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탑과 공중 정원
오리엔트의 통일(기원전 600년경)
요약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지배하던 신바빌로니아가 강대해지고 웅장한 신전과 궁전 등이 지어졌다. 바벨 탑과 공중 정원 등이 생겨 수도 바빌론이 구바빌로니아 시대보다 번영했다. 이후 오리엔트가 통일되어 오리엔트 전체가 하나의 국가 및 문화권으로 묶여 역사적 세계로서의 오리엔트가 성립되었다.
대홍수로 멸망한 인류는 야훼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민족신 야훼는 노아의 홍수 이후 다시는 물로 대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사람들은 야훼를 불신하고 그 상징으로 바벨탑을 세운 것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야훼는 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혼동시켜 멀리 흩어지게 함으로써 탑 건축을 중단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 지명을 바벨(Babel), 또는 바빌론(Babylon)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각 민족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 현상의 유래담(由來談)이 근간이 되어 합성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바벨탑
[바벨탑 건설] 1174년경
아시리아, 오리엔트 세계를 정복하다
혼란하던 오리엔트 세계는 메소포타미아의 일대 세력이었던 아시리아에 의해 비로소 통일되었다. 아시리아인은 셈 족의 일파로서 원래 통상 민족이었으나, 기마와 전차를 보유한 군국으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8세기 말에는 오리엔트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 제국이라 일컬을 만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수도 니네베는 그 웅장함과 번영을 자랑하였다.
아시리아인에게 정복당한 백성은 약탈과 모진 학대를 당하였다. 아시리아 궁전 벽에는 포로의 손발을 자르는 장면, 살아 있는 사람의 껍질을 벗기는 장면, 눈을 빼는 장면 등이 새겨져 있다. 정복당한 민족은 끊임없이 반항하였다. 마침내 기원전 612년, 니네베는 이란 고원에서 일어난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영화를 자랑하던 세계 제국도 멸망하고 말았다.
바벨 탑과 공중 정원, 바빌론의 번영을 증명하다
아시리아 멸망 후 오리엔트 세계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외에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리디아, 그리고 다시금 독립한 이집트를 합쳐 4국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중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지배하던 신바빌로니아가 가장 강대해졌다.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더욱 번영했고, 웅장한 신전과 궁전 등이 하늘 높이 솟았다. 특히 바벨 탑과 공중 정원이 유명하였다.
바벨탑신화 속의 바벨탑.
지구라트우르의 지구라트.
'바벨 탑' 이야기는 구약성서 창세기 제11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바벨 탑은 바빌론 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지구라트(신을 제사하는 성탑)와 관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공중 정원은 건조한 바빌론에 인조 공원을 만든 것이다. 벽돌로 벽을 쌓고 안을 흙으로 메워 여러 층의 정원을 만들고, 층마다 온갖 나무와 꽃을 심어 짐승과 새들이 살게 하였다. 필요한 물은 노예로 하여금 유프라테스 강에서 운반하게 하였다.
공중정원의 유적
공중정원바빌론의 공중정원.
바빌론의 공중정원
바빌론의 네브가드네사르 2세(재위 B.C.605~B.C.562)궁정에 부속된 유적이다. 왕이 메디아 출신인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산을 모방한 일종의 옥상정원으로 가까이에서 샘이 나와 정원에 물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다.
신바빌로니아에서는 또한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운명과 세상의 앞일을 미리 점치던 점성술이 발달하였다. 점성술 그 자체는 미신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천체에 대한 관찰은 과학적으로 천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강대국이 된 페르시아의 아래서 유대교가 탄생하다
그 무렵 메디아와 마찬가지로 이란인의 나라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밑에서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란 고원의 남서부에 옮겨와 살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중엽에 키로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페르시아는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키로스 왕은 메디아에서 독립한 후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인도 경계까지 진출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키로스 왕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재위 전 529~522) 때 이집트도 정복하여 오리엔트 전체를 하나로 묶었다. 그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재위 전 521~486)는 중앙 집권화에 힘써서 제국을 20개의 속주로 나누고, 각 주에 사트랍(장관)을 두어 세금을 거두는 일과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는 장군이 주둔하게 하여, 중요한 직책을 한 사람이 담당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따로 감독관을 두어 장관과 장군의 직무 수행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 외에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특별 감독관이 왕명을 받고 각 지방에 파견되어 사트랍을 감찰하였다. 수사와 사르디스를 잇는 '왕의 길'도 건설되었고, 간선도로에는 역전제(驛傳制)가 설치되었다.
바빌론 포로(유수)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이스라엘인의 '바빌론 포로(전 586~538)'에서의 귀환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고국에 귀환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야훼 신을 경배하는 민족적인 종교로 형성된 것이 유대교로서, 그때부터 그들은 '유대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고도의 문명이 형성되고 조로아스터교가 발전하다
조로아스터교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
페르시아 제국은 페니키아인과 아람인 등의 무역 활동을 보호했고, 그 결과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왕실에는 막대한 부가 쌓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이와 같은 개방 정책은 각 민족의 진보된 문화를 총합하여 고도의 문명을 형성했고, 아름다운 건축과 공예품이 창조되었다.
또한 조로아스터 교가 국민적인 종교로 발전하였다. 조로아스터 교는 기원전 7세기경에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아리아인의 신앙에 기초하여 창시한 종교이다. 그 경전인 《아베스타》에 따르면, 유일한 최고의 선한 신은 아후라마즈다(Ahura=신, Mazda=지혜)라는 이름의 광명의 신으로, 그 신은 암흑의 영 아리만과 대립관계에 있다.
이 세상은 이 두 신의 대결의 장으로서, 그 대결은 결국 선한 신 아후라마즈다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선한 신에게 속했던 사람들은 천국에 이르게 된다. 그 교훈은 유대교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불을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에 달리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한다.
페르시아 제국에 의한 오리엔트 통일이 이루어지다
페르시아 제국은 동으로는 인더스 강에서 서로는 에게 해 북쪽 해안, 남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다리우스 1세 이후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전 550~330)는 2세기 동안에 걸쳐 오리엔트 전역을 지배하였다.
나크 시 루스탐의 마애 왕묘.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 외 몇몇 왕들의 묘를 단애를 깎아 만들었다. 페르세폴리스 부근.
페르시아 제국에 의한 통일은 오리엔트 전체를 하나의 국가 및 문화권으로 묶어 놓았고, 이로써 하나의 역사적 세계로서의 오리엔트가 성립되었다. 또한 오리엔트의 통일은 당연히 주변 세계의 동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페르시아가 대통일 이후에 맞게 된 것은 서방 세계로의 진출이었다. 그 세력이 에게 해를 건너려 할 때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하는 그리스 세계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스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초강대국 페르시아에 맞서게 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벨 탑과 공중 정원 - 오리엔트의 통일(기원전 600년경)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 8. 13., 김희보)
5000년 전의 도시 계획
인도 문명의 형성(기원전 3000년경)
요약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인더스 문명은 파키스탄 구릉지대에서 발생한 농경문화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해 남쪽 동쪽으로 널리 퍼진 문명이다. 인더스 문명의 존재는 1922년 두 유적지 발굴로 명백해졌다.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퍼지다
파키스탄의 서부 구릉지대에서 발생한 농경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은 캔베이 만 연안, 동쪽은 델리 근방까지 널리 퍼졌다. 이 문명은 인도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서 '인더스 문명'이라 한다. 특히 상류 유역의 하라파 유적과 하류 유역의 모헨조다로 유적으로 대표되는 도시 문명이 특징적이다.
죽음의 언덕 모헨조다로의 대욕장을 만나다
모헨조다로인더스 문명의 특징을 보여 주는 모헨조다로 유적.
'죽음의 언덕'이라는 뜻의 모헨조다로는 주위 둘레가 4km에 이르는 큰 도시다. 도시 서쪽 모퉁이에는 높은 단을 쌓은 '성채부'가 있고, 거기에는 중요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그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큰 목욕탕인 이른바 '대욕장'이다. 대욕장 중앙부에는 남북으로부터 계단을 따라 내려올 수 있는 긴 욕조가 있다. 그 욕조는 크기가 19×7.5m, 깊이가 2.5m이다. 그 밑바닥은 천연 아스팔트로 만든 벽돌을 깔아 물이 새지 않게 하였다. 욕조 주위의 욕조를 향한 작은 방들은 무슨 용도로 쓰인 것인지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더스 문명의 지배자, 권력의 흔적을 남기지 않다
성채가 도시의 행정 센터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왕궁도, 신전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가지에는 주택과 공방(工房)이 이어져 있으나, 거기에도 역시 신전은 없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지배자의 성격은 성과 속의 권력을 합쳐 소유한 메소포타미아 유형의 지배자와는 다르다. 그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지배자가 소유했던 것과 같은 신전과 왕궁 등 건조물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의 지배자는 자신의 통치를 찰흙판에 기록하는 일도 하지 않았고, 또 자기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 같은 왕궁과 무덤 따위도 만들지 않았다. 지배자의 힘과 의지를 느끼게 되는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시 계획의 유지 방법이다. 모헨조다로는 도시의 규모도, 길거리도 전혀 변화시키는 일 없이 500년 이상 계속해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동상.엄숙한 표정과 잘 손질된 수염 등으로 봐서 신관으로 보인다. 기원전 2000~1750년경. 높이 약 18㎝. 아프가니스탄 카불 박물관 소장.
시가지에서는 동석제(凍石製)의 남성 흉상이 출토된 바 있다. 높이 18cm의 소품인 이 흉상은 수염이 나 있고, 눈을 반쯤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 한쪽에 걸치고 있는데, 그 옷을 입은 모양으로 미루어 신관왕(神官王)의 상으로 추정된다. 지배자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유물은 이 흉상 단 한 점이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의 선후관계를 논하다
하라파는 모헨조다로에서 약 600km 떨어진 지점인 펀자브 지방에 위치하고 있는 인더스 문명의 유적이다. 도시의 규모는 주위 둘레가 약 4km로서, 모헨조다로와 거의 비슷한 규모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다른 인더스 여러 유적과 비교할 때 규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두 군데의 수도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모헨조다로가 하라파보다 먼저 건설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 양 도시가 병존한 시기는 비교적 단기간이었다는 점 등으로 해서 두 개의 수도설은 타당성을 잃게 된다. 때문에 일부 학자는 모헨조다로에서 하라파로 천도하였다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하라파모헨조다로와 함께 방대한 도시 유적이 발굴된 하라파의 위치.
인더스 문명의 후반기에 신드 지방에서는 인더스 강의 범람과 소금 등의 해독 때문에 토지가 황폐해지게 되었다는 것이 근래의 조사 결과 밝혀졌다. 또한 모헨조다로도 도시 종말기에는 민가가 성채 안에까지 들어서는 등 도시의 통제력이 저하되었다는 사실이 발굴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인더스의 사람들이 신드 지방을 버리고 펀자브 지방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는 천도설을 따른다면 양 도시의 선후 관계에 대한 설명도 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양 도시에는 기본적인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모헨조다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보여지는 것으로 '큰 목욕장'과 '곡물 창고'가 있다. '큰 목욕장'에 상당하는 것은 하라파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하라파의 '곡물 창고'는 모헨조다로의 것과는 다르게 생겼고, 그 위치 또한 성채 밖이다. 이와 같이 양자의 관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막연한 면이 많다.
하라파 목욕탕 유적하라파에서 발굴된 목욕탕의 터.
인더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와의 관계를 밝히다
인더스 문명의 존재는 1922년에서 그 다음해에 걸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유적의 발굴로 명백하게 되었다. 그 발굴 직후부터 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즉,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이민이 이곳에 이르러 이 같은 고도의 문명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붉은 바탕에 검은색으로 무늬를 그린 채문(彩文) 토기, 동석제의 솜씨 좋게 만든 인장과 그 인장 위에 가느다란 선으로 그린 그림 등이 메소포타미아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유물들에서 유추하게 되는 문명의 성격은 그와 같은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토기와 인장, 그리고 토우 등의 유물은 역시 독특한 것이고, 토기를 구워내던 가마는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벽돌로 만들어졌다. 또한 그 모든 것이 빈틈없는 도시 계획에 따라 배치되어 있고, 하수도까지 완전하게 구비되어 있는 점 등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그러나 그 기원과 전파, 그리고 영향 관계라는 면을 제외한다면 양 문명 사이에는 어떤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즉, 인더스 문명의 독특한 인장이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었고, 또 비교적 근년에 이르러 이 양 문명의 해상 교류에 페르시아 만 앞의 바하렌 섬과 파이라카 섬이 중계 지점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서쪽을 향해 해상 교역의 짐을 실은 곳은 인더스 문명의 항만 도시인 로탈이었다.
인더스 문명의 기원과 멸망이 수수께끼로 남다
인더스 문명을 형성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발굴된 사람의 뼈에 의해 그 '인종' 구성을 탐구하는 방법이다. 그 결과 오늘의 펀자브와 신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골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규명하는 일인데, 그것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기 전에는 해명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문명의 그늘 아래에 있었던 도시 등에서는 어디서나 어떤 특정한 언어와 문자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던 듯하고, 그것이 인장과 부적 또는 토기 조각 등에 새겨져 남아 있다.
인더스 문자는 약 400종이 있어서, 현재 해독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2개 국어를 함께 기록한 경우가 없기 때문에 해독은 아주 난해하여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이 언어는 오늘의 남인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드라비다 계 여러 언어의 조상격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추측이다.
인더스 문자다양한 인더스 문자가 새겨진 도장.
인더스 문명의 기원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그 멸망의 원인과 경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견해 가운데서 1960년대에 영국의 고고학자 모티머 윌러가 주장한 학설이 큰 지지를 얻고 있다. 그것은 '아리아인 침입'에 의한 인더스 문명 멸망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5000년 전의 도시 계획- 인도 문명의 형성(기원전 3000년경)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 8. 13., 김희보)
[출처] 안수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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