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디모데후서는 바울 서신중 최후의 것으로 두번째 로마에 갇혀있는 동안에 기록한 것이다. 주후 67년 경이었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일단 석방되어 그후 서반아에 갔다가 다시 동방으로 와서 고린도와 밀레도를 거쳐(딤후4:20), 드로아까지 갔다가(딤후4:13) 드로아에서 갑자기 체포되어 다시 로마로 호송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때에 바울의 제자 가운데 그를 버린 사람들이 많았으며(딤후1:15-4:10)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은 누가 뿐이었다. 또한 바울은 자기가 마지막이 가까와진 것을 알고(딤후4:6-8) 더욱 디모데를 보기를 원하여(딤후4:9,20), 이 서신을 기록한 것일 것이다.
2. 주제표
초점 | 씀을 지켜라 | 말씀을 선포하라 | ||
구분 | 복음을 굳게 붙들라 | 복음을 전하라 | 복음을 보호하라 | 복음을 전파하라 |
본문 | 딤후 1장 | 딤후 2장 | 딤후 3장 | 딤후 4장 |
주제 | 감사 | 권면 | 경고 | 부탁 |
고난의 교제에 대한 도전 | 승리에 대한 도전 | |||
장소 | 로마 감옥 | |||
시간 | A.D 67년경 |
3. 내용과 주요 사상
이 마지막 서신의 내용은 개인적 감상, 행정 정책, 회상, 교훈, 슬픔, 확신등이 뒤섞 여 있다.
이 서신의 주 목적은 바울 자신은 이미 끝나 버린 어려운 임무를 감당해야 할 디모데에게 기운을 돋우어 주기 위한 것이나,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심은....오직 자기 뜻과....은혜대로 하심(딤후1:9)임을 상기 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전쟁에 나아가는(딤후2:3)심정으로 충성할 것을 말하고 있다.
개인 생활이나 교회와의 공적 관계에 있어서 항상 주의 종임을 알고 논쟁을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도우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렸다.
4. 내용 분해
1. 인 사 딤후1:1,2 2. 목회적 모범 딤후1:3-3:17 3. 마지막 권면 딤후4:1-8 4. 결 론 딤후4:9-22
○딤후1:1 디모데에 대한 감사와 격려 딤후1:1 바울의 문안 딤후1:3 감사와 위로 딤후1:15 오네시보로의 헌신 ○딤후2:1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의 충성 딤후2:1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 딤후2:14 거짓되게 가르치는 자의 경고 ○딤후3:1 말세에 있을 일에 대하여 딤후3:1 악에 대한 경고 딤후3:10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4:1 바울의 사역 마침 딤후4:1 그리스도 군사의 직무 딤후4:9 개인적인 부탁 딤후4:19 마지막 인사
. 내용 분해(대분류)에 따른 개론
(1) 목회적 모범
과거의 전례를 말하고 있는데(딤후1:3-8) 바울은 자기가 선조로부터 전해받은 신앙과 디모데가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로부터 길러진 신앙을 칭찬했다.
그리고 비록 반대를 당하고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우리 주를 증거하기에 부끄 러워 말라 (딤후1:8)고 권고 하면서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말하였다(딤후1:12). 또한 현재의 문제로서(딤후2:1-13) 운동 경기자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칙을 충성되 이 지켜야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공적 관계에 있어서(딤후2:14-26) 쓸데없는 논란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영원히 강하게 서있게 하라고 권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에 있어서(딤후3:1-17)마지막 시대에 배도하는 일이 일어나 악이 만연하 고 거짓 스승이 생겨날 것을 경고한다(3:1-9). 이러한 때에 신앙을 지켜야 하는데(딤후3:10-1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딤후3:12)것을 알아 바울이 보여준 꾸준한 인내를 본 받아 지킬 것과 그리고 영감으로 된 성서의 교훈을 기억하라고 명한다.
(2) 마지막 권면
마지막 유언삼아 디모데에게 명하는 바는 어떤 핍박아래서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딤후4:1-2) 것이며 , 바울이 밑은바 일에 모두 충성스럽게 마치고 이제는 받을 상이 주님의 손에 놓여 있다고 자신에 대해서 최후의 양심적 증언을 하고있다(딤후4:7-8).
(3) 결 론
각종 소식과 인사로 끝맺었다.
저자 및 저작연대 |
A.D. 62년 경에 로마의 옥에서 풀려난 사도 바울은 다시 4차 전도 여행을 떠났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한 시기는 바로 이 전도 여행 기간이었다. 그러나 A.D. 66-67년 경, 네로 황제9재위 A.D. 54-68SUS) 치하 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이대에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다. 옥에 갇혀 이떤 바울은 자신의 일생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
저작동기 |
바울은 세 가지 동기에서 디모데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여 보냈다. (1) 그는 외로운 상태였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4:10).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로마로 와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롬 16:21), 그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가까이에서 바울을 섬겼다(빌 2:22; 고전 4:17). 바울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이밖에 내게 없다'9빌 2:20)고 하였다. 바울은 그를 그리워하여(1:4) 두번씩이나 속히 오라고 요청하였다(4;9,21) (2) 바울은 네로의 박해 기간에 교회의 안전과 번영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복음을 지키고(1: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3:14),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4:2), 필요할 때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1:8; 2:3)고 명령하고 있다. (3)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본 서신을 읽고 이해하도록 의도하였다. |
메시지 |
바울이 디모데를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지칭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디모데의 개인적인 성장 배경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디모데가 복음 사역을 수행할 때 알아야 할 지침들을 설명하였다. 바울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가 더욱 더 그리스도 안에서 강건하여져 주의 군사로서의 사역에 충실토록 권면한다. 바울은 또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해 디모데가 그들의 변론에 휘말리지 말고, 확고한 진리의 말씀에 거하며, 바른 교훈을 받아들인 자답게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도록 권면한다. 이러한 권면의 말씀과 더불어, 앞으로 역경과 핍박의 때가 올 것임을 또한 예상하여 언급하였다. 환난에 대한 그의 예언적인 서술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적중하였다. 이러한 환난은 주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세상 마지막 날의 주요한 표징이자 특징이 된다. 그러나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3:15)하는 거룩한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환난을 견디고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
내용분해 |
1. 바른 교훈을 지킬 것(1;1-8) 2. 바른 교훈을 가르칠 것(2:1-26) 3. 바른 교훈에 거할 것(3:1-17) 4. 바른 교훈을 전파할 것(4:1-22) |
서론 일람 |
1. 기록자 : 사도 바울 2. 기록연대 : A.D. 66-67년 사이 3. 기록장소 : 아마도 로마 감옥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4. 기록대상 : 디모데 5. 핵심어 및 내용 : 디모데후서의 핵심어는 "인내"와 "가르침"이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강건하게 지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디모데에게 닥칠 모든 시련들을 잘 견디라고 권면한다. 그는 또한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믿음과 의로운 가운데에서 생활하라고 훈계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다움에 다른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가르치게 될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한다. |
디모데후서 서론 |
디모데후서 바울의 최후 서신으로서 디모데전서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개인적인 서신이다. 디모데후서는 내용에 있어서도 수신자인 디모데 개인에 대한 격려와 개인적인 간증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전도자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적 지침서'라는 평을 받는다(Ignatius, Marxsen). 또한 본 서신은 목회서신으로서 교회의 개척기를 지나 제도적인 교회가 출현하기까지 공백기의 과도적인 교회 생활에 관해 이해할 수 있는 현존하는 자료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자료이다. 즉 본 서신을 통하여 이단의 현저한 성장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초대교회의 위기 등을 알게 된다. 사실 바울서신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부류들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가운데 고린도전서는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언급하였고,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자를, 골로새서는 일부 철학적인 이단 사상을 언급하였지만 매우 간헐적이고 지엽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 사상의 대두에 대해 교회가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는 권면은 목회서신, 그 중에서도 특히 디모데후서에 두드러지게 언급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디모데후서가 기록된 시기와 초대교회 후반에 교회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특히 디모데후서에서는 보다 체계화된 신조가 나타나는데, 이는 신앙을 분명한 말로 기록하기 시작한 교회의 사회가 조직으로서 스스로 성장해 가던 시기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성직자 계층이나 기계적인 조직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는 조직과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당면하였다. 이러한 때 본 서신과 같은 지침서는 박해와 이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계속 성장해 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제1부 디모데후서의 역사적인 배경
I.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디모데후서의 서두(참조, 딤후 1:1, 2)에는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도 변호한다. 때문에 고대로부터 본 서신은 저자 문제에 관한한 항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만약 본 서신의 저자 문제가 외적인 증언에 의해 결정된다면 바울이 저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디모데후서가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외증에도 불구하고 비평학이 대두하기 시작한 19세기 초부터 본 서신의 저자 문제에 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제는 역사적인 것으로서 바울의 전도여행 중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기인한다. 즉 목회서신 내에서 발견되는 바울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은 사도행전의 기록과 일치되지 않으며 바울의 잃어버린 역사 기록을 가정한다 할지라도 그가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의 행적에 대한 재구성은 단지 목회서신과 가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목회서신이 포함하는 내용상의 불일치, 즉 지극히 발전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 바울 당시의 교회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는 주장이다. 이와 더불어 교리적인 문제가 반론으로 제기되었는데, 디모데후서에서 밝히는 교리적인 내용들은 순수하게 바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본 서신의 저자 문제와 관련된 반론으로는 교회의 성장 문제와 문체 문제 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의 저작을 인정하는 것보다 디모데후서의 바울 저작을 부정하는 이론들을 설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여하튼 디모데후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 비하여 현저한 특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인정하여야 한다. 또한 본 서신의 저자 문제에 있어서도 반대설이 유력한 근거를 가졌다는 사실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전통적인 바울 저작권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만일 바울이 로마의 1차 투옥에서 풀려나지 않고 순교하였다면 바울의 이름을 빌어 위작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물론 '해리슨'(Harrison) 같은 학자는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위작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초대교회의 도덕적 표준에 기초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Thiessen). 한편 외증과 내증이 보장하는바 바울의 2차 투옥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은 당연히 동역자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유서와 같은 서신을 보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의 절필로 알려진 디모데후서가 앞선 바울서신들과 풍모를 달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기다가 본 서신의 성격이 개인적인 서신이라고 할 때 심각한 교리 문제를 새삼스럽게 다룰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목회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사적인 감회가 뒤섞인 문장을 쓰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 서신에 문제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답변 못할 문제가 제기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본 서신의 저자는 바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2. 수신자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의 수신자를 결정하는 문제는 서신 자체의 주장을 통하여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는 수신인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는 바가 없다. 다만 디모데전서를 받아 본 디모데나 두 번째 서신을 받은 디모데의 사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본 서신 서두에 언급된 디모데가 본 서신의 수신자라고 쉽게 결정할 수도 있다. 사실 초대 일부 교회에서는 본 서신의 저자와 수신자를 한데 묶어서 바울과 디모데라고 생각했던 일이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도직을 구구하게 변명하는 것은 바울과 오랜 세월 동안 동역자로서 함께 일했던 디모데와의 친분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매우 어색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문장 전체가 냉담하다는 면에서 근거를 찾았다. 하지만 본 서신은 목회서신으로서, 첫째, 이단을 경계하고, 둘째, 개인의 윤리와 훈련을 강조하고, 셋째, 교회의 조직 강화와 같은 행정적인 지시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다소 냉담한 성격을 띠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수신자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도 저자 문제와 같이 뚜렷하고 확정적인 반론이 제시되지 않는 한 디모데로 봄이 타당하다 하겠다.
II. 기록 연대
디모데후서의 기록 연대는 바울의 사역 연대를 정하는 것으로 쉽게 결정지을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사역 연대, 특히 사도행전의 보고 이후의 사역 연대에 대해서 어떤 단언도 내릴 수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기록 연대를 결정하는 일도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으며, 여러 가지 견해들이 속출하였다. 초대교회의 문헌들을 보면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Clement). 그리고 그 시기는 64년에 시작한 네로의 박해 기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런데 본 서신은 바울의 순교 직전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순교 시기를 정하는 문제는 본 서신의 연대 결정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이 박해 기간 초기에 순교한 것으로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박해 기간 말기에 바울이 순교 당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자의 견해에 의지한다면 바울은 64년경에 순교했으며 디모데후서를 비롯한 목회서신들은 순교 직전인 64년경에 기록된 것이 된다. 즉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재투옥 직전에 기록되었을 것이고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투옥 기간에 쓰여졌을 것이다(Hart, Plummer, Findlay).
반면에 바울의 순교 시기를 박해 기간의 말기로 생각하는 학자들은 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67년에 바울이 순교했다고 주장한다(Gnilka, Marxsen, Holtzmann). 바울의 사역 연대를 이렇게 결정할 때 목회서신 내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은 다소 해결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에서 풀려나고 다시 투옥될 때까지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목회서신 사이의 연대적인 모순점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한 마게도냐까지 바울이 여행할 정도의 기간이 요구되는데, 단순한 여행이 아닌 각 교회를 들러 격려하고 교훈을 주면서 행한 여행이니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더욱이 디모데전서나 디도서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점들을 다룰 뿐만 아니라 동역자들에게 자신의 전도여행 경험을 토대로 한 지침을 들려준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상당 기간 동안 사역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와 동시에 학자들은 기준이 될 수 있는 연대를 바울의 사역과 결부시키는데 그것은 네로의 죽음이다. 네로는 68년에 자살하였고 따라서 네로가 죽기 직전, 그의 대박해 말기에 바울은 순교했다. 이렇게 본다면 디모데후서의 기록 연대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체포되어 로마 감옥으로 이송된 후 다시는 풀려날 것 같지 않은 심정으로 서신을 기록한 67년경이 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연대 결정은 디모데후서를 바울이 기록하였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바울의 친한 동역자가 혹은 여러 사람이 본 서신의 편집을 맡았다면, 이 편집은 바울의 사후에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Deissmann). 그러나 목회서신이 위작이라고 한다면 그 저작 시기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바울의 사후 다른 동역자들에 의한 편집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본 서신의 내용과 2세기의 영지주의를 관련시켜 연대를 결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 서신과 영지주의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바울서신들과의 관계를 먼저 고려해야 하며, 고린도전?후서를 비롯한 옥중서신들에서 디모데후서에 나타난 거짓 교사와 유사한 바울의 적대자들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본 서신과 영지주의, 그것도 2세기의 발전된 영지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무리한 논리이며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의 연대 결정은 바울 저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바울의 순교 직전인 64년 혹은 67년경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다만 이 글에서는 바울의 전체 사역 연대에 비추어 67년경으로 정하기로 한다.
III. 기록 목적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로서 바울서신 내에서나 교회사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일생을 전도 사역에 바친 노사도의 마지막 목소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디모데에게 보여준 특별한 조언은 교회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는 목회자를 위한 지침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요 임무를 밝히며 인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고난 체험을 간절하게 말하였다. 즉 전도자로서 당하는 고난이란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더욱이 그는 지금 박해의 현장에서 수인의 몸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은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또한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것을 권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에서 바울은 앞으로 다가올 도덕적 타락과 그에 관한 대처 방안을 디모데에게 가르치고자 하였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고난 체험을 상기시키면서 디모데에게 전도 사역을 계속하라고 당부한다. 결국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로 자리를 잡아가는 디모데에게 지도자로서 소양과 앞으로 교회가 떠맡아야 할 일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부수적으로 따를 고난 등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제자를 아끼는 노사도의 애틋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바울은 자신의 굳은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위로와 지침을 제시하였다 하겠다.
IV. 특징 및 구조
1. 특징
1) 문체적인 특징
디모데후서는 목회서신이면서도 디모데전서나 디도서와 문체면에서 약간 다르다. 대개 학자들은 본 서신이 바울의 마지막 서신이라는 점에서 이 문체적 차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즉 바울은 로마 감옥에 두 번째로 수감되어 다시는 풀려나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디모데에게 마지막 서한을 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전도 사역을 마감하는 글을 써야만 했다.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본 서신의 문체가 유창하기는 하지만 박력이 결여된 이유가 설명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이 마지막 서신이라고 할 때 본 서신 안에 나타나는 독특하고 영지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한 표현들은 역시 본 서신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보다 늦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의 문체적인 특징은 노사도의 중후한 무게가 전달되는 신앙고백적 권면과 간증이라는 점이고, 바울의 개인적인 감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문체라 하겠다.
2) 내용상의 특징
본 서신은 바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백조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아마도 이 별칭은 백조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에 기초한 듯하다. 여하튼 본 서신은 바울의 유서와 같은 서신으로서 함께 죽고 함께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에 대한 참여를 약속하는 신앙의 노래이다(Deichgraeber). 뿐만 아니라 복음 선포는 '위임된 보화'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는 이 복음을 성실하게 전해야 할 의무를 가졌으며, 따라서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가 복음을 전승 보존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게 위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본 서신은 사도적 소명의 계승에 관한 분명한 언급을 포함한다. 더욱이 그는 복음 선포의 올바른 성격을 보전해야 하는 일련의 전승들을 사용하였다. 즉 그는 복음 선포의 승계를 위하여 합법적인 행위, 곧 안수를 전제하고 안수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하였다. 바울은 안수 받은 사람이 항상 새롭게 활동하도록 하는 은사를 갖게 될 것이라고 한다(참조, 딤후 1:6). 따라서 바울이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 바는 위탁된 은혜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자신의 활동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과 전력을 다한 복음 선포가 그들을 복음 전도자로 세운다고 하였다. 디모데후서의 이와 같은 성격은 이후 바울의 사도권이 누구에게 계승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한계와 범위를 규정하였다 할 것이며, 실제로 속사도 시대에 있어서 사도권 계승 문제의 척도가 되었다.
2. 구조
디모데후서의 구조는 디모데전서나 디도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디모데후서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으며, 그 토대 위에 복음의 능력과 복음 사역자의 인내, 그리고 복음 메시지의 보호 및 선포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본 서신의 구조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복음의 능력(참조, 딤후 1:1-18)을 다루는 부분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의 능력 가운데 굳게 서서 반대 세력을 극복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바울은 특별히 오네시보로의 용기와 열심을 예로 들어 참된 복음의 능력 가운데 굳건히 선 자의 표상을 제시한다.
두 번째로 복음 사역자의 인내(참조, 딤후 2:1-26)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복음 사역자는 열심히 일하고 군사처럼, 운동선수처럼 혹은 농부처럼 자신을 훈련시키라고 권면한다. 세 번째, 복음 메시지의 보호(참조, 딤후 3:1-17)에서 바울은 장자 닥칠 복음에 대한 헛된 종교와 거짓된 가르침의 위협을 경계하여 악을 물리치고 성경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에 대해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을 가지며, 그에 힘입은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고 디모데에게 권면한다. 네 번째, 복음의 선포(참조, 딤후 4:1-22)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경험을 상기시키고 어떠한 대적의 위협에도 굳게 서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이 처한 최근의 상황을 설명하고 몇 가지 요청을 하는 것으로 본 서신을 끝맺는다
제2부 디모데후서의 특별 주제들
I. '구주'의 개념에 대한 고찰
초대교회의 문헌들에서 '구주'란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종말론적인 의미를 내포하는가 하면 전쟁에서의 조력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신비주의적인 문헌들에서는 새 생명의 창시자라는 의미도 함축한다. 그러나 어떤 표현들에서는 분명히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 용어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용어를 사용하게 만드는 사상적인 연관성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1. 초대교회에서 사용된 '구주'
'구주'라는 용어의 사용은 초대교회, 특히 목회서신 언어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구주'란 말은 헬라적인 전문 용어의 성격과 다르다. 왜냐하면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이 용어를 분명히 종말론적인 의미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 구주는 구원자와 동일시되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첫 번째 증거를 빌 3:20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분명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시한다. 즉 빌 3:20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빌 3:19)와는 달리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한 구절을 더 언급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하늘로부터 오실 그리스도, 곧 구주를 기대한다. 두 번째 증거로서 살전 1:10을 보면 마지막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등 종말론적인 문제들이 다루어진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 '구주'라는 말이 사용될 때 그것은 헬라 사상과는 별도로 종말론적인 맥락에서였다고 하겠다.
2. 70인역(LXX)과의 비교
'구주'라는 용어는 70인역에서 대략 네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첫째로 '구주'란 용어가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었는데, 사사들(참조, 삿 3:9, 15; 느 19:2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로 전쟁에서의 조력자를 가리키기도 했다(참조, 삿 12:3). 하지만 이러한 용법은 종교적인 용어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사들을 구주로 번역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용례들이 위인들을 존경하는 '명칭'으로서 '구주'란 말을 사용한 헬라어적 언어 습관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두 번째로 '구주'라는 용어가 '구원하는 자' 혹은 '구하는 자'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이때에도 종교적인 배경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 경우 그 대상이 분명 인간은 아니다.
따라서 구원하는 자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지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히브리인들은 메시아 대망 사상과 연관짓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로 70인역의 많은 본문들 가운데 '하나님과 구주'라는 공식 문구적인 용어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표현들이 히브리어 원문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며, 유대적 사상이 다루어진 문맥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헬라적인 영향을 인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70인역에서는 헬라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본문들이 있는데, 이 본문들은 모두 불멸과 영생에 관련된 것으로서 '구주'의 영원성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70인역에 나타나는 '구주'라는 용어는 초대교회에서 사용했던 '구주'의 특성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70인역을 헬라 문화권의 부산물로 간주할 경우, 초대교회에서 사용된 '구주'의 개념과 헬라 문화권에서의 '구주' 개념은 전자가 종말론적으로 사용되었다면 후자는 신적인 영역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하겠다.
3. 유대교의 '구주' 개념
70인역을 통해 '구주'란 말이 헬라적 유대교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명칭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일련의 본문들로부터 하나님이 셈족 계통의 토양에서는 그러한 명칭으로 불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Gressmann). 그러나 '구주'란 명칭이 이미 그리스도교 이전에 메시아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결론 내리기 어렵다. 왜냐하면 유대교 문헌들(18개의 기도문, 미드라쉬 등)에서는 장차 임하게 될 구속자에 대해 언급하지만 '구원하는 자'라는 용어가 유대 본문에 속하는지는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구속자'가 유대적인 메시아의 명칭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명칭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헬라적 용어와 유대적인 용어의 결합은 '필로'(Philo)에게서 나타난다. 헬라적인 어조의 본문에서는 '구주와 은인'이란 말이 '우주의 창조자와 생성자'란 말과 나란히 나타난다. 이는 구주라는 밀에 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으로서 세상의 주인과 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헬라적인 사고에서 가능한 것으로 하나님을 구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구주와 동일시할 수 있는 헬라인들로서는 '구원하는 자'란 모든 고민을 해결하는 '만병 통치약'을 주는 아버지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목회서신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된 '구주'라는 용어도 '클레멘트'(clement)가 기도문에서 사용한 용어와 마찬가지로 헬라적 유대 문구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리켜 '구주'라고 표현한 문구들(참조, 딤전 1:1; 딛 1:3; 2:10; 3:4)이 헬라적 유대교의 공식적 언어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부르는 전문적인 명칭이 유대교의 메시아 명칭으로부터만 유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주'라는 명칭은 그리스도교 문서의 초기 단계에서도 나타났으며, 또한 그리스도교적 헬라 문서들 곧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요한 문서들과 베드로 문서, 그리고 목회서신들 및 이그나티우스 서신들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유대적인 연관성이 암시되었지만 비유대적인 영향이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두 가지, 즉 헬라적 사상 계통과 동방적 사상 계통을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4. 헬라적 사상과 히브리적 사상
'구주'의 개념에 대한 헬라적 사상과 히브리적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합리적, 이성적인 반면에 후자는 종교적, 역사 발전적인 점이다. 먼저 헬라적 정신의 기반인 제우스 신화에 의하면 '구주'란 말은 일반적으로 '제우스'의 아들인 '디오스구로'(Dioscuri)에게 붙여진 이름으로서 '구원하는 신'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이 말이 신비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구주'는 신비주의자들에게 생명을 주어 재생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을 가리키게 되었다(Reitzenstein). 물론 동방의 일반적인 구속자 개념의 유입으로 통치자 숭배에까지 적용된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이처럼 헬라 사상에 있어서 '구주'는 인간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들은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나 구원하는 자들의 표상을 가시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구주'의 모습을 그들이 볼 수 있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인간들에게 적용시키게 되었다(Presigke). 이러한 예를 '호머'(Homer)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신들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는 역시 신과 인간 사이의 뚜렷한 한계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그러한 한계를 무너뜨리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죄로 생각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점은 구약성경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서 헬라 사상 안에 이미 구약성경에 비견되는 종교가 들어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헬라 사상이 갖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은 한계가 있었다. 즉 헬라인들의 기본적인 개념과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신에 대한 관념은 인간적인 것에 적용되었다 하겠다. 다음으로 동방으로부터 유래한 신들의 경우, '구주'란 명칭의 사용이 신적인 생명을 부여해 주는 것과 관련되었다. 즉 히브리적 사유에 있어서 신에 대한 이해는 다 형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헬라의 조형적인 묘사와는 다르다.
따라서 '구주'라는 말의 히브리 종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역동성에서 발견된다. 즉 '구주'라는 말 속에는 신의 계시와 신의 축복과 구원의 시대가 내재되어 있으며, '구주'의 활동과 통치 가운데서 이 의미는 역동성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벤트란트'(Wendland)는 헬레니즘 종교 가운데서 인간이 영웅화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갖는 사상적 기반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히브리적 사유의 기반에서 신에 대한 역사 발전적인 이해가 종말론적 미래 지향적인 세계관을 낳았고, 그로 인해 '구주'의 개념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갈파하였다.
5. '구주'와 예수의 신성
신약성경에서 '구주'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이 세상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해 말할 때마다 사용된 용어가 황제 숭배의 용어와 유사할 경우, 일반적으로 통치자 숭배를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딤후 1:10의 경우가 그러한데 '구주의 나타나심'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언급함은 물론 생명을 부여함에 대해 언급한다(Windisch). 따라서 초대교회가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교적인' 용어를 그대로 채용한 것인지 아니면 통치자 숭배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로마에 대해 반대하던 시기에 나온 문서들에 의하면 '구주'는 분명히 통치자 숭배에 대한 반대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의 '구주'란 명칭을 단순하게 헬레니즘 사회의 통치자 숭배에 대한 거부의 부산물이라고 결론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적인 술어의 사용이나 생명의 부여, 혹은 구원 시대의 통치자라는 사상만으로는 '구주'란 말의 개념이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헬라적인 용법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공식문구에서도 폭 넓게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의 기원을 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그것의 발전 과정도 추적하기 힘들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대용어로 널리 사용하게 된 명칭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론적 사상 체계를 확장시킨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용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 적용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명칭을 가지고 단순히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려 했던 것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나 목회서신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구주'의 오심은 헬레니즘의 황제 숭배 사상과는 구분되며, 오히려 구약성경과의 연결성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구주'라는 칭호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켰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또한 '구주'의 현실적인 영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발현되었다.
II. 디모데후서의 역사적 상황
1. 바울의 행적
딤후 1:17을 토대로 생각하여 고대와 현대의 학자들은 로마가 디모데후서의 기록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서신의 진정성을 인정할 경우, 대체로 두 번째 로마 투옥에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본다. 이 투옥은 로마에서의 1차 투옥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을 전제하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그는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2, 3년 간 헬라와 소아시아를 방문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바울이 서바나 여행을 성취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두 번째 투옥 및 그 이전의 서바나 전도에 대한 가설은 오직 행 27, 28장에서 바울이 서바나 전도를 소망한 일과 '클레멘트'(Clement)의 서신을 근거로 주장될 수 있을 뿐이다. 그만큼 바울의 서바나 여행은 증거가 빈약하다. 다음으로 본 서신이 첫 번째 로마 투옥 때 기록되었다는 가설은 딤후 4:13, 17을 볼 때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생각하기 어렵다. 더욱이 딤후 4:20의 언급으로 인해 그 가설은 전적으로 부정된다.
즉 행 20장에 의하면 드로비모는 바울 일행을 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질 때 바울에 의해 밀레도에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딤후 4:20에 의하면 드로비모는 수년 뒤에 병이 나서 밀레도에 머물렀다. 더욱이 에베소 혹은 그 근처에 있었던 디모데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로마에 있던 바울이 서신을 받고서야 안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딤후 4:20 이하에 언급된 개인적인 진술들은 가이사랴가 본 서신의 기록 장소임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바울을 돕던 자들은 데살로니가, 갈라디아, 달마디아, 에베소 등으로 흩어졌다. 만약 이것이 바울의 명령에 의한 여행이고, 바울은 고린도, 드로아, 그리고 밀레도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면 이 모든 사실들은 행 20, 21장에서 입증된 여행 경로와 일치한다. 또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이 밀레도에 머문 시기는 그렇게 오랜 시기가 아니었다.
딤후 4:13에 의하면 드로아에 남겨 두고 온 외투에 대한 언급은 앗소까지 걸어서 여행한 기록(참조, 행 20:13)과 연결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 23:1-10과 딤후 4:16, 17사이에는 일치하는 점들이 많다. 또한 딤후 4:21에 언급된 이름들의 명단도 가이사랴를 기록 장소로 생각하는 가설에 반대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행 20:4로부터 가정할 수 있는 사실, 곧 디모데가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동의했다는 사실이 딤후 4:20과 같은 보도를 쓸데없는 보도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가이사랴설은 반대될 수 있다. 더구나 딤후 1:17에 나온 로마에 대한 언급은 가이사랴에서 기록되었으리라는 가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본 서신의 기록 장소를 로마의 감옥으로 보고 그것을 두 번째 투옥으로 보았을 때 바울의 두 번째 아시아 여행, 곧 제4차 전도여행을 가정할 수 있다. 물론 제4차 전도여행이란 가정에 불과하고 그 행로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 다만 목회서신을 중심으로 대략의 여정을 재구성해 보면 바울은 니고볼리에서 체포될 때까지(참조, 딛 3:12) 그레데(참조, 딛 1:15), 밀레도(참조, 딤후 4:20), 골로새(참조, 몬 1:22), 에베소(참조, 딤전 1:3), 빌립보(참조, 딤전 1:3) 등을 여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67년경에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다시 투옥되는 처지가 되었다. 본 서신은 바로 이때의 투옥 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2. 바울 개인의 상황
디모데후서에 나타난 바울은 일생을 복음 전도에 바친 노사도의 위엄과 자애로운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년은 매우 외로운 상태였던 듯하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떠났고(참조, 딤후 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 두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참조, 딤후 4:10). 비로 임무 수행 차 떠났지만 그레스게와 디도, 그리고 두기고 등도 그의 곁에 없었으며(참조, 딤후 4:10-12), 누가만이 그의 곁에 남았다(참조, 딤후 4:11). 더구나 바울의 2차 투옥은 모든 자유가 박탈된 채 사슬에 묶여 다른 일반 죄수들과 똑같이 취급받았다(참조, 딤후 1:16; 2:9). 따라서 바울의 동역자들조차도 그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참조, 딤후 1:17). 바울은 이제 더 이상 풀려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도 직감했을 것이다. 그는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디모데에게 자신을 위하여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한다(참조, 딤후 1:4; 4:9, 21).
3. 대적자들
바울은 대적자들의 가르침을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딤후 2:23)이라고 하였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특별히 거짓 사도들과 그들의 유혹을 피하라고 권면한다. 실제로 목회서신 내에서는 여러 가지 유형의 대적자들이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디모데후서에 나타난 대적자들은 일련의 특징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도로 조직된 종파를 형성하였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전체 성격은 영지주의적인 사상 체계와 유사하지만 그들은 영지주의와 연결지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추세는 초기 영지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하겠다. 그들의 교훈은 독신 생활을 강요하고 육식을 금하는 등 부당한 금욕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즉 그들은 종교 생활의 내면적인 능력의 결핍을 외적인 제도와 고행 등으로 보상하려는 경향을 보였다(참조, 딤후 3:1). 반면에 이들은 도덕적인 방종의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금욕주의나 방종은 모두 종교 생활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개종자들에게는 큰 유혹이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금욕주의나 방종이 교회 내에서 갈등을 일으켰으며 급기야 그리스도교 2세기를 향한 교회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후에 영지주의로 발전하였다(Marxsen).http://cafe.daum.net/oknjc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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