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영적 전쟁(엡 6:10-17)
기독교인의 가정과 사회 윤리에 대해 진술한 바울은 본 단락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싸워야할 싸움의 대상이 무엇이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대비가 필요한 가에 대해서 설명해 가고 있다.
인간의 삶은 전 생애가 어찌 보면 싸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생을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 심히 치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은 학습경쟁 속에 살아가야 하고, 공부하는 과정을 마치면 직장을 취득하기 위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직장에 입사하였다하여 그저 편안 무사한 삶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경쟁은 계속된다. 즉 살아가기 위한 생존 경쟁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쉴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러한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다른 싸움을 싸워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영적인 싸움이다. 왜 성도들이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하느냐의 원인을 돌아보면 일차적으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에 오염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전적 타락한 상태로 출생하였기에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싸움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울러 성도들이 싸움 없이 믿음을 승리할 수 없는 것은 타락한 천사, 곧 사단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향한 도전을 계속해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하여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매우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 나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중생 이전에는 그럴 이유가 없었지만 중생 이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하기 때문에 그에 수반되는 수많은 조건과 상황이란 대적들이 믿음을 방해하고 가야할 성도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까닭이다.그러므로 바울은 본 단락에서 성도들을 향해 우리가 사워야 할 싸움이 무엇이고,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1. 성도들이 싸워야 할 싸움의 대상과 관련한 교훈
바울은 10절에서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라고 이야기 하였다. 여기서의 ‘종말로’란 주님 재림과 관련된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란 뜻으로 에베소서의 집필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권면한다는 취지로 사용한 표현이다.
그리고 강건해야함을 이야기하면서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는 성도가 강건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것이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임을 전제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즉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라는 것은, 성도가 주안에 있을 때 그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고, 반대로 주님의 능력으로 힘입기 위해서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울러 이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강건이 육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임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11절에서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즉 성도들이 강건해 져야 하는 이유는 마귀들과 대적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다. 이는 10절에서 언급한 바, 어떻게 해야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는 것인가에 대한 비유적 설명이다. ‘전신갑주’에 해당하는 ‘파노플리안’(πανοπλίαν)의 원형 ‘파노플리아’(πανοπλία)는 ‘모두’나 ‘전체’란 뜻의 ‘파스’(πᾶς)와 ‘병기’나 ‘갑옷’ 등으로 번역되는 ‘호플론’(ὄπλον)의 합성어로서, 군인이 전쟁에 나가면서 자신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입는 갑옷과 적을 무찌르기 위한 공격용 병기까지 총칭한 단어이다.
따라서 한글개역성경에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전신갑주를 갖추라는 말로 번역함이 좀 더 본문에 적합하다.군사들이 전쟁에 나가려면 무장을 갖추듯이 성도들이 영적인 전쟁, 곧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와 비견되는 영적 무장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어간 진술은 성도들이 싸워야 할 실제적인 대적이 누구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이에 대해 12절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진술하였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할 수 있다.
1) 성도들의 싸움은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여기서 ‘혈과 육’으로 번역된 단어는 ‘하이마 카이 사르카’(αἷμα καὶ σάρκα)이다. ‘혈’을 가리키는 ‘하이마’는 ‘피’나 ‘피 흘림’, 또는 ‘피 흘리다’, ‘살해하다’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며, ‘육’에 해당하는 ‘사르카’는 ‘살’이나 ‘몸’, 영혼과 반대되는 ‘육체’ 등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에 대해 옥스퍼드원어성서대전에서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처럼 연약한 성정을 가진 동료 인간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설명을 하였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랜드종합주석도 동일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혈과 육이 단순히 사람을 가리킨 것이라면,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에서 그곳 사람들을 향해 강한 어조로 저주를 선포하고,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내내 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싸움으로 일관 하셨는가? 따라서 이는 같은 사람들 간에 싸움을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의 표현이 아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31, 32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본문의 ‘혈과 육’이란 주님의 이 말씀과 동일 개념으로서 육신의 것을 추구하고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이방인들과 같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런 것을 위해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왜 성도는 육신의 것을 위한 싸움을 해서는 안 되는가? 바울은 로마서 8장 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주님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뜻이 육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러기에 육신의 것을 목적하게 되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중생한 성도는 필연적으로 일생동안 싸워가야 하는 싸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육신이나 세상 것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기서 가르치는 일차적인 교훈이다.
2) 성도들이 싸워할 주적과 관련된 교훈
즉 성도들이 싸워야할 주적에 대해서는 네 가지로 이야기 하였다. ‘정사’,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 이는 모두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영적 세력들을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던 단어들로 사단 마귀에 속한 것들을 총칭한 표현이다.
대부분 주석들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성도들이 싸워야할 대상이 악령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성도들이 악령들과 직접적이거나 물리적인 싸움을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육신을 가진 인간과 영적존재들인 악령과는 몸을 부딪치거나 물리적인 것을 이용한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싸움의 본질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사단에 의해 오염된 우리 인간의 본성
즉 사단에 속한 사상과 죄의 본질이나 본성을 가리킨 표현으로 이해함이 합당하다.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최초 조상인 아담이 사단의 궤계에 넘어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실패함으로 인하여 범죄 하였고, 그 죄의 속성이 이미 인간들의 본성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죄의 본성에 대하여 바울은 자주 ‘옛사람’으로 표현하였다. 골로새서 3장 9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라고 보도한 바 있다. 또 로마서 7장 18절에서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라고 표현한 바도 있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언급함에 있어서는 ‘육신의 생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살펴본바와 같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지적한 싸움의 대상에 대하여 ‘정사와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란 표현을 썼지만, 실제 그 싸움의 상대는 바로 자기 안에 사단으로 말미암아 오염된 죄의 속성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이 싸움의 일차적인 상대는 외부적인 어떤 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의 내부적인 문제인 것이다.
(2) 사단이 뿌려놓은 세속적 사상과 문화
사단은 우리를 죄에 오염시킨 것으로 역사를 끝내지 않았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방법과 수단들을 동원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방해한다. 세상의 각양 좋은 것들을 통해 미혹하기도 하고, 세상에 각종 아름답고 화려한 것들로 유혹을 하기도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친 주님에게 사단이 육신의 약식이나 세상의 영광 등을 가지고 시험을 하였듯이 이 땅의 것, 육신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방해를 하는 것이다.
원시 구속사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로 아내를 삼은 것 역시 그 이면적 구조는 사단의 유혹에 따른 것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광야에서 미디안 여인들과의 간음과 우상숭배 역시 이면적으로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도 사단은 각양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세상화 하려고 부단히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자체가 온통 물질중심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도 다 이러한 사단의 영향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을 동원하여 가혹한 억압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려하기도 한다. 또 세상 영광과 쾌락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가치관, 사상, 문화 등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도들이 싸워야 할 실제적인 싸움의 상대는 사단에 속한 악령들과 그들에 의해 조장되는 세속 사상과 문화, 세상 것들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싸움의 승리를 위해 준비해야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교훈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을 언급한 바울은 13절에서 다시 전신갑주를 취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14절부터 17절에서 그 전신갑주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성도가 무장해야 할 전신갑주에 대해서는 모두 여섯 가지를 보도하였다.
1) 진리의 허리띠
전신갑주에 대해 맨 처음 14절에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라고 하였다. 허리띠는 본래 민첩한 행동을 위해 옷을 간추려 입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는 겉옷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통으로 된 옷이었다. 그러기에 활발한 운동이나 민첩한 행동을 위해서는 옷을 위로 올려 허리띠로 동여매야만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유월절 음식을 먹을 것을 명하시면서 허리띠를 동여매고 먹을 것을 말씀한 바 있다. 이는 역시 긴 여행을 위해서나 하나님의 명이 있을 때 민첩하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준비 과정이었다. 특히 전쟁을 위한 군사들에게 있어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매는 일은 목숨과도 같은 중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옷이 치렁치렁하여 행동이 거추장스럽다면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확률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허리띠에 비교하여 ‘알레데이아’(ἀληθίᾳ)란 단어를 썼다. 이는 ‘진리’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성도가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해 가장 1순위로 준비해야할 무기이며 무장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모두 109회 쓰였는데 그중 76회가 진리로 번역되었다. 그랜드종합주석이나 옥스퍼드원어성서대전에서는 ‘진리’ 보다는 ‘성실과 정직’으로 이해함이 합당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곧 문자적 의미 그대로 진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고는 성실과 정직이 의미가 없고, 또 진리가 없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실과 정직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즉 성도가 믿음의 승리를 위한 싸움에서 가장 먼저 무장해야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인 것이다.
2) 의의 흉배
의의 흉배란 병사들의 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슴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가슴에 차는 갑옷을 가리킨다.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이 갑옷 역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적의 공격에 한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영적 무기로는 ‘의의 흉배’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의’로 번역된 ‘디카이오쉬네스’(δκαιοσύνης)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택한 백성들에게 입혀진 칭의를 가리키는데도 사용되지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살아가는 삶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 야고보서 2장 24절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의롭다’는 말로 사용된 단어가 본문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의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받게 된 ‘칭의’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해선 안 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과 행위를 가리킨 표현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칭의는 주님의 대속으로 거저 주어지는 은혜이지 사람이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준비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즉 성도가 믿음의 승리를 위해서 두 번째 준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가 진리를 깨닫는 것이었다면 역시 순서적으로 깨달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은 그 다음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 틀림이 없다.
3) 평안의 복음의 신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를 언급한 다음 바울은 15절에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하였다. 발에 신는 신 역시 전쟁을 위한 병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무장중의 하나였다. 민첩한 행동이나 오랜 행군 등을 위해서는 좋은 신발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에 대하여 ‘평안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평안의 복음’이 영적 전쟁을 위해 성도들이 준비해야할 중요한 무장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로 택한 백성들에게는 구원이 불가항적 은혜란 사실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성도들은 어떤 가운데서도 그 심령이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도가 영적 전쟁을 하면서 이 부분이 확실치 않으면 그 마음은 평안이 아니라 불안에 떨 수밖에 없고, 그러한 불안한 가운데서의 싸움은 결코 승리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면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을 말씀하셨다. 그중 가시떨기 밭과 관련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다.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세상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말씀이 결실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철을 녹여내는 용광로 속에 던져지면서도 그렇게 담대하게 이야기하였다.
(단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답변이다. 이는 그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 그로부터 있게 되는 마음의 평안이 가져다주는 담대함과 용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평안의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가리킨 것이며, 이에 대한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어떤 환란과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믿음의 방패
16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질 것을 이야기 하였다. 그래야만 악한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방패는 조그마한 것이 아니라 대개 길이가 120cm 가로가 70-80cm 되었다고 한다. 즉 전신을 다 가릴 수 있는 긴 장방형의 방패였다.
이 방패는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적들의 화전, 곧 불을 붙여 쏘는 화살을 말하는데,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에 매우 중요한 무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처럼 적들의 막강한 화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믿음의 방패’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믿음’에 대해서 대부분의 주석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을 가리킨 표현으로 이해한다. 올바른 해석으로 여겨진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해 주심과 도와주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역시 성도들에게는 꼭 필요한 전쟁의 도구인 것이다.
성도들의 결심이 약해지고 시험에 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현실 속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임이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일 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 하지만,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나를 도우시고 나와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즉 신전의식이 살아 있을 때 악한 자들의 어떤 도전이나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5) 구원의 투구
투구 역시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구원’이라고 하였다. 평안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완전성, 즉 구원에 대한 확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구원의 투구는 구원에 대한 확실성을 초월하여 내세에 대한 소망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차 이르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하고도 간곡한 소망은 실제 모든 악한 것들의 궤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믿음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6) 성령의 검
성도가 영적인 싸움을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해야할 것에 대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다. 진리에 대한 문제를 제 1의 무장으로 언급하였는데 마지막에도 ‘성령의 검 곧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깨달은 진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현실에서 활용되어지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검이 직접 적을 대항하는 무기라면 성도에게 있어 진리는 곧 적들을 대항하는 검과 같은 것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진리는 깨달은 것만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이를 삶의 현장에서 적절하게 사용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이를 성령의 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령은 마지막 구원에 이르는 순간까지 성도들을 도우시는 역할을 감당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도 성령의 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한 것은 성령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성령하면 무조건 기사나 이적들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란 사실을 본문은 분명히 하고 있다.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 말씀을 갖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깨달은 진리를 적절히 활용하여 사단의 도전을 물리쳐야만 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실제적인 싸움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외부의 적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의 검, 즉 하나님 말씀의 활용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칼질이어서는 안 된다. 가장 우선하여 자기를 향한 칼부림이어야 한다. 비슷한 개념에서 주님은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어내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수 있을 것으로 말씀하셨다. 우리가 믿음의 승리를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가장 먼저 적용시켜 대항할 주적은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자기를 먼저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만사가 다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0-16) 그림
[에베소서 6:10-16]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로마 군병의 사진
전신갑주를 입어라
(엡6:10-18)
그리스도인의 삶이 놀이터가 아니라 사탄과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그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면, 당신의 적을 알고 그를 공격하기 위해 힘과 장비를 갖추고 또한 그의 공격을 막을 보호장비가 있어야 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0-18)
그럼 그리스도인 군사의 여러가지 장비들을 살펴보고 나서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갑옷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진리의 허리띠
사탄은 언제나 거짓말장이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로 사탄을 대적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흘러내리는 옷을 묶고 물건을 허리에 차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허리띠를 띠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삶 가운에 모든 것을 꽉 붙잡고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요삼4절).
허리는 활동과 기동성과 지휘의 근원이다. 허리를 다친 군사는 별로 쓸모가 없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적에게 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삶에 스며드는 어떤 속임을 허용한다면 우리는 우리 위치를 약화시켜 그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의 허리띠는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방어하는 무기이다. 신자가 그의 삶에 진리의 장비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사탄의 공격에서 그를 보호할 것이다. 이 장비가 사탄의 공격을 예방하지 못하지만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입지 않게 신자를 보호해 줄 수 있다.
의의 흉배
갑옷에서 흉배는 목에서부터 허벅다리 위까지, 병사의 상체 앞 부분을 덮는다. 흉배는 중요한 내장 기관들을 보호한다. 바울을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받는 그분의 의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사탄은 고소(참소)하는 자로서 우리가 우리 죄를 기억하도록 하여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그분의 의를 전가받고 우리 것으로 삼게 됨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전가된 의와 분여된 의를 구별해야 한다. 죄인이 전가되며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신자가 주님과 동행하고 성령께 굴복할 때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분여되고 그는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
모든 신자는 칭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칭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주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일단 하나님이 당신을 의롭다고 선포하셨다면 당신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확고하게 서게 된다. 그러나 당신의 상태, 곧 당신의 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 굴복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생활도 변한다.
흉배는 가슴을 덮는다. 이 점이 우리의 감정은 그리스도의 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탄이 우리를 고소할 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사탄은 종종 우리를 중상 하고 비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을 이용할 것이며 역습을 하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이 화전들은 우리의 중요한 기관들을 명중시키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의지하라. 당신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완성하신 사역을 의지하라. 당신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졌다"(엡1:6)는 사실을 깨닫고 당신에세 전가된 하나님의 의는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라.
사탄의 공격
고대 유대인들은 심장을 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가슴은 곧 그의 마음이요 생각이며 사상인 것이다. 사탄은 성도의 마음을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이 부분이 의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의란 곧 칭의를 의미하고 있다. 성도를 비방하고 참소하기를 좋아하는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우리를 비방하여 마음에 상처를 안겨다 준다.
우리는 범죄한 자로서 본성적으로 불의 가운데 살았던 자들이다. 그래서 의인은 없고 한 명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의와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내가 누구보다 더 낫다"는 비교의식과 교만이 사람을 더욱 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들의 의는 하나님의 기준에 도저히 이를 수 없고 사람 속에서는 전혀 의를 찾을 수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의를 선물로 주셨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 속에 그의 의를 심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러므로 이제 사탄이 우리를 정죄하고 비방하는 화살을 쏘아 우리 마음에 절망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자포자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롬8:33,34) 하신 말씀을 힘입고 하나님의 의를 흉배 삼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함을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도로서 의로운 삶을 힘쓰면서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다만 "예수님 때문에" 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가슴에 담은 의는 나의 의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이다.
평안의 신
로마 병사들은 안정성과 기동성을 위해 징을 박은 신을 신었다. 당신이 어떻게 잘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당신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결정한다. 만일 전사가 발을 헛디딘다면 그는 싸움에 질 것이다. 견고한 발판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적을 대할 때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또한 그는 비록 원수 사탄이 전략을 바꾼다 할지라도 사탄의 다양한 공격에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에 기초하여 서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고전15:3-5).
바로 그리스도의 이 승리가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 우리에게 안전하고 굳건한 발판이 된다. 우리가 어디로 걸어가든지 우리는 승리의 발판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예비한 것(엡6:15)이라는 단어는 장비를 갖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가 마귀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 있는 신자는 싸울 수 있다. 그의 구세주는 이미 승리하셨으며, 그는 그 승리에 기초해 서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 병사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수행한다. 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탄과 싸운다. 사탄은 세상에서 죄와 불안과 분열의 원인이다. 그리스도인 병사는 사탄을 대적함으로서 평화를 추구한다. 복음은 평화의 메시지지만, 사탄에 대해서는 선전 포고이다.
평안의 복음
영적 싸움터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이런 준비가 있어야 한다.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을 신고 있어야 한다. 평안의 복음은 '평화' 또는 '화해'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평화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리에서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의 복음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주안에서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만나게 하였다.
이제 평안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성도들은 이웃과의 하나됨을 위하여 '화해'와 '평화'로 준비된 신을 신고 행동하는 화해자 들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신발은 행동을 의미한다. 발이 편하면 활동하기에 수월하다. 하나님과 화목함을 누리고 평안함으로 살아 가는 사는 성도는 이웃과의 화목을 이루어나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사탄이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려는 것 이다. 가정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교회의 질서를 혼란케 하며 성도간의 사랑을 깨뜨려 결국에는 갈리고 나뉘게 함으로써 복음전파를 의도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사탄은 십자가의 능력을 무의미하게 하려고 온갖 중상과 모략으로 평화를 깨뜨리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간질하고,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은 모두 사탄의 궤계이다.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들이 신어야 될 신은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이다. 곧 화해자의 신이다. 우리들이 가는 곳에 불화가 물러가고 화해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세상 전쟁에서는 휴식도 있고 휴가도 있어서 신을 벗고 쉴 수도 있지만, 영적 전쟁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날이 없다. 주님 오실 그 날 에 완전한 승리를 선포하시는 그 날까지 사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언제나 착용하고 있으면서 구두끈을 단단히 조이고 준비해야할 것 은 바로 '평안의 복음'이다. 이 신을 신고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영적 군사로 살아가길 바란다.
믿음의 방패
로마시대에 쓰던 방패는 세로 120, 가로60센티 크기의 나무로 만들어 졌다. 그 위에 가죽과 금속을 입혔다. 이 방패는 적이 쏘는 불화살(화전)을 피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움직이는 성벽 역할을 했다. 이 불화살을 끄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의 믿음이다. 당신이 그분을 신뢰하는 만큼 당신은 그분이 이루신 승리를 함께 누릴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쏘는 화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심과 두려움과 염려와 같은 온갖 잡념이라고 생각해본다. 문득 우리 마음에 무서운 생각이 엄습할 때 때때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물론 사탄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임은 사탄에게 있다. 만일 우리가 이 화전을 끄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다 타 버릴 것이며 우리는 그 불의 파괴력으로 고통당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 말씀에 매달리는 것이 이 화전들을 소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 병사는 반드시 성경교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믿음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의 어떤 신조에 대한 믿음이니 믿음에 대한 것들도 이 화전들을 소멸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탄이 화전을 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화전이 불을 붙이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중요한 일은 즉시 화전을 소멸하는 것이다. 당장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말씀에 기록된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믿으라. 그렇지 않다면 그 불이 번지기 시작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거기에 기름을 붓는다면 그 불은 당신이 끌 수 없게 번질 것이다. 당신의 감정은 자극되어 화를 낼 것이고 머지 않아 사탄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사탄의 불화살
우리 삶에도 무서운 공격이 언제나 있다. 사탄은 성도들에게 의심, 불순종, 배반, 탐욕, 두려움, 절망이라는 불화살을 쉴 틈 없이 쏘아댄다. 순전한 믿음을 빼앗아 가고 부패시키려는 음란이 어느 곳에 가든지 가득 차있고, 어둠과 타협하게 하는 유혹이 하루 종일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향해 불화살을 쏘아댄다. 이런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잘 말씀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 믿음이 이 세상의 악한 풍조와 사상을 이길 수 있고 세상에서 성도가 당하는 핍박과 오해와 누명과 조롱을 막을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작은 핍박에도 넘어지고 만다. 조그마한 오해와 누명을 참아내지 못한다.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조롱을 이기고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었고, 요셉 역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타국에 종으로 팔려 가서도 꿈과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승리의 삶을 살았고,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 궁전에서 누리는 세상 쾌락보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고난 당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어떤 사람은 핍박과 고난과 비난을 받아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 믿음이 있었기에, 어떤 사람은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용감하게 순교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여러 번 "하나님은 나의 방패" (시18:2) 라고 노래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피난하는 것이다. 사탄이 의심과 낙심으로 공격해 올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도록 하는 것이 이 믿음이며 유혹을 당할 때도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도록 하는 것이 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방패를 굳게 붙들고 다가오는 사탄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기 바란다.
구원의 투구
영적 전투에서 투구는 구원의 확신을 의미한다. 머리는 사고하는 부분이다. 모든 행동은 이 머리에 의해 조종된다. 그리고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노출이 잘 되어 적의 공격을 받기 쉽고 작은 충격에도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부위이다. 따라서 머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사탄의 주요 공격대상이기도 한다. 사탄은 온갖 거짓된 이론과 사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지성을 공격한다. 사탄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가지도록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탄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구원의 투구를 어떻게 쓸 수 있는가?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 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는 말씀을 확실히 나의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 기 바란다. 그리고 죄와 사망과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약속의 말씀들을 아멘으로 받기를 바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라고 하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8에서는 구원의 투구를 '소망의 투구' 라고 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얻은 것이며 주님 께서 오시는 그 날 완성될 것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이다. 전쟁에 나간 군인이 승리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비록 지금 밀고 밀리는 접전이 벌어질지라도 기어코 승리의 그 날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소망이 군인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다.
이 구원은 나의 노력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수양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거저 받는 선물 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하셨다. 이 구원을 확신하며, 죄 용서받은 믿음과 기쁨으로 살 때에 우리의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가 씌워져 있는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영생을 보장하신다. 나의 머리에는 예수의 보혈을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투구가 있는가? 맨 머리로 지내면서도 투구가 씌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는 않는가? 구원의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승리의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소망의 투구
우리는 이 구원의 투구를 데살로니가전서5장8절 말씀과 확실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바울은 여기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갖고 있는 소망을 언급하고 있다. 사탄은 종종 우리를 대적하기 위하여 낙담과 절망을 무기로 사용한다. 우리가 공격받기 가장 쉬운 때는 바로 우리가 낙담할 때이다 우리는 낙담해 있을 때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온갖 유혹에 빠지기 쉽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소망이 마음을 방어할 때 사탄은 우리를 낙담시키지 못한다.
낙담은 적의 손에 있는 치명적인 무기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낙담하여 하나님께 자신들을 죽여 달라고 간구하였다. 시편의 시들은 다윗이 낙담 속에 깊이 빠졌으나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할 수 있었던 여러 경우들을 기록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3:5).
우리의 마음과 소망이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다면 헌신한 신자의 삶에 파고드는 절망과 낙담은 당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투옥당하여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로마에 함께 있던 많은 신자들이 바울 곁을 떠났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소망으로 자기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성령의 검
갑옷의 다른 부분들은 방어를 위한 것이었는데 성령의 검만은 공격하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
하나님의 말씀, 곧 영적인 검은 인간이 휘두를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검과는 다르다. 물질적인 검은 사용함에 따라 무디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예리하다. 물질적인 검은 육체의 힘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영적인 검은 그 안에 생명과 능력이 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사탄을 만나 유혹을 받고 그를 물리칠 때 성령의 검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구약성경을 인용하셨다.
마틴 루터는 이 교훈을 잘 알아 위대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지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데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하나님의 말씀
사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이 말씀의 칼은 성령을 통하 여 우리에게 주어지고 성령께서 이 칼을 날카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로마군사들이 사령관으로부터 검을 받아 충성을 맹세하고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악한 세상에서 적과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승리의 필수적인 요건은 이 말씀의 칼이 예리하고 강력하도록 성령을 통해 날마다 갈고 닦는 것이다. 만일 칼 이 녹이 슬어 깨어지고 둔한 검이 된다면 그리하여 아무 것도 자를 수 없고 부서져 버린다면 그것은 곧 패배와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부르심을 받은 십자가의 군사들이다. 한가하게 세상 즐거움에 젖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의 검을 한 쪽 구석에 방치하여 녹슬게 하면서 무책임하게 인생을 허비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고 있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읽고 들으며 공부하시기 바란다. 그 말씀을 암송하시기 바란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신 것처럼 (마4:1 이하) 말씀의 검을 즉시 빼어 사용할 수 있도록 날마다 묵상하며 사용하길 바란다.
기도의 갑옷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8).
우리는 기도로 갑옷을 입고 성령으로 기도한다. 우리 자신들은 아침 묵상 시간이 갑옷을 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드린 후 성령이 우리를 충만케 채워 주실 것을 구하고 믿음으로 갑옷을 차례차례 입는다. 바울은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종류 네 가지를 기술하고 있다.
1. 꾸준한 기도
곧 무시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날을 시작하면서 몇 마디 경건한 말을 중얼거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하는 기도는 결코 사탄을 이기지 못한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눅18:1).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이 말씀은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기도를 끊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기도와 신뢰의 자세를 계속해서 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2. 조화있는 기도
곧 모든 기도이다. 그럼 모든 기도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모든 기도는 예배와 경배와 죄의 고백과 간구와 감사를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어떤 것을 구하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조화있는 기도의 참된 축복을 놓치고 말 것이다. 오직 구하기만 하는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일 수 있다. 사탄을 이기려면 모든 기도가 필요하다.
3. 성령의 권능을 입은 기도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이 말씀은 성령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 계속해서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기도는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정욕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머지 않아 포기할 것이고 사탄이 승리할 것이다.
4. 깨어 있는 기도
병사는 적에게서 눈길을 땔 여유가 없다(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잡고 기도하는 자세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뜨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든 채로 기도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하신 권고 였다(막13:33). 마귀가 하고 있는 일을 경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기도할 때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이러한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군대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장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 서서 버티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복음의 갑주를 입고 기도로 갑옷을 차례차례 입으라.
사탄을 공격하는 법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 운동이 사회 전체에 일어났던 기록들을 여러 가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부흥 운동이라 하면 일련의 집회로 생각하기 쉬운데 진정한 부흥 운동은 전 국민에게 파급되어 영향을 미쳤을 때를 말한다.
어느 지역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충분히 많은 수가 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고 더불어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지역에 축복을 부으실 만한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교회에서 퍼져나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다.
1. 지역사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이 영적 전쟁을 함으로써 지역사회를 위해 더욱더 기도하도록 인도하신다. 그 지역의 상황과 특성에 따른 하나님의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과거의 죄와 습관들이 악의 잔재물로 남아있는 곳에서는 그 지역이나 건물에 대한 영적인 씻음이 필요하다. 유령이 나오는 집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몰아내야 하는 곳들이 많이 있다.
2. 전도하는 것
전도는 영적 전쟁과 분리될 수 없다. 어둠을 몰아내는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은 불을 켜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어둠 가운데 불을 켜는 것과 같다. 교회가 받은 부르심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3. 의로운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
모든 역경을 겪을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리어 의로운 행위로 반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고 마귀를 격퇴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원수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닥치는 역경에 대해 의로운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
4. 포로를 자유케 하는 것
때때로 귀신들린 사람과 정면 대치하는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실 때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더 많은 속박을 만들어 가는데 이것들을 쫓아내 자유케 해야 한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가령, 귀신의 세력이 들어와서 고질적인 질병에 걸리는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악령들을 쫓아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도 고쳐야 한다.
5. 나누어 주는 것
사탄은 재정에 관심이 많다. 사탄은 사람의 이기심이 돈에 의해 조장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 실종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것이다. 탐욕은 바로 사탄의 경제적인 궤계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근간이 되는 것을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나눠주는 정신인 것이다. 사람이 나눠주면 이기심으로 사람을 옭아매려는 사탄의 시도가 완전히 좌절되고 만다. 단지 한 사람의 주는 행위 이상으로 마귀의 역사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나눠주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순환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6. 연합하는 것
연합은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이며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다. 마귀는 연합을 싫어한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분열의 씨를 뿌리고 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깨어지는 경우, 우리는 마귀를 크게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리는 언제나 양을 잡아먹기 위해 언제나 양떼를 흩어놓고 잡아 먹는다.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마귀에게 문을 굳게 닫아 놓게 되는 것이다.
7. 섬기는 것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 이길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전쟁과 재난과 다른 비극적인 일로 재산과 건강과 집을 잃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와 있다면 우리는 마귀의 일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단지 사회적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이며 영적 전쟁과 직결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절망 속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죽음으로 몰아넣는 멸망시키는 자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굶주린 자를 먹이고 집 없는 사람들과 난민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영공을 통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원수 마귀와 대항하는 효과적인 영적 전쟁이다.
8. 찬양을 통한 것
성경은 어둠의 세력을 무찌르는 찬양의 역사에 대해 많은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성경적인 찬양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천사들이 전투를 벌이고 매상황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와 설교에 헌신하는 이유는 축복을 받는다거나 충족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통해 우리는 어둠의 왕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며 결박할 수 있다.
9. 입술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
우리의 입술로 마귀를 꾸짖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입술로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공격을 받아친다.
10. 마지막 무기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승리자이다. 우리가 끈기를 가지고 견디어 내면 마귀는 꼼짝 못한다. 우리가 인내하는 사람인 줄 마귀가 안다면 이내 자기가 포기하고 만다.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영적 전쟁은 삶이다. 그것은 진리를 품으면서 원수를 분별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매일의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처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가지 않는다. 우리가 원수 마귀를 질책하지 않는다면 마귀는 질책당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있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악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영적 전쟁은 기독교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 가운데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포괄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영적 전쟁의 용사가 된다는 말이다. 영적 전쟁의 용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속적인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 http://blog.daum.net/h10680
마지막 전신갑주
(엡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이 땅이 사탄과의 영적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아담을 범죄 하게 한 이후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때에도 사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방해자 역할을 하였다(마 4:1; 눅 22:3). 그런 사탄은 마지막 때에 천사에 의해 무저갱에 가두어질 때까지 기승을 부릴 것이다(계 20:1-3).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이 사는 이 시대를 '악한 날' 곧 사탄이 지배하는 때라고 부른다(엡 5:16).
이런 악한 날을 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영적 전신갑주를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라는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모두 여섯 가지이다(엡 6:14-17). 이들 가운데 다섯 가지는 방어용 무기이지만 마지막 '성령의 검'은 공격용 무기이다. 아무리 방어를 잘 한다고 하여도 공격을 하지 못한다면 마지막 승리를 얻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승리를 위한 최후의 결정적 무기이다.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마 4:1-1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악한 날에 우리의 대적 사탄을 능히 제압하여 승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바르게 서기 위함이다.
전자가 외부의 적인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때로 보이는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대승을 거두게 하셨다. 그러나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되는 금덩어리 하나'를 숨겼다(여 7:21).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음도 불구하고 이기적 탐심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여리고보다 훨씬 작은 아이 성 점령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갖추고 사탄과의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내적 싸움이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일곱 번째 무기로 '기도'를 제안하고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엡 6:18).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활성화시켜 사탄을 능히 대적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영적 전쟁을 치룬 후에 지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우리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마지막으로 갖추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할 수 있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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