 오직 한 가지 계급적 구분만이 있었을 뿐이다.?

"오직 염소지기들과 양치기들만이 따로 구별된 하층 계층을 구성한다."

(Marcus Aurelius Epistula ad Frontonem 35; Lucian Ignorant Book Collector 3.

Epictetus Diatr. 2.9.3는 양을 음욕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The Good Shepherd, c. 300?350, at the Catacombs of Domitilla, Rome

 

목자들을 가장 경멸하는 이들은 엘리트들과 그들의 도시 청중들이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누려야할 적절한 사회적 지위가 좀 더 높아야 한다고 여겼음에ㅔ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유대 문학에서 목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일반적으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을 대표하는 랍비에게서 비롯되었다.

 

로마인들이 경멸히 여기는 직업군의 목록들 중에 대부분이 엘리트로부터 유래한다.

물론 엘리트들의 의견이 보통 대중들에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증거는 목자를 얕잡아 본 사람들이 특히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할 수 있다.

어떻게 여기든지 상관없이, 이러한 엘리트의 견해를 우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예수의 반대자들도 가지고 있었다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양의 지배자로서 목자들은 은유적인 맥락에서 통치자들에게 딱 알맞는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제공했다.

이것은 헬라와 유대의 맥락에서 모두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일찍이 호머 (Homer)의 시대에는, '백성의 목자'는 '백성의 통치자'와 동등하게 간주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스와 트로이 지도자들과 그들의 동맹들, 특히 그리스 군대의 지도자인 아가멤논에게는 친숙한 꼬리표가 되었다.

이후 작가들은 이 이미지를 계속 철저하게 활용했다.

맹인은 자신을 이끌어 줄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마 15:14; 23:16; 행 13:11; 롬 2:19).

이 점은 우리 본문의 맥락에서 자신의 백성을 이끄는 목자의 중요성을 강화시켜 준다 (9:39?41).

 

 

Allegory of Christ as the Good Shepherd, 3rd century

 

평판이 자자한 양의 성격이 이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강화시켜 준다.

비록 1세기까지 대부분의 동물 우화는 해석을 포함되어 있지만, 동물 우화는 처음부터 종종 설명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뻔했다.

이들 우화들은 동물의 특징에 대해 많이 알려진 문화적 환경을 전제로 쓰여졌다.

아일리언 (Aelian)은 동물에 관한 자신의 글 (On Animals, 7.27)에서, 양을 동물 중에서 가장 순종적이라고 여긴다.

양은 다른 이의 통치에 순종적이기에, 목자와 개와 심지어 염소들을 따른다.

양들은 또한 양무리 근처에 항상 남아있다.

양은 온화하다고 여겨졌다 ('placidum', Terrence Adelphi 534?535).

 

 

Inscription dedicated by parents of deceased 7 year old girl, Apuleia Crysopolis;

Good Shepherd and bush (Catacomb of St. Callisto, Rome).

 

양과 목자의 이미지의 성경적 자료

목자에 대한 복종한다는 성품은 양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으로 보는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제공했다.

초기 유대교에서도 이 이미지는 지속되었다.

"이스라엘이 양떼로 의도되었다는 것은 '집'이나 '포도원'과 같은 비슷한 언어보다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성막과 '양무리'를 비교하거나, 유대인 신비주의의 '일곱번째 현관'과 비교하기도 한다.

α?λ?라는 용어의 의미 범위는 단순히 너무 광범위하여 그렇게 함축된 의미로 볼 필요성이 없다.

제4 복음에서 대제사장 뜰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는데 (18:15), 문지기에게 알려야 출입이 가능한 출입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은 단지 요한의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병행점이 아니다.

오히려 침입자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작은 규모의 양떼에게는 문지기가 필요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문지기는 아마도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다고 본다.

 

 

Good Shepherd - Daniel Bonnell

 

초기 유대교 또한 종종 모세를 목자로 지속적으로 묘사하였다.

예를 들어, 제 4복음서가 쓰여지고 몇 세기가 지난 후, 랍비는 모세가 늑대 바로로부터 어린 양 이스라엘을 구해야 했었다는 비유를 들려주었다 (Exod. Rab. 5:20).

다윗과 예언자, 에스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임명한 지도자 (때로는 중요한 스승들도 포함)와 메시아도 목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초기 유대교의 주임 목자, 특히 구약의 주임 목자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제1차 출애굽 때와 같이, 백성들을 위하여 목자처럼 행하셨다.

어린 양을 짊어지고 (시 28:9, 사 40:11, 46:3?4), 양떼를 인도하신다.

 

 

The Exodus hero Moses.

The Biblical Moses, portrayed here as a shepherd in a print by contemporary Israeli artist Mordechai Beck,

protectively clasps a sheep in his arms.

Photo: Mordechai Beck.

 

이 단락의 언어 중 일부는 모세나 다윗에게서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자신의 양 떼를 목양하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그림은 에스겔 34장 (34:11?12)와 특히 요한의 전체 기독론 (1:1, 18; 20:28; 시95:7와 10:27?30의 관계 참조)에 우선적으로 잘 들어 맞는다.

 

이러한 병행점들은 예수의 신원을 대적자들에게 드러낼 만큼 그리 명백하지 않다.

하지만 전체 복음서의 맥락에서 볼 때, 익히 잘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예수의 신원을 확실하게 재확증하여 준다.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목자의 이미지로 사요하여왔다 (벧전 5.4).

때때로 모세 (히 13:20)와 어쩌면 하나님 (사 53:6?7와 벧전 2.25)도 목자의 이미지로 이해하여왔다.

어떤 의미에서든 예수가 그 이미지를 자신에게 원래 적용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막 6:34; 14:27; cf. 마25:32; 눅 15:4).

 

도둑과 강도 (10:1, 5, 8, 10)

도둑과 강도들은 흔했고 재산 소유주들에게 매우 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대상들이었다.

유대 법은 기술적으로 도둑과 도둑을 구별한다.

비록 정의는 다양했지만, 가장 흔히 전자가 집에 침입했고, 후자가 길가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이들 개념은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들은 동일한 의미 영역의 일부로 연결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양떼를 노략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10:10은 두 명칭은 모두 "도둑"을 염두에 두고 있다).

10:12의 늑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을 찾는 자들을 표현하는 추가 이미지로서 동일한 기능을 한다.

 

이집트 마을에서는 도둑들이 너무 흔했다.

따라서 남자들은 밤에 타작 마당을 지키기 위해 수에 따라서 순번제로 무료로 대표들을 뽑아야만 했을 정도이다.

강도들은 이집트에서 마찬가지로 심각한 위험이 되어서, 강도에게 가혹한 위협을 할 정도였다.

파피루스는 통행료로 종종 사막 경찰들을 지원했다고 증언한다.

사막 경찰은 강도 집단으로부터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을 보호하는 일을 맡았다.

고대 지중해 법은 일반적으로 도둑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요구했다.

실제로 마을 사람이 도둑을 잡으면 마을 사람들을 불러 그를 때리도록 도움을 요쳥했다.

 

 

 

다른 종류의 절도가 존재했다.

앙심을 품은 적이 포도원을 난도질하기 위해 포도원 경내러 몰래 침입하였다.

질투심 많은 지인이 동물을 훔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초기 로마법에서는 빌린 동물을 빌린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절도 행위로 취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유대 교사들은 또한 이웃을 속이거나, 속임수를 쓰거나, 거스름 돈을 덜 주는 사람들, 즉 우리가 "지능 범죄" (white- collar crime)이라고 부르는 짓을 하는 자들을 도둑으로 여겼다.

그러한 절도에는 가끔 비윤리적으로 양의 탈취하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다 친숙한 이미지는 길거리 도적단 (강도들)과 침입할지도 모르는 자들 (도둑들)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모습이 아마도 이 본문에서 일차적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강도들은 여행자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때로는 희생자들을 살해했으며,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미움을 샀다.

강도들이 시골지역을 통과하면서 불만을 가진 지원자들을 모았다.

 

많은 수의 지원자들을 얻을 수 있었고, 이들에 맞서기 위해 작은 군대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지중해 자료들은 적어도 호머처럼 일찍부터 목자들에게 가해졌던 강도들의 위험을 거론한다.

목자들은 종종 기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가축 도둑들에게 강도를 당하거나 습격을 당했다.

그 때문에 많은 지중해 목자들은 자신들의 동료들과 더불어 강도에 맞써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사나운 공격견을 데리고 있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의 개들을 사용하는 경우는 아마도 더 드물었다 (욥 31.1과 같은 경우는 비교적 적었다).

하지만, 다른 지중해 자료들은 일반적으로 목양을 할 때에 개들을 활용했다고 묘사한다.

개들의 주된 역할은 양을 지키는 것이었다.

목자들은 동료가 유용한 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때때로 자신들의 양떼를 그의 근처에 두고 싶어했다.

 

 

 

수사학을 구사하는 이들은 "도둑"와 "강도"이라는 호칭을 모욕을 주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맡은 지방을 착취하는 관리들에게 '강도들'나 '약탈자'라는 딱지를 비유적으로 적용하기도 했다

(예수가 우리 본문에서 엘리트에게 이들 호칭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게 비교할 수 있다).

그 이미지는 거의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 유대인 현자는 거짓말쟁이들처럼 도둑들도 파멸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시락 20:25).

따라서 탄나임 시대의 비유에서 도둑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이방 나라들로 가장 많이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 이미지를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적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예수가 당시 엘리트들에게 동정심을 보였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요한의 "도둑들과 강도들"을 예수에 '엎서서' 등장하였던 그릇된 메시아들로 여기기도 한다.

이들은 흔히 혁명 지도자들이다.

요셉푸스가 λ?στ?? (강도)를 우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치점이 있다 (예. Josephus War 4.138).

 

그렇지만 이러한 용도로는 요한 의 특정 문맥과 잘 맞지 않는다.

요한은 이 용어로 이스라엘의 복종하지 않는 지도자, 특히 지금 예수가 책망하고 있는 바리새파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지도자는 예수보다 문자 그대로 λ?στ??를 선호할 것이다 (118.40).

멸망의 아들 유다는 '도둑'이다 (12.6).

 

 

Tacuina sanitatis (XIV century)

-alimenti, latte, Taccuino Sanitatis, Casanatense 4182.

양과 목자의 관계 (10:3?6)

이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과 예수의 신원뿐 아니라 인식론을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헬라오 동사 ο?δα가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9:12, 20?21, 24?25, 29?31).

치유된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바리새인이 모른다 (9:25, 31).

그래서 치유된 사람은 예수의 양을 위한 전형 (paradigm)이 된다.

양은 예수를 "안다": 예수와의 관계 속에 있다.

요한이 ο?δα를 10:4?5에 채택하고, 그 동의어 γιν?σκω를 10:6, 14?15, 27에 활용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목자들은 보통 자신의 양과 매우 친숙해진다.

보통 양떼의 크기가 100마리 정도라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10:3)은 무엇보다도 친근함을 나타내며, 흔히 애정의 정도를 나타낸다.

목가(牧歌)의 창시자인 다프니스 (Daphnis)와 같은 고대 염소지기는 자신의 동물들을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관습에 대한 보다 최근의 보고가 있다.

 

양치기들은 "모양, 색깔, 특수성에 따라 이름을 지정했다.

어린 양이나 새끼에게 주어진 이름은 여전히 다 자란 후에도 여전히 동물들이 새기고 있다."

그러한 이름들은 동물을 부르는 방법을 제공했고 목동의 소유권을 가리켰다.

그래서 한 가정은 암염소를 "Χι?νη" (키오네)라고 부르는데, 뜻은 "눈처럼 희다", 즉 흰둥이이다.

동물을 더 빨리 소환할 수 있도록 짧은 서술형 이름이 선호되었다.

양치기들은 아마도 야생동물의 공격 후에 확인하게 위해 자신의 양을 전반적으로 세어 보았을 것이다.

 

 

양치기 개들은 주인의 부름에 귀를 기울였다.

양과 염소을 또한 "음성을 듣고 따르고 (φων? πε?θεσθαι)", 목자의 피리에 반응하도록 가르쳤다.

순종적인 동물은 목자가 몸으로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이 목소리와 피리로 이끌 수 있다.

특히 부지런한 목동은 동물들이 피리로 다양한 지시에 반응하도록 훈련시킬 수도 있다.

일어나거나, 풀을 뜯기 시작하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만일 늑대가 접근하고 있다면, 숲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이 지역에 요즈음의 목동은 "양떼 앞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약 2초마다 10초씩 피리소리를 내어 계곡을 통과하도록 인도할 수 있다."

 

매일 아침 양치기가 양을 목장으로 인도할 준비를 한다.'

그때 '작은 피리로 특별한 호출 소리나 특별한 선율로 연주한다.'

필요하다면 뜰 안으로 들어가 부르기를 반복한다.

일꾼이 그 동물들을 무리로 불러들인다.

물론 몇몇 염소들은 완강히 오기를 거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양들은 협조를 하는 것이 일종의 규칙이었다.

 

 

 

서로 다른 목자들이 하룻밤 동안 동일한 양무리를 함께 돌보기도 하지만, 아침이나 다른 시간에 양들을 분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양은 자신의 목자의 목소리와 다른 목자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피리소리의 음정에 따라 각기 적합한 짐승이 다르다.

소떼에게는 강함 음정, 염소에게는 날카로운 음정, 양에게는 온유한 음정이 더 적합하다.

피리소리로 다른 사람의 양이나 염소를 남겨두고, 한 사람의 양이나 염소를 불러낼 수 있다.

우리가 다르는 본문에서와 같이, 동방의 양치기들은 양보다 앞서서 이끄는 경우가 흔하다 (10:4).

 

양치기들은 고대 이스라엘 (시 23:1; 겔 34:2?6, 11?16)과 그 이후 시대 (예: CD 13.9; 막 6:34)에서, 양들에게 친밀한 관심을 배푸는 이미지를 제공했다.

'자신의' 양 (10:3?4, 12)이라고 부르는 것은 양(외부인이 잘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을 알아본 목자와 자신의 목자를 인지하고 있는 양의 이미지를 채택한다.

그리고 소속감과 친밀감이 드는 생각을 전달한다 (cf. 1:11; 13:1).

이름으로 양을 안다는 것(10:3)은 이러한 친밀감에 적합한 인물이 있음을 제시한다 (예: 요삼 15).

이 점은 요 20:16에서 예수가 마리아를 부르는 장면이나 21.7에서 사랑하는 제자가 음성을 듣고 '주'라고 베드로에게 말하는 장면을 통해 이야기 전개의 차원에서 예증이 된다.

 

 

 

이름으로 안다는 이미지는 양의 비유적 이미지 이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자신이 부르는 시민들이나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에 더 쉽게 호의를 얻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름으로 아셨다 (출 33:17).

 

따라서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냈다 (출 33:18?19, 요 1:14?18).

이러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과 가졌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은 전지전능함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사 40:26;45:3?4), 또한 자신의 백성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를 시사할 수 있다 (사 43:1; 62:2; cf. 65:15)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칠십인경 (LXX)에서 이들 본문들은 καλ?ω와 ?νομα를 결합하여 채택하고 있다.

반면에 요한은 φων?ω를 사용한다 (10:3).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한 설명으로는 요한이 이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예: 1:48, 11:28, 12:17; 그러나 예. 9:18, 24; 18:33).

요한은 καλ?ω를 두 번만 사용하지만, φων?ω는 열두 번, φων?는 15번 사용한다.

 

 

 

이와 동시에 요한은 자신에 들려주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 용어들을 채택하고 있다. 이들 용어들은 종종 율법이나 예언자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언약 언어와 동등하다.

이스라엘은 일부 초기 유대인 통역자들이 인정한 대로 (1QM 10.10?11),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특별하게 들었다 (신 4:33, 36, 5:22?26, 18:16).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율법이나 예언자를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 "귀를 기울이고" 또는 "청종"하게 되었다 (출 15:26; 19:5)

유대 전승은 천상의 '소리'  소리의 딸)과 예언적 영감이라는 관점을 제외하고는 신적 목소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오직 매우 의로운 자에게만 말씀하시는 모습을 견지하고 있다.

이 원리를 설명하면서, 우리는 어떤 랍비들조차도 오직 모세만이 목소리가 가진 능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Sipra VDDen. pq. 2.2.1.9; 2.2.2.1. 하나님 음성의 공대함에 관하여 예를 들어 참조. 시 29; Exod.Rab. 5:9; 29:9).

 

 

요점은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이 예수를 목자로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에게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당에서 치유된 사람을 출회한 바로 그 권위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제외된 것을 증명한다.

요한은 종종 예수나 아버지에게 "듣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하나님을 알고 이정하는 것으로 말한다 (5:37).

예수의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말한다 (10:3, 16, 27, 18:37, cf 3:29).

하나님의 목소리로 부활하는 존재에 대하여 말한다 (5:25, 28).

성령의 신비한 목소리도 말한다 (3:8)

 

 

 

요한복음과 계시록이 만일 같은 공동체에서 비롯되었다면, 요한의 청중 중 일부는 물리적 환상이나 청취로 그 목소리를 경험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예: 1:10, 12, 3:20, 4:1).

그렇지만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성령은 항상 그렇게 극적인 방식으로 예수를 모든 신자들에게 계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cf. 16:13?15).

제4복음에서는 그 말씀, 구전으로 전하는 성육신한 말씀의 메시지 (17:20), 그 말씀으로 예수를 밝히는 성령(16:7?15)을 통해 공동체가 계속하여 예수에게 듣고 있다.

예수의 목소리를 안다는 것 (10:4)은 예수를 안다는 것(10:14)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와 아버지와의 관계(10:15; cf. 10:30) 못지않게 언약적인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Sadao Watanabe (Japanese, 1913?1996), Pentecost, 1965.

Hand-colored kappazuri-dyed stencil print on washi paper.

 

5.20에서 현재 시제는 예수가 계속되는 계시로 아버지께 순종하셨음을 시사한다.

10.14-15에는 요한이 신자들에게 바라는 이상적인 관계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관계임을 시사한다.

성령으로 이러한 삶을 신자들이 경험하는 것(16:13?15)은 그들을 대적자들과 구별되는 표시이다.

또한 성경 예언자들과 연결시켜 준기에, 신자들의 논쟁을 든든히 뒤받침하여 준다.?

주의 말씀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5:38; 8:37), 의로운 공동체(15:7; 1 요한 2:14, 24)에 새 언약의 표시 (렘 31.33)로 거주한다.

 

예수에게 '경청'하는 것이 예수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들음'을 말할 때, 빈번하게 함축하는 의미).

그와 같이 예수를 아는 것(10:14)은 그를 '따라가는 것'(10:27), 즉 복종 (요일 2:3)을 의미한다.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따르는 것 (6:2)은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8:21, 24).

따른다는 것은 제자도를 의미한다 (1:37?38, 40, 43).

새로운 종류의 생명을 함축한다 (8:12).

심지어 그의 양떼 중에 하나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13.36) 따름을 의미한다 (21:19).

어린 양이 인도하고 그의 백성이 그 뒤를 따르는 이미지는 요한계시록 7.17과 14.4에도 나타난다.

 

 

 

양들은 목자를 인식하고 따르되 낯선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10:5; 이런 맥락에서 도둑[10:1]은 양의 정상적인 행동에 적합하다.

개와 같은 가축들은 낯선 사람보다 지인에게 더 수용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Plato Rep. 2.376A).

(그렇지만 그리스인들은 동물지기가 피리를 배워서 다른 동물들을 유인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케네스 베일리는 한 가족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새 양을 살 때, 그 양은 새 가족의 부름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새 목자가 부르거나 다른 양들이 모인 곳으로 떠날 때, 동요된 채로 남아있다.

훈련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배고픈 상태로 남아있다.

양은 생소한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유대지도자들은 오해(10:6, ο?κ ?γνωσαν, 그들은 그의 말을 "알지" 못했다)한다.

이는 그들이 그의 메시지 (8:43)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단순히 그들은 그의 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10:3?4).

 

 

담화 분석

선한 목자의 담화는 비유라기보다는 상징적 담화이다.

상징적 담화에서 주어진 은유는 보다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아니다.

알레고리는 일반적인 진리를 전달할 목적으로 추상적인 교훈을 전달하는 문학적 기법이다.

상징적 담화는 일상생활의 특징에서 출발하여 주도적인 은유의 여러 측면에 영적 진리를 부여한다.

하지만 알레고리, 비유, 상징적 담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리수이다.

요한은 이 담화를 수사법이라고 부른다 (παροιμ?α. 참고. 10.6; 16.25, 29 - 수수께끼, 알레고리. 잠언, 은유적 담화, 비유 등)

이 용어는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포함하는 포괄적 용어이다.

 

 

일반적인 진술 (1-5절): 대전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선한 목자와 삯꾼의 대조: 7-13절

전체 담화에서 예수와 유대 지도자 사이의 대조를 논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예수 자신

유대 지도자

문으로 들어온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듣고 따른다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한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나는 선한 목자라

도둑과 강도

다른데로 넘어간다

음성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않고 도망간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한다.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누구든지 나로 말마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나는 양의 문이라

삯꾼 목자

양을 돌보지 않는다.

 

왜 예수가 선한 목자인가? (14-18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π?ρ)(1)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2)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1) 전치사 ?π?ρ은 대속적 죽음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이다 (11, 15절, 15.13).

2) '한 무리의 양, 한 목자'는 에스겔 (34.23; 37.24)과 이사야 (56.8)의 예언을 인유하여, 예수의 비전을 나타낸다.

 

성경에서 양의 일반적인 특성은 고집이 세고 (53.6), 무기력 (마 9.36)하다.

하지만 요한은 양이 강하고 참 목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분별력을 가진 강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된다.

 

 

10장에서 유대인들의 반응

(1)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6절)

(2)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난다 (19절)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 그의 말을 듣느냐?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3)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4) 돌을 들어 치려한다 (31절)

(5) 신성모독우로 인해 돌로 치려한다 (33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기 때문이다.

(6)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니라 (39절)

 

왜 이렇게 유대 지도자들은 완고하고 강퍅한가?

수전절 맥락에서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불신앙의 증거를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양 무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6

예수의 이 주장은 터무니 없고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요한은 유대 지도자들의 불신앙의 증거로 마치 표적들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

성전예서의 상징적인 예언 행위

왕의 신하와 중풍병자의 치유

오병이어 사건

선천적 맹인의 치유

 

이와같이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특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분명한 많은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분명히 말하도록 요구한다 (24절).

마치 공안검사들 같다.

 

이러한 증거들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다고 한들, 과연 믿을까?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눅 16.30-31

유대인의 전반적인 불산앙에 대한 결론은 12장 37-43절에 요한은 내리게 된다.

결국 '듣지 않음'이다. 유대 지도자들을 따르는 자들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 백성의 미래에 참여할 수 없다.

 

 


신성모독 (
βλασφημ?α. 33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한다.

그 근거는 쉐마 (신 6.4-5)에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매일 회당에서 암송되고, 하루에 세번씩 의무적으로 암송하게 되어 있다.

유대인에게는 뼛 속까지 새겨진 신앙고백이다.

쉐마를 통해 유일신론은 유대인의 신앙에서 가장 확고하고 강력한 교리이다.

유일신론 사상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비싼 대가를 치루고 배운 교훈이다.

마키비 반란을 통해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서 있었던 성전을 정결하게 한 전통이 아직도 유대인들의 귀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의도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신앙적 공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요한 복음은 계속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5.1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 8.58-59

 

10장에서는 최고조에 달하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다.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 10.29-31, 33

이에 대한 예수의 논증은 전형적인 미드라쉬 기법을 보여준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요 10.34-38

여기서 예수는 시편 82.6을 인용한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과 통치자들은 으로 '신' 불린다.

사실상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으로 부른다.

이들의 임무가 신적으로 위임된 것임을 나타낸다.

 

 

 

이 논증은 랍비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논증방식을 보여준다.

"보다 작은 것에서 보다 큰 것으로"

(Argumentum a fortiori: from the lesser to the greater).

성경에서 한 사람이라도 "신"으로 불린다면, 하나님이 보낸 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더욱 더 적절하지 아니한가?

 

요한은 노련한 이야기꾼이다.

이 말로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에 대응하여, 예수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버지와 예수는 하나이다.

요한의 주요 강조점은 존재론적 연합보다는 기능론적 연합에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쉐마의 신앙고백을 거스르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유일무이한 독특성을 어기므로 신성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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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