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 Paolo fuori le mura, Rome
해외 선교의 거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사도 15,26)
바울로 사도의 3차에 이르는 전도여행의 출발점이었던 안티오키아는 기원전 301년 알렉산더 대왕의 막료인 셀레우코스가 건설하여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했던 곳으로, 헬라시대에 중동의 정치 경제 학문 등의 중심지가 되었고 기원전 64년에는 로마제국에 예속된다. 로마제국에서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안티오키아는 인구 50만이 넘는 도시로 이들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서기 33년경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달아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였고(사도 11,19-30) 이때 교회는 안티오키아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의 바르나바를 파견한다(사도 11,22. 한편 이 무렵 예언자들도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 11,27). 바르나바는 다마소에 머무르고 있던 바울로를 초빙하여(사도 11,25) 만 일년여 동안(43-44년경) 함께 교회에 머무르며 선교 여행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1) 사도 14,26에서 기록된 대로 안티오키아는 바르나바와 바울로 사도가 전도를 위임받은 곳으로 향후 키프로스, 터키(사도의 선교 주무대), 그리스로 향하는 1,2,3차 전도여행의 출발점이 된다.2) 이곳은 오늘날 아쉽게도 사도 및 교부시대의 유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나,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전파된 곳이며, 성경을 포함한 많은 문헌들이 저술되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함께 교부시대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안티오키아 학파가 발전한 곳이어서 그리스도교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곳이다(4세기 이후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주교좌가 된다. 향후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정도의 발전을 보임). 이 지역에서 나온 중요한 문헌으로는 서기 50-60년경에 쓰인 예수어록(Q문헌)과 80년경의 마태오복음서, 100년경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4세기경에 쓰여진 교회법전인 사도헌장 등이 있다.
1) 독실한 바리사이였던 바오로 사도가 바르나바에 의해 초빙되어 안티오키아 교회로 오게 된 상황은 다음과 같다. 길리기아 속주의 수도인 다마소 출신의 바울로 사도는 33년경에 있었던 성 스테파노의 순교(사도 7장) 이후 34-36년경에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압송하겠다며 내려오던 중 다마스커스 부근에서 회심하게 되고(사도 9장) 다마스커스로 가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게 된다(사도 9,20). 이후 잠시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와서(갈라 1,16-18) 3년 정도 머무르며 활동하던 중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유다인들에게 쫓기게 되어 밤에 바구니에 담겨 간신히 성벽을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피신을 한다(2고린 11,32-33; 사도 9,23-25). 예루살렘에서 보름간 묶으며 베드로 사도 등의 제자들을 만나려고 하였는데(갈라 1,18) 마침 바르나바의 중개로 제자들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사도 9,27).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에게 쫓겨 형제들의 도움으로 가이사리아를 거쳐 고향인 길리기아 지역의 다마소에 올라가 약 8년 동안을 머무르게 된다(사도 9,30).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리아 지역의 책임자로서 안티오키아에 파견된 바르나바가 서기 43년경에 바울로 사도를 찾아가 초빙하여 안티오키아에서 약 1년간 다른 예언자들 및 교사들과 함께 봉사하며(갈라 1,19-24; 사도 13,1) 선교활동을 구상하게 된다. 한편 참고로 위에서 언급된 다마스커스는 중동국가 시리아의 수도인데(→시리아는 당시 지명과 동일함), 오늘날의 시리아는 남으로는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북으로는 터키, 동으로는 이라크와 접하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 83%, 그리스도교(정교회와 가톨릭) 13%, 기타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수 민족에 의해 매우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마스커스의 '바른 길' Straight Street (사도 9,11)
2) 1차 전도여행은 키프로스를 거쳐 갈라디아 남부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2차 여행은 1차 여행 때 갔었던 갈라디아 지역을 거쳐 오늘날 그리스의 영토인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에서 4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교회.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고린토공동체를 말함)를 설립하였으며, 3차 여행은 1,2차 여행 때 갔었던 갈라디아 지역을 거쳐 아시아 지역의 에페소에 오랜 시간 머무르며 전도하고 이후 잠시 그리스에 들렀다가 돌아오게 된다. 즉 1차 여행은 오늘날 터키 남부에 있는 갈라디아 지역이 주무대이고, 2차 여행은 그리스 지역이며, 3차 여행은 터키 서부에 있는 아시아 지역의 에페소가 선교의 주무대라고 할 수 있다. 아래 이어지는 글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설립된 공동체의 규모는 머문 기간과 비례하여 에페소(27개월)가 가장 크고, 고린토(18개월) 공동체가 두 번째이며, 나머지 지역 공동체는 유의할만한 차이는 없다.
출처 : 성서지도, 성서와함께 편집부
제1차 전도여행
서기 45 ~ 49년경에 이루어진 제1차 전도여행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13-14장에 실려 있다.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골로 4,10), 그리고 바울로 사도는 시리아의 셀류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서, 살라미스에선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전도했고 바포에선 세르기오 총독을 개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사도 13,4-12). 엘리마라고 하는 마술사가 총독이 믿지 못하게 방해하려고 했는데 사도는 이적으로 그의 눈을 멀게 했다. 키프로스 선교를 마치고 바포에서 승선하여 터어키 남부 항구인 베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선교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사도 14,13). 베르게에서 바르나바와 바울로 사도는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마을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터키 중부로 올라가다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른다(사도 13,14. 여행의 출발점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다름. 한편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전도하게 되는 아래 설명할 4개의 마을은 지형적 동질성으로 한 세트로 볼 수 있다). 사도 13,14-52에 따르면 그들은 두 번의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설교했는데, 대체로 이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다인들은 불신하고 사도들을 쫓아내서 사도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간다. 이고니온에서도 똑같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여 유대인과 그리스인 가운데 많은 무리가 믿게 되었는데 믿지 않는 편에서 사도들을 돌로 쳐죽이려 하자 리스트라로 피해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키프로스 Cyprus
키프로스 항공사진 Satellite Pictures of Cyprus
베르게 Ruins at Perga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Antioch of Pisidia
(뒷편에 보이는 것이 안티타우루스 산맥)
이고니온 Iconium
리스트라에서는 바울로 사도가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는데 주민들이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울로 사도는 헤르메스 신(제우스 신의 아들로 웅변의 신)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했다(사도 14,8-18). 그런데 이고니온 등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부추켜 바울로 사도를 돌로 쳐 그가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버렸는데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튿날 데르베로 향하게 된다. 이곳 리스트라는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헤어진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울로 사도를 따르는 디모테오의 고향이기도 하다. 데르베에서 선교하면서 사도는 "우리는 마땅히 많은 환난을 거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남긴다(→이 말씀은 사도 9,16절뿐 아니라 사도의 편지 여러 곳에서 마치 숨겨진 보물처럼 감추어져 있는 십자가의 복음과 상통한다). 데르베를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선교한 지역들을 거꾸로 가면서 살펴보고 나서 아딸리아 항구에서 여행의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행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된다(사도 14,25-26)
리스트라와 데르베 Lystra and Derbe
제1차 여행 이후 안티오키아에 돌아와 있는 동안 유대지역에서 어떤 이들이 내려와 모세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 문제를 계기로 오늘날 교회회의Synod 및 공의회의 원형격으로 볼 수 있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사도 15장)가 있게 된다. 이때 결정된 내용은 사도행전 15장과 바울로 사도의 편지인 갈라디아서 2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회의는 그리스도 승천 이후 20년 가까이 될 때까지 교회 내에서 모세 율법 문제(어느 것을 지키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는지와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 등)가 해결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모여 많은 논쟁을 했고(사도 15,6)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사도의 발언 이후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진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규정 말고는 여러분에게 어떤 짐도 지우지 않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친 고기와 피와 숨막혀 죽은 짐승의 고기와 음행을 삼가도록 하시오. 이런 일들을 피해 여러분 자신을 지킨다면 잘 사는 것입니다."(사도 15,28-29). 즉 일부 율법규정을 제외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결정되었고, 이밖에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여 실천하기로 하였다(갈라 2,10). 한편 이때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바울로 사도에게 악수를 청하여(갈라 2,9) 이방인 선교를 인정하였는데(갈라 2,7) 이는 사도회의 결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으나(→당시 현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뿐 아니라 떠돌이 선교사들에 의해서도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안티오키아 교회도 그렇게 설립되었음) 이때 인정은 거짓된 내지 그릇된 사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인정받은 것이며 이에 따라 사도의 견해나 활동이 그리스도의 계시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선교임을 밝혀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갈라디아서 본문의 이해는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와 관련되는데 이에 대해선 아래 각주 3) 참고.
3) 갈라디아서는 1,2차 전도여행에서 갈라디아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세우고 3차 여행에서 이곳을 거쳐 에페소에 머물고 있을 때, 할례 등 유다 율법(613개 계율이 있음) 준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1차 여행 때 선교했던 데르베 등의 남부지역인지 아니면 2차 여행 중에 거쳤을 듯한 북부지역인지는 분명치 않다)에 가서 선교하는 바람에 그곳 교회가 그들에게 넘어가는 형국이라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쓴 편지이다. 앞서 1차 여행만 살펴보아도 사도는 갈라디아 지역인 이고니온, 리스트라 등에서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겼고, 첫 선교여행지이자 매 여행 때마다 들러 돌봐 주었는데 사도가 강조했던 그리스도 신앙과 이에 따른 유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거짓으로 치부하고 거짓 사도가 되어버린 형국에 격분한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당시 그리스도교 중에서 할례 등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수구파로 보이는데, 이들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고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도 배척된 것이니 율법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이에 사도는 편지에서 예루살렘과 연계된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밝히고 안티오키아 사건을 제시하며(→사실 이 부분은 격분한 나머지 오버했다) 율법 일부를 받아들인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 없이 강렬한 어조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요한 15,10)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중요함을 말한다. 모세 율법의 준수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에 따라 십자가를 지고(사도의 용어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음 또는 십자가에 못박음) 그분을 본받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6,14; 5,24; 5,11; 5,6; 2,19-20; 5,13-14; 6,9; 6,2. 요한 12,24-26 참조). 하지만 이 편지는 사도회의의 결정마저 언급없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명예를 공격할 만큼 너무 격정적일 뿐 아니라 당시 그 공동체에 문제되고 있는 유다 율법준수에 대해 거부해야 한다는 목표에 몰두한 편파성이 있어서 훗날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데, 바로 오늘날까지 횡행하는 것으로 행위가 따르는 사랑의 계명마저 뒤로 내팽겨치는 모든 율법 거부가 그것이다(이 견해는 여기에서처럼 말로는 또 이론적으로는 구약 율법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살펴보면 누구보다 율법주의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을 유심히 보면 항상 입에 붙어있는 것이 구약 율법 가지고 다른 교파 심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도께서 당시 정황상 언급하지 않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이 육의 행실로서 5,19절에 들어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3,16절 등을 잘못 해석하여 미혹에 빠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엔 인간은 자유의지 없이 은총으로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된다는 견해가 결합되어 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유대교 또는 그리스도교 수구파를 대적하는 입장이어서인지 얼핏보면 유다 613계율뿐 아니라 완성된 율법인 사랑의 계명 등 모든 율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편지든지 뒷부분 훈계에서 율법사항인 음행하지 말라거나 우상숭배 말라거나 등의 가르침을 마치 율법과는 별개의 말처럼 넌지시 던지는 경향이 있다(2베드 3,15-16 참조). 참고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5,19절의 산상설교에서나 마태 23,3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행위를 요하는 율법적 가르침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다. 율법적인 사항은 오늘날까지도 사안에 따라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일단 613개 계율(예:십일조)은 폐기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고, 그 정신(사랑 자유 생명)이 중요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 특히 사랑의 계명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판단해서 지켜져야 할 것(예로 바울로 서간에서 훈계에 포함되는 것)은 자율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마르 7장; 산상설교 등 참조). 영과 대치되는 육의 행실은 악의 유혹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갈라 5,19; 에페 5,5; 로마 8,13-17 참조)
제2차 전도여행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
50-52년경에 이루어진 2차 선교여행은 사도행전 15,36-18,22에 기록되어 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는 요한 마르코 문제로 갈라져서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고, 바울로 사도와 예루살렘 출신인 실라 등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1차 여행에 갔던 갈라디아 지역으로 간다. 이때 리스트라에서 인정을 받고 있던 디모테오를 만나게 된다(사도 16,3). 이후 아시아 지역에 들어가려 했으나 성령께서 막으셨고(왜일지?) 그 무렵 현시를 통해 계시를 받아 오늘날 그리스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로 향하게 된다(16,6). 사도는 트로아스를 거쳐 에게 해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들어간 후 곧장 로마식민지로서 기원전부터 라틴화된 도시인 필립비에 들어가 며칠을 머무르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필립비에는 유대교 회당이 없었고 안식일에 지각티스 강가에 모여 예배하였는데, 사도는 이곳 강가에 와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렸고 청중 가운데 리디아라는 부인이 믿고 세례를 받는다. 이 필립비는 바울로 사도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이후 바울로 사도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유일한 교회이다(필립 4,10-20; 2고린 11,9 참조. 한편 후원을 누가 주도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리디아 부인이 아닐까 짐작된다). 사도는 어디서나 원칙적으로 교우들의 물질적 도움을 사양했지만(1데살 2,9; 1고린 9,4-18) 필립비 교우들의 도움만은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만이 사도의 무사무욕한 본심을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곳에서 전도할 때 점귀신 붙은 하녀에게서 귀신이 떠나도록 명했다가 감방에 갇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일로 간수가 믿음을 가져 그 가족이 입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사도 16,16-34절에 실려 있다. 필립비를 떠나 바울로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이자 큰 항구도시였던 데살로니카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사도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다교 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제법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는데 일부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베레아 마을로 피신하게 된다(사도 17,1-10; 1데살 2,13-16). 베레아에서도 유대인 회당에 가서 설교했는데, 베레아의 유대인들은 점잖고 날마다 성서를 연구했기에 많은 이가 믿게 되었다. 그러나 데살로니카 유다인들이 들이닥쳐 훼방하는 바람에 이를 피해 실라와 디모테오는 남겨둔 채 바울로 사도는 아테네로 내려간다(사도 17,10-15). 아테네는 로마제국의 지배 이래 정치 경제적으로는 몰락했지만 철학 문학 예술 과학 등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수준이 높은 도시로 사도는 아크로폴리스 아래의 바위 언덕인 아레오파고Areios Pagos에서 유명한 설교를 하게 된다. 하지만 사도의 설교는 일부는 믿었지만 거의 먹혀들지 않아 공동체 건설에 실패했고(17,32-33) 그러는 가운데 이곳을 떠나 고린토로 향하게 된다.
필립비 Ancient philippi
데살로니카 Thessalonica
아레오파고 Areios Pagos, Athens
아레오파고 Areios Pagos, Athens
고린토는 아카이아 속주(오늘날 그리스)의 총독부가 있는 수도로서 부유한 상업도시이며, 인종과 종교의 박람회장 같은 곳으로, 빈부격차가 심했고, 흔히 항구도시가 그러하듯 문화적 윤리적으로 천박하고 풍기가 문란했는데, 사도는 현시를 받아 무려 18개월을 이곳에 머무르게 된다(사도 18,9-11. 이때 현시는 어쩌면 고린토서의 집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사도는 49년경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하였을 때 이곳에 와있던 아퀼라 부부를 만나 그 집에 얹혀 살면서 부부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는 한편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한다(사도 18,4. 아퀼라 부부에 대해서는 1고린 16,19 및 로마 16,3-5절도 참조). 고린토 선교 말엽에는 유다인들이 당대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이었던 아카이아의 총독 갈리오에게 사도를 고발하는데, 그는 현명한 사람이어서 종교문제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사도 18,12-17). 한편 베레아에 남아있던 실라와 디모테오가 고린토로 내려와서 데살로니카 교회가 충실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희소식을 전하자 사도는 데살로니카에 첫째 편지를 쓰는데(AD 51년), 이 편지는 바울로 사도의 첫 편지일 뿐 아니라 신약성경을 통틀어 최초의 작품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이후 사도는 고린토 공동체 형성을 마무리 짓고 아퀼라 부부와 함께 고린토를 출발하여 에페소에 잠깐 들러 아퀼라 부부를 남겨두는데, 이때도 잠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토론하여 이곳의 유대인들이 그가 더 머물기를 청하게 되는데 사도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사도 18,19-21)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교회에 인사한 다음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간다(사도 18,22). 2차 전도여행의 성과는 오늘날 그리스 지역(당시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에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고린토 등 4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창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리스는 19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났는데 과거 콘스탄티노플에서 자립한 그리스 정교회가 국교로 인정되고 있으며 수도원이 발달되어 있다.
고린토 Temple of Apollo, Corinth
제3차 전도여행
바울로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서기 53년에서 58년에 이루어진 제3차 선교여행은 사도행전 18,23-21,16절에 실려 있다. 바울로 사도는 1,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아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인 에페소로 가서 모든 전도여행에서 최장 기간인 무려 27개월 가까이 활약한다(사도 19,8-10; 20,31. 두 번째로 오래 머문 곳은 위에서 언급했던 그리스 지방의 고린토 교회임. 참고로 사도께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형성한 대표적인 규모 큰 공동체를 꼽으라면 이 머문 시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오늘날 터어키 지역의 에페소 교회와 그리스 지역의 고린토 교회라고 하겠음). 에페소는 2차 여행 때는 성령께서 막으시고 마케도니아로 이끄셔서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인데(사도 16,6 이하), 3차 여행 때는 문이 활짝 열렸다고 말할 만큼 전도가 잘 되었다(1고린 16,9; 2고린 2,12). 에페소에는 풍요의 여신인 아르데미스 신전이 있는데 세계 7경 가운데 하나라는 평판이 있어 소아시아 지역에서 순례객들이 모여들었었다. 그런데 바울로 사도의 전도로 인해 아르데미스 신전 모형을 만드는 은장이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은장이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사도 19,21-40). 한편 사도께서 복음 전파에 주력한 두 개의 지역(오늘날 터키와 그리스 지역) 중에 아시아, 갈라디아, 길리기아 등은 오늘날 모두 터키의 영토인데, 터키는 종교적으로 이슬람교(수니파)가 인구의 99%를 차지하고 있어 민중에 대한 이슬람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
에페소 Ephesus Main Street
에페소 아르테미스 신전 Temple of Artemis in Ephesus
터키 전역에 산재한 노천 극장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에페소 노천극장 (사도 19,31)
한편 사도는 이곳 에페소에서 많은 편지를 썼다. 갈라디아에서 할례 등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교회가 기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갈라디아서를 썼고(갈라 1,6-10), 고린토 교회의 소식과 질의서를 받고 고린토 편지를 썼으며(1고린 16,8. 이때 소식은 1장에 나오는 분열소식이고 질의는 7장에 나오는 결혼과 독신 문제를 말함), 에페소의 로마군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는(필립 1,13; 2고린 1,8-10)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은 필립비 교회에 감사의 편지를, 그리고 골로사이 지역 교회의 신자였던 필레몬에게 그의 노예 오네시모와 관련하여 당부하는 편지를 옥중에서 썼다. 위에서 언급한 것 중 고린토 서간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하면, 학설이 일치되고 있지 않은데 이 서간은 총 4통으로 추정되고 있다(통설적 견해). 첫째 편지는 분실되었고(1고린 5,9 참조), 둘째 편지는 고스란히 전해오는 고린토전서이며, 세 번째 편지는 눈물편지라고도 하는 고린토후서 10-13장인데, 여기서 육적이고 자기를 내세우며 성령 체험을 강조하는 거짓 사도들이요 속여먹는 일꾼들(2고린 11,13)에 의해 사도직이 부인되고 공동체가 유린당한 상황에 직면하여 눈물을 흘리며 쓴 것이다(2고린 2,4; 7,8). 네 번째 편지는 고린토 교우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와 다시 화해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쓴 것으로 고린토후서 1-9장이 이에 해당한다. 눈물편지인 10-13장은 사도의 과거 행적과 신상발언이 많이 들어있어 사도의 인간성과 사도관 등을 살펴보는데 좋은 보고寶庫가 되며, 또한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교 교파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와 유사성이 있어 그릇된 가르침을 깨어 경계해야 할 신앙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서간이라고 생각된다.
에페소에서의 소동이 가라앉은 뒤 사도는 에페소를 떠나 필립비와 데살로니카 교회가 있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내려가서 석 달을 머문다(사도 20,2). 이때 사도는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해서 로마서를 쓴다(로마 15,22-33 참조). 출발지인 시리아로 귀환할 때 고린토에서 항해편으로 곧 바로 오려고 했으나 유대인들이 흉계를 꾸몄기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마케도니아의 필립비 교회를 거쳐 아시아의 트로아스(→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로 유명한 트로이)에 이르러서야 배를 타게 된다.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을 지낼 목적으로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송하지 않으려고 에페소를 비켜 항해하기로 결정했는데(20,16) 그냥 지나치지는 않고 에페소 바로 아래에 있는 밀레도스에 정박하여 에페소 원로들(→오늘날 사제)을 부른다. 여기서 에페소 원로들에게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몇 가지 당부를 한 다음 헤어지는데 모두가 이 말을 듣고 비통하여 눈물을 흘린다(사도 20,17-38). 모든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시리아 지역에 도착하여 띠로를 거쳐 프톨레마이스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하가보라는 예언자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이 말을 들은 형제들이 사도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충고하나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묶이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을 한다(사도 21,7-14). 사도는 이후 가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야고보 사도 및 원로들을 찾아가 인사한 다음 자신의 봉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하신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한다(사도 21,18)
밀레도스 Miletus Amphitheatre, Turkey
프톨레마이스 Ausgrabungen von Ptolemais
프톨레마이스 Ptolemais
제3차 전도여행 이후 예루살렘에서의 체포 및 구금과 로마로의 압송, 순교
바울로 사도가 성전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구금되고 로마로 압송되어 자택연금 상태에 머무르며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 21,17절부터 마지막 28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후 성전에 있을 때 아시아 출신의 해외 유다인들이 나지르 서원 제사를 바치려고 성전에 온 바울로 사도를 알아보고 민족과 종교 배신자로 규탄하자 유다인들이 그에게 린치를 가한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성전에서 유대인의 선동으로 체포된 후 천부장의 허락으로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연설을 하는데(21,27-22,21) 연설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를 없애 버리라고 외쳤고, 이튿날 최고의회 산헤드린 앞에서 해명을 하게 된다(22,22-23,11). 이때 사도가 언급한 부활교리 문제로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간에 분쟁이 일어나 사도는 병영으로 압송되며, 그날 밤 주님으로부터 "로마에서 증언하게 될 것"임을 계시받게 된다. 유대인들이 계속 그를 죽이려 하였으므로 사도는 로마 총독이 상주하는 가이사리아로 호송되어 펠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으며 2년 동안 총독부의 감옥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게 된다(58년 오순절~60년 가을까지. 사도 23,12-24,27 참조). 펠릭스에 이어 후임 페스도 총독이 부임하자 사도는 로마 시민권4)을 내세워 황제5)에게 상소를 하고 총독을 찾아온 헤로데 아그리빠 왕 앞에서 해명을 하는데, 당시 총독과 아그리빠 왕은 사도의 말을 듣고서 그는 구속될 이유가 없고 황제에게 상소만 하지 않았더라면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25-26장. 특히 26,30-32). 드디어 60년 늦가을쯤 총독이 상주하는 가이사리아를 떠나 황제가 있는 로마로 압송되는데, 폭풍으로 파선되어 겨울을 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며 61년 봄에 로마에 도착하게 된다(27,1-28,15). 로마에 도착해서 사슬을 묶인 채(사도 28,20)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는 가택연금 상태였지만(28,16) 셋집을 얻어 자유롭게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2년 동안 지내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치게 된다(28,16-끝).
4) 사도의 부친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었으므로 사도는 태생적으로 로마 시민이다.
5) 당시 황제는 서기 54-68년에 통치했던 네로이다.
가이사리아 Caesarea
가이사리아 Caesarea
사도행전에서 바울로 사도에 관한 이야기는 앞에 기록된 로마에서의 증언(23,11) 등에 대한 기록은 없고 여기에서 끝맺는다. 여기 본문을 살펴보면 당시 사도로 인해 유대교와의 갈등이 심하게 일어나 있지는 않았고(28,21)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넘어갈 것이며(28,28)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계속 말씀을 전했다(28,31)는 것을 알려 주는데, 그러면 네로황제 앞에서의 재판 및 증언은 어찌 되었고, 언제 어떻게 순교했으며, 루가 사도는 그 이후의 일에 대해 왜 기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한 전거가 없으니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다. 재판의 결과로 사형을 언도받아 사망했을 수도 있고, 또는 64년 7월 네로 황제가 로마 시가를 불 지르고 여론이 사나워지자 다급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간 모질게 박해했었는데(서기 64-68년) 베드로 사도와 마찬가지로 이때 순교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펠릭스나 페스도 총독이 죄를 찾지 못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무죄로 풀려났을 가능성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도 23,11절의 증언은 단순히 복음을 전한 어느 지역에서처럼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는 증거(순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사도 1,8 참조). 6세기로 소급되는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곳에서 순교하고 그 근처에 묻혔다고 하는데, 시기적으로 500여년이 흐른 뒤에 나온 거라서 그 신뢰성을 보증하지 못한다. 오늘날 이 자리에 바울로 순교 기념성당이 들어서 있고(→이 순교지는 삼천三泉을 뜻하는 트레 폰타네Tre Fontane라고 불린다)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위대한 여행(사도 바울로의 발자취를 따라, 생활성서사),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생활성서사), 교회사 1(에른스트 다스만, 하성수 옮김, 분도출판사) 등
바울로 순교 기념성당 Tre Fontane
성 바울로 대성당 San Paolo fuori le mura, Rome
San Paolo fuori le mura, Rome
daum.net/ kk-oo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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