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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디모데후서 1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6. 2.

 

 

인사말(디모데 후서 1:1-5)<메튜헨리>

 

이상의 본문을 읽어보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본 서신의 서문에서 바울은 스스로를 일컬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또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격은 없지만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또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따라" 또는 복음을 따라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생명의 약속이다. 생명은 목표이며 그리스도는 길이 되신다(요 14:6). 생명은 그 약속된 것으로 이 생명과 약속은 신실한 증인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장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되며 아멘이 되기 때문이다"(고후 1:20).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토록 따뜻한 사랑을 느꼈던 것은 디모데의 회심을 바울이 도왔으며 또한 디모데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할 때 부자와 같은 친근함을 가지고 일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사람이었다. 즉 바울은 인간의 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며 또한 인간의 가르침도 받지 아니했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 복음을 받았다(갈 1:12). 그러므로 그가 사도로 위임받은 것은 인간의 뜻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디모데 전서에서 바울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되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도로 부르셨다.

 

2. 우리는 생명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디도서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인데" 이 영생은 거짓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라고 하였다. 그 약속은 영생의 자유로움과 그 확실성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3. 이 약속은 다른 약속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서 안에서 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안에 계신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나오며 그것은 확실하여 우리가 인심하고 의존 할 수 있는 것이다.

4. 바울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도 필요하였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도 이 축복들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분에게 복을 기원해야 한다.

 

5. 이러한 축복들은 가장 축복된 것들이며 또 우리가 진정한 친구를 위해 간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다. 즉 우리가 친구를 위해 그들이 필요할 때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은혜와 실수하였을 때 용서하시는 긍휼을 지니게 되기를 간구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과 그들이 평강을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은 가장 복된 기원인 것이다.

 

Ⅱ.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과 거룩함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바울이 기도하는 가운데 디모데를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가 무슨 선을 행하든지 또 친구를 위해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받으셔야만 하며 우리는 반드시 주님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로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기도를 많이 하였고 밤낮으로 기도하였다. 그의 모든 기도 가운데서 바울은 그의 친구들을 잊지 않고 기도해 주었고 특별히 선한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디모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라고 그는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기도는 바울의 끊임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듯 바울은 기도하는 주에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잊은 적이 결코 없었다. 바울은 조상때부터 순전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봉사하였다. 바울이 하나님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은 그에게 대단히 위안이 되었다. 또한 그가 순전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온 것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바울은 거리낌 이 없는 양심을 보존하였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였다(행 24:16). 바울은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는 디모데에 대한 간절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와 대화를 나누기를 바랐고 또 그들이 서로 헤어질 때 디모데가 흘린 눈물을 그는 늘 기억하였다.

 

디모데는 바울과 헤어지는 것을 섭섭히 생각하여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고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눈물로 디모데의 바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진실된 것이었는가를 그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가 그의 선조의 신앙을 지킨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5절). 디모데의 어머니 편의 선조로부터 디모데에게 믿음의 유산이 전해졌었다. 디모데는 좋은 어머니와 좋은 외숙모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디모데의 아버지는 믿지 아니하였으나(행 16:1) 어머니와 할머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경건한 부모의 본을 따라 믿음과 거룩함을 모방하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요삼 1:4).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5절). 바울은 그의 동역자에 대하여 대단히 우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잘될 것을 소망하였다. 물론 바울이 디모데를 대단히 신뢰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디모데처럼 심정을 터놓고 말할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빌 2:20).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바울은 본받아 우리도 거짓없는 양심으로 하니님께 봉사하여야 한다. 디모데의 선조와 우리의 경건한 선조가 그렇게 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기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고 하였다.

 

2. 기도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친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신실한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바울은 밤낮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의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기억하였다.

 

3. 진실한 신앙인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은 거짓없는 것이다. 참된 믿음에는 위선이 없다. 그 믿음은 시련을 견디는 믿음이며 또 이 믿음을 산원리로써 그들 속에 거한다. 디모데가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믿음을 물려받은 것이 바울의 감사의 제목이 되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항상 그와 같은 일을 볼 때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때마다 기뻐해야 한다. 바나바가 그러하였다(행 11:23, 24). 그러므로 이르기를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라고 한 것이다.

 

디모데의 믿음과 거룩함(디모데 후서 1:6-14)

 

본문에는 디모데의 의무에 대한 권고와 격려가 나타나 있다(6절). 본문은 "내가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라도 기억을 일깨워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아는 것이라도 항상 일깨워야 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벧후 3:1)라고 말하였다.

 

Ⅰ. 바울은 디모데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권고하였다. 이것은 재 속에 숨어있는 불을 다시 살르듯이 그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하나님의 은사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은사를 뜻하는 것이다. 즉 디모데로 하여금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하여 바울이 안수로서 부여한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디모데는 이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해야 했다. 그는 이 받은 은사들을 사용하여야 했고 그것들을 증가시켜야 했다. 이같이 은사는 사용할수록 증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된다(마 25:29)고 하였다. 따라서 디모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사용했고 또 불일 듯하게 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은사를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디모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평범한 것이든 특별한 것인든 간에(내 생각에는 후자인 것 같다) 디모데는 그것을 일깨워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시들어 버리고 말 염려가 있었다. 더욱이 디모데 안에 있는 은사는 사도 바울의 안수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나는 이 안수를 직분 안수식과 다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직분 안수식은 장로회에서 안수되었었기 때문이다(딤전 4:14)]. 디모데는 그에게 특별한 은혜와 은사들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받았는데 이 성령은 바울의 안수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내 생각에는 사도들 외에는 아무도 성령을 주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이같이 복음 사역을 위한 충분한 자질이 갖추어진 장로회에서 그에게 안수하여 직책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가 받은 은사를 증진시키는데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비열한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7절)라고 하였던 것이다. 악한 종이 달란트를 묻어두고 장사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두려움 때문이었다(마 25:2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심으로 두려움의 영을 대적하도록 우리를 무장시켜 주셨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며 너의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만나게 될 위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하니님께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영으로부터 구원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근신의 영을 주셨다." 능력의 영이란 어려움과 위험을 만났을 때 그것과 감연히 맞설 수 있게 하는 용기의 영, 또는 결단의 영을 말하는 것이며, 사랑의 영이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영을 말하는 것이며, 사라의 영이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영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만자는 여러 가지 반대를 무릅쓰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영으로 마치 야곱이 라헬을 위해 온갖 어려운 수고를 감당하였을 때의 야곱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영은 인간들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해로움이나 인간들에게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다. 또한 근신의 영이란 곧 평온한 심정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로 내적인 평안을 즐기게 해 주는 영을 말한다. 왜냐하면 자주 우리는 환상이나 상상의 산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는 길과 일에서 실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하고 견실하고 사고력 있는 마음은 이러한 상상과 환상을 방지해 주고 또 쉽게 대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주신 영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며 담대한 영이다. 그 영은 능력의 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늘과 땅에서 모든 능력을 가진 그 이름으로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신 영은 사람의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함이 목회자들의 사역에서 타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주신 영은 근신의 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와 명철이 들어있는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고난을 생각하고 그것을 대비하여 준비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8절). 너에게 맡겨진 복음과 증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아무런 면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자들을 부끄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디모데는 나이 많은 바울이 비록 옥에 갇혔지만 그의 갇힘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자기를 인하여 고난받는 사람들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었다.

 

(1) 복음은 우리 주에 관한 증언이다. 이 복음 안에서 그리고 이 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증거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복음 따를 것을 고백함으로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게 되며 또 그를 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바울은 주님으로 인해 갇힌 바된 죄수였다(엡 4:1).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사슬로 매여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우리 주님에 대한 증거나 혹은 증거를 위해 갇힌자 된 사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부끄러워한다면 후에 주께서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다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즉 복음의 목적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것을 예견하고 그것들에 대비하여 준비해야 하며 그것을 계산하고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성도들과 함께 기꺼이 운명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을 동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또 그들처럼 고통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복음이 고난을 당할 때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구원을 얻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만족히 여겨야 할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우리가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받을 때 우리는 고난을 잘 견디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2]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들은 복음의 일을 위해 고난받고 것을 예상해야 하다.

[3] 고난과 능력은 상관 관계가 있다. 고난이 증가할수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증가할 것이다(고전 10:13).

 

2. 하나님과 복음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음에 의해 우리에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셨던가를 하나님께서 복음에 의해 우리에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셨는가를 환기시켜 준다(9,10절).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담대히 고난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라고 촉구한다.

 

(1) 그가 고난받도록 부르심 받은 그 복음이 본질과 그 복음의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계획과 목적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언급할 때는 언제나 복음이 주제를 넓게 확대시켜 광범위하게 전개하는 것이 그의 관례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복음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확신과 또한 그 복음이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복음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본문에 말씀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케 해 줄 그 복음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을 괴로운 것으로 생각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구원의 사업을 시작하셨고 때가 오면 완성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 잊지 않은 것을(즉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롬 4:17).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셨다"고 본문에서 말한 것이다.

 

[2] 복음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계획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8절)즉 "우리를 거룩에로 부르신 것은"이라고 하였다. 기독교는 부름, 곧 거룩한 부름이다. 기독교는 그것에로 우리가 부름을 받은 부름 자체이며 그것을 위하여 수고하도록 우리를 부르는 부름인 것이다. 후에 구원받을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거룩하여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복음의 부르심이 참된 효과를 나타냈는가를 알려 주며 부름 받은 사람이 거룩하여졌나를 보면 된다. 왜냐하면 복음은 거룩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3]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영원하신 목적에서 출발된 것이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요 값없는 은혜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며 그것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것이 지나친 고통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이 구원의 은혜는 "세상이 지어지기 전에"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죄된 인간에서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복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가 표현된 형태이다. 그런데 이 복음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10절) 나타났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안에 계셨으며 그리고 아버지의 모든 은혜로운 목적을 완전하게 알고 계셨었다. 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은혜로운 목적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복음을 위하여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5]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죽음이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저는 사망을 폐하셨다"고 하였다(10절). 이 말은 주께서는 사망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폐지하셨으며 또 우리에게 역사하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주셨다는 말이다. 그는 죄를 옮기심으로 말미암아 이 사망을 옮기셨다(왜냐하면 사망의 요인은 죄이기 때문이다. 고전 15:56). 곧 그는 죽음의 지배 영역을 빼앗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것이다. 이제 사람에게 적이었던 죽음이 그들에게 친구가 되었다. 이제 죽음은 어려움과 고난과 죄가 가득찬 세상을 떠나서 완전한 평화를 순결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가 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죽음이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이기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죽음을 이기므로 죽음의 권세는 이제 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하였다.

 

[6] 주님께서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10절). 주께서는 우리에게 전에 주어졌던 계시에 의해 보여진 것 이상으로 저 세상을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 주셨고 우리의 믿음에 의한 복음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저 세상에서의 복됨을 밝혀보여 주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께서는 복음에 의하여 저 세상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 즉 그것을 우리 앞에 보이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기도 하셨다. 우리는 그 어느 것 보다 복음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하여 생명과 불멸이 확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은 전에 나타났던 어떤 계시보다 뛰어난 탁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생명의 복음이요 불멸을 약속해 주는 복음인 것이다. 또한 복음은 우리에게 영광에 영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일에 전념케 하는 강한 힘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저 세상으로 가는 준비된 길을 지시해 주는 안내자인 것이다.

 

(2) 바울 자신이 보여 준 본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고 하였다(11,12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받았는데 특별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울은 복음이야말로 그것을 위해 고통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디모데 또한 바울과 같이 생각해야 옳은 것이었다. 아무도 복음을 인하여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이로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킬 줄 확신함이니라"고 했다(12절).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선한 사람들을 때때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본문에 "이를 인하여 내가 고난을 받되"라고 했는데 이 뜻은 "나의 복음 전함과 복음을 따라 사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뜻이다.

[2] 복음 사역자들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동기가 떳떳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3]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의지하는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거룩한 승리와 기쁨을 가지고 말하기를 "나는 확고한 기초 위에 서있다. 나는 가장 신뢰할 만한 이의 손에 가장 큰 신뢰를 하고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나는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그리스도에게 위탁하여야 하겠는가? 바로 우리 영혼의 구원과 또 하늘 나라에 갈 때까지 우리 영혼을 지켜 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같이 우리가 주께 맡긴 바를 주께서는 지켜 주실 것이다. 우리의 영원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즉 "남자와 여자들이여! 너희에게 주어진 영혼으로 너희는 무엇을 하였는가? 너희가 너희의 영혼을 누구에게 의탁하였는가? 하나님인가? 사탄에게인가? 그래 그 영혼은 죄에 대한 봉사를 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봉사했는가?"한 날이 이를 것인데 이 날은 매우 엄숙하고 두려운 날일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청지기 사명을 어떻게 했는지 보고해야 할 것이며(눅 16:2). 우리 영혼에 대해 보고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려는 믿음을 가지고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탁했다면 그가 우리 영혼을 보호해 놓으셨으리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의탁의 결과로 그 날에 우리의 위로가 넘칠 것이다.

 

Ⅲ.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13절)고 하였다.

1. "들은 바 바른 말"이란 것은 다음의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우선 그것은 교리 문답식과 같은 짧은 형태로, 믿음의 첫째 원리를 성경에 의거하여 압축한 것으로 즉 자기가 사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독교 믿음을 성경으로부터 요약해낸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또는 그것은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 그 기준"이라는 말로 볼 수도 있겠다.

 

2. 또 "본받아 지키라"했는데 이 말은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전하고 그것에 집착하라.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는 모든 이단 교리와 거짓 교훈에 반대하여 복음에 집착하라. 네가 내게 들은 바를 그대로 지켜라는 뜻의 말이다. 바울은 신적 영감을 받았다. 또한 우리가 성경 안에 나타난 바른 말을 지킨다는 것을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경은 신적 영감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이다(딛 2:8).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믿음과 사랑으로"지켜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한 말로써 수락하고 그 말씀을 "받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환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선한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언약이다. 우리는 그 속에 율법과 복음의 두 돌판을 가장 안전하고 알맞게 배열해야만 한다(시 119:11). 또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동반하여야 한다. 온전한 말씀을 믿고 동의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그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말씀의 참됨을 믿고 말씀의 선하심을 사랑하고 또 그 바른 말씀의 참됨을 믿고 말씀의 선하심을 사랑하고 또 그 바른 말씀을 사랑을 통해 전파해야 한다. 즉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엡 4:15). 또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13절)라고 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붙드는 신앙과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예수님 안에서 또 예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또한 우리는 이 예수님 안에서 또 그에 의해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 수 있는 것이다. 복음 사역자로서 디모데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켜야 했다." 본문의 바른 말은 "지금의 힘을 지닌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영혼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 "주께서는 그의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으로 인간을 고치셨다." 같은 의미의 말씀이 14절에 있다. 즉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4절)는 말씀이 그러하다. 아름다운 것은 바로 바른 말씀 즉 기독교의 교훈이다. 그것은 디모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를 받고 교육받았을 때와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을 때 그에게 위탁되어진 것이었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맡겨진 위탁물이다. 그것은 광범위하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는 목회자들에게 맡겨진 것이다. 복음 안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귀중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유익을 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헤아릴 수 없는 좋은 보물이다. 왜냐하면 그 복음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기 때문이다(엡 3:8).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순수하고 온전하게 보존하도록 하기 위한 우리의 뒤에 오는 후손에게 온전히 전해 주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위탁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지켜야 하며 그 순결함을 더럽히고 능력을 약화시키고 그 완전성을 감소시키는 어떤 것을 그것에 더해서는 아니 된다. 또한 본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지키라"고 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복음을 배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아무리 잘 배운 사람일지라도 그의 도움심이 없이는 자기가 배운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복음을 자신의 힘으로 지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성령으로만 복음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모든 선한 목회자들과 성도를 안에 거하신다. 즉 그들은 성령의 전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순전하고 썩지 않게 지키도록 힘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좋은 복음을 지키도록 힘써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인간의 노력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오네시보로의 충성(디모데 후서 1:15-18)

 

13절과 14절에서 디모데에게 복음을 지킬 것을 권고한 후에 바울은 다음의 것을 언급하였다.

Ⅰ.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배교를 언급하고 있다. 교회의 역사상 가장 순수하였고 훌륭했던 초대 교회에서조차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중에 신앙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저버렸다고 말하지는 않았고(실상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바울을 저버렸으며 바울에게 등을 돌렸다고 말하였다. 또한 바울은 그들이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바울을 배반하고 그를 저버렸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바울보다 더 훌륭한 분(곧 주 예수 그리스도)배반하는 판국에 바울을 배반하였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필요 없는 것이다(요 6:66).

 

Ⅱ. 바울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은 한 사람 곧 오네시보로의 충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저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사슬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였다"(16절).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 베푼 친절. 오네시보로는 편지로 또 만나서 위로로, 바울을 자주 기쁘게 하여 주고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지금 당하고 있는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끄워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에게 한 두 번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고 자주 그렇게 하였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었을 때 뿐 아니라 그가 로마에 왔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와서 "바울을 찾느라고 상당히 애를 쓴 끝에 그를 만났다"(17절).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할 기회를 찾아다니며 또 주어진 기회를 한 번이라도 소홀히 흘려 버리는 일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에베소에서도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친절하게 잘 섬겼었다. 디모데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2. 오네시보로의 친절에 대한 바울의 보답(16-18절).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친절에 대하여 기도로 보답한다. 그리하여 그는 "원컨데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소서"(18절)라고 하였다. 당시에 오네시보로는 집을 떠나서 바울과 함께 지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떠난 후에 그의 집을 위해 또한 기도를 드린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을 오네시보로가 이미 이때에는 죽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위한 본문의 바울의 기도는 오네시보로에게 자비를 내려 달라는 죽은 자를 위한 중보의 기도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오네시보로가 죽었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와 같이 중대한 교리나 관습을 단순한 가정이나 매우 불확실한 근거 위에 세우려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것인 것이다.

 

Ⅲ.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가정에 대한 기도를 한 것처럼 오네시보로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하였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즉 죽음의 날과 심판의 날에 긍휼을 얻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때 그리스도는 그의 성도들이 가련한 처지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베푼 선을 모두 당신의 받으신 것으로써 간주하실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죽음의 날과 심판의 날은 두려운 날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 날에"라는 말로 강조되고 있다.

2. 그날에 주님께 은총을 입은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랄 최상의 소망이어야 한다. 그때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는 자비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3.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그 날에 긍휼 얻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고 했다.

 

4. 만약 그 날에 긍휼을 얻고자 한다면 오늘 주님에게 긍휼을 구하여야 한다.

5. 우리가 받아야 할 긍휼은 주님의 긍휼이요 주님으로부터 오는 긍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 한 인간이나 천사의 동정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6. 우리는 긍휼의 제공자가 되시고 수여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찾고 또 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해 하셨으므로 그 자비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긍휼을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필요할 때 도와주시는 은혜를 발견해야 한다.

 

7.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그날에 자신과 친구들이 주의 긍휼을 얻도록 주께서 승낙의 것은 그날에 자신과 친구들이 주의 긍휼을 얻도록 주께서 승낙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시간을 벗어나 영원으로 들어갈 때 또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갈 때, 그리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긍휼을 내려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그날에 우리가 주의 자비를 얻을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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