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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출애굽기 Exodus 내용 요약

by 은총가득 2021. 4. 25.

 

 

1. 출애굽기 Exodus 내용 요약 ⓐ

 

고대 애굽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케메트(Kemet)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검은 땅'(Black Land)이라는 뜻으로 해마다 가을이면 나일 강 기슭에 검은 토양이 쌓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강이 7월에 범람하기 시작해서 9월이면 가라앉는데, 이 때 쌓인 비옥한 흙 덕분에 애굽은 번창했고 위대한 문명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야곱(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하나였던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삶과 관습에 대한 성경 기록들은 고대의 다른 문헌들과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바로의 궁정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된 요셉은 가나안 땅에 있던 자기 가족들을 심한 가뭄에서 구해 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센이라는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가까이 살면서 그 강이 주는 활기를 통해 번창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 역시 번창하였습니다.

 

BC 1570-1300년경의 제18왕조에 많은 셈 족 사람들이 테베스(Tebes)에서 바로의 노예로 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고센이 위치한 북동쪽 삼각주 지역에 이들이 제19왕조까지 존재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아마도 BC 1300년에서 1250년 사이에 일어난 듯 합니다. 요셉이 누구였는지 몰랐거나 관심이 없었던, 혹은 히브리인이 요셉의 후손이라는 것을 몰랐거나 관심이 없었던 바로는 세티 1세(Seti I)임이 틀림없는 듯합니다. 그는 BC 1305년부터 1290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모세가 바구니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다가 바로의 한 딸에 의해 구출을 받은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공포의 시대였던 세티 1세 때의 일입니다.

 

모세는 세티 1세의 집에서 양육되었습니다. 모세가 자라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생활은 더욱 참혹해졌습니다. 모세가 도망자의 삶을 청산하고 돌아왔을 때 바로의 자리에는 세티의 아들인 람세스 2세(Rameses II, 1290-1224)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는 람세스 2세인 듯합니다. 그가 노예들이 홍해(더 좋은 번역은 '갈대 바다')를 거쳐 가나안으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풀어 준 사람일 것입니다. 이 중대한 전환기적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최소한 40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은 누구며 하나님은 누구신지 그리고 자신들이 부름받은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어떤 영성을 덧입어야 하는지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대한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모세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들은 새롭게 국가를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대로 그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확한 율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 사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무리 기상천외하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보존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이 기록은 그들의 탄생 이야기이며, 이 시대는 위대한 기적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출애굽기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출애굽기의 드라마

 

출애굽기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제외하고는 성경의 그 어떤 책도 이 책만큼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앞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거룩함, 권능, 자비를 목도합니다. 그 어느 것도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진흙과 피와 죽음으로 절어 있습니다. 번개와 천둥과 암흑과 불이 넘쳐납니다. 한편 하나님의 광채는 우리의 눈을 찌릅니다. 한순간 물이 피로 변하는 것을 경외감 속에서 바라봅니다. 또 온 땅이 메두ㄷ기들에 의해 암흑으로 뒤덮이는 것을 공포 속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문지방들이 피로 적셔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노예들이 어둠을 뚫고 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이 노예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맹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기들의 주머니에 채워 온 애굽의 황금으로 만든 송아지 상에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은 볼 수 있는 분이기도 하고 볼 수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알 수 있는 분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따뜻한 분이기도 하고 무서운 분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지만 그분의 뜻을 성취하려 하실 때는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매혹적으로, 때로는 눈부시고, 때로는 어리둥절하기도 한 이 이야기는 결코 호소력을 잃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를 자꾸 다시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출애굽기는 왜 영원히 살아 남습니까? 모세가 그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마지못해 움직이게 된 영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인물은 애굽 땅의 권력자인 바로와 하늘의 권력자이신 여호와 앞에 당당히 섰습니다.

 

하나님 역시 출애굽기가 영원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십니다. 그 분은 땅과 하늘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두꺼운 구름 뒤에 계시고, 번개와 함께 번쩍거리시고, 밤에는 불빛 속에서 반짝이신다. 그 분은 휘몰아치면서도 종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시며 그들의 죄를 사하십니다.

출애굽기가 개구리들과 메뚜기 떼, 우박 그리고 장자의 죽음이라는 잔인하고도 충격적인 장면으로 이어지는 재앙의 드라마라는 점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이야기, 사막의 만나, 무시무시한 시내 산, 모세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들고 번개를 품은 구름 속에서 나오는 장면, 황금 송아지, 돌판을 깨뜨린 이야기,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모세의 필사적인 기도, 성막의 황금과 광채와 신비, 하나님이 그 가운데 모든 영광과 더불어 임하시는 이야기 등 이러한 모든 놀라운 것들이 출애굽기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가 됩니다.

 

출애굽기는 생생하고 시각적이며 감각적입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읽거나 듣는 가운데 두려움과 놀라움이 소용돌이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가 세상을 매혹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완전히 자유롭게 됩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자들은 더 이상 괴롭힐 수 없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모든 권능과 영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십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들에게 하셨듯이 우리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출애굽기는 단지 억압 받는 자의 해방에 대한 모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약속과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출애굽기 Exodus 내용 요약 ⓑ

 

출애굽기의 12단계

 

하나님의 부재

시작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부재가 두드러집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영웅적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눈여겨 보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고, 숨겨지고, 구출되고, 양육되고, 도망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억압은 인종 말살 정책과 노예 생활로 바뀝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아니,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억압

오래 전 요셉 치하 은혜의 시기에, 애굽 고센 땅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히브리인들은 이제 새로운 바로의 통치 하에서 공포의 삶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城)과 기념비와 무덤을 짓도록 강요 당했습니다. 그들의 억압자들은 점점 더 무자비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가 많은 것에 깜짝 놀란 바로는 인종 말살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 결과 모든 히브리인 남자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산파들이 이에 호응하지 않아 이 정책이 통하지 않게 되자 그는 모든 히브리인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빠뜨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난과 비참함을 돌아보셨습니다. 한편 그 기간 동안 모세는 미디안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름 받음

광야 깊은 곳에서 양치기를 하며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모세는 나중에 십계명을 받게 될 바로 그 산에서 자기 생애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 곧 YHWH 혹은 여호와(Yahweh) 또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임을 계시하시고 그에게 애굽에 가서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모세의 백성이었습니다. 모세는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명들은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 생활로부터 인도해 내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의 논쟁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대면

모세와 그의 형은 이 세상의 강대국인 애굽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히브리인을 애굽에서 내보내시기 위해 자신들을 보내셨다고 선언했습니다. 비록 나중에 수없이 불평했지만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히브리인들의 노동력이 아쉬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재앙에도 끄덕하지 않다가 결국 맏아들이 죽고 나서야 히브리인들을 풀어 주게 됩니다.

 

해방

여호와께서 히브리인의 집을 넘어서 애굽인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들의 첫 새끼를 치시던 밤에, 바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세에게 히브리 백성을 데리고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서둘러 출발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들은 이제 해방 되었습니다.

 

돌보심

여호와께서는 광야를 지나는 히브리인들을 돌보십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바로가 그들을 다시 붙잡으려고 추격해 오자 애굽인들로부터 다시 그들을 구출해 내십니다. 또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며 많은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광야는 황량하고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곳에서조차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국가 창시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하나님과 처음 말씀을 나누었던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 백성은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맹세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피난민이나 노예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의 국가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율법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들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치시기 위해서 십계명과 기타 율법들을 주십니다.

 

반역

소망이 넘치는 출발이었지만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40일 밤낮을 산 위에서 머무르자 백성들은 참을성을 잃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결국 아론은 그들의 금을 받아서 황금 송아지를 만듭니다. 진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면서 흥청망청하는 것을 본 모세는 십계명이 쓰인 돌판을 땅에 내리쳐 깨뜨립니다. 그렇지만 이내 그는 그들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징계와 죽음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때문에 살아남게 됩니다.

 

회복

여호와와 이스라엘 간의 언약이 갱신되고 모세는 다시 돌아가서 40일 밤낮을 산 위에서 머무릅니다. 그러고는 돌판 위에 새겨진 십계명을 들고 돌아옵니다. 첫 번째 돌판도 하나님이 손수 쓰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얼굴이 빛납니다.

마침내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집니다. 이번에는 모세가 황금 송아지를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개역개정성경)

 

준비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지시에 따라 성막이 세워집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 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처소로써 아름답고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일단 이것이 세워져서 봉헌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고 나면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 뿐입니다.

 

임재

출애굽기 결말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에 가득 찹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재로 시작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임재로 끝을 맺습니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백성을 이끌고 그들의 집이 될 땅을 향해 나가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보이는 하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위해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 되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출애굽기 Exodus 내용 요약 ⓒ

출애굽기의 네 가지 길

 

떠남의 길

출애굽기의 영성은 떠남의 영성입니다. 이것이 '출애굽'(exodus)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자 애굽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미디안을 떠나 애굽으로 돌아가고 또다시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떠남의 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족장 야곱(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집을 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가나안에 새로운 집을 꾸리기 위해 애굽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안전하게 가도록 하셨으며 한동안 그들을 거기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훗날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곳을 떠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곳을 향해 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떠남의 길은 도착의 길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떠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는 그 누구도 영원히 살 곳을 찾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나그네들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성막에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오직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긴 여정 동안 여기저기에 진을 칠 때만 성막에 거하셨습니다. 염소 털로 만들어진 벽들은 하늘과 땅의 주님에게 영원한 처소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영성은 여정의 영성(spirituality of journeying)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이 땅이나 집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라는 초청장입니다. 그들은 많은 방랑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와 목적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둘 기회를 가졌습니다(기독교의 설교와 경건의 전통 속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은 종종 '제2의 출애굽'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자유의 길

하나님의 백성이 억압을 깨뜨리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출애굽기에서 역사상 가장 놀라운 해방 이야기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속박 당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해 내시기 위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예속으로부터의 구원은 더 긴 이야기의 첫 장에 불과합니다. 이 해방 노예들이 자기들의 마음과 영혼의 속박을 벗어 던지는 데에는 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출애굽기에서는 그렇지 못하지만 이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은 종국에 가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더 깊은 차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유의 길은 육체든 정신이든 간에 묶인 것을 해방시키는 영성입니다.

 

모세의 길

모세는 지도자이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의 인품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는 히브리 노예들에 대한 연민과 열정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러고는 이것 때문에 왕자로서의 삶을 버리고 애굽을 떠납니다.

 

또한 그는 연민과 열정으로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위해 싸우고, 그들 가운데 하나와 결혼해 미디안에 남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 대한 그의 열심과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열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맞설 힘을 주며 하나님 앞에 설 힘도 줍니다.

 

한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셨지만, 그들이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자 그들을 멸망시키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단호하게 하늘과 땅,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섭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이 노예 상태에서 구속해 내신 이 백성을 멸절하려면 자신도 함께 결절해 주시기를 요구합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완악하고 반역적인 백성의 성격을 다루는데 아주 적합합니다. 그러나 이 불 같은 성격 때문에 모세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결함이 있는 그의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모세의 길은 은혜의 길을 미리 보여 줍니다. 이 길은 우리의 약점 때문에 덜컹거리는 길이지만, 그것들을 오히려 우리의 강점으로 만들어 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광야의 길

사막 혹은 광야는 기독교 영성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과 가나안 사이를 여행한 것에서 상당 부분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광야에서의 여러 경험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야가 광야를 지나 시내 산까지 가는데 40일 밤낮이 걸렸으며,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도 40일 동안이었습니다(왕상 19:8, 눅 4:2). 이 경험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군분투한 것을 반영합니다.

 

광야의 길이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길이라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길은 단순히 전쟁과 시험과 자기 부정의 길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인 듯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고 싶어 하는 엘리야에게는 하나님 천사를 통해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광야가 실제적인 것이든 비유적인 것이든 간에 광야에서는 많은 기도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맹렬한 기도들을 광야에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도 기도했습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기는 중에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기도했습니다. 요한도 밧모 섬에서 기도했습니다. 광야 시기의 조상들도 애굽에서 기도했습니다.

광야는 의지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더욱 기도하게 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가볍기보다는 오히려 단물을 내는 샘처럼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영성은 일편단심으로 맹렬해야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필요를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광야에는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도 별로 없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잊게 하거나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벌거벗은 우리를 숨겨 줄 만한 인간적인 것들이 없습니다. 그만큼 광야에서는 많은 영적인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과 이스라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광야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광야의 길로부터 일어서는 자,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끈질기게 매달리는 자는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결국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신이 그 영광에 붙들려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믿지 못했던 것들을 적어도 자기 자녀들만은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광야에서 신앙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굳건해졌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강력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엘리사에게 외투를 벗어 준 후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시어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알지 못하던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 얼굴이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은 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계 1:16).

 

따라서 광야의 길은 궁극적으로 능력의 길입니다. 이 길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만연한 죄를 약화시키며,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길입니다. 광야의 길은 바로 진리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광야는 우리에게 재빠르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낮과 밤, 더위와 추위, 바람과 태양과 먼 길을 겪어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이적과 방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톨킨(J. R. R. Tolkien)이 말한 바와 같이, "방황하는 자들이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머레이 앤드류 퓨라(Murray Andrew Pura)

 

출애굽기 연대기

BC 1876년 :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창 46:7)

BC 1805년 : 요셉의 사망(창 50:26)

BC 1527년 : 모세의 출생(출 2:12)

BC 1487년 : 미디안 광야 도피(출 2:16-25)

BC 1447년 : 모세와 바로의 1차 대면(출 5:1)

BC 1446년 : 출애굽(출 12:37)

BC 1445년 : 성막 건축(출 40:33)

BC 1406년 : 아론의 사망(민 20:18), 모세의 사망(신 34:5)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3. 하나님이 출애굽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다 ⓒ

 

율법의 한계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본래 의도한 만큼 우리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외적인 행위인 할례는 사람들의 마음, 곧 내적인 변화를 일으켜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오늘날도 구약의 할례와 같은 세례가 내적인 상태를 반영해 주는 정확한 지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외적인 율법에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로마서 2:29, 개역개정성경)

 

우리는 ‘율법의 조문'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영적인 의도를 간과함으로써 우상숭배와 율법주의 혹은 제의의 남용(priestly abuse)에 빠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대신 율법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해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 책임을 등한시 했을 때 우리가 무심코 세워 준 권위는 우상 숭배를 더 재촉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을 통제하는데 율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 의지의 깊은 중심 부분까지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온전히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성품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중재 사역

 

인간의 성품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중재 사역과 관련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첫째, 비록 부름받은 백성이지만 우리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며 각자의 행동에 대해 창조주 앞에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기본 전제 조건입니다.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단순히 제사와 의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과 생활에서도 총체적이고 철저한 반응을 요구합니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난한 이웃들을 대함에 있어 선명하고 도덕적인 지침들을 제공합니다.

또한 율법은 계절과 절기에 맞춰 이루어지는 찬양과 회개, 희생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행사를 정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절기에는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의적 행사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촉진시키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의적 행사들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의 포괄적인 공동체를 만드시려는 그분의 목적을 신뢰하게 됩니다.

 

둘째, 모든 공동체에는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임무를 맡은 지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족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임을 가르쳤습니다. 모세는 일상 생활의 갈등과 불법 행위들을 해결할 수 있는 사법 체제를 도입했고, 아론은 정규적인 예배와 제의 확립을 주관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참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별되도록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들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 심판에 대하여 입증하였습니다(마 12:18).

 

셋째, 모든 공동체는 제도적인 체계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이든, 교육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혹은 종교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공동체에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특히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도덕적인 규범을 준수하고 정기적인 제의들에 참여하여 역사에 드러난 하나님의 행위들을 묵상하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체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제도적인 체계가 없다면 결국 시간과 목적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제의는 우리가 물질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에 동시에 뿌리내리도록 도와 줍니다.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갖춥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광야에서 패배와 지연 그리고 죽음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었으나 그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남긴 두 가지 유산인 율법과 성막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회고하며 앞으로 약속의 땅에서 누릴 정착 생활을 고대합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나 먼 길을 왔으며, 에덴으로부터는 더욱 먼 길을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에게는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by 공부하는 OTFre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