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의 표시 (요한 1서 3:4-10)
하늘의 소망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사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신자들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할 것을 강조한 다음 사도 요한은 죄에 대한 격렬한 논증과 어두움에 대한 불결하고 열매가 없는 일들에 대한 모든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Ⅰ. 그는 죄의 본성과 그 죄의 본질적인 악성에 대해 추론하고 있다. 죄는 거룩한 율법에 대해 상반되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또는 죄를 짓는 자마다 흉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며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나니) 그 이유는 죄는 불법이며 무법한 것이기 때문이다"(4절). 죄란 세상을 선하게 통치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으며, 인간에게 온전한 성품과 기쁨과 평안의 길을 보여주며, 거룩한 품성과 정결함의 표상인 율법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것은 거룩한 율법과 권위를 저버리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Ⅱ. 이 세상에 주 예수께서 오신 목적과 의도는 죄를 없이 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5절). 그는 무서운 형벌과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복종시키며 고난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거룩한 율법을 입증하고 완성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며 그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죄를 사하시며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을 이룩함으로(그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정결케 될 수 있으므로) 죄가 없으신 자신의 모범을 따라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바라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최상의 정결을 유지하는 가운데 그와의 교제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이 무엇임을 알고 또한 이를 숙고해야 한다. 즉 그가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다. 곧 너희가 아는 대로(지식은 깊고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고자 오신 것이다.
Ⅲ. 사도 요한은 죄와 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크나큰 분수령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6절). 여기에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 죄를 범한다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8,9절). 그리고 죄를 범한다는 것은 죄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행치 않게 된다. 주 예수와의 생명적인 연합이 심령과 성품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권세를 깨뜨린 것과 같이 인간의 삶과 행위에 있어서 죄의 통치와 만연을 방지한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표현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즉 죄를 짓지 않는 자는 순종하며 신실하고 올바르게 그의 생활에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일들을 행한다"(22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와 함께 그들의 언약 안에 거하는 자들이며 결과적으로 죄를 경계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강한 빛과 그의 지식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죄를 진자들은(죄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며(그리스도께 대한 건전한 복음적인 식견이 그의 마음속에 박혀 있지 않는 사람들이며) 그를 알지도 못하며, 그에 대한 아무런 경험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라고 결혼 지을 수밖에 없다. 죄에 대한 실제적인 부정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 계속적인 관계와 구원의 지식에 대한 크나큰 확증이 된다.
Ⅳ. 사도는 죄의 행함과 의로운 상태는 모순된 것임을 암시하면서, 의를 행함과 의로운 상태에 대한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것을 추리함은 크나큰 속임수이다.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라. 너희의 새로운 빛과 기독교를 수락함을 찬양하며 너희의 지식, 신앙 고백, 그리고 세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관심과 성실함으로부터 면제함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기 쉽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는 일에 경계하라. 의를 행하는 자만이 의로운 자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마태복음 5장 1절의 말씀대로 성서중 몇 군데서 나타난 바 의로움만이 정당하게 신앙으로 간주되어질 수 있는데, 의를 행함은 믿음을 위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베드로 전서 3장 14절에 "의를 위하여,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는 말씀이라든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 가운데도 교육한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의미하고 있다. 다음으로 의를 행함은 죄를 행하며 범하는 것과는 특별히 반대적인 면에 놓이게 된다. 즉 신앙적인 것을 행하는 자는 의로운 자다. 그는 어느 점으로 보든지 의로운 자다. 그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며 올바른 자다. 신앙의 실천은 하나의 통일과 양심의 원칙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에서 나타난 바 죄의 용서와 의로운 삶에서 이룩되는 의를 소유한다. 또한 그의 강림하심을 바라는 자들에게 이룩하신 그의 언약과 약속에 따라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는 의의 면류관을 차지하게 된다. 그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얼마간 의로와 졌으므로 거룩한 법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에 그리스도와 함께 비교적 의로와진 상태에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Ⅴ. 사도는 죄인과 마귀의 관계를 언급하고, 마귀에 대한 주 그리스도의 의도와 사명을 말하고 있다.
1. 우선 죄인과 마귀의 관계를 알아보자. 다른 곳에서 죄인들과 성도들을 구분하는 것처럼(비록 성도들도 넓은 의미에서 죄인이라고 불려지지만) 여기서도 "죄를 행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간주된다. 그의 죄된 성품은 마귀에 의해 영감을 받으며, 또한 마귀와 뜻을 같이 하고 그를 기쁘게 한다. 그는 마귀와 그 일당의 유익을 도모하며 그 왕국에 속해 있다. 죄의 주동자와 후원자와 시행자가 바로 마귀가 인간을 태초로부터 죄로 이르는 유혹자이며 여기에서 사도가 언급한 바를 알아보자.
2. 주 그리스도의 목적과 사명은 마귀와 더불어 대항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함이다"(8절). 마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멸하려고 계획하며 힘썼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를 대항하여 거룩한 싸움을 싸웠다. 그는 마귀를 정복하고 섬멸키 위하여 이 세상에 가르쳤을 입고 오셨다. 그는 죄를 완전히 파멸시킬 때까지 죄를 흩어 약화시킬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음을 잊지 말자.
Ⅵ. 사도는 죄의 재기와 폐기를 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것은 내적으로 새로워짐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품의 거룩한 통일성과 방향을 회복하게 만들었을 의미한다. "죄를 짖지 아니하는 자"는 그의 새로운 성품과 영에 대해 상반되고 불의나 불순종을 행하지 아니한다. 사도 요한이 첨가해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기" 대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빛과 능력으로 거하기 때문이다(베드로 전서 1장 23절의 말씀대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하신 말씀과 같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즉 배자(胚子)와 같은 상태에 있는 거룩함의 원리가 그 안에 있다. 새롭게 하는 은혜는 하나의 살아있는 원리다. 종교는 그 기원에 있어서 하나의 기술이 아니었으며 습득된 기교나 기술이 아니다. 하나의 새로운 본성이다. 이로써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죄된 행위를 저지를 수 없다는 말은 현명한 해석자에게는 난해한 것으로 취급된다. 죄를 고백함이 우리의 의무로 나타난 1장 9절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특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사도가 말한 바 "저가 범죄치 못한다"는 견해에서 볼 때 분명히 "죄를 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죄의 길을 따라 행할 수 없다. 성도라든가 하나님의 종과는 정반대 되는 죄인이라 명명할 만큼의 죄는 지을 수 없다. 또한 그는 비교적 하나님으로부터 나기 이전 상태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죄를 지을 수 없다. 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금지 내지는 배제되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1. 그의 마음에는 죄의 불의함과 악성을 드러내 보이는 빛이 있다.
2. 그의 심령 속에는 그로 하여금 죄를 증오하고 미워하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
3. 죄악된 행위의 힘과 견고성을 파괴할 만한 근원적인 영적 원리 또는 원동력이 존재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영적 원리는 다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절대적인 능력에서 비롯되거나 또는 마음과 영혼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죄악된 행위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영은 육체를 거스린다." 그러므로 죄에 관해서는 "이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서 중에는 인간의 죄가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 다만 마음과 영혼의 경향과 구조는 죄와 대치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4. 죄를 지었을 경우 죄에 대한 수치심과 후회하는 감정이 있게 다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적 또는 도덕적 인간의 무능함을 깨닫게 된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종교적으로 선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 한편 중생한 사람이 범죄할 수 없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죄지을 수 있는 능력에 억제와 금지(흔히 우리가 말할 수 있듯이)가 가해진다. 이러한 억제와 금지는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해 은밀하게 또는 사려 깊게 거스리도록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흠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일컬어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농담을 하지 않으며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며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란 말씀이 있다. 분명히 죄된 생활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자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Ⅶ.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식별하고 있다. 그들은 객기 특히 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게 된다"(10절). (고전적인 식별 방법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손과 뱀의 자손이 있다. 뱀의 자손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1. 신앙에 대한 태만으로 뱀의 자손임을 드러낸다. "의를 행치 않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등한히 하며 무관심 하는 자, 즉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로움이나 혹은 하나님께 그의 의무를 시행하는 것인데 누구든지 이를 의식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요," 반대로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마귀는 불의한 자 또는 불신앙인들의 아비다.
2.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함으로 그들이 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또한 그리스도로 인해 사랑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경멸하며, 증오하고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그들 속에 아직도 뱀의 본성을 머물게 하는 자들이다.
형제애(1) (요한 1서 3:11-13)
Ⅰ. 사도 요한은 마귀의 자녀의 표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사랑의 탁월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실제적 기독교의 기본적 원리를 이루고 있는) 소식 (사명 또는 책임)이니라"(11절). 우리는 주 예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귀히 알고 결과적으로 그 사랑의 대상인 모두를 사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Ⅱ. 사도는 이러한 사랑에 상반되며 형제를 미워하는 모든 악의와 가인의 행위를 저버리도록 하기 위한 기회를 포착하고 있다. 가인의 시기심과 악의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필히 배제되어야 한다.
1. 가인은 최초의 뱀의 자손임을 보여주었다. 최초의 인간의 맏아들인 그는 악한 자편에 있었다. 그는 마귀를 따르고 그를 본받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2. 그의 악의는 제지를 받지 하니했다. 곧 그의 악의는 인간이 지구상에 가장 희소할 때 최초로 형제간의 살인을 계획하고 성취하도록 했다. "가인은 그의 아우를 죽였다"(12절). 제멋대로 행해지는 죄는 한계를 모른다.
3. 악의가 그 안에 마귀를 이끌어드림으로써 그의 아우를 죽이게 했다. 가인은 보다 우월한 제사를 드린 아벨에 대해 분노를 발했으며, 하나님과의 우호 관계에 있는 아벨을 시기했다. 이로써 그는 형제를 살해했다.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12절). 악의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러러보며 모방해야 한 것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도록 자극한다.
Ⅲ. 선한 사람이 푸대접을 받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13절). 뱀의 성품이 아직도 세상에 남아 있다. 즉 거대한 뱀이 마치 하나님처럼 자신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연인의 후손인 당신들을 뱀이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형제애(2) (요한 1서 3:14-19)
사랑하는 사도 요한은 비로소 거룩한 사랑에 대해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마치 물에 뛰어드는 자처럼 강렬한 논증을 전개하며 사랑의 실천을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Ⅰ. 사랑은 복음적인 칭의(justification)와 생명의 상태로 옮기었다는 표시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14절)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식이요 죽음의 상속자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여기에서 복음은 계약 또는 약속을 뜻한다.) 우리의 상태는 내세를 지향하도록 변화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었고 사망의 죄의 법에서 생명의 법으로 옮기었다. 이러한 변화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요 3:36). 우리는 지금 놀라운 상태로 변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 간 줄을 알거니와"(14절)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된 상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확신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표시로 생각할 수 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일반 종교에 있어서 파당을 이룩하는데 대한 열심이나 자기와 동일한 교파에 속한 자들이나 자신의 감정에 맞는 자들을 위한 애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 여기에서 말하는 형제애는 인류를 위한 일반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기독교적인 사랑의 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 인류 사회 안에서의 보편적인 범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인간은 원칙적으로 사랑을 받아야 한다.
(1) 첫째,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탁월한 걸작이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놀라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인자에 대한 심판을 가하시는 이유는 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이다"(창 9:6).
(2) 둘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the Gens human)는 타락한 천사와 구원받은 백성과 구분되어 있는 하나의 존재 또는 구세주가 계획하고 준비했으며, 그들에게 부여한 바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한 이 세상은 마땅히 우리들에 의하여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 사랑은 부르심을 입지 못한 어두운 세상의 중생과 구원을 위한 간절한 간구와 기도와 사도로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내 마음의 소원과 기대는 그들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이 사랑은 원수에 대한 모든 의무적인 사랑을 포함한다.
2.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에 의하여 구원받고 의로와졌으며 성화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로의 지체서의 신앙적 공동체와 일반 교회 더 나아가서 교회의 머리(그리스도)를 위한 각별한 사랑을 내포한다. 이 사랑은 특별히 인격적인 사귐과 피차간 신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일반적인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행해지며 작용한다. 성도들은 그들을 사랑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스스로가 이룩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들 안에 와 그들을 위해 이루어진 사랑의 가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룩되는 결과이며 이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과정의 표가 된다.
Ⅱ. 반대로 형제를 미워함은 죽음의 상태와 사형 선고 아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14절). 그는 아직도 율법의 저주와 형벌 아래 있다. 이 사실을 사도는 명확한 삼단논법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줄을 알아야 한다"(15절). 한편 14절의 표현대로 "사랑치 않는 자는 사망에 거하는 자요, 그의 형제로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즉 사람에 대한 미워함이 더하는 것만큼 이는 생명과 복지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며 자연적으로 생명과 복지의 종식을 바라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가인은 그의 아우를 미워함으로 종국에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미움은 불쌍한 형제에 대한 연민의 정을 막아 버리며 이로써 그들에게 죽음의 슬픔을 안겨 준다. 형제를 미워함은 어느 때든지 그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추한 평판과 비난을 가하며 종국에는 핍박과 무력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적 경향과 악하고 맹렬한 정욕을 알고 있으며 한편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온전함을 알고 있는 자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랠 필요가 없다. 마음의 기분과 성향에 따라 살인을 행하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거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자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롬 6:6).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 말씀은 의를 말씀하신 구세주에 의해 주어지는 영생의 내적인 원리의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말은(14절) 상대적 변화를 의미함이 아니라 중생으로 이룩된 실제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4절에 언급된 "사망에 거하느니라"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바 영적인 죽음 안에서의 존속 또는 부패된 본성 안에 거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죽음이나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은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씻김을 받는 것은 죄의 부도덕성과 그 힘으로부터 씻김을 받는 것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이상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은 영생의 내적인 원리를 소유하거나 혹은 소유하지 못함에 따라 증명되거나 혹은 반증될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Ⅲ.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모범적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놓았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씀이 하나님이시었고, 그가 우리를 위해 육신이 되셨다"고 선포하는 한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말씀이신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이다. 생명을 취하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그 생명을 내어주셨다. 여기에 그 자신의 보혈로 하나님의 교회를 지속하실 거룩한 사랑에 대한 겸손과 이적과 신비가 있다. 하나님이 이처럼 지극히 사랑하신 그들을 우리도 사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Ⅳ. 강렬한 사랑의 모범과 그 사랑의 동기를 제시한 사도 요한은 이러한 기독교의 사랑의 성격과 열매는 어떤 것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1. 그 사랑은 교회를 위해 우리로 하여금 죽기까지 고난을 자처하게 하는 최고도의 열렬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라는 말씀과 같이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진흥을 위해 우리보다 더욱 봉사적인 자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우리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마땅하다(16절).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자제하는 생활을 해야 할까! 초연한 생활을 좀더 나은 생활을 하도록 얼마나 준비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좀더 나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2. 그 다음으로 형제들의 궁핍에 대해 동정적이며, 인색하지 않으며 친절해야 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도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17절). 부요한 사람들의 자비와 사랑의 실현을 위해 믿음의 자비와 사정의 실현을 위해, 믿음의 형제들이 가난을 자처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믿는 형제들로 하여금 가난한 성도들에게 자선을 베풀도록 세상의 재물을 쓰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세상의 재물을 소유한 자들은 좀더 하나님과 그들의 선량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재물을 나누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형제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곧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도 없다.
3. 나는 다음절에서 최하위의 사랑을 암시하려 하였으나 사도 요한은 이 마지막 말만으로, 자선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낮은 사랑임을 암시함으로 나의 의도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또 다른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모든 것에 진실하고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칭찬과 아첨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이루지 못하며 거룩한 애정의 신실한 표현과 사랑의 봉사와 수고만이 그리스도인을 이루게 한다.
Ⅴ. 이러한 사랑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신실성을 증명해 주며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부여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19절). 믿음 안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다. 견고한 자리에 이른 자들은 하나님께 대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세상의 비난과 책망을 들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호소하게 된다. 기독교의 진리와 완전에 대한 지식에 이르며 또한 내적인 평안을 얻는 길은 피차간 사랑에 얽히어 믿음의 형제에게 사랑의 수고를 베푸는데 있다.
양심의 증거 (요한 1서 3:20-22)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확증과 진실한 신앙의 특권이 있음을 암시한 다음 사도 요한은 계속 몇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Ⅰ. 양심의 심판과 그 권위를 말하고 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20절).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영혼과 기질 그리고 행위를 알 수 있으며 이로써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하며 분별할 수 있는 고상한 최상의 능력이다. 이것은 양심, 혹은 도덕적 자아 의식의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은 증인과 심판자 또는 재판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한편 이 능력은 비판과 변호도 하며 정죄와 심판도 한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이 주어진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며, 섬세하게 심층부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면과 비밀한 사건들을 탐색하는 하나님의 등불이요, 하나님에 의해 밝혀지는 발광체이다(잠 20:27). 양심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판을 수행하고 하나님을 대행하는 역할을 행한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벧전 3:21). 하나님은 재판장이시다. "우리 믿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의 마음 보다 크시고 능력과 판단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과 양심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일까 보냐?" 그러므로 법정의 결의와 판단은 곧 하나님의 결의와 판단이시다.
1. 만일 양심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비교할 수 있겠는가?"(20절)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보다 더 훌륭한 증인이요, 우리들에 대해 양심보다 더 많은 것을 아신다. 그는 양심보다 더 위대한 재판장이시다. 그는 최고의 재판장이므로 그의 판단은 정당한 것이며, 마침내 온전하게 수행될 것이다. 이런 점은 "나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다른 사도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한다. "나는 나의 직무와 사명에 있어서 어떠한 간교도 의식하지 못하며 불성실함도 인정하지 못한다. 이로써 나는 의롭지 못하다. 내가 서며 넘어지는 일도 내 양심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내 양심의 정당성 혹은 의로운 판결로 당신과 나 사이의 논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양심의 판결에 호소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양심의 결정에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가장 온전하게 결정적으로) 판단하실 이는 당신과 내가 끝까지 따라 가야 할 주님뿐이시다"(고전 4:4).
2. 만일 양심이 우리를 무죄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 내리실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21절),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하시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죄없다 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주제넘은 사람들은 "나는 심판의 날을 기쁨으로 맞이하리라. 나의 마음은 나를 정죄하지 아니하므로 또한 하나님도 나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라고 확신한다"고 할 것이다.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경건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나의 마음과 양심은 나를 책망하오나 나는 진정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야만 합니까?"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은 법관의 판결 같은 것으로써 헤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즉 무지와 오류, 편견, 편파, 그리고 선입관은 재판석의 재판관이나 그의 수행원(마치 마음과 기호, 정열, 성격, 기질 혹은 혼돈된 두뇌 같은 것)과 거짓된 판결을 내리는 배심원의 과오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과오는 재판관 즉 자기 의식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양심(sunei`dhsivj)의 과오가 아니다. 무지와 실수의 행위는 자기 의식의 행위가 아니라 모종의 오류를 범하게 하는 힘에 의한 것이다. 양심의 판정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본질과 과정에 따라 이룩된다. 그러므로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호소하며 열심히 주의를 집중하자.
Ⅱ.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향한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특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늘과 하늘의 보좌를 동경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간구는 하늘에 상달된다. 즉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는다"(22절). 간구하는 자들은 보좌의 존귀와 영광 또는 그들 자신이 의도한 영적 선물에 위배되는 것은 구하지도 않으며 구하려는 의도도 전혀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구한 바 선한 것들을 받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들은 그에 대해 합당한 것이며 그들의 자격과 실천력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구한 바 좋은 것들을 받게 되리라는 예측을 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22절). 순종의 사람들은 축복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응답의 약속을 받고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시 64:18; 잠 28:9).
계명의 준수 (요한 1서 3:23,24)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들의 의무로써 계명을 지키는 일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언급한 사도 요한은 또 다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Ⅰ. 기본적이며 요약된 계명이 어떤 것임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할 것이니라"(23절).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아들과 기름 부음을 받은 구세주로서의 그의 인격과 사명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그가 어떠한 분임을 인식해야 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요 6:40).
2. 우리들의 판단과 양심 그리고 확신과 지각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택하심을 받은 자로서 그를 인정해야 한다.
3. 또한 그를 믿기 위해서는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하고, 구세주로서 또한 하나님께 우리를 회복시킬 자로서 그를 따라야 한다.
4. 그가 구속의 사명을 온전하게 이루실 것을 믿고 그에게 응답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라"(시 9:10). "이를 인하여 내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니라"(딤후 1:12).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요소다. 그 이유는 그를 통해서만 우리는 아버지께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은혜와 의로우심을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용납되고 그의 마음에 부합하게 되며(엡 1:6), 그가 우리를 용납하시므로 우리가 바라는 축복이 이루어지며, 그의 중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되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꼭 기억해야 할 계명의 첫째 부분이며, 첫째는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절)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항상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바를 명심해야 한다.
(1) 우리를 대적하는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신다"(마 6:14).
(2) 불화한 자와 더불어 화해하여야 한다(마 5:23, 24). 인간들을 위한 선한 뜻이 하늘에서 선포된 것같이 특별히 형제들에게 대한 선한 뜻이 하나님과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자들의 마음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Ⅱ. 사도는 이러한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축복을 말하고 있다.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게 된다. 즉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특별히 믿음과 사랑을 가진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한다(24절). 우리는 하나님의 복된 관계에서 또한 그의 아들을 통한 영적인 연합과 그와 더불어 거룩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 안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의 믿음은 그에게만 의존하며, 그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확고해진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자에 대한 시험은 이로써 드러난다. 즉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된다"(24절).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거룩한 성향과 형태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만 할 것이다.
<매튜헨리 주석>
종말론적 신앙이란?
"사랑하는 자녀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다섯 달만 연기된 종말
미국 패밀리라디오 운영자 해롤드 캠핑이 지구의 종말이 닥친다고 예언한 5월 21일이 아무 문제없이 자나갔습니다. 그러자 영적인 종말은 그날부터 시작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다 금년 10월 21일이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수정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적했다 고작 꺼내 놓은 변명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이 거짓 예언에 속아 자살한 자가 미국에서 2명이고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입은 자는 부지기수입니다. 패밀리라디오 측에선 경제적 피해는 가능한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현이 의심스러운데다, 그 정신적 영적 피해는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는 경고가 생각날 뿐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냥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미국에선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말리거나 깨우쳐주려 해도 한번 왜곡된 종말관에 빠지면 헤어나기 심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멀쩡한(?)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비성경적 종말관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잠시나마 미혹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한갓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럼에도 종말은 어떤 날이라도 될 수 있기에 혹시 진짜 그날에 종말이 오면 어쩌나싶어 관심을 갖거나, 마음에 각오라도 단단히 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대부분의 신자들은 종말론적 믿음을 그야말로 종말을 미리 대비하며 사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세상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생업에도 열정적으로 종사할 필요 없고, 자연히 재산 관리에는 무관심 내지 문외한이 되고, 매일이다시피 교회에 모여 성경과 기도에 전무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캠핑은 겨우 지난 5/21에서야 영적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훨씬 전부터 그랬기에 정말 이 땅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죄는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인류가 번성함에 따라 그 죄는 확장 발전하여 다양 교묘 음흉 치사해졌지 그 반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도 모든 면에서 더 꼴이 아닙니다. 영적 종말은 실은 창조 당시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담의 배교를 묵과하지 않고 그 즉시 벌을 주되 종말론적 심판을 하셨습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인간들은 평생을 두고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있는 동안, 또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말로 종말까지 그 벌을 감수해야 한다면 최초의 벌이 바로 종말론적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은 죄의 본성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채 낙원에서 쫓겨났기에 그 후손들 사이에는 아무리 세대가 오래 지나도 온갖 죄악이 번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원흉인 사단도 함께 벌을 받았지만 완전한 멸망은 미뤄지고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들을 여전히 농간할 수 있도록 잠간의 유예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인간이 가는 곳, 하는 일마다 죄의 냄새가 무럭무럭 날 것입니다.
창조가 바로 종말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류의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또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인데, 그 일은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십자가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행하는 땅 끝까지, 살아가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다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이 다시 오시면 사단과 죄악에 대한 진짜 마지막 심판이 이뤄질 것입니다.
요컨대 인류의 역사는 종말을 향해 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원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되었음은 그 종말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에는 삼위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 시작과 끝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지 절대 사단이나 인간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든 심판하든 오직 그분의 영광만 드러날 뿐입니다. 물론 시작과 끝을 잇는 그 중간에도, 당연히 인간의 타락도 포함하여,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역사 연대표는 항상 인간에게만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창조와 종말이, 타락과 구원이 짝을 이루어 같은 항목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의 현장 속에선 단지 그 둘이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뜻은 그 둘의 완성을 사람들로 미리 보고 알게 해주려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둘의 완성이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진리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참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심판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이 동시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인간 역사에는 종말이 될 것이며, 하나님 시간표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의 이 세대에 지옥의 심판은 이미 내려졌고, 동시에 천국의 구원도 벌써 도래했지만 완성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단에 묶여서 심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와 하나님께 속해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 둘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정표 안에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구원과 심판이 이미 완벽하게 다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시공간 안에 제한 받는 인간에게 역사의 한 시점과 한 장소와 한 인물을 통해 그 둘의 완성을 모든 이가 보여 알도록 한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인간을 나누는 유일한 분기점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길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영원한 구원 안에 이미 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그 중에는 언젠가 십자가를 통과할 자도 분명 있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름)는 영원한 심판 안에 벌써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십자가를 통과해 버리면 더 이상 되돌아 갈 길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대속죽음은 영단번의 완전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제사를 지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 예수를 믿은 신자는 어떤 신분과 특권을 가진 것입니까? 한마디로 천국과 구원의 완성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일정표에는 완성되어 있지만 단지 인간이 실제로 체험하는 완성만 인간이 지각하는 시간표상의 미래 일로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인식하든 못하든 이미 종말을 맞았으며, 종말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심판의 완성과 지옥의 비참함을, 신자는 구원의 완성과 천국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주권 받고도 불법체류자 같은 신자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신자의 종말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지금부터 이미 하나님 자녀입니다. 장래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는 단지 인간의 시공간 안에 눈에 보이게는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종말 즉,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은 실현될지 안 될지 의심할 수 있는 성질이 절대 아니며, 아직 잘 모르기에 계속 공부하면서 알아가야 할 진리도 아니며,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불안하기에 단순히 소망하거나 기대하는 상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미국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영주권신청을 했는데 이민국에서 허락이 떨어졌다는 편지는 도착했는데 아직 영주권카드는 받지 못했고 한국여권에 스탬프가 찍혀지지 않은 상태일 뿐입니다. 신자란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의 영주권신청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허락한 편지와 영주권카드(성령님의 내주로)까지 날라 왔지만 그 입성만 잠시 미뤄진 것입니다. 영주권 승인 편지를 받은 후로는 영주권자 자격으로 모든 권리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듯이, 신자도 이 땅에서 천국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이란 단순히 종말을 대비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을 소유한 자로 종말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으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그 종말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또 그러도록 바로 천국으로 입성시키지 않고 이 땅에 아직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만큼 천국에 빨리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이미 천국 안에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말하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란 단지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갈 수 있다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종말에 "주와 같이 될 줄을 아는"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한이 누구입니까? 천국을 확실하게 보고 온 자입니다. 역사상 그만큼 천국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가 본 천국에는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분처럼 되어서 그분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는 자는 아직 그곳에 가지만 않았을 뿐 이미 그와 똑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정말 이 땅에서부터 종말 안에서 천국의 모든 신령한 복락을 미리 누리고 주위에 나눠주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신자의 능력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앎과 열망 속에서, 조금 단계를 낮추어 확신과 소망으로만 살아도 주님이 그런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니까 불신자보도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장래 완성될 구원에서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데" 어찌 지금 그와 같이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천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인데 어찌 깨끗하게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믿은 후의 신자에게 영원토록 내주하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몸이 들어붙은 샴쌍둥이와 같은 형상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는 앞에서 감히 더럽고 추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다시 같은 비유를 들자면 영주권 승인서를 받아놓고도 불법체류자처럼 추방당하면 어쩌나 싶어 경찰차만 보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바보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캠핑의 종말 예언에 간 졸였거나 혹시나 싶었던 것과 이 경우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도 예수님 재림으로 최후 심판이 있지만 그 날짜만은 아무도 모른다고 익히 알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러니 말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신자
물론 신자라고 이번 사태에 망부석처럼 완전 무심하게 지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심 호기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염려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종말이 닥칠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닥치지 않을 텐데 그 이후에 기독교가 또 욕먹을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전문가라도 특정날짜를 지정하면 결코 그 날에 오실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나마 이번에 다행인 것은 신자에게는 날짜 지정한 종말론에 더 이상 속지 말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되었고, 불신자에겐 하도 세상이 흉흉해서 종말에 대해 한번쯤은 상기시키는 반사적 유익은 있었으니 말입니다.
분명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거의 눈앞에 이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1-5)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모든 세대가 다 그러긴 했지만 이 구절에서 열거한 모든 사항이 하나 빠짐없이 철저히 해당되고, 특별히 마지막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는 모습은 바로 오늘 이 세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흉흉할수록 신자가 붙들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고 안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내 혼자만 착하게 지내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아가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을 구하라고 해서 초자연적 은사만 실행하거나 힘든 일에 기적 같은 보상만 소망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요한이 신자가 가져야 할 종말론을 본문에서 언급하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a) 십자가 사랑을 신자에게 주셔서 당신의 자녀라 일컬음을 이미 얻게 하셨다고 합니다. 앞에서 누차 말씀드린 대로 천국 안에 벌써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1절b) ‘세상’은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 그분으로 말미암은 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단에 미혹되어 그 종으로 살고 있기에 타락의 완성으로 자기들 인생이 흘러가고 있는 줄도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 믿은 우리를 처량하게 여깁니다. 오지도 않을 종말을 심심하면 끄집어내어서 세상을 시끄럽게 구니까 아예 상종도 못할 광신자들이라는 비난과 함께 말입니다.
요한은 신자더러 종말을 선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잘 모르듯이 예수를 모시고 사는 우리들 또한 그들에겐 잘 모르는 자로 인식 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전혀 다른 소망을 안고 살기에 그들이 확연히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이해하든 말든, 심지어 오해하고 뜯어 말려도 신자는 그 소망대로 살아야만, 아니 자연스레 그렇게 살아져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날씬하고 예뻐져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로잡고야 말겠다는 소망이 있는 여자는 남들이 저러다 병원 신세 지는 것 아닌가 염려해도 다이어트나 운동에 열중합니다. 자기가 번 돈 모두를 예뻐지는데 다 털어 넣지 않습니까? 신자도 이미 종말 안에 사는 모습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어야 합니다.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흉흉하고 고통스런 세상일에 자신이 완전히 지쳐 있어도, 고난은 끝이 없고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기도할 힘조차 없어져도, 심지어 제발 빨리 이 고통만 끝내고 싶은 심정이 생겨도 내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또 더 강하게 믿음을 세워서 염려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르듯이, 한 개인의 종말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신자는 종말이든 죽음이든 그 자체를 대비해서 살아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말 안에서, 죽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론 우리의 영원한 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만 있는 것이지 때가 되면 반드시 너무나 풍성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신자 앞에 활짝 펼쳐질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요체는 이런 확정된 그러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기에" 그곳을 향해 매일 한걸음씩 실제로 걸어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종말의 날자만 적시하지 않았을 뿐 곧 다가올 심판에 대비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캠핑이 벌린 짓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종말의 두려움만 강조했거나 전도의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했으니까 말입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에 종말은 아예 언급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말만 강조하면 자칫 그들로 신자마저 종말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심판의 완성으로 치닫고 있어도 그들이 전혀 믿지도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 재림에 대해 말로 설명해주어야 큰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을 향해 때로는 타락의 완성, 심판의 종말을 경고하면서 전도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 앞에서 신자가 이미 도래된 천국 안에서 구원이 완성되어져 가는, 그래서 자기들과는 다르지만 함께 따르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종말이 다가갈수록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며 더욱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자연히 사람들이 우리가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종말이 앞으로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어떤 큰 재앙과 환난을 동반할지 짐작도 못하기에 믿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가꾸어서 그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이미 도래한 그리스도의 종말 안에서 살고 있기에 주님의 재림이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닥친다 해도 전혀 요동치 않아야 합니다. 아니 나를 영광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그러기에 종말과 전혀 무관하게 이 땅에서 더욱 성실하고 깨끗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박신 목사/http://www.nosuchjesus.com/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요한일서 3장 6절의 직설법 현재 동사인 ‘하마르타네이’, 그리고 9절의 직설법 현재 동사인 ‘포이에이’에 대한 문법적 설명을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반복적 현재(Iterative Present)와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 이것은 제가 작의적으로 한글로 번역해 본 겁니다. 맞을지 안맞을지 모르겠습니다.)의 차이점은, 반복적 현재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어지지만, 그 초점은 ‘현재’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현재 반복을 말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반복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무시됩니다. 현재에 반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 7절에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셋 다 현재 직설법 명령)가 있는데,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일체 무시됩니다. 현재 반복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16절에 보게 되면,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에서 세례요한은 이전에도 세례를 주었겠지만, 그것은 무시되고 현재 세례를 주는 것에 강조를 둡니다. 그래서 만일 도표로 그린다면, “과거—현재—미래” 밑에 현재에만 ‘…..’을 표시할 수 있을 겁니다.
두번째로,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 혹은 '습관적 현재'라고 번역해도 좋겠네요.)는 현재에만 무게가 머물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까지 골고루 주어집니다. 이것이 관습, 습관이라고 불리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과거부터 반복이 규칙적으로 일어난 행동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 역시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로 불리워집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가 과거, 현재, 미래에 계속되어지는 것을 말하는데(ongoing state), 두 가지 다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에 포함됩니다. 도표로 그리자면, “과거—현재—미래” 밑에 모두 다 점선을 표시하든지, 아니면, 줄을 그어야 합니다.
만일 요한일서 3장 6절과 9절의 현재 직설법 동사에 반복적 행동에 무게를 두는 학자들은 그 동사를 반복적 현재(Iterative Present)가 아닌,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로 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반복적 현재(Iterative Present)로 보는 문법학자나 주석학자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한글로 된 문법서들은 제가 보지 못해서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못하겠네요).
그렇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사도요한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현재만 보고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란, 반복적인 죄(예를 들어 습관적으로 구타한다든지, 습관적으로 거짓말 한다든지… 등)도 있고 한번 지은 죄가 계속 지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ongoing state).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5장에, “아비의 아내를 취한 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자가 계모일 수도 있고, 혹은 아버지의 첩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그 사람이 자기가 취한 여인을 버리지 않는 한 그 범죄가 지속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살인한다든지, 간음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다름).
아니면, 존 뉴턴이 노예선 선장으로 있는 동안은, 노예를 붙잡고, 사고 팔고 하는 행위는 반복되겠지만, 그것을 가리켜 죄가 반복된다고 하지 않고, 죄를 지속적으로 짓는다(ongoing)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성격상, 만일 요한일서 3장 6절과 9절의 동사를 반복적 현재(Iterative Present), 혹은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 둘 중에서 취하려면 후자를 취해야 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그러면 요일 3장 6, 9절의 동사를,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학자들과, 그리고 오래된 주석들은 그렇게 봅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것을 교훈(금언)적 미래(Gnomic Present)로 봅니다.
요일 3: 6, 9절의 동사를, 관습적, 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로 볼 때 일어나는 문제점은,
첫째로, 사도요한의 단어 사용과 잘 맞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요한은 상당히 추상적(혹은 철학적)인 의미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비교를 사용합니다(있다, 없다, 안다 모른다. 하나님께 속했다, 마귀에게 속했다. …등등). 그리고 극적인 표현들을 사용합니다(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2:1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20), 등). 그런데 다른 부분에서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 요한일서 3장 6, 9절은 실제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적인 면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요한복음을 통독해 보시면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문장 자체가 주는 논리적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괜찮은가? 다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번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번까지 해야 반복적 죄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애매합니다.
세번째로, 요한일서 5장 16절의 의미와 배치됩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죄를 둘로 나눕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에서 “죄를 범하는 것”은 현재 분사입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믿는 자들(사도 요한이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음)이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범죄 중일 수도 있고, 이전부터 계속 지어오고 있는 죄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앞에서 3:6,9절에서 관습적,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를 썼다면, 여기서는 그렇게 쓰지 말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반복적으로, 또는 계속적으로 짓지 않는다”고 앞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5장 16절에서 형제들이 죄를 범한다고 하고서는 이어서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라고 또 관습적, 일반적 현재(Customary Present)를 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것은 교훈(금언)적 현재(Gnomic Present)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도요한의 단어 사용의 용례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훈적 미래란, 일반적이며, 무시간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선언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는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이 즐겨 쓰는 표현처럼, 요일서 3:6,9절 역시, 선언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도 그의 주석을 보면 교훈(금언)적 미래(Gnomic Present)로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렙/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
중생한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9)
본문 말씀은 거듭난 신자가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8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여 신자가 죄를 범할 수 있으며 아직도 죄인임을 시사하였다. 그뿐 아니라 실제로 거듭난 체험을 가진 신자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죄를 짓고 괴로워하며 회개하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가?
먼저 우리는 위 본문이 어떤 배경에서 주어진 말씀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사이를 비교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난자 즉 하나님의 자녀는 마귀의 길을 따르지 않으며 죄 안에서 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4:7), 예수를 믿으며(5:11) 세상을 이긴다(5:4). 같은 맥락에서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자라고 설명한다. 과거에 영적으로 거듭난 자는 현재 하나님의 자녀로 지속된다. 그의 아버지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아들인 거듭난 신자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닮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의 씨,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생의 원리가 그 마음속에 심겨져서 점점 더 크게 성장하며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원리에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마 7:18). 이런 성장으로 해서 신자는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살게 되며 그리스도를 응시하게 되니(히 2:2)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믿음의 경주를 잘 할 수 있다.1)
다음으로 본문 자체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씨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한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성령이나(요 3:6 ,9), 하나님의 말씀(눅 18:1; 약 1:18, 23; 벧전 1:23, 25)라고 할 수 있고 또 생의 신적 원리(Vincent)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본문의 뜻은 말씀의 설교에 성령이 역사 하시면 듣는 이의 마음에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 믿음으로 반응하게 된다(살전 1:5). 그 결과 성령을 통해서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계시게 되면 그는 죄를 짓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게 되며 죄에 반대하게 되어 죄를 짓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2)
여기서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으로 이 능력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중생하게 된다. 이 중생은 깊고 철저한 내적인 변화이다. 그러므로 이런 중생한 신자는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가 없다. 만일 죄를 계속 짓는다면 그는 결코 중생한 일이 없을 것이다.3)
마지막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은 새국제역(NIV)에서는 죄를 지속적으로 짓지 않는다'고 번역하였다. 그것은 헬라어의 원문이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이며 그는 죄를 고집하지 않으리라는 뜻이다.4) 그래서 로버트슨(A.T. Robertson)도 죄를 계속하여 짓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았다.5)
주
1. G.L. Archer,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p.428
2. I.H. Marshall, The Epistles of John(Eerdmans, 1979), p.187
3. John. R.W. Stott, The Letters of John(IVP, 1989), p.131
4. S.J. Kistemaker, James and I-III. John, p.303
5. A.T. Robertson, Word Pictures in New Testament, p.223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는 이유
(요일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앞 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의와 사랑을 행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의와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가인을 예로 들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시기하여 미워하고 살인하였습니다. 그러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본 절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로부터 미움을 당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곧 마귀에게 속한 세상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 항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삭에 대해 그러했고 에서도 야곱에 대해 그러했습니다.
갈라디아서4:29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행할 의도가 없기 때문에 의와 사랑을 행하는 것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첫째는 악령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2:2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악령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고 세상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을 택했기 때문에 미워합니다 (요7:7).
셋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7:14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동조자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자신을 거부하는 자로 여기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옳지 못한 일을 할 때 꼭 다른 사람이 함께 하기를 원하고 함께 하지 않을 때는 따돌립니다. 약한 자들이 불량학생들에게 동조하게 되는 것은 그런 미움을 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모습 다른 말 다른 행동 다른 가치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넷째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3:20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고 했습니다. 어둠만 있을 때는 어둠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드러나지 않으나 빛을 비추면 더러운 것들이 드러납니다. 어둠은 빛으로 인해 더러움이 드러납니다. 의와 사랑의 속성과 신념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함께 있으면 자신들의 삶의 수준이 낮다는 것 혹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그리스도인답게 죄에 대해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신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이고
진리에 속했기 때문이고 의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http://www.opendoor.or.kr.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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