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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6장/ 서로 짐을 지라

by 은총가득 2021. 5.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갈라디아서 6:1-5

 

인간은 언제나 세 가지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는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이 세 가지의 관계와 상황 안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날 때부터 혼자가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줄곧 이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나와 하나님과의 직선적인 관계가 가장 우선적입니다. 그 다음이 나 자신에 대한 성실성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라 하여 성도로서의 이웃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도와의 관계는 좋은 교우 관계도 있지만, 때때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게 해서 문제가 되는 관계도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바로 되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로서로 격려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내가 넘어지거나 나약해질 때에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나를 위로해서 힘을 주기도 하며, 나태해지려고 할 때에 의욕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가 지닌 힘입니다.

 

고향 교회에 열심히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는 어느 남자 권사님이 차를 몰고 나오면서 중간 중간에서 한 사람씩 여러 명을 함께 태워 가지고 교회로 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 격려가 됩니다. 어쩌다 꾀가 나서 하루 빠지고 싶어도 어느 한사람 그럴 수 없게 됩니다. 서로가 자신에게 책임을 지게 되어 다 같이 나올 수밖에 없어집니다. 차를 가진 분은 피곤해서 일어나기 싫을 때가 있지만 이 새벽에도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을 교우를 생각하고는 피곤을 이기고 일어납니다. 차를 함께 타고 다니는 교우도 그렇습니다. 차를 몰고 와서 자기가 나오기를 기다릴 텐데 어찌 그냥 누워서 쉴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약해지려고 할 때에 서로 격려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래서 다함께 개근을 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관계 때문에 시험에 빠집니다. 넘어질 만한 게 아니었는데 잘못된 교우를 알고 나서는 그만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교우가 나에게 힘이 되지 못하고 격려가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몰랐던 것이 좋을 뻔했습니다. 그 교우와 사귀었기 때문에 내 신앙도 잘못되고 교회관도 잘못 정립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전반적으로 병들고 말았습니다. 마음까지 황폐해지는 등 전혀 내게 도움이 안 됩니다.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몰라도 될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쓸데없이 많이 알아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만날수록 좋은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우리는 모두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인 광야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도 가나안에 도달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우는 상당한 수준의 성화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교우는 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신앙의 토대가 처음부터 잘 잡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작부터 잘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자마자 열심 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주일과 수요예배, 새벽기도에도 잘 나옵니다. 시간, 시간 틈나는 대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일조차 소홀히 합니다.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까지 열심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나가면 충분하고 다른 일로 바쁘면 그마저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인도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를 믿으면서 우상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영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꽤 오래 믿은 사람이 자녀들 혼사 때면 궁합을 보고 사주팔자를 점치고 날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하고 교제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면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어디서 배우느냐, 누구에게서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 그 이웃을 잘못 만나서 문제가 됩니다. 좋은 모델을 만났어야 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참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다 좋을 수도 없고, 좋기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분처럼 되어봤으면’ ‘세상에 저런 분이 계시는 구나’ ‘죄 많은 세상에 복 주시는 것은 저런 분 때문일 거야’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만났다면 나에게는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를 존경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모처럼 가까이서 만난 사람이 삐딱한 사람이었다고 하면 망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일생의 신앙생활이 통째로 잘못됩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완전한 교인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조금 먼저 출발한 사람, 그 뒤에 선 사람, 막 시작한 사람, 여러 형태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학교에 유치원생, 대학생,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아직까지 유치원에도 입학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인 중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진대 내가 만난 한 사람에 의해서 기독교인 전체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내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하나님을 믿어도 신앙의 형태나 스타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중세기의 가톨릭 교인들은 두 손바닥을 마주 모으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할 때에 루터교 에서는 가톨릭의 기도하는 모습이 싫어서 손을 깍지 끼게 했습니다. 가톨릭와 루터교의 차이는 요만큼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기도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하든 서서 기도하든 그 방법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이해하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여러 문제로 우리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30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중요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그렇다는 말이라기보다도 먼저 된 자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믿는데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으로 신앙의 깊고 얕음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 중에 오히려 더 열심이고 더 진실 된 사람이 많습니다. 수십 년 믿어도, 아주 형편이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친구를 교회로 처음 인도했을 때에 내 책임은 큽니다. “제 친구인데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하면서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를 소개하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가 뭔지도 모르고 나왔습니다.” 하고 본인도 인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도해온 분만큼만 믿으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면 인도해온 분이 펄쩍 뜁니다. “안됩니다. 저만큼 믿으면 안 돼요.”하며 새삼 열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인도해온 친구, 처음 믿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게으르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먼저 믿은 자는 뒤따르는 자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믿게 되고, 뒤따르는 자는 먼저 믿은 사람 따라가느라고 열심히 믿게 됩니다. 둘 다 열심히 됩니다.

 

 

기독교인은 3대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해하는 의무입니다. 이웃을 이해할 의무가 있습니다. 둘째, 용서하는 의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됩니다. 셋째, 사랑하는 의무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사랑해야 됩니다. 본문 1절의 “형제들아”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아델포이’인데, 이는 형제의 사랑이라는 호칭입니다. 나도 너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형제다. 철저한 형제애를 근거로 하여 오늘의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말씀하는데, 성경에서 ‘범죄’의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하마르티아’입니다. ‘과녁이 빗나갔다’는 뜻인데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불법’을 말할 때는 ‘아노미아’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와 ‘아노미아’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범죄’는 ‘파라프토마티’입니다. ‘실수로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실수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범죄가 되고 말았습니다. 목적은 나빴던 것이 아니지만 방법이 잘못되어 목적까지 잘못되어버렸습니다. 의도는 좋았지만 중간에 잘못되어 결과까지 못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동기까지 나빴다고 물을 수밖에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실수가 ‘드러나거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프롤렘프데’라고 하는데 ‘현행범’을 뜻합니다. ‘발각되었다’는 뜻입니다. 심증이나 소문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몇 사람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물적 증거가 있고 이미 폭로된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서 한 성도 개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드러난 일이 아닐 때는 덕을 위해서 공식적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본인만이 아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에 파급되는 문제는 교회 차원에서 문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교회는 덕을 위주로 합니다. 누구를 심판하자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정죄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다 알려져 있는 그 덕스럽지 못한 문제를 교회 전체의 덕을 위해서 취급해야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오늘 본문에 보면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로잡으라고 합니다(1절).

헬라어 ‘카타르티제테’는 탈골이나 위골되었을 때 바로잡아준다, 이것은 교정이지 정죄나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를 정죄할 권리도 없고, 심판할 권리도 없습니다. 심판주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심판하려 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잡으라.’ 그것도 ‘온유한 심령으로’ 온유, 겸손,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교정하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네 자신을 살펴보라고 말씀합니다(1절).

자신을 살펴야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어떤 사건을 접하게 되면 불식간에 그 사건 자체에 말려들어가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잘못한 것만 열심히 생각하고, 그것을 머리에 두고 있어 내 잘못은 까맣게 잊습니다. 남 심판하려다 자기 심판하기를 잊어버립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유명한 암 전문의사가 있는데, 유명한 만큼 환자도 많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자기 아내가 쿨럭쿨럭 기침을 합니다. 감기려니 싶어 약을 지어먹게 했으나 낫지를 않습니다. 한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후에 생각나서 정밀 진찰을 해보니, 폐암 3기였습니다. 이 내과의사, 다른 사람은 곧잘 치료할 줄 알았지만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죽어 가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열심히 알려 하고 또 알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문제는 모릅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거든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차릴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남 실수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는 나와 결코 상관이 없지 않습니다.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살피라는 두 번 째 이유는 ‘내게도 같은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 같은 실수가 내게도 있으니 내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간혹 남의 집 아이들이 잘못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도 안 해서 그래” “우리 집 아이들은 아무 일 없는데”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꼭 한마디 합니다. 내가 워낙 잘 가르쳐서 내 아이는 아무 일도 없다고 자랑합니다. 남의 집 아이들이 잘못된 것을 보고 동정할 줄을 모릅니다. 자신한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집 아들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나면 두 번 다시는 남의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남의 집 사건도 내 사건입니다. 남의 집 아이가 가출하면 내 집 아이도 가출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남에게서 실수가 보이거든 내게도 실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 사람이 실수했으면 나도 실수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은 같았다, 단지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드러난 형태는 달랐지만 같은 실수가 내게도 있다고 인정하고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살피라는 세 번 째 이유는 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에서 그의 실수를 기뻐하지는 않았는가, 자비함이 없는 자가 되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악인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말라.’ 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무자비한 자가 되어 기뻐하지는 않았는가, 혹 조소하는 마음이나 비난하는 마음이 없었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남의 실수를 비난하지 못합니다. 남을 정죄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기에 남을 비난하게 되고 문제를 삼습니다. 남의 실수를 보며 나 자신을 바르게 성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짐을 서로 지라고 합니다(2절).

아픈 마음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고통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요셉이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습니다. 약혼녀인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은 드러내지 아니하고 깊이 생각합니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하며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짐을 함께 진 것입니다. 책임을 함께 지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세 가지를 원한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자녀들도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이웃도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둘째,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이든 상대방이 믿어주기를 바랍니다. 제일 불쾌한 일이 남에게 의심받는 것입니다. 불신 당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진실을 알아주고 나를 믿어주기를 바랍니다. 셋째,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나의 실수를 용서해주고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비난 없이 이 비밀을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이웃으로부터 우리가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웃을 이해해야 하고, 믿어야 하며, 잘못이 있을 때에 덮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은 서로 도와주고 봉사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책임을 함께 지고 아픔을 함께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2절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넷째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합니다(5절).

4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5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라.” 뒤에 한 말이 더 적극적입니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일뿐이지 결코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심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나서서 바로잡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행할 부분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부분만 하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까지 하려고 들고, 다른 사람의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합니다. 그러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더 많은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보면 자기 일에는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은 남의 일에는 민감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매이지 말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3대 의무, 용서하는 것, 이해하는 것, 사랑하는 것까지가 내 할 일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부모로서 꼭 해야 할 일만 하고 나머지는 내버려두십시오. 항상 밝은 얼굴로 대합시다. 자꾸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 자녀들의 얼굴에 그늘이 집니다. 걱정하는 부모님을 대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일단 내 일에 충실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생각합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책임에 충실해야 합니다. 내 짐을 바로 지는 것이 다른 사람의 짐을 더는 것이 되듯 내가 내 짐을 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떠맡게 됩니다. 내가 내 짐을 바로 질 때에 다른 사람에게도 근심을 끼치지 않게 됩니다. 남을 구제하는 것이나 선행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먼저 나로 하여금 남에게 근심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얼굴 찡그리지 말고 밝고 긍정하는 마음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큰 구제가 되고 큰 봉사가 됩니다.

 

사람은 사회성을 띠고 살아갑니다.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다른 교우들의 실수가 보일 때마다 덕을 세우는 방법으로 그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반드시 나 자신부터 돌아보고 내가 대신 질 수 있는 짐이라면 함께 져야 합니다. 4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남의 실수로 인하여 내가 한 걸음 더 성장하고, 좀 더 귀한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의 잘못을 보면서 나도 넘어지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보면서 더 바른 성찰의 사람이 되고 더 온전한 사람,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 먼저 진실 되고 충실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 깊은 곳에 내밀한 자랑을 가지고, 그 긍지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갈라디아서 6:6-10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주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은 사람이 마땅히 갖출 자세에 대해 언급하는 아주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어떠한 목적으로, 어떻게 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가느냐?’ 라고 하는 성도의 생활윤리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6절을 보세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이 말씀은 문맥상 앞뒤 관계없는 독자적인 말씀 같은데,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좋은 씨’ 곧 ‘좋은 종자를 심으라.’ 라는 의미를 가지고 오늘 본문인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6절은 “함께 나누는 생활”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좋은 일을 함께 더불어 나누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이 6절 말씀은 해석할 때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 번째, 전통적인 해석방법으로 많은 학자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자”를 “교역자”와 “교인”로 해석해 왔습니다. 교인들은 교역자로부터 영적인 말씀을 받고, 신령한 양식을 얻습니다. 교역자를 우리는 목사라고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신부라고 합니다. 신부는 우리말이며 영어로는 ‘갓 파더’ ‘아버지’입니다. 교역자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로부터 태어나고. 그가 전해준 말씀에 따라서 내가 자라며, 그에게 징계를 받고 칭찬을 받고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의 마지막 훈계를 들으면서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영적으로 아버지가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16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부성애 적 심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역자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저도 교역자이지만 한편 저에게도 저의 교역자가 있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신 어른들이 많이 계십니다. 흔히 세상에 태어나서 세 가지의 복을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부모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둘째, 스승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교역자를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셋째,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교역자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내 영생의 문제를 좌우하는 귀한 말씀을 그로부터 받아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내가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까? 나를 가르치는 자, 교역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교역자는 돈 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교인으로서 물질과 함께 삽니다. 때문에 교인은 교역자에 대해서 물질적 부양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 교인과 교역자가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질 좋은 말씀을 잘 가르치고 잘 전해야 하고, 교인들은 좋은 것들로 교역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Calvin)은 이 6절을 해석할 때 아주 극단적인 말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사자들에게는 호화롭게 대우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들은 대우하지 않는다.” 무조건 대우만 받기를 바라는 것도 문제이지만, 대우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파사데나에 ‘웨스트민스터 가든’이라고 하는 양로원이 있습니다. 이 양로원은 은퇴한 선교사들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살 수 있도록 세워진 곳입니다. 이 양로원이 생긴 유래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120년 전의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사람이 뉴욕의 어느 공원을 지나가다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당신은 누구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나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다 돌아온 아무개입니다.” “그런데 집도 가족도 없습니까?” “네 은퇴하고 나서 이렇게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몇 명 정도 됩니까?” “내가 알기로는 몇 사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사람은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번 중국인 실업가였습니다. 그가 100만 불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100만 불이라면 큰돈입니다. 그 돈이 기금이 되어서 지금의 웨스트민스터 가든이 세워졌습니다. 이 양로원은 아시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 중에도 그곳에 살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100만 불을 참으로 좋은 일에 썼습니다. 평생을 선교사로 타국에서 살다가 은퇴해서 돌아왔는데 막상 갈 곳이 없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는데, 중국인 실업가는 그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가 좋은 것을 함께하는 좋은 예가 됩니다.

 

6절 말씀의 또 다른 해석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에 ‘바른 관계’를 이루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아가도이스’는 물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내가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가르치는 자를 어떻게 대할까? 물질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스승도 제자도, 선배도 후배도 없는 권위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 대해서 권위를 인정하고 바른 관계를 이루어야 하며, 좋은 말씀이 나오도록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마음이 평온하도록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라’의 헬라어 ‘코이노네오’는 ‘코이노니아'와 같은 말입니다. 친교를 의미하는 fellowship, 특별히 대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만큼, 가까운 친구를 대하는 만큼으로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즐거울 때는 함께 즐겁게, 내가 따뜻할 때는 그도 따뜻하게, 내가 편안할 때는 그도 편안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가르침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는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에 해외 선교를 한다, 남의 나라 돕는다, 등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선 내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선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함께 믿는 자들에게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여기에 한 구절을 덧붙였다면 6절과 관계를 지어 ‘너를 가르치는 자에게 먼저 할지니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크게만 생각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먼저 찾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함께하라.” 받기만 하면 안 됩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합니다. 또 주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주고받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다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됩니다.

 

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울은 6절 말씀에서 함께 주고받으라 하고 난 뒤 이어서 7절에서는 좋은 것을 심고 거두라고 말씀합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원리는 종자와 열매는 같습니다. 콩을 심었으면 반드시 콩이 열립니다. 둘째 원리는 시차입니다.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오늘 심어 오늘 거둘 수는 없습니다. 가을에 심고 봄에 거두기도 하며, 심은 지 10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 것도 있습니다. 셋째 원리는 행동하면서 무던히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땀을 흘리고 수고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연한 진리를 놓고 속는 일이 있습니다. 또 속이는 일도 있습니다. 먼저 이웃을 속이려고 듭니다. 악한 것을 심어놓고 선한 것을 거두려 합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속기도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아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그토록 악한 면이 있는 줄 모릅니다.

 

어느 부인이 몸도 약한데 자녀들이 다섯이나 되어서 몹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인 넷째 다섯째 자녀가 학교에 가다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사고를 당하자 그 무엇으로도 그 부인에게 위로가 안 됩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지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중에는 원망하는 행동이 너무 지나치자 주위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 가까운 친지 한 분이 그 부인의 원성을 딱 잘라놓았습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평소에 너희 집에 와서 보니까 넷째 다섯째가 떠들고 싸우고 말썽 좀 피운다고 하여 너무 귀찮아하는 것 같더라. 그럴 때마다 너는 그 아이들을 보고 ‘괜히 태어나서 남 고생 시킨다’ 며 투덜거리더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냐?” 부인은 다시 그런 소리를 안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십니까?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 몹시 침울해하는 부인에게 친구가 물었습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고 힘들게 할 때에는 혼자 사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느냐?” 그랬더니 오히려 한 수 더 뜹니다. ‘차 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려라’하고 생각했답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러한 독기를 품고 저주했는데, 이제 와서 죽었다고 슬퍼할 것이 있습니까? 심은 대로 거둡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로 심고 생각으로 심고 행동으로 심고, 거기에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선한 척하지만, 어느 사이에 내 안에 있는 악이 벌써 독을 뿜고 악의 씨를 뿌려놓았습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소원 성취한 것 아닙니까? 일은 이미 벌어졌는데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스스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가출했다고 울고불고하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세요. 백이면 백이 모두 그런 말을 자녀들에게 수없이 했을 겁니다. 말한 대로 소원 성취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든 말든 집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괜히 태어나서 말썽이라는 말은 더더욱 안 해야 됩니다. 꿈에라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심은 것은 되돌아옵니다. 언제였든 내가 심은 것입니다. 내 마음에 심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말로 행동으로 심어놓았습니다. 그것이 지금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은 오히려 덜 억울합니다. 내가 나에게 속는 것, 이것은 실망이요 절망입니다. 좀 더 나아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속이려고 듭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처럼 평범하지만 중요한 진리는 없습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업신여긴다’'는 말은 원문에서 '고개를 쳐든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콧방귀를 뀌며 비웃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 내가 당하는 현실을 놓고서 내가 심은 게 아니라고 우깁니다. 과거의 모든 행동이 이제와 열매 맺은 것이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지금 내가 받은 대우가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심히 억울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내가 악한 씨를 심으면서 앞으로 이 씨가 악한 열매가 될 것을 부정합니다. 아무리 내가 나쁜 일을 해도 이것이 내게 다시 돌아오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십니다. 과거에 심은 것은 오늘 거두게 하시고, 오늘 심은 것은 내일 거두게 하십니다. 금세에서 심은 것은 내세에서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5:9~10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 축복을 수천 대까지 주고, 악을 심어놓으면 삼사 대까지 거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하는 그 진리를 반드시 보여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심든지 염려하지 말고 부지런히 심으라고 하십니다. 성장도 염려하지 말고 추수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점을 상기시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음악도 시시한 것은 듣지 맙시다. 그림도 좋지 않은 것은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엽기적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면 잡히고 난 뒤, 범인의 집을 조사해보면 공통적으로 음란 폭력 비디오테이프가 꼭 발견된다고 합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밤낮으로 그런 것만 보았던 것입니다. 나쁜 것만 자꾸 정신 속에 심었습니다. 그 열매가 마침내 범죄로 나타난 것입니다. 듣는 것이 심는 것이요, 보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에 두는 것이 모두 심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쁜 것을 자꾸 심었으니 나쁜 것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당들은 꿈을 꾸어도 공산주의 꿈을 꾸라고 한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야말로 꿈을 꾸어도 기독교인다운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상한 꿈을 꾸고 허황된 꿈을 꾸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잠을 잤기에 그런 꿈을 꿉니까? 꿈은 잠재의식이므로 잘못된 꿈을 꾸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던 것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행동으로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신령한 것, 영적인 것, 영원한 것에 늘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좋은 이야기, 좋은 일을 마음에 심어나가면 아름다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농부가 되려면 두 가지의 주의사항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9절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선한 일을 조금 해놓고 당장 열매가 있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선행을 절대로 부도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내 이름으로 주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선행은 절대 부도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축한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조급히 생각하여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시기와 방법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내가 갑이라는 사람에게 주고 갑으로부터 다시 받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갑에게 주고 을에게서 받습니다. 동에 주고 서에 가서 받습니다. 어딘가에 심어 놓으면 그 어딘가에서 거두게 됩니다. 시편 37:25입니다.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부지런히 심어놓으면 후손들이 결코 배고프지 않습니다. 인색하게 굴지 말고 부지런히 베풀어 보십시오. 내가 지금 부지런히 심어놓으면 내 후손이 절대로 걸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를 가서든지 귀인을 만날 것입니다. 굶지 않고 잘살 것입니다. 복 받지 못할 짓만 하면서 복 달라고 비는 사람처럼 답답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지금 당장 못 받아도 좋습니다. 꾸준히 뿌리고 심으십시오. 언젠가는 거두게 됩니다. 내가 아니면 내 후손이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땅에서 못 거두면 하늘에서 거둘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낙심하지 맙시다.

 

다음으로 9절에 보면 ‘포기하지 말라’ 합니다. 지쳤다고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때에 거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하여 말씀합니다. 10절입니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선한 일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할 기회가 와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좋은 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기회가 지나간 다음에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할 것이요. 농사짓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심어 가꾸면 때가 이르러 거두게 됩니다.

 

 



육체로 자랑하는 자

갈라디아서 6:11-13

 

 

오늘 말씀과 다음 시간의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결론입니다. 오늘은 소극적인 면에서, 다음 시간에는 좀 더 적극적인 면에서 결론의 말씀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이라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종합해서 요점을 말합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어떻게 생활에 실천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셋째는 희망적인 것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받은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그 말씀대로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가능성을 보여주고, 빛을 보여주고, 소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결론이라고 합니다. ‘결론에 가서는 항상 희망적이어야 한다.’ 설교학에서 강조하는 말입니다. 자기반성은 좋지만 결론까지 어두운 면을 말하는 설교는 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화를 볼 때에도 중간의 내용은 어떻게 전개되든지 간에 마지막에는 해피엔드로 끝나야 좋습니다. 악한 사람이 죽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아야 됩니다. 결국에는 선한 사람이 잘되어야 영화 보는 재미가 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철학이다 뭐다 하여 마지막에 그만 착한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그러면 며칠 동안 기분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괜히 돈만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결론은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의 결론의 특징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뜨거운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특별히 사랑한다.’ 그 마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실 사랑을 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간혹 자녀들을 책망하고 꾸짖지 않습니까? 권면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다 좋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한마디를 꼭 해야 합니다. 만일 그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채 꾸중만 듣게 했다면 그날의 교육효과는 제로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미워하는구나.” “우리 어머니는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힐까?” 라고 자녀가 생각한다면 그날의 잔소리는 완전히 무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교훈을 열심히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교훈하는 자의 뜨거운 사랑을 교훈받는 자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사랑하라는 가르치는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의 의무보다는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감격이 우선될 때 가능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사랑하십시오.’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그 말 때문에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좋은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해답은 내가 지금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 때에 사랑할 마음을 가지게 되고 사랑의 지혜, 사랑의 능력까지도 얻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는 책망하는 말씀도 있고 마음을 찌르는 말씀도 있고 권면하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여러 귀한 말씀을 하고 끝에 가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내가 한 이 모든 말들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이 사랑이 전달되지 않으면 이제까지의 교훈은 다 무효요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사랑만 저들의 가슴에 닿아서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으면 이때부터 그 교훈은 훌륭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고 별의별 간청을 다 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언제나 한마디로 돌아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것이 응답인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다고 해봅시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몹시 아프겠구나. 그것도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듣고 ‘아멘’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아마도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몇 십 년 더 앓아누워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증거일진대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어쩌면 그 말씀과 함께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들려오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꼭 벌 받은 것만 같고, 저주받은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몸이 더 아픕니다.

 

바울이 사랑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11절입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내가 큰 글자로 쓴다는 말은 친필로 쓴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큰 사랑과 특별한 관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편지를 직접 쓰지 않았고, 언제나 대필시키고 마지막에 서명만 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 마지막 까지는 바울이 좀 불편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 손수 쓴 것입니다. 그래서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므로 대문자로 쓰겠노라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소문자와 대문자가 있듯이 헬라어에도 소문자와 대문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큰 글자로 쓴다고 하는 말은 이제부터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부득불 대문자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을 맺으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뜨거운 사랑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조점을 더욱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야기가 너무 많고 복잡하므로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이 한마디 말만은 꼭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는 말입니다.

 

둘째로는 바울이 워낙 눈이 나빴기 때문에 큰 글자로 쓴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위로부터 오는 밝은 빛을 보고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고 기도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뜹니다. 뜨기는 떴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강한 빛을 받았기에 시력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라식 수술이나 안경을 끼면 될 텐데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으니 그냥 침침한대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쓸 수도 볼 수도 없는 악조건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친필로 쓰고 싶은데 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써온 글자와는 다른, 좀 더 큰 글자로 마지막 결론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큰 글자로 쓰면서까지 마지막에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강조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교회가 할례 문제로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 문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대비하여 설명합니다. ‘왜 사람들이 할례를 강조하는가? 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가?’를 지적하며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아주 예민하게 분석하여 그들을 비판합니다.

 

할례 받은 첫째 이유는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12절 뒷부분입니다.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갈라디아사람은 본래 이방사람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할례가 필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와서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된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 고 자꾸 들쑤십니다. 그래서 할례 받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복잡하게 부딪칠 필요가 있느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저 적당히 타협하자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박해를 받습니까? 당시는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하던 때입니다. 로마는 유대나라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온 세계를 지배하면서 각 나라의 자치권을 인정하였고 종교에 대해서는 유대교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했고 대제사장 제도를 인정했습니다. 로마정부는 공식적으로 유대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의식, 즉 모든 예배와 제사를 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유대교는 로마법 앞에서 당당하게 믿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신흥종교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것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기독교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기독교를 믿으려고 할 때에 유대교의 규례에서 벗어나 믿으면 곤란해집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종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에는 박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게 될 때까지 기독교는 아직 공식적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박해가 따랐습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황제가 된 후, 기독교가 공인을 받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로마사람들이 볼 때 기독교는 이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초기 역사는 매우 험난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내용으로는 예수를 믿어도 형식으로는 할례를 받으면 유대교의 한 분파가 됩니다. 대신 그 순간부터 박해받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믿기는 예수를 믿고 형식적으로는 유대교의 형식을 취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할 때에 신사참배라는 것을 강제로 시켰습니다. 동네마다 ‘신사(神社)’를 만들어놓고 거기 대고 절하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우상 앞에 절을 하느냐 하며 결사반대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감옥에 들어가거나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국민의례라 생각하고 좀 하면 어떠냐? 잠시 묵도하면 된다, 어차피 나무쪼가리밖에 없는데 하나님 아버지하며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이렇게 적당히 넘어가면 박해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만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죽어 갔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적당히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순교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습니다. 정정당당하게 믿고자 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면 박해받을 것이 없습니다. 박해를 안 받으려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기독교인들은 고난 받지 않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의 삶에 고난이 없다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그 박해는 당연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면 그 손해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진실하게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읍시다.

 

할례 받은 두 번째 이유는 유대종교의 일부로 편승해야만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적으로는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로마사람이 못 박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재판하였고 로마군인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럴진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전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정부에 대해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를 전하고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외치는 기독교를 로마정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유대종교의 일부로 편승해야만 무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당신들은 메시야를 죽인 사람들이오.’ 하고 떠들고 다니는 격이 되고 맙니다. 로마정부를 향해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박해를 안 받기 위해서 그처럼 할례를 받아야 했다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고서 유대사람의 신분을 가졌습니다. 유대교인으로서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는 마치 여권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어디서든지 편하게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령 박해가 있을지라도 오직 예수만을 믿고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의 박해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사람들의 박해입니다. 유대사람들은 로마정부와 야합을 하면서까지 기독교인을 박해하였습니다. 이 유대인들의 박해를 면하려면 유대인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고 타협을 해서 무사하게 안일하게 예수 믿어보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고, 개혁적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독실하게 살고자 할 때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반드시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그 박해를 면해보려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교리적으로 유대주의 교리와 타협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기독교는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둘 다 믿자, ‘할례도 받고 예수도 믿자.’ 일종의 혼합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시작부터 고집스러웠습니다. 제사와 우상숭배를 금지 시켰습니다. 한국교회는 시작을 참 잘했습니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쪽에 가보면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오직 예수’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절간에 나가면서 동시에 교회에 나와도 괜찮다는 식의 사고를 심어주었습니다. 시작부터 그르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교회가 흔들흔들학고 교회 구실을 제대로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단호히 잘라내고 오직 예수만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차례 드리면 안되나요? 잠깐 절하고 오면 안 되나요?” 대답하기가 난감합니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는데, 이것을 버리자니 박해가 옵니다. 그래서 적당히 얼버무려 일 년에 한두 번 차례를 드리러 갑니다. 그저 한 해 동안 온 가정이 무사하게 해달라고 엎드려 절도 합니다. 그러나 꼭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그렇게 꾸벅꾸벅한다면 그 가문 전체가 교회에 나올 날짜가 점점 늦춰지는 줄만 아십시오. 현재는 무사할지라도 위하여 기도하는 그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혼합주의적으로 믿을 때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오직 예수가 아니라 이방 종교와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세속적인 것과 기독교를 혼합해서 믿으려 할 때에 이렇게 할례 받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의 교리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의를 이루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율법을 더 잘 행해야 되겠거니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시작하였는데 그 다음에는 선행, 구제, 봉사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의가 이루어지는 줄 알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마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자기 의를 인정받으려 하고 자기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서 축복을 받아내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를 받게 된 이유입니다.

 

할례 받은 세 번째 이유는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12절 앞부분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13절 뒷부분입니다.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할례 받는 이유가 육체로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갈라디아사람들은 원래가 이방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른 율법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단지 할례만 유대사람들의 규례를 따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특별한 사람 취급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 할례를 받지 않았고 또 한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할례 받은 사람이 ‘나는 할례 받은 사람이다.’ 하고 안 받은 사람에게 자랑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보면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별것을 다 자랑합니다. ‘나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 나는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 쓸데 없는 자랑을 합니다. 이 자랑에는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데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를 가지고 자기를 높입니다. 좋은 집이나 차를 가졌다든지 또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자기를 높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문을 자랑합니다. 양반이니 어쩌니 하며 떠벌입니다. 자기가 훌륭한 것이 중요하지 자기 아버지 자랑을 해서 무엇 합니까? 친척이 어떻고, 가문이 어떻고 자랑합니다. 그 다음에 종교를 자랑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하고 선행을 합니다. 종교적인 자랑이 대단합니다. 요즘도 ‘나는 몇 일 금식했다.’하며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의 명함을 받고서 한참 웃었습니다. 명함에다 '미국 대통령 조찬기도회 참석'이라는 문구를 새겨놓았습니다. 좀 웃기지 않습니까? 이것이 육체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자랑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랑에 빠지면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생각으로 급급합니다. 사람이 인정해줄 때는 좋아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사람이 인정하는 평판에 자기의 온 생명을 걸었습니다. 어느 교회에나 이런 문제가 다 있습니다. 나를 알아 달라,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 기도하거나 선행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고,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금식 티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너무 의식하면 외식주의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내적인 충실을 잃어버립니다. 할례 받은 것, 세례 받은 것, 오래 믿은 것, 무슨 직분을 받은 것, 이러한 관록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마침내 내적인 충실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외적인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많이 했다고 다 기도가 아닙니다. 응답을 받아야 진정한 기도입니다. 잠도 안 오고 마음도 갑갑해서 몸부림친 것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할례를 장식품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종교의식을 액세서리로 여겼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외적인 경건보다는 내적인 경건이, 밖으로 나타나는 의식보다는 내면의 충실함이 더 중요합니다. 진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육체로 자랑하는 것에 빠지게 되면 자기모순에 빠져서 의식에 치우치고 외면에 치우치고 끝내는 위선자가 됩니다. 마지막에는 나의 현주소와 나의 존재를 잃습니다.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랑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랑은 전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입니다. 고린도후서 1:14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그리스도의 날에 무슨 자랑을 할지 그것이 중요하지 오늘 하는 자랑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항상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땅에서 받는 영광보다 하늘에서 받는 영광이 크게 해주시고, 땅에 쌓는 재물보다 하늘에 쌓아둔 재물이 더 많게 해주시옵소서.” 하늘에서 받을 영광이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땅에서 받는 영광, 칭찬은 이제 좀 잊어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의 흔적

갈라디아서 6:14-18

 

 

오늘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결론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결론을 두 가지 방법으로 맺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요약하여 종합하려고 합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점을 강조합니다.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다시 말씀함으로써 기억하게 합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는 것마저 들어서 알 뿐이지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훈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인용하지 못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이 한마디 말고는 직접 인용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가 아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고 그리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알고 그 다음에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생애의 모든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서 말씀합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결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은 십자가와 내가 생명적 관계를 맺으면서부터 비롯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 그 속에 내 모습이 보이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환히 보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직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숱한 죄에 시달리다가도 십자가만 쳐다보면 그 십자가로부터 내게로 오는 빛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속에 엄청난 기쁨과 감격이 찾아와야 합니다. 신비로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십자가와 나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 성령이요, 그것을 바로 설명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를 들어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신비롭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30여 년 간을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누구나 임종을 앞에 두고 고뇌가 많습니다. 그 고뇌는 먹고살 걱정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남은 가족들에 대한 아쉬움도 아닙니다. 임종의 고뇌는 바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입니다. 내가 일생동안 산 모습이 주님과 만나게 됩니다. 누구나 그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이 고통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지만 다 부질없습니다. 평생을 설교하면서 살아온 저도 그 순간에는 뾰족한 재주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오직 이 한마디뿐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이 나오고 그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게 될 때 얼굴이 비로소 환하게 밝아져 옴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한번은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손에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꽉 쥐고 놓지를 않습니다. 어떻게나 꽉 쥐고 세상을 떠났는지 죽은 다음에도 손에서 빼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아니고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없습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십자가가 해결해줍니다. 오늘의 모든 문제도 알고 보면 십자가로써 해결이 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십자가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 아닌 다른 길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주제인 십자가 중심의 신학, 십자가 중심의 신앙을 재확인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바울은 십자가 말고 자랑할 것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개인적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2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말하지 않기로, 지식조차 십자가 중심의 것이 아니면 다 잊어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랑이 무엇입니까? ‘자랑’이라는 것의 의미는 기쁨의 근거를 말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다면, 보람과 긍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랑입니다. 자랑이란 모든 것보다 우선적이요 이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수 있는 높은 가치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랑에 의하여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며 삽니다. 자랑이 없으면 죽습니다.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말할 수 있거나 없거나 사람은 나름대로의 자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랑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못 느낍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랑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자랑을 빌립보서 3:5~6에서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 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유대사람인 것을 자랑합니다. 선민된 것을 자랑합니다. 당시의 석학인 가말리엘 밑에서 최고의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종파적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사역으로는 유대교회의 교리를 대변하는 젊은 행동파로서 유대교에 반대되는 사람은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아주 극렬분자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또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거기까지 쫓아갔습니다. 이런 것이 바울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가진 확신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랑이 많았지만,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알게 된 후에 그 모든 자랑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덧없는 것이요 헛된 것이요 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다 내버리고 다 잊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십자가,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그토록 십자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까? 십자가는 의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여러 문제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의의 문제입니다. 의의 반대는 죄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면 사함 받을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난하고 부하고를 따질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병들어서, 가난해서 뜻대로 안 되어서 운운하지만 입에 발린 소리일 뿐입니다. 깊은 곳에는 다 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네가 의인이기에 가난하다, 네가 병든 것은 잠깐 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병들고 보니 꼭 죄 때문인 것 같고 사업에 실패한 것도 내 죄 때문인 것만 같습니다. 내 불행이 모두 과거 어느 때에 저지른 죄의 결과인 것만 같습니다. 문제는 의요 또한 죄입니다. 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길은 십자가 말고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십자가를 근거로 해야 다른 자랑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빼놓으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는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를 통해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는 의의 승리, 진리의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모든 역사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기에 십자가는 소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능력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볼 필요조차 없는 실패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도 십자가를 한심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장가도 못가고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정치운동 하다가 실패해서 죽은 예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요 죄인의 상징이요 죽은 사람의 상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는 바울의 말씀처럼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십자가는 진정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 만드는 능력이요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능력을 설명 할 때에는 드라마틱한 생을 살아온 사람에게서 증거 하기가 더 수월합니다. 유명한 깡패 출신의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악수 한번 하면 손이 부러져 나갈 정도로 힘이 센 사람인데 부흥사가 되어 부흥회를 인도합니다. 이 사람이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안도하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방해를 합니다. “예수가 누구냐?” “천당이 어디에 있느냐?” 못된 소리들을 지껄이며 소란을 피웁니다. 한 대 치고 싶은 것을 끝내 참다가 이 목사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너 같은 놈은 이미 내 손에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참고 있다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위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그 엄청난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자유가 있고 무한한 은혜가 있음을 압니다. 또한 십자가에는 나를 거룩하게 하며 나의 생활을 승리로 이끄는 신비가 있고, 또한 십자가가 나의 생각과 나의 입맛과 나의 취미를 바꾸어 나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되게 만들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신비한 능력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졌다면 십자가 때문이요, 내가 딴 사람이 되었다면 십자가 때문이요, 내가 능력의 사람이 되어 무엇이건 이룬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십자가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미 바울은 갈라디아 5:24에서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했지만 또다시 14절에서 강조합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도 못 박히고 나도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완전히 죽었고 가치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못 박히고 죽었느니 이제 세상에 대하여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못 박힌 것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먼저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이제 세상일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이 좋고 세상일에 마음이 끌립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 믿어 손해 보았다고 말합니다. 먹을 것 못 먹고, 할 일도 못하고, 중요한 날에도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투덜거립니다. 예수 믿어서 손해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제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는 보다 더 능동적인 표현입니다. 세상 것이 무가치해진 것이 수동적이요,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것은 내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으로 향한 욕심이나 세상으로 끌리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전자는 수동적인 표현이요 후자는 능동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할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할례 받은 사람은 유대사람이요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이방사람입니다. 그러나 유대사람이든 이방사람이든 그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믿었느냐 도 상관이 없습니다. 직분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남는 것은 15절처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입니다. 오래 믿었다, 직분이 있다, 남보다 배운 바가 많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안다. 이는 모두 형식일 뿐입니다. 형식에 너무 매이지 맙시다. 문제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영적인, 그 내적인 존재에 변화가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중생의 문제입니다. 중생 없이 30년 동안 교회를 들락거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끔 교인들 가운데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봅니다. 중생 없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피곤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같이 수요예배 나오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나오므로 힘들고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나가자니 꾀가 나고 안 나가자니 지옥 갈 것 같아서 힘들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았든 못 받았든, 세례를 받았든 못 받았든, 직분이 있든 없든 다 잊어버리십시오. 형식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새로운 피조물,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이며 내적인 존재에 대해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7절에서 마지막 권면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흔적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사도의 권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헬라어 '엑수시아'인 이 권위(authority)는 몇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험의 권위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먼저 경험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권위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결혼식은 어떻고 신혼여행은 어떻다고 말해야 권위가 섭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책에서 본 것만으로 떠들어보았자 통하지 않습니다. 경험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경험의 우선자입니다. 경험의 선배로 권위가 있습니다.

 

둘째는 전문성의 권위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면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성경에 전문가가 아닙니까? 전문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희생의 권위입니다. 나를 위하여 얼마나 희생했는가가 문제입니다. 어머니의 권위가 무엇입니까? 바로 희생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없으면 어머니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단지 낳았다고 해서 권위가 생깁니까? 권위란 얼마나 투자하고 얼마나 많은 희생과 눈물을 흘렸는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희생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말로 훈계를 해보십시오.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희생을 한 사람이 한마디 해야 비로소 꼼짝 못합니다. 저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여 야단맞은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말씀은 한 번도 거역해 본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그만큼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얻기 위해 얼마나 기도한 줄 아느냐?” 사실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저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새벽마다 저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목사, 선한 목자가 되라,’ 하시면서 키웠습니다. 저에게 어머니는 절대 권위입니다. 어릴 때 늘 어머니께 손목이 잡혀 새벽기도에 나가곤 했습니다. 싫어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네가 그러면 되느냐?”하고 꾸중이라도 하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런 희생도 없이 잔소리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소리만 있지 효력이 없습니다. 바울은 희생을 많이 한 사람이니만큼 권위가 있었습니다.

 

넷째는 인내의 권위입니다. 고린도후서 12:12에서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라고 한 말씀과 같이 바울은 무던히 참았습니다. 온갖 어려운 것을 인내합니다. 어디까지 참느냐, 얼마나 참느냐에 권위가 있습니다. 잠시도 참지 못하고 발끈발끈 변덕을 부리면서 권위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 권위의 종합적인 증거로서 자신의 몸에 흔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스티그마'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흔적'이라는 말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노예에게는 반드시 주인이 있습니다. 가끔 이 노예가 도망을 가기도 하는데, 한번 도망갔다가 붙잡히면 얼마든지 주인 마음대로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죽이면 주인에게 손해가 아닙니까? 그때에는 노예의 몸에 문신을 합니다. 인두를 불에 달구어서 몸에 주인의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이제 그는 영원히 그 집의 노예입니다. 노예라고 하여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는 팔수도 있고, 자유를 주어 내보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양도할 수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번 도망갔던 종은 영원한 낙인을 가지게 됩니다. 어디에 가도 인두로 새긴 낙인이 드러나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합니다.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아무개의 종이라는 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티그마' 흔적입니다. 흔적이 새겨지는 순간은 인권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순간이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완전한 소유물, 영원한 소유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요 내가 하는 말이 곧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울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어 손해 본 것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내 몸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생겼습니까?

 

한국 기독교 초기에 활동했던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님은 모금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말을 남보다 특별히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그의 얼굴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상처는 길거리에서 전도할 때, 술 취한 사람이 맥주병을 깨서 던져 생긴 것입니다. 어디 가서 설교하든 이 상처는 모두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자연히 모금이 잘 되어 우리 교단 신학교인 한신대학교의 모체가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숭실학교를 세웠습니다. 무엇인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빤질빤질해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흔적이 있는가를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흔적을 하나씩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내 몸에 흔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또 믿음에 굳게 서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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