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아끼라(엡5:16)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세월의 덧없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90: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세월의 흐름을 날아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 듯, 로켓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지듯 그렇게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시 39:5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이니이다.” 세월이 하도 빨리 지나가서, 우리네 인생 전체를 다 따져 봐도, 한 뼘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앞에서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너무도 빠르게 지나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참 많은 것들이 후회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덧없이 느껴진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은 다른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월의 흐름을 더 빠르게 느낍니다. 흔히 세월이 10대에는 시속 10킬로로, 30대에는 30킬로로, 50대에는 50킬로로, 70대에는 70킬로로 지나간다고들 합니다. 실제로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생물학자 소던 박사가 1분을 예측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20대와 70대에게 각각 시계를 보지 않고 1분을 맞춰보라고 했더니, 20대는 비교적 정확하게 맞추었는데, 70대는 1분이 되기 전에 1분이 되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같은 나이라도 사람에 따라 세월의 흐름을 다르게 느낍니다. 같은 나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세월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빠르게 느껴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처럼 여유롭게 느껴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회상 효과’(reminiscent effect)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내용이 많으면 그 삶을 길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는 내용이 적으면 그 삶이 짧게 느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똑같은 일상을 지루하게 반복할 경우,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어제가 주일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또 주일인가 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하루가 무척이나 분주합니다. 참 많은 것을 보고 겪게 됩니다. 이럴 때는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시간을 허망하게 낭비해 버리면, 정말 인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세월을 알차게 보내면,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감사하고 또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오늘 본문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알차게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글귀가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후학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며 남긴 ‘권학문’(勸學文)의 글귀입니다. 少年易老學難成 / 소년은 늙기가 쉽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 /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未覺池塘春草夢 / 연못가의 봄풀이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階前梧葉已秋聲 / 계단 앞의 오동잎은 벌써 가을을 알리는 구나. 동양에서는 이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이 글귀를 간단히 요약하면 ‘쉬지 말고 공부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귀를 풀어보면 ‘한 시도 낭비하지 말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그러면 학문을 이룰 수 있느니라’. 그러나 오늘날 이 글귀는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습니다. 공 부나 일의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여러 분야에서 확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은 로봇처럼 쉬지 않고 공부나 일만 할 수 있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쉬지 않고 공부나 일만 하면, 갖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우선 몸에 탈이 납니다. 신체적인 이상이 나타나거나 심할 경우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스트레스로 시달리게 되고, 심할 경우 탈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나게 됩니다. 근자에 들어와 쉼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적당한 쉼과 달콤한 휴식은 창의력을 높여주고, 공부와 일에 몰입력을 증가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만 한 사람들보다는 쉬며 여가를 즐기며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효율이 높다는 것이 속속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의 참된 뜻은 무엇일까요? 우선 “세월”이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 원어로는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을 본문에서 세월이라고 번역했지만 많은 곳에서는 시간이라고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헬라사람들은 시간 개념을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χρονός)입니다. 이것은 초, 분, 시로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개념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시기를 나타내는 개념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정한 시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이 말하는 세월을 예로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라고 명하신 시기를 말합니다. 또한 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 전도를 명하시고 전도여행을 보내신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 세월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기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명하신 어떤 사명의 시기를 말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나선 시기를 말합니다. 다음으로 “아끼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 원어 ‘엑사고라조’(έξαγοράζω)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경 여러 곳에서 몸값을 치르고 되산다는 뜻으로 사용되어온 말입니다. 예를 들어 갈 3:13에서는 ‘속량’(贖良)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대신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을 속량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월에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을 흘러가도록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고, 내 소중한 무엇인가를 쏟아 부으며 공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월을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그 세월을 그저 흘러가는 세월로 버려두지 말고, 내게 소중한 시간들로 하나님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무엇인가 유익한 시간들로 바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20세기 위대한 성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알버트 슈바이처는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던 사람입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신학을 전공하여 특히 종말론 분야에서 신학자로서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철학을 전공하여 특히 칸트 학자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연주자로, 교수요 학자로 바쁜 삶을 살고 있던 어느 날 1905년에 한 선교단체의 보고서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에 의사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1913년 의학박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후 아프리카를 지키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대가를 지불하며 그 세월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월을 평범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나와 이웃을 위하여 가치 있는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세월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니라 본문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면서 때가 악하다고 덧붙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때가 악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월을 아껴야 할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도 세월을 아껴야 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저들과 달리 더더욱 세월을 아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때가 악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그 시대가 악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보내던 그 시대는 정말 악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며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박해가 두려워 수많은 배교자들이 나오고, 이런 박해에 맞서다가 수많은 순교자들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하나님을 모르는 시대여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각종 악을 저질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당시는 각종 우상숭배가 도처에 창궐했습니다. 심지어 로마 황제까지도 신으로 섬기는 일이 자행됐습니다. 그리고 각종 말세현상들이 즐비했습니다. 딤후 3:1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악의 기준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선악이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를 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악입니다. 그리고 인류 보편적인 윤리기준으로 볼 때도 명백한 악입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는 악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전쟁 중에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 정도라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는 악은 어떤 관점에서 본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악하다는 것입니다. 왕상 16:30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이 말씀은 북왕국 아합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가장 악을 행한 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씀입니다. 아합이 악한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일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합은 다르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 7대 왕입니다. 그는 통치 기간 중에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습니다. 모압에게 조공을 받고, 남왕국 유다와 화친 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는 경제적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돈의 왕이요 바알 제사장인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지독한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수없이 박해했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보란 듯이 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왕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시대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말해줍니다. 나아가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떨까요? 2016년 발표된 한국인의 종교통계 조사 보고를 보면, 비종교인구가 처음으로 50%를 넘었습니다. 그리고 한 종교통계를 보면 근자에 우리나라에 무신론자가 급증하여 세계 5위권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성향을 봐도 반기독교적 성향이 점점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을 봐도 친기독교적 성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점차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힘들어지고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 우리 사회를 종합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점점 악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때가 점점 악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고 있고, 점점 말세가 가까워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종합해 보겠습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월을 아끼는 방법도 분명해 집니다. 우선 소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지 않게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붙잡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회라고 생각해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 때 그 일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중단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선용하되,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하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기회를 사용하려고 할 때, 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산되게 해야 합니다. 이 일로 복음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이 세월을 그냥 덧없이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세월을 기회로 삼으려 해야 하겠습니다. 때가 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 세월을 기회로 삼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세월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실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더욱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
박봉수 목사(상도중앙교회) |
성령 충만 받은 성도의 특징(엡 5:8-21)
에베소서는 교회의 모습과 신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1장에서부터 4장 16절까지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4장17절부터 6장까지는 신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고 성도가 성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한국교회를 사랑하시고 이 시대에 이 땅에 청교도를 허락하셔서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엡5:8-21절까지의 말씀이 성도의 모습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엡5:8-21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 할 때에 큰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그 존재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어두움의 존재에서 빛의 존재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존재의 질이 바뀌어 진 사람입니다. 그 존재에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와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어두움이던 존재가 빛이란 존재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장소에서 설던 존재가 빛과 생명의 장소로 그 현주소가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주 안에서 빛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특징이 ‘주님 안에서’ 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이 바로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봉사하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살기도 하고, 주님 안에서 죽기도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존재의 질이 변화되고 존재의 현주소가 바뀌어 진 사람입니다. 철이 금으로 바뀌면 겉은 때가 뭍어도 속은 여전히 금입니다. 성도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질이 변하지 않고 도금한 성도 겉만 변한자들이 많습니다. 질이 변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다사랑 교회 성도들도 모두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주님 안에서 그 존재가 다 변화 되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8절 下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2절“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여기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인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입니다. 그 행동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산상 설교에서 주님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된 사람들이란 착한 행실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좋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누추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을 하지 않고 덕을 세우는 말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을 말하고, 이웃에게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며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엡5: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4: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28절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이고 선한 일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성도는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 만이 행동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 사람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로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면서 사는 못 된 존재입니다.
눅12:19절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이 말은 눅12장에 나오는 부자의 독백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의 소원이고 독백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기쁨의 대상이 돈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롬15:3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사도 바울도 자기를 기쁘게 하는 대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살전2:4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기쁨의 대상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로 바뀌는 것입니다. 육적인 기쁨에서 영적인 기쁨으로 바뀝니다.
롬15:1-2절 “우리 강한 자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 찌니라”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기쁨이 자기에게서 이웃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고전10:33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영혼구원 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누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넷째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15-17절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 "세월" 이란 말은 "시간" 이란 말도 되고 "기회" 란 말도 됩니다. 헬라어는 ‘카이로스’입니다. "기회" 또는 "때"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간과 기회와 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여기 ‘아끼라’라는 말은 "사라" 라는 말도 되고 "붙잡으라" 는 말도 됩니다. 값을 치루면서 까지 기회를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허송세월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꼭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그 기회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어려운 사람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그 기회들을 재빨리 붙잡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다섯째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자기 속을 채우는 내용물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술로 채우든지 욕심으로 채우든지 정욕으로 채우든지 지식으로 채우든지 무엇으로든지 채웁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술이나 욕심이나 정욕이나 지식으로 채우는 대신 성령으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하나님 자신의 일부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와 기운으로 자기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으로 자기를 채우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사모하므로 성령을 자기 몸에 채울 때 기도가 뜨거워지고 찬양이 뜨거워지고 봉사가 뜨거워지고 구제가 뜨거워지고 사랑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뜨거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할 때 삶이 부드러워지고 삶이 따뜻해지고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내 속에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내속을 충만히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섯째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안에서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새들은 물론이고 사람도 처음 지음 받을 때부터 노래하는 자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특히 우리한국 사람들은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논밭을 갈면서도 노래하고 고기를 잡으면서도 노래하고 운동을 하면서도 노래합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노래방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수들의 노래 유행가를 좋아하던 사람이 복음성가나 찬송가를 좋아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이고 심령으로 부르는 찬송인데 궁극적으로는 주께 노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19-20절“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이고 항상 주께 노래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일곱째로,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삶의 자세에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 받은 그리스도인은 지배하는 자세에서 복종하는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 받은 그리스도인은 주인의 자세에서 종의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피차 복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상전에게 순종하고 종들에게 순종하게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복종하는 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빌2:8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를 종이라고 부르면서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빌1:1절 “예수의 종 바울과”
고후4:5“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다스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 존재와 행동과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은 지배하려는 삶에서 복종하려는 삶을 삽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성령 충만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 일곱 가지에 대해서 두 주간에 걸처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존재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와, 기쁨의 대상과, 시간 개념과, 자기 속을 채우는 내용물과, 마음과 입술의 노래와, 삶의 자세가, 변화된 사람이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여주시고 사도 바울이 보여주시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히 변화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날마다 변화를 받는 삶이라고 롬12:2에서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오직 변화를 받아." 변화를 경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주위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어린 아기가 거름 마를 배울 때 자신도 기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변화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성도들도 기뻐하고 우리 사회도 기뻐할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첫째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늘 사모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구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항상 주님 안에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을 늘 사모하고 의지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변화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뻐하시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적 찬양(엡5:19-20)
성경적 찬양으로의 회복을 바라며(옮긴이의 머리말)
이 책은 로이드 존스의 에베소서 5:19-20에 관한 강해 설교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에베소서 강해전집에서 이 부분을 제외한 이유를 말씀한다. “책의 분량이 과도하게 많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엡5:19-20에 관한 설교를 생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설교는 이 책의 큰 주제인 결혼, 가정, 직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엡5:18-6:9의 설교를 ‘결혼, 가정, 직업’이라는 주제하에 한 권의 설교집으로 묶었는데, 그 분량이 너무 많아지자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엡5:19-20에 관한 네 편의 설교를 불가피하게 생략한 것 같다. 이 부분은 작은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저는 ‘왜 이런 설교가 직작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여러 번 느꼈다. 경배와 찬양이 한국 교회에 붐을 일으킬 때부터 이런 설교들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고 공유되었더라면 여러모로 유익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죽어 가는 예배를 살리자는 구호 아래 찬양과 경배의 시간을 대폭 늘리고, 그동안 세속적인 악기라는 이유로 금기시 되었던 여러 가지 악기들을 교회 본당에 설치하고, 오래되고도 경건한 찬송가를 등한히 하면서 현대인이 현대음악에 맞추어 만든 복음성가를 선호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알고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경외하는 심정을 품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변화된 예배 때문에 늘 말 못할 가슴앓이를 했다.
하나님에 대한 깊고도 풍성한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깊고도 풍성한 영적 체험을 다 담기 힘든 얄팍한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너무 힘들고, 육신의 부모를 위해 부르는 노래에도 사용하기 민망한 곡조로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교회에는 올바른 찬송에 대한 대안으로 시편 찬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참된 찬양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교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역사적인 개혁교회들이 예배 중에 오직 시편 찬송만 불렀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최근에 시편 찬송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고, 실제로 시편 찬송을 부르는 교회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몇 년 안에 오직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한국 교회가 이런 시점에 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설교는 지금 꼭 필요하고 꼭 읽어야 할 내용의 말씀들이다.
이 네 편의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한국 교회가 예배 회복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붙들었던 현대적인 복음성가와 오늘날 한국 교회 한 모퉁이에서 예배회복의 진정한 소망이라고 새롭게 내세우고 있는 시편 찬송 모두에 대해서 다루면서 성경적인 안목으로 그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성경을 펼쳐 놓고 그리스도인의 찬양과 관련하여 성경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저는 그 일에 이 작은 설교집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작은 책을 통해서 올바른 찬양에 대한 일치된 견해와 심정을 회복하기를 소원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여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 5:18-20 )
제 1 장 성령으로 충만한 찬송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엡 5:18-19 )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존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교리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삶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도 즐거운 측면을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 생활이다. 그래서 먼저 교회 생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도는 18절과 19절에서 성령 충만의 교리를 술 취함과 대조하여 설명한다.
“이전에 너희는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 혀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생각하는 행복과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술 취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제 나는 성령으로 충만해진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말할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는 예배 중에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에 관한 규범이 아니라, 사도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제할 때에 성령 충만함의 증거를 어떤 모양으로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주제는 특히 시편을 찬송하는 것과 관련하여 종종 논쟁거리가 되어 왔으며, 본문의 핵심이 전적으로 외면당한 것이다.
- ‘서로 화답하며’ -
‘말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음성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바울은 이 구절 전체에서 ‘찬양’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서로’는 “너희 자신들에게”(킹제임스 번역)로 잘못된 번역이며, ‘서로에게’라는 뜻이다. “너희는 너희에게 있는 행복하고도 기쁜 감정을 서로에게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려 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사도는 예배와 관련된 자세하고도 구체적인 규정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관심은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기 위하여 함께 찬양해야 한다는 데 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은 목소리를 발하여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
어떤 사람들은 ‘시’. ‘찬송’, ‘신령한 노래들’이 용어만 다를뿐 사실 똑같은 것을 가리키며 시편 중에서도 어떤 시편은 ‘노래’라고 부리고, 또 어떤 시편들은 ‘찬송’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모든 시편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단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바울이 본문에서 시편으로 찬양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찬양할 때는 오직 시편만으로 또는 성경구절만으로 찬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찰스 핫지, 이어디,등 위대한 에베소서 주석가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이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말해왔다. 사도가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개략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라는 히브리어는 ‘악기의 줄을 뜯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히브리어 전문가들은 이 단어가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부르는 경건한 노래’를 의미한다는 데 동의한다. 시편의 거의 모든 시가 하프나 수금 같은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부르도록 되어 있다. 바울이 사용한 ‘시’라는 단어가 ‘시편’을 가능성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시편을 작사하고 작곡할 수 있다. 그들도 시편의 형태로 경건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찬송’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리는 노래, 하나님에 관한 노래’ 거룩하고도 시적인 곡‘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찬송은 반드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정의했다. 지금까지 이것을 통상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찬송에 속하는 노래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졌다고 말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찬송가와 책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찬송을 배워야했다. 그래서 교창 비슷한 노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딛전3:16)
‘신령한 노래들’ 노래 앞에 ‘신령한’ 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시편이나 찬송이라는 단어에 이미 ‘신령한’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이라고 한 것은 노래에는 세속적인 노래, 코믹송등 여러 종류가 있다. 사도가 말하는 ‘신령한 노래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만들어진 노래, 영적인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래,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임에 틀림없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부른 노래, 주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 세례 요한의 부친의 노래, 등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에게서 이런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여기에서 ‘노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감동을 받고 즉흥적으로 발산하는 것을 암시한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천국에도 많은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장 9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구주와 그분이 자신들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노래를 거대한 합창으로 부르고 있다. 14장 3절에는 ‘새 노래’라는 단어가 나온다. 천국에서는 끊임없이 새 노래가 만들어 지고 불린다.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는 항상 그러한 결과가 뒤따른다. 바로 이것이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노래할 모습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렇게 노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교회가 오직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에베소서는 이방인의 교회를 대상으로 쓴 서신서이다. 바울이 오직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초대 교회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초대 교회는 시편 찬송 외에 다른 노래들도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유세비우스). “애찬식에서-물로 손을 씻고 나면 불이 켜졌고,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신이 성경에서 배워 알고 있는 내용이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노래하였다”(터틀리안-초대 교부). 바로 이것에 대하여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19절 후반부에서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송축하는 새로운 찬송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가르치는 말씀, 방언, 계시, 방언 통역함은 모두 교인들의 모임 시간이나 그 직전에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찬송시”라는 단어가 시편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문맥을 무시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영으로 찬송하고”라는 말의 의미는 시편으로 찬송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은 마음으로 찬송하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부르는 영적인 찬송을 의미한다.
- 오늘날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왜 이렇게 어두운지 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전형적인 모임을 엿볼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요소들이 있다. 거기에는 기쁨도 있고 자유로움도 있고 행복도 감동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이런 것이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부흥의 때에는 일종의“거룩한 무질서”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일들이 일어난다. 분명히 무질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서가 있다. 모든 사람이 영적인 유익을 얻고 기쁨의 영으로 충만해진다.
만일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사도가 오직 시편 찬송만 부르는 생기 없고 엄숙하며 지루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사도의 말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는 정반대의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찬송이나 시편 외에 다른 것들을 하나님을 송축하는 노래로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즉흥적인 기도 역시 잘못된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표현하게 되는 찬송과 경배, 감탄과 감사도 모두 잘못된 것인가?
성령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영감되어 권위 있고도 오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역사하셨던 것처럼, 또한 찬송 작가에게 능력을 주시어 새로운 찬송을 만들어 내게도 하신다. 그들의 잘못은 몇몇 찬송이 나쁘다는 이유로 나쁜 찬송만 버리면 되는데 그들은 모든 찬송을 버린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절제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바울은 “...다하되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 말했다. 무질서의 반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할 규칙이기도 하다.
참된 부흥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충만하게 임할 때마다, 교회에는 수없이 많은 새로운 찬송들이 생겨난다. 마틴 루터, 찰스 웨슬러, 존 케닉, 필립 도드리지, 웨일즈의 윌리엄 윌리엄즈, 이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영광스러운 찬송들을 만드는데 놀라운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때때로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이 만든 찬송을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멋대로 성령을 제한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그 증거를 나타내도록 하자.
제 2 장 마음의 노래
“사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19 )
-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노래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찬양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두 진리가 있다. 이미 살펴본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5:19)이며, 다른 하나는 이제 살펴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이다.
성령께서 다스리는 곳에는 자극과 생명력과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절제와 자제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 성령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독특한 증거이다. 우리는 그 위험을 피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양극단으로 빠져 버린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 킹제임스 번역에는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곡조’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감미로운 음악, 아름답게 배열된 음악적인 소리들, 음악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아름다운 선율과 가락등이다. 사도가 19절에서 곡조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음악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움 중에 하나가, ’마음으로 주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어리석게도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도는 기교 부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그 어떤 것도 기교를 특징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기교 부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자랑하는 것은 본래 세상이 하는 일이다. 신문에 실린 음악 비평 기사를 읽어 보면, 오늘날의 사람들이 기교를 부리고 불협화음을 내며 음조가 고르지 않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기독교적인 모든 것은 항상 아름답고, 항상 평안과 조화와 쉼과 기쁨을 준다. 이것들이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늘날 이 세상이 모든 종류의 예술에서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흉한 것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항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음악에 아름다음과 조화, 평안과 기쁨이 있음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곡조는 결코 경망스럽거나 경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다운 모든 것은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다운 모든 것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오늘날 ‘아름다운 곡조’ 라는 단어만큼 남용되는 것은 없다.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옛날 방식대로 행동하려 하였다. 그러한 그들에게 바울은 과거의 행동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인답게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찬송할 때, 하나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찬송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가사를 경박한 곡에 붙여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신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그 가사에 합당한 가락과 선율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부르는 노래의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하실 것이다.
- ‘너희의 마음으로’ -
여기서 이 말은 개인적으로, 진심으로, 또는 감정적으로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마음’ 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불러 대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길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노래한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요4:22,24) 예배 장소나 형식, 의식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다. 사도가 “너희 마음으로” 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게 비추어 주신다. 여기에는 여러분의 지성도, 이해력도, 이성도 다 포함된다. 바울은 “너희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묵상하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며 주의 깊고도 신중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매우 지적인 노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편 47편에서 시편 기자도 지식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한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완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시47:6-7)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찬양의 영광스러움은 그들의 지성과 감정이 모두 작용함으로 인하여 그 찬양에 참되고도 아름다운 곡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당하고도 적합한 방식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 사도의 이 권면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가?
첫째, 가사의 중요성을 생각하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사이다. 곡조가 좋으면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 곡조에 휩쓸려 찬송을 부르기 쉽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찬양과 경배가 말씀 선포, 곧 설교와 따로 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신교 신앙에 따르는 우리는 성례와 말씀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말씀이 선포되지 않아도 성례를 집행하고 참여할 수 있다. 동일한 원칙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찬송으로 채워져 있는 예배가 옳은 것일까? 절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우선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 말씀은 선포되지 않은 채로 찬양만 불러서는 안 된다. 만일 이 두가지를 꼭 분리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 가사의 의미를 반드시 명확히 알고 이해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이 찬양을 부르는 것이 경건에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덧붙여 말하기를 교묘한 현혹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가사보다 곡에 더 감동을 받거나 가사는 잊어버린 채 곡에만 심취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감정주의에 빠지지 말라.
너무 지나치게 찬양하지 말라. 예배 전에 준비 찬송을 하는 것은 현대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찬양으로 열기를 뜨겁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찬양을 통해서 고의적으로 감정을 조장하고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몇 마디 가벼운 농담을 함으로써 회중을 좋은 분위기로 이끌어 가려는 찬양 인도자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들은 손뻑을 치므로써 모임의 분위기를 달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감동이 너무나 커서 자신도 모르게 손뻑을 치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색소폰이나 그와 비슷한 악기들의 음색은 원색적이어서 감정만 자극할 뿐 생각을 더 깊게 해 주지 못하며 말씀을 더 잘 깨닫도록 도와주지도 못한다. 우리의 생각을 더 깊게 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깨닫도록 도와주는,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의 음악이 가진 큰 특징인데 세상 노래에나 어울리는 매우 감각적인 악기들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절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 자신이 행복해질 때까지 찬양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너희가 성령으로 충만해져 있고 너희 마음에 이 기쁨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고 주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찬송함으로써 너희의 기쁨을 표출하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함께 찬송하라.
바울은 사람들에게 회중석에 앉아서 찬양대가 부르는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보수를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노래 실력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버젓이 예배에 들어와서 찬양을 부르는 것은 훨씬 더 나쁜 일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이 한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있으며,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찬양에 참여한다. 그들 모두가 동일한 성령을 받고 동일한 성령의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을 회복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함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회중이 하나가 되어 함께 찬양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조화와 균형과 절제가 있다. 어느 한사람도 튀는 목소리로 큰소리를 내어 찬양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교훈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인가?(갈5:22-23) 먼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없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일도 없다. 또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가 나타난다. 자기의 목소리를 과시하며 잘난체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에서 우리는 한사람인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사도가 이 모든 것에 관하여 기록하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모이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찬송하기 위함이다. 술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라.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평강과 아름다운 곡조, 조화와 온유, 그리고 절제가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는 일에 무절제가 있다고 해서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쳐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일을 성령의 통치와 자유 가운데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절제하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통제하면서 행하라.(딤후1:7)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이든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아름다움과 조화, 평강과 선율, 성령의 영광스러운 성품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하자. 그리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영광과 높임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
제 3 장 영원한 노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엡 5:19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된다. 세상은 품위가 낮고 감상적인 노래들을 부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을 부른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 위하여 함께 모여 교제하며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있는 행복을 표현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노래한다. 특히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는 항상 주님이 중심을 이룬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주’라는 단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성령에게로 이끌지 않는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로 관심을 이끌지도 않으며, 어떤 특별한 결과에 관심을 두게 하지도 않는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본질이며 중심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이며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마주 대하도록 돕는 것들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시작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찬양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항상 온몸과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감동과 감격을 느꼈다. 그리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시와 산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단순히 위대한 문학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령의 역사였다.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난 일도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으로부터 찬송과 감사와 노래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철저한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주님을 찬양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에 바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얽매여 자신의 영적인 맥박을 재는 일, 자신의 체험을 살펴보는 일, 이런 저런 복을 갈망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 열매로 자연스럽게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그리고 성경 안에서 주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마음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 무엇을 찬양할 것인가?
우리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인격과 찬란한 위엄을 찬양해야 한다. 주님의 영원하심, 영원한 영광, 피조되지 않고 성부와 동등하시며 영원하신 주님! 바로 이것이 우리가 노래해야 할 주님의 인격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한다.
창조세계를 보라.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다.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는 우리를 위한 간구가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우리는 주님에게 속해 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주님을 알며 주님을 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즉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 근처에만 가도 찬송을 부르기 시작한다.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는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에 기록된 사도의 강력한 진술을 들어 보라. 성육신과 그 모든 과정, 그리고 사도는 그것을 살펴볼 때마다 골수에 사무치도록 감동을 받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날 기독교회의 큰 문제점은 이런 저런 사회 문제 등에 대해서 말하는데 시간을 써 버린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런 문제들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교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까닭은 교회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성육신에 크게 감동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삶의 구체적인 일들과 관련하여 주님의 교훈을 듣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주님을 알고 성육신의 이유를 알기 전까지 절대 주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노래하고 싶은가?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 아무런 감흥도 없고 부를 거리도 없고 마음에 아무런 곡조도 없어 고민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바라보라.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형체로 계셨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생각해도 마음이 불붙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주제만으로도 이 세상에서의 시간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의 시간을 다 들여서 배워도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엄청난 주제이다.
이 땅에서 주님이 살아가신 모습을 바라보라. 그분의 겸손을 생각해보라. 우리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셨지만, 가난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기꺼이 멈추어 서시는 주님을 보라.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너그럽게 받아 주시는 주님의 넓은 마음을 바라보라.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헐뜯고 비난했다. 주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도 왜 우리 마음에는 아름다운 곡조가 없는가?
주님의 직분을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 주님은 위대한 선지자이다. 그분의 권위와 가르침을 찬양하라. 우리의 제사장인 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으시고, 율법을 영화롭게 하셨다.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해 보라. 핍박과 조롱과 원한, 그리고 침 뱉음과 멸시를 생각해 보라. 여러분의 입에서 저절로 찬양이 흘러나오지 않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주님을 바라보라.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다. 주님은 제사장으로서 책무를 감당하시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이다.
우리 주님이 지금도 하늘에서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님은 왕이시다. 사망은 예수님을 붙잡아 놓을 수 없었다. 주님에게 모든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지친 성도들이여! 자기 자신의 모습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의 구주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하늘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생각하라. 자신의 원수들이 발등상이 되는 날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왕 중의 왕, 만주의 주로서 구름을 타고 천군 천사들의 호의를 받으면서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노래해야 할 주제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때까지 주님을 깊이 생각하라. 성령님께 주님을 계시해 달라고 간구하라.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며 찬송하게 될 것이다. 주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아무리 오래 찬양해도 이 주제에 관해서는 늘 새롭게 시작한 느낌만 들 뿐이다. 이 주제를 노래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 존재이며 우리의 말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찬양을 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리허설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서 참여하게 될 위대한 음악 축제를 준비하는 것일 뿐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함께 모여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라. 왜냐하면 천국에 가면 위대한 노래를 듣게 될 것인데, 만일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는 것을 모른다면 너희는 혼자 버려진 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부를 찬송을 지금부터 준비하라.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찬양을 들어 보았는가? 여러분들에게는 찬양의 은사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의 찬양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아멘!’ 이라고 화답하고 싶지 않는가? 희미한 ‘아멘!’ 조차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더 큰 ‘아멘!’이 될 수 있게 하라.
제 4.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 5:20 )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모든 차이점이 예배와 찬양이라는 공동체적인 행동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 “감사하며” -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감사’일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심정을 품고 있으며,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이 넘쳐흐른다. 이것은 성령의 필연적 열매이다. 부흥의 기록을 보면 부흥의 현장마다 감사와 찬양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재하시면, 먼저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지식과 이해력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들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고 역사한다.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며, 연약해진 마음을 회복시켜 준다. 이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감사와 찬양의 심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얼마나 역사하시는지 그 분량과 정도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은, 우리의 기도 가운데 감사와 간구의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이 연약하고 냄비처럼 쉬게 끊어올랐다가 한순간에 꺼지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간구하는 데 사용하고, 감사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것 저것 잔뜩 간구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기를 공정하게 대우해 주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큰 복을 받지 못한채 지금의 모습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형식적으로 감사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는 감사를 여러분에게 표현할 때 여러분의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관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간구 제목을 가지고 형식적으로 기도한다. 이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그렇게 기도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기도 제목을 적어 놓은 목록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했을 때는 더욱 뿌듯해한다.
오해하지 말라. 여러분이 선교사나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로 약속했다면 반드시 기도해야하고, 그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는 선한 일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와 삶의 전반적인 상태를 측정해 볼 수 있는 기준이, 우리의 기도 생활과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 가운데 감사와 찬양의 요소가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아버지 하나님께” -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전능하고도 영원하신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행해야 하는 의무요,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찬송해야 한다. 모든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온 우주가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 이라는 단어에 ‘아버지’ 라는 단어를 붙인다. 이 ‘아버지’라는 단어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특별히 덧붙인 말이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아버지가 되어 주시지 않는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그들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매우 신중하게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아버지’ 라는 단어를 붙여 쓴 것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비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크고도 풍성한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항상(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그 자체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창조자가 되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 많은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
결혼과 가정을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남자에게 돕는 배필인 여자를 주셔서 함께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가정을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로 지정해 주셨다. 짐승과 달리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싸우거나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하루도 빠짐없이 감사해야 한다.
신체적인 필요들을 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한다.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며, 의식주를, 건강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누리는 개인적인 은사들을 생각해보라. 누구든지 일정한 능력이나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여러분이 그런 재능을 창조해 낸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값없이 주신 모든 것들을 숙고하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찬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베푸시는 긍휼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아직까지 진멸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 인자하심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꾀에 따라서 살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형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고 지도하며 돌보신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통치하며 세상을 심판하고, 천사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토록 영광스러운 장래를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계신다. 이런 이유로 사도는 우리에게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매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말할 뿐,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온갖 것들 때문에 하루에도 수없이 흥분하고 작은 일에 성공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자신들을 정직하게 돌아보자.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천국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흥분과 전율은 어디에 있는가? 감사와 찬양은 어디에 있는가? 항상, 항상, 쉬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사도는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 라고 말한다. 시련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질병을 앓고 있을 때도, 모든 일이 엉망진창일 때도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한다.(롬8:28) 심지어 징계를 받을 때에도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히12:5-11, 약1:2, 벧전1:5-7)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는 가장 깊은 옥에 갇히고 발은 차꼬에 매여 있었지만, 범사에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이 세상은 그분을 미워하고 핍박했다.
여러분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자신에게 물어보라. 혹시 나를 각성시켜서 정신을 차리고 나를 점검하게 하며 생각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닐까? 어쩌면 여러분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시는 약간의 징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증거인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로 모든 일이 형통한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한 손안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영원 전부터 세워 놓으신 계획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되 반드시 주 예수 이름으로 감사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된 형제자매 여러분! 불평은 너무나 쉽게 늘어놓으면서 찬양하기에는 굼뱅이같이 느린 우리의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지고 우리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엡1:18-19) 알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성경을 읽고 묵상하게 하시며 깊이 숙고하게 만드신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진리들을 깨닫게 될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의 권면대로 살게 될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로이드 존스, 『성경적 찬양』, 이태복역, 지평서원, 2009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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