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본받자 i(엡 5:1-2)
에베소서 5장은 4장부터 6장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 그리고 성도들 개인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교훈의 일련기사이다. 이러한 본장을 크게 구분하면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단락은 1-14절이다. 여기서는 4장의 교훈과 연속되는 과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실생활과 관련한 교훈이 주어지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인 15-21절은, 4장부터 이어져온 성도들의 개인 실생활과 관련된 교훈의 결론적 권면이 주어지고 있다. 마지막 후반부인 셋째 단락은 22-33절이다. 이 부분 역시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나 여기서는 성도의 가정 윤리에 대한 교훈이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은 5장을 넘어 6장 9절까지 이어진다.
이런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1절과 2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추구해야할 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내용은 크게 둘로 요약된다.
1.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1절)
바울은 1절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이는 4장 30절에서 언급된,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씀을 전제한 표현이다. 그러기에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보도하였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여기서 ‘본받는 자’로 번역된 ‘미메타이’(μιμηταί)의 원형 ‘미메테스’(μιμητής)는 마치 성대 묘사를 하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특성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미모스’(μῖμος)란 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방적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생한 성도가 가져야할 삶의 제일 원칙이며,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근본이기도 하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그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전체적인 성경 교훈의 원리에서 보면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1) 원론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
그러기에 바울은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고자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 목적은 본서 1장 3-6절에서 밝힌바와 같이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주시고자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수 있는 아들 됨의 자격을 획득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령을 통하여 인치시고 부르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 효력을 입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자녀가 아버지의 뜻을 좇고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또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선악의 원리적 측면에서 오직 하나님을 본 받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을 본받지 않는 것은 죄요 악이기 때문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선과 의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만사 만물의 창조자가 하나님이시고 선악의 기준을 세우신이도 하나님이시다. 한편 인류의 모든 인생은 그들의 조상격인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실패하므로 인하여 처음 태어날 때부터 죄인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과나무에서는 오직 사과만이 열릴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죄인에게서 출생한 인생이 의인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바 있다.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진정한 선과 의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고, 하나님께 붙어있는 자들만이 선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붙어 있는 천사들은 선한 천사로 인정을 받으나, 하나님을 복종치 않고 떠났던 천사들은 죄와 악의 근원, 곧 사단 마귀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닮아가는 것 말고는 결국 모든 것이 죄일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스스로 선을 추구하고, 더불어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다 죄요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의와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것만이 선이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죄요 악이며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을 본받는 것 자체가 장차 영생의 기업을 누릴 능력이며 영광이 되기 때문
원론적 의미나 선악의 원리 측면에서도 필히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지만 성도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본받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영원한 영광의 상급이 되고 영원한 기업을 누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함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늘의 신령한 복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성경은 말씀한다. 즉 구원을 넘어서서 삶과 관련하여 무한한 영광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9장 6절에서는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교훈하신 바 있다. 즉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한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전체적인 성경의 원리에서 조명해 보면 영광의 상급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충성과 헌신의 분량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 측면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닮았느냐의 문제이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이 하나님이 누리시는 영광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많이 닮은 사람이 그만큼 그 세계의 영광을 더 많이 누리고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세상에서도 아무리 좋은 차가 있다 하더라도 그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기술이 없으면 차는 그림의 떡과 같은 경우와 같다. 세상은 세상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재능으로 느끼며 다스리고 누리며 산다. 배우고 익히지 못하면 배우고 익힌 사람과는 어떤 면에서든 그 누림과 영광의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역시 천국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님을 닮은 인격의 분량에 따라 그 영광을 느끼고 누리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의 영광을 차등적 영광이라 말씀하면서 그 영광을 위해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두 가지 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 하나가 주님을 닮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충성과 헌신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도 절대 필요한 삶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진술한 바 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기도 하였다.
중생한 성도의 일생은 오직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척인 성경의 교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사랑을 받은 자녀이고, 그것만이 오직 선이며 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자신의 영원한 영광을 결정하는 심히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인 것이다.
2. 하나님을 본 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다는 것(2절)
하나님을 본 받을 것을 권면한 바울은 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랑가운데서 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곧 하나님을 본 받는 것 자체가 주님처럼 사랑가운데 거하는 것이란 측면에서 언급한 발언이다. 주님은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청원하자 그렇게 답변하신 바가 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즉 주님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는 것으로, 주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본 받는다고 하는 것은 곧 주님을 본받으라는 것과 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그 모델로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는 표현으로 주님 사랑을 설명하였다. 이 가운데 ‘제물’로 번역된 ‘프로스포란’(προσφορὰν)은 하나님께 드렸던 모든 제사를 통칭한 표현이지만, 무엇보다 감사제가 주를 이룬다. 그렇다는 측면에서 보면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전 생애가 우리를 위해 감사제로 드려진 제물이란 의미를 함축된다. ‘생축’은 짐승의 피를 뿌려 바치는 속죄제를 가리키는 ‘뒤시안’(θυσίαν)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희생을 가리킨 표현이다. 즉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기까지의 전 생애를 바울은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성도들이 본받아야할 하나님의 모범적 행위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진술과 성경의 전체적인 교훈을 접목해 보면 여기에도 역시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1) 조건 없는 하나님 사랑
그것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이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그의 은혜를 입는 우리에게는 티끌만한 어떤 조건도 제시한 바가 없었다.
모든 인생들은 아담의 범죄의 영향으로 출생 때부터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소는 소를 낳고 돼지는 돼지를 낳을 수밖에 없듯이, 죄인의 자손은 죄인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원한 형벌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단 하나 유일하게 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그리스도의 대속이었다.
그런데 그 유일한 길을 주님은 아무런 대가를 구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공짜로 그 은혜를 입혀 주셨던 것이다. 때문에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일도 하지 않고 품삯을 받는 경우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이며, 그러므로 성도들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바울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의 사랑에 대한 교훈은 사람들 간에 사랑하라는 윤리적 차원의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자세를 말하고자 함이 교훈의 주 목적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조건 없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교훈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 14장 13, 14절의 잔치 비유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잔치를 배설하거든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 병(신)들,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의인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겠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 역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라는 것에 교훈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조건을 붙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교훈의 핵심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본 받을 것을 말씀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장 먼저 성도들은 절대 하나님 앞에 조건을 건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됨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 자기 소원, 자기 뜻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들로 도배를 하고 있다. 신앙생활이 오직 자기를 위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득세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빙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절대 그리해선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기 유익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의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2) 하나님을 향한 희생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하되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 받는 삶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희생하신 것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음에서 깨닫는 교훈이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제물과 생축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양자 모두 우리를 위한 희생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생축이란 의미는 앞에서도 살핀바와 같이 피로 드리는 속죄제를 가리킨다. 특히 그중에서는 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해 선택받은 두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위해 드려진 희생의 제물이었다. 두 마리중 하나는 죽임을 당해 그 피가 속죄소에 뿌려졌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요단강을 건너 먼 광야로 끌려가 버림을 받게 되는 운명에 처해져야만 했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그 머리에 안수하고 지명된 사람에 의해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광야로 나가게 되는데, 예루살렘 거리를 지날 때 사람들은 그 짐승에 침을 뱉고, 돌을 들어 던지기도 하고, 더러는 억지로 털을 뽑기도 하여 요단강에 도착할 때는 거의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강을 건너 광야 무인지경에 버려지게 되면 고통에 울부짖다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이리떼들에게 갈 갈이 찢겨져 죽임을 당하므로 그의 생을 그렇게 마감하게 된다. 아사셀을 위해 선택받은 염소를 이렇게 멀리 광야 무인지경에 같다 버린 것은 그 만큼 죄가 멀어졌다는 의미와 함께 죄와의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속죄일 아사셀을 위해 택함 받은 염소의 운명처럼 주님은 우리 택한 백성들을 위해 그와 같은 희생의 제물이 되셨던 것이다. 때문에 주님도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온 몸은 피투성이였다. 머리에 쓴 가시 면류관에 의해 흘러내린 피, 온몸은 로마 군병들의 내리찍는 채찍에 시퍼렇게 피멍이 든 상태였다. 그리고 버려진 염소가 이리떼들에 찢겨져 죽어가야 했듯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옆구리를 창에 맞아 온 몸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렇게 육신의 삶을 마감하셔야만 했다. 그리고 이는 오직 우리를 위함이었다. 그야말로 우리를 위한 말할 수 없는 희생을 감당하신 것이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부터 있을 수 없는 심히 크고 큰 희생이었다. 또한 육신을 입고 오시되 낮고 천한 신분으로 오신 것도 희생 중에 큰 희생이었다. 그러나 희생의 절정은 십자가의 형벌에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던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결코 이러한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죽으실 이유도, 희생하실 이유도 없는 까닭이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그길 밖에 없었기에, 주님은 그 희생을 스스로 선택하신 것이었다. 바울은 바로 이 희생을 본받는 것이 하나님을 본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역시 주님 사랑에 희생적이어야만 한다. 나와 나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헌신적인 충성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바로 이와 같은 헌신적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3) 내세 지향적 사랑
사랑의 목표와 목적이 바로 내세 지향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 세상 적이거나 육신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은 바로 영생의 문제, 오직 구원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은 육신의 것이란 무익한 것이라고 하셨다. 육신의 것이 무익함은 결국 육신은 한시적이요 잠깐이면 모두가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인생의 육신의 삶에 대하여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안개’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 역시 다 영생과 관련된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주님께서 제물과 생축으로 자기를 드리신 것은 우리의 영생을 위함이었지 이 세상에서의 육신적 삶을 위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을 본받을 것을 권유하며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언급한 것은 역시 성도들도 내세를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의 목표와 목적이 육신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하며 살았다고 증거 하였다. 모세가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받는 것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말도 하였다.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돌에 맞고, 칼에 맞고, 톱에 켜 죽임을 당하면서도 구차하게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모두가 이 세상을 위해 산 삶이 아니라 영생을 목표한 삶이었음을 그렇게 증거 한 것이다.
우리 역시 그리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인 것이다. 육신의 것에 인생을 걸어서는 안 된다. 성도가 인생을 던져야 하는 것은 곧 영생을 위함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간곡한고도 절대적인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본받자 iii(엡 5:8-14)
5장 1-3절에서는 큰 주제로 하나님을 본받아야 할 것을 권면하였고, 이어진 4-7절에서는 하나님을 본받기 위한 과정으로 성도들이 심히 조심해야할 5대 절제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본 단락에서는 변화를 이루어 가야할 당위성과 함께 어떻게 변화를 이루어 갈 것인가를 밝혀가고 있는 부분이다. 내용은 5가지로 요약된다.
1. 변화를 이루어야 할 당위성과 구원의 원리(8절)
하나님을 본받아야 함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그 당위성에 대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였다. 즉 과거와는 신분이 바뀌었기에 이제는 전날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바울은 성도들의 신분의 변화와 관련하여 ‘전에 와 이제’ 그리고 ‘어두움과 빛’을 대구(對句)로 삼았다. 즉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빛이라는 언급이다.
여기서 ‘어두움’으로 번역된 ‘스코토스’(σκόοτς)는 ‘어두움’이나 ‘흑암’을 뜻하는 문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죄악 된 삶과 소망이 없는 인생이란 의미로서 어두움을 뜻한다. 즉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인생, 그들의 삶은 오직 세상만을 추구하고 육신의 삶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죄요 소망이 없는 인생임을 지적한 것이다. 윤리 도덕적으로 심히 문란하고, 그 심령이 악질적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인륜적으로는 선하고 의롭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인생 자체가 죄라는 것이고, 따라서 소망이 없는 인생이란 뜻이다.
그리고 빛이나 빛의 자녀란 말은 어두움과 정 반대적인 뜻의 비유다. 즉 그들은 구원의 목적자요 하나님 백성이라는 뜻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소망이 전혀 없던 죄인의 신분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으로 변화가 있었음을 말하고, 그러므로 이제 그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인격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 인격이 어떻게 성장하고 형성하느냐에 따라 신분이 바뀌기도 하고, 신분이 바뀌면 또 거기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아이들의 언어가 어른과 다를 수밖에 없고 어른의 언어가 아이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단 공무원의 품위와 장관이나 대통령의 품위가 달라야 하는 것 역시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제는 빛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의 당위성을 바울은 신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말 한마디라도 가려서 해야 하고, 세상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도 바로 우리가 빛의 자녀이며 빛이기 때문이라는 진술이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동행해주고, 이처럼 세상 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있고 또 양보해야 하는 이유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란 진술이다.
대통령의 언어가 시장 잡배들과 같다면 그것처럼 꼴 볼견은 없을 것이다. 장성한 어른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화되지 못한 언어나 다듬어지지 못한 행동을 보인다면 그것 역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사람은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빛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진술에서 또 다른 구원의 원리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구원의 과정에서 구원이 먼저냐? 아니면 행위가 먼저냐 라는 우선순위에 대한 진리이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본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 반대의 원리로 진술을 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즉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곧 구원에 이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울의 진술은 구원과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신앙의 행위와 관련하여 구원이 먼저이고, 구원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본받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5장 1절과 2절에서도 그러했다. 때문에 1절에서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하였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고 하였다. 자녀가 되기 위해 하나님을 본 받아야 한다는 원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기위해 사랑가운데서 행하라는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가운데서 행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에는 구원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임을 바탕에 깔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창세전 선택의 원리, 오직 선택된 그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자녀를 삼으시고 그들만을 구원하신다는 원리가 이 진술의 배경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로마서 11장 7절에서 구원은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 자신의 의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공로에 감사하고 그것만을 자랑해야 한다. 그리고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성도가 맺어야할 빛의 열매(9절)
주안에서 빛이 되었기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것을 권면한 바울은 9절에서 빛의 자녀들이 행해야 할 삶의 열매가 과연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바울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모법적인 삶의 답안으로 제시한 것이 3가지다. 곧 ‘착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이다. 하나님을 본받는 삶, 즉 빛의 열매는 이 세 가지 열매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착함’에 해당하는 ‘아가도쉬네’(ἀγαθωσύνῃ)는 일반적 의미의 도덕적 선을 가리킨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을 뜻하는 ‘착함’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선하게 사는 삶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기에 영문성경이나 한글 공동번역, 표준 새 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은 모두 선으로 번역하였다. 비슷한 개념의 단어이긴 하나 ‘착함’이란 단어는 타고난 성품을 나타내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선’이란 의지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뉘앙스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즉 빛의 열매란 모든 것에서 선한 행위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지적인 요소를 드러낸 단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자기한테 잘하고, 유익이 되는 상대에게만 선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로 자기에게 어떤 해를 가하고, 또 그러므로 자신에게 크게 손해가 되는 일에서도 성도가 나타내야 하는 행위는 선이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대해서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바 있다.
(마 5:46-48)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즉 성도가 맺어야 할 빛의 열매는 이방인들이 하는 일반적인 경우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세리들, 이방인들도 하지 않느냐고 하신 말씀이 이를 뚜렷하게 지목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성도는 그렇게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영생의 문제가 더욱더 크고 가치 있는 것이기에 세상적이고 육신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희생하고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들의 삶은 모든 것에서 ‘착함’, 곧 ‘선함’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빛의 두 번째 열매로 지적한 것은 의로움이다. ‘의로움’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ῃ)는 ‘흠이 없는’, ‘거룩한’, 또는 ‘신의 법에 순종하는’이란 뜻의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의 여격 단수 명사이다. 본래 이 의로움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신 거룩한 속성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렇게 선언한 바 있다.
(롬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서 ‘의인’할 때, ‘의’로 번역된 헬라어가 바로 본문의 의로움의 원형인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다. 따라서 여기서 성도들에게 이 의로움의 열매가 있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인간이 의로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경우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뜻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으로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받는 일이며 성도들이 맺어야할 빛의 열매라는 사실이다.
성도들의 열매로서 마지막으로 제시된 것이 ‘진실함’이다. ‘진실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진리’로 더 많이 번역된 단어이다. 진리는 결코 거짓되지 않고, 진리는 절대 가식을 허용치 않는다. 자기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술수를 행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성도들이 맺어야할 빛의 열매로 제시하였다는 것은 가식이나 외식과 반대되는 솔직과 정직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거짓되거나 가식적인 행위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언제나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순수함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 자기 포기라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착함’을 실현키 위해서는 세상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어서는 모든 일에 착함으로 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로움이나 진실함은 자기 자신의 포기가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실함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진실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짓이나 가식을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안 되는 자기 문제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빛의 열매가 성도들에게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별한 노력과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 길을 선택해야 함은 우리는 곧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3. 성도들의 삶의 목표(10절)
빛의 열매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한 바울은 10절에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도들의 삶의 목적과 목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밝혀주기 위한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1)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한다는 것
여기서 ‘시험하여 보라’라고 번역된 ‘도키마존테스’(δοκιμάζντες)는 본래 금속을 불에 넣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보는 것을 나타내는 ‘도키마조’(δοκιμαζω)란 말에서 유래한 단어다. 일반적으로는 ‘검증하다’, ‘분별하다’, ‘시험하다’란 의미로 사용된다. 롬 12:2과 빌 1:10에서는 ‘분별하라’는 뜻에 가깝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에 대해 영문성경 NASB는 ‘깨달으려고 노력해야한다'(trying to learn)라고 번역하였고, 한글 현대어 성경에는 “여러분이 과연 어떤 생활을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지를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번역하였다. 따라서 이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피고 분별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곧 주님의 뜻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언제나 면밀하게 살펴야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과거 믿기 이전은 자기 생각, 자기 뜻을 따라 살았던 것이 모든 인생들의 삶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앞에서 빛의 열매에서 ‘의로움’이란 의미가 바로 그런 뜻임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뜻을 따라 순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의 기뻐하심, 즉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하고, 언제나 그것을 앞서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이렇게 권면한 바 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하는 것은 성도는 곧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2) 성도들의 삶의 목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
이는 곧 주님의 기쁘심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말씀이 담고 있는 교훈의 결론이다. 곧 성도는 자기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직 주님의 기쁘심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교회가 타락하여 믿음의 목적이 모두 자기를 위한 것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 믿음의 원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결과론적 의미에서 보면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실제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모두 우리를 위한 역사였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의 결과 역시 그에 따라 약속된 하늘의 상급적 측면에서 보면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자기를 위함에 목적을 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온전히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기쁨을 위한 행위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롬 14:8)라고 고백하기도 하였고, 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후 5:13)고 고백한 바도 있다. 즉 성도의 삶은 오직 주님의 기쁨, 주님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
과거 어두움이었을 때 우리는 모두 자기를 위한 삶으로만 살았다. 그러나 이제 빛의 자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기쁨을 목적한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결코 자기를 위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를 위한 길이 바로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길인 것이다. 육신의 부모가 자식을 위한 길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자기 자식을 위함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 때 그것이 자기 자녀나 가족을 위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성도의 의분(義憤)(11-13)
11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명령하였다. 7절에서는 소극적인 의미로서 불순종의 아들들이 하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들에 대하여 책망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면 13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리어 빛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성도는 잘못된 일에 대하여 의분이 살아 있어야 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물론 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라는 뜻은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어두움의 일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주님께서도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그 시대의 교회와 끊임없는 마찰과 싸움을 이어 가셨다. 세상에 대해서는 더욱더 부정하고 잘못된 일이 수 없이 많았겠지만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한 바가 없으셨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즉 그 시대의 교회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 마귀의 자식들이란 극한 표현 까지 쓰시며 그들을 책망하셨다. 때로는 성전에서 채찍을 들어 내려치시고, 장사하는 자들을 상을 뒤엎으시면서 까지 과격한 행동을 보이시기까지 하셨다. 즉 그 시대의 교회, 잘못된 교회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지 않으시고 격한 분노로 질책하셨고 정죄하신 것이었다.
바울도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며 격분을 쏟아놓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책망의 권고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으로 대충 얼버무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교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과감한 지적과 책망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어두움의 일들이 빛으로 바꾸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어두움의 일에 대하여 12절에서는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앞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성도가 음행이나 세속적 탐욕을 위해 우상을 섬기는 경우를 지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부끄러움으로 생각지 않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마치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무분별한 행위들을 가리킨 지적으로 여겨진다.
교회가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역시 성도가 성도를 책망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드러누워 침을 뱉는 경우와 같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무엇보다 교회의 잘못들에 대하여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아울러 지적하고 책망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을 책망하기 이전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타당하고 절대적인 문제이다. 그저 다른 사람의 눈의 티는 크게 보이면서 자기의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특히 여기서의 어두움의 일이란 사람들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진리와 관련한 문제나 교회 공동체를 문란케 하는 잘못된 행위들을 지적함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진리에 대해서는 가슴이 뜨거워야 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야만 한다. 덥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주님이 책망하셨듯이, 어정쩡한 태도는 성도가 취할 입장이나 태도가 아닌 것이다.
5. 성도들을 향한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뜻(14절)
바울은 14절에서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이사야 26장 19절과 60장 1, 2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내용이다. 이사야 26장 19절은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감으로써 마치 죽은 것 같았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다시금 나라를 재건할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60장 1절과 2절은 시온의 찬란한 미래의 영광을 예언한 일련 기사가운데 장차 시온에 여호와의 영광이 도래할 것과 그 때에 이방인들이 시온의 백성이 될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성으로 도래할 신약의 복음시대를 가리킨 예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이방인 교회와 성도들에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어두움의 일에서 훌훌 털고 일어서 이제 의의 하나님을 좇아 살아야 함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외침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이제는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성도이기에 그들만이 걸어 가야할 다른 길이 있다. 세상 사람들과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가는 길과 동행적인 걸음이 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순종하며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야할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의 지혜로운 삶(엡 5:15-21)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과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문제를 서술해 가는 과정에서 4장 17-24절까지는 성도의 기본 생활 원칙을, 25-32절까지는 이웃과의 관계를, 5장 1-14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본 단락은 이러한 총체적인 교훈의 결론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15절을 ‘그런즉’ 으로 시작하였다. 이는 문단을 전환하는 역할과,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들을 전제하기 위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언급한 뒤에 ‘그런즉’이란 접속사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그런즉’이란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이란 의미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권면의 내용은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1.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삶(15, 16절)
바울은 ‘그런즉’이란 접속사에 이어 15절과 16절에서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3가지로 요약된다.
1) 어리석음과 지혜와 관련된 문자적 의미
앞에서는 어두움에 속한 자와 어두움의 일을 하는 자, 그리고 그들과 대조하여 빛에 속한 자와 빛의 열매를 맺는 자를 말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란 대조를 통해서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결론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 없는 자’로 번역된 ‘아소포이’(ἄσοφοι)는 ‘어리석은’, ‘바보 같은’이란 뜻을 가진 ‘아소포스’(ἄσοφος)의 복수형 형용사다. 그리고 ‘지혜 있는 자’로 번역된 ‘소포스’(σοφός)는 ‘숙련된’, ‘노련한’, ‘지혜로운’, ‘현명한’이란 뜻의 복수형 형용사다. 즉 성도는 세상에서 바보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며 현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결론이다.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드시며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혜롭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인데,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삶인가?
2) 지혜로운 삶의 방법
지혜로운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함부로 행하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살피고 헤아리라고 하였다. 무엇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17절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헤아려야함을 가리킨 표현이다. 지혜와 관련하여 지혜서라 일컫는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한 바 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또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였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임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인 것은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보라는 말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인지를 살펴 행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에 대하여 바울은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로 대신하였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는 세월의 중요성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심히 소중한 가치의 것이라는 뜻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월은 아낀다하여 그것이 남아있거나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돈은 아끼면 오랫동안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세월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끼라는 것은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이 영생의 상급을 준비하는 심히 중요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무궁한 영광, 영원토록 우리의 소유가 되어 우리를 심히 큰 기쁨으로 누리게 할 영광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기에 함부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찌하든 초음을 아껴서라도 믿음에 유익한 곳에 사용되고 드려지도록 해야만 한다.
또 하나 세월을 아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세월이 그리 길지 않다는 뜻이다. 인생이 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번 뿐인 인생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인생의 세월은 그리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세월을 아껴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혹 인생이 두 번 기회가 있거나, 아니면 원시 구속사 때와 같이 평균 수명이 8백년 9백년 산다고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을 칠십으로, 강건하면 팔십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린 시절 빼고, 잠자는 시간 빼고,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빼고 나면 실제 무엇인가 일할 수 있는 세월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성경은 인생의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날아가는 살’, 또는 아침에 잠깐 있다 사라지고 마는 안개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불가불 먹고 살기 위해 부지런도 떨어야 하고, 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형태의 상황과 일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실제 남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에 남은 시간을 TV나 보고, 영화나 보고, 여행이나 하고,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엄벙덤벙 세월을 보낸다면 실제 믿는 일에 짬을 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혜 있는 자,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때가 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믿음의 삶을 심히 신중하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려 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주어진 세월을 허송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 표현이다. 때만 악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 역시 본성이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2. 주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17절)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보도한 바울은 이어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면하였다. 비슷한 권면은 앞의 10절에서도 보도 한바 있다. 그리고 이는 15절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는 연장선에서 주고 있는 결론적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훈은 두 가지 상반된 문장을 생각 할 수 있다.
1) 어리석은 자
바울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원어는 생각이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아프로네스’(ἄφρονες)다. 15절에서 지적되었던 ‘지혜 없는 자’란 뜻이 주로 지적인 측면이 강조된 단어라면 ‘아프로네스’는 행동까지를 포괄하는 좀 더 강한 의미를 지닌 단어다.
주님은 이 어리석음의 좋은 본으로 소출이 풍성한 부자를 말씀하신 바 있다. 한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쌓아둘 곳이 부족하자 그는 곡간을 헐고 새로 크게 지은다음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다. 그리고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저 육신적인 삶, 곧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삶이라는 말씀이다. 왜 이것이 어리석은 것일까? 인생은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 영원한 영생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도 영생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이 세상적인 문제, 육신적인 평안과 부요를 쫓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문제나 육신의 쾌락을 쫓는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때문에 바울은 그런 것을 추구하지 말고 믿음을 우선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2)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지혜’란 어리석음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말로 어리석음과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이해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쉬니에미’(συνίημι)다. 이 단어는 ‘함께’나 ‘더불어’란 뜻의 전치사 ‘쉰’(σύν)과 ‘보내다’란 뜻의 ‘히에미’(ἵημι)의 합성어로, 본래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어떤 대상과 자기 마음을 합하여 그 본질을 깨달아 아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러니까 주의 뜻을 마음에 품고 그 뜻의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함을 권면한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에 ‘오직’이란 우위접속사를 붙여 필히 그리해야한다는 것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어휘에는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이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깨닫기를 원하는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하고, 또한 깨닫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의 욕구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소원보다는 그렇지 않은 마음이 더욱더 강렬하다는 의미도 전제되어 있다. 현재 능동태 명령어인 ‘쉬니에미’를 사용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타락한 인생의 본성은 일반적으로 세상 것을 추구함에는 본능처럼 갈망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그렇게 능동적이거나 솔선적이를 못하다. 때문에 바울은 롬 3장 11, 12절에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지적한 바도 있다.
그러기에 중생한 성도라면 세상 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지혜 있는 자의 삶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유치원 몇 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거기에다 대학원까지 계산하면 거의 반평생을 배우는 일에 투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말씀의 가치를 모르는 주님 당시의 시대를 지적하고자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드셨던 경우가 있다. 그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듣고자 황금만 일백 이십 달란트, 즉 4000kg이 넘는 금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대하면서도 그 말씀의 가치를 전혀 귀하게 생각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스바 여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세상 것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없다면 그 책망은 곧 우리를 향하신 책망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건과 현실에서도 먼저 주의 뜻을 헤아리는 신중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성도의 삶, 지혜 있는 자의 삶이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이다
3. 성령 충만한 삶(18절)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할 것을 강한 어조로 권면한 바울은 이를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길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다.
여기서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대조법으로 사용한 것은 역시 육신 중심의 삶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비교하고, 또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문제를 지적코자 함에 목적이 있다.
당시 이방신전에서는 간음뿐만이 아니라 신전 제사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는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졌고, 이런 것들이 자랑거리로 여겨졌다고 전해진다. 바울은 바로 당시 우상을 섬기는 방탕한 종교를 지적하며 성도는 그리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이방의 종교가 술의 힘에 자신을 내 맡기고 행동하지만 성도는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야 함을 권면코자함에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성령 충만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리 충만 이라 답변할 수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언제나 진리와 함께, 진리로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이 진리 충만 이란 의미와 같은 뜻이란 확인은 바로 앞 절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할 것을 권면하였다는 것과 함께, 뒤의 21절에서 결론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권면한 말씀에서도 이를 증명해 준다.주의 뜻을 이해하라고 할 때, 그 주의 뜻이 바로 진리이고, 그리스도를 복종하라는 것 역시 진리에의 복종을 뜻한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삶은 바로 진리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 안에 진리가 충만하고, 진리가 우리의 삶을 주관해 간다면, 즉 언제나 우리의 생각이 진리에 의해 주관되고, 그 진리의 인도함을 따라 생활해 간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인 것이다. 우리가 주일에 들은 말씀을 늘 그 주간 기억하려고 애를 쓰고, 기도할 때 마다 다시금 들은 바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그 말씀이 우리를 주관케 하고자 함이고, 그것이 곧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성령 충만한 삶인 것이다.
4. 주님을 경외하고 복종하는 삶(19-21절)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함을 권면한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령한 예배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감사함 마음으로 사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진리에 복종하는 삶이다. 19절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말하였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광경을 묘사한 발언이다. 즉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20절에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이 역시 성령 충만한 삶의 중요 요소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사한 마음이 없고 불평과 원망, 짜증 섞인 삶은 성령이 충만치 않다는 증거일 수 있다. 또한 믿음의 목적이 온통 자기와 자기 세상을 위한 것에 있다면 이 역시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닌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망과 짜증은 언제나 성도가 자기 욕심, 자기 세상 것에 치중한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는 성령 충만한 삶의 최종적 결과로 제시된 중요 요소이다. 즉 성령 충만한 삶은 진리에 복종하는 삶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다 망쳐진 것은 바로 성령 충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성령 충만을 어떤 신비한 이적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받는다거나,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왜곡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로인하여 교회들이 진리에 대한 관심,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에 대한 진실한 삶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온통 신비한 능력 체험에 열들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 충만한 삶의 결론적 요소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 하나님께 대한 감사, 그리고 진리에 대한 복종이 그것이다.
믿음이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첫 번째 요소로 예배를 이야기하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믿음이란 무엇을 바라고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감사란 그 자체가 현실에 대한 만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자기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다. 복종이란 단어는 이유를 막론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 그리고 달라는 것이 아니라 드리고 헌신하고픈 마음,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삶이 곧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것이 바울이 내린 결론이다. chongshin.re.kr/zeroboard,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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