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인잔치. 파올로 베로네세(1528-1588) 작품. 한 가운데에 예수께서 마치 신랑처럼 앉아 있다.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첫 번째 표적과 마지막 표적
The first sign and the last sign in the Gospel of John
김 선 배
요한복음서 2장에 등장하는 포도주 사건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그녀를 γ?νναι(“여자여”)라고 부른 호칭으로 인해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표적”이라는 독특한 표현은 다른 복음서들이 사용한 “기적” 또는 “이적”이라는 표현들과의 차별성을 내포하고, 동시에 “첫 번째 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다가오는 일련의 표적들과 마지막 표적을 암시하면서 요한복음서의 특징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포도주 사건에 뒤이어 성전 정화 사건과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전개된다.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의 역사성을 전제로 하면서 주어진 현재의 본문에 활력을 불어넣어 그 전체적인 구성과 배열의 틀이 주는 의미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비록 요한복음서가 표면적으로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구성의 복잡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 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지향하는 말씀들과 비유적이라기 보다는 우화적인 표현들의 사용은 오히려 복잡하고 정교한 요한복음서의 구성을 배제할 수 없도록 만든다.3)
1. 포도주
요한복음서 2장에 등장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는, 요한복음서의 특징적인 표적과 더불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하는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사흘째 되는 날에”(2:1) 발생한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으며, 이 사건 속에 포함된 “여자여!,” “포도주,” “첫 번째 표적”(2:11) 이라는 표현 등은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요한복음서의 독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와 예수님 어머니와의 관계는 본문을 통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고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고(2:3),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에 대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지시하고, 이어서 예수님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행한다.
구약에서 포도주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와 구원의 시대를 상징한다(아모스 9:13-14; 호세아 14:7; 요엘 4:18; 이사야 29:17; 예레미아 31:12).6)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포도주 사건을 시작으로 전개되는 표적들은 마지막 표적인 부활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요한복음서는 비록 현재적이며(심판: 3:18; 9:39; 영생 3:36; 5:24; 부활 5:21, 24, 26; 이 세상 통치자의 쫓겨남 12:31) 동시에 미래적인 종말론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심판 12:48; 영생 12:25; 부활 6:39-40, 54; 파루시아 14:3, 18, 28; 메시아의 도래를 알려주는 환난 15장 16장), 그러나 부활 사건을 통하여 πααρκλητος 의 오심을 현재화시킴으로 미래적인 종말론을 현재 속에 흡수시킨다.7) 첫 번째 표적인 포도주 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의 현존을 말하고 있으며, 이 표적 후에 저자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2:11).
포도주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주어진 본문만을 가지고 볼 때에, 예수님은 이 잔치에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이를 그의 십자가의 죽음 때까지 연기시킨 것으로 보인다...가나의 포도주 사건은 당시의 관습과 상식을 뒤집었으며[2:10],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후에 발생할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 기적은 다가오는 표적들에 대한 사전 예고이며, [돌]무덤에 가득차게 될 새로운 포도주에 대해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결국 십자가의 죽음 현장에서 나타난 포도주는 이전의 표적들을 마무르며 마지막 가장 큰 표적인 새로운 포도주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19:28).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예수님에게 제공하며, 예수님은 그 신포도주를 드신 후에 “그 영”을 건네주신다(19:29-30). 비록 이 신포도주는 식초에 가깝던 당시의 음료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마태복음서의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ξο?)라는 분명한 기록은 다른 세 복음서의 신포도주 라는 의미를 보강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신포도주는 단순히 식초를 탄 물이 아니라 질이 다소 떨어지는 포도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2:10) 것과 같이 사람들은 갈증난 예수님에게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제공하여 그 갈증을 채우도록 한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후 신포도주를 드신 후에 운명하신 것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마시기를 거절했으며(27:34) 마가복음서와 누가복음서 역시 예수님께서 이 신포도주를 마신 것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정체와 관련된 “영광”은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포도주 사건을 통해서 처음으로 드러나고, 십자가 사건의 포도주와 더불어 완성되며,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입증된다(cf. 20:22, 27). 그래서 요한은,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증언하는 것이다(1;14).
2. 여자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와 함께 “여자여”라는 호칭이 등장하고, 십자가 위에서 또다시 포도주와 함께 이 호칭이 등장하며 가나에서와 달리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신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가? 단지 요한복음서 저자만이 우리에게 이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본문은, 이러한 호칭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여자여”라는 호칭이 지금의 우리 사회와는 달리 예수님 당시에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모자 간에는 어색한 표현임에는 틀림이 없다.12) 예수님께서 비록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십자가 위에서 한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단지 “여자여”라고 부를 뿐이다(2:4; 19:26). 또한 요한복음서 저자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 어머니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단지 “여자여”라는 호칭과 관련하여 기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cf.마태복음 1:16, 18, 20: 2:1113:55; 마가복음 6:3; 누가복음 1:27, 30, 34, 38, 39, 41, 46, 56; 2:5, 16, 19, 34).
브라운은, 이러한 표현을 예수님 어머니의 역할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그가 사랑하던 한 제자에게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 그리고 그 어머니에게는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19:26)라고 그 제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주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과의 “어머니-아들”이라는 구도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돌보는 여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여자여”라는 호칭의 어색함을 예수님의 어머니의 역할을 확대시켜 극복하려는 시도에 기인한 것이며, 동시에 그녀의 역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카톨릭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여자여”라는 호칭이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적용되는 구절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20:13, 15).
“여자여”라는 호칭이,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근거로 여겨진다면, 막달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어머니와 같은 임무 부여에서 제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관련하여, 빈 무덤 앞에서 천사는 막달라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며(20:13), 예수님 또한 그녀를 “여자여”라고 부른다(20:15).
예수님은 자신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을 “여자”라는 어휘를 통하여 균형을 잡아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 어머니를 부르실 때에 “어머니”칭호를 생략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요한복음서에서 독특한 기능을 하는 “여자”로서의 막달라 마리아의 위상을 높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여자여”라는 호칭 대신에 “마리아”라고 부를 때에, 두 번째 여자로서의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위치는 니고데모와 같이 되었으며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과 같이 “라부니”라고 불렀던 것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출생과 관련한(1:14) “여자”는 첫 번째 표적인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더불어 등장하며, 두 번째 출생과 관련한 “여자”는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인 부활 사건에 등장하여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반복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그의 어머니를 또다시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녀와 그를 따르던 한 제자와의 관계를 “어머니-아들”의 관계로 새롭게 설정해 준다. 물론 이 관계는 누구에게 초점이 놓이는가에 따라서 어머니를 제자에게 위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를 그의 어머니에게 위탁하는 것인지에 대한 차이를 드러내겠지만 그러나 “그 때로부터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19:27)는 말씀에 의해 전자의 위탁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차이에 대한 구별보다는 오히려 뒤이어 전개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여자”라는 호칭과 관련지어 이 문제를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
3.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와의 대화는 “여자여”라는 호칭과 예수님의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4)라는 말씀으로 인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더욱이 뒤이어 발생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과는 다르게 보여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 있도록 빈틈없이 훌륭한 조연 역할을 한다.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님에게 알려주며(2:3),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행동을 준비하는 민첩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에 대한 무관심과 아직도 특별한 일을 할 순간은 아니라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의 경솔한 요구를 책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의 일관된 입장과는 달리 뒤이은 포도주 사건에 의해 때로는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은 서술문과 질문 형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술문 형식은 현재의 본문과 같은 번역이며, 질문 형식은, 긍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이제 나의 때가 오지 않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질문 형식 다음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예, 그렇습니다. 지금 당신의 때가 왔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곧이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 가운데서 “때”는 어떤 종류의 일이 발생하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이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영화롭게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는 사건과는 관계가 없을까? 요한복음서의 드러난 본문만을 가지고 볼 때,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마셨다는 내용이 빠져 있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서에서는 최후의 만찬 사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는 기록은 단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현장에서만 등장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마 26:29; 막14:25; 눅22:18)라는 말씀과 달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그의 “때”는 이미 시작되었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된다. 즉, 그의 “들리움”(3:14; 8:28; 12:32, 34)은 십자가의 죽음과 영화롭게 됨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데, 이 “들리움”이 예수님의 생애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되듯이, 그의 “때” 역시 이미 시작되었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포도주를 마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씀을 서술문의 형식으로 해석하든지 아니면 질문 형식으로 해석하든지 간에 본질적으로는 의미상에 차이를 가져온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모호한 이중적인 표현 방법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그의 “때”는 와 있고 또 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있어서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씀으로 인해 서술문의 형식을 주장하는 입장이 선호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책망으로 간주되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성급하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직역하면 “여자여, 당신과 내게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이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가 있거나 또는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의미 있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여자”로서 해야 할 일정 부분의 역할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포도주 사건과 관련하여 그의 “때”가 언급되고, 동시에 십자가에서 포도주를 드시면서 그의 때는 완성되는 것이다.
4. “사흘째 되는 날”
요한은, 가나의 포도주 사건이 “사흘째 되는 날” 발생했다고 소개하고 있다(2:1). 요한복음서에서, 이 “사흘째 되는 날”이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19)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침례 요한과 더불어 활동을 시작하며, 처음에는 “태초에”(1:1), “이튿날”(1:29), “다음날”(1:35, 43)이라는 표현 등이 등장하다가, 가나의 포도주 사건을 언급할 때 “사흘째 되는 날” 이라는 순서적인 언급을 지속하다가(2:1), “첫 번째 표적”이라고 구체적인 표적의 횟수를 드러내 주는 표현을 사용한다(2:11). 단순히 사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튿날”(1:29), “다음날”(1:35, 43) 등등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특별한 기준점이 없는 상황 속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요한이 의도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가나의 포도주 사건 뒤에 이어지는 성전 정화 사건에서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선언하고 있다(2:19). 요한복음서에서 이 성전 정화 사건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사흘째 되는 날”과 “첫 번째 표적” 그리고 마지막 표적인 죽은지 사흘만의 부활에 대한 예고가 등장하며, 첫 번째 표적이 드러날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여자”로서 무대를 장식하고, 마지막 표적이 드러날 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 앞에서 그 표적을 증거 한다.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2:11). 마지막 표적인 그의 부활 후에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2:22). 그래서 요한은 “....다른 많은 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기록한 것이다(20:30-31). 첫 번째 표적은 마지막 표적을 지향하면서 그 성격을 예고한다. 즉, 요한은 첫 번째 표적을 소개하면서 그 표적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미리 표명하고 전체적인 요한복음서의 틀을 형성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1:14)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2:9),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또 다른 본질의 변화를 수반하는 새로운 출생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미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다(3:3, 5, 7). 1장 14절에서 사용된는, “되었다”가 아니라 오닐(O'Neil)의 주장과 같이 “태어났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즉, “로고스는 로 변화하였거나 또는 변장한 것이 아니라 σ?ρξ로 태어났다는 것이다.”20) 영을 건네고(19:30), 피와 물을 쏟아 낸 몸이(19:34) 다시 일어서는 것은(2:22), “사흘째 되는 날”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이(태어나듯이) “사흘째 되는 날” 예수님의 새로운 출생(γενν?ω)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5. “첫 번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서....”
첫 번째 표적은 포도주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며, 이 사건의 무대를 준비하는 주인공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여자”(구나이)가 등장한다. 요한은 계속해서 두 번째 표적을 언급하지만(4:54) 이 두 번째 표적 이후에는 단지 표적들만 계속해서 발생할 뿐이지 순서적인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첫 번째 표적을 통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신다(19:28-30; cf. 7:30; 8:20; 12:23, 27; 13:1; 17:1). 즉, 첫 번째 표적이 십자가 사건까지의 일들을 수렴하면서 그 절정을 예시하는 것이다. 슈나켄버그는, 첫 번째 표적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절정이며, 예수님께서 표적들을 통해서 자기 계시를 하는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cf. 1:50, 5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잔치를 맡은 이가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라고 말한다. 실제로 표적들은 점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더욱 큰 표적으로 바뀌며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가장 크고 좋은 표적이 뒤에 올 것임을 예고하는 고백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2:13-22)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다시 살아나심을 “표적”으로 제시한다(2:21-22). 요한복음서의 저자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소개하면서, 이 사건을 하나의 표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 뒤에,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0-31)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가나의 혼인 잔치와 같이 이전의 표적들을 마무르면서 또 하나의 가장 큰 표적을 준비하는 무대를 제공한다. 첫 번째 표적 직전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메시아이심을 안드레를 통해서 고백하게 하며(1:41), 나다나엘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언하고, 이어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면서,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51)라고 선언한다. 이 천사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등장하는 데,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20:12).
비록 다른 복음서에는 성전 정화 사건(2:13-32)을 예수님 생애의 후반부에 위치시키고 있지만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생애 초반부에 소개하면서 그의 부활 사건을 예고하고 있다. 이 성전 정화 사건에 뒤이어 바로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등장하는 데, 이 대화에서도 주제는 다시 태어나는 문제이다. 즉, 요한복음서는 처음부터 그의 마지막 표적인 부활을 예고하며 동시에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의 모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될 과정으로 암시하는 것이다(cf. 2:22). 첫 번째 표적의 결과에 대한 반응은 다른 표적들의 반응들과는 다르며, 여기에서는 잔치 참석자들이나 대중들의 반응이 등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표적의 결과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냈으며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마지막 표적인 부활 사건에 대한 갈무리도, 예수님을 “믿는” 반응을 요구한다. 결국 첫 번째 표적인 포도주 사건은 가장 좋은 포도주인 마지막 표적을 예고하는 것이다.
6. “목마르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19:28).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갈증을 토로하시는데, 이는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하는 의도적인 갈증이며 이 갈증에 기초하여 결국 포도주를 마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후 그 영을 건네주신다(19:30).24) 요한복음서의 본문만을 가지고 볼 때, 비록 가나에서 예수님께서 물울 포도주로 만드셨지만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포도주를 마신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의 “때”가 이루어졌음을 드러내 주며, 그의 죽음의 시간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cf. 마 26:29; 막14:25; 눅22:18).
가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예수님에게 알려 주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이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에게 무엇인지 물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어떤 의미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예수님에게 말했을까? 단순히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려주는데 있었을까? 아니면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된 사실에 대한 고지일 수는 없을까? 요한복음서 저자는, 요한복음서라는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이를 예수님의 “때”와 관련시켜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는 순간이다. “나사렛 예수를 낳았던 여자는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며, 빈 무덤 앞에서 울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개 될 두 번째 여자가, 십자가 아래에서 첫 번째 여자와 임무를 교대하면서 조용히 무대에서 등장하는 것이다(19:25-27).....예수님은 자신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을 ‘여자’라는 어휘를 통하여 균형을 잡아 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드시는 예비적인 행위로서 그의 갈증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의도된 과정이라고 설명한다(19:28-30). 즉,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르며 한 제자에게 위탁했을 때, 즉 “이 일 후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마지막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행하신 마지막 공적 활동은 포도주를 마시는 사건이다. 그는 포도주 사건과 더불어 공생애를 시작하고, 포도주 사건과 더불어 공생애를 마무리하신다.
7.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병사 하나가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이에 대해 요한은 새삼스럽게, 목격한 대로 증언했으며, 이 증언은 진실이라고 부연하므로, 이“피와 물”의 흘림에 대한 이론(異論) 발생을 사전에 제거하고 있다(19:35). “피와 물”은 “육과 영”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는 데, “피와 물”의 쏟아짐은 예수님의 영의 건네줌과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은 말씀으로서 육신이 되셨으며(1:14), 그 영은 예수님 위에 머물렀으며(1:32-33), 이 육과 영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피와 물로 상징는 것이다. 침례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그 영(프뉴마)은 예수님 위에 머물렀으며(1:32, 33),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바로 그 영을 건네주신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니다(6:63). 그래서 물과 성령[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3:5-6).30) 이 영은 성령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는, 즉 영광을 받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으며(7:39), 다시 살아나신 후에 우리에게 주시는 영이다(20:22).
예수님이 받은 영은 그의 죽음 뒤에 신자들에게 줄 성령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7장 39b절에서 비록 영이 이미 예수님 위에 내렸지만(1:32) ‘아직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내려 머물렀던 ‘그 영’을, 운명하시면서 하나님에게 돌려주신 후 ‘그 영’은 성령으로서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영은 ‘파라클레토스’가 아니며 성령이 ‘파라클레토스’πααρκλητος, 보혜사)가 되는 것이다. .... 침례 요한도 1장 33절에서 ‘영’과 ‘성령’을 구별하고 있다. 즉, 누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표적으로서 ‘영’의 내려옴과 그에 의해 오게 되는 ‘성령’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일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관련되지 않고, ‘파라클레토스’πααρκλητος로서 성령 강림[20:22]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흘러내리는 “피와 물”은 가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항아리와 같이, 자신을 완전히 비운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주며, 새로운 포도주를 제공해 주는 근원으로서 다시 살아나는 표적의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8. 결 론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이 첫 번째 표적이라면, 마지막 표적은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영”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주가 구약에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듯이(아모스 9:13-14; 호세아 14:7; 예레미아 31:12), 마지막 표적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며, πααρκλητος 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슈나켄버그는, 갈릴리 가나의 새 포도주는 잔치를 맡은 사람조차도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예수님의 선물이며,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표적을 통한 선물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오며(20:22), 예수님을 대신하는πααρκλητος인 것이다(14:16, 26; 15:26; 16:7).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이, “그 영”은 “성령”으로, 즉 πααρκλητος 로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의해 전달된다. “비록 여섯 개의 돌 항아리가 새 포도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은, 남아 있는 돌 항아리들을 통해서 증거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빈 무덤은 일곱 번째 항아리로서, 그리고 하나의 표적으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포도주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라”(7:37)는 말씀과 같이, 마지막 표적을 통해서 주어지는 성령은(7:39), 유대인들의 유월절(2:13; 6:4; 11:55)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유월절 포도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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