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하나님
(고린도후서1:1-4)
고린도 후서는 바울의 자서전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그의 서신서 중 특히 본 서신은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의 인간적이 모습을 잘 그려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 서신은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같은 근거는 7:5절에서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란 표현에서 보여 줍니다. 본서는 바울에 의해 AD 56년 가을 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의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라고 1절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서신의 서두
바울은 이 서신의 서두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란 말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 서신마다 변호하고 있는 것은 그가 실제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12제 중 한 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려면 그에 대한 응당한 변명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대적해 오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득불 복음을 위한 자기 방어상 자신의 사도의 직분이 바울 자신의 독단적인 주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가 복음을 전할 초기에 계시로 분명히 받고 이런 주장을 거리낌 없이 펴고 있으며 이런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는 자들을 반 복음적 거짓 선생으로 매도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지칭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앞에 ‘하나님의’란 소유격을 부친 것은 교회의 소유주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나타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졌지만 그리고 바울이 떠난 후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어 오지만 그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아가야 지방은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와 아가야 두 지역으로 구분해서 통치해 왔습니다.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였습니다. 바울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고 있습니다.
2.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일에 독특한 표현을 여러 가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는 대개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쓰였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더욱 은혜로우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자비의 아버지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죄인이 그들의 죄로 죽는 참담한 모습을 보시기 어려워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자비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위로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위로란 말은 ‘파라클레세오스’로 어떤 소송사건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부른 자인 변호인 혹은 변호사란 뜻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위로의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이 같은 위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1)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 환난을 거쳐야 하고 또 환난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뜻을 따라 세상 방법으로 살아가다가 환난을 겪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위로는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언제나 환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어둠에 속한 세상은 복음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환난을 거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환난을 겪었으며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12: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복음을 인하여 받는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가 컸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위로는 또한 우리들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는 우리에게 넘치는 힘과 능력이 되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 단계에 이르면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베푸는 우리의 위로에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위로의 능력이 역사 하시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환난 중에 오직 하나님의 위로만을 바라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에서 얻는 하나님의 위로
(고린도후서1:5-9)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은 현세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괴로움이 되고 지기 힘든 십자가가 되지만 그로 인하여 얻는 우리의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고난의 불속에 던져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8:17-18절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우리가 환난 받는 것
바울은 남다른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내리시는 그리스도의 위로도 넘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에는 그리스도의 위로가 언제나 따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우리가 받는 고난에 비례하여 항상 넘치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는데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넘치게 임하는 데 이로써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자신의 환난과 위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큰 환난을 받은 일은 결국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에 위로와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런 환난을 인하여 위로를 받는 것도 그들의 위로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받는 위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 그들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위로가 그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 하므로 바울이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그들이 당할 때, 그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겪는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고 또 위로에도 참여 할 줄을 알고 있는 사실로 인하여 바울에게 있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한 소망을 더욱 견고케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시는 환난
8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많은 환난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이 언제 어느 곳에서 받았던 환난인가에 대해 다만 아시아란 지역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가 받은 환난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힘에 지나도록 당한 심한 고생은 감당하기 어려운 핍박이나 생명에 위협을 주는 일이 바울에게 닥쳐온 사실을 의미할 것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는 말과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는 말은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나타낸 말입니다.
바울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새 힘이 생깁니다. 환난을 받는 보람이 있게 됩니다. 행5:4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공회에서 사도들을 붙잡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채찍질을 했을 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면 기쁨이 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위해 지금 받는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소망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로 환난을 받게 하심은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여기기까지 심한 고생을 하며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기를 의뢰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의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환난 중에서 고생하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께 대한 의뢰는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련이나 환난을 만나도 이 분, 하나님을 의뢰하여 그 분께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날에 얻을 자랑
(고린도후서1:10-14)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그가 받은 모든 환난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로 더욱 은혜가 넘치고 또 이런 모든 일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라
우리 주님은 참으로 우리들의 의뢰할 분이십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바울이 당한 환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이 같은 환난을 주신 일은 그로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망의 줄에서 바울을 건져내셨고 앞으로 그런 환난을 만난다 해도 건져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도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기도가 자신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꾼을 도와주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이 물질이나 어떤 헌신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방법으로 돕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기도로 도와주는 일입니다. 기도는 물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육체적 헌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들고 약한 몸이란 변명도 댈 수 없습니다. 시간을 내서 간구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인즉 이 방법의 도움이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도움이란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많은 사람이 할수록 유익합니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준 일로 은사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그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환난 중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난 것도, 병자들에게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 나타난 이적 등도 성도들의 기도로 말미암은 은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행12:5절 말씀을 보면 복음을 위하여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회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를 풀어 주고 옥에서 기적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인하여, 기도한 많은 사람들도 바울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2. 주의 날에 얻을 피차의 자랑
바울은 12절에서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얼마나 진실하게 행했는가에 대해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지혜란 인간적인 지혜로 일종의 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가식적이요 위선적인 잔꾀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 양심이 증거 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에 대하여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나 성도들에게나 진실했습니다. 그의 말이나 그의 행실에 있어서 이 진실함과 거룩함을 좇아 살아 왔으며 이런 일은 양심이 증거 하는 바요 이런 일이 바울의 자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랑에는 진실함과 거룩함이 따라야 하고 그런 일들이 양심의 증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거로 바울은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는 그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썼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나 사실이 아닌 일에 대해 쓴 것이 없으니 그대로 알아 줄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1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하여 대강 알고 있는바 대로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 놓을 자랑에 대해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대강 알고 있는 대로 자신이나 고린도 교인들에 있어서 자랑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의 날이 오면 너희는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는 또한 너희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자녀들로서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바울로 인하여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니 바울이 자기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예수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 이런 일이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께 피차에 감사하게 될 것
입니다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린도후서1:15-24)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나머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계획을 세우고 저들에게 알려주었으나 그대로 실행되지 못한 일에 대하여 변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계획은 고린도 교인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주려는 목적으로 먼저 고린도에 둘렀다가 마게도냐로 해서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 그곳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송별을 받으며 유대로 가기를 경영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 중 바울을 싫어하는 자들이 바울의 이 같은 변덕스러운 행동에 대해 비방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1.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바울은 이 같은 계획의 변경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들릴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어찌 경솔히 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편의를 따라 일을 계획했거나 그런 육신의 생각을 따라 이랬다저랬다 한 일이 아님을 말하면서 그런 일이 어찌 자신에게 있었겠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은 결코 일시적인 목적이나 육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변경시키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미쁘시다는 말의 피스토스(πιστὀϚ)는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라면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나 언약에 있어서 아주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은 미쁘시느니라’는 말씀과 연결되는 것으로 바울이 ‘내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이르노니 나는 결코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고 한 말입니다.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는 말은 ‘예’하면서 동시에 ‘아니오’한 일은 없다는 바울은 19절에서 자기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고린도 교회에 복음으로 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긍정을 뜻하는 말이며 동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란 말은 진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에는 아니오 란 말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진실하신 분이시므로 예 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 분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분이 아니시며 이중성이 없는 분이십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
바울은 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으며 그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로 세우시고 그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하나도 아니오가 없이 모두 예로써 성취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멘(ἀμἠν)이란 말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멘은 구약 시대에도 사용되었고 신약 시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에 참으로 동의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가 되기 때문에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에 ‘진실로 그렇습니다’고 동의하는 노래가 찬양이며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21절과 2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너희를 믿음으로 견고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하나님이 또한 교회의 직분 자로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말은 그 어원이 그리스도란 말에서 나왔는데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으며 하나님께서 교회 직분 자에게 기름 부으심을 주심은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인은 소유권의 표시입니다. 어떤 문서의 효력을 보장해 준다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을, 영생을 주신 약속을 보증하신 표로 인 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실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의 신실하신 모든 약속의 보증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이 성령을 주시므로 구원과 영생에 관한 하나님의 진실한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민병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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