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를 위한 바울의 눈물
(고린도후서2:1-11)
본문에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뜨겁게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과오에 대한 슬픔과 눈물에 얽힌 권고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살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바울의 참 목자 상을 찾을 수 있으며 성도들이 목자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넘치는 사랑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치 않기로 결단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그런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체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게 쓰여 있는데 공동 번역본에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기쁘게 해 주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주는 일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들르려고 한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면 벌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그런 책벌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대신, 편지를 써서 보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범죄자들에 대한 견책으로 보내진 것인데 이 편지를 보낸 후에 다시 이 고린도 후서를 써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고린도 전서를 의미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내고 후서를 보내기 전, 기록에 남기지 않은 다른 서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환난이란 말은 들맆세오스(θλἰΨεως)로 괴로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는 심히 괴롭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서신을 보냈는데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여 올바른 신앙으로 돌이킬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만나서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기쁜 마음을 가지고 가서 고린도 교인들을 만나야 고린도 교인도 바울을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직접 몸으로 가지 않고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괴롭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 보냈던 일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던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12: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범죄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고린도 교회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저를 용서하고 위로하라
5절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을 근심하게 한자가 있지만 사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길을 가는 형제가 있거나 이단적인 복음을 따르는 사람 있을 때 모든 성도들의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해 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 대단히 안타깝게 여기며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보아 교회 안에서 어떤 징계나 제재를 받아야 할 범죄일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이들이 이미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반대하는 파당이 있고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바울을 지지하고 바울의 복음을 따랐습니다. 바울을 따른 이 성도들은 이처럼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들에게 어떤 제재나 징계를 내린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제 족하니 차라리 그들을 용서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기세가 꺾기고 회개하는 기미가 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 이상 다그치면 그들이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낙심하여 믿음에서 떨어지거나 더 심판 죄 가운데 빠질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결론 :
바울은 그들이 너무 낙심하거나 실망에 빠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붙들어 주고 올바른 믿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는 사랑의 손길이 가장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고린도후서2:12-1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슬픔이 되고 자신의 슬픔이 될 고린도 교회 방문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드로아에 갔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당도하니 과연 복음의 문이 바울에게 열려 바울이 이 일을 감당하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고민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얼마 전 슬픈 방문을 마치고 두 번째 방문하려든 계획을 포기하고 디도편에 ‘눈물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고 또 하나는 디도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는 일로 디도가 혹 신변에 어떤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염려는 바울로 하여금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든 계획을 취소하고 그들과 작별하여 마게도냐로 가게 된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기게 하신다는 말은 드리암뷰오(θριαμβεὐω)로 로마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벌이는 개선 행진을 의미합니다.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개선 행군에 참여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비록 어려운 여건에서 복음을 전하며 마음에 슬퍼함과 애통함이 있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을 냄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이 냄새를 풍겼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냄새를 나타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바울을 복음의 도구로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이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핍박이나 시련이 있다 해도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냄새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바울은 15절에서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망하는 자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똑같이 향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향기란 말은 유오디아(εὐωδἰα)로 이 말의 뜻은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레1:9). 이 희생 제사에는 향기가 나는데 하나님은 이 향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죄 제물도 되시고 화목 제물도 되십니다. 그의 제물로 부터는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향기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런데 이 향기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향기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향기를 맡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망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이런 향기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 그대로 두시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망의 향기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선포한 설교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듣는 사람에게 똑같이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생명의 복음이 사망의 향기로 맡아지는 것입니다. ‘사망의 형기’란 말은 죽음의 악취를 말합니다. 복음에서 죽음의 악취를 맡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배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로 맡아지게 되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냄새가 그에게는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음성은 바로 복음의 소리입니다. 이 복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향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자들은 그 향기가 죽음의 악취가 되어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향기의 구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역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지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인도하심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 한다고 했습니다. 혼잡이란 말은 순수함이 결여된 상품을 말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런 가짜인 것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전하는 진리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진실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민병석 목사>
1-11절, 사랑의 직분
[1-3절]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고린도교인들의 기쁨이 바울의 기쁨이요 그들의 근심이 그의 근심이었다. 성도의 기쁨은 교역자의 기쁨이요 성도의 근심은 교역자의 근심이다. 또 교역자의 기쁨은 성도의 기쁨이다.
[4절]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 . . .
바울은 말한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전도자 바울에게는 외적으로는 큰 환난과 핍박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애통과 근심이 있었다. 그의 애통과 근심은 성도들의 연약과 부족 때문에 왔고 그래서 그는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바울의 사역은 눈물의 사역이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말했고 또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19, 31절). 바울의 눈물의 편지는 책망과 권면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근심과 슬픔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향한 뜨겁고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눈물의 책망의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드러난 책망은 감추인 사랑보다 낫다.
[5-6절]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생략)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희 무리를]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근심하게 한 자’는 범죄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그로 인해 근심하였으나 너무 심하게 표현하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나를 근심케 한 것’이라고 말한 것 같다. 고린도교회는 범죄자를 권징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였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 권징에 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찬성하였고 그 범죄자를 벌하였다. 이처럼 사도시대의 교회에는 권징이 있었다. 그들은 사도의 권면을 순종하였다. 인간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성령의 권면을 따랐다. 그들은 참된 신앙고백과 순종의 삶이 있는 공동체이었다.
[7-9절]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권징은 벌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죄인의 회개를 목표로 한다. 권징치 않으면 죄 가운데 머물 형제를 권징을 통해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이제 권징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므로, 바울은 그 범죄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한 후 그를 품어주듯이! 오늘날도 교회는 권징이 있고 용서와 위로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다.
우리 중에 사랑의 새 계명을 어기기를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새 계명에 복종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권징이 미움의 표현이 아니고 사랑의 동기에서 행해진 것이라는 것을 증거할 필요가 있다. 범죄하는 교인을 징벌하는 교회의 심정에 그 교인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음을 그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의 권면을 순종하리라고 기대한다. 아니 이 권면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순종하는 자들이기를 기대한다. 불순종은 옛부터 인간의 뿌리깊은 죄악이다. 교회는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0-11절]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교회는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해벌(解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행해진다. 주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18). 사탄은 범죄자로 하여금 너무 근심케 함으로 낙망케 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 사탄의 궤계는 성도를 범죄케 하고 낙심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벌도 필요하지만 회개한 자에게는 용서와 위로도 필요하다. 사탄은 죄인에게 속박과 근심과 낙심을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죄에서의 자유함과 기쁨과 평강을 주신다.
교회는 범죄자에게 눈물의 권면과 책망을 해야 하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위로를 줌으로 마귀의 궤계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12-17절, 승리의 직분
[12-13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문’은 전도의 문이다. 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된다. 전도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주 안에서 바울에게 열렸고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으나,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못해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구약시대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듯이”(삼하 8:6, 14),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일행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 곧 그리스도의 지식을 널리 알리는 향기라는 뜻이다. 바울의 사역은 고난 중에서도 항상 승리적이었다. 오늘날도 진리의 사역은 승리적이다. 불순종과 죄는 실패의 원인이지만, 순종과 의는 결국 승리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5-16절]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이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향기이다. 그러나 이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참으로 존귀하고 복된 직무요 두렵고 떨리는 직무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들 가운데서 생명과 사망을 나누고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나누기 때문이다(요 3:18).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을 감당할 뿐이다.
[17절]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혼잡하게 한다’는 원어(카펠루오)는 ‘장사하다, 품질을 떨어뜨리다, 부패시키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라는 원어(호스 에크 데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라는 뜻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많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 또는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였다. 그는 말씀의 바른 일꾼이었고 모든 시대에 복음사역자의 좋은 본이 되었다. 말씀의 일꾼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질되거나 타협하지 말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지 말고 순수하게, 순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교회에도 전도의 문이 넓게 열리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자. 구원과 전도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널리 풍기자. 사람으로서는 이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겠으나 하나님의 은혜로는 감당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거짓 교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시키거나 부패시키거나 변질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수하게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자.<김효성 목사>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교회(고후2: 1-17)
1. 성도의 진정한 기쁨 (1-3)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만족감을 제공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기쁨을 제공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즐거움은 항상 갈증만 더하게 할 따름이다. 이는 타락한 세상은 영원한 참된 기쁨을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세상으로부터 얻게 되는 즐거움을 쟁취하고자 여념이 없다. 아무런 보장성 없는 세속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그런 식의 삶의 태도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신자들이 갈구하는 그런 삶을 지향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사도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근심을 가진 채 저들을 방문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발생했던 모든 불미스런 일들은 잊어버리겠다는 표현이다. 이에 관해서는 바울뿐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여전히 욕망에 가득 찼던 과거의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여러 문제들과 직접 연관된다. 고린도교회에는 그 전에 파당, 성적 부도덕, 우상제물, 은사와 직분, 부활사상 등에 관한 문제들이 많았다. 바울로부터 첫 번째 편지를 받은 그들은 이제 많이 회복되고 변화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사실 그런 형태의 근심과 염려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당면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상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있다 할지라도 천상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 형편들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산상(山上)에서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면서 현재에 충실하며 복잡한 염려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를 가지도록 요구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 33,3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는 성도들의 생존과 삶에 연관된 교훈이지만 성도들이 처한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천상으로부터 공급되는 충분한 은혜의 분량이 예비 되어 있다. 세상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일들로 인해 지나친 염려에 빠지는 것은 아직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주된 관심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인간들은 항상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있다. 사실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모든 악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세상의 욕구를 충족하는 삶을 얻게 되면 그것을 성공한 인생이라 여기며 기고만장하게 된다. 그러나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들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더욱 큰 욕망을 가지고 더 많은 것들을 움켜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부질없는 착각에 의한 행동일 따름이다. 변칙과 불법을 통해 이 세상의 풍요로움과 엄청난 만족을 쟁취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인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원한 천국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타락한 세상은 천국시민권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온갖 유혹들이 산재한 위태로운 영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실하게 살려고 하면 타락한 세상이 가만 놓아두질 않는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달콤한 유혹과 더불어 다양한 염려거리들을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옭아매는 세상의 염려거리에 대해 필요이상의 과도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설령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엄청난 것들이 삶을 억누르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끝나게 될 일시적인 상황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항상 거룩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라고 요구하셨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며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지나간 것들에 대한 모든 근심을 다 떨쳐버리지 않고는 결코 저들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결단했음을 밝혔다. 자신이 과거의 일로 인해 근심에 빠져 있으면 결국 고린도의 성도들도 그로 말미암아 함께 근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참된 기쁨의 대상이 될 소중한 성도들인데 그들이 근심에 빠지게 되면 모두가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 도리어 근심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된다.
바울이 원했던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면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기쁨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모든 근심 걱정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먼저 자신의 근심을 떨쳐버려야만,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더불어 진정한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이다.
2. 환난과 교회사랑 (4)
하나님을 배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님의 편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 특별히 물리적인 핍박이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는 참된 가치관(價値觀)에 연관된 것으로서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끊임없는 환난과 고통 가운데 살아야만 했다.
불의에 저항하기를 쉬지 않던 사도바울은 그 동안 자신이 형언할 수 없는 힘든 환난과 더불어 항상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 환난은 바울의 서신을 받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동일하게 겪고 있는 문제였다. 그런 힘든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단코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앙 자세는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사도바울뿐 아니라 지상에 존재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의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그에 관한 명백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시편에는 환난과 근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눈앞에 닥친 환난으로 인해 낙심치 말도록 요구했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시119: 143,144);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3:13)
사도바울은 시편기자와 마찬가지로 불의에 저항함으로써 닥치는 환난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는 에베소서에서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환난이 단순한 고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환난을 통해 타락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교회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타락한 세상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풍족히 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아니라 타락한 세상에 속했음을 반증하게 된다. 그러나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천상의 왕국에 속한 자로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인정을 받아 영광을 누리려 하지 않는다.
시편기자는 위의 본문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고백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우환이 미쳤을 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단순한 인격수련이나, 세상의 욕심을 포기한 결과로 얻게 되는 수양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환난 가운데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근본 배경은 저들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명 때문이다. 기록으로 계시된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그것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의로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영원한 깨달음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을 통해 타락하여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 삶의 근본적인 원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자신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그런 자세를 요구하면서 그들을 향한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말씀을 통해 참된 위로를 받는 것(마5:4)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용서와 위로(5-11)
바울은 고린도 지역의 교회 내부에 자신과 하나님의 교회를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음을 언급했다. 또한 그런 자는 바울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 근심하도록 했음을 말했다. 바울이 본문에서 일부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 근심하게 했다고 언급했던 것은 그 말이 너무 심한 표현이 되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자제한 것일 뿐 사실상 그런 자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근심하게 만들었다.
교회와 성도들을 근심하도록 한 그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교회가 적절한 벌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을 계속 징계의 상태에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을 용서하고 위로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그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그 사람이 너무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배려해주라는 요구를 했다. 이는 그 사람이 교회 내부에 속한 신앙이 어린 교인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저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것을 권면했다. 이는 성숙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매우 소중한 자세이다. 따라서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하면서도 그와 동일한 언급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잘못 실수를 범한 형제들에 대해 서로 용서하고 용납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더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 12-14)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근심하게 한 자들에 대해 피차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완전히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이는 단순한 형식상의 논리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 말이 모든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용서하되 하나님 앞에 죄를 뉘우치는 자들에 대해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앞에서의 진정한 회개와 뉘우침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적인 판단과 인정(人情)에 따라 죄를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뿐 하나님의 뜻과 의에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올바른 방법과 절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용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랑이 곧 교회를 하나로 엮어 매는 끈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연관하여 교회에 허락된 신성한 권위에 관련된 말씀을 하셨다. 이는 권징사역을 통한 교회의 사랑과 용서에 관한 내용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그에 대한 교훈을 주시면서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이도록 했다. 즉 이는 지상에 하나님의 순결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내용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징계와 용서에 연관되는 이 말씀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허락된 말씀이다. 즉 교회는 진리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결코 무책임하게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천상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와 더불어 지상의 교회가 마땅히 시행해야 할 사명임을 말해주고 있다. 만일 이를 등한시하면 세상과 불의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며 교회는 점차 세속화되어 타락해 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된 실수를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마땅히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의 죄를 물어 엄하게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단순히 개인을 벌주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은 아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가 편지를 쓰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의 편지를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진리로 알고 온전히 순종한다면 그것이 참된 하나님의 성도라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근거와 증거에 관련된 중요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더러운 이단에 빠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으면서도 입술과 마음으로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의 종교적인 심성에 의해 자기의 꾀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 섬기고 싶다는 마음의 확신이 들면 그것이 곧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인가?
혹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자 하는 결단이 생기면 그것이 곧 신앙인가?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속한 이단들 가운데도 그와 유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기본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소유한 신앙의 기초는 신구약 성경66권을 천상으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그것은 말로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고백이 되어야 한다. 기록된 성경을 일 점 일 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과 인간을 알아가는 절대 기준으로서 계시된 성경을 받아들인다.
바울은 또한 잘못된 행위로 인해 벌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다른 형제를 용서하는 자는 자기도 그렇게 용서받으리라는 점을 말했던 것이다. 바울 자신이 다른 형제의 과거 실수를 용서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이는 예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하신 내용과 동일하다. 예수님은 다른 형제에 대한 성도의 자세가 자신의 용서와 연관됨을 말하고 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다른 형제의 잘못된 실수를 마음 속에 담아두지 말도록 요구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삼아 형제를 정죄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셨다.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와 교회에 들어온 악한 것들을 무조건 용납하라는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형제가 일시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면 교회는 마땅히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약점 잡아 지속적으로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행위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자의 죄를 드러내게 될 따름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로서는 언제든지 그런 실수에 빠질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다른 형제의 실수를 용서함으로써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지 않고 용서받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사탄의 계략을 극히 조심하라고 했다. 우리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사탄의 교활한 속셈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따라서 사탄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형제들의 실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지상에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순수한 자세가 아니라면 함부로 형제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교회와 성도들은 저들의 실수를 완전히 용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4. 그리스도의 향기 (12-16)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하기 위해 에베소를 출발해 마게도니아로 가는 도중 드로아(Troas)에 도착했다. 에게해 북단에 위치한 드로아는 바울에게 특별한 기억이 남아있는 도시였다. 그는 두 번째 전도여행에서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환상 중에 나타나 건너와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행16:9). 그로 인해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도착했었다.
이번 기회에 바울이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래 머물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이는 빨리 디도를 만나고 싶은 그의 심정으로 인해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에 오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드로아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작별하고 에게해를 지나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건너갔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그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신 사실과 여러 지역에서 저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the sweet aroma of the knowledge of Him)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전했다(고후2:14).
그 향기는 단순히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냄새이다. 또한 그 향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지만, 그렇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즉 동일한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도록 하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는 사람들 스스로 취하는 역할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사역이 드러나게 된다. 성경에는 그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교훈들이 많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는 장래 오실 메시아에 연관하여 그에 대한 예언이 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오시게 될 메시아의 역할을 돌(stone)과 반석(rock)에 비유하여 예언했다. 남북 이스라엘 백성에게 굳건한 반석으로 제시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것이 악을 피할 수 있는 방편이 되지만 배도자들에게는 동일한 그 돌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8:13-1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남북으로 갈라져 제각각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 예언을 하셨다.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오시게 될 메시아는 거룩한 분이며 모든 인간들이 경외해야 할 분이시다. 그러나 더러운 배도에 빠진 백성들은 그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사야는 그 메시아를 반석으로 칭하며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던 백성들에게는 그가 거룩한 피난처가 되신다. 하지만 세상을 누리며 즐기려는 자들에게는 그가 거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된다.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종교성을 자랑하며 외형상 그럴듯한 포장을 하여 인간적인 욕망을 추구하던 거민들에게는 그것이 함정과 올무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메시아가 세상의 평화와 안락에 취한 자들에게는 정반대의 심판자 역할을 하게 된다. 메시아가 없는 상태에서는 일시적으로 풍요로운 인생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악한 자들은 메시아의 강림으로 인해 그에 걸려 넘어져 뼈가 부러져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는 동일한 반석이 각 사람에 따라 정반대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도 동일한 교훈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도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그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시온의 모퉁이 돌이 되어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멸망케 하는 무서운 돌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6-8)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역사적 사건을 두고 특별히 택하신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는 것으로 묘사하셨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돌이 없어서는 안될 보배로운 반석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쓸데없는 돌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 그 돌의 진가(眞價)를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들은 저들에게 불필요한 그 돌을 바깥에 내다버렸다. 그러나 그 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엮어 구원하게 될 생명의 반석이었다. 이는 배도에 빠진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그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않는 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 빠져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동일한 돌이 사람에 따라 정반대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혀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삶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한 존재로 알고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5. 순전한 진리를 증거하는 교회와 사도들 (17)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악한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살인, 강간, 폭행, 사기 등을 일삼는 자들일까? 물론 그런 자들은 더러운 악행에 물든 자들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위험한 자들은 겉보기에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으나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악한 종교지도자들이다.
기독교 내부에는 항상 거짓을 퍼뜨리며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차라리 누가 보아도 이단(異端)인 것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문제는 겉보기에 만면에 세상적인 평화를 머금고 건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실상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사상을 지닌 자들이다.
현대 기독교의 내부와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등 기독교적 색깔을 띤 명백한 이단집단에 대해서는 지나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경계의 끈을 늦추고 있지 않는 성도들 가운데 저들의 미혹에 쉽게 넘어갈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기독교 교단에 속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훼손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는 여간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저들의 실상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큰 목소리로 기독교적 음성을 내며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외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의 음흉한 본색이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사탄의 술책에 동원된 그들은 괴팍하고 징그러운 모습이 아니라 광명한 천사와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고 있다(고후11: 14,15). 그런 위험한 현상은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나타난 양상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그런 일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사도교회 시대부터 그런 상황은 줄곧 이어져 왔다. 따라서 사도요한은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세상에 득실거리고 있으니 과연 저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했다(요일4: 1).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에 관한 분명한 말씀을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 15)
일반적인 안목으로 볼 때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들 사이에 어느 쪽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까?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므로 타락한 인간들의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영원한 천상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들의 구미(口味)를 자극할 수 있는 말들을 골라 하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가 느끼는 종교적 감정에 따라 거짓선지자들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반응하며 저들을 따라간다. 그것이 자기에게 세상에서의 종교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부합하는 변형된 신을 만들어 두고 섬기기를 즐겨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혼잡스럽게 한다. 진리의 말씀 위에 인간들의 이성과 감정을 혼합시키며, 거기다가 교묘한 욕망을 덧칠하게 되면 타락한 인간들의 종교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고 거짓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그것을 성공이라 자랑하며 선전하게 된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사실은 항상 깨어 있어 그런 자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대어 자신의 성공을 도모하며 수많은 교인들을 자기를 위한 도구로 만들어 간다. 그런 자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악한 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드는 수많은 악한 자들의 길을 멀리하는 자신의 삶을 고백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진리의 말씀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가운데 신실하게 전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교회 앞에서 개인의 사사로운 이성적 판단과 목적에 따라 무분별한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 점에 대해 민감한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교사와 지도자들뿐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공적으로 경배하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적인 달콤한 맛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의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는 자들을 민감하게 경계하지 않으면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어 살 수밖에 없다.<이 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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