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딤후 3:1-17)
신 존재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크신 경영을 가지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고자 할 때 사람들의 세계에 성신님으로 역사하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생존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잘 지지하시고 보존해 주시는 사실이 있다. 이런 것을 보통 신학상 일반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선한 사람에게든 악한 사람에게든 또 인간과 더불어 같이 살면서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여러 가지 것들, 초목이나 땅이나 금수와 같은 모든 삼라 만상에 해를 비추어 주시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렇게 은혜를 끼쳐 주심으로 피조물들이 활동을 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함부로 말도 하고 죄도 짓고 반역도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패역을 다 아시지만 크신 뜻이 있어서 불순한 인간에게도 일반적인 은혜를 베푸시고 보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뜻이란 사람들이 패역을 끝까지 조장하거나 계속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 가운데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나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내려주셨다. 사람들이 다만 생존 활동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영 게획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단순히 일반적인 은혜 가운데 있는 소원 일반 계시에 의하여 다 알 수 가 없다. 물론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호흡하고 활동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이나 거룩하신 엄위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사람은 나면서부터 당연히 하나님을 알게 돼 있다고 말씀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무신론자에게는 곧이들리지 않는 말이 되겠지만 어떤 사람의 말대로 무신론자의 무신론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했다면 무신론이라는 것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아무리 부인해도 자기가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무리 부인해도 그 부인한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대상이 거기 기본적으로 있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칸트파 철학자는 '나는 돈 백만 원이 없지만 백만 원이 있다고 상정을 하고 그것을 부인할 수 있고 시인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없는 것 가지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반박하는 사람은 '백만 원이라는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은 세상 어디에 이미 존재하는 사실이다. 그것이 제게 없다고 해서 전무하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백만 원이라는 아이디어를 들었고 그것을 존재하는 사실로 알았기 까닭에 부인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끝없이 많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지 '이러이러하니까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하라.
성경은 맨 처음에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시작하지 않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요한복음 초두에 보면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 로고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로고스가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로고스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다른 아이디어로 표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는 어떤 천지의 대주재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든지 '엘로힘'이라고 부르든지, '갓(God)'이라고 부르든지 상제라고 부르든지 그것은 각각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 전통 안에서 지어진 가장 근사한 언어를 선택해서 쓰는 것뿐이다. 요컨대 그 개념의 내용을 형성하는 실체는 한 가지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라고 불렀든지 '여슈아'라고 불렀든지 '지혜' 즉 호크마라고 불렀든지 무엇이라고 했든지간에 그 부르는 명사의 내용을 형성하는 실체는 늘 한 가지이다. 이렇게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하여 사람으로 논하게 하지 않았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스콜라 철학자들이 제일 주력해서 했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론이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묵상을 할 때에 그런 논증이 생각할 자료로서 의미가 없지는 않다. 가령 신의 본체론적인 논증이란 존재한다 하는 그런 관점에서부터 논리해 나간 것이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논증이라든지 우주론적인 논증이라든지 역사론적인 논증이라는 것이 있다. 또 특별히 칸트가 좋아서 많이 쓰던 도덕론적 논증이라는 것도 있다. 이미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경륜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 존재라든지 목적이라든지 역사라든지 우주라든지 혹은 도덕을 가지고 생각해 나가는 이런 것들은 다 우리에게 좋은 재료가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써 존재 자체를 증명하려 한다면 할 수 없는 것이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끝없는 반론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설복할 길도 없다. 성경은 차라리 '너희들이 아무리 부인해도 너의 저 깊은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이 늘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전도할 때 주의할 점
그런 까닭에 처음 전도를 받는 사람이 말끌머리에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오?' 하고 물을 때 이 말에 이끌려 대꾸하기 시작하면 전도는 결국 못 하게 된다. 전도가 아니라 변론하다가 마는 것이다. 전도할 때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일러주어야 한다. 그래도 '아니 나는 부인한다'고 말할지라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위치에서 일보 양보하여 뒤로 물러가거나 곁길로 들어가지 말고 자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절대 의로우신 까닭에 추호도 죄를 용납할 수 없는 분이시다'고 죄론을 이야기하되 '그 죄란 우주의 죄요, 세상의 죄가 아니라 당신의 죄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믿으면 당신은 속죄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할 때 결코 신 존재론으로 이끌려 들어 가서도 안 되고, 전도의 대도를 떠나서 세상론이라든지 사회론이라든지 인간 고통론이라든지 허무론이라는 곁길로 들어가서도 안 된다.
사람의 생명에만 속한 '자연인' 즉 프쉬키코스는 하나님의 신의 일을 받지 아니한즉 이것을 미련하게 여기고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서 깨달아 보려고 노력하더라도 깨닫지도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로 분별하고 뜻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였다(고전 2:14). 그 사람이 명석한 학자로서 훌륭한 논객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그 사람이 지금 죄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죽어 있다는 사실은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결국은 죽은 상태이기에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상대가 묻는 말에 내가 대꾸하여 여러 관문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무엇을 해 보겠다는 생각은 정당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죄는 용서치 아니하신다. 그에게는 지금 하나님의 형벌이 선고되어 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니 이는 저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이라"(요 3:18).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또 구약의 시편도 말씀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시 7:12-13). 회개치 않는 자는 지금 큰 진노의 현실 가운데 있되 누군가 활을 당기고 있는 것과 같아서 탁 놓으면 화살이 그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이다. 이와 같은 위험한 상태에 있는데도 준순 방황하고 앉아서 태평 세월에 변론만 하고 있고 종교론이나 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묘히 회피하는 처사이다. 물론 전도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 받고 성신님이 그 사람을 건져내시는 역사를 하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주어진 시간에 신실히 그 일을 하는 것 뿐이다. 곁길로 들지 말고 하나님의 엄위와 그 개인의 죄와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 영원한 형벌의 무서움을 전해야 한다. 지옥이 있다 없다 하는 소리도 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에게 지금 그것을 이론해서 말해 준다 한들 알아들을 수도 없다.
특별계시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나느냐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정하신 사람으로 살리시려면 내가 전한 말이 그에게 들어가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활동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전한 말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죄를 가중하게 해서 심판날 문책의 한 조건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정당하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을 가진 검과 같아서 이리도 저리도 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죄책의 중요한 조건이 되든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명백하지만 사람들이 똑똑히 알지도 못하고 덮어놓고 부인하는 수가 있다. 나중에 그런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무신론자였습니다' 하고 핑계치 못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거기 18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써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데 왜 나타나느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저희에게 다 보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다 보이신 것이다. 자기의 불의를 가지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일지라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그에게 다 보인 것이다. 그 다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의 신성에 대하여 모른다고 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최후의 심판 날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하고 아무도 핑계 못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문책할 조건들을 다 구비해 두셨다. 그런 조건이 미비한 것처럼 생각하고 쓸데없는 동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것에 관해서는 성경이 가르친 대로 명백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성경에 관하여'에서도 그것을 잘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에 심어 주신 빛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권능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핑계를 할 수가 없다' 이것을 소위 일반 계시라고 한다. 그러면 사람이 정신을 바로 차리고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의 깊은 도리를 혼자 다 알 수 있게 되느냐 할 때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경영하신 바 인류 구원의 특별한 은혜의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빈틈없이 알려 주기에 넉넉한 계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일반의 계시 이외에 특별한 계시를 더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특별한 계시가 아니면 구원의 크신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거룩하신 본의를 이룰 참된 구속과 영원한 생명의 사실을 보여 주신다. 우리 주님도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적해서 말씀하실 때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요 5:39). 하고 가르치셨다.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거기서 영생의 도리를 얻는 줄 아는 까닭에 하는 것 아니냐? 그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하셨다. 그런즉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에서 비로소 새로운 생명, 그 영원한 생명을 얻는 도리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구속이 큰 사실과 새로운 창조의 큰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성경에 많은 도리를 베푸셨고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특별한 계시를 사람에게 내리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깨우쳐 알게 하시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이라는 말은 원래 지시한다, 가르친다, 교훈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야라에서 유래하였다. 거기서부터 언어상으로 발전하여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다 하는 '법'이라는 말, 또 하나님께서 너희를 건지시는 길은 이렇다 하는 '길'이라는 의미가 담긴 토라라는 명사가 나왔다. 이 토라라는 것이 율법이라는 말이지만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무엇을 얻으려고 성경은 보는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내리실 때 모든 시대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명확하게 알아야만 할 도리로 가르치신 까닭에 단번에 다 주시지 않고 몇천 년 전부터 내려주셨다.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사람에게 전달을 해 놓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사람과 사람간의 통신의 방법, 의견과 생각을 교환하는 방식이 게속 변하는 까닭에 애초의 뜻이 정확히 전달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사회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변화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념의 말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나라마다 동일하지도 않다. 복잡한 개념으로 들어갈수록 용어들이 여러 가지로 변화가 생긴다. 큰 사전을 펴 보면 단어 하나를 한마디로 딱 써서 끝낼 수가 없어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혹 요것이다 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죽 써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이란 각각 그 말이 형성된 역사와 사회 현실에 따라 담겨 있는 개념의 내용도 다소 변화하며 발전해 나간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이다. 어족(family of lan-guages)에 따라 담겨 있는 개념의 내용도 다소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혹은 언어 계통에 따라 독특한 뉘앙스를 가지고 발달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정한 지역에서 일정한 시대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 의사와 감정을 소통하는 언어 하나만을 가지고 한 마디로 단정된다면 참으로 어려운 말이 될 것이다. 후세에 알아보기가 어렵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또 사회를 달리할 때도 알아 보기가 어렵게 된다. 그런즉 사람들의 이러한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많은 형식을 쓰셨다. 성경에는 법전도 있고 역사 이야기도 있고 설화 혹은 설교 또 시가나 심지어 전기 같은 것도 들어 있다. 이런 여러 가지 형식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알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이용하여 가르치시는 거룩한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언어로써 전달하시려는 내용에서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항상 중요하다. 성경에 있는 표면의 이야기 자체만 생각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내용과는 많이 다른 것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지역 사회 또 그 시대의 풍속을 좇아서 만들어진 역사적인 사실인 까닭에 그렇다. 성경이 그런 역사적 사실을 인용해 놓고서 전하려고 했으면 그 특수한 역사적인 현실을 잘 조사해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경의 참 뜻을 알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바 거룩한 도리를 바로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여기서 잠깐 곁길로 들어가서 여러분에게 생각해 보시라는 뜻에서 텔레비젼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요새 크리스마스 때가 되어 오니까 그랬겠지만 최근 우리 주님의 일생 이야기를 텔레비젼에서 몇 번 보았다.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네 번에 걸쳐서 방영한 <나사렛 예수>라 하는 영화이다. 상당히 이름이 있는 배우들을 모두 동원해서 진지한 태도로 영화를 만들었다. 옛날에는 영화계에서도 예수님을 나타낼 때 얼굴은 보이지 않게 하고 뒷모습만 보이게 했는데 이제 와서는 '뭐 그럴 것 있나' 하는 식으로 타파를 하고 예수님으로 분장한 사람의 얼굴 표정이 다 나타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화가 복음사를 연구한 결과로 나온 연대의 순서를 별로 고려하지 않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급적 연구한 결과로 나타난 순서에 충실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것인데, 대본을 쓴 사람이 좀더 드라마틱하게 이끌고 가기 위해서 시간상 많이 떨어져 있는 사건들이 한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만들기도 하고 연이어서 발생한 것처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것을 일일이 비평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빗나감을 주의하고 우리가 성경에 대한 정당한 태도를 늘 가져야 하겠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든지 성경에 있는 다른 이야기를 읽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알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주의해서 파악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있는 사람들의 역사나 생활이나 그들의 사상을 드라마틱하게 연결해서 알리는 것이 아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기적으로 잘 엮어서 조르르 나타낸다고 해서 예수님의 존재의 신비성이나 예수님의 하시는 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불가침적인 신적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전에도 잠깐 그런 설명을 몇 번 했다. 우리가 산상보훈을 읽어 가면서,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전을 이용하여 설명하실 때 '영원의 법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해 나가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보는 실정법적인 내용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법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영원의 법을 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기를 원하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기를 원하신 것이다. 한 지역 사회 특별히 유목과 농사를 함께 하는 그 사회에서 자기네끼리 통용하는 사회법으로 끝내라는 것이 아님을 과거에 다 배웠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가령 로고스가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으면 그 사람으로 끝났는가? 땅에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언제든지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씨앤쓰로포스, 신인이시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어느 것은 신적인 것이고, 어느 것은 그래도 우리가 파악하기 쉬운 인간적인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적인 형식을 통해서 그 속에 있는 신적인 가장 숭고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을 자꾸 깨달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인간 예수, 소위 '역사적인 예수'라는 말로 표현한 인간 예수의 역사적 사실만을 그냥 엮어서 본다면 복음사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당신의 신성을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맹렬히 반대하면서 일어나 돌로 치려고 하였던 것이다. 성경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합니까? 영원한 생명을 보려고 읽은 것이지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선지자였는가, 얼마나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였는가 하는 것을 보려고 읽은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참으로 주의하셔야 한다.
성신께서 은혜의 방도로 쓰심
성경이 이 세상 사람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인류 문화에서 아주 비류 없는 위대한 걸작품이다. 가령 시가나 선지자의 글이 가지고 있는 시문학적인 예술성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아주 웅혼하다. 물론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니까 표현하고 있는 문체 양식이나 필치도 다채롭다. 특별히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모세의 필치는 결코 북구라파의 장대한 싸가가 입내를 낼 수 없는 문장이라는 평가를 우리가 보는 것이다. 문학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도덕적인 서적으로는 물론 사상의 원천으로도 말할 수 없는 위대한 내용들을 보여 준다. 율법서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으며 또 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사회를 형성하시려고 했는가?'를 살펴보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겨우 이론적으로나 이야기하는 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깊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벌써 존엄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쓰고 있다.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조목을 가르치시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떠한 가치를 가진 인간이냐 하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멸시한다면 그것은 살인하는 죄와 마찬가지이니라' 하고 가르치셨다. 성경은 이렇게 고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나가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 최고 최종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이 성경의 본령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성경이 인류 문화에서 가장 위대한 비류 없는 문헌이라 할지라도 그런 요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최고 권위를 표시하는 사실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표시하는 것은 인류 문화의 위대한 걸작품이나 혹은 신학의 원천이라는 데 있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방도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도리'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도리, 양이 들어가고 나가면서 꼴을 얻듯이 얻어서 커 나가는 거룩한 도리를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방도 혹은 수단으로 사용될 때, 다른 말로 하면 성신님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것이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되고, 건전히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의 능력이 되며, 마음에 늘 평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한다. 성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은혜는 내 안에서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서도 발생하는 것이다. 성신께서 우리를 주장하심으로 소위 하나님의 섭리로서 동시 발생이 일어난다. 이컨커런스가 일어나 모든 것이 조화 있게 되어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묘하신 능력의 역사인데 그렇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하는 것이다.
성경은 먼저 구속의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 주고, 그 다음으로 새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식으로 또한 권속으로 어떻게 늘 극진히 보호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들을 가르쳐 준다. 이것을 떠나서 성경을 가리켜 위대한 문화 유산이라고 아무리 떠들어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본령과 그 진가를 바로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가치는 위대한 인도주의자요 위대한 인본주의자인 톨스토이나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당위가 무엇인가를 아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바로 깨닫는 것이다. 특별한 사상가가 아니고 대단한 학자가 아닌 필부 필부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를 배워서 그 도리 안에서 형제를 사랑 할 줄 알고 거룩한 켜뮤니티 안에서 자기의 당위를 할 줄 알면 그것은 훌륭한 인도주의자가 부르짖는 인류애보다도 훨씬 효과 있는 일이고 또한 위대한 일이다. 이런 깊은 도리를 깨달음으로써 그것이 자기에게 긴요한 자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은혜와 법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큰 도리를 가르친다. 이것을 달리 설명할 때 '법 혹은 은혜라 하는 내용의 표준이 되는 것이 성경이라'고 전에 말씀드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은혜는 은혜대로 따로 있고 법은 법대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은혜가 어떻게 내려온다는 그 질서가 곧 법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법은 광의로 이야기할 때 질서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을 적용하실 때에는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또한 직접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어떤 큰 역사의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심으로 깨닫고서 '아,나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고 자기의 신성한 의무나 책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한 법이다. 또 '너는 이렇게 해라' 하고 직접 명령하는 법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하지 말아라' 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이것을 더 이상 해서는 아니 되겠다' 하고 깨닫게 하시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다 법이다. 그런고로 '복음은 믿어야 하겠다. 믿되 반쪽만 믿지 않고 충분히 다 믿어야 하겠다' 하는 것도 하나의 법인 것이다. 이러한 법칙을 무시하고 복음이 저 혼자만 서는 것이 아니다. 법에는 또한 반드시 목적이 있는데 결국 하나님의 구원과 자비와 사랑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법에는 은혜가 있고 은혜에는 법이 있다. 성경에는 법이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은혜의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그 둘은 교직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것을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역사하는 양식이 있다. 성경이 현저하게 우리에게 꼽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말씀은 나를 인도하는 빛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9:105). 주의 말씀이 바로 눈앞에서 비치되 어떻게 발을 디뎌야 할 것인가, 돌이나 여타의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도록 등불같이 비추어 줄 뿐 아니라, 나의 갈 길이 캄캄해서 어딘지 모르겠는데 저기 멀리서 비추어 주는 빛과 같이 또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의 행보에서는 등 노릇을 하고 나의 기가긴 인생길에서는 빛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성경의 쓰임의 한 가지이다. 성경은 또한 전투할 때 쓰는 무기 역할도 한다. "성신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해서 성경은 모든 흑암의 세력과 더불어 싸울 때 사용해야 할 무기로서의 역할도 한다. 성경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덮어놓고 성경의 말이 신통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부정당하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셔야 할 것이다. 미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성신께서 그것을 은혜의 방도로 쓰시는 사실이 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님, 크신 사랑으로 인류에게 특별 계시를 내려주셔서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갖게 하셨지만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뛰어들어서 그 언어의 개념을 자신들이 생활하는 양상에서 얻은 그것으로 오해하기 쉽사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을 바로 잘 알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시되 저희로 하여금 어떻게 순결하게 참된 개념을 형성해서 말씀을 바로 이해해야 하겠는지를 가르쳐 주셨사옵나이다. 다만 저희가 부족하고 장성의 정도가 너무 빈곤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큰 뜻을 깨닫지 못하고 낮은 위치에서 방황하기 쉽고 또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항상 자기의 자식의 재료로만 생각하여 그릇되게 쓰기도 쉽사오니 저희가 그런 불쌍한 처지에 머물지 않도록 은혜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성신님께서 주장하시사 참으로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방도로 우리 안에 역사하셔야 하겠나이다. 말씀이 우리의 생활의 능력이 되어야 하겠고 깨달음이 되어야 하겠고 우리의 행보에 확실한 빛으로 인도하는 사실이 되어야 할 것이로소이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사 고귀한 것들을 고귀하게 쓰지 못하고 사람의 비천한 생각으로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저희를 단속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희에게 말씀을 주신 거룩한 본의가 확실히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디모데후서 3장 15-17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바울 선생은 제3차 선교 여행을 유럽에서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가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인 줄 확신하고 그 앞길에 놓인 고통과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로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때 이방 여러 교회에서 거둔 많은 연보를 가지고 갔습니다(행 24:27). 바울 사도는 유대 신자들의 비참한 육신 생활을 잘 알았으므로 이방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표로 모은 연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돈을 친히 갖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매를 실지로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오만한 율법주의, 그 그릇된 사상을 고쳐도 주고 교회의 사랑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주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피할 수도 있었으나 자진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행 21:13,14,17). 마침내 성전에 들어갔을 때 바울은 거기서 폭도들을 만났습니다. 이 폭도들 때문에 불가부득이 당시 팔레스틴의 로마 총독부가 있던 가이사랴 항구의 총독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거기서 있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사도는 가이사에게 상고를 한다고 해서 결국 가이사의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 이야기올시다.
바울 선생은 로마의 옥에서 재판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복음 사역을 계속하였고 그 후 2년 동안 자기의 셋집에서 지키는 군사와 함께 살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 서신들을 썼습니다. 그 후 소식은 A.D. 63년 혹은 64년에 바울 선생이 사면이 되어 옥에서 나와 가지고 다시 헬라 땅과 소아시아 땅을 순회하였고, 그 동안에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다시 잡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로마 관원에게 붙들렸습니다. 죄목도 유대교의 율법 문제가 아니라 그때 로마의 폭군 네로의 저 유명한 로마시 방화 사건의 범인 중 하나로 붙잡혀 로마의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미친 짓을 하던 네로가 ‘로마시를 깨끗하게 새로 건설하겠다’고 제가 불을 질러 놓고 민심이 오오하니까 나중에는 ‘기독교인이 불질렀다’는 식으로 전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은 이편저편한테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네로 측에서는 ‘민중의 적이니까 가만둘 수가 없다’ 하고 기독교인을 잡아들이게 하고, 일반 민중은 ‘불 지른 원흉들이니까 안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큰 박해를 받게 된 것을 다 잘 아실 것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바울 선생도 붙들려서 다시 로마로 압송이 되어 옥에 갇힌 것입니다. 이제는 뭐 다른 사건도 아니고 기독교인의 수괴의 하나인 까닭에 거기서 순교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것이 이 디모데후서올시다. 전에 로마 옥에 있던 때가 대체로 주후 63년이나 될 터인데 한 3년 후에 그러니까 66년이나 67년에 이 마지막 순교를 기다리는 옥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있으면서 디모데후서를 썼는데 이 3장에 들어가면 맨 먼저 1절부터 5절까지가 마지막 날에 혹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입니다. ‘큰 배교와 동시에 대환난이 있다’는 이야기는 디모데한테 전에 한 편지에도 썼지만(딤전 4장) 바울은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이때에 쓴 편지에도 ‘말세에 크게 고통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다시 썼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이유를 쓴 것을 보면 무슨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고 혹은 문화상 어떤 문제도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부도덕한 심정들 때문에 특별히 고통스럽다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거기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도 고통이고 또 신체가 약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보다도 한 사회가 다 같이 큰 고통에 들어가는 것은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심정의 악’ 때문입니다. 심정이 악해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자기를 ‘내로라’ 하고 뽐내고 남을 깔보고 업신여기고, 그리고 사나워서 남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람 사람끼리의 관계가 괴악하게 되는 것이…….
말세에 고통이 온다 하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를 했는데, 12절을 볼 것 같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히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거룩한 법도를 지키고 살아가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두고 “잘합니다. 잘해 보십시오” 하는 게 아니라 어쩐 연고인지 박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말이오. 말세에 고통하는 때 사람들의 심정이 이 3장 모두(冒頭)에 묘사한 것 같은 심정인 까닭에 다른 일반 이웃들에게 고통을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도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괴롭게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들이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거짓말하는 자, 그 원흉은 물론 사탄이오. 사탄의 특색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으로 나타나는데 사탄이 스스로 변하여 광명한 천사인 체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속이는 것들이 세상에 있어 가지고 이론으로 속이고, 종교로 속이고 또 도덕으로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현재의 사회 현상을 바라볼 때, 특별히 앞으로 올 세대를 생각해 가면서 사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생각들을 하는가, 하는 것들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괴상한 여러 가지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다’ ‘부도덕하다’ ‘옳지 않다’ 하던 것들도 지금은 당당하게 ‘사람이니까, 인간성이 있으니까’ 하는 말로 변호를 하고,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같이 해석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하고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 서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그러고, 서로 안됐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각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보고 안됐다고 하면 세대 차이라고, 세대 차이 때문에 그런 것이지 안된 게 아니라고 하는 피할 길들이 다 있습니다. 요컨대 그 ‘도덕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 다 뒤집혀 가지고 있는 그런 세대에 우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앞으로 21세기에 큰 기대를 하는 이들이 있지마는 21세기는 그런 일이 아주 더 현저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런 일이 현저해질 것 같으면 그만큼 사람 살기가 고통스럽고 어려워진다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데가 15절부터인데 바울 선생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았지?” 하면서 ‘성경이 무엇이다’ 하는 것을 요약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15절에 한 가지 요약해서 말하고 16절, 17절에 계속해서 또 성경이 소용 닿는 것, 성경이 가지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가,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15절에 있는 말씀대로 볼 것 같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얻는 지혜가 있게 한다” 하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16절로 들어가서는 “모든 성경은 그 근원이 어디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므로 성신께서 역사하신다” 그것입니다. 성신의 역사로, 그 거룩한 영감에 의해서 나타난 성경은 “곧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교훈 하는 것도 있고, 잘못을 책망하고 고치라고 하는 것도 있고, 또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하는 것들을 죽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시대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또 모든 선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또 하였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은 여러 가지 교훈을 합니다. 그런데 그 교훈은 받는 사람의 신앙이 장성하는 생명의 양식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그냥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말면, 그게 안 듣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성경이 바라는 바 그 용을 충분히 못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내가 듣고서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내 영혼의 기능이 반응을 일으켜서 깨달아야 할 바를 깨닫고, 알아야 할 것은 알고, 느껴야 할 건 느끼고, 결정해서 해야 할 일은 함으로써 구원의 신앙의 실질상 용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그대로 한 지식의 내용으로만 머문다면 지식으로야 언제든지 경전이 거기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가서 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지식의 내용으로 남는 소용이 아니라, 교훈이나 책망이나 바르게 함이나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게 작용한 실질이 나타나야 할 것이라 말씀입니다. 그렇게 유익한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묵상하고 성신께 구해야 합니다. 성신께서 역사해 주시사 그 거룩한 비췸이 우리를 깨우쳐 주심으로써 구원의 신앙의 소용이라는 것이 바르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라 할 때 구원이라는 말은 종합적인 용어입니다. 그 ‘구원’의 내용에는 ‘영생’의 관한 가르침도 있고, ‘믿음’에 대한 가르침도 있고, ‘회개’와 ‘거룩한 생활’,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영광으로 화하는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은혜로운 사실들이 거기에 순서대로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잘 임하여 바로 연결이 되는 것이 참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올시다. 성경을 보고 깨닫고 성신의 인도를 받으면 그 지혜를 바로 알게 된다 그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지혜라는 말을 한 인격자를 향해서도 썼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또 잠언에서는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9:1) 해서 지혜를 비유로도 썼습니다. 그런데 지혜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말하고는 좀 다른 말이올시다. 지혜가 지식의 하나는 하나인데 그것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치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구원을 얻는 지혜’라 할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에 이르는 가장 거룩한 방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도 안에서 신자가 장성해 가면서 거룩한 여러 가지 은혜의 내용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내용의 구원의 차서인데 가령 중생이 있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그 다음에는 회개를 하고, 믿고 의지하고 나가는 생활,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다음에 나타나는 거룩한 생활 즉 성화의 생활을 한다는 것, 또 양자가 됐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신다는 것, 또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입으신 몸과 같은 영광의 몸을 우리가 다 같이 입게 될 것이라는 것 등 여러 가지 내용이 바로 구원을 얻는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바 거룩한 은혜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은혜의 내용을 시대가 험하든지 평탄하든지, 고통과 환난이 있든지 순조롭든지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우리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도 순교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며칠 후 자기에게 돌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신앙의 동지요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러한 내용을 마지막 편지로 써서 보낸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 환경이 조용하든지 시끄럽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고 또 배워 가야 할 것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서 확호하게 서서 나가려면,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거룩한 교회로서 자기의 광망(光芒)을 비추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인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또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법도를 즐거워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만 가지고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시간과 정력을 써서 간곡하게 알아보고 생각하면서 배워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서 차츰차츰 빛을 비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전해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에게 말씀을 주시옵고 아버님의 거룩한 심정 가운데에 있는 신비한 내용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며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셨고 주신 바 말씀에 의해서 저희가 구원을 얻는 지혜도 얻고 교훈도 얻고 책망도 받고, 또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모든 것들이 저희에게 적용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주신 바 이 은혜를 감사하오며, 그저 듣는 말씀으로만 듣고 지내지 않게 하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진리를 사모하고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저희가 주야로 묵상하여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장성해 가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장성하는 것임을 정신 차려서 생각하게 하시고 그냥 관습적으로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며 지내는 것으로 족한 줄 알지 않게 깨달음을 주시기를 비옵나이다. 저희들에게 건전한 힘을 주시고 건실한 생활을 내려 주시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시절이 좋든지 좋지 않든지 주의 말씀은 여전히 그 거룩한 광망을 저희에게 비춰 주시오니 그 빛을 받고 깨달아 알아서 주님 앞에서 장성한 생활의 열매를 확호하게 맺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홍전 목사/성약교회
메튜헨리 주석
마지막 날의 표적들(디모데 후서 3:1-9)
전 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 악한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그물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한꺼번에 걸려들기 때문이다(마 13:47, 4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자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장). 따라서 우리는 유혹자의 활동을 보고 설득당하거나 교회나 기독교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도 안 될 것이다. 옥에도 티가 있으며 밀이 타장 마당에 놓여 있을 때 밀 가운데는 많은 겨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Ⅰ. 디모데는 복음의 시대인 마지막날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하였다. 복음의 시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개혁의 시대이지만 이러한 복음의 시대일지라도 고통의 때가 있을 것을 디모데는 알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밖에서부터의 박해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 내에서의 부패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는 어려운 시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선한 양심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통의 때가 이를 것인데 왜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세하여 기독교를 박멸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는 고통의 때가 이를 것인데 왜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없는 자들이 더렵혀지고 악해져서 교회에 대단히 많은 해를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이천명의 포위하고 있는 군대보다 아군의 두명의 배반자가 더 많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고통의 시대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악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죄는 고통의 때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도덕과 기질이 일반적으로 타락할 때 시대는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된다. 왜냐하면 모두가 타락한 가운데서 우리의 순결함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2. 고통하는 때가 올 때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예언된 대로 고난의 때가 닥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격의 신적 권위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는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3. 우리가 고통하는 때가 이른 것을 볼 때 놀라지 아니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세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알고 또 믿으며 숙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네가 이것을 알라"고 하였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슨 이유 때문에 고통의 때가 닥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말세를 알 수 있는 징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2절이하).
1. 자기를 사랑함이 고통의 때의 요인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자기 사랑은 비정상적인 자기애(自己愛)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 자아 보다는 죄된 육체적 자아를 더 사랑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는 자기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그 욕망을 위하여 준비하기를 더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독교적인 사랑 대신에 그들은 자기에 대해서만 관심을 지니며 또 교회의 덕에 앞에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
2. 탐욕이 고통의 때의 요인이다. 자기 사랑은 죄와 재앙이라는 기다란 기차를 끌고 간다는 것을 명심하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많은 선행을 기대할 수 있으나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그에게서는 아무런 선행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탐욕이 일반적으로 널리 유행되므로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을 위하여 또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게 될 때 인간관계는 험악하여질 것이고 사람은 이웃끼리도 경계하게 될 것이다.
3. 자긍과 교만이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 고통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은 교만에 빠져 자랑하는 자가 되고 훼방하는 자들이 된다. 자랑하는 자라 함은 사람들을 경멸과 조소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자들이요, 훼방하는 자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인간도 무시하게 되고 정반대로 변해 버린다.
4.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의무와 감사로 부모에게 대하여야 되고 그리고 자주 부모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의지해야 하는 데도 자녀들이 자기들의 이 의무를 저버리게 될 때 이것들이 고통하는 때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를 거스리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재앙이 닥치는 법이다.
5.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는 것들이 고통의 때의 요인이 된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따라 다닌다. 인간이 거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면 또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감사하지도 않게 된다. 그것은 배은망덕과 불경건은 함께 따라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은망덕은 가장 나쁜 죄 가운데 하나이다. 감사치 아니함, 불순함, 육적 욕망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 육신을 위하여 좋은 것들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의 증거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들을 우리 정욕의 음식과 연료로 삼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들을 남용하는 것이 된다.
6. 자연법 또는 보편적 선을 사람들이 무시할 때 그때는 고통의 때이다. 그때도 사람들이 무정하여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 사람의 성품에는 누구에게나 따스한 온정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자기와 똑같은 본성을 향한 인간애가 있게 되며 특히 친족들 사이의 정은 각별한 법이다. 그러나 고통의 때에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며(2절), 부모들은 자녀에게 대해 무정해진다(3절). 본성의 타락의 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라. 본성이 타락될 때 그들은 본래 타고 난 인간끼리 느끼는 따듯한 마음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이 땅에서 인류가 번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깨지게 된다. 그리고 본능적인 애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또한 신앙적인 계약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으려 할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그들은 "무자비 하게 된다." 즉 그들은 혈연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게 되는 것이다.
7. 인간들이 서로 참소할 때 그것은 고통의 때이다. 참소한다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는 "dia,boloi"라 하였다. 이 말은 사람이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는 뜻인 것이다. 즉 사람들이 상대를 존경하지 않으며 또는 서원한 신앙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들은 자유로와 마음대로 말하고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시 12:4).
8. 인간이 자기와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할 때 고통의 시대가 올 것이다. 스스로의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는 것은 "절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며 자기의 정열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사나웁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할 때 무너지는 도시와 같은 것이다. 또한 성벽이 없는 도성과 같아 약한 병력의 침입 앞에서도 곧 불타고 말 것이다.
9. 선하고 존경받아야 할 것이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으며 경멸당할 때가 고통의 때이다. 박해자들은 선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10. 인간들이 배반하고, 고집하며, 자고할 때가 고통의 때인 것이다(4절). 즉 사람들이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할 때"가 그러한 때인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형제가 형제를 배반하여 죽음에 내어 주며 아버지가 자식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10:21). 그런 자들이야말로 가장 최악의 배반자들인 것이다. 또한 성경을 박해자들에게 내어 주는 자도 배반자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위임된 신임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성미 급하고 과장하여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대할 때 또한 이런 경향이 일반적으로 풍미할 때 고통의 시대가 올 것이다.
11. 인간들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때"가 고통의 때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보다도 쾌락주의자들이 더 많아질 때 바로 그때가 악한 때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 보다 사물을 더 좋아할 때 그 마음이 육욕적인 마음이며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가득찬 마음인 것이다.
12. 이러한 모든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다"(5절).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기독교를 믿는 것으로 간주되어 세례를 받고 신앙 고백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건의 모양이 그럴 듯할지라도 사실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경건의 모양에는 경건의 능력이 따라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있게 하신 둘 중에서 경건의 능력은 잘라 떼어버린다. 그들이 경건의 모양으로 가장 하는 것은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제거해 주는 경건의 능력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것을 볼 수 있다.
(1) 사람들이 신앙 고백을 했을지라도 대단히 나쁘고 사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경건의 모양은 지닌다.
(2) 경건의 형태는 경건의 능력과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건의 형태는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능력이 전혀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능력을 부인한다. 특히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경건의 능력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3) 이러한 악으로부터 선한 그리스도인은 돌아서야만 할 것이다.
Ⅲ.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유혹자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디모데 자신이 그들에 의해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될 것을 물론이어니와 그가 책임맡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무장해 주라고 명하였다.
1.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활동하는 가를 설명하여 주었다(6절). 그들은 변절시키기 위해 특별히 정한 사람의 집을 비공개적으로 방문한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자들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다(요 3:20). 그들은 박해자들이 그리스도인의 가택을 수색할때하는 식으로 강제로 집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사람들의 집에 살금살금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환심을 먼저 얻은 다음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을 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그들에게 넘어가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들은 약한 자들로서 곧 "어리석은 여인들"이며 또한 악한 자들로서 곧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는"자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머리와 더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중에도 특히 여자들이 쉽게 유혹자들의 먹이가 된다.
2. 바울은 그런 자들이 "항상 배우지만"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7절).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배워야 하며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회의론 자들로서 경솔하고 불안정하여 무슨 새로운 사실을 대하게 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다는 구실 아래 쉽게 그 교훈에 젖어버린다. 결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지식에는 이르지 못한다.
3. 바울은 그들의 진전을 막는 어떤 방해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이런 방해자들을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마술사들 즉 본문에 그 이름이 기록된 얀네와 얌브레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비록 구약 성경에서 이들의 이름을 볼 수 없지만 고대 유대인의 저술물들 가운데 그들의 이름이 명기되었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끌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왔을 때 그 마술사들이 모세에게 대적하였던 것이다. 이 방해자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또한 애굽이 마술사들처럼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었고 진리를 곡해하며 편견과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고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며 진실한 그리스도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 어리석음이 드러나서 결국은 그 방해하려는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다음을 유의하자.
(1) 유혹자들은 비밀 장소를 찾고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며 몰래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가장 약한 자들, 즉 어리석고 부도덕한 여인들을 공격한다.
(2) 유혹자들은 전(全) 세기를 통하여 모두 비슷하다. 그들의 특징은 언제나 똑같다. 즉 모세를 대적하였던 얀네와 얌브레같이 진리에 대적하는 행위를 한다. 또한 그들의 기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데도 그들의 운명은 일치하는 것이다.
(3) 진리에 대적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진정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magna est reritas, et proeualebit 즉 위대한 진리가 마침내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4) 비록 하나님께서 범죄한 영혼을 당분간은 활동하도록 내버려두실 것이지만 곧 그들은 사슬에 묶어 놓으실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이상으로 국가나 교회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어리석음은 온 천하에 드러나서 결국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이 사기군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요 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고난의 때의 표적들(디모데 후서 3:10-17)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가 걸어야 할 길을 확실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본받을 것을 제시하였다. 디모데는 바울을 오랫동안 수종하면서 바울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였었다(10절). 먼저 바울은 디모에게 "너는 나의 교훈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훈을 더욱 충분히 알고 확실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 교훈에 굳게 붙어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진리에 소홀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이 그 교훈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적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를 모르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을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였던 것이다. 디모데가 바울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1. 바울이 설교했던 교훈을 알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숨겨두지 않고 전하였다(행 20:27). 그러므로 그들이 잘못하지만 않는다면 그 진리를 충분히 알 수밖에 없었다. 디모데는 그러한 선생님의 밑에서 훈련을 받는 유익과 또 그러한 선생이 전수하는 교훈을 알게 되는 큰 유익을 가지고 있었다.
2. 디모데는 바울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네가 나의 교훈과 행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생활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양자 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전한 복음을 그의 생활에 의하여 무너뜨리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과 행실이 일치하는 사역자들만이 선을 행하며 또 그들의 수고의 영구한 열매를 남길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설교는 잘하나 생활은 제멋대로인 목회자는 사람들에게 전혀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이다.
3. 디모데는 바울이 가르치고 실행함에서 그의 의도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네가 나의 의향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내가 가르친 것이 세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과 속된 생각과는 거리가 얼마나 멀고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의 영혼을 좋게 하는 데에는 얼마나 가까운지를 너는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4. 디모데는 바울의 선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선한 성품을 바울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을 통하여 엿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의 믿음의 증거(즉 이 믿음의 증거란 그의 성실함과 고결성의 증거라는 뜻도 되며 또는 바울이 근거하여 생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앞으로 올 세상의 증거라는 뜻도 된다)들과 그가 가르치고 다스렸던 교회를 위한 오랜 참음과 모든 사람에게 대한 그의 사랑과 인내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은사에 있어서 바울은 탁월하였고 디모데는 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5. 디모데는 바울이 선을 위하여 고난받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11절).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을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라고 기록하였다(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고난들은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 있을 때 당한 고난들만인 것이다). "따라서 네가 만일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놀라지 말라. 그것은 내가 이미 겪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6. 디모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을 돌보아 주셨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음"을 네가 알고 있다고 하였다(11절). 바울이 주님을 위해 결코 실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결코 바울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당신은 나의 모든 고난을 아시나이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었다.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어려움 당하는 것만을 볼 때에 그들이 당하는 그 어려움들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으로써 작용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어려움만을 알게 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즉 "그 진리를 소유하는데 그렇게 큰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면 포기해 버리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난을 충분히 알게 되면 즉 선한 사람들이 고난받는다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도움을 받고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가를 알게 된다면 용기를 잃는 대신 오히려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고난을 헤아리기 전에 다음의 말씀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알게 될 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12절).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형태의 핍박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다른 시대를 보다도 더욱 박해를 심하게 받았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는 것이다. 그들은 비난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또는 기독교는 그들의 박해 받음을 통하여 더욱더 확고히 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 특히 기독교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 곧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의 심정을 지니고 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자기들의 행실 가운데서 믿음을 보여 주고자 하는 자들 즉 경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사도 바울의 생활은 세 가지 면에 있어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하였던 바울의 "교훈"과 또한 교훈과 일치한 그이 "생활"과 또한 바울이 당한 "핍박과 고난"에 있어서 그는 좋은 본이 되었다.
(2) 그의 삶에 대단히 유익한 삶이었을지라도 그의 생은 심한 고난의 생애이었다. 이 세상에서 탁월한 봉사를 하고 심한 고난을 받는 일에 있어서 위대하신 우리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은 바울 외에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바울은 거의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또는 성령께서는 사실과 핍박이 그에게 있을 것을 증거하였다(행 20:23). 본문에서 바울은 그가 다른 곳에서 당한 고난들을 제외하고 오직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고난만을 언급하고 있다.
(3) 디모데와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용기를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주께서 그 모든 것에서 자신을 구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
(4)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고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실천이다. 또한 그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세상에서 받으리라고 각오해야 할 대우인 것이다.
Ⅱ.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이는 자들의 마지막 운명을 경고하였다. 그는 디모데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더욱 더 가까워지게 하기 위하여서 위와 같은 경고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13절0라고 말씀되고 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선하여지고 악한 사람은 사탄의 음흉함과 자기 자신의 부패의 힘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악하여지는 것임을 명심하자. 죄의 길은 내리막 길이다. 왜냐하면 죄의 길은 악한 데서 더욱 악한 곳으로 나아가며 서로 "속이고 또 속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자는 스스로 더욱더 잘못된 길로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에 자기의 행한 바의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Ⅲ. 바울은 다모데에게 그가 받은 좋은 교훈. 특히 그가 성경으로부터 배운 것을 잘 지키라고 명하였다(14,15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다. 선한 것을 배웠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배우기를 계속해야 하며 그 선을 끝까지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제자가 되는 것이다(요 8:31).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하리니 이는 사람의 궤술과 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되려 함이라(엡 4:14)고 하였고 또한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다(히 8:9)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배우는 배움을 계속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리고 젊었던 시절에 잘못 배운 과오를 계속 행해서는 안 된다(왜냐하면 우리는 확실한 지식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것들을 버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것들을 보존하는데 장애물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디모데가 진리를 배운 그대로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성경이 유혹자들의 함정과 유혹을 피하게 해 주는 무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야만 했다는 것"을 명심하자.
1. 우리가 배운 것들의 확실함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된 일이다(눅 1:4). 즉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임을 안다는 것은 축복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배운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즉 진리에 굳건히 서 있기 위하여 온갖 오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은 대단히 중대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본문에 "알며"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너는 좋은 선생들에게 배웠다는 것을 "알라." 네가 "진리를 누구에게 배웠는지를"생각해 보라. 너는 악한 사람이나 속이는 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에게서 배웠는데 그들은 그들이 네게 가르친 진리의 능력을 직접 경험하였고 또한 진리를 위해 고난 받들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진리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명백하게 증거하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2) 네가 세움을 받은 든든한 기초 즉 성경을 알라(15절).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느니라"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의 일을 잘 알고 그 일에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적인 계시를 요약해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3.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복된 일이다. 또한 어린이들은 늦지 않게 성경에 대한 지식을 배워야 한다. 어린시절은 배우는 시기이다. 또한 참된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배워야만 한다.
4.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책은 성경이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거룩한 교훈을 담고 있으며 거룩한 일을 말하고 있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복을 받도록 성결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성경은 바로 위의 사실 때문에 다른 모든 종류의 속된 책이나 또는 거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도덕을 다룬 책이나 일반적인 정의와 정직만을 다룬 책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성경을 알려면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 성경을 읽고 상고하여야 한다(행 7:11). 우리는 성경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또한 가끔 읽거나 또는 전혀 읽지 않거나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볼 수 있다.
(1) 성경의 탁월성.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여진 것"이다(16절).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로써 의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지각을 주신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계시(성경)를 내려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은 언제든지 사랑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고 하였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은 다음에 열거하는 성경에 나타나는 요소들을 통하여 증명되어진다. 즉 문제의 웅장함, 담고 있는 교훈들의 진리성, 순수성, 탁월성, 여러 부분들의 조화, 성경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효력, 모든 인류를 넘어서 서로 연관된 수많은 예언들의 성취, 그 책이 신적 기원임을 증명해 주는 상상도 못할 기적 등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뜻을 따라서 성령을 선물로 나눠주심으로써 그들의 증언을 뒷받침해 주셨다"(히 2:4)고 하였다.
(2)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1] 그것은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한다(15절).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안내자이다.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지혜롭게 해 준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성경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성경을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성경의 진리와 유익함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목적, 즉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목적이 담겨진 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것을 가르쳐 주며 우리의 잘못된 것을 책망하여 주며 선한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준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교훈과 바로 잡음과 책망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특히 사람들을 가르치고 바로잡고 책망을 해야 하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3]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준다"(17절).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케 하여 주는 것은 성경뿐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모든 선한 일을 온전히 행할 수 있게 된다." 성경 안에는 인생의 온갖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의무와 우리에게 요구되는 봉사가 어떤 것이든 성경은 그 모든 대답을 우리에게 하여 준다.
(3) 전반적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보게된다.
[1] 성경은 용도가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에 유익하며" 우리의 모든 판단과 생활에서의 잘못을 시정해 주는 것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다."
[2] 성경은 믿음과 실천의 완전한 규칙이며 하나님의 사람들 즉 하나님께 자기를 드린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사역자를 위해 기록된 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훈과……에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 교훈을 따른다면 우리는 "전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질 것이다.
[4] 철학자들의 기록들이나 랍비들의 우화나 카톨릭교의 전설들이나 또는 구전되어 오는 전승들이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더 성경을 사랑하고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거기에 담겨있는 유익을 발견하고, 결국 그 안에 약속되고 확증된 축복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4-17)
장님 코끼리 만지기
간혹 불신자도 때로 세상사를 멋대로 조종하는 신적존재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존재들이 과연 어떤 특성을 가졌으며 특별히 자기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에 관해선 전혀 알지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만 뭔가 눈에 안 보이는 방해 세력이 있는가보다 여기는 정도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방해만 하지 말아서 내 계획대로 순탄하게 해달라고 돼지 머리 앉혀놓고 열심히 간구한다. 그러나 여럿이 모여 신에게 진정한 존경심으로 경배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불신자가 신자와 가장 다른 점은 기도는 해도 예배는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안다면 가장 먼저 보일 반응은 그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 말고는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대비해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게 되면 한 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특별히 그분이 죄에 찌든 추하고 더러운 나의 개인적 모습까지 세밀하게 아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신 은혜에 잠기면 평생을 두고 엎드려도 모자람을 절감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 보일 첫 번째 반응은 오직 경배와 찬양뿐이다.
문제는 태초부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일개 피조물이자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는지 여부다. 그 답은 성경뿐이다. 다른 길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롬1:18-20) 웅장한 대자연을 보거나, 내 속에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을 통해 그분의 존재성은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자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며 또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으로 성경을, 구체적으로는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 문자에 갇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적 개념상의, 쉽게 말해 죽어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불과하다. 영원토록 실존하고 지금도 신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성경 말씀을 통해 실제 체험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이 믿음의 근거가 되며 말씀에 의해 믿음의 진정성 여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또 성숙시킨다.
비유컨대 물을 마시면 갈증이 없어지는데 과학 교과서를 읽어서 갈증과 해소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사후에 확인하는 것과 같다. 교과서를 읽지 않으면 갈증 나면 물 마실 줄은 알지만 물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갈증이 없어지는지 모르기에 평생을 두고도 물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진정한 감사가 생기지 않아 얼마나 귀한 줄 모른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를 늘 받고 있어도 그 받은 은혜를 도무지 감지도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리게 된다. 간혹 큰 은혜를 받았을 때 순전히 느낌으로 인식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왜 그런 은혜를 베풀었는지 또 그 일을 통해 자신에게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도무지 추측도 못한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경배를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고 믿기 위해선 반드시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아 신령한 신자라도 절대로 하나님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성경이 말하는 즉, 신구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난 범위 내에서의 그분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도 제한된 자신의 편견, 선입관, 경험, 감정, 지식에 따라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는 하나님밖에 모르게 된다.
예컨대 불신자가 병원에서도 포기한 말기 암을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낫게 되면 당장 교회에 출석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에게 하나님은 기도하면 뭣이든 그대로 들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일 뿐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도 신자의 모든 기도를 기도한 그대로 다 응답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또 전도 집회의 찬양과 간증에 감동받아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한 자가 떠올리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상한 감정을 치유해주는 신경안정제 같은 분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출석한 교회의 찬양이나 말씀이 정서적으로 뜨겁게 다가오지 않으면 믿음조차 약해지고 심지어 감정이 믿음을 대신할 것이다. 성경은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항상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믿음이 단순히 개인적 경험, 기도응답, 이적, 감정 등에 근거해선 안 된다. 그것들이 믿음을 체험하고 실증하는 일시적 부분적 요소는 분명 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전부인양 하거나, 혹은 그것에 주로 의존하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절대로 그분을 제대로 알 수 없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가공의 하나님을 믿은 것뿐이다.
신앙은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이다.
사람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는 다 다르다. 예를 든 대로 불치병이 낫거나 찬양집회에서 감동받아 교회에 출석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원을 받았거나 믿음을 가졌다고 말해선 안 된다. 대개는 단지 믿음을 가져볼까 하는 마음의 준비가 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세상에 자기 힘으로 되지 않는 일도 많으며 정작 큰 능력을 가진 불가시적 존재가 있다는 정도만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의 어떤 영적 능력에 의해 자기가 영향 받을 수도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 공부를 하면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말씀을 배우는 중에 믿음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성령이 간섭하여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겸허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실 때에만 생긴다. 불신자 시절에는 예수에 대해, 나아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선 콧방귀만 뀌고 아예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진지하고도 순수한 마음으로 귀담아 듣고선 복음 안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게 된 것이다.
그 믿음은 십자가에 죽으신 성자 하나님 예수를 일체의 선입관과 편견을 갖지 않고 오로지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진짜 정확한 실체를 발견해야만 생긴다. 그 실체가 너무나 더럽고 추해 죽을 수밖에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예수가 온전한 구세주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다. 한 마디로 이전의 자기는 완전히 버리고 예수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서 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에는 비록 초자연적인 간섭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 지정의의 총체적 반응도 필히 요구된다. 말하자면 지성과 이성을 동원해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분별, 이해, 동의하는 배움의 단계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맨 먼저 나오는 것, 즉 예수님이 3년간의 지상사역 중에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열두 명의 제자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합숙 생활을 통해 실천의 본을 보이면서까지 가르침에 몰두했다. 그들로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스승이 되어 예수님께 배운 것을 다른 이에게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배움이란 마땅히 배운 것에 대한 확신을 수반해야 한다. 확신은 또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배운 대로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의 삶에 반영하려는 태세를 완전히 갖추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확신에 거(居)하는 것은 실제 삶 속에서 계속 확신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도덕적 종교적 계명만 지키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을 정말 성경대로의 하나님답게 만들어야 한다. 그분의 간섭과 인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서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갖고 이전과는 전혀 반대되는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청년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가정과 회당에서 구약 성경 특별히 율법과 출애굽에 관한 기사들을 가르쳐 왔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성경에 대한 그런 지식적 앎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능한 일찍 체험하여 평생을 두고 그분께 배우며 확신한 것에 거하라는 뜻이다.
신자는 기독교 구원을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예정하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 그러나 그 구원이 단순히 지옥 형벌을 면케 하여 천국 보내는 것으로 그칠 것 같으면 구태여 어려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없다. 또 열심히 전도할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인간의 입장에선 죽기 직전에 확신을 갖거나 죽을 때까지 그런 확신을 못 가져도 천국 가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자가 똑 같이 죽을 죄인인데다 그 중에서 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에선 생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이 천국 가는 일로 그치지 않고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누리고 또 주위에 나눠주라는 것이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그래야 하는 것은 새 생명 안에서 사는 새 인생을 더 풍성하고도 오랫동안 세상 앞에 증거 하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입장에선 구원 자체보다 구원 이후의 인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평생을 두고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과연 그것이 정당한 핑계가 될지는 둘째 치고,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치 못할 수 있다. 비유컨대 그런 자는 입장권을 사서 디즈니랜드에 들어서긴 했지만 한 번도 놀이기구를 타지 못한 것과 같다. 천국에서 예수님이 놀이 공원에서 무엇이 가장 재미있고 신나더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못하게 된다. 구원은 받되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댄 그 영광스런 장소에서조차 그분과 전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부끄러운 구원이 될 뿐이다.
현실에서 출발된 믿음
성실하게 교회 출석은 하지만 성경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며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 믿음을 혹시 지옥이 있을지 모르니 천국 보험에 드는 심정으로, 아니면 온갖 문제와 고난으로 힘들지만 교회에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기에, 또는 자기 소원을 이루려 열심히 기도하기 위해서만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순전히 자기 편의로만 믿는 자들이다.
성경을 제대로 배운다면 올바른 믿음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성경이 엄숙히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십자가 복음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이다. 그런 설교를 매번 들으면서도 성경을 배우려 들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당연히 그 믿음의 근거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는지 여부다. 만약 그런 확신이 없다면 아무리 성경을 배워도 종교적 지식(knowledge)을 쌓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faith)이 생긴 것이 아니다. 성경을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여러 신학적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조금 색다르게 접근해보자.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성경 전체에 몇 번 정도 나올 것 같은가? 놀랍고도 신기하게도 365번이다. 무슨 뜻인가? 우선 인생은 일 년 내내 염려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종교를 갖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사실은 세상살이에 염려가 끊이지 않아서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인생은 정말로 평생에 걸쳐 고달프다. 믿음이 강하고 약하고 관계없다. 고난은 사람과 경우와 때를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믿음이 고난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단지 모두가 겪는 고난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일 뿐이다.
다른 말로 신앙은 고상하고 경건하고 심각하기보다는 기실 현실의 아주 세밀한 부분, 특별히 고난에 빠져 자신의 무력감을 절감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란 존재의 너무나 미약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하고 교리만 배워선 명목상의 종교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력 넘치는 신앙인이 될 수는 없다.
현실에서 출발된 믿음이라면 그 역할과 기능도 현실에 적용되어져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신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궁극적 운명은 천국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확보된 영생이 현실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졌듯이 땅에서도 이뤄져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신자는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특별히 고난 중에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면서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이 가장 많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뜻이다. 아무리 일 년 내내 염려가 끊이지 않더라도 성경 말씀대로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하면 신앙을 가질 이유가 없고 신자라고 말하기조차 아깝다.
반면에 대부분의 종교 경전은 도덕률이나 종교적 계명이 주를 이룬다. 기도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며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가장 많이 설파한다. 인간이 신에게 바치고 순종하게 만드는 행동강령이다. 인간이 지어낸 종교이기에 자연히 신에게 최선의 것으로 바치겠다는 맹세와 또 신의 명령을 최대한 따르겠다는 서약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인 양 인간을 향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꼴밖에 안 된다. 인간이 지은 종교의 경전에는 그런 권면을, 그것도 공교롭게도 365번 말할 수는 결코 없다는 뜻이다. 성경이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을 가장 많이 한 까닭은 오직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고난과 염려 가운데 있는 인간을 도리어 걱정하고 위로하며 힘을 주기 위해서다.
믿음이 현실. 특별히 절망의 나락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분명히 임재 하셔서 위로해 주신 은혜를 실감했다는 체험적 고백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막 중에 함께 거하며 앞서 행군하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직접 전쟁을 치르는 분이시다. 또 그 분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신조(creed)가 없는 성경
성경의 첫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창1;1) 이는 설명, 고백, 계명, 윤리, 신조가 아니다. 아주 간단한 한 마디 선언(proclamation)이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분석하여 그 존재성을 믿을 이유나 근거에 대한 언급은 사전에 전혀 없다. 나아가 기독교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또 그분이 천지를 창조했음을 믿는다든지, 제 1신조로 삼는다는 식의 표현은 본 구절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 눈 닦고 찾으려 해도 없다.
어찌 보면 성경 독자에게 아주 무례할 정도로 바로 갖다 들이미는 말이다. 이 진술의 진리성 여부는 아예 따질 필요도 없으니까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투다. 그 선택은 오직 독자에게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맹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든 안 믿든 그 진리 됨에는 하등의 영향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경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진리(truth)와 사실(fact)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이야기(narrative) 형식이다. 이야기 형식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서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적 진술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결코 규정(code), 규칙(rule), 계명(law), 법규(regulation), 방안(manual), 교리(doctrine), 신조(creed)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야기란 듣는 자의 동의와 수용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독자에게 오직 믿음만을 요구하며 또 믿음을 가진 독자라야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런 종교적 진술이 기독교에는 있지만 성경에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불신자를 가르쳐 믿음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고안 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인간의 저작이라고 주장하며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원의 길임을 완악하게 거부하는 이단들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 이야기 형식 안에 일관되게 흐르는 뜻과 규범을 유추해 낸 것이다. 교리와 신조는 이미 완성된 성경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변증 내지 입증한 것일뿐이다.
물론 교리와 신조가 결과적으로는 신자들의 믿음을 더 깊은 확신으로 이끄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신조에 의거하지 않고도 가질 수 있다. 성경에 우리는 이런 저런 것을 믿는다든지, 심지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신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식의 표현이 없다. 인간 역사(history)에 직접 개입하고 계시면서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His-story)들로만 채워져 있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여호와가 가라사대” 혹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표현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는 식으로 인간으로 주어를 삼는 다른 종교의 진술과는 전혀 다르다. 특별히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본 자가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도무지 인간이라면 감히 두려워서도 하지 못할 말씀을 많이 하셨다. 또 바로 그런 이유 즉, 신성모독(blasphemy)으로 사형을 당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반드시 미친 자가 아니면 하나님 둘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온당한 반응도 그 모든 진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미친 헛소리로 치부해야 한다. 이 둘 중 하나가 아닌 중간 지대에 선 어정쩡한 태도는 기독교에서 만은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
성경은 그야말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믿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며 또 기독교의 구원도 같은 맥락에서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지 이해와 상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성이나 지성과 모순된다면 구태여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성과 상충되지 않으면서 이해를 초월하는 것은 오히려 더 지성을 동원해 배워야 한다. 말하자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후에 열심히 배우면 확신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배워야만 믿어지지만 기독교는 그 반대로 믿어야만 배울 수 있다.
기독교가 그 경전인 성경에 구체적으로 규범화되어 있지 않지만 신조를 작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경미한 사안이라도 성경 66권 전체가 동일한 진술을 하고 있지 서로 모순 내지 상충되는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참 의미
성경은 약 1500년에 걸쳐 40여명의 저자가 지은 66권의 책이다. 저자들의 직업은 왕, 선지자, 세리, 농부, 의사 등 다양하며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도 다 다르다. 그들이 모여서 주제를 정하여 어떻게 저작할 것인지 구체적인 편집회의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주제에 관해 진술했다. 그리고 염려와 불안에 휩싸인 인간들을 향해 아주 건방지게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는 말을 가장 많이, 그것도 아주 공교롭게도 365번 기술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한 가지 주제는 죄에 빠진 인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15절)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죄를 감당하여 죽으심으로 용서해주셨고 또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선물로 주셨음을 믿어 구원을 얻는 십자가 복음이다. 요컨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이 꼭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적어 놓았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결과를 밝힌 것이다.
재차 강조하건대 구원이 단순히 모든 죄를 용서 받아 천국 가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어려서부터 구원을 줄 필요가 없다. 예정된 대로 죽은 후에 구원을 줘도 그만이다. 기독교 구원이 생전에 성령의 깨우침으로 확신을 갖게 하는 이유는 구원은 칭의와 동시에 성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성화가 따르지 않고 단순히 칭의만 붙들고 있는 믿음은 그 구원의 유효성마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어떻게 말하는가? 디모데더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17절) 되라고 하지 않았는가? 우선 신자 본인부터 일 년 365일 염려가 끊이지 않더라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세상 끝 날과 땅 끝까지 동행하시는 예수님만 굳게 의지하여 이겨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동행하므로 염려에 붙잡힐 필요가 전혀 없기에 대신에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며 그분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자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함에 온전케 되어야 한다. 현재 처한 어떤 위치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썩는 밀알이 되어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해야 한다.
최소한 성경이 가장 관심을 많이 권하고 있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당신께서 함께 하시기에 염려하지 말라는 당부를 그 말씀하신 회수대로 매일 아침마다 상기해야 한다. 정말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해야 한다. 예수 믿는 신자에겐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든, 아무리 허물과 죄악이 많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천국이 이 땅에 실제로 도래했으며 누구라도 믿음으로 침노하는 자가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다.
나아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는 자는 그분께서 기필코 궁극적인 영광으로 이끄신다. 천국의 영광은 이미 확보되어 있으며 최종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결국 신자에게 남은 책임이라고는 이 땅에서 정말 참 인간답게 살아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길 뿐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단순히 죽어서 지옥 가지 않는 것을 훨씬 뛰어넘어, 동물과 다르게 심히 아름답게 창조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만 할 모습대로 실제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워 확신하고 또 확신대로 거하는 길 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16절)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무리 경미한 주제라도 신구약을 관통해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기에 절대로 구절별로 따로 떼어내어 문자적 해석만 해선 안 된다. 반드시 전체 맥락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반드시 성경 전체를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야만 했는지? 왜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지? 그런 나와 예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제대로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믿은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평생을 배워도 배울 것이 더 남아 있다. 그럼 확신하여 거하려면 더더욱 시간을 아끼며 배워야 할 것 아닌가?
모든 인생은 365일 염려가 끊이지 않을 만큼 상처와 한숨과 눈물과 고통으로 점철된다. 거기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중 대부분이 이해 못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그 모든 영적인 갈증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원리에 관해 직접 말씀하셨다.
요컨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지 않고는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성경을 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는 그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문제의 모든 원인을 물질의 많고 적음에 돌릴 수밖에 없다. 이방인처럼 온갖 우상을 붙들고 그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 구하게 된다. 아니면 아예 자기 힘만 의지해 평생을 살다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과 함께 어이없는 죽음을 불시에 맞든지 말이다.
본문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어려서부터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까닭은 오로지 성경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 됨의 확신에 거하게 해서 365일 겹치는 염려를 이기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위로하게 위해서다.
오늘날 기독교가 왜 사회적 영향력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성경을 성경대로 제대로 배우지 않아 확신이 없고, 확신이 없으니까 든든하게 거할 수 있는 믿음의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신자마저 365일 염려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마저 자신들의 경전인 성경을 외면하는 바람에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는 쫓지 않고 인간적 사상과 유행과 사조만 따르기 바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진짜로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인지 확신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어도 사실은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고도 날마다 배운 것에 거하지 않는다면 디즈니랜드에 입장만 했지 놀이기구는 하나도 타지 않은 셈이다. 주님이 동행은 해주실지 몰라도 그분의 은혜와 권능은 절대 누릴 수 없다는 뜻이다.박신 목사
오직 성경
(딤후3:14-17)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95개조로 된 반박문을 내건 사건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에 이 날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금년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 5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기독교가 오늘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로 더욱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부패한 천주교의 문제를 조목조목 따지고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을 백가쟁명식으로 다양하게 제안했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은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신념, 주장, 그리고 가르침을 다섯 가지 ‘오직’으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둘째,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셋째, 오직 은혜(Sola Gratia)
넷째, 오직 믿음(Sola Fide)
다섯째,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입니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루터가 강조했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 세 가지를 널리 가르쳐졌습니다. 그러다 칼뱅이 강조했던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종교개혁의 모토 즉 ‘다섯 가지 오직’(Five Sola)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첫 번째 모토인 오직 성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
우선 ‘오직 성경’이란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천주교의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면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웠던 첫 번째 모토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천주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최고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해 왔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지만 성경 외에도 교회의 전통과 교회의 공적 회의의 결정도 같은 수준의 권위를 갖는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최고의 권위는 성경을 비롯해서 교회의 전통과 교회 회의인 공의회의 결정에도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입장을 신학에서는 “성경 우선”(prima scriptura)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우선 되지만 성경 외에도 전통과 공의회 결정과 같은 것이 함께 권위를 존중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최고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천주교와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습니다. “최고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만 있다” 그러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는 오직 성경의 권위 하에 있다 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되 성경의 권위 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가르침에 합한 교회의 전통은 존중하되,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교회의 전통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오직 성경”(sola scriptura)라고 합니다.
루터의 등장으로 종교개혁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자 천주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을 진압하고 잃어버린 세력을 되찾기 위해 거센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반종교개혁 운동’(Counter-Reformation)이라고 합니다. 이 운동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1546년 트렌트에서 공의회로 모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저들은 이렇게 결정해서 선포했습니다. “성경 뿐 아니라 전통도 동등한 경건한 사랑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경외하여야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에도 천주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둘 다 동등하게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길을 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까지 천주교와 우리 기독교의 입장은 ‘성경 우선’(prima scriptura)이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냐의 차이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천주교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며 물었답니다. “왜 천주교는 성직자들이 독신을 고수합니까? 딤전 3장을 보면 분명하게 감독의 자격 중에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말과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약의 제사장, 선지자 대부분이 결혼하여 가정이 있고, 사도들도 바울 외에는 대부분 결혼하여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천주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신부님이 이렇게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딤전 3장 말씀은 초대교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바울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성직자의 자격은 성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교회가 판단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이후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하여 사제는 독신이어야 한다고 교회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이고 신자들은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까 천주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결정을 하였고 이것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루터는 신부로서 독신으로 살다가 이 점을 깨닫고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그 뒤를 따라 성경의 가르침대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행위의 최종 권위(final authority)는 오직 성경에만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우리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기독교인들도 오직 성경이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왜 오직 성경이라는 이 가르침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루터가 오직 성경을 주창하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가 신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훈련을 받을 때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힘썼던 문제가 바로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늘 내가 죄사함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 같은 추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우선 당시 천주교가 가르쳐온 대로 고해성사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고행을 하며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죄사함의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순교자의 피와 사도들의 유물의 신령한 힘의 도움을 사모하여 로마로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 또한 허사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동안 죄사함을 위해 교회가 전통에 근거해서 가르쳐온 것을 다 따랐지만 허사였습니다.
후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신학교 교수로서 로마서를 가르치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롬 1:17절 말씀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의”란 말씀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죄사함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루터는 성경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천주교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그 가르침들이 성경 말씀과는 달랐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이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가로막는 걸림돌 노릇을 한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비텐베르크에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참된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것도 모자라 이제 구원도 돈으로 팔려고 하는 일이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뿌리가 천주교가 그동안 가르쳐 왔던 “성경 우선”이라는 주장에 있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성경이 권위가 있지만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고 또 교회가 성경에 없는 것도 결정하여 지키게 할 수 있다는 이런 주장 때문에 이 모든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성경”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지 교회가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없는 것을 교회가 결정해서 교리로 만들거나 행동지침으로 만들어 선포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지 않으면 부패하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따르게 됩니다. 심지어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게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말로는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떠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교회의 분열입니다. 엡 4:3 이하를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를 이루고 교회가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교파가 나뉘고, 교회들이 갈라지고, 교회 안에 끊임없이 분열과 다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천주교는 하나를 이루어 오고 있는데 기독교는 분열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의 성공주의에 물들어서 대형화를 추구하고, 세속주의 물결에 휩쓸려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의 문제, 교회 내의 성적인 타락과 윤리의 문제 같은 것들이 세상의 빛이어야 할 교회를 지탄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더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단의 문제 또한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것들입니다.
어떻게?
그러면 오늘 한국교회가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4-15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배워서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직 성경’의 삶을 살려면 우선 성경을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른 채 성경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려면 그것에 관련된 학식이나 실력을 갖추고 행정 능력이 있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면장은 동장, 군수, 구청장과 같은 면을 이끄는 기관장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공자가 아들 백어에게 한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공자가 아들에게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장면(牆面)’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장면이란 담벼락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이 답답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주남과 소남은 시경에 나오는 일상생활에 대한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시경을 모르면 마치 담벼락에 이마를 맞대고 서있는 사람처럼 답답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반대로 ‘면장(免牆)’이란 얼굴 앞에 담을 면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경을 알면 무식해서 답답한 상태를 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루터 당시 천주교인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대해 장면 상태에 있었습니다. 성경이 라틴어로 되어있고 자기 집에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위해 먼저 한 일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마침 이 때 구텐베르크에 의해 인쇄술이 발명되었습니다. 그 결과 독일 사람들이 독일어로 된 성경을 가지게 되었고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독일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면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 대해 장면 상태에 있으면 안 됩니다. 부지런히 읽고 배워서 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직 성경의 길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6-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 안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소개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안내하는 길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하게 설 뿐 아니라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많은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참 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때 성경에 묻고 또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오직 성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본의 MK택시는 독특한 경영으로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싸면서도 친절한 택시로 유명합니다. 특히 교토에서는 이 회사를 교토의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 회사의 설립자 유봉식 사장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분은 어떻게 택시 회사를 경영할까 고민하다가 성경에서 그 답을 찾기로 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답으로 찾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택시 기사를 가족처럼 섬겼습니다. 그리고 기사들 사이의 화목을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기사들이 손님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갖가지 문제들, 처리하고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 그 문제들을 가지고 성경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시 119:105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물을 때 성경은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성경에서 묻고 답을 찾게 될 때 우리는 오직 성경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특별히 종교개혁의 5대 모토 중 첫 번째 “오직 성경”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을 부지런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탐구하여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성경 앞으로 가지고 가서 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서 답을 찾고 그 답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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