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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4장

by 은총가득 2021. 5. 2.

 

 

그리스도의 구속(갈4:1-7)

 

본장에서 사도는 유대적 경향이 짙은 교사들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문제점을 분명히 제시해 준다. 이 유대적 경향이 짙은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립하여 모세의 율법을 옹호하였고 율법의 멍에 아래 갈라디아인들을 끌어 넣으려고 애를 썼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이로써 그들의 과오를 시정해 주기 위하여 본문에서 사도는 전 장에서 취급하였던 율법을 미성년인 아이에 비교하여 그들에게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서 있을 때보다 우리가 복음 아래서 얼마나 큰 유익을 누리고 있는가를 제시한다.

Ⅰ. 그는 우리에게 구약 교회의 정황을 알려 준다. 그것은 미성년의 아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구약 교회는 우리가 복음 아래서 즐기고 있는 더 큰 빛과 자유에 비교하여 볼 때 어둠과 예속 상태에 매여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구약 교회에도 은혜의 통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적 흑암의 통치였었다. 그것은 "유업을 이을 자가" 어린 상태에 있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림으로 후에는 그에게 대단히 유익할 것이 현재는 이들 후견인과 청지기로부터 그가 거의 깨닫지 못하는 사실들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지시를 받는다. 구약 교회가 꼭 이 아이와 같은 형국에 있었다. 그들이 처리를 받았던 모세를 경륜, 그 경륜의 의미를 그들은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가 말한 것처럼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였기 때문이다"(고후 3:13).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복음의 시대를 맞아 완전히 성숙할 때까지는 대단히 유용한 것이었다. 율법은 흑암의 통치였던 동시에 예속의 통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담스러운 수많은 의식과 규정에 얽매여 있었고 한편 이 초보적인 것들에 의하여 그들은 가르침을 받고 훈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린 아이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듯이 예속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구약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어질 수 있게 하려고 뚜렷한 이유도 깨닫지 못하고서 종의 멍에를 사람들에게 계속 메어 주었다. 그러나 복음 아래서의 섬김은 이러한 것보다는 더 합리적인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정한 때가 이르고 교회는 성년에 이르게 되었고 전에는 그 아래 매인 바 되었던 흑암과 구속이 그들에게서 옮겨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더 큰 빛과 자유의 통치 아래 거하게 된 것이다.


Ⅱ. 그는 우리에게 복음의 통치 아래 있는 기독교인들이 훨씬 행복한 상태에 있음을 알려 준다(4-7절).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차매" 그는 율법의 통치를 종식시키는 대신 다른 보다 좋은 것을 세우시기 위하여 그는 "그 아들을 보내셨다." 이 새로운 통치를 전하기 위하여 채택된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하나님 자신의 아들 곧 아버지의 독생자였다. 이 아들은 태초부터 예언되었었고 약속되었던 분이었는데, 때가 이르렀으므로 이 목적을 위하여 나타내진 바 되신 것이다. 그는 그가 착수하신 크신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그가 착수하신 "여자에게 나게 하심"에 복종하셨고(그의 성육신을 말한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심"에 복종하셨다(그의 매인 바 되심을 말한다). 이같이 참으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만유의 주님이신 그분이 예속 상태에 처해 있기를 허락하시고 자신에게 종의 형체가 입혀짐을 승낙하였다. 이 모든 일의 큰 하나의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즉 조금도 관용이 없는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고 보다 합리적이고 용이한 복음의 규례를 베푸시기 위한 것이었다. 참으로 그는 세상에 오심으로 단순히 우리를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에서 구원하시는 것 이상의 크고 원대한 뜻을 갖고 계셨다. 즉 그가 인성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한 고난과 죽음을 감수 하신 것은 이로써 그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도덕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며 우리는 죄인으로 그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일부였고 또 다른 자비가(이는 우리에게 양자의 자격을 주시기 위한 것인데) 그의 나타나실 때에 수여되기 위하여 보존되고 있었다. 그가 오시기 전에 한 동안 구약 교회는 더욱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참혹성을 더 좋은 교리로 하여금 구약 교회를 대신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보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즉 우리를 더 이상 종으로 취급되지 않고 성장한 아들로서 대우하시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었던 때보다 더 큰 자유가 주어지고 더욱 폭 넓은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그는 보냄을 받으실 것이다.

 

 

사도의 모든 논리의 전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양자됨의 특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바울이 말하고자 한 양자의 특권은 복음서가 자주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 주어질 특권으로써 말한 은혜로운 양자 선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곧 그의 장남이었다(롬 9:4). 그러나 이제 복음 아래서 믿는 각 개인마다 양자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령은 그들에게 기도의 사명을 인식하게 하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6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르기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사도는(7절)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를자니라"는 말로 그의 논거를 종결짓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복음의 상태에서는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 까닭에 우리는 아들의 영을 영접해야 하며 또 그에 의하여 양자로 선택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들들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되었고, 하늘의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롬 8:17 에서 그는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서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것은 가장 큰 연약함과 우매함을 나타내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본문에서 사도가 말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 그것은 우리를 속량하고 구속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특별히 나타난다. 또한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대신 그토록 낮아지시고 그토록 많은 고통을 참으신 아들에게서 또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이 은혜로운 목적을 위하여 강림하사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에게서 이 사랑과 자비는 또한 나타난다.

2. 복음으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누리게 될 고귀하고 가치 있는 사실들.

(1) 우리가 양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특권이다. 본래 진노와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던 우리가 은혜로 사랑을 입은 자녀들이 될 것이다.

(2) 우리가 "양자의 영"(이는 성령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양자된 자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다)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양자의 특권을 소유한 사람은 모두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어짐을 받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영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그의 자녀들이 그와 닮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2] 양자의 영은 언제나 기도의 영이시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로서 바라볼 수 있도록 가르치셨다.

[3] 만일 우리가 그의 아들이면 또한 그의 상속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세계에서는 장남만이 상속자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상속자가 된다. 아들의 성품을 받은 자들은 아들의 유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갈4:8-11)

 

본문에서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회심하기 이전의 상태가 어떠하였는가를 상기시킨다. 또한 회심으로 그들에게 어떠한 복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상기시킨다. 그런 다음 이제 그들이 그들을 모세의 율법의 멍에 아래 매어 놓으려고 하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하는 점을 그들에게 설득한다.

Ⅰ.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지난 날의 처지와 행위를 상기시키고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의 그들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었다." 그들은 참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였었고 그를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무지하였었다. 당시에 그들은 최악의 노예 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기"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신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참 신이 아니요, 단순한 피조물, 즉 어쩌면 그들이 만든 것으로써 그들의 말을 듣지도 또 전해 배울 수도 없는 무수한 우상과 미신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였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참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은 거짓 신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은 신들 없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것을 신으로 숭배한다.

2. 신앙적 예배는 본질상 참 하나님이신 그분 이외의 누구에게도 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도는 본질상 신일 수 없는 것들에게 예배드리는 행위를 책망하면서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분만이 유일하고 또 타당한 우리의 신앙적 숭배의 대상임을 명백히 제시해 주고 있다.

Ⅱ. 그는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 이루어진 복된 변화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을 그들에게 촉구한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알 뿐더러"(그들은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로 옮기어졌다. 이로써 그들은 그들이 전에 처해 있었던 무지와 예속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 이러한 복된 변화가 있게 될 것, 곧 우상에 대한 숭배에서 돌아서 사신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양자됨의 특권을 얻은 것은 그들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은총의 덕분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유롭고 풍부한 은총의 결과였고, 또 그들이 그렇게 마땅히 여겨야 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를 추종할 더 큰 의무를 수여받은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모든 사귐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에게 알려진 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Ⅲ.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다시 예속의 상태에 매이려고 하는 불합리하고도 미친 것과 같은 행위에 대하여 논한다. 그는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움과 깊은 우려를 품고서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어찌하여 돌아가려 하느냐"고 말한다(9절). "복음이 제시해 주는 방법대로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것을 가르침 받은 너희가 이제 형식적인 예배의 방법을 좇으라는 자들에게 어째서 설득당하고 있는가? 복음의 가르침대로 빛과 자유와 사랑의 통치에 친숙해 왔던 너희가 율법이 지시하는 흑암과 예속과 공포의 통치에 어찌하여 복종하려 하는가?" 그들은 유대인들처럼 결코 모세의 율법 아래 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을 좇을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 가운데 그토록 오랫 동안 지켜져 왔던 율법의 관습에 대하여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금 스스로 예속되고자 하는 것은 그 속에 영혼을 정렬케 하는 능력도 없고, 마음에 확실한 만족감도 주지 못하며 다만 미성년 상태의 규약 교회를 위해 계획된 것으로 이제 복음의 시대에는 종언을 고하게 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유대적 교사들에게 복종하고 유대인들의 각종 절기 즉 본문에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킴으로 유대인들과 동일화하려는 것이 더욱 그들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들추어 내는 것임을 말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신앙을 훌륭히 고백한 자들이 후에 신앙의 순결과 순박함에서 떠나 이탈해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갈라디아의 교인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2. 그들을 이끌어 복음을 알게 하고 복음의 자유와 특권을 알게 한 그 하나님의 자비가 크면 클수록 이 모든 권리를 가만히 빼앗겨 버리는 자들의 죄와 어리석음은 더욱 가중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는 특별히 강조한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고 또는 다른 말로 그에게 알리워진 바 된 후에 약하고 천한 율법이라는 초등 학문에 매이기를 바라는 것의 어리석음을 대단히 강조한다.

Ⅳ. 그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염려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씀한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복음에 대한 믿음과 복음이 주는 자유로 확신하게 하려고 많은 고난을 당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버림으로 그들 가운데서 행한 그의 수고를 헛된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기억하자.

1. 신실한 사역자들의 많은 수고가 헛되게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그렇게 전개될 때 영혼들의 구원을 염원하는 자들에게 큰 슬픔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사역자들의 수고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끝맺는 자들로 인하여 헛된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잘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에는 복음의 길에서 벗어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도 헛되어 수고를 하게 한 자들(그의 말에서 떠남으로)은 그 막중한 책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불타는 충고(갈4:12-20)

 

사랑에 불타는 충고(1)(갈라디아서 4:12-16)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가 전해 주었던 복음의 진리를 버린 사실을 그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될 것을 촉구한 후 바울은 그들이 전에 그들이 전에 자기와 그의 사역에 대하여 가졌였던 큰 사랑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당시에 고백하던 것에 대하여 현재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가도 상기시킨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Ⅰ. 바울의 그들을 향한 열정적인 호소. 그는 그들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상당히 멀어진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형제라고 부른다. 그는 모든 원망과 시비가 사라지고 그가 그들을 향해 품은 것과 같은 온화한 심정을 저희도 그를 향해 품게 되기를 바란다. 그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그에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음을" 말한다. 그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과 변론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행위를 책망할 경우에라도 그는 온화함과 깊은 관심을 갖게 하였고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적대하기 위한 심정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그들은 그를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오로지 복음의 진리와 순결을 위한 또한 그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열심히 그렇게 하였음을 말한다. 이같이 그는 그를 향한 그들의 심정을 달램으로 그들이 그가 그들에게 준 경고로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려고 애를 쓴다. 여기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견책할 때 우리의 책망이 사적인 불쾌감이나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신앙의 영예와 그들의 참다운 안녕을 위한 진지한 관심에서 나온 것임을 상대방이 인식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책망이 가장 공평성을 띨 때만이 그것은 성공적으로 먹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Ⅱ. 그는 그에 대한 그들의 이전의 사랑을 높이 평가한다. 그에 대한 이전의 사랑 때문에 그를 향한 현재의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그들은 더욱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었다.

1.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자기가 그들 가운데 처음 왔을 때 그가 당한 곤경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안다"고 말하였다. 그의 "육체의 연약함"은 "내 육체에 있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란 말로 보충되어 표현되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물론 그의 편지를 받는 교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그가 복음으로 인하여 겪었던 박해일 것이라고 본다. 또 어떤 이는 고린도 후서 10장 10절과 12장 7-10절의 내용을 들어 그것은 그의 사역에 대하여 감사한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고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이 그들에게 그를 나쁘게 생각하게 하는 요인이 된 것 같지는 않다.

2. 그들이 그를 경멸치 아니하였다는 이유는 그의 이러한 연약함에도 불구하고(어떤 이들은 이것 때문에 그를 업신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경멸하거나 거절하지 아니하였음을 그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의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대단한 경의를 표하였고 마치 그를 하나님의 천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파하러 오기나 한 것처럼 그들은 위한 메신저로 그를 환영하였다. 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들은 그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서 그를 줄 수 있을 정도였다." 백성들의 존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게 또 얼마나 그들의 마음은 표현하기 쉬우며 한때는 그들이 최대의 존경과 사랑을 바치던 대상에 대하여 쉽게 경멸을 가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을 기억하자. 여기 한때는 위하여 눈까지 뽑아 주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의 눈을 주려고 한 사람의 눈을 오히려 뽑으려하고 있음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판단을 받는 것은 작은 일이기 때문이다"(고전 4:3).

Ⅲ. 갈라디아인들을 향한 바울의 진지한 충고, 본문에 보면 그는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말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이다. "너희가 복음의 기쁜소식을 듣고 대단한 만족과 기쁨을 못이겨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너희들은 너희의 기쁨을 마치 내가 만들어 내기나 한 것처럼 나를 향하여 감사를 퍼부었었다. 그런데 이제 나에 대한 경의나 복음에 대한 흥미가 쇠퇴된 지금 너희는 얼마나 변모되었는가? 한때 너희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것을 버리다니 무슨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는가?" 그들의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은 다음의 사실들을 숙고한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이 한 때 말했었던 축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가? 그들이 하나님과 사귀고 또한 그의 종들과 동무로 지내던 때의 맛보았던 즐거움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로 물어 보아야 한다. 그는 그들의 현재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다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 지금까지 너희의 사랑을 받던 내가 어찌하여 너희 원수로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내가 죄가 있다면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고 너희로 진리를 깨닫게 하려 하였으며 너희로 복음의 진리를 확신케 하려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친구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작지 않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로 본문에서 사도와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경우처럼 그 대상이 사역자들이든 또는 다른 누구든 간에 저희에게 진리를 말해 주며, 저희의 영원한 구원의 문제를 자유롭게 또한 성실하게 말해 주는 사람들을 원수로 여긴다.

2. 때때로 사역자들은 그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려 하기 때문에 적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경우와 그러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진리를 말했으므로 그들의 원수로 취급되었다.

3. 그럼에도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내거나 그들로 인하여 저희가 불쾌하게 느낄 것을 염려하여 진리를 말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4. 사역자들은 그들이 저희에게 오직 진리를 말하였기 때문에 어떤 이들의 적의를 산 것이라고 여겨질 때 마음의 평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에 불타는 충고(2)(갈라디아서 4:17,18)
사도는 앞의 구절들에서 추구하였던 같은 목적을 본문에서도 계속 추구한다. 저 갈라디아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로부터 떠난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자 한다. 그들을 복음 안에서 세우려고 애를 쓴 그를 향한 그들의 태도 변화에 대하여 훈계한 바울은 그들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본문에서 말한다. 만일 그들이 이들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조금만 주의를 했더라면 그들이 이들 거짓 교사들에게 귀를 기우릴 이유가 거의 전무함을 곧 발견할 있었을 것이었다. 그들이 이들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갖고 있었든지 간에 그는 그들이 음모군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린다. 그들은 자기들을 세우려고 도모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허울 좋은 가식 속에는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이해가 더 많이 얽혀 있었다. 그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고 있다. 또한 저희는 너희를 진실로 존경하는 것처럼 하며 너희에게 대단한 사랑을 가장하고 있으나 좋은 뜻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떳떳하지 않은 의도를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요,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은 신실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이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너희로 그들을 사랑하게 하려는 것으로 이 목적을 이루려고 그들은 나와 진리에 대한 너희의 열심을 방해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한다. 그러므로 저희는 너희를 독점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저희의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도 하여금 저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임을 확신있게 바울은 말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진실과 성실함은 거의 없으면서 대단한 열의는 지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2. 백성들을 교사하여 결국 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려고 하는 것이 유혹자들의 일상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수단에 의하여 그들은 사람들을 저희와 같은 견해를 갖게 하려고 한다.

3. 유혹자들이 아무리 가식을 한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타인의 이익보다 자기의 이익에 더 관심이 있으며 자기들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파괴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정말 우리가 어느 길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18절 공동 번역 인용). 공동 번역에서 "좋은 동기"(개역은 "좋은 일")로 번역한 내용을 어떤 이들은 "좋은 사람"을 뜻한다고 보고 따라서 이 말은 사도가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라고 한다. 그들은 앞의 사정을 참작할 때, 또한 뒤에 곧 나오는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뿐만 아니라"는 말씀을 보아서도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은 말로 본다. "너희가 나를 향하여 열심히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너희는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리고 지금도 너희가 나를 달리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너희가 내게 하였듯이 내가 없는 지금에도 전과 같이 나를 존경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말씀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좋은 일"이라는 번역을 고수할 때 사도는 우리가 어떤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하는지의 좋은 규정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점을 우리의 열심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제의한다.

(1) 좋은 일에만 열심을 내도록 하라는 제의이다. 왜냐하면 열심은 좋은 일을 수행함을 주어질 때만이 훌륭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악한 것만을 열심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열심은 해로운 것이 된다.

(2) 좋은 일에 대한 열심을 계속적이고 꾸준해야 한다는 제의이다. 좋은 일에 언제나 열심을 품는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한 번만 열심을 내거나 또는 학질걸린 사람처럼 간헐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체온처럼 늘 지속적이어야 한다. 이 규정이 기독교인들 가운데 보다 잘 지켜진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워지겠는가!

 

사랑에 불타는 충고(3)(갈라디아서 4:19,20)
사도는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줄 수밖에 없었던 책망을 그들이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한 후 그는 본문에서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떠하며 또 그들의 안녕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세심한가를 표현한다. 그는 그들처럼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이랬다가 그들이 없을 때는 저렇게 한 적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싫어한다고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에게서도 식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에 그가 품었던 것과 같은 사랑을 지금도 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면서 그들을 대단히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저희의 거짓 교사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는 그들이 참된 유익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구한 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은 너무 쉽게 그를 자기들의 적으로 여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그들의 친구임을 확언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들을 향하여 부모와 같은 심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자기가 그들의 기독교 신앙으로의 회심의 도구 노릇을 하였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그들을 "나의 어린 자녀들"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주는 동시에 그들의 현재의 행동에 대한 풍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즉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계교와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것을 보아 그들이 아직 어린 자녀들과 같다는 말로도 볼 수 있겠다. 그는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에 비유하여 자신의 그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안녕 및 영혼의 번영에 대한 진지한 소망을 표현한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다." 그리고 그가 이같이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그들에게 진지하게 바란 가장 큰 소망은 그들이 그의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것"과 그들이 참된 기독교인들이 되면 복음에 대한 신앙에 보다 확고하게 서는 일 이외에는 없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심정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1. 신실한 사역자들은 그들이 위하여 고용된 대상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사랑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린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열렬한 사랑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2. 사역자들이 바라고 또 위하여 해산의 수고까지 아끼지 말며 바라야 할 주요 관심사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말아야 하며 그들을 자기들의 먹이로 여겨서는 더구나 안된다. 사역자들은 교인들의 심령이 새로워지고 그들이 완전히 정착되고 확고해지기를 바라야 한다. 이러한 사역자들을 배신하거나 싫어하므로 자기들이 그 위에 거하려고 하는 무리들의 행위야말로 얼마나 모순에 찬 행위인가!

3. 성도들이 자신의 의를 믿는 데서 벗어나서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의만을 의지하도록되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사람들속에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사랑과 관심이 또 다른 증거로 사도는(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그들에게 한다. 즉 그가 그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씀이다. 이는 그들에게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가 나눌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 왜냐하면 현재 그는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기에는 그들의 현재 상황을 너무도 완연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심정을 그들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심정 때문에 그가 현재와 같은 편지를 그에게 쓰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그가 두려워했던 것보다 건전한 상태에 있음을 보고 마음에 기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들의 책망하고 그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대신에 그들을 칭찬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바랐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치리하는 사람들을 꾸짖을 필요를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꾸짖는 것이 그들에게 꼭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책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결과가 좋을 수가 있다.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부드럽게 변화시킬 근거를 발견할 때 언제나 기뻐해야 하리라

 

 

바울의 사랑어린 충고(갈4:21-31)

 

본문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만 거하는 신자들과 율법을 신뢰하는 유대교에 치우친 자들 사이의 차이를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를 비교함으로 설명한다. 그는 이 차이를 그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겨 줄 방법을 통하여 소개한다. 또한 이 비유를 통해 진리를 떠난 그들의 연약함 복음의 자유를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는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시작한다. 그는 그들이 율법의 내용을 들은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매 안식일 공적 집회 때마다 율법을 읽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 아래 거하기를 매우 좋아한 사실로 보아 그는 그들이 율법 안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특히 본문에서 그는 그들에게 16장과 21장의 내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의 내용을 고찰해 보면 율법을 믿을 만한 이유가 거의 없음을 그들이 곧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을 논한다.

1. 그는 역사의 한 사실을 그들 앞에 제시한다(22,23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본문에서 그는 아브라함의 이 두 아들의 각각 다른 지위와 입장을 설명한다. 즉 그 중 하나는 이스마엘로 "계집 종에게서" 난 자요, 다른 하나는 이삭으로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한다. 다른 말로 전자는 자연의 일반 법칙을 따라서 또는 육체를 따라 났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을 통하여 볼 때 사라에게 아들을 기대할 이유가 없는 때에 "약속에 의하여" 태어났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이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알려 준다. 또한 그가 이 사신을 통하여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말한다(24-27절). 그러므로 그는 "이것은 비유니"라는 말로 이 사실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그는 이 사실의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이외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숨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하가와 사라"는 "두 언약" 또는 계약의 두 가지의 다른 통치를 상징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본다. 전자인 하가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나타내는 것으로 "종을 낳았다." 그것도 은혜의 섭리에 의한 것이지만 복음의 상태에 비교하여 볼 때 그것은 구속(拘束)의 통치였다. 그리고 율법의 본 의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기를 바란 기대 때문에 이러한 구속의 성격을 가일층 강화되었다. 왜냐하면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시내산은 당시 아라비아인들에 의하여 하가라고 호칭되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인데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아직도 복음에 대해 불신을 품고 당시의 계약에 계속 뜻을 두고 있으면서 자손 대대 예속 상태에 사는 유대인들의 현 상태를 적절히 표현한 말씀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 곧 사라는 위에 예루살렘을 상징한 것, 또는 새롭고 보다 낳은 계약의 통치 아래 있는 기독교인들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약속의 자손의 어머니 사라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복음의 통치 아래서의 교회가 누릴 보다 큰 자유와 확장이라고 본다. 그의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호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고 하였다.

2. 사도는 이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정황을 설명하는데 적용한다(28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고 그를 의지하며 오직 그를 통한 의인(義認)과 구원을 바라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혈통에 의하여서는 아니라도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동시에 약속된 유업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며 또 그의 후손에게 주어질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고집하며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반박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박해는 그 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각오해야 할 것임을 말한다. 즉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할 것같이" 그들은 지금도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갈라디아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서의 다음과 같은 내용(창 21:10) 곧 계집종과 그의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비록 복음을 유대화시키려는 자들이 그들을 박해하고 미워할지라도 결국 유대교는 침체되고 시들어 멸망하고 말 것이되, 참된 기독교는 영원히 번창하고 지속되리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의 결론으로써(31절)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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