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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엡 4:25-32)

by 은총가득 2021. 5. 19.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엡 4:17-24)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사와 교회 공동체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 바울은 이어서 성도들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원리와 원칙에 대해서 교훈을 이어가고 있다. 중생한 성도들이 필연적으로 거치고 해결해야할 생활 원리는 크게 두 분으로 언급되었다.

1. 믿기 이전 옛 사람의 행실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17-19절)

이는 17절부터 19절까지에서 진술되고 있는 내용이다. 성도가 과거 믿기 이전 살아왔던 삶을 청산해야 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의 양태 3가지를 지적하였다.


1)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17절)

17절에서 바울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성도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이러한 허망한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누스’(νοῦς)는 ‘정신’이나 ‘이성’, ‘생각’이란 뜻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리고 ‘허망’으로 번역된 ‘마타이오테스’(ματαιότης)는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결과도 없다는 뜻으로서 로마서 8장 20절에서는 ‘허무’로 번역되었고, 베드로후서 2장 18절에서는 ‘허탄’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두 가지 의미에서 조명해 볼 수 있는 단어이다. 하나는 목적이 없으니 결과도 없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근원적으로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그 결과 역시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내용상 후자의 경우가 좀 더 본 단어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진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목적을 가진들 세상이 전부일터이니 그 결과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방인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그러기에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고작해야 이 세상뿐이고 그러므로 결국은 모두가 허망한 것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허망한 마음’이란, 그 생각이 세상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 표현이다. 추구하는 삶과 목적이 온통 육신의 것, 이 땅의 것에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서 성도는 이러한 삶의 양태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이전은 세상이 모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라고 추구하는 것 역시 세상에 것뿐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였다. 그러기에 본서 2장 3절에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믿고 중생한 이후에는 이 세상은 그야말로 허망한 것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생의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 것을 추구해선 안 되며 이제는 영생의 것,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소원하며 살아야 함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 진정으로 믿음을 승리한 자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은 결코 이 세상을 목적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모세에 대해서는 히브리서에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고 하였다. 바울 역시도 세상 것에 대해서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고백한 바 있다. 또 골로새서 3장 2절에서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면하기도 하였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하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주님 역시도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고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행태라고 지적하기도 하셨다.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살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살 것을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세상 것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며 추구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은 본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허망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먹어도 먹어도 또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요 4:13)로 비유하기도 하셨다. 세상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는 ‘불의의 재물’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성도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불의한 일이라는 뜻이다. 이어진 10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영생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란 표현이시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 것을 위해 기도하고 육신의 문제를 위해 주님을 찾는 경우들이 다반사다. 코미디언을 하다 목사가 된 어떤 사람은 과거에 코미디언을 할 때는 70평 되는 집에서 살았는데 목사가 된 다음에는 100평 되는 집에서 살고 있다고 자랑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세상 복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허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이와 같은 삶의 양태를 벗어버려야 함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추구하고 거기에 인생을 거는 것이 성도가 추구해야 할 제일의 삶의 원칙이라는 진술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성도들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성도가 받고자 하는 영광은 세상에서의 영광이 아니라는 말이다. 썩지 않는 면류관, 즉 영원한 영광을 얻고자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삶의 원리라는 사실이다.



2) 무지와 마음이 굳어짐(18절)

바울이 두 번째 지적한 것은 총명이 어두워져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이다. 이에 대해 18절에서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지적하였다.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인하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성도들은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총명이 어두워졌다고 할 때 ‘총명’은 ‘사고’(思考)나 ‘이해’(理解)를 뜻하는 말로 하나님을 아는 전인격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것이 어두워졌다고 하였으니 하나님을 알 수 없도록 되어진 인간의 심령상태를 가리킨 표현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총명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아울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진 원인에 대하여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 때문이라고 바울은 지적하였다.


18절의 내용을 보면 한글 개역성경은 세 가지 원인에 의해 하나의 결과에 이르게 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세 가지 원인은 첫째 총명이 어두워진 것이고, 둘째는 무지함, 세 번째는 마음의 굳어짐이다. 이 세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쪽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저희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리고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라는 것이 된다. 즉 두 가지 원인에 의해 두 가지 결과에 이르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중 두 가지 원인은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이다. 그리고 두 가지 결과는 총명이 어두워진 것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총명은 하나님을 아는 전인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게 된 것을 말하고 그 결과적인 측면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지’로 번역된 ‘아그노이아’(ἄγνοια)는 ‘지식의 부족’이란 뜻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심령의 상태를 가리킨 표현이다.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것이 그 과정적 설명이라면 무지는 근원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즉 근본적으로 전혀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는 심령을 말함이다. 아무리 인간적으로는 총명하고 생각이 깊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박사란 칭호를 받아도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이 굳어짐’할 때 ‘굳어짐’으로 번역된 ‘포로신’(πώρωσιν)은 본래 ‘단단하게 굳어진 껍질’을 뜻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역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원어성서대전에서는 도덕적 양심의 기능을 하는 마음이 마치 화인 맞아 가죽처럼
딱딱해져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도덕적 양심의 기능을 가리킨 표현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과 진리를 아는 심령상태를 지적한 표현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이야기함에서 확인 된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 곧 하나님을 깨닫는 지식의 문제와 연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져 있고, 거기에다 도저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도록 그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는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인하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성도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완고한 마음은 그야말로 소망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그 물이 이르는 곳마다 강 좌우에는 나무가 심히 많고 번성하는 모든 생물들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신약구속사에 대한 예언으로 복음이 이르는 곳에 풍성한 구원 역사가 있을 것을 상징한 묵시이다. 그런데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진펄과 개펄은 사해 주변의 진흙구덩이들을 가리킨 것으로, 물이 차 있지 않고 고였다가 이내 빠져버림을 반복하는 형태를 상징삼고 있는 내용이다. 즉 하나님 말씀이 그 마음에 남아 있지 않는 자는 생명의 소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자 노력해야 하고, 진리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심히 유순해야만 한다. 마치 물에 가까이 대기만 하면 물을 그대로 빨아 흡수하는 스펀지와 같이 우리의 심령이 진리에 대해서는 그와 같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면서도 천사가 찾아와 처녀라 하니 처녀임을 믿고 아내로 데려온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아멘의 화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렇게 고백한 말씀이 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3) 방탕과 방임하는 것(19절)

이방인들의 삶의 양태로 세 번째 지적된 것이 방탕과 방임이다. 이중에 ‘방임’으로 번역된 ‘파레도칸’(παρέδωκαν)의 원형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는, ‘~부터’, ‘~곁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παρά)와, ‘주다’, ‘위탁하다’, ‘제물로 바치다’란 뜻의 ‘디도미’(δίδωμι)에서 파생된 단어로 ‘양도하다’, ‘포기하다’란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가 예수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신을 내어주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롬 4:25; 갈 2:20; 엡 5:5, 25).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방탕에 내어주었다는 의미로서 방임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방탕’으로 번역된 ‘아셀게이아’(ἀσελγίᾳ)는 ‘무절제’, ‘방종’, ‘호색’, ‘음란’이란 뜻을 나타내는데, 일부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권리나 감정, 공중도덕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치나 두려움 없이 행하는 추한 행위’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결국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버렸다는 말은 죄와 악에 대하여 포기한 상태를 가리킨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절제하지 못한 채 자신의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마구잡이로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지적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성도들은 이들과 달라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도들은 진리에 의한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말 한마디라도 가려서 해야 하고 행위 또한 역시 마찬가지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제1의 생활원칙은 이상과 같은 과거 옛 사람의 성품을 벗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이다.

 


2. 중생한 사람으로의 새로운 삶이 요구됨(20-24절)

이방인들의 삶의 양태를 통해서 과거 옛사람의 행실을 버려야함을 권면한 바울은 이어서 중생한 성도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1) 진리로 가르침을 받는 삶(20, 21절)

20절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고, 21절에서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을 이어갔다. 진리에 의한 가르침을 받았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써, 성도들은 누구나 진리에 의한 가르침을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진리에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것과 허망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방탕에 자신을 방임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20절에서 ‘그리스도를 이 같이 배우지 않았다’고 할 때 ‘~에 대하여’, 혹은 ‘~에 관하여’란 뜻의 전치사 ‘페리’(περί)를 그 앞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는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페리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이 된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다는 것은 지식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인격적인 배움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을 나타낸다. 즉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그동안 지식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에 가르침을 받았다는 지적이다.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2년여에 걸쳐 매일 강론을 하였을 때(행 19:9, 10) 이러한 가르침을 주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성도는 끊임없이 배우는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에베소 성도들이 매일같이 2년여 동안이나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 것을 보면 우리가 그저 일주일에 두세 번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진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배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되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이 중생한 성도들에게 필히 요구되는 새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이다.

 


2)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삶(22절)

여기서의 ‘옛 사람’은 중생 이전의 육에 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바울의 이론은 철저히 인간을 이분법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생 이전의 사람과 중생한 사람은 그 본질상 큰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한 바도 있다. 여기서 옛 사람은 바로 악에 속한 자를 가리키고, 그러기에 그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앞에서 지적한 허망과 무지, 방탕과 방임이 좀 더 적극적인 불신의 행위를 지적한 것이라면 이 부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즉 육신을 것을 좇고자 하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본성과 욕구에 대한 것을 지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간의 양태는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있는 동일한 성향이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이방인들은 오직 옛 사람 하나뿐이지만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근본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한 바도 있다.
(롬 8:5, 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바울이 여기서 말한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은 육신을 좇는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육신을 좇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 결과 사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히 육신에 속한 생각을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안 되면 실제 신앙생활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옛 사람의 성향과 성질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3)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이루어야함(23-24절)

2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르침을 받았음을 지적하였는데 23절과 24절에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하였다.
성도의 삶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으로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새사람으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함을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사람으로의 변화는 심령의 변화를 말함이다. 그러기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함을 서두에서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심령의 변화를 이루는 방법으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따라야함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따른다는 뜻으로 번역된 ‘카타’(κατὰ)는 ‘~아래’, ‘~을 통해서’, ‘~을 향하여’, ‘~을 따라서’란 뜻의 전치사이다. 그런데 그 뒤에 ‘데오스’(θεὸς)를 붙였기에 한글 개역성경은 ‘하나님을 따라’라고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새사람으로의 변화를 촉구하면서 먼저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그 기준을 명확히 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변화라 해서 되는 대로의 변화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의와 거룩은 그 방향이 종교마다 다르고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같은 사건을 놓고도 생각이 판이하게 갈라지는 경우들은 우리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은 변화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러한 표현을 앞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변화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실체에 대해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에 해당하는 원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ῃ)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인격과 삶을 뜻한다. 거룩 역시 비슷한 의미이지만 좀 더 특수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보다 성결함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은 밀접하게 진리와 연결되어 있기에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 하였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진리가 거룩함만을 수식(修飾)하는 것으로 번역하였지만 영문성경인 NIV나 RSV는 의와 거룩함 모두가 진리에 수식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공동번역성경도 이 부분을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즉 의와 거룩은 진리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며, 아울러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의와 거룩한 삶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진리를 좇는 것이고, 그 진리를 따른 삶이 바로 의롭고 거룩한 삶이라는 결론이다. 우리가 무엇보다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 중요시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진리에 적극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없고, 또 복종과 순종이 없이는 결코 의와 거룩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엡 4:25-32)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생활원칙을 설명한 바울은 이어진 본 단락에서는 중생한 새사람으로서 지켜가야 할 좀 더 구체적인 생활 원리를 제시한다. 내용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25절을 ‘그런즉’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앞 절인 24절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씀과의 연결을 위함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 곧 의와 진리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모두 6가지 방향에서 그 교훈적 의미를 다루고 있다.

 

1. 성도의 언어(25, 29절)

‘그런즉’으로 시작한 25절에서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권면하였다. 여기서 거짓에 해당하는 ‘프슈도스’(ψεῦδος)는 ‘기만’, ‘허위’등 진실 되지 못한 행위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그러면서도 이 단어는 유사함을 나타내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실제는 아니지만 실제와 비슷하다는 개념의 뜻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거짓, 곧 사실을 왜곡시켜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세속적인 것을 중심한 이야기를 말 함이다. 성도의 언어는 모든 것에서 내세 지향적이고, 천국을 목적한 것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그런데 흔히 하는 말로 그래도 돈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라든지, 세상 사람들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분류를 일컫는 말씀이다. 좀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하나님 말씀, 하나님 뜻에 합한 이야기가 아닌 세상 지향적인 이야기들은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 것이란 그 본질이 허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 세상 것에 대하여 ‘불의의 재물’ 즉 불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계시록 21장 8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였고, 27절에서는 거짓말 하는 자들은 결코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기도 하셨다.
세상 것을 불의한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세상 것은 하나의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이란 측면에서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계시록 21장에서 말씀한 거짓말 역시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 말이 아니다. 직접적인 의미는 진리를 왜곡시킨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본 절에서의 거짓말은 근거와 목표가 세속적인 것, 곧 세상 중심적인 이야기를 일컬어 하신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의 의미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세상이 전부인 그들에게 세상에서 출세해야 하고, 어떻게 하든 일단 세상에서 잘살고 보아야 하는 것은 절대 제일의 원리요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언어는 그리해선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함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라는 개념 보다는 믿음 중심, 하나님 뜻에 합당한 언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즉 성도는 언어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언어를 구상(構想)하는 중심이 하나님 뜻, 진리를 근거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단 농담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세속적인 것은 삼가야 한다. 그런 것은 모두 다 거짓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도의 성품(26-27절)

성도가 취해야 할 언어를 언급한 바울은 이어서 성도의 올바른 품성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것이라고 27절에서 지적하였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할 때 사용된 ‘분을 내다’란 헬라어는 ‘오르기제스데’(ὀργίζεσθε)는 ‘화나게 하다’, ‘노엽게하다’란 뜻을 나타낸다. 그런데 뒤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할 때 사용된 ‘분을’이란 단어는 ‘파로르기스모’(παροργισμῷ)로 ‘분개’, ‘진노’, ‘격노’ 등의 뜻으로서 좀 더 격한 분노를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원한이 될 만한 그런 분노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씀에서 보면 사람이 분을 내지 않을 수는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죄나 악한 일을 보고 분을 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그것은 오히려 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예수님도 이런 분을 내신바 있고, 구약에서 비느하스가 이방 여인들로 음행을 일삼는 자를 그 장막으로 들어가 살해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극찬하기도 하셨다(출 32:29). 또 계시록에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잘못된 것을 보고도 분을 품지 않는 행위에 대하여 덥지도 안고 차지도 않아 입에서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여기서의 분은 이러한 의에 속한 공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옛사람 적인 것, 즉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다하여 감정이 뒤틀린 것을 가리킨 말이다. 쉽게 말하면 부부간에도 이러한 분이 일어날 수 있고, 또한 직장에서든, 이웃과의 관계에서든, 심지어는 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도 운전을 하는 사람들 간에 이러한 분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일에 전혀 분을 내지 않을 수 있다면 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죄에 오염된 우리 사람들의 성품은 그럴 수는 없다. 그러기에 분을 낼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죄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분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품성이지만 그 분이 죄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죄가 되는 분이란 계속해서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루의 시간을 해가 지는 것을 경계로 삼았다. 때문에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였던 것이다. 즉 날을 넘기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서 오랜 시간 분을 마음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중국의 속담가운데는 원수는 대를 잇는다는 말이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백성들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억울하고, 또 상대로 하여금 가혹한 피해를 당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원한이 될 만큼 분을 품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웬만한 일에는 노여움이나 격한 감정을 내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작은 것에 감정을 부르르 표현하는 것은 무언가 인격이 덜 된 사람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성도는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돌려댈 수 있을 만큼 너그러움과 여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조건이 있다. 성도들은 육신에 것, 세상 것으로 경쟁하거나 승부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성도의 대세관(對世關)(28절)

즉 성도가 세상일에 임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바울은 28절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십계명가운데 8계명(출 20:15)을 인용한 것으로서 단순히 절도란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다.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이를 취하는 모든 행위나 스스로 일하지 않고 과다한 유익을 도모코자 하는 행위와 같은 경우를 총칭한 표현이다. 그러기에 이어진 말에서 바울은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 자기 일에 대해서도 열심을 다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당한 노력을 통하여 얻은 유익으로 선을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하되 그 목적과 목표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위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빈궁한 자를 구제하라’고 한 것은 하나의 선행을 비유삼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어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열과 성의를 다해야 함을 말씀한 것이다.


여기서 ‘수고하여’로 번역된 ‘코피아토’(κοπιάτω)는 ‘고된 일’, ‘애씀’, ‘고난’ 이란 뜻을 가진 ‘코포스’(κόπος)에서 유래한 말로 육체가 피곤할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해야 함을 나타내는 동사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서 자신이 장막 만드는 일을 하였다고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과 성의를 다했지만 바울은 장막 만드는 일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든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즉 선하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육신에 속한 일도 열과 성의를 다했던 것이다.


성도는 절대 세상에서 공짜를 바래서는 안 된다. 불로소득이나, 자신이 일한 것 이상의 유익을 욕심내어서도 안 된다.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한 것만큼의 소득을 만족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그렇게 열심을 내서 성실하게 일을 하면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이 주어질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기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하여, 주어진 일, 맡겨진 일에 성심과 성실을 다해 임하게 되면 반드시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임을 전제한 표현이다.
바울이 말하는 성도들의 세상일에 관한 대세관은 정직과 성실과 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상 직장에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하겠다는 헌신적인 자세로 임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설령 사람은 몰라준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쁘시게 받으심이 분명하다.
양치기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낙점하신 것은 그가 곧 자신이 맡은 일에 열과 성의를 다했음에 원인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그렇게 고백한 바 있다.


(삼상 17:34, 35)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다윗이 자기가 맡은 일에 얼마나 성실하고 성심으로 임하였는가를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근거이다.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자세가 성도들의 생활 원리임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잠언에서는 그런 말씀을 하신바 있다.
(잠 24:33, 34)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물론 정직과 성실은 사람들 앞에 인정받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세상사 유익을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성도들의 성실과 열정적인 삶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위함이며,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목적을 두어야만 한다. 그리해야만 성실이 성실답게 나타나고, 아울러 오래 인내하며 열심을 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게 되면 얼마가지 않아 그런 열심은 시들해 지기 마련이고, 결과는 좋은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을 한다 해서 그 모든 것을 공평하게만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열심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길에서 열과 성의를 다해야 하고, 성도들은 역시 자기 맡은 바 세상일에 대해서 정직과 성실함, 그리고 열정과 열심히 임해야만 한다. 그것이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 원리인 것이다.

 

 


4. 성도의 선행의 목적(30절)

바울은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근심하게 하지 말라’로 번역된 ‘메 뤼페이테’(μὴ λυπεῖτε)는 ‘슬프게 하다’, ‘근심하게 하다’란 뜻으로서 성도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도로서 살아가야할 삶을 바르게 행하지 않을 때 성령께서 근심하시며 슬퍼하신다는 뜻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격을 가지신 분이심을 전제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는 권면은 단순히 성령의 근심의 문제를 말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과 목표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의미가 있다. 그래야만 선이 선답고 의가 의 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결론으로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것을 강조하였다. 즉 구원에 이를 하나님 백성으로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을 근심케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그러니 너희가 행하는 선행의 목적은 사사로운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곧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곧 하나님 뜻에 불순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성도의 언어, 성도의 성품, 성도의 대세관 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이런 것들을 행해야 하는 목적과 목표가 순수하게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해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렇지 않으면 모든 선행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가식적인 것에 불과하고, 더욱더 그러한 행위는 하늘의 상급 역시 받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뒤에 이어지는 31, 32절과 더 밀접한 연관성에서 주어지고 있는 말씀이다.
아무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성령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여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로 이것이 성도가 취해야 할 선행의 목적과 목표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5. 성도의 자기 개혁(31절)

30절에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한 바울은 31절에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였다. 앞에서 제시한 내용을 번복하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기 위해서 성도가 자기를 개혁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개혁해야할 인간의 성품에 대해 여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1) 악독
악독으로 번역된 ‘피크리아’(πικρία)는 ‘날카롭다’는 뜻을 가진 ‘피크로스’(πικρός)에서 유래한 말로 독기서린 마음에서 나오는 과격한 언행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성경은 이 단어를 ‘독설’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이는 ‘악독’이란 표현보다는 ‘악독한 말’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원문의 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 노함
노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격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란 뜻을 가진 ‘뒤모스’(θυμὸς)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 4장 28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낭떠러지로 끌고 갔을 때의 감정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악독이 포악한 언어를 표현한 것이라면 노함은 포악한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독 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분냄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르케’(ὀργὴ)다. 성경에서는 ‘노함’으로 번역된 ‘뒤모스’(θυμὸς)와 거의 같은 의미로서 병행되어 사용된다. 그러나 노함이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외면적 행위와 관련된 것이라면 분냄은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원한이나 적대감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4) 떠드는 것
이는 고성방가(高聲放歌)와 같이 단순히 큰 소리를 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적대적 감정이나 의도를 가지고 상대에게 악한 말을 퍼 붓는 행위를 가리킨다. 좋지 않은 감정으로 상대방과 마주할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듯이 기선을 제압하고자 먼저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떠드는 것이란 상대를 향해 강한 톤으로 악한 말을 쏟아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5) 훼방하는 것
이는 ‘블라스페미아’(βλασφημία)로, ‘중상’, ‘비방’, ‘모독’, ‘명예훼손’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성경에서는 보통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을 지적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중상모략하거나 수군수군하는 태도를 지적함에도 사용되었다(고전 10:30; 골 3:8; 딛 2:5). 시도 때도 없이 남의 말을 하되 좋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를 말한다.

6) 모든 악의
‘모든 악의’로 번역된 단어는 ‘파세카키아’(πάσῃ κακία)다. 이는 앞에 다섯 가지 행위에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가리킴이다. 아울러 앞에 열거된 다섯 가지를 넘어서서 이러한 악의적인 모든 마음과 행위들을 버려버릴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성도의 삶은 자기 개혁의 과정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여기서 나열된 이런 기질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성향이며 성질들이다. 죄에 오염된 인간들이기에 근본이 이미 이러한 죄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은 무엇보다 자기의 옛 사람을 개혁하는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 성품과 성향이 개혁되지 않는 것은 결국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흠을 이야기 할 계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살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으로의 자기 개혁을 이루어 내야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바도 있다. 우리 역시도 날마다 자기를 잡는 실제적인 삶이 있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이다.

 

 

6. 성도의 자비(32절)

성도의 선행으로 마지막 제시된 것이 성도들의 여유로운 마음, 곧 자비이다. 바울은 32절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함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은 그야말로 조건이 없는 용서요 제한이 없는 용서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로 설명해 주신바 있다. 일만 달란트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빚을 탕감해 주셨음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죄에 대해서는 오백 데나리온으로 말씀하셨다. 그야말로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동전 한 닢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함 받고서도 오백 데나리온 정도밖에 안 되는 남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주심 같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권고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물음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교훈대로라면 우리가 얼굴을 붉히고 싸울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누구도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잘못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관련된 것,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서는 용서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성도가 언성을 높이고 악의를 품고 적개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와 긍휼은 그 이상 천반배도 더 크고 많기 때문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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