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울서신

고린도 후서 3 - 4장

by 은총가득 2021. 4. 25.

 

 

그리스도의 편지(고후3:3)

 

고린도후서 3장 3절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라는 말이 이 본문에서 나왔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한국 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전하는 편지"로 이해합니다. 이런 식의 해석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소식을 적어놓은 편지 종이와 같다. . . . 그리스도께서는 먹이 아니라 영으로, 그리고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편지를 쓰셨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씌어져 있는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있는가?

 

요컨대 "그리스도의 편지"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이자 동시에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편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아무리 큰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만약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전혀 전달하지 않는다면, 성도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에 대한 이런 이해는 널리 알려진 복음성가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성가는 애잔한 선율로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니 너를 통해 사랑이 나타나고 너를 통해 기쁨이 넘쳐나리."

심지어 경기도 용인에는 "그리스도의 편지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까지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몸부림이 느껴지는 이름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본문의 문맥에서 따로 떼어내서 읽으면 이 표현을 "그리스도를 전하는 편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선교적 존재로 이해하고, 힘써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면, 우리는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하고 고백한 사도 바울과 함께 기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서, 또는 전도의 사명을 고취한다고 해서 특정한 성경 해석을 아무런 검토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바른 해석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른 해석이란 문맥과 가장 잘 맞는 해석이며, 역사적 배경에 가장 잘 부합하는 해석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문맥 관찰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구절의 가까운 문맥은 3장 1-3절입니다.

 

이 짧은 단락에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1절에 "자천하다"라는 말과 "천거서"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자천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를 추천하다"라는 뜻입니다.

"천거서"란 개역개정이나 표준새번역의 번역과 같이 "추천장," 또는 "추천서(letters of recommendation)"입니다.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책망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이 진술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사도 사이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게 추천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바울 당시에 기독교 순회 사역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이나 또는 지역 교회로부터 "추천장"을 받아 가지고 다녔습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한 아볼로도 에베소 형제들의 추천서를 들고 아가야로 건너갔습니다(행 18:27). 사도 바울 자신은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인 뵈뵈를 로마교회에 천거하였습니다(롬 16:1).

또한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구제금 모금과 관련하여 디도와 함께 다른 한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천거하기도 하였습니다(고후 8:18-19, 23).

 

이런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의 추천서를 내어놓으라고 바울에게 요구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써준 추천서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음행하는 자를 치리하는 문제(고전 5장)로 인해 바울에게 반감을 갖게 된 일부 교인들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바울의 대적자들이 교인들을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 교회를 설립한 바울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의 추천서를 소지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라 침입자이거나 사기꾼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직과 관련해서 자주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문맥의 증거를 감안할 때, 고린도후서 3장 2절에 나오는 "우리의 편지"라는 표현과 3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편지"는 모두 1절의 "추천서"와 함께 바울의 사도직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1절 후반부에서 사도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어떤 사람들(바울의 대적자들)은 천거서를 제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자신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 교인 자신들이 바울의 편지, 즉 바울의 사도 됨을 입증하는 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사도가 사용한 헬라어 인칭 대명사 "너희"는 강조형입니다.

"너희 자신들이야말로," 즉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야말로 사도 바울의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풀어 번역합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이 본문은 고린도전서 9:2과 매우 흡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편지"라기보다 사도 바울을 천거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추천장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1절과 2절을 지배하는 중요한 개념은 추천서입니다.

3절에서도 사도는 계속해서 추천서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추천서 이외의 개념을 소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편지"란 "그리스도께서 쓰신 추천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편지"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쓰셨습니다.

물론 이 본문에서 "편지"나 "심비에 쓰다"는 모두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린도 교인들을 변화시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입증하는 추천서의 역할을 하게 만드셨음을 의미합니다. 3절에 나오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이라는 어구는 그리스도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심비에 편지를 쓰실 때 바울이 수행한 역할을 알려줍니다.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편지를 쓰는 사람은 필기자나 비서에게 받아 적게 하였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더디오에게 받아 적게 하는 방식으로 로마서를 집필하였습니다(롬 16:22). 사도 베드로도 실루아노를 통해 베드로전서를 기록하였습니다(벧전 5:12).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필기자로 자리매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변화시키고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부차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편지의 저자는 그리스도이시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신 것을 받아 적은 필기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3절)라는 표현을 "우리로 말미암아 대서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시고 변화시키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쓰신, 바울을 위한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추천하는 추천서입니까?

그들이 바울의 사도적 사역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바울이 설립한 고린도 교회는 그의 사도적 사역의 결과물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셨고, 그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음을 입증합니다.

사도 바울이 참된 사도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신 것이고, 그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고린도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존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추천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본문의 문맥과 1세기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편지"란 표현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편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고린도라는 이방지역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하는 편지"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추천서"입니다.

 

 

이런 해석이 오늘의 사역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사역자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은 신학교 졸업장이나 목사 안수증, 또는 목회학 박사 학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가 되려면 반드시 일정 정도의 신학 교육을 받아야 하고 목회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역자의 진정성은 단지 그런 외적인 요소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역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것, 자신의 사역을 통해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 사역자의 진정성을 입증할 것입니다.

좋은 목회지를 얻고자 외국 유학을 하여 학위를 취득함으로 자기 외양을 화려하게 꾸미려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역자의 진정성이 사람의 추천서나 학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겸허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길성남 교수>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고후3: 1-11)

 

1.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교회 (1-3)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지금 또다시 자신을 비롯해 자기와 함께 하는 자들에 대한 추천을 해야겠느냐며 반문하고 있다. 즉 그들이 올바른 신앙을 소유한 믿을만한 성도인지 여부를 보증하기 위해 새롭게 추천서를 써 보내거나 특별한 추천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이미 서로 간 그리스도 안에서 신뢰하는 관계에 놓여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바울은 저들에게, ‘너희가 우리 마음에 새겨진 우리의 편지라’(You are our letter, written in our hearts)는 언급을 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매우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인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교회공동체’가 사도들의 교훈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의미는 사적(私的)인 개념을 넘어 공적(公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들이 기록한 편지로서 흩어진 교회들 상호간에 읽혀질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게 된다. 이 말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자체가 그들을 위한 추천서가 된다고 말했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가 곧 사도들을 보증하는 추천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들과 교회가 본질적으로 상호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 사실을 언급하면서 지상의 참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사실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특별한 편지를 사도들의 교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시게 되었다.

따라서 지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편지를 읽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해 범죄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교회공동체로 드러나고 있는 그 편지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선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만 교회에 새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읽고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그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것이 놀라운 은혜가 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통해 허락하신 그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쓰셨다. 그것은 구약시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두 돌 판에 기록한 것처럼 새겨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비(心碑) 곧 성도들의 마음 판에 영으로 기록하신 것이다. 이는 교회공동체와 그에 속한 각 성도들의 심령에 새겨진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고 있다.

종이 위에 먹으로 쓴 편지나 돌 판에 새긴 글귀는 인간들의 마음 밖에 별도로 존재하지만 교회와 성도들의 심비에 새겨진 편지는 항상 살아서 움직이는 메시지이다. 먹으로 쓴 편지는 인간들이 지우고 다시 고쳐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도들의 마음 판에 새겨진 편지는 그렇지 않다. 또한 돌 위에 새겨진 글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오거나 꺼내어 다른 사람들이 읽도록 보여줄 수 있지만, 심비에 새겨진 편지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소중한 뜻을 전달하는 메시지가 된다. 따라서 그 편지는 세상 가운데 숨겨진 채 존재하지 않고 뭇 사람들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 (4,5)

 

이 세상에 살아가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항상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이며 활동한다.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러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명예를 지키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정성을 다해 가정을 행복하게 꾸리려는 것도 만족스런 인생을 살고자 하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만족에는 결코 진정한 생명력이 없다. 그것을 통해 어느 정도 일시적인 행복감을 느낄 수야 있겠지만 더 이상의 영원한 보장성은 제공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나름대로 그 점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획득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만족은 타락한 인간들의 그런 류의 욕망에 근거하지 않는다. 천국에 진정한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인간적인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얻게 되는 만족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참된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제공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 안에서 즐거워했다. 그에 대해서는 신약시대뿐 아니라 구약시대의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약성경에는 시편기자의 노래와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그에 대한 묘사가 선명하게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시32:11);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35:9);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8)

 

시편기자는 의인들을 향해 소리 높여 외치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함을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는 되풀이 되는 입술의 연습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허락되는 은혜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선한 자로 인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즐겁게 노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성도들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찬송하며 경배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이 모든 성도들에게 변치 않는 참된 만족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기뻐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타락한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거나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편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약시대 성도들뿐 아니라 신약시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교회들이 마땅히 소유해야만 할 본질적인 내용이다. 즉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진정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을 통해 적극적인 만족을 추구한다면 배도의 길에 들어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경은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라면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과 우상에 관심을 두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세는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 세력인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오직 그를 경외하며 섬기도록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만일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 신들과 그 사상을 추종하게 되면 저들에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임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6:12-15)

 

모세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매우 엄중한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며 섬길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들은 절대로 주변에 있는 이방 민족의 종교와 신들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저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배도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배도에 빠진 백성들을 진노하심으로 심판하게 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단순한 모세의 권면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엄중한 율법이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살았던 성도들뿐 아니라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이에 대한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만 한다. 이는 구약시대 성도들과 신약시대의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공히 적용되어야 할 내용인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이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종교적인 자기만족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과 그의 뜻을 벗어난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것들은 우상숭배행위와 연관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자녀들이 그런 더러운 삶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언약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이 우상숭배를 하며 이방 종교사상에 빠지는 것들을 질투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유의해야 할 점은 이방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이방 신 사상을 삶 전반에 수용하는 위험한 신앙태도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특정한 이방 신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스스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도의 길에 빠져있는 어리석은 자들은 형식적 생활에 있어서는 매주일 교회에 나가면서 기독교적 활동을 부지런히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저들의 행동과는 달리 속마음으로는 잡다한 이방 신 사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기복신앙, 종교다원주의, 종교적 현세주의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만일 누군가 이방 종교들에서 스며들어온 그런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기독교를 통해 자기중심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자기 자녀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종교적인 악한 배도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섬겨야 할 백성들이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진노하시게 된다.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참된 교회들과 그에 속한 성도들은 그 점에 대해 여간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새 언약의 일꾼 (6)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기 백성들을 향해 언약을 베푸셨다. 그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시기까지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더불어 발전적인 언약을 맺으셨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등이 곧 그것들이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은 장래 새롭게 갱신될 언약이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어졌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새 언약으로 갱신되었다. 사도들과 그들의 복음전파 사역을 통해 세워진 지상 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특별히 세우신 사도들을 새 언약의 온전한 일꾼으로 세우셨던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 주어졌던 옛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립될 새 언약을 위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모든 사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예언되어 왔다. 그들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장래 임하게 될 그에 관한 분명한 예언을 했다. 앞으로 때가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3)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통해 새 언약이 세워지는 그 날이 이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이 외부가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 존재하게 되며 그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이는 앞에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말한 것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내용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들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가로 놓여있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완벽한 관계가 회복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확립되어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과 연관된다(갈4:6; 롬8:15).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 사이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 역할을 하신다. 그가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 14,15)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의 몸을 성부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드리게 되었다. 그의 몸은 죄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흠 없는 속죄 제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거룩한 피로써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의 양심과 삶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죄의 자리에 앉아 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 그분께서는 십자가 사역을 통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심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중재자가 되셨다. 그 일을 위해 그분께서는 첫 언약 가운데 정죄된 죄를 속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것이다. 이는 새 언약이 없이는 참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첫 언약인 의문(儀文)은 죄를 드러내고 그것을 정죄하여 죽이는 기능을 하는데 반해 하나님의 영은 새 언약을 통해 성도들을 죄 가운데서 살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성도들은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상속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4. 영광의 직분: 직분의 영광 (7-11)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놀라운 영광으로 드러난다. 그 영광은 타락한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탄의 세력권으로 들어간 이 세상에는 진정한 영광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생성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자기 자녀들에게 영원한 영광에 관한 계시를 하셨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애굽에서 탈출한 후부터는 그에 대한 특별한 계시가 이루어졌다.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가시적인 말씀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형성된 이스라엘 백성과 구체적인 언약을 맺으셨다. 모세를 통해 특별한 규례에 따른 성막과 그에 속한 모든 부속물들을 만들게 하신 것과 시내산에서 율법을 허락하신 사실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 머무는 40년 동안 있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등도 가시적인 언약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그 율법은 이방 왕국인 애굽의 법령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며 단순한 질서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거룩한 율법은 타락한 인간들의 죄를 드러냄으로써 선택 받은 백성들로 하여금 구원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도록 했다. 이는 그 더러운 죄를 가진 상태에서는 영원히 멸망 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간들의 악한 죄를 드러내고 처참한 죽음을 가져오는 직분, 곧 인간들을 죽음에 가두게 되는 율법의 직분은 영광의 광채와 더불어 나오게 된다. 십계명이 기록된 모세의 두 돌 판은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율법을 집약하고 있다. 모세가 계시 받은 출애굽기에는 그에 관한 성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34: 29)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에서 친히 기록하신 두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은 배타적 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며 죽음을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분은 영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받아 시내산을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는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다(히3: 3).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은 그 광채로 인해 감히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시내 광야에서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그 광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다.

사도바울은 그 사실과 연관하여, 율법을 통해 인간들의 죄악을 정죄하는 직분도 영광스러운 것인데 하물며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생명의 직분은 오죽 더하겠느냐고 말했다. 앞으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며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과 더불어 없어지게 될 율법이 영광스럽다면 영원히 존재할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분이 더욱 영광스러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질 신약시대의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자신의 직분사역(ministry)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밝혔다. 그것은 앞으로 지상에 설립되어 완성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11: 13,14)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 받은 자신의 직분사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광스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피로 값 주시고 사신 지상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라는 사실에 연관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직분이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특히 자신의 골육친척(骨肉親戚)인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진 구원으로 인해 시기함으로써 그 가운데 선택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기를 원했다. 바울은 자신의 그러한 구원사역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복음을 위한 그의 직분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더욱 영광스러웠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상의 모든 보편교회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 역시 이 땅에 존재하는 썩어질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영광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한시라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언제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는가?'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서인지 아니면 천국에서인지’가 오늘의 질문입니다.

섣불리 답하기 전에 먼저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18절이 어떤 이야기 흐름 속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에서는 고린도후서 3장에 대한 소제목으로 “새 언약의 일꾼들”이라 적어놓았습니다. 3장이 말하려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본문을 쭉 읽어보면 옛 언약의 일꾼과 새 언약의 일꾼을 계속해서 비교합니다.

 

옛 언약의 일꾼 새 언약의 일꾼(6절)
먹, 돌판(3절) 영, 마음판(3절)
율법의 조문(6절) 영(6절)
죽이는 것(6절) 살리는 것(6절)
율법의 조문의 직분(7절) 영의 직분(8절)
정죄의 직분(9절)

의의 직분(9절)

없어질 것(11절) 길이 있을 것(11절)

 

둘 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들이 전달한 내용의 차이가(옛 언약, 새 언약) 크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계속해서 둘을 비교하면서 설명합니다. 두 언약의 공통점은 둘 다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점입니다(8-11절).

 

옛 언약은 율법의 조문으로 돌판에 기록되었고 죄를 알려주는 목적이 있으며 결국 죄 때문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것으로 마음 판에 새겨지며 영혼을 살리는 영속적인 것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언약을 전달하는 일꾼들이 일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12절에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들이 일하는 자세를 표현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일꾼들(사도, 교사 등) 즉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그들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반면 옛 언약 일꾼의 대표주자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 있던 “없어질 영광”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얼굴에 수건을 씁니다(출 34:33-35).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13절)

모세가 수건을 쓴 것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각각 새 언약에 대한 비교의 대상으로 사용됩니다.

 

첫째, 옛 언약도 일시적으로 있다 사라질 영광이었지만 너무 영광스러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면 영속적인 새 언약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냐?(7-11절).

둘째, 옛 언약은 사라질 것이므로 그것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가렸지만 새 언약은 영원한 것이므로 수건으로

가릴 필요 없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12, 14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 수건을 그들 마음에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합니다(14절). 오직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께 돌아갈 때 그 수건이 벗겨져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16-17절). 일시적인 영광이 아닌 그 영광이 가리키는 바 영속적인 영광의 구주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18절 본문을 읽어봅시다. 새 언약의 일꾼인 “우리”로 본문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새 언약의 일꾼은 수건을 쓸 필요가 없기에 벗어버리고 새 언약의 주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게 합니다. 주의 영이 그렇게 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을 때 그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났던 것처럼(일시적)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새 언약의 일꾼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그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합니다.

4장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복음”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수단이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본문 속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새 언약의 일꾼들에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은 새 언약의 모든 백성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기록한 대로 그 완성은 “그때”에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고전 13:12). <이 광호 목사>

 


육의 심지에 새겨진 편지
(고린도후서3:1-5)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 거짓 선생들은 유명 인사의 천거서를 지참하고 다님으로 신임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 당시 바울이 가장 경계했던 거짓 선생은 예루살렘 교회에 도사리고 있었던 유대교 적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해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습니다.


1. 바울의 천거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의는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 바울은 갈2:21절에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단언함으로 이들에 대하여 다른 복음’의 전달자로 규정하고 갈1:7절 이하에서 이처럼 정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들에게 정성을 기울여 가르친 것으로 이미 바울의 진실성과 그의 참 사도 됨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어떤 이들은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며 자화자찬한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하는 말이 자화자찬처럼 들리는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 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나 장로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추천서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내가 과연 고린도 교회에게 그런 추천서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하여 2절에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쉽게 풀이해서 ‘여러분 자신들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이 아닙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입니다’고 하는 뜻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는 다른 어떤 유명 인사의 소개장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신이 바울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소개장으로 이 소개장이야말로 누구에게나 통하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소개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의 진실성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증인은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야말로 바울의 마음에 새겨져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누구든지 통하고 읽을 수 있는 소개장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확신 

바울은 3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소개장이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은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여 결실을 본 목장이었으므로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바울의 복음과 그의 하나님의 종 됨과 사도됨을 보여 주는 추천서가 된다고 장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추천서는 ‘목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목으로 쓴 추천서를 들고 와서 고린도 교인들의 신임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을 다른 복음으로 미혹하면서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그들처럼 목으로 쓴 자랑거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아 드린 복음 역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이 추천서는 성령이 인정해 주시고 성령이 인쳐 주신 것이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다른 천거서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의 천거서는 낡고 없어져 버릴 돌비에 새겨진 것이거나 사람이 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질 수 없는 마음 비에 새겨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로서 난 만족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의의 직분의 영광
(고린도후서3:6-11)

바울은 본문에서 신약시대에 우리가 받은 의의 직분의 영광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했습니다. 이 만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바울은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율법과 대비되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율법아래서 하나님의 일꾼이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새 언약인 복음 아래서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꾼은 영광스러운 직분이며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으로 이런 만족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6절에서 새 언약의 성격을 말하면서 구 언약과 비교하여 얼마나 우위에 있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의문이란 그람마(ϓρἀμμα)로 본래 헬라어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 나 ‘책’ 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의문이라고 한 말은 문서로 나타난 율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새 언약의 성격을 밝히는 말입니다.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영이란 돌에 새겨지는 율법과 비교하는 말로 생명을 의미하며 성령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새 언약은 율법처럼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이 영의 역사이며 거짓 선생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다른 복음은 의문의 역사란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영적 역사로 나타난 복음이 율법보다 얼마나 우월한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의문에 속하는 옛 언약은 죽음에 이르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 자체는 거룩하고 선하지만 그 언약을 이룰 수 없는 인간들에게는 정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고 정죄로 인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영으로 이룬 것입니다. 의문에 기록하여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여 우리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육신을 정죄했지만 복음은 영을 살리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율법의 사역이 아니요 영의 사역이십니다. 그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적 사역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주셨습니다.


2.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영광의 차이점을 전개해 나가면서 7절에 와서 그 직분에 대한 영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이 돌 판에 대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결국은 모든 사람의 죄를 정죄하는 그 역할로 인하여 죽이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법이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책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지만 원래가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생명을 주시기 위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아 복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으로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 비를 받아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직분을 받은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났던 것입니다. 이 광채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세의 얼굴을 주목할 수 없어 모세는 그 얼굴에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의 영광은 얼마 후에 사라져 버렸지만 이처럼 율법의 직분 자에게도 영광을 주셨거든 하물며 새 언약의 작분 자들이 받을 영광이야 얼마나 더 하겠느냐는 것이 바울의 지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복음의 직분 자들의 영광은 모세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 율법 아래, 많은 직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들의 그 영광스러운 직분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직분 자들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벧전2: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속죄해 주므로 우리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율법의 정죄에서 오는 사망을 이기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복음의 일꾼들입니다. 이 직분에는 놀라운 영광이 따릅니다. 이 영광의 직분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의 직분 자의 할 일
(고린도후서4:1-4)


바울은 1절에서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을 수건으로 가리운 직분이 아닙니다. 그 영광을 들어낸 직분으로 우리는 복음에서 주의 영광을 보기 때문에 모세처럼 얼굴에만 잠깐 광채가 비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1. 이 직분을 맡은 우리가 할 일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이 직분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은 교회의 직분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것인데 이처럼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나 특히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견주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며 교회를 잔멸하고자 자원해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인인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자비를 베푸셔서 복음을 증거 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은 낙심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정죄의 율법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속죄함을 주며 구원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전하면서 아무리 어려운 시련과 핍박과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2) 바울은 2절에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지난날 예수를 알기 이전에 살았던 들어 내지 못할 창피스런 일들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이나 거짓 선생들은 실인즉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못하고 속으로 숨겨 둔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지난날 율법 아래서 그런 생활을 해 온 일이 있었으나 이제 그는 그런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3) 바울은 또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궤휼이란 말은 교활, 속임수란 뜻입니다. 이 말은 또 11:3절에서 ‘간계’(奸計)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일에 사용된 말입니다. 어떤 자들이 바울에 대하여 그는 ‘궤계’로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이 같은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고후112:16).

(4)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혼잡케 한다 ‘는 말은 불순물을 섞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은 결코 복음에 다른 어떤 불순물도 섞지 아니하고 진리 그대로 증거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어떤 사람들의 천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나 각 사람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자기를 떳떳하게 내 세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복음

바울은 3절에서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고 한 말이 그것입니다. 복음은 그 진실이 가려져 잘못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복음을 듣는 사람이 복음의 진실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자’들에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이미 2:15절에서 밝힌 바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망하는 자들에 대한 설명에서 4절에서 말하기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이 세상 신’ 이란 이 세상의 죄악을 주관하고 죄로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탄은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어둠을 물리치고 구원을 얻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받아 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혼미케 한다’는 말은 에튀플로센(ἐτὐΦλωσεν)으로 ‘눈을 멀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눈을 소경 되게 하여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도록 역사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는 것입니다. 사탄은 철저하게 이 광채를 차단하려고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4:5-7)


바울은 그가 복음을 떳떳하게 전하고 누구의 비판이나 비방까지도 개의치 않고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일에 대하여 5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전파하는 예수

바울의 복음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예수 외 다른 불순물은 전혀 개입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이단자들이나 잘못된 거짓 선생들은 바울의 복음을 비난하고 중상했지만 바울은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잘못된 이단자들이 자기들이 전파하는 다른 복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기를 전파하는 경우가 있지만 바울은 결코 자신을 전파하거나 자기의 학식이나 지식을 자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드린 후, 복음에 비하여 자신의 학문이나 지식이 얼마나 천박한지 깊이 깨닫고 빌3:7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어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을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주’란 말은 퀴리온(χὐριον)으로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가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일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너희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복음의 빚진 자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롬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빚진 자는 언제나 종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 울은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이 종의 멍에를 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정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은혜를 주며 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 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종의 멍에를 메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잘 감당할 때 그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듣고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질그릇에 가진 보배

바울은 6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은 빛의 창조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비취라고 하신 것으로 없는 빛을 창조해서 비취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소유하신 빛을 세상에 비취게 하신 것으로 이것을 창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것으로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을 보배라고 말하고 자신의 육신을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한 것, 보잘 것 없는 것, 바라볼 것이 없는 존재란 뜻입니다. 원래가 인간은 죄인이며 그 마음이 만물의 찌끼만도 못한 더러운 존재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인즉 질그릇만도 못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이처럼 귀한 보배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릇이란 그 안에 담겨진 물건에 따라 가치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질그릇이라도 그 속에 값진 보배가 담겨져 있다면 그 질그릇은 보배 그릇으로 귀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천하디 천한 인간에게 이 귀중한 복음은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이 같은 귀한 보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이 귀중한 보배의 영광을 비췰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고린도후서4:8-11)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큰 고난과 핍박을 당한 일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런 모든 일이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가지만 그 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위기에서 혹은 핍박에서 건져 주시고 그 생명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역사하시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1. 버린바 되지 아니한 바울의 시련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사망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겨 쌈을 당한다는 말은 들리보네노이(θλιβὀμενοι)로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른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표현인데 복음을 핍박했던 그 당시의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우겨쌈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결코 ‘싸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짓눌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런 일로 말미암아 결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음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답답한 일’이란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궁지에 몰려서 어쩔 도리가 없는 막막한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빠져 나올 길을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당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곧 핍박을 받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의 핍박 또한 극심했으며 같은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로부터의 핍박 역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가운데서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역자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당해도 주님으로부터는 버린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그 핍박으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배경이 있는데 그가 루스드라에 있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돌로 쳤는데 이 때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일으켜 다시 복음을 전하게 하셨 던 것입니다(행14:19). 원수의 무리로부터 이처럼 죽게 되는 위험에 처해도 하나님께서는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망하게 아니하신다는 말은 헛되이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2.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말은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그가 받으실 고난을 남겨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는 배려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요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 생명이 나를 변화시키시며 나로 주의 복음을 위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질그릇 같은 나를 통해 영광을 들어내시고 그뿐만 아니라 나로 그리스도의 영광에까지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시련은 패배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승리에 동참하는 일이며 그로 인하여 더욱 큰 영광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생애를 마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11절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주를 위해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한 믿음으로 복음의 일꾼으로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우리의 경한 환난
(고린도후서4:12-18)

바울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환난을 겪는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바울 안에서 나타남으로 복음 사역에 커다란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환난을 받는 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12절에서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믿는 고로 말하노라

바울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 가운데서도 부활에 관한 바울의 믿음은 진지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이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는 말의 인용은 시116:10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려운 역경이나 절망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견고했습니다. 특히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죽은 후에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인데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믿음이며 부활을 제해 버리면 그런 복음은 죽은 복음으로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세속적인 종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서로 밀접한 연결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5장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혼자만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절대적인 요소 입니다. 부활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이 없는 복음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애써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2. 낙심하지 아니하는 바울

바울이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 하지만 반면에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육체는 쇠퇴하고 늙고 낡아지지만 우리는 그런 육체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살아 계신 예수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속이란 속사람으로 육체의 사람과는 대조적인 존재로 거듭난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늙는 법도 없고 쇠하는 법도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오리려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새로워지는 이유는 육신의 연령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점점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겉 사람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속사람이 성장할수록 소망이 더욱 분명하여 소망의 실현이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존 시에 받는 환난은 잠시 받는 환난입니다. 그리 오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 환난은 중한 것이 아니라 경한 것입니다. 왜 경하다고 한 것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 그로 인한 보상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인데 보이는 이 세상은 잠깐 동안이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민병석 목사>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회복(고후4: 1-18)

 

 

1. 사도와 직분 (1, 2)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사탄의 통치 영역 가운데서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할 때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성도들뿐 아니라 사도들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도바울은 자기 앞에 낙심할 만한 일들이 숱하게 많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그로부터 긍휼을 힘입어 부여 받은 직분으로 인해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바울을 비롯한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던 성도들은 세상에서 값어치 있다고 하는 것들과 천박한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세상의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천상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선배들은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운 일을 버리고 간교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 경건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붙잡음으로써 그것을 혼잡스럽게 하는 일을 피했다. 도리어 저들의 삶 가운데 영원한 진리가 나타나도록 힘썼다. 그런 순전한 신앙자세와 성숙한 삶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 비추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추천하며 보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남에게 추천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써 자신을 비롯해 함께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앞에서 스스로 추천했다. 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역시 겸손을 유지하는 가운데 저들과 동일한 정신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올바른 신학과 신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신앙에 대한 주관적인 자기 판단이 아니라 객관성 있는 말씀의 증거가 따라야 함을 말해준다. 지상의 교회가 견고하게 자라감으로써 그러한 분량에 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복음의 비밀과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 (3, 4)

 

하나님의 복음은 바깥으로 드러남에 있어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그 복음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은 결코 스스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의 세력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철저히 단속하고 있다. 사탄은 항상 인간들을 어두움과 혼동 속에 가두어 두고자 온갖 책략을 다 쓴다. 따라서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탄이 제시한 가짜 신령들을 믿는 것이 마치 참된 신앙이라도 되는 양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거짓 신들을 따르는 자들은 마음이 혼미할 수밖에 없다. 어느 것이 참된 진리인지 거짓 가르침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불신자들의 마음이 혼미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소극적인 입장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일한 모범과 교훈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에 관련된 교훈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3-15)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에게만 그 복음이 특별히 증거 되어야 한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성도들은 복음을 소중히 여겨 신중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드러나게 된다. 이에 대한 증거와 의미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에게서 공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위에 기록된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보이셨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시대의 성도들도 마땅히 주님을 비롯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훈을 받아들여 그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잘못된 사람들에 의해 복음이 값싼 물건처럼 되어버렸다. 마치 마음씨 좋은 장사꾼이 아무에게나 제멋대로 나누어주는 듯이 헤프게 되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마치 그렇게 하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야 한다. 이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만족을 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귀한 뜻을 이루어가는 방편이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세속적인 이성과 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사고와 행동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또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고후4: 4).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길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모든 피조세계를 통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 26-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피조물도 소유하지 않은 자신의 형상을 오직 인간들에게 부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의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를 대리 통치하도록 맡기기 위해서였다.

위 본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특별히 복 주셨음이 언급되어 있다(창1: 28). 그 복은 타락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복은 온갖 저주와 고통을 겪은 자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복과는 상이한 개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범죄하기 전에 주셨던 원천적인 복을 통해 인간들은 생육, 번성, 충만한 가운데 천하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 그것이 곧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원천적인 복이었다.

그런데 사악한 사탄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저들 가운데 존재하던 거룩한 형상이 파괴되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은 그 후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다. 그 형상은 사탄이 관여하는 타락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자녀들을 버리지 않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자기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선택한 백성들에게 그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분이시다. 오늘날 그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새롭게 된 성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것으로 인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게 된다.

 

 

3. 복음전파의 내용 (5-7)

 

사도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사도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저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거나 전파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파하는 내용은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과 사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된다는 점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함으로써 저들의 주인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는 주인과 종의 확고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이, ‘너희’ 곧 ‘교회’의 종이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저들에게 허락된 직분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도들은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오늘날 모든 직분자들은 자신의 신앙적인 삶을 종교적으로 그럴듯하게 장식하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섬기는 자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교회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될 수 없다. 사도들조차도 교회를 섬기는 성도였을 뿐 그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는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과 목적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들과 사역자들을 특별히 세우셨다.

하지만 범죄한 인간들은 참된 빛이 전혀 없는 사탄이 지배하는 흑암 가운데 살게 되었다. 선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구원이 임하기 전에는 그와 동일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이 약속된 자기 자녀들을 위해 참 빛을 보내기로 작정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사도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빛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 5-13)

 

죄에 빠진 인간들은 참 빛이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일반 불신자들은 물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그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도리어 그를 심하게 핍박하고 배척했으며 급기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 대며 이 땅이 자신의 욕망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영접하여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혈통이나 신분 혹은 지식에 의해 쟁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권세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고귀한 선물이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빛의 본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던 것이다. 그로 인해 성도들의 심령은 죄를 벗어나 변화될 수 있었다.

바울은 또한 본문 가운데서 그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후4: 7). 이는 개인 성도들과 더불어 교회에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구원받은 성도이지만 날로 후패해져가는 인간의 몸을 지닌 사실과 여전히 피조물인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지상교회를 질그릇으로 이해했다. 이 말은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를 통해 죄악 세상을 능히 이기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놀라운 능력이 사도들을 비롯한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도들조차도 그 능력이 저들에게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 놀라운 능력을 독자적으로 소유한 자가 없음이 분명하다.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게 될 때 교회의 존귀함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4. 세상에 맞서 싸우는 전투 (8-11)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존재하는 이 세상은 마치 전쟁터와도 같다. 사탄의 세력은 성도들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핍박을 가하는 가운데 지상의 교회를 거꾸러뜨리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은 저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지 않을뿐더러 결코 낙심하지 않고 궁극적인 패망을 당하지 않는다.

타락한 세상은 원천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놓여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신음하는 자기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워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이래 사탄의 편에 서 있던 세상은 결국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참혹하게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른 것이며 십자가 사역을 통한 부활사건은 그의 자녀인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통 인간들의 단순한 죽음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이는 그의 죽음이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에 관한 언급을 하며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 10,11)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했다(갈6: 17). 이는 성도들의 모든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된다.

이 말은 살아있는 성도들의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본질적으로 연합관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롬6: 5). 즉 우리의 삶은 항상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에서의 죽음에 넘겨지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은 단순한 박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타락한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세상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을 통해 지상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 박해는 예수님의 죽음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이 나타나게 된다. 이 말은 세상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표식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의 말을 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타락한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 20)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삶을 고백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로서 자신을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보아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자신의 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비록 사도바울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이다(골2: 20). 그 대신 그들의 심령 가운데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이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표현이 아니라 영적인 실제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갈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그로 인해 완전히 확정되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이 세상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와 원수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원수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이라면 우리에게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세상은 아직까지도 사탄의 적극적인 간섭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세상과 문호를 개방하고 저들과 상호 가까이 지내려는 자들이 많이 있다. 나아가 그런 자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허물고자 애쓴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타락한 세상을 친화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간 우려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교회 가운데 보존해야 할 우리는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한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5. 사망과 생명의 주님 (12-15)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죄악 세상은 그것 자체로서 사망의 영역이다. 세상에서 드러나는 모든 죄의 양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고후4: 12)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이는 ‘너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사망과 눈물과 걸려 넘어짐으로부터 구원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기에 이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생존투쟁이 벌어지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세로 사고하며 행동해야 한다. 그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기에 시편기자는 그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116:8-17)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잔을 들고 거룩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갚으리라는 다짐을 노래했다.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호사스런 인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으로써 살아간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망을 포기함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타락한 세상에서 남 보기에 유능하고 훌륭한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자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의 종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가 사탄의 세력에 의해 결박되었던 자신을 영원히 해방시키셨기 때문이다. 띠라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하신 자녀들도 그와 함께 살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끝없는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6. 새 생명과 영원한 영광 (16-18)

 

죄에 물든 인간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후패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썩어져 가는 자기 자신의 일시적인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아무런 가치 없이 영원히 썩는 것에 귀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대다수 인간들은 썩어져 가는 자기의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이는 마치 썩어가는 시체에 짙은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비단옷을 입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썩어져 가는 겉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속사람에 진정한 가치를 두어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들은 그것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겉 사람과 속사람의 본질적인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도 겉 사람의 일을 추구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자들은 탐할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세상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주로 종교적으로 채색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참된 지혜는 인간의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해 가는 존재임을 분명히 깨달아 인식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세상에서 육신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은 항상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세계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자들은 영의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육신의 생각을 하며 추구하던 무엇인가를 이룩하게 되면 그것을 대단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기를 원하며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할만한 업적을 남기고자 한다.

한편 스스로 그런 삶을 살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자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거나 자기 자식을 통해 그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가운데서 나름대로 터득한 범위 안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삶의 태도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바울은 여기서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의 판단으로 세상의 값어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어떤 것들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들이 종교적인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육신의 사고로 말미암는 것들이라면 기독교 음악이나 미술, 혹은 다양한 종교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이 될 따름이다.

 

성숙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환난을 막연히 회피하고자 하지 않으며 세상에 속한 육신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천상의 나라에 연관된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눈에는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잠시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의 제한적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세상은 인간들에게 결코 영원하지 않은 과정적인 영역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참된 지혜를 가진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51:6)

 

어리석은 인간들은 잠시 지나가는 세계를 마치 영원한 듯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에서 쟁취해 얻은 것을 큰 자랑거리로 삼으며 삶의 가치로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세속화된 자들은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만일 교회 가운데 그런 사상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면 교회는 일반 종교적 색깔만 띠고 있을 뿐 세상과 다르지 않는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얻는 것들이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그 모든 것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들이 자랑거리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옷이 해어지듯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살던 인간들은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루살이 벌레처럼 죽음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소유한 구원은 영원히 존재한다. 또한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소유하게 된 참된 의는 영원토록 소멸하지 않는다. 성숙한 성도들이 소유한 참된 소망은 바로 거기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광호 목사>

  cafe.daum.net/correcttheology