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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디모데 후서 2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6. 2.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인내(디모데 후서 2:1-7)

<메튜헨리 쥬석>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그의 일을 함에 있어서 성실과 인내를 가지도록 격려한다. 본문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1절)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열심을 내야하며 그 일을 하기 위해 강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지라는 본문의 말씀은 우선 은혜가 약해진다는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은혜의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은혜의 힘에 의한 수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련이 증가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이 강해지고 우리의 결심이 강해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점점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는 본문에 "은혜 속에서 강해지라"는 말은 우리 자신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된 말씀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즉 "강하라. 그러나 네 인간적인 능력이 강해지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해지라"는 말로 볼수도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6장 10절의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경건하여지고"라는 말씀과 비교해 보라. 베드로가 주를 부인하기 보다는 차라리 주를 위하여 죽겠다는 약속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강함을 믿고 있었다. 만일 그가 그 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되었다면 그는 보다 더 믿음 위에 설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첫째,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요 1:17). 그 안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은혜가 풍성하게 있다. 둘째, 우리는 이 은혜 가운데서 강하여져야 한다. 즉 우리 자신 안에서도 아니요 우리가 소유한 힘 안에서도 아니요, 또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 안에서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안에서 강하여지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안에서 강하게 되는 방법이다. 셋째,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고하는 것처럼 다정함과 사랑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라." 다음을 생각하여 보자.

 

Ⅰ. 디모데는 고난 피흘리는 것까지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복음 사역을 계승할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여야 했던 것이다(2절).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또 그들을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고 그가 들은 바를 그들에게 위탁하여야 했다. 또한 디모데는 그들을 복음 사역자로 임명하고 복음을 그들에게 위탁하여야 했으며 그렇게 하여 그가 들은 바를 전해 주어야 하였다. 디모데가 목회자를 임명하는데 두 가지 사실을 유의하여야 했다. 그 하나는 그들의 신실성 또는 성실성이었다(즉 바울의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복음 사역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예와 인간의 영혼들의 잘됨과 구세주의 왕국의 이 땅에서의 실현을 진심으로 목적할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기라"). 다른 하나는 그들의 복음 사역자로서의 역리들이었다. 사역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남을 가르치기를 잘하고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디모데는 그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것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해야 했다. 그는 그 이외의 어떤 것 즉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가르침을 받아 디모데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준 것이외에 어떤 것도 다른 사람에게 위탁해서는 안 되었다.

2. 그는 그에게 위탁된 신령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하므로 그들이 그것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고도 흠없이 전하도록해야 했다.

3. 디모데가 이러한 것을 부탁할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사람이어야 했다. 즉 신용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했다.

4. 비록 신실하고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직분을 맡음에 있어서는 목회자인 디모데에 의하여 위임을 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복음 사역은 아무도 자신이 스스로 위임 받을 수 없으며 그 일에 이미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위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Ⅱ. 그는 "고난을 받아야만 하였다"(3절).

1.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의 깃발 아래서 주님을 위해 그의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기 때문이다(히 2:10).

2.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는 자신이 좋은 군사됨과 대장에게 신실함과 주님만을 위할 것을 입증해 보여야 하며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때"까지 싸움을 포기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롬 8:27).

3.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임을 보여 주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동안 고난을 받을 것을 예기하고 또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그 고난이 왔을 때 그것을 참으며 자신을 고난에 숙달시키고 견디며 고난에 의해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Ⅲ.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일에 자신이 얽매여서는 안 되었다(4절). 군인이 징병을 받았을 때는 자기의 직업을 떠나는데 이는 대장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을 바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매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생활을 위하여 직업에 종사하는 수밖에 없지만(우리는 마땅히 이 세상에서는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그렇다고 우리는 생활에 얽매여서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관심사들을 한쪽으로 밀어 버려서는 안 된 것이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자 하는 이는 이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군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대장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주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일이다. 우리를 군사로 뽑아 주신 주님을 기쁘게 하는 길은 이 세상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의 거룩한 전쟁에 방해가 되는 그러한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Ⅳ. 영적인 전쟁을 해 나가는 사람은 법칙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전쟁의 법을 지켜야 함을 알아야 한다(5절). 그러므로 본문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부패를 극복하고 선한 일에 뛰어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래야 규칙을 잘 지킬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규칙을 잘 지켜지 않는 한 상받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선을 행할 때에도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고 있는가를 주의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선을 행하고도 비방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인은 자기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자기의 욕망과 부패를 정복하는 것을 목적해야 한다.

2. 또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경기의 규칙에 따라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는 반드시 합법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3. 그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를 얻고 또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보상을 기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6절)고 하였다. 이것은 야고보서 5장 7절과 비교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 "수고한 농부는 그 결실에도 참여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열매를 얻고자 한다면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상급을 얻으려면 우리는 경주를 하여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열매를 얻기 전에 농부처럼 부지런하며 인내하여 먼저 수고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는 약속된 것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히 10:36).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한 것을 다시 한 번 권한다. 그리고 디모데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7절)고 하였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에게 훈계한 것에 대하여 디모데가 깊이 생각할 것을 권고하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일깨워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였다. 사고하는 힘은 회심에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선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2. 바울은 디모데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고 하였다(7절). 총명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장 지식있는 사람도 더욱 더 이 은사를 필요로 한다. 만약 말씀으로 계시하신 이가 우리 마음 속에 총명함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께서 총명을 그들에게 주시도록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는 또한 그들에게 우리가 말할 것을 생각하도록 권고하고 또 자극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고력은 우리가 듣고 읽은 바를 이해하고 기억하고 실행하게 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는 격려의 말씀(디모데 후서 2:8-13)

 

Ⅰ. 고난받는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디모데에게 상기시킨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8절)고 하였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에 대한 위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부활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기독교 신앙에 대해 신실하도록 만들어 주며 특히 복음을 인하여 고난받을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 지금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은 부활을 기억하도록 하자. 다음을 명심하자.

1.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자! 그분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 당함을 개의치 아니하셨고 그리하셨으므로 지금은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히 12:2).

2.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과 부활을 진심으로 믿고 올바로 생각하면 그것은 현생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힘이 될 것이다.

 

Ⅱ. 디모데가 고난을 감연히 맞설 수 있도록 그에게 격려가 되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고난의 본보기로써 바울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바울은 어떻게 고난을 당하였는가(9절). 본문에 그는 "내가 죄인과 같이 고난을 받았으나"(9절)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들인 디모데가 아버지인 바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은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선을 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나쁜 대우를 받고 가장 선한 사람이 가장 최악의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가운데서도 사도에게 위로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권력자들의 박해가 목회자들로 침묵하게 하고 또 그들의 활동을 억누를 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힘에 의해 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묶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었다. 왜냐하면 디모데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유보다도, 또한 자신의 생명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결코 매이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이 세상에서 받은 대우. 그것을 고난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내가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고난에로 부르심 받았고 또 그에게 고난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세상이 그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해 내세운 구실. 그는 본문에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과 같이 고난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같이 유대인들도 예수님에 관하여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8:30)라고 하였던 것이다.

 

(3) 바울이 죄인처럼 고난을 받은 진정한 이유. 본문에 "복음을 인하여"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바울은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사슬에 매인 바 되었고 그 후에 그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였던 것이다(히 12:4). 비록 복음 사역자들이 때때로 사슬에 매인 바 되는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을 것이다.

 

2. 바울이 즐거이 고난을 당한 이유. 그는 본문에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았다"고 하였다(10절). 다음을 유의 하라.

(1) 선한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교회에 좋은 것들을 가져다 주실 것이요, 또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모든 것이 유익되로록 하실 것을 기억하고 가장 힘든 봉사와 어려운 고난 가운에서도 용기를 내야 하며 또 용기를 얻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10절)고 하였다. 우리 영혼이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도 기꺼이 일하고 고난당해야 하는 것이다.

(2) 선택된 자는 구원을 얻기 위해 예정된 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살전 5:9)고 하였던 것이다.

(3)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는 구원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구입자이시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 또한 그 구원에는 영원한 영광이 동반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구원에 영원한 영광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4) 바울이 고난받은 것은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서였다. 즉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게 하기 위해서였다.

 

Ⅲ. 디모데가 용기를 얻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저 세상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1.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와 그의 법도에 충실한 사람은 그들이 그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더라도 저 세상에서 그들의 희생의 대가를 확실히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11절)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의 쾌락과 유익과 명예를 무시하고 살았다면 우리는 더 좋은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에 의해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12절). 다윗이 곤경 중에 있을 때 우리가 그와 함께 그의 고난에 참여하였던 자들은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와 함께 영광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과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

 

2. 우리가 주께 불성실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우리는 멸망당할 것이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신다"(12절). 즉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를 부인하면 주께서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마 10:33). 주께서 마지막 날에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원히 불행하게 되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든 안믿든간에 이것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어 약속을 어길줄 모르는 분이시다"라고 하였다(13절)(역주: 공동번역 인용). 주는 그의 약속도 틀림 없이 이행하시지만 멸망에 대한 경고의 말씀에도 틀림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앞에서는 하나라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적은 점이나 칭호도 빠뜨리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께 신실하다면 주는 우리에게 신실하게 대해 주실 것이며 우리가 주께 불성실하다면 주께서는 틀림 없이 심판으로 우리에게 갚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는 자기가 말씀하신 바 어떤 말이라도 감할 수 없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가 되시고 아멘이시며 충성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다음을 유의 하라.

 

(1)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함께 죽는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그와 함께 죽는 것은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 역시 그와 함께 통치하는 길(way)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하였던 것이다.

(2) 이 말씀은 신실한 말씀이며 그러기에 우리가 의지하고 또 믿어야 할 말씀인 것이다.

(3) 그러나 만약 우리가 두려움이나 수치로 인하여 혹은 어떤 세속적인 이익으로 인하여 주를 부인한다면, 주는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며 주님 자신이 잘못하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약속을 성실히 수행하시듯이 심판도 마찬가지로 틀림 없이 이행하실 것이다.

 

 

과오에 대한 경고(1)(디모데 후서 2:14-18)

 

디모데에게 담대히 고난을 받도록 촉구하고 난 다음 바울은 이어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들을 지시하였다.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믿음에로 교화시키는 일을 전념하라고 지시하였다. 즉 디모데에게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들을 "생각나게 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의 할 일은 교인들이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기억이 나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다. 즉 그들로 "말을 가지고 서로 논쟁을 벌이지 못하게 경고하는 것이"사역자의 일인 것이다. 원래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보통 매우 적은 문제를 가지고 다툼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말다툼이란 하나님의 일에 대단히 파괴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 유익이 없는 말을 가지고 다투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신앙에서의 말다툼의 거의 무익한 것임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말다툼을 그렇게도 열심히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다툼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에게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여 불신자들로 기독교의 대해 격분케 하고 증오하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까지 유실될 위험을 초래케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말다툼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말다툼은 사람을 혼란시키고 멸망시키는 것외에 어떤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익할 뿐 아니라 매우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말다툼을 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주님 앞에서 그들을 권고할 때 먼저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본보임으로 위엄을 잃지 말고 경고해야 하는 것이다. 즉 사역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또한 그의 말씀으로 엄하게 경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경고하는 대로 먼저 실행해야 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자신을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절)고 한 것이다. 목회자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명심하라. 또한 주님에게 받으실 만하여야 하며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이같이 하기 위해 사역자들은 끊임없이 조심하고 근면하여야 한다. 그래서 본문에 "네 자신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다. 목회자는 일군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일을 위해 수고를 하여야 한다. 서투른 일군이나 불성실하고 게으른 일군은 부끄러워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기 직분에 전념하고 자기의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한 사람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군이다. 그들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것이다." 새로운 복음을 창안해 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위임된 말씀을 올바로 분변하는 것이다. 그는 말씀을 분변하여 멸망에 속한 자에게는 두려움을 위로를 받을 자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는 때를 따라 모든 사람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마 24:45). 여기서 다음의 것을 생각해 보자.

 

1. 복음 사역자가 설교하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의 저자는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진리의 말씀은 올바로 분변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노력과 주의가 요구된다. 디모데는 이 일을 잘 행하기 위하여 힘써야 했다.

 

Ⅱ. 그는 목회를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조심하여야 했다(16절). 그는 오류를 조심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하였다. 자기들의 박식과 명확한 논리를 자랑하는 이단자들은 자기들의 박식과 명확한 논리에 자신들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망령되고 헛된 말"이라고 불렀다. 사람이 한 번 망령되고 헛된 말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 된다. 오류의 길은 내리막길인 것이다. 한 가지 잘못을 허용하게 되면 수만 가지의 잘못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법이다. 그러기에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오류나 이설(異說)이 들어와 한 사람이 물들게 되면 많은 사람에게 전염되며 한 가지 오류가 한 사람에 들어오면 그 오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한다. 바울은 최근에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되어 잘못된 교리에 빠진 사람들을 실례로 들도 있다. 그들은 "후메네오와 빌레도"였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이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같이 그들의 이름을 지적하므로 그들에게 씻겨지지 않을 불명예의 화인을 찍고 또 듣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이 경고가 되게 하고 있다. 그들은 "진리에 관하여 그릇 되었도다"라고 했다. 즉 저희가 진리인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대하여서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뱀과 뱀의 후손의 교활함을 보게 된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교훈에 대하여 잘못된 해석을 하였다. 즉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을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신비적으로 또 비유적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예수가 말한 부활은 단지 영적인 것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영적인 부활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적 부활이 있으므로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교란시켜 서로 대립시키는 잘못된 주장이었던 것이다. 이 주장을 통해 그들은 "어떤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즉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했다. 그러나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미래의 상태는 없을 것이며 우리의 봉사와 고난에 대하여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보상도 없을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고전 15:19). 내세에 대한 교리를 제거해버리는 교훈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교훈이다. 바울은 이러한 잘못들을 크게 반박하였다(고전 15:). 그러므로 그러한 논쟁에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디모데가 피해야 했던 불경스러운 것이요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공허한 그림자이며 망령된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오류라는 것은 대단히 번식력이 강한 것이고 그러기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즉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 것이다."

3.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였을 때 그들은 항상 그럴 듯 한 허위로 가장하려고 노력한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부활을 부정하지는 않고 다만 부활이 이미 지나간 것인 양 말하였던 것이다.

4. 특별히 기독교의 초보적인 진리에 대해 범한 오류는 어떤 사람들의 믿음까지 무너뜨리는 것이다.

 

 

 

다툼에 관한 경고(디모데 후서 2:22-26)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고하였다. 디모데가 경건하고 선한 인간이었고 또 이 세상에 대해 금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는 경고를 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그런 것으로부터 깨끗이 하기 위하여 수고와 노력을 다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청년 시절에 가장 왕성하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주의 깊게 육의 정욕을 경계해야 한다. 정욕 앞에는 아무리 선한 사람도 큰 소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젊은이의 정욕을 피할 수 있는 탁월한 처방을 기록하고 있다. 즉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는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청년의 정욕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일지라도 그것으로 위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정욕은 영혼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2:11).

2. 우리의 은혜의 충만함은 정욕을 가라앉게 할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향하여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악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와 믿음과 사랑은 젊음의 정욕을 제거하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불순한 정욕을 무마해 준다. 그러기에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사귀며, 또는 사랑하며 화평을 좇으라"고 하였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성도의 교제는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의 나쁜 일들과의 교제를 끊게 하여 준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언급된다. 곧 그리스도인 "깨끗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부른다는 말은 곧 기도를 말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는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가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그리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 기도는 용납되지 못하며 또 성공적인 기도가 되지 못한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러한 것들은 무익하며 말다툼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 깊이 들어가서 그 속에 빠지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 자신은 스스로 현명한 지식인이라고 자처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것들이 범하는 잘못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인과 복음 사역자들 사이에 다툼과 언쟁을 야기시킨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논쟁을 피하라고 자주 또 진지하게 경고 한 것은 기억해 둘 만한 일이다. 이 말씀은 신앙이란 교묘한 논쟁을 일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을 믿고 행하는데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러기에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24절)라고 말씀했다. 주님께서는 다투거나 외치시지 않으셨다(마 12:19). 그는 다투시기 보다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본이 되셨다. 이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그의 종들에게 잘못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주의 종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 하여야 하며" 또 이를 통하여 그가 자신이 설교하고 전파하는 거룩한 종교의 능력있는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또 "마땅히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24절) 하였다. 다투거나 난폭하고 그 집을 잘 부리는 사람은 가르치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 사역자는 반드시 자기에게 주어지는 해를 참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도 "온유함으로 가르쳐야 한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오류에 빠진 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좋은 도구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 대적자들의 영혼을 구해 준다는 구실 아래 우리로 그들의 육신을 죽이라고 명하지는 않는다(역주: 구교에서 예전에 영혼을 구한다는 구실 아래 배교자들을 처형한 사실을 저자는 공박한다).

2. 우리는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온유함으로 훈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셨기 때문이다(마 11:29). 온유야말로 주의 종이 지녀야 할 품성이다(24절). 그러므로 본문에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24절)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이 진리를 빛나게 또 능력있게 전달하는 방법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다.

 

3.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가르칠 때 사역자들은 그들을 돌이키는 것을 목적 삼아야 한다.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25절). 다음을 명심하자.

(1)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 진리를 반대하는 자들이 돌이키는 경우에 참으로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단념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멋대로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진리를 알게 하실까"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3) 우리에게 진리를 대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또한 은혜를 베푸사 그것을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계속 진리를 거역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또 그와 같이 입으로도 시인하는 것은(롬 10:9, 10)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인 것이다. 이 도움 때문에 죄인들은 사탄의 올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죄인의 비참성. 그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악마의 종노릇을 한다"(26절). 그들은 가장 악한 주인의 노예가 되어 지낸다. 그리고 이 악마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것이다(엡 2:2). 그들은 올무에 걸려 있는데 그 중에도 가장 나쁜 올무에 걸려 있다. 왜냐하면 그 올무는 사탄의 올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물에 걸린 고기와 같으며 덫에 걸린 새와 같다. 더욱이 그들은 창세기 9장 25절에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저주받았던 함의 저주 아래 있으며 그들은 또한 노예이며 하인이었던 함의 노예인 것이다.

 

[2] 회개한 자들의 행복. 그들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와 같이 올무로부터 벗어난 자들이다. 올무는 부서지고 그들은 거기서 도망치게 된 것이다. 위험이 클수록 해방도 커지는 것이다. 죄인들이 회개했을 때 이전에 사탄의 종이 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의 뜻이 주 예수의 뜻으로 변할 것이다. 선하신 주께서는 우리를 모든 올무로부터 자유케 하신다.


 

누가 주의 종인가?

(딤후2:1-26)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서 특별히 사도 바울 선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영하고 받들어 섬겨 나가는 자기의 일에서 큰 부분을 잇는 후계자가 된 디모데를 부를 때 ‘과연 이런 것이야말로 아들이다’ 하는 의미로 ‘내 아들아’ 하고 부른 것을 보았고(1절),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일을 맡은 일꾼이 이렇게 일해 나가는 것이다’ 하고 가르치면서 그 일꾼을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비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꾼의 특성들을 여러 모양으로 비유해서 대략 여섯 가지로 나타냈던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입니다(3절).

“그리스도의 일꾼인 너 디모데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인내와 봉사를 해야겠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에게는 그러한 특성이 있어서 그와 같이 잘 감내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 할 때에 성경을 보면 각각 그 사람의 자격에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입은 자는 개인이 되었든지 교회가 되었든지 하나님의 그런 여러 가지 요구를 이룰 의무가 있고 그 의무에는 그에 따라는 성격들이 붙여 있습니다.

 

지도자인 바울이 디모데 개인에게 그런 특성들을 찾을 때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는 말로 표현해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면 그리스도는 너를 군사로 뽑고 지휘하고 명령하시는 분이니까 군인답게 그 명령을 복종하고 어려운 일도 참고 견뎌라’ 하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군인은 평안한 데서 지내라고 뽑혀 나온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전쟁터에서 고난을 견디고 승리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노력해 나가는 데 그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면 네 생활이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하는가 하면 너를 군사로 뽑은 그분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군사로 뽑힌 자로서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서 고난 개의치 말고 견디어 가자는 말씀을 간직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서 우리 앞에 있는 적을 분명히 잘 식별하고 또한 신령한 무장을 하고 주께서 주신 적극적인 공격의 무기를 가지고 나가서 적을 무찌르고 하는 이 큰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할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십니다. 꼭 디모데만이 군사인 것이 아니라 디모데 같이 일을 맡은 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신령하고 거대한 역사를 자기가 담당하고 나아가는 길에서 부딪치는 적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 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대로 이 세상의 혈육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입니다(엡6:12참조).

 

그러므로 군사 된 자는 이런 적과 더불어 싸우기 위해서 신령한 무장을 늘 해야 하는 까닭에 진실 혹은 참됨이라는 것으로 허리띠를 띠어서 먼저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꽉 붙들어 매고, 그 다음에는 의라는 흉배를 붙이고, 또 화평한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또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그 다음에는 적극적인 공격의 무기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엡6:14-17참조).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는 본질상 이 세상과 더불어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늘 전투해 나갈 때 자체가 교회인 것을 비로소 정당하게 드러내는 까닭에 ‘전투의 교회’라는 속성을 언제든지 중요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전투의 교회의 목회자요 지도자답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확호한 전투의 행동을 늘 취해 나가는 것이고, 목표를 향해서 행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전투 때문에 필연적으로 받는 고난을 그대로 견디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군사다 되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첫째는 군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는 5절에 나오는 “경기하는 자”입니다.

가령 무슨 운동회든지 경주가 있으면 어떤 일정한 법이 있어서 그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법 하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확호하게 세워 놓은 법칙에 의해서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지 그 법칙을 무시해 버리고 제멋대로 그냥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태도는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기가 일정한 트랙에서 일정한 시간에 다 같은 규율과 법칙 하에서 움직입니다. 경기 장소처럼 법칙이 일호도 틀림없이 준수되어야 할 자리가 없습니다. 만일 경기장에서 법칙을 무시한다면 경기의 정신이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그만큼 경기장은 법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선수들이 한 줄로 죽 서 있을 때 신호를 ‘땅’ 쏘면 그 쏘는 신호 소리에 따라 모두 다 같이 뛰기 시작해야지 신호를 하려고 피스톨을 들 때 한 사람은 먼저 뛰고 어떤 사람은 ‘땅’ 소리 난 다음에 뛰고 어떤 사람은 멀거니 있다가 그 다음에 뛰고 그래도 괜찮다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안 됩니다. 적어도 ‘땅’ 소리 난 다음에 각각 자기가 책임지고 뛰어야 합니다. 뛸 때는 또 자기의 트랙 위를 가야지 가다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앞지를 듯 하니까 앞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그 트랙으로 픽 들어가서 슬쩍 다리를 걸어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그냥 달린다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경기장에는 까다로운 많은 법칙이 없을지라도 명확한 법칙이 서 있어서 그 중의 하나라도 유린해 버리면 전체가 통제가 안 되고 모두가 그 일에 대해 승인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맡은 사람은 마치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주하는 자라고 한 것은 많은 적수들이 있다든지 같이 뛰는 사람이 있다든지 하는 것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경주장에서 경주하는 때처럼 명확하게 법칙을 지켜야 할 때가 없지 않느냐, 법대로 해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법칙대로 해야만 면류관을 얻는 것이지 법칙을 무시하고 편법을 쓰든지 속임수를 써서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고 노름이나 도박에 불과한 것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경주의 법칙을 준수해서 스포츠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목적지에 제일 먼저 도달한다는 것이 항상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전제로는 법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 한다는 데 첫째의 의미가 있고, 둘째는 물론 그렇게 법칙을 준수하고 최선을 다 한 결과로 우열이 드러날 때 우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여기에 같이 써 놓았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하고 5절에 썼는데, 면류관을 얻는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고 법대로 경기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맡아서 가는 길을 여기서 이러한 비유로써 가르치는데, 우리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저기에 도달해라’ 하면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목적지에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바르게 순리대로 도달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을 어기더라도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그만이다’ 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의 일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이 내신 방법대로 정한 목적지에 도달하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이신 목적지에 도달해야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 없이 중도이폐한다면 물론 법칙은 다 준수했더라도 역불급이라 힘이 모자라서 끝까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정한 소기의 결과를 내지 못하고 가령 어느 기간 안에 어디까지 도달 해야겠다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게으르고 느려 빠져서 결국은 도달했다고 하지만 그 안에 여러 번 나태가 있고 잘못이 있고 좌절이 있고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말하자면 우승을 하는 경기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맡은 자들에게 요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충성해야 하느냐 하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첫째는 일을 맡기시는 것이고 그래서 일단 일을 맡았으면 둘째는 그 일에 충성해야 할 것이고, 그 때의 충성은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법칙대로 성의를 다해서 해 나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6절에 {농부}라는 말을 썼습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은 농부가 수고한 결과를 얻지만 농부야말로 자기가 수고해서 직접 거둔 사람이니까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선적으로 자기의 수고의 결과인 좋은 열매를 먹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사짓는 모든 것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 다 같다는 이야기가 아닌 줄을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것을 표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의 논리는 ‘농부가 수고하면 그 결과가 날 것이 아니냐? 곡식을 거두었는데 그 거둔 곡식을 자기는 차례가 돌아오면 그때야 조금 먹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 농사 짓는 수고를 했으니까 최후에 자기가 먼저 맛봄으로써 결산이나 결론에 이를 때까지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것도 표시하고 또한 자기가 심어 놓은 원인과 가꾸어 나간 이 과정이 이런 결과를 냈으므로 자기가 친히 맛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법칙인 것을 여기서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로는 15절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겠다. 그러한 데서 너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늘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성경이 크게 두 가지의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궁구해 나가도록 보이십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셔서 재창조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어떻게 함양되고 장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주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품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의 품성 형성에 있음 가르칩니다. 즉 그 사람의 마음에는 사람을 증오하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야 하고, 또 항상 비감과 절망과 슬픔 가운데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가져야 할 것이고, 마음에 항상 불안과 응애를 들끓는 것과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안위가 늘 고요히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행하면 의로운 행동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늘 보유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라는 말을 볼 때에도 성령의 열매의 여러 가지 면으로서 인내, 자지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이 다 품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고 그리스도의 지체다운 열매를 표시하는 것인데(갈5:22-23참조), 이러한 품성을 함양하고 가지고 있어서 발휘한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늘 요구하시는 것이고 명확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방법으로 그런 것을 우리가 얻을 수 잇느냐 하는 문제가 거기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성경이 크게 두 가지의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궁구해 나가도록 보이셨는데 또 하나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우리가 크게 현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볼 일면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일생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떠한 사명을 받아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심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명을 받아 가느냐 하는 문제뿐 아니라 그 사명을 받았으면 그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임하며 어떻게 봉사해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적인 예로 사명을 맡은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써서 그 비유의 어떤 특성을 가지고 그가 일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나 자격들을 이야기해 나가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좋은 군사가 된다든지 법대로 경기하는 자든지 수고하는 농부하든지 하는 것들이 다 그런 사명을 밭은 종들에게 적용되는 법칙들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다른 데 가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도 아니고 혹은 기도하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대로하는 것도 아니고 묘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이처럼 명백하게 이 면 저 면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이렇게 해야겠다. 해라’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꾸 자기가 알고자 하는 일면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정당합니다.

 

디모데후서 2:15절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부끄러울 일이 없이 아주 훌륭하고 선량하고 무고한 좋은 일꾼으로 인정을 받은 자답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늘 드리기를 힘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군사, 경기자, 농부, 일꾼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에는 다섯 번째로 나오는 것이 {그릇}입니다. 20절에 이하에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여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마지막에 24절에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주의 종이라는 말에 대해 그릇되게 쓰는 경우를 보십시오.

1. 주의 종이라는 말에 대해 그릇되게 쓰는 경우

자신이 주의 종이라는 의식은 어떠한 깨달음 가운데에서 명확하게 파악되느냐 하면 일찍이 죄의 종이 되었던 자리에서 구원과 구속함을 받았고 주께서 자유를 주셨다는 이 속죄의 사실에 대한 생생한 각성과 체험에 있는 것이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진리의 말씀, 영생하시는 말씀이 계시는 주님께 늘 복종하지 아니하고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요6:68) 하고서 주님께 늘 속하여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주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사실인가를 거기서 깊이 깨닫는 것이지 그냥 ‘주의 종, 주의 종’ 해서 무슨 종교의 직분을 하나 맡은 것으로써 금방 종이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대단히 형식적인 이야기이고 또 기계적인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서 신학 공부를 하고 그 결과 얻은 신학교의 졸업장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신학교 졸업했으니까 목사 안수 받는다’ 해서 목사가 되고 또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며 찾아서 시골이 되었든지 혹은 도시가 되었든지 어디에 있는 교회를 하나 맡아서 가면 거기에서 자기는 주의 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주의 종이라고 한다’ 하는 이런 아주 거칠고 그릇된 통념은 옳지 않습니다. 주의 종은 상전이신 주님께서 종으로 임명해서 되는 것이지 사람이 ‘나는 주의 종이다’고 자기가 제 마음대로 자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택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종으로 쓰려고 하니 너는 나와서 세상에서 다른 공부를 해서 달리 나가서 사업을 하려고 하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교회를 돌아보는 여러 가지의 지식을 잘 배워 훈련을 해서 적당한 시기에 내가 너를 내보낼 때 나가서 종노릇을 해라] 하고 그렇게 부르셔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찍이 부르신 일도 없고 그런 아무 소명도 없이 신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있습니다. ‘소명감이 잇느냐’고 물어보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소명감인 줄 아느냐’ 하면 ‘아’ 이것을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저것을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저리로 가려고 해도 안 되고 이 학교에 가 보려고 해도 안 되고 다 문이 닫혀서 할 수 없이 신학이라도 하려고 신학교에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제일 못난 사람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덤빈단 말입니까? 주님은 그렇게도 사람이 없어서 반드시 제일 못나고 학교도 다 떨어지고 그래서 이리 저리로 눈을 돌려도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데려다가 종으로 만드셔야 한단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주님의 종노릇을 하냐 하면 자기가 주님의 종노릇을 해서 신실하게 섬길 각성이 있으면 아주 큰 데 가서 이 세상 사회나 국가나 국민의 종노릇, 즉 공복노릇을 해도 잘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사람의 공복 노릇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겠습니다’ 하고 자신의 능력을 갖다 바치고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될 만한 그런 기우와 능력과 재능과 소질이 다 있어도 ‘그것 말고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고 나가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귀하게 잡아다 쓰시는 것이고, 혹은 큰 사회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이끌고 나갈 만한 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것을 바쳐서 저는 이 일을 하겠습니다’ 해야 ‘그러냐 값있는 귀한 것을 네가 나한테 내놓고 네 마음대로 네 소원대로 성공을 해 보겠다고 다른 데 쓰려고 하지 않으니 과연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살려는 줄을 내가 알았다. 그러면 내가 그것을 그대로 쓰마’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런 사람을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역사상의 위대한 주님의 종들이 세상에서 다른 것을 했다면 아주 못나게 되었을 뻔 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다른 것을 했더라도 위대하게 했을 사람들인데 다른 것을 안 하고 그 일을 버리고 주님의 일을 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적어도 기독교의 역사는 그렇게 찬란한데 이상한 기풍이 이 나라, 이 땅에 들어와서 한국에 있는 기독교에서는 제일 못나서 다른 것을 하도 안 되니까 어찌 할 수 없이 나중에는 신학교라도 가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이런 그릇된 생각이 지배합니다. 그리고는 자칭 종이라고 하고 돌아다니면서 사방에 분란을 일으키고, 주님의 나라를 선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 그 나라를 은폐하고 그 영광을 실추시킵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는 사람이 저렇게 못나고 잘못하고 시시하고 저렇게 상식도 없는 짓을 하는 것이냐’ 고 할 만큼 사회 도덕상 또 기독교로서 가져야 할 상식조차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릇된 생각과 그릇된 칭호부터 다 지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2. 죄의 종과 의의 종

주의 종은 반드시 종교의 직을 가졌으니까 주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이라고 할 때의 전제는 과거에 무엇인가 그릇된 것에 종이 되어 살다가 그것을 깨닫고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이제는 자기의 전 지체를 하나님 앞에 드려서 의의 종이 되는 그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으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19-22) 하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것이 주의 종입니다. 첫째는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사람이 거기에서 해방되지 않았느냐. 죄에서 해방된 상태에서 과거에 네 지체를 불의에 드렸던 것과 꼭 같이 이제는 의에 드려라. 그래야 종이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특별히 로마서 6장을 읽고 있습니다. 16절부터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6-18절)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가치가 결국 나쁘든지 좋든지 하는 것이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것은 없는 것이다. 명확하게 판단할 때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든지 그렇지 않고 거기서 해방되었으면 순종의 종의 되어서 의에 이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원래 너희는 죄의 종이었다. 그렇지만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그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먼저 이것은 위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에게 종이 되는 위치에다 갖다 놓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 했느냐 하면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이 되고 의에게는 종이 된 사람이라고 하지만 너희 육신이 연약해서 네 육신 생활을 보면 네게 주신 새로운 생명과 위치에 부합한 생활을 못하고 연약해서 도로 죄에게 가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을 많이 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것을 일러주마’ 하고 그 다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에게 있는 여러 가지 예가 있는데 그대로 내가 일러준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19절) 죄의 종노릇하던 그 시대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그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가운데 부정한 생각이나 하고 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아니한 불법의 생각이 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붙이고 또 여러 가지로 오해를 하고 망상을 해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부정과 불법에 지체를 드렸습니다.

 

지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 몸뚱이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모든 심리 활동에 따라 자연히 활동해야 할 육신의 모든 활동을 거기에 드렸던 것입니다. ‘너라는 한 지체를, 몸뚱이를, 너라는 한 인간 전체를, 개체를 항상 네 자신의 망상과 욕망과 부정한 것에 드렸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깨끗지 못하고 옳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에 맞지 않는 것들이지만 네가 거기에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이 된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3. 의의 종이 되려면

그러면 의의 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너희를 이미 죄에게서 해방해 주셔서 다시는 너희를 죄인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의의 종이라는 그 높은 위치에다 너희를 놓아주었다. 그렇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너희가 육신이 연약해서 자꾸 또 여전히 옛날식으로 부정한 생각이나 불법이나 욕망이나 탐욕이나 그런 것을 좇아서 그것을 자꾸 해 보겠다고 하고 그런 망상 가운데 젖어 있다. 이제는 너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마치 전에 너희 지체를 불법에 드려서 불법과 불의의 결과에 이른 것과 꼭 같은 양식으로 이제는 너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는 말은 ‘선’에다 너희 지체를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말을 안 쓰고 ‘의’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완전한 선인이 절대로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눅18:19)고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그러나 훌륭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언제든지 ‘의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이 특별히 히브리적 개념이고 또 구약에서 늘 그런 식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의롭다고, 즉 정당하다고 너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의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바 ‘이것이 바른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하는 것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네게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싫고 손해날 것 같고 남이 비웃을 것 같을지라도 상관할 것 없이 네 지체와 마음을 그쪽으로 기울이고 ‘예 하겠습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겠습니다’ 했으면 그 다음에 ‘아 참. 그래도 창피하고 싫은데 ---’ 하지 말고 네 발을 그리로 움직이고 네 손을 그쪽으로 향하고 네 몸뚱이를 그리로 향해서 나가라는 것입니다.

 

지체가 그렇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과는 구별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성별된 위치에 이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죄의 종, 의의 종 혹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거기에 썼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20절). 이 말은 하나님의 의사가 네게 있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 나는 상관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한다’고 했다는 말입니다.

 

4. 죄의 열매와 의의 열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21절). 이 말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바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그것은 내게 상관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하련다’ 해서 네가 자유를 누린 것 같지만 무슨 결과를 얻은 줄 아느냐? 네가 가진 그 어리석은 자유가 어떠한 결과를 네게 갖다 주었느냐? 그 마지막은 사망, 죽음인 것이다 하고 가르칩니다.

 

이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가르치는 사망,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는 하나님의 축복도 아무 것도 없이 영원한 저주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한 저주와 서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21-22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해방되었다’는 말은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권세가 다시 지배하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역사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죄가 사실상 실권을 가지고 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네가 자원해서 네 탐욕과 죄의 정욕에 네 몸뚱이를 맡기니까 죄가 자꾸 너를 지배하지 네가 그것을 거부해 봐라. 그러면 죄가 너를 지배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알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네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길이 없이 죄가 와서 너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죄에게서 너를 해방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속죄의 공효가 이미 네게 작용하여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노예 시장에서 나를 사 내왔다는 사실이 역사적인 사실로 현실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22절). 그것은 ‘이제 너는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 너를 인쳐 놓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으로서야 할 사람인 네가 하나님의 종다운 생각과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좇아가야 할 지체의 방향을 다른 데로 바꾸어 네 자신의 탐욕과 정욕과 부정과 불법을 따라다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여러분이 그전에 배운 것같이 7장에서는 율법에 대해서 자유를 얻은 이야기와 또한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면서도 죄에 질질 끌려가는 사실을 다시 묘사하고 왜 이러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 나갑니다. 이것은 다 우리들이 생활 가운데 얼마든지 경험하는 사실들이고, 그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위대하게 효과 있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이런 위치에 있어야 비로소 “주의 종이라는 사실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제 마음대로 결정해 가지고 기독교에서 무슨 월급 받는 직분을 하는 것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떠드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먼저 주의 종이 되기 전에 의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노릇을 못하는 사람이 주의 종노릇은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까? 밤낮 죄의 종노릇만 하고 하나님의 종노릇은 하루도, 한 나절도 반듯하게 못하면서 주의 종이라고 누각 뽐냅니까?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주의 종임.

주의 종이라고 할 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쓴 사도 바울 선생의 개념이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종이라고 할 때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종이나 의의 종이라는 말의 중심에 있는 죄의 권세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특수하고 적극적인 일을 위해서 그를 쓰시는 그 시간부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런 특별한 의미에서 디모데나 바울 선생은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부르신 것은 주님께서 그 나라를 적극적으로 신장해 나가시는 일을 위해 뽑아서 그 일만을 전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만 주의 종인 것은 아닙니다. 주의 종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신장해 나가는 데 각각 자기의 사명감을 명확하게 가지고 자기 은사의 부분에서 충실히 일하는 모든 사람이 주의 종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종교 직분자만이 주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디모데 선생 같은 이를 특수한 의미에서 주의 종이라고 할 때 그들은 생활의 전체를, 자기의 생계 문제까지라도 다 주님과 직접 관계하고 주님의 나라를 신장하는 일에서 해결해 나갔다고 하는 의미가 있지만 바울 선생은 언제나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처음에 하나님 나라의 형태를 신약의 교회라는 형태로 세워 나갈 때에는 아직 제도가 확립되지 아니한 까닭에 확립된 제도 하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그 일들, 구약에서 이미 다 가르친 그 일을 제대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전도를 할 때 뒤에 안디옥 교회가 있다고 하지만 안디옥에서 수 천리 멀리 떠나서 나중에 헬라 땅으로, 그리스로 다니면서 전도할 때는 안디옥에서 그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여수 하게 자꾸 뒤에서 보급하고 수급해 나갈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가 바울 선생이나 바나바 선생을 내보낼 때에는 자기네가 내보내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졌습니다. 아무 책임 없이 덮어놓고 내보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일단 거기를 떠나서 활동할 때 그 시대에는 바울 선생과 그 모교회의 연락이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쉽습니다. 미국 사람이 여기와도 미국과 연락이 금방 되어서 돈이 금방 오고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도저히 그럴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바울 선생은 그런 시대적인 곤란에 비추어 효과 있게 일하기 위해서 자기가 옛날에 배웠던 그 직, 장막을 짓는 일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만을 항상 하면서 그것으로 전부 자변을 했다고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바울 선생을 우리가 다 보면 자기와 자기 일행이 쓸 것을 자기 손으로 벌어서 자변을 했으니까 ‘내가 어떤 교회에 네가 돈을 내라. 하나님 앞에 너도 마땅히 바쳐라 하는 말을 할 때에는 떳떳하게 말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 그 도리를 모르니까 내가 그것을 가르쳐야겠다’ 하고 저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또 저들이 은혜를 받은 사람다운 사실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마땅히 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헌금을 해야 할 것을 잘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헌금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여비에 직접 보태 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처음 선 초생 교회가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 것이지 그 원칙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후대에 오는 모든 원칙은 반드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10).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전9:9-10)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셔서 어떤 사회에 들어가서 그 일을 하면, 즉 곡식을 밟는 일을 직접 하면 자기가 밟는 곡식을 저부터 먼저 먹어야 할 것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가 곡식을 밟아서 자꾸 떨면 그 떨어 놓은 곡식을 제가 우선적으로 먹어야지 소는 일체로 먹어서는 안 되고 곡식만 애써서 밟아 주고 먹기는 다른 사람들이 다 먹어야 한단 말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거기서 나오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결과에 대해서, 그런 축복에 대해서 먼저 거두어 갖는 것이 당연하다’ 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친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것은 바울 선생 자신도 나중에는 많이 자신에게 적용한 원칙으로 압니다. 어떠한 사람이 훌륭한 신앙이 있어서 그 일을 하기를 자원할 때는 바울 선생이 거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빌립보 성에 처음 들어가 전도했을 때에 하나님이 자주 장사하는 어떤 부인의 마음 문을 여셔서 처음에는 주의해서 듣게 하시고 즐겁게 그것을 받아서 주를 믿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루디아가 그렇게 주를 믿는 사람이 된 다음부터는 바울 선생이 다른 데 가서 유하면서 혼자 두류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주를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거든 나도 주 믿는 사람답게 봉사를 할 테니 우리 집에 와서 거하십시오’ 하고 그와 그 식구가 다 세례를 받고 그 집에 거하도록 강권해서 있게 했습니다(행16:11-15). 그만큼 루디아는 ‘나도 하나님 나라 일에 힘써서 내 몫을 하겠다’ 고한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많은 신학자들이 후대에 볼 때 그가 복음을 받는 과정이 아주 훌륭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복음을 제대로 받는 아주 전형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이란 그렇게 받는 것이 전형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물을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밤낮 남의 집의 궤짝이라도 고쳐 주어 가면서 전도해 가면서 먹고사신 것은 아닙니다. 30세까지는 나사렛에 있으면서 목수 노릇을 해서 생계를 돕고 집안을 도왔지만 일단 집을 나온 다음에는 당시의 이스라엘 랍비들이나 또 그런 훌륭한 선생들이 하는 방식을 좇아서 그 주위에 있는 제자들이나 제자로 자처하고 사숙하는 이들이 물질적으로 공궤하는 것을 가지고 지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이 멀리 유대 땅으로 가셨을 때는 갈릴리의 성도인 부인들이 거기까지 따라가서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주님과 그 제자들을 늘 공궤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그런 부인들의 이름을 쭉 썼습니다(눅8:2-3참조).

 

물론 어떤 하나를 가지고 이것이 모델이다. 저것이 모델이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칙은 성경에서 늘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고 할 때는 그가 그 일로 생계를 해결한다는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생계를 해결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신 것을 천직으로 알고, 즉 그 나라에서 주님이 요구하신 중요한 부분인 줄 알고 충실하게 그것을 감당해 나가면 그가 주의 종인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신학자들이나 목사들만을 주의 종이라고 하지 않고 기독교 역사상에서 기독교의 바른 발전을 위해서 충실하게 봉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여러 가지 일을 충실하게 하는 데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을 짓는 데에 늘 주력하면 그 사람을 가리켜 ‘너는 음악가지 주의 종은 아니다’ 하는 말을 하지 않고 훌륭한 주의 종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 어디서든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주의 종이라는 말을 다 쓰는 것입니다. 훌륭한 의사로 주의 나라의 신장을 위해서 열심히 나가서 봉사를 했다면 주의 종인 것이지 돈 안 받고 나가서 자선 사업만 해야 주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선 사업을 백 번해도 주의 종이 아닌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믿고 섬기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나라의 신장에 바른 일을 해 나갈 때는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돈 벌어서 먹고살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 살더라도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의 거룩하신 목적과 주의 경륜의 전진을 위해서 주님께서 불러서 시키시는 일을 자기가 확신하고 그렇게 밀고 나가면 주의 종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다 주의 종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도 그렇게 ‘주의 종이면 이렇게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6. 주의 종은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의 부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 안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과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7.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8.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나 은사를 정당하게 선용할 수 있어야.

9.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서 평가받을 때 인정받을만한 흔적을 남겨야

10. 하나님의 진리를 옳게 분변하여 자기를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서 드리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김홍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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