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 찬송가: 260장, 251장 |
종교개혁은 어떤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신앙을 되찾는 운동이었습니다.
즉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중 세 로마 천주교회의 변질을 안타까워하여 본질로 돌아가고자 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슬로건 중에 하나는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한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교부들의 신학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부들은 사도들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을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를 지키며, 교리와 신학을 정립한 분들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내적 갈등이나 이단과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바른 가르침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했고, 외적으로 박해가 임할 때에는 순교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의 생생한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세 천주교회는 이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있었습니다.
마리아 숭배, 성자 숭배, 성물 숭배 등 온갖 미신 덩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10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중세교회 는 점차 부패하여 성경의 권위는 상실되고, 사람이 만든 전통에 집착하였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 대신에 면죄부를 발행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고 교부들의 신학에도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 이지 중세교회의 전통이 아닙니다. 칼빈도 그래서 성경을 원어로 많이 연구했고, 교부들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본질로 돌아가는 것 중에 하나가 ‘오직 믿음’(sola fide) 이었습니다.
왜 ‘오직 믿음’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중세의 로마 천주교회가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오직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질을 왜곡시킨 변질이었습니다. 이런 공로주의는 비성 경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복음인가
이것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의 주제와 같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은 율법주의적인 이단이었습니다. 그 이단에 대해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 ‘복음의 변질’이라고 하며,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1:6-8).
그 율법주의적인 이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데 여기에 율법 준수를 더하는 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불의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며,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는 말씀은 율법을 지켜서 즉 우리 자신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기록된 의를 다 행할 수 없는 근본적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웅변적으로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뼛속까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선행을 할 수 없습니다.
도르트 신조에는 “모든 사람이 죄악 중에 잉태되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구원의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며 죄의 노예다.”라고 했습니다. 또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았고, 누구보다 성화를 많이 이루었던 바울 사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바울의 인생 후반기에 기록한 디모데전서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현재형 동사가 쓰였습니다.
그렇게 평생 거룩한 삶을 추구한 바울 사도조차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서도 생각과 행위가 완전히 성화되지 못했습니다. 대사도인 바울이 그러했다면 평범한 우리야 얼마나 더 깊은 죄성을 가진 존재들입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는 저의 마음도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죄인 중에 괴수요, 괴수 중에 괴수임을 고백합니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유아기 젖 먹던 시절의 죄까지 회개합니다. 유모가 아이들 젖을 먹일 때 보면, 먼저 먹고 배부른 아이를 내려놓으면 이미 배부른 아이가 다른 아이가 젖 무는 것을 보면서 째려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라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앞에는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사오니 이 세상에서 하루를 살았던 어린아이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죗값을 치르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얻습니다. 오직 믿음 외에는 구원의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이단은 십자가 전부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도 필요하지만 율법준수를 통한 공로도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반율법주의(半律法主義, 구원의 조건의 절반은 율법준수라는 주장, semi-legalism)라고 부릅니다. 또 갈라디아 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일어났기에 갈라디아주의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인간의 공로를 덧붙이는 것은 누더기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다 이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이단의 주장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것이 ‘다른 복음’이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보다 연장자이며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자기 멘토인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성도와 식사를 하다가 유대주의자들(할례파들)이 오니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떠나자 베드로와 바나바를 책망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만큼 복음이 변질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장을 쓴 바울 사도가 이 부분만큼은 아주 단호하였습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사랑할 것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사탄의 공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율법주의가 중세시대 로마 천주교회에 나타났습니다. 즉 그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거기에 인간의 공로까지 포함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른 복음이고 거짓 복음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sola fide)은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다섯 가지 솔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칼빈은 이 믿음이 인간의 결단으로 보이지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주된 역사는 바로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합니다. “신실한 성경 해석자인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를 믿는 믿음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하셨고 또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고 하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두 사람이 듣는데 한 사람은 멸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일으킴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멸시하는 사람은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일으킴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 덕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의 말씀처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복음을 깨닫고 믿게 도와주셔서 우리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넓게는 성경 그리고 좁게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므로 구약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절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복음을 믿을 때 누구라도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구원받은 자의 확신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하게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인간이 감관(感官)으로 아는 이해나 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감관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엡 3:18-19) 능력으로 멋지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그분의 뜻을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골 1:26, 2:2). 즉 믿음은 복음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참된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참된 신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친절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시라는 든든한 확신을 갖고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약속들을 의지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의지하고 사망을 확실하게 이기는 사람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신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여부를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기준을 둔다면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약속에 둔다면, 즉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믿으면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것을 다시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 솔라 피데’(sola fide)입니다.
둘째, 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와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셋째, 이 은혜가 너무나도 크기에 우리 생애를 그분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C. T. 스터드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었다면 그분을 위한 어떤 희생도 결코 위대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와 헌신을 하고 난 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자기 헌신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아는 ‘오직 믿음’의 사람은 ‘나의 헌신은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넷째, 현대판 반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이단들은 십자가를 믿는 것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배격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교리적 순결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박성규 목사(부전교회)
복음에 대적하는 외식
(갈 2:11-14)
1.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외식을 하여 바울이 책망함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편지를 쓴 전체 이유를 드러냅니다. 한 사건이 나옵니다.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바위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안디옥은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시리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거기에서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가서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아마 오늘 사건은 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나서 일어난 일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게바는 헬라어와 히브리어가 섞인 아람어로 바위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하면 페트로스,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본래 요한의 아들이니 바요나, 즉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여 게바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 게바라 불리는 베드로가 어떻게 보면 큰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안디옥에서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안디옥은 도시 이름 자체가 왕의 이름이요, 로마와 헬라 간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헬라인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아시아이지만 터키 쪽에 가까이 붙어있으니 말입니다. 헬라인들은 알다시피 할례를 거행하지 않는 이방인이요, 나면서부터 유대의 정결례를 당연히 지키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대의 음식과 의복과 제사의 의식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바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했던 야고보가 이 안디옥에 어떤 일로 일행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내니 갑자기 게바가 그들, 즉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으면 안되는 것이 유대법인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냄받은 사람이 오니 두려워하여 물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본받아 바나바도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음식 하나, 아직까지 옛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렇겠다고 볼 수 있기도 한데, 본문은 그를 대면하여 책망했다고 합니다. 얼굴을 맞대고 그 자리에서 베드로를 사도 바울이 꾸짖은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했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 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았고 게바는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맡았다고 합니다. 즉 유대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베드로에게 주로 맡기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는 예수님 승천 후 15년간 예루살렘 근처에 있다가 로마로 들어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즉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담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전할 것은 음식과 절기와 제사와 정결례와 의복과 금식과 기도법을 폐한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의 구원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듯 모세의 율법이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바울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아예 모르는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오직 믿음과 은혜의 구원을 믿기가 더 힘드니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2.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까지 한 이유
1) 구원은 형식의 변환이 아니라 영생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소한 일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음을 가로막을 수 있고 생명의 구원의 길을 막을 수 있는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내세워 본질적인 구원의 도를 방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대노하여 대놓고 책망한 것입니다. 복음은 그저 옷 하나 갈아입고 친구 바꾸는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복음은 유일하신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가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형식과 의식과 절기와 단체의 습관이 아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저주의 자리에 서서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강도가 낙원으로 가고 땅과 휘장이 갈라져 지성소 문이 열리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복음은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성소에 마음껏 못 들어가는데 십자가에서 성소의 휘장이 갈라집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막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인간이 가르면 아래에서 위로 가르나 하나님이 하시니 위로부터 갈라져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휘장은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도는 십자가의 도요, 생명의 권능이요, 전인적으로 우리의 신분을 바꾸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저 형식 하나 바꾸는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강도가 낙원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땅이 갈라지고 무덤이 생명을 토해내고 휘장이 갈라졌기에, 모세가 장막을 지은 이후 아무도 마음껏 들어갈 수 없던 그 자리에 이제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생명의 구원의 역사를 형식으로 가로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외식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딱딱한 것을 먹지 못하므로 배려하고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화를 내신 때가 세 번 있으셨습니다.
첫째, 아이들이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뭔가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형식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장로의 유전과 전통이라고 합니다.
둘째,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일곱 번이나 외식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외식은 형식주의입니다.
셋째, 성전을 더럽힌 것에 분노하셨습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휘장이 갈라져 아무도 못 나아가던 지성소에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로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더럽고 연약한 자로서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다가 드디어 나아갈 수 있게 됐는데 그 길을 형식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요, 사도 바울도 이 핵심을 안 것입니다.
모세도 80세에 다시 부름을 받았을 때 온유함이 지상에서 승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온유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빚어 가신 것입니다. 화내고 분내는 사람은 고통과 환란과 핍박과 기근을 당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베드로에게 분을 발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먼저 만난 자임에도 생명을 가로막는 행실을 하여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3) 그리스도는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지난 주 말씀에서 봤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 중요합니다(갈 6:14). 하나님은 할례나 무할례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기둥이라 불리는 야고보, 요한, 베드로와 나눈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 놓고는 오늘 본문에서 실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왜 그렇게 좋습니까? 그가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용납하셨고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 형식, 모양, 과거, 성격, 기질을 다 넘어서서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받아 줍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우리 거처를 다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영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구원받고 부활하고 거처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길을 막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능하다고 간질병 걸렸다고 게으르다고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나에게 오는 것을 가로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아까 말씀과 같이 외식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알면서도 외식하게 된 베드로
1) 이방인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전통
유대인들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립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다 지킵니다. 금식법도 지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인에 대한 것입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 10:28).
잘 아실 것은 이것이 구약이 아닙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 만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방의 객이라도 이삭을 따지 말고 남겨 두어서 나그네라도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이방의 객을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이 유대인입니다. 성전에도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제사는 드리지 못해도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을 경원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차를 정하신 것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잘못된 것들, 탈무드니 미쉬나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그것에 베드로도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환상을 주십니다. 이때가 베드로가 기도하러 올라가는 제육시인데, 이것도 역시 베드로가 이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기도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기도를 공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때까지 베드로에게 기도는 분명히 이방인들에 대한 법과 같이 의식법의 일부로 지켰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과도 같이 앉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지고 갑니다. 바리새인, 서기관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복음입니다. 강도가 구원을 받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베드로가 기도하러 가는데 깜빡 잠이 들었는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오는데 각종 짐승이 들어 있습니다. 네 발 가진 짐승, 기는 짐승, 나는 짐승,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두 번이나 거절하자 세 번째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 이방 백부장의 집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인 고넬료를 만나려면 한 자리에 앉아야 하고 먹어야 하기에,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 가운데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중요한 것은 기도하러 가는 것이 참 좋은 것이나 아직 형식주의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막힌 담을 허물고 형제 자매로 말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제 베드로가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간구하여 행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3) 무오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행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못 버리고 정작 유대인들이 나타나니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바울은 책망받을 일이 있어서 그를 대면하여 책망했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베드로가 무오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계승한 교황도 무오하고, 그것이 이어서 사제도 무오하다고 가르칩니다. 지난 번 사제가 선교지에 가서 추행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절대 그들은 그런 일에 대해 잘못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려한다고 할 뿐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강해서 국법도 세상법도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성당에서도 죄 많이 짓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베드로도 틀렸습니다. 그러니 책망을 받습니다. 사람이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4. 외식은 본질을 잠식한다
1) 외식은 본질을 주지 못하고 멀어지게 한다
복음의 진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면 누구라도 구원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나도 니느웨에 구원을 전하러 가기 싫었으나 박넝쿨의 교훈을 받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외식을 우리가 멀리해야 합니다. 외식은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했습니다. 외식은 바깥으로 장식하고 꾸미는 것입니다. 외식은 빛보다 빨리 전염됩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전파성이 있지만, 자기 자랑, 외식하는 것도 전염병같이 그 전염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비본질적인 것과 가식적인 것은 결국 어긋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수박 껍질만 주어서는 안 됩니다. 외식은 그저 치장 정도가 아닙니다. 외식은 본질이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대면하여 책망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계속 수박 껍데기만 갖다주고 왜 안먹냐고 하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이 필요하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말도 귀하지만 음식을 줄 마음 없이 말만 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2) 거짓되지 말라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내 마음을 지배합니다. 한두 번은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사르는 불과 죽이는 독과 같다고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기에, 말을 말은 계속 놔두면 무섭습니다. 본질과 형식이 같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데, 형식이 본질을 갉아먹어 종국에는 본질을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은 거짓말 하면 안됩니다. 가장 나쁜 것은 하나님 앞의 거짓말입니다. 기도의 문이니 뭐니 다 막힙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정직한 영으로 나를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슴을 치는 것은 아무리 해도 안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애통하는 상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바라십니다. 시편과 호세아서에 계속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식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유혹할 때부터 거짓말을 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3)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몸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이요 다른 것은 그림자,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실체를 만나야 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3-4). 신령한 반석은 그리스도입니다. 이제는 먹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신령한 양식과 음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먹고 마시는 것이지 음식법, 절기법, 제사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외식을 멀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마태복음 23장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해 말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에 대해 예수님이 가장 잘 가르치신 말씀인데 그 바로 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십니다. 일곱 번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라고 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남도 모두 못 들어가게 한다고 하십니다.
둘째, 교인들을 형식으로만 몰아가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껍데기가 본질을 나중에는 대체해 버립니다. 교회는 그저 모여서 교제하고 어떤 슬로건을 내걸고 무엇인가 하고, 그래서 우리가 만족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중에 돌려서 영광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지난 주 말씀처럼, 우리가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내 영이 삽니다. 내 영의 감동이 일어나면 전인적으로 중생한 사람으로 지식, 의지, 정서의 새로움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내 영혼이 독수리와 같이 날아오릅니다. 오늘도 교회에 오는데 얼마나 청명함이 좋은지요. 십자가에서 제육시부터 어둠을 모아 물리치니 우리 영혼이 얼마나 정결하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둠을 다 깨드린 것입니다. 어제 잠시 비가 오더니 오늘 얼마나 깨끗하고 맑은지요. 이와 같습니다.
셋째, 바리새인들은 눈먼 인도자라고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형식만 지키고 정의와 믿음과 긍휼을 버린 것입니다.
다섯째, 겉은 깨끗하나 속은 더럽습니다.
여섯째, 회칠한 무덤이요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일곱째, 선지자들은 죽인 자들입니다. 형식은 그저 있지 않고 본질을 대적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14절처럼 복음의 진리에 바로 서지 아니하면 형식에 윤리에 기복에 심리에 삼켜버립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어디 가고 없고 내 정서, 내 심리 놀음만 남습니다. 기분 좋으면 다 좋은 것이고 기분 나쁘면 다 나쁜 것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받는 자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7-20).
형식주의자들의 특징은 지키지 못할 것은 빼버리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빼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일컬어지며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말씀은 그대로 두고 우리를 쳐서 맞추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반대로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인간의 법을 계속 수없이 만들어 냅니다. 탈무드나 미쉬나가 모두 그런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부모 공경에 대해서는 고르반 하여 피해 다닙니다.
5. 결론: 본질인 복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이 아닌,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형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식도 본질 가운데서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마구잡이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강대상에서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려 주려고 레위기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 가운데 형식입니다. 우리 교회도 밖에 "복음의 진리, 십자가지기교회"로 써 붙이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합시다.
첫째,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롬 1:16).
둘째,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요 1:16).
셋째, 예수 믿어 예수 믿는 것입니다(요 14:6). 예수가 방편이고 수단이요 목적입니다. 예수 믿어 뭐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어 예수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궁극적인 목적을 앞당겨 누립니다. 천국에 가서 다른 것이 있는 것으로 현혹하면 잘못된 종말론입니다. 그때도 그저 동일하게 예수 믿습니다. 그것을 지금도 정도가 다를 뿐 미리, 여전히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넷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데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라고 합니다(레 20:7-8). 우리에게 거룩하라 명하시되 거룩하게 빚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 사탄은 본질이 아닌 형식으로 들어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대면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한 이유입니다. 별것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은혜 누리시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crossbc.org/bbs/board.php
내게 주신 은혜
갈라디아서 2:6-10
오늘 본문은 신앙인의 성격, 신앙인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서야 합니다. 동시에 사람 사이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가 바로 되고 사람과의 수평 관계가 신앙적으로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이 수직 수평 관계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가끔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로 된 것 같은데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신앙이 다 무너지는 수도 있습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만 열심히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지 못해 무너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직선적 관계, 독립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신앙은 누구의 간섭도 받을 수 없는 내 영혼의 문제입니다. 내 영혼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 의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면 이 사실을 보다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 순간에는 세상의 어떠한 것도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문제만 남게 됩니다.
제가 과거에 섬기던 교회에 연세가 많으신 장로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 갔을 때에는 책장에 유달리 책이 많아서 ‘참 부지런히 공부하시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가보니 책이 모두 치워져 있었고, 책상 위에 큰 성경책 한 권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장로님께 물었습니다.
“장로님, 책들을 다 어디로 치우셨습니까?”
“나는 요새 신문도 안 봅니다. 그냥 매일 매일 성경만 읽습니다.”
세상일은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할 것이니 이제 자신은 성경만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상관이 없답니다. 내 앞에 놓인, 하나님께로 가는 그 길을 예비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준비라도 하신 듯이 일 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순간에는 수직 관계만이 중요합니다. 자식이고 재산이고 뭐고,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독립적인 관계가 이토록 중요합니다.
동시에 사회성이 함께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30~31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할 때는 부모와 형제, 그리고 너희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부모자식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면 오히려 금세에서 복을 백배나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버리라는 것도 가정을 소홀히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조화를 잘 이루어나가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계시성과 현실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는 것은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굉장한 고집이고, 한 치의 양보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에는 현실성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즉 양보해야 할 일이 있고 타협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보해서는 안 될 일이면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이 계시성과 사회성의 바른 조화는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에 관한 한 절대적인 수호자였습니다. 털끝만큼의 양보도 없습니다. 독선적이기까지 합니다. 절대 비타협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반면 양보할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합니다. 너그럽습니다. 결혼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웬만하면 혼자 살아라, 하지만 정 가고 싶으면 가라, 시집보내려고 너무 애쓰지도 말라, 굳이 가겠다면 보내라.’ 여유 있는 말씀을 합니다. 고기 먹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기를 꼭 먹어야 하느냐, 어지간하면 먹지 마라, 그렇다고 안 먹을 것도 없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신앙에 방해가 된다면, 혹 실족케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양보할 것이라면 얼마든지 양보하고 양보해서는 안 될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거꾸로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양보해서 안 될 것은 쉽게 양보하고 양보해야 할 것은 쓸데없이 고집을 부립니다. 무모하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까짓 것 하면서 양보하면 될 터인데 왜 고집을 부립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미련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수직 관계와 수평 관계의 조화를 훌륭하게 이루어나갑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모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신앙과 신학에 대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다른 사도와의 관계나 다른 교회와의 관계 등 선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원만하고 폭넓은 이해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상대방을 존경하면서 또 스스로도 존경받으면서 수평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회심하고 난 14년 뒤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즉 소아시아 지방을 돌면서 여러 해를 전도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방 문화권에서 오랜 전도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선교할 때에는 신앙이 흔들리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선교사가 확고한 믿음과 사명을 가지고 선교지로 떠나지만 그 나라의 문화와 토착 종교에 부딪히면서 신학과 신앙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파송한 다음에는 몇 년에 한번 씩 본국으로 소환시킵니다. 신학적으로 재충전시킨 다음에 다시 파견합니다. 외지에서 오래 머무르다보면 그곳의 토착문화에 동화되어 기독교의 본질마저 잊어버리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별히 유대인들의 강한 벽에 부딪힙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지만 그의 계시적인 복음, 확고한 신학체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가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계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인한 것도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기에 변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체험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체험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체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환상의 체험, 방언의 체험, 병 고침을 받는 체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또는 사회생활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몸으로 직접 부딪쳐 얻는 깊은 체험이 있을 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체험 없는 신앙이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리 들으면 이 소리가 옳고 저 소리 들으면 저 소리가 옳습니다. 갈대와 같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체험이 중요합니다.
셋째, 체험만으로 끝나지 않고 신학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회심 체험을 한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신학화 작업을 했습니다. 성서적으로 체계화하고, 성서적으로 무장했습니다. 성경적으로 얻은 지식과 체험과 계시가 합쳐졌을 때에는 그 어떤 것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도, 어떠한 환란과 핍박에 부딪혀도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크게 나타나는지를 자기 생활뿐만 아니라 전도하는 가운데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나가고, 강팍하던 사람들이 깨져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서 죽어 가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만납시다.’ 하고 환하게 웃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바울은 현실로 체험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 하는가, 효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열매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 이유로 바울은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의 원리에 대해 잘 보여주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2:6입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여기 ‘유력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루살렘교회의 베드로, 야고보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영적 권세를 가진 유력한 분들이요, 예루살렘 교회 최고 어른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저 유력한 사람들과 '적어도 내가 전하는 복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 사람이 유력하든 유력하지 않든 똑같습니다. 베드로라고 더 크게 보시고 키 작은 바울이라고 작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기에 유력한 사람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저 유력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서술합니다.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고 말합니다. 차이점이 있는 동시에 하나라는 것을 역설합니다.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유력한 사람들, 곧 베드로, 야고보 같은 사람들과의 같은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역사하시는 분이 같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8에 “베드로에게 역사하사”가 나오는데 ‘역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네르게사스’ 에너지, 곧 영어로는 work, ‘부린다.’ ‘사역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이나 바울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이나 역사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맡은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7입니다.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에게도 맡기고 나에게도 맡겼다고 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맡긴 분이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일하는 사람은 많지만 일을 맡기는 분은 한 분입니다. 맡긴 분이 한 분이므로 누가 어떠한 일을 했건 상관할 바가 없습니다. 맡긴 분을 위해서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은혜를 주시는 분이 같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9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 은혜 받은 사람은 여러 사람이지만 은혜를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은혜를 주셨기에 영력도 있고, 지혜도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은혜인데, 은혜 받은 사람은 여럿이지만, 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이기에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여러분이 모여 있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분도 한 분이요,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도 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신실함을 인정하여 그 정도에 따라 일을 맡기시며, 그 일을 맡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분이 한 분이므로 우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큰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근본을 따져보면 다 하나입니다. 우리는 다 종이요 지체입니다. 주인도 하나요, 뿌리도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는 바울은 그 유력한 사람들과 차이점을 제시합니다. 결국 하나이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일을 맡기시는 분은 하나지만 일을 맡은 사람이 각기 다릅니다. 바울이 있고 베드로가 있어 하나님 마음대로 맡기십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흙을 빚어서는 귀한 것도 만들고 천한 것도 만듭니다. 꽃병을 만들건 항아리를 만들건 만드는 사람 마음 대로입니다. "나는 왜 항아리로 만들었습니까?" "나는 왜 뚝배기로 만들었습니까?"하고 대들 수 없습니다. 주인의 마음대로 주인의 필요에 따라 만듭니다. 어찌 보면 천한 그릇이 더 많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귀한 그릇은 깊숙이 모셔놨다가 손님이 오면 한두 번 내놓고는 쓰지를 않습니다. 천한 그릇이 내내 쓰입니다. 주인 마음 대로입니다.
그러나 일을 맡은 사람이 모두 다릅니다. 그 그릇이 다릅니다. 그 배경이 다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문화가 가미된 헬라 문화권에서 성장했으며 베드로는 히브리 문화권에서 성장했습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릅니다. 여러분도 지금 한자리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처음 믿는 사람,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 서울에서만 살아온 사람 등 각양각색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배경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넉넉히 이해하고 양보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포도원이 다릅니다. 바울은 이방사람들을 위하여 일하고, 베드로는 유대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 바울은 무할례자 들을 위하여 일하고 베드로는 할례자 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대상이 다릅니다. 지역이 다릅니다. 문화권과 종교적 배경이 다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는 근본이 같은 까닭에 종말도 같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었으나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같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은 같습니다. 다 같은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다 같이 주의 일꾼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을 섬기며 살다가 마지막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이 같습니다. 믿는 자의 운명은 다 같습니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유대인의 사도인가, 이방인의 사도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에게 옮겨가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기능의 다양성을 알아야 합니다. 9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중요하면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혜도 중요합니다. 사람들마다 받은 은혜가 다르고 은사가 다르고 기능이 다릅니다. 그러나 모두 소중합니다. 손만 중요합니까? 발만 중요합니까? 눈만 중요합니까? 코만 중요합니까? 다 중요합니다. 모두가 한 몸을 섬기는 지체들입니다. 각각인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이 조화, 유기적 관계를 바로 이해해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7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리고 2:9입니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또 내게 주신, 우리 각각에게 주신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알고그제야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국여행을 할 때에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
외국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서툰 영어로 대화하다가 서로 크리스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배경도 과거도 모릅니다. 장소가 어디이든지 같은 크리스찬이라는 사실 하나만 확인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나머지는 몰라도 괜찮습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베드로에게도 주신 은혜와 사명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역사를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서로 이해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9에서 그 유력한 자들을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기둥’은 아주 중요합니다. 기둥은 힘을 지탱해야 하기에 곧아야 합니다. 굽은 기둥은 쓸모가 없습니다. 기둥은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기둥이 열 개가 있어도 그 기둥의 하나가 주저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 전체가 다 무너지고 맙니다. 기둥은 서로 협력하며 똑같이 서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 기둥이 셋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들과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악수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양쪽이 전쟁을 하는데 아무리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 비슷비슷한데 그만 싸웁시다.' 하며 화해하는 뜻으로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 악수의 유래입니다. 악수는 너와 나는 같다고 하는 평등의 개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는 것은 바울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같은 교회의 기둥이나 잘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등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고, 또 다르면서도 결국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로 보강하자, 다른 것은 다른 데로 두고 그 이상은 간섭하지 말자, 상호 보충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2:10에서 구제에 대한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에 힘쓰겠다고 다짐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당시 예루살렘은 흉년이 들어 궁핍한 상황이었고, 고린도 같은 이방 지역에는 풍년이 들어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하러 다니는 곳마다 구제금을 모집하여 예루살렘에 보내자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이 이제 막 새로 개척한 교회이지만 모 교회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우니 돕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쓰는 편지에서 이런 말까지 합니다.‘신령한 것을 받았으니 물질적인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영생의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받았는데 우리가 예루살렘에 식량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give and take입니다. 정말 좋은 일 아닙니까? 상호 보충의 관계이기에 부탁하는 일이 생깁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센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서로 보충을 하는 것입니다. 상호 보충하고 서로 부탁하는 일이 이루어 질 때에 비로소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 되는 비결은 하나의 의미를 알면,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기능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 되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온전하고 크신 역사를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세워야 할 신앙이요, 교회공동체입니다. blog.daum.net/morningworld
예수 그리스도 - 내 삶의 중심
갈라디아서 2:20 빌립보서 1:20~21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 어떤 말씀입니까?” 사람마다 자신이 꼭 붙잡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나 신앙인이라면 내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투병하던 미국의 한 청년이 병상에서 요한삼서 1:2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 후 청년은 기적처럼 일어났고, 훗날 세계적인 대학과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오랄 로버츠대학교의 설립자 오랄 로버츠(Oral Roberts)목사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 붙잡았던 말씀은 시편 34:4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나라가 노예문제로 남북으로 갈라지고 개인적으로도 시련과 고난이 계속되자 링컨은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고, 드디어 나라는 하나가 되고 그는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많은 말도, 많은 사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말씀을 붙들고 계십니까?
우리 한국인들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 붙들었던 말씀 베스트 파이브입니다.
1등,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등, 여호수아 1:9,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3등, 시편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4등,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5등,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저는 젊은 날, 예레미야 33:3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신학교 시절부터 이 말씀은 저에게 힘이 되었고, 하나님은 저에게 때마다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라디아서 2:20를 통해서도 큰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가 군에 있을 때 사단 사령부 강당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군인 한 사람이 잘 하면, 군대를 살리고, 군대는 결국 군인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으로 군인의 사명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비단 군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영적 원리에도 해당되고,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성경 한 구절이, 성경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성경 전체를 성경 한 구절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이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갈라디아서 2:20로 요약되고, 또 갈라디아서 2:20이 성경 전체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 한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알기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 말씀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뒷부분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일생에 꼭 알아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고 또 나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 자신을 아는 지식, 이 두 가지 지식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부인은 자기 남편의 묘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그는 일생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 사람이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쓴 “웨슬리의 일기”에 보면 그가 성령을 체험하기 전에 단순한 열정만을 가지고 아메리카 인디언을 전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들뜬 마음으로 미국으로 가는 배위에서, 독일인 목사 슈팡겐베르크(August Gottlieb Spangenberg)를 만나고, 그로부터 본질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첫째, 형제는 성령님께서 당신을 통해 무슨 일을 하는지 압니까?
둘째,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셋째, 형제는 자신을 압니까?”
옥스퍼드 대학에서 우수하게 공부를 한 웨슬리였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목회해온 웨슬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웨슬리는 아무런 답변도 못하고, 매우 당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 하나님이 누구시고,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20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갈라디아서 2:20 앞부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금은 내 안에 살아계신 분입니다.
둘째, 내가 누구입니까?
갈라디아서 2:20 뒷부분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위해 평생 믿음으로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중요한 것은 이 두 질문의 한 가운데 계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심에 계시는 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물을 때,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도 사람자체를 100퍼센트 다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통해 바라봐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를 삶과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2:20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서성거리게 했던 그리스도를 이제 우리 신앙과 삶의 중심에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갈라디아 2:20은 그리스도가 세 가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입니다.
성경이 어떤 책이냐고 물을 때에도 역시 갈라디아서 2:20이 해답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마치 바다와 같은 책입니다.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인류문화의 시작과 역사의 한복판을 가로지릅니다. 그 시대가 가진 규범, 율법, 문화, 종교, 삶, 가치관을 다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모든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책은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품되, 한 가지 목적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행하시는 구원의 드라마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1,600년 동안 40명의 저자들이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언어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언어와 저자는 달라도 한 가지 방향만은 일치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입었던 한 벌의 원피스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옷입니다.
신약성경은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마태복음,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님이십니다. 마가복음, 예수님이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예수님은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께 집중하면서 구원에 관한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은 구원의 길이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부터 기다린 구원의 메시아입니다. 마가복음은 구원의 깊이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과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누가복음은 구원의 넓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병자든 강도든 누구나 구원합니다. 요한복음은 구원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 낮은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입니다.
바울이 쓴 모든 서신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합니다. 고린도서, 예수님은 교회의 주님입니다. 갈라디아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쓴 책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의 근거요, 기쁨의 근원이요, 역사의 주인임을 밝힙니다. 데살로니가서,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디모데서, 예수님은 모든 교회생활의 규범입니다. 요한계시록,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성경 전체를 보고, 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입니다.
둘째, 갈라디아 2:20이 말하는 또 하나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심입니다.
갈라디아 2:20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의 원리는 교회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생활의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교회는 세상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상당한 기대를 가졌는데 차츰 실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생활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 세 가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위’입니다. 다음은 ‘옆’입니다. 마지막은 ‘밖’입니다. 위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는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으로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천년 교회의 역사는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역사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에 중심에 예수님보다도 베드로를 세울 수 있는 위험을 보여준 역사였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가 예수님보다 더 중요시되면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가 잃어버린 교회의 주인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 걸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임을 강조하여 개신교회가 생겼지만, 정작 오늘의 교회는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의 레너드 스위트(Leonard I. Sweet)가 쓴 “예수선언”이라는 책을 읽다가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그리스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기독교는 철학이나 이데올르기가 아니요, 새로운 형태의 도덕이나 사회윤리, 세계관도 아니다. 현대 교회가 앓고 있는 병은 ‘JDD', ‘예수결핍장애(Jesus Deficit Disorder)이다.’ 그 다음에 한말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좋아하지만 교회는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는 교회만 좋아할 뿐 예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오늘의 교회를 향한 경고입니다. 주위를 가만히 보면 세상은 교회는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예수님은 좋아합니다. 힌두교인인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 Gandhi)도 예수님을 인류의 스승으로 여겼고, 대화의 철학자 유태인 마틴 부버(Martin Buber)도 예수님을 ‘Big Brother’, 큰형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을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교회만 좋아하지,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제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요, 중심입니다. 교회의 조직과 구조, 그리고 목회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거기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다 걷어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것으로 교회생활의 기준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갈라디아 2:20이 말하는 또 하나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장소는 교회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20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신앙은 살든지 죽든지 삶의 모든 부분에 예수님이 중심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자녀교육을 할 때 예수님이 가르치신 방식으로 합니까? 자녀를 결혼시킬 때 예수님의 가치로 합니까? 부부관계의 중심이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대화합니까? 시어머니를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이 합니까? 며느리를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이 합니까? 직장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마음으로 합니까? 직장에서 상관을 대할 때 예수님 대하듯이 합니까? 부하를 대할 때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합니까? 이것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표준이 바로 갈라디아서 2:20, 빌립보서 1: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아무 일에든지 살든지 죽든지” 이 말씀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한때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던 어떤 집사님이 회개하고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낙심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에 나오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구원받기 전에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그 뒤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와 그동안 못다 한 충성을 다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살았고, 평일에도 열심히 교회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제 마음이 늘 갈급하고 만족이 없습니다. 옛날 세상에서 살 때와 비슷해요. 답답합니다.”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제가 볼 때 집사님은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삶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옛날에는 세상에서 살았고, 지금은 교회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사는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집사님은 자기 힘으로 살았고, 지금도 집사님은 자기 힘으로 삽니다. 옛날에도 집사님은 자기를 위해서 살았고, 지금도 집사님은 자기를 위해 일합니다. 바꾸셔야 합니다.”
핵심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목표도 그리스도로, 방식도 그리스도로 바꾸셔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이 됩니다. 다시 그 집사님은 순종했고, 지금은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 저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믿음 좋은 척했지만 그리스도는 늘 제 삶의 변두리에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무런 빽도, 배경도 없었던 저는 닥치는 대로 공부하며, 학교에서, 교회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에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갖고 있던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그 열심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열심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저의 열심은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꿈을 이루기 위한 야망이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21:15을 읽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내 앞에 앉아 저를 바라보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때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주님이 이렇게 물으셨다면 좋을 뻔 했습니다. “너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지? 지금도 열심이구나.” 만일 그랬다면 저는 “그렇습니다, 주님!”하고 자신 있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면서 저는 눈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긴 세월을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면, 그때부터라도 주님을 위해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제 인생의 주인은 저였습니다. 그때 거기에 왜 주님이 없었는지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고, 또 목사가 되면 신앙의 인격이 다 갖춰지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는 신학수업, 그리스도가 없는 사역 그것은 정말 무의한 일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피로만 누적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닫고 결심했습니다.
“아 그렇다, 내안에 예수님이 없었구나, 내 인생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안 계셨구나, 이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중거하는 사람이 되리라.”
그런데 그런 은혜의 감격 속에서 주를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하다가도 어느 날 돌아보면, 또 그 주님과 멀어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저를 향하여 열심이 있고, 열정적인 사람이라 칭찬합니다. 그러나 열심있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열심히 살 수 있고, 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은 예수님을 삶의 분명한 제 삶의 주인으로 모시게 한 말씀입니다. 살다보면 가끔 흔들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저는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아무 일에든지, 죽든지 살든지” 그 은혜로 주님을 다시 사랑하고, 그러다가 혹시 주님을 또 잃을지라도, 언제나 다시 주님께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이 말씀으로 다시 세우며, 오직 주님만이 삶과 신앙의 중심이 되는 저와 여러분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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