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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고린도 후서 5장- 새로운 피조물과 화목케 하는 직책

by 은총가득 2021. 4. 25.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린도후서5:1-5)

바울은 5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광과 영생에 관한 실제적인 증거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바울이 4:17절에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했는데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1절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18절에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돌아보는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바울은 1절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 말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다하여 죽으면’ 이란 뜻입니다. 육신은 죽게 마련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누구든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혈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장막이란 스케누스(σχἠνους)로 천막이란 뜻입니다. 천막은 고대 유목민들의 일시적인 거처로 이 천막을 인체로 비유한 것은 인간의 육신이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란 뜻으로 한 말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땅의 장막처럼 만들어진 육신이 죽으면’ 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여기서 사람의 몸을 장막으로 표현하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이 장막과 비교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땅에서 살아갈 동안은 우리의 생명의 장막이 우리의 육신에 있지만 하늘에는 참 생명이 들어가 사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장막이 필요 없고 천국 그 자체가 우리의 장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의 거처가 되는 천국은 이 세상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집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요 시일이 지나면 낡아지고 쇠하여지지만 하늘에 있는 거처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그런 집은 영원한 집입니다. 다시는 우리의 생명이 무너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집이 있는 줄 바울은 안다고 했 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주님의 계시를 통해서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인 낙원에까지 올라가 사람의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2. 덧입기를 사모하는 우리들

바울은 2절에서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덧입는다는 말은 썩어질 것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입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우리의 썩을 이 육신이 죽고 새롭게 만들어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는 말입니다. 헌 옷을 벗으면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바울의 말은 궁극적으로는 부활의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활은 덧입는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옷입니다. 이 옷을 입기까지 우리는 부득불 썩어질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소망은 이 육신의 사람이 이 땅에서 오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벗지 아니할 옷으로 덧입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처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며 이 소망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우리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만약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져 버려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벗은 몸이란 말은 부끄러운 몸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처소로 덧입지 못한 몸을 의미합니다. 이 몸은 구원의 소망이 없는 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몸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계22:15절에서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 밖에 머무르는 몸은 하늘의 처소로 덧입지 못한 몸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한 확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일을 누가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이 모든 일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
(고린도후서5:6-10)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담대한 믿음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몸에 거할 때에는 이란 말은 우리들이 육신의 장막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이란 뜻입니다.


1. 주와 따로 거하는 이 세상에서의 생활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은 주님과 따로 거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영적인 연합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은 영적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이 일은 영적인 연합이지 별개의 인격체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거가 아닌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천국에 계시고 우리는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영적 연합 관계에서 실제적 동거 관계로 바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계21:3절에서 이르시기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관계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생활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구원이나 영생이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이나 이 모든 문제들은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적인 문제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믿음이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고 하늘에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싯점이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담대한 믿음

8절에 나오는 바울의 믿음의 증언은 너무나도 우리에게 소망을 주며 천국을 사모하는 믿음을 심어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하면서 “담대하여 원하는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육신의 생명이 죽는다는 문제는 그리 쉽게 받아넘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생애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담대하여 원했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진심으로 원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담대하여 원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 생활은 살아서 주와 함께 영적으로 살아가는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몸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이 바울의 말은 1절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시켜야 할 말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한 그 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집에 들어가면 주님과 실질적인 대면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생활이 실제로 이뤄질 것입니다. 이 집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과 함께 살아가려면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여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아가려는 의욕보다도 속히 죽을 몸을 벗어버리고 다시 말하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죽음의 과정을 지나 천국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런 확신에 찬 담대한 말을 듣고 천국에 대한 더욱 큰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천국에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믿음만 가진다면 우리의 생애는 얼마나 홀가분할 것입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운 부담보다는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소망이 더욱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자기 생각에는 차라리 몸을 떠날 수 있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로써 자기의 맡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의 9절에 나오는 말씀은 바울이 생존 동안 주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생애는 하늘의 상급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런 상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생애를 살다가 주님께 가야 보람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고린도후서5:10-12)


바울은 10절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드러나는 이유는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자세에 대해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와서 그런 보상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자신이 행한바 에 따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심판대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자리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인만의 상급 심판을 가리키는지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우리가 다 반드시’라고 한 말을 볼 때 우리 란 말은 불신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만을 가리키며 이 가운데 불신자가 들어간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대란 말은 구원과 멸망의 최종적인 판가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모든 선악간의 최종적인 판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도 선과 악이 있습니다. 선은 순종의 생활이요 악은 불순종의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의 생활이 지옥의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지은 죄악이기 때문에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 죄입니다. 그러나 이 죄악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상급에 결정적인 치명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만의 상급의 표준을 최종적으로 선고받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인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들은 다 이 자리를 거쳐 자신의 선악의 행실을 따라 하늘에서 받을 면류관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 자리를 거치지 않을 그리스도인 들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딤후4: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는 재판장에 의하여 상급 심판이 진행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판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 되시어 그 자리에 앉아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자리는 천년왕국이 지난 후, 곧 있을 하늘에 베풀어질 ‘흰 보좌 심판’ 때에 있을 것입니다.

이 때 불신자들은 ‘흰 보좌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염소로 비유하시고 왼쪽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양으로 비유하시고 오른쪽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에게는 이처럼 언도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염소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많은 상급을 얻기 위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주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5:58절에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알리어진 바울

바울은 11절에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 했습니다. 두렵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에 대한 경외심을 말하고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주로서의 두려움을 경종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 하나님 앞에 알려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복음의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부심이 그의 마음에 넘쳤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인 중에는 바울에 대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졌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 :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고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거나 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로 인하여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그들에게 가질 수 있게 하여 사실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외모로만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상금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에 대비하여 많은 공력을 쌓아 그 날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
(고린도후서5:12-15)


바울은 15절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어떤 삶의 목표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우리를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바울은 13절에서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복음을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 앞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바울에 대하여 미쳤다고 비방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눈에 바울의 열정적인 복음에 대한 열의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의 복음이 잘못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바울을 미친 사람으로 매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자신이 미쳤어도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울의 마음을 휘어잡았고 그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열정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의 불가항력적인 열의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런 일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 미친 것이라고 위안을 받았으며 그러나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이처럼 미친 사람으로 조롱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로 그토록 복음에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핍박과 조롱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14절과 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물론 그리스도이시며 모든 사람은 그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 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왜 죽어야 합니까? 그것은 죄로 인한 보응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의 죽음을 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대신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하며 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담 이후,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죄인의 혈통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며 완전한 의인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죽어 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죄 값으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누구든 죽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은 사실상 죽음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죽으심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죽으심 안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적용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로 다시는 자신의 생애를 위하여 살지 않고 대신 죽어 주신 분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는 뜻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로 죽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 죽었으니 이제는 이미 죽은 옛사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위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 분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이 그곳에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5:16-17)

바울은 17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창조물을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아담의 죄로 오염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육체대로 판단하지 말라


육체의 판단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 기준을 자신의 육적 기준에 둔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적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들은 영적 사람들입니다. 믿음도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모두 영적 실체들입니다. 만약 다른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육체의 경험이나 지식에 따라 판단하려 한다면 그런 판단 기준은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바울을 판단하는 방법이 그러했기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의 진실한 복음의 사역자란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아무라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하 반절에서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이전에는 육체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이해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올바른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영적 지식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일에 인간적인 지혜나 논리가 들어간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자가 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구세주로서의 증거는 오직 영적 지식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17절에 나오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이란 말은 ‘아직까지 바울이 증거한 바에 따르면’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일이 우리의 죽으심을 대신 하신 것이기 때문에 곧 우리의 죽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존재에 크다란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아직까지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새로운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말씀으로 니고데모를 이해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는 것이 아닙니까’고 묻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정말로 하나님에 의해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물론 육적 존재로서의 재창조가 아닙니다. 육적인 존재의 창조는 아무리 만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영적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바로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일에 있어서 ‘성령으로 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피조물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육신을 가지고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그의 생명은 정죄 받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이런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찾으면 안됩니다. 지나간 죄악의 사람을 따라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죄도 지나갔고 심판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죽을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가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5:16-17)

바울은 17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창조물을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아담의 죄로 오염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육체대로 판단하지 말라

육체의 판단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 기준을 자신의 육적 기준에 둔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적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들은 영적 사람들입니다. 믿음도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모두 영적 실체들입니다. 만약 다른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육체의 경험이나 지식에 따라 판단하려 한다면 그런 판단 기준은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바울을 판단하는 방법이 그러했기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의 진실한 복음의 사역자란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아무라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하 반절에서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이전에는 육체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이해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올바른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영적 지식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일에 인간적인 지혜나 논리가 들어간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자가 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구세주로서의 증거는 오직 영적 지식에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17절에 나오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이란 말은 ‘아직까지 바울이 증거한 바에 따르면’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일이 우리의 죽으심을 대신 하신 것이기 때문에 곧 우리의 죽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존재에 크다란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아직까지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새로운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말씀으로 니고데모를 이해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는 것이 아닙니까’고 묻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정말로 하나님에 의해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물론 육적 존재로서의 재창조가 아닙니다. 육적인 존재의 창조는 아무리 만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영적 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런 일은 바로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일에 있어서 ‘성령으로 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피조물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육신을 가지고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그의 생명은 정죄 받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이런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찾으면 안됩니다. 지나간 죄악의 사람을 따라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죄도 지나갔고 심판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죽을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가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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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케 하는 직책
(고린도후서5:18-21)


바울은 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란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사역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구원 사역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1. 화목케 하는 직책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로 죽게 하사 우리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원래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사탄 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죗값을 그리스도로 대신 지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죗값을 갚았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케 하신 것은 우리들로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시기 위해서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케 하는 직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된 이 사실을 전파하여 다른 사람들로 우리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시키도록 하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전함으로 죄인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을 천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먼저 화목함을 받은 우리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명감에 철저했습니다. 그의 서신서를 보면 모든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려는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그가 그토록 어려움을 겪으며 복음을 전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1:14절에서 이런 사명감에 대한 표현으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구원의 여망이 없는 것입니다.


2.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하나님

19절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란 말씀은 인간의 죄를 인간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에게 대신 짊어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와 당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놀라운 복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그 이치를 깨닫게 하시어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통해서 세상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대해 20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책입니까? 사신이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화평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죄인들의 살길입니다. 멸망에서 영생으로 살아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입니다.

21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 때문에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겨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가진 의나 우리가 가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얻은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가 잘 간직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병석 목사>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는 성도의 삶(고후5: 1-10)

 

 

1. 땅에 있는 장막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1-3)

 

모든 인간들은 생존하는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 역시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소중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영역일 뿐 영원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다. 사도바울은 편지 가운데서 그에 연관해 지상의 장막 집(earthly tent)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의 그 말은 넓은 의미로 보아 두 가지 의미(dual meanings)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육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an eternal house in heaven)이란 세상에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장막과 완전히 대비되는 말이다. 인간들은 지상의 거처에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나름대로 그럴듯한 공간을 꾸미며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지만 그곳은 잠시 머무르는 일시적인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천상의 나라에는 성도들이 영원토록 살아갈 아름다운 집이 예비 되어 있다. 그 집은 인간들의 두뇌와 손에 의해 건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집이다. 만일 인간들의 기술력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완벽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집은 그렇지 않다.

 

또한 장막에 관련된 바울의 말 가운데는 인간의 몸에 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쇠약해져 갈 수밖에 없으며 결국은 죽어 썩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완벽한 부활의 몸이 제공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어질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본문 가운데서, 성도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한다고 한 말은 그에 연관된 의미이다. 이는 인간의 몸이 본질적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앞에 언급된 ‘지상의 장막’이 한정적이고 일시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천상의 세계로의 이동을 전제하고 있다면, 나중에 언급된 것은 ‘인간의 썩어질 육신’으로부터 부활을 통한 영원한 몸으로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바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땅에서 그 의미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완벽한 부활의 몸을 입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부활을 소유한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한다고 한 말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장막 집을 벗을지라도 새로운 몸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또한 성도들이 타락한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이는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성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타락한 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사탄이 지배하는 죄의 영역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사이에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상호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세력과의 싸움을 위해 잠시도 방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 선한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요구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0-17)

 

이 싸움은 생명을 건 전투와도 같다. 나아가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다. 그 싸움을 위해 성도들은 온 몸에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전투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거룩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다. 이에 반해 사탄의 영역이 가진 속성은 공격적이며 파괴적이다.

 

따라서 세상과 상이한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핍박은 형식적 세력을 동반한 물리적인 핍박이 될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이 추구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으며 그들의 가치관을 배척할 때 상당한 핍박이 따르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탄식하며 신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교인들은 전투중인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총성이 터지고 주변에 지뢰가 가득 깔려 있는데도 그 위태로움에 둔감한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항상 그들을 일깨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의 장막은 멀지 않은 장래에 완전히 파괴되어 버려야만 할 임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종말의 때가 이르게 되면 천상으로부터 임하는 영원한 처소로 덧입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 속한 참된 성도들은 타락한 세상에 소망을 두는 대신 영원한 집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자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상의 장막에 살 동안 어떤 신앙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교훈하고 있다. 잠시 지나가는 임시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곳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라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1: 12-14)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영원한 진리에 서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연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실패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참된 소망을 갈구하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항상 그에 연관하여 어린 성도들을 일깨워주고자 애썼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 때 임시로 세워진 장막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장막이란 정착된 것이 아니라 조립과 해체를 되풀이하는 이동식 집을 의미한다. 이는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지상에서의 장막을 완전히 벗어나게 될 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성숙한 성도들이 소유해야 할 참된 지혜는 세상에서의 장막을 벗어날 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영원한 천상의 세계의 도래와 인간의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2. 이 땅의 장막에서의 탄식 (4, 5)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영원한 천국시민권의 신분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망이 지배하고 있지만 영원한 천국에는 참된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에 속했다는 사실은 세상에서의 어떤 환난과 핍박도 능히 이길 수 있음을 말해준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성도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 20,21)

 

 

우리의 시민권이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있다는 사실은 지상 교회와 연관 지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는 이 땅 위에 존재하지만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며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외관상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세상에 속한 자와 천국에 속한 자로 크게 나눠진다. 그 양자는 영원한 삶에 대해 서로 간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항상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융화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힘든 형편 가운데서 탄식하며 살아간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삶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진 듯 힘이 들 것이며, 빨리 그 짐을 내려놓고 싶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성도들은 신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를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것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을 덧입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소망이 되어 있다. 이는 그것을 통해 사망에 승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함성은 전적으로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자녀들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보증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신의 성령을 보내주셨다.

 

또한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고후5: 4)는 사실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와 동일한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15: 53,54)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몸은 후패하고 썩을 수밖에 없다. 무서운 죄에 빠져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육신이 후패해져 가게 된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역사 가운데는 수많은 인간들이 죽음을 미루고 수명을 연장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은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막을 만한 아무런 방도가 없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만이 안전한 보장을 약속할 수 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그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성취가 이루어질 때 ‘생명’은 사탄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사망’ 위에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3. 믿음으로 행하는 삶(6-8)

 

하나님의 자녀들은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항상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 해도 결코 위축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에서 병약하거나 남 보기에 그럴듯한 형편에 있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는다.

 

나아가 많이 세상적인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고 설령 무능한 것처럼 보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멸시를 당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지나친 분노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처한 열악한 환경에 상관없이 악한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교회의 성숙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부유하며 건강하다고 해서 그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는다. 많이 배워 지식이 넘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칭찬과 명예를 얻는다 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 이는 저들의 그런 삶이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육신이 천상에 계시는 주님과 떨어진 상태로 존재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신체적으로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신앙적인 삶의 자세는 분명해야 한다.

 

천국시민으로서 영원한 천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변에 널려있는 가시적인 조건들에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믿음에 따라 행하며 살아간다.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는 이 세상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천국에 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지나가는 이 세상에 강한 집착을 보이지 않으며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고 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믿음의 선배는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 1,2)

 

성도들이 소유한 믿음은 단순한 이론이나 상징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이며 실상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참된 믿음은 육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지만 영원한 것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전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그 믿음을 통해 참된 증거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최종적인 분리가 이루어지는 죽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자 하는 욕망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자세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천국에는 타락한 세상과는 달리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만 존재하며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찬송과 경배만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로 얼룩진 복잡한 세상을 떠나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4.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하나님의 자녀들 (9, 10)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의 욕망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들은 제한적인 인생의 의미를 잘 깨달아 알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죄에 물든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따르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의 죽음에 연관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 27,28)

 

인간은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감하고 죽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자들과 유물론자들은 불멸의 존재로서 인간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원시 상태의 미물(微物)로부터 진화한 인간은 그 근본을 단세포 물질에 두기 때문에 인간들 역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즉 인간들은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된 단백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생이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 세상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 자체의 영원성에 관한 의미가 아니라, 유기체로 존재하는 인간사회에서 개별 인간들이 어떤 역할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현상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상이자 행위이다. 그런 자들은 삶의 본질을 무시한 엉터리 주장을 하면서도 이 세상에 살면서 가시적인 업적을 남기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면 그것이 마치 영원히 갈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므로 가시적인 현상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천상의 세계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는 불신자들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있을 수 없다. 그에 반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에 참여한 성도들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소망이 있다. 신자든 불신자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죽게 되므로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 기준은 세상에서의 윤리적 삶과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공적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휼하셨으며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는 죄가 전혀 없는 분이었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셨다. 그것은 물론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사역을 통해 거룩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속죄와 화목을 위한 제물로 바치셨다.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깜깜한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 후 여러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천상의 나라로 승천하셨다. 그 때 그는 멀지 않은 장래에 올라가신 그대로 재림하시라고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주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오시게 될 것이다.

 

그 놀라운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는 성도라면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살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모진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살게 된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그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7-9)

 

 

교회에 속한 성도들 생명은 이미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피로 값 주고 그들을 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거룩한 피를 흘리신 것은 성도들을 자기에게 속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삶은 결코 스스로 손해를 보거나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렇게 사는 것이 저들에게 가장 훌륭한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 스스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에 연관되어 있을 때 진정한 인생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살든지 죽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하는 가운데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고후5: 11-21)

 

 

1.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는 인간들 (11, 12)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경외해야 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죄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악이 가득한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창세전에 작정하신 언약과 진정한 그의 사랑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이 경험한 일반적인 사랑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우리시대에는 하나님을 ‘사랑의 주님’으로 인식하면서도 참된 의미를 상실한 채 경거망동하게 대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따라 종교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있을 따름이다.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하면서 마치 인간을 대하듯이 인간적인 구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사도바울은 엄위하신 주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권면했다. 그는 자신은 물론 함께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그대로 드러난 상태이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된 상태이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진실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올바르게 깨달아 알기를 원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은 본질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자신의 비밀스런 부끄러운 일들을 누구에게나 숨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전지전능하신 조물주의 눈길마저도 피할 수 있는 듯이 착각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참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다. 나아가 어리석은 교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 된 본질을 망각한 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의롭고 떳떳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더러운 죄에 빠진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올바르게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온전히 의존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모든 죄를 낱낱이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 12,13)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말씀은 성도들에게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성경은 지상의 교회들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역사하고 있으며 성도들의 마음속에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그 말씀은 강력한 운동력이 있으며 양쪽에 날 선 예리한 칼보다도 더 날카롭다.

따라서 그 말씀의 칼은 인간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그 어떤 기관도 숨겨질 수 없다. 나아가 기록된 말씀은 인간들의 마음과 머릿속에 존재하는 생각들을 비롯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사상들조차도 정확하게 분별해 낸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만물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죄악에 물든 우리의 더러운 모습도 마지막 때가 되면 그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지게 된다. 인간들의 모든 것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시게 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은 앞으로 그런 일이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의 외양(外樣)을 화려하게 꾸미고 그것을 자랑하는 가운데 교만해져 간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종말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그에 대처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자신의 더러운 속 모습을 낱낱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는 죄에 물들어 둔감하게 된 인간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피조물인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항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들키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저지른 더러운 죄악들에 대해 자신만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다른 인간들의 눈을 쉽게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감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우리가 그에 대한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아 알고 있다면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절로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른 인간들 앞에서도 부끄러운 자신의 삶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자신을 성도들 앞에 내세우려는 것이 아님을 언급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도들의 사역으로 인해 저들에게 자랑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고 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사람들의 진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외모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자들에게 부화내동(附和雷同)하지 말고 정당하게 대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인본적인 형식을 내세우는 자들은 하나님께 드러나는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비쳐지는 외양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2. 오직 하나님을 위한 인생 (13-15)

 

사도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결코 일반 사람들의 눈에 평범한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남 보기에 미친 짓으로 비쳐진다 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또한 정신이 온전한 사람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무엇인가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직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기는 하지만 그에 연관된 의미 자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앞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편지하면서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며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도록 요구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 31-33)

 

올바른 신앙을 소유한 성숙한 성도들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한 인생을 살지 않도록 자제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은 개인의 종교적인 욕망을 포기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며 그의 뜻 가운데 살아갈 때 마땅히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구원이 선포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성도들의 그런 삶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백성을 위해 죽으실 때 그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도 그와 더불어 죽게 되었다(고후5: 14).

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타락한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는 세상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성도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 4)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현장에서 그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도 그와 함께 죽어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이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구원사역의 과정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시대의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죄악 세상의 통치로부터 구원하셨으므로(마1: 21, 참조) 성도들은 더 이상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대신 죽음을 담당하셨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 만일 그런 삶을 거부한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성도라 말할 수 없다. 이는 결코 상징적이거나 형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현실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16, 17)

 

사탄의 유혹에 의해 죄에 빠져 타락한 인간들은 항상 세상에서 익힌 자기의 이성과 경험에 따라 모든 것을 가늠하며 판단하고자 한다. 나아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에 맞아떨어지는 것들을 지향하는 가운데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본질이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며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취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순히 사람의 얼굴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존재하며 드러나는 세상의 모든 형편들을 포함하고 있다. 야고보 선생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취하는 것이 무서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2: 9)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형성된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 함부로 이웃을 평가하려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시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소유한 여부를 기준으로 하여 삶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외모가 수려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겉 치례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성공여부에 따라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거니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남으로부터 판단 받을 필요가 없다. 나아가 일반적인 윤리적 사고와 행동이 참된 인간과 삶의 여부에 대한 평가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나게 될 따름이다. 우리는 항상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고 취하는 것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행위가 된다.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엄중한 심판을 하시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기도 그 전에는 육체의 판단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려고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평가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도 그러했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나약한 모습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이성과 종교적 경험에 기초한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메시아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인간의 몸을 입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관심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진리들을 깨달아 알게 된다.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자들은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 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서 옛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위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위를 회복한 성도들은 이제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의 삶은 궁극적인 가치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과 함께 이미 역사 가운데 죽어 장사되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세례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서 새 생명을 지닌 피조물로 드러나게 된다. 이는 회복된 하나님의 영광과 직접 연관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와 경륜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훼손된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사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담으로 인해 죄를 소유하게 되었던 옛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4.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18-21)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악한 사탄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 때 인간은 단독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피조 세계를 끌어안은 채 멸망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로 인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죄로 오염되어 그것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는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소유하신 분이다. 그분께서는 창세전에 범죄하기 전의 아담에게 속한 자기자녀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했을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히 버리시지 않고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인간을 위한 속죄제물과 하나님 자신을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시게 되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로부터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 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 25,26)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자기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건은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상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아담이 범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다. 즉 타락한 인간이 죽어야 할 자리에서 무죄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죽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죄에 가담했었지만 저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의로운 자로 인정하시게 되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 때문에 다시 죽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의 완성을 위해 사도들을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후5: 18). 이는 지상의 교회가 소유하게 된 특별한 역할에 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계시된 말씀을 저들에게 위임하신 것으로서 복음선포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책무를 맡은 지상교회의 사명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자신의 거룩한 사역을 맡기셨다는 사실은 자기 백성들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관계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그 놀라운 책무에 참여해야 한다.

처음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특별한 위임과 부탁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이 무서운 죄의 굴레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가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관리를 아담에게 맡기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에 세워진 직분자들에게 화해의 말씀(the word of reconciliation)을 맡기셨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가운데서 올바르게 드러내고 선포해야 하는 임무를 의미한다. 만일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태만히 하거나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런 오만한 태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배도의 길에 들어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화목하게 하는 그 일을 이룩하시기 위해 항상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 가운데 계신다.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구원함으로써 진정한 화목을 이루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교회와 직분자들을 통해 창세전에 택한 자기 백성들을 불러 구원하시므로 저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직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나님의 사신(使臣)이 되어 택하신 백성들에게 나아가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계시된 말씀으로 저들을 권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들에게 간청한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죄책(罪責)을 대신 감당하게 하신 것은 순전히 자기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통해 죄에 빠진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전가될 수 있었다. 교회에 속한 우리는 은혜로 허락된 그 의로움으로 인해 지상에서 성도의 삶을 살며 영원한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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