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예루살렘 여행(갈2:1-10)
바울이 본장에서 자신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기독교 초창기의 설교와 교회 설립에 있어서 처음에 유대교인들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들과 이방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교인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은 제의적 율법에 대한 존경심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 그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방인들로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였고 기독교 자체만으로 완전히 순수한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것이었지만 아직 매장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율법을 존중하는 일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였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 기독교를 고수하였다. 이제 본장에서 그는 그와 다른 사도를 사이에 일어났던 일, 특히 그와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차 여행과 또 거기서 그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1-10).
Ⅰ. 그가 여행하던 당시의 주변 환경. 이에 대하여 그는 특별히 다음 사항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 방문 시기. 그것은 "십 사년 후"였었다. 그런데 십 사년 후란 그의 일차 방문이 있은 후(1:18) 십 사년을 말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 그가 회심한 후 또는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십 사년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같이 유익한 인물을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그의 사업에 종사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의 실례이다. 그리고 그가 이처럼 오랫동안 사도들과 헤어져서 그들에게 복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도 없이 내내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순수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종사하였다는 것은 그가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지녔다는 증거였다. 만일 그가 그들보다 열등하였고 그의 가르침이 그들에 의하여 부인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그들이 그를 불러다가 시험해 보았으리라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
2. 여행에 같이 동행한 인물들. "그는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갔다." 만일 본문의 여행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여행과 같은 것이었다면(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왜 바나바가 그와 함께 갔는지 이유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바울의 동무가 되고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에 협조자가 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도도 바나바와 같은 역할을 띠고 바울을 수행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디도를 바울이 데리고 간주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계속해서 전하고 있는 교훈을 주장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디도는 이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설교자가 되었지만 그는 본래 이방인으로 태어났고 무할례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디도를 동료로 수행케 함으로 유대적 기독교인들이 가르침이나 관습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한 것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다. 즉 이로써 그는 자신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의 무용성을 증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인정하며 사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다.
3. 방문의 이유. 그것은 그가 방문에 관하여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고 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자신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 출두하라는 사람의 소환을 받아서 간 것이 아니었고 하늘로부터 특별한 명령과 지시에 있어서 특별한 신적인 지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권이었다. 그렇다고 우리도 사사건건 그러한 지시와 명령을 기대해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본문의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가 시작하려고 하는 모든 중대한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 앞에 갈 길이 명백히 나타나질 수 있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며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함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Ⅱ. 바울은 우리에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행한 내용을 설명해 준다.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행동은 그가 조금도 다른 사도들보다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권위나 자격이 모든 면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동등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1. "그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대 사도의 신실함과 신중함을 엿보게 된다.
(1) 그의 신실함. 그는 그들에게 그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내내 전하여 왔고 또 지금도 전하기로 다짐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하여 또한 유대주의의 온갖 혼합 요소를 벗어난 순수 기독교에 대하여 자유롭고도 조리있게 설명을 하였다. 그는 이 교훈에 대한 말이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함을 안겨 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주장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것을 자유롭고도 우호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 앞에 진술하였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겼다. 그러면서도,
(2) 그는 소란을 야기시키지나 않았을까 하여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하였다. 그는 그의 복음을 제출함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보다 사사로이 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또한 되는 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유명한 자들" 곧 사도를 본인들과 유대적 기독교인들 가운데 지도적 인물들에게 그의 복음을 제출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믿기는 하나 율법에 열심있는 허다한 무리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행 21:20). 그리고 이렇게 주의한 이유는 "그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해서였다." 즉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동요시킴으로 그의 과거의 수고의 성과를 경감시켜 버리거나 또는 그의 미래의 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교의에 관한 견해 차이보다 복음의 진척을 방해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이러한 교리들이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논쟁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킬 때 복음 증거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의 목적은 그의 교훈이 가장 큰 권위를 지니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인정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받고자 하는 데 있었고 또 그들에 의해 인정받으면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소요를 피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을 모든 교회에 공개하지 말고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사도의 행동은 우리 모두, 특별히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신중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쳐 주며 또한 모든 일에 있어서 성실하게 조심스럽게 처신할 것을 가르쳐 준다.
2. 그는 그들 앞에 그가 전하였던 교훈을 확고하게 고수하였다. 바울은 결단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원리들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희랍인인 디도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에게 할례를 받도록 괴롭히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전함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도들도 할례를 강조한 것처럼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비록 그들이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할례가 의미있게 여겨지고 있는 것을 묵인하기는 했지만 그들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는 사도가 "거짓 형제"라고 일컫고 있는 다른 무리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교회에 또는 성도들 가운데로 "몰려 들어 온 자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가진 자유를 엿보려고" 들어온 자들이었다. 또한 바울이 복음의 내용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는 의식적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얼마나 굳굳하게 방어하고 있는지를 엿보고자 하였다. 그들의 의도는 "교인들을 종으로 삼고자 함"에서였다. 그들은 이러한 자기들의 의도를 관철할 수 있다면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즉 만일 그들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로 하여금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도록 시킬 수만 있었다면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쉽사리 할례를 강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이방인들을 모세의 율법의 멍에 아래 잡아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저의를 눈치채고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즉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며 한 가지 경우라도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복음의 진리로 그들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 때문이었다. 즉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가 굴복하게 된다면 생길 수 있는 것, 즉 순수한 복음이 유대주의와 결합됨으로 생겨 지는 부패를 막으려 하였고 이방 기독교인들, 특히 갈라디아 교인들의 순수하고 완전한 신앙을 보존하게 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할례라고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 할례는 죄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까지도 디모데의 경우에서처럼 할례를 때때로 주었음을 발견하게 된다(행 16:3). 그러나 할례가 필수적인 것으로 강조되고 단 한 가지 경우만이라도 바울이 할례를 허용함으로써 그것이 안수와 같이 장려할 사실로 여겨진다면 이에 순응하는 것이 복음의 순수성과 자유를 위해 우려할 사태임을 바울은 직감하였다. 그는 모세가 정한 의식과 절기를 강조하는 자들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를 굳건하게 수호하려고 하였다. 모세가 정한 규례도 합리성을 띤 어떤 경우에는 지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저버리지 않고서, 또는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이러한 규례는 마땅히 거절되어야 한다.
3. 그가 다른 사도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들로부터 무슨 지식을 얻은 것도 또는 권위를 위임받은 것도 아님을 그는 우리에게 알려 준다(6절). 그가 본문에 "유명하다는 이들"이라고 한 말은 다른 사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는 나중에(9절)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들은 특히 야보고, 베드로,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에 관하여 바울은 모든 사람에 의해 마땅히 존경받을 자들도 간주한다. 이들 사도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교회의 기둥들로 여겨졌던 자들로서 그들은 교회를 빛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받드는 데 가장 요긴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박해자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이미 사도로 있었고 따라서 바울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몸으로 보았으며 이 때문에 이러한 설명이 필요할 때 그들은 그보다 예수에 대하여 설명하는 데 유리한 면이 있음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이것이 그가 다른 사도들과 동등한 사도가 될 수 없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양을 보고 사도들을 취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도로 부르셨고 또한 자유로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도의 자격을 부여하시고 또 그들을 사도로 채용하실 수 있었다. 바울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로를 받으셨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나 "저 유명한 이들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그가 계시로 알고 있는 사실 이외에 어떤 새로운 사실도 그에게 제출한 교훈의 내용을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하였다. 이로 보건대 그는 저희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며 그들과 같이 사도라 불리울 만한 충분한 이유와 자질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4. 이 회담의 결과는 다른 사도들도 확실히 그의 사명과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그도 그들의 동료 사도로서 인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7-10절). 그들은 그의 교훈의 내용에 만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또한 복음을 확고히 하는 데 필요한 기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또한 복음을 확고히 하는데 필요한 기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함을 보았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바울에게 역사하사 그를 이방인의 사도를 삼으신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처럼 그는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라"고 마땅히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들은 바울에게 주어진 은혜를 알므로(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도의 명예와 직분을 감당케 하기 위하여 예정된 자였다)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자요 또한 사도들이 "할례자에게 복음을 계속 전하는 동안 그들은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징표로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임무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요, 또 기독교를 가장 널리 전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회의는 완전한 조화와 일치 속에서 끝났다. 그들은 바울의 교훈과 행위를 인정하였고 그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하게 여겼으며 진심으로 그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영접하였으며 "다만 바울과 그 일행이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것"을 부탁한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바울도 "본래 힘써 행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 지방의 기독교인들은 대단한 빈곤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사도들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인하여 바울에게 저희의 처지를 알리고 그의 이방인 교회들과의 친분을 활용하여 생필품을 공급해 주기를 건의하였다. 이것은 타당한 요구였다. 왜냐하면 "만일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은 섬기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었다(롬 15:27). 따라서 그는 쾌히 그러한 요구를 수락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비롭고도 관용성 잇는 성품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유대교에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거의 호감을 표시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을 형제로서 받아들일 마음을 갖추고 있었고, 단순한 견해 차이 때문에 그들은 돕는 일에 협조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자애의 아름다운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우리와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돕고자 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길 만한 사람이면 누구나 구제를 베풀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바울의 베드로에 대한 책망(갈2:11-21)
Ⅰ. 바울이 자기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도를 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적들이 그를 모함하려는 거짓됨을 쉽게 분별할 수 있었고, 또한 그가 자기들에게 전하여 준 복음을 떠나는 것이 어리석음과 연약함 때문이었음을 쉽사리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이미 말한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또 기독교를 유대교적 색채를 띄게 하려는 교사들의 꾀임수로부터 완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안디옥에 있었던 사도 베드로와의 다른 회견과 거기서 있었던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11-14절).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주의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간 기독교인들의 중심 교회였던 것처럼 안디옥 교회는 이방 기독교인들의 중심 교회였었다. 베드로가 안디옥의 감독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울 만한 이유는 없다. 만일 베드로가 그곳의 감독이었다면 바울이 베드로가 다스리는 교회에서 본문의 경우처럼 그렇게 맞서 싸우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가 이 곳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바울과 베드로가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 그들 사이에는 조화와 일치가 이루어졌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바울의 자격을 인정하였고 또 그의 가르침도 인정하였으며 또 그들은 좋은 친구로서 작별을 하였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바울은 베드로에게 반론을 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책망받을 일을 하였기"때문이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베드로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또한 교황이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하여 그의 절대 권력과 무오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근거가 박약한가를 보여 준다. 다음의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베드로의 실수. 그가 이방의 교회에 왔을 때 그는 자기에게 특별히 주어진 지시에 따라(행 10장) 비록 그들이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그는 아무 것도 "속하거나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늘의 환상을 통하여 보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적 경향이 짙은 기독교인들이 왔을 때 그는 할례주의자들의 기분을 달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을 두려워하여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기피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이방 교회들에게 대단한 슬픔과 낙망을 안겨 주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던 것이었다." 그의 실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를 보고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의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전에 그들은 이방 교인들과 즐겨 동석하였었지만 베드로의 본을 따라 이제는 이방인들과 먹는 것을 사양하였고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상 그들과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것처럼 처세를 하였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 중의 하나요 이방의 교회들을 세우고 물 주는 데 도구 역할을 하였던 바나바 자신까지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던 것이다"(참으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훌륭한 사람에게서도 나약함과 변덕스러움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도 어려움에 처하면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지나친 생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무 앞에서 얼마나 머뭇거리게 되는지 모른다.
(2) 나쁜 행위가 지닌 대단한 영향력을 기억하자. 특별히 위대한 인물 또는 선한 사람들, 즉 지혜에 있어서나 영예에 있어서 본이 될 만한 사람들의 나쁜 행위는 남들에게 강력한 나쁜 영향을 미친다.
2. 바울이 베드로의 실수에 대하여 가한 책망. 그는 베드로의 고결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평화에 문제를 일으킬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바울은 두려움없이 그 일에 대하여 그를 책망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으나 바울은 단호히 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여느 유대인들처럼 훌륭한 유대인이었다(왜냐하면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사도직을 막중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이방 교도들이 낙심을 하고 무시당하는 것을 좌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즉 복음이 가르쳐 주었고 또한 그들이 받아들이기로 고백한 원리들 곧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를 분리시키는 벽은 무너지고 모세의 율법에 대한 준수는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그 원리에 입각하여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의 실수가 낳은 결과임을 알았을 때 이에 대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그는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말하였다. 베드로의 행위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상충되는 그런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때로는 의식적 율법을 그대로 수행하지 않고, 또 이방인들의 방식을 따라 생활하지 않고, 이러한 그의 행위는 유대인들일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그의 입장을 나타내 주는 것이고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와 모순되게 이방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의식적 율법을 강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베드로가 비록 공개적인 압력을 가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행동과는 상반되게 한편으로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살도록 강요하는 것을 책망한다. 사실상 베드로의 행위는 만일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처럼 살지 않는다면 기독교 공동체에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나타내 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Ⅱ. 이같이 하여 바울은 자기의 인품과 직책을 확립하고 또 베드로에게 책망한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그가 다른 어떤 사도들, 심지어 베드로 자신보다 결코 못지 않은 사도임을 충분히 입증한 후 그는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교의인 "의인(義認)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임을 설명한다(어떤 이들은 본장의 끝까지 그가 한 말은 안디옥서 에베드로에게 하였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교의는 베드로의 친 유대교적 경향의 오류를 확실히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도구는 복음이지 율법은 아니라는 신앙의 원리 때문에 바울은 율법을 지키며 또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일에 믿음에다 율법까지 혼합시키는 일을 자행하는 자들을 후원하는 자들에게 불쾌감을 느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신앙 원리가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가르침이었다. 그는 이 교의를 추종하였고 또한 이 가르침을 기록하여 확고하게 하는 것이 이 서신에서의 그의 주된 목적이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 준다.
1. 유대적 기독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항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이 말은 우리는 유대교의 신앙 속에서 나서 자라 불순한 이방인들 중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한다. 즉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이다. "만일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왜 우리가 율법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만일 본래 유대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율법으로 되돌아 가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결코 율법에 매여 살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지 않는가? 이는 율법의 행위로써의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라고 반문한다. 즉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구하고 또 그렇게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도 우리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한 죄를 조장하는 것이요. 죄를 탐닉하는 것이며, 또 이방인을 죄인들로 만드는 것이 된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만일 그가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교훈을 우리에게 베푼다고 하면서 바로 그 교훈에 의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기는커녕 우리가 불결한 죄인으로 계속 존재하며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에 부적당한 존재로 계속된다면,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자냐?"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따르면 율법의 행위가 없이 이러한 결과에 이른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히 이를 거부한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하여 이러한 생각을 품는 것을 금하셨도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불완전하고 효력이 없는 의롭게 되는 길을 제시하셨다는 생각과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의롭게 되지 못한 채로 있으며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조그만 위안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금하셨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에게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이야기였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도 심각한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세우면, 즉 만일 모세 율법의 준행이 의롭게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쳐 온 내가(또는 다른 사람이)이제 와서 말이나 또는 행위로 율법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거나, 그렇게 암시를 한다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도 불결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요, 죄의 징벌 아래 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남을 기만하고 거짓말한 자로서 또한 자신과 일치하지 않게 행동한 자로서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같이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바로 유대적 기독교인들이 고수하는 원리와 행위를 들어 논증한다. 이 논증의 결과는 그들이 복음으로부터 떠났다는 점이었다. 또한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이 이방의 기독교인들과 사귀기를 거절하는 것과 그들을 율법의 멍에 아래 구속하려고 애쓰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라는 점이었다.
2. 바울은 자신의 입장과 행한 바를 우리에게 알린다.
(1) 그가 율법에 대하여서는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그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는 도덕적 율법을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그곳에 기록된 모든 것들을 계속해서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주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고 그런 식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였다. 의식적 율법에 대하여서 그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하여 유물로 전락해 버렸고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본질이 이르게 되자. 그는 더 이상 그림자에 대한 경의를 품지 아니하였다. 이같이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다. 율법은 이미 그 자체가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는 율법 자체를 고찰하여 보고서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는 의롭게 됨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았다(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복종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율법이 정한 희생제나 화목제가 더 이상 필요 없음도 알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이 모든 것에는 종지부가 찍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생각할수록 유대인들이 의존하고 있는 율법을 지킬 하등의 이유도 없음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같이 "율법에 대하여서는 죽었지만" 자신을 율법 없는 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희망을 포기하였고 계속 율법에 매어서 지내기를 거절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의무에서 멀어졌다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반대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가 받아들인 복음의 교훈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약화시키는 대신 그에 대한 의무를 더욱 강하게 확실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고 보다 나은 생을 살기 위해서였다(롬 7:4, 6).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삶, 그것이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삶보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고 또 그에게 합의되는 삶이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과 의 아래 사는 삶이었다.
(2) 그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듯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20절). 그러므로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 말하면서 믿는 자의 신비한 삶을 우아하게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1]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았다는 신비를 전해 준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또한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살았다. 죄는 극복되고 은혜는 소생한 것이다.
[2] "그는 살았다. 그러나 산 것은 그가 아니라"는 신비를 전해 준다. "내가 살았으나 산 것은 내가 아니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그 말은 이런 뜻이다. 그는 은혜의 역사 속에서 산다는 것. 그는 은혜의 위로와 승리를 맛본다는 것, 그러나 이 은혜는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데서 왔다는 뜻의 말이다. 믿는 자들은 자신들이 의지함 속에서 생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그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신비를 전해 준다. 이러한 결과는 그의 그리스도와 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합일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였고 이에 힘입어 죄에 대하여 죽게 되었으며 또한 이 합일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에로 동참하여 이 힘을 입어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있는 생을 얻은 것이었다.
[4] "그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곧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라"는 신비를 전해 준다. 외적으로 볼 때,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고, 그의 자연적 생명은 다름 사람들과 같은 방식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를 지지해 주고 생기있게 해주는 보다 높고 고귀한 원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또한 그는 이 믿음을 통하여 특히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자신을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볼 수가 있었다. 이 까닭에 그는 육체에 따라 살았지만 그는 육체대로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신앙에 의하여 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것은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그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에(그는 이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이들은 반대하였다)의하여 반대자들이 주장하던 두 가지 난제(難題)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함으로 이 강론을 종결짓는다.
1.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한 것은 바로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저지른 결과였다. 왜냐하면 그가 로마서 11장 6절에서 주장한 것처럼 "의롭게 되는 것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2.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폐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이다. 반대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소용 없는 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없이도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죽도록 예정되었겠는냐?는 말이다.
바울이 꾸짖은 베드로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 인들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 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 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 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 2:11ㅡ14)
이 구절은 한마디로,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베드로와 그 결정을 변호한 바울의 문제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식탁의 교제를 하지 않았다(행 10:28; 11:3). 그러나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이방인이 믿기로 했을 때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던 관습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결하였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였다(행 15:20). 다시 말하면 이방인 신자에게 유대인 관습을 강요하지 않게 하므로 신앙생활이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온 베드로가 그곳의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곳에 오자 베드로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혹시라도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그를 보고 그들의 관습을 어겼다는 비난을 들을까 하여 두려워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공회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면 신앙으로 보아 훨씬 후배인 바울이 선배 베드로를 공적으로 꾸짖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몇 가지 해답이 가능하다.
1. 베드로의 행동은 외식이었다.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은 원래가 극장에 배우들에 대해 썼던 말이었다고 한다. 배우들은 실제가 아닌 것을 실제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외식에는 누구보다도 신자가 빠지기 쉽다. 바리새인들은 그 본보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외식은 쉽게 다른 신자를 전염시킬 수 있다. 여기 본문에서 보면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던 바나바까지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다고 하였다(13절). 따라서 외식은 마땅히 책망 받아야 했다. 시험에서 예외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나바는 조심하면서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와 지시를 받아야만 했다.
2.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을 무시했다. 그는 바울과 의견일치를 보았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의 교제와 그들의 문화를 지키려는 소심함 때문에 반이방인적인 정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에 반대해서 행하는 잘못이었다. 식탁 교제를 구별하므로 다른 신자들을 제이급의 시민으로도 만들며 교회의 연합을 깨뜨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1) 베드로는 지속적으로 은혜의 복음의 실천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바울의 책망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때 온 성도들 앞에서 한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문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의 분쟁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 접촉일 때만 해결된다. 만일 면전이 아니라 뒤에서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불평이나 뒷공론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코 생산적이 못 된다.2) 이런 점에서 바울이 면전에서 대선배이지만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옳았다.
주
1. Craig S. Keener,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Colossians, Philemon(Waco: Word, 1982), p.523
2. Maxie D. Dunnam,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Colossians, Philemon(Waco: Word, 1982),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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