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울서신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론 고찰

by 은총가득 2021. 5. 8.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론 고찰

- 4장 1절에서 16절을 중심으로 -

 

1. 서론

 

현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론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교인들이 태반이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18에서 이 세상 가운데 자신에게 속한 ‘하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1)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무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불러모으시겠다는 의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죄악에 익숙한 교인들은 종교적 욕망에 얽매여 주님의 교회를 자기 뜻대로 경영하려 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구속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제각기 자기의 취향에 맞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단 제한된 속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혹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따라 분리되어 경영되는 각각의 형편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지상 교회들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의 경험적 사고에 천착하는 것은 온당한 자세가 아니다. 도리어 성령의 조명에 의해 끊임없이 문제점을 확인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잘못을 교정하려는 자세가 있을 때 그나마 참된 교회에 접근하려는 본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를 과연 참된 교회라 할 수 있는가? 개혁주의, 보수주의를 자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맹이 없는 그러한 주장은 도리어 거짓을 조장할 따름이다. 우리의 고백은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고 있다. 교회라는 형식적 이름을 가지는 것 자체로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의 표지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본질적인 것임을 안다. 겉으로 보아 평온하고 세상적 축복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며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면 참 교회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교회인 것이 아니다. 교회의 표지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올바른 성례’가 집행되며 신실한 ‘권징사역’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이 참교회의 표지이다.2)

 

우리는 참교회를 규정짓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셋 중 하나는 제대로 잘 이행하는데 나머지 둘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이에 얼마나 충실한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에 온전히 부합한다면 참된 교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거짓교회일 따름이다.

에베소서에는 교회에 대한 많은 교훈들이 담겨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교회의 원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일한 하나의 교회의 실체적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시대의 형편과 참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위해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특히 4:1-16을 중심으로 연구에 임하고자 한다.

 

 

2. 에베소서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원상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의 원상은 어디에 기준하는가?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원상에 대한 개념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엡1:4)과 ‘하나님의 형상’(엡4:24)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서 교회의 원상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창세전의 선택과 예정에 근거(엡1:4,5)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인간들의 신앙심을 통해 세워나가는 종교단체가 아니다. 즉 인간들의 신앙작용이나 종교적 행동에 근거하여 교회가 세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6)”(엡1:3-6)

 

에베소서 1:3에 기록된 ‘우리’란 바울과 에베소 교회를 포함한 그와 연관된 지상의 모든 교회를 지칭한다. ‘우리’ 즉 ‘교회’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늘의 복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 복은 인간들이 땅 위에서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처음 사람 아담이 지어지기도 전인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자기 자녀들로 예정하셨는데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주님의 교회가 결정되어 인간 역사 가운데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지구상의 참된 교회의 원상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안에 선재(先在)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에베소서 1:6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 즉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3) 그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신령한 관계를 의미하며, 인간들의 종교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가신 경륜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의의는 원상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엡1:6)과 본질적으로 연관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창조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에 뜻에 온전히 순종함을 의미하며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Now unto him that is able to do exceeding abundantly above all that we ask or think, according to the power that worketh in us,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 Amen. Eph.3:20,21,KJV).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구절의 올바른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교회 안에’(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백성 가운데 존재하며 그들을 구속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다. 이는 창세전에 선택받은 자기백성의 전체 무리 곧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를 발생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로 인해 세워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어 전 역사와 공간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킹 제임스 역의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를 눈여겨보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교회의 원상에 대하여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본문은 에베소서 4:24이다.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찐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1-24).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22절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과, 24절의 “하나님의 형상”4)이다. 한글 개역성경의 ‘하나님을 따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음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의 실제적 능력을 제어 당한 채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기능이 마비된 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5) 이는 처음부터 그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고후4:4, 골1:15, 히1:3)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위에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 가운데서 ‘옛 사람을 벗는다’는 표현은 덧입고 있는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공동번역)을 회복하여 입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창세전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6)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이라는 문구에서 말하는 ‘창조된’ 시기는 창세기와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형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타락하기 전 아담이 가졌던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 이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그 옛 사람 곧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범죄한 옛 사람 아담의 형상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 형상을 입은 성도들의 모임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관한 교훈을 주면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의 모임인 교회와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실체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며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괄(throughout all ages)하는 하나의 우주적 교회(the Church)7)로써 동일한 본질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주적 교회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개교회는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시대 유행하는 개교회주의란 심각한 문제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교회주의적 교회란 이미 참된 교회에서 떨어진 교회로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라 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예배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음으로써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진 보배로운 그릇과도 같다. 그 영광은 인간들의 종교적 행위와 노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존재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상징적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매 주일 교회 가운데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과 연관된 매우 구체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즉 성경과 성례를 기초로 한 교회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의 존재로 의미를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교회의 형식과 실체(엡4:1-6)

 

(1) “하나의 단일한 교회”

이 세상에는 원리적으로 하나의 교회만 존재한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의 교회만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들이 조직한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회합이 아니며 공동의 종교의식과 동일한 인간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시고 경륜에 따라 친히 세우신 공동체로써 성령께서 불러 하나되게 하신 주님의 몸이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인식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어온 중요한 개념이다. 초대교회의 익나티우스는 교회가 하나임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그는 최초로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8) 이러한 교회의 하나됨은 교인들 사이에 상호 긍정적인 감정을 갖거나 종교적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 가운데 보여주실 때 그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9)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엡4:3)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분할하거나 나눌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 교회의 하나됨을 이야기할 때 지(支;肢)교회를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 옳은 생각일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말하면서 지교회나 교단내부 혹은 정치적인 입장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바는 진리와 고백을 근간으로 하는 우주적인 의미이다. 사도바울은 전체 우주적 교회가 하나의 교회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한다.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우리는 또한 이 가운데서 ‘세례’에 관련된 의미를 관심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세례는 교회가 고백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실제적 삶의 의미와 연관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의 고백적 반응과 연결되어 교회와 세상과의 경계 즉 담을 확인하는 것이다. 원리적 측면에서 보아 세례는 하나님의 선택과 연관이 되며 성령의 사역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은 세상에 전혀 있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성찬을 나누게 된다. 따라서 지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례는 개교회의 영적 판단이기기도 하거니와 전체 우주적 교회의 신령한 사역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세례는 지교회의 소관인 동시에 우주적 교회의 영적 간섭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 채 자의적인 세례를 베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욕망에 의존하여 그리스도를 떠난 배도 행위일 수 밖에 없다.10)

 

(2)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

교회는 인간들의 인위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마15:13, 참조) 하나로 모여진 경륜적 공동체이다.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불러모으시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종교적인 인간이나 종교조직이 부름의 주체가 되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할 일이다. 우리 시대에 ‘전도’라는 명분으로 부름의 주체가 마치 인간이나 기독교 조직이 되는 듯이 이해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엡1:4)을 가볍게 생각하는 종교적 포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장로교회 특히 보수주의 교회들은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백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의 고백은 사변적이며 거짓주장이라 할 수 밖에 없다.11) 그들은 말로는 칼빈주의를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예를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어느 누구도 성도의 수를 늘이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이 확정적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12)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은 종교적이며 자의적인 열정을 통해 끊임없이 교인들의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더 구원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즉 교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도들의 수를 늘게 할 수도 있고 줄게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신학적 자세가 아님이 분명하다.

 

사도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엡4:1)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성령께서 부르신 소명의 의미 가운데 존재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부르신 데는 창세전 선택에 근거한 고유한 의도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무관하게 자기 판단이나 경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도리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권징사역을 통해 상호 권면해야 하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고 요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권면’과 ‘용납’ ‘지킴’에 관련된 요구는 권징사역으로서 교회가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켜나가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성도의 윤리적 삶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세움을 위한 것이다.

 

 

 

 

(3) 천상에 연결된 교회(엡4:7-10)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는 천상에 굳건히 연결된 교회들이다. 천상의 나라에 연결되지 않은 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외견상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사랑이 많아 보이며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 할지라도 거짓교회이다. 나아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할지라도 천상과 분리되거나 떨어져 있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그렇지만 다소 부족해 보이고 변변치 못해 보일지라도 하늘나라에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아름다운 목청으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고 가난하여 이웃을 돕지 못하며 때로 갈등이 존재하여 사랑이 다소 부족한 듯 보여도 천상에 잘 연결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천상으로부터 허락된 은혜로서 은사 및 직분과 연관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별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 곧 직분을 통해 천상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즉 교회를 연결하는 끈은 개인의 능력이나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허락하신 다양한 직분인 것이다.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허락하신 신령한 은사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취향에 따라 직분을 주고 받거나 행사할 수 없다. 우리시대의 교회가 타락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은사와 직분을 통해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경험을 배경으로 한 개인의 역량과 성향이 직분을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사악한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든 교인들은 그럴 수 있는 소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살펴 그런 악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참된 기도가운데 존재해야 한다.

 

(4) 지상의 교회를 위한 직분적 질서13)(엡4:11-12)

교회의 직분은 역사적 교회를 상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교회들은 앞선 시대의 참된 교회를 상속받아 미래의 성도들에게 상속해 가고 있는 과정에 놓여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상 교회가 세상을 이겨나가는 방편으로 신령한 직분을 허락하셨다. 그 직분은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적 은사로 허락하신 것이다.

 

교회는 개인에 의해 다스려지거나 경영되는 단체가 아니다. 나아가 특별히 유능한 몇몇 지도자들에게 의존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백성들 가운데 세워진 직분을 통해 상속되며 세워져 간다. 참된 교회는 다양한 직분적 기능이 잘 이행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이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세워져갈 수가 없다.14) 주님께서는 직분자들에게 종교적 통치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봉사적 기능을 통해 이 땅의 교회를 유지하며 세워 가신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사도교회 시대의 직분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에베소서 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과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나는 직분은 일차적으로 사도시대 교회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사도시대 직분들이 이후 교회시대의 직분의 밑바탕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초대교회에 들어서서는 일정기간 동안 직분들이 명확히 정착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문서인 Didache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타난다. 초대교회 초기, 즉 속사도시대에는 선지자 직분이 있었으나 서서히 없어졌다.15) 이는 속사도 시대와 사도적 교부들이 존재하던 시대의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부터 목사, 장로, 집사의 교회 세가지 직분적 질서가 나타난다.16) 이는 사도교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교회적 직분이 정착되어 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분이 인간들의 종교적 합의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다. 이 직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즉 그 직분의 정착은 단순한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구속사 가운데 존재하는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직분들은,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즉 그의 몸된 교회를 인도하고 다스리기 위한 특별한 도구인 것이다.17)

 

(5)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엡4:13-16)

 

① “장성한 자의 모습”(13-1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장성한 자의 모습으로 자라가야 한다. 이는 신학에서 말하는 역동성 있는 성화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화란 신앙생활의 연륜에 따라 점점 역량을 갖춘 종교인의 모습으로 변모해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더 열성적인 종교인이나 도덕적인 인물이 되어 간다는 말도 아니다. 또한 교회적으로 보아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거나 재정이 풍족해져 가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장성한 자로 성장해 간다는 의미는 죄악으로 가득찬 세속에 대응하는 성숙한 자로 자라가야 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세속적 가치에 대한 판단능력과 방어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악하다. 사탄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 세상은 그 자체로서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어린 신앙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세상에도 선한 것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 태어나 죄에 익숙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객관성 없는 미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도 선한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좋게 보이는 그러한 것들이 도리어 성도들을 미혹하는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정신차려 견제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면 죄악 세상과 분리된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장성한 교회는 세상과 분명히 구분되는 모습을 지닌 교회이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 세상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음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다. 또한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교회 가운데 지속적으로 선포하며 확증 짓고 있는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들 가운데는 덩치만 큰 미숙아들이 많다. 물론 그 가운데는 단순히 미숙할 뿐 아니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교회들도 많이 있다. 나아가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거짓교회들도 많이 있다. 교회의 외형이 화려하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교인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세상과의 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런 교회는 미숙아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재정이 풍부해 그럴듯한 종교 활동을 하고 소위 선교와 구제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외관상 좋게 보일 따름이며 실상은 매우 위험한 종교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는 그 미숙아들이 스스로 성장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있다. 그들 중에는 미숙할 뿐 아니라 병들어 자기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선교와 구제에 힘을 쏟으며 종교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들 마저 많이 있다. 그들은, 그런 활동을 통해 종교적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 자신의 몸이 성장을 멈추어 점차 병들어 죽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②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15)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성도들은 그에 붙은 지체이다. 이는 교회가 천상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이자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예외없이 그 머리에 달려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머리에서 분리된 몸체나 지체란 있을 수 없다. 머리의 지시를 거부하는 몸과 지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머리로부터 분리된 몸이라면 그것은 죽은 몸이며, 머리의 온전한 통치를 거부하는 몸이라면 그것은 정상적인 몸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사악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마치 교회의 머리인 양 행세하고 있다.18)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해 자신이 머리인 양 행세하는 지도자들이 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의사나 지시를 거부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머리의 의사와 관계없는 자신의 판단을 내세워 마치 머리가 그렇게 지시한 것처럼 성도들을 기만하거나 호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명백한 불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이 구절에서 말하는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은 불법을 행한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종교적 활동을 했지만 그들은 머리의 의사와 지시에 아무런 관계없이 자기 판단대로 종교적 활동을 했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핑계대어 사탄의 능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던 자들이다.

 

문제는 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리고 순박한 교인들이 그 거짓 지도자들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빗대어 자기 주장을 하는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을 따라 다니며 그것이 마치 주님을 위하는 것인 양 믿으며 미련하고 값없는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자기를 살찌우는 거짓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에 고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자기를 살찌우는 자들을 경계함으로써 연약한 형제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사도교회 시대부터 말씀을 팔아먹는 삯군들이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고후2:17, 표준새번역).

 

③ 지체로서 연결된 교회(16)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참된 교회라면,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支/肢)교회 내부에서 뿐 아니라 전체 보편교회와 우주적인 교회에서도 공히 적용되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로 엮어져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

 

이는 조직적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의해 상호 교감되는 유기적 연결을 말한다. 사람의 몸의 한 부위가 병들거나 아프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우리는 가정에서 그 원리를 어느정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고통에 빠지게 되면 나머지 가족 역시 그와 동일한 혹은 그 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에는 그 의미가 본질상 더 민감하게 나타난다. 교회에 속한 한 성도가 문제를 당하게 되면 온 교회가 그와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현실교회에서 그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체로서 연결된 유기적 교회 공동체라 할 수 없으며 이는 죽은 교회나 다름이 없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개교회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는 더 많은 축복을 받고 또 다른 어느 교회는 덜 축복받은 교회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 시대 어떤 교회가 그런 식의 주장을 한다면 주님의 몸에서 떨어져 분리된 거짓 교회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 이상 아니다. 물론 아직 어린 자태를 벗지 못한 경우를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원리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 간에는 누가 잘나고 못났다고 하는 세상적 차별 개념이 없다. 오로지 주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말씀과 은혜에 온전히 참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따름이다. 모든 지교회들이 머리인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는 지체들이라면, 어떤 교회도 다른 참된 교회들과 차별화를 시도해서는 안된다. 이는 특히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염두에 새겨 두어야 할 내용이다.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교회라면 어지러운 세파 가운데서 그 몸에 온전히 붙어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애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과 차별화를 시도함으로써 특별한 모습을 보이려 한다면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위험한 시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4. 결론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실체가 창세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자기형상에 따라 짓기로 작정하신 택한 자기 백성을 예정하고 계셨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에 빠진 자녀들을 경륜 가운데서 주님의 교회로 모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한다. 아담이 범죄하여 멸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자기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형상을 지닌 ‘자기 백성’(마1:21)을 불러 교회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인위적 종교단체가 아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교회 가운데서 인본주의적 종교활동을 장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창세전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기쁨의 대상이다. 사탄이 아담을 통해 파괴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그 영광을 회복하신 것이다. 참된 교회는 인간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회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지상의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창조와 구속의 의미를 확인해 가야 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께서 직접 창설하신 단일한 하나의 우주적 교회에 속해 있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주님의 교회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주적 교회는 천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전적으로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다. 모든 지교회는 보편교회와 우주적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하며 천상의 보좌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교회는 세상의 긍정적인 평가와 칭찬에 관계없이 참된 교회라 할수 없다.

 

시대를 초월하여 천상에 연결된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 특별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사든 장로든 혹 전체 교회회원들의 집합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와 직분에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그의 뜻에 따라 온전히 세워가는 일에 겸손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에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흥하여야 하고 다른 모든 이들은 쇠하여야 하는 것이다.19)

 

우리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에 대한 이해가 절대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런 자들은 자기의 경험에 의해 종교적 회합을 만들어 가기 위해 모든 종교적 열정을 쏟는다. 교회는 인간의 경험이나 열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어 그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을 돌리며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위한 도구로 만드는 오만한 자리에 빠지게 된다.

 

교회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은 지체이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의 소중함을 깨닫는 가운데 지상의 교회들에 대한 성경적 상호 비판(criticism)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세워 나가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지나간 교회들을 거울삼아 성경말씀에 기초한 건전한 비판을 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교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배도한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주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이 우리 가운데 많아지기를 바란다.이광호 목사/실로암 교회

 


목사와 교사는 서로 다른 직분인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1)

여기 목사와 교사를 두 개의 별개 직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헬라어에서 같은 전치사에 의해 함께 묶여 있음을 인정한다. 또 '그리고' 라는 접속사로 되어 있으므로 두 단어가 하나를 가리키며 같은 것을 언급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게 날카로운 구분은 그 말들이 복수일 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복수일 경우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면 에베소서 2:20에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하나여야 하고 같은 직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의 직분이나 은사들은 성경적으로 구별된다고 한다.1) 그리고 이 경우에 교사들은 어느 정도 목사보다는 책임이 덜한 직분이라는 것이다.2)

여기서 언급하는 사도나 복음 전도자 그리고 선지자는 주로 교회의 설립과 개척에 연관이 있다면 목사와 교사는 교회의 날마다의 세움을 위해서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목사의 의무는(문자적으로 목자) 양떼를 영적 양식으로 먹이고 영적 위험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다(벧전 2:25; 5:4; 벧전 5:2; 참고, 요 21:15-17; 행 20:28). 따라서 목사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딤전 3:2; 참고, 딛 1:9). 물론 교회 안에 따로 교육을 전담하는 사역자가 있더라도 목사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3) 양떼를 먹이는 것은 가르치는 교수를 방편으로 한다. 그러므로 교사들은 바울에 의해 덧붙여진 두 번째 용어이다. 디모데전서 5:17은 장로들이 특별히 말씀과 가르침에서 힘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선한 목자의 사역은 가르치는 것으로 그의 이름의 하나가 교사이다(마 28:20).4)

여기서 목사는 지역 회중의 사역자로 가르치는 장로를 가리킨다.5)
브르스(Bruce)도 이 용어들은 한 계급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는 서로 다른 직분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바울은 목사의 직무나 책임을 강조하여 설명하기 위해 목사와 교사란 말을 더했을 것이다.

 

 

목사와 교사?

(엡4:11)

 

성경에 보면 다양한 직분들이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구약적 직분인 선지자, 제사장, 왕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직분들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모두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도는 예수님의 11명의 제자와 맛디아 그리고 바울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이들은 구약의 선지자와는 다른 직분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엘과 및 사울이라”

고전12장 28절에 말하는 선지자와 교사는 아마도 초대교회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직분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고전12장 28절에 있는 직분은 오늘날의 교회에는 없는 직분들입니다.

 

에베소서에도 낯선 직분들이 나옵니다. 엡4장 11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 본문을 유의해서 볼 때에 성경에 나온다고 무조건 오늘날에도 그 직분이 존재해야 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도도 없고, 선지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 “목사와 교사”라고 언급된 직분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존재하는 직분입니다.

참고로 여기에서 말하는 ‘교사’는 일단은 행13:1과 고전12:28에 나오는 ‘교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직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직분은 무슨 직분입니까?

설마 여기에서 말하는 교사를 주일학교 교사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어떤 설교자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은 무시하고 위의 본문에 나오는 ‘교사’를 단순히 주일학교 교사라고 생각하고는 “(주일학교의) 교사는 목사만큼이나 중요하다” 라고 설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너무나 naive하고도 단순하게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에베소서가 기록된 당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주일학교의) 교사는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자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어떤 사람은’이라는 말이 각각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에게 한 번씩 붙습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사’에게는 각각 붙지 않고 한 번만 붙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볼 때 ‘목사와 교사’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직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글번역에 “목사와 교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원문에 따라 제대로 번역하면, “목사들 즉 교사들”(τοὺς ποιμἐνες καὶ διδἀσκαλοι)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를 잘 읽을 줄 몰라도 대충 보면 정관사(τοὺς)가 하나만 나오고, 그 뒤에 두 단어를 ‘접속사’(καὶ)로 이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 다시 말해, ‘목사들’이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있는데, ‘교사들’이라는 말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목사와 교사를 하나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에 따라서 1900년대 중반 칼빈신학교의 조직신학자였던 벌코프는 에베소서 4:11의 “목사와 교사”라는 말은 “두 종류의 다른 직임들(two different classes of officers)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연관된 기능을 지닌 한 종류의 직임(one class having two related functions)을 구성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라고 말했습니다.2)

시카고의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웨인 그루뎀은 아예 “목사-교사”(pastor-teacher)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합니다.3)

다시 말해 엡4:11에서 말하는 “목사와 교사”는 “목사 즉 교사”라고 해야 맞고, 목사의 중요한 역할인 ‘말씀의 교사’로서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분’이라는 사실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4)

 

전통적으로 장로교회는 디모데전서 5장 17절 말씀 “잘 다르시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에 근거하여 두 종류의 장로가 있다고 봅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로입니다.

치리 장로라 부르는데, 이들이 하는 중요한 역할은 딤전5:17에 따라 ‘다스리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치리(治理) 장로’라고 부릅니다.

 

다른 한 장로는 우리가 흔히 목사라고 부르는 직분입니다.

목사라고 불리우는 장로는 다른 말로 ‘가르치는 장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중요한 역할이 가르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엡4:11에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로 “목사 즉 교사”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입니다.

목사의 중요한 역할을 교사의 역할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공적예배 이외에 여러 방법으로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5)

이 사실이 딤전5:17에서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οἱ κοπιώντες ἐν λὀγω καὶ διδασκαλἰᾳ)로 표현되어서 목사의 본래적이고도 중요한 직무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6)

그래서 전통적으로 목사를 가리켜 ‘교회의 교사’라고 불렀습니다. 목사는 각 교회에 허락하신 교사입니다.

 

이처럼 목사의 중요성은 목사라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감당하는 직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7)

이러한 사실은 딤전2:7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내가 이방인의 스승(교사)이 되었노라”라는 문장에서 목사의 직분적 역할이 사도의 역할에서 이어진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딤후1:11에서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는 말로 목사의 직분적 역할과 사도의 직분적 역할이 어떤 점에서 연관성이 있는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치리 장로는 목사와 달리 다스리는 일에 치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가 장로의 역할을 다 감당하려고 하거나, 장로가 목사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근거하여서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로서의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ruling elder)로서의 장로’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성경에 근거한 직분을 유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8)

 

나아가 목사가 교사로서의 본분 외에 다른 일에 치중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크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목사의 직분을 맡은 자가 ‘설교’와 ‘가르침’의 일은 전혀 하지 않고 ‘행정’ 혹은 그 밖의 다른 사역에 치중하는 것은 교회를 말씀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세우지 못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심지어 ‘음악목사’와 같은 이상한 목사직의 존재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각각의 직분에 합당한 은사에 따라 적절히 시간과 사역을 부여하여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 세워져 가야 할 것입니다.


1) 여기에서 “카이”(καὶ)는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으로 사용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586;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4), 913. See again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4), 348: “it is appropriate ... that the two terms, ‘pastors and teachers’ should be joined together to denote one order of ministry”; Ralph P. Martin, “Ephesians”, in New Bible Commentary (Leicester: IVP, 1970), 1116; A. Skevington Wood, “Ephesian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11 (Grand Rapids: Zondervan, 1978), 58와 Alfred Martin, “Ephesians,”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Chicaago: Moody Press, 1962), 1311은 그리 강하지는 않으나 자연스럽게 이런 해석에로 나아가고 있다. Harold W. Hoehner, “Ephesians,” 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N. P.: Victor Books, 1983), 635도 그렇다. 그러나 그는 Wood보다는 좀 더 강하다. Francis Foulkes, Ephesians,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89), 127f.는 자연스럽게 이 둘을 연관시키면서도 디모데서와 연관해서 교사로서의 교훈 장로와 치리 장로의 구별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는 그 둘 모두가 목회자라는 좋은 해석의 시사를 주고 있다.

 

3) Grudem, Systematic Theology, 913.

 

4)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348.

 

5) 칼빈은 한편으로는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암부로시우스에게 동의하면서 (또 제롬의 견해와 같이) 목사와 교사의 직무를 연결시켜 말하면서(Comm. Eph. 4:11), 또 한편으로는 목사와 교사를 분리시켜 언급하기도 하였다(Institutes, IV. iii. 4; Comm. Eph. 4:11). 그 때 교사는 박사들(doctors)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오늘날의 신학교 교수와 비슷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일만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었음에 유의하라. 그들은 “교회의 선생님들”(doctor ecclesiae)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이해하는 교사는 성찬을 집례하지 않고, 학교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무를 전담하는 이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가르침은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지만, 바른 교리를 유지하는데는 성경을 해석하는 은사만 있어도 된다”고 하면서 목사가 아닌 교사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서 목사직의 교사로서의 기능, 가르치는 기능이 배제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하라.

이와 같이 목사와 교사직을 구분하여 논의하는 대표적인 예들로 다음을 보라: C. Leslie Mitton, Ephesians,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3; reprinted, Grand Rapids: Grand Gapids, 1989); Andrew T. Lincoln, Ephesians, WBC, 42 (Dallas, Texas: Word Books, 1990), 250-52.

이하에서 우리가 취할 해석과 이 해석을 모두 다 허용하고 있는 견해로는 Francis W. Beare, “Exegesis to the Ephesians,” in The Interpreter's Bible, vol. 10 (Nashville: Abingdon Press, 1953), 691; Richard J. Erickson, “Epehsians,” in Walter A. Elwell, ed.,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Grand Rapids: Baker, 1989), 1027을 보라.

 

6) 이렇게 에베소서 4:11의 “목사와 교사”는 디모데전서 5:17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명확히 확언하는 논의로 다음을 보라. John Murray, “Office in the Church,”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2: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7), 361. Ralph Earle은 이 구절에서 교훈 장로와 치리 장로의 구별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에 반대하나, 그가 이에 대해서 주고 있는 설명은 장로교인들이 교훈 장로와 치리 장로를 구별하는 것에 정확히 상응한다. Cf. Ralph Earle, “I Timothy,”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11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80.

 

7) R. B. Kuiper, The Glorious Body of Christ: A Scriptural Appreciation of the one Holy Church(Grand Rapids: Eerdmans, 1966;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7), 141. 목사의 설교하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허순길,『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서울: 총회출판국, 1994), 53-62를 보라.

 

8) 많은 이들을 이를 분명히 하지만 특히 회복에 대한 강조로 허순길,『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 71, 74를 보라. 디모데 전서에 이런 구별되는 장로들의 시사가 있을 수 있다는 해석들로 다음을 보라. Walter Lock, The Pastoral Epistles, ICC (Edinburgh: T. & T. Clark,, 1924), 62; 특히 Donald Guthrie, The Pastoral Epistles,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90), 117: “which may point to a particular class within the presbyterate.” 손재익 목사


오르고 내린다는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하려 하심이니라" (엡 4:9-10)

이 본문은 에베소서의 주제로 보아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르고 내린다는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땅 아랫 곳은 어디인가? 여러 가지 하늘들이 있는가? 무엇으로 그가 온 우주를 채우시는가?

본문은 시편 68:18의 인용에 대한 바울 사도의 해석으로 여기서 바울은 그 본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부터 이 구절을 두 번 이탈시켰고 70인 역 본문에서는 약간 다르게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1) 주께서의 제2인칭을 그의 3인칭으로 사용했다. (2)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대신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고침으로 선물을 주신 자를 존귀(尊貴)케 했다. 그래서 시편의 단어와 문자적 의미와는 모순되게 취했다. (3) 시내산에서 시온으로 하나님의 내려오심 대신에(시 68:17)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보좌에로의 승천을 찬미하였다(엡 1:20). (4) 이 구절에서 오르셨음을 인정한 것은 일찍이 내리셨음을 예상하고 말하였다(4:19).

그러면 어떻게 바울은 이렇게 네 가지로 과감하게 변화를 시킬 수 있었는가?
바울이 이렇게 해석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학자들은 탈굼 역보다 후대에 나온 랍비적인 시편 본문의 해석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면 올라가시고 내려오신 분은 누구를 가리키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1. 올라간 자를 모세로 보고 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와서 율법을 준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원래가 랍비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므로 그들의 해석에 정통하고 있었다.

2. 또 어떤 학자들은 성령님이라고 생각하였다. 내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순절 이 후에 그의 성령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리심이 성령을 가리킨다면 지구의 낮은 부분은 땅 아래를 의미해야 한다.

3. 또 만일 성육신에 관해 말한다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본문을 베드로전서 3:19과 4:6과 병행 구절로 보아 그리스도의 내림을 그의 십자가 후에 그의 오시기 전에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전서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으나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가 올라가신 곳은 최고의 하늘이요 그가 내리신 곳은 단순하게 이 지구(땅)를 가리켰을 것이다.1)

세 번째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장 타당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 올라가신 분은 먼저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신데 이것은 요한복음 6:38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신 말씀이나 요한복음 8:14에 내가 가는 곳을 내가 안다는 말씀 그리고 요한복음 6:28에서 "나는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신 사실을 보아 자명하다.

여기서 내리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의 인자의 오심을 가리키며 낮은 곳은 땅의 가장 낮은 곳 즉 지하 세계 죽은 자의 세계인 하데스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정점 즉 죽음과 장사를 가리킨다. 낮은 땅의 곳은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하늘의 높은 곳과 대조하여 쓰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온 우주를 채우신다는 말씀의 뜻을 생각하기로 하자. 이 말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1. 그가 모든 예언을 성취하실 것이다.
2. 그가 당신에게 할당되었던 모든 과업을 성취하신다.
3. 그가 우주를 그의 편재하심으로 채우신다.
4. 보다 더 자세하게 그의 몸을 포함해서 그의 인성이 완전한 기쁨이 되고 신적인 완전을 활용하시므로 영구하게
편재하시며 전능하게 되셨다는 뜻이다.2)

또 다른 해석은 위의 것과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1. 우주를 그의 임재와 능력으로 채우신다.
2. 그의 나라에 관한 모든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이 성취된다.
3. 그가 은혜와 선하심으로 모두 완전하게 하시며 가득하게 해 주신다.
4. 그가 그의 사역의 완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실 것이다.3)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자. 바울의 해석은 그리스도가 죄를 대속하신 갈보리의 지옥으로 내려가셨음과 이 대속이 온전히 용납되었음의 증거인 그의 부활과 승천의 결과로 이제 높아지신 중보자로서 온 우주를 축복으로 채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물은 그가 얻으신 것으로 온전한 무상의 구원인데 사도와 선지자들과 전도자들이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의 복음의 선포로 이 세상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바클레이(Barclay)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버림받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충만한 세상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지금 예배드리는 분이 올라가신 주님이신데 그 분은 동시에 내려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며 우리의 슬픔과 시련들 그리고 시험들을 나누신 같은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그의 백성의 슬픔이나 시련이나 시험을 느끼시며 동정하신다.4)


1. Francis Foulkes, Ephesians, Revised ed.(IVP, 1989), p.124
2. William Hendriksen, Ephesians(Baker Book House, 1967), p.194
3. Charles Hodge, Ephesians(London: Banner, 1964), pp.221-222
4. Fra


교회의 일치와 연합(엡 4:1-6)

 

바울은 앞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바울의 이러한 기도는 곧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뜻이란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어진 진술은 보다 실천적이 측면에서 교회의 일치와 연합, 그리고 변화된 성도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교훈들을 주고 있는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2:1-6:20절까지는 본서의 본론이다. 그중 3:21까지는 본론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회론을 중심한 교리적 교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4:1-6:20까지는 본론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교회론에 관한 교리적 교훈에 상응하는 실천적 교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는 전반부로 1-16절까지다. 여기서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의 근거를 소개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각 성도들 간에 서로 일치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중반부는 17-24절이다. 여기서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일련의 교훈을 진술하는 4:17-5:1까지의 개시 부분이다. 끝으로 25-32절까지가 후반부이다. 여기서는 넓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관련한 교훈들을 기록하고 있고, 좁게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마땅히 요청되는 새 삶의 방법으로 대인(對人), 대신(對神)관계에 있어서의 성도의 태도에 대해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1-6절까지의 본 단락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함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분류로 구분된다.

 

 


1. 교회의 일치를 위한 권면(1-3절)

이 부분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성도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세 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1)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권면

바울은 1절의 시작을 ‘그러므로’라고 운을 뗐다. 이는 3장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을 위한 수사이며, 그동안 앞에서 설명한 1장부터 3장까지에서 언급했던 교리적인 문제를 전제한 표현이기도 하다. 바울의 서신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가 교리적인 부분을 앞서 이야기한 다음 실천부분으로 이어진다. 즉 믿어야 할 것으로부터 행해야 할 것으로, 이론적인 신학에서 실천적인 실생활의 문제로 나아가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본문도 그동안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었기에 이제 실행과 관련한 교훈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므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원리가 그러하기에’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일차적으로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구금된 상태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런 언급은 3장 1절에서도 밝힌바 있다. 거기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은”이라고 표현 하였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단순히 ‘주 안에서 갇힌’ 것으로만 표현하였다. 앞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였기에 더 이상의 서술이 필요치 않지만 여기서 다시금 자신의 갇힌바 된 것을 표명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성도들 간에는 여러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측이 든다. 그리고 그 염려는 바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도가 왜 그렇게 어려움만을 당하는가에 대한 의혹이 더욱더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때나 이 때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맞은 현실을 통해서 믿음 안에 더 많은 고난과 수욕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재물의 풍요나 육신의 안일보다 훨씬 더 크고 큰 축복이요 행운이란 사실도 망각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희생은 그만큼 그 영광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는 까닭이다.
자신이 갇힌바 된 문제를 언급한 바울은 수신자인 에베소 지역의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하였다. 이것이 무엇보다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제 일순위의 덕목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7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라고 말한 바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씀한 바도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육신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육신의 안녕이나 금생의 영광을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거룩’이란 표현이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권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바울이 이러한 권면을 자신이 감옥에 투옥된 사실과 연결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비록 현실은 감옥에 투옥되어 심히 큰 고난의 삶을 산다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이 ‘주 안에서 갇혔다’고한 표현에서 잘 나타내 준다. 그리고 이것이 곧 교회와 성도들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가장 우선적인 덕목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오래참고 서로를 사랑하며 용납할 것을 권면

두 번째 교회와 성도들의 일치를 위한 덕목으로는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과 사랑’을 이야기하였다. 여기서 ‘겸손’이란,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를 낮추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프로쉬네스’(ταπεινοφροσύνης)가 ‘낮아짐’이나 ‘비하’란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의 겸손은 자신의 죄임 됨을 인정하는 자세와 함께 주님의 뜻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자세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신(빌 2:8) 것과 같이 자신의 옛 본성과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 뜻에 복종함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겸손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기서의 겸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리해야 함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교회의 일치를 위한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2장 3절에서는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9절에서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말하기도 하였고, 본서 바로 앞장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고 언급한 바도 있다. 성도들은 누구에게나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교회의 일치를 위한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겸손 다음에는 ‘온유’를 말하였다. 온유로 번역된 ‘프라우테토스’(πραΰτητος)는 ‘친절한’, ‘너그러운’이란 뜻을 가진 ‘프라우스’(πραύς)에서 유래한 단어로, ‘온화’, ‘정중’, ‘유순’, ‘온순’이란 뜻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옥스퍼드원어성서대전에서는 “이 온유함은 약함으로 인한 온순함을 의미하지 않고 강함을 절제함으로써 나타내는 부드러움”이라 표현하였다.
주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의 능력자이시지만 구원을 위해 안나스나 빌라도의 재판을 다 받아내셨듯이 온유함은 곧 급격하거나 과격한 성품에 반대되는 성질을 말한다. 주님을 위하고 복음을 위해서 할 말이 많지만 절제하고,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일만한 일이지만 자기를 억눌러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대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온유’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가 곧 교회의 일치를 위한 중요한 덕목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무엇보다 말에 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또 급격한 성격을 드러냄도 심히 삼가야할 부분이다. 이것이 안 되면 교회의 일치는 물론이고 일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친교나 교통이 불가능하다.


온유 다음에는 ‘오래 참음’을 이야기 했다. ‘오래 참음’으로 번역된 ‘마크로뒤미아스’(μακροθυμίας)의 원형인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ία)는 ‘멀다’, ‘길다’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마크로스’(μακρός)와 ‘진노’나 ‘분냄’이란 뜻의 명사 ‘뒤모스’(θυμός)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으로는 ‘분노로부터 거리가 먼 감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인내란 차원을 넘어 오래 참음이라 표현한 것은 성도가 갖추어야 할 인내는 그만큼 멀고 긴 싸움임을 나타내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해야 할 것을 말씀했다. 그야말로 끝없는 인내, 끝없는 오래 참음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성도들에게 있어서 오래 참음이 필히 요구되는 것은 성도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금생의 문제가 아니라 내생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에나 받게 될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므로 이 땅에서는 죽기까지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하지 않고서는 누구라도 이내 실망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일치를 위한 권면이란 측면에서 보면 성도들 간에는 피차에 서로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배려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상대가 맞추어 주기를 바라서는 성도들 간의 연합이나 교회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오래 참음을 사랑가운데서 용납하라는 말과 연결하였다.


분을 삭이며 참는 것도 아니고,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어쩔 수 없어 가만히 있는 경우와도 본질이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사랑 때문에 참아주고 용납하며 기다려주는 것을 뜻한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무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였던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주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것을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경우나 상황도 못 참아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진다. 따라서 성도가 있는 곳에는 그곳이 어디이든 언제나 평화가 넘쳐날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더욱더 교회는 그러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오래 참음이란 심히 아름다운 덕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을 권면

바울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을 또 하나의 교회 일치를 위한 덕목으로 제시하였다. 이를 원문의 뉘앙스를 따라 직역하면 ‘성령이 주신 연합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라’가 된다. 성령이 주신 연합이란 믿음 안에서, 곧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 교회공동체를 가리킨다. 당시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는 남자와 여자와의 인식에 대한 격차도 심히 컸다. 또 개론에서도 살펴 본 바와 같이 당시 초대 교회는 대내적으로 구속사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갓 이전된 시기였다. 따라서 아직은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 및 제반 요소들의 연관성, 곧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등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울려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간에 많은 갈등이 대두되게 되었고, 아울러 교회의 질서유지와 성도간의 일치와 화합의 문제가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당시의 양대 이단인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와 영지주의(Gnosticism)의 범람으로 인하여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도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주 안에서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란 사실을 강조하며, 민족과 신분, 남녀란 성별적 차이를 포함하여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이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은 하나의 공동체임을 말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교회 공동체를 힘써 지키라는 것은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고, 진리 안에서 성도들 간에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연합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평안의 매는 줄이란 말도 ‘평화’, ‘화평’, ‘일치’, ‘조화’란 의미의 단어로서 같은 뜻이다. 교회 안에, 성도들 공동체간에 서로 화평하고 일치를 이루기 위해 각자 힘을 써야 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해 주셨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교회 일치와 연합의 근거와 당위성(4-6절)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덕목을 제시한 바울은 이어지는 4-6까지 그 근거와 당위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왜 교회 공동체가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한 근거는 3가지로 요약된다.

1)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

바울은 4절에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라고 진술하였다. 여기서 ‘몸이 하나’란 말은 하나의 성령임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육체에 손과 발 등 여러 지체가 있지만 그것이 결국 하나가 아니냐는 설명이다. 이처럼 각 사람을 하나님 앞에 불러내신 성령 역시 그 역사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고, 그 증거 역시 다르게 역사할 수 있으나 동일하신 성령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너희의 부르심’이라 할 때 ‘너희’로 번역된 ‘칼레오’(καλέω)는 과거 수동태이면서도 목적격 소유격이다. 그러므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은 그 주체가 성령임을 뜻하고, 아울러 이는 아무나 부름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란 제한적 의미를 갖는다. 즉 창세전 선택된 자들로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를 전제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한 소망’ 안에서 부름을 입었음을 피력한다. 여기서의 이 한 소망은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나타낸다. 앞에서도 잠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려는 한 소망 안에서 선택을 받고 부르심을 입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필연적으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인종과 혈통이 다르고 각자 살아가는 삶의 양태가 다르다 할지라도 부름을 받은 소망은 오직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 역시 소망은 하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영생, 곧 하늘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2)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이시기 때문

이 역시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앞과 동일하다. 주가 하나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함을 받은 것이 누구나 동일하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실제 성도들은 아담에서부터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까지 모두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함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위한 행위언약이 대표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역사였다. 때문에 성도들은 주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같은 부모에게서 출생한 형제자매와 같이 성도들은 모두 같은 주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 사랑의 매는 줄로 연합하며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만 하나가 아니라 믿음도 하나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 역시 동일하다는 표현이다. 이 믿음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에게 주어진 믿음은 크고,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믿음은 작은 것이 아니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고 효력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사람마다 각자 믿음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그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가 어떤 자세로 임하는가의 차이에서 생겨지는 현상이지 본래 믿음이 다르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세 번째 세례도 하나라고 하였다. 이는 믿음의 결과론적인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표현이다. ‘세례’란 본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었음을 믿는 믿음의 표로 받는 성례식이다. 때문에 여기서 말한 ‘세례’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결과 역사 하나란 사실을 말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도 똑 같고, 장차 영광스런 부활에 이르는 것 역시 모두가 동일하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도 하나이심을 이야기하였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미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부터 이어져온 신앙의 유산이다. 앞에서 주도 하나요 라고 한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표현한 것이라면, 여기서 하나님도 하나라고 한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임을 나타내고자 한 표현이다. 즉 나타나기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즉 다른 이름, 다른 사역을 하시는 것으로 언급되었지만 실제는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의 중심이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이시되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창조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만사 만유의 창조주시란 뜻이고, 또 하나 구속사적인 의미에서는 그가 어느 민족, 어느 혈통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한 자들은 모두 한 분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본문이 교회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 간에 일치와 연합을 이룰 것을 교훈하고자 하는 측면이란 사실에서 보면 후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한 분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이니 성도들 간에는 다툼과 분리가 있어서는 안 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연합과 일치의 당위성을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오직 하나님 홀로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가운데 계시기 때문

이 부분 역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앞에서와 같다. 성도들 간에 일치를 이루고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함은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아래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원어성서대전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초월성, 편재성, 그리고 내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만유’란 뜻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란 뜻이다. ‘통일하시고’란 그 만유 위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하여 공동번역성경은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위에 계십니다”라고 번역하였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홀로 만사 만유를 통치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교회공동체는 시기나 다툼이 아니라 서로 화평하고 피차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바 사명에 역량을 다하여 교회 공동체를 위해 힘써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은 진리를 뛰어넘는 일치나 연합을 말함은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5장 6, 7절에서는 불순종의 아들들과는 함께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일치와 연합은 오직 진리 안에서 하나 된 성도들, 곧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향한 교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시대는 기독교가 막 이방에 세워져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외부로는 로마정부와 유대교의 박해에 직면해 있고, 내부적으로는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자들의 준동과 같은 이단사상들이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은 교회들과 성도들 간에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해야만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말세지말은 교회가 아닌 교회들이 난무하고 올바른 진리를 찾기가 심히 어려운 시대이다. 그러므로 좀 더 눈을 크게 부릅뜨고 교회들을 살피고 구분해야한다. 그러나 반면에 같은 진리 안에 있는 교회나 성도들 간에는 좀 더 일치와 연합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올바른 교회가 없는 시대에 그나마도 화합이 안 된다면 주님의 역사를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까닭이다.


외국에 나가 여행을 하면서, 특히 길을 잃은 사람이 같은 민족을 만나게 되면 그처럼 반가운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삶이 이와 같은 경우로 비교할 수 있다. 어디를 가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인 것 같지만 성경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믿음의 소망을 달리하는 사람들로 우리 주변들이 꽉 채워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믿음, 같은 소망, 진리에 대해 같은 방향으로 이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는가? 외국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같은 동족, 동향 사람을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귀하게 생각하고 서로 돕고 협력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중국의 교회를 위해 많은 시간과 물자를 투자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너무나도 귀하고 마치 보화처럼 각별하게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같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소망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서로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며 합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곧 주님의 뜻이고,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이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의 결론이다.

http://chongshin.re.kr/zeroboard/zboard.php?ncis Foulkes, op,cit., p.125

 

 

 

 

 

 

은사와 교회(엡 4:7-16)

 

교회의 일치와 그 당위성을 설명한 바울은 본문에서도 같은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본 단락에서는 조직적인 교회로서의 유기적 연합과 성장에 대해 설명해가고 있는 부분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하여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직접 설립하신 공동체이다.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성도 개개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 가도록 복음을 통해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고 오는 시대에 올바른 진리와 교회를 상속해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따라 다음 세대에 올바른 복음과 교회를 넘겨주어야 하는 사명을 말함이다. 크게 보면 이 두 가지가 교회에 맡겨진 가장 중차대한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이러한 교회의 책무를 바르게 깨달아 다툼이나 분쟁이 아니라 오직 한 몸, 곧 지체의식을 갖고 이를 위해 공동의 노력과 힘을 써야 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본 단락은 넷으로 구분하여 설명된다.

1.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의 정의(7-10절)

바울은 먼저 7절에서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 토 메트론 테스 도레아스 투 크리스투’(κατὰ τὸ μέτρον τῆς δωρεᾶς τοῦ Xριστοῦ)다. 이를 의역하면 ‘그리스도께서 주고자 하시는 대로 주어진 선물’이란 뜻이다. 그리고 ‘은혜’로 번역된 ‘카리스’(κάρις)는 구원과 관련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도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11절에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등 성도들 각자에게 주어진 다른 직분과 관련한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란 사실

때문에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이라고 하였다. 성도들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에 따라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감당토록 하신다는 뜻이다. 기본 구원과 관련한 문제도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지만 은사 역사 그 주권은 그것을 주시는 주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면 전적 주인의 의지와 의사 결정에 의해 각각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혹은 두 달란트, 혹은 한 달란트를 주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즉 은사를 받는 자의 편에서 무엇을 요구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어떤 행위나 공로에 의해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이를 선물이라 표현했다. 100% 하나님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란 뜻이다.

2) 은사의 종별과 분량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는 것

즉 누구나 동일한 은사일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그런 진술을 한 바 있다.
(고전 12:14-17)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이 말은 고린도 교회가 은사 문제로 혼란과 갈등이 있었기에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 몸을 비유로 삼은 내용이다. 그러기에 이어진 27절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 12:28-30)라고 반문하였다.


바울의 진술의 취지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한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에 시기나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됨을 강조한 표현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가 주어졌다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한다면 마치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최고의 은사를 받기를 소원한다. 평신도들의 믿음의 소원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장로나 권사로서 주를 섬기겠다고 이야기한다. 또 모두다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누구에게나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현재 주어진 현실과 재능에 만족하고 그것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목사 장로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모두가 부자가 된다하여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의 몸에 지체가 다양하듯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역시 다양한 은사가 요구되는 것이며,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할 때 그것이 교회의 일치와 성장을 이루는 중요한 원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에게 가장 적합하고 적당한 은사를 주신다는 사실

역시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유익하고 가장 합당한 은사를 주신다는 사실이다. 다섯 달란트를 주신 것은 그에게 그만큼의 분량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또 한 달란트밖에 안 준 것은 역시 그에게는 더 이상의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한 달란트도 바르게 사용을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받은바 은사의 종별이 무엇이든, 또한 그 분량이 얼마이든 그런 것에 크게 마음을 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눅 12:48)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심히 작은 것을 헌금하였지만 주님은 그에게 가장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하였음에도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곧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는 믿음의 원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의 종류나, 많고 적음에 대해 전혀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주신 것으로 계산하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낮고 천한 것과 같은 은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들에게 자장 유익하고 복된 것이기에 주신 까닭이다. 그래서 바울은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지 않느냐”(고전 12:23)고 이야기하였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원리의 입증을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하였다. 그것이 8-10절 내용이다. 이는 시편 68:18을 인용한 것이다. 8절에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음을 의미한 표현이고, 9절은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고난을 당하신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리고 10절에서 주님이 승천하신 것을 언급하며 그 이유에 대해 만물을 충만케 하려하심이라 하였는데, 이는 온 우주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구속사가 이방으로 확장될 것을 나타내고자 한 하나의 비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실제 취지는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은사를 말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주님도 천하고 고통스런 은사를 감당하셨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발언의 핵심이다. 즉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은사를 받은 것은 온 세상으로 구속사를 확장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는 뜻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은사에 대해 불평하거나 서로 시기하거나 다퉈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낮고 천하고, 희생적인 은사가 더욱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란 의미의 발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더 우리에게 꼭 맞는 옷을 입혀 주셨겠느냐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은사를 생각할 때 더욱더 그러하다. 오히려 낮고 천한 것, 힘들고 어려운 직임이 더욱더 큰 영광의 은사이니 맡은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함으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2. 은사를 주신 목적(11, 12절)

은사에 대해 정의한 바울은 이어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11절에서는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의 직임을 언급하였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자’란 뜻으로 주님 당시와 초대교회에 주어진 직분이다. 이는 성경을 완성하고 신약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주님께로부터 직접 선택함을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요 계시의 전달자로서 초대교회 때 사도들과 함께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행 11:28; 21:9, 11). 복음 전하는 자는 사도들과 함께 여러 각지를 순회하며 전도하는 직분을 가리키고, 목사는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맡아 영적으로 먹이며 외부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는 직임이다. 교사로 번역된 ‘디다스칼로스’는 ‘가르치다’란 뜻을 가진 ‘디다스코’에서 유래된 말로 가르치는 직분을 말한다. 그러나 원문에서 보면 목사와 교사 앞에 관사가 하나만 붙어 있다. 때문에 이 둘은 하나의 직분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학자들이 많다. 즉 ‘목사’는 직분의 관점에서, ‘교사’는 목사가 갖는 핵심 직무의 한 측면을 나타내기 위해 중복적 표현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교회의 직분을 나열한 바울은 12절에서는 이러한 직임, 곧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3가지 목적을 제시하였다.

1) 성도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바울은 12절에서 은사를 주신 첫 번째 목적에 대하여 ‘성도를 온전케 하며’라고 하였다. 여기서 ‘온전케 하며’로 번역된 ‘카탈티스모스’(καταρτισμός)는 ‘완전하다’, ‘준비하다’, ‘연합하다’, ‘채우다’란 뜻을 가진 ‘카탈디조’(καταρτιζω)에서 유래한 것으로 ‘완성’, ‘준비’, ‘연단’, ‘훈련’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가 고전 13:10, 11에서는 ‘어린아이’와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고, 14:20에서는 같은 기조(基調)에서 장성한 사람이란 의미로 쓰였다. 즉 더 이상 성장이 필요 없는 온전한 인간 개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곧 교회의 직분이나 은사는 성도들의 영적 성숙과 온전한 신앙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2) 주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위해

이에 대하여 바울은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라고 말하였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이 영적인 성숙을 의미한다면 봉사의 일은 외형적인 충성과 관련이 있다. 봉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코니아’(διάκονια)다. 이는 ‘하인’, ‘봉사자’, 혹은 ‘집사’를 뜻하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섬김’, ‘공궤’, ‘구제’ 등의 뜻을 나타낸다. 교회에 주어진 직분이나 성도들에게 허락된 은사는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각자 희생으로 섬기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받은 바 은사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과는 정 반대적 개념이다. 때문에 여기서의 봉사란 헌신과 희생적인 의미가 강하게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직분도 마찬가지다. 목사도, 장로나 권사 역시도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섬기기 위함이지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직분만이 아니라 다른 은사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이는 은사를 주신 최종적 목표이자 목적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의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구심점을 전제한 표현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일차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세워가는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 자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엡 1:23; 골1:24). 복음과 피차에 받은바 은사들을 통해서 성도들 간에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어 교회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며, 아울러 여기에는 선교적인 사명도 함축되어 있다. 교회란 그 자체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당대에서 끝나고 소멸되어 버린다면 그야말로 그 가치는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역사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날 까지 보전되고 계속해서 이 땅에 세워져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성도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것과 다른 하나는 교회를 상속해 가는 일이라고 하였다. 복음은 물론이고, 올바른 교회의 제도나 양식들이 세월에 따라 변화되지 않고 그 고유의 가치와 실체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이 바로 이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위해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동차 한 대는 수 만개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종합 예술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 개의 부품이 손상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자동차는 전체 기능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교회 공동체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받은바 은사를 가지고 제 기능을 잘 해야만 한다. 그리할 때 교회는 정상적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3. 지체들의 연합을 통한 성도개인의 성장(13-15절)

은사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한 바울은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교회가 이루어가야 할 또 다른 중요한 핵심 두 가지를 재차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먼저 언급된 내용이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 성장과 관련된 문제이다. 여기서는 크게 둘로 요약하여 설명된다.

1) 성도들 개인적인 신앙의 성숙과 관련된 문제

바울은 13절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성숙해져가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피력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15절에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함을 권면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에서 보면 신앙의 성숙은 두 가지가 전제 된다. 먼저는 진리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1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믿음과 지식의 통일성을 언급한 것으로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에서 기초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본절에서 사용된 ‘아는 일’에 해당하는 ‘에피그노세오스’(ἐπιγνώσεως)는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γνῶσις)에 접두어 ‘에피’(ἐπί)가 결합되어 좀 더 철저한 지식을 강조하는 뜻을 나타낸다. 때문에 신앙 성숙의 절대적인 조건은 바로 진리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한 말씀에서도 나타나듯이 바른 깨달음이 없이는 어떤 열정과 헌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가르치는 자이든 가르침을 받는 자이든 올바른 깨달음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참된 것을 하는 것이라고 15절에서 말하였다. 이는 깨달은 진리에 대한 순종의 행위를 가리킨다. ‘참된 것’은 진리를, ‘하는 것’이란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올바른 깨달음과 깨달은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2) 믿음이 성숙될 때 어떤 유혹과 그릇된 교훈의 풍조에도 휩쓸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

이는 14절에 보도된 것으로 바울은 온전한 사람이 될 때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올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만이 자신의 믿음을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안에 침투한 다양한 잘못된 가르침들로 인하여 흔들릴 수 있고 잘못된 신앙으로 이탈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르게 알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토록 주님과 대적관계에 있었던 것은 신앙에 열심히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올바른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극히 육신적이고, 지극히 민족적인 관점에서 메시아를 생각하다 보니 예수님이 결코 메시아로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시대마다 언제나 신앙의 이탈은 바른 앎의 결여에서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바른 깨달음에 머물러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곧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가는 초석이고, 거기에서만이 모든 유혹과 잘못된 것들에서 우리의 믿음을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4. 연합을 통한 교회 공동체의 성장(16절)

본 단락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내용은 교회 공동체의 구성과 성장에 대한 교훈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리가 강조되고 있다.

1) 교회 공동체의 구성 원리

16절 전반절에서 바울은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육체의 구성을 비유로 하여 교회의 구성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는 내용이다. 몸의 각 마디마디가 힘줄과 관절을 통해 연결되어 그 기능들이 상합하므로 우리의 몸을 이루고 활동이 가능케 되듯이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한 사람 만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유기적인 관계와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들만으로 활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몸의 전체 신진대사를 조절하는 머리가 없이는 아무런 기능을 감당할 수 없다(골 2:19). 교회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에게서’라는 말로 16절을 시작하였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각 성도들의 자기 역할이 충실할 때 온전한 교회로서의 기능을 갖고 주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다.

2) 교회 공동체의 성장 원리

바울은 교회의 구성원리를 이야기한 다음 각 마디를 통해 연결된 지체들이 “그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언급하였다. 몸의 지체들이 제 역할을 할 때 몸이 자라게 되는 것과 같이 교회의 성장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다.
제조업은 거의 모든 경우가 분업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옷을 만드는 것도 그렇다. 주머니를 만드는 사람은 계속해서 주머니만 만들고, 지퍼를 다는 사람은 계속해서 지퍼만 단다. 그렇게 분업화가 제대로 될 때 생산성도 월등하고 품질이 좋은 옷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동차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모든 부품을 조립하는 것이 아니다. 문을 다는 사람은 계속 문만 달고, 엔진을 조립하는 사람은 엔진만을 조립한다. 우리 몸을 비유하고 있는 바울의 의중이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이다. 즉 교회의 성장도 이와 같은 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우리가 있는 현실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천한 직임이라 하여 결코 불평해서도 안 된다. 힘든 직임이라 하여 다른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구속사의 원리에서 보면 오히려 낮고 천한 것, 힘들고 어려운 직임이 더욱더 큰 영광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엡 4:17-24)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사와 교회 공동체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 바울은 이어서 성도들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원리와 원칙에 대해서 교훈을 이어가고 있다. 중생한 성도들이 필연적으로 거치고 해결해야할 생활 원리는 크게 두 분으로 언급되었다.

 


1. 믿기 이전 옛 사람의 행실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17-19절)


이는 17절부터 19절까지에서 진술되고 있는 내용이다. 성도가 과거 믿기 이전 살아왔던 삶을 청산해야 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의 양태 3가지를 지적하였다.


1)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17절)

17절에서 바울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성도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이러한 허망한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누스’(νοῦς)는 ‘정신’이나 ‘이성’, ‘생각’이란 뜻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리고 ‘허망’으로 번역된 ‘마타이오테스’(ματαιότης)는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결과도 없다는 뜻으로서 로마서 8장 20절에서는 ‘허무’로 번역되었고, 베드로후서 2장 18절에서는 ‘허탄’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두 가지 의미에서 조명해 볼 수 있는 단어이다. 하나는 목적이 없으니 결과도 없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근원적으로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그 결과 역시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내용상 후자의 경우가 좀 더 본 단어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진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목적을 가진들 세상이 전부일터이니 그 결과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방인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그러기에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고작해야 이 세상뿐이고 그러므로 결국은 모두가 허망한 것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허망한 마음’이란, 그 생각이 세상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 표현이다. 추구하는 삶과 목적이 온통 육신의 것, 이 땅의 것에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서 성도는 이러한 삶의 양태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이전은 세상이 모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라고 추구하는 것 역시 세상에 것뿐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였다. 그러기에 본서 2장 3절에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믿고 중생한 이후에는 이 세상은 그야말로 허망한 것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생의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 것을 추구해선 안 되며 이제는 영생의 것,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소원하며 살아야 함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 진정으로 믿음을 승리한 자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은 결코 이 세상을 목적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모세에 대해서는 히브리서에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고 하였다. 바울 역시도 세상 것에 대해서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고백한 바 있다. 또 골로새서 3장 2절에서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면하기도 하였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하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주님 역시도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고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행태라고 지적하기도 하셨다.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살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살 것을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세상 것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이며 추구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은 본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허망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먹어도 먹어도 또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요 4:13)로 비유하기도 하셨다. 세상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는 ‘불의의 재물’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성도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불의한 일이라는 뜻이다. 이어진 10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영생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란 표현이시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 것을 위해 기도하고 육신의 문제를 위해 주님을 찾는 경우들이 다반사다. 코미디언을 하다 목사가 된 어떤 사람은 과거에 코미디언을 할 때는 70평 되는 집에서 살았는데 목사가 된 다음에는 100평 되는 집에서 살고 있다고 자랑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세상 복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허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이와 같은 삶의 양태를 벗어버려야 함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추구하고 거기에 인생을 거는 것이 성도가 추구해야 할 제일의 삶의 원칙이라는 진술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성도들의 삶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성도가 받고자 하는 영광은 세상에서의 영광이 아니라는 말이다. 썩지 않는 면류관, 즉 영원한 영광을 얻고자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삶의 원리라는 사실이다.

2) 무지와 마음이 굳어짐(18절)

바울이 두 번째 지적한 것은 총명이 어두워져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이다. 이에 대해 18절에서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지적하였다.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인하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성도들은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총명이 어두워졌다고 할 때 ‘총명’은 ‘사고’(思考)나 ‘이해’(理解)를 뜻하는 말로 하나님을 아는 전인격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것이 어두워졌다고 하였으니 하나님을 알 수 없도록 되어진 인간의 심령상태를 가리킨 표현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총명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아울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진 원인에 대하여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 때문이라고 바울은 지적하였다.


18절의 내용을 보면 한글 개역성경은 세 가지 원인에 의해 하나의 결과에 이르게 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세 가지 원인은 첫째 총명이 어두워진 것이고, 둘째는 무지함, 세 번째는 마음의 굳어짐이다. 이 세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쪽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저희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리고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라는 것이 된다. 즉 두 가지 원인에 의해 두 가지 결과에 이르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중 두 가지 원인은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이다. 그리고 두 가지 결과는 총명이 어두워진 것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총명은 하나님을 아는 전인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게 된 것을 말하고 그 결과적인 측면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무지와 마음의 굳어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지’로 번역된 ‘아그노이아’(ἄγνοια)는 ‘지식의 부족’이란 뜻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심령의 상태를 가리킨 표현이다.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것이 그 과정적 설명이라면 무지는 근원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즉 근본적으로 전혀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는 심령을 말함이다. 아무리 인간적으로는 총명하고 생각이 깊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박사란 칭호를 받아도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이 굳어짐’할 때 ‘굳어짐’으로 번역된 ‘포로신’(πώρωσιν)은 본래 ‘단단하게 굳어진 껍질’을 뜻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역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원어성서대전에서는 도덕적 양심의 기능을 하는 마음이 마치 화인 맞아 가죽처럼딱딱해져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도덕적 양심의 기능을 가리킨 표현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과 진리를 아는 심령상태를 지적한 표현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이야기함에서 확인 된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 곧 하나님을 깨닫는 지식의 문제와 연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져 있고, 거기에다 도저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도록 그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는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인하여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성도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완고한 마음은 그야말로 소망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그 물이 이르는 곳마다 강 좌우에는 나무가 심히 많고 번성하는 모든 생물들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신약구속사에 대한 예언으로 복음이 이르는 곳에 풍성한 구원 역사가 있을 것을 상징한 묵시이다. 그런데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진펄과 개펄은 사해 주변의 진흙구덩이들을 가리킨 것으로, 물이 차 있지 않고 고였다가 이내 빠져버림을 반복하는 형태를 상징삼고 있는 내용이다. 즉 하나님 말씀이 그 마음에 남아 있지 않는 자는 생명의 소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자 노력해야 하고, 진리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심히 유순해야만 한다. 마치 물에 가까이 대기만 하면 물을 그대로 빨아 흡수하는 스펀지와 같이 우리의 심령이 진리에 대해서는 그와 같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면서도 천사가 찾아와 처녀라 하니 처녀임을 믿고 아내로 데려온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아멘의 화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렇게 고백한 말씀이 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3) 방탕과 방임하는 것(19절)

이방인들의 삶의 양태로 세 번째 지적된 것이 방탕과 방임이다. 이중에 ‘방임’으로 번역된 ‘파레도칸’(παρέδωκαν)의 원형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는, ‘~부터’, ‘~곁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παρά)와, ‘주다’, ‘위탁하다’, ‘제물로 바치다’란 뜻의 ‘디도미’(δίδωμι)에서 파생된 단어로 ‘양도하다’, ‘포기하다’란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가 예수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신을 내어주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롬 4:25; 갈 2:20; 엡 5:5, 25).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방탕에 내어주었다는 의미로서 방임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방탕’으로 번역된 ‘아셀게이아’(ἀσελγίᾳ)는 ‘무절제’, ‘방종’, ‘호색’, ‘음란’이란 뜻을 나타내는데, 일부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권리나 감정, 공중도덕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치나 두려움 없이 행하는 추한 행위’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결국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버렸다는 말은 죄와 악에 대하여 포기한 상태를 가리킨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절제하지 못한 채 자신의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마구잡이로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지적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성도들은 이들과 달라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도들은 진리에 의한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말 한마디라도 가려서 해야 하고 행위 또한 역시 마찬가지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제1의 생활원칙은 이상과 같은 과거 옛 사람의 성품을 벗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이다.



2. 중생한 사람으로의 새로운 삶이 요구됨(20-24절)

이방인들의 삶의 양태를 통해서 과거 옛사람의 행실을 버려야함을 권면한 바울은 이어서 중생한 성도들이 살아가야할 삶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1) 진리로 가르침을 받는 삶(20, 21절)

20절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고, 21절에서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을 이어갔다. 진리에 의한 가르침을 받았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써, 성도들은 누구나 진리에 의한 가르침을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진리에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것과 허망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방탕에 자신을 방임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20절에서 ‘그리스도를 이 같이 배우지 않았다’고 할 때 ‘~에 대하여’, 혹은 ‘~에 관하여’란 뜻의 전치사 ‘페리’(περί)를 그 앞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는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페리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이 된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다는 것은 지식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인격적인 배움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을 나타낸다. 즉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그동안 지식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에 가르침을 받았다는 지적이다.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2년여에 걸쳐 매일 강론을 하였을 때(행 19:9, 10) 이러한 가르침을 주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성도는 끊임없이 배우는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에베소 성도들이 매일같이 2년여 동안이나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 것을 보면 우리가 그저 일주일에 두세 번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진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배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되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이 중생한 성도들에게 필히 요구되는 새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이다.

2)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삶(22절)

여기서의 ‘옛 사람’은 중생 이전의 육에 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바울의 이론은 철저히 인간을 이분법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생 이전의 사람과 중생한 사람은 그 본질상 큰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한 바도 있다. 여기서 옛 사람은 바로 악에 속한 자를 가리키고, 그러기에 그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허망과 무지, 방탕과 방임이 좀 더 적극적인 불신의 행위를 지적한 것이라면 이 부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즉 육신을 것을 좇고자 하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본성과 욕구에 대한 것을 지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간의 양태는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있는 동일한 성향이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이방인들은 오직 옛 사람 하나뿐이지만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근본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한 바도 있다.
(롬 8:5, 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바울이 여기서 말한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은 육신을 좇는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육신을 좇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 결과 사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히 육신에 속한 생각을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안 되면 실제 신앙생활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옛 사람의 성향과 성질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3)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이루어야함(23-24절)

2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르침을 받았음을 지적하였는데 23절과 24절에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하였다.
성도의 삶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으로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새사람으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함을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사람으로의 변화는 심령의 변화를 말함이다. 그러기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함을 서두에서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심령의 변화를 이루는 방법으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따라야함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따른다는 뜻으로 번역된 ‘카타’(κατὰ)는 ‘~아래’, ‘~을 통해서’, ‘~을 향하여’, ‘~을 따라서’란 뜻의 전치사이다. 그런데 그 뒤에 ‘데오스’(θεὸς)를 붙였기에 한글 개역성경은 ‘하나님을 따라’라고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새사람으로의 변화를 촉구하면서 먼저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그 기준을 명확히 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변화라 해서 되는 대로의 변화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의와 거룩은 그 방향이 종교마다 다르고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같은 사건을 놓고도 생각이 판이하게 갈라지는 경우들은 우리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은 변화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러한 표현을 앞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변화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실체에 대해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에 해당하는 원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ῃ)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인격과 삶을 뜻한다. 거룩 역시 비슷한 의미이지만 좀 더 특수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보다 성결함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은 밀접하게 진리와 연결되어 있기에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 하였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진리가 거룩함만을 수식(修飾)하는 것으로 번역하였지만 영문성경인 NIV나 RSV는 의와 거룩함 모두가 진리에 수식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공동번역성경도 이 부분을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즉 의와 거룩은 진리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며, 아울러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의와 거룩한 삶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진리를 좇는 것이고, 그 진리를 따른 삶이 바로 의롭고 거룩한 삶이라는 결론이다. 우리가 무엇보다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 중요시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진리에 적극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없고, 또 복종과 순종이 없이는 결코 의와 거룩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성하는 믿음

엡4:13-15 '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아멘.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구주로 믿어 영생을 얻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마치 이산가족이 만난 것처럼 한 번 확인된 후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입니다.

벧전1: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영생 얻는 믿음)

유1:3 ‘..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거듭 남은 단회적)

요6: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성도의 견인)

 

그리고 이 믿음의 기초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심이 자라는데 이것을 성화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앙은 잘하다가도 또 옛날 버릇이 나오기도 하고 다시 바른 신앙생활로 회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화적 믿음은 변하고 또 발전합니다.그래서 <장성하는 믿음>이란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믿음은 지성을 동반해야

 

바른 믿음은 성경대로 믿는 것인데 성령께서 지각을 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냥 뜻도 모르고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대중없이 아멘,아멘 소리를 주문처럼 외우고 질러대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γινwσκω)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하나가 되다는 만장일치,동의하다는 뜻.

 

1)복음의 내용을 듣고 알아야(믿음의 정보, 매뉴얼)

롬10:14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롬10:17)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이 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더냐고 주님이 물으셨고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마16:16-17).

 

2)믿음의 정보에 대한 바른 이해(인식)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γινwσκω)이니이다’고 하신대로 믿는 것을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도리가 분명치 않으면, 본문 엡4:14 ‘..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바른 지식을 지녀야 악한 영들과 미혹의 영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마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이단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성경을 바로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2. 참된 믿음은 성장한다

 

생명 있는 것은 자랍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농사가 잘 되면 농부의 마음이 만족하듯이 말씀의 씨를 우리에게 심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요15:8). 열매를 맺으려면 신앙심이 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1)기독교는 생명종교, 기독교 믿음은 산 믿음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다 죽었으나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의 교훈은 생명력이 있고 신빙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산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자랄지라’고 하는 자란다는 말 아욱사노(αὐξάνω)는 크기가 커지는 성장(grow become greater in size)하는 것을 뜻합니다. 길어지고 더 무거워지고 더 알차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2)해가 거듭할수록 성장하고 열매가 커져야

환난이 온다면 전에 보다 더 잘 참아내는 것도 성장한 것이고,물질적인 것도 전보다 더 풍요해지는 것도 성장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나날이 성장해가고 열매가 무르익어가는 법입니다. 그리고 풍성해집니다.

히5:12-14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터인데 ...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바울은 성도들이 마음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엡1:17-19‘17. ..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뜻은 순간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있고 대개 성숙된 믿음은 시련을 통하여 영안이 차츰 열리는 경험이 수반됩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여러 방면에서 성경대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신뢰를 말하는데 믿음의 단어 피스티스는 진리에 대한 확신과 진리를 따르는 충성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랐나 멈췄나를 스스로 반성하려면 내가 요즘 주님을 위해 충성된 삶을 사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충성스럽게 살려고 하게 됩니다. 예수 믿은 연륜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장한 믿음을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먼저 믿어도 나중 믿은 자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신앙이 그냥 자라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해수만큼 신앙이 성장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무슨 열매로 답할 수 있습니까? 반성해서 이제라도 믿음이 자라기를 소원하고 최선을 다해 성숙되어 열매 맺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