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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사회제도 비교

by 은총가득 2021. 5. 10.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사회제도 비교

 

한상인(서울대학교 박사, 한세대학교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사회제도의 연구는 정치조직과 경제구조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고대 팔레스타인에서는 철기Ⅱ기에1) 상이한 민족 집단을 중앙행정조직에 의해 통합시킨 복합체, 즉 진정한 국가가 처음 등장한다. 이스라엘도 이 시기에 도시화와 중앙화, 민족적 의식 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2)

 

도시화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기원전 10세기의 철기 Ⅱ기에 이르면 다윗과 솔로몬 왕국 하에 모든 건축술은 융합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지역을 지배함에 따라 가나안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독립은 사라지고, 10세기 중반부터는 급격한 변화가 특히 도시 계획에서 나타난다. 수도급 도시들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중심지가 되고, 다른 도시들은 하나의 주기능, 즉 행정 중심이나 병거 도시, 저장 도시, 제의 중심지 등의 기능 수행도시로 세워진다.3)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인구와 자원과 권력 등의 집중화를 야기한다. 그렇게 집중된 소수의 정치행정도시는 도시와 연관되는 시골지역까지 사회와 경제를 지배하게 되고 결국 재화와 용역에 대한 계층화를 초래한다.

 

수도들과 지방 행정 도시에서 나타난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 제도와 기능들의 집중화 현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는 계층화되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변화는 통일왕국시대부터 시작하여 분열왕국시대에 뚜렷이 나타난 것으로 이스라엘의 사회는 계층화됨으로써 보다 다양해지고, 보다 전문화되며, 더욱 세분화되었다. 그러나 점차 도시들 사이에는 다양한 요소의 경쟁으로 인해 경제적 불균형이 초래되었고 그것이 지방의 고질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그러한 불균형은 보다 큰 중앙의 힘에 의해 통제되어야 했는데, 다시 말해서 권력기관에 의해 억압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관료적인 실수와 정치적 부패는 사태를 악화시켰으며 결국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전개가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은 아니며, 고고학적 증거나 성서적 증거에 의해서 입증될 수 있다.4)

 

또한 민족의식은 중앙화나 국가화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렇지만 그 의식은 고고학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유물은 개인과 사회의 행위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문화의 지표가 된다. 어떤 지역이 일정하고 구별되는 유물조합(assemblages)을5) 나타낼 때, 그곳을 다른 지역과 구별하여 고고학적 문화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고, 그 고고학적 문화가 계속 발전되며 동시에 문헌적 증거에 의해 입증되고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면 민족적 명칭을 붙여 일컬을 수 있다.6)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 이르게는 기원전 13세기 말의 메르넵타(Merneptah) 비문에 처음으로 민족적 명칭이 나타나며, 늦어도 기원전 9세기부터는 성서와 성서외적 자료에서 이스라엘을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적어도 기원전 10세기에 이스라엘적인 물질문화의 유물조합이 출현한다.7) 기원전 9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특징적 유물로는 다양한 그릇 형태와 특징적인 붉은 덧칠 토기와 간 토기 등을 가진 동질적인 토기유형을 먼저 들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성문방을 가진 정형적 성문과 포곽성벽 등의 방어시설,8) 아쉴라르 석조기술과9) 나선형(뿔모양) 기둥머리장식, 4개 방의 가옥, 단구형 동굴무덤10) 등에서 이스라엘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밖에 독특한 유물로는 인장과 진흙덩이에 인장을 찍은 불라(bulla), 아세라상, 오스트라카, 여러 가지 히브리어적인 명문 등이 있다. 이러한 특징들의 일부는 외래적인 것이지만, 개개의 유물의 발전과정과 유물조합은 이스라엘의 중심부 지역, 즉 해안지방을 제외한 서부 팔레스타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11)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문화는 철기 Ⅱ기 동안 페니키아나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등의 문화와 쉽게 구별된다. 다만 그러한 이스라엘의 문화적 특성을 철기 Ⅰ기의 어떤 시기까지 소급시켜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기원연구의 과제이다.

 

본고에서 고대근동과 이스라엘의 사회제도를 다룰 때 공간적으로 고대근동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히타이트, 페르시아가 포함된다. 시간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단계에서 고대근동문화의 영향과 교류를 통해 형성된 문화적 유사성과 그 안에서의 변용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제도가 비교적 왕국시대로 국한되어 있는데 비하여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1천년이 넘는 기간이 망라되고 있으며, 히타이트나 페르시아는 오히려 그보다 짧은 기간의 정황이 해당된다. 그것은 이들 국가들의 사회제도에 관한 자료의 제한성도 있고, 그 자료들이 어떤 특정 시대의 사회현상만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자료의 한계상 그 시대적 선후나 상호영향을 고찰하지 않을 것이며, 자료의 누적을 기다리며 보다 포괄적인 사회현상에 중점을 둘 것이다.

 

Ⅱ. 고대사회의 고고학 연구동향

 

고고학적으로 보면 철기Ⅱ기의 이스라엘 왕국시대 동안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거대하고 정형적인 건축시설이 나타나고, 다양한 유물들의 출현을 통해 국가적 번영과 쇠퇴, 그리고 외국과의 교역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기능적 관점에서 고고학 유물에는 경제유물, 가정유물, 정치유물, 종교유물의 네 종류가 포함된다. 경제유물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 분배, 소비와 관계되는 유물이며, 가정유물은 가장의 권위 상징물이나 여성용 장신구 등의 성과 연령에 관한 유물들이고, 정치유물은 공공건물이나 왕에 관계된 유물들이며, 종교유물은 제의와 연관된 다양한 유물들을 말한다.12) 그러한 고고학 자료는 단순히 물질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적 측면을 반영한다.

 

전통적인 고고학에서는 고고학 자료를 발굴하고 분석하고 민족지 유추 등을 통해 문화를 복원하였다. 예를 들면 출토 유물과 유구의 형태로 추출된 특정한 주거 형태를 지도에 표시하여 분포도를 만든 후 그 분포 영역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특정 민족집단의 영토로 간주하고, 그 시기에 따른 분포 영역의 변화를 그들 민족집단의 확산 및 이동의 양상으로 해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고학적 문화와 문화영역이 만들어지고, 특정 민족의 이주와 문화전파 경로가 설명된 것이다.13) 그러나 1950년대 이후 그러한 전통적인 문화 역사적 고찰에서 벗어나 생태학적 시각에서 취락의 분포와 입지를 연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 결과 문화변동 원인을 종래의 이주나 전파 등 외적 요인으로 파악하지 않고 사회내적 변화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1960년대 미국에서부터 등장한 신고고학(New Archaeology)에서는 생태학적 시각 속에서 기술과 경제, 사회조직, 이념 등을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연관된 것으로 파악하는 체계이론의 단계로 발전시켜 나갔다.14) 신고고학에서는 인간행위에 있어서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낙관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지 연구에 나타난 문화양상과 고고학자료에서 보이는 물질문화 양상과는 직접적 연관성이 있다고 여기고, 그 상호연구를 통해 과거 고고학 자료로부터 명확한 행위를 추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고고학자들은 과거 인간행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축적시켜 나갈 수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일반법칙을 설정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15)

 

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현존하는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관찰할 수 있는 민족지적 연구를 통하여 과거 물질문화인 고고학 자료에 대해 명확한 행위를 추론할 수 있다는 인간행위에 관한 제일성의 가정(Uniformitarian assumption)은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비판자들은 과거 물질문화는 과거 인간행위의 일부만 반영할 뿐 전체를 반영하지 않으며 특히 과거 인간의 경험 중 사회현상 및 이념에 대한 측면은 거의 투영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후기 과정고고학자들은 종래의 고고학 해석의 일반화 추구 가능성을 포기하고,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모든 물질문화의 의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특수론적 입장, 특히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한다.16)

 

그에 대해 1990년대 콜린 렌프루(A. Colin Renfrew)를 비롯한 일련의 인지과정 고고학자들은 과거 고고학유물을 통해 얻을 수 있던 경제체계와 사회조직에 대해 보다 우월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신고고학의 업적을 뛰어넘어 과거 사람들의 이념에 대한 확실하고 체계적인 추론을 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이론대로라면 고고학 추론의 단계의 제일 상위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과거 인간의 이념과 상징, 종교에 대해 고고학 물질문화를 통해 확실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다는 야망의 표현이다.17) 콜린 렌프루는 사우삼턴(Southampton) 대학의 석좌교수 취임 강연에서 ‘사회고고학’을 향한 새로운 연구방향을 제시한다.18)

 

 

그러나 과거 인간의 상징체계 및 인지적 측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고고학적 시각이 아니라 후기 과정고고학에서 견지하는 상황적 해석학적 접근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반대에 봉착하게 되자, 렌프루는 신고고학에 뿌리를 둔 기능과정고고학의 방법론적 뼈대를 고수하면서 과거 인간집단의 정신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인지과정고고학(Cognitive- processual Archaeology)을 주장하게 된다.19) 그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고고학의 새로운 도약을 보장해줄 수 있는 분야는 물질문화를 토대로 선사시대인들이 무엇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했는가를 밝히는 인지고고학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 방법으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과 수학에 기초한 컴퓨터과학의 연구성과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20)

 

한편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구약성서 해석학에는 사회학적 연구방법이 등장하여 성서의 배경이 되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보다 확실히 규명하고자 하였다.21) 이전부터 삶의 정황에 대한 연구는 양식사와 전승사, 편집사적 연구방법에 의해 진행되어 왔지만 그같은 연구방법의 한계를 사회학적 성서해석자들은 지적한다. 그들은 사회역사적 정황이 무엇이냐를 넘어서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정황이 성서기록을 유발시켰는가에 대해서 연구한다. 고대 사회에 관한 연구는 인류학에 뒷받침되는 고고학적 연구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처럼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하고 문헌자료에 의하여 적절하게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연구는 전통적 연구에서도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 연구방법론의 변화로 직접적으로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례로써 20세기 중반이 되기까지는 이스라엘에서 발견되는 문헌기록이 극히 드물어서 그 사회의 문자보급율이 매우 낮았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 상황이 많이 변해서 수백점의 오스트라카와 수많은 토기나 돌그릇, 상아제품, 저울추, 인장 등에 새겨진 명문, 무덤에 새겨진 명문(銘文) 등 많은 자료가 나타났다.22) 또한 많은 알파벳을 쓴 금석문이 발견되어 당시에 글쓰기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증거로 인하여 고대 이스라엘에 문자 보급률은 상당히 높았다고 추정된다.23)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을 지라도 진정한 식자층은 잘 교육받은 상류층에 불과했을 것이다.24)

 

 

또한 사마리아에서 출토된 기원전 8세기의 히브리어 오스트라카 중에서 대부분은 기름과 곡식으로 세금을 지불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그 납세자의 이름이 한정된 소수의 숫자로 여러번 나타나고 있다. 그 사실은 소수의 일부 부유층이 사마리아 인근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반영해준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고고학적 해석이 기원전 8세기 예언자의 외침과 어울리고(사 5:8; 미 2:2), 그후 8-7세기의 예언자들의 통치 계급의 사치와 허영, 가난한 자의 압제 등에 대한 가슴에 사무치는 비판적 메시지와도 부합됨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사회적 계층화의 증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통한 이스라엘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는 성서 내용과 동떨어진 결과를 보고할 수도 있으나 역으로 성서시대의 사회현상을 소위 기록자의 이데올로기를 떠난 객관적인 사실로 제시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고대사회 복원에 관한 최근 고고학 연구동향을 성서분야에 전폭적으로 적용시키지 못한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문헌적 고고학적 연구를 병행하여 고대근동과 이스라엘 사회제도를 비교 고찰할 것이다.

 

Ⅲ. 왕실 제도

 

1. 왕정과 왕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천년기 초에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통치 계급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왕(수메르어의 Lugal, 아카디아어의 šarrum)이었다.25) 왕은 군사적 지도자일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에서 대제사장이며 신의 대리자였다. 왕권은 신에 의해 주어진 신적제도이며, 왕은 신들의 회의와 그 주재인 엔릴에 의해 결정된다. 보다 후대에 와서 바벨론과 앗수르의 왕들은 마르둑과 앗수르 신을 수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우주적 우월성을 부여했다. 마르둑이나 앗수르가 만신전 신들과 함께 인간을 창조하고 수도를 건설하였으며, 수도는 지상에 있는 신전회의 장소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는 모든 사회의 중심이며, 도시의 중심은 사원이었다. 그 사원에는 도시의 수호신이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 신을 섬기기위한 모든 노력이 다양한 경제적 행정적 활동을 만들었으며 그 성공 여부에 의해 주민들의 성공적 삶이 보장되었다.26) 이처럼 메소포타미아 왕들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그들의 통치권을 신적 기원에 두고 신을 위해 일하였다. 그러나 신의 아들과 같은 양자적 개념은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에서는 일반적이지만, 반면에 이집트에서는 왕이 국정을 수행할 때 성육한 신이었다. 물론 이집트에서도 메리카레(Merikare) 왕을 위한 교훈에서 보는 것처럼 “왕이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다”는 개념의 배경에는 신의 선택사상이 담겨있다.27)

 

이집트에서 왕은 정책 수립자로서 그의 관료들과 함께 정부의 여러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28) 왕의 권위와 왕정은 종교적 신념에 의해 정당화되었으며,29) 왕의 퇴위나 새 왕조의 성립은 그러한 신념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좌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한 왕정 질서가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엘리트 계층의 가치체계에 의해 사람들이 사회질서에 만족하도록 격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파라오나 엘리트 계층은 악행을 피하고 혜택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우주적 질서와 공평의 개념인 마아트(maʿat)에 집착했지만, 그것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농업과 관개를 증진시키며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최소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세속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름에 들어간 신들의 명칭들은 종교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선사시대의 사원은 왕국시대에 신전으로 발전했고 새로운 예식이 첨가되었다. 왕은 신전에 대한 세금을 면제했을 뿐 아니라 토지와 신상, 제의기구 등을 기증하고 신전건축을 후원하였다. 왕의 신성은 신의 영역과 인간 영역의 접촉점으로 여겨졌으며, 신전에서 제의를 수행하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니라 왕으로 벽화에 묘사되었다.

 

히타이트 사회의 최상류층은 왕과 그의 확대된 가족들이 차지하고 있다.31) 그 확대가족의 구성원들은 “위대한 가족”이라고 불리며, 그 안의 남자들은 왕자로, 여자들은 공주로 불려진다. 왕은 공식적 기록에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6개의 명칭이 나타난다. (1) 나의 태양신32) (2) 라바나(Labarna)33) (3) 위대한 왕34) (4) 하티땅의 왕35) (5) 영웅36) (6) 신의 사랑받는 자37) 등이다. 또한 왕의 복장으로 태양신을 표상하는 예복과 전사의 신을 표상하는 전투복이 대표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이 히타이트의 왕은 신적 기원과 후원으로 등극하였으며, 정의로운 정치와 영토보존, 전쟁의 지휘 등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스라엘의 경우 사사시대의 배경 속에서 귀족적인 도시국가들은 서로 다른 정치조직을 가진 백성들의 무리들을 통합시킨 영토국가로 발전해갔다.38) 그 과정에서 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왕정 이데올로기가 산출되었다. 비록 왕이 육체적으로 신적인 존재임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왕정은 태고적부터 존재해왔던 신적인 제도로 간주되었다.39) 왕정후기에는 달라졌을지라도 왕정의 가장 초기에는 왕이나 국가 건설자는 국가신의 아들로서 여겨진 것이 시리아-팔레스타인의 공통적 개념이었다.40) 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그로써 합법성이 인정되었다. 그것은 출생의 개념으로 정의되기도 한다(시 2:7; 22:9). 이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왕은 국가신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영토인 국가를 보존하고 방어하며, 그 영토와 그 백성을 돌보며, 그것을 증대시킬 임무를 가졌다. 왕은 최고군사령관, 대법관과 대제사장이었으며, 국제무역을 관할했고,41) 행정조직의 최정점에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도 왕은 성전 건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대근동에서 신전건설은 신의 나라와 그 백성을 다스리는 왕의 임무에 속했다.42) 신전은 신의 세계와 영역의 표현이며, 국가와 종교는 동일한 것이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신전에서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는데, 신전은 우주와 국가의 생명의 기반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의 경우처럼 왕궁복합체가 신전을 포함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근동에서 신전은 소떼나 양떼와 토지 등을 소유하는 경제적 조직체로 중요한 왕실의 수입원이었다.

 

페르시아 왕의 정의와 심판에 대한 기록은 다리우스의 비문에서 찾아진다.43) 왕은 정의의 친구이며 불의한 자와 벗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은 신앗시리아 제국과 신바벨론 왕들의 선언과 유사하다. 왕이 거짓의 사람으로 결정하고 반역자로 처형할 때 왕에 대한 반역보다 중요한 범죄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주권에 도전했다는 이유였다. 만약 다리우스 왕이 거짓말쟁이들을 처형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을 모두 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페르시아 왕의 권위는 아후라 마즈다에 의해 위임되었다.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심판은 법령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왕실에 기여한 것과 범죄사실과의 비중을 가리는 왕의 판단에 따르는 것 같다.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왕이 산도케스(Sandokes)를 재판할 때 먼저 사형을 선고했으나 다음에 그의 공적을 참작하여 그를 사면해주었음을 기록하고 있다.45) 그것은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취소할 수 없음이니라”는 내용과 대조된다.46)

 

2. 여왕과 왕비와 태후

여왕(malkāh)은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왕의 배우자로 사용되지 않았다(예외로 아가 6:8-9). 여왕은 예컨대 스바의 여왕처럼 통치권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사용된다. 왕의 배우자에 대한 일반적 용어는 왕의 아내('iššâ)이며,47) 그녀가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겠지만 우가리트의 왕비처럼 희생제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든지 하는 공식적 권한이나 직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히타이트의 왕비는 신들을 경배하는 부조에서 남편인 왕과 함께 묘사된다. 왕비는 고대세계에서 여성으로서의 제한이 있었지만, 어떤 왕비들은 상당히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신왕국 시기의 왕비들은 여왕에 상응되는 위대한 왕비라고 새겨진 인장들을 공식적인 일에 왕과 독립적으로 사용했다. 과부가 된 왕비도 죽을 때까지 권한을 행사했으며, 새로 등극한 왕과의 갈등을 겪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왕비의 권력은 주로 특정 사원의 기금과 자원, 헌물 등의 통제에 관계된 것 같다.48) 만일 통상적인 권력에 의해 소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을 때면 왕비는 그녀가 아는 정부의 기밀이나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뜻을 이루려했다. 히타이트 공주들은 외국으로 시집을 가기도 했으며, 반대로 외국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기도 했다49)

 

왕의 어머니 태후는 왕좌의 배후에서 권력을 쥔 여인이었다. 히타이트의 무르쉴리 2세의 태후인 타와난나(Tawananna)는 태양여신인 아리나(Arinna)의 대사제였다. 시돈에서도 태후가 여신 아스타르테의 사제였다. 앗시리아의 태후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성서에서 태후(gēbîrāh)는 “힘있는 여인”을 번역한 말로 유다왕국에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어머니와 연관하여 나타난다. 태후는 강력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며, 권력의 상징인 왕관을 썼다(렘 13:18).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가 나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였으며(왕상 2:19), 아달랴는 그 아들 아하시야에게 악을 행하게 조언하였으며(대하 22:3), 유다의 왕자들이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갔다(왕하 10:13). 이처럼 태후는 공식적인 권력의 자리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자 유다의 아사왕은 태후 마아가를 폐위시켰다. 마아가는 아마도 아세라를 섬기는 제의적 임무를 박탈당하고 단순히 왕의 어머니(할머니)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50) 태후는 마아가의 경우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아세라에 대한 제의적 직무 수행과 후궁의 관할, 왕궁의 여성 노동력을 감독하였을 것이다. 또한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드린 간청을 볼 때 왕에게 나아가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3. 왕의 신하

메소포타미아에서 국가는 왕실경비와 행정조직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재정이 필요하였다. 국가 소유의 토지는 정부의 관리들에게 생계를 위해 주어졌으며, 밭들도 직업군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세금은 왕실 소유의 토지세인 일쿠(ilku)와 일반토지세와 농산물 수확세인 빌툼(biltum), 쉽슘(šibšum), 믹숨(miksum)등이 있었다.51) 국가수입의 상당한 부분은 왕실소유의 토지세와 수확물세에 의해 충당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농사일과 개인적 부역을 위해 징집되었다. 하속(muškēnu)은 왕에게 속한 땅에 살면서 왕실에 그 생산물의 일부분을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정규군의 일부로 왕궁에 소속되어 신속히 정규군을 지원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그들은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매우 일찍부터 그들에 관한 법률조항이 나타난다.52) 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은 기원전 2천년기와 1천년기에 해방된 노예를 뜻하는 훕슈(ḥupšū)이다. 그들은 자유로웠지만 하층민이었으며 왕궁의 일에 연관성이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에서 국가는 자체의 이익을 보호해야만 했으며, 백성들의 생산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 백성들을 제어해야만 했다. 왕궁과 왕실 소유지들, 행정적인 성전들은 요새 도시들과 행정적인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운영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합적인 정부 기구들이 발전되었고, 조세 제도의 일부로서 세금 징수와 강제노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왕은 군대의 장관,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을 포함하는 관리들을 임명하였으며, 그러한 관료정치는 나라를 보호하고 제어하기 위하여 나라 전체로 확장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신민들, 소위 그의 “종들”은 높은 관료직에 있는 그의 아들들과 사위들을 비롯하여 왕궁 관리, 군사적 요원, 국가적 성소의 제사장, 주지사, 노동 감독관, 세금 징수관, 그리고 경찰관들을 포함하는 계급조직을 구성하였다. 또한 마지막의 몇몇 직책들은 레위인들에게 돌려졌다. 그들은 지방행정 중심지와 국고성에서 경찰관, 세금 징수관, 성전 관리, 그리고 공무원들이 될 수 있었다.53)

 

이스라엘 왕국 초기의 사울은 대규모의 건축 계획들을 수행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부에는 군대의 최고 장관이던 아브넬, 제사장 아히야, 그리고 사울의 목자장 도엑과 같은 관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의 통치에 있어 최상부의 사람들에 속했다.54)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고위 관료들의 명단이 사무엘하 8장 16-18절과 20장 23-26절, 열왕기상 4장, 역대기상 18장 15-17절에 나타난다. 사무엘하 8장과 20장에는 군대장관(śar haṣṣābāʾ), 서기관(sôpēr), 사관(mazkîr)55), 대제사장, 그리고 강제노역의 감독, 대제사장, 그리고 강제노역의 감독관 등이 있었다. 열왕기상 4장에 나와 있는 솔로몬의 고급관료 명단에는 관리장(‘al-habbayit)과 왕의 벗(rē'eh)이 첨가되어 있다. 관리장은 왕궁의 집사로 이사야 22장 15절에 나오는 소켄(sōkēn)과 병행되며 아카디아와 우가리트의 문서에도 나타난다. 집사라는 직책은 고대 근동에서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성서에서는 단지 일곱 사람만이 관련되고 있다.56) 고고학적 유물 가운데 무덤 비문과 불라(bulla),57) 인장에서 그러한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달야후(Gedalyahu)가 집사라고 새겨진 불라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아마도 그달리야를 가리킬 것이다(왕하 25:22).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새로운 통치조직을 창안하지 않았다. 법정과 군대, 그리고 제사장적인 직무들은 오래 전부터 가나안에서 잘 알려져 있었으며, 주변의 강대국인 이집트 파라오의 통치조직과 아마도 히타이트의 궁정조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58) 그러한 연관성을 고려하여 그 주요직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 칭 의 미 역할과 임무 비 고
소페르(Sôpēr) 서기관,
행정관
왕적인 서기관은 국정일반, 법률과 재정적인 문서를 취급 담당하는 내무적인 대신(왕하22:3)이며, 군대의 서기관은 모병을 담당(렘52: 25). 아마르나 편지들과 기원전 11세기 웬아문(Wenamun)의 여행기에 나타남
마스길(Mazkîr) 사관
(전달자)
왕궁의 결정들을 선포하거나 인증하고, 법률적인 의정서를 다루었으며, 국가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왕에게 정보를 제공함(삼하8: 16) 모압, 암몬, 에돔, 그리고 블레셋의 5대 도시들에서도 존재
요에스(Yôʿēṣ) 모사 일반적인 지식뿐 아니라, 신탁들과 예언을 통해서 군사적이고 공적인 문제들에 대해 왕에게 조언함 삼하 15:12 ; 대상27:32 :
사9;6
사르(Śar) 방백,
군대장관
많은 경우 방백으로 번역되고(삼상18:30; 왕하10; 1; 대하12:5), 군대장관과 같은 고위군사지도자를 의미함, 요압은 사르 하싸바 (śar haṣṣābāʾ ), 즉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음(삼하 8: 16). 그밖에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뜻함(출애굽기 18:21, 25; 신명기 1:15) 신앗시리아 문서, 히타이트의 문서, 모압왕 메사의 비문 등에 나타남
사르 하이르
(Śar hāʿîr)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
도시 관리자로 밤의 파수꾼들의 임명을 포함하는 명령들에 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어서 군사적인 지휘관이나 마찬가지임(아가서 5:7). 예루살렘 성전 수비대(렘 35:4) 고위의 도시 관리자에게 왕이 땅과 재산을 수여하여 소위 봉건적 영주들이 될 수 있었다(참조, 대하 21:2-4)

 

명 칭 의 미 역할과 임무 비 고
레아(Rēaʿ) (왕의) 친구 왕의 친구로서, 특별한 조언자를 언급하는 듯하다. 그는 아마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러한 신분으로 “격상된” 관리였을 것이며, 동시에 토지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삼상30:26 ; 삼하13:3
나아르(Naʿar) 소년 기사나 지주로서 왕과 귀족, 고위관리를 보좌하는 직책이며, 군의 장교를 지칭(왕상20:19). 창14:24 : 삼상14:1;
삼하16:2

 

4. 지방관리

히타이트에서도 왕실의 확대가족들은 부유한 토지 귀족들의 핵심을 형성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는 왕실과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왕자라고 불리지 않는 고관들도 포함되었으며, 전쟁시에 전차를 모는 기사 계급도 이에 속하였다. 히타이트의 거부들은 토지와 가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 토지의 일부는 왕의 하사품이었던 사실이 기록에 보존되어 있다. 부자들은 때때로 종교 축제를 주도하거나, 마을 신전을 건축하고 가구를 비치하고 그곳에 직원을 두는 등의 일을 하였다.60)

 

이스라엘에서 솔로몬의 통치지역은 왕국의 지리적인 단위들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지방관리들의 임무들은 단지 부역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것 뿐 만아니라 세금들이 예정된 시간까지 수도로 운반되는지 감찰하는 것이었다(왕상4장). 그 관리들은 왕의 궁전과 왕실 사람들에게 세입과 식량을 공급했으며, 또한 국가의 말들과 다른 동물들을 위하여 짚과 보리를 제공해야만 했다. 솔로몬 왕국의 분열 이후에 북이스라엘의 지역들은 계속해서 존재했을 것이며, 남유다 지역은 개혁되었을 것이다. 후대의 여호사밧왕 때에는 분명히 제의적인 개혁과 함께 재판제도를 개혁한다(대하 17:7-9). 이로써 유다에서 지역적인 분할이 존재했었으며, 그것이 왕에 의해서 개혁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참조; 대하 21:2-3). 몇 번 나오는 감독관인 사레 니싸빔(śārê niṣṣābîm)은 주지사 아래에서 강제적인 노동(mas)을 감독하는 사람들이었다(왕상 5:16).61) 솔로몬 왕의 노동 인구는 3만명이었으며, 그들을 3,300명이 관리하였다. 아도람과 여로보암은 강제 노동자의 감독관이었다. 그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리 명확하지가 않지만, 여로보암이 요셉족속의 역사를 감독하였으므로(왕상11: 28) 그는 아도람 다음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또한 지역의 중심지들과 국고성, 무역 통로의 요충지. 요새도시, 전략도시, 그밖에 지방의 저장설비들과 포도원들과 포도주 저장소, 기타 농업적 활동지역62) 등에 감독관들과 관리들이 있었다(대상 27:25-31). 예컨대 철기 Ⅱ기에 네게브 지역의 아랏(Arad)은 아라바와 아카바에 이르는 무역 통로를 보호하는 요새였는데, 그곳에서 군대장관 엘리아십에게 지시한 명령을 기록한 수기용 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0세기의 브엘세바에서는 여러 유물들과 곡식 저장창고가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일반적으로 왕정의 관리들에게 수여한 땅과 그 소산물을 소유하는 영주와 같은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신이 그 땅을 소유하다는 사상과 충돌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왕은 야웨의 대리자로서 그 땅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63) 땅의 하사는 왕의 인장이 사용되는 문서행위가 있었을 것이며,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인장과 법률문서의 사용을 보여주는 사례이다(왕상 21:8).

 

Ⅳ. 가족 제도

 

1. 가정과 가장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으로서 아버지는 아내와 그 자녀에 대해 대단한 권위를 가졌다. 만약 빚에 몰리면 그의 가족으로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며 그들을 구속해 줄 의무는 없었다. 가장이 죽으면 그 권한은 장남에게로 승계되지만 그가 너무 어릴 때는 어머니가 권리를 갖았다. 후대로 가면 모든 형제들이 재산을 똑같이 상속받지만 장남은 일부를 좀 더 받았는데, 앗시리아와 누지에서 장남은 2배의 상속을 받았다. 수메르와 누지에서는 아들이 없을 경우 딸들이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부친의 사망 전에 유언(šimtu)을 작성하였으며, 누지나 알랄라크, 우가리트, 에마르(Emar) 등에서는 유언이 발견되었다. 그밖에도 앗시리아에서는 수혼제를 통하여 가장의 권위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64) 메소포타미아에서 상속자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바벨론에서는 무덤에 물을 붓고 제사음식을 드리는 의식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누지와 에마르 문서에서는 장남이 가족제의의 제사장으로 묘사된다. 장남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신상이나 신령들을 모시게 되며, 다른 형제들이 그것들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게 된다.65)

 

고대 이집트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단위는 씨족 같은 확대된 친족인 아니라 오히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었다.66) 핵가족적 사회제도의 중요성은 범죄자의 가족을 노동수용소로 보낸다든지 도망간 범죄자를 잡기 위해 인질로 가족을 구금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3중간기에는 가족단위로 저주하는 법령이나 증서들이 흔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개인은 핵가족이라는 집단의 한 구성원이며 현대적 의미의 개인과 다르다. 가족의 대표가 누구인지에 대한 특별한 규정도 없으며, 결혼에 의한 친족관계가 혈연관계보다 중요시되기도 한다.67) 또한 이집트에서 무덤에 제물을 드리는 죽은 자에 대한 제의는 이집트 가족생활의 중요한 연장이다. 다이르 알-마디나에 있는 노동자 마을을 발굴한 결과 조상제의가 가정에서도 계속되었다. 왕실에 있어서도 죽은 왕은 아버지 오시리스가 되며, 그 계승자는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의 현신으로 여겨진다. 특별히 신왕국시대에는 합법적인 왕위계승이 이전의 왕들에 대한 조상제의를 수행함으로써 인정되었다.68)

 

히타이트의 가족관계에 대하여 하투샤의 고문서보관소에 있는 어떤 가정의 목록에 보면69) 가족구성원과 소유재산의 세부사항이 나와 있다. 가족은 남편과 아내를 비롯하여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 가축으로 황소와 양, 염소, 송아지 등이 있고, 목장과 포도밭, 과수원 등을 소유하였다. 그 가정은 상당히 부유한 가정으로 일부일처제이고 모든 가족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며, 아들 이름이 아내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에게 행사되었지만, 과부는 아들들이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도록 상속권을 박탈하거나 회복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페르시아 가정에서 부모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원칙적으로 아버지는 그의 자녀와 그 집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전적인 힘을 가졌다. 페르시아 가족들간의 결속력은 대단해서 고위 관직은 대를 이어가며 지속되었다. 반면에 왕에 대한 반역은 전 가족이 형벌을 받았다. 하만이 에스더 왕비를 범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을 때 그 자신과 전 가족이 처형당했다(에 7:10; 9:14). 그러나 가족에 대한 이러한 결속과는 달리 5-25세의 페르시아 귀족자녀들은 가정의 범위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육체적 도덕적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승마와 활쏘기, 창던지기, 진실을 말하기 등의 훈련을 받았고, 무장을 하지 않은 채 광야에서 지내는 통과의식을 행한 후 최종적으로 왕 앞에서 실습을 하고 가장 잘한 사람이 상을 받았다.70)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의 젊은이들은 능숙한 기마병이 되고 충직한 왕의 신하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국가조직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아버지의 집(bȇt'ab)이며71), 그 다음이 씨족(mišpāḥâ)72), 그 다음이 부족(šēbeṭ)으로 규모가 커진다. 가족 안에서 여자의 위치를 살펴보면 아내('iššâ)는 남편 다음의 높은 위치를 가졌으며, 여종(šipḥâ)은 가장 낮은 위치에서 비천한 노동을 하거나 대리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마(āmâ)는 첩이나 자유인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여자를 뜻하기도 하였으나 여종과 차이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73) 첩은 필레게쉬(pîlegeš)로 나타나지만, 왕의 후궁을 자주 가리킨다(삼하 16:21). 자녀들을 보면 장자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결혼하지 않은 어린 동생들은 형들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하였다(삼상 17:17-18). 딸들은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양육되었으며 들판에서와 가정에서 많은 일을 하는 반면, 이혼할 권리나 재산 상속권이 없었다.74)

 

2. 결혼과 이혼

메소포타미아에서 대부분의 결혼은 일부일처제이지만, 남자상속의 중요성 때문에 다른 아내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첫째 부인의 우월한 위치는 지속되며 때때로 두 번째 부인을 선택할 권한을 갖는다. 간혹 아이가 없는 부인은 자신의 여동생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게 해주기도 했는데, 그러한 결혼이 아이를 갖는 것이 금지된 여사제(naditū)에게서 시행되었다. 앗시리아에서는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지만 그 부인은 첩으로서 두 번째 지위를 가지며, 만일 자녀가 태어나도 첫 번째 부인에게 아들이 있으면 상속자가 될 수 없었다.75)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년기부터 여자들이 각종 형태의 재산의 구매자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여자들이 상속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결혼할 때 가족으로부터 상당한 선물이나 지참금을 받았다. 그 지참금은 보통 동산으로 가구나 그릇, 옷, 노예(부유한 경우) 등으로 구성되며, 때로는 집이나 밭을 받기도 했다. 여자의 재산(šeriktum이나 nudunnûm)은 흔히 결혼할 때 받게 되며 남편이 관리하고 증식할 수 있지만, 이혼할 경우에는 돌려주어야 한다.76) 고바벨론에서 태양신의 여사제는 결혼할 수 있지만 자녀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사제가 받는 결혼지참금은 특별히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재산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는 권리를 표명하지 않는 한,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형제들에게 돌아오게 된다. 반면에 마르둑의 여사제들은 그 지참금에 대한 자유처분의 권리를 가지며 그 형제들은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르둑 제의의 중요성을 배려한 특별 조치였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결혼 때 신부에게는 며칠 내지 몇 주씩 하는 결혼식 음식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선물이 주어졌다. 신랑측에서도 선물을 주었는데 그것은 신부 아버지의 지참금과 함께 신부의 소유가 되었다. 이혼은 남편측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임의로 할 수 있었으나 아내의 모든 재산을 상실할 뿐 아니라 그 이외의 돈을 지불해야 하기도 했다.77) 여자측에서의 이혼 주장은 드물기는 하지만 최선의 상황에서는 지참금을 받고 시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고바벨론의 결혼 계약에서는 죽음의 조건으로 아내의 이혼을 금지하였다. 남편에 의해 버림받거나 전쟁 등으로 남편이 생사불명인 경우는 재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사유로 남편이 돌아오면 본 남편에게 돌아가야 했으며, 새 남편과 사이에 낳은 자녀는 새 남편에게 속하였다.78)

 

이집트의 결혼예식에 관한 고대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혼식은 제사장이나 관리가 연관되어 있지 않는 세속적이고 개인적 제도이지만 경제적이고 법적인 측면에서는 중요하였다. 남편과 아내는 모두 결혼지참금을 가져왔으며, 후기시대 이후부터는 남편이 아내를 부양할 의무와 이혼시의 재산분배 등에 관한 계약문서가 나타난다. 결혼대상에 있어서 오직 왕만이 때때로 그의 동복자매나 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으며, 이복자매와 결혼하는 것은 평민들도 가능하였다. 일부다처제는 대부분 왕에게 시행되었으며, 평민에게는 극히 드물었지만 첩을 얻을 수 있었다.79)

 

고대 이집트 사회는 남성중심이었지만, 여자들도 상당한 법적 권리를 가졌다. 그들은 땅과 집 같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그것을 물려줄 수도 있었으며,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재산문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고, 중왕국과 신왕국시대에는 여성문학도 나타나고 있다. 아울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부 여자들은 신전에서 봉사하였는데, 하돌(Hathor)의 여사제로서뿐 아니라 신전의 가수와 무희로 활약하였다. 특히 신왕국시대부터 26왕조까지 왕실의 부인이나 딸들은 테베

의 아문신의 아내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이후 시대에는 제사장의 수반역할을 하기도 했다.80)

 

히타이트 가정에서 특별히 후사를 위해 아내가 여자 노예를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첩을 얻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아내의 여자 친척과의 성관계도 금지되었다. 히타이트에서 이혼은 한편의 요구가 있으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도록 구체화되어 있다.81) 비록 히타이트에서 여성들의 일반적인 활동영역은 가정이었으며, 그 개인적 권한은 남편의 권세에 의존하였을지라도 왕의 누이들과 딸들은 이웃 왕국에 시집가서 왕후의 권세를 누렸으며, 부자의 아내는 많은 종들을 관할하고 의식주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여가를 즐겼다. 가정 밖에서는 가난한 여인들이 임금을 위해 손일을 했으며, 왕궁에서 일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마술에 종사하여 병자를 치료했으며, 여성 정신적 치료사나 적어도 가정 상담인이 있었다. 조산원은 출산을 돕는 여성이며, 신전에서는 여자 성직자와 가수 등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여성의 임금은 대략 비교해볼 때 남자의 절반정도였다.82) 그러나 히타이트 여성들은 그러한 사회적 한계 속에서 스스로 이름을 떨치며 당당하게 살아가기도 했다.83)

 

페르시아에서 결혼식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없지만 공식적인 의식이 있던 것은 분명하며 일종의 합동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러명의 신랑들이 자리에 앉아 서로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면 신부들이 들어와 미래의 남편 옆에 앉았고, 신랑은 신부의 손을 잡고 키스하였다. 페르시아 여자들에게는 상속권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할 때 아버지의 재산을 받았다.84)

페르시아의 일부다처제는 왕실에서 잘 증명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두 딸을 비롯한 페르시아의 일부다처제는 왕실에서 잘 증명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두 딸을 비롯한 네 명의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는 이미 전에 두 명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이처럼 자매를 함께 맞이하는 결혼이나 삼촌과 조카딸 사이의 결혼도 가능하였다. 이처럼 동족결혼의 관습은 왕실에서 특히 잘 확인된다. 다리우스 2세는 이복누이와 결혼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아들과 딸의 결혼으로 출생한 다리우스 3세는 그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심지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의 두 딸과 결혼하였다. 동족결혼이 페르시아의 전통적 관습인지, 이집트에서 유래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지만, 왕실에서는 왕위계승권의 범위를 좁히는 실제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일반가정에서는 상속권이 직계가족에게 남게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85) 이혼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전혀 없는데 공주와 결혼한 사람이 공주의 부정한 품행에 대해 왕에게 호소했을 때 왕은 공주를 책망하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했을뿐 별거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서에서 이혼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왕비 와스디가 왕의 부름을 거절했을 때 왕은 사례를 아는 박사들의 자문을 구하였다(에 1:13). 그러한 사실은 페르시아 남편들이 어떤 재판을 통해서 아내와 결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86)

 

이스라엘에 있어서 결혼은 가정 사이의 중요한 거래의 하나로써 보통 가장들에 의해 성사되었다.87) 흠없는 신부를 보내는 가정은 신부값으로 보상을 받았으며, 그 값에 대한 기록도 나타난다(출22:16-17 ;신22:18-19).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적으로 동족간의 결혼을 선호했지만, 일정한 범위 내의 근친결혼은 금지하였다(레 18, 20장)

 

3. 양자

메소포타미아에서 양자에 관한 언급이 비교적 많이 있다. 누지 문서에 의하면 자녀가 없는 부부가 어떤 사람을 양자로 삼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양자가 되면 그는 양부모가 사는 동안 그들을 부양하고 죽은 후 명예로운 장례를 치러주는 한편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88) 양자는 친척이나 낯선 사람보다는 신임하던 노예가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노예여자가 낳은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맞아들일 수도 있다. 만일 노예의 여자가 낳은 아들을 합법화시키지 않는다면 그(아버지)가 죽으면 노예여자와 아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89) 양자나 친 아들도 경우에 따라 상속받지 못할 수 있으며, 양자와 양부 사이의 관계도 끊어질 수 있다.

히타이트에서 양자제도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며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경우를 보면 하투쉴리 1세(Khattushili Ⅰ)는 그의 손자 무르쉴리를 양자로 삼은 후 후계자로 정했으며, 하투쉴리 3세는 그의 형인 무와탈리 2세(Muwattalli Ⅱ)의 아들을 양자로 삼은 후 왕위에 올랐다.90)

이스라엘에서 양자상속에 관한 예는 왕국시대보다 족장시대에 몇 번 언급된다. 무자한 아브라함은 다메섹 출신의 엘리에셀로 상속자를 삼으려고 하였다(창15:2).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간 후의 생활을 보면, 라반은 본래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어서 야곱을 양자겸 사위로 삼았을 것이다. 야곱에게 자식소유(창31:43)와 축첩금지(창31:50)에 대한 라반의 말은 그에게 양부로서의 권한이 있음을 보여준다.91)

 

Ⅴ. 사회계층

 

1. 일반 사회계층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사회는 시민으로 묘사되는 원주민과 외국인으로 구별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대부분 자유민이었다. 그들의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 대한 의무가 관습과 전통에 의해 주어졌지만, 그 안에서 개인적 자유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자유민 중에서 집과 토지, 정원, 가축, 심지어 노예까지 소유하고 있는 유산계급과92) 장인이나 고용된 노동자와 목자, 소작인과 같은 자유로운 노동계급이 있었다.93)

이집트인들은 전통적으로 세 계층으로 구분된다. 귀족계급인 파트(pʿt)는 국가 행정과 제사장직, 고급군인을 형성하며, 평민인 레키트(rḫyt)가 두 번째 계층을, 그리고 정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헨메메트(ḥnmmt)가 세 번째 계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파트 이외의 단어는 곧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중왕국시대 관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을 네디에스(nḏs)라고 부르고, 신왕국시대에는 네메히(nmḥy)로 불렀다. 그러나 이외에도 다양한 계층용어가 있다. 켄티우-쉐(ḫntyw-š)는 왕릉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이며, 메레트(mrt)는 왕실 소유가 아닌 토지에서 일하는 소작인을 가리켰다. 네디에트(nḏt)는 고왕국시대에는 왕실과 신전의 토지와 연관된 사람이며, 신왕국 시대에는 속국에 거주하는 사람, 또는 이누(jnw)라는 세금과 연관된 사람을 의미했다. 요약컨대 이러한 용어들은 신분의 자유로운 상태여부와 그들이 거주하는 토지의 성격, 연관된 세금에 근거하고 있다.94)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고대 이집트 사회계층을 엘리트층과 비엘리트층으로 나누는 것이 유용하다. 그 구분은 대체로 귀족(pʿt)과 평민(rḫyt)과 상응할 것이다. 엘리트 계층은 전인구의 5%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95) 왕은 관리를 임명하고 파면시킬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관리직이 상속되었으며, 그 결과 소수 엘리트의 특권이 계속되고 계급간의 사회변동이 제한되었다. 반면에 엘리트 계층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였다. 안정된 시기에서도 왕권에 의한 관리직의 하향이나 몰락이 있었지만,96) 진정한 사회변동을 가져온 것은 혼란한 중간기들이었다. 엘리트들은 사회적 책임감을 갖도록 양육되었으며, 이집트인들은 공동체적 인식을 가졌다. 무덤에 기록된 전기를 보면 죽은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었고, 벌거벗은 자에게 옷을 주었다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러한 기록의 실제여부보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공동체인식이 이집트 엘리트 계층의 가치관이며 만일 심각한 잘못이 있으면 무엇보다도 자신에 의해 비판받는다는 것이다. 만일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집트 사람들은 사후에 축복된 세계로 들어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97) 상류 엘리트 계층은 일종의 평신도 제사장으로서 신전의 지성소 앞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며 제의 기도문을 암송하는 제사장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하위 엘리트 계층은 국가 신전이 아닌 곳에서 그러한 참여를 할 수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확인한 바로는 아케타텐과 다이르 알-마디나에서 노동자의 마을에 작은 신전들이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노동자 자신들이 직접 봉사했다. 또한 베스나 타웨레트 같은 수호신들은 가정에서 직접 모심으로써 일반 사람들이 신에게 직접적인 접근을 할 수 있어서98), 성서에서 미가가 신전을 만들고 제사장을 임의로 세운 내용과 비교된다.

이집트에서 중간계층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노예들도 재산을 모으고 자유민들과 결혼하며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처음부터, 특히 신왕국시대부터는 다인종 사회를 형성했다. 많은 외국인들이 군대나 전쟁노예 등으로 이집트 사회로 들어왔으며 그 문화에 동화되었다. 이집트 사람과 외국인 모두에게 군대는 상위계층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신왕국시대 이후로는 군장교가 제사장직과 행정직에 임명되었다. 후기시대에는 농부 출신의 시민군대가 상당한 수에 달했으며, 22왕조와 23왕조의 왕들은 리비아 출신의 군장교의 후손들이었다.99)

 

페르시아는 유목민과 농경민으로 크게 구분되고 그 안에서 세분되는 다양한 부족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나타낸다. 다리우스(Darius)는 그의 비문에서 자신을 권세있는 자(tunavant)와 가난한 자(skauthis)의 중재자라고 언급함으로써 두 부류의 사회계층이 있음을 암시한다.100) 헤로도토스는 인사하는 방법을 보면 계급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대등한 경우에는 입을 맞추며, 신분이 약간 낮은 사람인 경우에는 뺨에 입을 맞추며, 신분이 아주 낮은 사람인 경우에는 정중하게 엎드린다. 사회계층의 다양화가 정복전쟁으로 심화되었을 지라도 노예들 가운데는 가난한 페르시아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엘람어인 쿠르타쉬(kurtash)는 일반적으로 노동자를 말하며 국가소유의 토지나 공장에서 일했는데 거의 노예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귀족들 가운데에서도 여러 계층들이 있어서 첫 번째 사람, 가장 명예로운 사람, 가장 가치있는 사람, 가장 존경받는 사람 등의 공식적 용어를 사용하였다.101)

이스라엘 사회계층을 암시하는 말은 비록 지나가는 언급이기는 하지만 성서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런 말들은 단순한 낱말들이기 때문에 소위 후대의 편집자들의 손에 의해 걸러지지 않고 당시 일상생활의 단면을 잘 반영해준다.102) 히브리어 성서에서 사회계층을 암시해주는 용어로는 왕실 관련 용어들과103) 궁중관련용어,104) 군사관련용어,105) 귀족관련용어,106) 전문직업가,107) 종교지도자,108) 상업종사자,109) 각종 기술자,110) 일반노동자,111) 농업종사자,112) 최하층 사람들113)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를 통해볼 때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직업과 사회계층이 무척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종교계층을 볼 때 제사장은 왕정이 있기 전부터 있었으며 그 지위가 세습되었다. 에스겔 44장에 의하면 사독 자손인 제사장들이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는 반면 외국인들이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며, 레위인들과 일반백성들이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성서는 오직 몇몇 제사장 집단의 관점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 쿰란문서에는 다른 관점도 나타나고 있으며 가나안이나 비합법적인 히브리 신전에서는 제사장문서에서 채택되지 않은 관습도 실행되었을 것이다.114)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몫을 위해 최상의 가축을 요구했으며(레 1:2, 신 15:21), 질병에 대해서는 적절한 상태 파악을 위한 의무가 있었으며 포로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치료에 대한 의식도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이스라엘 사회에는 완전한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주민(gērîm)은 기아나 전쟁으로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며, 이스라엘 사람으로 동화되는 과정에 있었다.115) 그들은 땅을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여러 종교의식과 축제에 참여하는 권리를 가졌다(신 16:11, 14; 출 12:48). 그들은 많은 경우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법에 의해 다스려졌으며(출 20:10; 레 16:29), 고아와 과부와 같이 돌봄의 대상이 되었다(신25:19). 거류인(tôšābîm)은 이주민보다 사회에 덜 동화된 사람들로 종교의식 참여에 있어서도 더 제한을 받았다(출 12:45). 외국인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태도는 역사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준다.116) 그밖에 상인들은 거대한 부의 원천으로 보였으며 종종 왕의 대리인이었다(사 23:8; 호 12:7-8). 율법에는 종종 권력층과 연결된 상인들로부터 거래 과정과 계량 등에 있어서 소비자를 보호하는 조항이 나타나 있다(레 19:36).

 

2. 노예

노예들은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는 그레코로만 시대보다 숫자나 경제적 중요성에서 훨씬 덜했다. 남녀노예들은 본래 외국인들로 아마도 전쟁의 노획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삭발, 문신, 낙인 등으로 자유민과 구별되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귀족가문의 가사일에 사용되었지만 기술을 가진 노예들은 주인들을 위해 장인으로 일하거나 고용되어 이익을 주었다. 노예들이 해방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여자 노예가 낳은 자녀를 입양하여 자유를 주기도 했다. 어떤 노예들은 사원에 바쳐져서 헌납자를 위해 봉사도 하고 사원토지의 노동력으로 일하였다. 외국인이 아닌 수많은 노예들은 빚으로 인해 팔린 자국민들이었다. 신바벨론 제국시대에 채무자들은 감화원으로 보내져서 빚 대신에 노동을 해야 했다.117)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는 빚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법에 의해 정해진 이자에 대한 짐을 제거해준다든지118), 빚 노예가 된 사람을 3년 동안 일시키고 4년째 방면해야 된다는 등의 구제책을 찾을 수 있다.119) 신바벨론시대와 페르시아 시대에는 사원이나 왕궁의 토지에서 일하는 종속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두 부류로 구분되는데 한 부류는 농부(ikarū)로서 감독을 받고 토지세를 지불하며 병역에는 무관하였으며, 다른 부류는 슈샤누(šušānu)로서 말과 군수송에 연관되었다.120)

 

대부분의 이집트 사람들은 자유롭든지 아니든지 간에 경작자였다. 노예는 고왕국시대에는 없었고, 중왕국시대에는 드물었으며, 신왕국 시대에는 제국주의로 인해 많은 전쟁포로들이 노예가 되었다. 이 노예들은 왕의 처분대로 왕의 소유지를 경작하거나 신전에 바쳐지거나 전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상급으로 주어졌다.121)

히타이트에서 노예는 주인의 소유로 사고 팔 수 있었다122) 노예가 자유인과 결혼할 수 있지만, 그 자녀들의 일부는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자유인이 노예와 결혼하면 결혼기간 동안에는 노예가 되었지만, 상황에 따라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만일 신랑(신부)값(Kušata)이 지불되지 않았다면 의무 고용 계약 기간이 3년이었다. 재산이 있는 노예가 그의 자녀의 결혼을 위해 신랑(신부)값을 지불하면 자유로운 상대방의 부모는 결코 그의 자녀를 노예 신분에서 다시 해방시킬 수 없었다. 히타이트에서도 다른 고대 근동지역처럼 빚을 청산하는 기간 동안 노예가 되는 일이 있었다. 후리어와 히타이트어로 된 문서에는 경건하고 의로운 왕에게 채무노예의 주기적인 해방을 명하고 있어서 성서의 희년제도와 유사성이 주목된다.123)

 

이스라엘에는 자유 시민과 노예들, 그리고 거주 외국인을 포함하는 중간계층을 가졌다. 시민들은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일반 이스라엘 사람으로 구분되었다. 그러한 구분과 서열은 역사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에 의해 좌우되었다.124) 이스라엘에서 노예는 가장 엄격한 의미로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나, 히브리어를 포함해서 서부 셈어에서 노예(‘bd)로 사용되는 단어는 다양한 봉사를 하는 계층을 망라하여 관료로부터 실제 노예에 이르는 폭넓은 용어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노예는 히브리인과 비히브리인으로 구별된다. 비히브리인 노예는 빚으로 팔렸거나 전쟁포로로 잡혀온 자들이다(레 25:44-45; 민 31:18). 그들은 영구적인 재산으로 여겨졌지만 여자노예를 아내로 취했다가 이혼할 경우에는 자유를 주어야 했다(신 21:10-14). 히브리인 노예들은 보통 빚으로 팔렸기 때문에 진짜 노예라기보다는 고용된 종에 가깝다(레 25:39). 그래서 6년을 봉사한 후 안식년에 해방되거나 희년에는 빚과 함께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노예계층의 형성은 사회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노예해방과 토지환원 등을 촉구하는 희년제도의 변화와 연관된다. 마리 문서에 의하면 시리아에서 왕은 강제적으로 모든 거래를 환원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125) 메소포타미아에서 빚의 면제나 노예해방에 사용된 안두라루(anduraru) 또는 두라루(duraru)가 함무라비 법전이나 누지문서에서 발견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126) 아카드어인 이 단어들은 히브리어에서 자유를 뜻하는 드로르(deror, 레 25:10)와 연관되고 있어서 희년법의 고대성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그들 문서들과 헷족속의 법률, 우가리트 문서 등에서 토지는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희년법의 제정 당시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레위기 25장의 내용을 볼 때 희년제도가 가나안 정착 후 어느 정도의 농사 경험이 축적되고 토지 분배 이후의 빈부의 차이가 형성된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127) 성벽 있는 성 안의 가옥을 1년 이내가 아니면 무를 수 없다거나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대한 규정은 이스라엘 사회가 상당히 사유재산 제도가 발달하고 외국자본이 들어와 외국인들의 기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용되는 시대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국시대인 철기Ⅱ기에 이르면, 특히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에 이집트와 두로를 비롯한 다양한 국가와의 무역을 실시함으로써 외국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었다.128)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엄청난 내적 변화를 겪고 외국 영향으로 인한 도시문화의 발전과 부유층의 성장으로 빈부의 계층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한 사회상태에서 성벽 있는 도시의 가옥문제와 빚으로 인한 노예, 외국인에게 팔려간 이스라엘 사람 등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것이다. 그후 이스라엘 사회의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져서 이스라엘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왕상 21:1-20)이나 이사야의 대지주의 탐욕에 대한 재앙선포(사 5:8), 미가의 심판예언(미 2:2) 등이 이스라엘에서 기원전 9-8세기에 토지의 매매와 사유화가 촉진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시대의 희년정신의 구현은 이미 토지의 원상회복의 문제보다 금전적인 회복과 도움이 더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로 변화되어가는 상태라고 하겠다. 요컨대 희년제도는 처음의 토지의 원상복귀에서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의 차원으로 복잡하게 발전해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노예해방은 적절히 시행되지 못해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으며(느 5:5),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들이 위반하기도 하였다(렘 34:11).

 

 

Ⅵ. 나가는 말

 

고대근동 세계 속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사회제도는 다른 나라들과 많은 유사성 가운데 독특성을 보여준다. 그러한 독특성은 민족의식의 자각에서 비롯되며, 특히 성서에 나타난 자료의 경우 종교적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에서 본 문화적 독특성도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반대로 문화적 유사성이 종교적 독특성을 부정하는 방편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로 여기에서 어떤 총체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인데, 그것은 앞으로 자료가 증가할수록 구체적으로 지어져갈 틀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서의 내용과 병행되는 고대근동의 사회제도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짖고자 한다.

 

고대근동의 종교생활은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신전은 도시나 국가,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는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영향 아래 사람들을 통합시키고 통치하려는 방책이었다. 그러한 종교정책은 크게는 수도급 도시에서 수행되는 국가제의와 작게는 지방도시의 제의에서 수행되었으며, 보다 직접적인 신의 혜택이나 조상의 은덕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종교의식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종교정책의 정치적 목적이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고대 근동국가들과 유사하게 시행되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성은 결코 다신교가 아니었으며, 조상제의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고고학적으로는 철기시대 이스라엘에서 다양한 우상들과 다신교적 제의형태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 성서적 증거와 차이가 있다. 이집트에서 제사장을 가족 가운데 일원으로 세우는 것은 이스라엘 사사시대

미가의 경우와 유사하며(삿 17:5), 평민을 제사장으로 만드는 것도 여로보암시대와 병행된다(왕상 12:31).

 

고대 근동세계에서 왕은 백성들에 대한 통치권위를 신적기원에 두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왕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세워지며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양자라는 개념과 다윗언약에 의한 합법성 등이 독특하고 발전된 왕의 제도가 되었다. 국가화의 특징이 혈연관계보다 공식적인 관계가 중시되는 것이지만, 히타이트의 왕실 가족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사울 친척이나 솔로몬의 사위들이 12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그의 사위들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왕상 4:7-9). 이스라엘에서 왕비의 역할이 부각된 시대는 아합의 통치시기였다. 왕비 이세벨은 왕궁터를 넓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아합의 어인을 찍은 편지를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내 나봇을 참살하고 포도원을 빼앗았다(왕상 21:1-16). 이세벨이 어인을 사용한 것은 왕비의 공식적 권한 행사의 가능성도 보여주는데, 우가리트에서 왕비는 농경제의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보다 확실하게 태후는 왕의 어머니로서 공식적인 권력의 자리였으며 왕에게 나가는 통로역할을 하였다. 히타이트나 시돈의 경우 태후는 여신의 대사제로서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아사왕이 폐위시킨 태후 마아가도 아세라에 대한 제의를 관할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가장이 집을 다스리고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인 것이며 가장의 책임에 대해 온 가족이 책임을 지는 것도 유사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빚을 가족으로 대신 갚는 것과 엘리사의 생도의 자녀가 노예로 팔릴 위험에 처한 것과 병행되며(왕하4:1), 아간의 범죄로 인해 가족이 아골 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이집트에서 도망간 범죄자를 잡기 위해 가족을 구금하는 행위와 같은 연좌제법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에서 가족의 유대관계는 견고한 것이어서 관직이 상속되는 혜택도 있었지만 반역죄의 경우 온 가족이 처형되었다. 하만이 에스더 왕비를 범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후 전 가족이 형벌을 받았다(에 7:10; 9:14).

 

다윗이 아브넬의 화친제의에 사울의 딸 미갈을 요구한 것은 그가 사울의 가문의 합법적인 사위인 것을 대의에 천명함으로써 정치적 유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129) 다윗이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미갈을 다시 요구한 것은 율법(신24:1-4)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고대 근동의 경우에 비추어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행동이었을 것이다(물론 본율법 조항의 연대문제도 고려할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남편이 생사불명인 경우 부인이 재혼할 수 있으나 남편이 정당한 사유로 돌아오면 새 남편을 떠나 전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합법적이었다.130)

 

결혼관습을 보면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나 히타이트와 유사하고, 이집트와는 특히 근친결혼에 있어서 거리가 멀다. 페르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이집트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이스라엘에서 여자들의 법적 권리는 다른 고대 근동국가들보다 더 제한적이어서 이혼을 요구할 수도 없었으며 사회활동도 매우 빈약하였다. 일부 여성들의 경제적 종교적 활동들은 예외적인 것인지 보편적인 활동의 두드러진 경우가 성서에 기록된 것인지 자료의 증가를 더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딸들이 상속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민 27:1-11; 36:1-4).

이스라엘에서 사회계층은 직업에 의한 구분일 뿐 이집트의 경우 두드러진 신분적 차별은 아니었다. 다만 본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주민과 거류민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외국인 노예도 있었다. 그러한 사회계층의 구분을 이스라엘과 메소포타미아 사회가 유사하다. 노예는 전쟁포로가 중심이 되고 자국민이 노예가 되는 것은 빚으로 팔려가는 경우인 것은 이스라엘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히타이트가 유사하며, 그 빚으로 된 노예를 일정기간 후 방면하는 제도도 연관되고 있다.

페르시아의 사회제도가 이스라엘 귀환공동체와 어떤 유사성이나 마찰을 보여주는 예는 드물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어 엎드려 절하기를 거절한 것이 확연한 신분의 차이를 거부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종교적 이유로 경배에 대한 요구를 거부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에 3:1-5).

[출처]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 사회제도 비교 - 한상인교수   kaikk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법규 비교

 

(1) 가족 제도에 관한 제반 규정
고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했던 공동체는 바로 가족 또는 씨족이었다. 초기의 법규들에서는 사실 왕이나 관료 또는 재판관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반면에 "가장"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나고 "가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 결혼에 관한 법규
함무라비 법전과 비교해 볼 때, 결혼에 관한 규정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없다. 다만 성서에 나오는 여러 스토리들 가운데서 간접적으로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계약 법전을 통해서 우리는 납폐금의 제도가 있었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출 22:16-17). 이 납폐금은 남편될 사람이 장인 될 사람에게 지불해야 했던 돈이다.

또한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결혼에 있어서 여자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야 했으며, 그 결정에 거부할 권한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대 바빌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후기의 유대 법은 18살 이하가 된 여자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 없으며, 결혼은 어떤 경우에도 여자의 동의가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스라엘에서는 "수혼제"(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라는 결혼 제도가 있었음을 신명기 법전과 룻과 보아스의 결혼 이야기와 같은 여러 스토리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창 38:8, 14). 실제로 이런 관습이 고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대를 있는데 있었다.

 

한편,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바빌론에서는 반드시 결혼 계약 문서를 작성하여야 했다(제 128조). 결혼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이 문서 없이는 법적으로 아내의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계약 문서는 남자가 여자를 임의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작성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라에서는 이런 규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 법전은 결혼시 여자는 지참금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으며, 남편은 장인에게 "선물"을 주도록 하였다. 이 선물은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나, "몸값"이라는 개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참금은 어떤 경우에도 아내의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참금이나 선물 제도는 고대 이스라엘의 법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24:59-61은 이런 제도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 이혼에 관한 법규

고대 사회에서 남자는 별반 어려움 없이도 그의 아내와 이혼할 수가 있었다. 이혼의 경우에 있어서 주도권은 항상 남자에게 주어져 있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수치스러운 일"을 했을 경우, 이혼 증서만 써 주면, 이혼할 수가 있었다(신 24:1-4).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여자에게도 그녀의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재 142-143조). 이러한 예는 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율법서에서는 남편이 아내와 이혼할 수 없는 몇몇 경우들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신 22:13-19, 28f).

함무라비 법전은 여자 편의 잘못으로 이혼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위자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여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여자는 이혼 당할 때, 지참금은 물론 자녀의 양육비와 자신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경비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제 137-139조). 그러나 이스라엘 법규에서는 이러한 위자료 지불 규정을 볼 수 없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아내가 심각한 질병을 잃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이혼의 사유로는 단 한가지 여자가 "수치스런 일"을 행했을 경우만을 제시하고 있다.

 

<3> 간음에 관한 법규

고대 사회에 있어서 간음은 기본적으로 혈연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의 유지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간음죄에 대해서는 고대 근동이나 이스라엘 모두 중벌을 내렸다. 간음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고대 근동이나 이스라엘은 모두 여자에 의한 간음을 문제시하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간음한 여인은 물에 던져 죽게 하였다(제 129조). 여자가 간음죄로 기소를 당했을 때에는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거나 시죄법을 통과해야 했다(제 131, 132조). 약혼한 여인을 범한 경우에는 남자에게도 사형이 주어졌다(제 130조). 그러나 성서에서는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범한 남자는 그녀와 결혼을 해야 하며, 그녀의 아버지에게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출 22:16-17). 신명기 법전에서는 성 안에서 약혼한 여자와 다른 남자가 성 관계를 가졌을 경우에, 들 다 사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성 밖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남자만 죽이도록 하였다(신 22:23-27).

 

<4> 상속 및 양자에 관한 규정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상속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이 법전은 특별한 경우들에 대한 상속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고 있다(제 168-172조). 그러나 대체적으로 남자에게만 같은 분량으로 상속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남편이 죽은 경우, 부인에게도 상속권이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법규에는 상속에 관한 규정이 거의 없다. 이는 대체적으로 관습에 의하여 상속권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같다. 율법서에서는 장자 상속법에 대한 규정만이 나타난다(신 21:15-17). 그러나 후대에는 여자에게도 상속권이 허락되었다(민 27:1-11).

함무라비 법전(제 185-193조) 과는 달리 성서에서는 양자 제도나 양자에 관한 규정이 전혀 없다. 양자 입양 제도는 종족 보존을 위한 것이었음으로, 이스라엘에도 이런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혼제로 인해서 양자 제도가 성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러한 양자 제도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여러 문서들에서 발견된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양자보다도 양자를 들인 사람의 권리 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특별한 이유없이 부모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금하고 있다(제 192, 193조).

 

(2) 종에 관한 규정

고대 사회에 있어서 종 제도는 경제,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종의 제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가장 오래된 바빌론의 토판들에서도 종들의 매매에 관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 있어서 종의 제도는 로마나 그리스, 또는 금세기의 흑인 노예 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종들은 처음에는 전쟁 포로로 이루어졌으나, 나중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즉 빚을 갚지 못해 종이되는 경우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종들은 대부분이 후자의 경우들이다. 이러한 종 제도에 대해서 함무라비 법전은 21개 조항에 걸쳐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나, 계약 법전에서는 14개 조항에 걸쳐서 규정하고 있다.

 

<1> 종의 권리

계약 법전에서는 주인이 종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때 종이 즉사하면 주인은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즉사하지 않은 경우에는 주인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었다(출 21:20-21, 26-27). 이와는 모순되게 신체를 상해한 경우에는 그 종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종은 대체적으로 다른 세계의 종들보다 훨씬 보호를 많이 받았다. 종을 주인의 재산으로 여긴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출 21:21), 그러나 상품처럼 취급하지는 않았다. 성서는 종의 권리 보호에 초점을 모으고 있으며, 그들을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출 21:9).

그러나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주인은 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심지어는 주인은 종을 죽일 수도 있었다. 이 법전에서는 주인이 종을 상해하거나 죽인 경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것은 주인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종이 상해를 입거나 죽게 된 경우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때 주인은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종에 대한 상해는 재산에 대한 손실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법전에서는 종의 권리 보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주인의 권리 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다.

 

<2> 종의 방면

성서는 종을 6년 이상 부리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모든 종은 안식년이나 희년이 되면 풀어 주어야 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만이 이런 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모든 종은 3년동안 일을 시킨 다음 놓아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언뜻 보면, 함무라비 법전이 성서보다 더 종들에 대해 관대한 것처럼 조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6년간 일을 하게 한 반면, 바빌론에서는 3년간만 일을 시키도록 한 것은, 바빌론 사회가 그만큼 경제가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들은 기본적으로 노동력 제공들 통해 빚을 갚는 사람들이었다. 바빌론 사회는 경제가 발전하였음으로, 노동 임금이 높았기에, 3년이면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기에 6년 동안 일을 시키도록 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전쟁의 포로로 끌려와 종이 된 사람들은 방면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여종의 경우는 풀어 주지 않았는데, 이는 대부분 여종들은 주인이나 그 가족의 일원과 결혼하여, 그 가족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들에게는 법적인 보호가 어느 정도 주어졌다. 이는 바빌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함무라비 법전 제 119, 137, 144-146, 170-171조). 따라서 이런 규정은 여종들에 대한 사려 깊은 규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종을 내보낼 때에는 그들이 다시는 종으로 팔려 가지 않도록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주어서 내보내야 된다고 율법은 규정하고 있다9신 15:12-18). 이러한 규정은 다른 데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도망친 종에 관한 규정>

도망친 종들에 대한 문제는 고대 근동의 모든 법전들에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Ur-Nammu 법전 제 15조; Lipit-Ishtar 법전 제 12-13조; Eshnunna 법전 제 49조 이하). 도망친 종들은 단지 주인의 재산에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 질서의 균형을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중대 범죄로 취급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도망친 종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게 하였으며, 도망친 종들을 고발한 자에게는 상급을 주도록 규정하였다(제 17조). 그리고 잡힌 종은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런 혹독한 규정은 성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성서에서는 도망 온 종들을 오히려 잘 보호해 줄 것을 <기타 규정>

종의 매매에 관한 규정이 함무라비 법전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여기에서는 종을 사려고 하는 자는 건강한 종을 살 권리가 있으며(제 278조), 또한 파는 사람이 그 종의 주인임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 279조). 또한 종이 주인에게 대들 때에는 죽일 수 있도록 하였다(제 282조).

그러나 히브리 법규는 종의 매매에 관해서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종이라도 도로 팔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아내로 삼으려고 산 여종이나 포로로 끌려와 주인의 아내가 된 여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출 21:7-11; 신 21:14).

 

이러한 여러 가지 측면들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의 종의 제도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의 종들은 다른 나라의 종들보다 훨씬 인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결코 상품이나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고대 근동의 법규들은 종의 주인의 보호에 관심을 갖고 있으나, 성서에서는 근본적으로 종의 권리 보호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다른 이웃 민족들처럼 종의 제도가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고대 사회에 있어서, 특별히 이스라엘에 있어서 종은 "노예" 개념이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서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팔려 간 "품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상해법

가장 오래된 법전들인 우르 남무 법전이나 에쉬눈나 법전에서는 상해의 경우에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르 남무 법전에서는 손과 발, 코, 이 등에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돈으로 배상하도록 하였다(제 15-19조). 에쉬눈나 법전도 마찬가지이다(제 42-47조). 특별히 이 법전에서는 동물에 의한 상해를 다루고 있다(제 53-57조).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동태복수법을 적용하고 있다. 즉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 율법(계약 법전)에서도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의 원칙이 나오고 있으나, 이것은 성서 고유의 형벌 원칙이 아니었다. 이와 똑같은 원칙이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이 원칙을 여러 경우에 적용하고 있으나(제 116, 196, 197, 200, 210, 229-231, 235, 263, 267조), 성서에서는 실제로 이 원칙이 적용된 예가 한번도 나와 있지 않다. 이 동태복수법은 계약 법전에 단 한번 나오고 있는데, 그것이 전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동태복수법을 성서의 기본적인 형벌 원칙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상해의 경우, 성서에서는 돈으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원칙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한편 함무라비 법전은 상해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형벌이 다르게 주어졌다. 동태복수법이 적용되는 경우는 아웰룸(awelum) 계층과 아웰룸 계층 사이에만 적용되었다. 무스케눔(muskenum) 계층과 무스케눔 계층 사이에서 일어난 상해에 대해서는 벌금으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종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는 동태복수법보다 더 중한 형벌을 가했다. 특별히 이 법전은 임신한 여자에게 상해를 입혀 유산하게 된 경우에 대해서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는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출 21:22 이하). 함무라비 법전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에는 배상으로 처리했던 문제들에 대해 동태복수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해(치사)의 경우에 있어서, 함무라비 법전이나 성서는 모두 그 상해가 의도적인 것이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다르게 형벌을 부과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의도적인 살인이 아닌 경우,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게 하였으며,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벌금형을 내리고 있다. 짐승에 의한 상해 (치사)를 입은 경우들에 대해서는 에쉬눈나 법전과 함무라비 법전, 성서 모두가 다루고 있다(에쉬눈나 법전 제 54-57조; 함무라비 법전 제 250-252 조; 출 21:28-32). 이 세 법전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모두가 다 황소에 의해 다치거나 죽게 된 경우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에쉬눈나 법전은 개에 의한 상해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그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짐승이 위험한 짐승이라는 것을 주인이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형벌이 다르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이 법전들은 모두가 다 그 짐승이 위험하다는 것을 주인이 모른 경우에는, 주인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4) 재산권 보호에 관한 규정

성서의 법규들은 재산권 보호에 대하여 비교적 별 언급이 없다. 반면에 함무라비 법전의 경우에는 사정은 전혀 다르다. 재산권 보호는 함무라비 법전의 가장 큰 관심사이며, 또한 이 법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빌론이 정착 사회였으며, 경제가 상당히 발달한 곳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성서(계약 법전)에서는 비교적 반 유목민적 농경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만을 언급하고 있다: 물건을 도둑질한 경하겠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단순 사회였기에 재산권에 대한 규정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우, 이웃 농경지에 피해를 입힌 경우, 물건이나 짐승을 위탁한 경우, 빌려 온 짐승에게 해를 입힌 경우.


<1> 물건을 도둑질한 경우

가축을 도둑질한 경우, 도둑은 4, 5배의 배상을 해야 했으며, 도둑이 그것을 이미 다 처리한 경우에는 더 중한 배상을 해야 했다. 배상을 하지 못하면 종으로 팔려 가야 했다(출 22:3). 함무라비 , 이웃의 농경지에 피법전에서는 성전에 속한

<2> 이웃 농경지에 피해를 입힌 경우

성서나 함무라비 법전 모두해를 입힌 경우에는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 22:5-6; 함무라비 법전 제 57조).

 

<3> 재산을 보관하도록 위탁한 경우에 관한 규정

에쉬눈나 법전과 함무라비 법전, 그리고 성서 모두가 다 이러한 경우들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에쉬눈나 법전 제 36-37조; 함무라비 법전 제 120-126조; 출 22:7-13). 함무라비 법전은 이웃의 곡식을 맡아 보관하였다가 손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2배로 변상하도록 하고 있다. 도둑 맞았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서는 맡은 물건을 도둑 당한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맹세하기만 하면 변상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있다. 에쉬눈나 법전에서도 도둑 당한 경우에는 변상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였다.

한편 성서는 맡아 보관하던 가축이 야생 동물에 의해 피해를 당한 경우에도 변상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도둑 맞은 경우에는 변상해야 했다. 함무라비 법전은 자연 재해로 인해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신 앞에서 맹세를 하게 되면, 보상 책임이 면해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제 266조).

 

<4> 빌려 온 가축에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자연 재해로 인해 빌려 온 가축에 해를 입힌 경우에는 보상의 의무가 면제되었다(제 249조).

이상에서 우리는 가축에 대한 특별 보호 규정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가축이 농경 사회에서 중요한 재산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가축에 상해를 입힌 경우, 고대 사회에서는 비슷하게 처리하였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비슷한 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법규 비교 연구

 

1.고대 근동의 법전

 

지리적으로 고대 근동이라고 할 때에는 이집트로부터 시작하여 팔레스틴-시리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까지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말한다. 이러한 고대 근동의 세계에서는 일찍부터 문명이 꽃피어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던 곳이다. 바로 이곳이 세계 최초의 4대 문명 가운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꽃피었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법 문화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1) 우르 남무 법전

 

지금까지 발굴된 세계 최고(最古)의 성문화된 법전은 우르 남무(Ur-Nammu)법전으로서, B. C. 2050년 수메르 왕 우르 남무가 반포한 것이다. 이 법전은 설형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발굴되어진 이 법전의 대부분은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런 대로 복원되어 해독이 가능한 법규들은 20여개에 달한다. 이 법규들은 성에 대한 문제, 결혼, 신체 상해, 노예, 소송 및 증인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법전에서 과부와 고아 등의 약자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우르 남무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고아를 부자에게 넘겨주지 않았으며, 과부를 강자에게 넘겨주지 않았으며, 한 세겔에 해당하는 사람을 한 미나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이러한 약자들에 대한 관심은 성서의 율법에서도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한편 이 법규들은 모두가 다 조건절과 결과절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려면(조건절), 그는 일 므나를 지불해야 한다(결과절)"(제 6조). 이 법전에 이어 나타나는 모든 법전들도 하나같이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굴된 법규들은 한결같이 배상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으면, 그는 은 10 세겔을 배상해야 한다"(제 15조). 그러나 뒤이어 나타난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동태복수법("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놀랄 만한 것이다. 배상의 원칙이 동태복수법의 원칙보다 더 오래된 인류의 법칙임을 이 법전은 보여주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법규에서도 "눈에는 눈으로"의 법칙이 나오고 있긴 하나, 대부분 동태복수법을 따르지 않고 배상의 법칙을 따랐다.

 

 

(2) 에쉬눈나(Eshnunna) 법전

 

194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에쉬눈나에서 발굴되어 이라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법전은, B. C. 1920년 경에 아카드어로 기록되어진 것으로서, 아모리 왕 빌라라마(Bilalama) 시대의 것이다. 이 법전은 서문과 발문이 없으며, 60여개의 조문들이 나열되어 있다. 세율, 운임, 가족 문제, 성 문제, 노에, 동물에 의한 상해나 인간에 의한 상해 등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법전은 처음부터 대부를 받거나 이자 계산에 대한 조문들이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법전이 경제 문제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보게 된다. 이 법전에서도 배상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또한 중요한 문제는 왕이 판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 법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3) 리피트 이쉬타르(Lipit-Ishtar) 법전

 

수메르-아카드 왕조의 리피트 이쉬타르가 B. C. 1860년 경에 반포한 것으로서, 서문과 법규, 그리고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과 발문에서는 리피트 이쉬타르가 "정의와 복지"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38개에 이르는 법조항들은 배의 임대, 과수원, 노예, 세금, 결혼, 빌어 온 황소들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 법이 다루고 있는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법전은 이 법규들을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할 것이고, 어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끝을 맺고 있다.

 

(4) 함무라비(Hammurabi) 법전

 

프랑스 발굴단에 의해 1901-2년에 수사(Susa)에서 발굴되어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세계에 있어서 법전의 집대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함무라비는 세계 최초의 법률 수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법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뽑히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법전이 지금까지 발굴된 법전 중 가장 체계를 잘 갖추고 있으며, 그 범위가 광대하기 까닭이다.

 

함무라비의 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B. C. 1728-1686년에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에는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과 비등비등한 힘을 갖고 있었으나, 즉위 31년, 그는 명실상부한 메소포타미아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수많은 도시 국가들이 함무라비의 통치 아래 귀속되었다. 옛날에는 수메르라 불렸던 이 나라는 이제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법전이 기록된 비문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인 샤마쉬로부터 이 법전을 수여 받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법전은 서문과 발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서문에서 함무라비는 "나라의 정의를 구현하고 강자가 약자를 학대하지 않도록 하고, 비뚤어진 자를 멸하기 위해" 이 법을 제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발문에서 다시 한번 이러한 목적이 강조되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과부와 고아를 정의로 다스리기 위해서, 나는 나의 비문에 이전의 말들을 기록했다."

 

이 법전 속에 있는 282개 조에 달하는 법규들은 부분적으로 훼손된 것 외에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법 조항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총칙(1-5조)- 심판, 시죄법, 위증

 

(2) 도둑죄(6-25조)-절도, 유괴, 강도, 화재터 도둑

 

(3) 군인, 관리의 의무(26-41조)

 

(4) 농업법(42-66조)

 

(5) 상업법(92-120조)-대부, 이자, 행상인, 소매 상인, 의탁품, 차입, 부채, 공탁과 분실

 

(6) 가족법(127-193조)-가족, 결혼, 이혼, 첩의 지위, 처의 재산, 여승의 결혼, 지참금, 재산분배, 상속, 노예와 자유인의 결혼및 재산의 분배, 양자

 

(7) 상해와 상해 치사

 

(8) 직업법-의사, 수의사, 이발사, 건축가, 조선업자, 가축의 대차와 보상, 노동자, 선박과 수레의 임대, 기타 노예에 관한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