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갈1:1-5)
본문의 내용은 본 서신의 머리말 또는 서론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Ⅰ. 이 서신을 보내는 인물과 이 서신을 보내는 데 함께 동참한 인물들. 그들은 "사도 바울과 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이었다."
1. 이 서신을 바울이 보낸 것이다. 즉 이 서신의 기록자는 오직 바울 한 사람이었다. 갈라디아인들 가운데는 그의 인격과 권위를 낮게 평가하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 맞서서 그는 자신의 직책과 입장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한다. 이 일을 위하여 그가 불리움을 받은 사실을 그는 본장과 다음 장에서 더욱 상세히 논한다. 그의 직책은 사도였다. 비록 그의 적들은 그에게 그렇게 특징 지운다. 그리고 그가 정당한 근거없이 이러한 직함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그가 이 숭고한 직책에 어떻게 불리움을 받았는가를 저희에게 알린다. 그리고 그의 위임은 전적으로 신적 인데 근거를 두고 있음을 저희에게 주장하다.
왜냐하면 그의 사도됨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반 사역자들이 받는 것과 같은 그런 평범한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었고 하늘로부터 이 직분에 대한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 그는 사람의 중재에 의하여 사도의 자격을 획득한 것도 아니었고 사도가 되기 위해 그가 의도적으로 노력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것을 하늘로부터 직접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직접 그로부터 교훈과 위임을 수여받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신의 속성을 동등하게 지니셨다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임명하셨고 그를 우리의 믿음의 고백의 대상인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삼으셨으며 그에게 다른 사람에게도 이 직책을 임명할 권한을 허락해 주셨다. 바울은 이 하나님 앞에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이란 말을 덧붙인다.
이로써 사도는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그의 아들되심과 약속하신 메시야 되심을 공개적으로 증언하셨음을 알려 준다. 또한 그의 사도직의 소명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영광된 자리에 계실 때 받은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이 다른 사도들과 똑 같은 계열에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그들보다 앞서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실 때 소명을 받은 데 반하여 그는 예수께서 하늘에 계실 때 그에게 소명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사도는 그의 사도직이 그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에 의해 압력을 받게 되자 자기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밝힌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결코 자기가 지닌 권위를 자랑해서는 안 되지만 경우와 때에 따라서는 그것을 주장하는 것도 필요로 함을 보여 준다.
2. 이 서신을 쓴 것은 바울이었으나 그는 서신을 기록하는 자 가운데 그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도 포함시킨다. 그리하여 자신이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도 기억되게 한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란 바울이 현재 머물고 있는 같은 장소에 있는 기독교인들이거나 또는 복음의 사역자로 불리움을 받은 자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그들보다 우월한 인품 또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그의 형제라고 서슴치 않고 부른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의 고귀한 겸양과 겸손을 보여 주었고 또 그가 우쭐거리는 자들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가를 나타냈을 뿐만아니라 그의 편지를 받는 교회들에게 그가 쓴 편지에 대하여 고귀하게 대하여 마음을 갖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써 그가 가르쳤고 이제 다시 확고하게 라려는 교훈을 그 형제들도 일치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여 다른 자들에 의해 발표되고 고백된 신앙이나 자기의 신앙이나 별 차이가 없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Ⅱ. 서신의 수신인. 그것은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었다. "당시 이 지방에서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교회들은 모두 그들 가운데로 몰려 숨어 들어온 현혹하는 자들의 궤교로 인하여 얼마간 타락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자나깨나 늘 이 모든 교회들에 관하여 염려하는" 바울이 저희의 처한 현실에 깊은 연민을 느끼고 또 저희가 다시 복음에 대한 믿음에 굳게 서게하려는 배려로 이 편지를 그들에게 쓴 것이다. 그는 그들 모두가 현혹하는 자들의 술수에 많든 적든 간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편지를 그들 모두를 대상으로 썼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교회의 명칭을 몰수할 만한 짓을 저질렀지만 교회의 이름을 들어 그들에게 편지한다. 사실 본래 타락한 교회는 결코 교회라는 칭호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틀림 없이 그들 가운데는 계속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 신앙으로 복귀되기를 바랐다.
Ⅲ. 사도의 축복(3월). 여기서 사도와 그와 함께 한 형제들은 이들 교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다. "은혜와 평강"은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들을 축복할 때 늘 사용하는 축복의 말씀이다. 은혜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요, 우리를 위한 그의 선하신 행위이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우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근원지로서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며 전달 기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이 두가지를 사도들이 이들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가 먼저요, 그 다음에야 평강이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혜없이는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한 후 그가 지니신 사랑에 대하여 말씀한다. 즉 "그는 이 약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몸을 드리셨다"(4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즉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큰 희생물이 되셨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 희생을 요구하셨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이 요구에 자진하여 복종하셨다. 그의 한 가지 위대한 목표는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는 것"이다. 즉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곧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욕망으로 인하여 부패된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가 나면서부터 그것의 노예가 되고 있는 이 세상의 사악한 행실과 관습에서 우리를 건지신다. 또한 그는 모세가 세운 제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aivw/n on-toj"란 용어를 여기 사용한 것이다(고전 2:6, 8).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1. 현재의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또한 죄와 슬픔이 세상에 가득 차 있으며,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이 세상에 있는 수 많은 함정과 유혹에 노출되어지는 것이다.
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현재의 이 악한 세상에서 건지시려고 죽으셨다. 그것은 그의 백성을 즉시 이 세상으로부터 데려가신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권세로부터 그들을 건지신다는 말이요,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말이요, 때가 이르면 그들을 더 좋은 다른 세상에 살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사도는 이 일을 그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이러한 목적과 취지로 인해 자신을 희생물로 드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자유 의사로 승낙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아버지의 의사에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시고 겪으셨으므로, 주어진 효능과 용납해 주심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까닭에 우리는 또한 용기를 얻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는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인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이 아버지도 되신다. 이 사실은 우리의 복이 되시는 구세주 자신이 그가 그의 아버지요 또한 그들의 아버지인 분에게 승천하실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사실이다(요 20:17).
이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알린후 그리스도에게 엄위로운 찬양과 영광을 돌림으로 이 서문을 종결짓는다(5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우리들도 최대의 존경과 경의를 그에게 드려야 할 것이다. 본문의 영광의 찬가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게 동시에 돌리는 찬미로도 볼 수 있다. 사도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두 분의 이름으로 기원한 것을 보아서도 이 이론은 수긍이 가는 것이다. 두 분 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기를 마땅한 분들이시다. 모든 영예와 영광은 영원히 그분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이는 그들의 무한한 질적 우수성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그들로부터 받은 축복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결함에 대한 사도의 염려(갈1:6-9)
여기서 사도는 서신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들 교회들의 신앙의 흔들림에 대하여 그들에게 전반적으로 책망함으로 본론을 시작한다. 이 책망은 본문에서 여러 번 나오며 더욱 구체화된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Ⅰ. 그들의 신앙적 결함에 대한 그의 관심. 이에 대하여 그는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본문에 말하였다. 이 사실은 그의 마음을 즉시 대단한 슬픔과 놀람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은 기독교의 교훈을 그들에게 전해 준 대로 견고히 붙잡지 않고 있는데 있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의 순수함과 단순함으로부터 떠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크게 책망을 받아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그들이 그들을 "부르신 이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희를 복음의 친교 속으로 불러 들이는 데 도구 역할을 한 사도로부터 떠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떠났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에 의하여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된 것이었고 그들이 복음의 특권에 참여하도록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떠남으로 그들을 향해 베푸신 그의 친절과 긍휼을 크게 훼손시키는 죄를 그들이 범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불리움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전하여진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가장 영광스럽게 기록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은 가장 위대한 축복과 은혜에 불리움을 받게 된 것이었다. 즉 현세의 외롭다하심(Justification)과 하나님과의 화해 또한 장래의 영생과 행복에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이 모든 것들을 우리를 위하여 그의 고귀한 피를 치르시고 사셨다. 그리고 그를 정중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증여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향유한 특권이 큰 데 비례하여 이러한 특권을 버리고 스스로 이러한 축복들을 획득할 수 있는 바른 길에서 이탈한 저들의 꾀와 어리석음도 커지는 것이었다.
3. 그들이 "속히" 복음에서 "떠났기"때문이었다. 매우 짧은 순간에 그들은 그들이 지닌 것처럼 여겨졌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뿌리 깊이 혼합해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타락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넘어간 것은 그들의 연약함의 실례요, 나아가서 저희의 꾐에 빠짐이 그들로 자기들의 죄를 한층 무겁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4. 그들이 "다른 복음"을 좇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다른 복음은 없다"고 바울은 장담한다. 사도는 이 말을 통하여 유대 교사들의 가르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복음에서 계시된 의인과 구원의 방법과도 전혀 다른 의인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받는 길을 그들이 제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뜻으로 이 말을 하였다. "너희는 그것이 전혀 복음이 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거나 그 복음의 기초를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계시된 것 이외에 다른 하늘 가는 길을 세우려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부 파괴하는 죄를 짓는 것이며 이러한 것을 추구함을 통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커다란 실수를 범하였음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같이 사도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에 의해 의롭게 되는 길을 떠난 그들의 죄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 사실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그들을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책망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진하여 저희들이 가르침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의 간교함과 끈질김에 의하여 넘어간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나. 그들의 잘못의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이유는 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신실할 것을 가르치시며 또한 우리도 남을 책망할 때 상냥하게 할 것이며,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들 바로 잡으려고" 애써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6:1).
Ⅱ.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가르친 것이 오직 참된 복음임을 자신있게 확증한다. 그는 이 사실을 너무나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복음을 가르치고자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8절). 그리고 그는 이러한 저주가 그의 난폭함이나 또는 걷잡을 수 없는 불 같은 성격에서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님을 저희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9절에서 다시 이 사실을 반복한다. 이러한 말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와 사소한 견해 차이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저주를 퍼부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다만 새로운 복음을 꾸며내는 자들에 대한 것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義) 대신에 율법의 행위를 앞세움으로 은혜의 계약의 기초를 전복하려고 하며 기독교를 유대주의로 전락시키려고 하는 자들인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복음을 배척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정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거짓말을 전하는 사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만일 너희가 우리의 이름을 빙자한 다른 사람에 의해서거나 또는 천사 자신에게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자에 의해 너희에게 전해지는 다른 복음을 받는다면 너희는 속임수에 빠진 것이요 누구든 다른 복음을 전한 그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요, 그것을 받아들인 너희도 그 저주 아래 처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사도의 자기 변명(갈1:10-24)
이 서신의 서문에서 일반적인 측면에서 말씀한 것을 바울은 보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전개한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선언했다. 이제 본문에서 그는 보다 직접적으로 자기 인품과 직책에 대한 권한을 주장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바울의 인품과 직책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례적인 율법을 설교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한 바울의 명성을 떨어뜨리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그의 사명과 가르침이 신적인 데 근거를 두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로써 그는 그의 적들이 그를 향하며 던진 비방을 일소해 버리고 갈라디아의 교인들로 하여금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 충분한 증거로 제시한다.
Ⅰ. 그의 사명의 범위 및 계획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변호한다. 즉 그의 사명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기에게 이 사명과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에게 복종한다는 뜻의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또는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복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에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행동한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처럼 이제 그가 주로 목적하는 것은 죄인들을 그에게 복종케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임을 고백한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목적이므로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구하지 않았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는 가르칠 때 인간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호감을 사려 하지도 않았고, 또 그들의 미움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일이었다. 교회를 타락케 한 유대교적 경향이 짙은 교사들은 매우 다른 원리를 고안해 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고 행위에다가 믿음을, 또 율법에다가 복음을 혼합시켰다. 그들은 유대교인들의 바위를 맞추며 사이좋게 지냄으로 박해를 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는 다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하여 또는 그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변경시켜 이로써 저희를 기쁘게 하려고 열을 내지도 않았고 또 자기를 향한 저희의 분노를 달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 주는 좋은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그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전혀 병존할 수 없음을 알았다. 또한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쓸 데 없이 어느 사람이고 불쾌하게 해 주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실함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추호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그의 목적과 취지의 신실함을 들어 그는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입증한다. 이러한 바울의 생각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게 된다.
1. 복음의 사역자들이 목적 삼아야 할 가장 큰 목표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신실한 사역자들이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3. 사역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입증하고자 한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열성을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논증만으로는 불충분하게 여겨지어 계속해서 그의 사도직을 입증하고자 한다.
Ⅲ.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받은 방법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자기가 전한 복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계시에 의한 것임을 그들에게 확증한다. 사도가 지녀야 할 속성 가운데 한 가지 특성은 그가 불리움을 받고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직분은 직접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수여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점에서 자기의 적들이 아무리 반론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결코 결함이 없음을 본문에서 제시한다. 일반 평범한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중재에 의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사명을 받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교훈 전수와 협조에 의하여 복음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권한 뿐만 아니라 복음의 내용에 대한 지식도 직접 주 예수께서 받은 것임을 알린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복음을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직접적인 영감과 계시에 의하여 전수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사도됨을 입증하기 위하여 규명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다음의 사실들을 말한다.
1. 그는 회심 이전에 그가 받았던 교육과 지내온 환경을 그들에게 말한다(13,14절). 특별히 그는 그들에게 그가 유대교의 신앙 속에서 양육되어져 왔으며 "자기가 자기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고, 그의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였음을" 알린다. 즉 그는 그들의 조상들에 의하여 창안되고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되어 온 가르침과 관습을 그대로 지키는 데 열성이었다고 한다. 조상의 유전에 대한 그의 열성이 이러한 정도였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나칠 정도로 핍박하고 잔해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신적인 유래를 지닌 것이라고 하는 많은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을 거부하는 자로 지내왔을 뿐만 아니라 그 신앙에 대한 열성적인 핍박자 노릇을 하였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을 뿌리채 뽑아 버리려고 폭력과 위협 등 가진 수단을 다 써왔음을 말한다.
이 사실을 그가 자주 언급한 것은 그의 안에서 지금과 같은 놀라운 변화가 있게 한 자유롭고 부요한 은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이 큰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신실한 참회자가 되었고, 박해자 노릇을 하던 것을 그만두고 사도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여기에 언급한 것은 다음 같은 이유 때문에 더욱 적절한 것이었다. 즉 그가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 속에서 양육되어져 왔기 때문에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순전히 교육에 의하여 기독교로 인도됨을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였음이 이로써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말을 듣고 나면 그들은 그에게 이렇게 큰 변화를 일으켰으며 그로 하여금 자기가 받은 교육의 편견을 버리게 하고 전에 그렇게 반대하였던 교훈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전하게 한 것은 매우 비범한 역사(役事)가 작용한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2. 얼마난 놀라운 과정을 거쳐서 그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신앙으로 인도되었고 사도의 직분을 임명받았는가를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15,16절). 이 일은 평범한 과정을 통해 또는 일상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다음과 같은 비범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 하나님이 그를 "그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 그의 안에서 일어난 변화는 그에 대한 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 까닭에 그는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또는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기독교인과 사도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았다." 회심을 하고 구원의 길로 들어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저희의 회심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결과요, 저희 안에 그의 능력과 은혜가 역사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에게 주어진 변화의 돌발스러움과 위대성, 또한 그것이 이루어진 과정에 있어서 특별한 요소가 있었다. 그의 회심은 그 도구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에 의한 것으로 그가 바울에게 모습으로 보이사 직접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회심은 신의 능력과 사랑의 더욱 특별하고도 비범한 역사의 결과인 것이 입증되는 것이었다.
(3) 그는 하나님을 통하여 "자기 안에 나타내진" 그리스도를 대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에게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바로 바울 안에서 나타내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나타내시진 않고 그냥 우리에게 외적으로 나타내지는 것만으로는 거의 소용이 없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안에 당신의 아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또한 바울에게 특수하고 직접적인 계시에 의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그를 인도하고 그의 복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4)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바울에게 나타내신 것은 그로 하여금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한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바울을 자기 것으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계시에 의하여 기독교인과 사도가 된 것이었다.
3.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그 후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그는 그들에게 알린다(16-24절). 이같이 이러한 과업과 직분에 불리움을 받자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의 은혜에 의하여 우리를 부르실 때는 혈육과 의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본문의 말씀은 그가 인간들과 의논한 것이 아님을 뜻하고 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사도들에 의하여 인정받는 것과 그들에게서 또 다른 지시나 권위를 위임받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그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다른 코스를 택하여 "아라비아로 갔다."
그것은 이곳이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을 받은 후 좀더 신의 계시를 받고 또 거기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적절한 은거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그는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첫 사역을 착수하였고 그때 그의 적들의 전으로부터 간신히 피신해 나왔었다(행 9장). 그 후 그는 회심한 지 "삼 년이 지나서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가 그에게 갔을 때 그는 게바와 불과 십오일 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있었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기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나 복음을 전하는 권위에 대하여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진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사도직에 대한 그의 자격이라든가 그 일에 대한 부름받음은 특별하고도 신적인 것임이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사도직에 대한 그의 권리를 확립하고 그를 비방하는 자들의 부당한 비난을 제거하고 갈라디아인들이 그에 대하여 들은 편견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위의 중대한 설명을 바울은 엄숙한 맹세에 의하여 확인한다(20절).
즉 그가 말한 것은 엄밀한 진실이며 그가 말한 것에는 조그만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서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사사건건 하나님을 들어 맹세하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중대하고 결정적인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는 이러한 선서는 합법적인 동시에 우리의 의무임을 보여 준다. 이 말은 하고난 다음, 그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즉 그는 잠간 베드로를 방문한 다음에 다시 그의 일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당시에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교분이 없었고 그들 중에 그의 얼굴을 본 사람도 흔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들을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이러한 일을 이루신 데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의 안에서 나타난 이런 능력있는 변화에 대한 그 보고가 유대에 있는 교인들도 기쁨으로 충만케 하였고 그들의 마음에 감명을 일으켜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라디아서 2장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0) | 2021.05.02 |
---|---|
갈라디아서 1장 -은혜의 복음, 구원의 복음/ 사명자의 길 (0) | 2021.05.02 |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보낸 삼 년(갈1:17)의 진실? (0) | 2021.05.02 |
성령의 열매 - 주일학교 자료 (0) | 2021.05.02 |
고린도 후서 5장- 새로운 피조물과 화목케 하는 직책 (0) | 2021.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