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울서신

하나님의 약속- 갈 3:15-18/ 율법이 주는 유익

by 은총가득 2021. 5. 2.

하나님의 약속

갈라디아서 3:15-18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3:1~14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이 구원의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성경적인 지식을 근거로 이 주제를 강조해 왔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구원의 진리를 인간의 이성 또는 인간적인 상식과 지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확실하고 근본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들아(15절)”라고 정답게 말문을 엽니다. 3:1에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성경적인 근거나 인간이 가진 영적 체험의 사건을 들어서 말할 때에는 이처럼 가차 없는 비판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본문, 즉 인간의 이성에 호소할 때에는 좀 더 부드럽게 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일단 따뜻하게 불러놓고 권면하면서 변론을 벌입니다. 그 변론의 요점은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입니다. 이것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은혜의 약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간혹 우리 가운데, 구약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고,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말세에는 성령으로 구원받는다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이 철저한 구원론은 창세기 1장부터 있었고, 아브라함 때도 있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대립시켜 생각하거나 혹은 양자택일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갈라디아서는 다른 성경에 비해 내용이 좀 어렵습니다.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바로 이해하고 나면 다시는 신학이 흔들릴 염려가 없습니다. 말씀마다 깊이가 있기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즉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씀은 결코 두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 즉 율법주의자들은 이를 대립시켜 양자택일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바울의 신학 이론이나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이어 율법도 은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이지만 사함들이 이 은혜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수단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다음 장에서 언급될 것입니다. 율법이 몽학선생(蒙學先生)이 되어 우리를 은혜에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간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를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 중심으로 율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로 ‘약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독교는 약속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없다면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보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미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없다면 헛일 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 아무리 푸짐하게 바치면 무엇 합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제사를 드려라. 그리하면 복을 주시리라’하고 말씀하신 다음에 드려야 효력이 있습니다. 내 멋대로 수만 마리의 양을 바친다고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 국부터 마신다.’ 고 하는 속담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없이 내 편에서 아무리 발버둥 친들 이루어질 것이 없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약속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길로 약속을 주셔야 합니다. 그 약속을 따라야만 구원의 길이 효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은혜의 길에 먼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백 년 후에 가서 율법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있기에 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약속은 율법이 나왔다고 하여 폐하든가 더하든가 고치든가 다른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약속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약속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율법이 간접적인 역할을 할뿐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은혜를 대립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본문을 좀 더 신학적으로 분석해보기로 합시다. 15절 끝부분입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4절 끝부분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약속’이라는 말과 ‘언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 두 단어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약속’은 헬라말로 ‘에팡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에팡겔리온은 ‘먼저’라는 뜻의 ‘에피’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리온’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전해지는 소식, 이것이 약속입니다. 이는 사건이 있기 전에 미리 주어집니다. ‘내가 내일 아침에 너에게 무엇을 주겠다.’ 약속입니다. 아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그 소식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복된 소식 즉 복음은 ‘유앙겔리온’입니다. ‘복되다’의 뜻인 ‘유’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리온’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결국 에팡겔리온이 유앙겔리온이 되고 유앙겔리온이 에팡겔리온이 됩니다.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언약’은 헬라어로 ‘디아데케’인데, ‘유언’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베리트(berith)’ 사람이 죽을 때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유언입니다. 이 유언이 곧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신약(新約), 구약(舊約)이라고 부릅니다. 줄여서 신구약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순서상 ‘구신약’이라 해야 됩니다. 영어로도 올드 앤 뉴 테스터먼츠(Old and New Testaments)라고 합니다. 구약이 먼저입니다. 유독 한국교인들만 신구약이라고 합니다. 이는 단지 발음상의 문제이지 딴 뜻은 없습니다. 아무튼 신구약, 약속이라는 말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옛 약속, 새 약속, 이 약속이 디아데케, 유언이라는 것입니다. 유언은 죽는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사이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죽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저 논밭은 네게 준다, 이 집은 둘째한테 준다, 이 돈은 누구에게 준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일방적으로 말합니다. 쌍방의 약속이지만 일방적이며 약속을 받는 사람의 의사를 묻지 않습니다. 죽는 사람이 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말을 해놓고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약속은 해약을 할 수 있습니다. 해약 못하는 약속은 유언밖에 없습니다. 유언한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어디 가서 고치겠습니까? 천국까지 따라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또한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해주었더라도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효력을 발생하는 약속은 유언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유언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래 살 것처럼 유언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어 유산 문제를 놓고 말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유언만큼은 확실히 해둡니다.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서 변호사에게 맡겨 놓습니다. 죽은 다음에만 유언장이 공개됩니다. 죽은 날부터 효력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6~17입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 언약, ‘디아데케’입니다.

 

라틴어로는 ‘테스타멘툼(Testamentum)’ 영어로는 ‘테스터먼트(Testament)’입니다. 언약에 그런 깊은 뜻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언은 그 유언을 따라 지키는 자에게만 약속된 기업(基業)이 효력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집의 아들이라 하면 아들 노릇을 해야 그 유언이 나와 관계가 있지 내가 그 약속을 저버릴 때에는 약속이 준 효력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 기업이 나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약속을 많이 해주셨지만 우리가 그 약속을 받아 믿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믿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만 엄청난 의미가 발생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16절 앞부분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창세기 12장과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는데 그 약속이 일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아들을 주마, 고향을 떠나라,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많은 백성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일방적인 약속을 믿고 고향과 친척을 떠납니다. 믿고 떠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유효하게 이루어나가십니다. 떠나라 했는데 안 떠났다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불변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 믿음직합니다. 한번 약속한 다음에는 하나님 편에서 계속 이루십니다. 사람이 휘청거리지 하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몇 번 휘청거립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왜 휘청거리느냐고 깨우쳐주십니다. “나는 ‘엘 샤다이(El Shaddai)’이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니 내 약속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참으로 강합니다. 우리가 혹 잘못하든가 흔들리면 때려서라도 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다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태도에 따라 약속을 취소하시거나 번복하시지 않습니다. 강권적으로 그 약속을 끝까지 스스로 이루어나가십니다.

 

다윗 왕에게도 '너는 내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네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하고 약속하십니다. 사무엘하 7:14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때려서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겠다, 이 약속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 ‘비록 너희들이 변한다고 해도 나는 함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리라.’ 약속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약속에 합당하도록 내가 훈련할 것이요, 가르칠 것이요,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고 강권적이며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약속의 사인(sign)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 약속은 확증되고 효력을 냅니다. 그를 지키는 자에게,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에게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모두 내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를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면 그 약속이 내 생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목사님이 집사님들과 함께 성경 읽는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 집사님이 자기 성경에 빨간 펜으로 영어의 T자와 P자를 써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그 분의 성경에는 T자와 P자가 가득합니다. 궁금해진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T자는 무엇이고 또 P자는 무엇입니까?” “T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제가 그대로 시행해본 것입니다. 그래서 트라이(try)의 T자입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을 주나 안주나 시도해본 항에는 T자를 썼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시행했더니 정말로 복을 받았다, 확증이 되었을 때 프로브(prove)의 앞글자인 P자를 쓴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트라이해보았나, 시행해본 것에는 T자를 쓰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에는 P자를 쓰십시오. 과연 몇 자나 쓸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된다, 안 된다고 합니다. 안될 리가 없습니다. 일단 시도해보고 이야기합시다. 성경에는 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큰 약속, 작은 약속, 종말론적 약속, 현실적인 약속, 심령적인 약속, 물질적인 약속이 가득 있습니다. 해보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해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입증이 됩니다. 말라기를 보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라.’ 그대로 바쳐 보십시오. 창고가 넘치도록 주십니까? 주시지 않습니까? 뒤에 확증을 얻게 되면 거기에 P자를 크게 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절대로 폐기하시지 않습니다.

 

18절입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유업은 약속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보증하신, 즉 미리 정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약속이 여기에 있는데, 문제는 율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지 430년 후에 모세가 받은 율법이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요, 좁은 의미에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킵니다. 좀 더 좁은 의미에서는 ‘십계명’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좁은 의미의 율법을 말합니다.

 

그 율법이 아브라함과의 은혜의 약속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은혜와 율법을 대립적으로, 또 양자택일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율법이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약속이기 때문이요, 효력을 취소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과 은혜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해야 합니다. 은혜가 먼저 있었습니다. 은혜를 떠난 자에 대한 경고 또는 은혜로 다시 이끌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도 은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율법을 ‘이러지 말라 저러지 말라.’라고 해석하지만 예수님의 해석을 들어봅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율법이요 은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근본이다.’ 율법도 은혜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항상 은혜적이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때때로 심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말 안 들으면 때린다.” 언제는 사랑한다고 했다가 지금은 때리겠다고 합니다. 자녀로서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양자택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선물을 줄 때는 사랑하는 것이고 때릴 때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를 맞으면서 ‘두고 보자’하고 벼릅니다. 조금만 더 크면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작정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가출하게 되는 데는 이런 까닭도 있습니다. 참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은혜 안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게 선물을 줄 때도 사랑이요, 때릴 때도 사랑이요, 심지어 내가 못되게 굴어 부모가 너는 내 아들 아니다, 너에게는 유산이 없다. 라고 하여도 사랑입니다. 다 사랑 안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은혜 안에서 소화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율법을 소화하라. 이 말은 사랑과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 즉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신뢰, 이 믿음이 점점 자라나야 합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울 때에 잘못한 점이 많아 지금도 후회가 됩니다. 그때 좀 잘 배웠으면 바로 키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쉽습니다. 언젠가 어느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이들에게 약속과 성취의 긴장관계를 똑바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아이들이 뭘 달라고 하면 당장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뭘 달라고 하면 내일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하룻밤 잔 다음날에 줍니다. 일단 이렇게 약속을 했으면 울든 말든 당장은 절대로 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에는 비록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주어야 합니다. 전날 약속대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약속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도 뭘 달라고 하게 되면 사흘 후에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약속을 지켜서 사홀 후에 줍니다.

 

이렇게 해나가면 십년 후에 준다고 해도 약속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약속에 믿음이 갑니다. 준다고 하다가 안 주고, 안 준다고 하다가 주고, 당초에 신실치가 않습니다. 생각하면 제가 그것을 잘못했습니다. 약속과 성취에 대한 믿음을 확실하게 가르쳤어야 합니다. 이거 하나만 제대로 가르쳐놓으면 성경을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약속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믿게 됩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배신당하고, 아버지로부터 배신당하고, 친구로부터 배신당했습니다. 평생 배신당하며 살아왔기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까지 못 믿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관계를 한 번도 믿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합니다. 한 번도 믿어본 일이 없고 성취를 맛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약속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은 은혜의 약속입니다. 약속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에 조명하여 율법을 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된 약속이 있고 아직 남아 있는 약속이 있습니다. 또 앞에 있는 약속도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란 오직 은혜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그 약속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이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http://blog.daum.net/morningworld/886


율법이 주는 유익

갈라디아서 3:19-22

 

기독교의 복음 중에서 가장 귀중한 복음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구원의 복음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귀중한 진리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율법과 은혜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를 공부한 바 있습니다. 많은 경우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율법이 있으면 은혜가 필요 없고, 은혜가 있으면 율법이 효력 없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미숙한 사람들의 이해 방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하면 모든 것이 이해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도, 질서도, 체면도, 예의도 필요 없는 것이 사랑인 줄로 착각합니다. ‘이래야 사랑이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는 사랑이 없다, 죄 값은 사망이다, 피도 눈물도 용서도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은혜는 정반대요, 대립적이요, 양자택일적인 요소로 보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해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법을 더 소중히 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를 위하고 존경하며 아내의 생각과 뜻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수록 부부의 법을 더 소중히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 안에 율법이 완성되고 율법 안에 무한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치를 잘 통달하면 기독교의 교리를 졸업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사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숙한 수준에서는 언제나 양자택일, 율법이냐, 은혜냐 하며 대립적으로 생각하여 항상 마음속에서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은혜는 함께 있어야 하고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라고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율법은 왜 존재하는가, 곧 율법의 기능과 유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율법과 은혜는 결코 상반된 위치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은혜가 먼저 있었기에 율법은 은혜를 돕고 은혜를 섬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하여,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생활 속에서 은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은혜를 목적으로 율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증거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들어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먼저 율법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범법, 곧 죄지음으로 율법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법을 잘 지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법이 왜 있습니까? 교도소가 왜 있습니까? 죄짓는 사람 때문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양심적으로, 신앙적으로 사는 날이 오면 교도소는 필요 없게 됩니다. 몇 해 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는 한 교도소에 흰 깃발이 휘날렸답니다. 흰 깃발은 죄수가 하나도 없다는 표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법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법은 있지만 범법하는 사람이 없어서 마치 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법조문이 많다고 하여 좋은 것이 아닙니다. 법이란 본래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형법, 민법, 상법 등의 육법전서를 모르면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양심,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범법합니다. 보이지 않는 양심의 법, 신령한 법, 본래적인 사랑의 법을 자꾸 거역합니다. 그래서 부득불 법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흐려진 법을 밝게 하기 위해서, 잊어버린 법을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본래의 법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법이 생겼습니다. 먼저 전승적인 법이 생겼고 다음에 기록된 법이 생겼습니다. 법조문화한 법 즉 십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이 최초의 법이 아닙니다. 그전부터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왜 기록되어 글로 남게 되었을까요. 기록된 이유가 바로 인간들의 ‘범법함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문 앞에만 나가더라도 교통법규를 지켜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신호등을 잘 지킨다면 교통순경이 없어도 됩니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통순경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존재 이유는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음으로 생긴 것입니다. 요즘 사형 제도를 없애자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해도 사형은 하지 말자고 합니다. 비인도적이라는 것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형 제도를 없앴습니다. 그런데 없앴더니 범죄가 더 늘어납니다. 사형 법을 없앴던 미국의 어느 주(州)에서는 사형 법을 부활시키자는 의견이 다시금 나오고 있습니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도둑이 없다고 합니다. 도둑질한 사람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일 년에 몇 사람만 손을 자르면 도둑이 없습니다. 왜 그런 무서운 법이 있습니까?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 법도 필요 없게 됩니다. 다양한 법들이 생기고 존재하는 이유는 범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나오는 ‘범법함’은 헬라어로 ‘파라바세온’입니다. 이는 ‘죄’를 뜻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와 같은 말입니다. ‘줄을 넘는 것’ ‘한계를 넘는 것’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줄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율법이 있어야 했습니다. 외국에 큰 목장에 가면 넓은 들판에 소를 놓아먹입니다. 수백 마리의 소가 줄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들판에 나갔다가 다시 우리로 돌아옵니다. 관리하는 목동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찌나 질서 정연하던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보면 전기 줄이 둘러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가 줄에 닿으면 감전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문에 사람 하나 없어도 제 길을 잘 찾아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줄입니다. 율법도 이 줄과 같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징역을 산다, 이쪽은 벌금이다.’ 줄 안에서 살도록,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합니다. 이 한계를 넘어가려는 습성이 바로 율법이 존재해야 될 이유가 됩니다. 이 한계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한계만은 넘어가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율법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이것들이 율법입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넘어설수록 담은 점점 높아집니다. 사람들이 자꾸 넘다 보니 율법의 법조문이 점점 많아졌고, 형이 점점 높아졌고, 심판에 대한 말씀이 점점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아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있습니까? 요즘 남에게 아름답게들 보이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이것이 거울의 역할입니다. 만약 거울이 없다면 내 얼굴을 내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거울은 안 보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10년은 더 살 것입니다. 쭈글쭈글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짜증내다가 일찍 죽습니다. ‘쭈글쭈글한 이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한심한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얼마나 더 한심할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너무 자주 거울 보지 마십시오. 자꾸 들여다보다가는 주름살 때문에 괜히 속상해져서 애매한 아이에게 “야, 너희들 때문에 주름살이 생겼다!”하고 푸념만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나이 먹어서 생겼지, 나 때문에 생겼나!’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울은 언제 보느냐하면 고칠 수 있는 것이나 거울로 봐야 됩니다.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씻어야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거울은 볼 수 있어도 흉한 얼굴은 고칠 수는 없습니다. 거울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죽이고, 내 명예를 죽이고, 내 기를 죽이고, 내 의욕을 죽입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내 죄를 환히 드러냅니다. 내 나약함, 내 허물, 내 거짓됨, 내 위선이 다 드러나는데, 고칠 수가 없습니다. 본디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인간이 한계를 넘어가면서부터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에 비춰보면 내 죄는 알 수 있으나 고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 때문에 더 타락합니다. 기왕에 버린 몸,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알고 자포자기하여 점점 더 타락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법이다, 사람을 죽이고 양심을 죽이고 영혼을 죽이는 법이다.” 죄는 있는 대로 지적해 놓았지만 속수무책인 까닭입니다. 운동권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사회 부정을 고발하는 데는 명수이나 대책이 없습니다. 요란하게 떠들기만 합니다. 죄를 알게는 하지만 율법으로 죄를 씻지 못합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공로가 없지는 않습니다. 율법이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지고 철이 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구제불능이다 깨달으면서 겸손해지고 온유해질 수가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마음이 사라져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주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율법의 궁극적 역할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계시입니다. 19절입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이는 율법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면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사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말씀하셨고, 천사가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모세가 받아서 백성에게 전했다고 이해합니다. 율법이 간접적으로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직접 소재가 아니라 간접 소재이기에 그 진리의 농도나 질적 가치가 그만큼 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천사를 통하고 모세를 통하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율법으로 형성된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주신 말씀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으로 직접 전해진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가장 귀한 진리는 말씀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입니다. 본래적인 것은 사랑이요 은혜의 약속일진대 간접적으로 전해져 효과를 발휘한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은혜의 약속은 직접적인 것이요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간접적인 것입니다.

 

두 군데 말씀을 대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39에서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과 출애굽기 21:24에 있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눈을 상하게 했으면 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하고,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리라는 말입니다. 무서운 논리입니다. 세상이 온통 싸움판이 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두 말씀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같은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의 이를 부러뜨리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이 죄에 대한 심판으로 내 이가 부러집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곧 내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남남이 아니라 곧 나입니다. 저 사람의 이빨과 내 이빨이 하나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어떻습니까? 표현은 각기 다르지만 결국 같은 말이 아닙니까? 저 사람의 눈이 내 눈이요 저 사람의 물건이 내 물건입니다. 저의 아픔이 곧 내 아픔입니다. 그런고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는 이로 갚으라. 결국 같은 말입니다. 단지 다른 측면에서 다른 표현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직선적이요 다른 하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율법의 관계입니다. 율법의 근본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범법함으로, 그들의 형편과 그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간접적으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21절에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다면 다시는 은혜의 약속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영원한 것으로, 절대 규범으로 만들어 보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이 바울의 주장을 잘 설명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어느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청년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시자 청년은 그대로 실천할 용기가 없어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한번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에 청년이 이같이 대답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율법은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길이 없습니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다 지켰다고 합니다. 다 지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엄격하게 율법의 유효 기간을 설정합니다.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율법이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약속과 은혜가 오기까지, 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율법이 유효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율법을 요령 있게 이해하기 위한 3가지의 방법입니다. ‘첫째 용법은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용법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간접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셋째 용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율법의 3용법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제2용법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도록 우리의 길을 인도합니다. 율법만으로는 길이 없고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의 길을 찾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2절입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여기 성경이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율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벌벌 떱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주일을 범했더니 감기에 걸렸구나,’ 사업이 망하면 ‘십일조 안 바쳤더니 벌 받았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율법의 감옥에 갇혀서 벌벌 떠는 불쌍한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에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은혜를 알고 약속을 알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고, 그 법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괴롭히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죽이기 위한 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를 위해 있습니다. 율법의 궁극적임 목적이 은혜와 약속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대할 때 무서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가 범법치 않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신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율법의 완성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십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

갈라디아서 3:23-29

 

 본문도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라는 갈라디아서의 주제를 충실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본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지난주에 살펴본 율법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율법은 범위를 넓게 잡으면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이고, 좁게 잡으면 모세 오경, 더 좁게 잡으면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이 율법의 의미를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지 아니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둘째,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율법이 너무 엄하기에 죄를 지은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죄 값은 곧 사망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대가를 감당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로, 우리의 공로로,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게 됩니다. 두려운 마음, 저주에 쫓기는 마음, 그 공포와 저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찾아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우리를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받으면서도 예수께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넉넉히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천당 갈 것이다.’ 내 의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그를 심판하고, 율법 앞에 서 있는 자기의 죄 많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꼼짝 못합니다. 내 의와 내 행위로써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평생 교회에 한 번도 안 나온 분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전도하기를 원해서 그분께 찾아 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 동안 남보다 내가 낫다 하여 잘난 척하고, 내가 잘못한 것은 다른 사람들 때문이기에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는 하나님의 그 엄연한 심판 앞에, 율법 앞에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 공로에 의지합시다.” “그러면 저 같은 죄인도 주님 앞에 갈 수 있습니까?” “네” 이렇게 하여 그분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돠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우리를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셋째, 이제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자발적으로 잘 지킵니다. 이제 내 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천당을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을 지켜나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스스로 지키는 법,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지난 주 공부한 22절에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율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24절 두 번째 용법에 해당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이 세 번째 용법을 말하고, 다시 두 번째 용법을 말하며,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때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율법의 때와 믿음의 때입니다. 먼저 율법의 때가 언제입니까? 23절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율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때를 말합니다. 또 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어린아이가 되어 초등교사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가 바로 율법의 때입니다. 이것은 내게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사람이 아직도 교만하여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의를 고집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형벌, 율법의 공포에 눌려 있던 때를 말합니다. 또한 너무 유치하고 어리기 때문에 율법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은혜에 속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시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아직 유치하여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교회에 나올 때에 아마도 갈등을 겪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빨리 나아가 찬송하고 말씀을 들어야지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서두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안 나가면 ‘벌 받을지도 몰라, 감기 걸릴지도 몰라.’ 벌벌 떨면서 하는 수 없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나왔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아직 유치하고 어려 초등교사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때는 언제입니까? 믿음이 온 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신 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자유로워진 때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벌 받을까 하는 두려움, 저주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깨끗이 물러갔습니다. 죽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병들 것을 걱정하지 않고, 실패할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가 바로 믿음의 때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는 유치한 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고, 초등교사가 필요 없는 성숙한 때를 말합니다. 이 또한 믿음의 때를 말합니다.

 

믿음의 때, 여기에서 믿음은 헬라어로 정관사 '텐'이 붙어 ‘텐 피스틴’ ‘the faith’입니다. 그냥 믿음이라고 그랬지만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보통 믿음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믿음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라면 내가 잘 되리라는 믿음, 내가 복 받을 것이라는 믿음,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믿음, 덮어놓고 ‘믿습니다, 주여!’ 하는 믿음, 이것은 모두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 믿음’이란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23절과 25절 두 곳에 있습니다. 이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식과 관련이 없는 종교는 마술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문제와 관계없는 믿음은 무엇이든지 미신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속임수이고 참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이요, 은혜로 주시는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믿음입니다. 십자가가 믿어지는 믿음이요,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그 사건이 확실하게 내 안에서 사건화 하는 믿음입니다.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래서 십자가를 쳐다보면 절로 눈물이 납니다. 이 믿음이 선물입니다. 항상 하나님은 십자가 안에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은 누가 나에게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주시는 것이요, 구원에 이르는 복음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온 후에는 이제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23절에서처럼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23절 마지막부분에 “갇혔느니라.” 계속 감금되고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매인 바 되고, 갇혔느니라.” 이 두 말은 예수 믿기 전에 하는 말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모두 감정적으로 두려움에 매여 있었습니다. 죄지을까 걱정하고, 죄를 짓고 나서 벌 받을까 걱정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이런 걱정까지 합니다. 임신 중인데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자신이 죄를 많이 지어서 태어나는 아이가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걱정할만한 일입니다. 큰 걱정입니다. 이처럼 내 죄를 생각하면 하나에서 열까지 두려움뿐입니다. 잠시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완전히 공포에 매였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죄의식에 빠져 있고 형벌 의식에 매여 있습니다.

 

지식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식도 율법에 매인 바 되고 갇히게 되면 무슨 공부를 하든 하면 할수록 점점 어두운 면, 부정적인 면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비판적인 면으로만 봅니다. 흔히 가망이 없다, 다 썩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현대 철학을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소망은 없다.’ 세상에 남아 있는 진리라곤 소망이 없다는 바로 이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 율법에 매인 바 되고 갇혔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이해도 마찬가지로 율법에 매인 바 되고 갇히게 되면 어두워지고 캄캄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위한 이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발버둥 쳐봐도 결국 붙들고 보면 우상이요 미신일 뿐입니다. 이것이 다 율법 아래 매인 바 된 갇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완전히 자유를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보려고 애쓰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와서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귀한 뜻입니다.

 

24절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율법이 유치한 자를 가르칠만한 선생님과 같아서 비록 모자라고 간접적이고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도록, 그 약속을 믿도록, 메시야 대망사상을 갖도록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초등교사는 헬라어로 '파이다고고스'입니다. '파이스'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이며, '아고고스'는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파이다고고스'라는 말은 '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사람'으로 후견인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트레이너(trainer)라고도 번역됩니다. 요즘 운동선수를 훈련시키는 사람을 트레이너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많은 노예 중에 좀 지혜로운 노예가 있으면 그를 다른 노예들의 트레이너로 썼습니다. 아무튼 어린아이는 유치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붙들고 있는 것은 참 힘듭니다. 그래서 후견인에게 맡겨놓습니다. 후견인이 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항 할 것입니다. 그래도 도리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후견인 된 초등교사의 책무가 이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좀 더 높은 수준의 초등교사가 있었습니다. 옛날 부유한 양반의 경우는 자제를 가르치기 위해 개인 훈장을 자기 집에 두었습니다. 주로 세상 법이나 예법을 잘 아는 나이 많고 가난한 선비가 훈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들이 아이들을 맡아서 글을 가르치고 예법을 가르쳤습니다. 대통으로 만든 담뱃대를 들고 있다가 잘못하면 ‘이놈’하고 때리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이 길로만 가라고 가르치는 후견인을 초등교사라고 부릅니다.

 

요즘은 부부가 모두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파출부나 아예 가정부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들까지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아이가 아닙니다.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의 아이를 돌보는 것도 귀찮은데 게다가 말도 안 듣습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입니다. 한 알 먹이면 몇 시간은 자니까 자신의 행동이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먹입니다. 결국 아이는 약에 취합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데 약을 먹여 재운다니 말이나 됩니까? 이런 일이 미국에서는 흔하다고 합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했지만 초등교사는 이렇게 미숙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이리 가지 말고 저리 가라, 바른 길로 가라, 그리스도께로 가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선은 어리기 때문이요, 어려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라는 것보다 어쩔 수 없이 하지 말라는 것이 더 많습니다. 십계명을 가만히 보십시오. 열 가지 중에 몇 가지가 하라는 것이고 몇 가지가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늘 외면서도 어렵습니다.

 

다시 잘 검토해보십시오. 십계명에는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계명이 더 많습니다. 대인(對人) 계명 중 으뜸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제5계명 외에 다섯 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초둥교사요, 그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어리기 때문에 초등교사에게 붙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 못된 버릇, 나쁜 습관이 나오려고 합니다. 아직 분별력이 없어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유치한 가운데 있는 한 율법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많습니다.

 

일례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것을 봅시다. 즐거운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 저주받지나 않을까 벌 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서 헌금을 합니다. 아직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또 이름이 주보에 실리지 않으면 섭섭해 합니다. 주보에 적힌 자기 이름을 보고는 자랑스러워합니다. 아직 초등교사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어느 수준에 있습니까? 봉사를 해도 이름 없이 빛 없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저 후하게 해야 합니다. 이름을 밝혀줘야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면 봉사할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 당분간 초등교사에게 매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6절 이하를 보면 결론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로인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둘째, 세례 받은 자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다섯째,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은혜로 새로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한 가지씩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종이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원래 죄 가운데 있으면서 마귀의 자녀, 진노의 자녀였던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둘째,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율법 앞에서 죽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아무리 무섭지만 죽은 자를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어 버렸습니다. 이제 자유롭습니다.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살고, 나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사람과 헬라사람의 구별이 없습니다. 자유인과 종의 구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데는 평등합니다. 누구나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근본적으로 똑같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옷 입었다는 말은 신분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서 입는 옷이 구별되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 때 입던 옷과는 다른 것을 입었습니다. 결혼 전에 입는 옷과 결혼 후에 입는 옷이 달랐습니다. 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혼인 여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결혼식을 위해서 신부가 입는 옷은 다르지 않습니까? 옷은 신분을 나타내준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그리스도인은 신분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새 신분, 새 성품, 새 인격, 이제 새 운명이 시작됩니다. 나 혼자의 운명이 아닙니다. 결혼하면 배우자와 한 운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나니 내 운명이 그리스도의 운명과 같아졌습니다. 새로운 운명, 새로운 존재가 되어 종말에는 모두 주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완전히 새로운 신분, 새로운 존재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넷째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이는 약속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따라서 구원을 얻은 자를 말함이요, 선택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은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입니다.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이상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옛날 유대에 한 교만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이방인이 아닌 것과 노예가 아닌 것과 여자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감사합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안에 살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야 부하건 가난하건 간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유로운 후사요, 자유인이요, 성숙한 존재라는 것을 항상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