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지혜로운 삶(엡 5:15-21)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과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문제를 서술해 가는 과정에서 4장 17-24절까지는 성도의 기본 생활 원칙을, 25-32절까지는 이웃과의 관계를, 5장 1-14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본 단락은 이러한 총체적인 교훈의 결론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15절을 ‘그런즉’ 으로 시작하였다. 이는 문단을 전환하는 역할과,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들을 전제하기 위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언급한 뒤에 ‘그런즉’이란 접속사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그런즉’이란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이란 의미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권면의 내용은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1.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삶(15, 16절)
바울은 ‘그런즉’이란 접속사에 이어 15절과 16절에서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3가지로 요약된다.
1) 어리석음과 지혜와 관련된 문자적 의미
앞에서는 어두움에 속한 자와 어두움의 일을 하는 자, 그리고 그들과 대조하여 빛에 속한 자와 빛의 열매를 맺는 자를 말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지혜 없는 자와 지혜 있는 자란 대조를 통해서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결론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 없는 자’로 번역된 ‘아소포이’(ἄσοφοι)는 ‘어리석은’, ‘바보 같은’이란 뜻을 가진 ‘아소포스’(ἄσοφος)의 복수형 형용사다. 그리고 ‘지혜 있는 자’로 번역된 ‘소포스’(σοφός)는 ‘숙련된’, ‘노련한’, ‘지혜로운’, ‘현명한’이란 뜻의 복수형 형용사다. 즉 성도는 세상에서 바보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며 현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결론이다.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드시며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혜롭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인데,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삶인가?
2) 지혜로운 삶의 방법
지혜로운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함부로 행하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살피고 헤아리라고 하였다. 무엇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17절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헤아려야함을 가리킨 표현이다. 지혜와 관련하여 지혜서라 일컫는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한 바 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또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였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임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인 것은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보라는 말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인지를 살펴 행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에 대하여 바울은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로 대신하였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는 세월의 중요성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그만큼 세월이 심히 소중한 가치의 것이라는 뜻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월은 아낀다하여 그것이 남아있거나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돈은 아끼면 오랫동안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세월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월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끼라는 것은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이 영생의 상급을 준비하는 심히 중요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무궁한 영광, 영원토록 우리의 소유가 되어 우리를 심히 큰 기쁨으로 누리게 할 영광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기에 함부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찌하든 초음을 아껴서라도 믿음에 유익한 곳에 사용되고 드려지도록 해야만 한다.
또 하나 세월을 아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세월이 그리 길지 않다는 뜻이다. 인생이 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번 뿐인 인생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인생의 세월은 그리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세월을 아껴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혹 인생이 두 번 기회가 있거나, 아니면 원시 구속사 때와 같이 평균 수명이 8백년 9백년 산다고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을 칠십으로, 강건하면 팔십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린 시절 빼고, 잠자는 시간 빼고,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빼고 나면 실제 무엇인가 일할 수 있는 세월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성경은 인생의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날아가는 살’, 또는 아침에 잠깐 있다 사라지고 마는 안개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불가불 먹고 살기 위해 부지런도 떨어야 하고, 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형태의 상황과 일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실제 남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에 남은 시간을 TV나 보고, 영화나 보고, 여행이나 하고,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엄벙덤벙 세월을 보낸다면 실제 믿는 일에 짬을 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혜 있는 자,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때가 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믿음의 삶을 심히 신중하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려 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주어진 세월을 허송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 표현이다. 때만 악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 역시 본성이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2. 주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17절)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보도한 바울은 이어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면하였다. 비슷한 권면은 앞의 10절에서도 보도 한바 있다. 그리고 이는 15절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는 연장선에서 주고 있는 결론적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훈은 두 가지 상반된 문장을 생각 할 수 있다.
1) 어리석은 자
바울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원어는 생각이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아프로네스’(ἄφρονες)다. 15절에서 지적되었던 ‘지혜 없는 자’란 뜻이 주로 지적인 측면이 강조된 단어라면 ‘아프로네스’는 행동까지를 포괄하는 좀 더 강한 의미를 지닌 단어다.
주님은 이 어리석음의 좋은 본으로 소출이 풍성한 부자를 말씀하신 바 있다. 한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쌓아둘 곳이 부족하자 그는 곡간을 헐고 새로 크게 지은다음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다. 그리고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저 육신적인 삶, 곧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삶이라는 말씀이다. 왜 이것이 어리석은 것일까? 인생은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 영원한 영생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도 영생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이 세상적인 문제, 육신적인 평안과 부요를 쫓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문제나 육신의 쾌락을 쫓는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때문에 바울은 그런 것을 추구하지 말고 믿음을 우선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2)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지혜’란 어리석음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말로 어리석음과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이해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쉬니에미’(συνίημι)다. 이 단어는 ‘함께’나 ‘더불어’란 뜻의 전치사 ‘쉰’(σύν)과 ‘보내다’란 뜻의 ‘히에미’(ἵημι)의 합성어로, 본래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어떤 대상과 자기 마음을 합하여 그 본질을 깨달아 아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러니까 주의 뜻을 마음에 품고 그 뜻의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함을 권면한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에 ‘오직’이란 우위접속사를 붙여 필히 그리해야한다는 것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어휘에는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이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깨닫기를 원하는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하고, 또한 깨닫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의 욕구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소원보다는 그렇지 않은 마음이 더욱더 강렬하다는 의미도 전제되어 있다. 현재 능동태 명령어인 ‘쉬니에미’를 사용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타락한 인생의 본성은 일반적으로 세상 것을 추구함에는 본능처럼 갈망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그렇게 능동적이거나 솔선적이를 못하다. 때문에 바울은 롬 3장 11, 12절에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지적한 바도 있다.
그러기에 중생한 성도라면 세상 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지혜 있는 자의 삶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유치원 몇 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거기에다 대학원까지 계산하면 거의 반평생을 배우는 일에 투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말씀의 가치를 모르는 주님 당시의 시대를 지적하고자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드셨던 경우가 있다. 그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듣고자 황금만 일백 이십 달란트, 즉 4000kg이 넘는 금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대하면서도 그 말씀의 가치를 전혀 귀하게 생각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스바 여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세상 것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없다면 그 책망은 곧 우리를 향하신 책망일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건과 현실에서도 먼저 주의 뜻을 헤아리는 신중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성도의 삶, 지혜 있는 자의 삶이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이다.
3. 성령 충만한 삶(18절)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할 것을 강한 어조로 권면한 바울은 이를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길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다.
여기서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대조법으로 사용한 것은 역시 육신 중심의 삶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비교하고, 또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문제를 지적코자 함에 목적이 있다.
당시 이방신전에서는 간음뿐만이 아니라 신전 제사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는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졌고, 이런 것들이 자랑거리로 여겨졌다고 전해진다. 바울은 바로 당시 우상을 섬기는 방탕한 종교를 지적하며 성도는 그리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이방의 종교가 술의 힘에 자신을 내 맡기고 행동하지만 성도는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야 함을 권면코자함에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성령 충만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리 충만 이라 답변할 수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언제나 진리와 함께, 진리로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이 진리 충만 이란 의미와 같은 뜻이란 확인은 바로 앞 절에서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할 것을 권면하였다는 것과 함께, 뒤의 21절에서 결론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권면한 말씀에서도 이를 증명해 준다.
주의 뜻을 이해하라고 할 때, 그 주의 뜻이 바로 진리이고, 그리스도를 복종하라는 것 역시 진리에의 복종을 뜻한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삶은 바로 진리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 안에 진리가 충만하고, 진리가 우리의 삶을 주관해 간다면, 즉 언제나 우리의 생각이 진리에 의해 주관되고, 그 진리의 인도함을 따라 생활해 간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인 것이다. 우리가 주일에 들은 말씀을 늘 그 주간 기억하려고 애를 쓰고, 기도할 때 마다 다시금 들은 바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그 말씀이 우리를 주관케 하고자 함이고, 그것이 곧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성령 충만한 삶인 것이다.
4. 주님을 경외하고 복종하는 삶(19-21절)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함을 권면한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령한 예배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감사함 마음으로 사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진리에 복종하는 삶이다. 19절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말하였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광경을 묘사한 발언이다. 즉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20절에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이 역시 성령 충만한 삶의 중요 요소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사한 마음이 없고 불평과 원망, 짜증 섞인 삶은 성령이 충만치 않다는 증거일 수 있다. 또한 믿음의 목적이 온통 자기와 자기 세상을 위한 것에 있다면 이 역시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닌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망과 짜증은 언제나 성도가 자기 욕심, 자기 세상 것에 치중한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는 성령 충만한 삶의 최종적 결과로 제시된 중요 요소이다. 즉 성령 충만한 삶은 진리에 복종하는 삶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다 망쳐진 것은 바로 성령 충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성령 충만을 어떤 신비한 이적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받는다거나,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왜곡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로인하여 교회들이 진리에 대한 관심,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에 대한 진실한 삶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온통 신비한 능력 체험에 열들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 충만한 삶의 결론적 요소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 하나님께 대한 감사, 그리고 진리에 대한 복종이 그것이다.
믿음이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첫 번째 요소로 예배를 이야기하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믿음이란 무엇을 바라고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감사란 그 자체가 현실에 대한 만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자기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다. 복종이란 단어는 이유를 막론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함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 그리고 달라는 것이 아니라 드리고 헌신하고픈 마음,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삶이 곧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것이 바울이 내린 결론이다.
세월을 아끼라(엡 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5-18)
1. 시간의 중요성과 그 의미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시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천지도 시간과 공간의 창조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천지창조는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 삶과 직결되어 있는 공간과 시간 가운데, 인간은 공간에 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공간은 눈에 보이기도 손으로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가장 확실한 부동의 재산이다. 그 땅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가 곧바로 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땅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같은 공동체에게도 중요하다. 그래서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국가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그것에 비하여 시간은 비가시적인 것이어서, 소홀하게 취급되기 쉽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생긴 것도, 시간의 중요성을 쉽게 놓치는 인간의 습성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땅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는 것'이 곧 신앙의 바른 지혜라고 강조하였다. 시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려면, 시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 삶과 관련하여 시간의 특성은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시간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시간의 확실성이란 인간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곧 누구나 예외 없이 정해진 수명을 갖고 한평생을 살다가 죽게 되어 있다. 그렇게 정해진 각자의 수명을 잊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마음이다. 삶의 한계를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편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가 바로 그 의미이다.
시간의 불확실성은 그 수명이 끝나는 시점을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수명이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료 시점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를 미리 알게 되면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에 걸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죽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시점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죽지 않을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의 불확실성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배려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를 '인간의 허탄한 자랑'이라고 평가하였다(약 4:13-16). 우리는 잠시 뒤에 일어날 일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뺀 채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헛된 자랑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와 명예와 권력과 지혜를 누린 인물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다. 그런 솔로몬이 말년에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정리한 내용이 전도서다. 겉으로 드러난 전도서의 주제는 만사가 모두 헛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그 헛됨의 극복 방법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전 12:13)이라고 하였다. 시간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헬라어에서 시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크로노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양적이고 측정이 가능한 객관적 시간이다. 영어로 '연대' 혹은 '연대기'를 '크로니클'(chronicle)이라고 하는데, 이는 '크로노스'에서 파생된 것이다. 한정된 수명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은 '크로노스'로 이루어진다. '크로노스'는 계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확실성을 띠며, 인간 삶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질적인, 하나님의 결정과 관련된 사건으로서의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하나님 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회로서의 시간이기도 하다. 누구도 정확한 시간을 제시할 수 없는 종말은 대표적인 '카이로스'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개인적 종말인 각자의 죽음이 불확실성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는 것도,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속한 '카이로스'이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시간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다. '크로노스'가 인간 삶의 기본을 담는 그릇이라면, '카이로스'는 그 그릇에 담기는 의미들이다.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크로노스'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 안에 가치 있는 '카이로스'가 담겨야 한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양이 아닌 질로 간직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2. '세월을 아끼다'의 의미
신앙과 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신앙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잠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잠 1:7; 9:10). 신앙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들이 누릴 행복한 삶이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월을 아끼며 사는 삶이다. '세월을 아끼다'는 것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하게 여겨 아끼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하찮게 취급하여 아까워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끼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세월'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이로스'다. 곧 질적인 시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아끼다'로 번역된 헬라어 '엑스아고라조'는 '속량하다' '구속하다'인데, 남에게 팔린 것을 도로 사 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는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그런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끊임없는 교제를 유지하여야 한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우리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그런 삶을 살았었다. 그렇게 살았던 그때에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노스'의 그릇 속에 '카이로스'가 온전히 충족된 삶이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아담이 범죄함으로, 복된 '카이로스'가 모두 상실되고 말았다. 인간은 '크로노스'의 그릇만 들고 사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명령과 함께 "때가 악하니라"가 뒤이어 언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때'로 번역된 헬라어는 '헤메라이'인데, '날'(day)를 의미하는 '헤메라'의 복수형이다. 그런 점에서 '때'는 어원적으로 '날들'(days) 곧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하다'는 것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악의 본질은 사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온통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탄은 우리의 '카이로스' 회복을 방해하려고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다. 그것이 사탄의 우선적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원인도 사탄의 적극적인 방해 공작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고 감사한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를 전혀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이로스'는 사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영역이다. 사탄은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다시 소유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카이로스'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가장 큰 복이며 희망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로, 지금 문 밖에 서서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계 3:20).
3. 세월을 아끼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었던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신앙적 당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우리들이 누릴 복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아담이 누렸던 복이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끼는 삶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다음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17절).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는 지혜로움이기도 하다(15절). '자세히'로 번역된 헬라어 '아크리보스'는 '부지런히' '정확하게'라는 뜻이다. 열심을 다하여 부지런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고 정확한 것은 더 우선적이다. '주의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블레포'는 집중력 있는 관찰에 따른 바른 분별을 의미한다. 신앙에서 영적인 분별력과 집중력이 결여되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하나님의 기회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진다.
영적 집중력과 바른 분별력을 유지하는 길은 늘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전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기셨다(마 26:41). 시험에 빠지는 첫 단계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놓치는 것이다. 깨어 기도하는 것만이 '카이로스'의 회복을 가로막는 사탄의 방해공작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둘째로, 보다 적극적인 방법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의 창을 열어 놓아야 한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듯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기만 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술 취하지 말아야 한다. 술 취함은 방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방탕은 정상적인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욕심을 앞세우는 자기중심적 삶이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우리의 영적 주파수를 맞추는 거룩한 집중을 가능케 한다. 그런 집중력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감동과 도전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우리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천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하다(빌 2:13).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감동과 도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거슬러 근심하게 하고(엡 4:30), 더 나아가 소멸시키게 된다(살전 5:19).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실천을 전제로 주어진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종의 불경죄다.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마아'는 '순종하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고, 그분의 말씀은 지엄하신 어명과도 같다. 그런 말씀을 듣는 것에는 곧 그 말씀대로 행할 책임과 의무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전의 기회인 '카이로스'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 곧 세월을 아끼는 영적 지혜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시공간 제한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한계성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 한계성 안에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신앙의 우선적 과제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도 세월을 아끼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후 4:16). '날마다'는 하루 24시간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영적 새로움(카이로스)의 주기가 하루 24시간(크로노스)이라는 뜻이다. 점차적으로 낡는 겉사람의 한계성 속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평생 끊임없이 새로워짐을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을 습관화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바르고 지혜로운 신앙이다.
휴가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쉰다는 것만이 아니다. 생활의 활력을 얻기 위한 재충전의 기회다.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빼놓고 심신의 재충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세월을 아끼는 영적 지혜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회복해야 한다.
권혁승 교수(서울신학대학교 구약학)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
세월을 아끼라는 본문의 원어 상 의미는 현 한글번역의 제한적인 뜻보다 훨씬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세월” (‘카이로스’ καιρός)
한글의 ‘시간’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주 헬라어 단어는 ‘크로노스 καιρός’와 ‘카이로스 καιρός’인데,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반면에 ‘카이로스’는 어떤 특별한 일이 발생하는 시간을 나타낸다.
따라서 ‘카이로스’는 그 맥락에 따라 주로 ‘시간,’ ‘세월’, 또는 ‘기회’로 번역된다. 많은 영어성경에서는 본문의 ‘카이로스’를 ‘찬스 chance’로 번역하고 있다.
“아끼라” (‘엑스아고라조’ ἐξαγοράζω)
단적으로 말하여, ‘엑스아고라조 ἐξαγοράζω’는 ‘아끼다’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시장’의 뜻을 가진 ‘아고라’에 ‘엑스’라는 접두어가 붙어 이루어진 동사로서, 광의적으로는 ‘사오다’의 뜻으로, 좀 더 명확하게는 ‘대가를 주고 다시 찾아와 완전히 내 것으로 회복하는 행위’를 위해 쓰이는 용어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 4장 5절에서는 이 뜻을 충분히 살려 ‘속량하다(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주다)’로 번역하고 있다.
“때” (‘헤메라’ ἡμέρα)
‘헤메라’는 ‘날(日)’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때’를 위해서는 ‘호라 ’나 ‘카이로스 καιρός’가 주로 쓰인다). 본문에서는 그 복수형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다소 막연하게 느껴지는 ‘때’의 의미보다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의 날들’을 구체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와 같은 원어적 이해는 본문을 새로운 각도에서, 그리고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해 준다. “세월을 아끼라”의 ‘아낀다’는 개념은 그 대상이 나의 것일 때 가능한 말이다. 반면에 ‘사오라’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다시 찾아오라’는 말은 더더욱 그러하다.
성경은 그런 개념에서 시간과 기회를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모든 시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세상을 복되게 하는 가치 있는 시간이고 기회였다. 그 시간을 인류는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타락과 함께 이 세상 자체가 어둠에 속하게 되었다(엡 5:8, 11 참조). 그 결과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이 함께하는 모든 시간은 어둠에, 악한 영에게 속해 있게 되었다.
그래서 본문은 “날들이 악하다”라고 선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아 빛이 된 그리스도인들(엡 5:8)은 여전히 빼앗겨져 본질상 어둠에 속해버려 있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되찾아 와 의미 있는 기회로 만드는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 어둠의 세상 속에서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살아가면 이미 어둠의 영역 속에 있는 모든 시간과 날들은 다 의미 없이 흘러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되는 시간만이 참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지금도 어둠 속에서 흘러가버려지고 있는 시간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은 심각하게 요청한다
송창원 목사(소망세광교회
한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
(엡5:15-18)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한 생애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 사이의 주어진 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생애에 있어 우리의 출생과 죽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의 출생은 온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순간이 결코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그 두 순간의 사이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출생과 죽음 사이의 주어진 한 생애, 그 한정된 세월과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내 생애의 남아있는 그 한정된 시간의 양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내일의 긴 세월의 양을 내세워 게으름 속에 오늘의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짧은 세월의 양을 탓하면서 방종 속에 오늘의 시간들을 아무렇게나 포기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애에 있어 항상 중요한 것은 오늘의 시간이며, 우리의 한 생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우리가 사는 시간의 양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간의 질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실 유한 한 우리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양적 시간을 사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기보다는 질적 시간을 살아야 하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바로 이러한 두 종류의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크로노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자연적 시간으로써 분량에 따라 규정되는 양적 시간을 말하며,
“카이로스”는 목적이 이끄는 의식적 시간으로써 내용에 따라 규정되는 질적 시간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시간 사용과 관련하여 에베소서 5장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을 때에 그 “세월”을 바로 목적이 이끄는 질적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끼라”(엑사고라조)는 말은 “값을 주고 사라”(redeem) 또는 “최상의 것으로 만들라”(make the most)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풀이하여 말하면,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과 시간을 값을 주고 사서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처럼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한 생애, 그 시간과 기회를 그처럼 최상의 질적 가치를 가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엡5:15-18]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첫째, “자세히 주의하라”(15절)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 “자세히 주의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아크리보스”라는 단어에서 영어의 “acrobat” 즉 “곡예사”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세히 주의하라”는 말은 곡예사가 공중에 높이 달려있는 외줄을 타면서 두 팔을 벌리고 아슬아슬하게 몸의 균형을 조절해 가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처럼 자세히 주의하여할 그 이유로 16절에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우리 삶의 균형을 깨뜨리고 혼란 속에 몰아넣으며,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지배하려는 이 시대의 악한 것들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악한 것들이 때로는 지극히 선한 모습으로, 화려한 모습으로, 너무도 매력적인 모습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즐거운 모습으로 다가와서는 마침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습니다. 결국은 우리를 무절제 속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너무 많이 자고, 너무 많이 놀고,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 있는 자들로서 그 모든 것들을 조심스럽게 점검하고 평가하여서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거절할 것은 거절하면서 자세히 주의하여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세월을 아낄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절)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시간 사용에 대해 말하면서 “그러므로...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한 것은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한다는 것을 말씀해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이해하라고 한 주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실 그가 에베소 교회를 향해 그토록 강조하려고 하였던 주의 뜻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뜻을 이해하라고 말하면서 계속 사랑하라고 거듭 당부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도 지상에서의 바울 자신의 남은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타인을 위한 사랑의 봉사(21-26절)에서 찾았습니다. 그처럼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 바울의 생애와 시간들을 항상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의 모든 세월과 시간을 목적이 이끄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청소년 여러분들이 땀과 눈물의 값을 지불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그 시간을 최상의 질적 가치를 가진 시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실 학생들은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세월을 아껴 힘써 공부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한 생애, 그 모든 세월과 시간을 참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고 영원한 가치를 가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치유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며, 새로운 소망 중에 항상 은혜의 새날을 열어갈 수 있게 합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의 생애를 완성하며, 우리의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참으로 보장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의 사랑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자가 진정 세월을 아낄 수 있는 자입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절)고 합니다.
주의 사랑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리 자세히 주의하여 행할지라도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항상 내 안에 거하시는 영화로우신 주 성령께서 나를 친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며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내 안에, 내가 성령님 안에 살아가는 그 비밀스러운 능력을 덧입어 참으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참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온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 섬기는 것이 곧 피곤하고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한 생애 동안 우리도 그처럼 주안에서 오직 사랑으로 섬기는 것만으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마침내 그 어느 날에는 이 땅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 생애가 마감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그 세월, 그 은혜의 순간과 기회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였는가를 질문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서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을 찾으실 것입니다. 때마다 주시는 그 은혜의 시간을 우리의 땀과 눈물로 값을 주고 사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였는지를 질문하실 것입니다.
정해진 나의 한 생애 동안 이 사랑 이루기에 너무도 짧아 너무도 소중한 이 시간들을 영원한 질적 가치를 가진 최상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이 악한 시대에 물들지 않도록 항상 자세히 주의하여 모든 일에 절제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열심히 사랑함으로 배우고 준비하며, 힘써 사랑함으로 자신을 드리며 온전히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항상 능력 가운데 역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환봉 교수(고신대)
세월을 아끼라 (에베소서 5:15-18)
에베소서 5:15-18
"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늘 본문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시간 관리를 잘하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시간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신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살아가야 하며(벧전4:11), 그 영적 에너지는 성령님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적 에너지는 소멸된다. 마치 핸드폰을 사용하면 밧데리가 자꾸 소멸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밧데리를 재충전 해야 하듯이 신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하며 예배를 드려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시간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세월을 아껴야 하는가?
1. 자세히 주의하여 행하며 세월을 아끼라
"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하라"
예수 믿는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세히 주의하여" 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로 인해서 캄캄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주의하여 살피지 아니하면 다른 길로 벗어나며, 걸려 넘어지기 쉽고, 발을 헛딛어 수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러한 장애물들은 어떤 것인가? 오늘 본문 앞 3절과 5절에 보면 "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 . . 5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는 . . .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이 우리에게 영적 장애물이 되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장애물들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캄캄한 밤과 같은 세상에서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8절) 말씀의 빛을 비추면서 음란하고 부도덕한 것들을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런 면에 할애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은 지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으로 가득차 있다. 영화, TV, Video, 신문, 잡지 등 모든 것에 음란물이 섞이지 않으면 인기가 없으며, 화장품이나 옷이나 심지어는 자동차까지도 섹시해야 매력이 있고 잘 팔리는 세상이다. 마음과 생각이 온통 그런 것에 쏠리는 것이 이 세상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하는 탐욕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면에 관심을 쏟고 그것을 즐기기 위하여 시간을 보낸다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그에게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과 주변을 자세히 살펴서 헛된 것에 시간 빼앗기지 않도록 시간 관리를 잘 해야할 것이다.
2. 시간을 악에서 건지며 세월을 아끼라
"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영어로는 "redeem the time" 인데 "값을 치르고 다시 찾는다" 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리켜 "대속자" 또는 "구속자"라고 하는데 그것도 영어로 "Redeemer"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사서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뜻에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Redeemer"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사탄과 악의 영들에게 빼앗기고 있으며, 세속에 빼앗기고 우리의 영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다시 찾아서 성령으로 재충전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시간을 악에서 건져내는 시간 관리를 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술취하듯이 어딘가에 취해서 산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에 중독 되듯이 어딘가에 빠져서 살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그것을 좋은 말로 취미생활이라고 한다. 낚시, 골프, 축구, 야구, 영화, 등산, 도박 등 어딘가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인생을 살 맛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3가지라고 한다(요일2:16). 그러한 것에 정신을 쏟고 그것을 즐기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마음에 머물지 않을 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런 면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시간을 악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러한 악에서 건져내야 한다. 그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3. 주의 뜻을 이해하면서 세월을 아끼라
"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한 때 어린이들에게는 배트맨(batman)이 매우 인기 있었다. 건장한 남자가 박쥐모양의 가면을 쓰고 어깨에는 늘어지는 날개를 달았으며 어디든지 날아다니면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고 억울한 사람의 원수를 갚아주는 영웅같은 존재였다. 어린이 만화나 동화책이나 TV나 Video를 통해서 많이 유행했는데 그것을 보고 즐기던 2살난 남자 아이가 아버지가 사다 준 배트맨 가면을 얼굴에 쓰고 어깨에는 날개를 걸친 다음 양팔을 길게 뻗치면서 2층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 자기도 배트맨처럼 힘차게 날고 싶었다. 하지만 아래로 떨어진 그 아이는 즉사하였다.
그 아이는 자신만만 했다. 그러나 어른들이 볼 때는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 어린 아이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다. 그 어린 아이가 유행하는 배트 맨 스토리에 미혹되어 속았듯이, 현대 크리스챤들은 세속에 그처럼 미혹되어 속아 살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치관을 보실 때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understanding)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주께서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뜻이며, "주님의 뜻을 나의 표준으로 삼아라"는 뜻이고, "주님의 뜻을 나의 생활에 방침으로 삼으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세월을 아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훈련을 쌓아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본문 앞 10절에 보면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주 점검하고 우리의 신앙을 자주 테스트 해서 지혜 있는 자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령충만에 대한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이 문제만큼 모호한 것도 없다고 하겠다.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고 해석이 분분하다.
성령충만에 대해서 1900년대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의 계열에서는 제이의 단회적인 사건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자가 되었지만 성령충만은 신앙생활의 더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 한 것이라고 본다. 그 실례로 성령충만한 신자는 고린도전서 12:4-11에 언급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 방언을 하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모든 은사운동 계열의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런 경향은 초대 교회의 첫 2, 3세기 교부였던 터틀리안(Tertullian)이나 오리겐(Origen)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인의 이중의 경험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 단계는 십계명, 황금률, 그리고 사랑의 계명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라고 보며 제2의 단계로 올라간 크리스천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보다 높은 윤리나 혹은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분리의 이론은 감리교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칭의(의롭다 하심을 얻음)의 단계의 신자 즉 구원받고 의로워지고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된 신자가 있다. 그러나 성화의 단계를 추구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른 신자가 있다고 보았다.
앞서 언급한 오순절파에서는 성령충만을 성령 세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성령 세례의 표는 역시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세례에 대한 언급을 하는 구절들은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13인데 그 어느 곳에서도 여기 본문에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처럼 성령세례를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문에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를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러면 본문이 일반 신자에게 두 번째 높은 수준으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명령한 말씀인가? 또 이 말씀은 단번에 성령 세례로서 충만해지는 것을 가리키는가? 본문은 위의 은사운동 계열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여기 본문은 명령형이다. 그러나 어느 특수한 신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모든 신자에게 주신 명령이다. 역시 문법적으로 현재 시제이다. 그것은 성령을 단번에 충만히 받는다는 것을 배제한다. 지속적인 공급을 가리키며 채워지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성령충만을 시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시작한 대로 계속하여 성령으로 더욱 충만히 되기를 초대한 것이다.1)
그러므로 본문은 단번에 체험하게 되는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성령으로 지배되는 신앙생활의 경험인 것이다.
같은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해석을 달리하는 학자가 있다. 렌스키(Lenski)는 여기서 성령을 신자의 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 영이 영적 기쁨, 행복의 충만으로 해서 시와 찬미와 말로서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경우에 우리의 영이 영적인 표현으로 흘러넘치기 위해 채워져 있는 상태가 된다.2)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충만 할 수 있는가?
지배적인 견해는 신자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마음을 비우고 모든 개인적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축복하실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죄를 회개해야 하며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 노력과 힘으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축복하시도록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이 있다. 거기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성령은 모든 신자가 받았다. 그것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이요(고전 12:4),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롬 8:9)
그렇다면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받지 못한 성령을 내게 보내달라고 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되며(엡 4:30),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한다(살전 5:19).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해선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 성령의 감동하심, 성령의 역사하심에 내가 순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악독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고 서로 인자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 같이 해야 한다(엡 4:31-32).
이렇게 주님께 순종하며 그의 명령을 지켜 나갈 때 그의 임재(성령)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하며(요 14:15)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나가면 성령으로 충만케 될 것이다.3)
그러면 성령 충만한 성도의 삶의 특성이 무엇인가? 그는 겸손하며 사랑 충만, 기쁨 충만, 감사 충만한 삶을 산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이런 열매는 우리의 인격 전체가 성령에 의해 지배될 때 가능해 진다.
그래서 찰스 하지(C. Hodge)는 성령이 그의 생각, 느낌, 말 그리고 행동을 지배할 때 그것이 성령충만이라 하였다.4) 이렇게 성령이 충만해지려면 지속적으로 거듭하여 성령으로 채워져야 한다. 성령님을 위해 우리는 늘 마음을 연 자세가 되어야 한다. 새 영어 성경(NEB)에서는 성령이 너희를 채우시게 하라고 번역하였다.
주
1. James Montgomery Boice, Galatians(E.B.C. Vol 10), p.72
2. R.C.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Paul's Epistles to the Galatians, Ephesians and Philippians
(Augusbrug, 1961), p.619
3. Robert H. Stein, Difficult Passages in the Epistles, pp.46-52
4. C. Hodge, Ephesians,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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