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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3장 - 이신칭의

by 은총가득 2021. 5. 2.

믿음에 의한 의인(갈3:1-18)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1)(갈라디아서 3:1-5)


사도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서도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계속 추구하고 있는 자들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서 도덕적 계율에 복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생각에 매여있는 자들을 다룬다. 이들의 율법은 불완전한 것임에도, 율법에 의한 희생과 정결을 의지하여서 의롭게 되려는 그러한 자들이다. 그는 먼저 이러한 자들을 날카롭게 책망한다. 그런 다음 진리의 증거를 들어 그들을 확신케 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하여 책망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하여 책망하려고 할 때, 무엇이 잘못이며 무엇이 실수인가를 상대방으로 알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부른다(1절). 기독교인이란 점에 있어서 그들은 지혜의 자녀라고 할 수 있지만 탈선한 기독교인들이란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어리석은 자녀들이었다. 그는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묻는다. 이로써 그는 그들을 현혹하는 교사를 술수와 덫에 사로잡힌 자들로서 표현한다. 또한 이렇게 현혹된 것은 그들답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현혹됨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어리석음과 현혹됨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진리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즉 그들은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왔고 또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고백하였던 칭의의 수단으로써의 복음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진리를 알고 도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우리는 진리에 복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진리에 복종해야 하고 견고하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영적으로 현혹된 자들은 예수 안에 나타난 진리가 그들 앞에 명백히 제시될 때 이같이 그 진리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을 입증하고 더욱 확실하게 하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그들 앞에 밝히 보였는데"도 그들이 꾀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십자가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의 성례가 그들 가운데 집행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명백히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이 거룩한 신비를 알고 이 예식의 귀중함을 인정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발표되었고 그리고 성례전 속에 표시되고 봉인된 진리를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예와 특권이 우리의 어리석은 변절과 신앙의 퇴보의 의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그는 그들의 영혼이 경험하였던 성령의 역사에 호소하여 저들의 어리석음을 제시한다(2절). 그는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면서 "성령을 받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적어도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성별케 하시는 능력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적적인 은사의 동참자들이 되었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는, 또한 그 신앙의 몇 가지 가르침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된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 믿음으로 인한 의인은 기독교의 특별하고도 근본적인 원리의 하나인 것이었다. 이 교리에서 떠난 그들의 어리석음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그들이 어떻게 하여 이러한 은사와 은혜를 받게 되었는가를 알고자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라고 묻는다. 즉 너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필요하다고 가르침을 받았는가?고 묻는다. 이 물음에 그들은 답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리가 그들에게 가르쳐지지도 않았으며 이방인인 그들이 그런 식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믿음으로냐?"고 묻는다. 즉 의롭게 되는 오직 한 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느냐?는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그들이 진실을 말한다면 그들은 후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들이 그토록 좋은 경험을 갖게 한 가르침을 거절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성령이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복음의 사역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그들의 영에 유익한 축복이 되는 복음이 사역과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매우 현명치 못한 처사라는 사실이다.

3.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지난 행위와 현재의 행위를 생각해 보고 그들이 현재 매우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고 또한 이치에 맞지 않게 행동하고 있지나 않는지를 판단해 보라고 한다(3,4절). 그는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기를"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하여서 성령을 받게 되었으며 이 안에 의롭다함을 얻는 참된 길이 계시되었던 것이었다. 이같이 그들은 잘 시작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율법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고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다 율법의 준행을 덧붙였고 이것에 의해 보다 높은 완전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와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 준수는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대신에 역현상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외롭다함을 얻기를 바라는 한은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기는 커녕 전혀 기독교인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은 그들의 한 손은 복음을 붙잡고 다른 손은 율법에 잡혀 복음에서 끌려 나오고 있는 중이었고 그들이 지금까지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해체시키려 하고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마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괴로움도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그들이 복음을 버린다면 그들의 어리석음은 한결 심화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괴로움을 당한 모든 일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어리석게도 버려야 할 것을 위하여 고통을 받은 결과가 될 것이었고 그들의 고통은 모두 헛수고로 되고 말 것이요. 그들에게 아무 이익도 없을 것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변절자들은 그들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업적 또는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것들을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2) 누구든지 오랫 동안 예배, 수난, 안식일, 설교, 성례의 생활을 헛되어 살았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라는 사실이다. 변절의 경우 이전의 의는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다.

4. 그는 그들이 그들 가운데 신의 인봉함과 위임을 받은 사역자들(특히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을 가졌었던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이들 사역자들은 그들 속에 성령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으며 기적이 있게 하였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이들 사역자들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인지, 듣고 믿음에 의해서인지"를 묻는다. 또한 이들 사역자들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또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확증된 가르침이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결과인지 또는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결과인지를 묻는다. 이 일이 후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그들 자신이 잘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토록 의미있게 소유하였었고 입증을 받은 가르침을 버리고 이러한 업적도 이루어 놓지 못한 것과 복음을 바꾼다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잘못이었다.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2)(갈라디아서 3:6-18)
갈라디아인들에게 진리에 복종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또 이로써 그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을 깊이 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애쓴 사도는 본문이지 그들이 거절하므로 그가 책망한 교훈을 광범위하게 증거한다. 그것은 주로 율법의 행위없이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의인(義認)에 대한 교훈이었다. 이 사실을 그는 몇 가지 방법으로 증명한다.


Ⅰ. 아브라함의 의인(義認)을 예로 들어 믿음에 의한 의인을 증명한다. 사도는 이를 증거하는 데 로마서 4장의 것과 같은 논증법을 사용한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고 말한다(6절). 즉 다시 말해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었고, 그리고 그의 이 믿음에 의하여 그는 하나님에게 의인으로 인정되었고 또 용납되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상징된 것이었다. 사도는 이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육체를 따라서가 아니요, 약속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것"을 우리에게 말씀한다(7절). 따라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같은 방법에 의하여 그들도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들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창 12:3). 그 내용은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고 그 내용이 본문에도 성경 또한 하나님이 믿음의 수단을 통하여 이방 세계를 의롭게 하실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안에서,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자만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처럼 의롭게 여김을 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사도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즉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어느 민족 출신인가를 불문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하여 따라서 그가 가진 것 같은 믿음을 가짐으로 믿음의 아버지인 그와 함께 축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특권을 얻는 것도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Ⅱ. 그는 우리가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법정에 서서 그 재판을 받게 된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추방당하고 정죄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죄함을 받지 않고 의롭게 되는 방책으로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의인(義認)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재판 법정은 틀림 없이 그들에게 불리한 선고를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기 때문이었다(10절; 신 27:26). 율법에 의하면 인간들은 누구나 생활이 완전해야 하며 인격적이어야 하고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 율법의 용어는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든가 또는 12절의 경우처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에 살리라"는 식이다. 따라서 이것을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 율법은 저주를 선언한다. 우리의 복종이 율법책에 쓰여진 모든 것대로 보편적이며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또한 영속적으로 되어지지 아니하는 한(만일 어느 때든 한가지 실수라도 범한다던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이 저주는 계시되고 경고된 것으로 진노와 파멸을 가져 온다. 저주는 모든 악에 대하여 각각 적용된다. 이 저주는 모든 죄인들, 곧 모든 인간들을 치는 강력한 힘과 권세와 효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 죄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범법자로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면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인 것이다. 이 의인을 율법으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지만 사도는 우리에게 이 저주를 피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준다. 그것은(그가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기이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므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그는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감당하셨다. 그가 죄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선물이 되시었다. 즉 그는 모세의 율법이 특별한 낙인을 찍은 것이며 불쾌히 여길 수 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죄를 없이하고자 선물로 자기를 드리신 것이었다(신 21:23). 예수께서 자기를 드리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가 되고 특히, 복음 시대를 위하여 예비해 준 성령의 놀라운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은 율법에 자신들을 드림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나타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죄인으로서 우리가 받았어야 할 비참한 경우를 기억하자. 율법 아래 있었다면 우리는 또한 율법의 저주와 정죄 아래 처해 있었을 것이다.

2. 우리를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자. 그는 우리 대신 저주를 담당하시려고 또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복종하셨다.

3. 그를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될 행복한 미래를 전망하도록 하자. 우리는 저주를 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축복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4.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Ⅲ.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는 구약의 특별한 증언들에 대하여 언급한다(11절). 이러한 말씀이 언급된 것은 하박국 2장 4절로 거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이 다시 로마서 1장 17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인용되고 있다. 하박국 2장 14절의 말씀의 의도는 참된 삶을 소유하며 죽음과 진노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하나님의 가호를 입어 생명으로 복귀됨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은 의로운 자이어야 하며 또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용납되고 그를 위하여 살수 있을 때만이 이러한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며, 이후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여 영생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임을 또한 제시해 주고자 한다.

 

그 까닭에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혹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할 지 몰라도 적어도 믿음이 없는 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떳떳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의롭다함을 얻는데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 없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것이었다(레 18:15). 율법은 삶을 얻는 조건으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코 우리의 의인은 새로운 가르침 아니고 복음시대 이전에 벌써 하나님의 교회에서 세워지고 가르쳐진 것임을 밝히려 한다. 믿음이야 말로 진정 어느 죄인이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고 또는 의롭게 되는 오직 유일한 길인 것이다.

Ⅳ.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계약의 불변성을 주장한다. 이 계약은 모세의 율법의 주어짐에 의하여 취소되거나 폐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15절 이하).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율법보다 앞선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약속에 근거하여 세운 것이었고, 또 약속은 믿음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8절). 그리고 이 계약은 확고하고 변함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계약이 폐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계약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는가 또는 합의 조항이 인준되면 양편이 다 묶이게 되면 이미 다른 길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뒤에 있어진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이 무효화 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diaqh,kh-즉 계약과 유언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

 

 

런데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계약이라기 보다 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유언이 효력이 있기 위하여서는 유언자가 죽어야 하며 그가 죽은 후에 유언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유언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은 확고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언의 권리를 주장할 상속 인물이 없기 때문에 유언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16절) 거기에 대하여서는 그런 염려를 안해도 된다고 사도는 말한다. 아브라함이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다. 그러나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체결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매우 놀랍게 해석한다. 우리는 그 계약이 오직 유대 백성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아니라고 한다. 즉 "자손을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단수로 표시한 것을 보아 그 말씀은 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 같고 그 자손이 곧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아직도 효력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영원히 거시하시며, 또한 믿음으로 그의 것이 된 영적 자손들 속에서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율법이 행위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그 율법이 계약을 폐할 수 없다면 또한 율법 속에 믿음이나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볍한다(18절).

 

그러므로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일 후에 있어진 한 행위가 약속을 폐기한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롭게 되는 길을 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지혜와 신실하심에 불일치 하는 것이 된다. 만일 약속에 의해서 아브라함에 유업이 주어졌고 이로 인하여 그의 영적 자손에게 물려진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 약속을 거두시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처럼 후회할 일을 행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의 목적(갈3:19-29)

 

앞 단원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서 말하고 율법이 아니라 그 약속이 우리의 의인(義認)의 규범이 됨을 말한 다음 사도는 그들이 그가 너무 율법을 훼손시키고 율법을 의도와 그 방향에 대하여 강론을 하여 무슨 목적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는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바울이 앞의 사실만 강조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 즉 "구원을 위해 약속만으로 충분하다면 율법은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든가,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게 된다. 이를 예상하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Ⅰ.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한다(19절). 율법도 약속을 폐기하고 약속에 의하여 제시된 길 말고 다른 의인(義認)의 길을 제시하려고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약속에 덧붙여진 것"으로 약속을 돕기 위하여 추가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범죄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정되었지만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확실히 알게 하고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몹시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있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요"(롬 3:20). "율법에 가입(加入)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이다"(롬 5:20). 율법은 또한 그들로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그들의 욕망을 자제하게 함으로 본성적으로 격동되기 쉬운 지나친 욕망으로 파멸되지 않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율법은 동시에 죄가 소멸되는 참되고 유일한 길로 그들을 지시해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율법이 지시해 준 그곳에 도달해야 그들은 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이다. 율법에 제시된 희생과 정결의 제도는 바로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사도는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덧붙인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그는 바울이 앞서 제시한 것처럼 약속 가운데 언급된 근본 자손이다) 또는 복음이 선도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별이 없이 믿는 자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때가 올 때까지를 위하여 율법은 주어진 것이었다. 이 때의 성취 또는 구원의 완전한 분배가 성취될 때까지 그 동안에 있을 범죄 때문에 율법은 덧붙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의 자손이 오셨고 약속 가운데 나타났던 신의 은혜가 보다 완전히 나타났으므로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은 폐기된 것이었다. 즉 결점을 지닌 계약은 다른 보다 나은 계약에게 자리를 물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히 9:7, 8). 비록 율법이 자연법으로 생각할 때 인간에게 죄를 확인시켜 주고 그들로 죄를 자제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언제나 효력이 있고 아직 계속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법적 계약의 구속(拘束)과 그것이 주는 공포에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약속에 의하여 계시된 것과는 다른 의인(義認)의 길을 제시해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죄의 본 모습도 보여 주고 그리스도에게 안내함으로 오직 그를 통하여 그들이 용서받고 또 의롭다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율법이 약속을 폐기하기 위하여 시도된 것이 아님을 더욱 증거하기 위하여 사도는 "율법이 천사들로 말미암아 증보의 손을 빌어 베풀어진 것이라"고 덧붙인다. 율법은 약속에 따라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방법으로 또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약속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즉 모든 민족들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그의 모든 영적 자손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또한 약속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진 데 비해서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주어진 것이었다. 이 까닭에 율법이 약속을 폐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여 진다.

 

 

왜냐하면(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공동 번역 인용). 즉 중재자인 천사는 양편의 입장을 다 고려하여 상대적인 입장에서 율법을 기록하였으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또는 계약은 하나님의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요, 따라서 율법보다 약속이 우수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과 유대 민족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협정인 율법에 의하여 그가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포함한 그의 모든 영적 자손에게 주신 약속을 폐기하실 리는 없는 것이다. 그가 율법에 의해 약속을 폐기하신다는 것은 그의 지혜와도 일치되지 않으며 그의 진실과 신실하심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모세는 다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중재자일 뿐이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사이에 중재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이 영적 자손에게 주어진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더군다나 율법이 약속을 전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Ⅱ. 율법은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21절).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정말 율법과 약속은 서로 상충되고 대등한 입장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 또 너희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과 모세의 계약이 서로 모순된다고 보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이에 답하여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당시에는 율법이 하나님이 약속을 거스린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생각을 품으시지도 않았고, 그가 하신 말씀 가운데 그러한 내용을 찾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율법은 약속에 결코 불일치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에 종속된 것으로 율법의 의도는 인간들의 범죄를 들어내고 그들로 하여금 율법의 의보다 나은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았다는 결론은 하나님이 주신 교훈이라기 보단 그들이 만들어낸 교훈이라고 봄이 옳다. 왜냐하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약속은 폐지된 것이 되고 더 이상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 속에서는 우리는 율법으로 의로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에(22절). 또는 성경이 유대인이건 이방이이건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어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서 의를 성취하거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인들의 상처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 상처를 치료해 줄 수는 없다. 율법은 그들이 죄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율법이 희생과 순결의 제사를 정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없이 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따라서 율법의 가장 큰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다." 곧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율법이 그들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데 불충분함을 알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시키고 또한 약속의 혜택을 획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Ⅲ.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24절). 앞의 구절에서 사도는 "믿음이 오기 전에" 또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교리가 완전히 들어나기 이전에 모세의 경륜 아래서의 유대인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때 그들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어 엄격한 책벌 아래 율법의 여러 계명들을 엄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옥에 갇힌 죄수처럼 율법의 공포와 단련 아래 매인 바 되어 있었다. 이들을 이같이 묶어둔 목적은 이로써 그들로 하여금 "후에 계시될 믿음을" 기꺼이 용납할 마음의 자세를 갖게 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하고 그가 도입한 보다 좋은 은혜에 애착을 갖게 함으로 그들을 노예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보다 큰 빛과 자유의 상태로 그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율법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몽학 선생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율법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선포하고 동시에 그들의 의무에 대한 오류가 그들에게 있을 때 마다 그들을 치는 저주로써 주어진 동시에 율법은 또한 그들의 상실되고 영락된 상태를 그들에게 알려 주며 그들의 의가 그들을 하나님에게 추천하기에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나약한지를 보여 주기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율법이 온갖 희생의 제사를 그들에게 의무화한 것은 비록 이런 제사들이 그 자체만으로 그들의 죄를 없이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또 그가 죄를 사하기 위하여 드린 큰 희생의 유형(그림자)으로써 주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동시에 율법에(대단히 모호하게 나타났지만) 그들에게 그를 그들의 안신처와 도피처로 삼도록 지시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이 율법은 미성숙 상태에 있는 그들을 교훈하고 다스리기 위한 몽학 선생 또는 maidagwgoj란 단어의 뜻이 잘 나타내 주듯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고 인도하는 그들의 종인 것이다(마치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보호를 맡고 있는 하인들에게 이끌리어 학교에 가듯이 말이다). 또한 율법이 그들의 몽학 선생이 되어 그들을 의인과 구원의 참된 길에 대하여 보다 확실히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의인과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가장 완벽하고 명백한 의인과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기 위하여 임명되어 오신 것이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용도와 목적으로 쓰여지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면 기독교 시대에서도 계속 율법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는냐는 질문이 던져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25절). "믿음이 온 후" 곧 그리스도 아래서 복음의 반포가 시작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한 용서와 생명의 길이 가장 밝은 빛 아래 나타났으므로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한다"고 말씀한다. 즉 우리가 예전처럼 우리를 그에게로 인도해 주는 율법이 쓰이는 용도와 목적을 알려 준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의 옛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 이것은 그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복음의 시대에 비교할 때 율법을 주신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복음의 시대에 비교할 때 율법의 시대는 아직 어둡고 공포에 찬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율법은 그들에게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고 그에게 희망을 갖도록 그들을 격려한 면에 있어서 훌륭한 조력자와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였다.

2. 유대인들이 범함 큰 과오와 어리석음. 그것은 그들이 율법의 의도를 잘못 알고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남용하였다는 사실에서 들어난다. 율법은 그들에게 의롭다 함을 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며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는 수단으로써 계획된 것이었고 또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여 그를 믿게 함으로 의인의 특권을 획득하게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를 바랐던 것이다(롬 9:31, 31; 10:3, 4 참조).

3. 율법보다 뛰어난 복음의 유익성, 복음 아래서 우리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누렸던 것 이상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특혜를 즐길 뿐만 아니라 옛 유대인들이 메인 바 되었던 구속(拘束)과 공포의 상태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미성숙한 어린 아이로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장한 아들로서 대우를 받게 되었고, 옛 유대인들보다 더 큰 자유를 허용받았으며 더 큰 특권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 준다.

(1)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을 선언한다(26절).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참 기독교인들이 복음 아래서 누릴 크고 놀라운 특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종으로 취급받지 아니하고 "아들들"로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과 거리를 둔 상태, 곧 예속된 상태에 거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가까이 그리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그의 자녀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었고 모든 권리가 허용되는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다.

[2] 그들이 이 특권을 얻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그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만을 의인과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의지함으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특권을 누릴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인데) 그들이 세례를 받을 때 고백하였던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고 말씀한다. 세례받을 때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그들은 그에게 드려진 바 되었고 그의 옷을 입은 것과 같으며 스스로를 그의 종이요, 제자로 선언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일원이 된 후 그들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었고 그렇게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유대교로 들어가는 예표가 되듯이 세례는 기독교회로 우리를 받아들인다는 엄숙한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사도들에게 세례를 위임하심으로써(마 28:19) 세례를 기독교에 들어오는 예식으로 정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세례를 베푸는 것은 관례가 되었다. 아마 사도는 본문에서 그들의 세례를 의식적으로 강조하고 도 그들이 세례받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할례의 유익성을 강조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자 하였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약속된 자손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기시키려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리라"는 답변으로 이 곤란한 문제를 가볍게 처리한다. 즉 복음 아래에서는 세례가 할례를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드려지고 또 신실히 그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세례에 의하여 율법이 베푸는 특혜에 허입되듯이 그들도 기독교의 온갖 특권 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빌 3:3). 그러므로 그들이 할례를 계속 사용해야 할 이유는 없어진 것이다. 둘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입었다는 사실이다. 세례받을 때 우리는 그에게 제자됨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실한 종들로써 행동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세례받았다는 말이요, 또 그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실 때 우리도 그와 일치하여 죄에 대하여서는 죽고 새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롬 6:3, 4). 우리가 자주 이 사실을 기억할수록 이 사실을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특권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율법은 유대인과 희랍인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모든 우선권을 주었다. 또한 율법은 "종과 자유인", 주인과 종, 또 남성에게만 할례를 베풀므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르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입장에 있게 되었고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한쪽이 민족적 또는 개인적 편견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을 다른 편에서 누린다든가 반대로 그러한 민족적 개인적 특권이 없다고 해서 다른 민족이 배척된다는 법도 없게 되었다. 다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민족, 성, 빈부의 차이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에게 용납되며 그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된 것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음을" 그는 선언한다. 저희의 유대적인 교사들은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하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믿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아니다, 할례는 필요없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약속된 자손이며 그를 통하여 지상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되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다면, 즉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면 너희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될 것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될것이요, 결과적으로 그의 큰 축복과 특권을 받을 자격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고찰하여 볼 때 의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은 일시적인 제도에 불과하고 약속을 폐기하고 대신 있어진 것이 아니라 약속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하겠다. 바울은 아래에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제도하에서 누린 것보다 더 크고 훌륭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따라서 갈라디아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즉시 빼앗아 버리려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현명치 못한 처사라고 말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3:13,14)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구원의 소망이 우리가 책임을 완수한다는 조건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모두 정죄함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가장 경건한 사람도 자신이 원숙한 단계에 이르렀으며 다시는 실족하지 않으며 모든 결점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대로 부르시며 우리는 모두 타락했으니 정죄함을 받아야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인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처해 있는 저주받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매일매일 우리의 귀를 하나님 말씀으로 공격한들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 더 가까이 밀어 넣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인류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피할 방도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일러줍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시어 당신이 구원하려고 하셨던 모든 사람들의 저주를 감당하는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죄를 몸소 지실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신21: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이지 않게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체가 그렇게 더럽혀진 것을 보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무에 매달린 자 모두에게 이러한 저주를 내리셨을 때에 당신의 독생자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죽음을 당하신 것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사람의 변덕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결정되었습니다(사2:23; 4:28).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그 분을 죽음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만약 그 분의 죽음이 부정하고 강제적인 방법으로 유다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면 그 분의 죽음은 전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사도행전2:23에서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명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거기에서 우리 주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한 손은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뜻으로 결정하셨던 것 이상의 것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읽을 때에 주님이 그렇게 되신 것은 모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 고 말씀하셨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셨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조정되고 미리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잘 결합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과 당신의 아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짐을 자신이 직접 지셔서 자신을 이를테면 죄인의 괴수로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죄인이 되셨습니다. 모든 절대적인 권한을 다 갖고 계시며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그 앞에서 벌벌 떨며 꿇어 엎드리는 영광의 주님(the Lord of G1ory)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얼핏 보아서는 무모하고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복음의 도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라(고전1:18,23)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한 말을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기만 하면 하늘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는 지혜롭고 선한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이 멀어서 자연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사시기 위해서 새로운 방법 즉 우리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한 방법을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드님이 받아야 되는 저주와 관련해서 우리가 읽은 것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에서 기쁨을 얻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매우 사랑하시어 측량할 수 없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데 대하여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평가절하 하거나 성경 말씀이 주님께 돌리는 영광을 가리기는 커녕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계기를 훨씬 더 많이 마련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바울이 표현한 대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빌2:6).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을 비우셨으며 인간의 속성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렇게도 혹독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셨으니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는 매우 귀중한 존재였음에 틀들림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담겨 있는 뜻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크신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비록 우리가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것의 100분의 1만을 헤아릴 수 있어도 거기에 담겨 있는 뜻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 안에 있는 악의와 괴팍함을 어떻게 폭로하는지 보십시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이 되었다고 선언했을 때에 우리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고약하게 행동할 기회로 여기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복음을 완전히 단념하는 매우 타락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놀랄 일이로군요. 모든 선함의 원천이시며 우리를 성결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아드님이 저주를 받았다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그들의 생각이 맞다면 하나님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질서를 파괴하는 조치를 취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러한 어리석은 짓에 굽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방법이 지극히 분명한데도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를 폭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로우심에 놀랄 뿐입니다. 그것들이 주는 의의는 우리에게 모호할지도 모르고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이적 앞에서 우리의 지성은 실수를 하고 우리의 판단력은 혼란스럽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사악한 상태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토를 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와 부정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깨끗하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천사들로 하여금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할지라도 그들이 지불하는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배상할 수 있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신통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셨습니까? 연약함으로 오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연약하셨을 뿐 아니라 저주도 받았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고 있는 짐 때문에 모든 것이 혼돈 속에서 멸망했을 것입니다.

 

흠이 없는 어린양이시며 모든 의로움의 거울과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이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생각을 하고 놀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와 무한하신 긍휼로 구출해 주실 때까지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거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것은 우리를 완전히 겸허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감을 벗어버리고 우리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서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거기에 대한 대책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행될 때까지 우리는 겁에 질려서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밉살스럽게 되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가 없이는 하나님과 화해할 방도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덮고 있는 죄를 벗겨 주시고 그 죄를 자신이 직접 맡으십니다.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심판석으로 나아가서 만약 우리가 지금의 우리대로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를 삼켜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우리의 타락한 상태를 통감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드님이 우리에게 사주신 은혜를 찬양하고 비록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셨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예수님의 귀하심을 평가절하하지 맙시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이것이 우리를 자극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이 받아 마땅하신 모든 찬양을 드리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 당신에게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 약속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고 계시는 사랑의 표시를 바르게 평가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납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이 우리를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구속하지 않으시고 (벧전1:18)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그 비싼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긍휼을 요청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에게 흡족하게 내려진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조그마한 장점이 있다고 믿게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드님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아드님의 죽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귀중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으셔서 우리의 죄를 지기까지 하셨다고 한 바울의 말을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며 우리를 다정하게 대해 주실 것이라 고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바울의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그 약속은 먼저 그의 후손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구원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확산하실 때까지 구원의 선물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 약속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했으며 그들의 고유물이었으나 지금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왜냐하면 그 약속은 성령에서 비롯되었으며 의식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율법과 복음을 함께 혼합하려고 애썼던 유흑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졌던 그릇된 가르침을 모두 말소해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이런 것들 말하자면 희생, 할례 등은 모두 피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읽음으로써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이행하는 행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그 약속은 우리에게는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 지난날의 형상이나 그림자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초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허용하는 유일한 기반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내용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은 구원 방법에 대한 완전한 계시라는 것과 우리에게는 거저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규정된다는 간단한 원리 이외에 다른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또 다른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그는 거저 주시는 구원의 약속이 있은 지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진 약속은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효력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취소하기 위한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두 번째 약속은 첫 번째 약속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바울의 주장을 의심했습니다. 사람들이 합의에 이르자마자 다시 생각해 보고 생각을 바꾸어서 처음 약속의 효력을 상실시키기 쉽습니다. 법과 규례도 그와 같습니다. 첫 번째 법률이 두 번째 것에 의해 쉽게 파괴되고 효력을 잃게 됩니다. |

 

그러나 바울은 생각될 필요가 있는 무엇인가를 예상했습니다. 즉 만약 한 사람이 약속을 하고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할 의무를 엄숙하게 부과한다면 그는 그의 행보를 바꿀 수 없습니다. 즉 합의 사항은 굳게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양쪽이 상호 승인 하에 앞에서 합의했던 사항을 변경하기로 동의했다면 그 경우는 다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은 퍼뜩 떠오르는 가장 작은 생각에도 그들의 마음을 가볍게 바꾼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러한 예는 여기서는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문제의 그 분(person)은 영원히 지속되고 후에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논란이 되거나 위반 당하지 않을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약 한 쪽에서 그 약속을 파괴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참을 수 없다고 판정할 무서운 배반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합의 사항이 엄숙하고 정식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존중되어야 하며 아무런 반대도 없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비교해 보면 하나님이 허영에 불과한 사람보다 지조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나는 언약이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맺어졌기 때문에 복음의 약속은 효력이 변치않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만약 이것을 모두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우리를 얼떨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한 것을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조건에서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조건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맡으셨던 역할에 충실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우리들입니다! 그것은 ‘나는 당신에게 돈이 있다는 조건이 성립될 때에 물건을 팔겠습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돈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물건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맨 처음에 정해 놓은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는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율법으로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약속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부정으로 가득 갔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오염이 많이 되었으며 심하게 감염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증오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우리는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면해 주시겠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너그럽고 은혜롭게 맞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에 의지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지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의 약속과 율법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오래 되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차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더 오래 되었다면 그것의 효력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며 변할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이 먼저 있었으며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맺어졌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으며 본래의 언약을 취소하지도 않으셨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이 폐기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사람들을 공로 이외의 다른 이유로 구원해 주기로 맹세하셨는데 그후에 마음을 바꾸어서 우리가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을 높여 주기를 바라신다면 그것은 불합리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언약율법보다 먼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약에 대해서 어떤 것도 변경시키지 못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즉 언약의 본질과 효력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 언약이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중재자로 선택되셨으며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율법이 필요치 않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비록 모든 것을 1시간 또는 하루에 다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은 율법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잠깐이면 충분합니다. 정말이지 이 약속은 우리의 장점이나 개인적인 가치를 참고로 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인해서 이 약속을 하셨으며 우리는 엄청난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약속의 기초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중재자의 역할을 이미 맡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니 이 약속은 세상의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말을 해야 되는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유업을 자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율법이 없었지만 만족했으며 그는 물론 희생과 그와 같은 것들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마음이 깨끗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가 연약을 받았을 당시에는 성문률이 아직 없었으며 할례도 없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받았을 때에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할례와는 상관없이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회의 대속장이었던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늘날 사람들이 의롭다고 규정되어지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의롭다고 규정되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나머지 인종과는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것과 그들의 희망을 율법에 있는 형상과 그림자에 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자세하게 보여 줍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불쌍한 죄인이며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정죄받았다는 것과 그가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으로 의롭다고 규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직접 전해진 언약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의 모든 나라는 그의 자손을 통해서 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창l2:3).

 

여기서는 두 가지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는 축복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에게 약속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방인 혈통의 후예인 우리(즉 부정하고 원래 천국에서 추방당한 자들의 후손)도 이 언약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애초에 선택하셨던 그 혈통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왜냐하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가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런 대도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이며 아버지라는 것을 밝히시겠다고 하셨는데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관대한 손을 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을 찾고 계시는 것처럼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지만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하지만 때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강조점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는 축복이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후손들’(Seeds)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한 후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사하고 계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아마 바울이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을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후손’(seed)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10명이나 40명을 뜻하지 않고 단지 후손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인종 전체를 뜻합니다. 거기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12 지파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창 17:6). 우리는 한 민족의 수를 약 10만 명으로 여기는데 유다 지파 하나만도 그보다 많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후손’(seed)이라는 이 말이 단지 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하셨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정확하고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주장이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하나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첫 아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집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가정의 장자가 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21:30)라는 성경 말씀과 같이 남처럼 쫓겨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그에게는 다른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창25:1). 그는 그들 각자에게 분깃을 주고 멀리 떠나 보냈습니다. 이삭만이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습니다. 때가 되자 이삭은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이를 두게 되었습니다(창25:22-23). 먼저 장자인 에서가 당연히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거절을 당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약속된 축복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야곱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지중에 그를 축복해주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축복을 취소할 수도 없으며 또 그는 성령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을 바꿀 수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창27:37).

 

만약 우리가 ‘후손’(seed)이라는 말을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에게 적용시킨다면 확실히 이 말에는 이스마엘의 자손들과 하갈의 자손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종이었던 이두미아의 자손들도 아브라함 가문의 일원으로 취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서 상속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the seed of Abraham) 이라는 말은 다소 다른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잠시동안 그 문제에 대해서 이모저모로 생각해 봅시다. 믿음말고 무엇이 교회를 단합시킬 것입니까?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을 식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겠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우두머리가 되시는 분 (Head)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단합은 그 머리 (It's Head), 즉 예수 그리스도(Redeemer)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바울은 그 언약이 자손들 즉 복수에 적용되지 않고 한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을 발견하려면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둘러싸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상의해야 합니다.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속하고 믿음으로 그 분에게 의지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인이 아니요”라는 로마서 9:6 말씀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은 약속된 아이는 이삭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yes and amen)가 되어 절대적으로 확고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무는 하늘과 땅에 흐트러져 있는 자들 모두를 한 곳에 모으는 것이라고 골로새서l:20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혼돈에 빠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주장을 훨씬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이 세상에 주어지기 전에 즉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 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짓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택함을 받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그들을 자신에게로 데려오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인종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강조한 것처럼 ‘모든 국민들'(a1l nations) 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의 원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이 생존하고 있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중재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분의 이름으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게 되면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이미 확정되었으며 다행하게도 바뀐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체결된 언약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 즉 그것은 영원할 것이며 그 효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양자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 분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양자 삼으신 것은 우리 안에 가상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귀하다는 생각을 모두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믿음과 관련해서 선포된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그러한 축복을 누 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우리가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열등의식으로 자극을 받기 전에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받은 상태를 사진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회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유죄로 선고받고 우리 자신을 개탄하도록 인도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가서 구원을 요구하고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죄 속에서 뒹굴고 죄에 취함으로 하나님을 우롱하는 위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예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자들은 예수님께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마11:28)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와 그들이 범한 많은 죄를 지고 비틀거리는 자들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의식과 우리가 바칠 수 있는 모든 제물이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충분히 깨닫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기뻐하기 전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저주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 이 지금까지 우리의 주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약속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육적으로는 그의 자손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로 베드로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닙니다(벧전 1:23). 우리가 변화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독생자의 지체로 받아들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방인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결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자만심과 장점들은 끝나야 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찾지 않는다면 그들은 매우 당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을 다 들었으니 마음이 변하기 쉬운 사람들처럼 이리 저리로 날려 다니지 않는 방법을 배웁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항상 그들의 생각을 첨가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 악한 혼합물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달려 있으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능력이 되 게 하십시오.

 

만약 우리가 그 분에게 투자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 서신에서 자주 반복하는 요점입니다. 더욱이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굳게 신봉하고 또 하나님의 진리는 어떠한 첨가물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우리가 거기에 무엇인가를 부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는 언약을 더럽히고 어기고 위조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니 우리는 그 분 안에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 기대됩니다. 왜냐하면 이 분에게는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줄 충분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담대하게 부를 수 있으며 비록 우리가 아담의 저주받은 종족의 자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거리낌없이 우리를 양자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식이 전세계에 두루 퍼지기를 소망하십니다. 이제 문이 활짝 열렸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대로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빈> <바른신학 바른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