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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1장 -은혜의 복음, 구원의 복음/ 사명자의 길

by 은총가득 2021. 5. 2.

은혜의 복음

갈라디아서 1:1-5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를 말할 때 존 칼뱅(Calvin, Jean)과 마틴 루터(Luther, Martin)를 말합니다. 칼뱅은 “예정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정론이란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가 미리 정한 바를 실현시켜 나간다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그래서 칼뱅은 에베소서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예정론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말씀이 1:4~5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런가 하면 루터(Luther, Martin)는 갈라디아서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그가 갈라디아서 주석을 두 번이나 썼는데, 로마서는 16장까지 있고, 갈라디아서는 6장밖에 안되는데도 갈라디아서 주석의 분량이 역시 그가 쓴 로마서 주석에 두 배가 되는 것은 그만큼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좋아하고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 행적과 교훈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밖에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디모데전후서와 같은 말씀은 목회서신입니다. 당시의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문제를 수습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써 보낸 편지입니다. 이에 비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교리를 전반적으로 체계적으로 다룬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믿는 것이며, 기독교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스무 번 반복하여 읽어보면 기독교가 과연 어떠한 신앙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작은 로마서”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로마서가 어떻게 쓰여 졌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요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워 그곳으로부터 만방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랐습니다. 한마디로 로마를 복음의 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에 이미 몇몇 사람들이 로마에 먼저 가서 가정교회를 세우고 활동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들이 알고 있는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고, 확고한 기독교 교리를 정착시키며, 온전한 교회를 세워 선교의 역사를 제대로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로마를 교회의 중심, 선교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는 가지만, 들려온 바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큰 핍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쩌면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예루살렘에서 죽는다면 로마는 영영 가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죽어서 로마에 가지 못하더라도 편지로 메시지를 대신하고자 그토록 가고 싶었던 로마를 향하여 그가 평생 전하던 기독교 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기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여 기독교 교리에서 윤리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마침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그 저술 동기가 로마서와 유사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와 주후 48년 경 수리아 안디옥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쓰기까지 복잡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이방인으로 사도된 바울이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숱한 박해를 당합니다. 특히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이 심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잘 설명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논박하고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당연히 그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전반을 다룹니다. 그가 평생토록 전파하던 복음과 교리를 요약하여 써 놓은 갈라디아서를 "작은 로마서"라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루터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신교 교리의 중심입니다. 인간의 공로, 선행, 지식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루터가 좋아한 갈라디아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Justification by faith)”는 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루터의 그의 주석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를 상실하면 기독교 교리 전부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기독교 복음의 핵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교리가 의미상으로는 성경 전체에 나와 있지만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고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뿐입니다. 바울이 쓴 많은 편지 가운데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이 교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두 책의 의미를 높이 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에서 '의(righteousness)'는 헬라어 '디카이오스우네'입니다. 이 '말이 42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오는데 예외가 있다면 고린도전서 6:11과 디도서 3:7에 각각 한번 나올 뿐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보더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라는 교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만 특별히 강조된 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애초에 그가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출발 한만큼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닥칩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선교사가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하려면 많은 어려움을 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민족주의(nationalism)입니다.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이 정치적인 장벽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민족주의의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은총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침략을 당하여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해 있을 때입니다. '저 사람들은 미국사람이다' '저 사람은 서양 사람이다' '저들은 우리와 상관없다'하고 그들을 거부할만한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일본사람이 싫다는 데서 그 반사작용으로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그런 시점, 그런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선교가 잘 안 되는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거의가 민족주의의 장벽이 있습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닌데 민족주의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외 없이 정치적인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문화적 장벽이라고 하는 것이 까다롭기 그지없습니다. 문화, 습관, 풍속이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난도 당하고 많은 핍박을 받습니다. 한층 더 어려운 점은 신학적인 문제였습니다. 사상적인 문제, 교리적인 문제로 예루살렘 공의회로 모이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많은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당한 핍박은 세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첫째는 상대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종교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오해까지 받습니다. 둘째는 유대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하를 보면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종교를 말살시키고, 유대주의를 왜곡하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완고한 민족주의, 협소한 선민사상, 고정관념, 그들 나름의 주관적인 율법 해석이 바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통문화와 신앙을 혼동하게 되고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각색한 신앙을 고집하면서 예수를 믿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심지어는 원정까지 하면서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어찌나 극성스럽게 괴롭혔는지 바울을 죽이지 않고는 먹지도 않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이 정말로 먹지 않아서 죽었는지 궁금합니다.

 

셋째는 그런 극성스러운 바깥의 핍박보다도 더욱 어려운 핍박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본디 밖에 있는 적보다도 안에 있는 적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마태복음 10:36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 더 무섭습니다. 교회에 들어와 직분도 맡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믿는 자들의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이 더 괴로운 핍박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도 교회 안에 원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항상 이런 내부의 적은 있게 마련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 있는 무서운 적은 바로 외식주의자입니다. 내심으로는 유대주의를 숭상하면서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 척합니다. 예수 신앙과 유대주의를 혼합하려고 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입니다. 기독교 교리와 그 순수성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순수성이 무너지면 생명력이 사라져 혼합주의로 발전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 비집고 들어와 자라고 있는 잘못된 사상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비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다.' 이렇게 적시하고 깨우쳐 주어야만했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적과 원수가 있어서 공격을 받았기에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선명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다면 적당히 믿기 쉽습니다.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대강 믿으면 되겠지 하고,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30년 전 제가 신학공부를 할 때만 해도 은혜와 은사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은혜가 곧 은사이고 은사가 곧 은혜였습니다.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이므로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날로 시끄러워지고 복잡한 문제가 많아짐에 따라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사이고 저것이 은혜이다. 조목조목 따집니다. 또 '예정'과 '선택'도 옛날 신학자들은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깊이 연구하여 구별하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선택이다, 저것은 예정이다, 이것은 경륜이다, 저것은 섭리다 하는 식으로 까다롭게 구분합니다. 하도 시끄럽고 하도 문제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럴 필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심오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충대충 믿자, 예수 믿고 천당에 가면 됐지 복잡하게 살 것이 있나?’ 이런 타성에 젖었을 수도 있습니다. 적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같이 복잡한 연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유대주의자들로 말미암아 깊은 신앙적 교리를 설명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도리어 좋은 계기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적이 교회 안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환영하여 말썽 없이 받아들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기독교가 유대주의의 한 분파가 되었다가 몇 백 년 후에는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이 있었기에 뛰쳐나와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 바른 신앙이 어떤 것인가 변증하게 되고, 로마서 ․ 갈라디아서 같은 귀중한 말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야말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 인생사, 적이 있어서 강해지고, 문제가 있어서 연구하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핍박이 있음으로 더 순수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상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핍박함에 기독교 교리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건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사방에서 일어서고 있는 기독교가 괴수 바울만 없애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탄은 늘 대표자만 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없으면 디모데가 합니다. 디모데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울만 제거하면 교회가 무너질 줄 알고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은 보통사람이다.' 하고 흔듭니다.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아니냐' 하고 이간질합니다. '바울은 간질병이 있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고 깎습니다. 이런 식으로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를 실추시키려듭니다. 그의 권위가 떨어져나가면 지금껏 쌓아온 선교의 성과가 원점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짓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 고린도서에 보면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권에 대해서 사도행전 1:21~22에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예수님과 평생 동행한 사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지켜본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이적을 통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했다는 증거가 있는 사람이 사도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다녔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 만나 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말씀의 능력도 있었고 기적도 행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년을 동참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 점을 약점으로 삼아 자꾸 거론함으로 바울의 영적 권위를 실추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 고 항변하면서 당당히 사도임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서에 여러 번 나타나 있습니다. 심지어 1:1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사람들이 세운 것도 아니요, 투표하여 뽑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임명하셔서 내가 사도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사도권을 부정하면 말씀을 받는 자의 신앙이 무너짐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보면 바울이 사도권을 특히 강조하고 있고, 또 자신의 일과 교리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1~12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전해 받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계시를 직통으로 전수했다고 합니다. 간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책을 읽어서 얻은 것이 아니요 남에게서 들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예수님께로서” 직접 받은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르치는바 교리의 독특성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8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다 보니 바울은 복음과 진리, 특히 신앙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 주의 종들이 순교하게 된 것은 절대로 양보와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신앙, 교리, 진리, 계시에 관한 한 결단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바른 진리에 대하여 이렇듯 양보하지 않는 것이 독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아닌 인간적인 것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것은 고집불통일 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려면 때때로 어느 정도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마냥 물러 터져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듣고도 "자네 말이 옳아"하고 저 사람의 말을 듣고도 "자네 말이 옳아"합니다. 이렇게 줏대 없이 우왕좌왕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에 대해서는 독선주의자가 될지언정 무골호인(無骨好人)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외고집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내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당연히 독선주의자로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계시의 직접성을 근거로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신앙 체계와 진리 위에 꿋꿋이 서서 복음을 전한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대함에 고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2:6~10을 보면 타협성도 있습니다. 추호의 타협도 없을 것 같던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러 가고, 함께 지냅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교제의 악수를 청합니다. 타협을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신앙에 관한 한은 타협이 없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영적으로 실수했을 때에는 책망도 합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것이나 형식적인 것, 혹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유 있게 타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진리와 복음에 대해서는 타협이 전혀 없지만, 이를테면 베드로가 유대사람에게 보냄 받은 것처럼 나는 이방사람들에게 보냄 받았다고 기능적으로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선교 대상이 다르고 받은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았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저분은 목사의 일을, 저분은 장로의 일을, 저분은 권사의 일을 각각 은사로 받았다. 이렇게 은사가 다르고 기능이 다름을 이해한다면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여유 있게 타협할 줄도 아는 협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궁극의 문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반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율법이 무엇이고 은혜가 무엇이냐?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앞으로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그 해답을 얻어야 할 문제입니다.

 

우선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아봅시다.

첫째, 율법은 죄를 알게 합니다.

둘째, 율법은 은혜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 간접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그 엄한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리스도께, 또 하나님의 은혜로 간접적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은혜를 앞서지 못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선을 넘어섭니다. 은혜가 먼저이며, 오직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최종 승리를 말하는 중요한 변증적 교리가 이 갈라디아서에 전개됩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나면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또 위선과 외식주의에서 벗어납니다. 간혹 예수를 잘못 믿으면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곧 외식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부터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둔갑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이제 선행을 베풀어야 된다, 구제를 해야 된다, 그리 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디로 갔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믿음이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선을 행하면 교만해지고 행하지 못하면 절망하여 쓰러집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위선과 외식주의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여야 됩니다.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더욱 진지하게, 더욱 성실하게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복음

갈라디아서 1:1-5

 

갈라디아서가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어떤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갈라디아서의 주제와 서론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이제 오늘은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 시간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1:1~5은 편지 형식으로 문안 인사입니다. 사실 형식은 문안 인사이지만 내용은 '구원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편지를 쓸 때 수신자의 이름을 먼저 씁니다. '어머님 전상서, 혹은 아버님 보시옵소서'라든가 '사랑하는 누구에게' 등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발신자 이름은 맨 끝에 '불초 소생올림'이라든가 '아무개드림'이라고 씁니다. 이렇게 수신자를 먼저 나타낸 다음에 안부를 묻는 것이 일반적인 편지형식입니다. '그동안 안녕하십니까?'라든가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옵시며'와 같은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사람들이나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우리와 다릅니다. 그들은 먼저 발신자를 밝힌 다음에 수신자를 밝히고, 그리고 문안을 합니다. 특히 히브리식의 문안은 안부 대신 복을 비는 말로 이루어집니다. 축복으로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의 서신에도 나타납니다. 오늘 바울 서신 갈라디아서, 이 편지는 헬라식과 히브리식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편지 쓰는 형식은 헬라적이지만, 문안의 내용은 히브리적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 말씀의 헬라 원문은 첫마디가 '파울로스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처음이 '바울'이고, 그리고 '사도(使徒, apostle)'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어서 '사도'에 관해 설명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사도에 관한 설명을 길게 한 다음에 '바울'의 이름이 나오는데,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에 '사도'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는 지금 핍박자들이 많습니다. 핍박자는 로마 정부 같은 교회 밖에도 있지만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 안에 교리가 전혀 다른 이방종교적이고, 겉으로도 표가 나는 이단(異端)들도 있고, 또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신앙의 형식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교인들을 헐뜯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율법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이래서 바울이 '복음은 이것이다' '바로 믿는 신앙은 이것이다'하고 쓰게 된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은 철저하게 잘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믿는 것보다 행함이 더 중요하다, 세례만으로는 소용없으니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한다, 행함이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된 신앙이었지만 어느 사이에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을 행하여야 한다'라는 생각이 자기 공로가 지배하게 됩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율법적으로 깨끗하게, 진실 되게, 완벽하게 사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예수님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고, 예수님의 보혈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주의자들은 믿음의 본질인 복음을 파괴하고 변질시키기 위하여 먼저 행위와 율법을 강조하고,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을 공격합니다. 바울로 하여금 사도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도자인 바울을 꺾어놓으면 교회가 무너지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의 무리가 흩어지지 않습니까? 사단이 그 이치를 이용하여 바울을 치려고 합니다. 그 방편의 하나로 먼저 바울의 과거사를 거론하여 트집을 잡습니다. 사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는 훌륭한 사도요, 신학자요, 하나님의 종이요, 능력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다' '자칭 사도라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사도 자격이 없다'라고 하면서 과거를 문제 삼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자격을 겸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제자로 삼아 공생애 3년에 동참했어야 합니다.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도임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이적을 보여야 합니다. 바울은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적을 나타내는 권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자격 미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름 받고 3년 동안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한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저들은 이 점을 약점으로 들추어냅니다. 사단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역사할 때에 바울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사람이다' '스데반을 죽일 때에 동참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사도랍시고 돌아다닌다며 헐뜯습니다. 그렇게 하여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사단은 언제나 이렇게 역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의 사도권과 카리스마적인 권세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역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변명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누구의 후손이기 때문도 아니요, 회의에서 결정하여 사도로 세워준 것도 아니요, 투표로 임명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 있는 나를 친히 부르셔서 사도된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임명했습니까? 어느 회의에서 파송했습니까? 바울은 예수로 말미암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게 된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내가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를 붙들어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것에서부터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것,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것까지 모든 과거사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경륜이 그를 불러 사도 되게 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그를 붙드시고, 그 능력 안에서 사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드고아의 목자도 선지자가 되고, 야곱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쓰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당신의 역사를 감당하게 하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데 내가 왜 사도가 못되느냐고 바울은 반박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내가 사도된 것이다.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one who is sent)'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예수의 보냄을 받아 이방세계에서 많은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고, 참된 복음의 진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느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 이것만을 생각하며 모세를 따랐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옛날에 애굽사람을 죽이고 40년 동안이나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던 사람이 아니냐?' 이렇게 따지는 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고 비방하던 미리암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을 치셨습니다. 모세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은 모세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어떤 실수를 하였는지 알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가, 모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가? 이것만을 알고자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세를 따랐어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모세를 죽이느니 살리느니 한다는 것은 정면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좋은 점이 많았지만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후 계속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의 과오를 거론하고 트집을 잡아 이야기한 사람들은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이 점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다윗을 따랐어야 합니다. 다윗을 신앙적으로 보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큰 실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수제자라고는 하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부인할 뿐만 아니라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불과 두 달도 못되어 삼천 명의 군중 앞에서 예수 믿으라고 설교를 합니다. 이 때 누군가가 비난하기를 "저 사람이 누구냐? 며칠 전에 예수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사람이 아니냐? 예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도망 다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예수 믿으라고 설교를 하다니, 말도 안 돼"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의 어부이든 어떻든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든 열 번 부인하였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성령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고 그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오직 이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마귀 사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베드로를 가리켜 "저 못 배우고 무식한 갈릴리 촌뜨기가 하는 말을 왜 듣느냐"라고 하면서 훼방을 놓습니다. 이런 짓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은혜 받지 못하고 맙니다.

 

"저사람, 갈릴리 촌사람이 아니냐?"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것을 배웠나?" 이런 소리나 하다가 결국은 예수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고,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계시가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어야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갈라디아교회 안에서 교회를 헐뜯고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행위는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이래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주의 종이 말씀을 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것, 그 이상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 시험에 들고 보면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말씀은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상대의 과거, 상대의 결점, 상대의 실수를 생각합니다. 자꾸 약점을 캐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보이게 됩니다. 마귀의 시험이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엎질러집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은혜 못 받으니 끝난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사도다.” 스스로 이 같은 마음으로 설교하며, 듣는 자도 그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이것만을 생각하고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이어 2절에서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수신자를 밝힙니다. 갈라디아교회라고 했습니다마는 무릇 교회는 하나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교회가 수신자입니다.

 

3절에 문안대신 축복의 말씀이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 바울의 편지마다 나옵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자격 없으면서 받는 사랑이 은혜입니다. 나에게는 그 큰 사랑을 받을만한 의가 없습니다. 무자격한 가운데 받는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입니다. '평강'은 히브리적인 인사말로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사람과의 화평을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헬라식 인사와 히브리식 축복이 합쳐진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 축복의 근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격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그리스도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를 통하여 복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듯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복의 근원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4~5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원의 진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목적이 무엇이냐, 건지시려고,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 목적이 이에 있습니다. 악한 세대, 마귀가 다스리는 세대로부터 건지심 받기 위함입니다. 죄가 다스리는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구원이란 건짐 받는다, 즉 자유의 구원이라고 풀이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건짐 받는 것과 같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과 진노로부터, 죄와 사망과 사단의 역사로부터 건짐 받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건짐 받을 수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고 물에서 건져집니까? 누가 밖에서 손을 내밀어줘야 합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고행을 하고, 공로를 세우고, 별 짓을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구원의 의미가 설명됩니다.

 

말씀 중에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의 해결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면 되겠습니까? 병든 사람으로 건강을 되찾게 하면 되겠습니까? 신분이 낮은 사람을 높여주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기본개념은 죄로부터 출발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 중에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개념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개인의 인격, 가정, 사회, 국가가 다 구원받습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없는 한 절대로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몸을 주셨으니" 자기희생이 구원의 길입니다. 부자로 만드는 것, 병을 고쳐주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구원의 길은 자기희생에서 옵니다. 이렇게 인도하고 저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저렇게 다 해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이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로 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의 이름으로도 구원 얻을 길이 없습니다. 복음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완전히 주심으로,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을 믿고, 그 뜻을 알고 따를 때에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있을 때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진수를 설명하면서 바울은 감격해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구원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일생을 두고 끝없이 이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임종 맞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 한마디 말이 아니고는 다른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 한마디가 구원의 희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병원애서 사역할 때 어느 집사님의 안내로 그의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동에 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예수를 믿지 않을 뿐더러 예수 믿는 것을 핍박까지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아들 된 입장에서 마지막 가는 길에라도 구원해보고자 하는 것이 그 집사님의 충정이었습니다. 병실 문 앞에서 집사님은 침통한 얼굴로 망설입니다. "목사님, 아버님께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더 좋을 것이 없지만 행여 라도 목사님께 욕이라도 하며 나가라고 소리 지르면 어떡하지요?"하고 걱정이 태산입니다. 절박한 시간의 답답한 심경이 그 표정에 안타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욕을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목사님, 한 번 더 기도하고 들어가십시다." 함께 기도를 하고 서슴없이 병실 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환자를 보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옆에 있던 아들 집사님은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제가 점잖게 인사를 나누고 따뜻한 말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상식적인 위로의 말로 듣기 좋게 시작할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집사님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싱겁다 싶을 만큼 일이 쉽게 풀리고 말았습니다. 뒷날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장례를 마지고 그 집사님이 제게 인사하러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때 저는 큰 일 났다 싶었습니다. 인사도 안 하고 느닷없이 왜 거기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사태가 급하니까요. 여유가 없지요. 인사를 차리고 격식을 찾고, 그럴 틈이 어디 있습니까? 그 순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죽어 가는 자에게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금덩이도 필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믿음만이 구원이 됩니다."

 

 

 

주님의 종

갈라디아서 1:6-10

 

 갈라디아서 1:1~5까지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문안 인사와 함께 자신의 사도권의 근거를 천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사도로 부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놀라운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6~10절은 갈라디아서 본론의 서두입니다. 이 서두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매우 엄한 책망으로 시작합니다. 왜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는지를 여기서 밝히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라디아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을 따르는 복음의 변절자들, 이단을 좇는 사람들,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기에 그들을 위해 엄하게 꾸짖으며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6절 가운데에 "속히 떠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말의 핼라어는 '타케오스 메타티데스데'인데, 이 말은 아주 급하게 생각을 홱 돌리는 것을 뜻합니다. 몸이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떠났다, 생각을 돌렸다, 그 뜻입니다. 이것은 '군사적인 용어'로 탈영, 불복종에 해당됩니다. 군법회의에서 가차 없이 사형 감입니다. 정치적으로도 변절자가 있습니다. 여당에 있다가 야당으로 가고, 야당에 있다가 여당으로 갑니다. 철학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것도 변절입니다. 지금까지는 오른쪽으로 주장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을 홱 돌려서 왼쪽으로 주장합니다. 이런 줏대 없는 모습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고 삽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중요하게 여기는 변절은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배교행위입니다. 바른 신앙에서 떠나는 것,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문에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것도 '속히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어느 찰나에 홱 돌아버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를 크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은혜로 부르신 이를 그렇게 속히 떠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6절 앞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우리는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은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팔짱끼고 우리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몸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더라도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빼고 모든 비유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만 '기다리는 아버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 나서시는 적극적인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저절로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믿기까지에 얼마나 많은 투자가 있었는지 아십니까? 내가 내 발로 찾아가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종교 가운데서 골라잡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내가 선택해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부터가 은혜입니다. 내가 의로워서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나에게는 구원받을만한 의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구원의 경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시작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이 있음으로 비롯되어 모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 이것이야말로 전적인 은혜 아닙니까?

 

그 다음에 이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로써 구원의 역사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 나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생전에 한번만이라도 복음을 들었다면 예수님을 영접했을 분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주지 않아서 믿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가끔 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특별히 이 자리에 많은 여자 분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와 앉아 있지만 백 년만 이전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여자가 교회에!' 어림없는 일입니다. 여자가 밤중에 어디를 나다녀요? 집안이 발칵 뒤집힙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이것만도 엄청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해들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꼬이라고 하는 일본 사람입니다. 태평양전쟁 때 참전했다가 전쟁이 끝났는데도 종전 소식을 못 듣고 도망 다니다 27년을 괌의 원시림에 숨어 살았습니다. 그곳은 춥지도 않고, 원시림 숲에 열매가 있었기에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상에 오르면 아래로 비행장이 보입니다. 관광객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기들을 보면서 전투기로 착각하고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7년을 그렇게 살았다니 기가 막힙니다. “전쟁이 끝났다.” 이 한 마디를 못들은 것이 그에게 평생에 한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청춘을 누가 보상합니까?

 

이처럼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전적인 은혜 아닙니까? 우리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음식을 먹고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된 일입니까? 아닙니다. 낳으시고 키우시고 가르쳐주신 부모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물며 복음이겠습니까? 엄청난 은혜의 결과입니다. 나 한사람 예수 믿게 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렀습니까?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습니다. 동서고금에 얼마나 숱한 순교의 피가 뿌려졌습니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많은 선교사들이 와서 죽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이 일어났고, 전했고, 모질게 핍박받았고, 순교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100% 하나님의 가없는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전해지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준다 해도 안 될 사람은 안 됩니다. 마음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눈은 작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예배시간에 저 뒤에 앉은 분들 얼굴까지 다 보입니다. 찬송 부를 때에 안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타까워서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설교할 때에만은 꼭 마음 문을 열게 해달라고, 예배드리러 와서 끝내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마음 문을 열지 않고 딴청만 피우면 마음속에 잡념이 끓고, 졸립니다. 그런데 마음 문을 여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감동해서 마음 문을 열어주어야 온유해 지고 겸손해져서 '주여 오소서. 전적으로 믿겠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하소서.' 이렇게 됩니다. 이런 옥토 같은 마음이야말로 큰 선물입니다. 이것 역시 은혜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혜에는 우리의 공로가 필요치 않습니다. 온전히 은혜일 뿐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가운데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진리를 찾을 수 없고, 주님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라고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을 얻고 감격하던 갈라디아 교회의 몇 사람이 자신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로 돌아서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만으로 부족하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공로를 세워야 한다.’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특색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들의 말처럼 생각 같아서는 꼭 선한 일 해야만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조심해야 됩니다.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믿음만 가지고 되나, 좋은 일도 해야지.’라며 업적, 공로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여러분, 선행도 믿음의 열매입니다. 선한 일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공로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의 사고에 박혀 있는 '공로주의'란 이를테면 '도둑질을 했습니까, 구제를 해야지요. 간음을 했습니까, 고행을 해야지요. 살인을 했습니까, 평생 봉사하시오.' 이런 식입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요? 그러나 잘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도둑질을 했다고 칩시다. 그로 인해 피해자가 마음이 상한 나머지 울화병을 앓다가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뉘우칩니다. 훔친 것의 열배로 갚겠다고 나섭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아니면 속죄의 뜻으로 내가 불우한 이웃을 구제했습니다. 그 선한 행위로 해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납니까? 이것이 용서될 수 있는 일입니까? 이미 '상황 끝' 입니다.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워서 이미 지은 죄를 속죄해보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갈라디아교회의 이단들은 이런 율법주의의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안식일도 지켜야 한다, 주일만 지켜서야 쓰나' 주일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뒤죽박죽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 할례 안 받다니 말이 되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할례 받느라고 청승떱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겠습니까?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무효로 돌려버리려는 수작입니다. 그렇게 살살 꾀어서 유대주의로 율법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없습니다. 있다고 하는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 필요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22:1~14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왕이 자신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오라 했더니 모두가 핑계와 구실을 대며 오기를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하러 온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왕은 대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다시 명령합니다. "잔치는 푸짐하게 준비되었는데 청한 사람들은 그 모양이니 차라리 길에 나가 아무나 데려오라." 종들이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그제야 집안에 사람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왕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가 왕의 눈에 띄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예복도 입지 않은 채 여기 왔느냐?" 임금은 그 사람을 꾸짖어 내쫓아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시고 결론을 주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오라고 하면 "예"하고 따르면 됩니다. 초청자가 예복을 보내주었으니 그것을 입고 잔치에 참여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토록 어렵습니다. 왜일까요? 알량한 자존심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우리가 남한테서 선물을 받을 때, 스스럼없이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물을 주는 마음보다 받는 마음이 더 귀한 법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말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더 어렵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는 누구나 체험하는 바입니다. 나의 공로, 나의 자존심, 나의 의를 완전히 포기할 때에만 깨끗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 다음 7절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계속되는 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교란하게 하여'의 헬라어는 '타라손테스'로 아주 혼미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가른 복음이란 사람을 혼미하게 하여 그 틈에 신앙을 떨어뜨리려는 교리가 다른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째서 '다른 복음'에 빠집니까? 인본주의 때문에 그런 시험에 빠집니다. 아직도 나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자기 의를 내세우고 교만하니까 이런 시험에 빠집니다.

 

흔히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을 만큼 죄악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더 열렬한 신앙인이 됩니다. 전적으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큰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아직 은혜가 없습니다. 완전히 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와 교만이 완전히 깨어져야 은혜를 은혜로 압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교회에 나와도 그냥 오락가락 하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거나 중병에 걸려야 백기를 들고 항복을 합니다. 이 말은 완전한 자기부정이 이토록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안 됩니다. 내 의지로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전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먹혀들지 않습니다. '나도 공로가 있는데' '나도 이만하면 괜찮은데' 이래서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기왕에 예수 믿는다면 '화끈하게' 믿어야 됩니다. 전적으로 '내 주여 뜻대로' 하고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 참 신앙입니다. 전적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위탁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뿌리 뽑아 내버리지 못한 자기교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8절은 이 같이 어정쩡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단호히 응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은 격앙된 목소리로 ‘너희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발합니다. 바울은 본디 여유 있는 인격을 지닌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8:13입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만큼 마음이 큰 사람입니다. 로마서 9:3입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한이 없겠다.” 굉장한 스케일입니다. 이토록 도량이 넓은 사람이지만, 복음과 진리에 관한 한은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우리도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에 관한 한 한 치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어야 능력이 있습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하는 식의 신앙은 헛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리스도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는 양보 없는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태국에서 10년간 활동했던 선교사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일찍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교회가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시작이 잘못되어서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불교의 나라인지라 교회 나오라고 해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절에 가면서 교회에 나와도 좋다"라고 꾀었답니다. 그랬더니 주일날 아침에는 교회에 나왔다가 오후에는 절간에 갑니다. 이렇게 양다리 걸치고 양쪽을 왔다 갔다 하도록 했으니 교회가 부흥될 턱이 없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의 교회는 부흥되지를 않습니다. 이에 비하여, 우리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의 절대성을 내세우고 들어왔습니다. 예수 믿으려면 먼저 우상을 불태우고 오라.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믿은 연후에 불태우면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미리 불태우고 오라.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조상제사 하는 것도 딱 잘라 금했습니다. 술․담배를 금했습니다. 교회 나와서 끊으라 한 것이 아니라 끊고 나오라 했습니다. 이를 두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그건 지나쳤다고 점잖은 소리들을 하지만 한국 교회가 부흥되는 까닭이 그런 절대불가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는 '타협'이라는 것이 하나의 미덕일 수 있지만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결단코 비타협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국민의례라 여기면 되지 않는가 했지만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태극기 앞에 절하는 것도 안 된다고 기독교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손을 가슴에 갖다 대는 의식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근본정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현재의 한국 교회는 이러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기에 부흥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복음은 절대입니다. 그러므로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능력은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절대성 앞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100%의 은혜를 주장하는 데서 100%의 충성이 나옵니다. 나의 공로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미 죽었던 몸인데 다시 죽는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죽은 몸이라고 여길 때에 충성이 나옵니다. 그 충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입니다. 털끝만큼도 가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이 진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서슬 푸르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축소․감소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충성을 맹세한 결과, 사람의 기분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더러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고집불통이라고 하든 지독한 사람이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태도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바울을 똑바로 보십시다. 10절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오직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오직 은혜에 응답하고 있기에 그는 참된 종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미움 받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기 때문에 고집불통의 인간, 비타협적인 인간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100% 은혜임을 믿는 절대적 신앙의 그리스도인,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택함과 부르심을 입은 종

갈라디아서 1:11-17

 

 사도 바울이 그동안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많은 도전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자주 언급해 왔는데요. 이제 오늘 본문에는 그가 명실 공히 하나님께로부터 택정함을 받은 사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어떤 객관적인 진리를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에 대한 자기 간증과 고백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진리는 이렇습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복음과 나와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살고 이 복음에 내 운명을 걸었습니다.' 라는 자기 간증, 자기 신앙고백을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주관적인 것에 치우치면 고집만 부리고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객관적인 것에만 치우치면 지나치게 이성적이 되고 냉정해지고 관념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합쳐졌을 때에 마침내 큰 가치를 생산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런 말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 제 아무리 진리를 논리 정연하게 펼친다 하더라도 자기 체험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경험, 나의 신앙 간증, 나의 신앙체험이 함께 해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복음과 자신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나는 복음의 종이다, 나는 복음을 위해 태어났다, 오늘도 복음을 위해 살고 내일도 복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 복음이 나의 생명이며 내 존재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절대 낙심이 없이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사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찰스 스펄젼(Spurgeon, C. H.)목사에게 성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소명이 무엇입니까? 소명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끝까지 피곤하지 않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명을 영어로 콜링(calling)이고 한자로는 부를 ‘소(召)’ 명령 ‘명(召)’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름을 분명하게 들었습니까? 또 오늘도 분명히 듣고 삽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며 산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사울아"하고 부르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 부르심에 "예"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개인적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의문입니다. 부부가 결혼해서 얼마동안 살다보면 싫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 '너는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 살아라.' 하고 지정해 주었더라면 좀 싫어진다고 해도 열심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름과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목회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너는 그 교회를 맡아 그곳에서 평생 일하라' 하고 딱 부러지게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렵다고 하여 쉽게 지치거나 물러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름이 분명치 않다고 느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명이란 무엇입니까? 스펄젼 목사는 소명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심리적으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가장 귀한 일로 생각되어진다면 하나님께서 그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 그 일이 가장 수월해야 합니다. 쉬워야 되지 어려우면 소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려고 할 때에는 이미 거기에 필요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미리 다 준비를 해주셨기에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워야 합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다면 부름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가장 쉽고 가장 자신 있는 일을 즐기며 하는 것이 바른 충성입니다. 굳이 불가능한 것을 붙들고 발버둥 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을 극대화하면서 충성을 하는 것이 바로 소명에 응답하는 자세입니다.

 

 

소명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신학적 이론 몇 가지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소명은 의식 이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기가 깨닫는 날부터 소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모두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의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내가 어느 날, 어느 시에 중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중생을 깨달은 것이지 중생 자체는 아닙니다. 중생은 의식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알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미처 깨닫지도 못할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놓으셨고 그 다음에 그 부름에 대한 깨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아이들이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기억합니까? '내가 너를 젖 먹여 키우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었다'하고 말해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세 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가끔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 믿었다'고 하는 사람을 봅니다. 모태에서 언제 예수를 믿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냥 어머니 뱃속에 있어 딸려 다닌 것이지요. 중요한 일들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의식 이전에 받은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 아는 것은 조금밖에 없습니다. 받은 그 사랑은 엄청난 분량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그 사건, 내가 깨닫는 것은 만분의 하나도 안 될 것입니다.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과 사실에 대한 이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내가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요, 사건은 그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바울이 소명을 깨친 것이 언제입니까? 다메섹 도상 아닙니까?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인 사람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붙잡겠다고 쫓아갔던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놀란 그는 얼른 대답합니다. "뉘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고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위대한 사도로 탄생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 그 순간에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에야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15절에서 굉장한 말씀을 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만세 전부터 예정해 놓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플랜, 영원한 경륜 중에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두 문화권에 걸쳐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유창했습니다. 부모가 이민을 가 미국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영어를 잘합니다. 그런가하면 한국에 돌아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한국말도 잘해요. 두 나라 말이 다 가능합니다. 얼마나 유리합니까? 이처럼 환경과 문화를 타고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여 중학교 가서 영어 배우자니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언어가 수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 문화권에 걸쳐서 성장하는 것은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옛날에는 선교사로 나가려면 헬라어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헬라어가 세계의 통용어였기 때문에 헬라어를 못하면 선교가 어려웠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철저한 히브리 가정에 태어나 히브리 문화에 정통하고, 헬라어와 헬라 철학에도 정통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헬라 철학을 공부했고, 바리새인으로서 철저한 히브리적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심지어 국회의원 격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입니다. 이렇듯 그가 자라 온 생애와 경력은 선교사가 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까지 하고 죽인 경험까지 있기에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거나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렇게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사울아!' 불러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이 부름 받은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모두 부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명을 그때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부름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왜 사업에 실패했을까? 왜 공부에 낙제했을까? 왜 이렇게 지내왔을까? 후회하고 불평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 부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8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갈대상자에 실려 나일강에 떠내려가기 전부터입니다. 바로의 공주에 의해 40년 동안 왕궁에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80세에 부름을 받습니다. 80년 동안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면 적어도 애굽의 문물을 알아야 하고, 높은 지성을 얻어야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또 그것으로 충분치 않아 광야로 보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만드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처가살이 40년이라면 남자로서는 끝난 인생 아닙니까?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호렙산 기슭에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십니다. 80년 세월이 그냥 덧없이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전부가 부름입니다. 귀에 들리는 것만 부름입니까? 그가 귀로들은 것은 80세 때이지만, 사실은 어머니 태로부터 80년 동안 줄곧 부름 받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높은 경륜 안에서, 필요한 문화권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의 경험과 생애를 통하여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자격한 그를 부르신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13절 뒷부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한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부름을 받았으니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매를 맞아도, 감옥에 들어가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름 받은 자의 자아의식입니다. 특히 바울은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바리새인 중에서도 특별히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주께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내가 있게 된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립니다. 재주가 있음도 아니요 능력이 있음도 아니며, 의가 있음도 아니요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주의 종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오늘도 내가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렇게 알고 사는 사람이 주의 종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계시성입니다.

11~12절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쳐서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들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한테 들었고 누구한테 배웠으며 누구와의 관계가 어떻고 하면서 돌려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책에서 볼 수도 있고 남의 경험을 통할 수도 있으며 간증과 설교를 들어서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내가 직접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직접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지식이 아니요 체험입니다.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해서 그의 능력으로 내가 알게 되는 것, 이것이 계시입니다. 내 지식, 내 능력, 내 감정, 내 체험, 나의 모든 것을 다 이용해서 하나님의 전권적인 능력으로 나를 주장하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계시'란 원래 '아포칼뤼프시스.' '너울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결혼식 때 면사포를 벗겨서 서로 마주보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벗겨서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뵙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직접 보았다, 직접 내게 가르쳐 주었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의 습관을 살펴보면 복음에 관한 한은 언제나 직접성을 강조하면서도 일에 있어서는 직접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고 세움 받은 것은 안디옥교회 입니다. 거기서 추천하여 세우고 안수하여 파송한 것입니다. 또한 선교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가서 공회를 열어 해결한 다음에 다시 이방 교회로 떠났습니다. 이처럼 회의를 통해서, 때로는 지도자를 통해서, 일을 간접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것만은 직접 들었다고 말합니다. 행정상의 문제들은 얼마든지 간접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복음에 관한 한에는 직접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자칫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가고 오는 일에 대해서는 마치 직접 받은 것처럼 말하고 복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남으로부터 배운 것처럼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복음은 직접 받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직통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책도 보고 다른 사람의 것도 참고하는 등 여러 모로 준비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계시성입니다. 이것을 카리스마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장하사 직접 설교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를 듣는 자의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듣기는 목사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목사가 설명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 육성을 통해 성령의 역사로 내게 직접 들려지는 말씀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 말씀 저 말씀 다 듣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는 사람만이 은혜를 받고, 이것을 듣는 사람이라야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은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배운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정작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헌신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미 기록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읽어나가고 해설하는 동안 성령으로 감동하사 내게 직접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것에 진실하게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16~17절입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하나님의 종, 계시 받은 사람은 문제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내 앞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볼 때에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은 부모님이나 선배와도 의논하지 않습니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아라비아로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그는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복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왔기 때문에 바울은 문제의 최종 해결도, 구체적인 해결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무개하고 결혼하려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닐까요?” 참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는 부모님께 여쭈어볼 수도 있고, 친구에게 조언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바르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내 운명을 책임질 타인이 없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기도하며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하여야 합니다. 한 처녀가 프로포즈를 받아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친척 한 분을 모시고 이틀 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나서야 결단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그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프로포즈를 받고서 결정하기까지 하룻밤 정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좋다느니 싫다느니 하며 아무렇게나 대답해 놓고는 뒤에 가서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매사를 기도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대학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고, 회사 일도 그렇습니다. 여기 가서 물어보고 저기 가서 물어보고 하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은 기도로써 해야 합니다. 여러 의견과 지혜를 다 동원해보되 언제나 마지막 결정은 기도로 할 것입니다.

 

바울의 자세를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은 이래야 됩니다. 마지막 결정에 대해서는 어느 타인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중대한 궁극문제에 관해서는 혈육과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선배와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그 연후에야 다메섹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기도로써 결정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누가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최종 결정은 기도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고독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순교자가 부모님께 물어보고 순교합니까? 집에 가서 아내에게 물어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기 위해 부모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는 제자를 막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사하러 가면 못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의논하지 말라, 보습과 쟁기를 든 사람이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심각하게 새겨들을 이야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기도하고 '아멘'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다가는 세월 다 가고 맙니다. 기도하고 결정하고 추진해 나갑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 된 자가 지닐 최종판결의 능력입니다.

 

사명 받은 자의 길

갈라디아서 1:18-24

 

 

바울의 극적인 회심은 사도행전 9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회심의 사건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이 바울의 회심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국한되어 있던 기독교를 세계로 발전시키게 되었고, 나아가 오늘의 기독교로 성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울될 수 있었던 것이 이 회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가담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이 사건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다메섹이라는 먼 곳까지 피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곳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붙잡아 공회에 넘기려고 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없애버리려는 철저한 기독교 박해자였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예수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계시적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소명으로 압니다. 운명이 여기에서 확실하게 정해졌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바울의 회심과 같이 중요한 사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험만큼 대단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작건 크건 누구에게나 신앙적 체험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체험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느냐 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결심했으면 그 마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삶의 전환을 가져온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민족은 6․25 한국 전쟁 같은 절박한 형편에서 우선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살아만 남는다면 앞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살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짐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중병을 얻어 수술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소용이 없다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병이 나았습니다. 너무 기뻐서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얼마동안이 지났습니다. 누가 인사를 합니다. “건강해 보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졌습니까?” “글쎄요.”하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 약도 좋고 의학도 많이 발전이 되어서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나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가도 때가 지나고 나면,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을 거라는 둥 약의 효험이라는 둥 우연이었다는 둥 딴소리가 나옵니다. 유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받은 체험은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남이 뭐라 건 세월이 어떻든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약속했으면 지금도 순종하고, 처음에 충성하기로 약속했으면 두고두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기로 약속했으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체험의 질을 희석시킵니다. 그대로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회심의 사건을 소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생을 전환하여 직선으로 살았습니다. 다시 돌아가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이 하나님의 계시요 소명이라고 믿고 그대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 귀중한 신앙적 체험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런 경험 뒤에 후속 조치를 어떻게 했습니까? 은혜를 입고 난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 소중한 체험을 가지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예전처럼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일상에 복귀하거나 돈 벌러 갑니다. 이렇게 당장에 세상 속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어떤 성도님 한 분이 큰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병원에 있다가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불편한 몸인데 그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교회부터 들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기도를 드린 다음에 집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건강만 되찾으면 꼭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여 그 은혜로 건강을 얻었는데 어찌 집으로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부터 찾아 기도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가끔씩 그런 분을 만날 때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저는 이렇게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분에게 특별히 은혜 베풀어주소서. 은혜가 더 충만케 해주소서. 더 건강하게 해주소서.’ 우리가 얻은 체험에는 이같이 후속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은혜 받은 바울의 후속 조치로서 사명 받은 자의 길, 네 곳을 갑니다.

 

첫째, 바울은 아라비아로 갑니다. 본문 앞 절인 17절입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아라비아로 간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곳에 혼자 가서 무엇을 하였는지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신학공부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종교적 경험을 신학화하고, 그 다음에 사명화하여 마침내 행동화한 것입니다. 신비로운 체험을 하자마자 간증부터 하려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아라비아 3년’이 필요합니다. 체험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다시 신앙적으로 소화하고 지식화해야 됩니다. 성경의 어느 맥락, 어느 말씀과 관계가 있는지, 성경적인 진리와 연결을 시켜야 합니다. 또한 받은 신앙적 체험과 자기의 생활과 조화를 이루어 신학화해야 됩니다. 체계화해야 됩니다. 신학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의미, 계시적인 의미를 따져서 체계를 잡아나가는 일입니다. 성경 안에서 일관성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벗어나도 안 되고, 다르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의 맥락에 상통하여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기도하며 연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아브라함에게 찾아 해석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한마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로 요약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성경의 근거를 아브라함에게서 찾습니다. 창세기 15:6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리고 하박국 2:4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두 말씀을 붙들어서 구약성경의 맥락을 꿰뚫어 성서적으로 신학화합니다. 놀라운 발견이요, 엄청난 신앙고백이요, 위대한 신학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체계가 잡힌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 아무리 좋은 신비적 경험을 했더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신앙적으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특별한 체험 때문에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중한 체험을 신학화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다메섹 체험 이후 이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라비아 3년은 바울의 사역 준비기간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했습니까?” “준비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무조건 가면 되지요.” 말도 안 됩니다. 선교사로 나가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나라 언어도 공부해야 하고, 문화, 신학, 교회구조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 동안 준비하시고 3년을 일하셨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급해도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은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는 혼자 가서 깊이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경륜이 무엇일까, 왜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을까’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갈라디아서 1장에 나온 것처럼 ‘아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구나.’ 이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체험을 하게 되면 먼저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실패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닥친 일부터 처리하려들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도한 후에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일은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언제든지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과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받은 계시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훈련시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고치고, 잘라내야 합니다. 아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 째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17절입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다메섹으로 갔다.’ 이것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메섹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곳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 예수를 만나서 회심을 한 후에 다메섹으로 곧장 들어갔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여러 회당을 다니며 증거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9:21에 사람들이 이렇게 바울을 의심합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저사람 간첩이 아니냐? 예수 증거 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았다가 모두 잡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별의별 의심을 다합니다. 그런가하면 유대사람들은 유대사람들대로 바울이 유대교를 배신했다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릅니다. 그 경황에서도 그가 경험한 소중한 바를 다메섹에 와서 전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던 사람이 변하여 이제 예수를 전한다고 하니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또 기도 없이 전하였기에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년 동안 기도를 하면서 신학화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체계 있게 정리한 다음에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실패한 그 자리,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 저들에게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설명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각오로 다메섹으로 갑니다. 지난번에는 기도 없이 갔지만 이번에는 기도하면서 갑니다. 그리고 바울은 과거의 그는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전부 끌어다 죽이려는 마음으로 공문서를 가지고 갔지만 이제는 그 빚을 갚으려고 갑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다. 당신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치고 많은 빚을 졌으니 이제는 복음의 빚을 갚아야겠다.’ 라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진정으로 받은 체험과 복음을 낱낱이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메섹으로 간 이유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은혜에서 한번 실패했다고 한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충분히 한 다음에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되돌아가서 반드시 열매를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갑니다. 18절입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회심하자마자 바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라 회심 후 3년간 기도 생활을 한 연후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지 않고 15일간만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게바, 곧 베드로를 심방하고 주의 형제 야고보 말고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서 교제했다던가, 1년 동안이라도 같이 지내며 성경공부를 했다던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베드로와 야고보, 이 두 사람만 만나 보름 동안 같이 지냈다고 합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바울이 받은 계시와 사명은 인간적인 것, 세상적인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과 직선적으로 이루어진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핵심적인 접촉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쓸데없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지도자인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인 야고보만을 만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교만하여 나만 옳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겸손히 예루살렘으로 가서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인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매우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확실하다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 역시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라면 내게 말씀하셨듯이 당시 라이벌 같은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시고 야고보에게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는 예수, 베드로가 아는 예수를 같이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을 명백히 하려는 것입니다. 단독적이요 계시적인 복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사도적 전승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연결하여 협력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나도 옳지만 그들도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협력을 요청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 개인적인 신앙고백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공동체적이고 교회론적인 의미를 함께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나의 체험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교회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함께 힘을 모을 때에 더 크고 온전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갑니다. 21절입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입니다. 아라비아에서 다메섹, 그리고 예루살렘을 거쳐 이제 고향으로 갑니다. 이 귀향에 담겨 있는 의미를 따져봅시다. 로마서 9:3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영적인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긴 것이 자기 골육의 친척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서둘러서 고향 사람들부터 먼저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법입니다. 기쁜 소식이 있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가까운 친구, 가장 가까운 이웃이 주님 앞에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그 마음이 참으로 귀중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하고 말씀하신 최후의 명령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치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파문이 중심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퍼져나가듯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점점 더 먼 곳으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바울은 누구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척, 친구, 가까운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말씀은 참으로 고귀하다고 하겠습니다. 22~24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바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소문이 이미 퍼졌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지금은 전도자가 되었단다.’ 바울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져나가 이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이 하나님께 돌리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어디로 돌아갑니까? 여러분에 대한 평판이 주위로 퍼져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까? 반대로 욕이 돌아갑니까? 가슴에 손을 얹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에 대한 소문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이 좋은 소문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교회’하면 ‘그 교회는…’ 하고 칭찬할 소문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소문은 전도와 부흥의 비결이 됩니다.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며칠 전 동장님을 만났는데, 그래도 지역사회에서 우리 정락교회에 대한 소문이 비교적 좋게 퍼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핼쓰클럽에서 만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스러운 교회, 인간미가 넘쳐 사랑스러운 교회, 일을 많이 하는 교회, 편안한 교회라고들 합니다. 대단할 것은 없지만 듣기 좋습니다. 언제나 좋은 소문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전도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 은혜가 많습니다. 한번 와 보세요." 이것이 전도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소문이 가족들과 친척 또는 친구들을 통하여 이래저래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의 소문입니까? 그 소문을 듣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야 합니다. 소문이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한다면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바울이 직접 돌리는 영광이 아닙니다. 나로 인해 나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내가 한 일 때문에,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어도 이 소문을 듣는 사람들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morning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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