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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항상 기도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by 은총가득 2021. 5. 24.

 

 

쁨과 기도와 감사(5:16-18)

 

16항상 기뻐하라 17 쉬지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2-15절의 사회적 규례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상관 관계에 있는 세가지의 개인적 교훈을 주고 있다.

16절의 항상 기뻐하라(판토테 카이레테,)는 조건 및 상황에 근거한 인정적 기쁨이 아니라, 주안에서 누리는 영적 기쁨(1:6의 주석을 보라)을 뜻하는 것이다.

17절의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환난 중에서도 감사하며[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Chrysostom),7) 물론 그 교훈은 일생 동안 매일 24시간씩 형식을 갖추어 기도만 하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의 기도하라는 프로슈케스테로서, 피조물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태도와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말이다(고전 7:5,골4:2). [블레이키는 [성령에 의하여 마음이 하늘을 향한 바램과 대망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참기도가 될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렘6:18의 주석).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입을 열어 아뢰는 기도의 내용은, 생활 속에서 그대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마디로, 참된 신자의 기도란 곧 삶이다.

18절 상반의 범사에 감사하라(엔 판티 유카리스테이테,)는 무슨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현재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에 직면하고 있다(1:6,2:14,3:4). 그러나 성도는 생의 모든 정황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실상 그 어느 상황도 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과 무관할 수 없다. 불행한 처지에 있는 자식에게 부모의 사랑이 더욱 강렬하게 기우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불우한 상황에 처했을 때 더욱 강렬하게 임하는 법이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에게 불리하고 악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라도 단지 우리의 영적 복리를 위한 보다 광범위한 계획의 일시적인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롬8:28).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항상 감사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토마스,p.278). 많은 어려움이 따랐던 광야 여행 중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 준 상반된 태도를 미루어 보아, 우리는 감사 또는 불평이 환경이 아니라 신앙 인격의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절 하반)고 한다.
이는 이란 투토 가르로서, '왜냐하면 이것은'의 뜻이다.

 

이것은에 대해 (1) "쉬지 말고 기도하라"(17절)와 '범사에 감사하라"(18절)을 지시한다는 설(Grotius)8),(2) "범사에 감사하라"(18절)만 지시한다는 설9) , (3)"항상 기뻐하라"(16절)와 "쉬지 말고 기도하라"(17절)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18절) 를 지시한다는 설 10) 등이 있다.

 

(1)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가 단수 대명사라는 점을 내세워 (2) 설과 (3)설을 반대한다. [그러나 이 ()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교훈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지칭하는 단수 대명사라고 본다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문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의미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16절에서 18절까지 사이에 나타난 바울의 교훈은 그것이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으나 그 모두가 신앙에 의한 행위라는 점에서 하나의 통일적 근거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가지 행위를 한 마디로 "신앙의 행위"라고 보고, 여기의 ()는 그 신앙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김용옥). 또한 논의의 성격으로 보아 '하나님의 뜻'(4:3의 주석을 보라)을 어느 하나에 국한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 11) 안에서'(1:2의 주석을 보라)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신앙 생활의 본질에 속하는 바,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가르친 세 가지 교훈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와 계시에 의하여 명백하게 밝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말은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에서 비롯되는 능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요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항상 기뻐하라. 즉 조건 및 상황에 근거한 인정적 기쁨이 아니라, 주안에서 누리는 영적 기쁨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 여기서의 기도는 형식을 갖춘 기도라기보다는 모든 태도와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삶으로서의 기도이다.
세째,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은 생의 모든 정황에대해 그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이다.

 

 

 

취할 것과 버릴 것(5:19-22)

 

19성령을 소멸치 말며 20예언을 멸시치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바울은 독자들에게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에 관해 교훈하고 있다.


먼저 그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 (19절)라고 한다. 여기서의 성령(토 프뉴마,)에 대해서는 (1) 영감이라는 설(NEB),(2) 성령이라는 설("Phillips"1), 헨리), (3) 성령의 역사(행사)라는 설 2), (4) 성령의 열매(윤리)들이라는 설("Chrysostom"3) 김용옥). (5) 성령의 은사(선물)들이라는 설4), (6)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리 마음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영향들이라는 설(A.클라케,바니스)등이 있다.


본절의 경우에는 취사선택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즉 성령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것이다.
소멸치 말며(메 스벤뉘테,)의 동사는 불이나 빛을 끄는 것을 의미한다 (Wetstein),5) 따라서 성령 또는 그 작용은 여기서도 불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마3:11,눅3:16,행2:318:25,딤후 1:6).


성령의 불을 끄는 것에 대해 A.클라케는 [성령께서는 자랑의 영이시므로 분노, 적의,원한, 불친절,불경한 기질은 성령의 불을 끌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떠난 것이고 마음은 완고해지고 어두워질 것이다.... 범죄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며 또한 그 불을 끌 것이다]라고 하며, 어드맨은 [어떤 신자나 다 성신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성신의 감동을 거역하며 그의 지도를 거부하며 성신의 주시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으며 그의 은혜를 함양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성신을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행하게 된 것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63:10)라고 외쳤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고 하였고, 율법주의를 가르친 거짓 교사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라고 탄식조로 책망하였다. 한 마디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으라는 뜻이다(갈5:17).

 

다음으로 그는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예언을 멸시치 말고(20절)라고 한다. 이러한 금령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처럼(고전 14:1)에언의 은사를 매우 하잖게 여겼던 것 같다. 본절의 동사는 엑수테네이터로서,단순히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경멸하거나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뜻한다.
예언이 복수(프로테이아스,)로 되어 있는 것은,예언이 수많은 표현 형식을 갖기 때문이거나, 개개의 경우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예언이란 성서를 해석하는 기술이 아니다(칼빈). 또한 미래를 미리 말하는 은사도, 과거를 설명하는 은사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프레임). 그래서 예언자(고전 12:28-14:29-)란 내재하신 그리스도 또는 성령 안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인 것이다.


헨드릭슨은 예언자란 말을 어원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로페테스는 프로(앞으로, 밖으로)와 페미가 앞으로(말하기)가 결합된 단어이다... 그리고 그 (예언자)가 앞으로(밖으로) 말하거나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다. 그는 선포자이지, 반드시 예고자(예언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6) 좋은 것을 취하고(21절),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절)고 한다.
범사에(판타,)즉 모든 일에를 성령의 불 또는 예언을 지시하는 것7)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말 자체가 일반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그것들을 포함한 "모든 일에 있어서"라고 폭넓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헤아려(도키마제테, 2:4의 '감찰하시는'의 주석을 보라)는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고전 12:10). 여기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식별을 뜻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하고,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하지만, 한편 그들은 시험해 보지도 않은 채 경솔하게 말려 들어가서도 안된다(Lightfoot).9) 어드맨은 시험하는 방식에 대해[모든 성신의 은사는 사랑 안에서 활용할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라고 다른 곳에 밝히 적혀 있다. 그리고 참으로 성신의 감동을 받은 자는 그것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주신 은사인 줄 알아 오직 그의 영광만 나타내고 자기는 전혀 숨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베드로전서 4:10에도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좋은 것을 취하고(21절 하반)란 식별한 후에 취할 태도를 말한다. 특히 취하고(카테케테,)는 구데 붙잡는 것, 견고하게 지키는 것을 뜻한다. 즉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절)에 대해 (1) 악이 모양의 형용사, 즉 모든 악한 모양이라는 설10), (2) 악이 모양의 주격, 즉 악은 모든 모양이라는 설11)이 있다. 둘 다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후자가 보다 강조적이다.


모양은 에이두스로서, 신약에는 드물지만, 70인 역에는 많이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1) 육체의 모양(요5:37,눅3:22,외관, 용모(눅9:29,욥 41:10),육체의 출현, 현현(고후5:7,출 24:17,민9:15), (2)종류,부류(렘15:3)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겉모양 12)이라기보다는 종류13)로 이해해야 한다.

 

버리라는 아페케스테로서, 피하라(NIV),버리라 등을 뜻한다. 이 말은 21절의 "좋은 것을 취하고"와 병행하여,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를 요청하는 것이다(김용옥). 바울은 성령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것을 없애지 말라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예언들 곧 하나님의 말씀 선포(설교)를 전적으로 무시하지 말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앞서 언급한 것을 비롯한 모든 일(것)에 있어서 잘 시험하여 좋은 것을 굳게 붙잡고, 대신에 악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버리라고 명한다.

 

 

 

 

성결을 위한 기도(5:23-24).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너희를 부르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본서의 전반부를 기도로 끝낸 저자(3:11-13)는 본서 전체의 결론도 기도로 한다. 기도의 내용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절)이다.


평강의 하나님(호 테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평강"(1:1의 주석을 보라) 의 창시자요 원천이신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다(롬15:3316:20,고전 14:33,고후 13:11,빌4:9).
친히(아위토스)는 강조하기 위한 말로서 하나님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히기아사이, 3:13의 주석을 보라)란, 성도가 성별되어 성결(성화)케 되는 것이 성도 자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과 자신의 생활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온전히는 홀로텔레이스로서, 여기서는 질적으로 '너희가 완전해 지도록' 이 아니라, 양적으로 '전적으로'라는 뜻으로 취해야 한다(프레임).이 말은 부사로서는 아니지만, 야고보서 1:4에도 나타난다.[텔레이오스)는 끝까지 도달하는 완전함(흑기). 장성한 자(히5:14), 그리스도인의 성격의 완성(마5:48)을 뜻한다.
바클레이는 [이 말은 대개의 경우 기정적 목표와 기정적 목적에 대하여 완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설정해 주신 목표에 도달한다는 의미에서의 완전이지,신과 같은 절대적 완전은 아니다]라고 풀이하였다](약1:4의 주석).

 

너희 온..의 온은 홀로클레론으로서,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이 말도 신적 완전이 아니라 인간적인 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말과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윤리적으로 완전해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온전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프레임).


영은 토 프뉴마로서,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며(고전 2:11, 롬8:9),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구속받은 인간을 지시한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 하여(고전 6:17), 신자의 내적 인간의 존재 형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존재 형식과 같음을 보여 주고 있다(도드).1) 이러한 존재 형식을 갖는 인간은 영으로 성령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며(롬8:16),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고전 14:2), 영으로 기도하며(고전 14:14),영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또한 영이란 사고하고(롬8:6), 인식하며(고전 2:11,롬8:16), 의지하고 (롬8:4-5)을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고전 5:3). 바로 [이 영의 지배를 받는 영의 도구가 마음인 것이다(에드맨,이상근)](엡4:23)의 "심령"의 주석).


혼은 헤 프쉬케로서, 동물의 생명, 생기(계8:916:3), 인간(마6:25), 몸과 영 구별되는 인간의 영혼(마 10:28),애정과 의지의 자리로서의 영혼(행14:222), 자아(마10:39),인간의 인격,개인(롬13:1)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과 혼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것이며, 실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 영과 혼은 둘다 "호흡,생명,또는 생명의 원리'를 뜻한다.
혼은 동물적 생명, 영은 보다 높은 생명으로 분류되나, 사실인즉 후자도 동물적 생명을 뜻하기도 하고(전 3:21,계16:3),전자가 하나님께 적용되기까지 한다(사 42:1,딤 9:9 암6:5,히10:38).이와 같이 두 낱말을 교대적으로 사용되는 수가 많다. 사람의 구성을 혹은 몸과 혼으로(마6:2510:28), 혹은 몸과 영으로(전10:7,고전 5:35) 밝히고, 사람의 죽음을 혹은 혼이 떠나는 것이라(창 35:18, 왕상 17:21,행15:26), 혹은 영이 떠나는 것이라(시31:5,눅23:46,행7:59)]한다.

 

몸은 토 소마로서, 바울이 인간의 실존을 특징짓기 이해 사용하는 가장 포괄적인 용어이다. 이 말은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는데 대조하기도 하고, 또는 영과 정신(혼)과 대조하여 육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밖에도 육체의 조직이나(엡4:16195:3,롬12:4,고전 12:12-25),고통을 당하는 육체(갈6:7)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바울이 육체란 의미로 몸을 사용하지만, 헬라의 영육 이원론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결코

인간의 몸을 정신의 무덤이나, 그 자체가 파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롱지네커).3) 그는 표면상 몸과 영, 몸과 영과 정신(혼)을 구분하는 것이지, 결코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조직체로서 몸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음, 바울은 몸을 하나님과 대립되는 인간의 피조성 혹은 주체로서 표현하고 있는데(롬8:13),그것은 곧 나약하고 낮은 것으로(고후 10:10,빌3:21,고전15:43),죄와 죽음과 관계를 가지며, 그들의 지배 아래 속박되어 있다. 이러한 몸은 죄의 몸이요(롬1:246:6128:10,고후5:10),사망의 몸이다. (롬6:127:248:11). 엘리스는 [바울은 많은 경우에 몸을 죄와 죽음에 얽매인 자아로 사용하고 있다]4)라고 설명하였다.


육신의 의미를 갖는 몸과 죄와 죽음에 얽매인 인간의 피조성 혹은 나약성이란 뜻의 몸이란 곧 구속받지 못한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몸은 영광된 것이요 영원성을 갖는다. 그는 우리의 몸 안에 성령께서 거하신다고 하며(고전 3:166:19),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몸에 대해 말한다 (롬12:1,고전6:20).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관련된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영 또는 혼과 대조되는 인간의 보이는 부분, 즉 물질로 구성된 몸을 의미하고 있다.

본절과 히브리서 4:12은 인간의 본성 연구에 있어서, 그 구성을 몸과 혼(정신)과 영으로 나누는 삼분설(trichotomy)5) 의 근거가 되었다. 이 견해에 반대하여 영(혼)과 몸으로 나누는 것은 이분설(dichotomy)6)이라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바울의 의도는 인간 본성을 분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에어하트, 네일, 김용옥)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1:10의 주석을 보라) '흠 없게'(2:10의 주석을 보라)보전되기를 원하는 것이다(참조 3:13).


이 점에 대해 김용옥 박사는 [학자들 중에는 이 세 낱말을 근거로 해서 바울의 인간관은 3분법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간단히 수긍할 수 없는 것은, 바울은 인간학적 용어로서 이 세 낱말 이외에도 다른 용어들(예:마음,육,양심등)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영,혼,몸'만을 가지고 바울의 인간관 전체를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서 바울이 이상 세 말을 중요한 인간학적 용어라고 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영,혼,몸 등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셋을 다 합친 전체적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즉 바울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인간이 흠 없게 완전하게 되기를 데살로니가가 교인들을 두고 기원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위에 언급한 염원들이 다 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근거를 가리켜,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4절)고 한다.


미쁘시니란 피스토스로서, 신실하다는 뜻이다(살후3:3,고전 1:910:13,고후1:8,딤전 2:13,계1:5).

독자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틀림없이 응답될것이다. 그러나 [그 응답은 바울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독자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 때문이다] (Chrysostom).7) 이 하나님의 신실성은 이미 영원한 선택과 일치하여(1:4), 복음의 설교를 통해(살후 2:14)그가 그들을 부르셨을 때 명백해 졌다.(프레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우리에게서 이루신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불필요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그만큼 더 신실한 노력과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지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되는 것이다](헨리).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평강의 창시자요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로 온전히 성결케 해 주시고, 또한 그들의 온 영과 혼과 몸, 즉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을 확신하는데, 이는 자기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뤄 주실 것이라고 설명한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