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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by 은총가득 2021. 5. 2.

육체의 일

갈라디아서 5:16-21

 

그리스도인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 그 생활의 중심에 예수를 왕으로 메시아로 제사장으로 나의 주님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좀 더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서 8:9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육체가 있고 이성이 있고 마음 가운데에 영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마지막 판단은 ‘어느 쪽이냐? 무엇을 기준하여 결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누구나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오로지 육체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만이 능사입니다. 모든 일이 육체에 이끌리어 되어 집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육체를 위해 투자하는 일뿐입니다.

 

둘째는 이성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추리할 수 있는 능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 즉 이성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하려고 듭니다. 이치에 맞도록 생각하면서 삽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신사적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격자라고는 해도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이 있으나 성령의 역사에 굴복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성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옳고, 이것이 그릇되고 저것이 그릇되고, 생각도 비판할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욕망 내 판단을 다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성령이 감동해 주시는 대로 그대로 따릅니다. 내가 다 이해하고 판단하지 않고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를 믿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성령이 감동하시는 대로 따라가며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결혼할 때나 자녀들의 혼사 때 조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격도 보고, 가문도, 건강도, 용모도 봅니다. 학벌과 직장, 또 경제형편까지 봅니다. 그런데 모두 만점을 받는 것은 어렵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해야 합니다. 어떤 한 조건이 변변치 않아도 다른 쪽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배운 바가 많지는 않아도 건강해서 좋다거나, 경제형편이 좀 시원치 않아도 신앙 좋으니 그만이라거나, 또 직장이 당장은 믿을만하지 않지만 성품이 좋으니 됐다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부족한 부분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야 믿거나 말거나 돈이 제일이지’ ‘그 가난한 집에 가서 평생 고생할래?’ 이렇게 나오는 부모가 있습니다. 물론 다 자녀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들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주로 하고 사십니까?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이것이면 된다.’ 하는 바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장로님의 딸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누구와 다니더라.’ 하는 소문이 장로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 장로님은 딸이 어떻게 하려나 싶어 가만히 두었더니, 어느 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더랍니다. 딴에도 배우자감으로서는 부족한 점도 많아 꽤나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장로님은 딱 한 가지만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 믿니?” “믿어요.” “그러면 됐다.” 딸이 너무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그거 하나면 족하지 않습니까? 나머지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까? 중대한 결정, 최종 결정을 내릴 때에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서 성령 주도적이요, 성령에 이끌리어 결정하고 성령에 이끌리어 따라가면 됩니다. 중립이란 없습니다. 마귀에게 이끌리지 않으면 성령에 이끌립니다. 언제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과 육체는 서로 대적한다.’고 말씀합니다. 17절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대적함으로 양자택일해야지 둘 다는 불가합니다. 육체적으로도 좋고 영적으로도 좋고, 그렇게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느 편에 끌리어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자유란 없습니다. 무엇엔가 끌려갑니다. 그런데 신앙은 참 자유를 의미한다고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란 무엇으로부터 풀려난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참 자유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때에 비로소 얻어집니다. 즉 쪽에 매임으로써 다른 쪽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에 매임으로써 육체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나'의 육체적인 욕망, 이성적인 판단, 교만, 자기 의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이기고 교만과 명예욕을 이기고 물질의 욕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 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애쓰고 유혹을 피하여 깨끗하게 살려고 하다가 교만의 죄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깨끗하니 더러운 사람과는 사귈 수 없다는 바리새적인 죄에 빠지고 맙니다. 진정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성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2입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비로소 모든 죄와 유혹으로부터, 심지어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를 일깨워줍니다. 19절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여기에 일상적이며 수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운 행동 하나하나 제시함으로 나의 나됨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기울고 있으며 무엇에 기뻐하고 있는가?’ 이 말씀을 깊이 읽으면서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쇠사슬에 매여 있는 사자도 사자입니다. 내가 지금 행동으로는 죄를 못 짓고 있다 하더라도 죄인은 죄인입니다. 악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면 육체가 약해졌기 때문에 죄를 못 짓습니다. 마치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 같습니다. 기회가 없고 용기가 없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뿐이지 그 마음속에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 내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큰 죄를 저지르고 나서 회개할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51:5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사실은 벌써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음란하고 나쁜 마음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없고 용기가 없어 쇠사슬에 매여 있는 사자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왕이 되고 자유가 생기니까 그만 쇠사슬이 탁 끊기면서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사건은 지금에 나타났지만, 죄는 벌써부터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지어왔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죄인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회개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에도 이런 회개의 말이 나옵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는 물론 죄요, 말로 지은 죄, 생각으로 지은 죄도 죄입니다.’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있었던 죄를 고백합니다. 또 마지막에는 '죄 아닌 것이 어디 있더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의 극치입니다. 행동, 생각, 의까지도 생각하면 할수록 다 더러운 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적극적으로 성령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단단히 붙들리어 더 열심히 주의 일을 하고 뛰어야 합니다. 가만히 한가하게 있으면 못된 짓만 하게 됩니다. 시간이 남아돌면 언제나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 집사님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느라고 집에서 새벽에 나와 밤늦게야 돌아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주일날과 삼일저녁에만 나가면 되지 뭐 그리 열심히 다니느냐, 집에 좀 붙어 있어라”하고 책망을 합니다. 그 여 집사님은 “그러면 내가 댄스홀에 가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하고 대꾸했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두 손 들고 교회일이나 계속하라고 하더랍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마음이 꽉 차 있어야 합니다. 바빠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해야겠다,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해야지 마음이 비어 한가하면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빈 집이 위험하다’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감화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내 입에서는 항상 찬송이 떠나지 않아야 하며, 마음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묵상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떠나면 잡스런 말들이 나오고 허탄한 생각들이 나옵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의 악한 욕망을 율법과 이성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자유를 하나님의 말씀에 반납해버려야 합니다. 세속적인 방법으로 자유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아예 내 자유를 다 바쳐버리고 순종하며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풀어놓으면 잘못되고 시험에 빠지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온전히 성령의 역사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구체적인 악덕 목록, 버려야 될 것, 15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 몸에 내 생활에 내 마음에 이런 잡초가 나거든, 이런 성향이 있거든, 이런 욕망이 생기거든, 이런 세속적인 자유의 흔적이 보이거든, 내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 나서 다시 그리스도께,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15가지 악덕 목록을 자세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15가지 악덕을 기록하는 이유는 나의 나됨을 알고 내가 내 처한 현주소를 알아 내 현 상태를 진단해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바위와 모래는 차이가 많습니다. 바위는 크고 모래는 아주 작은 알갱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바위나 모래나 모두 물에 가라앉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모래도 가라앉고 바위도 가라앉습니다. 이는 작은 죄든 큰 죄든 같은 죄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큰 죄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하고 안심을 하지만 그게 문제입니다. 어느 죄목이든, 그것이 크든 작든 그 죄는 나의 인간성이며 내 타락된 본성의 발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내부에 이런 성향이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이 15가지의 악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모든 육체에 속한 일들, 옛사람의 본성, 타락된 인간성, 악령에 속한 것, 사단이 이끄는 행동이 15가지 죄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것은 모든 죄목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두드러진 것을 대표적으로 열거했다고 말합니다.

 

첫째, 감각적인 죄입니다.

본문에서 이 죄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으로 말씀합니다. 모두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1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몸 안에 죄를 짓는 것, 나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더럽히는 것 같아도 실은 나 자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순결을 해하는 것입니다. 이 감각적인 죄는 다른 말로 내 인간 존재 자체를 비인간화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엄연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비인간화되어 하나의 속된 동물로 바꾸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음행 죄, 더러운 죄, 호색 죄를 죄목 제1조로 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죄입니다. 음행에 대한 칼 바르트의 정의는 유명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간음이다.’ 육체적 행위 만으로서의 성행위는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 행위가 정당한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개입 안 된 단순한 육체의 향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분명히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반드시 정신적인 사랑, 아름답고 신령한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의 상징으로 혹은 사랑의 증거로 이루어지는 성행위여야만 정당하다고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습니다. 행동은 육체적이나 그 의미는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마치 성찬예식과도 같습니다. 행동은 육체적인 것 같으나, 정신적 사랑의 발로요 정신적 결합의 발로로서 상징화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행이 됩니다.

 

‘더러운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속됨을 의미합니다. 이는 음행의 결과로 오는 더러운 행위를 말합니다. 이상하게도 음행이라는 것은 갈수록 점점 더 속되어 동물보다도 더 천해졌습니다. 현재 세계에 2천 5백만 명의 에이즈 보균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발병자가 약 1백 50만 명이며, 일 년 동안 이로 인해 죽는 사람이 2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대로 나아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에이즈로 죽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참으로 썩어 빠졌습니다. 왜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더러운 쪽으로 나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즐깁니다. 인간성이 갈 데까지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또, ‘호색’이라 하였습니다. 성의 목적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을 즐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이 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중심이 될 수도 없습니다. 호색, 모든 감각적인 것들은 저마다 악한 방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를 이기려면 성령으로 사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신령하게 살려고 애쓰고, 신령한 것들을 즐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종교적인 죄가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주술’ 두 가지입니다. ‘우상숭배’는 말할 것도 없이 죄입니다. ‘주술’은 헬라어로 '파르마케이아'입니다. 영어의 약을 의미하는 ‘팔머시(Pharmacy)’라는 말의 어원이 ‘파르마케이아’입니다. 옛날에는 마술사들이 약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술이라고 하는 것은 약물을 가지고, 또는 못된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알코올, 마약처럼 마비시켜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 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을 그래서 주술이라고 합니다. 영적 타락을 의미합니다.

 

셋째, 사회적인 죄가 있습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이 열 가지 악덕은 모든 이기심과 타락된 인간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원수를 맺는 것’ 한번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면 기어이 원수를 갚겠다고 벼릅니다. 원수를 풀지를 못합니다. 섭섭한 마음을 품는 순간에 이미 성령은 떠났습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여 ‘억울하다, 복수하고 말겠다,’ 하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힘들겠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9년 전에 해직되었던 기자의 고백입니다. “해직 당했을 때는 욕도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복수하려는 마음도 먹었지만,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늘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덕분입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살아올 수 있었다고 절실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내 마음이 가득하여 내게 해롭게 한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또 그들을 위하여 기도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수를 맺고, 원수 갚으려고 하는 복수심 그 자체가 마귀의 종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성령은 이미 떠나고 내 안에 마귀가 들어와 나를 종으로 부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복수해라”하고 마귀가 자꾸 부추깁니다. 마침내 무서운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이어 나오는 ‘분쟁’도 똑같은 뜻입니다. 분쟁하는 마음도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음이며, ‘분냄’은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또 ‘당 짓는 것’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 당만 옳습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당만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분열함’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은 통합보다 분열에 대해 더 분주합니다.

 

그 다음에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은 방임(放任)입니다. 이것들을 묶어서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포자기하는 태도입니다. 제가 병원에서 원목으로 사역할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간경화증으로 입원한 28살 청년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술을 마셨는데 매일 하루에 소주 7병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술을 마셨느냐?”하고 묻자 기막힌 대답을 합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위에 구멍이 뚫려 반으로 잘라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이제는 술 마시면 죽는답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괴로워서 그걸 잊으려고 술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도 몰래 나가서 술을 사가지고 마셨습니다. 그러다 그는 결국 사망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함에는 내일이란 없습니다. 오늘로 끝내자,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15가지 죄목을 열거한 다음 21절에서 바울은 “경계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악덕이 여전히 머물러 있고, 거기에 끌려가면 내 마음속에서 성령이 떠납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1절 뒷부분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정말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혀 있으면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15가지의 악덕들이 자꾸 좋아지고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져 관심이 가면 근본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옛사람은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이러한 것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도 없어지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마음을 충만히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소욕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소욕을 넉넉히 이기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22-23

 우리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소욕, 육체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의 본능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거스르며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거슬리는 모든 그릇된 욕망을 통틀어 ‘

육체의 소욕’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역사는 정반대 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만 있을 뿐입니다. 양쪽에다 어정쩡하게 다리를 걸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복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후배가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도 구원하고, 교회도 부흥되기 위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복음 뿐 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복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복음을 사랑이라는 문제를 놓고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참 중요하다, 꼭 필요하다.’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사랑해야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철학이요, 윤리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하고 명령합니다. ‘사랑하면 복 받고 사랑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입니다. 셋째, 그러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 알면 그 사랑에 대하여 사랑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이제는 사랑할 힘이 생기고 사랑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에 빠지고 어느 사이에 철학에 빠집니다. 오직 복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도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랑하면 복 받는다고 하는 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이렇게 나타나 있구나'하고 깨닫고 감격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이것이 가슴에 충만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어려운 일도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느냐, 그 근거가 중요합니다. 사랑을 몰라서 못하고 사랑해서 좋은 줄 몰라서 못합니까? 문제는 다 알고 있는데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는 마음을 생기게 할 것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그 밖의 어떠한 것으로도 마음속에 진정한 사랑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열매는 단순한 율법이나 도덕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종자에 비유하십니다. 우리가 좋은 밭을 마련하고 토지를 잘 가꾸어놓았다 하더라도 씨앗이 뿌려지지 아니하면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종자가 반드시 그 밭에 뿌려져야 합니다. 밖에서부터 종자가 떨어져서 그 속에 심기어질 때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밭이 좋다고 저절로 생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을 비운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는데, 운동이 쉽지가 않습니다. 거기서 트레이너가 “목사님, 마음을 비우세요.” 그럽니다. 여러분,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쓰지 마십시오.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일생동안 비우려고 애를 써도 비워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만 많아집니다. 비운다는 말은 기독교적 용어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교리는 오히려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을 충만하게 채움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비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원천적인 교리입니다.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애매하게 알고서 믿기 때문에 불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 왔다 갔다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가득 채울 때에 욕심이 도망가고 은혜로 가득 채울 때에 더러운 것들이 물러갑니다. 사랑함으로써 증오를 잊을 수 있습니다. 미워하지 않겠다, 잊어버리겠다며 아무리 애를 써도 꿈속에 나타나는데 어떻게 잊어버립니까? 보면 생각이 나는데 어떻게 잊어버립니까? 벌써 잊은 줄 알았는데 만나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채워야 됩니다. 사랑해버려야 됩니다. 사랑으로 채워야 미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씨가 밭에 떨어져야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 밭이 고르다고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행동보다 더 근본적인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 노력하지 말고 좋은 나무가 되도록 노력하자.’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나무는 되지 못하면서 좋은 열매만 맺고 싶어 합니다. 씨앗이 없는데 어디서 열매를 맺겠습니까? 아무리 공들이고 기다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시고 성령이 주도하시어 내 인격과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 그때에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요 바로 기독교인들이 실천해야 할 윤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다음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씨앗, 종자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성령이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마귀나 육신의 욕심과 세상적인 것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성령만이 씨앗이 되어 내 마음에 뿌려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수용의 문제입니다.

생명이 내게 들어왔는데 내가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마치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아서 이 생명을 수용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는 듣는데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조선족들에게 여러 말씀을 드렸더니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외칩니다. “목사 선생, 지금 하신 말씀을 전폭적으로 접수합니다.” 아무리 귀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내가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수용이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을 성장케 해야 합니다.

성장을 도와야 됩니다. 생명이 내 안에서 자라도록 알맞은 여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한 말씀을 들을 때에 순종하고, 두 말씀을 깨달을 때에 순종하고, 세 말씀을 알게 될 때에 그대로 실천합니다. 그럴수록 은혜가 점점 더 충만해지고, 더 깊이 깨닫게 되고, 더 많은 능력을 얻게 되고, 큰 열매를 거둡니다. 이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본문에 있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세 가지씩 묶어서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 셋째는 나 자신과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아홉 가지 열매가 맺어집니다. 반대로 만약에 이 열매가 없으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시 회개하고 성령을 내 안에서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이제 성령의 열매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Agape)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많습니다. 우리의 언어에서도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애-친구에 대한 사랑, 형제애-형제에 대한 사랑, 효심-부모에 대한 사랑, 애국심-국가에 대한 사랑 등으로 구분됩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에 대한 어원이 전혀 다른 네 가지의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가 에로스(Eros)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에로틱하다는 말은 자주 듣습니다. 남녀 간의 애정입니다. 상대방을 서로 그리워하고 소유하며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필리아(Philia)입니다. 프렌드쉽(friendship)이라는 영어가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 친구처럼 친한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스톨게(Storge)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입니다. 혈육의 사랑입니다.

 

넷째, 아가페입니다. 성경에 많이 나타나는 용어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극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곳은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때에 “아가파스”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나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필리아의 사랑을 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아가페라는 말을 쓰지 못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필리아의 사랑을 한다고 답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필레이스 메’ 그러면 친구의 사랑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가페이지 에로스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연애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가페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에 아가페의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예수님의 성령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6:13~14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미 말한 것을 깨닫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에 대하여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는 기억나게 합니다. 그 사건이 순간순간 마음속에 재생됩니다. 기억하지 못하면 사건이 사건 될 수 없습니다. 기억에서 사라지면 사건은 없어지고 맙니다. 성령은 마음 안에 들어와서 계속 기억나게 합니다.

셋째는 감당하게 합니다.

넷째는 진리에로 인도합니다.

 

이렇듯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 열매가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을 때 비로소 사랑하게 됩니다. 내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옵니다. 미워하던 사람을 이제는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면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미운 사람도 고와집니다.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소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도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일 뿐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은 아주 쉬운 길입니다. 저절로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하게 마련입니다.

 

두 번째 열매는 희락입니다.

헬라어로는 ‘카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기쁨이고, 영어로는 joy입니다. 단순한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기쁨입니다.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이런 때는 기쁘고 저런 때는 슬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내게 잘해주고 못해주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기쁨은 소유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지식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세상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기쁨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때에 오는 기쁨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기쁩니다. 누가 이유를 묻는다면 정확히 말할 수 없는데 그냥 좋아 죽겠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맺게 하는 열매는 내 모든 감정을 사로잡는 기쁨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 내 모든 감정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울고 다닌다고 해서 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늘 상 엎드려서 울다가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울 일이 그렇게도 많으냐고 물었더니 슬픈 일이 많아 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어 질 때까지 기도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웃음으로 안 바뀌었다면 아직 성령을 못 받은 것입니다. 성령은 열매가 희락으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가 영광의 예수님을 뵙습니다. 베드로가 5절에서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처자식이 버젓하게 있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합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이 시간이 좋으니 이대로 여기에 눌러앉아 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마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시간이 기쁘고 좋습니다. 성령이 동력이 되어서 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 기쁨으로 모든 상황을 극복합니다. 그 기쁨이 크기에 사소한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시시한 문제를 가지고 아귀다툼할 것이 없습니다. 큰 기쁨이 있는데 무엇이 걸립니까? 그 기쁨은 모든 시험과 모든 상황을 이기는 승리의 힘이 됩니다.

 

 

세 번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입니다. 샬롬이 바로 은혜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이 평안할 것입니다. 힘으로 이루어진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저는 가끔 환자들을 위해서 이러한 내용의 기도를 하곤 합니다. ‘건강할 때에 얻지 못했던 신비로운 평안을 오히려 병든 가운데 얻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건강해야만 평안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들었을 때에 어려울 때에 신비로운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 걱정도 아무 미련도 없습니다. 순수한 평안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안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리스도와 화평하고 사람과 화평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평안’이란 바로 이 같은 마음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화해하고 싶습니까? 가정을 화평하게 하고 싶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날마다 하루에 세 번씩만 말하십시오.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하십시오. “나는 너희들 때문에 행복하다. 너희를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러면 화평해집니다. 화목하자, 화목이 좋다더라 하고 입이 아프게 이야기해 본들 무엇 하나 이루어집니까? “야, 나는 너 때문에 못살겠다.” 이런 소리나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화목이 오고 무슨 화평이 오겠습니까? 내 마음에 먼저 충만함이 있어야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화평이 없는데 누구와 화평하자는 것입니까?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합니다. 웃는 사람하고 원수 맺을 수 없습니다. 항상 웃고 기뻐하면 화목한 사람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에 몇 분은 만날 때마다 싱글벙글합니다. “뭐가 그리도 좋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화목케 만드는 자입니다. 피스 메이커(peace maker)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화평을 주시고 모든 관계 안에 평화를 주십니다.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 ‘마크로두미아’라는 헬라어인데, ‘마크로’는 ‘오래’이고 ‘두미아’는 ‘마음’입니다. 오래 가는 마음입니다. 헬라어에는 인내라는 말로 ‘휘포모네’가 있습니다. 마크로두미아는 일반적인 인내가 아니라 특별한 인내입니다. 오래 참는 것입니다. 잠깐 참는 것이야 쉽습니다. 오래 참음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소되어버려서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두고 보자 하며 버티다가 한 10년 뒤에 가서 ‘내가 10년을 참아왔다’하며 터뜨립니다. 이것은 참는 게 아닙니다. 그럴 것이면 참지 말고 진작 터뜨렸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오래 참음이란 오래 참을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두고 보아도 다시 미워하고 다시 참고 다시 고통을 느낄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내를 성령이 주십니다. 그리스의 교부 크리소스톰은 인내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복수할 힘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 것’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데 갚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는데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힘을 주셔서 평안하고 쉽게 참아낼 수 있습니다. 굳이 인내라고까지 표현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인내,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헬라어 ‘크레스토테스’는 친절함입니다.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친절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든지 자연스럽게 친해집니다. 예수를 잘 믿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반가워하고 친절함이 자연스럽습니다.

 

 

여섯 번째는 양선(良善)입니다.

‘아가도수네’라는 헬라어는 자주 쓰는 말입니다. 자비에 비해 훨씬 능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그 차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비는 잠재적인 양선이요 양선은 현실적으로 힘을 나타내는 자비이다.’ 양선은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비를 의미합니다. 기다리는 선이 아니라 찾아가는 선입니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가서 베푸는 선이 양선입니다.

 

 

일곱 번째는 충성입니다.

‘피스티스’입니다. 믿음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충성, 진실, 믿음은 헬라어로 다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진실성이 생기고 성령이 충만할 때에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여덟 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입니다. 이것은 길들여진 말을 의미합니다. 뻣뻣하고 거친 말이 아닙니다. 유들유들하니 잘 길들여진 온순한 말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매사에 너무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성령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그 고집이 꺾어져야 됩니다. 눈에 띄게 개성이 강하고 모나게 행동하는 것도 무엇인가 조금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유순해야 합니다. 온유함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에 온유함이 실현되어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온유함입니다. 내 뜻이 엄연히 있건만 내 뜻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즐거움으로 따라갑니다. 이것이 온유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좀처럼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변치도 않은 자기 의지를 그렇게도 꺾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고쳐야 됩니다. 내 뜻을 속히 버리고 그쪽 뜻을 따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굽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주는 열매입니다.

 

 

아홉 번째는 절제입니다.

헬라어로는 ‘엑크라테이아’이고 영어로는 셀프 컨트롤(self-control)입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쉬운 일 같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 욕심, 내 성격, 내 게으름, 내 명예심, 내 교만, 나를 다스리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잠언 16:32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자기 절제를 가능케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할 때에 가능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역시 성령이 충만할 때에 충분히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열매가 나에게, 내 인격에, 내 성품에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홉 가지 중에 하나도 없습니까? 찾아봐도 보이는 것이 없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을 재충전해야 합니다. 새어나간 성령을 다시 채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 지지 않고 마음을 열 때에 이루어집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이제 주님께 내 자유를 위탁해버립시다. 그리고 당신께서 내 안에 충만하여 나를 완전히 다스리시고, 나를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때에 나는 비로소 사랑의 사람, 희락의 사람, 화평의 사람, 오래 참음의 사람, 자비의 사람, 양선의 사람, 충성의 사람, 온유의 사람, 절제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고서 스스로 놀라고 감사하는 때가 곧 다가올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26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가 마태복음 16:16에서 아주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예수님은 축복하시고 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당치도 않다면서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16:22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에 예수님은 정색을 하고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마태복음 16:23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어 예수님은 마태복음 16:24에서 제자들에게 귀중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자격과 조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자기’라는 말이 두 번이요, 주님 자신을 지칭하는 ‘나’가 한 번입니다. 첫째, 나를 부인하고 둘째,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주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를 부인하지도 않고 나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무조건 내가 예수 잘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직분을 가졌으니 남보다 예수를 더 잘 믿는 것이라고 자만하지도 마십시오. 천당에 가보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잘 못 되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니 믿다가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도 시원스럽게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한 번도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옆에서 보기에도 답답합니다. 이보다 딱한 사람이 없습니다. 차라리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면 예수 믿으라고 전도나 할 수 있지만 도대체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절대조건입니다. 여기서 부인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의 반대입니다. 자기를 인정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 지식, 내 능력, 내 재주, 내 IQ, 나의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 생각, 내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고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있습니까? 그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갈등이 있을 뿐입니다. 예배시간에 습관적으로 늦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 공짜로 배급을 준다고 하면 부리나케 달려갈 사람입니다. 영화구경을 간다고 하면 단 5분이 늦을까봐 야단을 떨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올 때는 꼭 시간에 늦습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직도 자기 십자가를 철저하게 지지 못했기 때문이요 큰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이 힘들고 교회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가자니 싫고 안가자니 지옥으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오늘만 가지 말까, 매일 가야 천당에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루 안가면 어떠랴. 망설이다보니 벌써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또 늦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 모든 일들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입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을 뜻합니다. '소속'이란 참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소개할 때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명함에 적혀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름 석 자와 직장명입니다. 나는 이 직장에 속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속을 밝히는 것이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입니다. 이 증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소속입니다. 명함에 나는 돈 얼마를 가졌다고 써넣은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집이 몇 채가 된다고 써넣은 사람도 못 봤습니다. 명함에 쓰는 것은 오직 소속입니다. 아무 회사의 아무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을 써넣습니다. 사람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소속이 하나씩은 있습니다. 성씨(姓氏)입니다. 김 씨이면 김 씨 집안에 속한 사람을 뜻하고, 박 씨이면 박 씨 가문에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 가문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는 소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소속부터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속,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의 소속에 따라 평가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무엇을 내놓을 것입니까? 나의 공로를 내놓을 것입니까? 나의 업적을 내놓을 것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라는 것밖에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이 소속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해야 됩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의 소속은 그리스도입니다. 외국에 있는 교포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이 외국에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기에서 이기면 애국가가 울려 퍼집니다. 그때에 울지 않는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다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워 이긴 것은 아니지만 내가 속한 나라가 이겼으므로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속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하는 소속감을 늘 확인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원칙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가치와 목적과 의미에 있어서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옛날에 속하였던 많은 관계들도 다 끊어낸 사람입니다. 옛것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봅시다. 십자가에는 몇 가지 원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는 자원적이고 선택적인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도망갈 수 있고, 사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일부러 침묵하고 변명 없이 십자가를 질 때에 그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에 좀 고생이 따른다고 해서 자식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런 싸구려 십자가는 세상에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잘못하여 남편에게 시달려도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 그것이야 마지못해 지는 것입니다. 도망갈 수 없어서 억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십자가가 못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든지 얼마든지 안 질 수 있는 것을 내가 자원하고 선택해서 기꺼이 질 때에 십자가가 됩니다. 고통스럽다고 다 십자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적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는 목적적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확실한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었을 때, 그 의미가 자신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고,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추수의 날을 고대하면서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에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렇듯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됩니다. 어물거리다가 그만 말려들었다면 이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무슨 특별한 뜻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잘못해서 지게 된 고통을 가리켜 십자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십자가는 철저한 고통,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 고통의 극치입니다.

 

넷째, 십자가는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이란 기억도 없고, 감각도 없습니다. 가치도 없고, 매력도 없습니다. 시체에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살았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시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박물관에서 미이라 전시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미이라 20구 를 옮겨다 전시해놓았습니다. 아이 미이라, 어른 미이라를 쭉 늘어놓았는데 모양은 거의 똑같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것이 하나 보였습니다. 특별히 배를 갈라 해부해 놓은 것인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마치 꼭 북어 말려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 미이라 된 사람 두 번 죽는구만”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태워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북어 꼴을 하고 전시한다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수천년 동안 썩지 않았다고 자랑하지만 차라리 썩은 것만도 못합니다. 옛날 왕들이 참 어리석었습니다. 미이라로 만들어 안 썩게 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입니다. 정말 보기에 딱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왕의 죽음이든 거지의 죽음이든 죽음은 죽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모두 똑같습니다. 거기에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부정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능동적입니다.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죽음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숨을 쉬고 있어도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하나님과 나와의 법적관계에서 철저하게 죽어야만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이미 타락한 몸이며 잘못된 심령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깨끗하게 죽어야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하고 간증합니다. 어제도 차를 타고 가면서 잠깐 방송으로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겪은 바를 간증했습니다. 그렇게도 못된 사람이었는데 완전히 죽어져서 은혜를 받았다는 체험을 나름대로 설명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죽는 것을 체험합니다. 자기가 죽는 것,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죽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죽도록 만드십니다. 스스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게 만드십니다. 완전히 죽어져서 백기를 들어야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교회에 몇 십 년 다녔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는 체험을 아직 못한 사람이라면 사는 체험은 더더욱 못했을 것입니다. 죽는 체험이 있고서야 사는 체험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 체험이 없이 무슨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이치가 이렇구나' 하고 아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빈번합니다. 회개도 제대로 못하고 찬송도 크게 못 부릅니다. 한 번도 벅찬 감격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바싹 메말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자기가 철저하게 죽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유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십자가에 죽어져야 하는데 죽는 중에 다 죽지 못했습니다. 버리는 중에 다 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옛사람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도 왜 은혜가 잘 되지 않습니까? 이 청산이 잘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잔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철저히 죽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일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귀한 체험을 하고서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돌 판을 던집니다. 우상 섬기는 것을 좀 보았기로 그렇게 때려 부술 수 있습니까? 아주 철저하게 죽은 줄 알았는데 욱하고 올라오는 기운에 마구 폭발합니다. 애굽 사람을 죽였던 그 옛날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돌인데, 잠시 옆에 놓고 다른 돌을 던지든 말든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돌 판을 내던지면 어떡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는 아직 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 그는 종종 그런 실수를 합니다. 반석을 탕탕 두 번 친 것도 그렇습니다. 모세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죽을지언정 따라가겠다고 장담하였는데, 죽음의 위험이 닥치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목숨을 바치고 사는 사람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형식적으로 법적으로 세례교인이므로 교인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죽지 못한 까닭에 진짜 교인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까? 무엇을 죽여야 합니까? 24절에서 바울은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못 박으라고 말합니다. 여기 ‘정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데마신’, 라틴어로는 ‘파시온(passion)’, 원뜻은 ‘정열’입니다. 인간적인 정열, 이 정열이 죽지 않아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탐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두미아이스’입니다. 필요 이상 가지려 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물질, 일, 지위, 명예 등, 욕심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어느 경영학 서적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식과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왜 실패 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지나친 욕심이 원인입니다.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그런데 정욕과 탐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완전히 죽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뜻을 하나님께 둔다고 말로는 하면서 아직도 정욕과 탐심은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셔서 내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또 여러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탐심이 문제라는 것을 지시해주십니다. 그런데도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동안은 참 그리스도인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매를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평생 붙들고 고집하다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야 포기합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조금 더 일찍 체험했어야 하는데’하며 후회하기 전에 정욕과 탐심을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기독교방송에서 어느 장로님이 간증을 했습니다. “제가 평생에 회개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장로님에게는 아들 셋이 있습니다. 그 중 똑똑한 아들 하나가 서울대학교를 나와 미국의 명문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 아들이 가문의 명예를 높이겠구나 하여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 저 신학공부 해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아마 집회에 참여했다가 은혜를 받은 모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기가 막혀 소리쳤습니다. “야 이놈아, 정신 나갔구나 너.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어찌하고” 성공이 눈앞에 환한데 목사라니 웬 말인가 싶습니다. 그길로 아들이 한국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하는 말이 “에이 장로님이 왜 그러십니까?”였습니다. 그 장로님 곰곰이 생각해보니 큰 실수를 했습니다. 가슴깊이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가장 똑똑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똑똑한 녀석이 목사가 뭐냐’라고 했으니 말이 됩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정욕과 탐심을 아직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희미하니 실수한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깨끗이 못 박아야 됩니다. 그럴 때에야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정욕과 탐심을 못 박은 사람의 특징을 본문 25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안과 밖이 다 성령으로 맺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만 성령을 따라서도 안 되고 지식만 성령을 따라서도 안 됩니다. 행동 자체가 성령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야 됩니다. ‘줄을 잘못 탔다’는 말이 있지요. 줄을 잘못 타면 정말 큰일 납니다. 고속도로 운전을 할 때 차선을 잘못 들어서면 엄청 고생 합니다. 줄을 잘 타야 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줄을 따라가야 됩니다. 잘못된 줄을 타면 엉뚱한 방향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2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노엽게 하는 것은 약함의 증거입니다. 약하니까 소리만 요란합니다. 투기가 왜 생깁니까? 앞으로 가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것이 투기입니다. 투기하는 자의 마음은 실패한 자의 마음입니다. 자신만만한 사람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면 되지 남 잡아당길 필요가 없습니다. 넘어진 사람이 앉아서 남에게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가장 비겁한 행동이 투기입니다. 내 마음속에 질투하는 마음이 있거든 각성해야 합니다. 투기는 약자의 하소연입니다. 실패한 자가 제자리에 앉아 남을 끌어내리자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나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그리고 나의 죄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됩니다. 그때에 나는 온전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온전히 죽을 때에 자유 하게 됨을 체험합니다. 마침내 부활의 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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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란 무엇인가?(갈 5: 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聖靈)을 좇아 행(行)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慾心)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肉體)의 소욕은 성령(聖靈)을 거스리고 성령(聖靈)의 소욕(所慾)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對敵)함으로 너희의 원(願)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오직 성령 (聖靈)의 열매는 사랑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자비(慈悲)와 양선(良善)과 충성(忠誠)과 온유(溫柔)와 절제(節制)니 이같은 것을 금지(禁止)할 법(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肉體)와 함께 그 정과 욕심(慾心)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萬一) 우리가 성령(聖靈)으로 살면 또한 성령(聖靈)으로 행(行)할지니 헛된 영광(榮光)을 구(求)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16-26)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성령과 하나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커다란 오류(誤謬)에 빠져있음이 심심치 않게 발견(發見)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시행착오(試行錯誤)와 사람들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영에 무지(無知)한 육적인 인간은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지식(知識)과 학문으로 이해하여 하고, 인간이 할 수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신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해가 될리 만무(萬無)하며, 어쩌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세기동안 인간들은 제한된 언어로 영이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규정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규정이 되지 않자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 실례로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실, 삼위일체 문제, 성령과 하나님과의 관계, 성령과 예수님과의 관계 등등 영적인 문제를 세상적인 상징적(象徵的)표현을 쓰다보니 여러모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현상이 수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을 구약에서는 대개‘루아흐;j'Wr ’(Ruah)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퓨뉴마;pneu'ma ’(Pneuma)를 사용하였는데, 그 뜻은‘생기’‘바람’‘호흡’‘입김’등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영에 무지한 육을 가진 인간들이 성령은 하나님이심을 모르고 성령이 하나님께 예속된 한 부분쯤으로 생각한 나머지,‘Having ruah’(루아흐를 가진) 하나님으로 잘못 오인(誤認) 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루아흐(Ruah)자체 이십니다.
하나님은 루아흐 자체이시지 루아흐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님 자신이시고 성령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분문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시(時)에 세운 교회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마가를 데리고 수리아의 안디옥을 출발, 구브로섬을 지나 밤빌리아의 버가로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 중남부 지방의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함으로써 갈라디아 지역과 인연을 맺습니다.(행13:13)

버가로부터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자리를 옮긴 바울은 이곳 회당에서 복음(福音)을 전하였는데(행13:16-41) 이곳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믿게 되는 좋은 결실(結實)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시기(猜忌)와 반대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이 지역에서 쫓겨나기에 이릅니다.(행13:42-52)
그 이후 이고니온으로 자리를 옮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허다(許多)한 무리들을 개종(改宗)시켰으나 이곳에서도 역시 유대인의 선동(煽動)으로 인하여 목숨의 위협(威脅)을 느끼고 다시 루스드라로 피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행14:1-7)

그리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에서 선천적인 앉은뱅이를 고치게 되는데, 이로인해 그들은 신으로까지 추앙(推仰)받게 될 처지였으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철저히 만류(挽留)한 후에 오히려 더욱 더 겸손한 마음으로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 당시의 기성종교인 유대교가 바울의 복음 전파로 기본틀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살아 생존에 예수님을 핍박(逼迫)하고, 조롱하고, 반대하여 예수님을 틈만 나면 잡으러 다닌 그때 그무리들처럼 유대인들의 시기(猜忌)와 질투(嫉妬)와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하늘을 치를듯 했습니다.

그러한 와중(渦中)에서도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하심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異邦人)들을 개종(改宗)시켰고, 이것을 계기(契機)로 갈라디아 지방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행14:17)

수백년 동안 모세의 율법신앙으로 고정관념(固定觀念)이 굳어진 유대인들의 신앙에 바울사도는 주의 능력과 권능으로 맞섰으며 당시 유대인들의 하늘을 찌를듯한 교권의 틀을 부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기어코 세웠습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복음을 흐트리려는 유대인들의 갖가지 음모(陰謀)는 말로 다 할 수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의 음모를 방지하기 위해 2차, 3차 전도 여행때에도 갈라디아 교회에 시간을 내어 들려 그들의 믿음을 돈독(敦篤)히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3차 전도여행 후기인 AD 56년 경(라이프 성경참조)마게도냐에서 율법과 복음으로 혼란해진 이방인 개종 성도들의 신앙을 바로잡아 주기위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복음을 바로 정립(定立)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바울은 박식(博識)한 학문의 토대(土臺)위에 갖가지 영적인 은혜와 은사를 체험,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없는 영적인 일들을 새롭게 결부시켜 질서를 세우고 정립시켰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에 가장 가깝게 성경을 풀어서 수 천년 동안 깊이 뿌리를 내렸던 유대주의의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관념(觀念)들을 뛰어넘어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의 복음 13편을 서신으로 기록한 쾌거(快擧)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성령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첫째. 성령의 열매는 인격을 말합니다.

“오직 성령(聖靈)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慈悲)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溫 柔)와 절제(節制)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法)이 없느니라”( 갈 5:22)


일반적으로 히브리어로 열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① 에브(bae ): 녹색식물 혹은 과일(단 4:9,18)
② 에불: 땅의 소산물(레 26:4,삿 6:4)
③ 니브: 소산, 입술의 열매(사 57:19)
④ 가말(/m'G; ): 좋게하다(잠 11:17), 선을 행하다(시13:6)
⑤ 파라흐(jl'P; ): 낳다, 번창하다(창 41:52)

 

또 헬라어로는 열매를 다음과 같은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① 카르포스(karpov" ): 어떤 일에서 기원한 것, 결과
② 게네마 : 열매, 자손 등등 똑같은 열매이나 쓰이는 측면에서도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① 직접적으로 과일의 열매
② 수험생에게는 합격의 영광
③ 사업가에게는 사업의 성공
④ 목수에게는 건축물의 완공
⑤ 어머니에게는 자녀출산
⑥ 정치가에게는 일의 성취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여러번 말씀하면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고 하면서 좋은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둘째. 성령의 열매는 신의 성품(性品)을 말합니다.

바울선생이 말한 성령의 열매를, 베드로는 신의 성품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約束)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情慾)을 인(因)하여 세상(世上)에서 썩어질 것을 피(避)하여 신(神)의 성품(性品)에 참예(參與)하는 자(者)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德)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敬虔)을, 경건에 형제(兄弟)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供給)하라”(벧후1:5-7)

셋째.성령의 열매는 복 받을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은사와 열매로 말했으나 예수님은 성령의 은사를 ‘표적’(세메이온;shvmeron )으로, 열매에 대해서는 산상에서 축복론 집회를 하시면서‘복이 있나니’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 5:1-12)

1.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
2. 애통(哀痛)하는 자
3. 온유(溫柔)한 자
4.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
7. 화평(和平)케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핍박(逼迫)을 받는 자
9.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에게 욕하고 핍박하는 자

 

넷째.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내적(內的)역사를 말합니다.

“ 그 영광(榮光)의 풍성(豊盛)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能力)으로 강건(强健)하게 하옵시며”(엡 3:16)

 

다섯째.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 나오는“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를 KJV에서 보면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로 되어 있듯이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으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온유(溫柔)와 절제(節制)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法)이 없느니라”(갈 5:23)

 

여섯째. 성령의 열매는 빛의 열매를 말합니다.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義)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9)

 

일곱째.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분량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穩全)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이 충만(充滿)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詭術)과 간사(奸詐)한 유혹(誘惑)에 빠져 모든 교훈(敎訓)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凡事)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3-15)

여덟째.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푯대를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穩全)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向)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爲)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아홉째.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나의 자녀(子女)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爲)하여 해산(解産)하는 수고(受 苦)를 하노니” (갈 4:1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者)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爲)하여 미리 정(定)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兄弟) 중(中)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열번째.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소욕을 말합니다.

“육체(肉體)의 소욕(所慾)은 성령(聖靈)을 거스리고 성령(聖靈)의 소욕(所慾)은 육체(肉體)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對敵)함으로 너희의 원(願)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열 한번째. 성령의 열매는 신앙의 집을 잘 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行)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磐石) 위에 지은 지혜(智慧)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열 두번째. 성령의 열매는 경건의 능력을 말합니다.
“경건(敬虔)의 모양(貌樣)은 있으나 경건(敬虔)의 능력(能力)은 부인(否認)하는 자(者)니 이 같은 자(者)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크도다 경건(敬虔)의 비밀(秘密)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肉身)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靈)으로 의(義)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天使)들에게 보이시고 만국(萬國)에서 전파(傳播)되시고 세상(世上)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榮光)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淨潔)하고 더 러움이 없는 경건(敬虔)은 곧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自己)를 지켜 세속(世俗)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열 세번째. 성령의 열매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智慧)는 첫째 성결(聖潔)하고 다음에 화평(和平)하고 관용(寬容)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善)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7)

 

열 네번째.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豫言)도 폐(廢)하고 방언(方言)도 그치고 지식(知識)도 폐(廢) 하리라”(고전 13:8)


열 다섯번째. 성령의 열매는 선한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聖靈)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 (롬 14:17)

“그런즉 너희는 강(强)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하라 너희 행(行)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대하 15:7)

 

열 여섯번째. 성령의 열매는 영적인 옷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擇)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와 겸손(謙遜)과 온

유(溫柔)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골 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2)
“그에게 허락(許諾)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細麻布)는 성도(聖徒)들의 옳은 행실(行實)이로다 하더라”(계 19:8)

 

열 일곱번째. 성령의 열매는 언제든지 실족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兄弟)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擇)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行)한즉 언제든지 실족(失足)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열 여덟번째. 성령의 열매는 거룩한 성도들의 생활의 결과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聖靈)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順從)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爲)하여 택(擇)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便紙)하노니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벧전 1:2)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者)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行實)에 거룩한 자(者)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이 은혜(恩惠)는 곧 나로 이방인(異邦人)을 위(爲)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福音)의 제사장(祭司長) 직무(職務)를 하게 하사 이방인(異邦人)을 제물(祭物)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聖靈)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너희 중(中)에 이와 같은 자(者)들이 있더니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聖靈)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義)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11)

“주(主)의 사랑하시는 형제(兄弟)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感謝)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擇)하사 성령(聖靈)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眞理)를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게 하심이니” (살후 2:13)
“ 여자(女子)는 일절 순종(順從)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딤전 2:11)

“저희는 잠시 자기(自己)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懲戒)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有益)을 위(爲)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參與)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懲戒)가 당시(當時)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後)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者)에게는 의의 평강(平康)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疲困)한 손과 연약(軟弱)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爲)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라” (히 12:10-13)

 

열 아홉번째.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교회가 한 몸을 유지하고 성도들 개개인이 각 지체로서 서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하나된 마음과 겸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겸손의 모본을 보여주셨으므로 성도들도 그대로 생활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예수님의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勸勉)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聖靈)의 무슨 교제(交際)나 긍휼(矜恤)이나 자비(慈悲)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合)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虛榮)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謙遜)한 마음으로 각각(各各) 자기(自己)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各各) 자기(自己)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各各)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充滿)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取)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自己)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貌樣)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自己)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빌 2:1-8)

스무번째.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成肉身)하시기 전 즉, 영원 전부터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 1:1,2,14)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 2:6-7,요 1:14)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신적인 속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으며, 죄인된 인류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기꺼히 순종함을 보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스물 한번째. 모든 열매는 사랑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무디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답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뽑아 보았습니다.
그 일은 몇주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나 자신도 참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먹으며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내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참으로 사랑하고 싶었고, 내 속에 사랑이 넘칠듯 차올라 손가락 밖으로 퉁겨나갈 정도였답니다.

당신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놓고 성경과 씨름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사랑에 충만해져서 입을 열기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홍수처럼 흘러나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을 한없이 사랑합니다.
우리들은 내가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고,
선생님이기 때문에 학생들을 사랑하고,
목회자이기 때문에 성도들을 사랑하고,
어떠 어떠한 교회의 소속이기 때문에 자기의 소속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하고 관계가 없으면 철저히 무시해버리고, 나의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아예 팽개쳐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다르게 봅니다.
비록 그들은 세상에서 제멋대로 산다해도 이 땅의 양심이요, 이 땅의 빛이요, 소금인, 그리스도인들만은 그들과 다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사랑이 가장 많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의 기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사업터가 사랑이 없고 , 이기적인 자들과 목이 굳은 율법주의자들이 더 많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사랑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덩어리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택함받은 성도들이 그 사랑안에서, 사랑을 베풀며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 여러분들은 다 열매맺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여러분들이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면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고, 어렵지도 않는 사랑안에 있음을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피차(彼此) 사랑의 빚 외(外)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者)는 율법(律法)을 다 루었느니라 간음(姦淫)하지 말라 살인(殺人)하지 말라 도적(盜賊)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外) 에 다른 계명(誡命)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自 身)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惡)을 행(行)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律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스물 두번째. 예수님은 열매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충만(充滿;Fullness) 하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요1:16)

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증거한 바 있지만 그러한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진리요(요1:14), 예수님 자신이 기쁨이요(롬 15;13), 예수님 자신이 평강이며(롬 15:13) 예수님 자신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롬15:29)

 

결 론(結 論)

제가 저술한 『성령론 대 설교집』『은사를 받으라Ⅰ.Ⅱ』에서 성령에 대한 개관(槪觀)적인 것과 은사에 대해 비교적(比較的) 상세(詳細)하게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만, 열매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소 소홀(疏忽)함이 없지 않았음을 시인합니다.

이번 기회에 열매에 대한 정확한 어휘와 의미를 통해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성숙(成熟)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음하는 바램이 미력(微力)한 저의 소망입니다.

지금까지는 저 역시 성령의 열매를 윤리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혹은 상식적 범주에서 성도들을 지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성령의 열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인격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신의 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복 받을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내적역사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빛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분량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푯대입니다. <daum.net/ym6807>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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