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헨리 주석
복음 사역자의 제반 의무(디모데 후서 4:1-8)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Ⅰ. 바울은 디모데에게 엄하게 명령하였다(1절). 본문에서 그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자기의 의무를 두려운 마음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다. 만약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고전 9:16).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맡은 일에 충실하게 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들을 상기시키었다.
1.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하나님 앞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네게 명하노니"(1절)라고 하였다. 이 말은 "네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은총을 입은 사람답게 행하며 또한 자연 계시와 특수 계시에 대해 의무를 다하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정 받을 것이며 또한 너는 너를 만드신 하나님과 너를 구원하여 주신 주 예수께 그의 합당한 섬김을 바쳐야 할 것이라"라는 뜻이다.
2. 바울은 주 예수님에게 위임된 다가오는 심판을 디모데에게 상기시키면서 디모데가 그 심판날에 자기의 행한 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재림하시어 그의 왕국을 차지하신 후 주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목회자나 백성들이나 모두가 다 그들에게 위임된 모든 직분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곧 보고해야 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즉 마지막 날에 살아있는 자들과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다음을 기억하자.
(1)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심판권을 위임하셨고 또 그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관으로 임명하셨다(행 10:42).
(2) 주께서는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 주께서는 재림하실 것이며 "epifanei,a"라는 말씀이 의미해 주듯이 그의 오심은 영광스러운 재림이 될 것이다.
(3) 그때 주의 나라가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다. 본문에 보면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라고 하였다(1절). 왜냐하면 그때에 주께서는 그의 나라에 나타나사 보좌에 앉으시고 세계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Ⅱ. 바울의 경고의 내용(2-5절).
1.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말씀을 나누어 주는 것은 그들에게 위임된 일이다. 목회자들이 전도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이나 상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순전하고 명백한 말씀을 전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그 말씀을 더럽히지 말고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선 자답게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앞에서와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해야 한다(고후 2:7 을 참조).
2. 디모데가 전해야 할 내용.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설교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네 전심을 다 기울여 이 일을 행하라. 네가 책임 맡은 사람들에게 죄를 주의하도록 경계하고 그들의 의무를 다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회개하고 믿고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일깨워야 한다. 때가 있든지 없든지 그같이 하라. 때를 얻으면 즉 그들이 너에게 들을 시간이 있을 때 또는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 그때에 너는 유익한 말을 전해 주어라. 그리고 비록 때를 못 얻는다 하더라도 즉 그들이 네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일 것 같지 않아도 전하라. 왜냐하면 마음을 닫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실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람이 제 마음대로 불 듯이 성령도 어떻게 활동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에는 씨를 뿌리되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전 11:6)고 하였다. 때를 얻을 때 전해야 한다는 것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이며 때를 못 얻을 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은 때가 적절하지 않다는 구실 아래 의무를 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3. 디모데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점을 말해 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을 경책하고 경계하라." 악한 사람들의 악을 깨닫게 하고 또 그들이 가는 악한 길의 위험함을 납득시켜 주어라.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해 주므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노력하라. 엄숙함과 권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경책하라. 그리하여 너희의 그들에 대한 책망을 마치 하나님의 책망으로써 그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게 하라고 하였다.
4. 디모데는 신앙 생활을 잘 시작한 사람들을 지시하고 용기를 복돋아 주며 활기를 불어 넣어 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권하되(그들이 잡은 것을 마지막까지 붙잡도록 권하라는 말이다)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라"고 하였다.
(1) 디모데는 권하는 일을 인내함으로 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오래 참음으로 하라"고 했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이다. "비록 네가 수고한 일에 대하여 곧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그 일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피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오래 참음을 보여 주셨으므로 목회자들은 오래 참음으로 권고하여야 할 것이다.
(2) 디모데는 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즉 감정적으로"처리 하지 말고 "가르침으로"처리해야 한다. 본문에 "가르침으로"라는 말은 그들로 하여금 선한 행실로 돌아서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좋은 원리를 서서히 주입시키도록 하라. 그들에게 진리를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고 그 진리를 믿는 믿음을 확고히 가지게 하라. 그럴 때 "그들은 악을 떠나서 선의 길로 돌아올 것이다"는 뜻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1] 목회자의 임무는 다양하다. 그는 "말씀을 전하고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해야 한다."
[2] 사역자는 근면하고 주의 깊어야 한다. 사역자는 "때를 만나든지 못만나든지 항상 힘써야 한다." 그는 고통과 수고를 피해서는 안 된다. 그는 교우들로 하여금 그들의 영혼과 영원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촉구해야 한다.
5. 디모데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줄 기회를 찾으라. 너의 태만으로 좋은 기회를 잃지 말라. 너의 직무를 주의하라. 사탄의 유혹을 경계하라. 이 유혹에 의해 네 임무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다. 네게 맡겨진 영혼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6. 그는 고난을 각오해야 하며 그 고난을 참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본문에 kako pa,qhson 즉 꾸준히(patiently) 참으라는 뜻이다. 즉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네가 만나는 어려움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말고 심령의 평안함을 가지고 그것들을 감당하라. 네 자신이 고난에 익숙해지도록 하라."
7. 그는 자기의 직분을 기억하고 그 의무를 수행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전도인을 일을 하며-"라고 하였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은 사도들의 파송자로서 사도들이 세운 교회에 물을 주는 일이었다. 그들은 정착된 목회자들은 아니었고 다만 사도들이 세워놓은 교회에서 안정된 목회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면서 그곳을 관할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일이 디모데가 받은 직분이었다.
8. 그는 자기의 사역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되기를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였다. 디모데에게 지워진 일은 대단히 중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거기에 응하여 근면과 주의함으로 자기가 맡은 직분의 모든 부분을 온전히 수행해야 하겠다. 다음을 명심하라.
(1) 목회자는 자기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동안 고난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2) 목회자는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인 용사답게 꾸준히 참아야 한다.
(3) 목회자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고난 때문에 실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자기의 직분을 수행하고 그의 사역을 성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4) 우리 목회를 수행하는 가장 최선의 길은 그것을 다 마치는 일이다. 즉 복음 사역의 모든 일들을 구체적으로 돌보아 이루는 것이다.
Ⅲ. 바울이 그러한 명령을 강력히 권한 이유.
1. 오류와 이단설이 교회 안에 스며들어 오게 되고 그로 인하여 많은 믿는 그리스도인이 타락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다.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들이 교훈을 듣고 있으니 이 때를 이용하라. 지금은 씨를 뿌릴 때이니 나쁘게 일하라. 추수 때가 되어 들이 황금빛으로 물결치니 낫을 들도록 하라. 어물어물하면 추수기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탈한 이야기를 좇으리라(3,4절). 그러므로 네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건지도록 하라. 그리하여 폭풍과 광풍이 일어날 때에 그들로 확고히 안정되어서 그들로 이단의 교리들을 막아 낼 수 있도록 하게 하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들어야 하며 목회자들은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없는 때가 오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재앙에 대해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 그들이 귀를 "진리를 돌이켜"(4절)라고 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쉽고 낯익은 복음에 대하여 싫증을 내고 허탈한 우화를 찾아서 그 이야기를 즐기게 되며 하나님은 그들을 잘못된 믿음에 내어버려 두시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가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살후 2:11, 12). 다음을 명심하자.
(1) 그러한 거짓 학생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스스로 가진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고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그 거짓 선생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2) 사람들이 먼저 바른 교훈 즉 엄중하고 분명하게 인생의 목적에 부합한 교훈을 듣기 싫어하게 되겠고 그다음 그들은 자기의 사욕에 맞는 선생들을 둘 것이다.
(3)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른 교훈이며 진리의 말씀이라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은 단순한 우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4) 우화를 즐겨 듣는 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은 그들이 먼저 진리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우화를 동시에 듣고 또 기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들은 "허탈한 이야기를 좇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에 싫증을 내고 허탈한 이야기로 돌아서는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이다.
2. 바울에게 최후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네 직무를 다하라.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웠노라"(6절)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이다.
(1) "그러므로 너의 짐이 보다 무거워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일군이 포도원을 떠날 때 뒤에 남아 있는 자들이 한가로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전보다 배나 근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일손이 부족할수록 일을 맡은 사람들은 더욱 더 부지런히 해야 한다.
(2)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다 마쳤다. 너는 나의 본을 받아 네게 주어진 일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3) 떠날 때가 가까워 옴에도 오히려 기쁨을 지니는 자신의 태도를 보이므로 바울은 디모데로 더욱 더 부지런하고 근면하여 자기의 직분을 진지하게 수행하도록 용기를 주려고 하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참 병사였고 디모데는 새로 입대한 신병(神兵)이었다. 바울은 "오라! 나는 나의 주님의 친절하심과 내가 맡은 일의 선함을 알았다. 나는 대단히 큰 기쁨과 만족함으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본다. 그러니 너도 네가 만나게 될 어려움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생명의 면류관은 네 머리에 이미 씌워진 것처럼 확실하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을 견디고 네가 맡은 사역은 온전히 수행하라"고 하였다.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임종에 처하여 보이는 담담한 태도 특히 임종을 맞는 순교자들의 의연한 용기와 평안은 기독교 신앙의 진실됨의 위대한 증거가 되며 살아있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자기의 직분을 이행하는데 큰 용기를 준다. 바울은 앞을 바라보고 자기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도다"(6절)라고 한 것이다. 전에 성령께서는 그에게 각 성에서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하셨었다(행 20:23). 마찬가지로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으면서 아마도 자기가 피를 흘려 진리를 증거해야만 한다는 특별한 통지를 성령으로부터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것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다. 그러기에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6절)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원어로 h'dh spe,ndomai - 즉 그 뜻은 이 순교자가 되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관계의 부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순교자의 피는 비록 그것이 속죄의 희생 제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에 영광을 돌리기 위한 희생 제물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바울이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기쁨으로 말한 사실을 생각해 보자. 바울이 자기 죽음을 "떠날 때"라고 불렀다. 바울이 자기가 참혹하게 피를 흘리는 죽음을 당하여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죽음을 떠날 때 혹은 "석방의 때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이 세상의 감옥에서 갇힌 바 되었다가 해방을 얻은 것이며 새로운 즐거움의 세계로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그의 생애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옮겨가는 것 뿐이다.
[2] 바울은 자기의 살아온 생애를 큰 기쁨을 가지고 돌이켜 보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7절)라고 하였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의 삶의 목적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삶을 살았음을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도인으로서, 목회자로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 바울은 싸움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섬김을 수행했고 또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승천하신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수행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바울의 생애는 하나의 경주였으며 이제 그 경주가 끝나게 된 것이었다. 이제 바울의 싸움이 끝났으므로 또한 그의 달려갈 길도 끝날 것이었다. 또한 그는 "나의 믿음을 지켰다. 나는 복음의 교훈을 지켰으며 복음의 한 마디라도 배반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다음을 기억하자. 첫째, 그리스도인, 특히 목회자의 생애는 하나의 전쟁이요 경주라는 사실이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떤 경우에는 전쟁과 비교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경주에 비교하였다. 둘째, 그 싸움은 선한 싸움이요 선한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계속하여 신실하고 용감하다면 그 종말은 선한 것이요 승리는 확실한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길을 마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때까지 싸움을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롬 8:37). 넷째, 임종을 앞에 둔 성도가 그의 지난 생애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믿음 즉 믿음의 교훈과 믿음의 은혜를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면 크나큰 위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생애의 끝날을 맞이하여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우리의 길을 마치기 위해 우리도 계속 노력하자(행 20:24).
[3] 그가 큰 기쁨을 가지고 앞으로 남은 자기의 삶을 바라보았던 것을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 그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8절)라고 하였다. 바울은 주를 위해 잃은 자가 되었으나 자신은 주를 위하여 잃은 것이 없다고 확신하였다(빌 3:8). 우리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얻을 영광과 기쁨이 지금 싸우고 있는 모든 수고와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하여 줄 것이라는 사실은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병사로서 고난을 이기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음으로 바울이 우리가 후에 받을 보상을 "의의 면류관"이라고 부른 사실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그 면류관은 우리의 수고에 대한 "잊어버리시는 불의하신 분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거룩함과 의가 그곳에서 완전하여질 것이며 그 완전한 거룩함과 의가 우리의 면류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잊은 것이 하나도 없이 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그는 결코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의의 면류관은 사도들이나 목회자나 순교자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것이 성도들의 특성임을 명심하자.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던 그의 초림을 사랑했었다(히 9:26). 그들은 그의 재림을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또 심판에 주님이 재림하시기를 사모한다.
그들은 사모하며 또한 간절히 기다린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의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 기쁨을 주실 것이다. 또한 그들을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이 있을 것이며 그때 그것은 곧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히 9:28).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주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은 진리에 입각하여 되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믿는자들의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으로써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매입된 것이요 성도들의 의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셋째, 믿는 자들이 쓰게 될 이 면류관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금 면류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그들은 상속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현재 그것을 소유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면류관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예비하여 갈망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개인적인 부탁(1)(디모데 후서 4:9-15)
본서의 종결 부문인 본문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언급한 특별한 여러 가지 부탁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능한 빨리 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르기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하였다(9절). 왜냐하면 디모데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복음 전도자가 아니었고 사도들이 만들어 놓은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기 위하여 사도의 지시에 따라 여러 곳을 순회할 복음 전도자였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의 협조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디모데를 오라고 한 이유는 여러 사람이 바울을 두고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10절). 한 사람이 나쁜 의도에서 바울을 떠났는데 그는 "데마"였다.
그래서 그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라고 말하였다. 데마는 바울과 바울의 사업을 포기하였는데 그것은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든지(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죄수로 있었기 때문에 데마는 바울로 인하여 자기에게 고난이 닥칠까 두려워하였다) 혹은 세상에 속한 일에 빠져서 목회를 포기하였든지 둘 중에 하나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데마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처음의 사랑은 포기하고 잊어버리고 그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길과 진리로부터 떠나는 이유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기억하라. 데마는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아마도 장사를 하러 갔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세상 직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갔을 것이다. 또한 그레스게와 디도도 각각 떠났다. 하지만 누가는 바울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바울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바울은 여러 동료들과의 교제를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바울은 정중하게 마가에 관하여 말하기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말한 마가는 사도행전 15장 39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그를 놓고 다투었던 사람인 것 같다. 바울은 마가를 자기의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했었다. 왜냐하면 마가는 한때 복음을 떠나 방황하다가 되돌아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마가에 대하여 말하기를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로 보아서 이제 바울은 마가와 화해하게 된 것같이 보이며 마가에 대하여 전보다 더호의를 가지게 된 같다. 이것은 우리에게 용서하는 심령을 지닐 것을 교훈해 준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한 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 때문에 그 사람의 유능하고 재주 있음을 영원히 부인하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에게 올 것을 명하면서 드로아에 가서 겉옷을 가지고 올 것을 명하였는데 그 옷은 그가 떠나올 때 그곳에 놓고 떠나왔던 것이었다. 아마도 바울이 겉옷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감옥이 더 추워질 것을 생각해서 인 것 같다. 바울은 항상 검소하게 옷을 입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주석자는 그것을 "내가 드로아에 남겨 두었던 양피지 두루말이"라고 해석하고, 어떤 주석자는 내가 남겨 두었던 책상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으나 그럼에도 읽을 책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읽는 데에 힘 쓸 것을 권고하였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비록 이제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지라도 책을 읽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하여 배워야만 한다. 또한 본문에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고 하였다. 어떤 주석자는 가죽종이에 쓴 것이 바울의 서신들의 원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주석자는 바울이 자기 스스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데 사용하던 천막을 만드는 가죽이라고 해석한다.
4. 바울은 또한 알렉산더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가 많은 해를 주었다고 하였다. 여기의 알렉산더는 사도행전 19장 33절에 언급하였던 인물과 동일한 사람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처음에 솔선하여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였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후에 신앙을 버리고 바울에게 많은 해를 입히었다. 바울은 노골적으로 공격해 오는 대적들에게서도 해를 당하였지만 또한 자기의 잘못된 형제들에게서도 위협을 당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알렉산더에게 갚으시리라고 예언하였다. 그것은 알렉산더에게 미칠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적 선언이다. 그래서 그는 본문에서 "주께서는 저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알렉산더를 경계할 것을 명하였다. "그에 대하여 주의하라 그는 친구가 아닌데 친구로 가장하여 해를 주려고 배반할 것이다." 바울과 같은 사람이 대적하는 사람과 함께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한때 바울의 청쥐자들이었고 그를 존경하였던 몇몇 사람들은 바울이 불쾌히 여길 일들을 행하였다. 즉 어떤 이는 바울을 저버리고 또 다른 사람은 더욱 악한 일을 그에게 행하여 그를 대단히 대적하였었다.
(2) 그러나 반면에 바울은 몇몇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대단히 즐거움을 가지고 이야기하였다. 몇몇 사람들이 악하다고 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선한 것까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은 디모데와 디도와 마가와 누가 같은 인물들이었다.
(3) 바울에게 해를 끼쳤던 두 사람의 이름이 본서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영원한 치욕이었다. 즉 한 사람은 "데마"인데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알렉산더"인데 바울의 말에 크게 대적을 하였었다.
(4) 하나님께서는 행학자들 특히 배반자들에게 자기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5) 알렉산더와 같은 정신과 기질을 지닌 자들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한 일을 해주지 않고 오히려 모든 해로운 일들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디모데에 대한 개인적인 부탁(2)(디모데 후서 4:16-22)
Ⅰ.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현재 자기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1. 바울은 황제에게 호소하였던 자기의 소송에 의거하여 최근에 황제 앞에 부름을 받고 나아갔었다. 그러나 "바울과 함께 한 가지 아무도 없었다"(16절). 즉 바울의 사건을 변호하고 그를 위하여 증언을 해 주려고 하거나 또는 바울과 아는 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든 사람이 다 바울을 버렸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온 세계에 전파되었다고 했는데(롬 1:8)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로마에서까지 그렇게도 선한 바울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역시 인간에 불과할 따름이다.
바울이 로마에 올 때 그곳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마중 나와 그를 영접하였었다(행 28장).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 곤란한 상황이 닥치고 그들이 바울과 더불어 고난을 받아야 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바울을 버렸던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큰 잘못임에도 그들의 허물을 그들에게 돌리지 마실 것과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들에게 내리시지 마실 것을 기도하였고 그들을 사해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뻔뻔스러운 죄들과 연약하여 짓는 죄들과 사이에 얼마만큼 큰 차이가 있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바울에 대하여 악의를 가지고 대적하였으므로 바울은 그를 대하여 기도하기를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약함 때문에 바울이 고난 당할 때 움츠러 들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서 바울은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하고 기도하였다. 다음을 명심하라.
(1) 바울은 자기의 적대자들이 그를 대적하는 위험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의 순간에 친구들에게서도 저버림을 받는 시련을 당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사람이 그를 저버렸다.
(2) 선한 사도를 위하여 그들이 증언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처음 증언할 때 그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던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약함으로 인하여 저지른 죄이다. 그러므로 보다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허물을 돌리실지라도 그래도 바울은 그의 진실된 기도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도하기를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2.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곁에 서서" 바울로 하여금 자신을 위하여 잘 증언할 수 있도록 특별한 지혜와 용기를 주셨다. 아무도 바울을 도우려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였던 것이다. 본문에 보면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라고 말씀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하여 나를 그러한 곤경으로부터 구하여 주셨다. "그 복음 전하는 것이 나의 직무이다"라는 뜻이다. 그러한 어려운 때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은 설교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옥중에서도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를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본문에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17절)라고 하였다. 사실 황제와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그들 앞에 끌려오지 않았었다던 결코 바울의 설교를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본문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17절)고 하였다.
이 사자란 네로(어떤 주석가들이 생각한 것처럼)이거나 혹은 다른 재판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은유의 형식을 지닌 말씀으로 보아 이 말씀을 다만 그가 절박한 위험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르기를 "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18절)라고 하였다. 우리는 본문이 바울이 자기가 경험한 사실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평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즉 그의 말은 다음의 뜻이다. "구원의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지금도 그가 우리를 건지시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노라. 그가 모든 악한 일에서부터 즉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하는 행악에서부터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또한 나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 그리고 이를 인하여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만약 주께서 우리의 곁에 서 계시다면 주는 어려움과 위험한 때에도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이며 모든 사람이 떠난다 해도 주께서 함께 계시면 천만인이 함께 있는 것보다 더욱 든든하다는 사실이다.
(2) 주께서 크고 긴박한 위험에서 자기의 종들을 구하시는 것은 그들로 긴요한 일과 봉사를 하게 하시기 위하여서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보존된 것은 그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3) 이전에 받은 주님의 도움은 미래의 소망에 대한 용기가 될 것이다.
(4) 주껫거 자기의 신실한 증거자들과 고난을 받는 종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천국이 있다는 것이다.
(5)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원에 대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였다.
Ⅱ.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을 보내고 있다. 또한 바울은 병든 드로비모를 밀레도에 남겨 두었음을 말하고 있다(20절).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사도들이 그들의 가르침의 확증을 위해서는 모든 질병을 기적적으로 고쳤으나 그들 자신의 친구에게는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적적인 치유를 사도들 간에 공모에 의한 것으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Ⅲ.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이 되기 전에 자기에게 오라"고 재촉하였다(21절). 왜냐하면 너무나 디모데를 만나기를 원했고 또한 겨울에도 여행이나 항해하기가 더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Ⅳ. 바울은 "으볼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디모데에게 보내는 문안을 전하였다. 이때 활동하던 한 이방인 작가가 부데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글리우디아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 작가는 글리우디아는 영국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을 근거로 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본문에 나오는 부데와 동일 인물이요 본문의 글라우디아는 그의 아내였다고 하고 그들은 로마에서 뛰어난 그리스도인이였다고 간주한다.
Ⅴ. 바울은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는 기도로 이 서신을 끝맺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 것보다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 모든 영적인 축복들이 총 집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친구들에 대한 최선의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속에 함께 하시며 그들을 정결케 하시고 구원하시고 마지막에 주님께서 그들을 받으시도록 기원하는 기도인 것이다. 마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주여 나의 영혼을 받으소서"(행 7:59)라고 기도했듯이 말이다. 그의 기도는 "주 예수여! 내가 살아있을 때 내 영혼과 함께 하셨듯이 내가 죽을 때도 내 영혼을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뜻이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22절)이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의 서신마다 쓴 관용어이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 그같이 기록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글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3:18)라고 하였다. 만약 주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변화를 얻게 하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며 끝날을 위하여 예비할 수 있게 하신다면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 12)라고 말씀하였고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의 마지막 부탁(딤후 4:9-13)
“오직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라”
앞으로 닥칠 환난의 시대,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는 원동력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
로마의 감옥에 재차 투옥된 바울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면서 마지막 서신을 기록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그의 마지막 부탁이 담긴 편지를 보냅니다. 바울의 마지막 부탁, 디모데에게 한 마지막 부탁은 무엇이었을까요?
1. 디모데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절).
바울의 갑작스런 체포와 구금에 이어, 순교의 날이 가까워옵니다. 바울에게는 함께 사역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보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의 2차 선교지인 루스드라에서 처음 만난 이래로, 변함없이 바울에게서 배우며 아들처럼 섬긴 사람이 디모데입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19~22)
자신을 배반하고 떠나가는 사람들로 인해(딤후 1:15) 마음 아팠던 바울에게 하나님은 신실한 아들 디모데와, 동역자인 헬라인 의사 누가를 남겨 두셨습니다. 또한 오네시보로를 통해 바울은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딤후 1:16~18). 에베소 출신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소식을 듣고, 아예 로마로 와서 집을 얻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기어이 찾아내어, 자주 찾아와 격려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사역에 이런 사람들을 남기기 바랍니다. 신실한 사람들을 남기는 것이 최고의 사역이며, 최고의 열매입니다.
2. 네가 올 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져오라(13절).
가보는 드로아(트로이) 지방의 신실한 신자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에서 놓이고 서방전도에 다녀온 후, 일기가 더워지므로 무거운 외투를 남겨둘 정도로 친분이 두텁고 도움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겉옷’은 책의 커버라는 해석도 있으나, 이제 곧 닥칠 추운 겨울을 위해 바울이 필요로 하는 외투를 뜻하는 것입니다.
털로 짠 외투는 밤의 추위를 가리는 도구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신분, 권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2장에서 우리는 엘리야의 겉옷을 기억합니다.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의 겉옷을 떨어트립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요단강 물을 치며 건너옵니다. 엘리야의 영감과 권위가 겉옷을 통해 엘리사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동시에 겉옷은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보호막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9장에서 대홍수 후에 포도주에 취해 장막에서 벌거벗고 누운 노아를 봅니다. 그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해 두 아들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겉옷을 들고 뒷걸음으로 가서 겉옷을 덮어줍니다. 우리는 모두 허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우리의 허물과 약함을 덮어주는 겉옷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책은 가죽 종이에 쓴 것으로 가져 오라(13절).
당시의 책은 일반적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기록했습니다. 가죽종이에 쓴 것은 특별한 고가품이거나, 중요한 책입니다.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마지막까지 책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죽종이에 쓴 이 책을 성경이라고 봅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마지막을 기다리는 외로운 바울에게 이제 죽음의 그늘이 다가오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깊은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 속에서 바울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읽고 더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채우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더욱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디모데후서 4장 1~2절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환난과 시험과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진정한 경건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허탄한 이야기를 듣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라고 명령합니다.
4.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절).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 바나바는 조카인 마가를 수행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일행들이 바보 섬을 지나,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를 때 마가는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습니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흐르고, 한 생을 복음을 위해 다 드린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지나온 날들을 회상합니다. 바울은 그 때 자신이 그렇게 책망했고, 싸늘하게 대했던 마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지금은 마가가 로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베드로의 수제자가 되어 그를 극진히 섬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한 때 부잣집 아들로 철없어 보이던 그 마가가 이제는 신실한 일꾼이 되어 로마의 곳곳을 누비며 베드로의 사역을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마가가 보고 싶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인사도 시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함께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함께 일해야 합니다. 네로의 박해를 시작으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긴 암흑의 터널로 들어갈 것입니다. 앞으로 닥칠 환난의 시기에 다음 세대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부탁처럼, 여러분들의 마지막도 복되기를 바랍니다. 신실한 주의 사람들을 남기고 그들을 통해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받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세대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아쉬움 없이 오직 사랑과 감사의 마음만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상복 목사(광주동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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